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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기자조선의 실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 10.

환단고기는 단군 47대가 약 2000년동안 주신국을 다스렸다고 서술하고있다. 그와는 반대로 규원사화는 단군 47대가 약 1000년동안 주신국을다스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속세에 말하기를 환단고기는 기자조선이 설자리를 빼앗기 위해 일부러 1천년의 주신국의 역사를 2천년으로 늘여놓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규원사화는 2천년의 주신국의 역사를 기자조선의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주나라 건국 연대에 맞추어 주신국의 역사를 축소하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환단고기 비판론자에 의하면, 2천년동안 47명의 임금이 다스린 나라는 없다는 것이며, 임금들의 치세 기간이 상식밖으로 길며 인위적으로 환단고기에서 1천년의 역사를 2천년으로 늘였다고 한다. 그리고 환단고기 번한세가에서는 주신국 앞의 1천년동안 번한이 29명이며, 뒤의 1천년동안 번한이 44명으로 본국인 주신국이 2천년동안 47명의 단군이 다스렸다는 것은 논리에 어긋난다고 하니, 설득력있는 말인 것 같다. 즉, 규원사화의 기록대로 단군 47대는 기원전 1128에 뭇 가(加)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공화정이된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이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규원사화의 기록을 보자.

 제34대 단군 오루문(원년 BC1342)때에 현재 도읍인 임검성을 "진번국의 제후"에게 내어주고, 단군은 동남쪽의 땅인 "낙랑홀"로 옮기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주신국의 제후국인 진번국이 점차 세력이 커져 주신의 수도를 차지하고 주신국은 본국은 동남으로 이동하여 낙랑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37대 단군 마물(원년 BC1293)때에 진번국의 제후는 모든 가(加)를 총괄하게되며, 이때 주신국의 단군은 남쪽으로 순행하다 임금이 된지 8년만에 죽고나서 진번국의 제후가 단군이 된다. 즉, 이말은 이때부터 주신국은 그 정권이 진번국으로 넘어 갔음을 의미하게 되며, 진번국은 환단고기의 번한에 해당하며 이때 번한의 재위에 오른 서우여이다. 다시말해, BC1285년 이후로는 진번(번한)의 역사가 시작되며, 번한세가의 임금들은 더이상 제후가 아닌 본국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기원전 역사의 앞의 천년은 주신국의 역사로 단군 47대에 해당되며, 뒤의 천년은 진번국의 역사로 번한세가의 서우여부터 시작하여 기준가지 44대의 단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증명하냐 하면, 바로 진개의 침략기사이다. 진개가 침략한 나라의 이름이 진번조선인데, 이는 진번국과 조선국의 두개의 나라가 아닌 바로 서우여이래로 진번이 본국이 된 진번국을 중국의 사가들이 오랑캐라 뜻하는 조선(朝鮮)을 뒤에 붙인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신국의 단군 47대와, 진번국(혹은 서우여 이후의 번한)의 단군 44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고조선의 2천년의 역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은 무엇인가? 조선왕조실록중 세종12년 기사를 보자

 

산천단 순심 별감(山川壇巡審別監) 정척(鄭陟)이 아뢰기를,
“평양 기자묘(箕子廟) 신위(神位)에 쓰기를, ‘조선후기자(朝鮮侯箕子)’라고 하였사오니, 청하건대 ‘기자’ 두 글자를 삭제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렇다.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인데, 이를 칭호(稱號)로 함은 불가하다. 그러나 그저 조선후라고 일컫는 것도 미안한 듯하니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어떠할까. 상정소(詳定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 등은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희(喜) 등의 의논에 따랐다.

기 자의 가묘를 처음 세울때에 조선후기자(朝鮮侯箕子)라고 썼었나보다. 즉, 주신이란 나라의 제후인 기자란 뜻이다. 정척이라는 자가 이르기를 조선후와 기자가 같은 뜻으로 문구의 뜻이 중복이 되니"기자"를 삭제하여야 한다고 청한 것이다. 그에 대해 세종대왕이 뭐라고 하냐면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인데".... 종합해보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제후국의 이름이 기(箕)이고 그 제후국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조선에서 작위를 내린것을 뜻하는 글자가 자(子)라는 것이다. 기자의 가묘에 조선의 제후라고 하는 것이 미안하니까 후조선의 시조 기자라고 하자고 한것이다. 이것이 후에 사대사상에 의하여 살이 붙여지고 미화되어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이은 나라라고 와전된 것이며, 중국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분명 세종때까지 "기자"라는 인물은 고조선의 작은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세종대왕 자신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묘를 세울정도이니 그가 매우 위대한 사상가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