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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기자(箕子)는 불조선 건국자인 기수가한(奇首可汗) 서여(西余)이고 고구려와 거란의 선조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
고조선의 역대단군
우선 기자(箕子)가 기수가한(奇首可汗)인 것을 논의하기 전에 고조선의 왕통부터 새로이 정립해야겠습니다.

규 원사화에는 제1대 환검(桓儉)에서 제47대 고열가(高列加)까지는 약 1200년간 지속되었고 환단고기에는 약 2100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매우 헷갈립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규원사화의 기록에 따르면 고열가 이후 기자가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조선 왕통 2100년간 47명인데 비하여 불조선 왕통은 약 2100년간 74명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불조선 30대 불한 서여부터는 74대 기준까지 약 1000년간은 45명이 되며 1대 치두남에서 29대 소정까지 29명이 약 1000년간 다스리게 되므로 논리상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잘 해결이 됩니다.

우선 단군조선 47대는 규원사화의 기록이 맞다고 봅니다. 즉,
1)  환검(BC2333);  2) 부루(BC2240);     3) 가륵(BC2206);    4) 오사(BC2155);    5) 구을(BC2106);
6)  달문(BC2071);  7) 한율(BC2039);     8) 우서한(BC2014); 9) 아술(BC1957);    10) 노을(BC1929);
11) 도해(BC1906); 12) 아한(BC1870);    13) 흘달(BC1843); 14) 고불(BC1800);    15) 벌음(BC1771);
16) 위나(BC1738); 17) 여을(BC1720);    18) 동엄(BC1657); 19) 구모소(BC1637); 20) 고홀(BC1612);
21) 소태(BC1602); 22) 색불루(BC1568); 23) 아물(BC1551); 24) 연나(BC1532);    25) 솔나(BC1519);
26) 추로(BC1503); 27) 두밀(BC1494);    28) 해모(BC1449); 29) 마휴(BC1427);    30) 나휴(BC1418);
31) 등올(BC1365); 32) 추밀(BC1359);    33) 감물(BC1351); 34) 오루문(BC1342); 35) 사벌(BC1322);
36) 매륵(BC1311); 37) 마물(BC1293);    38) 다물(BC1285); 39) 두홀(BC1266);    40) 달음(BC1238);
41) 음차(BC1224); 42) 을우지(BC1205); 43) 물리(BC1196); 44) 구홀(BC1181);    45) 여루(BC1174);
46) 보을(BC1169); 47) 고열가(BC1158);

그러면 이 다음의 단군은 누가 될까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강단에서 주장하듯이 기자(箕子)가 은나라에서 건너와서 조선의 임금이 되었을까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그 다음 왕통에 대한 단서가 역시 규원사화에 보입니다.

《규원사화 단군기》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 宅奄慮忽.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람국이라 이름하고 엄려홀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庚辰歲, 壬儉蘇台元年. 西巡諸地, 觀藍侯之政, 尋陳兵于商地.
경진년(BC1602)은 소태 검의 원년이다. 서쪽의 여러 지역을 순행하고 람후의 정치를 살펴 본 뒤 얼마 후에 상나라 땅에 군대를 들여놓았다.

壬辰歲, 壬儉普乙元年. 藍侯遂總師諸侯, 朝覲者, 遂稀.
임진년(BC1169)은 보을 검의 원년이다. 람후가 마침내 제후들을 총괄하여 거느리게 되니 임금을 알현하는 자가 드물었다.

위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치우의 후손에게 봉국을 맞기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람국이고 BC1169년에 들어서면서 람국이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군조선 고열가 이후로는 람국이 조선의 거느리는 가장 높은 임금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람국이 두각을 드러내는 불한(勃汗)은 누구일까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바로 기수가한(奇首可汗)으로 짐작되는 제30대 불한(勃汗)인 서여(西余)입니다. 환단고기 불한세가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환단고기 불한세가》
蚩頭男蚩尤天王之後也
(제1대 불한(勃汗)인)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이다.

이 기록을 보건대 환단고기 불한은 바로 규원사화 람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치우의 후손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치우의 후손이 단군조선 1000년이 흐르게 된 뒤에 단군조선을 장악하여 불조선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小丁出補番韓. 蓋高登每彈其智謀出衆而勸帝出補. 時段主武丁方欲興兵高登聞之遂與上將西余共破之追至索度縱兵焚掠而還.  西余襲破北毫檣兵于湯池山遣刺客殺小丁竝載兵甲而去
소 정(小丁 : 29대)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帝)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상 장(上將)이었던 서여(西余)가 은느라 무정을 격파한 뒤 갑자기 자객을 보내 29대 불한(勃汗)에 있었던 소정을 죽입니다. 이는 서여(西余)가 무력으로 불한의 자리에 오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환단고기에는 30대 불한 서여를 단군조선 진한의 단군 색불루가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규원사화의 기록과 환단고기의 기록이 모두 합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려면 상장 서여가 불한이었던 소정을 죽이고 불한자리에 오르면서 단군조선을 점차적으로 장악하게 되었고 기원전 12세기 경에 들어서면서 단군조선 전체를 장악하여 진조선은 드디어 불조선의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48) 서여(BC1285); 49) 아락(BC1224); 50) 솔귀(BC1184);
51) 임나(BC1137); 52) 노단(BC1105); 53) 마밀(BC1092); 54) 모불(BC1074);  55) 을나(BC1054);
56) 마휴(BC1014); 57) 등나(BC1012); 58) 해수(BC983);  59) 오문루(BC942); 60) 누사(BC894);
61) 이벌(BC866);  62) 아륵(BC840);   63) 마휴(BC836);  64) 다두(BC785);    65) 내이(BC752);
66) 차음(BC722);  67) 불리(BC676);   68) 여을(BC676);  69) 엄루(BC647);    70) 감위(?);
71) 술리(BC613);  72) 아갑(BC603);   73) 고태(BC588);  74) 소태이(BC574); 75) 마건(BC556);
76) 천한(BC545);  77) 노물(BC535);   78) 도을(BC520);  79) 술휴(BC505);    80) 사양(BC471);
81) 지한(BC453);  82) 인한(BC438);   83) 서울(BC400);  84) 가색(BC375);    85) 해인(BC341);
86) 수한(BC340);  87) 기후(BC323);   88) 기욱(?);         89) 기석(BC290);    90) 기윤(BC251);
아래 기비와 기준이 있으나 기비부터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가 조선의 패권을 가진것으로 보이므로 생략

즉, 고조선은 2000년간 47대가 아니라 위와 같이 약 90명의 단군이 다스렸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앞의 1000년은 진조선의 신한(辰汗)이 다스렸으며 후의 1000년은 불조선의 불한(勃汗)이 다스렸던 것이죠.

서여(西余)가 기자(箕子)로 왜곡된 경위
이 글을 읽기 전에 제가 예전에 쓴 "기자(箕子)는 풍백(風伯)의 자손"이라는 글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보기를 원하시는 분은 http://blog.naver.com/breathjustic/50022535070)
제 가 예전에 쓴 글에서 치우는 바로 풍백이며 풍백은 기백(箕伯)이라고도 쓰는데 이 자손, 즉 기백지자손(箕伯之子孫)을 짧게 말하여 고조선에서는 기자(箕子)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29대 불한(勃汗)을 죽이고 불한에 오른 서여(西余)도 지나인들이 보기에는 아마 치우의 자손이며 이 사람도 기백지자손(箕伯之子孫) 기자라고 할 수 있겠죠. 과거에는 통신과 교통이 불편하였으므로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즉, 단군조선 1000년 뒤에 나라를 열었던 서여(西余)가 바로 기백지자손(箕伯之子孫) 기자인데 지나인들은 이것을 왜곡하여 자신들 나라에서 조선으로 망명한 기자를 두고 서여(西余)라고 왜곡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나의 사서에서는 기자의 이름은 서여(西余)인데 어디에 근거를 두었는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論語類考》卷七
莊子云箕子名胥餘不知何據 기자의 이름은 서여인데 어디에 기록된 말인지 모르겠다.

기 자의 이름이 서여인데 어디 기록인지 모르겠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왜곡한 것이기때문이죠. 기백지자손(箕伯之子孫)인 기자를 그들 나라 기(箕)씨 성을 가진 자작(子爵)과 일치시키려다보니 기자의 이름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48대 단군 기자의 이름은 서여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서여(西余)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러면 고조선 48대 단군 기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지나의 기록에 성이 기씨라고 하였으므로 48대 단군은 기서여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자로 箕西余로 써야 하겠지만 48대 단군은 치우의 자손이 아니므로 엄밀히 말하면 기백지자손(箕伯之子孫) 기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단기고사의 기록대로 기서여(奇西余)가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생략...徐于餘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
서여(西余)에게 살수의 땅 100리를 주고 다스리게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기서여(奇西余)와 기수(奇首).... 이것은 48대 단군의 이름이 바로 여(余)라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즉, 48대 단군의 이름은 원래 여(余)이고 그 성씨는 모르겠으나 그를 기수(奇首)에 봉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관직과 이름을 합쳐 기수(奇首) 여(余)로 부르다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대사관에 의하여 지나인들이 왜곡해 놓은 기자(箕子)의 이름은 서여(胥餘)라는 것에 현혹되어 48대 단군 이름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즉, 48대 단군은 원래 기수(奇首) 겸 상장(上將)의 관직에 있었던 여(余)라는 사람인 것이죠.

그러면 기서여(奇西余)의 "기서"와 기수여(奇首余)의 "기수"
이들 발음이 약간 다른데 그럴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에 보면 기수(奇首)는 기선(奇善)으로도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발음이 기수 기서의 중간 발음이었을 것입니다.

《欽定遼史語解》卷一
奇善汗  滿洲語奇善鮮明也汗君長之稱卷一作竒首可汗遼始祖
기선한(奇善汗): 만주어로 기선(奇善)은 선명(鮮明)하다는 뜻이다. 한은 군장을 지칭한다. 권1에 기수가한은 요 시조라 하였다.

기수(奇首), 기선(奇善), 기서(奇西), 기서(奇胥) 모두 선명하다는 뜻일겁니다. 그리고 48대 단군은 성이 기씨고 이름이 서여가 아니라 고조선에서 기수(奇首)로 있었던 이름이 여(余)인 것입니다.

48대 단군 기수(奇首) 여(余)가 거란(契丹)의 시조가 되느냐?
기 선가한(奇善可汗)이 거란의 시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조선 48대 단군도 또한 기선(奇善)이며  고대에 임금을 한(汗)이라 칭하였으므로 48대 단군도 기선가한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에서 가한(可汗)은 태왕(太王)과 같은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고조선 1대에서 47대까지의 제정일치사회에서는 최고임금을 단군(壇君)으로 부르다가 제정일치사회가 끝나고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더이상 단군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임금중에 임금으로 한자로 태왕(太王)이라 했을 것이고 이를 훈독하면 순 우리말로 가한(可汗)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조선 서쪽에 위치했었던 불조선이 패권을 가지게되므로 그 도읍도 진조선 시대에는 요하 근처이었다가 불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난하와 북경근처로 옮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고구려가 건국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임금을 태왕이라고 했던 것이죠. 즉, 고구려는 기수(奇首) 여(余)가 건국했던 불조선의 위치에서 나라를 세웠고 그를 조상신으로 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이죠.

《삼국사기》권32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당서(唐書)에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풍속에 음사(淫祠)가 많고 영성(靈星) 및 해[日] 기자가한(箕子可汗) 등의 신에게 제사지냈다.

김 부식은 당서를 그대로 베꼈던 것인데, 고구려에 대한 기록에 기자와 가한이 나오니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죠.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기자가한(箕子可汗)은 지나인들이 왜곡한 것으로 지금까지 제 주장에 따르면 이는 기수가한(奇首可汗)임을 쉽게 알 수 있으며 그가 바로 고조선 48대 단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수가한이 고구려의 시조인 동시에 거란의 시조가 되는데 고구려의 초기도읍이나 거란의 발상지는 거의 비슷한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란의 시조를 기수가한이라고 명확하게 표기하였던 것이고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두고 기자가한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표현한 것이죠. 거란은 자신의 시조가 바로 불조선 48대 단군인 것을 내세우고자 그들의 국명도 契丹이라고 한 것입니다.

契丹은 문자그대로는 계단으로 읽고 왜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거란이라고 읽습니다.
그 러나 제 생각에는 契丹은 "계불"로 읽어야 합니다. 그들은 나라이름에서 자신들이 불조선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싶었기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계불(契丹)이 불조선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것이냐하는 문제가 있죠. 고구려 5부 중에 중부를 계루(桂婁)라고 하죠. 루(婁)는 "라"의 전음으로 "나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계루란 고구려 중에 가운데에 해당되는 나라라는 것이죠. 이는 "계"라는 말이 가운데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계불(契丹)이란 불국(丹國) 혹은 불조선의 한 가운데라는 것이죠. 이 나라이름으로부터 그들이 불조선의 정통임을 나타내려고 했던 저의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짐작하게 하는 사서의 기록이 보입니다.

《遼史》卷四十九, 志第十八, 禮志一
遼本朝鮮故壤箕子八條之教流風遺俗葢有存者
요나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으로 기자의 8조의 가르침과 유풍과 풍습이이 전해진다.

여 기서 箕子를 조선으로 투항한 기자로 보면 안되며 이는 불조선의 건국자인 기수(奇首) 여(余)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나인들은 불조선의 건국자인 기수(奇首) 여(余)를 그들의 기국(箕國) 자작(子爵)인 기자(箕子)로 왜곡하였기때문입니다.

기 자(箕子), 기수(奇首), 기수가한(奇首可汗), 기자가한(箕子可汗), 서여(西余) 등은 모두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고조선 48대 단군 기수(奇首) 여(余)이며 불조선을 개국하였으며 불조선의 도읍에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그 주변에 바로 계불(契丹)이 발상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