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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 고구려 침략

by 부르칸 2015. 4. 3.

요동태수님이 자유게시판에 아래의 글을 남겨주셨더군요.

원교근공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사실 위, 공손씨, 고구려의 관계에서 원교근공이 과연 적합한 정책이었나 의문스럽습니다. 당시 고구려보다 약하다고 볼 수 없는 요동세력이었지만 대륙적 규모의 위나라에 비하면 상대할만하다고 할 수 있을텐데 공손씨를 치는데 협력함으로서 스스로 방파제를 허문격이 되었고 결국 관구검의 침입으로 큰 대가를 치루고 말았습니다.

전략적으로는 위나라가 공손씨를 멸망시키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고구려가 후원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낙랑, 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낫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고 구려 입장에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위나라의 침공을 근근이 막은 공손씨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낙랑, 대방을 합병하는 것 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력이 약해진 만큼 땅을 도로 찾으려 들기도 힘들 것이고 결국 약해진 요동을 접수하기도 쉬울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공손씨를 치는데 협력해서 멸망시키고야 만 다음에야 위나라 상대로 "낙랑, 대방 내껍니다."라고 힘싸움을 벌입니다. 차라리 서안평을 공략할 것이라면 공손씨가 전력으로 위나라와 싸울 때가 적절한 시기였다고 봅니다.

요동태수님의 의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구려로서는 위나라보다 요동의 공손연 세력이 상대하기 편하므로 공손연이 망하지 않도록 지원했어야 했다.
2. 어차피 서안평을 공격할 것이라면 공손연이 위나라와 싸울 틈을 타는 것이 좋았다.

위 의견이 타당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관련 기록들을 좀 살펴봤습니다. 먼저 삼국지의 공손연 토벌기록부터 보겠습니다.(대충 해석했기 때문에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발견시 말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삼국지》 〈명제기〉(권3)
景初元年秋七月丁卯, 司徒陳矯薨. 孫權遣將朱然等二萬人圍江夏郡, 荊州刺史胡質等擊之, 然退走. 初, 權遣使浮海與高句驪通, 欲襲遼東. 遣幽州刺史毋丘儉率諸軍及鮮卑、烏丸屯遼東南界, 璽書徵公孫淵. 淵發兵反, 儉進軍討之, 會連雨十日, 遼水大漲, 詔儉引軍還. 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王護留等居遼東, 率部衆隨儉內附.
경초 원년 가을 7월 정묘에 사도 진교가 죽었다. 손권이 장군 주연 등 2만명을 보내어 강하군을 포위했는데, 형주자사 호질 등이 이를 공격하자 퇴각했다. 처음에 손권이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통하여 요동을 습격하려 했다.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제군과 선비·오환을 거느리고 요동의 남계에 주둔하여 새서로 공손연을 징벌토록 했다. 공손연이 병사를 일으켜 거스르니 관구검이 진군하여 이를 토벌하였으나 비가 10일간 계속해서 내려 요수가 크게 불어나므로 조서를 내려 관구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게 하였다. 우북평 오환 선우 구루돈과 요서 오환 도독 왕 호류 등이 요동에 있었는데, 부하를 이끌고 관구검을 따라 내부하였다.

二年春正月, 詔太尉司馬宣王帥衆討遼東. 秋八月丙寅, 司馬宣王圍公孫淵於襄平, 大破之, 傳淵首於京都, 海東諸郡平. 冬十一月, 錄討淵功, 太尉宣王以下增邑封爵各有差. 初, 帝議遣宣王討淵, 發卒四萬人. 議臣皆以爲四萬兵多, 役費難供. 帝曰:「四千里征伐, 雖云用奇, 亦當任力, 不當稍計役費.」 遂以四萬人行. 及宣王至遼東, 霖雨不得時攻, 群臣或以爲淵未可卒破, 宜詔宣王還. 帝曰:「司馬懿臨危制變, 擒淵可計日待也.」卒皆如所策.
2 년 봄 정월, 태위 사마선왕(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려 무리를 거느리고 요동을 토벌토록 하였다. 가을 8월 병인, 사마선왕이 양평의 공손연을 도모하여 대파하고, 공손연의 머리를 수도로 보내어 해동의 여러 군을 평정했다. 겨울 11월, 공손연을 토벌한 공을 기록하고, 태위 선왕 이하에게 읍을 더하고 벼슬을 봉하여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선왕을 보내어 공손연을 칠 것을 논하면서 4만명을 일으켰다. 신하들이 모두 4만명은 너무 많다며 공역의 낭비라 갖추기가 어렵다 했다. 황제가 말했다 : 「4천리 정벌하는데 비록 기책을 쓴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힘써 임해야 하니 공역의 비용을 계산함은 부당하다.」 드디어 4만명이 갔다. 선왕이 요동에 이르자 장마가 쏟아져 공격할 때를 얻지 못하니, 많은 신하들이 공손연의 무리를 깨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니 마땅히 선왕이 돌아오도록 조서를 내려야 된다 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 「사마의는 위태로움에 임하여 변고를 제어하니, 공손연을 잡음에 날을 세며 기다림이 옳다.」결국 모두 이 책략과 같았다.

요약하면 공손연에 대한 1차 정벌은 관구검이 했으나 실패했고, 2차 정벌은 사마의(사마선왕)가 군사 4만을 거느리고 가서 성공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공손탁(공손도)전에 더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삼국지》〈공손탁전〉 (권8)
景初元年, 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 淵遂發兵, 逆於遼隧, 與儉等戰. 儉等不利而還. 淵遂自立爲燕王, 置百官有司. 遣使者持節, 仮鮮卑單于璽, 封拜邊民, 誘呼鮮卑, 侵擾北方[五].
경 초 원년, 이에 유주자사 관구검 등에게 새서를 주어 공손연을 징벌하도록 보내었다. 공손연은 군사를 일으켜 요수에서 관구검 등과 싸웠다. 관구검 등은 불리하여 돌아왔다.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에 즉위하여 백관과 유사를 두었다. 사신에게 부절을 주어 보내어, 선비 선우의 옥새를 빌려 변방 백성을 봉배하고 선비를 꾀어내어 북방을 침요했다.

二年春, 遣太尉司馬宣王征淵. 六月, 軍至遼東. 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 圍塹二十餘里. 宣王軍至, 令衍逆戰. 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 宣王令軍穿圍, 引兵東南向, 而急東北, 卽趨襄平. 衍等恐襄平無守, 夜走. 諸軍進至首山, 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 復擊, 大破之, 遂進軍造城下, 爲圍塹. 會霖雨三十餘日, 遼水暴長, 運船自遼口徑至城下. 雨霽, 起土山、脩櫓, 爲發石連弩射城中. 淵窘急. 糧盡, 人相食, 死者甚多. 將軍楊祚等降. 八月丙寅夜, 大流星長數十丈, 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 壬午, 淵衆潰, 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 大兵急擊之, 當流星所墜處, 斬淵父子. 城破, 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 傳淵首洛陽, 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2년 봄, 태위 사마선왕을 보내어 공손연을 정벌토록 했다. 6월, 군이 요동에 이르렀다. 공손연은 장군 비연과 양조 등 보기 수만을 보내어 요수에 진을 치게 하고, 둘레 20여리의 참을 팠다. 선왕군이 이르자, 비연에게 명하여 맞아 싸웠다. 선왕은 장군 호준 등을 보내어 이를 격파했다. 선왕은 군에 명하여 주위에 구덩이를 파고, 병사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향하다 급히 동북으로 향하여 곧바로 양평으로 달렸다. 비연 등이 양평에 수비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여 밤에 달아났다. 제군이 진격하여 수산에 이르니, 공손연이 비연 등을 보내어 죽기를 각오하고 군을 맞아 싸웠다. 다시 쳐서 대파하고, 진군하여 성 아래에 참을 팠다. 마침 장마가 30여일 쏟아져, 요수가 사납게 불어나니, 운송선이 요하 입구에서 성 아래로 곧바로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과 수로를 일으켜, 돌을 쏘고 쇠뇌를 잇달아 성 안으로 퍼부었다. 공손연은 군급해졌다. 식량은 다하여 사람이 서로 잡아먹고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장군 양조 등이 항복했다. 8월 병인 밤, 길이 수십장의 큰 유성이 수산의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의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 공손연의 무리는 무너지니, 그 아들 공손수와 함께 수백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뚫어 동남쪽으로 도주했는데, 대군이 이를 급습하여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참했다. 성은 깨졌고 상국이하 수천을 참했으며 공손연의 머리를 낙양으로 전하여 요동·대방·낙랑·현토가 모두 평정되었다.

그런데 관구검전에는 1차 정벌후 관구검이 손 뗀 것이 아니라 사마의와 함께 했다고 나옵니다.

《삼국지》〈관구검전〉 (권28)
靑龍中, 帝圖討遼東, 以儉有幹策, 徙爲幽州刺史, 加度遼將軍, 使持節, 護烏丸校尉. 率幽州諸軍至襄平, 屯遼隧. 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等, 昔隨袁尙奔遼東者, 率衆五千餘人降. 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 封其渠率二十餘人爲侯、王, 賜輿馬繒綵各有差. 公孫淵逆與儉戰, 不利, 引還. 明年, 帝遣太尉司馬宣王統中軍及儉等衆數萬討淵, 定遼東. 儉以功進封安邑侯, 食邑三千九百戶.
청룡 중, 황제는 요동을 토벌하길 꾀하였는데, 관구검이 간책이 있으므로 유주 자사로 옮겨 도요장군, 사지절, 호오환교위를 더하였다. 유주의 제군을 거느리고 양평에 이르러 요수에 진을 쳤다. 우북평 오환 선우 구루돈, 요서 오환 도독 솔중왕 호류 등, 옛적에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달아난 자들이 무리 5000여명을 거느리고 항복했다. 구루돈이 아우 아라반 등을 보내어 궁궐에 이르러 조공하므로, 그 거수 20여명을 후·왕에 봉하고 여·마·증·채를 각기 차등있게 주었다. 공손연이 관구검과 더불어 싸웠으나 불리하자 되돌아갔다. 다음 해에, 황제가 태위 사마선왕을 보내어 중군과 관구검 등 무리 수만을 거느리게 하여 공손연을 토벌, 요동을 평정했다. 공적으로써 관구검을 안읍후에 봉하였으니 식읍이 3900호였다.

이 기록을 보면 2차 정벌 당시 사마의가 거느린 병력 4만에 관구검의 병력까지 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차 정벌시 관구검이 거느린 병력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보기 1만을 거느리고 왔던 점을 생각하면 사마의의 총병력은 최소 5만이 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정벌 당시 고구려는 지원군을 보내어 사마의의 군대에 동참하는데, 지원군 숫자에 대해선 기록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삼국지 고구려전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삼국지》〈고구려전〉(권30)
景初二年, 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경초 2년, 태위 사마선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동천왕)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군을 도왔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가 파견한 군사의 수가 수천명인데, 양서에는 천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서》〈고구려전〉(권54)
魏景初二年, 遣太傅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位宮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軍.
위 경초 2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보내어 병사 천명을 거느리고 군을 도왔다.

삼국사기는 양서를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연도(238)와 병력수가 양서와 일치합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권17)
東川王十二年, 魏太傅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동천왕 12년에 위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왕이 주부, 대가를 보내어 군사 천명을 이끌고 이를 돕게 하였다.

위 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요동태수님의 의견에 대한 답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요동태수님은 고구려가 공손연을 도와 위나라를 견제해야 했었다고 주장하셨으나, 당시 위나라가 동원한 병력(5만 이상)과 장수(사마의, 관구검)를 보면 공손연의 멸망은 필연적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참고로 배송지의 주석에서 인용된 간보의 진기를 보면, 사마의는 공손연에 대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요, 요수에 의거해 대군을 막는게 차선책이요, 양평에 앉아 지키고 있는 건 사로잡히기나 할' 최하책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干寶晉紀曰:帝問宣王:「度公孫淵將何計以待君?」宣王對曰:「淵棄城預走, 上計也;據遼水拒大軍, 其次也;坐守襄平, 此爲成禽耳.」)

따라서 고구려가 사마의의 군대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즉 고구려가 보낸 군사 수천(혹은 천명)은 근공이라 할 것도 없는, 그저 구색 맞추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위나라에 협력하여, 손권이 보낸 사신의 목을 쳐서 위나라에 보낼 정도였으니까요.

이렇듯 사마의·관구검의 5만 군사가 공손연을 토벌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공손연을 지원하거나 혹은 이 틈을 타 서안평을 침공했다면 고구려는 사마의의 5만 대군와 맞서 싸워야만 했을 겁니다. 이 경우 고구려가 승산이 있었을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은 공손연 정벌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벌어진 위와 고구려 간의 전쟁이니까요.

먼저 당시 기록인 관구검기공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관구검기공비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고 당시에 새긴 것입니다.(판독·해석 임기환)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遺寇六年五月旋
정시(正始) 3년(242년)에 고구려(高句驪)가 반(反)하자, 7장군(將軍)을 거느리고 구려(句驪)를 토벌하였다. 5(年에) (고구려가) 다시 구략(寇略)하자, (토벌하고) 6년 5월에 (군사를) 돌이켰다.

다음은 삼국지의 기록입니다.

《삼국지》〈삼소제기〉(권4)
正始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정시 7년 봄 2월,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했고, 여름 5월엔 예맥을 토벌하여 모두 깨뜨렸다.

위 내용은 관구검전에 보다 자세히 나옵니다.

《삼국지》〈관구검전〉 (권28)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梁音渴.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宮不從其言. 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 擧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漑灌, 民賴其利.
정 시 중, 관구검은 고구려가 자주 침범하여 배반하므로, 제군의 보기 1만을 거느리고 현토로 나가 여러 길로 나누어 토벌했다. 구려왕 위궁은 보기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로 진군하였고 양구에서 대전이 벌어졌는데, 양의 음은 갈이다. 위궁이 잇달아 깨지어 달아났다. 관구검이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라가서 구려의 국도를 도살하니 참획한 머리와 포로가 수천이었다. 구려의 패자인 득래가 수차례 위궁에게 간하였지만 위궁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 「곧 이 땅에 장차 쑥이 자라는 것을 보겠구나」 드디어 먹지 않고 죽으니, 나라 사람 모두가 어질다고 했다. 관구검이 제군으로 하여금 그 묘를 무너뜨리지 말도록 하고, 그 초목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얻어 모두 풀어주었다. 위궁은 단지 처자만 데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6년, 재정벌하니 위궁이 매구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토태수 왕기를 보내어 이를 추격하여2), 옥저를 천여리 정도 지나 숙신씨의 남계에 이르러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고, 환도의 산을 깎아, 불내의 성이라 새겼다.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8천구였고, 공을 논하여 상을 수여하니 후가 100여인이었다. 산을 뚫어 관개하니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얻었다.

또한 고구려가 서안평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삼국지 고구려전에 실려 있습니다.

《삼국지》〈고구려전〉(권30)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爲幽州刺史毌丘儉所破. 語在儉傳.
정시 3년, 위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했는데, 5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관구검전에 실려있다.

다음은 양서 고구려전의 기록입니다.

《양서》〈고구려전〉(권54)
正始三年, 位宮寇西安平,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 位宮將步騎二萬人逆軍, 大戰於沸流. 位宮敗走, 儉軍追至峴, 懸車束馬, 登丸都山, 屠其所都, 斬首虜萬餘級, 位宮單將妻息遠竄.
정 시 3년, 위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니, 5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나가 위궁을 토벌했는데, 위궁이 보기 2만을 거느리고 맞서니 비류에서 대전이 벌어졌다. 위궁이 패주하니 관구검의 군대가 추격하여 현에 이르렀는데 수레를 매달고 말을 묶어 환도산에 올라가 그 도읍을 도살하니 참수된 자가 만여급이라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絕沃沮千餘里, 到肅慎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6 년, 관구검이 다시 토벌하자, 위궁은 제가를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는데, 관구검이 장군 왕기로 하여금 이를 추격케 하여, 옥저의 천여리를 지나 숙신의 남계에 이르러 돌을 깎아 공을 기록했다. 또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이라 새기고 돌아갔다.

위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2차례 정벌 당해 모두 패배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관구검이 동원한 병력은 불과 1만이었는데도 말이죠.

물 론 삼국사기에는 이와는 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긴 합니다. 관구검의 침공을 맞아 초기엔 고구려가 승리를 거두었다거나, 이후 남옥저까지 도망친 상황에서 유유가 위군 장수를 죽이자 동천왕이 혼란한 위군을 쳐서 회군시켰다는 기록 등.. 그래서 삼국사기의 내용을 근거로 고구려가 패배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한순간의 실수에 의한 패배일 뿐 실력에 의한 패배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패배가 실력에 의한 것임은 기록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위 기록들에 의하면 당시 관구검이 동원한 병력은 불과 1만인데 고구려는 2만의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싸우다 패했고, 관구검의 침공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있었는데(정시 3년과 5년), 고구려는 두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패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한순간의 실수가 아닌 실력에서 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환도가 초토화되어 평양으로 종묘사직을 옮긴 것이나, 관구검이 회군하면서 한가로히 공을 새기며 돌아간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패배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관구검이 완패하여 철군했다면 공을 새길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 렇듯 관구검의 1만 군사에게 두 차례나 대패한 당시의 고구려가, 사마의·관구검의 5만 대군을 맞아 싸운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사마의는 역사에 관심없는 한국인들도 다 알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죠. 비록 연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아 무튼 이처럼 고구려가 공손연을 도와 위에 항거했더라면 고구려는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사마의가 공손연을 정벌하는 틈을 타 서안평을 침공했더라면 고구려는 관구검의 1만 군대가 아닌 사마의의 5만 군사를 상대해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는 완전히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고구려의 서안평 점령은 동천왕의 침공으로부터 약 70년 뒤인 미천왕 12년(311)에 가서야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동천왕대의 서안평 침공은 무익한 것으로서 도모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엔 관구검의 침공을 피할 길이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생각일 뿐이며, 또한 깊게 알아본 것도 아니므로 틀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