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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고구려가 멸망시킨 동옥저는 환단고기의 서옥저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30.
삼국사기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四年 秋七5)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4년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말한 동옥저를 대부분 함경도로 생각하여 창해(滄海)란 동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 동해가 창해라고 불리었습니까? 절대 동해는 창해가 아닙니다. BC 128년 예(濊) 군장 남려(南閭)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에게 반기를 들고 한나라로 투항하여 창해군(滄海郡)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을 윤내현 교수는 천진시 남쪽에 있는 창주(滄州)라고 하였고 본 홈페이지 운영자칼럼에 창해(滄海)란 창주(滄州)와 신해(新海)를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동옥저를 멸하고 동쪽으로 창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는 말은 창주(滄州)와 신해(新海)의 동쪽 해안까지 영토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천진 남쪽이 바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동옥저의 위치가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는 생각보다 서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고구려의 위치

우선 고구려의 위치를 말하기 전에 북부여 동부여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북부여란 대부분 말하기를 고구려의 북쪽에 있어서 북부여라고 한다고 하지만 거짓입니다. 삼국사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던 나라는 동부여입니다. 그리고 동부여 서쪽에 있던 나라는 북부여입니다. 즉, 이말은 고조선 시대에 부여라는 고조선 봉국이 있었는데 이 나라의 북쪽에 있던 부여가 북부여이며, 북부여가 동으로 이동한 것이 동부여라는 것입니다. 

史記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第六十九
夫燕亦勃碣之間(正義勃海碣石在西)一都會也……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眞畨之利
무릇 연은 발해와 갈석 사이(정의: 발해와 갈석은 바다의 서쪽에 있다)의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다.……북쪽으로는 오환 부여와 이웃하였고 동쪽으로는 예 맥 조선 진번과의 이익을 관장하였다.

위 사기의 기록으로부터 고조선 봉국이었던 옛 부여의 위치를 대략이나마 알수 있습니다. 발해의 서쪽에 있는 갈석산의 북쪽에 바로 부여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명으로는 갈석산이 난하 유역에 있지만 사기의 기록에는 갈석산이 발해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갈석산을 지금의 항산(恒山)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어찌됐는, 고조선 봉국이었던 옛 부여는 동쪽으로 최대한 잡더라도 중국 북경근방입니다. 이곳이 바로 옛 부여가 있던 곳이라는거죠. 따라서 북부여는 어디겠습니까? 북부여는 바로 북경 북쪽의 내몽골 부근입니다. 

따라서 초기 고구려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광개토왕비에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하였고, 어느 사서에서는 추모왕이 북부여로부터 동남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난하정도가 될수도 있겠죠. 강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 집안부근이 아닙니다. 북경에 유리하(琉璃河)와 유리묘(琉璃墓)가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西자가 왜 東자로 쓰였는가? 

신 채호선생은 삼국사기에  西자와 東자가 서로 바뀐 곳이 많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고어에 동쪽은 날이 새는 곳이므로 "새" 비슷한 발음이었을 것이고, 이를 이두자로 써서 西로 썼을 것이고 이것이 동서 양자가 바뀌게 된 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東沃沮는 서쪽에 있는 옥저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 사석의 기록 검토 

후한서 옥저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삼국지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므로 삼국지에 대한 기록을 차근차근 뜯어 봅시다. 삼국지 동옥저전에...

東沃沮在髙句麗盖馬大山之東濵大海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다에 의존하여 산다.

후한서에는 東濵大海라 하였으나 삼국지에는 동쪽에 바다가 닿아 있다고 설명하지 않고 그냥 바다에 의존하여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개마대산이 과연 어디인지 기록을 통해 살펴봅시다. 후한서를 보면요...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개마는 현 이름인데 현도군에 속했다. 그 산이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는데 평양성은 즉 왕검성이다.

식민사학자는 개마대산이 개마고원이라고 하나 평양성 서쪽에 있다고 합니다. 평양이 어디고 개마고원이 어딘지 모르는 우리나라 지형도 모르는 것들이 무슨 역사를 연구한다는지 이해할 수없는 사람들입니다. 개마고원은 평양의 동쪽인데도 말이죠. 후한서에 개마는 현도군의 현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현도군을 찾아보죠.

漢書卷二十八下 
元菟郡, 戸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髙句驪, 上殷台, 西蓋馬
한서에 나오는 현도군입니다. 현도군은 현이 3개인데 고구려현, 상은대현, 서개마현입니다.

현도군의 개마현은 서개마현이군요. 즉, 동옥저는 서개마에 있는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는 말이됩니다. 서개마 있다는 말은 동서남북 다른 어디에 또 다른 개마가 있다는 말입니다. 북개마를 현재의 대흥안령산맥으로 볼경우 서개마의 후보로는 대청산, 음산산맥, 태행산맥 등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옥저는 대청산이나 음산산맥 동쪽에 위치해야 하며 이곳이 바로 천진유역입니다. 바로 창해지역이죠.

대청산과 음산산맥의 동쪽이 그러면 현도군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또 있습니다. 좀전에 북부여는 발해와 갈석의 북쪽이라고 하였습니다. 갈석이 바로 항산(恒山)이므로 이 곳의 북쪽에 북부여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아래의삼국지 기록을 봅시다.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
부여는 장성의 북쪽으로 현도에서 천리에 있다...

즉, 북부여는 현도군의 북쪽에 천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북경 북쪽에 있는 내몽골 지역이 바로 북부여가 되는데 이곳의 남쪽으로 천리는 바로 현도군 지역이라는 말이고 현도군의 서개마현에 있는 개마대산 동쪽이 동옥저가 있는 곳이 됩니다. 누가보더라도 지금의 천진지역이 바로 동옥저가 있었던 지역이며, 위치로 보아 동옥저라 아니라 서옥저가 되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