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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고각(鼓角)은 고구려에게 어떤 의미일까?

by 부르칸 2012. 11. 28.


고각(鼓角)이란 기본적으로 군중(軍中)에서 쓰는 북과 나팔을 말한다. 고구려에는 고적(鼓笛)을 군대에서 신호로쓸 뿐만 아니라, 고각을 불고 기치(旗幟)를 들게 하니 모든 군사가 북치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의 요고(腰鼓)는 각(角)과 함께 군대에서 신호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각과 문헌자료를 살펴보면, 고(鼓)의 종류는 고, 요고, 제고, 담고, 구두고, 용두고 등 6종류로 파악된다. 각(角)에 관하여 악기명칭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문헌자료는 없으나, <삼국사기>와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내용을 통하여 ‘뿔나팔’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렇듯 고각은 군대에서 주로 사용하다가, 그후 민간 부분까지 확대 되었다. 그러나 아무르강 일대에 거주하는 고대아시아인들 가운데 신들과 영적으로 교류하는 능력을 가진 샤먼들도 무구(巫具)로서 고(鼓)를 사용하였다. 이를보면 고대인들이 인지하는 고각은 군사용이나 단순한 악기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신물(神物)로 인식하여 왕권의 정치적 정당성과 신성함을 의미하는 상징적 보물로 해석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서기 32년)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너의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최씨 딸이 날 선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가죽]면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다가, 우리 군사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연후에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서기 28년)에 한나라 낙랑군을 장악한 토착 호족인 왕조의 침략 이후로, 낙랑군과 밀착 관계에 있었던 옥저(낙랑국)을 멸망시킬 계책을 세운다. 그런데 옥저(낙랑국)에는 스스로 소리를 내어 적의 침공을 미리 알렸다는 신비로운 고각이 있었다. 이에 대무신왕은 호동왕자에게 옥저(낙랑국)의 신물(神物)을 파괴하라는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중국 연변 지역에서 전승되는 민간설화를 모은 <민간설화자료집>에 따르면, 호동왕자는 최리가 타고 다니는 말이 갑자기 날뛸적에 그 말을 잡아세우고 그를 구했다. 이런 인연으로 최리의 공주와 혼인하게 되었고, 이때 무기고에 들어가 고각을 부서 버렸다고 한다. 물론 <삼국사기>나 설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각이 스스로 소리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부족 단위의 국가에서는 신물(神物)을 갖춘 사람만이 왕으로써 정통성을 가질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옥저(낙랑국)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던 것이다. 의미는 다르지만 남쪽의 마한에서도 이와 같았다.


<삼국지 마한전>

귀신(鬼神)을 믿으며 국읍(國邑)에 각각 한 명씩을 세워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그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한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蘇塗)라 부르며,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立大木)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鬼神)을 섬긴다.


고각이 왕권의 정치적 정당성과 신성함을 의미하는 상징적 보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 최초는 추모왕과 비류왕의 싸움이었다. 북부여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졸본부여에 정착한 추모는 천제의 자식이라는 타이틀로 왕위에 올랐었다.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지만, 북부여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졸본으로서 왕권의 상징인 신물(神物)이 없었다.

이에 추모왕은 졸본부여 동북쪽의 비류국을 찾아가서 천제의 자손임을 밝히고 담판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류국왕 송양은 선인(仙人)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추모왕에게 비류국의 부용국이 될 것을 강권한다. 명분 싸움에서 밀린 추모왕은 어쩔수 없이 졸본부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동명왕편>

“국업(國業)이 새로 창조되었으나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서 맞이하고 보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하시니, 시종하는 신하[從臣] 부분노(扶芬奴)가 앞에 나와,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 하였다...........중략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한다. 왕께서는 비류에서 와서 고각을 볼까 두려워하여 오래된 것처럼 빛깔을 검게 칠해 놓았다.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추모왕은 자신이 송양에게 명분 싸움에서 밀린 것은 졸본부여가 고각의 위의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부분노 등이 비류국으로 몰래 들어가 고각을 훔쳐온다. 참으로 어이없는 고각 쟁탈전 이었지만, 그만큼 고각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고 볼수 있다.

왕권의 상징인 고각을 손에 넣은 추모왕은 비류국에 대해 군사적인 대응 조치를 취한다. <동명왕편>에서는 이러한 군사적 공격을 노루를 통해 비류국에 비를 내리게 하였고, 또한 채찍으로 그 물길을 막았다는 등 추모왕이 신과의 대리자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어째든 비류국왕 송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추모왕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동명왕편>

가을 9월에 왕이 승천하여 내려오지 않으시니 이때 나이가 40세였다. 태자가 (왕이) 남기신 옥채찍을 용산에 장사지냈다 한다.

<호태왕비문>

19년 가을 9월에 왕은 [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자] [황룡]이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산 위에서 용머리에 올라타고 승천하였다.


추모왕은 (기원전 19년) 9월에 나이 40세로 승하 하신다. 그런데 추모왕의 죽음에 이상한 점이 보인다. <호태왕비문>에 “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자”란 표현이 주목된다. 유리(類利)가 태자가 되면서 왕위계승 문제로 말미암아 유리를 옹립하려는 공신 세력과 졸본부여 토착세력과의 정쟁에 휘말린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왕이 남기신 옥(玉) 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황룡이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 용머리에 올라타고 승천하였다.” 라는 기록이 이를 반증한다.

고구려 시조로서 추모왕은 난생신화로서 태어났고, 천제의 자손이며 고각이 동북 아시아 샤머니즘에서 중요한 무구(巫具)임을 고려하면 고구려인들에게 그는 정말로 신과의 대리자였던 것이다. 부여에서 고구려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고각의 의미는, 왕권의 상징으로 때로는 신과의 대리자인 주술사 모습이기도 하였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한나라 때에는 고취(鼓吹), 기인(技人)을 하사하였다.”라고 하여 마치 한나라가 고구려 왕조를 자지우지 하였던 것처럼 비쳐 지지만, 왕권과 신의 대리자라는 의미로서의 고각은 오로지 북방민족 특히,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고각이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 고유의 의미가 퇴색되어, 군사용 및 단순한 악기로 취급되어졌다. 중국문헌 기록을 인용한 김부식은 아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서기 21년)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요!” [왕은]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서기 22년)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고구려에 있어서 고각은 왕권의 상징으로 때로는 신과의 대리자라는 의미임을 묘사 하였는데 김부식은 느닷없이 중화인들이 왕권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정(鼎)을 수록 하였다. 구정(九鼎)이란 우 임금때 주조되었다고 하는 거대한 솥으로 천자의 덕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기원전 607년) 초나라 장왕이 주나라 사신인 왕손만에게 구정(九鼎)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왕손만은 “순 임금이나 우 임금 같은 성덕의 시대에는 먼 지방에서조차 모두 그분들의 덕에 감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천하 구주의 목민관을 시켜 구주의 금속을 공납케 하여 제왕의 덕을 상징하는 보물로서 정(鼎)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정을 구정이라 부른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