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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개로왕 때의 백제의 영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5. 13.
백제의 영토라고 하면 어디라고 생각되는가? 
요즘도 백제라고 하면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전라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단사학에서 말하는 백제의 첫 도읍을 지금의 서울이다. 즉, 한성백제가 있던 곳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남하하여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하고 이곳에서 멸망하였다.
보통 전라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후백제 견훤의 영역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백제는 그 역사가 잘 알려져있지 않아서 삼국사기 기록을 서울에 맞추어 보려고 하더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백제는 북쪽에 말갈이 있었다.
그리고 백제는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

서울의 북쪽에 말갈이 있고 서울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니...
말이 안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제 이러한 백제의 이상한 영토를 다시 비정하여 고대사를 다듬어보자.

삼국사기에 보면 개로왕이 방죽을 쌓은 기록이 있는데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까지라고 말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AD 475년)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개로왕이 쌓은 방죽이 있는 사성과 숭산이 어디인지 알아보자.
백제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제의 중심지가 낙랑군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백제가 말갈의 남쪽과 낙랑의 서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 6)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역을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이 말은 백제의 위치가 현재 알고 있는 것처럼 황해도나 경기도 부근이 아니라 낙랑군 서쪽인 요동 부근이라는 것이다.
백제가 발생한 지역이 요동이라는 것은 삼국사기에 간접적으로 기술된 것 이외에 임하필기에도 잘 나와 있다.

<<임하필기>> 권36
扶餘國本濊地. 今中國奉天之開元縣句麗百濟之(?)自起也
부여는 원래 濊의 땅인데, 현재 중국 봉천 개원현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일어난 곳이다.

따라서 백제의 사성과 숭산은 낙랑군과 요동군 부근에서 발견되어야만 할 것이다.(낙랑군은 난하 부근에서부터 평안도까지라고 생각된다)

1. 숭산(崇山)
숭산(崇山)이란 이름은 매우 흔하여 여러군데 존재한다.
앞서 삼국사기에서는 백제가 낙랑군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서쪽에 있는 숭산을 찾아보도록 하자.

<<요사>> 권38, 동경도
崇州 隆安軍 刺史, 本 漢 長岑縣地, 渤海置州,故縣三, 崇山 溈木 縁城, 皆廢, 户五百, 在京東北一百五十里, 統縣崇信縣.
숭 주(崇州) 융안군(隆安軍)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낙랑군 장잠현(長岑縣)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숭산(崇山) 위수(潙水) 녹성(綠城)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15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인데 숭신현(崇信縣)이다.

貴徳州...貴徳縣 本 漢 襄平縣, 渤海 為 崇山縣.
귀덕주...귀덕현(貴德縣)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며 발해 때는 숭산현(崇山縣)이다.

여기에 숭산현이 두개나 나온다. 하나는 遼의 崇州로 漢의 낙랑군 장잠현인 곳과, 또 하나로는 遼의 귀덕주로 漢의 요동군 양평현인 곳이다. 아마도 漢의 낙랑군 장잠현과 漢의 요동군 양평현의 땅이 서로 붙어 있었고 이곳을 백제가 차지한 뒤로 숭산현으로 삼았던 것 같다.

위 두 주에 대한 발해이전의 연혁이 없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나 백제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기때문일 것이다.
가장 최근의 기록에서 숭산은 어디인가? 이를 알면 낙랑군의 가장 서쪽 영역도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畿輔通志>>卷四十
山海關...중략...北倚崇山南臨大海
산해관은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즉, 백제의 숭산은 현재 산해관 북쪽의 산이 아닐까 짐작해 보며 이곳이 낙랑군과 요동군의 경계지역일 것이고 백제가 건국되면서 백제가 그곳을 차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사성(蛇城)
아주 특이한 이름이라서 사서에 기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열하일기에 보면 사성(蛇城)을 찾을만한 단서가 보인다.

<<열하일기>>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ㆍ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즉, 백제의 사성(蛇城)을 고구려가 빼앗은 후 뱀(비얌, 배암)을 한자로 번역하여 蛇로 썼던 것을 음차하여 배암성(白巖城, 백암성)으로 고쳐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백암성과 사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순서를 보면 열하일기에서 말한 것이 맞는 것인지 그 대략이나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i)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성(蛇城)
* 책계왕 원년, AD286년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 개로왕 21년, AD475년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
  
ii)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암성(白巖城)
* 양원왕 3년, AD 547년 "백암성(白巖城)을 고쳐 쌓고, 신성(新城)을 수리하였다."
* 양원왕 7년, AD 551년 "돌궐(突厥)이 신성으로 와서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 보장왕 3년, AD 645년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성사(省事)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였다. "

즉, 백제의 사성은 개로왕 475년 이후 시점 어디선가 고구려에 빼앗겼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리고 그곳은 돌궐이 공격할 정도로 서쪽에 위치하였고 요동성의 성사가 백암성으로 도망할 정도로 요동성과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백암성은 어디인가?

요사를 보면 "백암"이 두 군데 있는데...

 <<요사>> 권38 동경도
盧州 玄徳軍 刺史, 本 渤海 杉盧郡, 故縣五, 山陽 杉盧 漢陽 白巖 霜巖, 皆廢, 户三百, 在京東一百三十里.  兵事 屬 南女直湯河司, 統縣一, 熊岳縣 西至海 一十五里, 傍海 有 熊岳山.
노 주(盧州) 현덕군(玄德軍)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삼로군(杉盧郡)으로 옛 현은 산양(山陽)•삼로(杉盧)•한양(漢陽)•백암(白巖)•상암(霜巖) 등 다섯이 있었는데 다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300이며, 동경에서 130리 떨어져 있다. 군사 관련업무는 남여진탕하사(南女直湯河司)에 속해있다. 관할 현은  하나 웅악현(熊岳縣)으로 서쪽으로 바다까지 15리이며, 바닷가에 웅악산(熊岳山)이 있다.

瀋州...巖州 白巖軍 下 刺史, 本 渤海 白巖城.  太宗 撥屬 瀋州, 初隸長寧宫, 後屬敦睦宫, 統縣一.  白巖縣 渤海置.  
심 주... 암주(巖州) 백암군(白巖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백암성(白巖城)이다. 태종이 심주에 속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장녕궁에 예속시켰다가 나중에 돈목궁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 현은 하나이며  백암현(白巖縣) 발해가 설치하였다.

노주에 속한 백암현과 심주에 속한 암주가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백암성을 점령한 후 황제가 암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백제의 사성은 심주에 속한 암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심양 부근이 아닐까 한다.

즉, 개로왕이  사성에서 숭산까지 쌓았다던 방죽은 현재 심양부근에서 산해관부근까지이므로... 대릉하 유역을따라 방죽을 쌓지 않았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