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阿達羅紀(아달라기) (A.D.213 - A.D.243:재위31년) - 해석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9.
初支所禮王妃毛利神母 寡居以其財宝歸先今 未幾其女只珍內禮 亦受先今寵 一日夢見大盧神君騎黃赤虎來 授寶月珠 只珍內禮 受而呑之 因言于先今 今吉之乃合 而生帝 穎異有精彩 乃承嫡統 只珍內禮始以二骨爲聖母 登天宮位 先今崩 自以爲恩重 而殉之 遺命分骨 于私夫昔鄒陵 上至孝 依其命分骨 因尊昔鄒爲葛文王 以胞弟伐休爲其太子 上自幼友愛 凡有所好 必傾與之 伐休亦至誠事帝 未嘗離側不 以己心爲心 唯從上好 上太子時 恐違先今 密近于汗介 及先今不預 以八生相約 密以璽宝居之 伐休諫之 曰 “父今尙嚴 兄何自急” 汗介密囑于上 曰 “小兒窺爾位無爲” 洪介所欺 上曰 “吾弟無他意 汝何妬之” 乃命伐休入井居之 媚事汗介 及登大位 以休妻黃氏紫凰皆爵權妻 入井居之 時稱二君
처음 지소례(支所禮)왕비 모리(毛利)신모가 과부로 지낼 때 재화와 보물을 선금(先今, 일성)에게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딸 지진내례(只珍內禮)가 또한 선금의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꿈에 대노신군(大盧神君)이 황적(黃赤)색 호랑이 타고 보월주(寶月珠)를 주어, 지진내례가 받아 삼키었다. 그런 이유로 선금에게 말하니, 지금이 길한 때라 하여 이에 합방하고 왕(帝)을 낳았다. 빼어나고 기이한 정채(精彩, 정묘하고 아름다운 빛깔, 생기가 넘치는 활발한 기상)가 있었다. 이에 적통(嫡統)을 이었다. 지진내례는 두개 성씨(二骨)의 성모(聖母)가 된 시초다. 천궁(天宮)의 제위에 올랐다. 선금이 죽자 스스로 은혜를 중히 여겨 (선금을) 따라 죽었다. 사부(私夫) 석추(昔鄒)의 무덤에 분골(分骨, 몸을 나누어 장사를 지내는 일)하라는 유명(遺命, 유언)을 남겼다. 왕이 효성이 지극하여 그 명에 의하여 분골하였다. 그로 인하여 석추(昔鄒)를 갈문왕(葛文王)으로 높이었다. 이로써 같은 어머니의 동생 벌휴(伐休)를 태자로 삼았다. 왕이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있고, 무릇 좋아하는 바가 있어 반드시 다투더라고 함께 하였다. 벌휴 역시 지성(至誠)으로 왕을 섬겼다. 일찍이 곁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을 형의 마음으로 삼았다(以心傳心). 오로지 왕을 따르며 좋아하였다. 왕이 태자일 때, 선금에게 어긋날까 두려워하면서도 은밀히 한개(汗介)와 가까워졌다. 선금이 관계(預)를 가지지 못함에 이르자 서로 팔생(八生)을 약속하였다. 은밀히 새보(璽宝, 옥쇄)를 가지고 살았다. 벌휴가 간하여 말하기를 “부금(父今, 아바마마)는 더욱이 엄한데, 형은 어찌 스스로 급한가?”라고 하였다. 한개가 은밀히 왕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어린 아이(벌휴)가 너의 자리를 엿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홍개(洪介, 벌휴의 장모)가 거짓이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동생은 다른 뜻이 없다. 너는 어찌 시새움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이에 벌휴를 궁(井)에 들어와 살게 하고, 한개를 아첨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대위(大位, 제위)에 오르기에 이르자, 벌휴의 처 황씨(黃氏)와 자황(紫凰) 모두 권처의 직위를 내려, 궁궐(井)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시 2군(二君, 두 명의 군주)이라 칭하였다.

二月 先今崩 上與只后登祚 受朝
2월 선금이 죽어, 왕과 지후(只后)가 즉위하여, 조회를 받았다.
≪견해≫ 남당유고 백제왕기 구지왕 25년 기사
二十五年 壬辰 二月 羅王逸聖薨 王遣弟古尸 吊之 送賻如例.
25년(A.D.212) 임진 2월 신라왕 일성(逸聖)이 죽었다. 왕이 동생 고시(古尸)를 보내어 조문하고, 선례에 따라 부의를 보냈다.

只后 以板檍爲伊伐飡 馬元稟主
지후(只后)가 판억(板檍)을 이벌찬으로, 마원(馬元)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內禮汗介爲左右后
3월 내례(內禮)와 한개(汗介)를 좌우후(左右后)로 삼았다.

以只后命 追尊昔鄒爲葛文王 伐休爲太子
지후의 명으로 석추(昔鄒)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고, 벌휴(伐休)를 태자로 삼았다.

四月 只后與上及內后 謁桃山 謂上 曰 “內后聖骨正統 可以傳吾位” 乃以翟服加之 托自禱于神 而斷髮爲尼 上恨之無 及葬先今 遂殉 而從之以遺命 分骨壤井
4월 지후와 왕과 내후(內后, 내례)가 도산(桃山)을 찾아가 (조상들에게) 아뢰었다.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후는 성골정통(聖骨正統)이다. 가히 나의 자리를 전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적복(翟服, 황새의 깃털로 만든 의복)을 더하여 주었다. 스스로 신에게 맡기기를 원하여,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가 되었다. 하늘에 원통함은 없다고 하며, 선금을 장사지냄에 이르자 끝내 따라 죽었다. 유명을 쫓아 분골(分骨)하여 양정(壤井)에 장사를 지냈다.

五月 仙徒可馬成治等 欲立 班君之子忽郞 起仙軍 鷄徒虎徒馬徒多從之 牛徒羊徒反之 上命長昔討平之 忽郞君走 入太伯神山 命勿追 命置郞君奴 屬于神山
5월 선도(仙徒) 가마성치(可馬成治, 혹은 可馬와 成治)등이 반군(班君)의 아들 홀랑(忽郞)을 세우기 위해 선군(仙軍)을 일으켰다. 계도(鷄徒), 호도(虎徒), 마도(馬徒)의 무리들은 따르는 자가 많았고, 우도(牛徒), 양도(羊徒)가 따르지 않았다. 왕이 장석(長昔)에게 쳐서 평탄하도록 명하였다. 홀랑군은 태백신산(太伯神山)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왕이) 추격하지 말라 명하고, (홀랑)군의 노비를 석방하여 (태백)신산에 소속되도록 명하였다.
≪견해≫ 길선(吉宣)이 주도한 반란도 지마의 자손들을 옹립하려는 시도였다. 내례(內禮)를 정궁황후(正宮皇后)로 내세운 것도 내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달라와 내례의 사이에는 2명의 딸 출생기사만 보인다.

六月 太子汗昔自阿瑟羅 入朝 曰 “聖人當國 老臣願以壽憲 而來” 上賜日知宅 居之 復妻門介 昔以汗介之父 被召 遇以太公禮
6월 태자 한석(汗昔)이 아슬라(阿瑟羅)로부터 입조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라를 맡았으니 노신은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여 왔나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일지(日知)의 집을 내려 살도록 하고, 다시 문개(門介)를 처로 주었다. (한)석은 한개(汗介)의 아버지로, 부름을 받아 태공례(太公禮)로 예우하였다.

七月 太太文其薨 葬以神母禮 加洪完及其妻章氏玄方爵 以洪介爲太聖
7월 태태(太太) 문기(文其)가 죽었다. 신모례로 장사를 지냈다. 홍완(洪完)과 홍완의 처 장씨(章氏)와 현방(玄方)에게 작위를 더하였다. 이로써 홍개(洪介)를 태성(太聖)으로 삼았다.

八月 大享四徒 于南桃
8월 남도에서 4도(四徒, 4종류의 선도)에게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上幸洪介井 禱文其太太神 仍幸洪介 洪曰 “妾年尙少 太聖之位雖貴 不如三母” 上可之 復以洪介爲聖母
왕이 홍개정(洪介井)에 행차하여 문기(文其) 태태(太太, 王의 어머니에게 부여되는 호칭으로 어머니가 없는 경우 이모나 고모 또는 장모에게도 부여)의 신령에게 기도하였다. 이에 홍개에게 행차하였다. 홍(개)가 말하기를 “첩의 나이 또한 젊으니 태성의 지위가 비록 귀하나, 삼모(三母)와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옳다하여 홍개를 다시 성모로 삼았다.

十月 以王理聖母爲太聖 納理爲左井 洪介爲右井 內禮爲眞骨 汗介爲大元 左爲日宮 右爲月宮 眞骨爲天宮 大元爲地宮 太聖爲神宮 黃氏爲春宮 紫凰爲夏宮 辣后爲秋宮 葛后爲冬宮 命宅師一新宮室 九宮之制 乃立
10월 이로써 왕리(王理, 玉理, 지마와 애후의 딸)성모를 태성(太聖)으로 삼고, 납리(納理)를 좌정(左井), 홍개(洪介)를 우정(右井), 내례(內禮)를 진골(眞骨), 한개(汗介)를 대원(大元)으로 삼았다. 좌(정)을 일궁(日宮)으로, 우(정)을 월궁(月宮)으로, 진골을 천궁(天宮)으로, 대원을 지궁(地宮)으로, 태성을 신궁(神宮)으로 하였다. 황씨(黃氏)를 춘궁(春宮)으로, 자황(紫凰)을 하궁(夏宮)으로, 랄후(辣后)를 추궁(秋宮)으로, 갈후(葛后)를 동궁(冬宮)으로 삼았다.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궁실을 일신하도록 하였다. 9궁(九宮, 日月天地神春夏秋冬)의 제도가 이에 세워졌다.
≪견해≫ 정(井)과 궁(宮)이 혼용되어 쓰이는 말임을 나타내주는 기사다.

十一月 行先今愛后只后大祭 于蛇陵門 以內后爲祭主 召文夫余加耶諸國 來吊
11월 선금(行先, 일성)과 애후(愛后)와 지후(只后)의 큰 제사를 사릉문(蛇陵門)에서 행하였다. 내후(內后, 지마와 애례의 딸)를 제주(祭主)로 삼았다. 소문(召文), 부여(夫余), 가야(加耶)의 모든 나라가 와서 조문을 하였다.

十二月 汗昔太公請 立黑齒祠 許之
12월 한석(汗昔)태자가 흑치사(黑齒祠)를 세우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元年 正月 上與五后 受朝大井
원년(A.D.213) 정월 왕과 5후(春夏秋冬 제외)가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大宴骨門
2월 골문(骨門)에게 큰 잔치를 벌였다.

汗后生女達介 上曰 “朕多女 而未生子 汝珥都 亦生女乎” 汗曰 “妾始生汝身所生爲貴 汝何言南女乎 所珥者 接于神也 今與汝接 安得爲都乎”
한후(汗后, 한개)가 딸 달개(達介)를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딸이 많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너는 도도(都都)인데 역시 딸을 낳느냐.”라고 하였다. 한(개)가 말하기를 “첩은 너의 자식을 낳음으로 바야흐로 귀하게 되었다. 당신은 어찌 남녀를 말하느냐. 도(都)라는 까닭(所以)은 신에 접하는 사람이니, 지금 너와 함께 (신을) 접한다면 어찌 도(都, 신을 모시는 사람)를 얻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三月 繼元伊伐飡 淡色稟主 康禮兵飡 洪完左部執書 如老右部執書
3월 계원(繼元)을 이벌찬, 담색(淡色, 마공의 딸)을 품주로 삼았다. 강례(康禮)를 병찬, 홍완(洪完)을 좌부집서, 여노(如老)를 좌부집서로 삼았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원년 기사
원년 3월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大日大師小光太子薨 汗昔太公代之 以古治爲大道師
대일대사(大日大師) 소광(小光)태자가 죽었다. 한석(汗昔) 태공에게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고치(古治)를 대도사(大道師)로 하였다.

四月 亥鄒爲角干 圓孝沃沮軍事
4월 해추(亥鄒)를 각간(角干)으로, 원효(圓孝)를 옥저군사(沃沮軍事)로 삼았다.

六月 汗后率骨女百人 大行流頭 于蚊川 上服骨女衣 密從汗后 使骨女不能知 流罷 上出舞岩上 諸女大驚 名其岩 曰尼今岩 百女奉帝至泉 曰百女泉
6월 한후(汗后)가 골녀 100인을 거느리고 문천(蚊川)에서 유두(流頭)를 크게 행하였다. 왕이 골녀의 옷을 입고 은밀히 한후를 따라갔다. 골녀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는데, 유(두)가 끝나자 왕이 바위위에 올라와 춤을 추었다. 모든 여자들이 크게 놀랐다. 그 바위를 이름하여 니금암(尼今岩, 대왕암)이라 하였다. 100명의 여자들이 왕을 모시고 이른 샘을 백녀천(百女泉)이라 부른다.

七月 行大月歌
7월 월가(月歌)를 크게 행하였다.
≪견해≫ 월가를 행하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다.

阿瑟羅太守虹彘 無嫡而薨 上命內公爲虹彘妻陽地繼夫 內公乃上之叔父也 陽地入京 謝恩 曰 “不意今日 中興祖業”
아슬라(阿瑟羅)태수 홍체(虹彘)가 적자가 없이 죽었다. 왕이 내공(內公)을 홍체(虹彘)의 처 양지(陽地)의 계부(繼夫)로 하였다. 내공은 왕의 숙부(叔父, 간혹 외가에도 쓰기 때문에 일성의 동생인지는 알 수 없다)다. 양지가 입경하여 감사하며 말하기를 “오늘 뜻하지 않게 조상의 기업을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九月 以牛徒主古治爲大道師
9월 우도(牛徒)의 주(主)인 고치(古治)를 대도사(大道師)로 삼았다.
≪견해≫ 213년 3월 기사와 중복된다. 228년 10월 징연 기사에 자세하다.

洪后生 伐休子納正 而詐稱上子 上大喜 洗之 曰 “今始生子 汝吾妻也” 洪后百媚 而欺之 洪后自先今時 密納其婿伐休 休自懼 乃引上通之 而復爲寵后 上使伐休同處 聖井混合四宮 欲得子門 故洪后以納正爲上子 而上不疑也
홍후(洪后, 홍개)가 벌휴(伐休)의 아들 납정(納正)을 낳고 왕의 자식이라고 사칭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아기를 씻겨주며 말하기를 “지금 처음으로 나의 아들을 낳으니, 너야 말로 나의 처다.”라고 하였다. 홍후가 갖가지 아첨하며, 그 사실을 속였다. 홍후는 선금때부터, 사위인 벌휴를 은밀히 거두었다. (벌)휴가 스스로 두려워하자, 이에 왕을 끌어들여 통하였다. 다시 총애를 받는 후가 되었다. 왕이 벌휴로 하여금 같은 곳에 살도록 하였으나, 성정(聖井)을 뒤섞어 4궁(四宮)으로 하여 아들을 얻는 비결(門)을 얻고자 하였다. 그런 연유로 홍후가 납정을 왕의 아들이라 하였지만, 왕이 의심하지 않았다.
≪견해≫ 아달라에게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아들을 낳은 벌휴의 처들로 하여금 자신의 처들과 함께 살면서 아들 낳는 비방을 배우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上幸敦父第 辛其妻文窘 拜敦父爲通路將軍 文窘上之異母妹也 上幼時相洽 故至是復幸窘 乃請入井故也
왕이 돈부(敦父)의 집에 행차하였다. 그의 처 문군(文窘)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돈부에게 벼슬을 내려 통로장군(通路將軍)으로 하였다. 문군은 왕의 다른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왕이 어렸을 때 서로 흡족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이때에 이르러 다시 (문)군에게 행차하여, 이에 궁(井)으로 들어오길 청하였던 까닭이다.
≪견해≫ 남당유고 상장돈장 돈부의 계보
일지(한나) - 마지나(유생) - 유지나(돈기시) - 돈부(문군)

十月 夫余美姬天乙地乙來 夫余歎媚二君 捀其骨女之美者 獻于上及伐休也
10월 부여의 아름다운 계집 천을(天乙)과 지을(地乙)이 왔다. 부여는 2군(二君, 아달라와 벌휴)을 칭찬하며 아첨하고, 부여의 골녀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받들어, 왕과 벌휴에게 바쳤다.

十一月 大宣角干薨 以其子大郞爲京都兵官 興宣爲護城兵官 皆先今之外孫 有渠父之風
11월 대선(大宣) 각간이 죽어, 그의 아들 대랑(大郞)을 경도병관(京都兵官)으로, 흥선(興宣)을 호성병관(護城兵官)으로 삼았다. 모두 선금의 외손인데 우두머리의 기질이 있었다.
≪견해≫ 남당유고 상장돈장 대랑과 흥선의 계보
일광(알영) - 봉모(성제) - 순정(마원) - 순선(대양)- 대선(해생) - 대랑, 흥선

十二月 上幸黑齒祠拜像
12월 왕이 흑치(黑齒祠)의 사당에 행차하여 상(像, 초상, 모형)을 방문(拜)하였다.
≪견해≫ 흑치가 복권된 상태가 아니다. 245년 2월 기사를 참조바랍니다.

文介生 汗昔子文昔 上幸其第 賜米衣
문개(文介)가 한석(汗昔)의 아들 문석(文昔)을 낳았다. 왕이 그 집에 행차하여, 쌀과 옷을 내렸다.

二年 正月 上與內后祀祖廟 大赦天下
2년(A.D.214) 정월 왕과 내후(內后, 내례)가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에 대사면을 하였다.

康禮伊伐飡 金女稟主 興宣一吉飡 賜興宣母解生大白馬
강례(康禮)를 이벌찬, 금녀(金女)를 품주로, 흥선(興宣)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흥선의 어머니 해생(解生)에게 대백마(大白馬)를 주었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2년 기사
2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견해≫ 남당유고 상장돈장 강례와 금녀의 계보
일신(선도) - 복공(월고) - 월복(홍제) - 마제(미례) - 유례(운생) - 강례(금녀)
천신(선도) - 남해(운제) - 유리(아리) - 파사(사성) - 지마(애례) - 금녀

二月 上與辣后 謁壤井 祀吐解大神 命伐休爲法
2월 왕과 랄후(辣后)가 양정(壤井)에 가서 알리고, 토해대신(吐解大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명하여 벌휴를 (양정)의 법(法)으로 삼았다.

三月 試射士 于北川
3월 북천(北川)에서 사사(射士, 궁수)를 시험하였다.

藥師白知爲兵官調理
약사(藥師) 백지(白知)를 병관(兵官) 조리(調理, 요리사)로 삼았다.

四月 大求人才 于州郡 勿拘骨地而擧
4월 주군에서 인재를 크게 모았다. 골품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천거하였다.

五月 文窘生 上子達文 上洗之
5월 문군(文窘)이 왕이 아들 달문(達文)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九月 大行月歌 于閼川
9월 알천(閼川)에서 월가(月歌)를 크게 행하였다.

十一月 以羽林年功者 分屬州郡
11월 우림(羽林)군에 여러 해 동안 공로가 있는 자는 주군에 나누어 벼슬을 주었다.

禁民私自遷移 投入雜徒
백성들이 사사로이 옮겨 다니는 잡도(雜徒)를 투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三年 正月 洪完伊伐飡 章氏稟主
3년(A.D.215) 정월 홍완(洪完)을 이벌찬, 장씨(章氏)를 품주로 삼았다.

三月 汗后生 上子達子 賜酺三日
3월 한후(汗后)가 왕의 아들 달자(達子)를 낳았다. 3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四月 隕霜
4월 서리가 내렸다.

內后生 伐休女昔禮
내후(內后)가 벌휴(伐休)의 딸 석례(昔禮)를 낳았다.

妙德公主生 居利子欽室 賜米衣
묘덕(妙德)공주가 거리(居利)의 아들 흠실(欽室, 박제상의 증조부)을 낳았다. 쌀과 옷을 내렸다.

五月 通路敦父 開鷄立岺 功成召還 以大解代之
5월 통로(通路) 돈부(敦父)가 계립령(鷄立岺)을 열어, 공을 이루자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대해(大解)가 (통로의 직을) 대신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3년 기사
3년 4월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에 길이 개통되었다.
≪견해≫ 1. 통설은 계립령(鷄立岺)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옛이름이라 한다. 충남 아산시 명암리 밖지므레 유적에서 계형토기(鷄形土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2. 215년 7월의 기사에 (대)가야가 토산물을 바치어 오는 것은, 계립령의 개통으로 나라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七月 加耶世主阿修獻方物
7월 가야(加耶)의 무리의 주인 아수(阿修)가 방물(方物)을 바쳤다.

好禮生 上女七禮
호례(好禮)가 왕의 딸 칠례(七禮)를 낳았다.

八月 邇父文窘爲京路
8월 돈부(敦父)와 문군(文窘)을 경로(京路)로 하였다.

十月 甘文大亂 命暖門討平之
10월 감문(甘文)에서 큰 난이 있어, 난문(暖門)에게 명하여 쳐서 평탄하였다.
≪견해≫ 1. 통설은 감문(甘文)은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인근의 小國이라고 한다.
         2. 감문국이 완전히 토벌된 것은 293년으로 본다. 이 때에 감문국의 영토의 일부를 빼앗아 216년 2월의 기사와 같이 2개의 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十二月 命骨女修女藝 于南桃
12월 골녀(骨女)들에게 명하여 남도(南桃)에서 여자들의 기예를 닦도록 하였다.

以蛙山鎭爲郡
와산진(蛙山鎭)을 군(郡)으로 삼았다.

大道師古治爲大師 賜名澄然
대도사(大道師) 고치(古治)를 대사(大師)로, 징연(澄然)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四年 正月 吉玄伊伐飡 完解稟主
4년(A.D.216) 정월 길현(吉玄)을 이벌찬, 완해(完解)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置甘勿馬山二縣
2월 감물(甘勿)과 마산(馬山) 2현을 설치하였다.
≪견해≫ 통설은 감물현(甘勿縣)과 감문국(甘文國)을 김천시로 같은 곳으로 본다.

三月 巡至長岺鎭 賜將士征袍
3월 (백성을 어루만지며) 장령진(長岺鎭)에 이르러, 장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견해≫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4년 기사
4년 2월 감물현과 마산현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四月 多婆那以迎烏郞爲君
4월 다파라(多婆那)가 영오랑(迎烏郞)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비교≫ 삼국유사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기사
第八阿達羅王 卽位四年 丁酉 東海濱有延烏郞細烏女 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而非眞王也] 細烏怪夫不來 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지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문득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있어,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살펴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작은 나라의 왕이지, 일본 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괴이하게 여겨 돌아오는 곳을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이 있었다. 역시 그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바위가 또한 세오를 업고 전과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아뢰어 (세오를) 바쳤다. 부부가 서로 만나, 세워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빛이 없었다. 일자(日者, 길흉을 점치는 사람)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나라에 내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서 두 사람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킨 그리된 일이다. 지금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였더라도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림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비단을 주니, 그 말에 의지하여 제사를 지냈다. 연후에 해와 달이 예전과 같았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 임금의 창고)에 감추어 두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그 창고를 이름 하여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견해≫ 삼국유사에는 연오랑(延烏郞)으로 영일읍지에는 영오랑(迎烏郞)으로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五月 西路瓜盧彡達入朝 上與四后會食 達乃上之胞妹也 上思之 而召也
5월 서로 과노(瓜盧)와 삼달(彡達, 삼달라)가 입조하였다. 왕과 4후가 모여 식사를 함께 했다. 삼달라는 왕의 같은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왕이 그리워하여 부른 것이다.

骨花大母薨 嘗與骨夂 作骨花經 進之 年七十五
골화(骨花)대모가 죽었다. 일찍이 골치(骨夂, 골화의 모)와 함께 골화경(骨花經)을 지어 진상하였다. 나이 75세였다.

七月 以邊倍爲紇古祠主 命新其宇 而享牛徒
7월 변배(邊倍)를 흘고사(紇古祠)의 주(主)로 삼았다. 그 지붕을 새로 하도록 명하였고, (수고를 한) 우도(牛徒)에게 흠향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를 행하였다.

九月 伊飡索斗卒 斗善文章能吏治 時稱能斗 其子女亦皆美 而善文辭鄕歌
9월 이찬 색두(索斗)가 죽었다. (색)두는 뛰어난 문장가로, 능숙하게 벼슬아치를 다스렸다. 당시에 능두(能斗)라고 칭송하였다. 그 자녀들 역시 모두 아름답고, 문사(文辭, 문장)와, 향가(鄕歌)에 뛰어났다.

扶余姬天乙生 紫井女紫乙 賜米
부여의 계집(姬, 아가씨, 천자의 딸) 천을(天乙)이 자정(紫井)의 딸 자을(紫乙)을 낳아, 쌀을 내려주었다.

十二月 如老伊伐飡 粉生稟主
12월 여노(如老)를 이벌찬, 분생(粉生)을 품주로 하였다.

五年 正月 上巡行六部 察民 飢寒者恤之
5년(A.D.217) 정월 왕이 6부를 순행(巡行, 여러 곳을 돌아다님)하여 백성들을 살피고,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구휼하였다.

二月 阿瑟羅太守臼臣卒 子寬公代之
2월 아슬라(阿瑟羅)태수 구신(臼臣)이 죽어 아들 관공(寬公)이 계승하였다.

三月 命將軍大解 開大嶺
3월 장군 대해(大解)에게 명하여 대령(大嶺)을 개통하였다.
≪견해≫ 172년 2월 기사에 대령(大嶺)으로 침입해 오는 세력은 말갈이다.

妙德公主生 上女妙亥 上洗之
묘덕(妙德)공주가 왕의 딸 묘해(妙亥)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野人來獻土物 請文師二人 藥師二人
야인(野人)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문사(文師) 2인과 약사(藥師) 2인을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5년 기사
5년 3월 죽령이 개통되었다. 왜인이 예방해왔다.
≪견해≫ 남당유고와 신라본기의 내용이 다르다. 만약 대령(大嶺)의 개통과 야인(野人)이 토산물을 바치는 내용이 연관성이 있다면, 띄어쓰기가 없어야 한다.

五月 甘文太子旭方 爵阿飡 尙福福河公主
5월 감문(甘文)태자 욱방(旭方)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복복하(福福河)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

七月 凉雨來 旬
7월 차가운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十月 伐休妻紫凰生 上女宝凰 上洗之
10월 벌휴(伐休)의 처 자황(紫凰)이 왕의 딸 보황(宝凰)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長昔伊伐飡 倉歇稟主 邊旱右部執書
장석(長昔)을 이벌찬으로, 창헐(倉歇)를 품주로 삼았다. 변한(邊旱)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六年 正月 上與內后 行黃狗祭 于閼川
6년(A.D.218) 정월 왕과 내후가 알천(閼川)에서 황구제(黃狗=戊戌)를 지냈다.

三月 伊飡邊于卒 于善文章音律美風采 仙門惜之
3월 이찬 변우(邊于)가 죽었다. 문장(文章)과 음률(音律)이 뛰어나고, 풍채(風采)가 아름다웠다. 선문(仙門)이 애석해하였다.

四月 好禮生 郁甫子仇道 上幸其第 賜米衣
4월 호례(好禮)가 욱보(郁甫)의 아들 구도(仇道)를 낳았다. 왕이 그 집에 행차하여, 쌀과 옷을 내렸다.

五月 波珍飡淵公卒 年三十九 善擊毬 好神畵 上寵愛之 以其妻板岳 妻暖門
5월 파진찬 연공(淵公)이 39세로 죽었다. 격구(擊毬)를 잘하고, 신화(神畵)를 좋아했다. 왕이 그것을 총애하였다. 연공의 처 판악(板岳)을 난문(暖門)에게 시집보냈다.

舍人松良與上女國氏 私通 命流松良 尋 妻之
사인(舍人,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 또는 관직명) 송양(松良)이 왕의 딸 국씨(國氏)와 사통(私通)하였다. 송양을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국씨가 송양을) 찾아서, 그에게 시집보냈다.

六月 阿瑟羅寬公卒 弟田公代之 寬公寬仁善歌舞好遊 連其妻文君與田公 相通情好 寬公知之 出遊 自陷深淵云 或云羽化不返
6월 아슬라(阿瑟羅)(태수) 관공(寬公)이 죽어 동생 전공(田公)이 계승하였다. 관공은 너그럽고 어질며, 가무(歌舞)를 능하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관공의 처 문군(文君)이 전공과 이어져, 상통(相通)하여 정분이 좋자, 관공이 그것을 알고, 밖으로 놀러가 스스로 깊은 연못에 빠져죽었다고 하거나, 혹은 신선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九月 瓜盧伊伐飡 彡達稟主 邊旱左部執書 文完右部執書 皆邊于子也 時人榮之
9월 과노(瓜盧)를 이벌찬, 삼달(彡達, 삼달라)를 품주로 삼았다. 변한(邊旱)을 좌부집서, 문완(文完)을 우부집서로 삼았는데 모두 변우(邊于)의 아들이다. 당시사람들이 영화롭다 하였다.

七年 正月 上幸郁甫宅 幸好禮 加郁甫爵
7년(A.D.219) 정월 왕이 욱보(郁甫)의 집에 행차하였다. 호례(好禮)에게 거동하고, 욱보의 작위를 더하였다.

三月 福福河主生 旭方子福方 賜米衣
3월 (감문) 복복하(福福河) 주(主)가 욱방(旭方)의 아들 복방(福方)을 낳았다. 쌀과 옷을 내렸다.

四月 暴風雨七日 閼川大漲 人戶多流 命羽林防水
4월 폭풍우가 7일 동안 계속되어, 알천(閼川)이 넘치고, 백성들의 집이 많이 떠내려갔다. 우림(羽林)(군)에게 제방을 막도록 명하였다.

穀公祠奴忠今 入怒濤中 負像而出 特賜大烏
곡공사(穀公祠)의 노비 충금(忠今)이, 성난 물결속으로 들어가 (곡공의) 상(像)을 업고 밖으로 나왔다. 특별히 큰 새를 하사하였다.
≪견해≫ 鳥(조)와 烏(오)를 구별하기 힘들다.

金城北門自毁 上問責 于仙老
금성(金城) 북문이 저절로 무너져, 왕이 선로(仙老)를 문책(問責)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7년 기사
7년 4월 폭우로 알천이 넘쳐서 집이 떠내려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七月 謁賢伊伐飡 瓜仁稟主 文完左部執書 敦車右部執書 賜邊旱母昭于年穀
7월 알현(謁賢)을 이벌찬으로, 과인(瓜仁)을 품주로 삼았다. 문완(文完)을 좌부집서로, 돈차(敦車)를 우부집서로 삼았다. 변한(邊旱)의 어머니 소우(昭于)에게 해마다 곡식을 주었다.

加耶阿修殂 其妻毗可自立 以庶子宇理爲繼夫
가야(加耶) 아수(阿修)가 죽어, 그의 처 비가(毗可)가 스스로 섰다. 서자(庶子) 우리(宇理)가 남편을 이었다.

八月 伊飡長昔卒 以其妻倉歇 妻邊旱
8월 이찬 장석(長昔)이 죽었다. 이로써 장석의 처 창헐(倉歇)을 변한(邊旱)에게 시집보냈다.

九月 上幸京安公主 于日宗宅 命入權井
9월 왕이 경안(京安)공주에게 행차하여, 일종댁(日宗宅)으로 갔다. 권정(權井)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十月 吐己長岺太守
10월 토기(吐己)를 장령(長岺)태수로 삼았다.

伐休妻黃氏 妻邊長
벌휴(伐休)의 처 황씨(黃氏)를 변장(邊長)에게 시집보냈다.

十一月 太公汗昔薨 加文介穀五十石 猩公大日大師
11월 태공 한석(汗昔)이 죽었다. 문개(文介)에게 곡식 50석을 더하였다. 성공(猩公)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하였다.

十二月 送征袍 于西北路
12월 서북로(西北路, 혹은 서로와 북로)에 갑옷(征袍)을 보냈다.

八年 正月 洪夫骨門大書 可氏書主 潛宣小書
8년(A.D.220) 정월 홍부(洪夫)를 골문대서(骨門大書), 가씨(可氏)를 서주(書主), 잠선(潛宣)을 소서(小書)로 삼았다.

二月 郁甫諫上多寵 上怒以爲妬好禮 命流長岺
2월 욱보(郁甫)가 왕에게 총애가 많음을 간(諫)하였다. 왕이 노하여 호례(好禮)를 시새움하는 것으로 여겼다. 명하여 장령(長岺)에 유배를 보냈다.

三月 妙德生 上女妙君 上洗之
3월 묘덕(妙德, 소문국 출신)이 왕의 아들 묘군(妙君)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견해≫ 소문의 왕 묘덕과는 동명이인이다.

四月 阿瑟羅南太守內公薨 子松君繼之
4월 아슬라(阿瑟羅) 남태수 내공(內公, 아달라의 숙부)이 죽었다. 아들 송군(松君)이 자리를 이었다.

五月 好禮生 上女九禮 上洗之
5월 호례(好禮)가 왕의 딸 구례(九禮)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六月 邊旱伊伐飡 倉歇稟主
6월 변한(邊旱)을 이벌찬으로, 창헐(倉歇)을 품주로 삼았다.

七月 南路大蝗 海魚出死者甚多
7월 남로에 메뚜기 떼가 들었다. 바다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죽음이 심히 많았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8년 기사
8년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고, 바다 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八月 紫凰生 上子奈音 上洗之
8월 자황(紫凰)이 왕의 아들 내음(奈音)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十月 文完妻仙珍生 上女仙于 上洗之 加文完爵
10월 문완(文完)의 처 선진(仙珍)이 왕의 딸 선우(仙于)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문완의 작위를 더하였다.

十二月 行蛇陵大祭
12월 사릉대제(蛇陵大祭)를 행하였다.

九年 正月 文完伊伐飡 仙珍稟主
9년(A.D.221) 정월 문완(文完)을 이벌찬으로, 선진(仙珍)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上與稟主 巡幸沙道城 勞戍卒 從海而還
3월 왕과 품주가 사도성(沙道城)을 행차하여 수졸(戍卒, 변방을 지키는 병사)를 격려하고, 바다를 따라서 돌아왔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9년 기사
9년 왕이 사도성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를 위로하였다.
≪견해≫ 신라와 백제에게 모두 사도성(沙道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백제의 사도성에는 말갈이, 신라의 사도성에는 왜가 침입하였으며, 해택(海宅)이 침범 당하였다. 통설은 신라의 사도성은 경북 포항시라 한다.

五月 內后生 伐休女公禮 上洗之
5월 내후(內后)가 벌휴(伐休)의 딸 공례(公禮, 미추이사금의 외할머니)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七月 扶余入貢 藥材玉石 請奉骨女 上命吉宣往其國 議通兩情 答以土物吊勿氏喪
7월 부여(扶余)가 약의 재료인 옥석(玉石)을 바치러 들어와, 골녀(骨女)를 모시는 일을 물었다. 왕이 길선(吉宣)에게 부여로 가서 양국의 사정에 통하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물씨(勿氏)의 장례에 토산물로 조문하도록 답하였다.
≪비교≫ 남당유고 백제왕기 초고왕 24년 기사
二十四年 己巳 七月 攻羅狗壤城
十月 勿太后崩 春秋七十二 太后新羅眞骨 性寬弘慈愛 田太后事之以母 國人重之如泰山
24년(A.D.249) 기사 7월 신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10월 물태후(勿太后, 물씨)가 죽었는데 춘추 72세였다. 태후는 신라 진골이었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크고 자애로웠다. 전태후(田太后, 전씨)가 어머니로 섬겼다. 나라사람들이 태산처럼 중히 여겼다.
≪견해≫ 당초 전씨(田氏)는 물씨(勿氏)의 잉첩신분으로 와서, 물씨의 신분을 능가하게 되므로 신라에게 형식적이나마 허락을 받으려 한 듯.

十月 召文王妙德以其女雲帽獻之 命入權井 帽有身香而美 有殊寵
10월 소문(召文)왕 묘덕(妙德)이 그의 딸 운모(雲帽)를 바쳤다. 권정(權井)에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운)모는 몸에서 향기가 나고 아름다워서 특별한 총애가 있었다.

上幸松良第 濡其妻國氏 加爵松良 自是累幸國氏
왕이 송양(松良)의 저택에 행차하여, 그의 처 국씨(國氏, 아달라와 장씨의 딸, 203년 12월생)에게 은혜를 입혔다. 송양에게 작위를 더하고, 이때부터 국씨에게 왕의 행차가 잦아졌다.

十二月 蚊川祠林中 有大笋聲 于雪中 主採而獻之 上以爲祥 命祀阿世大母
12월 문천사(蚊川祠)의 숲속 눈속에 죽순이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문천사) 주(主)가 캐어서 바쳤다. 왕이 상서롭다하여, 아세대모(阿世大母)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十年 正月 敦車伊伐飡 羅亥稟主 加爵亥母瓜姬與其弟作平及平子作奴 羅亥善天饍 作平善治園 時人稱 作平園羅亥羞
10년(A.D.222) 정월 돈차(敦車)를 이벌찬, 나해(羅亥, 지마의 딸, 189년 2월생)를 품주로 삼았다. (나)해의 어머니 과희(瓜姬)와 (과희의) 동생 작평(作平)과 (작)평의 아들 작노(作奴)의 작위를 더하였다. 나해는 임금의 반찬을 잘하고, 작평은 과수원을 관리에 능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작평의 과수원, 나해의 수라’라고 하였다.

二月 文介生上孿子 痛聲聞外 上爲之獻髮 于産神 男曰髮公 女曰髮姬 上洗畢 而汗流沾杉 文介猶不捨上 介年已五十有二 而狐媚于上 竟生孿子自苦 人皆笑之
2월 문개(文介)가 왕의 쌍둥이 자식을 낳았다. 산고의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왕이 이를 위하여 머리카락을 잘라 산신(産神, 삼신할미)에게 바쳤다. 남자아이는 발공(髮公), 여자아이는 발희(髮姬)라고 이름 지었다. 왕이 (아기를) 씻긴 후에 땀이 흘러 삼베옷을 적셨다. 문개가 오히려 왕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개는 이미 나이가 52살인데 여우같이 왕에게 아첨하여, 결국엔 왕의 쌍둥이 자식을 낳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四月 命牛羊狗馬虎徒 各守其地 無相侵凌 禁其無品之刀 私藏弓矢
4월 우도(牛徒), 양도(羊徒), 구도(狗徒), 마도(馬徒), 호도(虎徒)에게 명하여 각자 자신의 땅을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골품이 없는 자는 칼을 휴대해서는 안 되고, 사사로이 활과 화살을 감추는 것을 금하였다.

六月 召郁甫歸京 甫相于長岺得士卒心 一軍仰之如父母 聞其歸 而失聲號哭
6월 욱보(郁甫)를 불러 귀경하도록 하였다. (욱)보는 장령(長岺)의 사졸(士卒)의 마음을 얻어 (백성들을) 다스렸다. 일군(一軍)이 부모와 같이 우러렀다. 욱보가 돌아간다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목이 쉴 정도로 울며 불렀다.

上與文介幸紇古祠 賜牛徒酒食 命選其通德者十二人 屬于各典給仕
왕과 문개(門介)가 흘고사(紇古祠)에 행차하였다. 우도(牛徒)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왕의) 덕이 통하는 자 12명을 골라 각 전(典)의 급사(給仕, 하위직 공무원)로 발탁하였다.

九月 行大場 于南郊
9월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行白羊祭 于明活山
10월 명활산(明活山)에서 백양제(白羊祭)를 행하였다.
≪견해≫ 白羊(백양)과 양도(羊徒)와 명활산(明活山)이 관련이 있다. 양(羊)은 방위상으로 7시 방향이다.

十一月 大道大師澄然卒 葬以伊飡禮 澄然以天地日月陰陽爲大道之六經 順此者興 逆此者替 講法三十年 仙徒推之 爲牛徒之宗匠 澄然以文其母弟 潛心力學 得通大道 其父文父嬖臣乾治也
11월 대도대사 징연(澄然)이 죽어 이찬례로 장사지냈다. 징연은 천지일월음양(天地日月陰陽)을 대도의 6가지 경전으로 삼았다. 따르는 자는 흥하였고, 반하는 자는 쇠퇴하였다. 30년 동안 강법(講法)을 하고, 선도들이 받들어 우도(牛徒)의 종장(宗匠, 우두머리)으로 삼았다. 징연은 문기(文其)의 동모제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학문에 힘써 대도(大道, 사람이 행하여야 할 바른길)에 통하는 힘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는 문부(文父)의 귀여움을 받던 신하 건치(乾治)다.
≪견해≫ 228년 10월의 기사에 자세하다.

十二月 爵多牟臣阿飡
12월 다모신(多牟臣)에게 아찬의 작위를 내렸다.

上滯雪 于桃山
왕이 눈에 막히어 도산(桃山)에서 머물렀다.

十一年 正月 暖門伊伐飡 板岳稟主
11년(A.D.223) 정월 난문(暖門)을 이벌찬, 판악(板岳)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雲帽爲七品權妻
3월 운모(雲帽)를 7품 권처로 삼았다.

松良妻國氏生 上女國元公主 上洗之
송양(松良)의 처 국씨(國氏)가 왕의 딸 국원(國元)공주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四月 行汗兒大祭 于閼川
4월 알천(閼川)에서 한아대제(汗兒大祭)를 행하였다.

毗可生 宇理女美理
(가야의) 비가(毗可, 금관출신)가 우리(宇理)의 딸 미리(美理)를 낳았다.

紫凰生 伐休女好買 賜米衣
자황(紫凰)이 벌휴(伐休)의 딸 호매(好買)를 낳았다. 쌀과 옷을 내렸다.

五月 命築凉臺 于狼山
5월 낭산(狼山)에 양대(凉臺)를 짓도록 명하였다.
≪견해≫ 1. 낭산(狼山)은 아달라이사금이 묻힌 곳이다.
         2. 양대(凉臺)는 신라의 왕들이 더위를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七月 邊長伊伐飡 黃氏稟主
7월 변장(邊長)을 이벌찬, 황씨(黃氏)를 품주로 하였다.

禁小兒捕苑林之蟬蜩 上夢見蟬王 羽衣來訴故也
어린아이들에게 나라의 동산의 숲에서 매미(蟬蜩)를 잡는 것을 금(禁)하였다. 왕이 꿈에서 매미의 왕을 보았는데, 날개옷을 입고 와서 하소연하였기 때문이다.
≪견해≫ 11월에도 같은 맥락의 꿈 이야기가 나타난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一月 禁民奉異國人雜神 上夢見 歡樹王興 異國神爭祠 乃有是令
11월 백성들에게 다른 나라의 잡신(雜神)을 모시는 것을 금하였다. 왕이 꿈속에서 수왕(樹王, 나무의 왕)이 흥(興)하자 기뻐하였는데, 다른 나라의 신과 사당을 다투었다. 이에 이와 같은 령(令)이 있었다.
≪견해≫ 신라의 神이 木 → 火(日) → 金(부처)로 변화가 있다.

十二年 正月 上與內后 行靑龍祭 于月池中 命六部仙女 破氷行舟擧火
12년(A.D.224) 정월 왕과 내후(內后)가 월지(月池)에서 청룡제(靑龍祭=甲辰年)를 행하였다. 6부(六部)의 선녀(仙女)들에게 명하여 얼음을 깨뜨리고 배를 저어 횃불을 들도록 하였다.

二月 大解伊伐飡 淵活稟主
2월 대해(大解)를 이벌찬, 연활(淵活)을 품주로 삼았다.

骨門大書洪夫薨 上痛哀之 厚葬之 洪夫以洪介之出 善文章美風采 其妻可氏文其出 魚水而無子 洪夫使其寵臣貝權 命通可氏 觀而樂之 遂生權子女 洪夫取爲己子 權母貝喜 以洪夫奉侮 得洪夫寵生 洪夫子洪權 上命爵洪權 許可氏爲貝權妻
골문대서(骨門大書) 홍부(洪夫, 일성의 아들, 192년 2월생)가 죽었다. 왕이 애통해하며 후하게 장사를 지냈다. 홍부는 홍개(洪介)가 낳은 자식이다. 문장에 능하고 아름다운 풍채를 가졌다. 그의 처 가씨(可氏)는 문기(門其)의 자식이다. 물고기와 물과 같았는데 자식이 없었다. 홍부는 그가 총애하는 신하 패권(貝權)에게 시키어 가씨와 통하도록 명하고, 보면서 즐거워하였다. 드디어 (패)권의 자녀가 태어났다. 홍부는 자신의 자식으로 취하였다. (패)권의 어머니 패희(貝喜)는 홍부가 기르는 것을 업신여겼으나, 홍부의 총애를 받는 홍부의 아들 홍권(洪權)을 얻게 되었다. 왕명으로 홍권에게 작위를 내리고, 가씨를 패권의 처로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太史文格奏 曰 “昨夜龍見京都 必有非常之變 宜令有司備之” 上曰 “朕聞國君有道 災蘗自消 無道無往不敗 朕若不自修 雖備何益” 乃令角干以下奈麻以上 言君之過無隱” 群臣皆言 “陛下聖德如天 災難自消” 奈麻骨正獨曰 “堯舜之君 亦不得盡善 父今何得盡善 母今常言 父今好色濫財 恐爲民憂 臣亦憂之” 骨正伐休之子 年十八 能直言 上嘉之 召而抱之 曰 “此眞吾子也 汝等若如此子無隱 則庶無失” 乃進骨正爵級飡 賜其母紫凰神衣 時上寵愛紫凰子 其子骨正等 特寵無嚴 與上狎 遊苑池 故能盡其言也
태사(太史, 기록을 맡은 관리) 문격(文格)이 여쭈어 아뢰기를 “어젯밤에 용이 경도(京都)에서 보였습니다. 반드시 변란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령을 내려 벼슬아치에게 준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나라의 왕이 도(道, 인의)가 있으면 재난의 그루터기는 스스로 없어진다고 들었다. 무도(無道)함이 없으면 예로부터 패함이 없다고 하였다. 짐이 만약 스스로 도덕과 품행을 기르지 않는다면 비록 준비한다하더라도 무엇이 나아지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각간(角干)이하 내마(奈麻)이상의 신하로 하여금 임금의 잘못을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폐하의 성덕이 하늘과 같으니 재난은 스스로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마 골정(骨正)이 홀로 말하기를 “요순(堯舜)임금도 역시 선(善, 도덕적 기준에 합당한 것)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아바마마께서는 어찌 진선(盡善)에 이름이 있겠습니까. 어마마마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아바마마는 호색하고 재산을 낭비하여, 백성의 근심을 두려워하셔야 하며 신 또한 그것을 근심합니다.”라고 하였다. 골정은 벌휴(伐休)의 아들이고, 나이 18세이지만 능히 직언(直言)을 할 수 있었다. 왕이 훌륭하다하여 골정을 불러 안았다. “너야 말로 진실한 나의 아들이다. 너희들은 만약 이 아이와 같이 숨김이 없다면 곧 여러 잘못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골정의 작위가 급찬(級飡)에 나아갔다. 골정의 어머니 자황(紫凰)에게는 신의(神衣)를 내렸다. 당시 왕이 자황의 아들을 총애하여, 자황의 아들 골정 등에게는 특별히 엄함이 없었다, 왕과 친숙하여 나라의 동산과 연못에 놀러 다녔다. 그런 연유로 능히 그런 말을 다함이 있었다.
≪견해≫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11년 기사
11년 2월 서울에 용이 나타났다.

五月 行紇古大母祭 于吉公祠 上臨其祭 賓于祭主 板岳板失賜其族 衣酒有次
5월 흘고(紇古)대모의 제사를 길공사(吉公祠)에서 지냈다. 왕이 그 제사에 참석하였다. 빈우(賓于)를 제주(祭主)로 하였다. 판악(板岳)과 판실(板失) 그 친족에게 옷과 술을 내림에 차례가 있었다.

十月 吉宣謀反事覺 走入夫余 上命夫余獻之 夫余不聽 上大怒 命大解將西路軍伐夫余 吉宣以吉門之孫 密華之子 嫁其女於夫余 而仍爲夫余左平 娶夫余骨女 生子女十余人 置廣宅于其都 上疑其有異謀 不以兵事委之 至是果反兩國失和
10월 길선(吉宣)이 모반한 일이 드러나, 부여(夫余)로 도망갔다. 왕이 부여에게 길선을 바치라고 명하였으나 부여가 듣지 아니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대해(大解)를 장수로 명하여 서로군(西路軍)으로 부여를 쳤다. 길선은 길문(吉門)의 손자로, 밀화(密華)의 아들이다. 그의 딸이 부여로 시집보내어, 이에 부여의 좌평(左平)이 되었다. 부여의 골녀(骨女)에게 장가를 가서 자녀 10여인을 낳고, 부여의 도읍에 넓은 저택을 두었다. 왕이 거역하는 계책을 의심하여, 병사에 관한 일을 맡기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반역을 이루어져 양국이 화친을 잃게 되었다.
≪비교≫ 1.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12년 기사
12년 10월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처형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2. 남당유고 신라사초 구지왕 38년 기사
三十八年 乙巳 十月 吉宣事敗 而逃歸 羅王求之 王答之曰 “爲臣不忠 固可罪矣 而其女爲小國內君 幸爲小國 貸其一命” 羅王怒不聽 遣其將大解 來侵不利而還.
38년(A.D.225) 을사 10월 길선(吉宣)의 일이 실패하여 도망하여 돌아왔다. 신라왕이 길선을 불러들이려 하였다.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지 아니함은 틀림없이 죄를 줄만합니다. 그의 딸이 소국(小國, 백제)의 내군(內君, 왕후)이니 그 명을 관대히 처분하시면 소국으로서는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라왕이 화가 나서 듣지 아니하고, 장수 대해(大解)를 보내어 침략하였는데 불리하여 돌아갔다.
≪견해≫ 남당유고 백제왕기와 신라사초가 1년의 기년차이가 난다.

十二月 內后生上女發萱 賜酺群臣 文完奏 曰 “國有大慶 而出征之士 凍餒于異域 聖人勿爲匹夫之怒 願陛下罷 夫余之役 以洽軍情” 上許之 而猶以大解久圍無功 罷其相 仍以貝權作假相 貝權年小 而上愛其妻可氏 爲稟主 命貝權代大解之政 至是專之 群臣爭其非 上曰 “吾妹之夫 不能出納 吾命則孰爲之” 仍超授權 波珍之位 稱曰假相 乃稟主始也
12월 내후(內后)가 왕의 딸 발훤(發萱)을 낳아,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문완(文完)이 여쭈어 말하기를 “나라의 큰 경사가 있으니 출정을 한 병사들이 이역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성인(聖人)은 필부(匹夫)처럼 성내지 아니하니, 원컨대 폐하께서 부여와의 싸움을 그만 두시고, 이로써 군대의 형편을 부합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다만 대해(大解)가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었으나 공이 없었으므로 재상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에 패권(貝權)을 가상(假相, 임시직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패권은 나이가 어리지만, 왕이 그의 처 가씨(可氏)를 사랑하여 품주(稟主)로 삼았다. 패권에게 대해의 정사를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오로지(홀로)하게 되었다. 군신들이 옳지 않다고 따졌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여동생의 남편이지만 출납을 할 수 없다. 나의 명이 있으면 누구든지 출납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파진(찬)의 지위를 초월하는 권력을 주고, 가상(假相)이라 불렀다. 비로소 품주(稟主)의 시초다.
≪견해≫ 이 때부터 품주(稟主)에게 재정권(財政權)이 부여된 듯.

十三年 正月 上與內后 受朝南桃 宴群臣 皆醉舞於前 獨興宣不飮酒戱女 上問之 奏 曰 “我國神造 內無反臣 外無侮國 今凶賊吉宣不滅 在外夫余 有狼心 此豈飮酒之時乎” 上嘉之 欲進其爵 興宣曰 “無功而爵 則失群臣之心 願試臣 于西路 待功而爵之 未晩也” 上然之 乃以興宣板失爲西路軍事 以整戎旅
13년(A.D.225) 정월 왕과 내후(內后)가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잔치를 벌려 군신들이 모두 취하여 왕의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흥선(興宣)이 홀로 술을 마시지 않고 여자와 놀지도 않았다. 왕이 연유를 물으니, 흥선이 아뢰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신(神)이 나라를 세우고, 안으로는 반신(反臣)이 없었으며, 밖에서도 나라를 업신여김이 없었는데, 지금 흉적(凶賊) 길선(吉宣)이 없어지지 않고 나라 밖 부여에서 살면서 낭심(狼心, 인정도 없고 탐욕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어찌 이처럼 술을 마시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 작위를 올려주려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공이 없는데 작위를 올려주면, 곧 군신의 마음을 잃게 됩니다. 원하건대 신을 시험하시어 서로(西路)로 보내주시고, 공을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작위를 올려주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리하여, 이에 흥선과 판실(板失)을 서로군사로 삼았다. 이로써 군사를 벌이어 정비하였다.

三月 可氏有疾 羊元伊伐飡 元弓稟主
3월 가씨(可氏)가 병이 있어, 양원(羊元)을 이벌찬, 원궁(元弓)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吉宣死 于夫余 其君仇知 葬以太公禮 吉宣女田氏爲仇知妻有寵 乃以其女苩氏妻吉宣 吉宣死 其子彭宣仍娶苩氏爲妻 先是苩氏與其母兄私通 不肯與彭宣好 仇知乃命 母兄監軍於外 兄不平 欲作亂 仇知弟古尸亦與田氏潛通 生子 田氏子素古 時仇知太子 其骨多不平 古尸獨保之 田氏乃言古尸之忠 委以軍國大事 田氏與古尸彭宣 幽仇知 而專政 未幾仇知殂 乃立素古爲君 而田氏古尸專政 苩氏母兄 遂奔末曷
5월 길선(吉宣)이 부여(夫余)에서 죽었다. 부여의 임금 구지(仇知)가 태공(太公)례로 장사를 지냈다. 길선의 딸 전씨(田氏)는 구지의 처로, 왕의 총애가 있어, 구지의 딸 백씨(苩氏, 백제왕기의 백화, 백화의 어머니가 백씨로 나옴)를 길선에게 시집보냈다. 길선이 죽자 그의 아들 팽선(彭宣)이 이에 백씨에게 장가들어 처로 삼았다. 이전에 백씨와 그의 모형(母兄, 同母兄, 백제왕기의 백인, 구지왕의 아들)과 사통(私通)하여 (백화가) 팽선(彭宣)과 좋게 지내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구지가 이에 모형(母兄, 백인)에게 바깥의 군대를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형(兄, 백인)이 불평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구지의 동생 고시(古尸) 또한 전씨와 잠통(潛通)하여 아들을 얻었다. 전씨의 아들 소고(素古, 초고왕)가 당시 구지의 태자여서, 그 자식들이 불평함이 많았다. 고시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전씨가 고시의 충성을 예측하고, 나라 안의 군대에 관한 큰일을 고시에게 맡겼다. 전씨와 고시와 팽선이 구지를 가두고, 나라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지가 죽어, 소고가 임금으로 세워, 전씨와 고시가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백씨의 모형(母兄, 백인)은 드디어 말갈로 도망가게 되었다.
≪비교≫ 남당유고 백제왕기 구지왕 39년 기사
三十九年 丙午 五月 上佐平吉宣卒 年五十五 王痛哀之 以太公禮葬之 吉宣子彭宣田氏之兄也 王以苩花妻彭宣 彭宣言 苩花與其兄苩仁密通 薄於臣 王命苩仁出 監北漢軍 苩仁曰 “父王惑於田氏 而薄於子弟” 王弟古尸聞之 密告於田氏 曰 “諸王子欲與苩仁 作亂” 田氏曰 “且將奈何” 古尸曰 “事急矣 不如矯詔 發兵以先制之” 田氏乃出密符 與之 令行內外軍事 古尸乃逼王 幽於深宮 立素古爲新王 以號令天下 古尸者王之庶弟也 其母嘗與王 潛通 密告宮中秘事 頗有力於王 故王亦愛古尸 如己子 古尸年少而美 密與田氏相通 而生子素大 常恐王知 至是苩仁等欲發其事 故古尸先其捕之 苩仁知計違 而奔于末曷 古尸乃與田氏專政 王憂憤而薨 春秋七十二 王以聖君 早有治平之名 而只好內事 而不檢閨門 遂爲愛弟寵妻之所制 惜哉 達率燕多鬲閃等 欲伐古尸 不克而逃 歸新羅 謀兩擧 故古尸不敢自立 而立素古 年才十三.
39년(A.D.226) 병오 5월 상좌평(上佐平) 길선(吉宣)이 죽었는데 나이 55세였다. 왕이 애통해하며 태공례(太公禮)로 장사를 지냈다. 길선의 아들 팽선(彭宣)은 전씨의 오빠다. 왕이 백화(苩花)를 팽선에게 시집보냈다. 팽선이 백화와 그의 오빠 백인(苩仁)이 밀통하여 신을 깔본다고 하소연하였다. 왕이 백인에게 밖으로 나가 북한군(北漢軍)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백인이 말하기를 “아바마마가 전씨(田氏)에게 미혹되어, 아들과 동생들을 가벼이 여긴다.”라고 하였다. 왕의 동생 고시(古尸)가 그 말을 듣고, 전씨에게 은밀히 고하여 말하기를 “모든 왕자들이 백인과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전씨가 말하기를 “또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고시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다. 왕의 조서를 바로잡아 군사를 일으켜 먼저 제압함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전씨가 이내 밀부(密符, 병란이 일어나면 즉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도록 내리던 병부)를 내어 고시와 더불어 내외군사(內外軍事)로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고시가 이에 왕을 핍박하여 궁궐 깊숙이 가두어 놓고, 소고(素古, 초고왕)를 새로운 왕으로 세워 이로써 천하에 호령하였다. 고시는 왕의 서제(庶弟, 아버지의 첩에서 낳은 자식)이다. 그 어머니는 일찍이 왕과 잠통하여, 은밀히 궁중비사(宮中秘事)를 고하였다. 자못 왕에게 애씀이 있었다. 왕 역시 고시를 사랑하여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다. 고시는 나이가 젊고 아름다워 전씨와 은밀히 상통하여 아들 소대(素大)를 낳았다. 왕이 알까 항상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인 등이 그 일을 발설하려 하였다. 그런 연유로 고시가 먼저 사로잡았다. 백인이 계략이 어긋났음을 알고 말갈(末曷)로 도망쳤다. 고시가 이에 전씨와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왕이 근심하고 분노하며 죽었는데 춘추 72세였다. 왕은 성군(聖君)으로써 일찍이 나라를 잘 다스려 평안하게 한 이름이 있었다, 다만 여자를 좋아하여, 규문(閨門, 부녀자)의 일을 점검하지 않았으니, 끝내는 사랑하는 동생과 총애하는 처에게 억제를 당하였다. 아깝도다. 달솔(達率) 연다(燕多)와 격섬(鬲閃) 등이 고시를 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여 신라로 귀의하였다. 두 번의 거사가 모의되어 고시가 감히 자립(自立)하지 못하였다. 소고가 섰는데 나이 겨우 13살이었다.
≪견해≫ 남당유고 백제왕기와 신라사초가 1년의 기년차이가 난다.

六月 夫余達率燕多來降 賜爵 燕多來報 古尸弑君 逐嫡而祕 不發喪 請得精兵 報仇 上命議重臣 皆言不知虛實 不可動 止之
6월 부여(夫余)의 달솔(達率) 연다(燕多)가 와서 항복하여 작위를 내렸다. 연다가 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고시(古尸)가 왕을 시해하고, 적자를 쫓아내고 숨기어 발상(發喪, 초상이 난 것을 발표함)을 하지 않으니 정병(精兵)을 얻기를 청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하였다. 왕이 중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으나, 모두 허실을 알지 못하니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여 그치도록 하였다.

七月 上與內后汗后 入凉臺 召板岳仙珍 入供
7월 왕과 내후(內后)와 한후(汗后)가 양대(凉臺)에 들어갔다. 판악(板岳)과 선진(仙珍)을 불러 모시도록 하였다.

始置海宅 于花田舊地 乃阿惠后與昔公所遊處也 有小鹿亭大鹿亭 奉其像
처음으로 해택(海宅)을 화전(花田)의 옛 땅에 세웠다. 화전은 아혜후(阿惠后)와 석공(昔公)이 놀던 곳이 있다. 소록정(小鹿亭)과 대록정(大鹿亭)이 있고 그 형상을 모셨다.

九月 上幸松良宅 賜國氏子國良衣 乃上之外孫也 上愛國氏 久置權井 有殊寵而無子 乃降于松良 始生子也
9월 왕이 송양(松良)의 집을 행차하여, 국씨(國氏)의 아들 국량(國良)에게 옷을 내렸는데, 곧 왕의 외손이다. 왕이 국씨를 사랑하여, 오랫동안 권정(權井)에 두었는데, 특별한 총애가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이에 송양에게 내렸는데, 처음으로 생긴 아들이다.

上幸現郞公主宅 賜公主衣酒 公主召文翡貝王胞姊也 年八十七 玉皃如畵 早起掃地 望先今廟拜 次拜上所 如一日 上聞之 曰 “現郞二十從先今 五十余年又事朕如此 可知其忠也” 乃幸其宅 召完郞舍利等 大宴其族
왕이 현랑(現郞)공주댁을 행차하여 공주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공주는 소문(召文)왕 비패(翡貝)왕의 같은 어머니 누나이다. 나이 87세였는데, 옥 같은 얼굴이 그림 같았다. 일찍 일어나 땅을 쓸고, 선금(先今)의 사당을 바라보며 절을 하고, 다음으로 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기를 하루와 같았다(변함이 없었다). 왕이 그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현랑은 20년을 선금(先今)을 따르고, 50여년을 또한 짐을 섬기이 이와 같으니 가히 그 충심을 알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댁을 행차하여 완랑(完郞)과 사리(舍利) 등을 불러 그 친족들에게 크게 잔치를 열었다.

十月 上與加耶女主毗可 盟于黃山
10월 왕이 가야(加耶) 여주 비가(毗可)와 황산(黃山)에서 맹약을 하였다.
≪견해≫ 신라와 가야가 맹약을 한 것은 백제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十二月 上與內后 入海宅
12월 왕과 내후(內后)가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行盤山大師大祭 于日池 上與后 親祀之 命爵盤山大師子孫 隨才擇用 盤山以不世出之神才 早通仙學 化洽百世 德被萬方 眞聖人之聖人也 吉公足公乙公黑齒等 皆師事之 故牛徒虎徒羊徒鷄徒 皆奉之爭 娶盤氏女 爲宗主 澄然妻盤花亦師之女也 長澄然八歲 能通諸法 澄然事之如母 曰 “吾妻乃吾師也” 澄然之學 盖出於盤花也 澄然卒 盤花欲殉之 牛徒惜其才 而不許 遂爲澄然子碩然妻 至是爲祭主 年六十九 而氣力尙富 身體肥豊 子夜浴于神井 上曰 “汝年已衰 恐傷寒風 雖非神井可也” 盤花曰 “妾有養精之術 雖隆冬 可以入水 當此大祭 安可不浴乎” 上壯其言 遂幸盤花 于井舍 賜權妻 號後人 以其井爲盤花井
일지(日池)에서 반산(盤山)대사의 대제(大祭)를 지냈다. 왕과 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반산대사의 자손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재주가 따르는 자는 골라 쓰도록 명하였다. 반산은 불세출(不世出)의 신재(神才)로, 일찍이 선학(仙學)에 통달하여 교화가 두루 미침이 백세(百世=百代)에 이르고, 만방(萬方, 모든 곳)이 덕을 입었다. 참으로 성인중의 성인이었다. 길공(吉公), 족공(足公), 을공(乙公), 흑치(黑齒)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한 연유로 우도(牛徒), 호도(虎徒), 양도(羊徒), 계도(鷄徒)가 모두 받들기를 다투며, 반씨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종주(宗主)가 되었다. 징연(澄然)의 처 반화(盤花) 역시 대사의 딸이다. 징연이 자라나 8세가 되자 모든 법(法, 규범)에 능통하고, 징연이 반화를 섬김이 어머니와 같았다. 말하기를 “나의 처는 곧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징연의 학문은 대개 반화에게서 나온 것이다. 징연이 죽자 반화가 따라죽으려 하였다. 우도(牛徒)가 그 재주를 아까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징연의 아들 석연(碩然)의 처가 되었고, 이 때에 이르러 (반산대사의) 제주(祭主)가 되었는데 나이 69세였다. 기력이 오히려 성하고, 신체가 살찌고 풍성하였다. 밤 자시에 신정(神井)에서 목욕을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의 나이는 이미 쇠하여, 찬바람으로 몸이 상할 것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비록 신정이 아니라고 괜찮은가?”라고 물었다. 반화가 말하기를 “첩은 양정(養精, 양의 정기)의 재주가 있어, 비록 차가운 겨울이라도 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큰 제사를 맡는다면 어찌 목욕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씩씩하다 여기고 드디어 반화에게 행차하여 정사(井舍)로 갔다. 권처의 직위를 내렸다. 후인(後人)들이 그 정(井)을 반화정(盤花井)이라 하였다.

十四年 正月 仙門大書文完卒 年四十七 文完邊于之子也 有渠父之風 善文章能歌舞 上寵愛之 超授爵位 賞賜甚重 上嘗夜宴宮中 完醉誤入后側 時辣后方在厠 完抱而戱之 后慕其風而不怒 遂相通 完恐得罪 不敢復近辣后 辣慕完益篤 悲歌之 帝聞之 而采之 曰 “汝與朕同胞 而同穴有何隱乎 夫男女大慾也 莫非有所男乎” 辣乃以完告之 上乃召文完責之 完叩首請死 上命囚完 于辣后寢殿 完知上意 乃復與后相通 生子 后求爲完妻 上不許 曰 “龍女可有私臣 安可爲臣子之妻” 乃命 文完爲冬宮私臣 后常召完入侍 完妻仙珍獨宿 完臣連弓通之 完不知之 一夜上幸冬宮 命完歸 完歸家 走入妻房 見連弓抱其妻而臥 遂得心疾 月餘而卒 于冬宮 辣后泣 曰 “汝死則朕無可枕之臣 雖欲從汝而死 奈有上何” 完曰 “臣之臣連弓 美而善歌 可以代臣” 后乃奏于上 乃召連弓入冬宮 與后行吉 命文完妻仙珍爲連弓妻
14년(A.D.226) 정월 선문대서 문완(文完)이 죽었는데 나이 47세였다. 문완은 변우(邊于)의 아들인데 대들보의 풍채가 있었다. 문장(文章)에 좋고, 가무(歌舞)에 능하였다. 왕이 총애하여 초월하는 작위를 주고, 상을 내려줌이 심히 많았다. 왕이 일찍이 밤중에 궁중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문)완이 취하여 잘못하여 후의 측면으로 들어갔다. 당시 랄후(辣后)의 방향에 화장실이 있었다. (문)완이 랄후를 안으며 희롱하였다. (랄)후가 그 풍모를 사모하여 화를 내지 않아, 마침내 상통하게 되었다. (문)완이 죄를 지은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는 감히 랄후의 가까이 가지 않았다. 랄(후)가 문(완)을 사모함이 점점 도타워져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 왕이 그 노래를 듣고 캐어물으며 말하기를 “너와 짐은 같은 어머니의 자식이고,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무엇을 숨김이 있느냐. 대개 남녀간에는 큰 욕심이 있는데, 아닌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있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랄(후)가 이에 (문)완을 고하였다. 왕이 이에 문완을 불러 꾸지람을 하였다. (문)완은 머리를 조아리며 죽기를 청하였다. 왕이 (문)완을 랄후의 침전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문)완은 왕의 뜻을 알고 이에 다시 (랄)후와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 (랄)후가 문(완)의 처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용녀(龍女, 왕가의 여자)는 사신(私臣, 개인적인 신하)을 두는 것이 가능한 일이다. 어찌하여 신하의 처가 됨이 옳겠느냐?”라고 말하며 이에 문완을 동궁사신(冬宮私臣)으로 명하였다. (랄)후는 항상 (문)완을 불러 모시도록 하였다. (문)완의 처 선진(仙珍)은 혼자서 잠을 잤는데, (문)완의 신하 연궁(連弓)과 통하였으나, 문완이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왕이 동궁(冬宮)에 행차하여 (문)완을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문)완이 귀가하여 처의 방으로 달려 들어가니, 연궁이 그의 처를 안고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끝내 마음의 병을 얻고 한 달여를 앓다가 동궁에서 죽었다. 랄후가 울면서 말하기를 “네가 죽으면 곧 누가 있어 짐과 잠자리 신하로 하겠느냐. 비록 너를 따라 죽기를 바라지만 왕에게 어찌해야 하느냐?”라고 하였다. (문)완이 말하기를 “신의 아랫사람인 연궁이 아름답고 노래를 잘하니 신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랄)후가 이에 왕에게 여쭈었다. (왕이) 이에 연궁을 불러 동궁으로 들어오게 하고 (랄)후와 결혼식을 행하였다. 문완의 처 선진을 연궁의 처로 삼았다.

二月 連弓伊伐飡 仙珍稟主 郁甫左執書 貝權右執書
2월 연궁(連弓)을 이벌찬, 선진(仙珍)을 품주로 하였다. 욱보(郁甫)를 좌집서, 패권(貝權)을 우집서로 하였다.

賜盤花白大馬奴婢 花有神術悅上心 累召宮中幸之 花以紫衣綠袴 跨白大馬 而白髮垂馬 後人以爲白髮仙母 舞則曳地 從者爲之持隨
반화(盤花)에게 백대마(白大馬)와 노비를 주었다. (반)화는 불가사의한 재주가 있어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누차 궁중으로 불러 행차하였다. (반)화는 자주색 옷과 녹색의 바지를 입고, 백대마에 걸터앉아 백발(白髮)이 말에 드리워졌다. 후인들이 백발선모(白髮仙母)라 하였다. 춤을 추면 (머리카락이) 땅에 끌리고, 종자(從者, 따르는 자, 또는 노비)들이 머리카락을 잡고 따랐다.

五月 上大閱 于一善
5월 왕이 일선(一善)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七月 夫余聞我將伐 欲挫我軍氣 而先以精騎 襲我助比川二城 城主死之 恐我進攻 虜婦女小兒一千口而去 上聞之大怒 命興宣急擊夫余 興宣曰 “兵行不可 苟且按兵不動 夫余連日不寐 以爲我兵將至 上下疲困”
7월 부여(夫余)가 우리가 장차 치러간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군의 사기를 꺾고자 하, 먼저 정기(精騎)로 우리의 조비천(助比川)의 2개성을 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 우리의 진공(進攻, 진격)을 두려워하여 부녀자와 어린아이 1000명을 사로잡아 갔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흥선(興宣)에게 급히 부여를 치도록 명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병사를 움직이는 것을 불가합니다. 구차(苟且, 일시적으로 미봉함)하더라도 병사를 움직이지 않도록 누르고 있으면, 부여는 연일(連日)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우리의 병사가 장차 이른다고 할 것이므로, 상하가 피곤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14년 기사
14년 7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2. 백제본기 초고왕 2년 기사
2년 7월 몰래 군사를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에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興宣)을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나라 동쪽의 여러 성들을 쳐들어 왔다. 신라왕도 또 친히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이어 한수(漢水)까지 엄습하여 왔다.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려서 곧 앞서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었다.
         3. 남당유고 백제왕기 초고왕 2년 기사
二年 丁未 八月 破新羅助比川城 而虜一千口而還 羅又引兵 逼我漢水 故還其所俘.
2년(A.D.227) 정미 8월 신라의 조비천성을 깨뜨리고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신라가 또 병사를 이끌고 우리 땅 한수(漢水)를 핍박하였다. 그런 연유로 포로들을 돌려주었다.
≪견해≫ 신라사초와 백제왕기의 기년이 1년 차이가 있다. 아마도 백제왕기에서 잘못이 있는 듯 하다.

八月 興宣領 兵二萬分爲四軍 聲西擊 東而北上 上聞連獲大捷 親率精騎八千 直至漢水 將陷其京 田氏大懼 環其所掠一千口 而乞和 曰 “妾父吉宣得罪 已死 妾當更修貢職 世世爲臣妾” 上始知 仇知吉宣已死 乃許 古尸爲田氏繼夫 古尸乃與田氏渡江 而來降 上命行酒 欲携歸 興宣曰 “田氏非自過 不若他人 不如立之 而見信” 上然之 夫余群臣感恩 爭以酒食犒我軍
8월 흥선(興宣)을 우두머리로 하고 병사 2만을 나누어 4군으로 하였다. 서쪽으로 쳐들어간다고 소리 내고 동쪽에서 북으로 올라갔다. 왕이 연속으로 대첩(大捷)을 거두었다는 소리를 듣고 왕이 친히 정기(精騎) 8천을 이끌고 곧바로 한수(漢水)에 이르렀다. 장차 (부여의) 도읍이 함락하여 하였다. 전씨(田氏)가 크게 두려워하여 노략질한 1000명을 되돌려 주며 화친을 구걸하여 말하기를 “첩의 부친 길선(吉宣)이 죄를 지었으나 이미 죽었으며, 첩은 응당 공물을 바치는 직을 바꾸고 세세(世世, 대대)로 신첩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비로소 구지(仇知)와 길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고시(古尸)를 전씨의 계부(繼夫)로 허락하였다. 고시가 이에 전씨와 더불어 강을 건너와 항복을 하였다. 왕이 술자리를 열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전씨 스스로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 타인이 아니라면 왕으로 세워 믿음을 보임과 같이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리하였다. 부여의 군신(群臣)들이 은혜에 감사하며, 술과 음식으로 우리의 군사를 먹이기를 다투었다.

行盤山大師大祭 于軍中 諸軍見盤山大師 以玉鞭指路 我軍向之 則必勝 請奉爲軍神 許之
군중(軍中)에서 반산대사(盤山大師)에게 큰 제사를 지냈다. 모든 군대가 반산대사를 만나, (반산대사의) 옥편(玉鞭)이 가리키는 길로 우리의 군이 향하면 곧 반드시 승리하였다. 군신(軍神)으로 삼아 모시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十月 上還京都 獻俘于祖廟 仍幸松良宅 賜國良衣 國良上之外孫也 仙史作九月五日生 至是上始洗之 他作十三年九月 故兩示之也
10월 왕이 경도(京都)로 돌아와 조상이 사당에 되돌려 받은 포로를 바쳤다. 곧 송양(松良)의 집을 행차하여 국량(國良)에게 옷을 내렸다. 국량은 왕의 외손이다. 선사(仙史)에는 9월 5일생이라 하고 이때에 이르러 왕이 국량을 씻겨주었다고 한다. 다른 사서에는 13년 9월생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연유로 양쪽에서 보인다.
≪견해≫ 226년 9월 기사 참조

十二月 夫余入貢
12월 부여가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

上入海宅 命貝權爲稟主 號可氏爲祖主
왕이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명으로 패권(貝權)을 품주(稟主)로, 가씨(可氏)를 조주(祖主)라고 불렀다.
≪견해≫ 224년 12월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품주(稟主)란 직책은 왕명으로 출납을 담당하는 부서로, 이벌찬의 부인되는 여자가 맡아왔는데, 남자로 변화하는 과정의 기록을 보여준다.

十五年 四月 伊飡繼元卒 年五十三 元以君啓之子 有大樹之風 沈重有大度 上卽位之初 委以大政 其妻淡色馬公之女也 亦有寵於上 生上子淡君 賜宅 宮井外 輒以微服幸之 夜深而歸 以此淡色多用 繼元之臣 大政多決於其手 至是病卒 會葬者萬人 上命爵其子 賜淡色年穀
15년(A.D.227) 4월 이찬(伊飡) 계원(繼元)이 53세로 죽었다. (계)원은 군계(君啓)의 아들로 대수(大樹, 큰 나무 또는 사람이름)의 기질이 있었고, 다. 침중(沈重, 성질이 가라앉아 진득함)하고 대도(大度, 도량이 큼)가 있었다. 왕이 즉위 초에 나라의 큰일을 맡겼다. 그의 처 담색(淡色)은 마공(馬公)의 딸인데 역시 왕의 총애가 있었고, 왕의 아들 담군(淡君)을 낳았다. 궁정(宮井)의 바깥에 집을 내려주었는데, 번번이 미복(微服, 수수한 차림)으로 행차하였다가 밤이 깊어 돌아왔다. 이 때문에 담색을 자주 등용되었다. 계원의 아랫사람들이 대정(大政)은 계원의 손에서 결정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들어 죽었다.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왕의 명으로 그 아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담색에게는 해년마다 곡식을 내렸다.

超授興宣爲伊伐飡 彡亥稟主 板失祖主
(나이나 골품을 초월하여) 흥선(興宣)을 이벌찬으로 삼고, 삼해(彡亥)를 품주로, 판실(板失)을 조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15년 기사
15년 4월 이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八月 上幸猩公宅 享仙徒 問眞於公 公曰 “陛下自有眞 臣何敢言” 上曰 “朕多慾好色 寧有眞乎” 公曰 “普天之下 莫非聖有多慾好色 何妨之有” 上笑曰 “汝以朕爲天地間棄物乎” 公曰 “非徒陛下而已 聖賢亦一棄物而已 天地一棄庫而已 大元歸眞天地 何用” 上曰 “天地無用 爲何而苦 朕其行樂矣” 公曰 “臣聞 飽於樂則悲 飽於苦則樂 苦樂本不離 願陛下與斯民同甘苦” 上曰 “善” 仍加公年穀 命淡色爲公妻 淡色托福得娠 乃請于上故也
8월 왕이 성공(猩公, 지마와 달해의 아들)댁을 방문하여 선도(仙徒)에게 흠향하였다. (성)공에게 진(眞, 참, 변함이 없는 것)을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폐하 스스로 참됨이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호색(好色)하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데, 틀림없이 참됨이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공(公)이 말하기를 “보통 하늘아래에는 아닌 게 아니라(莫非) 성(聖)스러움에도 호색(好色)하고자 하는 욕심이 많으니, 어찌 거리낌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에게 짐은 천지(天地)간에 버려야 사람인 것이로구나.” 공이 말하기를 “선도가 아닌 무리들이 폐하에게 그럴 뿐입니다. 성현(聖賢) 또한 버려야 할 물건일 뿐이고, 천지는 하나의 버리는 창고 일뿐입니다. 대원(大元)은 진천지(眞天地)로 돌아가야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천지가 쓸모없으니 어찌하여 고통을 행하겠느냐. 짐은 그 즐거움을 행하겠다.”라고 말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臣)이 듣기에, 즐거움에 배부른 것이 슬픔이요. 괴로움에 배부른 것이 즐거움이라 하였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본래 분리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백성들과 잠깐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시길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에게 해마다 곡식을 더하여 주고, 담색(淡色)을 공의 처로 삼았다. 담색은 복(福, 상서로움)에 의지하여 임신하기를 원하여, 이에 왕에게 청한 까닭이다.
≪견해≫ 아달라이사금시기에 있었던 반역은 지마이사금의 후손을 옹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공(猩公) 또한 지마의 자손이므로 의중을 떠본 듯 하다.

十二月 上與內后 入海宅 貝權稟主 可氏祖主 命伐休監國政 于京都
12월 왕과 내후(內后)가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패권(貝權)을 품주, 가씨(可氏)를 조주로 하였다. 벌휴(伐休)에게 경도(京都)에서 국정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內后生女阿禮 于海宮 上洗之 后好淫 多引美少爲嬖臣 上不禁 夫余之役 上親征 后入吉公祠 托言祈禱 日與嬖臣四五人 縱淫爲樂 昌豆洪權天猩伊買繼忠等 最有寵 阿禮昌豆所烝而生也 皃甚美 上愛之 曰 “勝於吾出” 后怒 曰 “此女眞汝出 汝以我謂借外種乎” 上爲之謝罪二日 乃釋 或云 上洗阿禮 謂伐休 曰 “此女不肖于朕 ” 無乃 “汝女乎” 伐休恐后怒 而不敢奏昌豆之事 而奏 曰 “世多不肖之女 其孫則肖之 陛下何其急乎” 后恐孫不肖 强言肖之 問於諸臣 不敢違 乃責 伐休及上 二日不食 上亦不得食 抱后而慰之 約不復疑 而誓于神 云
내후(內后, 내례)가 해궁(海宮)에서 딸 아례(阿禮, 아소례의 어머니)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후는 음란함을 좋아하여 많은 미소년을 데리고 다니며 폐신(嬖臣, 귀인의 사랑을 받는 신하)으로 삼았다. 왕이 금하지 않았다. 부여와의 전쟁 시 왕이 친정하자, 후가 길공사(吉公祠)에 들어가 기도한다고 부탁하여 알리고, 하루는 폐신(嬖臣) 4~5인과 늘어지게 음란하며 즐겼다. 창두(昌豆), 홍권(洪權), 천성(天猩), 이매(伊買), 계충(繼忠) 등이 가장 총애가 있었다. 아례는 창두가 증(烝,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치붙음)하여 태어났다. 얼굴이 심히 아름다웠다. 왕이 사랑하며 말하기를 “나의 자식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후가 화내어 말하기를 “이 여자아이는 진짜 너의 자식이다. 너는 내가 바깥의 씨앗을 빌려왔다고 말하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왕이 이 때문에 이틀 동안 사과하여 풀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왕이 아례를 씻겼다고 한다. (왕이) 벌휴에게 까닭을 말하기를 “이 여자아이는 짐을 닮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벌휴가 아무 말이 없자 이에 “너의 딸인 게로구나”라고 하였다. 벌휴는 후가 화를 낼까 두려워하여 감히 창두의 일을 아뢰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뢰어 말하기를 “세상의 많은 딸들은 아비를 닮지 않습니다. 그 손자가 닮는 것입니다. 폐하는 무엇이 그리 급합니까.”라고 하였다. 후는 손자가 닮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억지로 닮았다고 말하며, 제신(諸臣, 모든 신하)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제신들이) 감히 거스리지 못하자, 벌휴와 왕을 책망하며 이틀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왕 역시 밥을 먹지 못하고 후를 안으며 위로하였다.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