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奈解紀(내해기) (A.D.257 - A.D.291:재위35년) - 해석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9.
帝卽位之日大雨 是年自正月至四月 不雨 故民皆歡慶
왕의 즉위(卽位)일에 큰 비가 내렸다. 이해에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백성들이 경사를 기뻐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머리기사 발췌
(중략) 是年自正月至四月 不雨 及王卽位之日 大雨 百姓歡慶
이 해에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가, 왕이 즉위하던 날 큰 비가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즐거워하며 경축하였다.

元年 正月 受朝 月宮
원년(A.D.257) 정월 월궁(月宮)에서 조회를 받았다.

奈音伊伐飡
내음(奈音, 아달라와 자황의 아들)을 이벌찬으로 하였다.

二年 正月 謁始祖廟
2년(A.D.258) 정월 시조묘(始祖廟)를 참배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년 기사
2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岳門伊伐飡 發仁稟主
악문(岳門)을 이벌찬, 발인(發仁)을 품주로 하였다.

三年 正月 受朝 南桃
3년(A.D.259)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黃長伊伐飡 柿姬稟主
황장(黃長)을 이벌찬, 시희(柿姬)를 품주로 하였다.

四月 壤井楊柳樹王 老臥多年 忽自起 皆稱其慶 乃行昔鄒只珍大祭
4월 양정(壤井)의 버드나무 수왕(樹王)이 늙어 오랫동안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저절로 일어났다. 모두 그 경사스러움을 칭송하여, 이에 석추(昔鄒)와 지진(只珍)의 큰 제사를 지냈다.

五月 西路大水 免其一年租調
5월 서로(西路)에 큰 비가 내려, 그 곳의 일년 동안의 세금을 조사하여 면제하였다.

七月 遣謁休 巡視撫恤
7월 알휴(謁休)를 보내어,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어루만지며 구휼하도록 하였다.

吉完伊伐飡
길완(吉完)을 이벌찬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년 기사
3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수재를 당한 주와 현에 1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
7월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四年 七月 夫余侵境
4년(A.D.260) 7월 부여(夫余)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4년 기사
4년 7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2. 백제본기 초고왕 34년 기사
34년 7월 지진이 일었다.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3. 남당유고 백제왕기 구수왕 6년 기사
六年 己卯 七月 地震 侵羅邊鄙
6년(A.D.259) 기묘 7월에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국경 마을을 침입하였다.
≪견해≫ 남당유고 신라사초와 백제왕기에 1년의 기년차이가 있다.

美羅生 河道女河羅
미라(美羅, 아달라와 미시의 딸)가 하도(河道)의 딸 하라(河羅)를 낳았다.

五年 七月 太白晝見 隕霜殺草 大師國良陳 王道十二條 上嘉納之 賜衣酒
5년(A.D.261) 7월 태백(太白, 금성)이 낮에 보였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대사 국량(國良)이 왕도12조(王道十二條)를 말하였다. 왕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국량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5년(A.D.200) 기사
5년 7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견해≫ 태백(太白, 금성)이 낮에 보인 천문현상이 신라사초(남당유고)와 신라본기(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어느 시기가 맞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角干南亥卒
각간 남해(南亥)가 죽었다.

九月 大閱於閼川
9월 알천(閼川)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美理神生 河道女河理
(가야) 미리신(美理神)이 하도(河道)의 딸 하리(河理)를 낳았다.

六年 二月 加耶請和 先是與夫余內應謀反 故將以大兵拔之 其君臣懼而服之
6년(A.D.262) 2월 가야(加耶)가 화친을 청하여 왔다. 예전에 부여(夫余)와 안으로 응하여 모반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대병(大兵)을 일으켜 치려고 하였다. 그 임금과 신하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6년 기사
6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해왔다.
         2. 남당유고 백제왕기 초고왕 28년 기사
二十八年 癸酉 三月 置狗原行宮 加耶女君 美理神王 遣使 獻絹及龍舟 請得王子爲婿 及弓矢槍刀 王命賜大刀七柄 槍五十而送之
28년(A.D.253) 계유 3월 구원(狗原, 관미성의 함락 시 진사왕이 도망간 곳)에 행궁(行宮, 임금이 나들이 할 때 머물던 별궁)을 두었다. 가야여군(加耶女君) 미리신(美理神)왕이 사신을 보내어 명주와 용주(龍舟, 임금이 타는 배)를 바치고 왕자를 얻어서 남편(婿, 또는 사위)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활과 화살, 창과 칼을 보내줌에 이르자, 왕이 큰 칼 7자루와 창 50개를 보냈다.
≪견해≫ 가야와 백제가 내응한 기록은 오직 백제왕기에만 나타난다. 포상8국의 란과도 연결된다.

三月 大旱 錄內外囚 放其輕罪
3월 크게 가물었다. 나라 안팎의 죄인을 조사(기록)하여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풀어주었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6년 기사
6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해왔다.
3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큰 가뭄이 들자,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였다.

淡王太子薨
담왕(淡王)태자가 죽었다.

七年 正月 玄公伊伐飡 世羊稟主
7년(A.D.263) 정월 현공(玄公)을 이벌찬, 세양(世羊)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內禮太后崩 春秋七十八
2월 내례(內禮)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78세였다.

七月 板興伊伐飡 國元稟主
7월 판흥(板興)을 이벌찬, 국원(國元)을 품주로 삼았다.

八年 正月 行靑神祭
8년(A.D.264) 정월 청신(靑神=甲申)제를 행하였다.

七月 夫余入寇 利音擊破之
7월 부여(夫余)의 도둑떼가 들어와, 이음(利音)이 격파(擊破)하였다.

十月 末曷入寇 萱堅擊退之
10월 말갈(末曷)의 도둑떼가 들어와, 훤견(萱堅)이 부딪쳐 물러나게 하였다.

桃李再華 忽宗伊伐飡 晉氏稟主
복숭아와 오얏(자두)꽃이 다시 호화로웠다. 홀종(忽宗)을 이벌찬, 진씨(晉氏)를 품주로 하였다.

國中行疫 禱于桃山
나라 안에 전염병이 돌아, 도산(桃山)에서 기도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8년 기사
8년 10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九年 二月 眞忠伊伐飡 發萱稟主
9년(A.D.265) 2월 진충(眞忠)을 이벌찬, 발훤(發萱, 아달라와 내례의 딸)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 2월 기사
10년 2월 진충을 일벌찬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시켰다.

九月 穀大登 行大場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年 三月 國良伊伐飡 雲童稟主
10년(A.D.266) 3월 국량(國良)을 이벌찬, 운동(雲童)을 품주로 하였다.

紫凰太后崩
자황(紫凰)태후가 죽었다.

七月 霜雹交下 南郊 公穀多被傷 尼今憂之 遣添公 祀郊梪及畯職 而歸
7월 남교(南郊)에서 서리와 우박이 번갈아 가며 내렸다. 나라 또는 관청에서 소유한 많은 곡식들이 상처를 입었다. 왕이 걱정하여 첨공(添公)을 보내어 교외 독두나무(梪)에서 준직(畯職, 농사를 담당하는 관리)과 제사지내고 돌아왔다.
≪비교≫ 독두나무(梪)가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알 수 없다. 독두(禿頭)가 대머리라는 뜻이 있으므로 늙어서 나뭇잎이 없는 나무를 일컫는 것으로 보이며, 자정(紫井)태자가 아마도 대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太史斗宣奏 太白犯月
태사(太史) 두선(斗宣)이 아뢰어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고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A.D.205) 7월 기사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고, 금성이 달을 범했다.
≪견해≫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범한 천문현상이 신라사초(남당유고)와 신라본기(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어느 시기가 맞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八月 弧鳴于金城梪壇 翌日又鳴于壤井廟庭 尼今歎曰 “寡人否德 奈何” 是日 紫井太子薨 黃雲覆天 人皆以爲昇天 仙術甚高故也
8월 여우가 금성(金城)의 독두나무 제단(壇)에서 울었다. 다음날 양정(壤井)의 사당의 뜰에서 또 울었다. 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덕이 없음이로다.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이날 자정(紫井, 일성과 자리의 아들)태자가 죽었다. 누런 구름이 하늘에 퍼졌다. 사람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며, 선술(仙術)이 심히 높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 8월 기사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利音請 加戍西路 許之
이음(利音)이 서로(西路)의 병사를 늘려주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十一年 三月 巡視 西路
11년(A.D.267) 3월 서로(西路)를 돌며 살펴보았다.

五月 夫余與浦上 通謀
5월 부여(夫余)와 포상(浦上)이 비밀리에 통하여 공모하였다.
≪견해≫ 1. 백제와 포상8국이 동맹을 맺음으로 인하여 급해 진 것은 대가야다. 당초에 가야제국이 백제와 동맹을 맺었는데, 우두머리격인 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여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포상8국은 나라의 이름이 아닌 연맹의 이름일 것이다. 삼국사기 물계자전에 의하면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의 이름이 등장하고, 고구려사초에는 사물(史勿), 초팔(草八), 골포(骨浦), 첨포(添浦), 가리(加利), 성산(星山) 등이라 한다.
         2. 백제와 가야 연합군이 공격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고, 개별적인 공격기록만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 백제와 가야 사이에는 신라의 영토가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十月 吉斗使加耶
10월 길두(吉斗)를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十二年 正月 利音伊伐飡兼視軍政
12년(A.D.268) 정월 이음(利音)을 이벌찬 겸 군정(軍政)을 살피는 일을 겸하도록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2년 기사
十二年 春正月 拜王子利音〈或云奈音〉爲伊伐飡兼知內外兵馬事
12년 정월 왕의 아들 이음〈혹은 내음〉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아달라이사금이 아들이 없어, 벌휴를 왕으로 세웠다고 하였고, 벌휴 또한 아들들이 일찍 죽어 손자인 내해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통설은 이음(利音)을 내해이사금의 아들로 본다. 내해가 벌휴의 손자로써, 장손인 조분보다 연장자여서 왕위를 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설명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준으로는 당시 이음의 나이가 10대를 벗어나기 힘들다. 특히 내해이사금 13년과 14년 기사는 10대의 어린아이가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삼국사기가 신라의 세계(世系)를 부정하는 것에서 나온 결과이다. 만약 이음의 나이를 상승시키게 되면 아버지라 믿고 있는 내해의 나이가 동반 상승하게 되고, 35년의 비교적 긴 재위기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내해의 비(妃)는 나이가 어려서 왕으로 세우지 못한 조분의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유교적 기반에서 손을 댄 사서임에 분명하다.

五月 述明使加耶
5월 술명(述明)을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十三年 二月 西巡一善沙伐至管城 撫慰將士 歷捺己召文 而還 凡十有七日
13년(A.D.269) 2월 서쪽으로 일선(一善)과 사벌(沙伐)을 돌아 관성(管城)에 이르러 장사(將士)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날기(捺己)에서 지내다가 소문(召文)을 거쳐 돌아왔다. 무릇 17일이었다.
≪견해≫ 포상과 공모한 백제를 경계하는 신라의 움직임이다.

立五太子祠 小光板公汗昔左玉紫井五仙也
다섯 태자의 사당을 세웠다. 소광(小光), 판공(板公), 한석(汗昔), 좌옥(左玉), 자정(紫井) 다섯 신선(五仙)이다.

四月 倭人犯境 利音率輕騎 擊退之
4월 왜인(倭人)이 경계를 넘어와, 이음(利音)이 경기(輕騎)를 이끌고 가 부딪혀 물러가게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3년 기사
13년 2월 왕이 서쪽의 군과 읍을 순찰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九月 加耶入朝 報河道新立 命美知往吊孝修
9월 가야(加耶)가 입조하여 하도(河道, 미리신의 아들)가 새로 왕이 되었음을 보고하였다. 미지(美知)에게 가서 효수(孝修)를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十四年 正月 行白虎祭
14년(A.D.270) 정월 백호제(白虎=庚寅)를 행하였다.

七月 加耶于考太子入 告浦上八國入侵 請求 乃命于考與利音將 六部兵往求之
7월 가야(加耶)왕자 우고(于考)태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포상8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입하였으니 구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우고와 이음(利音)을 장수로 하여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 기사
14년 7월 바닷가의 여덟 나라(浦上八國)가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견해≫ 가야왕자 우고(于考)가 내해의 아들 우로(于老)로 바뀌었다. 우로(于老)는 조분의 처인 아이혜의 오빠이고, 조분의 여동생인 홍모(紅帽)의 아들이다. 만약에 조분의 여동생이 내해 원년 이전에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면, 조분이 즉위하기에 어리다고 볼 수 없다.

八月 利音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群臣賀之 乃獻俘獲 于祖廟
8월 이음(利音)이 부딪쳐 8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군신(群臣)들이 치하하며, 포로들을 조상의 사당에 바쳤다.

河道以其女大理妻美知
(가야의) 하도(河道)가 그의 딸 대리(大理)를 미지(美知, 벌휴와 미시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十五年 四月 旱久 發使 錄囚 除二死餘皆放之
15년(A.D.271) 4월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다. 사신을 보내어,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죽을죄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는 풀어주었다.
≪견해≫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5년 기사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신을 보내 군읍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는 모두 석방하였다.

七月 述明伊伐飡 淵蓬稟主
7월 술명(述明)을 이벌찬, 연봉(淵蓬)을 품주로 하였다.

十六年 正月 連同伊飡 骨忠稟主
16년(A.D.272) 정월 연동(連同)을 이찬, 골충(骨忠)을 품주로 하였다.

萱堅伊飡 允宗一吉飡 白凰稟主
훤견(萱堅)을 이찬, 윤종(允宗)을 일길찬, 백황(白凰)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6년 기사
16년, 정월에 훤견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견해≫ 훤견(萱堅)을 이찬으로 임명한 기사는 7월의 기사인 듯.

十七年 三月 加耶王子來 質
17년(A.D.273) 3월 가야(加耶)왕자를 불러 인질로 삼았다.

五月 大雨 漂毁民屋
5월 큰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7년 기사
17년 3월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유실되었다.

大理生 美知子車理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아들 차리(車理)를 낳았다.

十八年 正月 牛芻伊伐飡〈南忠〉
18년(A.D.274) 정월 우추(牛芻)를 이벌찬, 〈남충(南忠)을 품주로 하였다.〉

骨正妻玉帽生 帝子沾解 帝洗之
골정(骨正)의 처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첨해(沾解)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비교≫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머리기사
沾解尼師今立 助賁王同母弟也
첨해이사금이 섰다. 그는 조분왕의 동복아우이다.
≪견해≫ 동모제(同母弟)라 함은 아버지와 같은 경우와 아버지와 다른 2가지의 경우가 있다. 삼국사기에 동모제(同母弟)라 한 분들은 백제 초고왕과 고이왕, 신라의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 미추이사금과 내물이사금의 부친인 말구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모두 아버지를 같은 것으로 보나 실제로는 아버지가 모두 다르다. 그렇게 판단하다 보니, 고이왕은 최소 120세까지 장수한 분이 되고, 내물이사금의 경우는 구도갈문왕의 2대손이 된다. 구도갈문왕의 후손인 조분이사금부터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세계(世系)를 분석해 보면 조분이사금은 구도의 2세손, 그 다음인 첨해이사금은 2세손, 그 다음인 미추이사금은 1세손, 그 다음인 유례이사금은 3세손, 그 다음인 기림이사금은 4세손, 그 다음인 흘해이사금은 4세손, 그 다음인 내물이사금은 2세손이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七月 以骨正女紅帽爲后
7월 골정(骨正)의 딸 홍모(洪帽)를 후(后)로 삼았다.

沙飡孫光隧吳人米會 入吳
사찬 손광(孫光)이 오나라 사람 미회(米會)를 따라서 오(吳)나라로 들어갔다.
≪견해≫ 1. 손광(孫光)이 손(孫)씨의 오(吳)나라와 성(姓)이 같아서 원래부터 중국사람 이었는지 혼란을 느꼈던 부분이다. 상장돈장 58페이지에 계보도를 참고하시고 대략적인 계보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벌도리(선도성모, 혁거세의 어머니를 말함, 괄호는 여자) - 적공(茂山) - 大樹(군문) - 군을(다리) - 군계(마발) - 계원(담색) - 진충(손씨) - 손광
삼국유사를 기준으로 하여 소벌도리를 기준으로 삼으면 손광은 정(鄭)씨가 되고, 무산(茂山) 대수(大樹)를 기준점으로 삼으면 손광은 손(孫)씨가 된다.
         2. 손광(孫光)이 오(吳)나라로 건너간 시기인 내해이사금의 재위기는 신라와 백제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제를 거쳐 남중국으로 건너갔을 리가 없고, 또한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으로 남중국인 오(吳)나라의 지역으로부터 많은 유민(流民)들이 월내(月奈)를 거쳐 신라로 유입된 것으로 신라사초에 기록하고 있으므로, 육지를 경유한 것이 아니라 해로(海路)로 왔음에 분명하다. 오(吳)나라로부터 우리에게로 물길이 닿는 지역은 전라남도 서남부 해안지역이 분명하고, 아마도 포상8국의 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가야로부터 취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十九年 三月 大風 折木
19년(A.D.275)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實理生 高知子宣知
실리(實理)가 고지(高知)의 아들 선지(宣知)를 낳았다.

七月 仙權伊伐飡 忽仁稟主
7월 선권(仙權)을 이벌찬, 홀인(忽仁)을 품주로 하였다.

扶余來功腰車城 殺城主薛夫 命利音率精兵六千 伐夫余 破沙峴城
부여(扶余)가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6천을 거느리고 가 부여를 쳐서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9년 기사
19년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7월 백제가 나라의 서쪽 요거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2. 백제본기 초고왕 39년 기사
39년 7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신라 왕 내해(奈解)가 노하여 이벌찬(伊伐) 이음(利音)을 장수로 하여 6부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였다.
         3. 남당유고 백제왕기 고이왕 11년 기사
十一年 甲午 七月 攻羅腰車城拔之 斬其城主 羅兵來侵沙峴城而退
九月 命北部眞菓 攻末曷 取石門
十月 末曷來侵述川 擊退之
太王崩於山宮 春秋六十一 太王鴻壯有神力 善射好騎馬 早有盛德之名 晩好神仙 土木沈於聲色 國人惜之
11년(A.D.274) 갑오 7월 신라 요거성(腰車城)을 빼앗고, 성주를 베었다. 신라의 병사가 사현성(沙峴城)을 침입하였으나 물러났다.
9월 북부의 진과(眞菓)에게 명하여 말갈을 공격하고 석문(石門)을 취하였다.
10월 말갈이 술천(述川)으로 침입하였으나 부딪쳐 물러나게 하였다.
태왕(太王, 초고왕)이 산궁(山宮)에서 죽었는데, 춘추 61세였다. 태왕은 체격이 크고 좋으며 뛰어난 힘이 있어, 활쏘기를 잘하고 말 타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성덕(盛德, 크고 훌륭한 덕)으로 이름이 있었다. 뒤늦게 신선을 좋아하여 음악과 여색(聲色)보다 토목(土木)에 빠져들었다. 나라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견해≫ 남당유고 274년 9월 10월 기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고왕 49년(사망한 해) 기사다.

河道獻 其女河羅
(가야) 하도(河道)가 그의 딸 하라(河羅)를 바쳤다.

十二月 雷震 行禱
12월 천둥번개가 쳐서 기도하였다.

二十年 正月 行火神祭
20년(A.D.276) 정월 화신제(火神=丙申)를 행하였다.

乾臣伊伐飡 陽元稟主
건신(乾臣)을 이벌찬, 양원(陽元)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加耶于考太子歸
7월 가야(加耶)의 우고(于考)태자가 돌아갔다.

大理生 美知女索理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딸 색리(索理)를 낳았다.

二十一年 正月 暖檍伊伐飡 連色稟主
21년(A.D.277) 정월 난억(暖檍)을 이벌찬, 연색(連色)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行射馬選科 于北川
3월 북천(北川)에서 궁병과 기병의 병과를 선택하였다.

玉帽生帝女乳帽 于宅 命骨正洗之
옥모(玉帽)가 왕의 딸 유모(乳帽)를 댁에서 낳았다. 골정(骨正)에게 아기를 씻기도록 명하였다.

紅后生于老太子
홍후(紅后)가 우노(于老)태자를 낳았다.

四月 行先今祭
4월 선금(先今, 벌휴)의 제사를 지냈다.
≪견해≫ 이매(伊買)를 갈문왕으로 추봉한 기록은 없다.

二十二年 正月 索孝伊伐飡 駿仁稟主
22년(A.D.278) 정월 색효(索孝)를 이벌찬, 준인(駿仁)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綠帽生 仇道子末昕
녹모(綠帽)가 구도(仇道)의 자 말흔(末昕, 내물의 祖父)을 낳았다.

二十三年 正月 汗忠伊伐飡 柿月稟主
23년(A.D.279) 정월 한충(汗忠)을 이벌찬, 시월(柿月)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武庫兵物自出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나왔다.

孫光還自吳
손광(孫光)이 오(吳)나라로부터 돌아왔다.

夫余來圍獐山城 上親擊破之
부여(夫余)가 쳐들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니, 왕이 친히 부딪쳐 깨뜨렸다.
≪비교≫ 1.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3년 기사
23년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밖으로 나왔다.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격퇴하였다.
         2. 백제본기 구수왕 5년 기사
5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였다. 신라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니 아군이 패배하였다.
         3. 백제왕기 고이왕 15년 기사
十五年 戊戌 七月 攻羅獐山城
15년(A.D.278) 무술 7월 신라 장산성(獐山城)을 공격하였다.

二十四年 正月 布喜伊伐飡〈板忠〉
24년(A.D.280) 정월 포희(布喜)를 이벌찬, 〈판충(板忠)을 품주로 하였다.〉

玉帽生 帝子仲解 帝洗之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중해(仲解)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七月 興失伊伐飡 亥文稟主
7월 흥실(興失)을 이벌찬, 해문(亥文)을 품주로 하였다.

河羅生 帝女守羅
하라(河羅)가 왕의 딸 수라(守羅)를 낳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二十五年 正月 行白牛祭
25년(A.D.281) 정월 백우제(白牛=辛丑)를 행하였다.

三月 旱
3월 가물었다.

發門伊伐飡 病免
발문(發門)이벌찬을 병으로 면직하였다.

六軍頭上利音薨
6군두상(六軍頭上) 이음(利音)이 죽었다.

忠萱伊伐飡兼執軍政 成氏稟主
충훤(忠萱)을 이벌찬 겸 군정(軍政)으로 처리하도록 하고, 성씨(成氏)를 품주로 하였다.
≪견해≫ 무관(武官)들이 나라의 정권을 잡은 시기라는 의미도 있다.

七月 大閱 陽山西
7월 양산(陽山)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5년 기사
25년 3월 이벌찬 이음이 사망하자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7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加耶女君美理神殂 命述明往吊之
가야여군(加耶女君) 미리신(美理神)이 죽었다. 술명(述明)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二十六年 七月 凉宮成
26년(A.D.282) 7월 양궁(凉宮)이 완공되었다.

虹公伊伐飡 臼燕稟主
홍공(虹公)을 이벌찬으로, 구연(臼燕)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거행하였다.

加耶河道殂 女河理立
가야(加耶)의 하도(河道)가 죽어 딸 하리(河理)가 섰다.

二十七年 四月 雹傷麥
27년(A.D.283) 4월 우박이 내려 보리가 상했다.

南新懸豪民諸馬武身死 體溫微歷月 其妻不忍葬之 抱而摩之 乃醒言 夢見陰司治獄之事 其設多符合 衆信奇之 稱諸先生 以車馬迎之 聽法
남신현(南新懸) 호민(豪民, 세력이 있고 재물이 넉넉한 백성) 제마무신(諸馬武身)이 죽었다. 몸이 체온이 미약하게 1달을 보냈다. 그의 처가 잔인하게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끌어안아 남편을 어루만졌는데, 이에 깨어나며 말하기를 꿈에 음사(陰司, 내력이 올바르지 않은 귀신을 모셔 놓은 집)와 치옥(治獄, 형률을 관장하는 자)의 일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설명 중에 많은 부분이 부합(符合, 틀림없이 꼭 맞음)하여 대중들이 그 기이함을 믿었다. 모두 선생(先生)이라 칭송하였다. 거마(車馬)를 보내어 맞이하고 법(法, 불가의 진리)을 청취하였다.

七月 添公伊伐飡 休介稟主
7월 첨공(添公)을 이벌찬, 휴개(休介)를 품주로 하였다.

十月 夫余入寇牛頭州 忠萱與賊戰 于熊谷 失利 命連珍代之 貶萱爲牛頭鎭主
10월 부여(夫余)가 우두주(牛頭州)를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충훤(忠萱)이 웅곡(熊谷)에서 적과 싸웠는데 손해를 보았다. 연진(連珍)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고, (충)훤을 낮추어 우두진주(牛頭鎭主)로 삼았다.

連珍大破夫余兵 獻俘
연진(連珍)이 부여(夫余)의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포로를 바쳤다.
≪비교≫ 1.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7년 기사
27년 4월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가 상했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 달에 다시 살아났다.
10월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 왔으므로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막으려 하였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 백제본기 구수왕 9년 기사
9년 2월에 담당 관청(有司)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에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6월에 서울(王都)에 물고기비가 내렸다.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두진(牛頭鎭)에 들어가 민호(民戶)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忠萱)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熊谷)에서 맞아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여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3. 남당유고 백제왕기 고이왕 19년 기사
十九年 壬寅 二月 修堤防 勸農事
六月 王都雨魚
太子責稽納帶方王女宝果
十月 攻羅牛頭鎭 抄掠民戶 羅將忠萱引五千兵 逆戰於熊谷 互有勝敗
19년(A.D.282) 임인 2월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6월 왕도(王都)에 물고기 비가 내렸다.
태자 책계(責稽)가 대방의 왕녀 보과(宝果)를 거두었다.
10월 신라의 우두진(牛頭鎭)을 공격하여 민호(民戶)를 노략질 하였다. 신라 장수 충헌(忠萱)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와서 웅곡(熊谷)에서 역전(逆戰, 공격을 받다가 역습하여 나아가 싸움)하였다. 상호간에 승패가 있었다.
≪견해≫ 남당유고 신라사초와 백제왕기 사이에 1년의 기년차이가 있다.

二十八年 正月 連珍伊伐飡兼知軍事 淡眞稟主
28년(A.D.284) 정월 연진(連珍)을 이벌찬 겸 지군사(知軍事)로 삼고, 담진(淡眞)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行壤井)를 행하였다.

加耶入朝
가야(加耶)가 입조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二十九年 正月 昔盧伊伐飡 江氏稟主
29년(A.D.285) 정월 석노(昔盧)를 이벌찬, 강씨(江氏)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骨井太子薨
3월 골정(骨井)태자가 죽었다.

七月 連珍大破夫余 於烽山下 殺獲一千餘級 請築城而防之 命康萱築烽山城
7월 연진(連珍)이 부여를 봉산(烽山) 아래에서 크게 깨뜨리고 1천여 명을 죽이고 수급을 얻었다. 성을 쌓아 방어하기를 청하여 강훤(康萱)에게 봉산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견해≫ 1.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9년 기사
29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전투를 하였다. 그는 봉산 아래에서 백제병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였다.
8월 봉산성을 쌓았다.
         2. 백제본기 구수왕 11년 기사
11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連珍)이 쳐들어 왔다. 우리 군사가 봉산(烽山) 아래에서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0월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3. 남당유고 백제왕기 고이왕 21년 기사
二十一年 甲辰 七月 新羅來侵 戰于烽山 不利 命太子責稽 盅內外軍事
21년(A.D.284) 갑진 7월 신라가 침입하여 봉산(烽山)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책계태자(責稽)에게 명하여 (봉산) 안팎의 군사를 비우도록 하였다.

螺碧伊伐飡 采氏稟主
나벽(螺碧)을 이벌찬, 채씨(采氏)를 품주로 하였다.

三十年 正月 淵于伊伐飡 馬淡稟主
30년(A.D.286) 정월 연우(淵于)를 이벌찬, 마담(馬淡)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閱馬 于桃山
4월 도산(桃山)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紅后生 帝女阿爾兮 有五色雲覆之
홍후(紅后)가 왕의 딸 아이혜(阿爾兮)를 낳았는데 오색구름이 감싸고 있었다.

九月 行一善大場
9월 일선(一善)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扶余君古尒殂 子責稽立
부여(扶余)의 왕 고이(古尒)가 죽어, 아들 책계(責稽)가 섰다.
≪비교≫ 1. 백제본기 고이왕 53년 기사와 책계왕 머리기사
五十三年 春正月 遣使新羅請和
冬十一月 王薨
53년(A.D286) 봄 정월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죽었다.
責稽王 或云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蛇城 備之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한다〉은 고이(古尒)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세가 영웅호걸이었다. 고이가 죽자 즉위 하였다. 왕은 장정(丁夫)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보다 앞서 왕은 대방왕녀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런 연유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다. 그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대방을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2. 남당유고 고이왕 23년 기사
二十三年 丙午 二月 麗伐帶方 帶方請救 王命太子救之 麗怨我 將欲侵邊 乃發丁夫 修葺慰禮城及阿旦城蛇城 而備之
十一月 王薨 太子責稽立 王以太王寵子 孝友愛民 夙興夜寐 勤儉下士 國家大治 而常憂外寇 未常晏居 而薨 春秋五十二 國人痛哀之.
23년(A.D.286) 병오 2월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명하여 대방을 구하였다. 고구려가 우리를 원망하여 장차 변경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이에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과 아단성(阿旦城, 백제본기에는 阿且城이라 하였다)과 사성(蛇城)을 지붕을 이어 수선하여 (침략에) 대비하였다.
11월 왕이 죽어 태자 책계(責稽)가 섰다. 왕은 태왕(太王, 초고왕)의 총애를 받은 아들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였다. 일찍 일어나 밤에 잠을 들었으며, 근검(勤儉,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아랫사람에게 보였으며, 나라가 대치(大治, 치안이 원만하게 이루어짐)하였으며, 항상 바깥의 도적들을 근심하여, 항상 편안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춘추 52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애통해 하였다.
≪견해≫ 남당유고 원문 신라사초 아달라기 235년 정월 기사에 고이(古尒)왕의 출생기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234년 5월 기사에 출생기사가 있다. 그리고 235년 정월 기사로 줄을 그어 연결해 놓았다. 백제왕기에는 235년 정월 기사가 있으므로, 기재하다 잘못이 있어 그어 놓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234년 5월 출생이 옳다면 고이왕은 285년에 사망한 것이 된다. 또 남당유고 신라사초와 백제왕기가 계속적으로 1년의 오차를 보인다. 1년이라는 오차를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중국25사 진서 동이전(晉書 東夷傳)에 285년 부여의 기록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비교≫ 진서 동이전 부여의 기록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 曰 “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 足以復國者 當爲之 方計 使得存立” 有司奏 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明年 夫餘後王依羅遣 詣龕〈依羅遣詣龕 御覽七八一引 遣下有使字〉 求率見 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遣 督郵賈沈以兵送之 〈督郵 周校 當照 慕容廆載記作督護 按 通鑑八一亦作 督護〉 廆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廆衆退 羅得復國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사마염, 265~290)때 빈번히 와서 조공(朝貢)을 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A.D.285)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깨뜨려졌는데, 부여(夫餘)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보전하였다. 무제(武帝)는 아래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부여왕은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켜왔으나,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됨을 당하였으니 심히 가엾게 여기노라. 만약 그의 남겨진 무리가 있어 족히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리하여 방법과 계책으로 나라를 존립을 얻을 수 있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보고하여 말하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회에 맞는 계책을 놓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였다.
이듬해(明年,A.D.286)에 부여(夫餘)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사신을 보내어 하감에게 이르렀다.〈依羅遣詣龕에, 어람(御覽) 권781을 인용하면 견(遣)자 아래에 사(使)자가 있다〉 우두머리를 불러 만나보니, 그 사람이 옛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여 이에 구원을 청한다고 하였다. (하)감이 (상급자에게 또는 왕에게) 줄지어 보냈다. 독우(督郵) 가침(賈沈)에게 병사를 보내도록 하였다. 〈독우(督郵, 지방관리 또는 감찰관)는 주교(周校, 주나라의 교위?)다. 이 부분을 대조해 보면 모용외재기(慕容廆載記)에는 도호(督護)로, 통감(通鑑) 권81 역시 도호(督護)라고 지었다.〉 (모용)외가 길목에서 기다리니,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렸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三十一年 正月 國興伊伐飡 白兮稟主
31년(A.D.287) 정월 국흥(國興)을 이벌찬, 백혜(白兮)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國良卒 孫光大日大師
2월 국량(國良)이 죽어, 손광(孫光)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하였다.

三月 旱不雨 行禱
3월 가물었으나 비가 오지 않아, 기도를 행하였다.

加耶女君河理禪 于其夫孝道
가야(加耶) 여군(女君) 하리(河理)가 남편 효도(孝道)에서 선위하였다.

六月 中外祈雨 行赤羊祭
6월 나라 안팎에서 비가 오기를 빌고, 적양제(赤羊=丁未)를 행하였다.

七月 汗達伊伐飡 黃珍稟主
7월 한달(汗達)을 이벌찬으로, 황진(黃珍)을 품주로 삼았다.

孫光祈雨 於陰山 七日 乃大雨
손광(孫光)이 음산(陰山)에서 7일 동안 기우제를 하였는데, 이에 큰 비가 왔다.

發倉廩 賑飢民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十月 放輕囚
10월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하였다.

命助賁太子 巡視州郡
조분(助賁)태자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펴보게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1년 기사
31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10월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하였다.

三十二年 正月 碧正伊伐飡 隆主稟主
32년(A.D.288) 정월 벽정(碧正, 벌휴의 손자)을 이벌찬, 융주(隆主)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巡狩西南郡邑 弘后助賁從之
2월 왕이 나라의 서남(西南, 혹은 서로와 남로)의 군읍(郡邑)을 살폈다. 홍후(弘后, 홍모)와 조분(助賁)이 따라갔다.

三月 還都
3월 도읍으로 돌아왔다.

七月 康萱伊伐飡 同忠稟主
7월 강훤(康萱)을 이벌찬, 동충(同忠)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2년 기사
32년 2월 왕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 강훤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三十三年 正月 行土鷄祭
33년(A.D.289) 정월 토계제(土鷄=己酉)를 행하였다.

七月 允宗伊伐飡 邊月稟主
7월 윤종(允宗)을 이벌찬, 변월(邊月)를 품주로 하였다.

三十四年 正月 元豆伊伐飡 昌兒稟主
34년(A.D.290) 정월 원두(元豆)를 이벌찬, 창아(昌兒)를 품주로 하였다.

命助賁太子 監國
조분(助賁)태자에게 나라를 살피도록(監國) 명하였다.

四月 蛇鳴 南庫三日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九月 地震
9월 지진이 있었다.

十月 大雪深五尺
10월 큰 눈이 내려 5자나 쌓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4년 기사
34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9월 지진이 있었다.
10월 눈이 크게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三十五年 正月 薛白伊伐飡 牛忠稟主
35년(A.D.291) 정월 설백(薛白)을 이벌찬, 우충(牛忠)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帝崩 紅后立母兄助賁太子 爲尼今 行祥登祚
3월 왕이 죽었다. 홍후(紅后)가 오빠 조분(助賁)태자를 세워 니금(尼今)으로 하였다.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5년 기사
35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견해≫ 1. 홍모(紅帽)는 어느 기사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따라 죽은 듯 하다. 또한 홍모(紅帽)이전에는 왕비가 나오지 않는데, 아마도 보황(宝凰, 아달라와 자황의 딸, 326년 8월 기사 참조)을 생각에 두었던 것 같다.
         2. 내해이사금기는 여타 신라사초의 기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내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 인물은 어떠했는지, 누구랑 절친했고 또 누구를 총애를 했으며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백제랑은 어떤 관계로 멀어졌는지, 고구려와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35년이라는 비교적 긴 재위기간과 포상8국을 난을 제압한 공로가 있음에도 주변 설명이 너무나 부족하다.
         3. 내해이사금 당시의 주변국가의 관계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가야제국과 백제가 동맹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백제와 길선의 반란의 사건이후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백제의 태후인 전씨가 지마계인데 비하여 신라는 일성계에서 석씨계열로 변화되어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추모경 후비열전 소서노열전에는 소서노와 고구려의 건국공신 협부와의 사이가 견원지간으로 나온다. 아마도 그 앙금이 계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도 보인다. 내해이사금이 즉위하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250년 8,9월 기사에 백제와 신라가 원산성에서 싸워 신라가 크게 패배하였다. 대가야가 백제에게 동맹을 맺는 기사가 백제왕기 초고왕28년(253년)기사에 나타난다. 대가야는 백제가 동맹을 맺음으로 인하여, 신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을 것이다. 262년 2월 신라가 병사를 일으켜 대가야를 치려하자 대가야가 화친을 청해온다. 이 때문에 대가야가 가야제국의 일원인 포상8국과 이해를 달리하여 내분이 생긴 듯 하다. 270년 7월 포상8국이 백제와 공모하여 대가야를 쳐들어가자 신라는 6부병을 일으켜 포상8국의 란을 진압한다.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을 살펴보면 포상8국의 난이 한 번의 전쟁에서 바로 진압된 것이 아니라 수년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게 포상8국과의 전쟁은 가볍게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가 치고받고 싸우면 가장 즐거운 나라는 고구려다. 백제와 신라는 후방인 고구려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고구려와 백제를 살펴보면, 238년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 시 백제는 낙랑의 변방을 쳐서 위(魏)의 후방을 교란시킨 공로가 있다. 토지공사에서 보관중인 팔면성에서 출토된 비문과 연결된다. 고구려는 먼저 백제에게 은의를 입은 바가 있어 백제의 뒷통수를 치기엔 미안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라와는 그렇지 않다. 당시 신라의 북변을 쳐서 자신들의 욕심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기사가 남당유고 고구려사초(략) 중천대제기에 있다. 당시 조분이사금이 죽고 첨해이사금의 모후(母后)인 옥모(玉帽)가 고구려에 입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옥모의 나이는 장남인 조분이 첨해에게 왕위를 물려준 시기이므로 70세 이상의 고령으로 판단되며, 중천제의 아들을 생산하기는 불가능한 시기이나, 옥모가 중천제의 아들을 낳은 것으로 기재하였다. 고구려사초(략)의 모두를 믿을 수 없으나 옥모가 고구려에 입조한 사실만은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포상8국과 대적하여 싸우기 위해 고구려에게 입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옥모는, 군권의 최고 책임자인 구도(仇道)의 딸이고, 태자인 조분(助賁)의 어머니의 신분을 겸하고 있으며, 내해와의 사이에 아들 첨해를 두었으니 이 정도로 볼모의 신분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작태자의 후손 석씨가 당시 왕이라는 조건도 있었다. 상장돈장에 은모와 패모라는 딸 이름도 보이나,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옥모를 대신하여 남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는 신라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을 둘 사이에 해결하라며, 관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85년 고구려가 대방을 친다고 하자, 대방은 초고왕의 동생 소(沼)의 아들 건(虔)이 다스리고 또한 백제와 인척(姻戚)관계임을 들어 불가론을 고구려에게 설명하나, 고구려가 들어주지 않게 된다. 결국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상태로 접어드는데 엉뚱하게도 제3자인 모용외가 그 틈바구니를 타고 백제를 기습해 오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게 군사를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상대적인 약자인 신라는 고구려와 협의하라 했을 것이고, 고구려는 대방을 내놓으라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서로 눈치를 보느라 군사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참다못한 백제는 제3자인 서진(西晉)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청계왕이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기는 하였으나 아버지인 고이왕의 시기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상황도 예전과는 같지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백제왕기 청계왕 이후가 자세하지 않아 살필 수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이왕 말년에 고구려와 대치상황에서 준비작업으로만 끝이 나고, 고구려가 실제로 쳐들어왔는지, 위협만 하다 그냥 돌아갔는지, 누가 승리를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김영채 (2009-02-15 21:07:13)  
(1) 3년 정월기사 : 3년(A.D.259)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 3년(A.D.259) 정월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2) 32년 2월기사 : 弘后助賁從之 -> 紅后助賁從之, 해석: 홍후(弘后, 홍모)와 조분(助賁)이 따라갔다. -> 홍후(紅后, 홍모)와 조분(助賁)이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