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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元史列傳] 원말元末, 홍건적을 토벌한 명장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 역신이 되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 : 몽골어로 베이르 티무르(Бээр Төмөр) 또는 베이르어 티무르(Бээру Төмөр)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 한자의 우리말 음은 패라첩목아

원사열전의 역신 베이르티무르를 번역하면서 몽골제국은 말기의 세기적 전염병과 자연재해와 혼란스런 치세에도 불구하고 홍건적의 봉기로 멸망했다기보다는 군벌간의 내전으로 군사력을 거의 소모하여 스스로 붕괴되었다 보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보면, 원말元末, 혼란스런 세상을 기반으로 봉기한 홍건적을 토벌하여 연승하면서 가장 이름을 떨친 명장名將이었지만 조정내부의 권력을 잡고있던 기황후가 미는 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Ayushiridara)를 따르는 무리와 황제를 따르는 세력간의 권력다툼이 확대되어 몽골제국 내부의 군벌세력간의 알력과 연계되면서 그와 원한을 갖고있던 다른 명장인 차칸티무르察罕帖木兒(Chaqan Timur)의 모함으로 군권을 상실하고 제거당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분개하여 군사를 일으켜 경사京師를 점령하여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여 복권을 받으며 이에 기뻐하며 대동大同으로 돌아갔지만 태자 아유시리다라Ayushiridara의 원한만 더 사게 되었습니다.

태자는 차칸티무르Chaqan Timur의 아들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를 불러서 대동大同을 토벌하고자 하였고 이에 분노한 베이르 티무르(Бээр Төмөр)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경사京師를 점령하였으나 황제의 밀지를 받은 부하들에 의해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며 역사에 역신이라는 오명만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원사 열전의 내용을 따라가 보면 결함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군사를 일으켜 도성을 점령했음에도 칸을 폐위하거나 태자를 몰아내지 않았고 복권하여 승차하자 의외로 깨끗이 물러나 도성에서 대동大同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 야망이 있어서 역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차칸티무르와 다른 신료들의 무고와 자신의 몰락위기에 단순히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순한 역신으로만 보기에는 그와 차칸티무르察罕帖木兒가문간의 쟁탈이 대원제국의 몰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원인중 하나임을 고려할때 너무 단면적인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와 차칸티무르察罕帖木兒가문간의 쟁탈은 결국 원말의 혼란속에서도  홍건적의 대군을 궤멸시킬 정도로 막강하였던 제국의 군사력 붕괴와 몽골제국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는데 명장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를 잃고 남은 용장勇壯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도 결국 조정에서 몰락하면서 몽골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열전의 언급된 시기는 홍건적이 고려를 1차 2차에 걸쳐 침입한 시점이고 고려가 군사를 보내어 홍건적 토벌을 도운 때이므로 고려역사를 보는 데에도 작으나마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풀이에 있어 부족한 점이 많고 불민하여  혹여 틀리거나 상이한 점들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정해야 할 부분이나 보완할 부분이 있으면 추후 더 보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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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校本元史 / 列傳 / 卷二百七 列傳第九十四 / 역신逆臣 /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는 다쉬팔도로答失八都魯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따라 적도賊盜-홍건적紅巾軍들을 토벌하여 전공戰功을 여러번 세워 그에 대해 말하길 아버지를 빼어닮았다 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는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정형구井陘口에 머물렀다.
지정至正 18년(1358년) 정월에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를 하남행성평장정사河南行省平章政事로 명하고 거듭하여 그 아버지가 원元에서 맡아던 제군諸軍을 모두 거느려 통솔하도록 하였다.
[四] 지정至正 18년 정월, 도광본보道光本補 본서本書 권卷 45를 상고하여 따르면 순제順帝紀 지정至正 18년 정월正月 조條에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를 하남행성평장정사河南行省平章政事로 삼았다」는 명命이 있다.

孛羅帖木兒,答失八都魯之子也.從父討賊,屢立戰功,其語見父傳.父既歿,孛羅帖木兒引兵退駐井陘口.至正十八年正月[四],命孛羅帖木兒為河南行省平章政事,仍總領其父元管諸軍.

[四] 至正十八年正月 從道光本補.按本書卷四五順帝紀至正十八年正月條有命「孛羅帖木兒為河南行省平章政事」.

☞ 티무르帖木兒 : 티무르帖木兒는 티무르제국을 세운 칸의 이름으로도 유명하지만 기본적으로 몽골제국을 세운 몽골인들사이에서 상당히 많이 사용되어진 이름으로 원사나 몽골사를 찾아보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름이다.
몽골어로 『투무르Төмөр』이며 차가타이어察合臺語와 우즈벡어O'zbekcha로  『Temur/Timur/Taimur/Tamerlane』로 불리며 그 의미는 모두 ‘철鐵’이다.
[참조: 위키피디아 몽골사이트(국가항목 Монгол)에서 Төмөр로 확인할 수 있다.]
영어로도 『Timur/Tamerlane』로 같고 터어키어로도 『Timur』이고 몽골어를 음차한 차이나 병음발음으로는 『띠에무어Tiěmùr帖木兒』가 되며 한자의 한글음은 『첩목아帖木兒』가 된다.   정확히는 『투무르Төмөр』라 불러야 맞다.



3월, 류복통劉福通-원말元末 홍건적紅巾軍 수령首領-과 위휘衛輝에서 격파하여 그를 패주시켰고 진군하여 복주濮州에서 승리하였다.
4월, 진정真定에 군사를 주둔하였다.  6월, 무안武安으로터 팽성彭城을 꾀하여 사류沙劉등을 맞이하여 길을 끊고 그들을 격파하였다.
9월, 제군을 통솔하여 령을 내려 조주曹州를 협공夾攻하도록 명하였다.
10월, 참정參政 광복匡福을 보내어 묘군苗軍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는 북문北門으로 들어가면서 4문四門에서 아울러 진군하여 함락시키고 조주曹州를 다시 회복하였다.  관무재상官武宰相을 사칭하던 자들을 포로로 사로잡거나 죽였으며 지원知院-군정장관軍政掌管-을 처형하고 거짓 인신印信, 금패金牌등의 물건을 압수하였다.

三月,擊劉福通於衛輝,走之,進克濮州.四月,屯兵真定.六月,自武安由彭城邀截沙劉等,敗之.九月,命統領諸軍夾攻曹州.十月,遣參政匡福統苗軍自西門入,孛羅帖木兒自北門入,四門並進,克復曹州,擒殺偽官武宰相、仇知院,獲偽印信金牌等物.

☞ 류복통劉福通(1321—1365)
영주潁州사람으로 원말元末 홍건적紅巾軍 수령首領으로 지정至正 11년(1351年) 5월,한산동韓山童이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고  한족漢族이 반란을 일으킬때 함께 주동이 되었다.
지정至正 15년(1355년), 한산동韓山童의 아들 한림아韓林兒가 제帝를 자칭하여 소명왕小明王이라 하고 박주亳州를 도성으로 대송大宋이라 할때 평장平章、승상丞相등을 역임하며 송宋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원元  조정朝廷에서 군사를 보내어 박주亳州를 함락하여 반란을 진압하자 패하여 달아나서 안풍安豐(安徽)을 도성으로 하였다.
이후, 새로이 군사를 삼로三路로 나누어 섬서陝西、산동山東、하남河南、산서山西、하북河北등을 공략하여 한때는 대도大都인근의 유림柳林에까지 이르렀다.
지정至正 18년(1358년),류복통劉福通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변량汴梁을 점령하고 새 도성으로 하였으나 이듬해인 19년,원元의 토벌군이 변량汴梁을 공략하여 깨뜨리자 안풍安豐으로 물러났고 이로부터 삼로의 홍건적紅巾軍들은 제각기 나뉘어 독자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러 상호대립하기에 이르른다.
지정至正 23년(1363년),장사성군張士誠軍이 안풍安豐을 공략하여 포위하자,한림아韓林兒와 더불어 저주滁州(安徽)로 가서 주원장朱元璋에게 의탁하였고 후에 주원장朱元璋의 명命에 따라 그 부장에게 피살되어 익사溺死하여 호령하던 파란마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지정至正 19년(1359년) 2월 대주代州를 지나서 장수 맹본주孟本周(?)의 제군諸軍을 무너뜨려 산동山東을 거두었다.  3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에게 군사를 옮기어 대동大同에 이르도록 하여 대도독병농사大都督兵農司를 맡기어 스스로 둔을 치고 파종播種하며 살피도록 하고 이를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통솔하도록 조서가  내려졌다.  
당월當月, 풍주豐州、운내雲內의 군사에 령領을 내려 관선생關先生과 더불어 싸웠는데 관군關軍-관선생의 홍건적-이 무너져 패주하였다.
이때, 양성楊誠이란 자가 있어 울주蔚州에 웅거하고 있었다.
6월, 평장平章 월로부카月魯不花와 추밀동지樞密同知 팔라화자八剌火者를 보내어 조서를 내리기를 군사들을 감독하고 양성楊誠을 사로잡으라고 하였다. 7월에 그 성城을 포위하였다.
갑자기 조서를 내려 군사를 회군하도록 명하였다.
11월, 재차 명이 내려와 초포勦捕-죽이거나 사로잡는 것-하라고 하였다.

十九二月,過代州,收山東潰將孟本周諸軍.三月,詔孛羅帖木兒移兵至大同,置大都督兵農司,專督屯,以孛羅帖木兒領之.當月領兵豐州、雲內,與關先生戰,關軍奔潰.時有楊誠者,據蔚州,六月,詔遣平章月魯不花、樞密同知八剌火者,督兵捕之,七月,圍其城.俄有旨,命回兵.十一月,再命勦捕.

☞ 1차 홍건적(紅巾賊) 침입: 1359년 12월~1360년 2월 모거경毛巨敬휘하의 홍건적 4만명의 고려침입, 서경西京까지 함락되었으나 안우,이방실,최영 휘하의 고려군에 패주.




지정至正 20년(1360년) 정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양성楊誠을 추격하여 비상현飛狐縣 동관東關에 이르자 성誠이 군사들을 버리고 달아나서 그 군사들이 무너져 항복하므로 회군하여 대동大同에 머물렀다.
2월,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로 임명되었다.  3월, 상도上都의 정사충程思忠을 토벌을 명받아서 군사가 흥화興和에 이르니 사충思忠이 무너져 패주하였다.
7월, 전풍田豐을 공격하는 것으로 꾸며서 대주臺州에 있는 장수 왕사성王士誠을 속이었다.
8월, 석령관石嶺關이북을 지키도록 명을 받았고 차칸티무르察罕帖木兒는 석관령石嶺關이남을 방어하였다.
9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는 기녕冀寧을 손에 넣기를 원하여 석령관石嶺關으로부터 군사를 보내 곧바로 재촉하여 그성을 포위하였으나 3일만에 다시 물러나 퇴각하여 교성에 둔병屯兵하였다.

二十年正月,孛羅帖木兒追誠至飛狐縣東關,誠棄軍遁,降其潰卒,回駐大同。二月,除中書平章政事。三月,命討上都程思忠,兵次興和,思忠奔潰。七月,擊敗田豐偽將王士誠於台州。詔總領一應達達、漢人諸軍,便宜行事。八月,命守石嶺關以北,察罕帖木兒守石嶺關以南。
九月,孛羅帖木兒欲得冀寧,遣兵自石嶺關直趨圍其城,三日,復退屯交城。



10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기녕冀寧을 수비하도록 조서를 받자 보보保保、은흥조殷興祖、고탈高脫에게 배도倍道-이틀길을 하루에 걸음-로 그 곳으로 달려가서 수비하는 자가 넘기지 않도록 하였다.  차칸티무르察罕帖木兒는 쇄주鎖住를 보내어 바로 장악하여 늘어놓으니 병사들이 와서 다툼이 일어나므로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의 부장 탈렬백脫列伯이 싸웠으나 그에게 패배하였다.

十月,詔孛羅帖木兒守冀寧,遣保保、殷興祖、高脫因倍道趨之,守者不納.察罕帖木兒遣鎖住、陳秉直以兵來爭,孛羅帖木兒部將脫列伯戰敗之.[五]
二十年正月,孛羅帖木兒追誠至飛狐縣東關,誠棄軍遁,降其潰卒,回駐大同.二月,除中書平章政事.三月,命討上都程思忠,兵次興和,思忠奔潰.七月,擊銑田豐僞將王士誠於臺州.詔總領一應達達、漢人諸軍,便宜行事.八月,命守石嶺關以北,察罕帖木兒守石嶺關以南.九月,孛羅帖木兒欲得冀寧,遣兵自石嶺關直趨圍其城,三日,復退屯交城.
[五] 孛羅帖木兒部將脫列伯戰敗之 按本書卷四五順帝紀至正二十年十月己亥條有「與孛羅帖木兒部將脫列伯戰,敗之」,疑此處脫「與」字.

☞ 정사충程思忠 : 원말元末 요동遼東 각지各地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뇌티무르부카雷帖木兒不花와 함께 영평永平등을 함몰시키고 상도上都를 공략하였으나 곧 토벌되었다.
☞ 왕사성王士誠 : 원말元末 홍건적紅巾軍의 장령將領으로 류복통劉福通의 부장部將. 지정지정至正 17年(1357년) 여름,관선생關先生을 따라 북벌北伐을 나서 산동山東으로 들어가 모귀毛貴와 더불어 회합해 군사를 합하였다. 다음해(1358년),익도益都로부터 회경懷慶을 공격하고  한때는 진녕晉寧(山西)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이후 전풍田豐과 더불어 연합하여 곧 태주台州(山西)에 나아가 이르렀다. 지정至正 20年(1360년),산동山東으로 돌아와 소지왕掃地王이라 칭하였다. 지정至正 21年(公元1361年),전풍田豐과 같이 원元 장군인 차칸첩기察罕帖機에 항복하였으나 이듬해,전풍田豐과 같이 차칸察罕의 칼에 죽으며 익도성益都城은 파괴된다.
☞ 모귀毛貴 : 원말元末 홍건적紅巾軍 류복통劉福通의 부장部將으로 원래 조군용趙君用의 부장部將이었으나 회북淮北에서 싸우다 산동山東으로 들어왔다.




지정至正 21年(1361년) 정월, 평장平章 다쉬티무르答失帖木兒와 참정參政 70명이 가서 그를 타일러 화해시키도록 명하였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군사들을 물러나게 하여 진鎭으로 돌아갔다.
9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에게 보정이동保定印과 하간이남河間以南에서 둔전屯田하도록 명하였다.

二十一年正月,命平章答失帖木兒、參政七十往諭解之,孛羅帖木兒罷兵還鎭.九月,命孛羅帖木兒於保定印、河間以南屯田.

☞ 2차 홍건적(紅巾賊) 침입 : 1361년 11월~1362년 1월사이에 반성潘誠, 관선생關先生, 사류沙劉, 파두반破頭潘 휘하 홍건적 10만~20만명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開京까지 함락되었다가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휘하의 고려군 20만에 패주하여 거의 전멸함.




지정至正 22年(1362년) 2월,평장平章 좌이左李가 양영조楊榮祖를 보내어 대동大同에 이르러 항복하겠다고 속이었다.
3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예수부카也速不花등에 군사 오만을 구하여 대동大同을 지키었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태위太尉, 중서평장中書平章으로 승차하여 제일공로를 차지하여 자리잡았다. 장량필張良弼이 오자 절제있게 받아들였는데 이사제李思齊가 군사를 무공武功으로 보내어 량필良弼을 공격하자 량필良弼의 복병이 이를 대파하였다.

二十二年二月,偽平章左李遣楊榮祖至大同降.三月,孛羅帖木兒遣裨將也速不花等招兵五萬,戍大同.陞孛羅帖木兒太尉、中書平章,位居第一.張良弼來受節制,李思齊遣兵攻良弼于武功,良弼伏兵大破之.

☞ 이사제李思齊 : 처음에는 차칸티무르察罕鐵木兒의 무장武裝이었는데 홍건적紅巾軍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군사를 거느리고 섬서임서등지행중성평장정사陝西,任陝性地行中書省平章政事가 되었고 원元의 제장諸將이 상쟁相爭하여 싸우며 혼란해지자 명明 홍무洪武 2年1369년)명에 항복하였다.



지정至正 23年(1363년) 10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다시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가 지키는 땅을 남으로 침범하여 진정真定에 이르러 웅거하였다.
시초에, 조정朝廷이 먼저 어사대부御史大夫 로적사老的沙를 몰아내 동승주東勝州에 안치하고 별도로 환관宦官을 보내어 베이르티무르密諭孛羅帖木兒를 가만히 타이르도록 하고 군중軍中에 머무르며 령令을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황태자皇太子는 관리를 보내어 그를 찾아 묶도록 하였으나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는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二十三年十月,孛羅帖木兒復南侵擴廓帖木兒所守地,遂據真定.初,朝廷既黜御史大夫老的沙,安置東勝州,帝別遣宦官密諭孛羅帖木兒,令留軍中.而皇太子累遣官索之,孛羅帖木兒匿不發.



지정至正 24年(1364년) 정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몰래 사람을 시키어 그의 숙부叔父 좌승左丞과 한갖 젖먹이인 부카不花를 죽이고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며 가서 조문하였으나 곡哭은 하지 않았다. 조정朝廷이 그 발호跋扈를 알고 또한 노적사老的沙의 일을 숨기었다.
3월 신묘辛卯일,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를 병권兵權에서 파면하고 사천四川에 안치安置하는 조서를 내렸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사신을 죽이고 명命을 거부하고 부장部將을 보내어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와 회합하여 군사를 이끌고 범궐犯闕하였다. 양언揚言이 우승상右丞相 삭사감搠思監과 자정원사資正院使 박부카朴不花 2인人을 찾아내었다.
이에 앞서, 조정朝廷은 둔전屯田하며 시위하게 하고 일찍이 중서우승中書右丞 에센부카也先不花가 이끌고 감독하도록 명하였고 더불어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와 원지院地를 나누어 서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 가까이 있음으로 어지러워짐에 이르자 혐극嫌隙이 형성되었다.
에센부카也先不花는 이에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를 참소하여 조정朝政에서 꾸짖고 비방하였기 때문에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와 더불어 독견티무르禿堅tūjiān帖木兒는 서로 우호하며 친하게 지냈다.  
또한, 그 무고한 것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그가 깨끗하며 죄가 없다고 하였다.
황태자皇太子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병권을 쥐고 발호하자 이때 이에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와 교통하고 불궤지신不軌之臣의 사특함을 용서한다하면서 승상丞相 삭사감搠思監과 논의를 마치고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의 관직을 삭탈하는 조서를 청하여 그 군사를 나누어 사천성四川省 승상丞相 차칸부카察罕不花에게 내려주어 그들을 거느리도록 하였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제의帝意가 아니라고 이르며 명을 받지 않고 군사를 들어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를 구원하였다.

二十四年正月,孛羅帖木兒陰使人殺其叔父左丞亦只兒不花,佯爲不知,往弔不哭.朝廷知其跋扈,又以匿老的沙事,三月辛卯,詔罷孛羅帖木兒兵權,四川安置.孛羅帖木兒殺使者拒命,遣部將會禿堅帖木兒提兵犯闕,揚言索右丞相搠思監、資正院使朴不花二人.
先是,朝廷立衛屯田,嘗命中書右丞也先不花提督,與禿堅帖木兒分院之地相近,因擾及其親里,搆成嫌隙,也先不花乃譖禿堅帖木兒詆毀朝政,孛羅帖木兒與禿堅帖木兒相友善,且知其誣,遣人白其非罪.皇太子以孛羅帖木兒握兵跋扈,今乃與禿堅帖木兒交通,又匿不軌之臣,遂與丞相搠思監議,請詔削其官,分其兵授四川省丞相察罕不花領之.孛羅帖木兒謂非帝意,故不聽命,舉兵助禿堅帖木兒.



4월 임인壬寅일, 거용居庸으로 입성하였다.
을사乙巳일에는 청하清河의 열영列營에 이르러 범궐犯闕하려 하였다.
제帝가 달달국사達達國師를 보내어 만자원蠻子院에게 가서 묻도록 하였던 고로 이에 삭사감搠思監은 영북嶺北으로 가서 숨고 박부카朴不花는 감숙甘肅으로 가서 숨으라고 명命하고 재화를 가져가도록 함께 보내었다.
경술庚戌일,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가 스스로 건덕문健德門으로 들어와 제帝를 연춘각延春閣에서 뵈고 서럽게 통곡하며 죄罪를 청하였다.  
제帝가 잔치를 베풀며 권하여 위로하며 그 죄를 사면赦免한다고 조서詔書를 내렸다.
거듭하여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를 태보太保、중서평장겸지추밀원사中書平章兼知樞密院事로  삼고 대동大同을 수어守禦하도록 하고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를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로 삼았다.
신해辛亥일,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대동大同으로 돌아가자 황태자皇太子-기황후奇皇后의  子-가 성내고 노하기를 그만두지 못하였고 다시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의 군사를 불러서 경사京師를 가로막아 보호하였다.

四月壬寅,入居庸,乙巳,至清河列營,將犯闕.帝遣達達國師、蠻子院使往問故,乃命屏搠思監于嶺北,竄朴不花于甘肅,實執送與之.庚戌,禿堅帖木兒自健德門入,見帝延春閣,慟哭請罪,帝賜宴慰勉,詔赦其罪.仍以孛羅帖木兒爲太保、中書平章,兼知樞密院事,守禦大同;苡堅帖木兒為中書平章政事.辛亥,孛羅帖木兒還大同,皇太子恚怒不已,再徵擴廓帖木兒兵,保障京師.



5월, 조서詔書를 내려서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를 총병總兵으로 하여 제도諸道의 군사를 나누어 대동大同을 토벌할 것을 조서調書하였다.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가 그 부친 차칸티무르察罕帖木兒가 있던 시절부터 해마다 계속 서로 원망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조정이 누차례 화해하여 화답하며 일하도록 명을 내려서 양측의 군대軍隊가 그치고 병사를 돌려보내 각각 각지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가 이에 크게 군사를 파견하여 제도諸道가 대동大同을 협공하였고 휘하의 쇄주鎖住로 경사京師를 수어守護하도록 조서調書를 주었으나 군사가 매우 가득차지는 아니하였다. 그 부部의 아래 청군青軍 양동첨楊同僉에게 거용居庸을 수비하도록 하고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는 스스로 인솔하여 태원太原에 이르러 제군諸軍을 거두어 통솔하였다.

五月,詔擴廓帖木兒總兵,調諸道軍分討大同.擴廓帖木兒自其父察罕帖木兒在時,與孛羅帖木兒連年相仇殺,朝廷累命官講和,二軍已還兵,各守其地.至是,擴廓帖木兒乃大發兵,諸道夾攻大同,調麾下鎖住守護京師,兵不滿萬,以其部下青軍楊同僉守居庸,擴廓帖木兒自將至太原,調督諸軍.



7월,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군사를 이끌고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 노적사老的沙등과 더불어 다시 범궐犯闕하여 경사京師가 진동하여 벌벌떨었다.
병술丙戌일, 황태자皇太子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청하清河에서 맞이하고 승상丞相 예수也速과 첨사詹事 불란해不蘭奚의 군사는 창평昌平에서 맞이하였는데 예수也速의 군사軍士는 투지鬥志가 없었으므로 청군青軍 양동첨楊同僉이 거용居庸에서 죽음을 당하자 불란해不蘭奚는 전장에서 패주敗走하여 달아나고 황태자皇太子 역시 달아나 성城으로 들어갔다.
정해丁亥일 밤夜에 쇄주鎖住가 동궁관료東宮官僚를 질책하고 태자太子를 따라서 궁宮을 나와 태원太原으로 달아났다.
무자戊子일,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의 군사가 이르러 건덕문健德門 밖에 머무르며 황태자皇太子를 쫓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노적사老的沙가 힘써 멈추게 하였다.
3인이 들어가 제帝를 선문각宣文閣에서 뵈고 울면서 절을 올리며 원통함을 하소연하여 제帝가 또한 눈물을 보이며 이에 잔치를 베풀었다.
경인庚寅일,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를 태보太保、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으로 노적사老的沙를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로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명命하였으므로 이를 따랐다.
부部에 속한 장사將士들을 대성臺省위에 늘어 벌여놓았으니 나라의 권세를 모두 취하였다.

七月,孛羅帖木兒率兵,與禿堅帖木兒、老的沙等復犯闕,京師震駭.丙戌,皇太子親統兵迎於清河,丞相也速、詹事不蘭奚軍於昌平,也速軍士無鬥志,青軍楊同僉被殺於居庸,不蘭奚戰敗走,皇太子亦馳入城.丁亥夜,鎖住脅東宮官僚從太子出奔太原.
戊子,孛羅帖木兒兵至,駐健德門外,欲追襲皇太子,老的沙力止之.三人入見帝宣文閣,泣拜訴冤,帝亦為之泣,乃賜宴.庚寅,就命孛羅帖木兒太保、中書左丞相,老的沙中書平章政事,禿堅帖木兒御史大夫.部屬將士,布列臺省,總攬國柄.



8월, 임인壬寅일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에게 관직을 더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상주국上柱國、록군국중사錄軍國重事、태보太保、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으로 삼는 조서를 내리고 천하의 군마를 절제하도록 하였다.
수일간에,압신狎臣 독로티무르禿魯帖木兒, 파적왜아마波迪哇兒禡등을 주살하였다.
삼궁三宮을 세우 짓는 것은 급하지 않으므로 그만두게 하였고 환관宦官을 선별하여 가려뽑도록 하고 대궐省의 전량錢糧을 줄이고,서번西番 승인僧人이 불사佛事하는 것을 금하였다.
황태자皇太子를 청하여 조정에 돌아오도록 수차례 사신을 청하였으나 사신들이 태원太原에 이르면 구류拘留하고 답하지 않았다.

八月壬寅,詔加孛羅帖木兒開府儀同三司、上柱國、錄軍國重事、太保、中書右丞相,節制天下軍馬[六].數月間,誅狎臣禿魯帖木兒、波迪哇兒榪等,罷三宮不急造作,沙汰宦官,減省錢
糧,禁西番僧人佛事。數遣使請皇太子還朝,使至太原,拘留不報。



지정至正 25年(1365년), 황태자皇太子가 외지에 있으며 주야로 내란內難이 일으키어 숙청코자하여, 조서詔書를 써서 령부嶺北、감숙甘肅、요양遼陽、섬서陝西및 확곽티무르擴廓帖木兒등의 군대에 보내어서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를 진토進討하여 바로잡도록 도와달라고 하였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노하여 황후皇后를 궐밖으로 내보내고 백일을 가두어 두었다.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상도上都에 의지하고있는 황태자皇太子를 토벌하도록 보내었고 예수也速에게 조서詔書를 써보내 확곽티무르군擴廓帖木兒軍을 남쪽에서 가로막으라 하였다.
예수也速가 머뭇거리고 잠시도 향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영평永平으로 되돌아가더니 사람을 보내어 서西쪽으로는 태원太原과 연결하고,동東쪽으로는 요양遼陽과 연결하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 일어났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이를 근심하여 요장驍將-날랜 장수-인 요백안부카姚伯顏不花를 군사를 통솔하여 막도록 보내어 통주通州에 이르렀는데 하수河水가 넘쳐서 기다리고자 홍교虹橋에 영營을 세웠다.
예수也速가 불의에 그곳으로 나와서 급습해 쳐들어가 깨뜨리고 요백안姚伯顏을 사로잡아 그를 죽였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크게 노하여 스스로 인솔하여 통주로 나왔으나 3일 동안이나 큰 비가 내리자 물러서 되돌아갔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앞서 그 장수 보안保安을 의심하여 죽였던 것을 경험하였고 또한, 이미 요백안姚伯顏을 잃었으므로 답답하고 울적하여 즐겁지가 아니하여서 이에, 로적사老的沙와 더불어 하루동안 음연飲宴을 베풀었는데 황음무도荒淫無度하고 술을 탐닉하더니 사람을 죽여 희로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싫어하였다.
위순왕威順王의 아들 화-상和尚이 제帝의 밀지密旨를 받아서 모든 군사와 더불어 이를 근거로 모의를 하더니 용사勇士 상도마上都馬、김나해金那海、백안달아伯顏達兒[七]、첩고사부카帖古思不花、화아홍달火兒忽達、홍보보洪寶寶등과 결호를 맺고 은밀히 그를 찔러 죽일 것을 꾀하였다.

二十五年,皇太子在外,日夜謀除內難,承制調遣嶺北、甘肅、遼陽、陝西及擴廓帖木兒等軍,進討孛羅帖木兒.孛羅帖木兒怒,出皇后于外,幽置百日.遣禿堅帖木兒率軍討上都附皇太子者,調也速南禦擴廓帖木兒軍.也速次良鄉不進,而歸永平,遣人西連太原,東連遼陽,軍聲大振.孛羅帖木兒患之,遣驍將姚伯顏不花統兵出禦,至通州,河溢,營虹橋以待,也速出其不意,襲而破之,擒姚伯顏,殺之.孛羅帖木兒大恐,自將出通州,三日大雨而還.孛羅帖木兒先嘗以自疑殺其將保安,既又失姚伯顏,鬱鬱不樂,乃日與老的沙飲宴,荒淫無度,酗酒殺人,喜怒不測,人皆畏忌.威順王子和尚,受帝密旨,與徐士本謀,結勇士上都馬、金那海、伯顏達兒、[七]帖古思不花、火兒忽達、洪寶寶等,陰圖刺之.



7월 을유乙酉일, 즈음하여 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가 사람을 보내어 상도上都에서 승전捷하였음을 알리었다.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가 일어나 입궐하여 상주해 아뢰자 연춘각延春閣 이수李樹 아래에 행차하여 이르렀는데,백안달아伯顏達兒가 스스로 무리중에서 떨쳐 일어나 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의 머리腦를 베니 상도마上都馬및 김나해金那海등이 앞을 다투어 베어죽였다.
노적사老的沙가 이마額를 다쳤으나 달려나가 말馬을 얻고 그 집으로 달아나 베이르티무르擁孛羅帖木兒의 모처母妻및 그 아들과 천보天寶와 종奴들을 호위하고 북으로 도피하였다. 민간에 령令을 내려 그가 거느린 당黨을 모두 죽이라고 성지聖旨를 내렸다.
다음날,베이르티무르孛羅帖木兒의 수급首級을 함函에 넣어 사신을 태원太原에 보내었으며, 황태자皇太子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조정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제도諸道의 군사들이 조서詔書를 듣고 군사를 파罷하고 귀환하였다.
9월,황태자皇太子가 경사京師에 와서 알현하였다.
12월,독견티무르禿堅帖木兒、노적사老的沙를 사로잡아 모두 복주伏誅-형벌에 따라 주살-하였다.

七月乙酉,值禿堅帖木兒遣人來告上都之捷,孛羅帖木兒起入奏,行至延春閣李樹下,伯顏達兒自眾中奮出,斫孛羅帖木兒,中其腦,上都馬及金那海等競前斫死.老的沙傷額,趨出,得馬,走其家,擁孛羅帖木兒母妻及其子天寶奴北遁.有旨令民間盡殺其部黨.明日,遣使函孛羅帖木兒首級往太原,詔皇太子還朝.諸道兵聞詔,罷歸.九月,皇太子朝京師.十二月,獲禿堅帖木兒、老的沙,皆伏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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