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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伐休紀(벌휴기)(A.D.244 - A.D.256:재위13년) 해석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9.
初 昔鄒葛文王夢見 脫解尼今以宝刀與之 曰 “可以祀嘉禾” 乃與只珍內禮 入壤井 禱于樹王 而生帝 只后曰 “此兒之貴 應倍于他兒 樹王以此兒爲第一” 而夢常持節隨之 及長 豊美有德 人多服之 自幼事兄君先今至誠 起臥共之 先今曰 “吾無汝一日 不得安” 先今卽位 只后殉于老今 曰 “使汝登祚 昔鄒之力也 可與爾弟 共天下” 先今乃奉遺詔 以爲天嗣 以傳國 帝嘗師小光太子 小光從容指其女紫凰 曰 “天命在汝及吾女 乃脫解帝復生之運也” 時帝已與紫凰 密約三生 而不敢言 乃請爲妻 許之 至是果驗
처음에 석추(昔鄒) 갈문왕(葛文王)의 꿈에서 탈해니금(脫解尼今)이 보도(宝刀)를 주며 말하기를 “맛좋은(또는 뛰어난) 곡식으로 제사를 지냄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지진내례(只珍內禮)와 함께 양정(壤井)에 들어가 수왕(樹王)에게 기도하여 왕을 낳았다. 지후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귀하기가 응당 다른 아이보다 갑절이고, 수왕이 이 아이가 제일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항상 꿈을 지니고 절제하며 따랐다. 장성함에 이르자 넉넉하고 아름다우며 덕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형군(兄君, 아달라) 선금(先今, 아달라)를 지성(至誠)으로 섬겼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나기와 눕기를 함께하였다. 선금이 말하기를 “나는 너와 하루도 같이 하지 않으면 편안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선금이 즉위하여 지후가 노금(老今, 일성이사금)을 따라 죽으며 말하기를 “너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석추의 공로이다. 너희 형제가 천하를 함께 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선금이 이에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로 받들어, 이로써 천자의 후계자로 삼고 나라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왕은 일찍이 소광(小光)태자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소광이 조용히(從容) 그의 딸 자황(紫凰)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너와 나의 딸에게 있는데, 탈해제(脫解帝)가 다시 태어난 운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왕은 이미 자황(紫凰)과 더불어 비밀리 3생을 언약하였기에 감히 말하지 못하고 이에 배필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소광이) 허락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영험한 결과가 있었다.
≪비교≫ 1.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머리기사 발췌
伐休〈一作 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벌휴(伐休)〈발휘(發暉)라고도 한다.〉이사금이 섰다. 성(姓)은 석(昔)씨이며, 탈해(脫解)왕의 아들, 구추(仇鄒)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金氏), 지진내례(只珍內禮)부인이다. 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2.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머리기사 발췌
阿達羅尼師今立 逸聖長子也 身長七尺 豊準有奇相 母 朴氏 支所禮王之女 妃朴氏 內禮夫人 祗摩王之女也
아달라(阿達羅)이사금이 섰다. 일성(逸聖)의 장자이고, 키가 7자이며, 풍성하기가 표준이며, 별난 인상이었다. 어머니는 박씨로, 지소례(支所禮, 갈문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內禮)부인으로, 지마(祗摩)이사금의 딸이다.

七月 盤昔伊伐飡 穀乙稟主
7월 반석(盤昔)을 이벌찬, 곡을(穀乙)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大赦天下 輕因日犯
8월 천하(天下)의 가벼운 죄(輕因)를 지은 자와 일범(日犯)을 크게 사면하였다.

十月 內后有疾 中外行禱
10월 내후(內后)가 병이 있어, 나라 안팎에서 기도를 하였다.

元年 正月 受朝 月宮
원년(A.D.244) 정월 월궁(月宮)에서 조회를 받았다.

盤昔請立太子 定國望 上曰 “先今以朕爲一體 而授宝 朕欲捀先今之子爲一體 今不得之 奈何” 內后曰 “先今常言 吾子奈解 汝何反之” 上曰 “人皆知 奈解爲吾孫 奈何” 群臣曰 “先今與陛下共后而生 盖一體也 何求他嗣乎” 上乃決之
반석(盤昔)이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여, 나라를 희망(미래)을 준비할 수 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선금(先今)은 짐과 한 몸으로 하여 보(위)를 내려주었는데, 짐은 선금의 아들을 한 몸으로 받들기를 원하나, 지금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하였다. 내후(內后, 내례)가 말하기를 “선금이 항상 말하기를 내해(奈解)는 나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너는 어찌 반대하느냐.”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내해는 나의 손자로 알고 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선금과 폐하는 왕후를 함께하여 자식을 낳았으므로 모두 한 몸의 자식입니다. 어찌하여 또 다른 후계자를 구하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결심하였다.

七月 連乙伊伐飡 淡元稟主
7월 연을(連乙)을 이벌찬, 담원(淡元)을 품주로 하였다.

六軍頭上長昔卒 敦車代之
6군두상 장석(長昔)이 죽어, 돈차(敦車)로 하여금 계승하도록 하였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胡祇月歌頭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호지(胡祇)를 월가두(月歌頭)로 하였다.

十月 行大場
10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內后有疾 行禱
내후(內后)가 병이 있어 기도를 하였다.

尊太大角干亥鄒爲太公 加奴婢田宅 賜其大妃彭仙小妃豆姬 白大神衣及馬
태대각간(太大角干) 해추(亥鄒)를 높이어 태공(太公)으로 삼고, 노비와 전택(田宅)을 더하였다. 해추의 대비(大妃) 팽선(彭仙)과 소비(小妃) 두희(豆姬)에게 백대신의(白大神衣)와 백대신마(白大神馬)을 내렸다.
≪비교≫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벼슬이 법흥왕때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十一月 行昔鄒葛文王大祭 于壤井 以上女昔禮爲祭主 月盧爲法 上與二后親祀之
11월 석추갈문왕(昔鄒葛文王)의 큰 제사를 양정(壤井)에서 지냈다. 왕의 딸 석례(昔禮, 벌휴와 내례의 딸)를 제주(祭主)로, 월노(月盧)를 제법(祭法)으로 삼았다. 왕과 2후(내례와 자황)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上幸豆芻宅 洗太孫碧正 賜碧豆牧丹衣 豆芻以上妹 有寵于上 其夫碧牛 亦有寵於上 其女碧豆以納正太子妃 亦有寵於上 賞賜甚多
왕이 두추(豆芻)댁에 행차하여 태손 벽정(碧正)을 씻겨 주었다. 벽두(碧豆)에게는 목단의(牧丹衣)를 내렸다. 두추는 왕의 여동생으로 왕에게 총애가 있었고, 두추의 남편 벽우(碧牛) 또한 왕에게 총애가 있었다. 그의 딸 벽두(碧豆)는 납정(納正, 벌휴와 홍개의 소생)태자비(妃)로 역시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어 상을 내려줌이 심히 많았다.

十二月 封上子爲殿君 賜宅
12월 왕의 아들을 전군(殿君, 천자의 거처에 사는 왕자)으로 봉하여, 집을 내렸다.

上幸小南君宅 壽其母 達亥上姑也 上幼時 與達亥所生黑齒子南亥 遊於南君宅雙柿之皐 達亥愛之 如己子 至是上奉之 以太后禮 封其柿爲王 是夜大雪 上與南亥立 于雪中 而封之 仍滯 宿南亥 以其女采薦之
왕이 소남군(小南君)댁에 행차하여 그의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하였다. 달해(達亥)는 왕의 고모이다. 왕이 어렸을 때 달해가 낳은 흑치(黑齒)의 아들 남해(南亥)와, 남군(南君, 소남군의 아버지)댁 두개의 감나무 언덕(皐, 또는 연못)에서 놀았다. 달해가 자신의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태후례로 모셨다. 그 감나무는 수왕(樹王)으로 봉(封)하여, 이날 밤 큰 눈이 내림에도 왕과 남해가 눈 속에서 서 있었다. 수왕(樹王)을 봉(封)하고 나니 이에 (눈으로) 막히어, 남해의 집에서 숙박하게 되자, 남해가 그의 딸 남채(南采)를 천거하였다.
≪견해≫ 달해가 벌휴의 고모라는 말이 상장돈장에는 나오지 않으나, 여러 정황상 다음과 같이 계보를 살펴볼 수 있다.
파사(사성) - 미생(구추) - 석추(지진내례) - 벌휴(자황) - 이매(내례) - 내해
파사(사성) - 미생(일성) - 달해(남군) - 소남군

行靑鼠祭 于北川 是年國大豊 酒食饒足 頌歌連夕 上與二后及諸公主 登雲梯送鼠
청서제(靑鼠=甲子)를 북천(北川)에서 행하였다. 이해 나라에 대 풍년이 들어 술과 음식이 넉넉하여 충족하였다. (풍년을) 기리는 노래가 밤마다 이어졌다. 왕과 2후와 모든 공주가 운제(雲梯)산에 올라 청서(靑鼠)년을 떠나보냈다.
≪견해≫ 자(子, 쥐)의 방향은 북(北)이다. 북천(北川)과 운제산(雲梯山)은 같은 곳에 있다.

二年 正月 上與二后太子 受朝 南桃 入壤井 行大祭 于脫解毛施 仇鄒味生
2년(A.D.245) 정월 왕이 2후와 태자(내해)와 더불어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양정(壤井)으로 가서 탈해(脫解)와 모시(毛施), 구추(仇鄒)와 미생(味生)의 큰 제사를 지냈다.

召文監國山乙卒 年七十六 召文人奉之如神 立乙公祠
소문(召文) 감국(監國) 산을(山乙)이 76세로 죽었다. 소문 사람들이 신(神)처럼 모시며, 을공사(乙公祠)를 세웠다.

行祖廟大祭
조상의 사당에 큰 제사를 지냈다.

賜酺群臣 加爵一級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작위를 1급씩 올려주었다.

大赦內外重囚
나라 안팎의 중대한 범죄를 지은 자를 사면하였다.

上與二后 入海宅
왕과 2후가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月盧伊伐飡 昔禮稟主
월노(月盧)를 이벌찬, 석례(昔禮, 벌휴와 내례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命所非太子 巡國中 賜賑于四窮
소비(所非葛文王, 利音, 아달라와 자황의 아들)태자에게 명하여 나라 안을 순찰하게 하고 4궁(四窮, 네 가지의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 곧 늙은 홀아비, 늙은 홀어미, 어버이 없는 어린이, 자식 없는 늙은이를 이르는 말)에게 구휼하였다.

南亥與其女采 謁于海宅 曰 “臣以黑齒之子 爲南君子 今臣父立祠 而不許臣歸父 是削主也 陛下憐臣舊好 而許之 則母亦喜也” 上曰 “朕以父母之德 非品而得位 母唯仲母 安敢不奉喜也 但次父存 焉不敢獨行 汝可乞于太公” 乃問之 太公笑曰 “吾妹之子 卽吾子也 汝爲吾子足矣 何苦爲逆賊之子乎” 南亥泣 曰 “先今已赦罪 而立祠 仲父何言逆賊乎” 太公曰 “黑齒社稷之罪人也 祇逸兩聖不赦 唯敢赦之乎 汗昔欲爲鷄徒安心之計 而乞于先今 先今不得自專 乃議于功臣 多不許 而子實爲汝 而亦贊立祠 而實非國家之祠也 社稷之罪未洗 而汝爲其子 汝之子孫 必奴于官 吾可使汝爲此乎 汝爲南君子 乃祇今之孫也 汝子可尙公主 而入眞骨也 汝何不恩乎” 南亥乃拜謝而退 曰 “吾年將近六十 尙不知仲父之恩 安得爲子乎” 乃與其妻雙吉 扶持太公
남해(南亥)와 그의 딸 남채(南采)가 해택(海宅)에서 알현하여 말하기를 “신은 흑치(黑齒)의 아들인데 남군(南君)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臣)의 부친의 사당을 세웠으나, 신의 부친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제주(祭主)가 약해졌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을 가엽이 여기고 옛정을 생각하여 허락하여 주시면 어머니께서도 또한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부모의 덕으로 비품(非品, 왕이 될 골품이 아님)임에도 왕위를 얻었다. 어머니가 비록 중모(仲母, 둘째어머니, 여기서는 달해의 여동생인 달고를 말하는 듯)이더라도 어찌 받들지 아니함이 기쁘겠는냐. 다만 차부(次父, 숙부, 해추)가 계시니 어찌 감히 홀로 결정하겠는가. 네가 태공(太公)에게 구걸하면 가능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태공에게 물으니 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여동생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이다. 너를 나의 아들로 하면 족하겠느냐. 어찌하여 괴롭게 역적(逆賊)의 아들이 되려하느냐.”라고 하였다. 남해가 울면서 말하기를 “선금(先今, 아달라)이 이미 사면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중부(仲父, 작은아버지)는 어찌하여 역적이라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태공이 말하기를 “흑치는 사직(社稷)의 죄인이다. 지마와 일성, 두 분의 성인께서 사면하지 아니하였는데 오히려 감히 사면했다는 것이냐. 한석(汗昔)이 계도(鷄徒)를 안심시키려는 계책으로 선금에게 구걸하여, 선금이 스스로 오로지 하지 못하고, 이에 공신들과 의논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너는 친아들이어서, 또한 사당을 짓는 것을 도왔으나 실제는 나라의 사당이 아니다. 사직의 죄는 씻지 못하였다. 네가 흑치의 자식이 되면 너의 자손들은 반드시 관가의 노비가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이처럼 만들어야 옳은 것이로구나. 너는 남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지마이사금의 손자이다. 너의 자식은 공주(公主)로 숭상되어, 진골(眞骨)로 들어갈 수 있다. 너는 어찌 은혜를 모르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남해가 이에 절하여 감사드리고, 물러나며 말하기를 “나의 나이 장차 60이 가까워지는데, 중부(仲父)의 은혜를 모르고 있었구나. 어찌하여 자식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처 쌍길(雙吉)과 더불어 태공을 곁에서 부축하였다.

二月 召文八世主奉景德祠主龍雲 達文而反曰 “伐休非品竊位 非祖宗之法也 天下可共討之” 甘文阿瑟羅沙伐等 將應之 上憂之 右頭上興宣曰 “小寇可遣小兒擒之 不足憂也” 上曰 “朕所以憂者 非擒之也” 興宣曰 “何也” 上曰 “達文兄今之子也 子雖弄兵 父何可傷之乎 召文世主皆姻戚也 雖有迷途 可以導之 不可雪之 兩軍相對 無咎之民受禍 安得不憂乎” 興宣曰 “臣有二兵官 可當此任” 上曰 “誰也” 曰 “郁甫之子仇道 熟知召文得其人心 雖少寬仁 可任大事 彭仇之子仇須兮 善攻城 二人相得 一攻而一襲 則可保 無虞” 上大喜 乃以仇道仇須(兮)爲左右軍主 而伐之 仇道自龜山東北 仇首兮直指阿火屋大路 兩軍互相 緩急行計 仇道作女巫隊 襲其關守 直至其都 牛乙內應之亂 遂平 命其七世主 皆如牛乙 擇骨門丈夫爲夫 達文妻子 命宅京都
2월 소문(召文) 8세주가 경덕사주(景德祀主) 용운(龍雲, 소문국 묘초의 여동생)을 받들었다. 달문(達文, 아달라와 文窘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벌휴(伐休)는 비품(非品, 왕의 될 골품이 아님)으로 왕위를 훔쳤다.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니다. 천하가 함께 토벌하여야 옳다.”고 하였다. 감문(甘文), 아슬라(阿瑟羅), 사벌(沙伐) 등이 장차 응하려 하였다. 왕이 걱정하였다. 우두상(右頭上, 西路와 北路를 담당) 흥선(興宣)이 말하기를 “작은 도적은 어린아이를 보내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걱정하기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걱정하는 바는 사로잡을 수 없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달문은 형금(兄今, 아달라)의 아들이다. 아들이 비록 병사를 제 마음대로 할지라도, 아버지가 어찌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느냐. 소문의 세주(世主)는 모두 인척(姻戚)이다. 비록 미도(迷途, 미로)에 있더라도 가히 지도하여야 한다. 누명을 씌우는 것을 옳지 않다. 양군이 상대하면 잘못이 없는 백성들은 화를 입는다. 어찌하여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신에게는 두 명의 병관이 있으니, 가히 이 임무를 맡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누구냐.”라고 물었다. (흥선이) 말하기를 “욱보(郁甫)의 아들 구도(仇道)는 소문국을 익숙하게 잘 알고 (구도의 처인 운모는 소문국 묘덕왕의 딸이다) 그 인심을 얻었으며, 비록 젊더라도 너그럽고 어질어서 가히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팽구(彭仇)의 아들 구수혜(仇須兮)는 공성(攻城)전에 뛰어나므로 두 사람이 서로 한번 공격하고 한번 습격하면 곧 가히 지켜낼 수 있으니, 그르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구도와 구수혜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치도록 하였다. 구도는 귀산(龜山)에서 동북으로, 구수혜는 아화옥(阿火屋)대로로 곧 바로 향하였다. 양군은 상호 완급(緩急)으로 계책을 행하였다. 구도가 여무대(女巫隊) 일으켜 관문을 지키는 자를 습격하고 그 도읍으로 직행하였다. 우을(牛乙, 산을의 아들)이 내응(內應)하여 란을 일으켜서 드디어 평정하였다. 7세주에게 모두 우을을 따르도록 명하고, 골문장부(骨門丈夫)를 택하여 남편으로 삼도록 하였다. 달문의 처자는 경도(京都)에서 벼슬살이를 하도록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2년 기사
2년 정월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을 정벌하였다. 군주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四月 亥鄒太公薨
4월 해추(亥鄒) 태공이 죽었다.

七月 賞召文征士 有差
7월 소문(召文)을 정벌한 장수들에게 상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以牛乙爲景德祠主
우을(牛乙)을 경덕사주(景德祠主)로 하였다.
≪견해≫ 대개 여자가 제주(祭主) 혹은 사주(祠主)가 된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如老角干卒
여노(如老) 각간이 죽었다.

十一月 達亥大母薨 春秋八十二 逸帝女也
11월 달해(達亥)대모가 춘추 82세로 죽었는데, 일성이사금의 딸이다.
≪견해≫ 191년 8월 기사에는 달해가 지마를 따라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行昔鄒王祭
석추(昔鄒)왕의 제사를 지냈다.

三年 正月 受朝 月宮
3년(A.D.246) 정월 월궁(月宮)에서 조회를 받았다.

洪喜伊伐飡 元氏稟主
홍희(洪喜)를 이벌찬, 원씨(元氏)를 품주로 하였다.

上巡幸西路州郡 至一善 行靑牛白虎送迎祭 賜父老酒 命元氏南采歌舞 而娛之 入甘文 賜其骨老酒 命其子女 行古樂 仍還召文 亦觀其風俗 而歸
왕이 서로(西路)의 주군(州郡)을 두루 돌아보며 일선(一善)에 이르러, 청우(靑牛=乙丑, A.D.245)를 보내고, 백호(白虎, A.D.246은 丙寅년으로 赤虎로 오기인 듯)를 맞들이는 제사를 지내며, 부노(父老)에게 술을 내렸다. 원씨(元氏)와 남채(南采)에게 노래와 춤을 추도록 명하고 즐거워하였다. 감문(甘文)으로 들어가 그 골노(骨老)에게 술을 내리고, 그 자녀들에게 옛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거듭하여 소문(召文)을 돌아보고, 또한 소문국의 풍속(風俗)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견해≫ A.D.246년은 고구려 동천왕과 위나라 관구검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으므로, 최소한의 국경지역에는 대비하는 움직임이 기록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평화로운 기사뿐이다. 아마도 소문8국이 진한8국인데,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낙랑군 동부도위지역과 혼동하고 있는 듯.

三月 敦車卒 大解六軍頭上
3월 돈차(敦車)가 죽어, 대해(大解)를 6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五月 幸太公宅 行太公祭 賜晋鄒彭芻等爵 彭仙豆姬豆芻等年穀 有差
5월 태공(太公, 해추)댁을 행차하여 태공의 제사를 지냈다. 진추(晋鄒), 팽추(彭芻) 등에게는 작위를 내리고, 팽선(彭仙), 두희(豆姬), 두추(豆芻)에게는 해마다 곡식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七月 南新縣 獻嘉禾
7월 남신현(南新縣)에서 맛좋은(또는 뛰어난) 곡식을 바쳤다.

彭芻伊伐飡 豆姬稟主
팽추(彭芻)를 이벌찬, 두희(豆姬)를 품주로 삼았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3년 기사
3년 정월 왕이 주군을 순행하여 민정을 시찰하였다.
5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7월 남신현에서 상서로운 벼를 진상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거행하였다.

十月 元氏生 上子虎公 上洗之
10월 원씨(元氏)가 왕의 아들 호공(虎公)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十一月 南采生 上女采氏
11월 남채(南采)가 왕의 딸 채씨(采氏)를 낳았다.

親祀黑齒 盡許其子女
(왕이) 친히 흑치의 제사를 지내고, 모두 그 자녀가 됨을 허락하였다.
≪비교≫ 245년 정월 기사 참조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四年 正月 治公伊伐飡 碩虹稟主
4년(A.D.247) 정월 치공(治公)을 이벌찬, 석홍(碩虹)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行赤兎祭
2월 적토(赤兎=丁卯)제를 행하였다.

骨正太子巡行州郡 察民疾苦
골정(骨正)태자가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살폈다.

三月 下令 省土木 勿奪農時
3월 영(令)을 내려 토목공사를 살피어 농사철에는 징수하지 않도록 하였다.

四月 行只后大祭 于壤井
4월 양정(壤井)에서 지후대제(只后大祭)를 행하였다.

上幸豆姬宅
왕이 두희(豆姬)댁에 행차하였다.

七月 昌豆伊伐飡 沙兒稟主 南吉左執 月老右執 謁休骨書 文光大書
7월 창두(昌豆)를 이벌찬, 사아(沙兒)를 품주, 남길(南吉)을 좌집(左執), 월노(月老)를 우집(右執), 알휴(謁休)를 골서(骨書), 문광(文光)을 대서(大書)로 삼았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十月 牛徒 行吉公祭 于阿瑟羅 雪深丈餘 無以通路 有大猪一群 自至 人以爲神致
10월 우도(牛徒)가 아슬라(阿瑟羅)에서 길공제(吉公祭)를 지냈다. 눈이 사람 키를 넘어 통로가 없었다. 한 무리의 돼지 무리가 있어 스스로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신이 보내준 것이라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4년 기사
4년 3월 주군에 명령을 내려 농사철에 토목 공사를 하지 않도록 하였다.
10월 북부지방에 큰 눈이 내려 한 장 깊이로 쌓였다.

十一月 頒征衣
11월 군포(征衣)를 하사하였다.

置兵司 掌兵器及工
병사(兵司)를 설치하여 병기(兵器)와 장인에 관한 일을 맡겼다.

十二月 入海宅 行花田祭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와 화전제(花田祭)를 지냈다.

小南君薨
소남군(小南君, 남군과 달해의 아들, 지마이사금의 손자)이 죽었다.

五年 正月 南吉伊伐飡 忽碧稟主
5년(A.D.248) 정월 남길(南吉)을 이벌찬, 홀벽(忽碧)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夫余眞格等 來攻母山城 命南路將軍仇道 率精騎一千 往求之
2월 부여(夫余) 진격(眞格) 등이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남로(南路)장군 구도(仇道)에게 명하여 정기(精騎) 1천을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5년 기사
5년 2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파진찬 구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방어하게 하였다.
         2. 백제본기 초고왕 23년 기사
23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군사를 내서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3. 백제왕기 초고왕 23년 기사
二十三年 戊辰 二月 重修宮室 命將軍眞格等 攻新羅母山城
23년(A.D.248) 무진 2월 궁실을 중수(重修,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여 고침)하였다. 장군 진격(眞格) 등에게 명하여 신라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盤花大母薨 春秋九十二 嘗記大母故事數千言 曰大母經
반화(盤花)대모가 죽었는데, 춘추 92세였다. 일찍이 대모(大母)의 고사(故事) 수천가지 말씀을 기록하여, 대모경(大母經)이라 부른다.

三月 命猩公行黃龍祭 于閼英井 擇遊花三百 飾花車十二 而鎭四方 京都大繁
3월 성공(猩公)에게 명하여 황룡(黃龍=戊辰)제를 알영정(閼英井)에서 행하였다. 유화(遊花) 3백 명을 뽑아서 꽃마차 12대를 장식하고 사방을 채우게 하였다. 경도(京都)가 크게 북적거렸다.

彭板爲大書 碧芻爲大畜 作奴爲園圃 大亥爲兵司 尙盧爲城司 元元爲蚕司
팽판(彭板)을 대서(大書), 벽추(碧芻)를 대축(大畜), 작노(作奴)를 원포(園圃), 대해(大亥)를 병사(兵司), 상노(尙盧)를 성사(城司), 원원(元元)을 잠사(蚕司)로 하였다.

五月 角干暖門卒
5월 각간 난문(暖門)이 죽었다.

七月 月老伊伐飡 馬里稟主
7월 월노(月老)를 이벌찬, 마리(馬里)를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一月 行壤井大祭
11월 양정대제(壤井大祭)를 지냈다.

大解卒 晉鄒六軍頭上
대해(大解)가 죽어, 진추(晉鄒)를 6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六年 正月 天猩伊伐飡 九禮稟主
6년(A.D.249) 정월 천성(天猩)을 이벌찬, 구례(九禮, 아달라와 호례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以召文爲剛州 牛乙太守
소문(召文)을 강주(剛州)로 하고, 우을(牛乙)을 태수로 삼았다.

上幸南亥宅 滯雪
왕이 남해(南亥)의 집을 행차하여, 눈에 막히었다.

美時生 上子美知
미시(美時, 가야 미리신의 여동생)가 왕의 아들 미지(美知)를 낳았다.

四月 置兵官理方 命彭芻爲頭上 月盧骨理頭上 曉然仙理頭上 乾方平理頭上
4월 병관이방(兵官理方)을 설치하여, 팽추(彭芻)를 두상(頭上)으로, 월노(月盧)를 골리두상(骨理頭上)으로, 효연(曉然)을 선리두상(仙理頭上)으로 건방(乾方)을 평리두상(平理頭上)으로 명하였다.
≪견해≫ 병관이방(兵官理方)은 행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行金蛇祭 于南桃 賜酺百官 以福聖壽
금사제(金蛇祭)를 남도(南桃)에서 행하였다. 백관(百官)들에게 잔치를 내리고 성수(聖壽, 임금의 나이, 여기서는 임금의 장수)를 축복하였다.
≪견해≫ 사(蛇, 뱀)의 방위는 南이다. 249년은 己巳(白蛇)년으로 차이가 있다. 벌휴제의 환갑과 겹친다.

六月 行大流頭 骨正太子率骨女 散餠于百女泉 汗后爲群女所推 入深 吐水疾作
6월 골정(骨正)태자가 골녀(骨女)를 거느리고 대유두(大流頭)를 행하였다. 백녀천(百女泉)에서 산병(散餠, 떡의 한 종류)을 주었는데, 한후(汗后, 한개)가 무리 여자들에게 밀림을 당하여, 깊은 곳으로 빠졌다. 물을 토하고 병이 일어났다.

七月 岳公伊伐飡 羊仁稟主
7월 악공(岳公)을 이벌찬, 양인(羊仁)을 품주로 하였다.

仇道大破夫余 于狗襄 獻獲五百余級 命加從征壯士爵秩 以差賜衣酒
구도(仇道)가 구양(狗襄)에서 부여(夫余)를 크게 깨뜨리고 500여명의 목을 취하여 바쳤다. 싸우러 따라간 장사(壯士)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더하여 주었고, 옷과 술을 내려줌에 차등이 있었다.
≪비교≫ 1.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6년 기사
6년 7월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5백여 명을 죽였다.
         2. 백제본기 초고왕 24년 기사
24년 4월 초하루 병오에 일식이 있었다.
7월에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패배하였는데 죽은 자가 500여 명이었다.
         3. 남당유고 백제왕기 초고왕 24년 7월 기사
二十四年 己巳 七月 攻羅狗壤城
24년(A.D.249) 기사 7월 신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견해≫ 남당유고와 삼국사기의 기술방식에 차이가 있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거행하였다.

九月 命大農頭上淵角 行大場 于一善 會召文加耶農師百余人 賜衣酒
9월 대농두상(大農頭上) 연각(淵角)에게 명하여 일선(一善)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소문(召文)과 가야(加耶)의 농사(農師)가 백여 명을 불러 모이도록 하여, 옷과 술을 내렸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七年 正月 足達伊伐飡 雲帽稟主
7년(A.D.250) 정월 족달(足達)을 이벌찬, 운모(雲帽)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上幸汗后宅 賜宴 后病起而行壽 故特赦舊惡而春之 后感泣而作明月歌
2월 왕이 한후(汗后)댁에 행차하여 잔치를 열었다. (한)후가 병에서 일어나 수(壽, 회갑연)를 행하였다. 옛 잘못(209년 11월 기사 참조)을 특별히 사면하였던 연유로, 떨쳐 일어났다(春). (한)후가 감동하여 울면서, 명월가(明月歌)를 지었다.

四月 行只后祭
4월 지후(只后)의 제사를 지냈다.

加耶君夫河智殂 美理神請以孝修爲繼夫 許之
가야군(加耶君, 미리신)의 남편 하지(河智)가 죽었다. 미리신(美理神)이 효수(孝修)로 남편을 잇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骨正太子巡北鄙
골정(骨正)태자가 북쪽의 시골을 순찰하였다.

栽花樹 于京都街行
꽃나무를 경도(京都)의 길거리에 심었다.

五月 謁逃山 行白馬大祭
5월 도산(逃山)을 찾아가 뵙고 백마대제(白馬=庚午)를 지냈다.

七月 常盧伊伐飡 亥氏稟主
7월 상노(常盧)를 이벌찬, 해씨(亥氏)를 품주로 하였다.

大郞角干卒
대랑(大郞) 각간이 죽었다.

九月 行大嘉俳 于南桃
9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견해≫ 아마도 8월의 기사인 듯.

夫余襲破圓山 進圍缶谷 仇道率勁騎 擊之 夫余佯敗 誘至蛙山 伏兵四起 我軍困潰
부여(夫余)가 원산(圓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진격하여 부곡(缶谷)을 포위하였다. 구도(仇道)가 굳센 기병을 거느리고 부딪쳤다. 부여가 거짓으로 도망치는 체하여, 와산(蛙山)까지 꾀였다.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우리 군이 갇혀서 무너졌다.
≪비교≫ 1.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7년 기사
7년 8월 백제가 서쪽 국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였다. 구도가 와산까지 추격하다가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왕은 구도가 잘못했다고 하여 부곡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하였다.
         2. 백제왕기 초고왕 25년 기사
二十五年 庚午 八月 攻羅圓山鈌谷 大捷於蛙山
加耶遣使 來貢明珠
25년(A.D.250) 경오 8월 신라 원산(圓山) 결곡(鈌谷)을 공격하여, 와산(蛙山)에서 크게 이겼다.
가야(加耶)가 사신을 보내어 명주(明珠)를 공물로 보냈다.
≪견해≫ 이 때부터 가야가 백제에 붙었다. 백제왕기 253년 3월 기사 참조

十月 命薛支 代領仇道軍 仇道貶于缶谷城
10월 설지(薛支)를 구도군(仇道軍)의 우두머리로 대신하게 하고, 구도의 (지위를) 떨어뜨려 부곡성(缶谷城)주로 하였다.

十一月 頒征衣
11월 군복을 하사하였다.

上入海宅
왕이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八年 正月 虹祇伊伐飡 牛豆稟主
8년(A.D.251) 정월 홍지(虹祇)를 이벌찬, 우두(牛豆)를 품주로 하였다.

汗后崩 葬于逸聖陵
한후(汗后)가 죽어, 일성릉(逸聖陵)에 장사를 지냈다.

五月 內后有疾 行禱
5월 내후(內后)가 병이 있어, 기도를 하였다.

大會牛羊馬虎鷄徒 于南桃 命骨正太子爲五仙頭上 賜各徒衣酒有差 命行白羊大祭
남도(南桃)에서 우도, 양도, 마도, 호도, 계도의 대회가 있었다. 골정(骨正)태자를 오선두상(五仙頭上)으로 명하였다. 각각의 무리(徒)에게 옷과 술을 차등 있게 내렸다. 백양(白羊=辛未)대제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七月 淵角伊伐飡 仙于稟主
7월 연각(淵角)을 이벌찬, 선우(仙于)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泒藥使 于州郡
고약(泒藥)을 주군으로 보냈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8년 기사
8년 9월 치우기(蚩尤旗, 혜성)가 각(角)좌와 항(亢)좌에 나타났다.
≪견해≫ 신라사초에는 천문의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九年 正月 猩公薨 國良代之
9년(A.D.252) 정월 성공(猩公)이 죽어, 국량(國良)이 계승하였다.

文光伊伐(飡) 信禮稟主
문광(文光)을 이벌(찬)으로, 신례(信禮)를 품주로 삼았다.
≪견해≫ 종종 관직명이 줄여 나오기도 한다.

國良阿飡 述明一吉 二人有仙術 負衆望 故特加以褒之 述明屬兵司
국량(國良)을 아찬,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하였다. 두 사람은 선술(仙術)이 있어 무리의 희망을 업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작위를 특별히 올리어 기렸다(칭찬하였다). 술명은 병사(兵司)에 부속시켰다.

二月 京都雪深三尺
2월 경도(京都)에 눈이 3자가 내렸다.

興宣六軍頭上
흥선(興宣)을 6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五月 大雨水 山崩十餘所 遣所非太子 恤民 行蘿畐祭 于南郊 履雨順
5월 큰 비가 내려 무너진 산이 10여 군데였다. 소비(所非, 이음)태자를 보내어 백성을 구휼하고, 남교(南郊)에서 라복제(蘿畐祭)를 행하여 비가 순하여 지기를 빌었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9년 기사
9년 정월 국량을 아찬에 임명하고, 술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3월 서울에 눈이 내렸는데 깊이가 석 자였다.
5월 홍수가 나서 산이 10여 군데 무너졌다

美時與舍人述明相通 生子高知
미시(美時, 가야 미리신의 여동생)와 사인(舍人, 관청 사람 또는 관직명) 술명(述明)이 상통(相通)하여, 아들 고지(高知)를 낳았다.

七月 彭板伊伐 食玄稟主
7월 팽판(彭板)을 이벌(찬), 식현(食玄)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祇摩大祭 別立陵垣 先是蛇陵玉垣甚廣 累因水潰 至是各分陵垣
8월 지마대제(祇摩大祭)를 행하였다. 왕릉의 담장(울타리)을 별도로 세웠다. 옛날에 사릉(蛇陵)의 왕(玉과 王은 同字)의 담장이 심히 넓어 누차로 물에 허물어졌다. 이때에 이르러 각각의 왕릉의 담장을 나누었다.

十一月 入海宅
11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十年 正月 大亥伊伐 冬介稟主
10년(A.D.253) 정월 대해(大亥)를 이벌(찬)으로, 동개(冬介)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漢祇遊花生四男一女 皆完 命賜米衣
3월 한지(漢祇)의 유화(遊花)가 4남 1녀를 낳아 모두 완전하였기에 쌀과 옷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견해≫ 유화(遊花)는 몸을 파는 여자를 말하는 듯.

六月 倭大饑 男女千余口 乞食來泊 命居南鄙閑地 賜食就業 是爲倭圃 與作平齊名
6월 왜(倭)에 큰 기근이 있어 남녀 천여 명이 배를 타고 와서 식량을 구걸하였다. 남쪽 시골 한가로운 땅에 살도록 명하고 식량과 일자리를 주었다. 이것이 왜포(倭圃, 왜인들의 채마밭)이다. 작평(作平, 222년 정월 기사 참조)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10년 기사
10년 정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한지부 여인이 한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 왜인 천여 명이 큰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
≪견해≫ 천문에 관한 기사는 기록이 없다.

七月 元元伊伐飡 肥豆稟主
7월 원원(元元)을 이벌찬, 비두(肥豆)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를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玉帽以歌姬 得骨正寵 有娠 上責骨正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여, 옥모(玉帽)를 가희(歌姬)로 하였다. 골정(骨正)의 총애를 얻어 임신을 하였다. 왕이 골정을 꾸짖었다.

十一年 正月 欽室伊伐飡 白面稟主
11년(A.D.254) 정월 흠실(欽室)을 이벌찬, 백면(白面)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以仇道女玉帽 妻骨正 行吉 鮑祠
4월 구도(仇道)의 딸 옥모(玉帽)를 골정(骨正)에게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五月 方君太子薨
5월 방군(方君, 지마와 소송의 아들)태자가 죽었다.

美理神生 孝修子孝道
미리신(美理神)이 효수(孝修)의 아들 효도(孝道)를 낳았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11년 기사
11년 6월 그믐 을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견해≫ 천문에 관한 기사는 기록이 없다.

七月 可權伊伐飡 黃發稟主
7월 가권(可權)을 이벌찬, 황발(黃發)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玉帽生骨正子 是爲助賁帝 有瑞雲異香 上奇之 曰 “此兒必興吾家” 其娠産皆以月明 故曰助賁
옥모(玉帽)가 골정(骨正)의 아들을 낳았다. 이분이 조분제(助賁帝)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있는 구름과 기이한 향기가 흘렀다. 왕이 특별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우리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임신하고 태어난 날이 모두 달이 밝았다. 그런 연유로 조분이라 이름 지었다.

十二年 正月 仇須兮伊伐飡 彭達稟主
12년(A.D.255) 정월 구수혜(仇須兮)를 이벌찬, 팽달(彭達)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碧芻伊伐飡 墨昌稟主
7월 벽추(碧芻)를 이벌찬, 묵창(墨昌)을 품주로 하였다.

美理生 河道女大理 美時兄也
(가야) 미리(美理, 미리신, 神은 사람이름 뒤에 붙는 접미사)가 하도(河道)의 딸 대리(大理)를 낳았다. (미리신은) 미시(美時)의 언니이다.

十三年 正月 仇道伊伐飡 好買稟主
13년(A.D.256) 정월 구도(仇道)를 이벌찬, 호매(好買, 벌휴와 자황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견해≫ 구도(仇道)에게 골정(骨正)의 후광이 있었던 듯.

公禮生 所非女述禮 賜米 或云 奈音相通而生
공례(公禮, 벌휴와 내례의 딸)가 소비(所非, 아달라와 자황의 아들)의 딸 술례(述禮, 미추니금의 어머니)를 낳아 쌀을 내렸다. 혹은 내음(奈音, 아달라와 자황의 아들)과 상통(相通)하여 낳았다고 한다.

二月 大修宮室
2월 궁실(宮室)을 크게 수선하였다.

三月 旱久 行禱
3월 가뭄이 오래 지속되어 기도하였다.

加耶王子河道 來朝 妻以美羅 河道美時姪也
가야(加耶)왕자 하도(河道, 미리신의 아들)가 내조(來朝)하여 미라(美羅, 아달라와 미시의 딸)를 시집보냈다. 하도(河道)는 미시(美時)의 조카이다.
≪견해≫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13년 기사
13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4월 대궐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왕이 붕어하였다.

四月 月宮南樹王 震之 上憂之 曰 “兆其朕矣” 乃入桃山待罪 翌日 又震金城東門 上命設席 于神堂 而潔身仰臥 從容而崩 上自幼神明 能占風雲 預水旱豊歉 知人邪正 至是又知仙期 不病而崩 人皆稱聖 內后乃與奈解太子 行祥登祚 下詔 曰 “新今年才未高 當此大任 爾大小臣僚 克體朕意 輔我新今” 仇都乃請 內道攝行 許之
4월 월궁(月宮)의 남수왕(南樹王)이 벼락을 맞았다. 왕이 걱정하며 말하기를 “조짐이 짐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도산(桃山)에서 처벌을 기다렸다. 다음 날 금성(金城) 동문에 또 벼락이 쳤다. 왕이 신당(神堂)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명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반드시 누워 조용히 죽었다. 왕이 어렸을 때 신명(神明)이 있었으며, 바람과 구름을 보고 능히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았으며, 사람들이 정직한지 사악한지를 알았으며, 이때에 이르러 또 신선이 될 시기를 알아 병이 없었으나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성인이라 칭송하였다. 내후(內后)가 이에 내해(奈解)태자와 더불어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아랫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신금(新今)의 나이 아직 많지 않으나, 대임(大任, 왕위)을 당해내야 하니, 너희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짐의 뜻을 체득하여 이루어내고, 우리 신금을 돕도록 하라.”고 하였다. 구도(仇都)가 이에 내도(內道, 태후나 왕비)로 섭행하기를 청하여 (내후가) 허락하였다.

六軍頭上興宣卒 碧牛代之 興宣多奇才 累建功爲國柱石 至是上崩於桃山 未發 興宣夢見 阿達羅帝與上 幷騎白大馬 將朝于天命 公爲前衛 公將具甲冑 倉黃索之 忽聞上崩 曰 “吾其逝矣” 亦無疾而卒 人以公爲二帝之身僕 阿帝身長七尺 伐帝六尺五寸 興宣六尺 阿帝豊準龍鬚 伐帝玉顔美目 興宣能作 二帝之狀 遠而望之 不能辨 阿帝太子時 與伐帝同爲兵官 情若兄弟 及卽位 任以大事 大政多出其手 夷狄不能侮之 國人傷其卒 莫不掩淚 乃立其祠 以祀之 曰大祠
6군두상(六軍頭上) 흥선(興宣)이 죽어, 벽우(碧牛)가 지위를 계승하였다. 흥선은 많은 뛰어난 재주로 여러 번 공을 세워 나라의 주춧돌이 되었다. 왕이 도산에서 죽음에 이르자 상(喪)이 난 것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흥선의 꿈에 아달라제(阿達羅帝)와 벌휴제가 함께 백대마(白大馬)를 타고 나타나, 장차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에 문안드리러 가니 공(公)을 전위(前衛, 전방의 호위)로 삼으려 한다고 하였다. 공이 장수의 갑주(甲冑, 갑옷과 투구)를 당황하며 찾았다. 갑자기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죽어야 할 때로구나.”라고 하였다. 역시 병이 없었으나 죽었다. 사람들이 두 왕의 신복(身僕, 몸종)이라 하였다. 아(달라)제는 키가 7척(尺)이고, 벌(휴)제의 키는 6척5촌이며, 흥선의 키는 6척이다. 아(달라)제는 풍성하기가 평균이며 용의 수염을 가졌으며, 벌(휴)제는 옥안(玉顔, 잘 생기고 훤한 얼굴, 임금의 얼굴, 옥처럼 하얀 얼굴)이며, 아름다운 눈을 가졌으며, 흥선은 능히 두분 왕의 형상(狀, 초상)을 만들 수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왕과 형상을) 구별할 수 없었다. 아(달라)제 태자 일때 벌(휴)제와 같이 병관의 직에 있었는데, 인정(情, 뜻, 본성)상으로는 형제와 같았다. (벌휴제가) 즉위함에 이르자, 큰일을 맡겼다. 대정(大政, 나라의 큰 일)이 그 손에서 나왔다. 오랑캐(夷狄)들이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아파하였다. 눈물을 쏟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사당을 이름 지어) 대사(大祠)라 하였다.


김영채 (2009-02-15 21:06:36)  
(1) 2년 2월기사 : 달문(達文, 아달라와 文窘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키며 -> 달문(達文, 아달라와 文侰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키며
(2) 7년 7월기사 : 常盧伊伐飡 -> 尙盧伊伐飡, 해석: 상노(常盧)를 이벌찬 -> 상노(尙盧)를 이벌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