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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 朝 鮮」의 位 置

by 부르칸 2015. 4. 3.

「古 朝 鮮」의   位 置


사기 조선열전 속의 三水 확정이 선결

고두동

 

우리의 국력이 급속도로 신장됨에 따라 한국에 대한 국제적 연구열도 가일층 심화돼 가고 있는 실정이며 우리의 도서도 연간 엄청난 숫자로 수출되고 있다는 이 현상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4천~5천년전부터 중국본토에서 독자적인 패권을 차지해온 엄연한 사실과 우리의 고대 명칭인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껏 정확한 해석을 내린 이가 거의 없는 것도 어김없는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 조선의 위치에 대해 어떤 원로사학가는 일본학자들의 왜곡된 학설 그대로를 인용하여 평양으로 표기했고 또 일부 학자들은 중국사학가들의 편협한 학설과 같이 요서지방으로 보고 있지만 이건 너무나 거리가 먼 부당한 견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왜 냐하면 단군조선(별도로 논증할 예정이다)이나 기자조선이 중국본토에서 유래된 사실이 요즘 명백해지고 있을뿐 아니라 尙書大典(書經)이나 戰國策(한대 유향이 지은 서명) 및 史記 (한대 사마천 지음)등 등에 조선이란 명칭이 기록돼 있다.


『사 기』 「조선전」 첫머리에 보면 장안의 주기로서 “조선에 濕水-洌水-汕水가 있다. 三水가 합치는 곳이 열수니 아마 <낙랑조선>에서 이름을 취한성 싶다”는 기록이다. 즉, 삼수가 있는 곳이 처음으로 “조선”이란 명칭이 붙여진 곳이란 뜻이다. 이런 기록이 명확하게 있음에도 삼수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한 것은 중국인들의 압력에 시달려 망각하고 있으나 이제는 그 위치를 명료하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과거 위대한 활약상을 회고하여 앞으로 세계의 진운에 따라 크게 비약할 수 있는 저력의 고취에도 유익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 습수(濕水)
 삼수중의 하나인 “습수”에 대해 연구해 본 결과, “습”자를 강희자전에는 본음이 “탑”이며 水名이라 하고 “물은 동쪽에서 나와 東武陽을 거쳐 바다로 든다”했다.


 이 동무양현은 “산동성 조양현의 서쪽에 있다” 했으며 조양현의 위치는 제남시 장구현의 서북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다. 이곳이 열수와 가까운 중요한 곳이란 것을 밝혀둔다.


 또 중국사전에 보면 “습”은 “漯”(합)자와 같다 했고, 다시 “탑하”를 찾아보면 “산동성 임평현 서남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우성현을 거쳐서 사해하로 주입했다.” 했으나 이곳은 열수와의 거리가 멀어보인다.


 다시 일본의 “제교편 대한화사전”에 보면 “습수”는 수명이다. 산동성 동양현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든다“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도 “수경주”의 기사도 있으나 습수의 발원지역이 너무나 광대한 범위에 미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상으로 습수의 위치는 잘 알아 볼수 있는 것이다.

 

2. 열수(洌水)
 이 “열수”의 소재지 발견은 정확한 국사찾기에 20년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 많은 사서를 저작하고 있는 문정창옹의 연구이다. 산해경에 기술돼 있다.  강희자전 “국掬”자 해석에 보면 “齊陳曰 斯燕之外郊 朝鮮洌水之間曰掬 제진왈 사연지외교 조선렬수지간왈국”이란 기록이다.


 이 齊 陳을 인명으로 본 이가 있으나 모두 국명으로 제는 주나라 무왕이 태공망(강태공)을 봉한 나라 이름이니, 즉 산동성을 가리킨 것이며 진은 주대에 호공을 봉한 지역이다. 진국의 영역은 하남성 구개봉부 동쪽과 남으로 안휘성의 구박주(박주) 등지이며 산동성과 이웃해 있다.


 그러므로 제국과 진국의 지방에서는 남연의 외교에 “렬수”가 있다는 뜻을 명백히 말한 것이다.
 이 사연이란 이“연”은 산동반도에 건국했던 남연을 가리킨 것으로 선비족 모용덕이 서기 4백년에 나라를 세워 410년에 망했으며 소거한 지명은 산동성 광고(현재의 익도부)였다.


 그 리고 “교”자의 뜻을 “辭源사원”에 보면 재미있게 해석해 있다. 즉 거국백리를 원교라 일컫고 50리 거리를 근교라고 말한다 하며 또 국외를 “교”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렬수”는 남연의 옛 도읍지인 광고의 외교에서 서쪽으로 장산, 추평(鄒平) 등지의 소청하로 흘러든다.


 이곳에서 삼수가 합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지도상으로 엿볼 수 있으며 습수의 발원지인 조양과 추평과의 사이는 지도상으로 보아 부산과 대구와의 거리와 비슷하다. 현재도 삼수가 합쳐 흘러 바다로 들고 있다.

 

3. 汕水(산수)
 이 “산수”는 사기 장안의 주기에 따르면 “렬수”와 이웃해 있다 했으니, 습수와 렬수, 이 양수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지승람” 평양부 “郡名”條 “朝鮮”項에 보이는 汕水 등의 주기는 중국의 압력에 못이겨 선현들이 의식적으로 평양부 편에 기록해 있다는 것을 일부 사가들은 알아야 한다.


 또 “낙랑조선”이란 지명은 하나의 지명인 동시에 산동지방과 요녕성 광녕(현재의 북진현)의 동남에 위치한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반산현의 낙랑조선과 평양의 낙랑조선으로 3개소가 사서에 실려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여둔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모노대사가는 “위만조선”의 도읍지까지도 “평양”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요동지방에 양평(구 봉천), 요양, 안시 등지와 같이 기재돼 있는 “번한”을 평안도 박천에다가 비정해 놓았으나 이 “번한”은 그 주기로 보아 磐山縣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울러 밝혀둔다.


 그 리고 “낙랑”이라 명칭은 평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지승람”에 보면 한반도 안에는 낙랑평양과 낙랑 경주가 있으며 古馬韓 지역(경기도)기록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낙랑에서 일어나 마한을 다 차지했다는 기록을 감안해 볼 때 안동성에 있는 집안현(고구려 고도)도 “낙랑집안”이란 것을 알 수 있고 또 한서지리지에 보이는 위만왕도 險瀆(험독-반산현)도 “낙랑험독” “낙랑조선”이란 것을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밖에도 고조선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문헌고증적 관점에서 옛날과는 달리 제각기 논순한 사서가 있다. 이 기회에 그 내용의 일부나마 음미해보기로 한다.


 강양부의 “하은민족고”에는 고조선의 땅이 어디 있었는가 하면 본시 조선의 은민족의 분포지가 그것이며 당시에는 “요동반도”라고 했다.


 서 량지씨는 “중국사전사화” 267면에서 “ -은주이전과 은주의 시대에는 동이족의 활동지역이 실로 광범위하여 오늘의 산동, 하북, 하남동서, 강소서북, 호북동우, 발해연안과 요동반도 및 조선반도 등 광활한 지역에 미쳤으니 그 중심지는 산동반도”라고 지적했다.


 임 혜상씨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는 “중국민족사”에서 “殷은 고동방민족의 족명이며 본시 이족이다. 은이 동이란 설은 허다하지만 은인과 조선민족과의 관계는 아직 불충분하다”하여 동이족인 고조선족이 중국본토에서 흥기하여 크게 활약한 사실을 일부러 은닉하려 앴으나 습수, 렬수가 산동의 “낙랑조선”지대에 있었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확실해졌을 뿐 아니라 은이 산동에서 서진했던 것을 보더라도 은족과 고조선족은 같은 종족이란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밖에도 안호상 박사가 “배달 동이겨레의 한옛 역사”란 저서에서 인용한 왕동령씨의 “중국민족사” 및 여사면씨의 “중국민족사”와 교봉림시의 “중국통사” 등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키로 한다.


 다 시 고 이택시의 “국어학론교”(58년간)를 참고해 보면 “중국 고대언어가 조선어와 같다. 설문(한자에 대한 성립과정과 원뜻을 밝힌 서명. 한의 허신이 지음) 서문에도 창힐(蒼頡)이 처음 서계를 지을 때 대개 품류에 따라 상형했으므로 ”문“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또 “문은 끝는다는 뜻이며 중국고어에도 契(글)이라 하니 즉 서,사를 의미한다. 한자제작과 구성서법등도 은족 중심으로 창안되었고 <이는 시야>란 고어들이 고대중국에도 있었을 뿐 아니라 오제의 명칭도 상고 동이족의 관명이라”라고 상세한 논술이 있다. 깊이 음미해야 할 가치있는 논증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조선이란 지명의 유래
 조선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 고 최동박사는 저서 “조선상고민족사” 81~82면에서 “숙신과 조선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다. 그러므로 숙신(주신)이 <조선>이라” 했으나 사실과는 전연 다르다.


 이 숙신에 대해 김정배 교수는 “한국민족문화의 기원” 2장 2절에서 “숙신과 조선족과는 국제학자들이 별개로 보고 있어 아직 미결의 장이라”고 서술했다. 최박사가 전기 저서에서 “조선의 지명기원”을 나열한 가운데 하나의 예로서 “조일선명설”도 들먹여 놨다. 이 설이 정확시 된다.


 『상서』 「요전」에 “희중(천문학자인듯)에게 명령하여 우이(嵎夷-東表의 地)에 살게하니 이곳이 暘(陽)谷이다”라고 했다.

 “東表日出之處(동쪽 해뜨는 곳)”로 “조선”이란 명칭이 이런 까닭으로 산동지방에서 붙여진 것이 확실하게 보이며 그 환경이 한반도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관계로 “조선”이란 명칭이 은대를 전후하여 붙여진 것이다. 우리들은 앞으로 이민족의 과거의 찬란한 활약상과 그 위치를 영원히 명심하여 더욱 더 비약에 힘써야 할 것으로 믿는다.

월간<자유>. 1979년 5월호 40~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