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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진서(晉書) · 지리지(地理志)》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전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28.

글: 장진근

1. 글 머리에

 
   필자는 본란에서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진서(晉書)》 특히 《지리지》 부분에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것임을 소상히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것을 재론하는 번잡함을 피하고 그 요점만을 소개하고 진서 지리지의 명확한 이해를 위해는 어떤 점이 필요한지를 논급하려고 한다.
 
   첫째, 《진서》는 제왕이 역사 편찬에 직접 관여한 어찬사서이다. 그는 다름 아닌 당태종 이세민이다. 필자가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장서에서 발견했다던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에 는 사마천을 위시해서 《고금역대찬사제유성씨(古今歷代撰史諸儒姓氏)》명단 150명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 유일하게 당태종이 올라 있고 거기에는 "칭제찬진서(稱制撰晉書)"라고 써 있는데 그 말은 진서를 제찬(制撰)하였다고 뜻이다. 《진서》가 편찬될 당시에는 수많은 《진서》가 있었었는데 그 중에서 그의 구미에 맞는 장영서의 것을 남본으로 하여 《진서》를 편찬하고 나머지 사서들은 없애 버렸다. 
 
   둘째, 문정창 선생이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진서》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지리지이다. 진나라는 동진과 서진으로 나누어졌다. 이들 서진과 동진은 제계도 서로 다르고 영가지란(永嘉之亂) 이후에 강좌로 밀려나 반벽강산(半壁江山: 침략으로 빼앗기고 남은 반 동강이의 국토)을 유지했기 때문에 서한과 동한이 따로따로 지리지가 쓰여진 것처럼 나뉘어져야 하는데 하나로 통합되는 바람에 서진 초기의 번성한 국세가 전기간에 존속한 것처럼 쓰여져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를 않고 있다고 한다.
 
   셋째, 중화서국 표점본 《진서》를 교감한 학자들이 쓴 출판설명에 의하면  《지리지(地理志)》와 같은 것은 겨우 서진(西晉)의 정황만 자세하고, 영가(永嘉) 이후의 동진(東晉) 시대의 지명(地名) · 관명(官名) · 관직(官職) · 시기(時期) · 지점(地點)의 착오와 불일치는 더더욱 많다고 하였다.(방현령 등찬, 《진서(晉書)》, 중화서국 , 출판설명, 1~5쪽 참조)
 
   넷째, 《진서 · 지리지》의 결함은 청나라 건륭 연간에 《동진강역지(東晉疆域志)》라는 책을 쓴 홍양길(洪亮吉)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역대 정사의 《지리지》에는 각자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착오가 많기로는 오직 《진사 · 지리지》뿐이다. 이 책은 태시(泰始) · 태강(太康)만 자세하고, 영가(永嘉) 이후에는 몇 마디 말을 주워 모은 것이기 때문에 서진(西晉)의 지리지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진(東晉)의 강역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다.(화림보, 《중국지명학원류(中國地名學源流)》, 호남인민출판사, 2002년, 354쪽 참조)
 
   이상과 같은 여러가지 모순과 불합리성이 있기 때문에 소위 《진태강삼년지기(晉太康三年地記)》 요서군(遼西郡) 조에 쓰여 있는, "비여현(肥如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묘갈처럼 바닷가에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秦)나라가 갈석(碣石)으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 갈석이라는 것은) 지금의 고구려 구계(舊界)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여기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을 말하는 것이다(肥如縣, 有碣石山。碣然而立, 在海旁故名。秦築長城, 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碣石山也。)" 또한 평주 낙랑군(樂浪郡) 조에서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의 공사를 시작한 곳이다(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등의 기술을 근거로 일본사람 도엽암길(稻葉岩吉)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란 논문을 통해 한반도의 수안(遂安)을 갈석이 있다는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 거기서 진나라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고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의 이병도 선생도 이에 찬동한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해왔다.  
 
   그러나 학문이란 것은 남의 주장은 들어보지 않고 내 주장만 앞서 무터대고 아니라고만 우겨대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거는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들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면 논리는 논리로써 맞서 그들을 설득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진태강삼년지기(晉太康三年地記)》란 무엇인가

 
   《태강지기(太康地記)라고 하는데 작자의 이름이 없다. 《구당서(舊唐書) · 경적지(經籍志)》에 기록되기를, "《지기(地記)》5권. 태강 3년(282)에 편찬되었다."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기를, "《진태강토지기(晉太康土地記)》10권."이라고 하였다. 《통지(通志) · 예문략(藝文略) 四)》에 기록되기를 "《태강삼년지기(太康三年地記)》 6권."이라고 하는 등 이 3종의 저서는 이름은 다 다르나 사실은 같은 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책들은 송나라 이후에 망일(亡佚: 산실)되었던 것을 청나라 사람 필원(畢沅)(1730~1797) 이 이들을 집록하여 곧장 책 이름을 《태강삼년지지(太康三年地志)》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태강삼년지지》라는 말이 하나는 《송서(宋書) · 주군지(州郡志)》 회계군 시녕령(始寧令) 아래에 나왔고, 다른 하나는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三國志)》 손호(孫皓)가 현명궁(顯明宮)을 지었다는 주석 아래에 나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진서(晉書)》를 상고해 보니, 무제 태강 4년에 요동왕 유(蕤)를 동래왕으로 지리를 옮겼는데도 이 《지(志)》에는 동래(東萊)에서 아직도 군(郡)이라고 말하고 있고, 《수경주(水經注)》에 태강 5년(284)에 신도(信都)를 장락(長樂)으로 개칭한 것을 이 《지(志)》에서는 아직도 신도(信都)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이 완성된 것은 태강 3년에 편찬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화림보, 《중국지명학원류(中國地名學源流)》, 호남인민출판사, 2002년, 86쪽 참조)
 
   필자가 가끔 정체불명이라고 평가절하를 하던 《태강삼년지기(太康三年地記)》는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요, 설사 그 집록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이상, 그 자체를 무작정 부정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그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 자료를 비판적으로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해당 자료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서 많이 가능하다고 본다.
 

3. 《진사(晉史)》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

 
   진나라는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로부터 천자의 자리를 물려 받은 후 15년이 지난 태강 원년(280)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중국은 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재통일 되었다. 진나라는 전 · 후반을 합쳐 156간 지속되었는데 전반 52년간은 수도를 낙양(洛陽)에 두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서진(西晉)이라 하고, 후반 104년은 수도를 건강(建康)에 두었기 때문에 동진(東晉)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호족 출신의 사마의(司馬懿)는 조조 이래 위나라에 벼슬하여 249년에는 승상이 되고 이후 그의 아들 사마사(司馬師) · 사마소(司馬昭) 등이 사실상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사마소는 촉한을 토멸한 공로로 진왕(晉王)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염이 265년 위나라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 왕조를 세웠다.
 
   무제(武帝) 사마염은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다. 즉위 초에는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으나 점차 사치와 방탕에 빠지자 귀족들로 다투어 마치 경쟁이라도 벌이듯 사치와 부를 과시하였다. 무제가 죽고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국정은 점점 문란해지고 제실의 울타리로써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역사상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다. 팔왕의 난은 무제의 황후 양씨(楊氏)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賈氏) 일족들의 권력 다쿰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계기로 여남왕(汝南王) 양(亮) 등 팔왕(八王)이 16년에 걸쳐서 싸움을 벌려 마침내는 영가의 난(永嘉之亂)이 일어났다.
 
   결국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을 부르고, 영가의 난이 서진(西晉)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중국 북부에서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중국 내륙에 많은 이주민을 보내고 있던 유목민족이 무력 침략을 시작하였다. 지방의 남흉노의 수장 유연(劉淵)이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고 북한(北漢)을 세웠다.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영가 5년(311)에 영가의 난을 계기로 서진의 회제(懷帝)를 사로잡았다. 이어 장안에서 즉위했던 민제(愍帝)도 건흥 4년(316)에 북한의 유요(劉曜)에게 항복함으로써 서진은 52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왕실의 일족인 사마예(司馬睿)는 건업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왕도 등 중원의 호족과 토착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317년 동진을 세움으로써 중국 북부에 오호십육국과 남북으로 대치하는 남북 분열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서진이 316년에 멸망하자 서진의 일족인 사마예는 317년 건업을 건강(建康)으로 개칭하고 이곳을 수도로 정해 동진을 세웠다. 사마예는 동진의 관중(管仲)이라 불리는 왕도(王導)의 도움으로 강남 지방 호족들을 복종시켜 기반을 튼튼히 해나갔다.
 
   동진 정권이 수립된 후 6년째 동진의 중신 왕돈이 형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하고 반대파 충신을 죽이거나 추방하였다. 동진의 황제 사마예는 왕돈의 반란에 심한 분노를 느끼고 발병하여 죽고 그 후 난은 평정되었다.
 
   동진 정권은 북방에서 내려온 호족 왕씨와 강남지방의 호족 세력이 2대 지주를 이루었는데 약 100년 동안은 왕씨 일족과 그 뒤를 이은 유씨(庾氏) · 사씨(謝氏) · 환씨(桓氏) 등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였다. 동진은 끝내 중국 북부를 수복하지는 못하였으나 383년에는 비수지전(비水之戰)을 통해서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의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양자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동진은 말기에 이르기까지 남조 송을 세운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한편 동진 왕조와 때를 같이 하여 중국 부부에서는 흉노 · 선비 · 갈 · 저 · 강 등 다섯 이민족이 약 130년간에 걸쳐 중국 북부에 16개 왕조를 세웠다. 이를 오호십육국이라고 부른다. 이들 이민족들은 일찍이 후한 말 · 삼국시대에 이미 중국북부에 이주하여 한민족과 섞여 살았다. 서진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304년 남흉노의 수장 유연(劉淵)이 산서에서 독립하고 361년에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서진 왕조를 멸망시켜 중국 북부가 분열상태에 놓이자 오호십육국은 각지에 할거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진(前秦)이 중국 북부를 한때 통일하였으나 비수지전(비수지전)에서 동진에게 패함으로써 통일의 꿈이 와해되었다. 다음으로 선비족의 척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北魏)가 점점 강력해져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439년 다시 중국 북부를 통일함으로써 오호십육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 북부에는 북위(北魏)가 통일하고 중국 남부는 송(宋)의 유유(劉裕)가 통일함으로써 남북조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김영희, 《이야기중국사》2책, 청아출판사, 201쪽 참조)
 
   이상의 진나라를 둘러싸고 오호십육국과 이를 뒤이는 남북조시대가 어어지는 동안 중국은 일대 혼란 그 자체였음을 절감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후한에 뒤 이어 일어나 위 · 촉 · 오 삼국의 정립시대를 거쳐 위나라가 일시 통일을 했다가 위는 진나라에 멸망당하게 되었다. 그간에 요동의 주인이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4. 요동의 할거

 
   이 부분을 요령있게 정리할 실력이 아직 없으므로 장박천 교수 등의 《동북역대강역사(東北歷代疆域史)》 중에서 적절히 발췌 정리하였다. 중국은 주변에 이민족들과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강역과 관련된 연구가 매우 발달해 있다. 이에 부수하여 지리지와 관련된 학문도 발달되어 있다.
 
   역대로 이곳에서 패권을 차지하여 웅거했던 국가나 할거세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한사군의 이동 궤적을 추적할 수 없게 된다.
 
   한나라 세력이 물러 났다고 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이 아니다. 이를 대신해서 우리의 서부 국경인 요동을 역대로 어느 나라가 차지하였는지를 알아 보아야 한다.  
 
   동한 말 황건농민들의 대반란은 지주계급 연합에 의해서 진압된 뒤, 각 봉건 지주 집단은 곧장 이를 틈타 각자 기반을 차지하여, 지주집단간의 봉건할거가 형성되었다. 당시 유주(幽州)는 유우(劉虞)에 점거되었고, 요서는 공손찬(公孫瓚)에 의해 점거가 되었으며, 요동은 공손탁(公孫度)에게 점거 되었다. 공손탁은 동북 지구에서 일개 대성이었다. 공손탁은 원래 요동 양평(지금의 요녕성 요양시) 사람으로, 그의 부친 공손연(公孫延)은 옥리의 추포를 피해 현도에 살고 있었으며, 공손탁은 현토의 일개 하급 관리였다. 나중에 요동군의 서영(徐榮)의 천거로 동탁(董卓)에 의해 공손탁은 요동태수로 임명이 되었다. 공손탁은 관직에 오른 뒤 요동의 호족 · 명문세가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면서 이전에 양평 수령을 지냈던 공손소(公孫昭)를 구속, 양평 저자에거 태형을 가해 죽였다. 군내의 명문 호족이며 세가인 전소(田韶) 등은 평소에 은원(恩怨)이 없는데도 모두 법에 따라 주살을 당하거나, 1백여 가가 죽임을 당하자 군내 사람들은 전율했다. 이는 그에게 대부분의 동북지구를 통일하고 지방 호족 세력의 반항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공손탁이 요동을 다스리면서 내외에 법령을 엄정하게 적용, 요동군을 나누어 요서(遼西) · 중료군(中遼郡)으로 만들고 태수를 두었으며,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 제현을 아우르고 영주자사(營州刺使)를 두는 등 자립하여 요동후 · 평주목(遼東侯平州牧)으로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나라가 동북에 설치하였던 현도 등 군도 자기의 관할 하에 전부 귀속시켰다. 공손씨가 요동을 점거할 때 동이 아홉 종족이 모두 공손씨를 섬김으로써 동북 지구에 통일 다민족 지방할거 정권이 형성되었다.
 
   공손탁은 부여 · 선비 등 종족에게 구슬리거나 연합 정책을 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신복하게 하였으며 주로 그 동서에 있는 양대 민족 세력을 정복하는 데 정력을 쏟았으니, 동으로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오환(烏桓)을 쳐서 해외에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한헌제 건안 초에, 발기(拔奇)가 형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함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더불어 각기 하호 3만여 구를 거느리고, 공손탁에게 가서 항복을 하였고, 비류수 가로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건안 14년(209)에, 공손탁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쳐서 그 나라를 쳐부수고 그 읍락을 불태웠다고 하였다. 산상왕(山上王) 연우(延優)(곧 이이모)는 "다시 신국(新國)을 만들었으며 환도성 아래에 도읍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동한 말년, 봉건할거 투쟁 중, 요서 오환의 대인들도 모두 이 틈을 타서 각자 할거하던 곳에서 칭왕(稱王)을 하고 중원의 몇몇 봉건지주집단과 연결을 하였다. 중산태수 장순(張純)은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오환으로 들어가, 스스로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부르고, 삼군 오환의 원수가 되어,  청(靑) · 서(徐) · 유(幽) · 기(冀) 4주를 침략하여 소란을 피우고,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 · 약탈을 일삼아 백성들의 걱정거리로 되었다. 유우(劉虞)가 유주목(幽州牧)을 할 때 3군 오환에 대해 회유정책을 취하였으나, 요서를 차지하였던 공손찬(公孫瓚)은 오환을 멸할 뜻을 가지고 부곡(部曲)을 내몰아 호한(胡漢)을 침략하고 이로 인해서 항상 유우와는 거스르게 되었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은 서로 공살(攻殺)하다가 유우(劉虞)는 공손찬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유주(幽州)는 바로 공손찬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공손찬(公孫瓚)은 요서 영지인(令支人)으로, 집안 대대로 이천석(二千石: 태수의 녹봉이 이천 석인데서 비롯됨)의 사족 출신이었다. 공손탁은 유주를 차지하자, 하층 호강(豪强)들의 신임과 지지로 사족들에게 타격을 주어 이들을 통제하였다. 공손찬(公孫瓚)과 원소(袁紹)가 하북의 영도권을 놓고 다툴 때, 삼군 오환 수령 탑둔은 군사를 내서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동으로 쳐서 물리쳤다. 건안 4년(199)에, 유주(幽州)는 원소의 차지가 되었고, 삼군 오환은 원소의 통제를 받았다. 건안 5년(200)에 조조는 관도지전(官渡之戰)에서 원소를 쳐서 물리쳤고, 7년(202)에 원소의 아들 원담(袁談)은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막내 아들 원상(袁尙)과 형 원희는 건안 10년(205)에 요서 탑돈(蹋頓)에게 투항, 오환의 힘을 빌어 조조의 동북지역의 통일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조조가 원소 부자를 쳐서 물리친 뒤에 동북 통일의 칼끝은 직접 요하 이서에서 할거하고 있는 삼군 오환을 향해 겨누게 되었다. 건안 11년(206)에 조조는 군사를 내어 삼군 오환을 정벌, 탑둔 및 각 왕이 참살당했으며, 호한(胡漢)으로 항복한 자가 20여 만 구에 달했다. 요동속국(遼東屬國)선우 소복연(蘇僕延) · 요서 선우 누반(樓班) · 우북평 선우 오연(烏延) · 원상(袁尙) · 원희(袁熙)는 수천 기를 거느리고 요동군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삼군 오환을 정복한 것은 동북지구의 통일의 중요한 단계의 하나였다. 그는 그는 책사 곽가(郭嘉)을 얻고, 서무산(徐無山)에서 전주(田疇)의 도움을 받아 계략을 꾸몄을 뿐만 아니라, 연도의 산민(山民)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사역을 공응받았다. 이는 동북을 통일하는 것이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과 부합됨을 설명해 주고 있다.
 
   공손탁이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왕의 자리를 노리는 것으로 보고, 조조가 공손탁을 무위장군(武威將軍)으로 임명하고, 영녕향후(永寧鄕侯)로 봉하였으나, 그는 명령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요동의 왕인데 무슨 놈의 영녕(永寧)이란 말이냐?"라고 하였다. 공손탁이 죽은 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공(公孫恭)은 모두 조씨 정권의 양평후(襄平侯) · 평곽후(平郭侯)라는 봉호를 접수하였고, 공손연 때에는 또 다시 요동태수로 임명하여 공손씨 정권을 자기 직속하의 일개 군으로 간주하였다. 경초 2년(238)에, 사마의가 요동을 정벌, 공손연 부자를 양수(梁水) 강가(지금의 태자하)에서 주살하고, 원래 공손씨가 관할했던 지역을 위나라에 전부 귀속시킴으로써 중국 북부와 동북에 하나의 통일 국면을 조성하였다.
 
   조위(曹魏)가 공손씨 정권을 통일했을 때, 또 몰래 군사를 바다로 띄워 보내 낙랑 · 대방군을 회수하자 해표(海表: 우리나라를 가리킴)는 조용해졌고 동이가 굴복하게 되었으니, 동북 각족이 이미 위나라에 신속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정벌하자, 고구려에서는 주부(主簿) · 대가(大加)를 보내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위나라가 공손연을 치는 것을 도왔다. 그뒤 고구려가 여러 차례나 침략과 배반을 하므로, 정시 5년(244) 관구검(毌丘劍)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지금의 무순 노동공원 고성지)를 출발, 여러 길로 해서 토벌에 나섰다. 고구려 왕 위궁(位宮)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지금의 부이강 및 혼강) 가로 진격, 양구(梁口)(지금의 태자하 나루터 입구)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위궁은 패해서 달아나매, 적현(적현)(지금의 혼강 동쪽)까지 추격, 최후로 현거속마(懸車束馬)하여 환도산(丸都山)에 올라, 환도성(丸都城)(지금의 집안현성 북쪽 5리 산성자)을 함락시켰다. 정시 6년(245)년 관구검이 또 고구려를 공격, 고구려 왕 위궁은 매구(買溝)(즉 매구루, 지금의 혼춘 부근)으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어 위궁을 추격, 옥저 1천여 리를 지나 줄곧 숙신(肅愼)의 남계에까지 추격하였다. 이와 동시에 낙랑태수 유무(劉茂) · 대방태수 궁준(弓遵)은 군사를 내어 영동(嶺東)의 예(濊) 지역을 점령하였다. 옥저 · 예는 모두 위의 관할이 되었다. 
 
   서진이 위나라를 대신하게 되면서 동북지구는 곧장 서진왕조의 관할 아래 두었다. 서진 말년에, 중원은 봉건의 할거로 혼전 중에 각 민족의 수뇌부들은 중원이 혼란한 틈을 타서 전후하여 지방 민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정권과 동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후조(後趙) · 전연(前燕) · 전진(前秦) · 후연(後燕) · 북연(北燕)이다.
 
   후조(後趙)는 갈족 석륵(石勒)이 세운 나라이다. 석륵은 책사 장빈(張賓)을 중용, 군현을 설치하고 농업발전에 주의를 기울여 북방의 통치를 공고하게 하였다. 후조는 서쪽 진롱(秦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유(幽) · 기(冀)까지 이르렀는바, 한 · 위 · 진 이래의 요서 · 우북평의 일부지방을 포함하였다.
 
   전연(前燕)은 동부 선비 모용씨가 건립한 나라였다. 모용외가 정치를 공명하게 하고, 인물을 아끼고 중시하였기 때문에 사민들이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한인을 대량으로 받아들이고 한족지주계급을 끌여들여 군현을 건치하고 생산을 발전시키게 되니 동북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일을 신속하게 완성하였다.
 
   서진 무제 태강 6년(285)에, 모용외가 군대를 거느리고 부여를 진공하자,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였고, 그 나라의 국성을 쳐부수고 1만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 부여는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어 거의 멸망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평주자사 최슬(崔瑟)은 요동(지금의 요양시) 현지에서 주재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최슬은 기주의 명문귀족으로 그는 북방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자신에게 귀부하지 않고 도리어 모용외에게 귀부하는 것에 대해 마음 속에 몹씨 불쾌하여 문득 암암리에 단씨(段氏) · 우문씨(宇文氏)와 더불어 고구려와 연합하여 모용외를 쳐서 그 땅을 나눠 가질 것을 모색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최슬은 양평을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 투항하였다. 요동은 모용외에게 의해 통일되었다. 동진 성제 함강 4년(338)에, 모용황(慕容皩)은 연왕(燕王)을 칭하고, 후조(後趙)의 석륵(石勒)과 동맹을 맺어, 동서로 단부(段部)를 협공하자, 단부는 후조(後趙) · 전조(前趙)로 분할되었다. 함강 7년(341)에, 모용황은 유성(柳城)으로부터 용성(龍城)으로 다시 옮겨갔다. 같은해, 전연은 남북 두 길로 군사를 나누어 고구려를 쳐서 그 도성 환도(丸都)(지금의 집안현 성북 5리 산성자)를 함락시키고, 남녀 5만여 구를 약탈했다. 강제 건원 2년(344)에, 전연은 2만의 기병으로 우문부를 치려고, 모용한(慕容翰) · 모용수(慕容垂)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는 대장을 섭혁우(涉奕于)로 보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장은 전사하고, 그 부하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전연의 군사는 이 승리를 틈타 북쪽으로 추격, 우문부의 도성을 점령하자, 걸득귀(乞得龜)는 멀리 막북(漠北)으로 달아나매, 개척한 영토가 1천여 리요, 그 족 사람 5만여 명을 창려(昌黎)로 옮기고, 섭혁성(涉奕城)을 위덕성(威德城)으로 개칭했다. 목제 영화 2년(346)에, 다시 서쪽으로 연쪽으로 옮겨간 부여를 기습 격파, 그 나라 왕 현(玄) 및 부락 5만여 구를 포로로 하여 돌아왔다. 이와같이 전연이 곧장 기본적으로 동북을 통일하게 되었다.
 
   전진(前秦)은 저족(저族) 부견이 수립한 정권이다. 부견은 왕맹(王猛)을 등용시켜 국사를 맡게 하여 강병부국을 이루었다. 이때의 전연(前燕)의 정치는 이미 극도로 부패, 정권은 대귀족 모용평(慕容評) 등의 사람들이 잡고 있었는데 올바른 법집행은 세워지지 않고 호족들은 전횡을 일삼았거니와 지어는 민호(民戶)까지 부려서 남김없이 다 실어가벼렸으며, 삼군(三軍: 군대)은 투지마저 없었다. 이처럼 정권이 부패하자, 전연 왕맹(王猛)의 대군이 한번 이르러 한번 접촉하자마자 궤멸되었다. 동북 지역은 전진의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다.
 
   후연 모용희(慕容熙)의 정치가 가장 부패하여, 의희 3년(407)년 고운(高雲)(고구려 왕족의 후예)은 풍발(馮跋) 형제 등 22명과 동맹을 맺어 모용희를 죽이고,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하니 역사에서는 북연(北燕)이라고 하였다. 북연의 풍발은 선비화(鮮卑化)한 한인이었다. 북연은 후연의 기초 위에 건립된 것으로, 국세가 날로 쇄약해져 요하 이동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유송(劉宋) 원가 8년(431)에, 후위에게 멸망당했다.
 
   후위(後魏)는 북방의 각개 정권의 통일 과정 중에 서기 436년 동북 요하 이서에 할거하던 북연(北燕)을 통일하였다. 이 해를 전후로 하여, 오락후(烏落侯) · 고막해(庫莫奚) · 거란(契丹) · 두막루(豆莫婁) · 물길(勿吉) · 실위(失衛) · 고구려 등도 전후해서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남조와도 계속하여 정치 · 경제 ·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후위의 북방에 대한 통일은 동북 각족의 중원에 대한 관계를 더욱 증대시켰고, 북방의 정권의 분립 · 상호혼전의 정황을 개변시켰다. 당시 동북 각족은 모두 후위를 동북의 대국(大國) · 천부(天府)라고 하였고, 그로부터 봉사(封賜: 옛날 제왕이 신하들에게 관작이나 재물을 상으로 내려 주는 것을 말함)를 받도 그 신민이 되었다.(장박천 등, 《동북역대강역사(東北歷代疆域史)》, 길림인민출판사, 59~65쪽 참조)
 
   여기까지가 양한이 망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리의 서부 변경 지역인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던 역대 정권이나 할거 세력들의 자취들이다. 필자는 《만주원류고》를 번역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명멸해갔던 역대 정권과 군웅이 할거하던 모습을 주의깊게 살펴 보았다. 거기에서 발견한 것은 진나라 때 고구려는 요동을 약유하였고, 백제도 요서 · 진평을 약유하였고 백제군을 따로 두었다는 한 귀절이었다. 고구려는 차지하고라도 백제의 눈부신 해외 경략 정황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도대체 우리 사학자들은 무엇이 두려워 이를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의심부터 하는 겁장이들이었다. 필자는 중국의 자료를 통해 오로지 문정창 선생만이 백제 경략을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 어느 한 사람 함께 나서서 거들어 주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중국의 사서에 한 군데만 아니라 여러 곳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지질이도 못난 식민지 근성은 하루 아침에 버려야 할 것이다.
 

5. 교치(僑置)의 이해

 
   교치의 사전적 정의는 앞서 소개한 《중한사전(中漢辭典)》에 "육조시대에 다른 나라에 빼앗긴 땅 이름을 자국 수중에 있는 땅에다 옮겨 놓음으로써 그 땅이 빼앗기기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대민족문화연구소, 《중한사전(中漢辭典)》, 2006년 전면개정판, 1555쪽 참조)

   호아상(胡阿祥)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교치를 논하는 분들은 늘쌍 동진(東晉)에서 교치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예로 고힐강 · 사념해 두 분이 쓴 《중국강역연혁사(中國疆域沿革史)》 제15장 제2절에 나와 있는 "원제 태흥 3년(A.D 320)에 낭야국(琅邪國)에서 양자강을 건너간 백성들로써 건강(建康)이란 곳에 회덕현(懷德縣)을 교치(僑置)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이런 종류의 제도의 남상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부분을 인용하였다.(고힐강 · 사념해 저, 《중국강역연혁사(中國疆域沿革史)》, 상무인서관, 1999년, 113쪽 참조)

   그러나 호아상 교수는 《한서(漢書) · 고제기(高帝紀)》 고조 12년(B.C 195)의 기록에, "풍(豊) 사람들을 관중으로 옮기게 하여 평생토록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하였다는 기록에서 소급하여 교치의 원류를 찾고 있다. 그에 대한 한나라 응소(應邵)의 주에 이르기를, "태상왕(한 고조 유방의 아버지)이 고향인 풍(豊)으로 돌아가실 생각만 하므로, 고조는 이에 사시리(寺市里)에 풍현(豊縣)과 똑같은 성을 쌓고 신풍(新豊)으로 불렀으며 풍(豊)의 백성들을 옮겨다 이곳에 채웠다."라고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패현 풍읍 촌놈으로 초한전쟁에서 승리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라 당당히 서한의 개국황제가 되었다. 기원전 197년, 유방은 그의 연로하신 부친을 수도 낙양으로 모셔와서 그 노인네를 아주 행복하게 청복을 누리면서 여생을 편안히 사시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노인네는 도시 생활에 익숙치 못하고 날마다 고향의 노인들과 친구들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방은 황제의 신분으로 명을 내려 풍읍의 길거리 그대로 장안성 동쪽 교회에 하나의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가 완성된 후 다시 풍읍의 고향에 있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옮기고 이 곳에 신풍(新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지명이동(地名搬家)"이라고 한다. 
 
   한고조는 그 이전인 7년(B.C 200)에도 역읍(酈邑)이라는 곳에 성을 건설하여 사직을 만들고, 도로와 정원을 만들어 백성들이 사는 집을 풍읍(豊邑)처럼 꾸며 태상왕이 예전에 함께 살던 사람들을 모두 데려다 그곳에 채워 함께 살도록 했었다. 그리고 태상왕이 죽자 그 곳을 신풍(新豊)이라고 했음은 이미 언급했다. 왜 그랬을까. 자기 아들 덕에 태상왕이란 높은 직책에 올랐지만 자기가 예전에 살던 고향의 모습이며 친구들이 눈에 밟혀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예전에 살던 굴을 향해 머리를 향하고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위에서 원류라고 소개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요, 더더구나 실토기우(失土寄寓: 자기가 살던 땅을 잃어버리고 한 때 다른 곳에 몸을 붙이고 사는 것을 말한다)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논자는 교치(僑置)의 전형인 실토기우(失土寄寓)의 예로서 동한 때 설치했던 현도군과 그 관할 고구려(高句麗) · 상은대(上殷台) · 서개마(西盖馬) 등 3현을 들지 않는가.

   필자는 처음에 이 글을 접하고 잠시 망연자실했다. 옛말에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라", 그저 체면이고 뭐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필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바로 이 한 귀절이었다. 난마처럼 얽혀 우리 민족을 부끄럽게 하던 열등복합(컴플랙스)의 원형질인 소위 한사군에 관한 매듭을 풀 수 있는 지낭(智囊)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필자가 단언컨대 교치란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한사군의 이해는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다시 이어지는 이 논문을 보기로 하자.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에는 현도군이 있는데 그 관할로 고구려 · 상은대 · 서개마 3현이 있으며, 《속한서(續漢書) · 군국지(郡國志)》 현도군에는 그 관할로 고구려 · 서개마 · 상은대 및 예전에 요동에 속했던 고현(高顯) · 후성(侯城) · 요양(遼陽) 등 모두 6현이 있다. 주진학(周振鶴) 선생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속한지(續漢志)》의 현도군은 원래 《한지(漢志)》의 현도군을 교치(僑置)한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원래 요동의 새외에 처해 있었던 《한지(漢志)》에서 말하는 현도군은 점차 흥기한 고구려족의 위협을 받아 요동군 관내로 옮겨가게 되자 고구려 · 상은대 · 서개마 3현은 이에 따라 요동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동으로 교치된 현도군은 관할이 겨우 200호니 가구당 5명을 잡더라도 1,000명도에 불과한 유명무실한 군세였음은 《자치통감》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사료에 의해서 추측이 가능하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삼국 가운데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요동을 차지하고 있던 공손연(公孫淵)에게 장미(張彌)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위나라를 견제하려고 하였는데 공손연은 오나라가 지리적으로 멀고 믿을 만한 곳이 못되므로 위나라에게 잘보이기 위해 오나라의 사신 장미(張彌) · 허안(許晏) 등을 목베어 위나라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신들이 오나라에서 공손연이 웅거하고 있던 요동군 치소 양평(襄平)에 사신으로 보내졌는데 공손연은 이들 사신을 없애버리기 위해 수행하던 이병(吏兵: 관병)들을 일단 분리시킨 뒤 이들을 현도군에 감금해 버렸다. 그곳에 40여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한 사신들은 천신만고 끝에 고구려로 달아났는데 고구려에서는 처음에 이들을 환대했다가 나중에 이들의 신병을 공손연에게 넘겨줌으로써 이웃 나라에서 온 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괜스레 공손연에게 헛 인심만 쓴 꼴이 되고 만 일도 있었다. 
 
   동 기록에 의하면 당시 현도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현도는 요동으로부터 북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태수는 왕찬(王贊)이라는 사람인데 관할 호가 200호이다. 억류한 사신들을 적당히 감금할 시설마저 없으므로 민가를 이용하여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였다고 하였다.(玄菟在遼東東北二百里, 太守王贊, 領戶二百, 旦等皆舍於民家, 仰其飮食)[《자치통감》 권72, 위기4, 명제 청룡 원년(232) 기사 참조)  

   독자 여러분들은 이제 교치의 개념이 어떤 것인 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교치(僑置)에 대해 어떤 누구도 설명을 한 바 없으며, 한사군이 고구려 세력에 의해 이미 요동쪽으로 다 밀려난 뒤에도 낙랑군이 마치 지금의 평양 부근에 있다가 고구려 미천왕 때인 313년에 비로소 한사군이 한반도에서 소멸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일찍이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교치(僑置)"라는 말에 주목하고 조금만 연구를 했더라면 한사군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재야사학자로서 정평이 나 있던 문정창 선생의 《백제사》에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에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중국의 사록에 지명교치(地名僑置)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고 하면서 유연(劉淵) · 이웅(李雄) · 백제(百濟) · 고구려(高句麗) · 선비(鮮卑) · 부견(苻堅) · 석륵(石勒) 등이 진조(晉朝)의 요부인 유(幽) · 기(冀) · 평(平) · 사(司) · 병(幷) 등 제주(諸州)에 덮치더니 급한 한인들이 민족이동적인 세로 강남으로 달아나 남송년대까지 150년간 계속되었는데 동진 · 남송 양조는 피난해 온 강북의 사람들을 출신지별로 일정한 지역에 안치하고, 그들의 출신지명을 그 이주지명으로 하였으니 이것을 교치(僑置)라 한다고 하였다.(문정창, 《백제사(百濟史)》, 백문당, 1975년, 849쪽 참조) 
 

6. 《진서(晉書) · 지리지(地理志)》에서의 교치의 음미

 
   《진서 · 지리지)》를 보면, 특정 지역을 설명하면서 맨 마중는 그 지역이 영가지란(永嘉之亂) 이후에는 자기의 강역이 아니었음을 실토하고, 그간의 지명 변천연혁을 설명하면서 그 지역은 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제 사주(司州)를 예를 들겠다.
 
   영가지란(永嘉之亂) 후에 사주는 유총(劉聰)의 수중에 떨어졌다. 유총은 낙양(洛陽)을 형주(荊州)로 만들었고, 석륵(石勒) 때에 이르러 또 낙양을 사주(司州)라고 하였다. 석계룡(石季龍)은 또 사주의 하남(河南) · 하동(河東) · 홍농(弘農) · 형양(滎陽)과 연주(兖州)의 진류(陳留) · 동연(東燕)을 나누어서 낙주(洛州)로 하였다. 원제(元帝: 동진의 사마예)가 양자강을 건넌 뒤에도 사주(司州)를 서(徐)에 교치(僑置)하였는데 결코 원래에 있었던 곳이 아니었다. 나중에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심양(尋陽)에 잠시 정착했던 틈을 타서 홍농인들이 임시로 홍농군(弘農郡)을 세웠다. 또 남쪽에 잠시 정착했던 틈을 타서 하동인들이 한무릉군 잔릉현(孱陵縣) 경내인 상명 지방에 임시하동군(河東郡)을 세워, 안읍(安邑) · 문희(聞喜) · 영안(永安) · 임분(臨汾) · 홍농(弘農) · 초(譙) · 송자(松滋) · 대척(大戚) 등 8개의 현을 거느리면서 모두 현지에서 얹혀 살았다. 영화(永和: 목제의 연호) 5년(349)에, 환온(桓溫)(312~373)이 낙주(洛州)로 편입시켰다가 다시 하남군(河南郡)을 설치하여 사주(司州)에 예속시켰다.
 
   본문에서는 어떤 곳에서는 교치(僑致)라 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교립(僑立)이라고 하였는데 교치와 같은 말이다.
 
   교치로 인해 지리위치를 특정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었으니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진나라 말에 유유(劉裕)가 동진 북부병의 장군으로 북벌을 단행하여 중원의 여러 지역이 일시적으로 또 강좌의 소유로 되고 옛 땅을 얻은 뒤에도 주 · 군 · 현을 재설치하면서 옛날에 교치했던 것은 원래 그대로 두고 폐지하지 않은 채 겨우 새로 획득한 여러 실제의 주 · 군 위에 북녁 북(北)자를 덧붙여 구별하였다. 그러나 원가(元嘉: 남송 문제의 연호) 이후 북로(北虜: 북위)가 자주 남침하여 관서(關西)와 중원(中原)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종전에 북녘 북자를 덧붙였던 여러 주 · 군들도 강회(江淮: 양자강과 회수) 사이로 거처를 옮겨가게 되면서 계속해서 옛날에 교치했던 지명에는곳 남녘 남(南)자를 머리에 씌움으로써 남 · 북으로 대립되고 첨차 모양이 복잡하게 되자 그 후에는 설사 북녘 북자를 떼어내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 복잡한 정형은 예전 그대로였다.  
 

7. 실제 교치된 낙랑군 현의 모습의 해석 문제

 
   기술한 바와 같이 한나라가 망한 뒤 이를 대신하여 요동의 주인이 되었던 나라가 진나라 이전에는 조위(曹魏)가 있었고 조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서가 《삼국지(三國志)》인데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전장제도에 관한 부분에서 가장 주요한 지리지가 누락되어 있다. 이를 보완하여 청나라 때 홍양길이 《보삼국강역지(補三國疆域志)》라는 명저를 냈는데 아직 그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서 그 자료가 들어 있는 《이십오사보편(二十五史補編)》이란 아주 희구한 자료를 입수 정밀 검토 중에 있다. 이 자료를 잘 검토해 보아야 한나라를 뒤어었던 조위와 한반도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발흥하기 이전에는 분명히 조위의 요동군 관할에 들어 있던 낙랑군 등에 대한 기술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입수한 《이십오사보편》 자료 중 제3집에 《보삼국강역지》가 있다고 하는데 굥교롭게도 이 자료는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