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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428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한 이유 지나사서를 보면 아주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155],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도망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화하·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한예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2010. 1. 7.
마한의 영토가 왜 4000리일까? 제왕운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王來欲渡蓋斯水魚鼈化作橋梁橫漢元立昭二甲申開國馬韓王儉城주몽왕이 도망하여 개사수를 건너려 하니 고기와 자라가 다리로 변하여 가로 놓였다 한나라 원제 입소 이년 갑신에 마한의 왕검성에 개국하였다 立昭는 아마도 建昭라고 생각됩니다. 기원전 37년이죠. 삼국유사에도 고구려는 마한이라고 최치원의 말을 인용합니다.崔致遠云馬韓麗也辰韓羅也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고구려는 마한의 중심지에서 건국되었다.왕검성은 꼭 고조선 진한의 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오늘날 수도라는 말일 것이다.이 두가지를 짤막하게나마 생각해보면 1) 고구려 건국지, 졸본부여, 낙랑군 조선현, 마한 왕검성위 세 지역은 다 비슷한 지역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많습니다. 고구.. 2010. 1. 7.
정감록과 단군에 대한 기록 계봉우 저서 『과학의 원수』 중에서 제사졀 뎡감과 단군신지(神誌)와 님검(壬儉, 즉 임검)이 그 음의(音義)로 보아서 서로 같으고 선인(仙人)과 선이가 또한 그 음의로 보아서 서로 같은 것은 의심할바가 족음도없이 들어낫습니다마는 뎡감록이 곳 신지비사요 뎡감(정감)이 곳 단군이라는 최륙당(崔六堂)의 례증(例證)을 거저 범범히 보고 지낼수가 없습니다. 그는 “단군과 삼황오제(檀검과 三皇五帝)”라는 긴 론문을 지은 그중에 박달나무 아래에서 강림한고로 이 일흠을 단군이라 하엿다는 그젼 력사가의 리론에서 멀리 뛰어나 고려 중엽의 중 일연이 짛엇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쓰이어있는 단군(壇君)으로써 그 리론의 근거를 삼아가지고 례증을 들엇는데; 우리 조션말의 「」을 한ㅅ자로 번역할때에 형용이 곱고 뜻이 합하도록.. 2010. 1. 2.
구당서 거란(契丹) 열전 번역문 거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 지역인 선비족(鮮卑族)의 옛 영토에 살고 있다.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동북쪽으로 5,300 리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며 서쪽으로는 해국(奚國), 남쪽으로는 영주(營州)와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에 다다르고 있다. 이 나라의 남쪽에는 냉형산(冷陘山)이 위치하고 해국의 서산(西山)과 서로 맞대고 있으며 영역은 사방 2,000리이다. 사냥을 일삼아 왕래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군장(君長)의 성씨는 대하씨(大賀氏)이다. 정예병사 43,000명인데 8부족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만약 군사의 징발이 있으면 각각의 부족에서는 모두 반드시 합의를 해야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거병을 할 수 없었다. 수렵은 각 부족별로.. 2010.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