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428 환단고기 진개 침략 기록의 잘못된 점 진개(秦開)라는 인물은 연국(燕國) 소왕(昭王)때 사람이다.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던 연대는 BC311 - BC279이다. 즉, 진개(秦開)가 쳐들어 왔던 사건은 이때에 일어났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이상한 구절이 있다. 진개의 침략이 북부여(北夫余) 제1대 임금인 해모수(解慕漱) 19년, 즉 BC221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맞는 것일까?일부 국수주의 재야사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BC221년에 진개가 쳐들어 왔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연국(燕國)은 BC222에 진국(秦國)에 의하여 망하여 속국이 되는데, 망한 나라의 장수가 쳐들어 왔다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왜 환단고기에서는 진개(秦開)가 해모수 19년에 쳐들어 왔다고 하였을까?기록을 보면 해답은 오히려 간단하다. 《환단.. 2009. 12. 17. 기후(箕詡)가 BC 323년에 즉위했다는 환단고기 기록은 조선상고사를 베낀 것 환단고기에 기후(箕詡)가 즉위한 년도는 BC 323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오년 BC 375 가색(哥索) 경진년 BC 341 산한(山韓) 신사년 BC 340 수한(水韓) 무술년 BC 323 기후(箕詡) 환단고기를 따르면 대략 이렇습니다. 그리고 수한(水韓)에서 기후(箕詡)로 바뀌기 된 연유가 써 있는데 그 대략은 “BC 339년 연국(燕國)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왔을 때 기후(箕詡)가 싸움을 도운 후에 세력을 크게 얻어 수한이 후사가 없이 죽자 기후가 무력으로 권력을 잡았다.”라는 것입니다. 어찌 좀 의심스럽죠. 환단고기 전반을 죽 읽어보면 의심스러운 사건이 3가지가 있습니다. 연도를 맞추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건을 (소설처럼) 만들어 그 사건으로 인하여 임금이 바뀌었다고 한 부분입니다.첫째는 색.. 2009. 12. 16. 일명 동천왕 벽비라는 물건을 새롭게 해석해보자 우선 제 주장을 하기 전에 아래 두가지를 먼저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고구려 초기 위치부터 다시 확정해야겠습니다. 두번째는 삼국사기의 임금님 이름에 숨어 있는 비밀입니다. 1) 고구려 수도 이동은 아래와 같죠.BC37-AD3 홀본, 동명성왕AD3-209 국내위나암성, 유리명왕209-247 환도성, 산상왕247-342 평양성, 동천왕342-343 환도성, 고국원왕343-427 평양 동황성,427-586 평양, 장수왕586-668 장안, 평원왕 우리가 알고 있는 홀본의 위치는 집안근처도 요동근처도 아닙니다. 바로 북경근처죠. 북경 근처에는 고구려 2대 임금인 유리명왕과 한자가 똑같은 유리묘와 유리하가 있습니다. 그리고 홀본에서 국내위나암성은 돼지가 달아난 곳이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일 것입니다. 환.. 2009. 12. 16. 기준(箕準)은 산동반도에 있는 남은(南殷)에서 마한을 세웠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보니 신기한 기사가 있네요.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남은(南殷)에 대한 변증설. 일찍이 어떤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미처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이때 방 장군(龐將軍)이란 자가 전사(戰死)하였는데, 그의 아내는 기와 굽는 사람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더욱 노기(怒氣)를 품고 출전하여 용맹한 적장(賊將)을 죽이고 크게 승첩(勝捷)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 남은 무종(南殷武宗)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위만.. 2009. 12. 16. 이전 1 ··· 65 66 67 68 69 70 71 ··· 10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