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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428

송사전(宋史筌) 금(金) 열전 번역문 청장관전서 23권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개명은 민(旻), 한성(漢姓)은 왕(王)인데, 핵리발(劾里鉢)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나라씨(拏懶氏)이다. 선계(先系)는 말갈(靺鞨)인데, 말갈의 본호는 물길(勿吉)로서, 즉 고대 숙신국(肅愼國)이다. 당(唐) 초기에는 흑수(黑水)ㆍ속말(粟末) 두 말갈로서 함께 고구려에 부속되었다. 속말 말갈은 성이 대씨(大氏)인데 나중에 발해국(渤海國)을 세웠고, 흑수 말갈은 당 나라의 작위를 받아 발해에 속해 있다가 뒤에 거란(契丹)에 부속되었다. 그런데 남쪽에 있는 자는 거란에 입적이 되어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리우고, 북쪽에 있는 자는 거란에 입적되지 않아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리웠다. 그 뒤 요주(遼主) 진종(眞宗)의 이름을 피해 여직(女直)으로 개칭하였는데, 이 .. 2009. 12. 20.
여수기(余守己)라는 인물의 오류 한단고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濊邑叛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 그리고 보통 이렇게 해석합니다.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추장 소시모리를 참수하게 하였다. 한단고기의 이 기록은 BC2173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규원사화에는 이상하게도 단군임검때 나옵니다. 余守己爲濊君여수기(余守己)를 예국(濊國)의 임금으로 삼았다. 이 기록은 대체로 BC 2300년대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즉 한단고기 기록과 비교해보면 130년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결국 여수기(余守己)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했었는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濊)와 부여(夫余)이상하게도 지나의 기록에는 부여임금의 도장에 예나라 임금의 도장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夫餘...중략...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 2009. 12. 20.
왕검(王儉)과 임검(壬儉) 중에 무엇이 바른 것인가?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우고 임검성(壬儉城)에 도읍하였다고 규원사화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지나인의 사서에 위만이 나라를 세워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죠. 식민학자들은 왕험성(王險城)은 임검성(壬儉城)의 도읍이라고 주장하여 단군이 도읍한 곳에 기자가 도읍하였고, 또한 후대에 위만이 도읍하였으며 한나라는 이것을 멸망시켜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식민사학자들의 말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임검(壬儉) 두 글자에 숨어있는 그 속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조선 역사 해석의 중요한 단어 웅(熊)대부분 단군사화를 해석할 때에 웅녀를 토테미즘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환웅이 천신족(天神族)이므로 웅녀는 지신족(地神族)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 2009. 12. 20.
기자(箕子), 기수가한, 서여 그리고 고구려와 거란과의 관계 고조선의 역대단군우선 기자(箕子)가 기수가한(奇首可汗)인 것을 논의하기 전에 고조선의 왕통부터 새로이 정립해야겠습니다. 규원사화에는 제1대 환검(桓儉)에서 제47대 고열가(高列加)까지는 약 1200년간 지속되었고 환단고기에는 약 2100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매우 헷갈립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규원사화의 기록에 따르면 고열가 이후 기자가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조선 왕통 2100년간 47명인데 비하여 불조선 왕통은 약 2100년간 74명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불조선 30대 불한 서여부터는 74대 기준까지 약 1000년간은 45명이 되며 1대 치두남에서 29대 소정까지 29명이 약 1000년간 다스리게 되므로 논리상 .. 2009.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