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428

白民과 朝鮮에 대한 가설 "아사달"의 "아사"를 朝로 번역하여 나랏이름을 지었다는 말은 틀린것 같다.[1] 까마득한 옛날에 한자를 번역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삼국사기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지명만 보더라도 거의다 음차하였기때문이다. 한자로 번역하여 그 뜻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신라 경덕왕부터인것 같다. 오히려 국가명은 朝가 아니라 鮮에 촛점을 맞춰야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白民國의 白도 "흰"이 아니라 사투리 "센"이고...鮮은 "센"으로 읽어야 한다.濊도 "예"가 아니라 "쇠"라고 읽어야 한다. 설문해자에 呼會切라고 했는데 이는 "회"로 읽히나 우리말에 ㅎ이 구개음화되어 ㅅ로 곧잘 발음되기때문이다.濊가 옮겨와 살았다던 東濊로 비정될 수 있는 강릉은 동국여지승람에 鐵國이라 하였으니 鐵은 곧 "쇠"이다.. 2010. 6. 7.
현대우리말 ㅎ은 ㄱ과 ㅋ에서 분립되었다 客連郡[客 一作 各, 一云 加兮牙]客(객)을 달리 加兮(가혜)로 썼다.여기서 兮(혜)는 加(가)의 받침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고대국어에서 'ㅎ'가 아직 발생되지 않아서 대개 ㅎ이 ㅋ으로 발음되었기때문이다. 楊口郡[一云 要隠忽次], 穴口郡[一云 甲比古次], 泉井口縣[一云 於乙買串]口(구멍)의 의미를 뜻하는 말로 忽次(홀차)와 古次(고차)와 串(곶)이 서로 같은 음가로 쓰인것이다.여기서도 忽의 말머리자음이 ㅎ이 아니라 ㄱ임을 알 수 있다.그리고 次는 받침으로 쓰였다. 忽次는 "곷", 古次도 "곷"이며 串은 원래음 그대로 "곶"이다. 赤木縣[一云 沙非斤乙], 栗木郡[一云 冬斯肹]木의 뜻이 斤乙(근을)로 쓰여져 있는데 '그루'이고한편 肹(힐)이 斤乙(근을)에 해당할 수 있는데 아마도 肹을 "길"로 읽지 않았을까한.. 2010. 6. 7.
朝鮮(조선)이란 두 글자는 음차했는가 아니면 뜻을 번역했는가? 최남선의 "단군과 삼황오제"에서 어떻게 고대 중국인들이 외국의 고유명사를 표기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어서 알기 쉽게 풀이하여 적어봤다. 대체로 아래 다섯가지이다. 외국의 풍속과 법도를 적을때 고유명사의 원래 음을 따라서 음차하여 적고 만약 뜻을 취하게 되면 그렇게 적은 이유를 표시하는 것이 통례이다. 외국어를 음차하면서 문자의 편의를 위하여 변통을 웬만큼 허락하는 것도 일상적이다. 외국어를 음차하면서 할수있으면 그 뜻까지 나타내려함이 흔한 일이다. 즉, 음차를 하더라도 음이 약간 다르더라도 뜻이 부합하는 한자를 고를수도 있다는 말이다. 중국인들의 언어구속성때문에 원래 음가를 바르게 적지 못하고 별개의 말들을 만들어 표기하던지 더 심하면 아예 축약 또는 탈약하여 적는 경우가 있다. 발음기관이나 청취.. 2010. 6. 7.
삼국사기 살수(薩水)의 기록은 후대에 첨가된 것인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초기 살수(薩水)에 대한 기록은 좀 이상하다. AD32. 최리의 낙랑국 멸망 - 만약 낙랑국이 평양방면에 있었다면 분명 이 시점에서 살수(즉 청천강)을 점령하였다. AD37. 낙랑을 다시 습격하여 멸하였다.- 중복된 기록이 5년뒤에 다시 나타난다. AD32년의 것이 낙랑국이고 AD37년의 것이 낙랑군이라는 말도 있고.....여러가지 설이 있다.- 어찌됐는 확실한 것은 AD37년에는 확실하게 살수(청천강)이 고구려 땅이 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낙랑국이나 낙랑군이나 둘 중 하나는 대동강 유역에 있었기때문이다. AD44. 후한 광무제가 살수(청천강) 남쪽을 군현으로 삼다.- 이 기록에 대한 신빙성 역시 의심되고 있지만...- 살수(청천강) 남쪽을 군현으로 삼앗다고 하였으므로 이 시.. 2010.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