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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428

신당서 지리지 발해(渤海) 번역문 당나라는 여러 기미주(羈縻州)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국경 근처에 있었으므로 오랑캐 부락에 이름을 붙였다. 사방의 오랑캐가 중국과 교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수들이 토벌하거나 칙사들이 방문할 때 나아간 길을 기록해 두었다. 천보(天寶) 연간에 현종(玄宗)이 여러 주변 나라들의 거리를 물으니 홍려경(鴻臚卿) 왕충사(王忠嗣)가 서역(西域)의 지도로 대답하니 겨우 십여국에 불과하였다. 그후 정원(貞元) 연간에 재상을 지냈던 가탐(賈耽)1)이 사방 영역의 거리를 고찰한 것이 가장 상세하였으니, 변방에서 사방 오랑캐로 들어갈 때 홍려시(鴻臚侍)에서 통역하는 자치고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사방 오랑캐로 들어가는 길과 관문과 요새로 가장 중요한 것이 일곱 개가 있다. 첫째는 영주(營州)에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2009. 12. 28.
환단고기 상충된 기록 "불" 한단고기 상고사 부분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불의 발견"입니다. 문제점이 두가지로 요약되는데 불의 발견 연대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불의 발견이 어느 곳에서는 한국(桓國)이라고 했다가 어느 곳에서는 단국(檀國)이라고 했기때문입니다. 건국 후 불을 발견했다고 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역사상 상식적으로 생각해볼때 불을 발견하여 무리를 짓고 살다가 국가가 생겨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한단고기 기록은 반대로 국가를 건설하고 불을 발견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충된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제가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1) 불의발견 연대가 맞지 않는 이유는 개천(開天)의 주체자가 다르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桓國)에서 불을 발견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삼성기전 상편》 日降童女童.. 2009. 12. 28.
문원영화 발해(渤海) 번역문 홀한주자사(忽汗州刺史)·발해군왕(渤海郡王) 대무예(大武藝)에게 칙서를 보낸다. 경이 형제지간에 서로 다툰 탓에 문예(門藝)가 곤궁하여 나에게 돌아왔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를 서쪽 변경에 둔 것은 경을 위한 까닭이었으니, 또한 잘못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자못 제 자리를 얻은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경은 바다 모퉁이에 있으면서 당의 문화를 항상 익혔으니, 형제간의 우애 같은 것을 어찌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골육간의 정은 깊어 스스로 차마하지 못하는 바이다. 문예가 비록 과오가 있더라도 또한 그 뉘우침을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경은 마침내 (문예를) 데리고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요청하지만 (그 의도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 짐은 효성와 우애로써 천하에 가르쳐왔으니 어찌 이런 일을 차.. 2009. 12. 28.
후한서 읍루(挹婁) 열전 번역문 푸른 돌로 화살촉을 만들고, 촉에는 모두 독약을 바르므로 사람이 맞으면 즉사한다. 배를 잘 타고 노략질을 좋아하므로 이웃 나라들이 꺼리고 걱정거리로 여겼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동이(東夷)나 부여(夫餘)는 음식을 먹을 때 거의 모두 그릇(俎豆)를 사용하지만, 오직 읍루(挹婁)만은 법도가 없으니 (동이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읍루(挹婁)는 옛 숙신(肅愼)의 지역에 있는 나라이다.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들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서로 다르다. 오곡(五穀)과 마포(麻布)가 있으며, 붉은 옥(赤玉)과 좋은 담비가 .. 2009.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