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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428

한단고기 마한세가 번한세가 역년을 비판한 강단사학에 대한 반론 강단사학계는 한단고기에 나온 단군세기, 마한세가, 번한세가의 역년(歷年)이 상식에 어긋난다고 비판합니다. 이유는 고조선 약 2000년간 다스린 임금이 47명인데 번한의 임금은 74명이며 마한의 임금은 35명이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번한의 임금은 앞의 1000년간 치두남에서 소정까지 29명인데 뒤의 1000년간 서우여에서 기준까지 45명이기 때문에 더욱더 믿을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기만하고 역사의 큰 흐름을 보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한단고기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단군, 번한, 마한이 차이가 나게 되었는지 개천(開天)부터 시작하여 그 대략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1. 한님나라(桓因) 桓因이란 환국의 오자도 아니.. 2012. 9. 5.
한(漢)의 낙랑군은 요동군의 서쪽에 있었다. 보통 요동군 동쪽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서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낙랑군은 요동군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가운데 인용된 위략을 보면 燕乃遣将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溴水..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여 서방 2천여리를 취하고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였다. 한(漢)나라에 이르러 노관을 속국 연나라의 왕으로 삼고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를 패수(溴水는 浿水의 오자)로 삼았다. - 사기 조선열전 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築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逺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 연 나라는 전성기때에 진번 조선을 공격하여 자기땅으로 삼아 장새를 쌓고 관리를 두었다. 진이 연을 멸하여 요동 밖 요(.. 2012. 9. 5.
환단고기 상충된 기록 "불" 한단고기 상고사 부분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불의 발견"입니다. 문제점이 두가지로 요약되는데 * 불의 발견 연대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불의 발견"이 어느 곳에서는 한국(桓國)이라고 했다가 어느 곳에서는 단국(檀國)이라고 했기때문입니다. * 건국 후 불을 발견했다고 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역사상 상식적으로 생각해볼때 불을 발견하여 무리를 짓고 살다가 국가가 생겨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한단고기 기록은 반대로 국가를 건설하고 불을 발견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충된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제가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1) 불의발견 연대가 맞지 않는 이유는 개천(開天)의 주체자가 다르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桓國)에서 불을 발견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삼성기전 상편》.. 2012. 9. 5.
기후(箕詡) 조선의 수도는 하북성 탁주시(涿州市) 기준이 도망한 곳은 압록강 이남이 아니라 산동과 하남 근처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글을 다시 인용하여보면...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남은(南殷)에 대한 변증설. 일찍이 어떤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미처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위 글을 토대로 단순히 은나라 수도에 마한이 있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준이 도망가기 전의 수도는 과연 어디였을까 기록을 토대로 찾아봤습니다. 潛夫論卷九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其後韓西亦姓韓為衛.. 2012.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