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112 (백송님) 남당(南堂)의 일사(逸史)와 현록표도(懸鹿漂都) 미스테리 백송님. 원래 이글은 백송님의 ‘답(答)글’에 대한 ‘댓글’로 쓴 것인데, 쓰다보니 양(量)이 많아서 독립된 재(再) ‘답글’로 올리게 된 글입니다. / 백송 님. /라디오 님. 먼저, 좌계가 약간의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김성겸 님’이 해석하는 글에 대해서 비교해서 검토케하는 사료(史料)- 문건(文件)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김성겸 님’이 지금 해석하고 있는 글에 대해서는 좌계는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高句麗史抄/高句麗史略卷之一’이라는 순서로 나가는 문건(文件)중에 고구리 왕(王)의 세계(世系)에 따라, 맨 처음에는 ‘始祖紀’ 그 다음에는 ‘광명대제기(光明大帝記)’ 하는 식의 기년체(紀年體)로 기록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에 .. 2009. 11. 18. 高句麗史抄/高句麗史略卷之一/始祖<芻牟大帝>紀 김성겸님의 고구려사초에 대한 탁월한 해석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다만 몇가지 대목에 관하여 라디오님이 연결해 놓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원문사진파일 高句麗史略을 근거로 제 견해를 첨가해 봅니다. 다음은 고구려사략의 기록입니다.(원문은 정성일님 댓글인용) 元年 甲申 八月練兵於汗濱壯士來皈者二千余人. 원년 갑신 8월 한수가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명에 복종하고 참가한 장사가 이천여명이었다. 上與后觀稼而歸喜年大豊, 曰黍稷豆梁足矣奈無麥, 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 自足鳩群含麥來播者無數名曰鳩麥 황상과 황후가 농사현황을 둘러보고 돌아가며 올해는 대풍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올해는 기장과 콩 조(粱)는 충분한데, 보리가 없으니 어찌할까(보리씨앗이 없었다는 뜻인 듯)”. (이때에) 누군가 기르는 것이(史는 使.. 2009. 11. 18. 남당유고 구지왕기가 진짜인 이유 남당사료 중에 백제왕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곳에 보면 구지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입니다. 그런데, 구지왕기에는 공손씨가 구지왕에게 딸을 주는 기록이 보이며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구태임이 분명합니다. 위구태는 부여의 왕이지 백제의 왕이 아니므로 구지왕기는 가짜인듯 하나.... 백제와 공손씨가 매우 가까운 동맹을 맺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입니다. 백제본기 고이왕 5년 (238년) 여름 4월에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른 용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 나갔다. 대체 이 기록이 뭔가하고 봤더니 해답은 동사강목에 있었습니다. 권2 상 백제 고이왕 5년 (위 명제 경초 2년, 238년) 황룡(黃龍)이 궁궐문에서 날아 나왔다. ○ 이 해에 위의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쳐서 .. 2009. 11. 18. 남당 박창화 백제왕기 중 구지왕기가 가짜인 이유 요즘 남당 박창화가 남긴 사료들이 문제가 되는데요... 그 중 백제왕기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구지왕기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없는 왕이죠. 구지왕기의 기록을 보니 삼국지 부여전에 나오는 위구태더군요. 우선.... 구지왕기에 분명히 공손씨로부터 딸을 받아 결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지왕편 三年 庚午 三月 公孫度王以女宝婁歸王曰 “聞王未有室家 故敢以賤息往 奉巾櫛 幸勿棄焉” 王乃以白馬三雙爲幣以娶焉. 十月 王助遼富山之軍 大獲捷利. 3년(AD190) 경오 3월 공손탁왕이 딸 宝婁(보루)를 구지왕에게 시집보내며 말하기를 “왕이 室家(실가)가 없다고 들었는데 고로 감히 천한 자식을 보내니 아내로 삼고 행여나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내 백마 3쌍을 .. 2009. 11. 18. 이전 1 ··· 22 23 24 25 26 27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