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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백송님) 남당(南堂)의 일사(逸史)와 현록표도(懸鹿漂都) 미스테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백송님.
원래 이글은 백송님의 ‘답(答)글’에 대한 ‘댓글’로 쓴 것인데, 쓰다보니 양(量)이 많아서 독립된 재(再) ‘답글’로 올리게 된 글입니다.  

/ 백송 님. /라디오 님.

먼저, 좌계가 약간의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김성겸 님’이 해석하는 글에 대해서 비교해서 검토케하는 사료(史料)- 문건(文件)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김성겸 님’이 지금 해석하고 있는 글에 대해서는 좌계는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高句麗史抄/高句麗史略卷之一’이라는 순서로 나가는 문건(文件)중에 고구리 왕(王)의 세계(世系)에 따라, 맨 처음에는
‘始祖<芻牟大帝>紀’ 그 다음에는 ‘광명대제기(光明大帝記)’ 하는 식의 기년체(紀年體)로 기록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댓글로 올린 ‘정성일’ 선생이 ‘해석 준비중’인 문건(文件)의 정확한 명칭(名稱)이 무엇인지 좌계는 약간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고구리(高句麗) 사략(史略)’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高句麗史略卷之一’ 과 같은 순서로 나가는 글의 앞에 총론(總論)격(格)으로 쓰여진 것이 ‘고구리 사략’인지?
하는 구성(構成)상의 성격과 그 정확한 명칭에 대해 좌계는 약간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확한 구분이 없으니, 사실 비교해서 검토할 때, ‘어느 문건’의 ‘어떤 부분’과 비교해보면 ‘무엇이 모순을 일으킨다.’는 비교 검색 자체가 약간 어색해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꼭 ‘댓글’로써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백송님.
올리신 글 즉 “[re] 高句麗史抄/高句麗史略卷之一/始祖<芻牟大帝>紀” 에 대해서, 님의 해석과 견해(見解)에 대해 좌계의 솔직한 의견을 올리겠습니다.  

좌계가 올리는 글은 님의 해석과 관련해서 다음 세 가지 내용으로 압축됩니다.

*(1)* “사(史)는 사(使)의 오기(誤記)가 아니다.”는 것을 고구리의 ‘통신-비둘기’와 관련해서
*(2)*  고구리(高句麗)의 수신(隨神)과 ‘동맹(東盟)’을 위한 ‘태양여행’과 관련해서
*(3)*  현록표도(懸鹿漂都)와 ‘국제-배달화백-지도권과 관련해서

이상 세 가지의 문제는 좌계가 볼 때, 남당(南堂) 선생의 일사(逸史)를 해석함에 있어 계속 등장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사천(史穿) 김성겸 님’과 ‘정성일 님’의 해석을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를 사전(事前)에 검토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1.  사(史)는 사(使)의 오기(誤記)가 아니다.

(원문(原文) 및 해석(解釋)의 옮김)
上與后觀稼而歸喜年大豊, 曰黍稷豆梁足矣奈無麥, (***)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 自足鳩群含麥來播者無數名曰鳩麥
황상과 황후가 농사현황을 둘러보고 돌아가며 올해는 대풍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올해는 기장과 콩 조(粱)는 충분한데, 보리가 없으니 어찌할까(보리씨앗이 없었다는 뜻인 듯)”. (***)(이때에) 누군가 기르는 것이(史는 使의 오기인 듯)확실한 비둘기 한쌍이 보리를 물고 뜰에 내려왔다. 이는 곧 성모궁에서 기르는 비둘기였다.(***) 이어서 많은 비둘기 무리가 보리씨앗을 물고 와서 파종하는 것이 무수하였다. (그래서 이 보리를)이름하여 <비둘기 보리>라고 하였다.

(좌계의 의견)

위 원문(原文)및 해석(解釋)에 있어서, (***) 사이에 있는 ‘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의 해석에 있어서 사(史)를 사(使)의 오기(誤記)라고 가정(假定)하고 있으나, 좌계가 볼 때에는 오기(誤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史)의 뜻을 일반적으로 ‘역사(歷史)’의 의미로 쓰고 있지만, 원래의 뜻은 ‘샤만(shaman)’ 즉 무당을 뜻하는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가. 전거(典據)및 용례(用例)

주역(周易) 손위풍(巽爲風) 괘(卦)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구이(九二) 손재상하(巽在牀下) 용사무분약(用史巫紛若) 길무구(吉無咎)’

이 구절에서 사(史)의 뜻은 제사때 연혁(沿革)등을 적은 제문(祭文)을 신(神)에게 고(告)하는 샤만을 뜻하고, 반면 무(巫)는 접신(接神)해서 그 뜻을 말해주는 샤만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이(九二)의 뜻은 “바람(=‘겸손’을 뜻하기도 함)이 상하(牀下)에 있다. 하의상달(下意上達)하는 사(史)와 상의하달(上意下達)하는 무(巫) - 두 종류의 샤만을 부려서 분분(紛紛)한 의견을 신(神)과 소통한다. 길(吉)하여 뒤탈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史)가 ‘샤만’으로써 자꾸 신에게 연혁(沿革)을 아뢰는 것이 원인이 되어,  사(史)의 뜻에 역사(歷史) 즉 History의 뜻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나. ‘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의 뜻

따라서 위 인용문인 ‘何須史雙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에서 해석상의 핵심적인 구절은 ‘하수사(何須史)’가 됩니다.  이때 하(何)는 ‘어떤 이’ 즉 ‘어떤 샤만(=사(史)’이 되는 것이지요.  
하수사(何須史)의 뜻은 ‘어떤 사(史)가 잠깐 사(史)하니 - 이는 신(神)에게 그 앞의 말 즉 “올해는 기장과 콩 조(粱)는 충분한데, 보리가 없으니 어찌할까(보리씨앗이 없었다는 뜻인 듯)”을 고(告)하니 하는 뜻입니다.  
그 결과 ‘한 쌍의 비둘기가 보리를 물고 뜰에 내려왔다.’가 ‘雙鳩含麥而下庭’의 뜻이며,  이 쌍구(雙鳩)의 정체가 성모궁(聖母宮)에서 왔다는 것이 ‘乃聖母宮鳩也’의 뜻입니다.

따라서 별표(*)로써 의견을 표현한 “*황상이 백성을 위해 곡식을 걱정하자 이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또한 성모(유화)의 사랑이 비둘기를 내려보낸 것으로 연결됩니다.”은 정확합니다.
단 샤만(shaman)인 사(史)의 보고(報告)를 통해서 이런 이적(異蹟)이 있어났다는 것이지요.  

다.  고구리(高句麗)의 ‘통신-비둘기’에 대해

좌계가 백송 님이 올린 사료(史料)를 보고 매우 놀라는 것은 고구리(高句麗)에는 고도(高度)로 발달된 통신-비둘기가 있었고, 그 센터(center)에 유화(柳花)의 성모궁(聖母宮)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귀소본능(歸巢本能)을 활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샤만(shaman)인 사(史)와 ‘정신적인 소통’이 되어서 ‘알아서 척척 보리 씨앗’을 가져오는 그런 통신-비둘기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또한번 나타나는 것이 ‘백송 님’께서 사천(史穿) 선생께 자신의 견해를 밝힌 아래의 글에 다시 한번 나타납니다.

(1)  제사(祭祀)인 수(隨)의 경우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과 ‘백송 님’의 해석인 * 의 옮김)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 十月,祀隧祭豊<扶餘><鳩含>麥,而來.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고 <부여><구함>의 보리농사가 풍년들기를 빌고 돌아왔다

*隧는 <신수神隨>, 즉, “시월 풍년 감사 제사를 신수에서 지냈다. 부여의 비둘기가 보리를 물고 왔다.”로 해석이 됩니다.

(좌계의 생각)
좌계는 ‘백송 님’의 신수(神隨)에 대한 해석은 달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이 옳다.”고 봅니다. (이점 조금 후에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상기(上記) 문장에서 두 분의 의견을 합치면 ‘十月,祀隧祭豊<扶餘><鳩含>麥,而來’의 구절은 “10월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祭祀)인 수(隨)를 지냈는데,  (이 때) 부여의 비둘기가 보리를 물고 왔다.”로 통합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이런 제사(祭祀)인 수(隨)에서 ‘샤만(shaman)’인 사(史)가 신(神)에게 하의상달(下意上達)하자 이런 통신을 받아들여 ‘보리를 물고 온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2) 동명대회(東明大會)의 경우

이처럼 사(史)가 무엇을 신(神)에게 하의상달(下意上達)하면, 성모궁(聖母宮)에서 ‘통신-비둘기’가 ‘보리를 물고 오는 현상’이 ‘백송님’이 올린 자료에 의해 또한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송님이 올린 사료(史料))

三年 丙戌  十月設東明大會於神隨, 群鳩播麥於神田.

삼년 병술 시월 동명대회를 <신수神隨>에서 열었다. 많은 비둘기가 보리를 신전(神田)에 파종하였다.

이 사료(史料)가 중요한 것은 신전(神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통신-비둘기가 있는 센터(center)인 성모궁(聖母宮)에서 ‘통신-비둘기’가 보리를 물고 온 정도가 아니라, “동명대회(東明大會)를 여는 부근에 신전(神田)을 만들었는데,  수백 마리, 수천 마리 군구(群鳩)들이 성모궁(聖母宮)에서 날러와서 우리가 모내기 하듯, 신전(神田)에 보리를 파종(播種)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입으로 땅을 ‘콕 콕’ 찍어서 ‘보리 씨앗’을 심었다. -이것이 파(播)임”는 것입니다.  

샤만(shaman)인 사(史)를 통해서 ‘통신-비둘기’를 통해, ‘보리의 파종(播種)’ 이런 이야기가 분명히 서술(敍述)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튼 유의해야합니다.

이런 파종 기술까지 가능하니 이 비둘기로써 전서구(傳書鳩) 역할 정도야 고구리(高句麗)라는 나라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요.  

2.  고구리(高句麗)의 신수(神隨)에 대해서

백송님.
그런데 님께서는 “*隧는 <신수神隨>, 즉, 시월 풍년 감사제사를 신수에서 지냈다. 부여의 비둘기가 보리를 물고왔다로 해석이 됩니다.”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 신수(神隨)가 하나의 제천(祭天)하는 장소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천(史穿) 선생께서 이 수(隨)를 ‘수혈(隨穴)’로 생각하는 것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리(高句麗) 조(條)의 기록과 속칭 국동대혈(國東大穴)이라고 치는 특정한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고 좌계는 봅니다.  

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리(高句麗) 조(條)의 원문(原文)

(원문(原文)과 해석(解釋))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簿頭著 , 如 而無餘,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이 수신(隨神)을 맞아서 ‘나라의 동쪽의 높은 곳 (=國東上)’에 모시기 위해 (수신(隨神)을 행차(行次)시켜 한바퀴) 돌려(=환(還)) 제사(祭祀)를 지낸다.  (이 수신(隨神)은) ‘나무로 된 수신(隨神)이어서(=木隧)’ 이를 놓는 곳이 신좌(神坐)가 된다.  

나. 해석에서 주의(注意)해야할 점.

백송님
좌계가 볼 때에는 위 원문(原文)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라고 봅니다.  

(1) 태양(太陽)여행에 대해.

분명히 고구리(高句麗) 나라의 동쪽에 큰 대혈(大穴)이 있는데,  이 이름을 수혈(隨穴)이라고 칭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압록강에 이 대혈(大穴)이 발견되었고,  이는 산(山)을 관통해서 ‘뜨는 태양 빛’이 특정한 장소를 비추는 그런 성소(聖所)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동맹(東盟)이라는 제천(祭天)행사가 있을 때,  이 대혈(大穴) 속에 있는 수신(隨神)을 - 나중에 보면 이것이 ‘나무로 된 것’ 즉 목수(木隨)임을 알 수가 있음 - 모시는 과정이  영수신(迎隧神)인데,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여는 곳까지 이 목수(木隨)가 긴 여행을 하게 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고구리(高句麗)가 중국 하북(河北)에 있었음으로 실로 수천리(數千里)의 ‘맞이 굿’이 펼쳐진다고 상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목수를 국중대회(國中大會)가 열리는 곳 - 하북(河北) 어디인가에 있는 국내성(國內城)의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바로 환(還)으로 나타나고, 다시 ‘동쪽의 높은 곳’에 이미 설치(設置)된 신좌(神坐)에 모셔지는 것으로 동이전(東夷傳)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수혈(隨穴)이라는 곳에서 신좌(神坐)가 모셔진 곳까지의 이런 여행이 일종의 ‘태양여행’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2)  태양여행의 시원(始源)을 중시한 ‘김성겸 님’의 해석

따라서 사천(史穿) 선생께서 이미 해석한 것은 아래의 구절은 이런 ‘태양여행’의 첫 출발지를 중심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三年丙戌,. 十月,祀隧群,鳩播麥于神田.
10월, 동굴무덤들에 제사하고, 신전(神田)에 보리를 편안하게 파종하였다

그리고 ‘백송 님’께서 “* 隧는 <神隨>로서 지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로 의견을 단 것은 태양여행이 끝나고, 목수(木隨)가 모셔진 신좌(神坐)를 지명(地名)으로 생각한 듯 싶습니다.
그러나 좌계 생각에는 수(隨)는 목수(木隨)가 ‘태양여행’을 마치고 모셔진 신좌(神坐)로써 가변적(可變的)인 장소입니다.
왜냐?  동맹(東盟)이란 국중대회를 때로는 국내성(國內城)에서 지낼 수도 있고, 때로는 안시성(安市城)에서 지낼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즉 개최지(開催地)가 어떠하든지 간에 무조건 태양의 자리인 국동상(國東上)에 모셔진다는 것입니다.  

3.  현록(懸鹿) 표도(漂都)에 대해서


백송님은 ‘올리신 사료(史料)’에서 현록(懸錄)이란 이상한 표현에 대해서 “이 뜻이 무엇일까?”라는 의견을 올리셨습니다.

(올리신 원문(原文))

二年 乙酉 六月松讓懸鹿於蟹原. 七月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讓自知德薄獻國爲臣. 上以其地爲故國原而松讓爲多勿候. 多勿復舊?之意也. 盖聖父解慕漱與聖母柳花逍遙之地也.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해원에서 사슴을 내 걸었다.(이것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7월 큰비가 내려 도읍이 물에 잠기자 황상(皇上)이 군사(軍師)를 동원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송양(宋讓)은 스스로 덕(德)이 없음을 알고 나라를 바치고 신하가 되었다.
황상(皇上)이 그 땅을 고국원(故國原)으로 삼고 송양(宋讓)을 다물후(多勿侯)로 삼았다. 다물이란 “옛 것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그 땅은 위대한(盖:숭상하다) 성부 해모수께서 성모 유화와 더불어 소요하던 땅이다

(좌계의 현록(懸鹿)에 대한 의견(意見))

가.  비류국(沸流國)과 고구리(高句麗) 초기(初期)의 수상(水上) 선박생활에 대해

이 점에 대해서는 좌계는 현록(懸鹿)과 표도(漂都)에 대해, 좀 독특하나 - 이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는 의견임 - 뚜렷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송양(宋讓)의 비류국(沸流國)은 물론, 고구리(高句麗)의 초창기(草創期)에는 “모두 수상(水上)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북(河北)의 어느 강가나 호수 위에 선박(船泊) 생활을 한 것이 분명히 들어나는 것입니다.

1)  삼국사기 고구리(高句麗) 동명성왕 편에서 발췌

(원문(原文)과 해석)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다만 비류수(沸流水) 수상(水上)에 생활하면서 ‘갈대’를 엮어 선상옥(船上屋)을 짓고 살았다.  나라를 고구리(高句麗)로 칭했기에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姓氏)로 했다.  

2)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절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백송님
좌계가 볼 때에 삼국사기 고구리 동명성왕 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의 구절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結廬於沸流水上居之’이 핵심적인 문장으로 생각합니다.

가)  수상거지(水上居之)는 수상(水上)-선박(船泊)생활을 뜻한다.  

흔히들 ‘沸流水上居之’를 해석함에 있어서, 비류수 ‘상류(上流) 강가’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좌계가 볼 때에는 이는 한문(漢文) 어법(語法)에 전혀 안맞는 해석입니다.  
만약 “‘비류수 상류(上流) 강가’에 갈대를 엮어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을 한문(漢文)으로 쓸려면 ‘지비류수(至沸流水) 결로이상류거지(結廬而上流居之)’라 해야 됩니다.
이것이 너무 긴 문장이라고 생각하면, ‘결로어비류수원거지(結廬於沸流水‘源’居之)’로 해야되는 것이지요.

백송님.
한문(漢文) 어법(語法)상 아주 초보(初步)적인 이야기이어서 굳이 이처럼 상세히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사학자(史學者)들이 죄 ‘비류수 상류’로 해석하니깐 어쩔수 없이 원문(原文)을 소개시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수상(水上) 스키’를 탄다는 것은 ‘물 위’에서 ‘스키’를 타는 것이지, 상류(上流)에서 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초보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나)  표도(漂都)현상과 ‘선박(船舶)으로 된 도시(都市) 이야기’

백송님.  
따라서 표도(漂都)라는 말은 이처럼 모든 집들이 선박(船泊)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홍수(洪水)가 졌을때, 이런 선박(船舶)으로 된 배들 - 다시 말하면 도시(都市) 전체가 떠내려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비류국(沸流國)은 그 중요 도시(都市)가 비류수상(沸流水上)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는 삼한(三韓)의 최대(最大)였던 마한(馬韓)이 아시아 최대의 해운국(海運國)으로써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호수(湖水) 위에 선박(船泊) 생활을 하다가, 무역(貿易)이나 해운(海運)의 중요사업이 있을 때에는 집인 동시에 선박(船舶)을 타고,  홀연히 전 도시가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그 역동성과 접맥(接脈)이 되어 있는 것으로 좌계는 봅니다.

 또한 고주몽-일행 가운데 ‘마름옷[水藻衣]을 입은 무골(無骨)’이 있는 것도,  삼한(三韓) 특유의 하이-테크(high-tech)인 ‘고래’가 배(船)를 끌게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무골(無骨)은 ‘미역으로 된 옷’을 입고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다) 고주몽-일행이 탄 선박(船舶)과 ‘갈대로 엮은 집’

여기서 우리는 “고주몽-일행이 타고온 선박(船舶)이 어떤 것일까?”하는 상상(想像)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그것이 호수(湖水)에서 하는 화백회의 즉 배달화백(倍達和白)에서 ‘속이 빈 피라미드’인 허달성(虛達城) 혹은 금성(金城)이라고 칭해지는 오늘날 다시 나타나도, 최고급(最高級)으로 되어 있는 수상(手上)구조물(構造物)입니다.
마치 오늘날 해저(海底) 석유(石油)를 캘 때,  부구(浮具)를 저 해파(海波) 밑으로 내리는 장치를 비롯한 온갖 상상을 초월한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떠있는 성(城)’에 가까운 것이지요.
그래서 파도(波濤)에 미동(微動)도 안함은 물론,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소통해서 ‘고래’가 끌고 가는 그런 배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최고급의 하이-테크(high-tech)로 된 ‘움직이는 배’가 비류수상(沸流水上)에서 왜 새삼스럽게 ‘갈대 집을 엮어 선상옥(船上屋)’을 만들었나?!”하는 것입니다.

이는 계속 선상(船上) 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즉각 이해(理解)할수 있는 극히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육지(陸地) 냄세가 그리운 것이지요.  흙 냄세, 풀 냄세, 나뭇가지 속에서 우는 새들..이런 정취(情趣)가 거의 홈-시크(home- sick)에 가까운 것이지요.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갈대로 엮은 집’을 ‘쇠로 된 집’인 금성(金城) 위에 짓는 것입니다.
짓기도 편하거니와, 신기하게도 새(鳥)들이 거부감 없이 날아옵니다. 또 신기하게도 호수(湖水)나 바다 위임에도 불구하고, 육지(陸地) 냄세를 풍기게 됩니다.  
고대 사회에  ‘갈대로 된 배’가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수상(水上) 생활 위임에도 불구하고 육지(陸地)와 같은 공기(空氣)의 흐름을 만들기 때문인 것이지요.  

3) 왜 현록(懸鹿)인가?!

백송 님.

그런데 비류국(沸流國) 국왕(國王) 송양(宋讓)과 고주몽-동명성왕께서 싸울때 항시 현록(懸鹿)이란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잘아시다시피 이는 ‘사슴을 걸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슴이란 용어는 ‘누가 중원(中原)의 사슴을 차지할 것인가?!’는 뜻, 즉 중국대륙의 백성들을 상징화하여 나타내는 유명한 비유(譬喩)입니다.
따라서 현록(懸鹿)이라 함은 상징적 비유로써 “누가 중원대륙의 백성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하는 상징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  비류국(沸流國)의 중요성 - 한사군(漢四郡)에 ‘배달화백(倍達和白)에 대한 노우-하우(Know-how)’를 지도(指導)하기 위해 투입(投入)된 국가

백송님.
좌계가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고구리(高句麗) 관련 사료(史料)를 볼 때, 가장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漢)나라와 고조선-부여 연합군이 싸워서 고조선-부여 연합세력이 승전(勝戰)의 결과로 ‘국제(國際) 배달화백(倍達和白) 특구(特區)’로 한사군(漢四郡) - 이는 “설치비용을 패전국인 한(漢)이 지불한다.”는 의미임. -을 설치했는데,  지금까지 좌계는 이런 배달화백을 지도하는 국가가 고조선 혹은 부여라고만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당(南堂)선생님의 사료(史料)를 보면,  고조선및 부여의 ‘배달화백에 대한 노우-하우(Know-how)를 지도(指導)하기 위해 투입(投入)된 국가가 바로 비류국(沸流國)임이 들어난다는 점에서 매우 감격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주몽과 송양(宋讓)이 환풍호우(換風呼雨)하는 법술(法術) 싸움으로 거의 신화화(神話化)해서 설명하는 것은 한사군(漢四郡)으로 칭해지는 곳에서 ‘중국대륙’에 펼쳐지는 배달화백에 대한 종주권(宗主權) 혹은 지도권(指導權)에 대한 싸움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현록(懸鹿)이란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나) 현록(懸鹿)의 또 다른 의미 - 목경권(牧鯨權)의 싸움

백송 님.
좌계가 이곳에 쓴 글 가운데 ‘(*) 고래: 우리 민족의 최초의 가축, 하이테크(high-tech)의 문(門)’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좌계가 규명한 것은 사슴고기가 고래들을 사육(飼育)할 때, 고래의 젖(=유(乳))이 잘 나오도록 준 ‘먹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돌고래를 ‘이루가’라고 말하는데 이를 한자(漢字)로 쓸때에는 입록어(入鹿魚)라고 합니다.
즉 ‘사슴고기가 바다에 들어갈 때 나오는 물고기’가 바로 ‘돌고래’라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호수(湖水), 큰 강(江), 혹은 바다에서 배달화백(倍達和白)을 할 때에는 이를 받쳐주는 ‘물 위에 떠있는 성(城)’ 소위 허달성(虛達城) 혹은 금성(金城)이라 칭해지는 ‘물 위에 떠있는 성(城)’이 있었는데, 이를 끄는 동물이 ‘고래’였고,  이 ‘고래 먹이’를 걸고 어떤 싸움을 벌렸다고 하면,  결국 이는 ‘고래를 방목(放牧) 사육(飼育)할 권리’ - 즉 목경권(牧鯨權)을 걸고 싸웠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라)  왜 현록(懸鹿)과 표도(漂都)가 다른 시점에 나타나는가?

백송님
그런데 백송님께서 정확히 문제제기했듯이,  이 현록(懸鹿)하는 시점과 표도(漂都)하는 시점이 다릅니다.

이를 백송님께서는 사천(史穿) 선생의 글을 일단 적시(摘示)한 뒤, 그 의견을 말씀하였습니다.
- 백송님의 글 인용 -

◎二年,乙酉, 六月,<宋讓>,懸鹿漂都,以國來獻,封爲多勿候(多勿故鄕之意□慕漱之地也).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懸鹿漂都하여 나라를 (통째로) 바쳐오기에, <다물후>로 삼았다(다물고향지의□모수지지야).

*懸鹿漂都(현록표도):이것만 보면 의미가 안통하는데 고구려 사략을 보면 ‘현록’과 ‘표도’는 각각 다른 달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이미 인용한 원문(原文)이 있습니다.

원문(原文) : ‘二年 乙酉 六月松讓懸鹿於蟹原. 七月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또한 그 해석도 이미 해놓았습니다.  

해석(解釋) :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해원에서 사슴을 내 걸었다. 7월 큰비가 내려 ‘도읍이 물에 잠기자’ 황상(皇上)이 군사(軍師)를 동원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 백송님의 글 인용 마침 -

그런데 좌계의 솔직한 의견으로는 위 해석에서 , 표도(漂都)를 “도시(都市)가 물에 잠기다.”로 해석했는데,  표(漂)의 뜻은 ‘잠기다’가 아니라 ‘떠다니다’ ‘흐르다’로 해석하여야합니다. 이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선박(船舶)으로 호수(湖水)나 ‘강(江)가’에 있는 도시(都市)가 흘러 나가다.”인 것이지요.
만약에 ‘물에 잠기다’의 뜻이라면 잠도(潛都)혹은 몰도(沒都)가 되어야 어법(語法)상 맞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1) 무엇에 대한 고주몽-동명성왕과 비류국의 송양의 싸움인가?

결국 이는 고주몽-동명성왕과 비류국(沸流國) 송양이 이미 고조선과 부여 연합세력이 한(漢)나라와 전쟁에서 승리해서 ‘국제-배달화백-특구’의 계승권을 가지고 싸움을 시작한 것이 바로 현록(懸鹿)이라는 것이지요.
*(1)* 첫째는 목경권(牧鯨權)을 걸고 한 싸움이고,
*(2)* 둘째는 중원(中原)의 백성을 걸고 - 즉 배달화백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건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이 싸움이 일어난 과정을 아주 리얼(real)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 들어 납나다.

(2)  하북(河北) 해안가인 해원(蟹原)

원문(原文) : 六月松讓懸鹿於蟹原.:
해석(解釋) : 6월에 해원(蟹原)에서 송양(宋讓)이 ‘사슴을 걸다(=현록(懸鹿)’

중요한 것은 이 지명 해원(蟹原)입니다.  오늘날 정확한 지명(地名)을 찾을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蟹)란 글자가 ‘게’등의 갑각류(甲殼類)를 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는 현 중국 하북(河北)의 어느 해안가 지명임에는 분명한 것이지요.

그런데 아마도 송양(宋讓)은 이 해안가인 해원(蟹原)에 ‘어마어마한 분량의 사슴고기 - 살아있는 사슴을 목장(牧場)에 둘수도 있음’를 걸고, “ ‘목경권(牧鯨權)’과 ‘중국대륙에 대한 배달화백’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화백회의로써 결정하자! ”는 일종의 포고(布告)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이미 잘 알려진 유화(柳花)의 성모궁(聖母宮)에 있는 비둘기가 천하(天下)로 흩어져나갔겠지요.  
그래서 천하(天下)의 선박들이 모여들었고,  - 좌계 생각에는 이들이 모여드는데 한 7일이나 10일 정도는 걸렸을 것임.  

(3) 20일 정도의 배달화백을 통한 ‘종주권’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하북(河北) 어느 호수에서 - 아마 현 북경(北京) 근처의 호수인듯 - 20여일 정도 배달화백을 하였는데, 그 결과가 고주몽-동명성왕의 승리(勝利)였겠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송양(宋讓) 편을 든 선박(船舶)들은 흘러나가는 현상이 벌어졌고, 이를 표도(漂都)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우로보로스Uroborous)’를 틀어 경제를 꾸려나가는 신시(神市) 씨스템에서는 많은 계원(契員)이 빠져버리자, 자연히 천독(天毒)들이 스스로 창출한 ‘세노리지’가 없어져서
가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때마침 대우(大雨)가 내렸고, 이에 고주몽-동명성왕께서는 병사(兵士)들을 풀어서 빠져버린 계원(契員)을 대신해서 일하게 함으로써 ‘오로보로스’의 빈틈을 메꾸는 일을 해낸 것이 사료(史料)에 들어난 다음과 같은 기사(記事)로 보이는 것입니다.

좌계의 생각에는 대우(大雨)와 표도(漂都)가 오비이락(烏飛梨落)으로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대우(大雨)가 아니라 칠월(七月) 칠석(七夕)의 ‘가는 비(세우(細雨))’가 왔어도, 표도(漂都)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원문(原文)) : 七月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해석(解釋)) : 7월에 큰 비가 내렸고, (송양(宋讓)을 지지하던 배들이 떠나서) 표도(漂都)현상이 있었다.  이에 황상(皇上)은 병사들에게 (‘오로보로스’가 깨어져) ‘굶는 백성’들을 ()그 ‘빈틈’을 메꾸어) 구헐하게 하여 구원(救援)하였다.  

마)  현록표도(懸鹿漂都) 는 우리-역사에만 있을 수 있는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백송님 좌계가 볼때에는 현록표도(懸鹿漂都)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 민족에만 있었던 사자성어(四字成語)라는 것입니다.
즉 “‘목경권(牧鯨權)과 ’국제-배달화백에 대한 지도권(指導權)‘싸움에서 결판(決判)을 내다.”라는 뜻이 있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밖에 볼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싸움이 6월에서 7월까지 한 달 걸렸던 것으로 사료(史料)에는 적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백송 님’께서 사천(史穿) 선생의 아래의 글에 대한 평(評)은 정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김성겸 님’이 본능적(本能的)으로 “현록표도(懸鹿漂都)하여”라고 한 것은 정확한 해석이라고 좌계는 보는 것입니다.  
(원문(原文))
二年,乙酉, 六月,<宋讓>,懸鹿漂都,以國來獻,封爲多勿候(多勿故鄕之意□慕漱之地也).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解釋))
이년 을유 6월, <송양>이 懸鹿漂都하여 나라를 (통째로) 바쳐오기에, <다물후>로 삼았다(다물고향지의□모수지지야).

다시 말해, 설혹 한사군(漢四郡) 지역의 ‘배달화백에 대한 종주권’을 송양(宋讓)은 잃었지만,
배달화백을 통해, 중국대륙에 대해 ‘화백민주주의를 회복’하게한 것은 - 이것이 다물(多勿)의 뜻임 - 송양에 의해서 가능해졌음으로 그를 다물후(多勿侯)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백송 님’의 평(評))

*懸鹿漂都(현록표도):이것만 보면 의미가 안통하는데 고구려 사략을 보면 ‘현록’과 ‘표도’는 각각 다른 달에 일어난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백송 님.
좌계는 화백과 신시를 연구하면서, 가끔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인류역사상 그런 제도가 없었는데, 왜 좌계는 그것이 우리에게 있었다고 이야기하는가?!”
그럴때 늘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에게만 있었는데, 우리가 잃어버리면, 이 세상이 잃어버린 것이다.”

백송님.
좌계가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는 절대로 “ ‘현록표도(懸鹿漂都)’가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는 말을 삼가달라는 말입니다.  

왜냐?!  우리가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백성이니깐 말입니다.

4.  역사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백송님.
물리학에는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관찰자가 ‘객관적인 세계’에 어떤 ‘미지수’를 집어넣었을 때, 비로소 객관적인 세계가 확정성의 세계로 변한다.”는 좀 얼떨떨하게 하는 이론입니다.

현록표도(懸鹿漂都)의 문제 역시 똑같은 문제라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르면, 세계가 모르는 문제인 것이고,
우리가 알면, 세계가 아는 문제인 것이지요.  

특히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를 보면서, 좌계는 매우 찹작한 생각에 빠집니다.
왜냐?
이 남당(南堂)이란 것이 ‘호수(湖水) 위에 세워진 ‘속이 빈 피라미드’ - 금성(金城), 허달성(虛達城)등으로 불리웠던 수상(水上) 구조물(構造物)의 ‘또다른 이칭(異稱)’이었거든요.
왜냐?
그곳에서 화백회의를 했으니깐 말입니다.

어쩌면, 남당(南堂) 선생은 일제(日帝)가 감춘 수많은 사서(史書) 가운데, 자신의 호(號)와 관련된 사료(史料)에 일차적인 관심을 지니고 ‘길고 긴 학술적 조사’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어쩌면 현록표도(懸鹿漂都)에 대한 우리만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좌계 (2007-05-04 09:56:00)  
1. 현록(懸鹿)과 중원축록(中原逐鹿)

현록(懸鹿) - 즉 ‘사슴을 걸다’와 관련된 유명한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바로 ‘중원축록(中原逐鹿)’입니다.
이는 직역(直譯)하면 “중원(中原)의 사슴을 쫓는다.”인데, 그 뜻은 “중원(中原)의 백성을 누가 차지하는가?!”하는 비유법으로 씁니다.
이 중원축록(中原逐鹿)의 출전(出典)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기(史記)의 ‘회음후 열전(淮陰侯 列傳)’이 있습니다.
회음후(淮陰侯)는 바로 초한지(楚漢誌)의 한신(韓信)을 가르킵니다.

2. 해모수-동명성왕과 한고조(漢高祖)간의 한사군(漢四郡) 설치 밀약의 가능성

좌계 생각에는 한(漢)나라가 일어설때, 이미 삼한(三韓)과 한반도에 있던 대한국(大漢國)의 협조를 받아서 한(漢)이 급속히 통일하고, 이 과정에서 “ ‘해모수’ 동명성왕과 한(漢) 조정(朝廷)에 이미 ‘국제-배달화백-특구’에 대한 구상이 오고간 것이 아닌가?!”하는 여러 역사적 파편(破片)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한무제가 이를 깨고 ‘실크-로드’를 비롯한 국제-무역로를 독점하려는 배신을 하자, 고조선-부여 연합세력과 한(漢)과의 전쟁이 터졌고,
배상(賠償)조건으로 하북(河北)에 ‘한사군(漢四郡)’이라는 ‘국제-배달화백-특구’를 설치하고, 그 지도국(指導國)으로 비류국(沸流國)이 투입되었다고 봅니다.

3. 중원축록(中原逐鹿)이란 용어 자체가 고조선-삼한 문명이 시원(始源)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중원(中原)의 백성을 사슴으로 표현하는 비유 방법 자체가 좌계가 볼 때에는 사슴사냥을 존중하는 고조선-삼한 문명의 언어이고, 우리는 백제서기(百濟書記)에 들어나듯이 ‘문자(文字)의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한자(漢字)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언어를 시각화(視覺化)하는 ’결승(結繩) - 가림토‘ 체계를 중시한 결과, 기록(記錄)이 적게 남아있어서 이를 “사슴=천하(天下)의 백성”이라는 비유를 한족(漢族)에만 남아있다고 좌계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백송 (2007-05-04 11:25:55)  
현록(懸鹿)과 중원축록(中原逐鹿)에 대한 좌계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鹿을 帝位로 보면 축록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군요. 즉, 송양이 제위를 걸고 한판승부를 하자고 도전한 것이 되겠군요.

漂都와 '수'와 '신수'에 대해서도 님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좌계 (2007-05-04 13:09:11)  
/백송 님.
백송님께서는 해석이 매우 곤란했던 “時人曰:"勇亦死, 懦亦死."을 상쾌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늘 해석에 문제에서 ‘자신의 해석’을 뒤엎는 타인의 학설(學說)에 승복(承服)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학자(學者)다운 태도인 것 같습니다.
좀 이상한 말씀이지만, 학자는 ‘틀리면 망(亡)하는 학자’와 ‘틀려도 남는 학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계에게 ‘틀려도 남는 학자’가 되도록 깨우침을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