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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世<太祖皇帝>紀
◎ 帝諱<宮>亦曰<於漱>, <神明仙帝>之子也. 母曰<芦花>太后<扶餘>氏, <東部{扶}餘>太師<王文>之女也. 帝生而開目能視, 有神力將兵往<遼東>累建大功. 至是, 受禪, 時年四十五. 性寬仁孝友捨己從人. 以父皇厭政咨問於母. 太后以決事, 事不置太輔.
○ 제는 휘가 <궁> 또는 <어수>이고, <신명선제>의 아들이다. 모친은 <호화>태후 <부여>씨로 <동부여>의 태사 <왕문>의 딸이다. 제는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고 있어 사물을 볼 수 있었고, 신통한 힘이 있어 병사를 이끌고 <요동>을 쳐서 누차 큰 공을 세웠다. 때가 되어 선위를 받으니 나이 45세였다. 품성은 아량이 넓고 어질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고, 자기보다는 타인을 존중했다. 부황은 정사에 별 뜻이 없어 모친에게 물었다. 태후가 정사를 처결하였고, 정사를 돌봄에 있어 태보를 따로 두지 않았다.
◎ 元年壬子, 六月, 尊先帝爲太上皇, 母后爲<芦花宮>皇太后. <麻樂>左輔, <松豆智>右輔. 元用神明者, 以先帝在世故也. 三代鏡五十七卷成. <東明>·<光明>·<大武>三代之聖繪也. 先皇詔曰; “允爲人君者, 必有代鏡. 鏡所以照善也, 不可以照惡, 惡者廢之. 以戒吾子孫.”
十月, <羅><婆娑>殂, 葬于<蛇陵>, 子<祇味>立. 母曰<史省>, <許婁>女. 妻曰<爰{愛}禮>, <摩帝>女也. 初, <婆娑>與<祇味>過<輯岐>, <許婁>欲以其女妻<祇味>而出舞, <摩帝>亦以其女出舞, 以成饌美醞待之. <祇味>多取<摩帝>酒, 故遂以<爰{愛}禮>配之, 稱<摩帝>以<酒多干(舒弗邯牛角干)>, 以其地名<大庖>云.
<索頭><應黙>殂. <査功>立, 以<母鷄>爲妻.
○ 원년(단기2445년/AD112)임자, 6월, <선제>를 태상황으로 높이고, 모후를 <호화궁>황태후로 하였다. <마락>을 좌보, <송두지>를 우보로 하였다. 년호는 선제가 살아계시는 까닭으로 <신명>을 썼다. <삼대경> 57권이 이루어졌다. <동명>·<광명>·<대무> 3대의 성스러운 그림(聖繪)이다. 선황이 조서로써 이르길; “진실로 인군 된 자는 대경이 있어야 한다. 경은 선함을 비추는 것이지, 악함을 비추는 것이 아니다. 악함은 이(경)를 못쓰게 만든다. 이를 내 자손들에게 경계코자 한다.”고 하였다.
10월, <신라>에서는 <파사>가 죽어, <사릉>에 장사하고, 아들 <기미(지미)>가 섰다. 모친 <사성>은 <허루>의 딸이다. 처는 <원{애}례>로 <마제>의 딸이다. 애초에 <파사>가 <기미>와 함께 <집기>를 지날 때, <허루>가 자기 딸을, <기미>에게 처로 주고 싶어, 나와서 춤추게 하였고, <마제> 또한 자기 딸을 나와서 춤추게 하고, ‘성찬미온’으로 그를 대접하였다. <기미>가 <마제>의 술을 많이 마셨기에, 마침내 <원{애}례>를 짝지어 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마제>를 <주다간(서불감우각간)>이라 부르고, 그곳 땅을 <대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색두>의 <응묵>이 죽었다. <사공>이 서고, <모계>를 처로 삼았다.
◎ 二年癸丑, 正月, 太后親太輔之政, 命擧內外, 賢良才藝勇猛之士, 不問骨品, 授之以職, 曰; “民爲國本, 食爲民本, 宜爾大小官士, 亦務農牧釀織, 勿墜貧窮. 朕當示本, 遂與上親行耕蠶.” 命, 刻<幽>·<幷>·<冀>·<遼>之版, 頒領聰俊之士, 以營, 征<遼>之役.
二月, <祈味>祀其祖廟, 以<昌水>伊湌參政, <玉權>海湌, <申權>一吉湌, <順宣>級湌.
三月, <濟>使至<羅>, <濟>以<末曷>爲苦, 而欲南下也.
○2년(단기2446년/AD113)계축, 정월, 태후가 친히 태보의 정사를 보면서, 내외의 ‘현량재예용맹지사’에게 골품을 따지지 말고 직책을 맡기라고 명하고는, 이르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식량은 백성의 근본이니, 대소의 모든 관리 역시 ‘농목양직’에 노력하여 빈궁함으로 떨어지지 말라. 짐도 당연히 상과 함께 ‘경잠’을 행할 것이다.” 하였다. <유>·<병>·<기>·<요>주의 땅을 혹독하게 쳐부수되, ‘총준지사’를 나누어서 병영을 세우고 나서 <요> 정벌전쟁에 나서라 명하였다.
2월, <기미>가 조상의 사당에 제사하였고, <창수>를 이찬 참정으로, <옥권>을 해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삼았다.
3월, <백제>의 사신이 <신라>에 갔다. <백제>는 <말갈>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남하하고자 하였다.
◎ 三年甲寅, 二月, 仙師<尙仁>上化, 諡曰<普尊仙師>, 仁, 善天畵, 有上帝品百二十卷, 壽九十八. 以<高德>女<高>氏爲皇后. 時, 皇后生子<萬勒>故也. <德>, <高婁>太子之弟八子也. 仙術高明與<普尊>比<扃{肩?}>, 以王孫讓師于<尊>. 杜門修道, 以絶烟火, 八十三妻子不敢近唯. 上往拜獻果則敎, 以愛民孝親崇仙無驕. 上請火食而長壽, 則曰上帝; “召我使治遠”, 而未幾, 亦上化.
是, <羅>春雹夏水, 而慮囚.
○ 3년(단기2447년/AD114)갑인, 2월, 선사 <상인>이 죽었다. 시호는 <보존선사>이고, 어질었고, 귀한 그림을 잘 그렸기에, 제에게 올린 품목이 120권이나 된다. 98세를 살았다. <고덕>의 딸 <고>씨를 황후로 들였는데, 황후가 그때에 <만륵>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고덕>은 <고루>태자 동생의 여덟 째 아들이다. 선술에 고명하여 <보존>과 함께 <경?>에 비견되었는데, 왕손이어서 선사의 자리를 <보존>에게 양보하였다. 두문불출하여 도를 닦으며, 불과 연기를 피우지 않고 사니(날 음식만 먹고 사니), 83명의 처자가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상이 찾아가서 절하면 가르치곤 하였는데, 백성을 아끼고 효도하며 선을 숭상하고 교만하지 말라고 하였다. 상이 익힌 음식을 먹고 오래도록 살라고 청하니, 제에게 아뢰길; “저를 불러 먼 곳을 다스리게 하십시오.”하였는데, 이를 이루기 전에 역시 죽었다.
이 해에 <신라>에서는 봄에는 우박이 내리고, 여름에는 수해를 입어, 죄수 방면을 생각했다.
◎ 四年乙卯, 二月, 重修<西河(長春)>·<南口(遼源)>·<河城(通遼)>·<安平(開原)>·<長岺(鐵 岺)>·<菟城(奉天)>·<屯有(遼中)>·<平郭(台{令}安)>·<河陽(遼陽㝢 堡)>·<高顯(開通)>·<南蘇(赫爾蘇)>等城, 以備西南. 八月, 國南蝗, 巡視而至南海, 十月, 還.
二月, <加耶>伐<羅>南. 七月, <祈味>親征<加耶>, 師步騎渡<黃山河(漢江)>, 遇伏兵于<林薄>, 被圍數匝. <祈味>奮鬪決圍而出, 勇將<春郞>戰死.
○ 4년(단기2448년/AD115)을묘, 2월, <서하(장춘)>·<남구(요원)>·<하성(통요)>·<안평(개원)>·<장령(철 령)>·<토성(봉천)>·<둔유(요중)>·<평곽(태{령}안)>·<하양(요양우 보)>·<고현(개통)>·<남소(혁이소)> 등 10성을 고쳐쌓아 서남쪽에 대비하였다. 8월, 나라의 남쪽 땅에 황충 피해가 있어서, 순시하여 <남해>에 이르렀다가, 10월에 돌아왔다.
2월, <가야>가 <신라>의 남부를 쳤다. 7월엔 <기미>가 친히 <가야>를 쳤는데,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황산하(한강)>를 건넜고, <임박>에서 <가야>의 복병을 만나 여러 겹으로 포위를 당했다. <기미>가 분투하여 포위를 뚫고 나왔는데, 용장 <춘랑>이 전사했다.
◎ 五年丙辰, 二月, 納<羽奕>女爲副后. 三月, 日食. 十二月, 雪五尺.
八月, <祈味>自將精兵一萬伐<加耶>, <加耶>固守而天且久雨, 故無功而歸.
<査功>遣弟<健>來獻駱駝三十匹以<荻>公主妻之.
○ 5년(단기2449년/AD116)병진, 2월, <우혁>의 딸을 부후로 맞았다. 3월, 일식이 있었고, 12월엔 눈이 5 자나 쌓였다.
8월에 <기미>가 직접 정병 1만을 이끌고 <가야>를 쳤는데, <가야>가 굳게 지키고, 날씨도 오래도록 비가 내려,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사공>이 동생 <건>을 보내 낙타 30 필을 바쳐왔기에, <적>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 六年丁巳, 三月, 上皇巡狩至<淌村>, 納<溫>女<天花>于後宮. 命修<尙須祠>. <須>以<買溝谷>長者, 歸化而主畜. 其子<仁>爲<海山>高仙, <溫>之孫也. 世世修德淨心而至此. <天花>性溫柔且靭, 皃又絶色, □萬若之一人也. <高>皇后生<元>公主.
○ 6년(단기2450년/AD117)정사, 3월, 상황이 순수하여 <창촌>에 이르러 <상온>의 딸 <천화>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상수사>를 보수하라 명하였다. <상수>는 <매구곡>의 우두머리였었는데, 귀화하여 주축대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인>은 <해산>고선이 되었는데, <온>의 손자이다. 대대로 도를 닦고 마음을 맑게 가라앉혀 오늘에 이르렀다. <천화>는 성품이 온화하고 끈질기며, 용모 또한 만에 하나 있을만한 절색이었다. <고>황후가 <원>공주를 낳았다.
◎ 七年戊午, 三月, 置三軍, <羽奕>中軍將軍, <高良>左軍將軍, <禾直>右軍將軍. 地震. 六月, <漢>人侵<菟城>, 敗歸, 又攻<華麗>. <漢>人師, <大>上“歷代治亂繪七卷”, 賜年穀牛羊, 養之. 七月, 雹. 八月, 命五部仙院, 擧賢良孝順之士, 授之官, 問四窮不能存者, 給衣食. <麻樂>太輔, <松豆智>左輔, <乙布>右輔.
○ 7년(단기2451년/AD118)무오, 3월, 삼군을 설치했다. <우혁>을 중군장군으로, <고량>을 좌군장군으로, <화직>을 우군장군으로 삼았다. 지진이 있었다. 6월, <한>인들이 <토성>에 쳐들어 왔다가 패하여 물라가더니만, 또 <화려>를 공격했다. <한>인 스승 <대>가 “역대치란회7권”을 바쳐오니, 매년 곡물을 주고 소 및 양도 주어 기르게 하였다. 7월, 우박이 내렸다. 8월, 5부선원에 명을 내려 ‘현량효순지사’를 천거하게 하여, 뽑혀 온 이들에게 관직을 주고, ‘사궁불능존자’를 찾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마락>을 태보로, <송두지>를 좌보로, <을포>를 우보로 삼았다.
◎ 八年己未, 正月, 副后生<羽>公主. 六月, <羽奕>·<高良>·<禾直>等伐<宿車(運{連}平)>·<候城(寧城)>·<遼 隊(岺脉)>等地, 掠生口千余人而還. 九月, 擧八藝之士, 一曰禮, 二曰樂, 三曰射, 四曰騎, 五曰畵, 六曰算, 七曰藥, 八曰陶槍劒之士. 附於射科書刻之士, 附畵科陰易之士, 附於禮科鶴舞之士, 附於樂科針灸之士, 附於藥科匠木之士, 附於陶科. 置採金使, 主諸金及貨貝. 上納<天花>爲宮人, 上皇命也.
○ 8년(단기2452년/AD119)기미, 정월, 부후가 <우>공주를 낳았다. 6월, <우혁>·<고량>·<화직> 등이 <숙거(운{연}평)>·<후성(영성)>·<요대(령맥)> 등지를 정벌하고 생구 천여 명을 잡아 돌아왔다. 9월, '팔례지사'를 천거 받았다. 일왈‘예’, 이왈‘락’, 삼왈‘사’, 사왈‘기’, 오왈‘화’, 육왈‘산’, 칠왈‘약’, 팔왈‘도창검지사’이다. ‘사과서각지사’에 속하게 하고, ‘화과음역지사’에 속하게 하고, ‘예과학무지사’에 속하게 하고, ‘락과침구지사’에 속하게 하고, ‘도과’에 속하게 하였다.
‘채금사’를 두어 모든 금과 화패를 관장하게 하였다. 상이 <천화>를 받아들여 궁인으로 두었는데, 이는 상황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 九年庚申, 二月, <漢>人<姚光>自稱<菟城>太守, 據<汶城>, 數侵<菟城>·<平郭>·<屯有>, 以違其約, 遣王弟<遂成>率<禾直>·<乙魚>等攻<遼東(彰武)>拔之. <姚光>遁去<汶城(新民)>, 亦歸于我. <漢>人來降者千人. 命<漢>人師<大>畵<三代(東明光明大武三代)鏡>繪百八十卷, 以爲新鏡, 其畵精鮮燎然, 舊鏡五十七卷古色蒼然. 簡素, 可法, 故名爲<政經>. 師<大>, 初翻舊鏡而今又着新, 故妻以<乙布>女, 爵小兄.
<羅>, 二月, 有大星墜<月城>西, 其聲如雷. 三月, <羅>都大疫. 上送藥十種救之.
○ 9년(단기2453년/AD120)경신, 2월, <한>인 <요광>이 스스로 <토성>태수를 칭하고 <문성>에 머물면서 <토성>·<평곽>·<둔유>를 누차 침략하여 약조를 어겼기에, 왕의 동생 <수성>이 <화직>과 <을어> 등을 이끌고 가서<요동(창무)>을 쳐 발본하게 했다. <요광>은 <문성(신민)>으로 도망갔다가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찾아와서 항복한 <한>인이 천 명이었다.
<한>인 스승 <대>를 시켜 <삼대(동명광명대무삼대)경>그림을 180 권을 그리게 하여 신경이 생겼는데, 그림이 ‘정선요연’하였고, 구경 57 권은 ‘고색창연’하였다. 간소하고 법으로 삼을만하여, <정경{다스림 경전}>이라 이름을 붙였다. 스승 <대>가 처음으로 구경을 번역하여 새롭게 되었기에, <을포>의 딸을 처로 삼아주고, 소형의 작위도 주었다.
<신라>에서는 2월에 큰 별이 <월성>의 서쪽에 떨어졌는데, 그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3월에 <신라>의 도성에 돌림병이 크게 들어, 상이 10종의 약을 보내 도와주었다.
◎ 十年辛酉, 正月, 宮人<天花>生子<白固>. 先是皇夢見<天花>與上合而生龍. 至是, 應焉. 故曰名以<白固>, 乃覇必固之義也. 長而仁賢, 不失上皇命名之, 意聖哉. 仙皇之鑑.
<査功>殂, <健>立.
○ 10년(단기2454년/AD121)신유, 정월, 궁인 <천화>가 아들 <백고>를 낳았다. 이에 앞서, 황상이 <천화>와 상이 화합하여 용이 되는 꿈을 꾸었는데, 지금 그 응답이 왔다고 하여 이름을 <백고>라 하였다. 이겨서 반드시 굳게 지킨다는 뜻이다. 자라서는 어질고 현명하여 졌으며, 상황이 그의 이름을 성스럽게 지은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선황(仙皇)의 거울이라.
<사공>이 죽고, <사건>이 섰다.
◎ 二月, <姚光>自<幽州>來侵殺<丘利>渠帥. <后{羽}突>·<禾直>赴救大破之, <乙魚>誘其大軍于<甬道>, 而設伏嶮阨, 以殘滅之, 獲其兵仗馬匹無數. 又追擊於<赤山(赤峰)>·<棘城(津平)>, 焚其城郭糧草, 虜獲生口二千余. □其技能者授職, 聲色者賜將士爲妾. 上皇洗<白固>, 而疾作月餘, 二月, 晦, 崩, 葬于茅山(今茅河).
四月, 親征<蔡諷>於<遼隊(古北口之岺脉)>戰于<新城(永平)>, 斬其將<耿芼>·<龍端>·<公孫酺>·<孫壽>等百四十余人. <棘城印皆入我地. <諷>逃入<幽州>不敢復侵.
八月, <漢>使來朝弔上皇, 獻簿, 請和. 群臣以其奸凶, 不可信, 請斬之. 上曰; “彼以禮來我, 何暴.”, 爲命賓部厚待. <遂成>問<鄧>后之年, 使曰; “崩矣.” <遂成>曰; “昔<呂>后解帶於(平)城, 以悅<冒頓>. 汝等何不以<鄧(曼)>解帶于我, 而魚肉. 邪若不以<祐>母妾我, <洛陽>灰矣.” 使撫然, 良久, 當從王命. 上聞之責. <遂成>曰; “<遂成>, 吾視<漢>如草. 今吾何畏之, 甚乎.” 上曰; “經, 不云乎. 一虫可畏, 况人而君哉. 驕者敗, 戒之.”
○ 2월, <유주>에서 <요광>이 쳐들어와 <구리>의 거수를 죽였다. <후{우}돌>과 <화직>이 구원하러 가서 <요광>을 크게 쳐부쉈고, <을어>는 <요광>의 대군을 <용도>로 유인하여, 험지에 매복하여 놓은 군사로 모조리 짓이기고,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이 무수하게 많았다. 또한 <적산(적봉)>·<극성<진평>까지 추격하여 성곽과 군량 및 마초를 불사르고, 생구 2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잡힌 사람들 중에서) 기능이 있는 자에게는 직책을 주었고, 목소리가 예쁜이들은 장사들에게 첩으로 나누어 주었다. 상황이 <백고>를 씻어 주고 병이 들어 달을 넘겨 앓다가, 2월 그믐에 죽어, <모산>에 장사했다.
4월, <채풍>을 <요대(고북구지령맥)>에서 친히 정벌하고 <신성(영평)>에서 싸워, 그의 장수들 <경모>·<용단>·<공손포>·<손수>등 140여 명을 참하였다. <극성>이동의 땅이 우리 것이 되었다. <채풍>은 <유주>로 도망하여, 감히 다시는 침입하지 않았다.
8월, <한>의 사절이 상황을 조문하러 래조하여 부의를 바치고 화친을 청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들은 간교하고 흉악하여 믿을 수 없으니 죽이자고 청을 하자, 상이 이르길; “저들이 우리를 예로써 찾아왔는데, 어찌 사납게 할 수 있는가?” 하고는 빈부에 후하게 대접하라고 명하였다. <수성>이 <등>후의 나이를 묻자, 사신은 “돌아가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수성>이 말하길; “지난날, <려>후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어 <모돈>을 즐겁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왜 <려만>이 나에게는 허리띠를 풀게 하지 않는가? 어육이 될 일이다. 간사히 하여 <우>의 어미가 내게 첩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낙양>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사신들은 난감하여, 잠자코 있다가, 왕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이 이 말을 듣고는 책망하니, <수성>이 이르길; “저 <수성>은 <한>을 잡초같이 여깁니다. 지금 어찌 제가 그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저를 질책하심은) 지나치십니다.” 하였고, 상이 이르길; “옳지 않으니, 그만하라. 벌레 한 마리도 조심하여야 하거늘 사람과 사람들의 임금 된 자는 어떠하겠느냐? 교만하면 지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十月, 上與太后如<扶余>, 祀<柳花>聖母及太后祖廟, 問民窮者, 賜物.
<肅愼>來獻紫狐表白鸞白馬. <肅愼>在<梁貊>之北(<滿洲里>之北)<膝河>. 以漁獵馬生, 其俗淳古, 父子人畜同室混處. 以<貊弓>從岺外水路往來于<漢>, 而泄我國情, 故朝廷束之.
○ 10월, 상은 태후와 함께 <부여>로 가서 <유화>성모와 태후 조상을 모신 사당에 제사하고, 백성들 중에 궁한 이들을 찾아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숙신>이 찾아와서 자색 호피와 백란 및 백마를 바쳤다. <숙신>은 <양맥>의 북쪽(만주리지북)에 있다. 물고기를 잡고 말을 길렀으며, 그 풍속은 옛사람들처럼 순박하였고, 부자인축이 한 곳(室)에서 섞여 기거하였다. <맥궁>을 가지고 고개 밖의 물길로 <한>에 오가면서 우리나라의 사정을 누설하는 까닭에 조정이 이들을 잡아두었다.
◎ 十一月, 上自<扶余>還. 以<遂成>爲大芻加, 委以兵權, 太后命也. 十二月, <姚光>, 誘<句麗(林西)>渠帥<屠利>爲<玄菟>都尉, 與<卑離>反賊<尉仇台>, 謀復<紫蒙>故地, 新置<玄菟>府于<川西(林東)>而居之. 上親率<馬韓>·<盖馬>軍一萬騎, 而攻<川西>, 不克而還.
<羅>, <翊宗>伊湌, <昕連>海湌, <林權>阿湌. 二月, 築<大甑山城>. 四月, <倭>寇東邊.
○ 11월, 상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수성>을 대추가로 삼고, 병권을 위임하였는데, 이는 태후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12월, <요광>이 <구려>거수 <도리>를 꼬드겨 <현토>도위로 삼고{삼겠다 하고}, <비리>를 이반한 적도 <위구태>와 함께 모의하여 <자몽>의 옛 땅을 회복하고, <천서>에다가 새로이 <현토>부를 두고 거기에서 머물렀다. 상이 <마한>과 <개마>의 1만 기병을 이끌고 <천서>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에서는 <익종>을 이찬으로, <흔련>을 해찬으로, <림권>을 아찬으로 삼았다. 2월에는 <대증산성>을 쌓았고, 4월에는 <왜>가 신라의 동쪽 변방을 노략하였다.
◎ 十一年壬戌, 二月, 上復引<馬韓>·<勾茶>·<盖馬>三國兵, 伐<川西>·<勾麗>, 拔之. <姚光>逃走, 爲其部下所殺. <仇台>逃入<西紫蒙(達里湖西沙漠之地)>自稱<西扶余>, 後爲<宇文>所逐.
四月, 太輔<麻樂>薨, 年六十九. 父, <卑離>王<義鹿>, <麻離>子也. 聚<大武神>女<都>公主, 而生<樂>. 腹有紅紋三星, 驍勇而善戰, 累建大功, 及入輔爲執大臣, 體能決大事, 可稱賢相. **然, 閨簿不嚴, 殯未冷而妻女奔, 人情哉.** <松豆智>太輔, <乙布>左輔, <遂成>右輔, <羽奕>大主簿, <尙溫>大評者, <尙岑>馬將軍, <尙蕃>殿中(皀/皂)衣(使人).
是, <羅>大風東來, 折木飛□, 終日. 訛言, <倭>至, 民爭遁谷, <翊宗>諭止之. 而七月, 蝗飢多盜.
○ 11년(단기2455년/AD122)임술, 2월, 상이 다시금 <마한>·<구다>·<개마> 3국의 병사를 이끌고 <천서>와<구려>를 정벌하여 뿌리 뽑았다. <요광>은 달아나다가 자기 부하의 손에 죽었고, <구태>는 <서자몽(달리호서사막지지)>으로 피하여 들어가 스스로 <서부여>라 칭하였으나, 후일에 <우문>에게 쫓겨났다.
4월, 태보 <마락>이 죽었다. 나이 69살이었다. 부친은 <마리>의 아들이자 <비리>의 왕이었던 <의록>이다. <대무신>의 딸인 <도>공주에게 장가들어 <락>을 낳았다. 배에는 붉은 ‘삼성’ 문양이 있었는데, 용감하여 전쟁에 뛰어나 큰 공을 누차 세웠고, 재상으로 들어가서는 집정대신이 되어 몸소 큰 정사를 잘 처결하였으니, 현명한 재상이었다 할 만하다. 성품이 부드러워, 규부를 엄격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시신이 식기도 전에 부녀자들이 분망하였었으니, 이것이 인정이라! <송두지>를 태보로, <을포>를 좌보로, <수성>을 우보로, <우혁>을 대주부로, <상오>을 대평자로, <상잠>을 마장군으로, <상번>을 전중(흡/조)의(사인)로 삼았다.
이 해에 <신라>에서는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서 하루 종일 나무가 부러지고 □가 날렸다. <왜>가 왔다고 말이 퍼져서 백성들이 산곡으로 숨어들자, <익종>은 이를 깨우쳐 말렸다. 7월에는 황충 피해가 있어 굶주리게 되니 도적이 들끓었다.
◎ 十二年癸亥, 二月, 大閱<西河>. 十月, <穆度婁><沸流>沛者·<高福章><桓那>沛者·<尙溫><淹호>沛者, 三人莫逆之交, 而治世之賢, 故人稱‘三台’.
<羅>, 三月, 與<倭>和. 四月, 霜. 五月, <金城>東民屋(陷)爲池.
○ 12년(단기2456년/AD123)계해, 2월, <서하>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10월, <비류>패자<목도루>·<환나>패자<고복장>·<엄호>패자<상온> 세 사람은 막역하게 사귀면서 세상을 현명하게 다스렸기에, 사람들이 <3태>라 불렀다.
<신라>에서는, 3월에 <왜>와 화친하였고, 5월에는 <금성> 동쪽 땅이 푹 꺼져서 물에 잠겼다.
◎ 十三年甲子, 五月, 右將軍<穆吉>卒, <尙岑>代之. <禾直>率<紫蒙>軍, 伐<尉仇台>, 破<月海(達里湖)>, 至<月都(多倫)>而還. <遂成>左輔, <羽突>右輔. 八月, 田于<太伯山>南(白羅山對面山界)獲白鹿大如馬而紫角. 巫言<仇台>王時此馬現而今又現之. 以綠錦爲鞍而乘之. 上身長八尺, 重百斤余, 而鹿白如故, 以爲乘馬而每朝騎馳, 人號以<白鹿大王>. 一日, 至<毛屯谷>三賢坮, 得聖母釧, 仍祭<優勃水(哈爾屯河)>. 國南蝗, 送仙人<陽父(被)>之. 九月, 庚申, 晦, 日食. <漢>使來請和. 十一月, 東部地震. <尙>后生<衲>公主. <好萬>太輔. <松豆智>薨, 年七十一, 賜其妻<典>公主年穀.
○ 13년(단기2457년/AD124)갑자, 5월, 우장군 <목길>이 죽어 <상잠>이 대신하게 하였다. <화직>이 <자몽>의 군대를 이끌고 <위구태>를 정벌하여 <월해(달리호)>를 깨고 <월도(다륜)>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수성>을 우보로 삼았다. 8월, <태백산(백라산대면산계)>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크기가 말만하고 뿔이 자색인 흰 사슴을 붙잡았다. <무당>이 말하길 <구태>왕 시절에 이 말이 나타났다가 지금 또 나타났다고 하였다. 녹색 비단으로 안장을 얹어 타고 다녔다. 상은 신장이 8척이나 되고 체중은 100근 여가 되는데, 사슴은 옛날과 같이 흰색이고, 매일 아침 이를 타고 달리니, 사람들이 <백록대왕>이라 불렀다. 하루는 <모둔곡>의 <삼현대>에 이르러 성모의 팔찌를 줍고는 <우발수(합이둔하)>에 제사하였다. 나라의 남쪽에 황충이 나타나 선인 <양부>를 그곳으로 보내어 해결했다. 9월, 경신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한>의 사신이 와서 화친하기를 청했다. 11월, 동부에 지진이 일었다. <상>후가 <납>공주를 낳았다. <호만>을 태보로 삼았다. <송두지>가 나이 71살에 죽어, 그의 처 <전>공주에게 매년 양식을 주게 하였다.
◎ 十四年乙丑, 正月, <尙溫>右輔, <朱文>中畏大夫, <富文><松江(同江)>沛者. <朱文>·<富文>, <芦花>太后弟也. 十一月, <太伯山>巫<据山>獻雌白鹿, 有黃斑. 上喜天, 而牝吾馬乎. 命, 字于<淌水宮>, 曰; “ 鹿之有斯牝, 如朕之有賢后.” 仍名牡曰; “<明角>”, 牝曰; “<玄池>”. 上與后分乘每朝, 出<淌宮>從河尾之<綸原>而返朝饌. 新造鹿舍于內庭, 置鹿師二人.
是年, 正月, <末曷>入<羅>北殺掠. 七月, 又襲<大岺柵>過於<泥河>. <濟>遣五將軍助<羅>破<曷>.
○ 14년(단기2458년/AD125)을축, 정월, <상온>을 우보로, <주문>을 중외대부로, <부문>을 <송강(동강)>패자로 삼았다. <주문>과 <부문>은 <화화>태후의 동생들이다. 11월, <태백산> 무당 <거산>이 누런 반점이 있는 흰 사슴 암컷을 바쳐왔기에, 상은 하늘에 기뻐하면서 “내 말의 아내로 삼아줘야겠다!”라 하였다. <창수궁>에서 기르라고 명하면서, 이르길; “나에게 현명한 후가 있듯이 사슴에게도 짝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니, 수컷은 <명각>이라 이름을 붙여주고 암컷은 <현지>라 이름을 붙여주었다. 매일아침에 상은 후와 함께 나누어 타고는 <창궁>을 나서서 <창하> 끝 <륜원>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아침을 먹었다. 새로이 사슴의 우리를 지어주고 사슴 관리인 두 명을 두었다.
이 해 정월에 <말갈>이 <신라>의 북쪽에 들어와 살육하였다. 7월에 또 <대령책>을 습격하여 <니하>를 지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신라>를 도와 <말갈>을 깼다.
◎ 十五年丙寅, 二月七日, <麻樂>妻<烏>氏生<穆崇>子<靖>, 請爲<樂>許之. 以<尙溫>女<銀花>爲副后, <天花>之妹也..
○ 15년(단기2459년/AD126)병인, 2월 7일, <마락>의 처 <오>씨가 <목숭>의 아들 <정>을 낳고는, <락>의 아들로 하여 달라고 청을 하니 허락되었다. <상온>의 딸 <은화>를 부후로 삼았는데, <은화>는 <천화>의 여동생이다.
◎十六年丁卯, 七月甲戌朔, 日食. <尙>后生子<將固>.
○ 16년(단기2460년/AD127)정묘, 7월 갑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상>후가 아들 <장고>를 낳았다.
◎ 十七年戊辰, 八月, <曷思>王<都頭>, 以國來獻, 封爲<于台>. <尙溫>東部大使者, <羽奕>右輔.
是月, <羅>長□龍天. 十月, 地震. 翌月, 雷.
○ 17년(단기2461년/AD128)무진, 8월, <갈사>왕 <도두>가 나라를 들어 찾아왔기에, <우태>에 봉하였다. <상온>을 동부대사자로, <우혁>을 우보로 삼았다.
이 달에 <신라>에서는 기다란 용이 승천하였고(?), 10월엔 지진이 있었고, 11월엔 우레가 있었다.
◎ 十八年己巳, 三月, <松奇>生女<黃龍>. <享>王, 其妻, <度婁>妹也. <尙溫>第三女<暖花>又入後宮. <高>皇后生<莫德>太子.
秋, <羅><昌永>死, 以海湌<王權>爲伊湌參政.
<尙>后生<비>公主.
○ 18년(단기2462년/AD129)기사, 3월, <송기>가 딸 <황룡>을 낳았다. <향>왕의 처는 <목도루>의 여동생이다. <상온>의 셋째 딸 <난화>가 또 후궁으로 들어갔다. <고>황후가 <막덕>태자를 낳았다.
가을, <신라>에서는 <영창>이 죽어, 해찬 <왕권>이 이찬 참정이 되었다.
<상>후가 <비>공주를 낳았다.
◎ 二十年辛未, 二月, 以<暖花>妻<萬勒>太子, <高>皇后請也. <松奇>大評者. 五月, <羅>大雨漂民戶. 七月, 太輔<好萬>薨, 年七十三.
○ 20년(단기2464년/AD131)신미, 2월, <난화>를 <만륵>태자의 처로 삼았는데, <고>황후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송기>를 대평자로 삼았다. 5월, <신라>에서는 큰비가 내려 민가가 물에 떴다. 7월, 태보 <호만>이 나이 73살에 죽었다.
◎ 二十一年壬申, 正月, <芦花>太后崩, 春秋八十四, 身長八尺, 重百三十斤, 有(脅)力, 善槍劒. <慕本>初, 隨夫皇<再思大王>平<扶余>內亂有功, <仙帝>時國之大事皆決於后. 上之卽位初, 亦居太輔之位. 有英斷能決難事, 知大體, 務精要. 臨崩, 勤與<遂成>, 相傳荑友(愛). 又言<天花>, 國之<源花>, 可與<遂成>共之, 以是, 亂倫而失政. <尙>后生子<春固>. <遂成>太輔, <羽奕>左輔, <禾直>右輔. 三月, <藻那>王<心>反, 遣<貫那>沛者<達賈>∇部大使者<穆度婁>, 討平之. 移<心>子<貫那>.(貫那藻那皆東扶餘地也藻那在黑水之口最遠而濱海故封蛙王之後孫沈爲王者也). 以< 穆度婁>爲<柵城>太守. 四月, 上命<尙>后與<遂成>出遊<太伯山>諸仙院, 凡七閱月而還.
是年, 二月, <羅>宮南門焚. 以<元>公主妻<遂成>.
○ 21년(단기2465년/AD132)임신, 정월, <호화>태후가 춘추 84세에 죽었다. 신장은 8척에 체중도 130근이었고, (상대를 겁주는) 힘도 있었고 창검도 잘 썼다. <모본> 초에는 부황인 <갈사대왕>이 <부여>내란을 평정할 때 따라가서 공을 세웠고, <선제(仙帝)> 시절엔 나라의 큰일들이 <후>에게서 처결되었다. 상의 즉위 초에도 태보의 자리에 있었다. 뛰어난 결단력이 있어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처결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을 알고 일의 핵심을 꿰었다. 죽음에 가까워서는 <수성>과 함께 일하면서 서로가 깊은 우애를 서로 전하였다. 또한 <천화{<상>후}>에게 이르길, 나라의 <원화{<상>후}>는 <수성>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둘이 그리하였는데, 이것이 윤리를 어지럽게 하고 실정하게 하였다. <상>후가 아들 <춘고>를 낳았다. <수성>이 태보, <우혁>이 좌보, <화직>이 우보가 되었다. 3월, <조나>왕 <심>이 반란하여, <관나>패자 <달가>와 동부대사자 <목도루>를 보내 토벌 평정하게 하였다. <심>의 아들을 <관나>로 옮겼다. (관나조나개동부여지야조나재흑수지구최원이빈해고봉와왕지후손심위왕자야). <목도루>를 <책성>태수로 삼았다. 4월, 상이 <상>후에게 <수성>과 함께 나가서 <태백산>의 여러 선원을 돌아보며 유람하라고 명하였더니, 무려 일곱 군데의 선원을 돌아보고 한 달이 다되어서 돌아왔다.
이 해 2월에 <신라>의 남문이 불탔다.
<원>공주를 <수성>의 처로 삼았다.
◎ 二十二年癸酉, 正月, 以<遂成>爲皇太弟, 置<東宮>, 僚七十八人, 以<尙>后爲<遂成>妃. <羽奕>太輔, <乙布>左輔, <尙溫>右輔. 六月, <遂成>妃生<遂成>子<駿>. 以<穆度婁>爲東宮大夫, 其妻<松花>生女<守禮>於<柵城>, 西來爲<駿>乳媼. 始築<牛山城(丸都)>, 以爲避暑之地.
○ 22년(단기2466년/AD133)계유, 정월, <수성>을 황태제로 하여 동궁을 설치하고 관료 78인을 딸려주고, <상>후를 <수성>의 비로 삼아주었다. <우혁>을 태보로, <을포>를 좌보로, <상온>을 우보로 삼았다. 6월, <수성>의 비가 <수성>의 아들 <주>을 낳았다. <목도루>를 동궁대가로 삼았는데, 그의 처 <송화>가 <책성>에서 딸 <수례>를 낳았기에, 서쪽으로 와서 <준>의 유모가 되었다. <우산성(환도)>을 쌓기 시작했는데, 피서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 二十三年甲戌, 三月, <紇于>孫<龍山>, 以<桓阿>·<越都>二部, 來屬降, 命<桶口>太子爲<桓阿>太守. 至<越都>, 納<龍山>女<紇>氏. 十月, <朱那>反, 命<桓那>沛者<薛儒>伐之. 其國多湖亦曰<湖國>, 在<藻那(今尼港之西北海岸)>之南, 與<藻那>相婚, 故欲復<藻那>, 而反. 男多女少, 有大(獹)如鹿, 能解人語.
是年, <濟><羅>皆旱疫死者殆半, <祈味>亦以疫殂.
○ 23년(단기2467년/AD134)갑술, 3월, <흘우>의 손자 <용산>이 <환아>와 <월도> 2부를 들고 찾아와 항복하여, <통구>태자를 <환아>태수로 삼았다. <월도>에 이르러서 <용산>의 딸 <흘>씨를 맞아들였다. 10월, <주나>가 반란하여, <환나>패자 <설유>에게 명하여 <주나>를 정벌하게 하였다. <주나>국은 호수가 많아서 <호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조나(금니항지서북해안)>의 남쪽에 있었으며, <조나>와는 서로 혼인하는 사이었기에 <조나>를 되찾으려 반란하였던 것이다. <주나>에는 남자는 많으나 여자가 적고, 사슴 크기의 큰 (개)가 있는데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이 해에 <백제>와 <신라> 모두 가물고 돌림병이 돌아 (사람들의) 태반이 죽었으며, <기미(지미)> 역시 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 二十四年乙亥, 正月, <朱那>王子<乙音>來降, 封爲古芻加, 以<眞>公主妻之. 移<朱那>余党于<桓河>·<樂浪>人部落, 與之相婚而居. 三月, 重修<鸞臺>爲宮. 使<白>畵<三代鏡>于璧, <玄武>·<渡河>相名焉.
○ 24년(단기2468년/AD135)을해, 정월, <주나>왕자 <을음>이 항복하여 와서, 고추가로 삼고, <진>공주를 처로 주었다. <주나>의 남은 무리를 <환하>의 <낙랑>인 부락으로 옮겨서 서로 혼인하고 머물러 살게 하였다. 3월, <란대>를 고쳐서 궁으로 삼았다. <백>을 시켜 <삼대경>을 벽(璧; 넓적한 옥; 옥판)에다 그리게 하였는데, <현무>또는 <도하>라고도 이름 하는 것(그림)이다.
◎ 二十五年丙子, 三月, 太輔<羽奕>薨, 年七十一. 其父, <方>以<光明帝>外孫. 久居中畏, <恭儉>稱之. <奕>, 亦以武術, 累立大功. <乙布>太輔, <尙溫>左輔, <穆度婁>右輔兼<牛山>太守中畏大夫.
<羅><雄宣>伊湌知兵馬, <近宗>一吉湌.
○ 25년(단기2469년/AD136)병자, 3월, 태보 <우혁>이 나이 71 세로 죽었다. 그의 부친 <방>은 <광명제>의 외손자이었다. 오랜 동안 중외(대부)의 자리에 있었기에, <공검>이라 불렀다. <우혁> 역시 무술로 인하여 여러 번 큰 공을 세웠다. <을포>를 태보로, <상온>을 좌보로, <목도루>를 우보 겸 <우산>태수 중외대부로 삼았다. <신라>의 <웅선>이 이찬이 되고, <근종>이 일길찬이 되었다.
◎ 二十六年丁丑, 五月, <朱那>余党與<樂浪>人襲<浿口>, <桶口>太子被創, 入山谷而薨, 從臣<于恢>葬而歸其鄕. <恢>, <黃龍>王<仁>之裔也. <禾直>平<樂浪><朱那>之余党, 而入爲左輔, <達賈>右輔, <尙溫><淌水>公. 十月, <扶余>獻鹿. 十二月, 東部雪五尺.
<末曷>, 二月, 燒<羅><長岑>五柵. 八月, 更子, <濟>, 熒惑犯南斗.
○ 26년(단기2470년/AD137)정축, 5월, <주나>의 남은 무리가 <낙랑>사람들과 <패구>를 공격하였다. <통구>태자가 창을 맞고 산곡으로 들어가 죽어, 그의 신하 <우회>가 묻어주고는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회>는 <황룡>왕 <인>의 후예이었다. <화직>이 <낙랑>과 <주나>의 남은 무리를 평정하고는 들어와서 좌보가 되었다. <달가>를 우보로, <상온>은 <창수공>으로 삼았다. 10월, <부여>가 사슴을 바쳐왔다. 12월, 동부에 눈이 다섯 자나 되게 내렸다.
<말갈>이 2월에, <신라>의 <장령>지역 목책 다섯을 태웠다. 8월 경자일에 <백제>에서는 형혹성이 남두성을 범했다.
◎ 二十七年戊寅, 二月, <高>皇后崩, 春秋四十七. 后有聖德高行, 上敬愛之, 生六子. 長曰<桶口>, 次曰<萬勒>, 三曰<大德>, 四曰<其德>, 五曰<最德>, 六曰<孝德>, 皆有賢行. 五公主, 曰元, 曰眞, 曰慕元, 曰陽德, 曰慕玄. 后, 生孝德, 而疾劇不起. 上哀慟之, 葬于<茅山>. 三月, <紇>氏生<恢>子<素>, <嬖耳>生<桶口>女<龍寶>. 上寵<寶>. 上使<伯固>往見之, <伯固>密與<紇>氏相通. 御苑丈二大虎病死, 有八子二女.
<羅>, 二月, 置政堂于<金城>. 七月, 閱于<閼川>西. 十月, 北巡, 祀<太伯山>. 十一月, <濟><己婁>殂, <盖婁>立.
○ 27년(단기2471년/AD138)무인, 2월, <고>황후가 춘추 47 세로 죽었다. 후는 성덕고행하였기에, 상이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여섯 아들을 두었다. 맏이는 <통구>, 둘째는 <만륵>, 셋째는 <대덕>, 넷째는 <기덕>, 다섯째는 <최덕>, 여섯째는 <효덕>이다. 또한 다섯 공주를 낳았는데, <원>, <진>, <모원>, <양덕>과 <모현>이다. 후가 <효덕>을 낳고 나서는 병이 극심하여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상이 그를 슬퍼하여 서럽게 울고는 <모산>에 묻어주었다. 3월, <흘>씨가 <회>의 아들 <소>를 낳고, <폐이>가 <통구>의 딸 <용보>를 낳았는데, 상이 <용보>를 총애하였다. 상이 <백고>를 시켜 가서 살펴보라고 하였더니, <백고>가 몰래 <흘>씨와 상통하였다. 어원의 나이 든 큰 호랑이 두 마리가 병으로 죽었다. 숫호랑이 여덟 마리와 암호랑이 두 마리를 낳았다.
<신라>가 2월에 <금성>에 정당을 두었고, 7월에는 <알천>의 서쪽에서 군대를 사열하였고,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고는 <태백산>에 제사하였다. 11월에 <백제>의 <기루>가 죽고, <개루>가 섰다.
◎ 二十八年己酉, 六月, <西河>太守<尙岑>, 與其弟<蕃>, 率<貊>騎, 掠<岺東都尉府>, 珍寶而來. 九月, <岺東>太守<公孫玄>, 來寇<盖馬>, 敗去. <穆度婁>守<西河>, <尙岑>守<安平(開原)>.
四月, <盖馬>獵<漢山>, 而相<北漢山城>地, 命有司始役.
七月, <羅>霜菽.
八月, <末曷>掠<長岺>民去. 十月, 又來, 天大雪, <曷>畏其, 遁走.
○ 28년(단기2472년/AD139)기유, 6월, <서하>태수 <상잠>이 그의 동생 <번>과 함께 <맥>의 기병을 이끌고 <령동도위부>를 쳐서 진보를 빼앗아 돌아왔다. 9월, <령동>태수 <공손현>이 <개마>를 노략질 하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목도루>는 <서하>를 지켜냈고, <상장>은 <안평(개원)>을 지켜냈다.
4월, <개마>가 <한산>에서 사냥하면서 <북한산성>을 쌓을 터를 보고는 관리에게 (성 쌓는) 일을 시작하라 명하였다.
7월, <신라>에서는 숙주가 서리를 맞았다.
8월에 <말갈>이 <장령>에 사는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돌아갔다가, 10월에 또 다시 쳐들어 왔는데, 큰 눈이 내리자 겁이 나서 도망쳐 (돌아)갔다.
◎ 二十九年庚辰, 三月, <尙>后生女<白雲>, <乙布>妻<羽>氏爲乳媼. 四月, 以<羽>公主妻<遂成>. <穆度婁>南部大使者. <羅<立柵<長岺>.
○ 29년(단기2473년/AD140)경진, 3월, <상>후가 딸 <백운>을 낳아, <을포>의 처 <우>씨를 유모로 붙였다. 4월, <우>공주를 <수성>의 처로 주었다. <목도루>를 남부대사자로 삼았다. <신라>가 <장령>에 목책을 세웠다.
◎ 三十年辛巳, 四月, <帶方><張彦>侵<屯有>, <菟城>太守<乙魚>擊殺之. <樂浪>太守<龍俊>侵<西安平>, <西安平>太守<尙岑>擊破之, 追擊<新安><居鄕>, 奪其妻子兵仗而歸, 賊遁入<幽州>. 左輔<禾直>薨, <尙溫>左輔, <穆度婁>右輔. 九月, 辛亥, 晦, 日食. <尙>后生女<靑雲>. 獲紫獐于<質>陽, 飼之. 十月, <東海谷>太守<尙蕃>獻朱豹, 尾長九尺身一丈, 命飼御苑.
○ 30년(단기2474년/AD141)신사, 4월, <대방>의 <장언>이 <둔유>에 침입하니, <토성>태수 <을어>가 그를 쳐서 죽였다. <낙랑>태수 <룡준>이 <서안평>에 쳐들어왔기에, <서안평>태수 <상잠>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신안>의 <거향>까지 추격하여, <장언>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는데, 적은 <유주>로 도망해 들어갔다. 좌보 <화직>이 죽어, <상온>을 좌보로, <목도루>를 우보로 삼았다. 9월 신해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후가 딸 <청운>을 낳았다. <질산> 남쪽에서 자색의 노루를 잡았기에 먹이를 주어 길렀다. 10월, <동해곡>태수 <상번>이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이고 신장이 한 길이나 되는 붉은 표범을 바쳤기에, 이를 어원에 두고 길렀다.
◎ 三十一年壬午, 正月, <達賈>左輔. 三月, <遂成>佃于<質>陽七日不歸, 戱樂無度. 七月, 又獵<箕丘>五日, 而又獵于<倭山>傷民黍菽. 與其黨類<貫那>于台<彌儒>·<桓那>于台<菸 疾>·<沸流>皀衣<陽神>等相議曰; “兄皇老而不死, 奈何. 吾齒將暮, 不可待矣.”, 皆曰; “當行廢立.” <伯固>曰; “嫡子在, 何必兄弟相傳乎. 公以皇帝之親, 爲百醪之長, 宜以忠孝存心, 何乃荒淫如是. 禍福無門, 唯人召之.” <遂成>曰; “居樂之勢, 而不遊, 何爲汝其, 勿言.” 九月, 西部地震. 上夜夢, 豹齒斷虎尾. 巫曰; “必有皇親謀絶大(統).” 上不悅. <高福章>曰; “作善, 則災反爲福, 不善, 則吉變爲匈. 今, 陛下, 憂國如家, 愛民如子, 何憂之. 有凡君之福, 在德, 不在夢.” <福章>, <婁>之曾孫也.
<羅>議遠征<末曷>. <雄>曰; “<末曷>, 本無定居, 故以<高句麗>之大猶, 置(度)外. 况議, 小國, 安可空國, 遠征哉, <濟><倭>之伺欠, 一不可也. 所爲<末曷>云者, 多<扶余><樂浪>, 則與<麗>失和, 二不可也.”
○ 31년(단기2475년/AD142)임오, 정월, <달가>가 좌보가 되었다. 3월, <수성>이 <질산>의 남쪽에서 사냥을 하여 이레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즐기고 노는 것이 도를 넘었다. 7월에 <기구>에서 또 닷새를 사냥하고, 또다시 <왜산>에서 사냥하다가 백성들의 곡식을 상하게 하였다.
그의 무리들인 <관나>우태 <미유>, <환나>우태 <어질>, <비류>흡의 <양신> 등과 서로 상의하다가; “형황께서 늙으셨는데도 돌아가시지 않으니 어찌하여야 하겠소? 나도 나이가 서산에 기울어,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라 하니, (무리들) 모두는 “당장 폐하고 세웁시다.”라 하였다. 이에 <백고>가 나서서 “적자가 있는데, 하필이면 형과 동생 간에 전위한다는 말입니까? 공께서는 황제의 지친으로 백관의 수장이시니, 의당 마음속에 충효가 가득해야 할 것인데, 어찌 황음함이 이러하십니까? 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사람이 불러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수성>이 받아 말하길; “즐기며 놀고 있는 자리에서 (너는) 왜 놀지는 않고 무슨 이유로 그리 말하느냐? 입 다물어라!.” 하였다. 9월, 서부에 지진이 있었고, 상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이빨로 물어 끊었다. 무당이 아뢰길; “필시 황친이 대통을 끊으려 일을 꾸미고 있음입니다.”하니, 상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복장>이 아뢰길; “선한 일을 하면, 재앙도 바뀌어 복이 되고, 나쁜 짓을 하면 길한 것도 흉한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나랏일 걱정하시길 집안일처럼 하시고, 백성 아끼시길 자식같이 하시는데, 무슨 걱정하실 일이 또 있겠습니까?. 모든 인군의 복은 덕행에서 오는 것이지 꿈에서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복장>은 <고루>의 증손자이었다.
<신라>가 <말갈> 원정을 상의하고 있었는데, <웅>이 말하길; “<말갈>은 본래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기에 <고구리>의 큰 괴수도 일정한 바깥지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이 작은 나라가 나라를 비우고 멀리 가서 <말갈>을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백제>와 <왜>가 항시 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불가한 이유의 하나이고, 소위 <말갈>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는 <부여>와 <낙랑>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어 <고구리>와의 화평이 깨질 수 있으니, 불가능한 둘째 이유입니다.” 하였다.
◎ 三十二年癸未, 三月, 太輔<乙布>薨, <尙溫>太輔, <達賈>左輔.
○ 32년(단기2476년/AD143)계미, 3월, 태보 <을포>가 죽어, <상온>을 태보로, <달가>를 좌보로 삼았다.
◎ 三十三年甲申, 三月, <高福章>守<西河>. □月, 以<松奇>女妻<守成>. <羅>修堤防墾田野, 禁民用金銀珠玉.
○ 33년(단기2477년/AD144)갑신, 3월, <고복장>이 <서하>를 지켰다. □월, <송기>의 딸을 <수성>의 처로 주었다.
<신라>가 제방을 고치고 농경지를 개간하여 넓히고, 백성들이 금은과 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 三十四年乙酉, 二月, <尙蕃><柵城>褥薩. <白面>上<仙皇>, 修道繪, 三卷.
<羅>, 春夏, 旱, 南地最甚, 移粟賑之.
○ 34년(단기2478년/AD145)을유, 2월, <상번>이 <책성>욕살이 되었다. <백면>이 선황에게 수도하는 그림 세 권을 바쳤다.
<신라>는 봄과 여름이 가물었고, 남쪽이 제일 심하였기에, 조를 옮겨서 나누어 주었다.
◎ 三十五年丙戌, 二月, <達賈>薨, <穆度婁>左輔, <高福章>右輔, <乙魚>守<西河>. 七月, <遂成>與其黨<彌儒>等議廢立于<倭山>. 義臣諫曰; “殿下孝順, 事上久矣. 今以年老改心, 非忠也. 請安分而待之.” 左右欲殺. <遂成>曰; “直諫藥也. 亦不可無此一人.” 十月, <高福章>勸上誅<遂成>. 上曰; “兄弟不可相殘. 吾將禪位矣.” <福章>, <遂成>不仁不可, 以委國而胎禍. <帶方>反, <乙魚>攻其守<劉虎>斬之, 餘衆慴伏. 十二月, 上禪位于<遂成>, 退去<鶻川>別宮. 春秋七十九. <遂成>卽位於鸞宮, 以<尙>后爲中宮皇后. <羽>公主爲左宮皇后. <松奇>女<黃龍>爲右宮皇后. 以<松奇>爲右輔.
○ 35년(단기2479년/AD146)병술, 2월, <달가>가 죽어, <목도루>를 좌보로, <고복장>을 우보로 삼고, <을어>에게 <서하>를 지키게 했다. 7월, <수성>과 그 일당 <미유> 등이 <왜산>에서 폐립을 논의했다. 의로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길; “전하께서는 효순하여 상을 섬기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늙었다 하여 변심한다면 불충한 것입니다. 청컨대 분수를 지키며 기다리시지요.”라고 하니, 좌우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 <수성>이 말하길; “직간하여 줌이 약이로다. 역시 불가하다고 말하는 이는 이 한 사람 밖에 없구려.”라고 하였다.
10월, <고복장>이 상께 <수성>을 주살하라 권하였더니, 상께서 이르길;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곧 선위할 것이다.” 하였고, <복장>이 다시 말하길; “<수성>은 어질지 못하여 선위는 불가합니다. 나라를 맡기시면 재앙을 잉태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대방>이 반란하여, <을어>가 <대방>의 태수 <유호>를 참살하니,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항복하였다. 12월, 상께서 <수성>에게 선위하고, <골천>의 별궁으로 물러나 앉았다. 춘추 79세였다. <수성>이 란궁에서 즉위하고, <상>후를 중궁황후로, <우>공주를 좌궁황후로, <송기>의 딸 <황룡>을 우궁황후로 삼고, <송기>를 우보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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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정할 것에 대한 가르침을 구합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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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世<太祖皇帝>紀
◎ 帝諱<宮>亦曰<於漱>, <神明仙帝>之子也. 母曰<芦花>太后<扶餘>氏, <東部{扶}餘>太師<王文>之女也. 帝生而開目能視, 有神力將兵往<遼東>累建大功. 至是, 受禪, 時年四十五. 性寬仁孝友捨己從人. 以父皇厭政咨問於母. 太后以決事, 事不置太輔.
○ 제는 휘가 <궁> 또는 <어수>이고, <신명선제>의 아들이다. 모친은 <호화>태후 <부여>씨로 <동부여>의 태사 <왕문>의 딸이다. 제는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고 있어 사물을 볼 수 있었고, 신통한 힘이 있어 병사를 이끌고 <요동>을 쳐서 누차 큰 공을 세웠다. 때가 되어 선위를 받으니 나이 45세였다. 품성은 아량이 넓고 어질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고, 자기보다는 타인을 존중했다. 부황은 정사에 별 뜻이 없어 모친에게 물었다. 태후가 정사를 처결하였고, 정사를 돌봄에 있어 태보를 따로 두지 않았다.
◎ 元年壬子, 六月, 尊先帝爲太上皇, 母后爲<芦花宮>皇太后. <麻樂>左輔, <松豆智>右輔. 元用神明者, 以先帝在世故也. 三代鏡五十七卷成. <東明>·<光明>·<大武>三代之聖繪也. 先皇詔曰; “允爲人君者, 必有代鏡. 鏡所以照善也, 不可以照惡, 惡者廢之. 以戒吾子孫.”
十月, <羅><婆娑>殂, 葬于<蛇陵>, 子<祇味>立. 母曰<史省>, <許婁>女. 妻曰<爰{愛}禮>, <摩帝>女也. 初, <婆娑>與<祇味>過<輯岐>, <許婁>欲以其女妻<祇味>而出舞, <摩帝>亦以其女出舞, 以成饌美醞待之. <祇味>多取<摩帝>酒, 故遂以<爰{愛}禮>配之, 稱<摩帝>以<酒多干(舒弗邯牛角干)>, 以其地名<大庖>云.
<索頭><應黙>殂. <査功>立, 以<母鷄>爲妻.
○ 원년(단기2445년/AD112)임자, 6월, <선제>를 태상황으로 높이고, 모후를 <호화궁>황태후로 하였다. <마락>을 좌보, <송두지>를 우보로 하였다. 년호는 선제가 살아계시는 까닭으로 <신명>을 썼다. <삼대경> 57권이 이루어졌다. <동명>·<광명>·<대무> 3대의 성스러운 그림(聖繪)이다. 선황이 조서로써 이르길; “진실로 인군 된 자는 대경이 있어야 한다. 경은 선함을 비추는 것이지, 악함을 비추는 것이 아니다. 악함은 이(경)를 못쓰게 만든다. 이를 내 자손들에게 경계코자 한다.”고 하였다.
10월, <신라>에서는 <파사>가 죽어, <사릉>에 장사하고, 아들 <기미(지미)>가 섰다. 모친 <사성>은 <허루>의 딸이다. 처는 <원{애}례>로 <마제>의 딸이다. 애초에 <파사>가 <기미>와 함께 <집기>를 지날 때, <허루>가 자기 딸을, <기미>에게 처로 주고 싶어, 나와서 춤추게 하였고, <마제> 또한 자기 딸을 나와서 춤추게 하고, ‘성찬미온’으로 그를 대접하였다. <기미>가 <마제>의 술을 많이 마셨기에, 마침내 <원{애}례>를 짝지어 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마제>를 <주다간(서불감우각간)>이라 부르고, 그곳 땅을 <대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색두>의 <응묵>이 죽었다. <사공>이 서고, <모계>를 처로 삼았다.
◎ 二年癸丑, 正月, 太后親太輔之政, 命擧內外, 賢良才藝勇猛之士, 不問骨品, 授之以職, 曰; “民爲國本, 食爲民本, 宜爾大小官士, 亦務農牧釀織, 勿墜貧窮. 朕當示本, 遂與上親行耕蠶.” 命, 刻<幽>·<幷>·<冀>·<遼>之版, 頒領聰俊之士, 以營, 征<遼>之役.
二月, <祈味>祀其祖廟, 以<昌水>伊湌參政, <玉權>海湌, <申權>一吉湌, <順宣>級湌.
三月, <濟>使至<羅>, <濟>以<末曷>爲苦, 而欲南下也.
○2년(단기2446년/AD113)계축, 정월, 태후가 친히 태보의 정사를 보면서, 내외의 ‘현량재예용맹지사’에게 골품을 따지지 말고 직책을 맡기라고 명하고는, 이르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식량은 백성의 근본이니, 대소의 모든 관리 역시 ‘농목양직’에 노력하여 빈궁함으로 떨어지지 말라. 짐도 당연히 상과 함께 ‘경잠’을 행할 것이다.” 하였다. <유>·<병>·<기>·<요>주의 땅을 혹독하게 쳐부수되, ‘총준지사’를 나누어서 병영을 세우고 나서 <요> 정벌전쟁에 나서라 명하였다.
2월, <기미>가 조상의 사당에 제사하였고, <창수>를 이찬 참정으로, <옥권>을 해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삼았다.
3월, <백제>의 사신이 <신라>에 갔다. <백제>는 <말갈>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남하하고자 하였다.
◎ 三年甲寅, 二月, 仙師<尙仁>上化, 諡曰<普尊仙師>, 仁, 善天畵, 有上帝品百二十卷, 壽九十八. 以<高德>女<高>氏爲皇后. 時, 皇后生子<萬勒>故也. <德>, <高婁>太子之弟八子也. 仙術高明與<普尊>比<扃{肩?}>, 以王孫讓師于<尊>. 杜門修道, 以絶烟火, 八十三妻子不敢近唯. 上往拜獻果則敎, 以愛民孝親崇仙無驕. 上請火食而長壽, 則曰上帝; “召我使治遠”, 而未幾, 亦上化.
是, <羅>春雹夏水, 而慮囚.
○ 3년(단기2447년/AD114)갑인, 2월, 선사 <상인>이 죽었다. 시호는 <보존선사>이고, 어질었고, 귀한 그림을 잘 그렸기에, 제에게 올린 품목이 120권이나 된다. 98세를 살았다. <고덕>의 딸 <고>씨를 황후로 들였는데, 황후가 그때에 <만륵>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고덕>은 <고루>태자 동생의 여덟 째 아들이다. 선술에 고명하여 <보존>과 함께 <경?>에 비견되었는데, 왕손이어서 선사의 자리를 <보존>에게 양보하였다. 두문불출하여 도를 닦으며, 불과 연기를 피우지 않고 사니(날 음식만 먹고 사니), 83명의 처자가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상이 찾아가서 절하면 가르치곤 하였는데, 백성을 아끼고 효도하며 선을 숭상하고 교만하지 말라고 하였다. 상이 익힌 음식을 먹고 오래도록 살라고 청하니, 제에게 아뢰길; “저를 불러 먼 곳을 다스리게 하십시오.”하였는데, 이를 이루기 전에 역시 죽었다.
이 해에 <신라>에서는 봄에는 우박이 내리고, 여름에는 수해를 입어, 죄수 방면을 생각했다.
◎ 四年乙卯, 二月, 重修<西河(長春)>·<南口(遼源)>·<河城(通遼)>·<安平(開原)>·<長岺(鐵 岺)>·<菟城(奉天)>·<屯有(遼中)>·<平郭(台{令}安)>·<河陽(遼陽㝢 堡)>·<高顯(開通)>·<南蘇(赫爾蘇)>等城, 以備西南. 八月, 國南蝗, 巡視而至南海, 十月, 還.
二月, <加耶>伐<羅>南. 七月, <祈味>親征<加耶>, 師步騎渡<黃山河(漢江)>, 遇伏兵于<林薄>, 被圍數匝. <祈味>奮鬪決圍而出, 勇將<春郞>戰死.
○ 4년(단기2448년/AD115)을묘, 2월, <서하(장춘)>·<남구(요원)>·<하성(통요)>·<안평(개원)>·<장령(철 령)>·<토성(봉천)>·<둔유(요중)>·<평곽(태{령}안)>·<하양(요양우 보)>·<고현(개통)>·<남소(혁이소)> 등 10성을 고쳐쌓아 서남쪽에 대비하였다. 8월, 나라의 남쪽 땅에 황충 피해가 있어서, 순시하여 <남해>에 이르렀다가, 10월에 돌아왔다.
2월, <가야>가 <신라>의 남부를 쳤다. 7월엔 <기미>가 친히 <가야>를 쳤는데,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황산하(한강)>를 건넜고, <임박>에서 <가야>의 복병을 만나 여러 겹으로 포위를 당했다. <기미>가 분투하여 포위를 뚫고 나왔는데, 용장 <춘랑>이 전사했다.
◎ 五年丙辰, 二月, 納<羽奕>女爲副后. 三月, 日食. 十二月, 雪五尺.
八月, <祈味>自將精兵一萬伐<加耶>, <加耶>固守而天且久雨, 故無功而歸.
<査功>遣弟<健>來獻駱駝三十匹以<荻>公主妻之.
○ 5년(단기2449년/AD116)병진, 2월, <우혁>의 딸을 부후로 맞았다. 3월, 일식이 있었고, 12월엔 눈이 5 자나 쌓였다.
8월에 <기미>가 직접 정병 1만을 이끌고 <가야>를 쳤는데, <가야>가 굳게 지키고, 날씨도 오래도록 비가 내려,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사공>이 동생 <건>을 보내 낙타 30 필을 바쳐왔기에, <적>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 六年丁巳, 三月, 上皇巡狩至<淌村>, 納<溫>女<天花>于後宮. 命修<尙須祠>. <須>以<買溝谷>長者, 歸化而主畜. 其子<仁>爲<海山>高仙, <溫>之孫也. 世世修德淨心而至此. <天花>性溫柔且靭, 皃又絶色, □萬若之一人也. <高>皇后生<元>公主.
○ 6년(단기2450년/AD117)정사, 3월, 상황이 순수하여 <창촌>에 이르러 <상온>의 딸 <천화>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상수사>를 보수하라 명하였다. <상수>는 <매구곡>의 우두머리였었는데, 귀화하여 주축대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인>은 <해산>고선이 되었는데, <온>의 손자이다. 대대로 도를 닦고 마음을 맑게 가라앉혀 오늘에 이르렀다. <천화>는 성품이 온화하고 끈질기며, 용모 또한 만에 하나 있을만한 절색이었다. <고>황후가 <원>공주를 낳았다.
◎ 七年戊午, 三月, 置三軍, <羽奕>中軍將軍, <高良>左軍將軍, <禾直>右軍將軍. 地震. 六月, <漢>人侵<菟城>, 敗歸, 又攻<華麗>. <漢>人師, <大>上“歷代治亂繪七卷”, 賜年穀牛羊, 養之. 七月, 雹. 八月, 命五部仙院, 擧賢良孝順之士, 授之官, 問四窮不能存者, 給衣食. <麻樂>太輔, <松豆智>左輔, <乙布>右輔.
○ 7년(단기2451년/AD118)무오, 3월, 삼군을 설치했다. <우혁>을 중군장군으로, <고량>을 좌군장군으로, <화직>을 우군장군으로 삼았다. 지진이 있었다. 6월, <한>인들이 <토성>에 쳐들어 왔다가 패하여 물라가더니만, 또 <화려>를 공격했다. <한>인 스승 <대>가 “역대치란회7권”을 바쳐오니, 매년 곡물을 주고 소 및 양도 주어 기르게 하였다. 7월, 우박이 내렸다. 8월, 5부선원에 명을 내려 ‘현량효순지사’를 천거하게 하여, 뽑혀 온 이들에게 관직을 주고, ‘사궁불능존자’를 찾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마락>을 태보로, <송두지>를 좌보로, <을포>를 우보로 삼았다.
◎ 八年己未, 正月, 副后生<羽>公主. 六月, <羽奕>·<高良>·<禾直>等伐<宿車(運{連}平)>·<候城(寧城)>·<遼 隊(岺脉)>等地, 掠生口千余人而還. 九月, 擧八藝之士, 一曰禮, 二曰樂, 三曰射, 四曰騎, 五曰畵, 六曰算, 七曰藥, 八曰陶槍劒之士. 附於射科書刻之士, 附畵科陰易之士, 附於禮科鶴舞之士, 附於樂科針灸之士, 附於藥科匠木之士, 附於陶科. 置採金使, 主諸金及貨貝. 上納<天花>爲宮人, 上皇命也.
○ 8년(단기2452년/AD119)기미, 정월, 부후가 <우>공주를 낳았다. 6월, <우혁>·<고량>·<화직> 등이 <숙거(운{연}평)>·<후성(영성)>·<요대(령맥)> 등지를 정벌하고 생구 천여 명을 잡아 돌아왔다. 9월, '팔례지사'를 천거 받았다. 일왈‘예’, 이왈‘락’, 삼왈‘사’, 사왈‘기’, 오왈‘화’, 육왈‘산’, 칠왈‘약’, 팔왈‘도창검지사’이다. ‘사과서각지사’에 속하게 하고, ‘화과음역지사’에 속하게 하고, ‘예과학무지사’에 속하게 하고, ‘락과침구지사’에 속하게 하고, ‘도과’에 속하게 하였다.
‘채금사’를 두어 모든 금과 화패를 관장하게 하였다. 상이 <천화>를 받아들여 궁인으로 두었는데, 이는 상황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 九年庚申, 二月, <漢>人<姚光>自稱<菟城>太守, 據<汶城>, 數侵<菟城>·<平郭>·<屯有>, 以違其約, 遣王弟<遂成>率<禾直>·<乙魚>等攻<遼東(彰武)>拔之. <姚光>遁去<汶城(新民)>, 亦歸于我. <漢>人來降者千人. 命<漢>人師<大>畵<三代(東明光明大武三代)鏡>繪百八十卷, 以爲新鏡, 其畵精鮮燎然, 舊鏡五十七卷古色蒼然. 簡素, 可法, 故名爲<政經>. 師<大>, 初翻舊鏡而今又着新, 故妻以<乙布>女, 爵小兄.
<羅>, 二月, 有大星墜<月城>西, 其聲如雷. 三月, <羅>都大疫. 上送藥十種救之.
○ 9년(단기2453년/AD120)경신, 2월, <한>인 <요광>이 스스로 <토성>태수를 칭하고 <문성>에 머물면서 <토성>·<평곽>·<둔유>를 누차 침략하여 약조를 어겼기에, 왕의 동생 <수성>이 <화직>과 <을어> 등을 이끌고 가서<요동(창무)>을 쳐 발본하게 했다. <요광>은 <문성(신민)>으로 도망갔다가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찾아와서 항복한 <한>인이 천 명이었다.
<한>인 스승 <대>를 시켜 <삼대(동명광명대무삼대)경>그림을 180 권을 그리게 하여 신경이 생겼는데, 그림이 ‘정선요연’하였고, 구경 57 권은 ‘고색창연’하였다. 간소하고 법으로 삼을만하여, <정경{다스림 경전}>이라 이름을 붙였다. 스승 <대>가 처음으로 구경을 번역하여 새롭게 되었기에, <을포>의 딸을 처로 삼아주고, 소형의 작위도 주었다.
<신라>에서는 2월에 큰 별이 <월성>의 서쪽에 떨어졌는데, 그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3월에 <신라>의 도성에 돌림병이 크게 들어, 상이 10종의 약을 보내 도와주었다.
◎ 十年辛酉, 正月, 宮人<天花>生子<白固>. 先是皇夢見<天花>與上合而生龍. 至是, 應焉. 故曰名以<白固>, 乃覇必固之義也. 長而仁賢, 不失上皇命名之, 意聖哉. 仙皇之鑑.
<査功>殂, <健>立.
○ 10년(단기2454년/AD121)신유, 정월, 궁인 <천화>가 아들 <백고>를 낳았다. 이에 앞서, 황상이 <천화>와 상이 화합하여 용이 되는 꿈을 꾸었는데, 지금 그 응답이 왔다고 하여 이름을 <백고>라 하였다. 이겨서 반드시 굳게 지킨다는 뜻이다. 자라서는 어질고 현명하여 졌으며, 상황이 그의 이름을 성스럽게 지은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선황(仙皇)의 거울이라.
<사공>이 죽고, <사건>이 섰다.
◎ 二月, <姚光>自<幽州>來侵殺<丘利>渠帥. <后{羽}突>·<禾直>赴救大破之, <乙魚>誘其大軍于<甬道>, 而設伏嶮阨, 以殘滅之, 獲其兵仗馬匹無數. 又追擊於<赤山(赤峰)>·<棘城(津平)>, 焚其城郭糧草, 虜獲生口二千余. □其技能者授職, 聲色者賜將士爲妾. 上皇洗<白固>, 而疾作月餘, 二月, 晦, 崩, 葬于茅山(今茅河).
四月, 親征<蔡諷>於<遼隊(古北口之岺脉)>戰于<新城(永平)>, 斬其將<耿芼>·<龍端>·<公孫酺>·<孫壽>等百四十余人. <棘城印皆入我地. <諷>逃入<幽州>不敢復侵.
八月, <漢>使來朝弔上皇, 獻簿, 請和. 群臣以其奸凶, 不可信, 請斬之. 上曰; “彼以禮來我, 何暴.”, 爲命賓部厚待. <遂成>問<鄧>后之年, 使曰; “崩矣.” <遂成>曰; “昔<呂>后解帶於(平)城, 以悅<冒頓>. 汝等何不以<鄧(曼)>解帶于我, 而魚肉. 邪若不以<祐>母妾我, <洛陽>灰矣.” 使撫然, 良久, 當從王命. 上聞之責. <遂成>曰; “<遂成>, 吾視<漢>如草. 今吾何畏之, 甚乎.” 上曰; “經, 不云乎. 一虫可畏, 况人而君哉. 驕者敗, 戒之.”
○ 2월, <유주>에서 <요광>이 쳐들어와 <구리>의 거수를 죽였다. <후{우}돌>과 <화직>이 구원하러 가서 <요광>을 크게 쳐부쉈고, <을어>는 <요광>의 대군을 <용도>로 유인하여, 험지에 매복하여 놓은 군사로 모조리 짓이기고,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이 무수하게 많았다. 또한 <적산(적봉)>·<극성<진평>까지 추격하여 성곽과 군량 및 마초를 불사르고, 생구 2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잡힌 사람들 중에서) 기능이 있는 자에게는 직책을 주었고, 목소리가 예쁜이들은 장사들에게 첩으로 나누어 주었다. 상황이 <백고>를 씻어 주고 병이 들어 달을 넘겨 앓다가, 2월 그믐에 죽어, <모산>에 장사했다.
4월, <채풍>을 <요대(고북구지령맥)>에서 친히 정벌하고 <신성(영평)>에서 싸워, 그의 장수들 <경모>·<용단>·<공손포>·<손수>등 140여 명을 참하였다. <극성>이동의 땅이 우리 것이 되었다. <채풍>은 <유주>로 도망하여, 감히 다시는 침입하지 않았다.
8월, <한>의 사절이 상황을 조문하러 래조하여 부의를 바치고 화친을 청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들은 간교하고 흉악하여 믿을 수 없으니 죽이자고 청을 하자, 상이 이르길; “저들이 우리를 예로써 찾아왔는데, 어찌 사납게 할 수 있는가?” 하고는 빈부에 후하게 대접하라고 명하였다. <수성>이 <등>후의 나이를 묻자, 사신은 “돌아가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수성>이 말하길; “지난날, <려>후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어 <모돈>을 즐겁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왜 <려만>이 나에게는 허리띠를 풀게 하지 않는가? 어육이 될 일이다. 간사히 하여 <우>의 어미가 내게 첩 노릇을 하지 않으면 <낙양>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사신들은 난감하여, 잠자코 있다가, 왕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이 이 말을 듣고는 책망하니, <수성>이 이르길; “저 <수성>은 <한>을 잡초같이 여깁니다. 지금 어찌 제가 그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저를 질책하심은) 지나치십니다.” 하였고, 상이 이르길; “옳지 않으니, 그만하라. 벌레 한 마리도 조심하여야 하거늘 사람과 사람들의 임금 된 자는 어떠하겠느냐? 교만하면 지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十月, 上與太后如<扶余>, 祀<柳花>聖母及太后祖廟, 問民窮者, 賜物.
<肅愼>來獻紫狐表白鸞白馬. <肅愼>在<梁貊>之北(<滿洲里>之北)<膝河>. 以漁獵馬生, 其俗淳古, 父子人畜同室混處. 以<貊弓>從岺外水路往來于<漢>, 而泄我國情, 故朝廷束之.
○ 10월, 상은 태후와 함께 <부여>로 가서 <유화>성모와 태후 조상을 모신 사당에 제사하고, 백성들 중에 궁한 이들을 찾아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숙신>이 찾아와서 자색 호피와 백란 및 백마를 바쳤다. <숙신>은 <양맥>의 북쪽(만주리지북)에 있다. 물고기를 잡고 말을 길렀으며, 그 풍속은 옛사람들처럼 순박하였고, 부자인축이 한 곳(室)에서 섞여 기거하였다. <맥궁>을 가지고 고개 밖의 물길로 <한>에 오가면서 우리나라의 사정을 누설하는 까닭에 조정이 이들을 잡아두었다.
◎ 十一月, 上自<扶余>還. 以<遂成>爲大芻加, 委以兵權, 太后命也. 十二月, <姚光>, 誘<句麗(林西)>渠帥<屠利>爲<玄菟>都尉, 與<卑離>反賊<尉仇台>, 謀復<紫蒙>故地, 新置<玄菟>府于<川西(林東)>而居之. 上親率<馬韓>·<盖馬>軍一萬騎, 而攻<川西>, 不克而還.
<羅>, <翊宗>伊湌, <昕連>海湌, <林權>阿湌. 二月, 築<大甑山城>. 四月, <倭>寇東邊.
○ 11월, 상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수성>을 대추가로 삼고, 병권을 위임하였는데, 이는 태후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12월, <요광>이 <구려>거수 <도리>를 꼬드겨 <현토>도위로 삼고{삼겠다 하고}, <비리>를 이반한 적도 <위구태>와 함께 모의하여 <자몽>의 옛 땅을 회복하고, <천서>에다가 새로이 <현토>부를 두고 거기에서 머물렀다. 상이 <마한>과 <개마>의 1만 기병을 이끌고 <천서>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에서는 <익종>을 이찬으로, <흔련>을 해찬으로, <림권>을 아찬으로 삼았다. 2월에는 <대증산성>을 쌓았고, 4월에는 <왜>가 신라의 동쪽 변방을 노략하였다.
◎ 十一年壬戌, 二月, 上復引<馬韓>·<勾茶>·<盖馬>三國兵, 伐<川西>·<勾麗>, 拔之. <姚光>逃走, 爲其部下所殺. <仇台>逃入<西紫蒙(達里湖西沙漠之地)>自稱<西扶余>, 後爲<宇文>所逐.
四月, 太輔<麻樂>薨, 年六十九. 父, <卑離>王<義鹿>, <麻離>子也. 聚<大武神>女<都>公主, 而生<樂>. 腹有紅紋三星, 驍勇而善戰, 累建大功, 及入輔爲執大臣, 體能決大事, 可稱賢相. **然, 閨簿不嚴, 殯未冷而妻女奔, 人情哉.** <松豆智>太輔, <乙布>左輔, <遂成>右輔, <羽奕>大主簿, <尙溫>大評者, <尙岑>馬將軍, <尙蕃>殿中(皀/皂)衣(使人).
是, <羅>大風東來, 折木飛□, 終日. 訛言, <倭>至, 民爭遁谷, <翊宗>諭止之. 而七月, 蝗飢多盜.
○ 11년(단기2455년/AD122)임술, 2월, 상이 다시금 <마한>·<구다>·<개마> 3국의 병사를 이끌고 <천서>와<구려>를 정벌하여 뿌리 뽑았다. <요광>은 달아나다가 자기 부하의 손에 죽었고, <구태>는 <서자몽(달리호서사막지지)>으로 피하여 들어가 스스로 <서부여>라 칭하였으나, 후일에 <우문>에게 쫓겨났다.
4월, 태보 <마락>이 죽었다. 나이 69살이었다. 부친은 <마리>의 아들이자 <비리>의 왕이었던 <의록>이다. <대무신>의 딸인 <도>공주에게 장가들어 <락>을 낳았다. 배에는 붉은 ‘삼성’ 문양이 있었는데, 용감하여 전쟁에 뛰어나 큰 공을 누차 세웠고, 재상으로 들어가서는 집정대신이 되어 몸소 큰 정사를 잘 처결하였으니, 현명한 재상이었다 할 만하다. 성품이 부드러워, 규부를 엄격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시신이 식기도 전에 부녀자들이 분망하였었으니, 이것이 인정이라! <송두지>를 태보로, <을포>를 좌보로, <수성>을 우보로, <우혁>을 대주부로, <상오>을 대평자로, <상잠>을 마장군으로, <상번>을 전중(흡/조)의(사인)로 삼았다.
이 해에 <신라>에서는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서 하루 종일 나무가 부러지고 □가 날렸다. <왜>가 왔다고 말이 퍼져서 백성들이 산곡으로 숨어들자, <익종>은 이를 깨우쳐 말렸다. 7월에는 황충 피해가 있어 굶주리게 되니 도적이 들끓었다.
◎ 十二年癸亥, 二月, 大閱<西河>. 十月, <穆度婁><沸流>沛者·<高福章><桓那>沛者·<尙溫><淹호>沛者, 三人莫逆之交, 而治世之賢, 故人稱‘三台’.
<羅>, 三月, 與<倭>和. 四月, 霜. 五月, <金城>東民屋(陷)爲池.
○ 12년(단기2456년/AD123)계해, 2월, <서하>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10월, <비류>패자<목도루>·<환나>패자<고복장>·<엄호>패자<상온> 세 사람은 막역하게 사귀면서 세상을 현명하게 다스렸기에, 사람들이 <3태>라 불렀다.
<신라>에서는, 3월에 <왜>와 화친하였고, 5월에는 <금성> 동쪽 땅이 푹 꺼져서 물에 잠겼다.
◎ 十三年甲子, 五月, 右將軍<穆吉>卒, <尙岑>代之. <禾直>率<紫蒙>軍, 伐<尉仇台>, 破<月海(達里湖)>, 至<月都(多倫)>而還. <遂成>左輔, <羽突>右輔. 八月, 田于<太伯山>南(白羅山對面山界)獲白鹿大如馬而紫角. 巫言<仇台>王時此馬現而今又現之. 以綠錦爲鞍而乘之. 上身長八尺, 重百斤余, 而鹿白如故, 以爲乘馬而每朝騎馳, 人號以<白鹿大王>. 一日, 至<毛屯谷>三賢坮, 得聖母釧, 仍祭<優勃水(哈爾屯河)>. 國南蝗, 送仙人<陽父(被)>之. 九月, 庚申, 晦, 日食. <漢>使來請和. 十一月, 東部地震. <尙>后生<衲>公主. <好萬>太輔. <松豆智>薨, 年七十一, 賜其妻<典>公主年穀.
○ 13년(단기2457년/AD124)갑자, 5월, 우장군 <목길>이 죽어 <상잠>이 대신하게 하였다. <화직>이 <자몽>의 군대를 이끌고 <위구태>를 정벌하여 <월해(달리호)>를 깨고 <월도(다륜)>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수성>을 우보로 삼았다. 8월, <태백산(백라산대면산계)>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크기가 말만하고 뿔이 자색인 흰 사슴을 붙잡았다. <무당>이 말하길 <구태>왕 시절에 이 말이 나타났다가 지금 또 나타났다고 하였다. 녹색 비단으로 안장을 얹어 타고 다녔다. 상은 신장이 8척이나 되고 체중은 100근 여가 되는데, 사슴은 옛날과 같이 흰색이고, 매일 아침 이를 타고 달리니, 사람들이 <백록대왕>이라 불렀다. 하루는 <모둔곡>의 <삼현대>에 이르러 성모의 팔찌를 줍고는 <우발수(합이둔하)>에 제사하였다. 나라의 남쪽에 황충이 나타나 선인 <양부>를 그곳으로 보내어 해결했다. 9월, 경신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한>의 사신이 와서 화친하기를 청했다. 11월, 동부에 지진이 일었다. <상>후가 <납>공주를 낳았다. <호만>을 태보로 삼았다. <송두지>가 나이 71살에 죽어, 그의 처 <전>공주에게 매년 양식을 주게 하였다.
◎ 十四年乙丑, 正月, <尙溫>右輔, <朱文>中畏大夫, <富文><松江(同江)>沛者. <朱文>·<富文>, <芦花>太后弟也. 十一月, <太伯山>巫<据山>獻雌白鹿, 有黃斑. 上喜天, 而牝吾馬乎. 命, 字于<淌水宮>, 曰; “ 鹿之有斯牝, 如朕之有賢后.” 仍名牡曰; “<明角>”, 牝曰; “<玄池>”. 上與后分乘每朝, 出<淌宮>從河尾之<綸原>而返朝饌. 新造鹿舍于內庭, 置鹿師二人.
是年, 正月, <末曷>入<羅>北殺掠. 七月, 又襲<大岺柵>過於<泥河>. <濟>遣五將軍助<羅>破<曷>.
○ 14년(단기2458년/AD125)을축, 정월, <상온>을 우보로, <주문>을 중외대부로, <부문>을 <송강(동강)>패자로 삼았다. <주문>과 <부문>은 <화화>태후의 동생들이다. 11월, <태백산> 무당 <거산>이 누런 반점이 있는 흰 사슴 암컷을 바쳐왔기에, 상은 하늘에 기뻐하면서 “내 말의 아내로 삼아줘야겠다!”라 하였다. <창수궁>에서 기르라고 명하면서, 이르길; “나에게 현명한 후가 있듯이 사슴에게도 짝이 있어야 한다. 그러하니, 수컷은 <명각>이라 이름을 붙여주고 암컷은 <현지>라 이름을 붙여주었다. 매일아침에 상은 후와 함께 나누어 타고는 <창궁>을 나서서 <창하> 끝 <륜원>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아침을 먹었다. 새로이 사슴의 우리를 지어주고 사슴 관리인 두 명을 두었다.
이 해 정월에 <말갈>이 <신라>의 북쪽에 들어와 살육하였다. 7월에 또 <대령책>을 습격하여 <니하>를 지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신라>를 도와 <말갈>을 깼다.
◎ 十五年丙寅, 二月七日, <麻樂>妻<烏>氏生<穆崇>子<靖>, 請爲<樂>許之. 以<尙溫>女<銀花>爲副后, <天花>之妹也..
○ 15년(단기2459년/AD126)병인, 2월 7일, <마락>의 처 <오>씨가 <목숭>의 아들 <정>을 낳고는, <락>의 아들로 하여 달라고 청을 하니 허락되었다. <상온>의 딸 <은화>를 부후로 삼았는데, <은화>는 <천화>의 여동생이다.
◎十六年丁卯, 七月甲戌朔, 日食. <尙>后生子<將固>.
○ 16년(단기2460년/AD127)정묘, 7월 갑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상>후가 아들 <장고>를 낳았다.
◎ 十七年戊辰, 八月, <曷思>王<都頭>, 以國來獻, 封爲<于台>. <尙溫>東部大使者, <羽奕>右輔.
是月, <羅>長□龍天. 十月, 地震. 翌月, 雷.
○ 17년(단기2461년/AD128)무진, 8월, <갈사>왕 <도두>가 나라를 들어 찾아왔기에, <우태>에 봉하였다. <상온>을 동부대사자로, <우혁>을 우보로 삼았다.
이 달에 <신라>에서는 기다란 용이 승천하였고(?), 10월엔 지진이 있었고, 11월엔 우레가 있었다.
◎ 十八年己巳, 三月, <松奇>生女<黃龍>. <享>王, 其妻, <度婁>妹也. <尙溫>第三女<暖花>又入後宮. <高>皇后生<莫德>太子.
秋, <羅><昌永>死, 以海湌<王權>爲伊湌參政.
<尙>后生<비>公主.
○ 18년(단기2462년/AD129)기사, 3월, <송기>가 딸 <황룡>을 낳았다. <향>왕의 처는 <목도루>의 여동생이다. <상온>의 셋째 딸 <난화>가 또 후궁으로 들어갔다. <고>황후가 <막덕>태자를 낳았다.
가을, <신라>에서는 <영창>이 죽어, 해찬 <왕권>이 이찬 참정이 되었다.
<상>후가 <비>공주를 낳았다.
◎ 二十年辛未, 二月, 以<暖花>妻<萬勒>太子, <高>皇后請也. <松奇>大評者. 五月, <羅>大雨漂民戶. 七月, 太輔<好萬>薨, 年七十三.
○ 20년(단기2464년/AD131)신미, 2월, <난화>를 <만륵>태자의 처로 삼았는데, <고>황후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송기>를 대평자로 삼았다. 5월, <신라>에서는 큰비가 내려 민가가 물에 떴다. 7월, 태보 <호만>이 나이 73살에 죽었다.
◎ 二十一年壬申, 正月, <芦花>太后崩, 春秋八十四, 身長八尺, 重百三十斤, 有(脅)力, 善槍劒. <慕本>初, 隨夫皇<再思大王>平<扶余>內亂有功, <仙帝>時國之大事皆決於后. 上之卽位初, 亦居太輔之位. 有英斷能決難事, 知大體, 務精要. 臨崩, 勤與<遂成>, 相傳荑友(愛). 又言<天花>, 國之<源花>, 可與<遂成>共之, 以是, 亂倫而失政. <尙>后生子<春固>. <遂成>太輔, <羽奕>左輔, <禾直>右輔. 三月, <藻那>王<心>反, 遣<貫那>沛者<達賈>∇部大使者<穆度婁>, 討平之. 移<心>子<貫那>.(貫那藻那皆東扶餘地也藻那在黑水之口最遠而濱海故封蛙王之後孫沈爲王者也). 以< 穆度婁>爲<柵城>太守. 四月, 上命<尙>后與<遂成>出遊<太伯山>諸仙院, 凡七閱月而還.
是年, 二月, <羅>宮南門焚. 以<元>公主妻<遂成>.
○ 21년(단기2465년/AD132)임신, 정월, <호화>태후가 춘추 84세에 죽었다. 신장은 8척에 체중도 130근이었고, (상대를 겁주는) 힘도 있었고 창검도 잘 썼다. <모본> 초에는 부황인 <갈사대왕>이 <부여>내란을 평정할 때 따라가서 공을 세웠고, <선제(仙帝)> 시절엔 나라의 큰일들이 <후>에게서 처결되었다. 상의 즉위 초에도 태보의 자리에 있었다. 뛰어난 결단력이 있어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처결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을 알고 일의 핵심을 꿰었다. 죽음에 가까워서는 <수성>과 함께 일하면서 서로가 깊은 우애를 서로 전하였다. 또한 <천화{<상>후}>에게 이르길, 나라의 <원화{<상>후}>는 <수성>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둘이 그리하였는데, 이것이 윤리를 어지럽게 하고 실정하게 하였다. <상>후가 아들 <춘고>를 낳았다. <수성>이 태보, <우혁>이 좌보, <화직>이 우보가 되었다. 3월, <조나>왕 <심>이 반란하여, <관나>패자 <달가>와 동부대사자 <목도루>를 보내 토벌 평정하게 하였다. <심>의 아들을 <관나>로 옮겼다. (관나조나개동부여지야조나재흑수지구최원이빈해고봉와왕지후손심위왕자야). <목도루>를 <책성>태수로 삼았다. 4월, 상이 <상>후에게 <수성>과 함께 나가서 <태백산>의 여러 선원을 돌아보며 유람하라고 명하였더니, 무려 일곱 군데의 선원을 돌아보고 한 달이 다되어서 돌아왔다.
이 해 2월에 <신라>의 남문이 불탔다.
<원>공주를 <수성>의 처로 삼았다.
◎ 二十二年癸酉, 正月, 以<遂成>爲皇太弟, 置<東宮>, 僚七十八人, 以<尙>后爲<遂成>妃. <羽奕>太輔, <乙布>左輔, <尙溫>右輔. 六月, <遂成>妃生<遂成>子<駿>. 以<穆度婁>爲東宮大夫, 其妻<松花>生女<守禮>於<柵城>, 西來爲<駿>乳媼. 始築<牛山城(丸都)>, 以爲避暑之地.
○ 22년(단기2466년/AD133)계유, 정월, <수성>을 황태제로 하여 동궁을 설치하고 관료 78인을 딸려주고, <상>후를 <수성>의 비로 삼아주었다. <우혁>을 태보로, <을포>를 좌보로, <상온>을 우보로 삼았다. 6월, <수성>의 비가 <수성>의 아들 <주>을 낳았다. <목도루>를 동궁대가로 삼았는데, 그의 처 <송화>가 <책성>에서 딸 <수례>를 낳았기에, 서쪽으로 와서 <준>의 유모가 되었다. <우산성(환도)>을 쌓기 시작했는데, 피서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 二十三年甲戌, 三月, <紇于>孫<龍山>, 以<桓阿>·<越都>二部, 來屬降, 命<桶口>太子爲<桓阿>太守. 至<越都>, 納<龍山>女<紇>氏. 十月, <朱那>反, 命<桓那>沛者<薛儒>伐之. 其國多湖亦曰<湖國>, 在<藻那(今尼港之西北海岸)>之南, 與<藻那>相婚, 故欲復<藻那>, 而反. 男多女少, 有大(獹)如鹿, 能解人語.
是年, <濟><羅>皆旱疫死者殆半, <祈味>亦以疫殂.
○ 23년(단기2467년/AD134)갑술, 3월, <흘우>의 손자 <용산>이 <환아>와 <월도> 2부를 들고 찾아와 항복하여, <통구>태자를 <환아>태수로 삼았다. <월도>에 이르러서 <용산>의 딸 <흘>씨를 맞아들였다. 10월, <주나>가 반란하여, <환나>패자 <설유>에게 명하여 <주나>를 정벌하게 하였다. <주나>국은 호수가 많아서 <호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조나(금니항지서북해안)>의 남쪽에 있었으며, <조나>와는 서로 혼인하는 사이었기에 <조나>를 되찾으려 반란하였던 것이다. <주나>에는 남자는 많으나 여자가 적고, 사슴 크기의 큰 (개)가 있는데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이 해에 <백제>와 <신라> 모두 가물고 돌림병이 돌아 (사람들의) 태반이 죽었으며, <기미(지미)> 역시 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 二十四年乙亥, 正月, <朱那>王子<乙音>來降, 封爲古芻加, 以<眞>公主妻之. 移<朱那>余党于<桓河>·<樂浪>人部落, 與之相婚而居. 三月, 重修<鸞臺>爲宮. 使<白>畵<三代鏡>于璧, <玄武>·<渡河>相名焉.
○ 24년(단기2468년/AD135)을해, 정월, <주나>왕자 <을음>이 항복하여 와서, 고추가로 삼고, <진>공주를 처로 주었다. <주나>의 남은 무리를 <환하>의 <낙랑>인 부락으로 옮겨서 서로 혼인하고 머물러 살게 하였다. 3월, <란대>를 고쳐서 궁으로 삼았다. <백>을 시켜 <삼대경>을 벽(璧; 넓적한 옥; 옥판)에다 그리게 하였는데, <현무>또는 <도하>라고도 이름 하는 것(그림)이다.
◎ 二十五年丙子, 三月, 太輔<羽奕>薨, 年七十一. 其父, <方>以<光明帝>外孫. 久居中畏, <恭儉>稱之. <奕>, 亦以武術, 累立大功. <乙布>太輔, <尙溫>左輔, <穆度婁>右輔兼<牛山>太守中畏大夫.
<羅><雄宣>伊湌知兵馬, <近宗>一吉湌.
○ 25년(단기2469년/AD136)병자, 3월, 태보 <우혁>이 나이 71 세로 죽었다. 그의 부친 <방>은 <광명제>의 외손자이었다. 오랜 동안 중외(대부)의 자리에 있었기에, <공검>이라 불렀다. <우혁> 역시 무술로 인하여 여러 번 큰 공을 세웠다. <을포>를 태보로, <상온>을 좌보로, <목도루>를 우보 겸 <우산>태수 중외대부로 삼았다. <신라>의 <웅선>이 이찬이 되고, <근종>이 일길찬이 되었다.
◎ 二十六年丁丑, 五月, <朱那>余党與<樂浪>人襲<浿口>, <桶口>太子被創, 入山谷而薨, 從臣<于恢>葬而歸其鄕. <恢>, <黃龍>王<仁>之裔也. <禾直>平<樂浪><朱那>之余党, 而入爲左輔, <達賈>右輔, <尙溫><淌水>公. 十月, <扶余>獻鹿. 十二月, 東部雪五尺.
<末曷>, 二月, 燒<羅><長岑>五柵. 八月, 更子, <濟>, 熒惑犯南斗.
○ 26년(단기2470년/AD137)정축, 5월, <주나>의 남은 무리가 <낙랑>사람들과 <패구>를 공격하였다. <통구>태자가 창을 맞고 산곡으로 들어가 죽어, 그의 신하 <우회>가 묻어주고는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회>는 <황룡>왕 <인>의 후예이었다. <화직>이 <낙랑>과 <주나>의 남은 무리를 평정하고는 들어와서 좌보가 되었다. <달가>를 우보로, <상온>은 <창수공>으로 삼았다. 10월, <부여>가 사슴을 바쳐왔다. 12월, 동부에 눈이 다섯 자나 되게 내렸다.
<말갈>이 2월에, <신라>의 <장령>지역 목책 다섯을 태웠다. 8월 경자일에 <백제>에서는 형혹성이 남두성을 범했다.
◎ 二十七年戊寅, 二月, <高>皇后崩, 春秋四十七. 后有聖德高行, 上敬愛之, 生六子. 長曰<桶口>, 次曰<萬勒>, 三曰<大德>, 四曰<其德>, 五曰<最德>, 六曰<孝德>, 皆有賢行. 五公主, 曰元, 曰眞, 曰慕元, 曰陽德, 曰慕玄. 后, 生孝德, 而疾劇不起. 上哀慟之, 葬于<茅山>. 三月, <紇>氏生<恢>子<素>, <嬖耳>生<桶口>女<龍寶>. 上寵<寶>. 上使<伯固>往見之, <伯固>密與<紇>氏相通. 御苑丈二大虎病死, 有八子二女.
<羅>, 二月, 置政堂于<金城>. 七月, 閱于<閼川>西. 十月, 北巡, 祀<太伯山>. 十一月, <濟><己婁>殂, <盖婁>立.
○ 27년(단기2471년/AD138)무인, 2월, <고>황후가 춘추 47 세로 죽었다. 후는 성덕고행하였기에, 상이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여섯 아들을 두었다. 맏이는 <통구>, 둘째는 <만륵>, 셋째는 <대덕>, 넷째는 <기덕>, 다섯째는 <최덕>, 여섯째는 <효덕>이다. 또한 다섯 공주를 낳았는데, <원>, <진>, <모원>, <양덕>과 <모현>이다. 후가 <효덕>을 낳고 나서는 병이 극심하여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상이 그를 슬퍼하여 서럽게 울고는 <모산>에 묻어주었다. 3월, <흘>씨가 <회>의 아들 <소>를 낳고, <폐이>가 <통구>의 딸 <용보>를 낳았는데, 상이 <용보>를 총애하였다. 상이 <백고>를 시켜 가서 살펴보라고 하였더니, <백고>가 몰래 <흘>씨와 상통하였다. 어원의 나이 든 큰 호랑이 두 마리가 병으로 죽었다. 숫호랑이 여덟 마리와 암호랑이 두 마리를 낳았다.
<신라>가 2월에 <금성>에 정당을 두었고, 7월에는 <알천>의 서쪽에서 군대를 사열하였고,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고는 <태백산>에 제사하였다. 11월에 <백제>의 <기루>가 죽고, <개루>가 섰다.
◎ 二十八年己酉, 六月, <西河>太守<尙岑>, 與其弟<蕃>, 率<貊>騎, 掠<岺東都尉府>, 珍寶而來. 九月, <岺東>太守<公孫玄>, 來寇<盖馬>, 敗去. <穆度婁>守<西河>, <尙岑>守<安平(開原)>.
四月, <盖馬>獵<漢山>, 而相<北漢山城>地, 命有司始役.
七月, <羅>霜菽.
八月, <末曷>掠<長岺>民去. 十月, 又來, 天大雪, <曷>畏其, 遁走.
○ 28년(단기2472년/AD139)기유, 6월, <서하>태수 <상잠>이 그의 동생 <번>과 함께 <맥>의 기병을 이끌고 <령동도위부>를 쳐서 진보를 빼앗아 돌아왔다. 9월, <령동>태수 <공손현>이 <개마>를 노략질 하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목도루>는 <서하>를 지켜냈고, <상장>은 <안평(개원)>을 지켜냈다.
4월, <개마>가 <한산>에서 사냥하면서 <북한산성>을 쌓을 터를 보고는 관리에게 (성 쌓는) 일을 시작하라 명하였다.
7월, <신라>에서는 숙주가 서리를 맞았다.
8월에 <말갈>이 <장령>에 사는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돌아갔다가, 10월에 또 다시 쳐들어 왔는데, 큰 눈이 내리자 겁이 나서 도망쳐 (돌아)갔다.
◎ 二十九年庚辰, 三月, <尙>后生女<白雲>, <乙布>妻<羽>氏爲乳媼. 四月, 以<羽>公主妻<遂成>. <穆度婁>南部大使者. <羅<立柵<長岺>.
○ 29년(단기2473년/AD140)경진, 3월, <상>후가 딸 <백운>을 낳아, <을포>의 처 <우>씨를 유모로 붙였다. 4월, <우>공주를 <수성>의 처로 주었다. <목도루>를 남부대사자로 삼았다. <신라>가 <장령>에 목책을 세웠다.
◎ 三十年辛巳, 四月, <帶方><張彦>侵<屯有>, <菟城>太守<乙魚>擊殺之. <樂浪>太守<龍俊>侵<西安平>, <西安平>太守<尙岑>擊破之, 追擊<新安><居鄕>, 奪其妻子兵仗而歸, 賊遁入<幽州>. 左輔<禾直>薨, <尙溫>左輔, <穆度婁>右輔. 九月, 辛亥, 晦, 日食. <尙>后生女<靑雲>. 獲紫獐于<質>陽, 飼之. 十月, <東海谷>太守<尙蕃>獻朱豹, 尾長九尺身一丈, 命飼御苑.
○ 30년(단기2474년/AD141)신사, 4월, <대방>의 <장언>이 <둔유>에 침입하니, <토성>태수 <을어>가 그를 쳐서 죽였다. <낙랑>태수 <룡준>이 <서안평>에 쳐들어왔기에, <서안평>태수 <상잠>이 이를 쳐서 깨뜨리고, <신안>의 <거향>까지 추격하여, <장언>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는데, 적은 <유주>로 도망해 들어갔다. 좌보 <화직>이 죽어, <상온>을 좌보로, <목도루>를 우보로 삼았다. 9월 신해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후가 딸 <청운>을 낳았다. <질산> 남쪽에서 자색의 노루를 잡았기에 먹이를 주어 길렀다. 10월, <동해곡>태수 <상번>이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이고 신장이 한 길이나 되는 붉은 표범을 바쳤기에, 이를 어원에 두고 길렀다.
◎ 三十一年壬午, 正月, <達賈>左輔. 三月, <遂成>佃于<質>陽七日不歸, 戱樂無度. 七月, 又獵<箕丘>五日, 而又獵于<倭山>傷民黍菽. 與其黨類<貫那>于台<彌儒>·<桓那>于台<菸 疾>·<沸流>皀衣<陽神>等相議曰; “兄皇老而不死, 奈何. 吾齒將暮, 不可待矣.”, 皆曰; “當行廢立.” <伯固>曰; “嫡子在, 何必兄弟相傳乎. 公以皇帝之親, 爲百醪之長, 宜以忠孝存心, 何乃荒淫如是. 禍福無門, 唯人召之.” <遂成>曰; “居樂之勢, 而不遊, 何爲汝其, 勿言.” 九月, 西部地震. 上夜夢, 豹齒斷虎尾. 巫曰; “必有皇親謀絶大(統).” 上不悅. <高福章>曰; “作善, 則災反爲福, 不善, 則吉變爲匈. 今, 陛下, 憂國如家, 愛民如子, 何憂之. 有凡君之福, 在德, 不在夢.” <福章>, <婁>之曾孫也.
<羅>議遠征<末曷>. <雄>曰; “<末曷>, 本無定居, 故以<高句麗>之大猶, 置(度)外. 况議, 小國, 安可空國, 遠征哉, <濟><倭>之伺欠, 一不可也. 所爲<末曷>云者, 多<扶余><樂浪>, 則與<麗>失和, 二不可也.”
○ 31년(단기2475년/AD142)임오, 정월, <달가>가 좌보가 되었다. 3월, <수성>이 <질산>의 남쪽에서 사냥을 하여 이레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즐기고 노는 것이 도를 넘었다. 7월에 <기구>에서 또 닷새를 사냥하고, 또다시 <왜산>에서 사냥하다가 백성들의 곡식을 상하게 하였다.
그의 무리들인 <관나>우태 <미유>, <환나>우태 <어질>, <비류>흡의 <양신> 등과 서로 상의하다가; “형황께서 늙으셨는데도 돌아가시지 않으니 어찌하여야 하겠소? 나도 나이가 서산에 기울어,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라 하니, (무리들) 모두는 “당장 폐하고 세웁시다.”라 하였다. 이에 <백고>가 나서서 “적자가 있는데, 하필이면 형과 동생 간에 전위한다는 말입니까? 공께서는 황제의 지친으로 백관의 수장이시니, 의당 마음속에 충효가 가득해야 할 것인데, 어찌 황음함이 이러하십니까? 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사람이 불러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수성>이 받아 말하길; “즐기며 놀고 있는 자리에서 (너는) 왜 놀지는 않고 무슨 이유로 그리 말하느냐? 입 다물어라!.” 하였다. 9월, 서부에 지진이 있었고, 상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이빨로 물어 끊었다. 무당이 아뢰길; “필시 황친이 대통을 끊으려 일을 꾸미고 있음입니다.”하니, 상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복장>이 아뢰길; “선한 일을 하면, 재앙도 바뀌어 복이 되고, 나쁜 짓을 하면 길한 것도 흉한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나랏일 걱정하시길 집안일처럼 하시고, 백성 아끼시길 자식같이 하시는데, 무슨 걱정하실 일이 또 있겠습니까?. 모든 인군의 복은 덕행에서 오는 것이지 꿈에서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복장>은 <고루>의 증손자이었다.
<신라>가 <말갈> 원정을 상의하고 있었는데, <웅>이 말하길; “<말갈>은 본래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기에 <고구리>의 큰 괴수도 일정한 바깥지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이 작은 나라가 나라를 비우고 멀리 가서 <말갈>을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백제>와 <왜>가 항시 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불가한 이유의 하나이고, 소위 <말갈>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는 <부여>와 <낙랑>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어 <고구리>와의 화평이 깨질 수 있으니, 불가능한 둘째 이유입니다.” 하였다.
◎ 三十二年癸未, 三月, 太輔<乙布>薨, <尙溫>太輔, <達賈>左輔.
○ 32년(단기2476년/AD143)계미, 3월, 태보 <을포>가 죽어, <상온>을 태보로, <달가>를 좌보로 삼았다.
◎ 三十三年甲申, 三月, <高福章>守<西河>. □月, 以<松奇>女妻<守成>. <羅>修堤防墾田野, 禁民用金銀珠玉.
○ 33년(단기2477년/AD144)갑신, 3월, <고복장>이 <서하>를 지켰다. □월, <송기>의 딸을 <수성>의 처로 주었다.
<신라>가 제방을 고치고 농경지를 개간하여 넓히고, 백성들이 금은과 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 三十四年乙酉, 二月, <尙蕃><柵城>褥薩. <白面>上<仙皇>, 修道繪, 三卷.
<羅>, 春夏, 旱, 南地最甚, 移粟賑之.
○ 34년(단기2478년/AD145)을유, 2월, <상번>이 <책성>욕살이 되었다. <백면>이 선황에게 수도하는 그림 세 권을 바쳤다.
<신라>는 봄과 여름이 가물었고, 남쪽이 제일 심하였기에, 조를 옮겨서 나누어 주었다.
◎ 三十五年丙戌, 二月, <達賈>薨, <穆度婁>左輔, <高福章>右輔, <乙魚>守<西河>. 七月, <遂成>與其黨<彌儒>等議廢立于<倭山>. 義臣諫曰; “殿下孝順, 事上久矣. 今以年老改心, 非忠也. 請安分而待之.” 左右欲殺. <遂成>曰; “直諫藥也. 亦不可無此一人.” 十月, <高福章>勸上誅<遂成>. 上曰; “兄弟不可相殘. 吾將禪位矣.” <福章>, <遂成>不仁不可, 以委國而胎禍. <帶方>反, <乙魚>攻其守<劉虎>斬之, 餘衆慴伏. 十二月, 上禪位于<遂成>, 退去<鶻川>別宮. 春秋七十九. <遂成>卽位於鸞宮, 以<尙>后爲中宮皇后. <羽>公主爲左宮皇后. <松奇>女<黃龍>爲右宮皇后. 以<松奇>爲右輔.
○ 35년(단기2479년/AD146)병술, 2월, <달가>가 죽어, <목도루>를 좌보로, <고복장>을 우보로 삼고, <을어>에게 <서하>를 지키게 했다. 7월, <수성>과 그 일당 <미유> 등이 <왜산>에서 폐립을 논의했다. 의로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길; “전하께서는 효순하여 상을 섬기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늙었다 하여 변심한다면 불충한 것입니다. 청컨대 분수를 지키며 기다리시지요.”라고 하니, 좌우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 <수성>이 말하길; “직간하여 줌이 약이로다. 역시 불가하다고 말하는 이는 이 한 사람 밖에 없구려.”라고 하였다.
10월, <고복장>이 상께 <수성>을 주살하라 권하였더니, 상께서 이르길;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곧 선위할 것이다.” 하였고, <복장>이 다시 말하길; “<수성>은 어질지 못하여 선위는 불가합니다. 나라를 맡기시면 재앙을 잉태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대방>이 반란하여, <을어>가 <대방>의 태수 <유호>를 참살하니,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항복하였다. 12월, 상께서 <수성>에게 선위하고, <골천>의 별궁으로 물러나 앉았다. 춘추 79세였다. <수성>이 란궁에서 즉위하고, <상>후를 중궁황후로, <우>공주를 좌궁황후로, <송기>의 딸 <황룡>을 우궁황후로 삼고, <송기>를 우보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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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정할 것에 대한 가르침을 구합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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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사천(史穿) 선생께서 대장정(大長征)을 계속하는 글이 ‘싸이트(site)-에러(error)’ 후에 올라옴에 대해서 경하(敬賀) 드립니다. 너무 반갑고 또한 기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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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史穿) 김성겸 님. 해석은 누가 해석(解釋) 주필(主筆)을 잡아도 , 오류(誤謬)가 있게 마련이고, 또한 ‘도움이 되고져’ 교필(校筆)하는 의견 자체도 ‘틀림’을 강요함이 있는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수용성’과 ‘솔직한 의견개진’이란 두 가지의 핵(核)이 충돌하는 본질적으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무거운 짐을 사천(史穿) 선생께서 지고 나가심에 대해서 좌계 일단 머리를 숙입니다. 해석하심에 있어 사천(史穿)선생께서 의문(疑問)을 표한 글과 천문(天文)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 일단 좌계의 견해를 올립니다.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1) 십일년 임술(十一年壬戌)의 ‘**然(閨?)簿不嚴殯(殤?)未冷而妻女奔人情哉.**’ 규부(閨簿)는 ‘규방의 회계부’로 보고, 이는 태보(太輔)인 ‘마락’을 도와주는 ‘여인들의 명단’인듯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리에 대해서 태보(太輔)이신 마락(麻樂)께서 관대하신듯 합니다. 그래서 마락(麻樂)이 운명하시고, 그 ‘주검’의 온도(溫度)가 채 식기도 전에 이 여인네들이 분주(奔走)하게 돌아다닐 정도인데, 이는 마락(麻樂)께서 ‘펼친 인정(人情)이로다!’는 이야기 인듯 합니다. 아마도 ‘**然(閨?)簿不嚴殯(殤?)未冷而妻女奔人情哉.**’의 문장에서 앞의 글자는 관(寬) 혹은 유(裕)등이 판독(判讀)이 희미한 글자가 아닌가 추측합니다. 또한 이 문장에서 처(妻)는 ‘여자 하급 관료’인 듯 합니다. 즉 태보(太輔)의 시침(侍寢)을 들어야하는 존재인데, 전혀 관심을 안둔 듯 합니다. 따라서 해석은 .... “ 성품이 관대했다(관연(寬然?) 특히 (태보(太輔)를 돕는 ‘아낙들의 장부(=규부(閨簿))관리’에는 엄격치 않아서, (마락(麻樂)께서 운명하시어) ‘그 주검’이 식기도 전에 처(妻)와 여자들이 (상례(喪禮)을 지키지 않고) 분주(奔走)히 돌아다니는 그런 인정(人情)으런 분위기 였다.”로 봅니다. 2) 십일년 임술(十一年壬戌)의 ‘有紅紋三星驍勇’의 해석에 대해서는 태보(太輔) 마락(麻樂)에 대한 앞 문장인 것이지요. 이를 사천(史穿) 선생께서는 “홍문에 별무늬 세 개가 있었는데 ”로 마치 홍문(紅紋)이 ‘인체의 어떤 부위(部位)’인 듯하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문자 그대로 ‘붉은 무늬로 된 삼성(三星)’입니다. 그런데 삼성(三星)은 그냥 ‘별 세 개’일수도 있지만, 삼성(參星)과 같은 뜻이고, 이는 ‘아시아 천문학’에서 ‘백호(白虎)칠사(七舍)’의 마지막 별인 삼수(參宿 - 28수(宿)가운데 하나)를 뜻합니다. 오늘날 별자리 이름은 ‘오리온 좌’입니다. 이 ‘오리온 좌’의 별은 벌어진 에취(H)자 모양인데, 그 가운데 ‘허리띠’ 부분의 별이 ‘셋’이고, 실제 ‘붉은 색’ 혹은 ‘노란 색’의 별로 칩니다. 따라서 ‘有紅紋三星驍勇’의 정확한 해석은 “(몸에) 붉은 무늬의 오리온 별이 있으셔서 유난히 용감하셨다.”가 돈다고 봅니다. 3) 십사년 을축 (十四年乙丑) ‘命字于<淌水宮>曰鹿之有斯牝如朕之有賢后,’에 대해서 여기서 창수궁(淌水宮)과 그 다음의 창궁(淌宮)은 이 궁궐(宮闕)에 있는 사람(특히 여자(女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건물 자체 특히 현판(懸板)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命字于<淌水宮>‘의 뜻은 “ ??**<창수궁>에게 글로 써서 명하길**?? ”이 아니라, “창수궁(淌水宮)에 ‘글자(=자(字)를 써넣도록’ 명령했다.”로 봅니다. 왈(曰)이하가 “써져 있는 글자, 문장의 내용인 것으로 보입니다. 3) 24년 을해(二十四年乙亥) ‘<玄武>·<渡河>相名焉.’에 대해서는 본래 이것이 벽옥(璧玉)에 삼대경(三代鏡)이라고 칭해지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앞 문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현무(玄武)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로 말해지는 사영수(四靈獸)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전(前)에 사천(史穿) 선생께서 번역하셨듯이 ‘고주몽-추모대제’께서 타고 온 ‘일인용(一人用) 배(船)’를 뜻합니다. 문맥으로 봐서는 일종의 잠수함(潛水艦)인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왜냐면 이 현무(玄武)는 ‘거북’과 ‘무지개 용(龍)’인 쌍수룡(雙首龍)인데, 이 ‘쌍수룡’이 ‘공기 튜브’가 되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어별성교(魚鼈成橋)라고 칭한 그 사건에서 고주몽 께서는 ‘다리’ 위로 말(馬)을 타고 간 것이 아니라, ‘다리’를 타고 가다가 현무(玄武)속으로 들어가서 타고 온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현무(玄武)’라는 것과 도하(渡河)라는 현상이 동일해 집니다. 즉 ‘<玄武>·<渡河>相名焉.’의 해석은 현무(玄武)라는 그림과 도하(渡河)라는 그림은 ‘서로 상통(相通)되는 명칭이다.’라는 뜻으로 봅니다. 4) 31년 임오(三十一年壬午) 삼월(三月) 조의 “居樂之勢 而不遊, 何爲汝其, 勿言.”에 대해서는 ..... 수성(遂成)이 직접 “형(兄)을 폐위하자.”고 말한 것이 아니라, 수성(遂成)의 패거리인 ‘<관나>우태 <미유>, <환나>우태 <어질>, <비류>흡의 <양신>’이 ‘사냥하고 노는 자리’에서 “폐위(廢位)하자.”고 말했고, 이에 ‘백고’가 수성(遂成)한테 따지자, 수성(遂成)은 “왜 노는 자리에서 딱딱하고 심각한 말들을 하느냐?!”라고 받아친 말로 보입니다. 즉 “居樂之勢 而不遊, 何爲汝其, 勿言.”의 해석은 “노는 자리인데 너는 유독히 놀지도 않으면서, (남들이 농담(弄談)으로 폐위(廢位)이야기를 하는데), 너는 어째서 그것까지 문제삼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로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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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가 많습니다. 05.晉紀 第097卷 晉紀十九 (AD342–AD347) 《康皇帝》 二年 p-3058 逸豆歸遣南羅大涉夜干將精兵逆戰,〔南羅,城名。大,城大也。慕容既克宇文,改南羅城為威德城。考異曰:慕容皝載記作「涉弈干」。今從燕書。〕皝遣人馳謂 慕容翰曰:「涉夜干勇冠三軍,〔冠,古玩翻。〕宜小避之。」翰曰:「逸豆歸掃其國內精兵以屬涉夜干,〔屬,之欲翻。〕涉夜干素有勇名,一國所賴也;今我克 之,其國不攻自潰矣。且吾孰知涉夜干之為人,〔孰,與熟同。〕雖有虛名,實易與耳,不宜避之以挫吾兵氣。」遂進戰。翰自出衝陳,〔易,以豉翻。陳,讀曰 陣。〕涉夜干出應之;慕容霸從傍邀擊,遂斬涉夜干。宇文士卒見涉夜干死,不戰而潰;燕軍乘勝逐之,遂克其都城。〔宇文國,都遼西紫蒙川。〕逸豆歸走死漠 北,宇文氏由是散亡。皝悉收其畜產、資貨,徙其部眾五千餘落於昌黎,闢地千餘里。更命涉夜干所居城曰威德城,使弟彪戍之而還。高詡、劉佩皆中流矢卒。 〔還,音旋。中,竹仲翻。卒,子恤翻。〕 자치통감에서 찾은 자몽에 관한 부분입니다. 우문국이 자몽천에 도읍을 했다하니..그 자리엿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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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맨 먼저 도움을 주셨읍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좀 기다렸다가, 다른 분들의 조언까지 취합하여 한꺼번에 정정토록 하겠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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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 2년(A.D.113)조 2월기사에 이름이 잘못된 것 같구요. 신라에 관한 기사입니다. 고구려사초에 의외로 신라에 관한 기사는 많은데 백제에 관한 기사는 거의 없네요. 다음 글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 지마 이사금 (A.D.112~134 재위기간 23년) 지마 이사금[혹은 지미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파사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인데, 그녀는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애초에 파사왕이 유찬 못가에 가서 사냥할 때 태자도 동행하였다. 사냥을 한 뒤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 허루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술 기운이 무르익자 허루의 아내가 젊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찬 마제의 부인도 역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허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 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말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리웠다. 2년(A.D.113)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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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민스러운 글자 "자(紫)"와 "시(柴)"가 해결되었읍니다. 살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성일 선생님/ 삼국사기에서 표기한 것이 현재 우리가 번역하고 있는 사람 이름을 구속할 수는 없겠으나, "祇"는 음이 "기"와 "지" 두 가지인 것을 확인하였읍니다. 고맙습니다. 좌계 선생님/ 31년 임오(三十一年壬午) 삼월(三月) 조의 번역을 끊어읽기를 고쳐서 해결이 된 것 같습니다. "어쩔거냐"고 다그친 이와 "나도 나이가 들어 더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한 이가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보입니다. 다음에 올릴 <폐제차대제>의 얘기를 보면 선선히 양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윽박질러서 찬탈한 것으로 나옵니다. 나머지는 모두 반영하였읍니다. 흡족하실른지요... 고맙습니다. <폐제차대제>편은 지금까지의 것을, 나름대로 전후를 살펴서 스스로 정정한 내용으로, 한꺼번에 올릴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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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史穿) 선생님. <等相議曰; “兄皇老而不死, 奈何.” “吾齒將暮, 不可待矣.”>의 문장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 <... 등이 서로 상의하더니만; “형황께서 늙으셨어도 돌아가시지 않으니, 어찌하려 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수성>태제가 말하길;) “나도 나이가 서산에 기울어,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라고 하였고,>로 해석하셨습니다. 정확한 해석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말투는 오자서(伍子胥)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고 표현한 고사(故事)에 보다시피, ‘어떤일을 강행(强行)할 때’ 즐겨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특히 ‘백고’가 항의(抗議)하더라도 “오자서(伍子胥) 흉내 낸 장난인데, 놀이에 나와서 너는 왜 그것도 못받아들이냐?!”는 식으로 둘러치기 좋은 ‘밑거름 말’으로 봅니다. 명해석으로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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菟: 호랑이 도, 새삼 토 ㉠호랑이 ㉡고을 이름 ㉢성(姓)의 하나 ⓐ새삼 (토) ⓑ토끼 (토) 고을이름에는 '도'라 발음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玄菟=현도라 표기하는게 옳다고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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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단기2455년/AD122)임술, 2월, 상이 다시금 <마한>·<구려>·<개마> 3국의 병사를 이끌고 <서천>을 정벌하였다. '천서'로 수정.. 주석이 많이 빠져 있습니다. 川西(林東),적산(적봉),극성(율?평)등... 요대(고북구지영맥)등 주석을 첨가, 부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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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님/ <사초/사략>과 근일에 아려주신 <사략>을 비교하며 전자한자자전(고려대학편)을 참조하여 최대한 빈칸을 없애고 번역누락도 최소화 하여 놓았읍니다. 지명의 위치비정에 도움이 될른지요...휴~우~...힘이 부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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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겸님/ 좀 쉬시게 좋을듯합니다. 보는 것만 해도.. 멀미가 날 정도인데.. 직접하시는 분은 오죽하시겠습니까.. 쉬시는게 장땡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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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제사 지내던 구태왕은 부여왕 위구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정황이 여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태조대왕13년 8월의 기사를 주의깊게 읽어 보시면 무당이 하는 말이 구태왕이 위구태가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참고문 : 중국25사중 북사, 주서) 일단 백제의 구지왕은 태조왕보다 후대의 사람이니 일단 빠져야 되겠고, 구태가 공손도의 딸과 결혼했다는 말도 잘못된 해석이고, 위구태가 구태라고 뭔가 많이 이상하다. 혹시 구태는 온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3년(단기2457년/AD124)갑자, 5월, 우장군 <목길>이 죽어 <상잠>이 대신하게 하였다. <화직>이 <자몽>의 군대를 이끌고 <위구태>를 정벌하여 <월해(달리호)>를 깨고 <월도(다륜)>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수성>을 우보로 삼았다. 8월, <태백산(백라산대면산계)>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크기가 말만하고 뿔이 자색인 흰 사슴을 붙잡았다. <무당>이 말하길 <구태>왕 시절에 이 말이 나타났다가 지금 또 나타났다고 하였다. 녹색 비단으로 안장을 얹어 타고 다녔다. 상은 신장이 8척이나 되고 체중은 100근 여가 되는데, 사슴은 옛날과 같이 흰색이고, 매일 아침 이를 타고 달리니, 사람들이 <백록대왕>이라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