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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本紀新編列傳(p48) 太子列傳 - 도절태자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本紀新編列傳
p48
太子列傳

都㘦太子母阿爾后召西奴生優台女也. 類利太子娶之生都㘦及女五人而十三年崩, 十四年扶餘請都㘦爲質. 王以其無母不肯之群臣力請, 遣之中途得疾不發, 扶余怒發兵來侵而掠, 都㘦去帶素以其女妻之生一子于扶余而歸辛酉正月薨.
도근(삼국사기에는 도절)태자의 모는 아이후인데 소서노와 우태의 딸이다. 유리태자가 장가들어 도근과 딸 5을 낳았고 (유리왕) 13년에 죽었다. 14년(B.C.6) 부여가 도근을 볼모로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 어머니가 없음을 들어 군신들이 청하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보내지 못했다. 부여가 화를 내어 병사를 보내어 침략하고 약탈했다. 도근이 가서 대소가 그 딸을 처로 삼게 했는데 부여에서 아들 한명을 낳고 돌아왔다. 신유(A.D.1)년 1월 (도근태자가) 죽었다.
= 도근태자가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는지, 돌아와서 죽었는지 확실치 않음.
=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 13년조의 봄2월의 기사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즉 부여가 1월에 고구려의 도근태자를 볼모로 요청했고, 도근태자가 병이 나서 가지 못하자 2월에 고구려를 쳐들어 왔는데 그 길목에 비류의 미추홀이 있어서 미추홀이 공격당하고 소서노가 사망한 것을 보여진다. 아래 글을 참조해 보면 유리왕 14년에 부여는 고구려를 두 번을 침략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고구려에게는 한 번 밖에 침략을 당하지 않았다면 한번은 백제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 당시의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참고문 : 고구려사략 유리왕기》
◎十四年乙卯,正月, <都 >如<柵城>娶<帶素>女. 七月,<溫祚>立柵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十月,<帶素>引五萬軍入寇(通江),大雪七日,凍死者十九,悔不聽<解素>之諫.
◎14년(단기2328년/BC6)을묘, 정월, <도절>이 <책성>으로 가서 <대소>의 딸과 혼인하였다. 7월, <온조>가 <한산>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공주를 온조에게 처로 주었다. 10월, <대소>가 5만군을 끌고와서 도적질을 하였는데, 큰눈이 7일간이나 내려 얼어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나 되니, <해소>가 말리던 것을 뿌리친 것이 후회되었다.

《참고문 : 고구려사초 유리왕기》
十四年乙卯正月都㘦如柵城娶帶素女. 七月溫祚立柵漢山下盖有南進之意也, 上謂皇后曰朕與卿西進溫祚與再思南進先帝之靈應有喜也, 時再思爲溫祚妃故也. 十月帶素欲得松江(通江)而率五万兵來侵遇大雪七日進退不能凍死者十八九不戰而退歸謂解素曰不聽汝言而致此.
14년(B.C. 6)을묘년 1월 도근(도절)이 책성에 가서 대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7월 온조가 한산의 아래에 한산아래에 목책을 세웠는데 아마도 남진의 뜻이 있었다. 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유리)과 경(황후)는 서쪽으로 나아가고, 온조와 재사는 남진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제(추모)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 이때는 재사가 비류의 妃가 되어있던 까닭이다. 10월 대소가 송강(통강)을 얻기를 바라여 병사 5만을 이끌고 와 침입했는데 우연히 7일 동안 큰 눈이 내려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전쟁을 하지 않고 물러났는데 돌아와서 해소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너의 말을 듣지 않아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렀다.

《참고문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定疆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참고로 한글2002에서는 흙벽근자 나오는데 여기로 옮길때는 사라지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2)


라디오 (2007-05-11 05:32:28)  
그냥 제 눈으로 보았을 때의 해석이니 참고로 봐 주셨으면 합니다.
王以其無母不肯之群臣力請, 遣之中途得疾不發.
유리왕이 그가 어머니가 없음을 들어(측은하게 여겨) (볼모를 보내는 문제에) 응하지 않았으나, 군신들의 압력에 못이겨, 그를 보낼려는 와중에 (그가) 병을 얻어 출발하지 못했다.

時再思爲溫祚妃故也.
이 때 재사는 온조의 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故也의 용법을 모르니, 판단하기 어렵군요.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백제서기에도 그대로 나오는걸로 봐서는... 김부식이 만든 말인 것은 아닌것 같고..
원래 김부식이 참조한 저본의 편찬자가 은유법으로 넣은 기사로 추측합니다.
소서노가 죽은 원인을 말하는 대목일터인데.. 판단하기 어렵군요..
정성일 (2007-05-11 15:06:12)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제가 이 몇자 안되는 글을 해석하기 위해 지금껏 백제서기의 해석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아직 몇군데 알아야 할 글자가 남아있으므로 언제 마무리를 지을 지 알수는 없지만 은유화된 침략자의 윤곽을 잡았으니 절반은 이루어진 셈인것 같습니다.
라디오 (2007-05-11 20:21:23)  
좋은 생각입니다.
사기에 은유법으로 표현된 구절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죠.
모쪼록 궁금증을 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