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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계속] - 하편(下篇) : 배달화백과 화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3.  배달화백(倍達和白)의 재원(財源)은 무엇인가? - 예산(豫算)의 딜레마와 관련

사천(史穿) 김성겸 님.

결국 우리 고대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key)는 “이 소도(蘇塗)와 관경삼국(管境三國)과의 관계가 어찌 연결되었는가? ”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소도(蘇塗)에서 베풀어지는 배달화백(倍達和白)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개략적으로 배달화백을 이해하는데도 이곳에 본 회(回)를 포함해서 4-7회 이야기해야만 “아...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倍達民族)이라 하는구나!”할 정도의 실질적인 상(象)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4-7회 나누어서 설명을 해야되는 이유가 워낙 배달화백이란 것이 특이하게 운영이 되면서도, 영산화백 보도 몇 배 복잡한 씨스템(system)이기 때문입니다.  

좌계는 이 배달화백을 연구하면서...“이렇게 복잡하고 상호 유기성이 유난히 많은 회의방식이 고조선(古朝鮮) 때 돌연히 창조되었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 요순(堯舜)은 아시아의 순방(淳厖) 체제의 지류(支流)- 문명에 불과하다.  
: 솔본 선생님의 ‘거발환’의 어원 규명과 관련해서

“환국(桓國) 시초에 이미 배달화백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해왔었는데, 때마침 솔본 선생님께서
환국(桓國)을 만드신 ‘거발환’이 비교언어학적으로 볼 때, gebar khan (게바르 칸(한))이어서 “거발한, 즉 게바르칸=바타르=영웅이라는 한단고기의 설명은 타당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는 이 싸이트(site)에 솔본 선생님의 글 “역대 환인과 환웅들의 이름 뜻”이란 제목의 글 속에 있습니다.)

이런 솔본 선생님의 규명은 ‘배달화백’과 관련해서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 배달화백이 ‘박타르 화백’과 같은 어원(語源)을 지님은 자명(自明)할 뿐만 아니라, “그 시원이 고조선(古朝鮮)을 너머서 환국(桓國)에 이른다.”는 관점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명은 상서(尙書)에 나오는 요순(堯舜) 시대를 전혀 새롭게 하는 ‘눈’을 지니게 합니다.  

사학자(史學者)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상서(尙書)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보면, 이들이 “ ‘하늘의 호수’인 ‘북두칠성’과 관련된 곳에서 정치(政治)를 했다. ”는 기록이 나옵니다.  
즉 그들도 ‘배달화백’을 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아시아 태고사(太古史)를 규명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정보입니다.

즉 환국(桓國)의 순방(淳厖) 체제 ‘속’에 요순(堯舜)이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같은 체계 ‘안’에서 단군-왕검과의 종주권(宗主權) 싸움을 버리다가, 패퇴(敗退)해서 ‘독립된 진영(陣營 : block)을 유지했음이 명쾌히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지류(支流)라는 것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가.  배달화백(倍達和白)은 어떤 화폐로 ‘말발’로 사용하며, 또 그 재원(財源)은 어찌 형성되는가?

배달화백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배달화백에서 쓰이는 화폐가 무엇인가? 또 이 화폐를 취득하게 하는 재원(財源)은 어찌 형성이 되는가?”는 가장 기초적인 문제부터 언급함이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순방(淳厖)-씨스템(system)을 하나씩 설명하기 위해서, 연재 형 글을 쓸때, 처음 거론한 것이 바로 ‘(*) 이군일민(二君一民)과 “누구를 위한 세노리지(seigniorage)인가?” -(A)’이었습니다.  
이 내용의 핵심은 돈(money, 화폐(貨幣))라는 것은 ‘세금(稅金)을 거두기 위한’ 사회적 고안(考案)으로써 발명된 것이지, 경제학자들이 하는 말처럼 물물교환이 불편해서 만든 것이 아님을 밝힌 것입니다.

(1)  모든 국가의 세금(稅金)이 ‘배달화백의 재원(財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국가 즉 정부들이 주권자(主權者)인 천독(天毒)들로부터 세금(稅金)을 거두고,  여러 가지 공공(公共)-써비스(service)를 한다면,  “숫제 그 세금(稅金)을 전부 재원(財源)으로 하고, 이런 ‘공공(公共)-써비스’에 대한 소비자 주권(主權)이 반영된 프로슈머(prosumer)로써 직접 기획하게 하는 것이 어떨까?”는 혁명적 발상을 해볼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나라의 세금(稅金)을 ‘배달화백’의 재원(財源)으로 삼는 것이지요.

특히 이런 정부(政府)들의 공공-써비스는 그 힘이 서로 대립적으로 사용되어 낭비가 심한 현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비(軍事費)인 것이지요.

또 지방정부의 예산과 중앙정부의 예산, 그리고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의 정부 예산이 서로 중복되어서 남용이 많이 됨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 사용방향이 공멸(共滅) 적으로 사용되어서 총합해보면 마이너스-섬(minus-sum)으로 사용되는 것이 많은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각국가의 세금을 모두 통합하고, 이들의 불합리한 공공-써비스를 시너지(synergy)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쓸 수 없을까?”하는 차원에서 개발된 것이 바로 배달화백(倍達和白)이라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일반 천독(天毒)들이 ‘세노리지(seigniorage)의 대역전을 가능케하는 배달화백을 가로막는 심각한 알력(軋轢)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알력(軋轢)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이 알력을  어찌 해결했는가?”를 다음 회(回)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 일단 배달화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저변(低邊)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에 우리의 시각을 집중시키기로 합시다.)

아무튼 이런 각국(各國)의 세금을 거두워서 신시(神市)의 화폐로 바꾸는 금입택(金入宅)이란 은행에 담보를 잡히고, 배달화백에 쓰는 ‘말발’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2)  배달화백 때 쓰이는 ‘말발’은  호수(湖水) 위에 떠있는 ‘자이로스코프(Gyroscope)’원리를 내재한 연등(蓮燈)

아무튼 배달화백은 기본적으로 천독(天毒)들이 호수(湖水 - 박(泊)달) 가에서 앉아있으면서, 두 나라를 통합하거나 분리시키고 싶을 때, 호수 ‘안’쪽으로 태(兌)라는 수상연단(水上演壇)을 타고 하세(下世)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수많은 이런 태(兌)를 탄 사람들이 부문별 - 그러니깐 경제부문, 군사부문, 교육부분 등등 ‘나뉘어 진 검토분야’ 별로 하세(下世)하게 됩니다.  따라서 호수가에 있는 천독(天毒)들은 이들의 정견(政見)을 듣고,  ‘말발’을 실어주는데, 이 때의 말발이 마치 ‘물에 떠있는 연(蓮)꽃’ 처럼 떠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발’인 연꽃은 태(兌) 뒤로 호심(湖心)을 향하여 길게 늘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연(連) 꽃 내부장치가 오늘날 자이로스코프(Gyroscope: 회전의(回轉儀))로 칭해지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과학기술적’으로 매우 흥미를 느끼게 하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둥근 링(ring)에 직각으로 회전할 수 있는 또다른 링(ring)을 끼우고, 그 ‘안’에 또다시 직각 방향으로 링(ring)을 끼워넣는 식으로 링(ring)네개가 결합되고 그 ‘안’에 등잔(燈盞)을 넣은 일종의 ‘수평 유지 장치’속에 ‘등잔’을 넣어두는 기술인 셈입니다.  
아무튼 이런 링(ring)이 네 겹으로 된 수평유지 장치에 등잔을 넣고, 막대기를 빙빙돌려도 등잔(燈盞)불이 똑바로 ‘서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자이로스코크(Gyroscope)를 활용한 등(燈)은 막대기에 이를 꿰고 여러 사람들이 이 등(燈)을 직물(織物)로 용(龍)의 모습 안에 집어넣고, 용(龍)의 춤을 추는 놀이가 유행할 정도로 고대 동양에는 일반적인 기술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기술의 원천(源泉)이 계속 내려오게 한 배경은 바로 배달화백입니다.  
즉 호수에 가벼운 풍랑(風浪)이 있어도 그 출렁거림에 연등(蓮燈)이 꺼지지 않기 위한 기술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댓글’로써 주(注)를 달겠음)

아무튼 이런 연등(蓮燈)을 말발로 해서 말발을 자유로이 뺄 수도 있고, 보태줄 수 있는 배달화백을 진행하게 되면,  사회-공통체가 통합도 되고, 분리 독립도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점 즉 배달화백의 상세한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번 연재(連載)때 상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서 “우리는 연등(蓮燈)이 과연 ‘배달화백의 말발’로써 통용된 역사적 흔적이 있는가 ?”는 문제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연등(蓮燈)이 배달화백의 말발로 사용되었다면, 이 연등(蓮燈)이 곧 신시(神市)의 화폐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엉뚱하게도 실제 배달화백에서 ‘말발’로 사용하는 것은 이런 ‘자이로스코프(Gyroscope)’형태로 된 연등(蓮燈)이지만, 이를 신시(神市)의 화폐로써 취급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배달화백의 말발로 쓴 화폐는 바로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는 곡옥(曲玉)의 형태로 발견이 됩니다.

“왜 곡옥(曲玉)의 형태로 배달화백에 쓰이는 ‘말발’이 발견이 되는데,  실제 배달화백에서는 연등(蓮燈)으로 말발을 삼아 쓰게 되는가? ”  “또 그 도중에 어떤 변환(變換) 과정이 있는가?”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3)  왜 배달화백의 말발은 곡옥(曲玉)의 형태를 취했나?

이 문제는 천독(天毒)들이 ‘배달화백의 말발’인 곡옥(曲玉)을 지니고 있다가,  배달화백이 일어나는 호수 앞에 가면, 오늘날 회계사(會計士)라 할 수 있는 주부(主簿)가 곡옥(曲玉)의 숫자 만큼의 연등(蓮燈)을 내어주는 과정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쉽게 당시의 상황을 재구(再構)해 낼 수 있는 문제에 불과하다고 간단히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화폐의 ‘본질적 성격’과 관련된 매우 엉뚱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  고인(賈人)의 화폐와 상인(商人)의 화폐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1) 고인(賈人)의 화폐는 ‘가치 내재성(內在性)’의 속성을 지닌다.

 그것은 ‘돈(money)’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고인(賈人)의 화폐와 다양한 호혜(互惠: reciprocity)및 재분배 등등이 얽혀있는 신시(神市)의 상인(商人)들의 ‘화폐’의 속성(屬性)이 전혀 다르다는 엉뚱한 문제가 있습니다.
즉 교환(交換: Exchange)거래를 하는 고인(賈人)들의 화폐는 그것이 ‘국가화폐’이든 ‘실물화폐’이든 가치(價値)가 화폐 속에 함유(含有)내지 부착(附着)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즉 ‘한국은행권 10,000원’이란 액면가(額面價)가 있으면, 만원이란 액면가(額面價) 자체가 그 ‘돈’ 안에 부착(附着)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찍어낼’ 권한은 오직 국가(國家)에서 엄격히 통제하는 곳에 한정(限定)이 되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찍어낸 돈’을 위조(僞造) 화폐라고 하면서, 경제질서의 교란(攪亂)으로 중범죄로 취급학지요.  

또 금화(金貨)나 은화(銀貨) 역시 금(金)과 은(銀)의 함유량(含有量)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함유량(含有量)이 모자른 금화(金貨)나 은화(銀花)를 흔히들 악화(惡貨)라고 칭하는데, 이는 결국 이는 분명히 ‘도덕적으로 악(惡)한 돈’이란 개념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고인(賈人)들이 쓰는 ‘돈’의 가장 큰 속성은 “ ‘돈’이란 존재(存在) ‘안’에 가치(價値)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상인(商人)의 화폐는 ‘가치 외재성(外在性)’의 속성이 있다.

그런데 상인(商人)의 화폐는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도전(刀錢) 100 양(兩)을 지니고 있다.”라고 하면, 이는 국가에 소속된 군마(軍馬)를 ‘벅수군’에게 인계한 증표(證票)에 불과하고, “정말 벅수군에게 100 양(兩)의 군마(軍馬)를 마꼈는가?”하는 정보는 군마(軍馬)를 인계받은 ‘벅수군’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포전(布錢) 1,000 양(兩)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  이는 ‘우로보로스(Ouroboros)’의 빈틈이 생겨서 상품의 생산이 불가능할 때, “‘기술 전수(傳授) 여행’을 온 사람에게 배워서’그 기술을 익혀서 ‘빈틈’을 메꿔 상품을 제대로 생산하는 능력이 생겼고, 실제로 생산했음”을  보장하는 증표(證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연 기술을 제대로 익혀서 빈틈이 생긴 ‘우로보로스(Ouroboros)’를 메꾸어 상품을 생산했는가?”는 정보는 ‘기술 전수자’와 해당 상품을 인계받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3)  위조(僞造) 불가능한 상인(商人)의 화폐
- ‘계산(計算)의 도구(道具)’와 ‘영광(榮光)과 위신(威信)의 증표(證票)’에 불과한 화폐

고인(賈人)들의 화폐는 ‘가치 내재성’이 있기 때문에, 거래를 하기 전(前)에 ‘공식적인 확인과정’을 하는 항상적인 ‘공적(公的)인 시장(市場 : marcket) 관리인’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의 화폐는 ‘가치 외재성’이란 속성을 띠기 때문에, 거래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항상적으로 ‘공식적인 확인 과정’을 하는 ‘공적인 시장 관리인’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군마(軍馬)를 벅수군에게 인계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전(刀錢)을 잔뜩 위조(僞造)해서 ‘영산화백’의 ‘말발’로 쓰기 위해 화백회의장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왜냐?  영산화백이 일어나는 장소 입구에는 반드시 ‘공적인 시장 관리인’이 파견되어 “정말 이 사람의 도전(刀錢)이 장부(帳簿)에 있는 도전(刀錢)인가?”를 첵크(check)하는 과정이 따르기 때문에 입장 자체도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피(p)형 도전(刀錢) 즉 ‘사는 화폐’로 물건을 사거나,  큐(p)형 도전(刀錢) 즉 ‘파는 화폐’로 물건을 팔려고 하더라도 시장(市場)에 들어설 때, 역시 ‘공적인 시장 관리인’에게 확인을 해야 되기 때문에, 시장(市場: marcket)에 역시 입장 자체도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상인(商人)의 화폐는 ‘공적인 시장 관리인’이 지니고 있는 서계(書契) - 즉 장부(帳簿)에 ‘돈’이 있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고고학적으로 발견이 되는 도전(刀錢), 포전(布錢), 벽옥(璧玉) 등등은 무엇인가 함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화백회의나 시장(市場) ‘안’에서 서로 ‘계산(計算)하기 좋은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서계(書契)나 장부(帳簿)에 확실한 ‘정보’만 있으면 ‘돈’이 있는 것이고,  ‘맨 몸’으로 화백회의장에나, 시장(市場)에 들어가더라도 ‘공적인 시장 관리인’이 장부(帳簿)와 맞추어서 해당되는 화폐를 ‘타서’ 거래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워낙 고인(賈人)들의 화폐의 속성하고는 다릅니다.  
반대로 고인(賈人)들은 ‘가치가 내재(內在)한 화폐’를 쓰기 때문에,
‘돈’을 안들고 시장에 들어가면, 물건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상인(商人)의 화폐는 소장(所藏)할 필요가 없는 화폐입니다.

그런데도 신시(神市)의 화폐 가운데 벽옥(璧玉)이나, 곡옥(曲玉)은 유별나게 소장(所藏) 욕구가 강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곡옥(曲玉)으로 나는 부여와 고구리를 통일시킨 배달화백에 참여한 천독(天毒)이다.” 라든가, 혹은 “나는 이 벽옥(璧玉)으로 막대한 ‘실물화폐’를 담보를 잡고, 고주몽-동명성왕에게 ‘추모대제’로 그 지위(地位)를 밀어주고 남은 화폐이다.”하는 삶의 역사성에 대한 위신과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증표(證票)로써 소장(所藏) 욕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장 욕구는 대(代)를 넘어서 전승(傳承)도기도 합니다.
오늘날 일본 신사(神社)에 곡옥(曲玉)이 신물(神物)로 모셔지는 이유는 그 곡옥(曲玉)이 배달화백을 통해 ‘어떤 나라들을 통합’한 소중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참고 : 일본서기, 고사기에 나오는 천황(天皇)이란 존재는 ‘산책 선생님’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역사에 있는 왕들을 편집해 놓은 것이라는 것임.  따라서 신사에 모셔진 곡옥(曲玉)이 “어떤 나라와 어떤 나라를 배달화백으로 통합한 증표(證票)인가?”하는 것도 편집된 천황이 누구며, 그 분이 어떤 나라들을 통합하였는가를 추적하면 찾을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것임. )

(4)  왜 하필이면 배달화백에 쓰인 화폐는 곡옥(曲玉)의 모양을 취하는가?

이처럼 신시(神市)의 화폐 - 다시 말하면, 상인(商人)의 화폐가 정보처리를 하는 서계(書契)와 장부 ‘안’에 있고, 우리들이 보는 화폐는 단지 ‘계산(計算)의 도구(道具)’화 ‘위신(威信)과 영광의 증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 고대사(古代史)를 연구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해 집니다.

그런데, 신시(神市)의 화폐는 ‘가치 외재성’ - 즉 화폐 ‘밖’에 가치가 있는 다시 말하여 장부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형태가 가지는 상징성이 중요합니다.
도전(刀錢) - 이는 ‘칼’이 상징하는 군사적 폭력을 인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포전(布錢) - 이는 ‘딱딱하게 죽은 땅’을 숨을 쉬게하기 위한 ‘따비’처럼 기술의 승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곡옥(曲玉)이 왜 배달화백의 ‘말발’ 화폐로써 상징성을 획득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해집니다.

가) 곡옥(曲玉)은 자궁(子宮) 안에서 잉태된 생명체의 모습

오늘날 문화인류학자들은 이 곡옥(曲玉)의 모양이 모든 생명체가 자궁(子宮)에 있을 때의 모습과 유사함에 착안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인 것이지요.  ‘새로운 사회-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유의해야할 점은 곡옥 가운데 ‘자모(子母)-곡옥(曲玉)’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미’ 곡옥이 ‘아기’곡옥을 안고 있는 모양인데,  이런 모양새는  “먼저 큰 공동체를 통합하고, 이의 도움을 받아 작은 공동체를 통합한다.”는 배달화백의 효과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런 모양새 자체각 애초부터 도상학(圖像學)적으로 음미해 볼 여지(餘地)를 두고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  곡옥(曲玉)은 우주목(宇宙木)의 별(영혼(靈魂))벌레 모습

 이 곡옥(曲玉)과 관련해서 아주 흥미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백제 금동 대향로’라는 명저(名著)를 쓴 ‘서정록 선생’께서 좌계와의 대화 중에 터기(Turk)계통의 화보 설명집에 보았는데, “하늘의 영혼(靈魂)이 우주목에 날러와서 ‘영혼 벌레’로써 자라다가 여인의 자궁으로 들어가서 인간이 된다.”는 설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정보인 것 같아서 “확실한 전거(典據)를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현재까지 “ ‘백제 금동 대향로’를 쓰기 위해서 읽은 외국 도록(圖籙) 가운데서 본 이야기인데,  도대체 수많은 도록 가운데서 어디에서 읽은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틈틈이 살펴보긴 하지만, 아직까지 못 찾았다.”는 회답만 받고 있습니다.
(혹 이글을 읽고, 이에 대한 확실한 서책(書冊)을 지니신 분은 꼭 ‘댓글’이나, 훗날에라도 ‘자유게시판’에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이 영혼-벌레의 이야기를 좌계가 유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곡옥(曲玉)의 정확한 상징성의 유래(由來)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달화백도 화백인 이상 ‘사회적 명상’을 하게 되는데,  지구를 둘러싼 별(星 : star)들이 명상을 한 결과가 ‘우주목’에 깃드는 ‘영혼-벌레’로 나타났고, 이 ‘영혼 벌레’가 사는 ‘둥지’가 있고, 여기에서 어느 정도 자라면 회임(懷妊)중인 어머니 몸속에 들어간다는 특이한 ‘패러다임’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지구상에 있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우주의 배달화백’으로 잉태된다는 것이 엿보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둘째는 실제로 ‘육지’에서 실시하는 ‘압축형’의 배달화백의 ‘말발’로 사용되는 모델(model)이되는 ‘패래다임’이기 때문입니다.  


다) 실제로 육지(陸地)에서 ‘압축하여’ 배달화백을 운영할 때에 ‘말발’로 쓰인 곡옥(曲玉)

아무튼 곡옥(曲玉)이 바로 ‘배달화백’에 쓰이는 ‘말발’ 화폐인데,  실제적으로는 이 곡옥 자체에 ‘가치내재성’이 있는 것은 아니고, ‘국가의 세금(稅金)’을 상(商)이라는 ‘피라미드’에 담보룰 잡히고 얻는 ‘장부(帳簿) 상의 기록’ 에 있는 ‘기록’ 자체가 진짜 곡옥(曲玉)이고, 실제 배달화백에 들어서면, ‘자이로소코프(Gyroscope)형태로 된 연등(蓮燈)’이 실제 사용하는 말발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곡옥(曲玉)이 실제 ‘배달화백’의 ‘말발’로도 쓰입니다.
그것은 육지(陸地)에서 배달화백을 ‘압축한 모양’으로 할 경우입니다.
즉 신성한 성지(聖地)나 ‘피라미드’ 같은 현실(玄室) ‘안’에서 배달화백을 재현(再現)할 경우입니다.  

호수(湖水)에서는 수상연단(水上演壇)인 태(兌)를 타고 나가지만, 이는 장소(場所)를 크게 잡아야하는 흠이 있습니다. (물론 멀리서 ‘배’를 타고 소도(蘇塗)의 호수(湖水)에 들어올 경우는 그 배 ‘안’에 있는 태(兌)를 진수(進水)시키는 즉결성(卽決性)이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태(兌) 밑에 마차(馬車)를 달아서 육지에서는 ‘배달화백’을 할 수도 있긴 합니다.  또 문자 인류학적으로 볼때 이처럼 태(兌)에 마차(馬車)를 밑에 ‘깔고’ 육지에서 배달화백을 할 때의 태(兌)를 선(單)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이런 정견을 발표할 때 타고 나가는 태(兌)나, 선(禪)은 ‘크게 공간을 활용해야 되는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태(兌)및 선(單)은 약 일장(一丈 : 3미터)되는 크기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지에서 ‘압축된 환경’ 속에서 배달화백을 할 때에는 선(單)을 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호(壺)라는 ‘단지’를 안고 나가서 자신의 정견(政見)을 발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때, 이를 지켜보는 천독(天毒)들은 ‘연등(蓮燈)’ 대신에 곡옥(曲玉)으로써 말발을 실어주는 것이지요.  
이는 곡옥(曲玉)이 영혼-벌레이고 호(壺)라는 ‘단지’가 이 ‘영혼-벌레’가 깃드는 ‘둥지’라는 개념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4.  광개토태왕의 호우(壺杅)와 ‘육지(陸地)에서 압축형’으로 전개되는 ‘배달화백’

배달화백이 소도(蘇塗)의 중심부인 호수(湖水)에서 하는 것은 고조선-삼한(三韓) 사람들이 아시아 최대의 해운(海運) 선박(船泊)-민족이라는 삶의 형식과 관련됩니다.  즉 선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강(江)을 타고 호수에 들어왔을 때, 마치 오늘날 구명정(救命艇)이 선박 ‘안’에 있듯이 있는 이미 싣고 있는 태(兌)를 꺼내서 호수(湖水) 가에 ‘어떤 위치’에 배치(配置)해 두고,  자신은 호수 가에 앉아서 이미 태(兌)를 타고 나간 사람들의 정견(政見)을 듣고는 ‘말발’을 실어주거나 빼거나 옮기다가 자기 자신도 직접 정견(政見)을 이야기 하고 싶을 때 즉각 타고나갈 수 있는 즉결성(卽決性)이 있기 때문에, 발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兌)는 기본적으로 일장(一丈 : 약 3미터)되는 일인용(一人用) 평저선(平底船)이기 때문에  ‘수레’ 위에 손쉽게 부착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실제로 이렇게 태(兌)란 평저선과 수레를 부착시킨 것이 선(單)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일인용 수상연단(水上演壇)에서 일인용 육상연단(陸上演壇)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문제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호수(湖水)나 대평원(大平原)에서 배달화백을 하는 것은 수만 명의 천독들이 ‘모여서 배달화백’을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가.  육지(陸地)에서의 압축형으로 ‘배달화백’을 할 경우의 가설(假說)

그런데 그 규모가 배달화백의 최소단위인 250명에서 1,000 여명일 경우에는 굳이 약 일장(一丈: 3미터)나 되는 일인용 연단(演壇)이 오히려 번거러운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오히려 호(壺)라는 이름의 ‘단지’를 들고 하세(下世)하여 ‘배달화백’의 말발을 받는 것이 유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호(壺)라는 단지는 그 모양이 ‘영혼-벌레’인 곡옥(曲玉)이 우주목 위에 깃드는 ‘둥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물론 가설(假說)이긴 하지만, 육지에서 ‘압축적’으로 하는 배달화백과 곡옥(曲玉), 그리고 호(壺)의 상관관계를 재구(再構)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1)  경주시 노서리 고분의 호우(壺杅)의 명문(銘文)

이와 관련해서 일단 떠올려지는 것이 1946년 경주시 노서리에 있는 고분(古墳)의 발굴 과정에서 나온 부장품 중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과 관련된 호우(壺杅)입니다.  
그래서 이 고분을 흔히들 호우총(壺衧塚)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호(壺)의 밑바닥에 새겨진 명문(銘文)입니다.

이를 옮기면 ‘을묘년(乙卯年)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 됩니다.
“도대체 이 호우(壺杅)를 어떤 용도로 썼을까?”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명문(銘文)에서 시기(時期)를 나타내는 을묘년(乙卯年)과 광개토태왕과 관련된 글 귀 즉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을 빼고 나면, 그 용도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호우십(壺杅十)이란 단어(單語) 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호우십(壺杅十)의 의미

우(杅)와 도(棹)는 혼용(混用)이 되는 글자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를 호도십(壺棹十)이라고 읽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杅)나 도(棹)는 문자 그대로 ‘탁자(卓子)가 달린 작은 배’라는 뜻입니다.
이런 명칭 자체가 이 호우(壺杅) 혹은 호도(壺棹)가 ‘배달화백’과 관련됨을 알 수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호우(壺杅)를 안고 하세(下世)했을 때, 이와 동등한 견해를 품은 사람은 곡옥(曲玉)이란 말발을 그 호우(壺杅)속에 집어넣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옮길 필요가 있을 때는 곡옥(曲玉)을 빼 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호우총(壺衧塚)에서 발견된 호우(壺杅)에 적혀있는 “호우십(壺杅十)에서 ‘십(十)’이 뜻하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달화백은 경제부문, 교육부문, 군사부문 등 수많은 ‘검토 분야’별로 수상연단(水上演壇)인 태(兌)를 타고 나갈 수 있는 화백회의입니다.  그런데 천독(天毒) 한 분이 여러 분야에 동시에 자신의 정견(政見)을 피력하기 위해 ‘다중(多重: multiful) 하세(下世)’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검토분야를 호우일 (壺杅一), 호우이(壺杅二), .......호우십(壺杅十)으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배달화백을 할때 한 사람이 이처럼 여러 분야에 하세(下世)할 경우, 동시에 여러 검토분야에서 자신의 정견(政見)을 이야기할 수가 없음은 자명합니다.

(3)  배달화백에서 광개토태왕의 분신(分身)이었던 영광

가령 광개토태왕께서 호우십(壺杅十)에 하세(下世)했을 때, 여기에 ‘말발’로 곡옥(曲玉)을 넣고는 첫째로 안 빼감은 물론 둘째로 광개토태왕의 해당 검토분야 부문의 주장을 광개토태왕의 주장과 똑같이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최소한 그 분야에 관한 광개토 태왕의 분신(分身)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배달화백을 마치고, 사회가 무사히 통합이 되었을 때,  “나는 을묘년(乙卯年) 배달화백때 호우십(壺杅十)의 검토분야에서는 광개토태왕의 분신(分身)이었다.”는 영광을 지닐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은 이 호우십(壺杅十)을 광개토태왕으로부터 선물(膳物)받고,  이를 무덤에 까지 함께할 영광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고구리 왕가(王家) 아이콘(Icon)인 ‘샵(#)’과 호중록(壺中錄), 투호놀이

이런 가설(假說)은 이런 명문(銘文)이 새겨진 호(壺) 밑바닥 위에 ‘백두산 천지(天池)물’을 상징하는 우물 정(井)이란 글자가 음악의 ‘샵(#)’ 표식처럼 뉘어져 있는 모습이 주요 아이콘(Icon)으로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 개연성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샵(#)’ 모양이 고구리 왕가(王家)의 고유 아이콘(Icon)일런지도 모릅니다.

또한 조선(朝鮮)때 우리 고사서(古史書) 수거령(收去令)이 내렸는데, 그 가운데 호중록(壺中錄)이 있습니다.  “이 호중록(壺中錄)의 내용이 무엇일까?”하는 것에 대해서 ‘육지에서 압축적으로 하는 배달화백을 한 기록’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상상도 하게 됩니다.

또한 투호(投壺)라는 놀이가 있는데 이는 ‘화살을 호(壺)라는 단지’ 안에 던지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원래 배달화백을 할때 수만명이 운집해서 수상연단(水上演壇)인 태(兌)에 ‘말발’을 실어주거나 빼는 명령을 천독(天毒)들이 ‘화살에 쪽지를 감아서 쏘는’ 관습(慣習)과 관려해서 착안되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排除)하지 못합니다.
즉 호(壺)나 태(兌)가 동일한 ‘말발’을 담아두는 ‘그릇’이고, 여기에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화)  살이었기 때문에,  투호(投壺)라는 발상이 자연스럽게 잉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가설(假設)이긴 하지만,  가설(假設)을 세우고, 그 진위(眞僞)를 기다리는 방법론이 없다면,  이는 “실제 역사를 재구(再構)해냄이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적어도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개방적으로 대해야할 가설임에는 분명합니다.  

나.  현실감을 송두리째 없애는 ‘사실(fact)’로만 구성하는 역사

이러한 점은 호우(壺杅)에 새겨진 을묘년(乙卯年)의 의미를 살펴보면, 더욱더 그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즉 을묘년(乙卯年)은 광개토태왕께서 돌아가신 해(A.D. 415)로부터 3년후인 A.D. 415년인 것이지요.  

(1)  광개토태왕의 ‘죽음’을 기념하는 ‘항아리’라는 이상한 ‘발굴보고서’

그래서 이 호우총(壺衧塚) 발굴보고서에서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호우(壺杅)의 정체에 대해서  “ 이 호우(壺杅)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이 돌아가신(412년) 3년 후인 을묘년(415) 만주 집안 국강상에 영원히 잠드신 광개토왕을 기념하는 항아리’라는 말이다(호우총 발굴보고서. 1948년).”라고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코메디(comedy)같은 내용을 본질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 왕이 죽은 지 3년을 기념해서 마치 기념 주화(鑄貨)를 발행하듯, ‘단지’인 호(壺)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의 죽음의 3년째를 기념하기 위한 항아리 ??” 아무래도 코메디 같은 결론이어서 그 항아리를 설혹 ‘광개토태왕의 죽음을 슬퍼해서 운 눈물을 담아두는 항아리들 가운데 10번째 항아리...’라고 좀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인다고 해도 괴기(怪奇)스러운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료(史料)와 유물(遺物) 만’으로서 재구(再構)해 내는 역사는 ‘현실감을 송두리째’ 없애는 그런 한계(限界)가 분명있다는 것입니다.
즉 해석학이 빠진 사료(史料)와 유물 만의 ‘사실(史實 : fact)’만의 해석으로는 ‘코메디같고, 괴기스러워서’ 결국 현실감이 오히려 없애게 한다는 것이지요.
해석학에는 따라서 ‘분명히 있었던 어떤 제도를  실험고고학적으로 재구(再構)하려는 가설(假說)의 도입과 이의 세심한 검토가  요구(require)됨이 분명한 것입니다.

(2)  태왕(太王)이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았을 때의 경우

더구나 광개토태왕이 죽은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소도(蘇塗)에서 대로(對盧)나 천황(天皇)이 되기 위해, 의식(儀式)으로써의 ‘죽음’을 치루고, 오늘날 일본의 할머니 사학자(史學者) ‘고바야시 야스꼬’씨 주장대로 인덕(仁德) 천황이 되었다면, 위 호우총의 호우(壺杅)는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도 우리는 생각해봐야합니다.
이 경우 죽음의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인덕 천황이 된 후에 난 자식이 고구리 왕가(王家)의 계승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호우총의 호우(壺杅)의 의미를 사실(史實 : fact)그대로만 볼 경우 “ ‘고구리 계승권을 포기하는 의례(儀禮)적인 ‘죽음’의 3년을 기념해서 만든 항아리이다.”라는 뜻으로 변하기는 해도, 역시 이상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이처럼 의례(儀禮)로써의 ‘죽음’이 있었음을 만약 확실하다면,  더욱더 “배달화백을 ‘압축형’으로 실시할 때,  태(兌)나 선(單) 역할을 하는 것이 호우(壺杅)였다.”는 것이 현실감을 띤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쩌면 광개토태왕의 비문(碑文)에 등장하는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의 ‘숫자’도 압축형으로 배달화백을 할 때, ‘배달화백에의 참여’가 허락된 사람의 숫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즉 태왕은 ‘의례적인 죽음’을 하기 전에 최후로 ‘모종(某種)의 중요한 배달화백’에서 참여할수 있는 자격을 왕(王)으로써 ‘왕 턱’을 조율하는 그 명단을 발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5.  왜 압축형 배달화백이 있게 되었나? - 사영지(四靈地) 관련

호수(湖水)에서 수상연단인 ‘태(兌)’를 타거나, 혹은 설원(雪原)이나 초원(草原)에서 ‘육상연단’인 선(單)을 타고 광활한 지역에서 배달화백을 하지 않고, 250여명- 1,000명 안팎의 사람이 모이는 압축형 ‘배달화백’이 열리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아무리 배달화백이 ‘큰 공동체의 통합’을 먼저하고 이의 도움을 받아서 ‘작은 공동체의 통합’을 하는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서는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나 ‘파워 엘리트(Power-elite)의 가 실질적인 갈등과 해결책을 모두 표출(表出)해 낸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꼭 검토해 봐야할 사료(史料)가 있습니다.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에 번호를 붙여서 살표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진덕여왕’조(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1) 칠성(七星)의 숫자.

“왕의 대(代)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 주의(注意) :
일단 여기까지 기록이 중요한 것은 “진덕여왕을 포함해서 전부 7명의 대신(大臣)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는 ‘북두칠성’의 숫자와 동일하고, 이는 ‘배달화백’을 운영할 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속이 빈 피라미드(=허달성(虛達城)’을 지키는 영성문(靈星門)의 문주(門主) 숫자와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즉 이처럼 7명의 문주(門主)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이 회의가 ‘압축형 배달화백’임이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

2) ‘사회적 명상’을 뜻하는 우지암(亏知巖)


-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우知巖)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

-주의(注意)
: 일단 여기서 우지암(亏知巖)이란 명칭에서 ‘우(亏)’이 뜻이 우(于)의 본자(本字)로써 “~로 가다” “ ~행하다.”는 뜻이어서 결국 “~지혜를 향하여 가는 바위”라는 뜻을 지님에 유의해야할 듯 합니다.  
즉 화백과 동일어로 쓰였던 ‘사회적 명상’과 그 본질적인 뜻이 ‘같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할 듯 합니다.
아무튼 문제는 이 우지암(亏知巖)이 “암석(巖石)임은 분명한데,  어떤 모양으로 된 것인지?”하는 질문입니다.  

3) 일곱 개의 바위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긴 홈’이 있는 바위구조


그런데 북두칠성(北斗七星)에 해당하는 7명이 있고, 이들이 앉아 있는 바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바위의 숫자가 일곱(7)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일곱 개의 바위는 인공(人工)으로 뚫든, 약간의 변조를 하던 간에,  입구 문(門)이 있고, 이에 들어서는 것이 싫으면 물러나가는 사람들의 힘에 의해서 저절로 ‘문 턱’이 높아지고, 반가히 맞이하면 ‘문 턱’이 낮아지는 장치가 가미된 그런 ‘바위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은연중 위 문장에 나타납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는 구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면(正面)으로 달려드는 ‘호랑이의 꼬리’를 앉아있는 채로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알천공(閼川公)이 앉아있는 바위 밑이나 옆으로 통로가 있고,  이 통로 사이로 호랑이가 지나갈 때, 앉은 채로 손을 뻗어서 꼬리를 잡았던 것이고, 들어 올려서 땅에 메쳐 버린 것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일어난 것은 ‘알천공(閼川公)’이 있는 곳으로 범이 달려드니깐, 바위에 그대로 앉아서는 상황파악이 안되기 때문에 일어선 것이지, 무서워서 도망갈려고 일어선것이 아니며, 특히 이 자리에는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보호를 위해서 여차직하면 행동할려고 했음이 문장의 이면(裏面)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알천공(閼川公)이 완력을 써서 범을 잡자, 그를 ‘북두칠성’ 가운데 가장 ‘첫째 별’인 탐랑(貪狼)성 자리에 앉히고,  대접을 했음이 들어나고,  그러나 이런 ‘압축형 배달화백’을 진행시킴에 있어서, 완력은 전혀 ‘위엄’이 없었기에 오히려 유신공 께서 앉아있는 바위 앞에 ‘위엄’을 더 느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유신공께서는 무곡성(武曲星)에- 북두칠성의 끝의 별이 파군성(破軍星)이고, 그 다음 별임 - 정좌(靜坐)한 듯 합니다.  
계속 삼국유사 진덕여왕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4) 사영지(四靈地)에 대해


“신라에는 사영지(四靈地) 즉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 주의(注意)
일단 이 구절은 화백회의를 묘사할 때 늘 등장하는 표현방식 ‘나라의 큰일이 있을때 의논한다.’ 만장일치를 뜻하는 듯한 ‘그일이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말이 있어서, 화백회의를 묘사하는 문장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이어서 사영지(四靈地) 이야기의 구체적인 명칭이 나옵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우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사영지(四靈地)가 실제로 어디인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압축형 배달화백’이 진행되는 성지(聖地)는 “ 신라(新羅)의 경우, 4곳에 한정(限定)이 되어 있었고, 신라왕이 참여하기 쉬운 신라의 수도 근처에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똑같은 이유로 백제나 고구리, 부여에서도 ‘압축 배달화백’이 열리는 성지(聖地)는 제한(制限)되어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지는 대목입니다.

좌계가 볼때에는 ‘압축 배달화백’이 열리는 또하나의 장소는 ‘거대한 피라미드(=적석총)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  그 자체가 성지(聖地)이니깐 말입니다.  


6.  상인(商人)의 거래에 반드시 존재하는 주부(主簿) - ‘The king of accounting)


아무튼, 배달화백은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서도 하지만, ‘압축형’ 배달화백이 오늘날로 말하자면, ‘파워 엘리트’와 ‘오피니언 리더’를 중심으로 소규모 - 최소한 200여명에서 1,000여명이 할 수도 있음을 강조드리기 위해서 신라의 사영지(四靈地) 이야기도 한 것입닉다.

그런데 이미 고인(賈人)들이 쓰는 화폐와 상인(商人)들이 쓰는 화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인(賈人)들이 쓰는 화폐가 그것이 ‘국가화폐’이든 ‘실물화폐’이든지 간에 ‘가치 내재성(內在性)’이 있지만,  교환(交換: exchange)을 중심거래로 하지 않는 상인(商人)들의 거래는 기본적으로 그 화폐가 ‘가치 외재성(外在性)’입니다.  즉 화폐가 ‘계산의 도구’로써 쓰이고, 위신(威信)과 영광의 증거물일 뿐, 실재로는 서계(書契)나 장부(帳簿)에 있는 ‘정보’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시(神市)의 화폐는 본질적으로 전자(電子)-화폐 즉 ‘정보(情報)를 본위’로 하는 화폐입니다.

따라서 ‘교환-거래’를 하지 않는 경제-씨스템(system)에서는 특이하게도 통계 및 회계처리가 고도로 발달되어 있고, 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시장(市場)-관리인’으로 입회(立會)해서 ‘화폐 가치’를 보증해 주어야만 비로소 거래(去來)가 가능한 한결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환거래를 철저히 배격하고,  호혜(互惠)-거래를 끝까지 한 ‘다호메이(Dahomay)왕국’은 문자(文字)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모든 거래마다 ‘오로보로스(Ouroboros)’를 틀어서 하는 복잡한 ‘호혜-거래’를 모두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통계처리를 거래와 동시에 병행(竝行)해서 진행하면서 훌륭하게 완성해냅니다.

예를 들어 바구니에 각 부족을 상징하는 문양을 그려넣고,  1살짜리 아이가 태어나면 ‘1살짜리’ 바구니에 조약돌을 집어넣고, 일년후에 이 아이가 2살이 되면 ‘2살짜리 바구니’에 집어넣고, 만약에 아이가 죽으면, 그 ‘돌’을 빼내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모든 경제 거래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통계 행위와 계산행위가 이루어져서, 당시 이 지역에 주둔(駐屯)한 ‘프랑스 인’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좌계가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구리(高句麗) 관직(官職)에 주부(主簿)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회계(會計)의 주(主)’ 즉 ‘회계의 왕(王)’이란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The king of accounting’인 것이지요.  

이들이 결국 수많은 정보처리를 해서, 상인(商人)의 거래에 따르는 ‘가치 외재성’을 보증해 주는 ‘시장 관리인’인 것입니다.  

‘다호메이’ 왕국이 문자(文字)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위에 든 방법으로 그 복잡한 경제 거래를 완벽히 소화해 냈음을 생각하면,  한문(漢文)을 비롯한 각종 문자를 발명한 우리 조상들이 신시(神市)를 운영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다호메이 왕국’에는 “일은 남자가 하고, 정보처리는 여자가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일을 하다가 부당한 대접을 받게 되면,  자신의 ‘정보처리’를 해주는 ‘짝’인 여자에게 호소(呼訴)를 하는 것입니다.

좌계가 오늘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문을 보고 또한번 놀란 것은 태보(太輔) 마락(麻樂) 주변에는 이런 ‘정보처리를 하는 여인’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태보(太輔)는 고구리(高句麗)에서 왕 혹은 황제를 대신해서 배달화백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배달화백은 놀랍게도 신시(神市)와 함께 운영이 되는 회의방식입니다.
따라서 ‘복잡한 상인(商人)의 들의 정보처리’를 하는 여인들이 태보(太輔) 아래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이지요.  

비록 태보 마락(麻樂)께서 “성품이 관유(寬裕)하셔서 ‘주검이 채 식기도 전에 이 정보처리 여인들이 분주(奔走)하게 나들이 하였다.”고 ‘태조 황제기’에는 적혀 있지만,  당시대 고구리인들이 “이 무례(無禮)한 처녀(處女)들..”이라고 분노하지 않고,  정보처리해주는 여인들에 대해서 저토록 인정(人情)스럽게 대했던 태보(太輔)를 흠모한 까닭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 태보(太輔)의 처녀(妻女)들은 실제로 ‘일하는 남자’들의 ‘짝’인 ‘정보처리하는 여자’였고, 그들 사이에는 애인(愛人)들도 많았을 겁니다.

아무튼 이들은 태보(太輔) 마락(麻樂)의 죽음이 가져온 일종의 ‘휴가’때 오래간만의 ‘데이트’를 즐기면서 ‘태보 마락(麻樂)의 위대성을 찬미(讚美)했을 것’으로 봅니다.  

사천(史穿) 김성겸 님.  
사천(史穿) 선생께서 남당(南堂) 유고의 해석이라는 매우 힘든 대장정을 하듯이....
좌계 역시 순방체제와 배달화백에 대한 대장정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3)


좌계 (2007-05-22 15:33:24)  
* 호우총(壺衧塚)의 호우(壺杅)에 대해
<본문(本文)>에 ‘경주시 호우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호우(壺杅)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올립니다.
1946년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호우총(壺棹塚)에서 출토된 것으로 총 높이 19.4cm, 그릇의 깊이 10cm, 몸통의 지름 24cm이다. 그릇과 뚜껑의 각 표면에는 3가닥씩의 융기대(隆起帶)를 돌리고, 뚜껑에는 다시 윗부분에 1가닥을 돌린 위에 화형(花形) 10 꽃잎의 유좌(쐤座)에 구슬 같은 손잡이 꼭지가 달려 있다.

그릇 밑받침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도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棹十)'이라고 돋을새김한 4행 16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을묘년(乙卯年)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째가 되는 415년(장수왕 3)이다.

며, 이 글귀는 '국강(國岡) 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용호우'라는 뜻이다.

또 이 글자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비문과 같은 웅건한 한예체(漢隸體)이다. 이 제기(祭器)가 어떠한 경로와 이유로 신라의 서울에까지 흘러들어왔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제조연대가 뚜렷한 고구려 때의 공예품이란 점에서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좌계 (2007-05-22 15:35:07)  
* 자이로스코프(Gyroscope)와 황(巟)

호수(湖水) 위에 떠있는 연등(蓮燈)은 ‘물결이 일어나도 등(燈)이 커지지 않는 수평유지 장치 안’에 있는 장치있니다. 말하자면 회전의(回轉儀)인 ‘자이로스코프(Gyroscope)’의 원리인데, 이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그 시원을 연구한 사람이 ‘조셉니담’입니다.
워낙 방대한 저술이라서 이를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이라는 제목으로 ‘로버트 템플’이란 사람이 ‘그림’과 ‘간략한 설명문’으로 한 권으로 압축해서 냈습니다.
(현재 ‘까치 사(社)’에서 출판하고 있음)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런 등이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기원전 140년에 지은 미인부(美人賦)라는 시(詩)에서 나타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미인(美人)을 유혹하는 장면에 ‘불에 타는 향이 들어있던 굼속의 동그라미’에 대한 것이 쓰여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침구(寢具)속에서도 외부 링(ring) 때문에 불이 붙지 않고, 은은한 불빛과 향(香) 때문에 ‘최고품의 섹스(sex) 보조용품’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회전의(回轉儀)의 발명자를 ‘조셉니담’은 방풍(房風)이란 사람이 만들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을 본격적으로 재현(再現)한 사람은 당시대 발명가로 유명한 정완(丁緩)이 A.D 180년에 한 것이라는 것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분명히 들어난다는 것이지요.

즉 그 책에는 “ 정완은 ..... ‘이불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향로’ 혹은 ‘침구용 향로’도 만들었다. 이러한 물건은 본래 방풍(房風)에게서 유래된 것인데, 후일 정완이 복원하기 까지 그 제작법은 오랬동안 잊혀져 있었다. 정완(丁緩)이 고리를 조합하여 ‘ 위 아래 사방 어느 쪽으로나’ 회전하는 장치를 고안한 덕분에, 향로 본체가 항상 수평을 유지하여 그것을 침구나 방석 사이에 놓아둘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까치 사, p81에 있음)

그런데, 이는 ‘조셉니담’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주역의 지천태(地天泰) 괘에 보면 “황(巟)을 안고 황하(黃河)를 건넌다. (포황(包巟)용빙하(用憑河))”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황(巟)의 글자는 금문(金文)으로 보면, 마치 ‘자이로스코프(gyroscope)’의 내부를 그려논 듯한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주(周)나라때부터 있었던 기술인 것으로 보이고, 특히 더 중요한 것은 ‘배달화백 때만’ 사용하는 신성(神聖)한 기술로써 외부(外部)에 유출을 금한 기술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조셥니담’이 쓴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대부분의 과학기술은 그 당시 ‘중국’에 있던 우리 선조(先祖)들의 과학기술인 듯한 인상을 좌계는 많이 받고 있습니다.

왜냐?
그 과학기술이 절실히 필요했던 배달화백이라든가, 세계경영의 편리성 때문에 요구되는 기술이었던 것으로 보이니깐 말입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의 고대사에는 절실히 이런 ‘필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니깐 말입니다.

우리 역사를 재구(再構)함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절실히 요구되었던 기술이 무엇일까?”를 찾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좌계는 늘 생각합니다.
economet (2007-05-24 10:31:01)  
좌계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항상 글을 접할때 눈이 뜨이는거 같습니다.

확실한 출처는 모르나 두가지 연상되는게 있어 한자 적어봅니다.

1. "이 영혼-벌레의 이야기를 좌계가 유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곡옥(曲玉)의 정확한 상징성의 유래(由來)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달화백도 화백인 이상 ‘사회적 명상’을 하게 되는데, 지구를 둘러싼 별(星 : star)들이 명상을 한 결과가 ‘우주목’에 깃드는 ‘영혼-벌레’로 나타났고, 이 ‘영혼 벌레’가 사는 ‘둥지’가 있고, 여기에서 어느 정도 자라면 회임(懷妊)중인 어머니 몸속에 들어간다는 특이한 ‘패러다임’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지구상에 있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우주의 배달화백’으로 잉태된다는 것이 엿보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1년반전에 줄기세포사건으로 생명윤리가 매스컴에 타고 오른적이 있습니다. 이때 유대교의 생명윤리가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기독교(천주교와 큰 개신교종파들)와 달리 유대교는 배아줄기세포연구를 허용할수있는 교리를 벌써 천년도 더 전에 정립하였기에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유대교는 수정후 정확히 7주 그러니 49일이 지나야 우주/하늘에 위치한 영혼의 헛간/곳간에서 영혼이 내려와 몸에 깃들어 그제서야 온전한 생명체가 된다는 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세때의 한 랍비에 의해 정리되었다고 봤는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니 히브리인들의 이런 영혼 도래설은 좌계님이 위에서 언급하신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참고로 요한묵시록의 세계종말의 7대 징조중 6번째인가가 바로 이 영혼의 헛간이 비어 도로 차지 않은 상태에서 지구상에 영혼이 깃들지 않은 아기가 태어나는것입니다.

2. 공식적으로 세계에사 제일 오래되었다는 수메르문자 즉 쐐기문자를 연구하여 소개한 글들을 보면 원형 쐐기문자는(제일 초기의 쐐기문자형태로 기록된 토기에는) 경제/행정관련 글들밖에 없다는 군요. 종교적이나 왕조를 소개한것이 아니고 경제거래나 행정적인 통치행위를 담은글들만 보인다고 합니다. 예: 일정 품목의 값어치를 은으로 된 단위 몇개라고 쐐기문자로 적은 토기들.
잠깐 들여다보았지만 문득 이게 좌계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고대 시장제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target=_blank>http://etcsl.orinst.ox.ac.uk/
http://www.sumerian.org/
좌계 (2007-05-24 16:23:13)  
/ economet 님.
귀중한 정보 고마 와 같습니다.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