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와 ‘차례’ *** )
“이미 읽으신 분은 다시 안 읽어도 되겠습니다.”
원래 이 글을 올리고, 고구리 사략(유류왕)을 인용함에 있어서, 유류왕과 동명성왕을 혼돈한 구절, 또 솔본 선생님께서 규명한 ‘거발환’의 어원(語源) 규명이 배달화백과 관련, 어떤 가치가 있는가? 또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을 수정(修正) 작업하는 도중, 괴상하게도 ‘수정된 문장’을 집어넣는 ‘작성완료’라는 난(欄)이 있는 부분이 숫제 ‘싹둑’ 잘리고, HTML 문서가 뜨는 사태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나중에 이 글을 다시 읽는 사람들을 위하여 원래의 글을 삭제하고, 새롭게 올리려고 했으나, 역시 중간에서 끊어지는 또다른 이변(異變)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긴 글이어서 이변(異變)이 생겼다고 판단 원래 하나의 글을 나누어서 올리게 됩니다.
원래 하나의 ‘글’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하여
그 안에 있는 내용(內容)을 나열(羅列)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좌계의 글에 vote해주신 분 들게 미안합니다. 그러나 오류(誤謬)가 있는 글을 고치기 위한 방도가 없어서 부득이 취한 것임을 이해바랍니다.)
아래의 긴 ‘차례’를 둔 것은 그 내용을 일별(一瞥: 한번 훑어봄)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나열한 것입니다.
- 이하 ‘차례’ -
상편(上篇)
1. 순방(淳厖)의 의미와 전거(典據)의 중요성.
가. 우민(愚民)뜻과 순방(淳厖)의 현묘성(玄妙性)
나. 전거(典據)의 중요성 -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
(1) 종국(宗國)과 비종국(非宗國)과의 관계
(2) 희흡사표(熙洽四表)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3) 중첩적으로 전개되는 표리(表裏) 관계
2. 순방(淳厖)- 씨스템(system)의 파지(把持)를 위한 질문(質問)들.
가. 소도(蘇塗)에서 화백회의를 주관하는 대로(對盧), 패자(沛者), 배달(倍達)어미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왕(王)을 둘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 양서류(兩棲類)적 삶의 중요성
나. 고구리, 백제, 신라의 왕(王)은 소도(蘇塗)에 대한 영순위(零順位) 투자가(投資家)였다.
다. 왜 삼국(三國) 혹은 오국(五國)은 서로 전쟁을 했나?! - 내전(內戰)을 하지 않고 ‘허물’씻기
(1) 소도국(蘇塗國)과 관경삼국(管境三國)
(2) 소도(蘇塗) 큰길(健吉)과 건길지(健吉支)
(3) ‘허물의 응징’이라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전쟁 - 순방(淳厖) 체제의 현묘성(玄妙 性)
(4) 민란(民亂)의 기록이 없이 장수(長壽)하는 나라의 신비
라. 왕(王)과 ‘왕 턱’의 문제
: 모본제(慕本帝)의 독제는 천독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편(下篇) : 배달화백과 화폐
3. 배달화백(倍達和白)의 재원(財源)은 무엇인가? - 예산(豫算)의 딜레마와 관련
(*) 요순(堯舜)은 아시아의 순방(淳厖) 체제의 지류(支流)- 문명에 불과하다.
: 솔본 선생님의 ‘거발환’의 어원 규명과 관련해서
가. 배달화백(倍達和白)은 어떤 화폐로 ‘말발’로 사용하며, 또 그 재원(財源)은 어찌 형성되는가?
(1) 모든 국가의 세금(稅金)이 ‘배달화백의 재원(財源)’이다.
(2) 배달화백 때 쓰이는 ‘말발’은 호수(湖水) 위에 떠있는 ‘자이로스코프(Gyroscope)’원리를 내재한 연등(蓮燈)
(3) 왜 배달화백의 말발은 곡옥(曲玉)의 형태를 취했나?
나. 고인(賈人)의 화폐와 상인(商人)의 화폐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1) 고인(賈人)의 화폐는 ‘가치 내재성(內在性)’의 속성을 지닌다.
(2) 상인(商人)의 화폐는 ‘가치 외재성(外在性)’의 속성이 있다.
(3) 위조(僞造) 불가능한 상인(商人)의 화폐
- ‘계산(計算)의 도구(道具)’와 ‘영광(榮光)과 위신(威信)의 증표(證票)’에 불과한 화폐
(4) 왜 하필이면 배달화백에 쓰인 화폐는 왜 하필 곡옥(曲玉)의 모양을 취하는가?
가) 곡옥(曲玉)은 자궁(子宮) 안에서 잉태된 생명체의 모습
나) 곡옥(曲玉)은 우주목(宇宙木)의 별(영혼(靈魂))벌레 모습
다) 실제로 육지(陸地)에서 ‘압축하여’ 배달화백을 운영할 때에
‘말발’로 쓰인 곡옥(曲玉)
4. 광개토태왕의 호우(壺杅)와 ‘육지(陸地)에서 압축형’으로 전개되는 ‘배달화백’
가. 육지(陸地)에서의 압축형으로 ‘배달화백’을 할 경우의 가설(假說)
(1) 경주시 노서리 고분의 호우(壺杅)의 명문(銘文)
(2) 호우십(壺杅十)의 의미
(3) 배달화백에서 광개토태왕의 분신(分身)이었던 영광
(4) 고구리 왕가(王家) 아이콘(Icon)인 ‘샵(#)’과 호중록(壺中錄), 투호놀이
나. 현실감을 송두리째 없애는 ‘사실(fact)’로만 구성하는 역사
(1) 광개토태왕의 ‘죽음’을 기념하는 ‘항아리’라는 이상한 ‘발굴보고서’
(2) 태왕(太王)이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았을 때의 경우
5. 왜 압축형 배달화백이 있게 되었나? - 사영지(四靈地) 관련
1) 칠성(七星)의 숫자.
2) ‘사회적 명상’을 뜻하는 우지암(亏知巖)
3) 일곱 개의 바위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긴 홈’이 있는 바위구조
4) 사영지(四靈地)에 대해
6. 상인(商人)의 거래에 반드시 존재하는 주부(主簿) - ‘The king of accounting)
(*** ‘참고’ 및 ‘차례’ 끝. ***)
사천(史穿) 김성겸 님.
최근 남당(南堂) 선생의 유고(遺稿)의 해석이라는 대장정(大長征)의 선두(先頭)를 끄는 사천(史穿) 선생과 ‘정성일 선생’의 글을 읽어보고, 좌계는 “배달화백(倍達和白)에 대한 이야기를 길어도 계속 해서 설명하는 글을 올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남당(南堂) 선생께서 어떤 저본(底本)을 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저본(底本)은 분명히 ‘배달화백’을 바탕으로 한 역사(歷史)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기(神奇)하기 짝이 없는 ‘선왕(仙王)’, ‘선처(仙妻)’의 제도, 또한 난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등등의 표현이 그 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사천(史穿) 김성겸 님.
그래서 , 원래 ‘(*) 이군일민(二君一民)과 “누구를 위한 세뇨리지(seigniorage)인가?” -(A)’로 시작하는 연재 형 긴 글을 쓰다가 잠시 ‘남당 유고 해석’을 돕느라 중지했지만, 계속 짬을 내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연재헝의 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동천왕(東川王)은 관구검과의 전쟁에서 패전했고, 고구리 국법으로 순사(殉死)를 극력 말렸음에도 너도나도 달려들어 순사(殉死)를 해서 시원(柴原)을 이룰 정도였나?!”하는 질문에 대해서 좌계의 응답(應答)이었습니다.
이렇게 긴 연재형의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그 질문에 대한 답(答)을 하려면, 삼국시절 때까지 왕성하게 운영되었던 화백(和白)회의와 신시(神市)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동천왕과 함께하는 ‘순사(殉死) 신드롬’이란 미스테리(mystery)를 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몹시 놀랐던 것은 딱딱하고, 복잡한 이 긴 이야기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가져줄지는 전연 예상치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점 좌계는 지금도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따라서 화백(和白)과 신시(神市)에 대한 이 연재 형 글은 사천(史穿) 선생께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이런 내용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여러 분들에게 보내는 서신(書信)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달화백을 설명하자면, 이것이 워낙 생소(生疎)한 씨스템(system)이고 다른 여러 가지 씨스템(system)과 복잡하게 어울려 있기 때문에, 일단 큰 윤곽이라고나 할까? 배달화백의 저변(低邊)을 편안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습니다.
그래야 “왜 저리 복잡한가?”가 쉽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글 제목을 긴 호흡으로 일단 “순방(淳厖) 체제 - 배달화백의 저변에 대한 이해”로 붙인 것입니다.
다시 지금 연재형 글을 쓰면서, 일단 “화백(和白)-신시(神市)로 한단고기(桓檀古記)등에 묘사하고 있는 이 체제의 이름을 한마디로 줄여서 무엇이라고 칭해야하나?”는 생각을 늘 품고 답답해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신완순’ 선생님께서 순방지치(淳厖之治)의 개념을 유학(儒學)에서 이상정치를 상징하는 ‘요순(堯舜) 시대’와 대비시켜 재(再) 환기(換氣)시키시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신시(神市)-화백(和白) 그리고 경당(扃堂) 교육 씨스템(system) 그리고 ‘벅수군’ 등 복잡하게 얽힌 이 씨스템(system)을 순방(淳厖)체제로 이름 부르는 것이 합당하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순방(淳厖)의 의미와 전거(典據)의 중요성.
가. 우민(愚民)뜻과 순방(淳厖)의 현묘성(玄妙性)
일단 이 순방(淳厖)이란 의미는 의외로 ‘아시아 고대 국제정치’에서 핵심적인 이념(理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노자(老子) 65장에는 “백성을 어리석게 하여야한다.”는 속칭 우민(愚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를 많은 학자들이 “노자(老子)가 피력하는 무위(無爲)의 세계라는 것도 결국 우민(愚民)정치에 불과하다.”는 등의 비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상군서(商君書)를 읽어보면, 고대에 우민(愚民)이란 개념이 ‘우직(愚直)하게 농사짓고, 전쟁이 나면 열심히 싸우는’것이 정확히 보답 받는 사회란 전혀 엉뚱한 개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정치적 흥정을 통해 ‘일확천금’이나 ‘벼락출세’하는 것이 사회적 댓 가를 받도록 해서는 아니된다. 우직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댓가를 받어야 한다.”는 엉뚱한 개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 세계에서도 우직하게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줄을 잘서는’ 기회주의자와 책략가가 득세(得勢)하는 현실과 맞물려 지금도 설득력이 있는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순방(淳厖)이란 말의 순(淳)은 잘 아시다시피 ‘순박(淳朴)함’인데, 아무튼 이런 우민주의(愚民主義) - “기회주의자, 책략가보다 우직한 사람이 보답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방(庬)은 ‘두텁다’라는 뜻인데, 바둑을 둘 때에도 ‘두텁게 두는’ 사람은 상대방의 응수(應手)에 ‘허리가 유연하게’ 대처할수 있는 튼튼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진(秦)의 혹정(酷政)은 ‘법률적 강제’로써 백성의 우직(愚直) 함에 보답하는 사회체제로써 중국대륙을 통일하긴 했으나, 반란(反亂), 혹정에 대한 염증(厭症)이란 간단한 충격 앞에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 ‘얄팍한 체제’였음이 들어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좌계가 대륙삼국설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 ‘수천년 동안’ 대륙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충격을 이겨내는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 좀 엉뚱한 시각이 있음도 숨길 수 없습니다.
아무튼, 아무리 순박(淳朴)한 사회라고 할지라도, ‘돈의 매력’, ‘폭력의 무서움’에 쏘이면 금방 영악한 사람이 판을 치는 사회로 변질되는데, 이런 면에서 보면 순방(淳厖)이란 용어 자체가 현묘(玄妙)한 뜻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 용어를 날카로운 시각으로 발굴해내신 ‘신완순’ 선생님의 안목(眼目)에 고마워할 뿐입니다.
나. 전거(典據)의 중요성 -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
그런데 이 이 순방지치(淳厖之治)가 나오는 전거(典據)는 바로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上篇)인데,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
檀君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得道接化羣生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高矢主種稼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尤作兵馬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해석(解釋) :
단군은 두 손을 모으고 단정(端正)이<檀君端拱>
세상(世上) 앞에 앉아 ‘억지부림’없이 명상하는 것에 의하여 <無爲坐定世界>
현묘(玄妙)한 길을 얻어냈으며<玄妙得道>,
(죽어가는) 무리(=군(群))들과 접(接)하여 살도록 하였다.<接化羣生命>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命彭虞闢土地>,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成造起宮室,>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高矢主種稼>,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臣智造書契>,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奇省設醫藥>,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那乙管版籍>,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卦莁>을 관장케 하고<羲典卦筮>,
우(尤)에겐 병마(兵馬)를 관장하게 하였다.<尤作兵馬>.
비서갑(菲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후(后)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
순방의 다스림<淳厖之治>의 빛이 온 ‘거죽세상’을 두루 적시도록 하였다<熙洽四表>.
이 원문(原文)의 마지막 구절인 ‘淳厖之治 熙洽四表’ - 즉 “ ‘순방(淳厖)의 다스림’의 빛이 온 ‘거죽세상’을 두루 적시도록 하였다.”는 가 특이 중요합니다.
(1) 종국(宗國)과 비종국(非宗國)과의 관계
왜냐?
의외로 아시아 고대 사회에서는 광범위하게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 즉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임금과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임금이 이원화(二元化)되어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흉노(匈奴)는 선우(單于)와 골도후(骨都侯), 오월(吳越)은 왕(王)과 태재(太宰), 초(楚)는 왕(王)과 영윤(令尹)으로 앞의 명칭이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임금의 명칭이고, 뒤의 명칭이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시아-문명의 종국(宗國)인 - 이는 ‘정성일 선생’께서 해석하는 남당(南堂) 유고(遺稿)에 나오는 말임 -고조선(古朝鮮)과 삼한 역시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고조선(古朝鮮)은 상(相)들과 단군(檀君), 삼한(三韓)은 왕(王)과 천군(天君)으로 되어 있어 역시 앞의 명칭이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명칭이고, 뒤의 명칭이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명칭으로 똑같은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問題)는 종국(宗國)과 종국이 아닌 나라 즉 비종국(非宗國)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비종국(非宗國) 경우는 영역을 관장하는 임금의 힘이 소도를 관장하는 임금의 힘이 더 큽니다.
반면 종국(宗國)의 경우는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임금이 영역을 관장하는 임금보다 더 큽니다.
즉 고조선의 경우 단군(檀君)이 여러 지역별로 나뉘어진 상(相)들 보다 더 힘이 크고, 삼한 역시 왕(王)보다 천군(天君)의 힘이 더 큰 것이 들어납니다.
그렇다면, 종국(宗國) 즉 소도(蘇塗)의 임금이 더 우월한 나라와 비종국(非宗國) 즉 영역을 관장하는 임금이 더 힘이 강한 나라와의 상관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이 표리(表裏) 즉 ‘거죽’과 ‘안’의 관계로 보입니다.
즉 종국(宗國)인 삼한(三韓) 사람이거나, 고조선(古朝鮮)사람들이 비종국(非宗國)의 소도(蘇塗)로 흘러 들어가면, 그 비종국(非宗國)은 부유하면서도 강국(强國)으로 변하고, 반대로 비종국(非宗國)의 나라에서 흘러 나가면 상대적으로 가난하면서도 약국(弱國)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2) 희흡사표(熙洽四表)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이는 좌계가 이미 이 곳에 올린 글 “ ‘쌍알’계란(鷄卵) 구조를 띤 삼한(三韓) - 그 파워(power)의 핵심”에 드러나듯이, 이들이 중국대륙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해운국(海運國)으로써 호수(湖水)를 중심으로 한 소도(蘇塗)에서 배(船)로 숙박(宿泊)하면서, 평상시부터 늘 백성들에게 ‘세노리지(seigniorage)’를 확보해주기 위해 최초 원자재(原資材)의 산출지(産出地)와의 교역(交易)을 독점해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비종국(非宗國)은 ‘거죽세상’인 사표(四表)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들어가면, 순방(淳厖) 체제 -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신시(神市), 화백, 경당교육, 벅수군 등등의 특이한 복합된 체제를 운영하는 빛(=희(熙))이 비종국(非宗國)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결국 빈부(貧富)의 격차 등을 줄여서 경제적 혜택도 고루 비추어 거죽세계를 흠뻑 적신다고 볼수 있습니다.
뒤집어서 이야기 한다면, 비종국(非宗國)의 국가들이 소도(蘇塗)를 두는 이유는 이들이 들어와야만, 경제적인 부와 정치적인 안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고등 정치전략이기도 한 것입니다.
(3) 중첩적으로 전개되는 표리(表裏) 관계
이처럼 같은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거죽’과 ‘안’ - 다시 말하여 표(表)와 리(裏)로 보는 관점은 대단히 순방체제(淳厖體制)를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된다고 봅니다.
일단 비종국(非宗國)이 ‘겉’이 되면, 종국(宗國)은 ‘안’이 되고, 이 종국(宗國)은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여러 나라들과 이를 다스리는 왕(王)은 고구리, 백제, 신라는 물론이고 나아가 부여, 왜(倭) 역시 ‘거죽’이 되고, 이 ‘안’에 소도(蘇塗)들이 네트워킹(networking)되어 있는 중첩되어 있는 표리(表裏) 관계의 ‘패라다임’을 상정(想定)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소도(蘇塗)가 대부분이 호수(湖水)였기 때문에 이 소도(蘇塗)의 주인(主人)인 천독(天毒)들은 강(江)을 타고 나와 자유여행, 자유이민함이 아주 용이한 삶의 형식을 지녔던 것입니다.
즉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마한(馬韓) 조(條)에 묘사되어 있듯이 -이는 마한(馬韓)이 성곽이 없었다는 기록을 뜻함 , 따라서 자연 해자(垓字)인 호수(湖水) 안에 숙박(宿泊)하는 것임 - 대표적인 선박(船泊)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현 중국대륙(中國大陸)에 수없이 많은 호수(湖水)에 배(船)를 타고 숙박(宿泊)하며, 강(江)을 타고 언제든지 해외(海外)로 나갈 수 있음은 물론 ‘조로마리 주법’을 익힌 말(馬)을 그 배에 실어 육지에 접안(接岸)될때에도 고도의 기동력을 가짐은 물론, 때로는 ‘열(熱)기구’를 띄워 속칭 ‘용교비행술’로 험한 산(山)도 가볍게 넘는 최대의 기동(機動)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2. 순방(淳厖)- 씨스템(system)의 파지(把持)를 위한 질문(質問)들.
‘오퍼레이셔날 데피니션(operational defini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학술적 작업’을 할 때, 이 작업의 진행상 “이 용어(用語)는 무엇을 뜻한다.”고 정의(定義)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좌계는
“교환시장을 그대로 둔 채 ‘벽옥(璧玉)’으로써 ‘실물화폐’와 ‘국가화폐’를 담보잡아 ‘호혜-거래’를 중심으로한 신시(神市)와 영산화백(靈山和白), 배달화백(倍達和白), ‘벅수군’이란 특이한 군사제도, 경당(扃堂)이란 교육제도 금입택(金入宅)이란 명칭으로 불리워 졌던 은행(銀行)제도 등등을 묶이어 있는 복합(複合)체제를 도대체 무어라고 불러야하나?”
하는 오래된 숙제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신완순’ 선생님께서 요순(堯舜)의 정치와 대비시키는 순방지치(淳厖之治)란 개념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이를 ‘오페레이셔날 데피니션(operational definition)’j으로라도 순방(淳厖)-씨스템(system)로 부르기에 적격(適格)이라 봅니다.
그런데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원문(原文)에서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가 완벽한 대구(對句)로써 이루어진 것을 보면, “어쩌면 옛날에도 순방체제(淳厖體制)로 불렀을런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옵니다.
왜냐?
‘안’이 흘러 들어간 쪽은 저절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 되고, 빠지게 되면 그 반대로 되기 때문에, 이를 희흡사표(熙洽四表) - ‘빛’으로 사물(四物)즉 천하(天下),국(國),가(家),신(身) 흠뻑 적셔주는 현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순방(淳厖) 체제를 설명하다보면, 항상적으로 받는 질문(質問)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質問)이 대부분, 생소(生疎)하고 복잡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체제와의 혼동(混同)을 벗어나서, 명료하게 구분짓기 위한 중요한 질문들임을 좌계는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가. 소도(蘇塗)에서 화백회의를 주관하는 대로(對盧), 패자(沛者), 배달(倍達)어미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왕(王)을 둘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 양서류(兩棲類)적 삶의 중요성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이란 개념을 도입하면서 신시(神市)와 화백(和白)에 대해서 A B C 식으로 나가는 연재형의 이야기를 이 싸이트(site)에 썼을 때, ‘박정길’ 님께서 한 질문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단군- 삼국시대(三國時代)의 명칭은 마지로(=대로(對盧)였음 - 과 패자(沛者), 배달어미등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왕(王)을 둘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경제인류학의 역사를 보면 의외로 ‘돈’으로 물건을 사고팔지 않고, ‘우로보로스’를 틀어서 일반 백성이 권력자인 왕(王)에게 빼앗기지 않고, ‘세노리지(seigniorage)’를 모두 가지는 체제가 인류 역사상에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미 소개했듯이 ‘페르시아’이고, 또 아프리카의 ‘다호메이(Dahomay)’왕국입니다.
문제는 이런 나라들이 한번 망(亡)하면 절대 ‘옛날 체제’를 재건(再建)해 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런 나라들은 신기할 정도로 ‘돈(money)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외부세계에 대해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대항’하면서 폐쇄성(閉鎖性)을 띠고 있고, 적대 국가의 행동에 대한 예측(豫測)을 위해서 막대한 훈련과 정보활동비를 쏟아붓고 있지만, 의외로 예측력(豫測力)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폐쇄성(閉鎖性)을 지니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외부에 있는 나쁜 영향 - 즉 돈(Money)가 만들어내는 나쁜 영향에서 완전히 분리되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체제가 다른 적대세력에 대해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을 - 외교관, 전략가, 간첩들을 육성하고 “적대세력이 어찌 행동하겠는가?”에 대한 정보활동비를 억수로 쏟아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왜 저리 행동하는지? 또 앞으로 어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예측력이 떨어집니다.
그 이유는 ‘돈(money)으로 사고 파는 사회’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豫想) 자체가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측의 순방(淳厖) 체제에서는 ‘돈으로 사고파는 사회’도 경험하고, 또 왕(王)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 자체에서 자연스런 추론(推論)으로서도 충분히 예측(豫測)해내는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즉 고구리, 백제, 신라 왕들은 중국대륙에 있는 봉건주의 왕(王)들이 어떤 정책이나 행동을 했을 때에 금방 “아... 저런 생각이 깔려있군”하고 쉽게 알아채고, 적절히 대응할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일반 백성들도 두 세계에- 이는 화백(和白)민주주의와 봉건제도, 또 ‘교환시장’과 ‘호혜시장’을 뜻함 - 자연스럽게 모두 노출(露出)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면역성(免疫性)이 있음은 물론 ‘자연스런 비교’에 의해 “아무리 봐도 교환시장만 있는 ‘고인(賈人)의 사회’보다는 ‘호혜시장’도 있는 ‘상인(商人)의 사회’가 낳다.”는 강요도지 않는 가치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설혹 순방(淳厖) 체제가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다시 세울수 있고, 또 선박(船泊)을 타고 이들이 중국대륙에서 한동안 떠났어도, “왜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나?!”하는 기다림도 획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세계를 모두 넘나들기 때문에 이를 양서류(兩棲類)적인 삶을 산다고 할수 있는데, 이 양서류(兩棲類)의 가장 좋은 점은 “전략이나 체제유지를 위해 ‘억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억지 없음’을 한자(漢字)로 나타낸 것이 ‘무위(無爲)’인데,
이런 면에서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란 용어가 들어있는 한단고기(桓檀古記)의 해당 문장에서 ‘檀君端拱 (無爲) 坐定世界’ 에 ‘무위’란 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고구리, 백제, 신라, 뿐만 아니라, 부여와 왜(倭)의 왕(王)들은 모두 봉건주의 왕(王)과 똑같은 ‘권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 고구리, 백제, 신라의 왕(王)은 소도(蘇塗)에 대한 영순위(零順位) 투자가(投資家)였다.
이처럼 왕(王)이 봉건주의의 왕(王)들과 ‘똑같은 권력’을 지닐수 있었다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세노리지(seigniorage)’ 즉 세금(稅金)을 거둘 권리인 것임은 당연합니다.
그래야만 군대(軍隊)와 많은 관료들에게 봉급(俸給)을 주고, 국가와 자신을 위해서 충성을 하게 할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그러나 고구리, 백제, 신라 그리고 부여와 왜(倭)의 왕들이 세금(稅金)을 거두는 것은 일반 봉건주의(封建主義) 국가의 왕(王)과는 전혀 다른 ‘쓰임새’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도(蘇塗)를 위해서 투자(投資)하는 엉뚱한 용도인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면 납득이 가겠지만, 이런 소도(蘇塗)에의 투자 없이는 왕(王)의 지위를 세습(世襲)하기도 힘듬이 밝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왕(王)이란 지위(地位)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분량의 벽옥(璧玉)이 확보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정길 님’의 질문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에서 단군만 있으면 되지, 왕(王)을 둘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의 질문이 중요한 것은 순방(淳厖) 체제에서는 왕(王)이 거두는 세금(稅金)이 ‘스페어(spare)’ 소도(蘇塗)에의 투자 재원의 확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동차에는 바퀴가 펑크(punk)날 것을 대비해서 ‘스페어(spare)’ 바퀴를 가지고 다니듯이 순방체제에서의 세금은 소도(蘇塗)에의 ‘예비 투자 원(源)’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王)의 세금이 소도에의 ‘예비 투자 원(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보면, 우리는 남당(南堂)선생의 유고 - 고구리 사략(유류왕)편에 나오는 ‘上曰豈徒臂哉, 渠是我而我是渠也.’이 순방(淳厖)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해석(解釋) :
상(上)이 말씀하시기를 “어찌 (내 수족(手足)에 불과한) 팔만 되겠는가? 온조(溫祚)는 독자적(獨自的)인 보(洑)를 지니면서, 내 논이 마를 때 물을 대는 봇물이요. 나역시 온조의 논이 마를때 물을 대는 봇물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고구리와 백제는 겉으로는 다른 나라이지만, 소도(蘇塗)를 통해서 천독(天毒)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 나라이기 때문에, 유리명왕(瑠璃明王)의 말씀대로 유리명왕(瑠璃明王)과 온조(溫祚)는 서로가 모셔야할 천독(天毒)들에 대한 ‘봇물을 대는 도랑’ 즉 세금을 통해 ‘예비 투자 원(源)’인 사이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다. 왜 삼국(三國) 혹은 오국(五國)은 서로 전쟁을 했나?!
- 내전(內戰)을 하지 않고 ‘허물’씻기
순방(淳厖) 체제의 기이(奇異)함은 ‘고구리, 백제, 신라’라는 삼국(三國) 겉으로는 세 나라이지만, 속으로는 한 나라라는 점입니다.
(1) 소도국(蘇塗國)과 관경삼국(管境三國)
머릿속에 확실한 상(象)을 그리기 쉽게 말하자면, 소도국(蘇塗國)이라는 아시아 최대국가가 소도(蘇塗)를 이어주는 호수(湖水)며 강(江)이며 바닷가에 걸쳐서 있고, 여기에 삼국(三國)이 붙어서 들어섰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는 부여와 왜(倭)까지도 결국 같은 소도(蘇塗)의 큰길(健吉)로써 이어졌기 때문에, 결국 고대 아시아에는 아시아 최대의 국가인 소도국(蘇塗國)아래 오국(五國)이라는 특수국가가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최근 남당(南堂)-유고에 의해 이 소도(蘇塗)-네트워크(network)의 고대 명칭이 ‘석탈해의 고향인’ 용성국(龍城國)으로 밝혀지는 엉뚱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읍니다만....
(2) 소도(蘇塗) 큰길(健吉)과 건길지(健吉支)
이들 왕에 대해서 일반 백성 즉 천독(天毒)들이 건길지(健吉支)라고 불렀다는 북사(北史)의 기록은 호수(湖水)를 이어주는 강(江)과 바다가 ‘큰길(健吉)’이고 이 ‘큰길’을 갈 때 늘 만나는 어른(=지)이란 의미로 ‘큰길 지’ 즉 건길지(健吉支)로 불렀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같은 나라이면서, 이 “세 나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다시피 그토록 자주 싸웠나?”하는 의문을 던질수도 있습니다.
실제 좌계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이 하나의 소도국(蘇塗國)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낼때 마다 늘 받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3) ‘허물의 응징’이라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전쟁 - 순방(淳厖) 체제의 현묘성(玄妙性)
이 질문에 답하기 관경삼국(管境三國)과 그 안에 있는 소도국(蘇塗國)이 ‘거죽’과 ‘안’의 관계 - 다시 말하면 표리(表裏)관계에 있는데, 실제 이런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뱀과 같은 파충류와 ‘게’같은 갑각류입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속살’이 차 오르면, 그 ‘거죽’을 벗겨 내는데 이를 ‘허물’이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허물’이라는 말 자체가 결점, 잘못을 말할 때 흔히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허물’이라는 용어는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체제에서 “왜 삼국이 그토록 싸웠나?”함을 설명함에 있어 적절한 비유로 쓰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우리는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에서 ‘땅’도 이원화(二元化)되어 영역(領域) - 순수한 우리말로는 ‘터전’인 듯 -과 소도(蘇塗)로 -이는 위지(魏志) 동이전 마한(馬韓) 조(條)에 의하면 호수(湖水)와 그 주변의 옥토(沃土)임 - 나눌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역(領域)혹은 ‘터전’은 ‘허물’이 되고, 소도(蘇塗)는 천독(天毒) 입장에서는 ‘이동 가능한 속살’이 되는 것이지요.
즉 백제왕이 잘못하면, 백제의 영역이 있는 속의 소도(蘇塗)에서 - 이는 대부분 호수(湖水)로 이루어져 있다. - 천독(天毒)들이 ‘백제의 대로’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고구리(高句麗)로 들어가 ‘고구리의 대로’를 거쳐 ‘고구리 왕’이 백제의 영역(領域)을 공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백제 왕(王)이 ‘허물’이 많으면, 백제의 천독(天毒)들은 고구리로 들어가 ‘고구리 왕’이 공격하게 해서 그 땅을 점령하게 하는 것입니다.
점령(占領) - 이는 천독(天毒) 입장에서 보아서는 소도(蘇塗)에 ‘강제 투자’를 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좌계의 생각으로는 이 역시 순방(淳厖) 체제의 현묘(玄妙)한 방략(方略)이기도 합니다.
왜냐?
백성 혹은 민중을 탄압하는 정부를 그 ‘안에서 공격하기는 지난(至難)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코 백성들이 정부(政府)보다 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실제 삼국시대(三國時代)때에는 천독(天毒)들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대로(對盧)가 왕(王)보다 권력이 강했다고 좌계는 보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천독(天毒)들끼리 의견이 갈라져서 갈등이 생길 경우,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등이 심해서 “왕(王)을 죽여야한다.”는 의견과 “왕을 지켜야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졌을 경우를 상정(想定)하면 우리는 왜 굳이 영역(領域 : 터전)을 지키는 왕을 따로 두었는지를 금시 알게 됩니다.
즉 백제왕이 문제있을 때 백제의 천독(天毒)들이 같은 백제의 천독들과 내전(內戰)을 하기 보다는 홀연히 신라나 고구리로 빠져나가서 고구리나 신라 왕이 이끄는 군대로써 백제 왕이 관할하는 땅을 공격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때 전쟁을 하는 왕의 군대들은 절대로 소도(蘇塗)의 큰길(健吉)을 빌릴 수는 있으나, 전쟁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격을 당한 백제의 일반 천독(天毒)들은 ‘벅수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전쟁에서 열외(列外)되게 되고, 패전(敗戰)한 나라는 그 ‘허물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삼국이 서로 전쟁을 할 때, 신기하게도 전국가의 힘을 전부 쏟아내는 그런 전쟁의 싸움이 아니라, 왕가(王家)끼리의 소규모 전쟁, ‘허물’ 응징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결국 순방(淳厖) 체제의 영향이라는 것입니다.
(4) 민란(民亂)의 기록이 없이 장수(長壽)하는 나라의 신비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의 특징은 민란(民亂)이 거의 없고, 전쟁의 횟수에 비하면 무시해도 될만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역사 기록 - 봉건주의 제도의 기록은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진압군이 등장하고, 이 진압군이 혁명군에게 패배해서 왕조(王朝)가 바뀐 역사라는 것과는 현격히 대비된 신기한 역사인 것입니다.
순방(淳厖) 체제에서는 사실 민란(民亂)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소도(蘇塗)의 호수(湖水)에서 배를 타고 관경삼국 아무 나라로 들어가서 응징하면 되니깐 말입니다.
라. 왕(王)과 ‘왕 턱’의 문제
- 모본제(慕本帝)의 독제는 천독(天毒)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천(史穿) 김성겸 님.
그런데 화백회의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가끔 받는 특이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왕이 ‘왕 턱(=王橛)’을 잡고, 화백회의에 ‘들어오는 턱’이나 ‘나가는 턱’을 관장(管掌)해서 화백회의의 출입하는 사람을 정선(精選)하는 것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영산화백(靈山和白)이 일반 백성 즉 천독(天毒)들이 주인이 되어서 ‘직접 민주주의’로서 국정(國政)을 운영하는 것이고, 왕(王)은 단지 화백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을 잘 가리는 이른바 ‘수동적(受動的) 권력’을 지닌 자로 생각하였는데, 봉건주의 왕과 똑같이 절대적 명령권을 지닌다면, 이 양자의 갭(gap)과 혼란을 어찌 정리하는가?”인 것입니다.
(참고: ‘왕 턱’이 화백회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은 이 싸이트(site)에 좌계가 ‘(*)[보완]리레이(relay)되고 ‘턱’이 있는 영산화백(靈山和白)-(C)’라는 제목으로 이미 글을 올렸습니다. 기억을 환기시킬 분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왕들은 가장 높은 신하(臣下)에게 자신을 대신(代身)해서 이 ‘왕 턱’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니깐 말입니다.
신라에서는 상대등(上大等)이 왕을 대신해 영산화백의 ‘왕 턱’을 잡았고, 백제는 상좌평(上佐平)이 그리고, 고구리는 태보(太輔)가 이를 잡았으니깐 말입니다.
물론 왕이 직접 나서서 ‘왕 턱’을 잡고, 영산화백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영산화백이 주제(主題)별로 운영이 되는 것이니깐, 아주 중요한 주제(主題)에만 직접 ‘왕 턱’을 잡았겠지요.
그리고 왕이 거둔 세금(稅金)도 기실 절반 이상은 이런 영산화백(靈山和白)의 검토를 거쳐서 집행됨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산화백(靈山和白)과는 별도로 왕이 전권(全權)을 가지는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극(史劇)에서 수없이 보는 봉건주의 식의 회의 방식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영산화백과 어전회의가 겹쳐지고, 민권(民權)과 왕권(王權)이 겹쳐진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겹쳐짐이 있기 때문에,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영산화백의 ‘빈 틈’이나 ‘독자적 영역’에 첨가해서 자유자재로 징세(徵稅)에서 온 힘들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세금(稅金)의 사용이 왕(王)에게는 두갈래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영산화백(靈山和白)의 ‘왕 턱’을 잡는 부분에서의 왕권(王權)은 화백민주주의와 철저히 조화가 되는 부분이어서 ‘세금의 사용’이 왕권이라 할지라도 순방(淳厖) 체제에 종속이 되는 부분이고, 그 ‘위’에 첨가되는 어전(御前)회의 부분은 ‘세금의 사용’이 ‘관료’들에게만 적용(適用)이 되는 별도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금의 사용’이 관료에게만 적용되는 부분에서 생각해보면, 왕의 신하들은 ‘가족’이나 친척에 까지도 충분히 혜택이 돌아가는 ‘높은 보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삼국사기 보장왕 13년(AD 654)년 4월 조(條)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원문(原文)
十三年夏四月 人或言於馬嶺上見神人, 曰, “汝君臣奢侈無道, 敗亡無日,”
해석(解釋)
13년 4월에 혹자가 말하기를 “마령(馬嶺)위에 신인(神人)이 나타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너의 군신(君臣)은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하였다.
당(唐)나라와의 전쟁시기였는데도 이런 평(評)을 들을 정도였으니, 평상시야 오죽하겠는가 하는 느낌을 주는 사료(史料)인 것입니다.
이처럼 고구리를 비롯한 관경삼국의 신하(臣下)들은 놀랍게도 가족과 친척들의 경제를 책임졌기 때문에, 설혹 가혹한 징벌이 있어도, 일반 천독(天毒)들은 “애초에 그 정도의 혜택을 받았으면, 그 정도의 징벌을 받을 각오로 신하(臣下)가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싫으면 평범한 천독(天毒) 생활을 해야지...”하는 느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본제(慕本帝)가 괴상한 독제체제를 실시하긴 했어도, 그 피해가 일반 천독들에게는 오지 않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석인(席人)으로 발탁이 되면, 이 미소년(美少年) 가족은 넉넉히 먹을 수 있고,
설혹 죽음을 당하여도, 일반 천독들은 “그게 실으면 우리처럼 천독(天毒) 생활을 해야지... ”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왕의 독자적인 권력은 영산화백(靈山和白)이 베풀어지는 곳에 들어간 이미 사용된 ‘국가예산’ 위에 첨가적으로 사용되는 세금(稅金)이고, 그 분량은 어마어마했던 것입니다.
즉 유리명왕(瑠璃明王)께서 “온조(溫祚)와 나는 서로 논물이 말랐을 때 ‘봇물’을 대어주는 도랑이다.”라고 했을 때의 봇물은 결국 세금인데, 그 양(量)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3)

“이미 읽으신 분은 다시 안 읽어도 되겠습니다.”
원래 이 글을 올리고, 고구리 사략(유류왕)을 인용함에 있어서, 유류왕과 동명성왕을 혼돈한 구절, 또 솔본 선생님께서 규명한 ‘거발환’의 어원(語源) 규명이 배달화백과 관련, 어떤 가치가 있는가? 또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을 수정(修正) 작업하는 도중, 괴상하게도 ‘수정된 문장’을 집어넣는 ‘작성완료’라는 난(欄)이 있는 부분이 숫제 ‘싹둑’ 잘리고, HTML 문서가 뜨는 사태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나중에 이 글을 다시 읽는 사람들을 위하여 원래의 글을 삭제하고, 새롭게 올리려고 했으나, 역시 중간에서 끊어지는 또다른 이변(異變)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긴 글이어서 이변(異變)이 생겼다고 판단 원래 하나의 글을 나누어서 올리게 됩니다.
원래 하나의 ‘글’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하여
그 안에 있는 내용(內容)을 나열(羅列)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좌계의 글에 vote해주신 분 들게 미안합니다. 그러나 오류(誤謬)가 있는 글을 고치기 위한 방도가 없어서 부득이 취한 것임을 이해바랍니다.)
아래의 긴 ‘차례’를 둔 것은 그 내용을 일별(一瞥: 한번 훑어봄)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나열한 것입니다.
- 이하 ‘차례’ -
상편(上篇)
1. 순방(淳厖)의 의미와 전거(典據)의 중요성.
가. 우민(愚民)뜻과 순방(淳厖)의 현묘성(玄妙性)
나. 전거(典據)의 중요성 -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
(1) 종국(宗國)과 비종국(非宗國)과의 관계
(2) 희흡사표(熙洽四表)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3) 중첩적으로 전개되는 표리(表裏) 관계
2. 순방(淳厖)- 씨스템(system)의 파지(把持)를 위한 질문(質問)들.
가. 소도(蘇塗)에서 화백회의를 주관하는 대로(對盧), 패자(沛者), 배달(倍達)어미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왕(王)을 둘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 양서류(兩棲類)적 삶의 중요성
나. 고구리, 백제, 신라의 왕(王)은 소도(蘇塗)에 대한 영순위(零順位) 투자가(投資家)였다.
다. 왜 삼국(三國) 혹은 오국(五國)은 서로 전쟁을 했나?! - 내전(內戰)을 하지 않고 ‘허물’씻기
(1) 소도국(蘇塗國)과 관경삼국(管境三國)
(2) 소도(蘇塗) 큰길(健吉)과 건길지(健吉支)
(3) ‘허물의 응징’이라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전쟁 - 순방(淳厖) 체제의 현묘성(玄妙 性)
(4) 민란(民亂)의 기록이 없이 장수(長壽)하는 나라의 신비
라. 왕(王)과 ‘왕 턱’의 문제
: 모본제(慕本帝)의 독제는 천독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편(下篇) : 배달화백과 화폐
3. 배달화백(倍達和白)의 재원(財源)은 무엇인가? - 예산(豫算)의 딜레마와 관련
(*) 요순(堯舜)은 아시아의 순방(淳厖) 체제의 지류(支流)- 문명에 불과하다.
: 솔본 선생님의 ‘거발환’의 어원 규명과 관련해서
가. 배달화백(倍達和白)은 어떤 화폐로 ‘말발’로 사용하며, 또 그 재원(財源)은 어찌 형성되는가?
(1) 모든 국가의 세금(稅金)이 ‘배달화백의 재원(財源)’이다.
(2) 배달화백 때 쓰이는 ‘말발’은 호수(湖水) 위에 떠있는 ‘자이로스코프(Gyroscope)’원리를 내재한 연등(蓮燈)
(3) 왜 배달화백의 말발은 곡옥(曲玉)의 형태를 취했나?
나. 고인(賈人)의 화폐와 상인(商人)의 화폐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1) 고인(賈人)의 화폐는 ‘가치 내재성(內在性)’의 속성을 지닌다.
(2) 상인(商人)의 화폐는 ‘가치 외재성(外在性)’의 속성이 있다.
(3) 위조(僞造) 불가능한 상인(商人)의 화폐
- ‘계산(計算)의 도구(道具)’와 ‘영광(榮光)과 위신(威信)의 증표(證票)’에 불과한 화폐
(4) 왜 하필이면 배달화백에 쓰인 화폐는 왜 하필 곡옥(曲玉)의 모양을 취하는가?
가) 곡옥(曲玉)은 자궁(子宮) 안에서 잉태된 생명체의 모습
나) 곡옥(曲玉)은 우주목(宇宙木)의 별(영혼(靈魂))벌레 모습
다) 실제로 육지(陸地)에서 ‘압축하여’ 배달화백을 운영할 때에
‘말발’로 쓰인 곡옥(曲玉)
4. 광개토태왕의 호우(壺杅)와 ‘육지(陸地)에서 압축형’으로 전개되는 ‘배달화백’
가. 육지(陸地)에서의 압축형으로 ‘배달화백’을 할 경우의 가설(假說)
(1) 경주시 노서리 고분의 호우(壺杅)의 명문(銘文)
(2) 호우십(壺杅十)의 의미
(3) 배달화백에서 광개토태왕의 분신(分身)이었던 영광
(4) 고구리 왕가(王家) 아이콘(Icon)인 ‘샵(#)’과 호중록(壺中錄), 투호놀이
나. 현실감을 송두리째 없애는 ‘사실(fact)’로만 구성하는 역사
(1) 광개토태왕의 ‘죽음’을 기념하는 ‘항아리’라는 이상한 ‘발굴보고서’
(2) 태왕(太王)이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았을 때의 경우
5. 왜 압축형 배달화백이 있게 되었나? - 사영지(四靈地) 관련
1) 칠성(七星)의 숫자.
2) ‘사회적 명상’을 뜻하는 우지암(亏知巖)
3) 일곱 개의 바위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긴 홈’이 있는 바위구조
4) 사영지(四靈地)에 대해
6. 상인(商人)의 거래에 반드시 존재하는 주부(主簿) - ‘The king of accounting)
(*** ‘참고’ 및 ‘차례’ 끝. ***)
사천(史穿) 김성겸 님.
최근 남당(南堂) 선생의 유고(遺稿)의 해석이라는 대장정(大長征)의 선두(先頭)를 끄는 사천(史穿) 선생과 ‘정성일 선생’의 글을 읽어보고, 좌계는 “배달화백(倍達和白)에 대한 이야기를 길어도 계속 해서 설명하는 글을 올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남당(南堂) 선생께서 어떤 저본(底本)을 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저본(底本)은 분명히 ‘배달화백’을 바탕으로 한 역사(歷史)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기(神奇)하기 짝이 없는 ‘선왕(仙王)’, ‘선처(仙妻)’의 제도, 또한 난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등등의 표현이 그 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사천(史穿) 김성겸 님.
그래서 , 원래 ‘(*) 이군일민(二君一民)과 “누구를 위한 세뇨리지(seigniorage)인가?” -(A)’로 시작하는 연재 형 긴 글을 쓰다가 잠시 ‘남당 유고 해석’을 돕느라 중지했지만, 계속 짬을 내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연재헝의 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동천왕(東川王)은 관구검과의 전쟁에서 패전했고, 고구리 국법으로 순사(殉死)를 극력 말렸음에도 너도나도 달려들어 순사(殉死)를 해서 시원(柴原)을 이룰 정도였나?!”하는 질문에 대해서 좌계의 응답(應答)이었습니다.
이렇게 긴 연재형의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그 질문에 대한 답(答)을 하려면, 삼국시절 때까지 왕성하게 운영되었던 화백(和白)회의와 신시(神市)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동천왕과 함께하는 ‘순사(殉死) 신드롬’이란 미스테리(mystery)를 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몹시 놀랐던 것은 딱딱하고, 복잡한 이 긴 이야기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가져줄지는 전연 예상치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점 좌계는 지금도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따라서 화백(和白)과 신시(神市)에 대한 이 연재 형 글은 사천(史穿) 선생께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이런 내용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여러 분들에게 보내는 서신(書信)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달화백을 설명하자면, 이것이 워낙 생소(生疎)한 씨스템(system)이고 다른 여러 가지 씨스템(system)과 복잡하게 어울려 있기 때문에, 일단 큰 윤곽이라고나 할까? 배달화백의 저변(低邊)을 편안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습니다.
그래야 “왜 저리 복잡한가?”가 쉽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글 제목을 긴 호흡으로 일단 “순방(淳厖) 체제 - 배달화백의 저변에 대한 이해”로 붙인 것입니다.
다시 지금 연재형 글을 쓰면서, 일단 “화백(和白)-신시(神市)로 한단고기(桓檀古記)등에 묘사하고 있는 이 체제의 이름을 한마디로 줄여서 무엇이라고 칭해야하나?”는 생각을 늘 품고 답답해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신완순’ 선생님께서 순방지치(淳厖之治)의 개념을 유학(儒學)에서 이상정치를 상징하는 ‘요순(堯舜) 시대’와 대비시켜 재(再) 환기(換氣)시키시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신시(神市)-화백(和白) 그리고 경당(扃堂) 교육 씨스템(system) 그리고 ‘벅수군’ 등 복잡하게 얽힌 이 씨스템(system)을 순방(淳厖)체제로 이름 부르는 것이 합당하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순방(淳厖)의 의미와 전거(典據)의 중요성.
가. 우민(愚民)뜻과 순방(淳厖)의 현묘성(玄妙性)
일단 이 순방(淳厖)이란 의미는 의외로 ‘아시아 고대 국제정치’에서 핵심적인 이념(理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노자(老子) 65장에는 “백성을 어리석게 하여야한다.”는 속칭 우민(愚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를 많은 학자들이 “노자(老子)가 피력하는 무위(無爲)의 세계라는 것도 결국 우민(愚民)정치에 불과하다.”는 등의 비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상군서(商君書)를 읽어보면, 고대에 우민(愚民)이란 개념이 ‘우직(愚直)하게 농사짓고, 전쟁이 나면 열심히 싸우는’것이 정확히 보답 받는 사회란 전혀 엉뚱한 개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정치적 흥정을 통해 ‘일확천금’이나 ‘벼락출세’하는 것이 사회적 댓 가를 받도록 해서는 아니된다. 우직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댓가를 받어야 한다.”는 엉뚱한 개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 세계에서도 우직하게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줄을 잘서는’ 기회주의자와 책략가가 득세(得勢)하는 현실과 맞물려 지금도 설득력이 있는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순방(淳厖)이란 말의 순(淳)은 잘 아시다시피 ‘순박(淳朴)함’인데, 아무튼 이런 우민주의(愚民主義) - “기회주의자, 책략가보다 우직한 사람이 보답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방(庬)은 ‘두텁다’라는 뜻인데, 바둑을 둘 때에도 ‘두텁게 두는’ 사람은 상대방의 응수(應手)에 ‘허리가 유연하게’ 대처할수 있는 튼튼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진(秦)의 혹정(酷政)은 ‘법률적 강제’로써 백성의 우직(愚直) 함에 보답하는 사회체제로써 중국대륙을 통일하긴 했으나, 반란(反亂), 혹정에 대한 염증(厭症)이란 간단한 충격 앞에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한 ‘얄팍한 체제’였음이 들어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좌계가 대륙삼국설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 ‘수천년 동안’ 대륙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충격을 이겨내는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 좀 엉뚱한 시각이 있음도 숨길 수 없습니다.
아무튼, 아무리 순박(淳朴)한 사회라고 할지라도, ‘돈의 매력’, ‘폭력의 무서움’에 쏘이면 금방 영악한 사람이 판을 치는 사회로 변질되는데, 이런 면에서 보면 순방(淳厖)이란 용어 자체가 현묘(玄妙)한 뜻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 용어를 날카로운 시각으로 발굴해내신 ‘신완순’ 선생님의 안목(眼目)에 고마워할 뿐입니다.
나. 전거(典據)의 중요성 -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
그런데 이 이 순방지치(淳厖之治)가 나오는 전거(典據)는 바로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上篇)인데,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
檀君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得道接化羣生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高矢主種稼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尤作兵馬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해석(解釋) :
단군은 두 손을 모으고 단정(端正)이<檀君端拱>
세상(世上) 앞에 앉아 ‘억지부림’없이 명상하는 것에 의하여 <無爲坐定世界>
현묘(玄妙)한 길을 얻어냈으며<玄妙得道>,
(죽어가는) 무리(=군(群))들과 접(接)하여 살도록 하였다.<接化羣生命>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命彭虞闢土地>,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成造起宮室,>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高矢主種稼>,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臣智造書契>,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奇省設醫藥>,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那乙管版籍>,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卦莁>을 관장케 하고<羲典卦筮>,
우(尤)에겐 병마(兵馬)를 관장하게 하였다.<尤作兵馬>.
비서갑(菲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후(后)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
순방의 다스림<淳厖之治>의 빛이 온 ‘거죽세상’을 두루 적시도록 하였다<熙洽四表>.
이 원문(原文)의 마지막 구절인 ‘淳厖之治 熙洽四表’ - 즉 “ ‘순방(淳厖)의 다스림’의 빛이 온 ‘거죽세상’을 두루 적시도록 하였다.”는 가 특이 중요합니다.
(1) 종국(宗國)과 비종국(非宗國)과의 관계
왜냐?
의외로 아시아 고대 사회에서는 광범위하게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 즉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임금과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임금이 이원화(二元化)되어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흉노(匈奴)는 선우(單于)와 골도후(骨都侯), 오월(吳越)은 왕(王)과 태재(太宰), 초(楚)는 왕(王)과 영윤(令尹)으로 앞의 명칭이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임금의 명칭이고, 뒤의 명칭이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시아-문명의 종국(宗國)인 - 이는 ‘정성일 선생’께서 해석하는 남당(南堂) 유고(遺稿)에 나오는 말임 -고조선(古朝鮮)과 삼한 역시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고조선(古朝鮮)은 상(相)들과 단군(檀君), 삼한(三韓)은 왕(王)과 천군(天君)으로 되어 있어 역시 앞의 명칭이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명칭이고, 뒤의 명칭이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명칭으로 똑같은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問題)는 종국(宗國)과 종국이 아닌 나라 즉 비종국(非宗國)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비종국(非宗國) 경우는 영역을 관장하는 임금의 힘이 소도를 관장하는 임금의 힘이 더 큽니다.
반면 종국(宗國)의 경우는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임금이 영역을 관장하는 임금보다 더 큽니다.
즉 고조선의 경우 단군(檀君)이 여러 지역별로 나뉘어진 상(相)들 보다 더 힘이 크고, 삼한 역시 왕(王)보다 천군(天君)의 힘이 더 큰 것이 들어납니다.
그렇다면, 종국(宗國) 즉 소도(蘇塗)의 임금이 더 우월한 나라와 비종국(非宗國) 즉 영역을 관장하는 임금이 더 힘이 강한 나라와의 상관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이 표리(表裏) 즉 ‘거죽’과 ‘안’의 관계로 보입니다.
즉 종국(宗國)인 삼한(三韓) 사람이거나, 고조선(古朝鮮)사람들이 비종국(非宗國)의 소도(蘇塗)로 흘러 들어가면, 그 비종국(非宗國)은 부유하면서도 강국(强國)으로 변하고, 반대로 비종국(非宗國)의 나라에서 흘러 나가면 상대적으로 가난하면서도 약국(弱國)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2) 희흡사표(熙洽四表)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이는 좌계가 이미 이 곳에 올린 글 “ ‘쌍알’계란(鷄卵) 구조를 띤 삼한(三韓) - 그 파워(power)의 핵심”에 드러나듯이, 이들이 중국대륙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해운국(海運國)으로써 호수(湖水)를 중심으로 한 소도(蘇塗)에서 배(船)로 숙박(宿泊)하면서, 평상시부터 늘 백성들에게 ‘세노리지(seigniorage)’를 확보해주기 위해 최초 원자재(原資材)의 산출지(産出地)와의 교역(交易)을 독점해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비종국(非宗國)은 ‘거죽세상’인 사표(四表)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들어가면, 순방(淳厖) 체제 -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신시(神市), 화백, 경당교육, 벅수군 등등의 특이한 복합된 체제를 운영하는 빛(=희(熙))이 비종국(非宗國)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결국 빈부(貧富)의 격차 등을 줄여서 경제적 혜택도 고루 비추어 거죽세계를 흠뻑 적신다고 볼수 있습니다.
뒤집어서 이야기 한다면, 비종국(非宗國)의 국가들이 소도(蘇塗)를 두는 이유는 이들이 들어와야만, 경제적인 부와 정치적인 안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고등 정치전략이기도 한 것입니다.
(3) 중첩적으로 전개되는 표리(表裏) 관계
이처럼 같은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거죽’과 ‘안’ - 다시 말하여 표(表)와 리(裏)로 보는 관점은 대단히 순방체제(淳厖體制)를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된다고 봅니다.
일단 비종국(非宗國)이 ‘겉’이 되면, 종국(宗國)은 ‘안’이 되고, 이 종국(宗國)은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여러 나라들과 이를 다스리는 왕(王)은 고구리, 백제, 신라는 물론이고 나아가 부여, 왜(倭) 역시 ‘거죽’이 되고, 이 ‘안’에 소도(蘇塗)들이 네트워킹(networking)되어 있는 중첩되어 있는 표리(表裏) 관계의 ‘패라다임’을 상정(想定)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소도(蘇塗)가 대부분이 호수(湖水)였기 때문에 이 소도(蘇塗)의 주인(主人)인 천독(天毒)들은 강(江)을 타고 나와 자유여행, 자유이민함이 아주 용이한 삶의 형식을 지녔던 것입니다.
즉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마한(馬韓) 조(條)에 묘사되어 있듯이 -이는 마한(馬韓)이 성곽이 없었다는 기록을 뜻함 , 따라서 자연 해자(垓字)인 호수(湖水) 안에 숙박(宿泊)하는 것임 - 대표적인 선박(船泊)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현 중국대륙(中國大陸)에 수없이 많은 호수(湖水)에 배(船)를 타고 숙박(宿泊)하며, 강(江)을 타고 언제든지 해외(海外)로 나갈 수 있음은 물론 ‘조로마리 주법’을 익힌 말(馬)을 그 배에 실어 육지에 접안(接岸)될때에도 고도의 기동력을 가짐은 물론, 때로는 ‘열(熱)기구’를 띄워 속칭 ‘용교비행술’로 험한 산(山)도 가볍게 넘는 최대의 기동(機動)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2. 순방(淳厖)- 씨스템(system)의 파지(把持)를 위한 질문(質問)들.
‘오퍼레이셔날 데피니션(operational defini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학술적 작업’을 할 때, 이 작업의 진행상 “이 용어(用語)는 무엇을 뜻한다.”고 정의(定義)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좌계는
“교환시장을 그대로 둔 채 ‘벽옥(璧玉)’으로써 ‘실물화폐’와 ‘국가화폐’를 담보잡아 ‘호혜-거래’를 중심으로한 신시(神市)와 영산화백(靈山和白), 배달화백(倍達和白), ‘벅수군’이란 특이한 군사제도, 경당(扃堂)이란 교육제도 금입택(金入宅)이란 명칭으로 불리워 졌던 은행(銀行)제도 등등을 묶이어 있는 복합(複合)체제를 도대체 무어라고 불러야하나?”
하는 오래된 숙제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신완순’ 선생님께서 요순(堯舜)의 정치와 대비시키는 순방지치(淳厖之治)란 개념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이를 ‘오페레이셔날 데피니션(operational definition)’j으로라도 순방(淳厖)-씨스템(system)로 부르기에 적격(適格)이라 봅니다.
그런데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원문(原文)에서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가 완벽한 대구(對句)로써 이루어진 것을 보면, “어쩌면 옛날에도 순방체제(淳厖體制)로 불렀을런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옵니다.
왜냐?
‘안’이 흘러 들어간 쪽은 저절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 되고, 빠지게 되면 그 반대로 되기 때문에, 이를 희흡사표(熙洽四表) - ‘빛’으로 사물(四物)즉 천하(天下),국(國),가(家),신(身) 흠뻑 적셔주는 현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순방(淳厖) 체제를 설명하다보면, 항상적으로 받는 질문(質問)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質問)이 대부분, 생소(生疎)하고 복잡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체제와의 혼동(混同)을 벗어나서, 명료하게 구분짓기 위한 중요한 질문들임을 좌계는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가. 소도(蘇塗)에서 화백회의를 주관하는 대로(對盧), 패자(沛者), 배달(倍達)어미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왕(王)을 둘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 양서류(兩棲類)적 삶의 중요성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이란 개념을 도입하면서 신시(神市)와 화백(和白)에 대해서 A B C 식으로 나가는 연재형의 이야기를 이 싸이트(site)에 썼을 때, ‘박정길’ 님께서 한 질문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단군- 삼국시대(三國時代)의 명칭은 마지로(=대로(對盧)였음 - 과 패자(沛者), 배달어미등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왕(王)을 둘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경제인류학의 역사를 보면 의외로 ‘돈’으로 물건을 사고팔지 않고, ‘우로보로스’를 틀어서 일반 백성이 권력자인 왕(王)에게 빼앗기지 않고, ‘세노리지(seigniorage)’를 모두 가지는 체제가 인류 역사상에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미 소개했듯이 ‘페르시아’이고, 또 아프리카의 ‘다호메이(Dahomay)’왕국입니다.
문제는 이런 나라들이 한번 망(亡)하면 절대 ‘옛날 체제’를 재건(再建)해 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런 나라들은 신기할 정도로 ‘돈(money)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외부세계에 대해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대항’하면서 폐쇄성(閉鎖性)을 띠고 있고, 적대 국가의 행동에 대한 예측(豫測)을 위해서 막대한 훈련과 정보활동비를 쏟아붓고 있지만, 의외로 예측력(豫測力)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폐쇄성(閉鎖性)을 지니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외부에 있는 나쁜 영향 - 즉 돈(Money)가 만들어내는 나쁜 영향에서 완전히 분리되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체제가 다른 적대세력에 대해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을 - 외교관, 전략가, 간첩들을 육성하고 “적대세력이 어찌 행동하겠는가?”에 대한 정보활동비를 억수로 쏟아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왜 저리 행동하는지? 또 앞으로 어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예측력이 떨어집니다.
그 이유는 ‘돈(money)으로 사고 파는 사회’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豫想) 자체가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측의 순방(淳厖) 체제에서는 ‘돈으로 사고파는 사회’도 경험하고, 또 왕(王)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 자체에서 자연스런 추론(推論)으로서도 충분히 예측(豫測)해내는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즉 고구리, 백제, 신라 왕들은 중국대륙에 있는 봉건주의 왕(王)들이 어떤 정책이나 행동을 했을 때에 금방 “아... 저런 생각이 깔려있군”하고 쉽게 알아채고, 적절히 대응할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일반 백성들도 두 세계에- 이는 화백(和白)민주주의와 봉건제도, 또 ‘교환시장’과 ‘호혜시장’을 뜻함 - 자연스럽게 모두 노출(露出)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면역성(免疫性)이 있음은 물론 ‘자연스런 비교’에 의해 “아무리 봐도 교환시장만 있는 ‘고인(賈人)의 사회’보다는 ‘호혜시장’도 있는 ‘상인(商人)의 사회’가 낳다.”는 강요도지 않는 가치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설혹 순방(淳厖) 체제가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다시 세울수 있고, 또 선박(船泊)을 타고 이들이 중국대륙에서 한동안 떠났어도, “왜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나?!”하는 기다림도 획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세계를 모두 넘나들기 때문에 이를 양서류(兩棲類)적인 삶을 산다고 할수 있는데, 이 양서류(兩棲類)의 가장 좋은 점은 “전략이나 체제유지를 위해 ‘억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억지 없음’을 한자(漢字)로 나타낸 것이 ‘무위(無爲)’인데,
이런 면에서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란 용어가 들어있는 한단고기(桓檀古記)의 해당 문장에서 ‘檀君端拱 (無爲) 坐定世界’ 에 ‘무위’란 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고구리, 백제, 신라, 뿐만 아니라, 부여와 왜(倭)의 왕(王)들은 모두 봉건주의 왕(王)과 똑같은 ‘권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 고구리, 백제, 신라의 왕(王)은 소도(蘇塗)에 대한 영순위(零順位) 투자가(投資家)였다.
이처럼 왕(王)이 봉건주의의 왕(王)들과 ‘똑같은 권력’을 지닐수 있었다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세노리지(seigniorage)’ 즉 세금(稅金)을 거둘 권리인 것임은 당연합니다.
그래야만 군대(軍隊)와 많은 관료들에게 봉급(俸給)을 주고, 국가와 자신을 위해서 충성을 하게 할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그러나 고구리, 백제, 신라 그리고 부여와 왜(倭)의 왕들이 세금(稅金)을 거두는 것은 일반 봉건주의(封建主義) 국가의 왕(王)과는 전혀 다른 ‘쓰임새’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도(蘇塗)를 위해서 투자(投資)하는 엉뚱한 용도인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면 납득이 가겠지만, 이런 소도(蘇塗)에의 투자 없이는 왕(王)의 지위를 세습(世襲)하기도 힘듬이 밝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왕(王)이란 지위(地位)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분량의 벽옥(璧玉)이 확보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정길 님’의 질문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에서 단군만 있으면 되지, 왕(王)을 둘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의 질문이 중요한 것은 순방(淳厖) 체제에서는 왕(王)이 거두는 세금(稅金)이 ‘스페어(spare)’ 소도(蘇塗)에의 투자 재원의 확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동차에는 바퀴가 펑크(punk)날 것을 대비해서 ‘스페어(spare)’ 바퀴를 가지고 다니듯이 순방체제에서의 세금은 소도(蘇塗)에의 ‘예비 투자 원(源)’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王)의 세금이 소도에의 ‘예비 투자 원(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보면, 우리는 남당(南堂)선생의 유고 - 고구리 사략(유류왕)편에 나오는 ‘上曰豈徒臂哉, 渠是我而我是渠也.’이 순방(淳厖)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해석(解釋) :
상(上)이 말씀하시기를 “어찌 (내 수족(手足)에 불과한) 팔만 되겠는가? 온조(溫祚)는 독자적(獨自的)인 보(洑)를 지니면서, 내 논이 마를 때 물을 대는 봇물이요. 나역시 온조의 논이 마를때 물을 대는 봇물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고구리와 백제는 겉으로는 다른 나라이지만, 소도(蘇塗)를 통해서 천독(天毒)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 나라이기 때문에, 유리명왕(瑠璃明王)의 말씀대로 유리명왕(瑠璃明王)과 온조(溫祚)는 서로가 모셔야할 천독(天毒)들에 대한 ‘봇물을 대는 도랑’ 즉 세금을 통해 ‘예비 투자 원(源)’인 사이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다. 왜 삼국(三國) 혹은 오국(五國)은 서로 전쟁을 했나?!
- 내전(內戰)을 하지 않고 ‘허물’씻기
순방(淳厖) 체제의 기이(奇異)함은 ‘고구리, 백제, 신라’라는 삼국(三國) 겉으로는 세 나라이지만, 속으로는 한 나라라는 점입니다.
(1) 소도국(蘇塗國)과 관경삼국(管境三國)
머릿속에 확실한 상(象)을 그리기 쉽게 말하자면, 소도국(蘇塗國)이라는 아시아 최대국가가 소도(蘇塗)를 이어주는 호수(湖水)며 강(江)이며 바닷가에 걸쳐서 있고, 여기에 삼국(三國)이 붙어서 들어섰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는 부여와 왜(倭)까지도 결국 같은 소도(蘇塗)의 큰길(健吉)로써 이어졌기 때문에, 결국 고대 아시아에는 아시아 최대의 국가인 소도국(蘇塗國)아래 오국(五國)이라는 특수국가가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최근 남당(南堂)-유고에 의해 이 소도(蘇塗)-네트워크(network)의 고대 명칭이 ‘석탈해의 고향인’ 용성국(龍城國)으로 밝혀지는 엉뚱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읍니다만....
(2) 소도(蘇塗) 큰길(健吉)과 건길지(健吉支)
이들 왕에 대해서 일반 백성 즉 천독(天毒)들이 건길지(健吉支)라고 불렀다는 북사(北史)의 기록은 호수(湖水)를 이어주는 강(江)과 바다가 ‘큰길(健吉)’이고 이 ‘큰길’을 갈 때 늘 만나는 어른(=지)이란 의미로 ‘큰길 지’ 즉 건길지(健吉支)로 불렀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같은 나라이면서, 이 “세 나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다시피 그토록 자주 싸웠나?”하는 의문을 던질수도 있습니다.
실제 좌계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이 하나의 소도국(蘇塗國)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낼때 마다 늘 받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3) ‘허물의 응징’이라는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전쟁 - 순방(淳厖) 체제의 현묘성(玄妙性)
이 질문에 답하기 관경삼국(管境三國)과 그 안에 있는 소도국(蘇塗國)이 ‘거죽’과 ‘안’의 관계 - 다시 말하면 표리(表裏)관계에 있는데, 실제 이런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뱀과 같은 파충류와 ‘게’같은 갑각류입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속살’이 차 오르면, 그 ‘거죽’을 벗겨 내는데 이를 ‘허물’이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허물’이라는 말 자체가 결점, 잘못을 말할 때 흔히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허물’이라는 용어는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체제에서 “왜 삼국이 그토록 싸웠나?”함을 설명함에 있어 적절한 비유로 쓰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우리는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에서 ‘땅’도 이원화(二元化)되어 영역(領域) - 순수한 우리말로는 ‘터전’인 듯 -과 소도(蘇塗)로 -이는 위지(魏志) 동이전 마한(馬韓) 조(條)에 의하면 호수(湖水)와 그 주변의 옥토(沃土)임 - 나눌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역(領域)혹은 ‘터전’은 ‘허물’이 되고, 소도(蘇塗)는 천독(天毒) 입장에서는 ‘이동 가능한 속살’이 되는 것이지요.
즉 백제왕이 잘못하면, 백제의 영역이 있는 속의 소도(蘇塗)에서 - 이는 대부분 호수(湖水)로 이루어져 있다. - 천독(天毒)들이 ‘백제의 대로’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고구리(高句麗)로 들어가 ‘고구리의 대로’를 거쳐 ‘고구리 왕’이 백제의 영역(領域)을 공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백제 왕(王)이 ‘허물’이 많으면, 백제의 천독(天毒)들은 고구리로 들어가 ‘고구리 왕’이 공격하게 해서 그 땅을 점령하게 하는 것입니다.
점령(占領) - 이는 천독(天毒) 입장에서 보아서는 소도(蘇塗)에 ‘강제 투자’를 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좌계의 생각으로는 이 역시 순방(淳厖) 체제의 현묘(玄妙)한 방략(方略)이기도 합니다.
왜냐?
백성 혹은 민중을 탄압하는 정부를 그 ‘안에서 공격하기는 지난(至難)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코 백성들이 정부(政府)보다 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실제 삼국시대(三國時代)때에는 천독(天毒)들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대로(對盧)가 왕(王)보다 권력이 강했다고 좌계는 보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천독(天毒)들끼리 의견이 갈라져서 갈등이 생길 경우,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등이 심해서 “왕(王)을 죽여야한다.”는 의견과 “왕을 지켜야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졌을 경우를 상정(想定)하면 우리는 왜 굳이 영역(領域 : 터전)을 지키는 왕을 따로 두었는지를 금시 알게 됩니다.
즉 백제왕이 문제있을 때 백제의 천독(天毒)들이 같은 백제의 천독들과 내전(內戰)을 하기 보다는 홀연히 신라나 고구리로 빠져나가서 고구리나 신라 왕이 이끄는 군대로써 백제 왕이 관할하는 땅을 공격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때 전쟁을 하는 왕의 군대들은 절대로 소도(蘇塗)의 큰길(健吉)을 빌릴 수는 있으나, 전쟁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격을 당한 백제의 일반 천독(天毒)들은 ‘벅수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전쟁에서 열외(列外)되게 되고, 패전(敗戰)한 나라는 그 ‘허물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삼국이 서로 전쟁을 할 때, 신기하게도 전국가의 힘을 전부 쏟아내는 그런 전쟁의 싸움이 아니라, 왕가(王家)끼리의 소규모 전쟁, ‘허물’ 응징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결국 순방(淳厖) 체제의 영향이라는 것입니다.
(4) 민란(民亂)의 기록이 없이 장수(長壽)하는 나라의 신비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의 특징은 민란(民亂)이 거의 없고, 전쟁의 횟수에 비하면 무시해도 될만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역사 기록 - 봉건주의 제도의 기록은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진압군이 등장하고, 이 진압군이 혁명군에게 패배해서 왕조(王朝)가 바뀐 역사라는 것과는 현격히 대비된 신기한 역사인 것입니다.
순방(淳厖) 체제에서는 사실 민란(民亂)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소도(蘇塗)의 호수(湖水)에서 배를 타고 관경삼국 아무 나라로 들어가서 응징하면 되니깐 말입니다.
라. 왕(王)과 ‘왕 턱’의 문제
- 모본제(慕本帝)의 독제는 천독(天毒)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천(史穿) 김성겸 님.
그런데 화백회의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가끔 받는 특이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왕이 ‘왕 턱(=王橛)’을 잡고, 화백회의에 ‘들어오는 턱’이나 ‘나가는 턱’을 관장(管掌)해서 화백회의의 출입하는 사람을 정선(精選)하는 것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영산화백(靈山和白)이 일반 백성 즉 천독(天毒)들이 주인이 되어서 ‘직접 민주주의’로서 국정(國政)을 운영하는 것이고, 왕(王)은 단지 화백회의에 참여하는 사람을 잘 가리는 이른바 ‘수동적(受動的) 권력’을 지닌 자로 생각하였는데, 봉건주의 왕과 똑같이 절대적 명령권을 지닌다면, 이 양자의 갭(gap)과 혼란을 어찌 정리하는가?”인 것입니다.
(참고: ‘왕 턱’이 화백회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은 이 싸이트(site)에 좌계가 ‘(*)[보완]리레이(relay)되고 ‘턱’이 있는 영산화백(靈山和白)-(C)’라는 제목으로 이미 글을 올렸습니다. 기억을 환기시킬 분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왕들은 가장 높은 신하(臣下)에게 자신을 대신(代身)해서 이 ‘왕 턱’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니깐 말입니다.
신라에서는 상대등(上大等)이 왕을 대신해 영산화백의 ‘왕 턱’을 잡았고, 백제는 상좌평(上佐平)이 그리고, 고구리는 태보(太輔)가 이를 잡았으니깐 말입니다.
물론 왕이 직접 나서서 ‘왕 턱’을 잡고, 영산화백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영산화백이 주제(主題)별로 운영이 되는 것이니깐, 아주 중요한 주제(主題)에만 직접 ‘왕 턱’을 잡았겠지요.
그리고 왕이 거둔 세금(稅金)도 기실 절반 이상은 이런 영산화백(靈山和白)의 검토를 거쳐서 집행됨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산화백(靈山和白)과는 별도로 왕이 전권(全權)을 가지는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극(史劇)에서 수없이 보는 봉건주의 식의 회의 방식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영산화백과 어전회의가 겹쳐지고, 민권(民權)과 왕권(王權)이 겹쳐진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겹쳐짐이 있기 때문에,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영산화백의 ‘빈 틈’이나 ‘독자적 영역’에 첨가해서 자유자재로 징세(徵稅)에서 온 힘들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세금(稅金)의 사용이 왕(王)에게는 두갈래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영산화백(靈山和白)의 ‘왕 턱’을 잡는 부분에서의 왕권(王權)은 화백민주주의와 철저히 조화가 되는 부분이어서 ‘세금의 사용’이 왕권이라 할지라도 순방(淳厖) 체제에 종속이 되는 부분이고, 그 ‘위’에 첨가되는 어전(御前)회의 부분은 ‘세금의 사용’이 ‘관료’들에게만 적용(適用)이 되는 별도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금의 사용’이 관료에게만 적용되는 부분에서 생각해보면, 왕의 신하들은 ‘가족’이나 친척에 까지도 충분히 혜택이 돌아가는 ‘높은 보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삼국사기 보장왕 13년(AD 654)년 4월 조(條)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원문(原文)
十三年夏四月 人或言於馬嶺上見神人, 曰, “汝君臣奢侈無道, 敗亡無日,”
해석(解釋)
13년 4월에 혹자가 말하기를 “마령(馬嶺)위에 신인(神人)이 나타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너의 군신(君臣)은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하였다.
당(唐)나라와의 전쟁시기였는데도 이런 평(評)을 들을 정도였으니, 평상시야 오죽하겠는가 하는 느낌을 주는 사료(史料)인 것입니다.
이처럼 고구리를 비롯한 관경삼국의 신하(臣下)들은 놀랍게도 가족과 친척들의 경제를 책임졌기 때문에, 설혹 가혹한 징벌이 있어도, 일반 천독(天毒)들은 “애초에 그 정도의 혜택을 받았으면, 그 정도의 징벌을 받을 각오로 신하(臣下)가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싫으면 평범한 천독(天毒) 생활을 해야지...”하는 느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본제(慕本帝)가 괴상한 독제체제를 실시하긴 했어도, 그 피해가 일반 천독들에게는 오지 않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석인(席人)으로 발탁이 되면, 이 미소년(美少年) 가족은 넉넉히 먹을 수 있고,
설혹 죽음을 당하여도, 일반 천독들은 “그게 실으면 우리처럼 천독(天毒) 생활을 해야지... ”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왕의 독자적인 권력은 영산화백(靈山和白)이 베풀어지는 곳에 들어간 이미 사용된 ‘국가예산’ 위에 첨가적으로 사용되는 세금(稅金)이고, 그 분량은 어마어마했던 것입니다.
즉 유리명왕(瑠璃明王)께서 “온조(溫祚)와 나는 서로 논물이 말랐을 때 ‘봇물’을 대어주는 도랑이다.”라고 했을 때의 봇물은 결국 세금인데, 그 양(量)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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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 65 장>의 해석 노자 65장이 순방(淳厖)-체제의 내용과 유사한데, 그 해석을 ‘우민(愚民)정치’로 잘못해석하기 따문에 그 해석을 올려봅니다. 원문(原文) :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多知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此兩者亦稽式 常知稽式 是爲玄德 玄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 주(注)1) 명민(明民), 지(知), 우(愚)에 대해. :노자 65장에 나오는 지(知, 智)는 권모술수(權謀術數)나 정치적 외교적 책략을 통해 보답을 받을려는 ‘약삭빠른 지식과 지혜’를 뜻하고, 이런 ‘약삭빠른 지혜에의 해 밝은’ 백성을 명민(明民)이라함. 반대로 우(愚)는 ‘어리석음’의 뜻이 아니라, ‘우직(愚直)한 노동이 보답을 받게 하는 것’을 뜻함. * 주(注)2) 국(國) ‘국가(國家)들’을 뜻함. 왜냐하면 한문(漢文)은 단복수(單複數)가 구분이 잘 안되기 때문임. * 주(注)3) 계식(稽式) : 원래 식(式)은 마차(馬車)위에 창(槍=과(戈))를 걸어두는 ‘가로 막대’로써 손잡이를 뜻함. 계(稽)는 ‘계속 두고 비교해보는 기준이 되는 본보기’를 뜻함. 따라서 계식(稽式)은 ‘비교(比較)해서 잡을수 있는 본보기’ 즉 오늘날로 말하면 실천할수 있는 모델(model)을 뜻함. * 주(注)4) 현덕(玄德) : 여기서 덕(德)은 노자(老子)에서 정의(定義)한대로 덕자축야(德者畜也) - “덕(德)이란 것은 축적(蓄積)을 뜻한다.”는 뜻임. 따라서 현덕(玄德)은 ‘현묘(玄妙)한 축적임’ * 주(注)5) 여물반의(與物反矣) : 여기서 물(物)은 ‘사회-공동체’를 뜻함.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사물(四物)-천하(天下),국(國),가(家),신(身)을 뜻함. 반(反)은 반(返) 즉 되돌리는 피드-백(feed-back)을 뜻함. 따라서 여물반의(與物反矣)는 ‘천하(天下),국(國),가(家),신(身)’과 더불어 함께 피드-백(feed-back)되는 것을 뜻함. 해석(解釋) 옛날의 도(道)로 세상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을 ‘약삭빠른 지혜’로 밝어지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우직(愚直)함이 보답받도록’ 하였다.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백성(민중)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그 원인이 백성이 ‘약삭빠른 지혜가 잘 보답 받음을 알기’ 때문이다. <民之難治 以其多知> 그러므로 ‘약삭빠른 지혜’로써 세계경영을 하는 것은 국제정치(國際政治)의 적(賊)이며<故以智治國 國之賊>, 이런 ‘약삭빠른 지혜’의 통용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국제정치의 복(福)이다. <不以智治國 國之福> 이 두 가지는 겹쳐져서(=역(亦)) ‘비교해 보고 운영가능한 본보기’가 된다. <此兩者亦稽式> 항상적으로 이런 ‘비교해 보고 운영가능한 본보기’를 아는 것을 일컬어 ‘현묘(玄妙)한 축적’이라고 한다. <常知稽式 是爲玄德> ‘현묘한 축적’의 수원(水源)이 깊어지고, 그 흐름이 멀리나가면, 천하(天下),국(國),가(家),신(身)을 비롯한 모든 사회-공동체가 피드-백(feed-back)되어 온다. <玄德深矣遠矣 與物反矣> 이런 연후(然後)에 ‘큰 순조(順調)로움’에 도달하게 된다.<然後乃至大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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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는 대표적인 삼한(三韓) 사람 즉 고한국인(古韓國人)입니다.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을 보아도, 오늘날 절강성에 변한(弁韓), 강소성(江蘇省)에 진한(辰韓) 그리고 그 서쪽에 마한(馬韓)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마한(馬韓)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것입니다. 또한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보면, 아주 자세하게 노자(老子)가 한국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대륙 삼국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주로 사학(史學)의 입장에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중국대륙에 있던 고대 우리의 사상가로써 ‘노자(老子)’와 ‘손무(孫武)’를 조명함도 중요하리라 봅니다. 순방지치(淳厖之治) 희흡사표(熙洽四表)의 내용이 노자(老子)의 사상과 직결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노자 65장’의 조명 역시 중요할 듯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