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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婆娑尼師今紀(파사이사금,A.D.126 - A.D.158:재위33년) 1-7년 기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16.
婆娑尼師今紀(파사이사금기)
(A.D.126 - A.D.158:재위33년)

元年 二月 上與惠后 親祀祖廟 大享骨門
원년(A.D.126) 2월 왕과 혜후(惠后:아혜)가 친히 조상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골문(骨門:왕족)에게 크게 대접하였다.

以市老爲伊伐飡 阿休爲稟主
시노(市老)를 이벌찬(伊伐飡: 신라 때의 최고 관리, 진골만이 하는 벼슬로 신라 17관등제와 별도로 제정)으로 삼고 아휴(阿休)를 품주(稟主: 신라 때 재정과 기밀을 맡아보던 관아)로 삼았다.

許婁爲中外軍事 阿明爲軍母
허루(許婁)를 중외군사(中外軍事)로 삼고 아명(阿明)을 군모(軍母)로 삼았다.
≪견해≫ 이벌찬과 품주, 장군(또는 군사)과 군모는 부부사이다.

三月 上與惠后 巡撫京外州郡 發倉賑貧曰 “三皇之世 民無盜賊 而皆自富裕 太君以來 四方多事 民多抵罪 朕深憐之 其除死罪 而原之”
3월 왕과 혜후가 서울 밖의 주군을 돌며 위로하고, 가난한자들에게 창고를 열어 구휼하며 말하기를 “삼황(三皇:삼국유사에 의하면 삼황의 첫째가 남해차차웅이라고 함)이 다스릴 때는 백성들 중에 도적이 없었는데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함으로부터다. 태군(太君:토해이사금)이래로 사방에서 섬기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는데, 많은 백성을 저죄(抵罪:죄의 경중에 따라 알맞게 형벌을 받아 때움)해야 하나, 짐(朕)이 그것을 심히 가엾이 여겨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용서하겠다.”고 하였다.
≪참조문≫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년 기사
2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주군을 순행하여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사형죄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석방토록 하였다.
≪견해≫ 삼황(三皇)은 3명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남해차차웅이 첫째, 유리이사금이 둘째, 탈해이사금이 셋째가 되어야 하나 문맥상 탈해이사금이 탈락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신라본기는 남해차차웅과 자충을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권등성경의 팔린통빙고에 의하면 다른 사람으로 보았다.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7년의 기사에 탈해를 대보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대보라는 직책은 이때가 유일하다. 상장돈장의 계보를 살피면 다파라군이 신라녀를 처로 삼아 토해를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다파라군 역시 신라에서 살았다는 증명이 된다. 남해차차웅 시기의 탈해는 다파라군으로 유리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파라로 떠난 것은 아닐까.

四月 以支所禮爲兵官 使屬中外
4월 지소례(支所禮)를 병관으로 삼아 중외(中外)에 속하게 하였다.

六月 稟主阿休奏曰 “妾兄阿世 乃眞骨精也 神道多艱 被妖受汚 今在自淨 甚可矜願 召宮中 以補權妻” 何如上曰 “阿世女豪也 非許婁則不可” 命爲中外上軍母 使吉 鮑祠
6월 품주 아휴(阿休)가 아뢰어 말하기를 “첩의 언니 아세(阿世)는 진골(眞骨:부모가 왕과 왕비)의 으뜸이다. 신도(神道)에 접응하여 많은 고생을 하고, 요사스러움을 쓰고 더럽힘을 받았으나, 지금은 자정(自淨:스스로 깨끗해짐)하고 있으니 심히 불쌍히 여기어 궁 안으로 불러 권처(權妻:후궁의 한 종류, 배우자를 따로 정하지 아니하며 왕녀들을 관리하는 직책)로 삼기를 청하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말하기를 “아세는 여걸이다. 허루가 아니면 불가하다.”라고 하고 (아세를) 중외상군모(中外上軍母)로 삼고 포사(鮑祠=鮑石祠, 200년 9월 기사 참조)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九月 沙伐副君成公 與伏亥 入朝
9월 사벌(沙伐)의 부군(副君) 성공(成公)이 복해(伏亥)와 함께 입조(入朝)하였다.
≪견해≫ 성공과 복해는 부부 사이다.

行大場 于一善州
일선주(一善州)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견해≫ ‘行大場’이라는 문구는 9월에만 등장한다. 풍년이 든 해에 신(神)에게 감사하는 제사와 축제를 벌였다는 뜻으로 보인다. 한자 해석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문장이다.

十一月 上與惠后史省 入奈歷 護山梯病
11월 왕과 혜후와 사성(史省)이 내력(奈歷)으로 들어와서 산을 지키며 병의 실마리를 잡았다.
≪참조문≫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일(第一) 제사(祭祀)편에 의하면 내력(奈歷)은 진한(辰韓) 6부 가운데 하나인 습비부(習比部:명활산 고야촌)에 있다고 하였다.
大祀 三山 一 奈歷 (習比部) 二 骨火(切也火郡) 三 穴禮(大城郡)

十二月 遣支所禮 問西路將士
12월 지소례(支所禮)를 보내어 서로장사(西路將士)에 관하여 물었다.
≪견해≫ 매년 1월에 대규모의 인사가 있는데, 왕이 내력에 있음으로 인하여 정사(政事)에 관해 물었다는 뜻으로 보인다.

韓那生 許婁子穀公 賜米
한나(韓那)가 허루(許婁)의 아들 곡공(穀公)을 낳았다. 쌀을 내렸다.

二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奈歷
2년(A.D.127) 정월 왕과 혜후가 내력(奈歷)에서 조회를 받았다.

三月 置南北挑 以爲骨仙集場
3월 남도(南挑)와 북도(北挑)를 설치하여, 골선(骨仙)들이 모이는 장소로 하였다.

以許婁爲伊伐飡 阿世爲稟主
허루(許婁)를 이벌찬으로 아세(阿世)를 품주로

以月瓠爲西路軍事 妻以達門 謁長爲朶山城主 妻以彡月
월호(月瓠)를 서로군사(西路軍事)로 하여 달문(達門)을 처로 삼게 하고, 알장(謁長)을 타산성주(朶山城主)로 하여 삼월(彡月)을 처로 삼았다.

五月 月福太子薨 葬以太公禮 太子先神之摩腹子也 好神仙 遊四方神仙 北至勾利 南至海上 得道以歸 以育兩門 有子女八十二 孫不知數 上與惠后爲之幸其宅 仙徒會集者萬衆 上臨問曰 “大父上昇 誰可繼統乎” 太子曰 “吾子皆劣不足 以傳唯齊居 可以統仙” 於是仙統 遂歸齊居
5월 월복(月福)태자가 죽어 태공(太公)례로 장사지냈다. 태자는 선신(先神)의 마복자(摩腹子)다. 신선을 좋아하여 사방의 신선과 유람하였는데 북으로는 구리(勾利)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도(道)를 얻어 돌아왔다. 이로써 양문(兩門)을 기르고 자녀가 82명이고 손자는 몇 명인지 알 수 없다. 왕과 혜후가 그 집을 행차하였는데 선도(仙徒)의 회집(會集:모임)에 많은 백성이 모였다. 왕이 대면하여 말하기를 “대부(大父:월복)가 하늘로 올라가면(죽으면) 누가 이어 통솔하느냐”고 묻자 태자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들은 모두 뒤떨어지니 이로써 제거(齊居)에게 오로지 전달함이 합당하며 신선을 통솔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신선들을 통솔하는 것은 제거에게 돌아갔다.

九月 月瓠與河石等 大破蛙山 燕支出降 抗扶余守卒二百人 扶余卒 皆取河石軍之妻女 致怒於軍 故被禍慘矣
9월 월호(月瓠)와 하석(河石)등이 와산(蛙山)을 대파하였다. 연지(燕支)가 나가서 항복하려는 것을 부여(扶余)의 수비병 200명이 막았다. 부여의 병사들은 모두 하석(河石)군의 병사의 처와 딸을 취하여 분노가 군대에 이르렀다. 이런 까닭으로 입은 재난이 참혹하였다.
≪참조문≫ 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10년, 19년, 20년의 기사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9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20년 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 백제본기 다루왕 39년, 48년, 49년 기사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00명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신라에게 패하였다.
48년 10월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9년 9월 와산성이 신라에게 회복되었다.
≪견해≫ 탈해이사금기에 있는 기록이 섞여있다.

十一月 上與惠后 入奈歷 禱天
11월 왕과 혜후가 내력에 들어와 하늘에 기도하였다.

惠后生女翁君 上洗而名之
혜후가 딸 옹군(翁君)을 낳았다. 왕이 씻겨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견해≫ 왕이 아기를 씻기는 것은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三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高井
3년(A.D.128) 정월 왕과 혜후가 고정(高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三月 許婁請免 不許
3월 허루가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以赤旨爲卞韓兵官 君己爲京都兵官 歸公爲中外兵官 阿世生許婁子倉公 賜米視兒
이 때문에 적지(赤旨)를 변한(卞韓)병관으로 삼고, 군기(君己)를 경도(京都)병관으로 삼고, 귀공(歸公)을 중외(中外)병관으로 삼았다. 아세가 허루의 아들 창공(倉公)을 낳았는데 (왕이)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보았다.
≪견해≫ 귀공과 군기의 계보를 살펴보니 두 사람의 어머니는 한나와 아세로 모두 허루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자식들에게 작위를 내린 것 같다.

五月 上與惠后史省 幸一善州 犒軍 州干克市進 樂浪玉器 于后及史省 史省不受曰 “金玉非寶也 良臣爲寶 汝若愛民忠君 何用玉乎” 克市汗出 惠后聞之曰 “朕爲天子 而德不如史省” 亦却其器
5월 왕과 혜후와 사성이 일선주에 행차하여 군사들에게 음식을 보내어 먹였다. 주간(州干:지방의 벼슬이름) 극시(克市)가 나아가 낙랑의 옥그릇을 혜후와 사성과 바쳤다. 사성이 받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금과 옥은 보배가 아니라 좋은 신하가 보배로다. 네가 만약 백성을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한다면 옥을 진상할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극시가 땀을 흘리며 나갔다. 혜후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짐은 천자다. 덕이 사성과 같지 않다.(혜후는 진골이므로 혜후의 골품은 사성보다 상위임을 나타내는 말)”라고 하며 역시 그 그릇을 물리쳤다.

八月 推火草八等合 加耶兵 欲納良刀 于卞山 吉門迎戰于黃山津口 大破之 虜獲千餘及 進其爵爲波珍飡
8월 추화(推火)와 초팔(草八) 등을 합한 가야(加耶)의 병사가 양도(良刀)를 바치기를 바라며 변산(卞山)으로 왔는데, 길문(吉門)이 황산(黃山)의 나루터 입구에서 만나 전투를 하여 가야의 병사를 크게 깨뜨기고 포로로 잡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작위가 파진찬에 나아갔다.
≪참조문≫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1년 기사
21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
≪견해≫ 다음 9월의 기사에 일지신군의 기사가 나온다. 일성이사금 4년(A.D.195)의 기사의 아도갈문왕 대도(大刀)와 양도(良刀)는 형제이다. 대도가 사망한 것은 124년으로, 대도와 대수갈문왕이 일지갈문왕을 견제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지갈문왕이 가야의 병사들을 부추겼다고 보인다.
九月 上與阿利大母日知神君 會于境上
9월 왕과 아리(阿利)대모와 일지(日知)신군이 국경에서 만났다.
≪견해≫ 아리와 일지는 모자(母子)관계이고, 일지와 파사는 동복(同腹)형제이다. 즉, 파사이사금과 왕위를 다툰 사람은 일성이사금이 아닌 일지신군으로 보인다.

十一月 良刀南奔阿那 加耶奉使請罪
11월 양도(良刀)가 남쪽으로 도망하여 아나(阿那:아라)로 갔다. 가야가 사신을 받들어 죄를 청하였다.
≪견해≫ 양도가 남쪽으로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일지의 청을 파사가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十二月 一直太守 大長神君薨 以白公爲之代 賜其妻宿其 紫色衣 白大馬
12월 일직(一直)태수 대장(大長)신군이 죽었다. 이 때문에 백공(白公)을 대신하게 하였다. 백공의 처 숙기(宿其)에게 자색의 옷과 백대마(白大馬)를 보냈다.

四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南桃 宴太君彡君 於高井
4년(A.D.129) 정월 왕과 혜후가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고정(高井)에서 태군(太君)과 삼군(彡君)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二月 駒令君珍花入朝 修貢
2월 구령군(駒令君) 진화(珍花)가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以許婁子加良爲護城大師 以發良爲京都軍事 甘生爲軍母 乾水爲一善州太守 克市爲推火太守
허루의 자 가량(加良)을 호성대사(護城大師)로, 발량(發良)을 경도군사로, 감생(甘生)을 (경도)군모로, 건수(乾水)를 일선주태수로, 극시(克市)를 추화태수로 삼았다.

三月 許婁爲角干 掌中外兵馬事 阿世爲祖主
3월 허루를 각간(角干)으로 삼아 중외병마사에 관한 일을 맡기고, 아세를 조주(祖主)로

阿名爲大軍母
아명(阿名)을 대군모(大軍母)로

齊居爲伊伐飡 遐利爲稟主
제거(齊居)를 이벌찬으로 삼고, 하리(遐利)를 품주로 삼았다.
≪참조문≫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 상(上)에 보면, 재정(財政)과 기밀(機密)을 담당하는 집사성(執事省)의 명칭이 품주(稟主)와 조주(祖主)로 나온다.

四月 日知神君薨 于卞山 阿利大母 請歸葬 上問於許婁 許之 神君失志 以來沈爵 得疾不起 上痛哀之 葬以尼今禮 入蛇陵門 殉之者甚衆 加良禁之不得
4월 일지신군이 변산(卞山)에서 죽었다. 아리대모가 (제자리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러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루에게 물어 허락하였다. 신군(神君)은 뜻을 잃은 이후로 술잔에 빠져들어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왕이 애통해하며 니금례(尼今禮)로 장사지냈다. 사릉문(蛇陵門)에 들어가 따라죽으려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가량(加良:허루의 아들)이 따라 죽는 것을 막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復以阿利爲太聖 居大井 許婁爲太聖私臣 呼以聖父
아리를 태성(太聖)으로 되돌리고 대정(大井)에서 살게 하고, 허루를 태성사신(太聖私臣)으로 하여 성부(聖父)라고 불렀다.
≪견해≫ 1. 태성(太聖)이라는 직책은 왕의 어머니에게 부여되는 직책으로, 파사의 어머니 아리가 태성의 지위에서 대모라는 직책으로 격하되었다가, 일지갈문왕이 죽음으로 인하여 원래의 직책을 회복하였다는 뜻으로 보인다.
        2. 허루를 태성사신을 칭한 것은 명목상이고, 파사의 아버지 노릇을 하면서 왕에게 ‘성부’라고 존칭되는데, 후에 마제와 길문이 반란의 명목으로 삼았다.

五月 置五路軍事 九州太守 命五路皆娶聖父女爲軍母 以生里妻西路月瓠 干詩妻南路吉文 夂多妻水路歸公 河馬妻北路摩帝 水酒漢鳥 樂浪那嘉 悉直猪治 爲第一藩 覆岩弩乙知 召羅方我 爲第二藩 一直白公 一善乾水 爲第三藩 卞山晉公 推火克市 爲第四蕃
5월 5로군사와 9주태수를 두었다. 5로 모두 성부의 딸에게 장가들도록 명하여 군모로 삼았다. 생리(生里)는 서로 월호(月瓠)의 처로, 간시(干詩)는 남로 길문(吉文)의 처로, 치다(夂多)는 수로 귀공(歸公)의 처로, 하마(河馬)는 북로 마제(摩帝)의 처로 삼게 하였다. 수주(水酒) 한조(漢鳥), 낙랑(樂浪) 나가(那嘉), 실직(悉直) 저치(猪治)는 제1번(藩: 왕의 영토, 변방을 지키는 왕가의 부용국)으로 삼고, 복암(覆岩) 노을지(弩乙知), 소라(召羅) 방아(方我)는 제2번, 일직(一直) 백공(白公), 일선(一善) 건수(乾水)는 제3번으로, 변산(卞山) 진공(晉公), 추화(推火) 극시(克市)는 제4번으로 삼았다.
≪견해≫ 5로 군사라고 하면서 4로밖에 안 보이는 것은 경로군사가 빠졌기 때문이고, 신라의 동서남북 중 동로가 보이지 않고 수로가 대신 나타난다. 동로가 수로가 같은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六月 太聖與聖父阿世 享上及惠后 于夏宅 以聖父宗妻加其 爲五品大母 私妻達元月門 爲三品大母 授紫花大衣 以聖父子加也 爲殿中郞
6월 태성(아리)과 성부(허루)와 아세가 하택(夏宅)에서 왕과 혜후를 위하여 잔치를 하였다. 성부의 종처(宗妻) 가기(加其)는 5품 대모로 삼고, 사처(私妻) 달원(達元)과 월문(月門)은 3품 대모로 삼아 자화대의(紫花大衣)를 주었다. 성부의 아들 가야(加也)는 전중랑(殿中郞)으로 삼았다.

七月 吉門與發良妻甘生 逃歸卞山 初甘生與吉門 有私願 歸于吉門 聖父不許 而妻發良 甘生乃誘干時曰 “我夫骨好 而性柔 汝夫骨賤 而性急我當爲汝易之” 干時年幼 而順良 以其言 告于吉門 吉門大喜 遂與發良 會飮 因其醉 使干時薦之 發良酒醒 而悔之 謝罪于吉門 吉門笑曰 “入枕之花不貪 非丈夫也 旣貪之花 反之非豪傑也 兄妻雖老 與我有私 可以易之” 發良曰 “我旣犯罪 敢不如命 但恐聖父不許” 吉門乃與甘生不告而去 聖父大怒 欲伐吉門 時達門 有寵於聖父 而泣救之 史聖亦止之 乃以干時爲京路軍母 行吉 鮑祠 而命吉門 反甘生 甘生托病不歸自爲吉門妻
7월 길문(吉門)과 발량(發良)의 처 감생(甘生)이 변산(卞山)으로 도망쳤다. 처음에 감생과 길문은 사사로이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 길문에게 시집가기를 원하였다. 성부가 불허하여 발량의 처로 보냈다. 감생이 간시(干時)를 속이어 말하기를 “나의 남편(발량)은 혈통이 좋고(발량의 부모는 혁거세와 알영의 자식임) 성품이 부드러운데 너의 남편(길문)은 핏줄이 천하고 성품이 급하니 나는 마땅히 너와 남편을 바꾸어 주겠다.”라고 하였다. 간시는 나이가 어려서 착하고 어질어, 그 말을 길문에게 알리었다. 길문이 크게 기뻐하며, 발량과 만나서 함께 술을 마셨다. 취기로 인하여 간시를 발량에게 천거하였다(동침하도록 하였다). 발량이 술이 깨자 그것을 후회하며 길문에게 사죄하였다. 길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여자와 동침하는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은 장부가 아니다. 이미 여자와 동침하였으므로 되돌리려 하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형의 처(감생)가 비록 나이가 많으나 나와 더불어 사사로운 감정이 있으니 바꾸는 게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발량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죄를 저질렀다. 감히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 다만 성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 두렵다.”라고 하였다. 이에 길문이 감생과 더불어 알리지 않고 성부에게 갔는데 크게 화를 내어 길문을 베려고 하자 이 당시 달문은 성부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울면서 길문을 구하였다. 사성 또한 길문을 베려는 것을 그치게 하였다. 이에 간시를 경로군모(발량의 처로 삼았다는 뜻)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고, 길문에게 감생을 되돌리도록 하였다. 감생을 병을 핑계로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 길문의 처가 되었다.

聖父奏曰 “臣之子女 特臣之功而荒 亂者願 上治之 無赦” 上曰 “朕之兄弟也 雖亂何妨”
성부가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자식들은 특별한 공로가 없으니, 어지럽힘을 일으키려는 자는 왕께서 다스려 사면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성부의 자식들은) 나의 형제와 다름없다. 비록 어지러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어찌 거리낌이 있겠는가(벌을 할 수 없다).”

八月 行大嘉俳 于觜山
8월 자산(觜山)에서 대가배(추석)를 행하였다.
≪견해≫ 자산(觜山)은 길문의 할머니 이름이다.

以史省爲雌神 行吉 奈乙
이로써 사성을 자신(雌神)으로 삼고, 내을(奈乙)에서 길한 일(즉위식)을 행하였다.
≪견해≫ 자신(雌神)은 황후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十月 樂浪太守那嘉與其妻阿曼 入朝 獻宝弓神器革囊 賜爵大阿飡 以授紫衣
10월 낙랑태수 나가(那嘉)와 처 아만(阿曼)이 입조하여 보궁(宝弓)과 신묘한 그릇과 가죽 주머니를 바쳤다. 대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자색옷을 수여하였다.

五年 正月 上與惠后史省 受朝南桃
5년(A.D.130) 정월 왕과 혜후와 사성이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大光星出自東北 凡二十日 或曰聖人出
2월 대광성(大光星)이 동북쪽에 나타나더니 무릇 20일을 머물렀다. 혹은 성인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참조문≫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3년의 기사
23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견해≫ 이 문장은 자연현상(혜성)과 다음해의 기사인 지마의 탄생기사와 관련 있는 기사이다.

上與惠后史省 禱天 于閼川
왕과 혜후와 사성이 알천(閼川)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견해≫ 혜후에게는 덕공이라는 아들이 있지만, 신라는 부모의 혈통보다도 신(神)이 내린 자손을 더 중요시 하였으므로 이 해에 태어난 자손이 왕의 후계자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서로 자신에게 자손을 갖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을 것이다.

三月 八鏡 多出死魚 命戽扈其水
3월 8개의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서 많은 죽은 물고기가 나타났다. 명하여 그 물을 퍼내도록 하였다.
≪견해≫ 해석하기 난해한 문장이다.

以發良爲伊伐飡 干時爲稟主 弩門爲京都軍事 以聖父女烏羅爲軍母 以屈公子古乙爲護城兵官
발량을 이벌찬으로 삼고 간시를 품주로 삼았다. 노문(弩門)을 경도군사로 삼고 성부의 딸 오라(烏羅)를 군모로 삼았다. 굴공(屈公)의 아들 고을(古乙)을 호성병관으로 삼았다.

四月 大風 大井東門頹壞 上爲之責己不食 惠后沐浴禱天 曰 “責在妾身 願解夫 今須臾風止” 遣支所禮 問民頹戶
4월 큰 바람이 불어 대정의 동문이 기울어져 무너졌다. 왕이 자책하며 식사를 하지 않았다. 혜후가 목욕을 하고 하늘에 기도하며 말하기를 “책임은 나에게 있으며 원하건대 남편을 풀어주시고, 비록 지금 잠깐이라도 바람을 그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지소례를 보내어 백성들의 집이 무너졌는지 묻게 하였다.
≪참조문≫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4년의 기사
24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견해≫ 2월에 대광성이 나타나, 성인(새 임금)이 태어나거나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이 신라 내부에 퍼져서 파사이사금이 곤란해 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五月 惠后生女 難之曰 “妾己衰矣 願以吾女毛多爲聖母 以報上恩” 上曰 “施優在多 何爲母 汝尙豊儁 史省在焉 勿爲遠慮也”
5월 혜후가 딸을 낳으며 그것을 (앞날을)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첩의 몸은 이미 쇠하여 나의 딸 모다(毛多)를 성모로 삼아 주기를 원합니다. 이로써 왕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베풀고 싶은 마음은 많으나 어찌 (성)모로 삼겠는가. 너는 오히려 사성보다 풍성하고 뛰어나니, 먼 앞일을 걱정하지마라.”라고 하였다.
≪견해≫ 혜후의 당시 나이가 48세이므로 더 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으니 대신 자신의 딸을 맞으라는 뜻이다. 대광성의 후광을 입은 아들을 낳지 못하였기에 사성이 아들을 낳는다면 후계자 구도에 밀릴 수 있으므로 자신의 딸로 후사를 이르려는 마음을 나타낸 기사로 보인다.
≪용어≫ 원려(遠慮) : ①먼 앞일까지 미리 잘 헤아려 생각함. ②멀리 떨어져서 근심하거나 걱정함. 또는 그런 근심이나 걱정.

八月 太君以暑疾崩 于日知宅 上與惠后臨泣曰 “父今棄我 何去” 太君曰 “歸侍先今 此願畢矣 骨門無相殘 努來無相欺 知之乎” 上曰 “諾” 太君乃崩 天地晦冥 上痛哀之 以父今禮葬 于壤井陵門 阿孝今堂皆殉之 不能禁 太君足智多謀有 大功于社稷 又喜女色所 畜嬪妾 千有余人生子女七百人 不能盡知 自神以來 初有之事也.
8월 태군(太君)이 더위로 병을 얻어 일지(日知)의 집에서 죽었다. 왕과 혜후가 대면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는 지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하자 태군이 말하기를 “선금(先今)을 모시러 돌아가고자 한다. 이것이 마직막으로 원하는 바이다. 골문(혈육)간에 상잔(相殘:서로 해침)하지 말고 (신라로) 오고자 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속이지 말라. 그것을 명심하라”고 하였다. 왕이 승낙하였다. 태군이 이에 죽었다. 하늘과 땅이 깊은 어둠속에 빠져들었다. 왕이 태군의 죽음을 애통해 하여, 부금례(父今禮, 태왕)로 양정릉에 장사를 지냈다. 아효(阿孝)와 금당(今堂)이 모두 따라 죽었으나 막지 못하였다. 태군은 지혜와 많고 꾀가 있어서 사직(社稷:나라와 조정)에 큰 공이 있었다. 또 여색을 좋아하는 바가 있어 빈첩(嬪妾:임금의 첩)이 천여 명이었고, 자녀가 700명이 다하여 모두를 알지 못하였다. 하늘이 열린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
≪용어≫ 노래(努來) : ①오는 사람을 맞아 수고를 위로함. ②수고를 치사하고 격려함.

九月 以史省毛施納彗爲聖母 行吉 于奈乙
9월 사성과 모시(毛施)와 납혜(納彗)를 성모로 삼아 내을에서 즉위식을 행하였다.

覆岩太守 弩乙知薨 干州革古 請拾骨而葬 許之 吉門請與發良易妻 許之
복암태수 노을지(弩乙知)가 죽었다. 간주(干州) 혁고(革古)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길문이 발량과 처를 바꾸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다.
≪참조문≫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5년 기사
5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견해≫ 복암은 옛날 마한과 백제의 영토였다. 즉 백제와의 접경지역이다. 복암태수가 시신의 수습을 허락받아야 한다는 것은 반란에 가담한 죄인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태수의 경우 그 아들이 세습하는 경우가 많은데 명선으로 교체된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以明宣爲覆岩州太守 妻珥氏
명선(明宣)을 복암주 태수로 삼고 도씨(都氏)를 처로 삼았다.

十月 聖父角干與太聖 巡至一善 慰賜軍士 夂理唐卒 命以海飡禮葬之
10월 성부(허루)각간과 태성이 더불어 순행하여 일선(一善)에 이르러 위로하여 군사를 주었다. 치리(夂理)가 갑자기 죽어 해찬례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견해≫ 일선주의 군사수를 보태 주었다는 것은 이곳의 병력이 반란군 진압에 동원되어 많은 병력이 죽거나 다쳐 부득이 군사를 늘려주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는 뜻으로 복암주와 내분이 있었던 듯하다.

十二月 扶余乘雪 欲取一牟城 不克而退
12월 부여(扶余:백제)가 눈을 타고 일모성(一牟城)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견해≫ 일모성이라는 명칭이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六年 正月 上與惠后及三母 受朝南挑
6년(A.D.131) 정월 왕과 혜후와 삼모(三母)가 남도에서 조회를 받았다.
≪견해≫ 삼모(三母)는 130년 9월의 기사를 참조.

賜骨門長老 宴于其宅 分遣勅使勸酒
골문장로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도록 하여 칙사(勅使:임금의 명령을 받은 신하)를 나누어 보내어 술을 권하였다.
≪견해≫ 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관련하여 골문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일이 집으로 찾아가 술을 보냈다는 의미로 보인다.

達文生許婁子許乙 上賜米見兒
달문(達文)이 허루의 자 허을(許乙)을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보았다.

二月 行月歌會 于春宅 賞歌仙七人
2월 춘택(春宅:봄에 거주하는 별장)에서 월가회(月歌會)를 열어, 가선(歌仙) 7인에게 상을 내렸다.

以聖雪仙童宮公爲奈麻 宮公有寵于善孝大母 以爲首功 而賜爵
성설선동(聖雪仙童) 궁공(宮公)을 내마(奈麻)로 삼았다. 궁공이 선효(善孝)대모에게 총애가 있어 으뜸 공로로 삼아 작위를 내렸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發良爲南路軍事 干詩爲軍母 以車門爲理方大師
3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발량을 남로군사로 간시를 군모로, 차문(車門)을 이방대사로 삼았다.

史省聖母生太子 是爲祇摩 上喜不自勝 與惠后 洗兒終日不離 曰 “此子有龍狀 必興太國家也” 惠后不悅 曰 “吾子德公 何如” 上乃慰惠后 曰 “弟固兄之臣 雖貴 在下吾妻之子 可以奉神 何可同論” 惠后大喜 以酒勸上 不止
사성성모가 태자를 낳았는데 이 분이 지마(祇摩)다. 왕이 기뻐하며 사사로운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혜후와 함께 종일 아이를 씻기며 떼어놓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아기에게 용(임금)의 형상이 있다. 반드시 나라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혜후가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의 아들 덕공(德公)은 어찌 하구요”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혜후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동생은 오로지 형의 신하일 뿐이다. 비록 귀하다고는 하나 나의 처의 아들(덕공)의 아래에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지마가) 신을 섬김이 마땅하다. 어찌하여 같음을 논하는가.”라고 하였다. 혜후가 크게 기뻐하며 왕에게 술을 권함이 그치지 않았다.
≪용어≫ 자승(自勝) : ①자기 스스로 남보다 낫다고 여김. ②사사로운 욕심을 억누름.
≪견해≫ 130년 2월의 기사에 대광성이 나타나면 성인이 나타난다는 믿음이 당시 신라인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사성의 아들 지마가 대광성을 타고나서 형인 덕공을 누르고 왕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四月 以君己爲大城大師 妻以聖父女加西 行吉于鮑祠 許婁與阿世主之
4월 군기(君己)를 대성대사로 삼았다. 성부의 딸 가서(加西)를 군기에게 시집보냈다. 포사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는데, 허루와 아세가 주재하였다.
≪견해≫ 군기는 아세(신공)의 아들, 가서는 허루의 딸이다.

以屈公爲仙老 齊居爲上仙 行法于南桃 會子萬衆
굴공(屈公)을 선로로, 제거(齊居)를 상선으로 삼아 남도에서 행법(行法)을 하였는데 모인 백성이 많았다.
≪용어≫ 행법(行法) : ①사법(四法)의 하나.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하는 수행을 이른다.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 따위이다. ②수행하는 방법.

六月 以聖父爲太上老仙 督中外仙巫事
6월 성부를 태상노군으로 삼고 나라 안팎의 신선과 무속에 관한 일을 살피게 하였다.
≪용어≫ 중외(中外) : ①안과 밖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나라 안팎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③조정(朝廷)과 민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

八月 行大嘉俳 于高井 惠后自績 而示衆
8월 고정에서 대가배(大嘉俳:추석)를 행하였다. 혜후가 몸소 길쌈을 하며 백성들에게 보였다.

聖父正妻山梯大母薨 上親幸弔慰 葬以后禮 聖父痛之曰 “吾妻賢 而訓我 今日富貴 而相棄 何可忍乎” 乃作思妻廟 是爲山宮也
성부의 정처 산제(山梯)대모가 죽었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조문하고 위로했다. 후의 예로 장사지냈다. 성부가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나의 처는 현명하여 나를 가르쳐 현재의 부귀를 이루었는데 함께하기를 버리고 떠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부인을 생각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산궁(山宮)이다.
≪견해≫ 산제(山梯)의 부모는 혁거세와 알영이다. 발량과 백마가 산제의 아들이니 혁거세와 알영의 생몰년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以權妻毛優 妻康造太子 行吉鮑祠
권처 모우(毛優)를 강조(康造)태자에게 시집보내어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十月 以阿世爲聖父正妻 名曰宅主 初太聖自願之 上欲從之 齊居諫之不行
10월 아세(阿世)를 성부의 정처로 삼았다. 택주(宅主)라고 불렀다. 처음에 태성이 스스로 성부의 정처가 되기를 원하여 왕이 따르기를 바랐으나, 제거가 (태성이 성부의 정처가 되는 일을) 간언하지 않았다.

十二月 以康造太子 爲壤井大師 月公爲副師 星門爲都頭
12월 강조(康造)태자를 양정(壤井)대사고 삼고, 월공(月公)을 (양정)부사, 성문(星門)을 (양정)도두로 삼았다.
≪견해≫ 양정은 탈해가 묻힌 곳으로 이 분들은 모두 탈해와 혈족관계라는 뜻이다. 그러나 상장돈장에는 석씨와 관련된 계보가 특히 부실하여 정확한 관계를 알기는 어렵다.

七年 正月 上與惠后 拜玄神 于井中 受朝南桃
7년(A.D.132) 정월 왕과 혜후가 정중(井中)에서 현신(玄神)에게 절하였다. 남도에서 조회를 받았다.
≪견해≫ 132년은 임신(壬申)년인데 임(壬)이 水(물) 또는 黑(검다)의 뜻으로 대치된다.

上巡行六部 至漢祇 見飢民 于途下車 泣之 命改倉廩令 而責其部君
왕이 6부를 돌며 한지(漢祇)에 이르러 굶주린 백성을 보고 도중에 어가에서 내려 눈물을 흘렸다. 창름령(倉廩令)을 고치도록 명하고 한지부 군장의 책임을 묻도록 명하였다.
≪용어≫ 창름(倉廩) : ①=곳집 ②곳집에 저장하여 둔 곡식.

二月 以加良爲京路軍事 君己爲護城大師 允良爲大城大師 以阿世女道失妻加良 爲軍母 以聖父女果老 爲君己妻 使吉 鮑祠
2월 가량(加良)을 경로군사로 삼고, 군기를 호성대사로 삼고, 윤량(允良)을 대성대사로 삼았다. 아세의 딸 도실(道失)을 가량(加良)에게 시집보내어 군모로 삼았다. 성부의 딸 과노(果老)를 군기의 처로 삼아 포사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北路軍事摩帝 爲西路軍事 弩門爲按軍使 巡五路 以備戒器
북로군사 마제를 서로(摩帝)군사로 삼고, 노문(弩門)을 안군사(按軍使)로 삼아 5로를 돌아다니며 대비하고 경계하는 도구로 삼았다.

惠后有病 上爲之不食 命中外仙巫 行禱
혜후가 병이 들어, 왕이 혜후를 위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다. 중외선무에게 명하여 기도하도록 하였다.

以厚理爲聖父密妻 行吉鮑祠
후리(厚理)를 성부의 밀처로 삼고 포사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四月 覆岩君都氏 與其子孟百 入朝
4월 복암군 도씨(都氏)가 그의 아들 맹백(孟百)과 함께 입조(入朝:벼슬아치들이 조정의 조회에 들어가던 일)하였다.

置助比川主 以大盖爲之 古陀耶主 以叔公爲之 加西妻叔公 加亥妻大盖
조비천주(助比川主)를 두어 대개(大盖)로 삼고, 고타야주(古陀耶主)는 숙공(叔公)으로 삼았다. 가서(加西)를 숙공에게 시집보내고, 가해(加亥)는 대개에게 시집보냈다.
≪견해≫ 조비천(助比川)은 백제와의 경계지역인 듯하다.

五月 聖父與太聖 遊卞山
5월 성부와 태성이 변산(卞山)으로 놀러갔다.

加耶遣使獻神鹿 于太聖及聖父
가야가 사신을 보내어 신록(神鹿)을 태성과 성부에게 바쳤다.
≪견해≫ 변산(卞山)이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역임을 확인하는 기사다.

孟百爵大舍 使屬京路
맹백(孟百)에게 대사(大舍)의 작위를 주고 경로에 속하게 하였다.

七月 善孝大母生宮公女流宮公 于沙伐
7월 선효대모가 사벌(沙伐)에서 궁공의 딸 유궁공(流宮公)을 낳았다.

都氏願 以其弟召氏 爲明宣妻 許之
도씨가 그 동생 소씨(召氏)를 명선의 처로 삼아줄 것을 원하여 (왕이)허락하였다.

八月 行嘉排 于南桃
8월 남도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悉直太守猪治卒 以其子奉治代之
실직태수 저치(猪治)가 죽어 그의 아들 봉치(奉治)로 대신하게 하였다.
九月 太聖聖父歸 自卞山
9월 태성과 성부가 변산에서 돌아왔다.

以勢漢爲倉廩令 以備內外之穀
세한(勢漢)을 창름령으로 삼고 이로써 내외의 곡식을 채우게 하였다
≪견해≫ 세한(勢漢)을 열한(熱漢)이라고 표기하는 곳도 있다.

十一月 聖父密妻韓那代母薨 上爲之發哀 葬以太公禮 卞人立其祀 曰大國神
11월 성부의 밀처 한나(韓那)대모가 죽었다. 왕이 한나대모의 죽음을 슬퍼하여, 태공례로 장사지냈다. 변인(卞人)이 사당을 지어 대국신(大國神)이라고 불렀다.
≪견해≫ 한나의 어머니가 알영이다.

以出于爲那靈郡主 赤旨爲一牟城主
출우(出于)를 나령(那靈)군주로 삼고, 적지(赤旨)를 일모(一牟)성주로 삼았다.
≪견해≫ 일모성은 백제와 경계지역이다.

十二月 上宴太聖聖父 于高井
12월 왕이 고정에서 태성과 성부와 잔치를 벌였다.

命支所禮 巡問窮民
지소례에게 명하여 돌아다니며 굶주리는 백성을 살펴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