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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지리지

수경주 다시읽기 습여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8.
[수경]

습여수(濕餘水)는 상곡군(上谷郡) 거용관(居庸闗) 동쪽에서 나온다.

濕餘水出上谷居庸闗東

[주]
闗在沮陽城東南六十里居庸界, 故闗名矣. 更始使者入上谷, 耿况迎之于居庸闗, 即是闗也. 其水導源闗山, 南流歴故闗下, 溪之東岸, 有石室三層, 其户牖扇扉悉石也, 盖故闗之候臺矣. 南則絶谷, 累石為闗垣, 崇墉峻壁, 非輕功可舉. 山岫層深, 側道褊狹, 林鄣邃險, 路才容軌. 曉禽暮獸, 寒鳴相和, 羇官逰子, 聆之者莫不傷思矣. 其水厯山南, 逕軍都縣界, 又謂之軍都闗. 續漢書曰, 尚書盧植隠上谷軍都山, 是也. 其水南流出闗, 謂之下口, 水流潜伏十許里也.
거용관은 저양성(沮陽城) 동남쪽 60리의 거용현(居庸縣) 경계에 있는데 옛날 관(闗)의 이름이다. 후한(後漢)의 경시제(更始帝)의 사자(使者)가 상곡에 들어갔는데 경황(耿况)이 그를 거용관(居庸闗)에서 맞이하였는데 곧 이곳이다. 습여수는 관산(闗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옛 관(闗) 아래를 지나는데 시냇물(溪)의 동쪽 언덕(岸)에는 3층의 석실(石室)이 있다. 그 석실(户)의 창과 사립문과 문들은 모두 돌인데 모두 옛 관(闗)의 후대(候臺, 망대?)이다. 남쪽은 곧 골짜기로 끊겼고 여러 돌들로 관(闗)의 담을 쌓았으며, 높은 담은 벼랑과 같이 험준하니 가벼운 공으로는 쌓지 못하였을 것이다. 산봉우리는 높아 골짜기가 깊으므로 옆 길이 좁디 좁으며 숲이 담처럼 가로막아 깊고 험준하니 길은 겨우 수레가 지날만하다. 새벽에 날짐승과 날 저물 땐 들짐승이 차갑게 울어 서로 조화를 이루니 노니는 나그네가 그것을 들으면 옛날의 상처를 생각하게 된다. 그 강(습여수)은 산(관산) 남쪽을 지나 (상곡군) 군도현(軍都縣)의 경계를 거치는데 또 이르기를 군도관(軍都闗)이라 한다. 속한서(續漢書)에서 말하기를 ‘상서(尚書)에 로식(盧植)이 상곡(上谷) 군도산(軍都山)에 숨었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이다. 그 물(습여수)는 남쪽으로 군도관(出闗)을 흐르는데 하구(下口)라 한다. 물이 자맥질하고 숨고 하기를 10여리 정도이다.

[수경]

동쪽으로 흘러 군도현(軍都縣) 남쪽을 지나, 또한 동쪽으로 흘러 계현(薊縣) 북쪽을 지난다.

東流過軍都縣南, 又東流過薊縣北.

[주]
濕餘水故瀆東逕軍都縣故城南, 又東, 重源潜發, 積而為潭, 謂之濕餘潭. 又東流, 易荆水注之, 其水導源西北千蓼泉, 亦曰丁蓼水. 東南流逕郁山西, 謂之易荆水. 公孫瓉之敗于鮑丘也, 走保易荆, 疑阻此水也. 易荆水又東左合虎眼泉水, 出平川, 東南流入易荆水, 又東南與孤山之水合. 水發川左, 導源孤山, 東南流入易荆水, 謂之塔界水. 又東逕薊城, 又東逕昌平縣故城南, 又謂之昌平水. 魏土地記曰薊城東北百四十里有昌平城, 城西有昌平河. 又東流注濕餘水. 濕餘水又東南流, 左合芹城水. 水出北山, 南逕芹城, 東南流注濕餘水. 濕餘水又東南流, 逕安樂故城西, 更始使謁者韓鴻北徇, 承制拜呉漢為安樂令, 即此城也.
습여수(濕餘水) 즉 도랑(수준)으로 동쪽으로 군도현(軍都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또한 동쪽에서 다른 발원지가 있어 자맥질하여 물이 쌓여 못을 이루는데 그것을 습여담(濕餘潭)이라 한다. (습여수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역형수(易荆水)가 습여수(之)로 들어간다. 그 물(역형수)은 서북쪽 천료천(千蓼泉)에서 발원하는데 (역형수는) 또한 정료수(丁蓼水)라고도 한다. (정료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욱산(郁山) 서쪽을 지나는데 그것을(욱산 서쪽을 지난 정료수를) 역형수(易荆水)수라고 한다. 공손찬(公孫瓉)이 포구(鮑丘)에서 패하여 역형(易荆)으로 달아나 보존하였는데 아마도 이 강이 아닌가 한다. 역형수(易荆水) 또한 동쪽 즉 왼쪽에서 호안천수(虎眼泉水)와 합하여지는데 (호안천수는) 평천(平川)을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역형수로 들어간다. 또한 (이 때에) 동남쪽에서 고산수(孤山水)와도 합하여진다. 평천(川) 왼쪽에서 발(發)하는 물은 발원(導源)가 고산(孤山)인데 동남쪽으로 흘러 역형수(易荆水)로 들어가니 이름은 탑계수(塔界水)이다. 또한 동쪽으로 계성(薊城)을 지나고 또한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나는 물을 창평수(昌平水)라고 한다. 위씨토지기(魏土地記)에서 말하기를 계성(薊城) 동북쪽 140리에 창평성(昌平城)이 있는데 창평성 서쪽으로 창평하(昌平河)가 있다. (창평하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습여수(濕餘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창평수와 합하여진 후에) 습여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근성수(芹城水)와 합하여지는데 (근성수는) 북산(北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근성(芹城)을 거쳐 동남쪽으로 흘러 습여수로 들어간다. 습여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안락(安樂) 옛 성의 서쪽을 거친다. 경시제(更始帝)가 알자(謁者)인 한홍(韓鴻)으로 하여금 북쪽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承制拜 오한(呉漢)은 안락령(安樂令)이 되었는데 바로 이 성이다.

[수경]

또 북쪽으로 굽어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어양군 호노현(狐奴縣)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又北屈, 東南至狐奴縣, 西入于沽河.

[주]
昔彭寵使狐奴令王梁, 南助光武起兵, 自是縣矣. 濕餘水于縣西南, 東入沽河. 故地理志曰, 濕餘水自軍都縣東, 至潞, 南入沽, 是也.
옛날 팽총(彭寵)이 호노령(狐奴令) 왕량(王梁)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광무제가 병사를 일으키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이 호노현에서 시작한 것이다. 습여수(濕餘水)는 호노현 서남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그래서 지리지에 말하기를 습여수(濕餘水)는 군도현(軍都縣) 동쪽으로부터 로하(潞河)에 이르러 남쪽으로 고하(沽河)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 올바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