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남당유고 백제왕기(p19-p29) 구지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고이왕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5.

仇知王(구지왕)


휘는 ‘백고’이고, 기루왕의 7째 아들이고, 개루왕의 다른 어머니 동생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성스러운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공경하고 추모하여 말하기를 “구대왕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개루왕때 같은 어머니 동생들이 모두 특별히 임금의 은총을 입었으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백성의)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개루왕이 깊은 질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러 왕비 사씨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동생들이 비록 많다고 하나 오직 백고가 가장 현명하니 내가 죽으면 너의 자식들은 모두 어리므로, 만약 모든 동생들이 왕위를 얻고자 하면 너의 자식들이 반드시 불리해질 것이므로, 백고를 맞이하여 너의 남편으로 잇는 것보다 못하다” 사씨가 이내 이 때문에 한 밤중에 은밀히 궁중을 바쳤다(백고와 성적교합을 하였다는 말). 이날 밤에 눈이 와서 사람의 키를 넘었는데 모든 왕의 동생들이 (이런 사실을) 모두 알지 못했다.
諱伯古 己婁王第七子 而盖婁王之異母弟也. 寬仁有聖德 國人敬慕之曰 “仇臺王復來矣” 時盖婁王同母弟皆特寵 擅威不得人心. 盖婁王深疾之臨崩謂其后沙氏曰 “吾弟雖多唯伯古最賢 吾死而汝子皆幼 若諸弟得志必不利於汝子 未若迎伯古以爲汝繼夫” 沙氏乃以深夜密納宮中是夜雪深丈餘 諸王弟皆不能知.

元年 戊辰 十二月 以沙氏爲后立 母屹氏爲太后 王潛邸時納舍人賈杞妻苩氏 生子仁及女苩花 甚有寵至是命復歸賈杞 命杞子其子女.
원년(A.D.188) 무진 12월 사씨를 후로 세우고, 어머니 흘씨를 태후로 삼았다. 왕이 사저에 숨어 있을 때 관청에 있는 사람 ‘가기’가 처 백씨를 바쳐 아들 인과 딸 백화를 낳았는데 왕의 은총이 깊어 ‘가기’에게 되돌아가도록 명했고, ‘가기’의 자식을 왕의 자식으로 명했다.(‘가기’의 처 ‘백씨’는 ‘가기’에게 돌려주었지만 왕의 아들 ‘인’과 딸 ‘백화’는 다시 왕의 자식으로 삼았다는 뜻임)

二年 己巳 二月 遣使于新羅. 遼東太守公孫度王譴使請和 王亦遣胞弟大知獻方物.
2년(A.D.189) 기사 2월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요동태수 공손도왕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왕 또한 같은 어머니 동생 ‘대지’를 보내어 방물(특산품)을 바쳤다.

三年 庚午 三月 公孫度王以女宝婁歸王曰 “聞王未有室家 故敢以賤息往 奉巾櫛 幸勿棄焉” 王乃以白馬三雙爲幣以娶焉. 十月 王助遼富山之軍大獲捷利.
3년(A.D.190) 경오 3월 공손도왕이 딸 보루를 시집보내며 말하기를 “듣기로는 왕이 가정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런 까닭에 감히 천한 자식을 보내오니 아내로 삼고 행여나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왕이 이내 백마 3쌍을 폐물로 삼고 장가들었다. 10월 왕이 요의 부산의 군대를 도와 많은 전리품을 얻고 승리하였다.
= 巾櫛 : 여자가 아내나 첩이됨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四年 辛未 四月 獵于漢山.
4년(A.D.191) 신미 4월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五年 壬申 二月 築北漢山以備高句麗. 八月 新羅王逸聖立 遣使來貢.
5년(A.D.192) 임신 2월 북한산(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에 대비하였다. 8월 신라왕 일성이 섰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七年 甲戌 二月 王后沙氏崩 王請婚于新羅. 七月 新羅以近宗女勿氏歸我 勿氏母乃新羅先王祗摩之女密華夫人也. 其容色秀於國中 勿氏亦色之尤者 王大喜之厚待其使小光而歸.
7년(A.D.194) 갑술 2월 왕후 사씨가 죽었다. 왕이 신라에 혼인을 청하였다. 7월 신라가 가까운 왕의 종실의 딸 물씨를 우리에게 시집보냈다. 물씨의 어머니는 신라의 선왕 지마의 딸 밀화부인이다. (밀화부인은) 그 얼굴과 얼굴빛이 나라(신라)에서 뛰어났고 물씨 역시 얼굴빛이 더욱 뛰어났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 사신 ‘소광’을 후대하여 보냈다.

十年 丁丑 五月 麗延優逐其兄而獲其嫂 公孫度王欲問罪命我出兵 王謝仁祖之國不忍相殘 公孫度王不悅. 十月勿氏生王子餘勿 遣使新羅告慶新羅以勿氏胞兄吉宣來賀獻物 王以私女苩花妻吉宣 苩花年才十一 未能當夕 王使其母苩氏當之吉宣乃率其母女而歸 苩氏夫賈杞爲心疾而死 人皆憐之.
10년(A.D.197) 정축 5월 고구려의 연우가 그 형(발기)을 내쫓고 그 형수(우씨)를 얻었다(고구려사초가 없으면 엉뚱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공손도왕이 죄를 묻고자 우리에게 군대를 출병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왕이 같은 조상의 나라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군대를 출병하지 않음을) 사죄하였다. 공손도왕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10월 물씨가 왕자 여물을 낳았다.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어 기쁜 일을 알렸다. 신라는 물씨의 같은 어머니의 오빠 길선을 보내어 축하하고 선물을 보냈다. 왕이 사저에 있을 때 낳은 딸 백화를 길선의 처로 주었다. 백화는 이제 나이 11세로 아직 밤일을 할 수 없었다. 왕이 그 어머니 백씨를 시켜서 길선의 짝을 지워주었는데 이내 그 모녀를 데리고 (신라로) 돌아갔다. 백씨의 남편 ‘가기’가 마음에 병이 생겨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게 생각하였다.

十七年 甲申 九月 公孫度王薨 太子康立 王遣使弔慰之.
17년(A.D.204) 갑신 9월 공손도 왕이 죽었다. 태자 공손강이 섰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위로했다.

二十二年 乙丑 十月 麗延優移都丸都 卑詞請和 王畏公孫康王 不敢顯待 而令太子苩仁密待其使於境上 以送之.
22년(A.D.209) 을축 10월 고구려왕 연우가 환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아랫사람(직급이 낮은 사람)을 보내어 알리며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공손강 왕을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내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태자 백인에게 명하여 그 사신을 은밀히 국경에서 기다렸다가 이로써 돌려보냈다.

二十四年 辛卯 七月 吉宣以其妹勿氏年過三十 而多産子女色漸褪?耗 請以其女田氏媵之 王大喜納之 田氏母彭田領來館于龜宮 王密諧?龜宮不能待期而先通 田氏皃似勿氏 而尤美 王沈惑之 乃拜吉宣爲佐平 彭田爲國夫人 賜以莊園奴婢 如王子例 彭田亦有色 而善媚 王兼通之時人多惜之曰 “吾王之好色也 何易卵 而換母邪盖” 以苩花母女易田氏母女故也 田氏年才十五 而頗之政事.
24년(A.D.211) 신묘 7월 길선이 그 여동생 물씨가 나이가 30살이 넘어 자녀를 많이 낳아 점점 (얼굴이) 바래고, 감소하였으므로 길선의 딸 전씨를 보내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전씨를 받아들었는데 전씨의 어머니 팽전이 (전씨를) 거느리고 구궁의 객사에 왔다. 왕이 은밀히 구궁에서 만나서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통정을 하였다. 전씨의 얼굴이 물씨와 비슷하여 더욱 아름다웠는데 왕이 깊이 매혹되었다.
이에 길선에게 벼슬을 내리어 좌평으로 삼고, 행전을 국부인으로 삼았다. 장원(귀족의 사유지)과 노비를 내리고 왕자의 예우로 대하였다. 팽전 역시 색기가 있고 아첨을 잘하였다. 왕이 (전씨 모녀를) 겸하여 통정하였을 때 (나라) 사람들이 다 애석해 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 왕은 여자를 밝힌다. 어찌하여 여자(卵)를 바꾸는가. 어머니를 바꿈으로써 그릇됨을 덮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백화모녀와 전씨 모녀를 바꾼 까닭이다. 전씨는 나이 겨우 15세이지만 정사에 자못 밝았다.

二十五年 壬辰 二月 羅王逸聖薨 王遣弟古尸弔之 送賻如例.
25년(A.D.212) 임진 2월 신라왕 일성이 죽었다. 왕이 동생 고시를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과거의) 예와 같이 부의를 보냈다.

二十七年 甲午 四月 田氏生王子素古 王酷愛之欲立爲太子 重用龜宮屬.
27년(A.D.214) 갑오 4월 전씨가 왕자 소고를 낳았다. 왕이 소고를 심하게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기를 바랐다. 구궁을 중용하고 (구궁에서) 돌보게 하였다.

三十年 丁酉 三月 公孫康王始稱帶方王更 以其妹宝皐媵之 時朝廷頗用漢人多 依遼東王 以此重宝婁宝皐 而無子.
30년(A.D.217) 정유 3월 공손강 왕이 대방왕이라고 바꾸어 칭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그 여동생 보고를 왕에게 시집보냈다. 이때 조정에는 한인을 등용함이 자못 많았는데 (한인들이) 요동왕에게 의지하였다. 이 때문에 보루와 보고를 중히 하였는데 (보루와 보고) 아들이 없었다.

三十四年 辛丑 七月 帶方王康薨 弟恭立 以康子晃質于漢王 遣使弔問之.
34년(A.D.221) 신축 7월 대방왕 공손강이 죽어 동생 공손공이 섰다. 이 때문에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이 한왕 (헌제)에게 따져 물었다. 사신을 보내어 조문을 했다.

三十五年 壬寅 二月 正妃宝婁夫人薨 春秋五十也 后性淸雅容皃端正 御衆以仁 待嬪妾爾 未嘗有妬色 而常恨無子 臨終謂宝皐曰 “吾死爲汝求佳子矣” 王聞之盖悲 葬于烏坂.
35년(A.D.222) 임인 2월 정비(정실 왕비를 후궁에 비하여 부르는 말) 보루부인이 죽었는데 춘추 50세였다. 왕후의 성품은 청아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무리를  다스림에 어질고, 빈과 첩을 덕행으로 대하고, 일찍이 색을 시샘함이 없으며 항상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임종에 이르러 (동생) 보고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너를 위하여 좋은 자식을 구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슬픔을 덮고 오판에서 장사를 지냈다.

三十六年 癸卯 二月 以吉宣爲上佐平 委以軍事 吉宣以其妹女歸我 而置大宅妻妾于兩國往來 不常羅新君疑之不重用 吉宣自以爲祗摩之孫 當王頗有不軌心 王戒之曰 “王者天命也 非人力可求 勿妄動可也” 然終爲田氏所力勸(勸力?)委之 印路軍事 吉宣大喜以歸.
36년(A.D.223) 계묘 2월 길선을 상좌평으로 삼고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길선이 그 여동생과 딸 때문에 우리에게 돌아왔는데 큰 저택에 처첩을 두고 양국을 왕래하였다. 신라의 새로운 왕이 때때로 길선을 의심하여 중용하지 아니하였다. 길선 스스로 지마의 손자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의 왕에게 자못 불궤(역모)한 마음이 있었다. 왕이 길선의 신라왕에 대한 역모의 마음을 경계하며 말하기를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얻을 것이 아니므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씨에게 동로군에 관한 일을 길선에게 맡기도록 권하였다. 길선이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三十八年 乙巳 十月 吉宣事敗而逃歸 羅王求之 王答之曰 "爲臣不忠 固可罪矣 而其女爲小國內君 幸爲小國貸其一命” 羅王恕不聽 遣其將大解 來侵不利而還.
38년(A.D.225) 을사 10월 길선의 일이 실패하여 도망하여 돌아왔다. 신라왕이 길선을 (보내주기를) 청하자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지 아니함은 마땅히 죄가 있다. 길선의 딸이 소국(백제)의 내군(왕후)이니 소국(백제)은 그 명령을 관대히 처분하기를 바란다.” 신라왕이 사과를 듣지 아니하고 신라의 장수 대해를 보내어 침략하였는데 불리하여 돌아갔다.

三十九年 丙午 五月 上佐平吉宣卒 年五十五 王痛哀之 以太公禮葬之 吉宣子彭宣田氏之兄也 王以苩花妻彭宣 彭宣言苩花與其兄苩仁密通 薄於臣王命苩仁 出監北漢軍 苩仁曰 “父王惑於田氏 而薄於子弟” 王弟古尸聞之密告於田氏曰 “諸王子欲與苩仁作亂” 田氏曰 “且將奈何” 古尸曰 “事急矣 不如矯詔發兵 以先制之” 田氏乃出密符與之令 行內外軍事古尸 乃逼王幽於深宮 立素古爲新王 以號令天下 古尸者王之庶弟也其母嘗與王潛通 密告宮中秘事 頗有力於王 故王亦愛古尸如己子 古尸年少 而美密與田氏相通 而生子素大 常恐王知 至是苩仁等 欲發其事故古尸先其捕之 苩仁知計違 而奔于末曷 古尸乃與田氏專政 王憂憤而薨 春秋七十二 王以聖君 早有治平之各 而只好內事 而不檢閨門遂爲愛弟寵妻之所制 惜哉 達率燕多 鬲關等 欲伐古尸不克 而逃歸 新羅謀兩擧故古尸 不敢自立 而立素古 年才十三.
39년(A.D.226) 병오 5월 상좌평 길선이 죽었는데 나이 55세였다. 왕이 길선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태공의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길선의 아들 팽선은 전씨의 오빠다. 왕이 백화를 팽선의 처로 삼게 하였는데 팽선이 백화와 그의 오빠 백인에게 맹세하여 은밀히 통하여 신하로써 가까이 하였다. 왕이 백인에게 명하여 북한(산)군을 나가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백인이 말하기를 “부왕이 전씨에게 미혹되어 왕의 아들과 동생들을 가벼이 여긴다.”고 하였다. 왕의 동생 고시가 그 말을 듣고 전씨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모든 왕자들이 백인과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전씨가 말하기를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자 고시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다. 임금의 명령으로 군사를 일으켜 이로써 먼저 제압하여 바로잡음만 같지 않다.” 전씨가 이내 밀부(병란이 일어나면 즉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도록 내리던 병부)와 더불어 고시를 내외군사로 한다고 명령하였는데, 곧 왕을 핍박하여 궁궐 깊숙이 가두어 놓고 소고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이로써 천하에 호령하였다. 고시는 왕의 서제(아버지의 첩에서 낳은 자식)이다. 그 어머니는 일찍이 왕과 몰래 간통하였는데 은밀히 알려진 궁중의 숨겨진 이야기이다. 왕 역시 고시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했던 까닭으로 자못 왕에게 힘이 있었다(왕의 총애를 받았다). 고시는 나이가 적어서 아름다웠는데 전씨와 더불어 은밀히 간통하여 아들 소대를 낳았다. 항상 왕이 알까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인 등이 이러한 사실을 발설하고자 하였다. 묘인이 계략을 잘못되었음을 알고 말갈로 도망쳤다. 고시가 전씨와 더불어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왕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죽었는데 춘추 72세였다. 왕은 성군으로써 일찍이 다스림에 있어 각각을 평탄하게 다스렸고, 단지 집안일을 옳다고 여겨 규중(부녀자)의 일을 점검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사랑하는 동생과 총애하는 처에게 제거되는 바가 되었다. 아깝도다. 연나라가 두루 이끌고 넓게 (쳐들어 왔으나) 빗장 등을 걸고 막았다. 고시를 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연나라로) 도망하여 돌아갔다. 신라가 함께 고시가 반란을 일으킨 까닭에 (연나라와) 함께 모의하였으나 감히 자립하지 못하였다. 소고가 섰는데 나이 겨우 13살이었다.

肖古王(초고왕)


諱素古 仇知王第五子也 體鴻大 有遠識 臨事不輕決 古尸田氏不敢擅威 國人稱之.
휘는 소고, 구지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체격이 크고 멀리(넓게) 아는 것이 있어 정사를 결정함에 가볍지 않았다. 고시와 전씨가 감히 두려워하여 멋대로 하지 못했다. 나라사람들이 그것을 칭찬하였다.

元年 丙午 七月 尊母 田氏爲太后.
1년(A.D.226) 병오 7월 어머니 전씨를 태후로 하였다.

二年 丁未 八月 破新羅 助比川城 而虜一千口而還 羅又引兵 逼我漢水 故還其所俘.
2년(A.D.227) 정미 8월 신라의 조비천성을 깨뜨리고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신라가 또 병사를 이끌고 우리 땅 한수를 핍박하였는데 우리가 빼앗은 원래(신라)의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三年 戊申 五月 帶方王恭 以位讓 于前王子淵 遣使告慶 王幸龜宮宴宝皐夫人 宝皐泣歌之 王憐之 遂宿於龜宮通之 自是累幸.
3년(A.D.228) 무신 5월 대방왕 공손공이 옛 왕자 공손연에게 양위를 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경사를 알렸다. 왕이 구궁으로 행차하여 보과부인에게 잔치를 열었다. 보과가 슬픈 노래를 불렀는데 왕이 가엽게 여기어 구궁에서 머무르며 보과와 정을 통하였다. 스스로 이것은 묶여진 행운이다.

四年 己酉 四月 宝皐生王女龜氏 王納佐平沙市女 而又烝太后田氏 沙氏者太后婢也 田氏妬 王愛宝皐 而自媒沙氏 以引之及己也.
4년(A.D.229) 기유 4월 보고가 왕의 딸 구씨를 낳았다. 왕이 좌평 사시의 딸을 거두어 이에 태후 전씨를 용서하였다. 사씨는 태후의 아랫사람이다. 전씨가 왕이 보고를 사랑함을 투기하여 스스로 사씨를 중매를 서서 이로써 왕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였다.

五年 庚戌 八月 沙氏生王子仇首 九月 以沙市爲上佐平委以政事 烏候爲右佐平委以兵事 富輪爲左佐平委以密事 流太公古尸 于小熊島移太后於彭宣家 十月 遣將侵羅邊邑掠其府庫 十二月 皀衣舍人眞可說王曰 “陛下以英明之姿 早破古尸之奸 以雪父王之恥 則可也 自古以來未有讐母之君 伊時若非太后陛下 焉得以王 畢日若有不測 則非太后 而孰有偕乎” 王大悟 乃冒雪夜 幸彭宣家 偕太后而歸.
5년(A.D.230) 경술 8월 사씨가 왕의 아들 구수를 낳았다. 9월 사시를 상좌평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기고, 오후를 우좌평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고, 부윤을 좌좌평으로 삼아 비밀스러운 일을 맡겼다. 태공 고시를 소웅도로 유배 보내고 태후는 팽선의 집에 있게 하였다. 10월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국경지역의 마을을 침략하여 관청의 창고를 약탈하였다. 12월 향기가 있는 옷을 입은 관청의 사람 진가가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영명(좋은 명성이나 명예)한 모습으로, 일찍이 고시의 간음함을 깨뜨리고 이로써 부왕의 수치스러움을 씻었는데 옳음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를 원수로 대한 왕은 없습니다. 저번에 만약 태후가 아니었다면 폐하가 없습니다. 이에 왕이 얻은 게 무엇입니까. 모든 날 만약 곁에 없다면 곧 태후가 아니면 누가 있어 함께 하겠습니까?” 왕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곧 눈이 오는 밤임에도 무릅쓰고 팽선가로 행차하여 태후와 함께 돌아왔다.

六年 辛亥 二月 新建太后宮 曰上宮 召帶方人 焦毛等 鑄印 及兵伏于西院
6년(A.D.231) 신해 2월 새로 태후궁을 세우면서 ‘상궁’이라고 불렀다. 대방인 초모 등을 불러 도장을 녹이고 서원에 병사를 숨겼다.
《해설》가급적 해설을 하지 않고 네티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이해가 어려울 것 같아 나의 견해를 말하겠다. 초고왕이 태후 전씨를 궁으로 불러들이니 전씨가 공이 있음을 들어 고시 또한 궁으로 불러들이고자 하니 전씨와 고시에게 있던 도장들을 녹여 없애고 전씨와 고시와 밀착되지 않을 대방인들로 하여금 두 사람을 감시하게 하여 사전에 내란을 방지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七年 壬子 四月 石夫人眞氏生女素嬭 或云太后出也 立眞氏宮爲赤柔宮.
7년(A.D.232) 임자 4월 석부인 진씨가 딸 소내를 낳았다. 또는 태후가 낳았다고도 한다. 진씨의 집을 세워서 적유궁으로 삼았다.

十年 乙酉 正月 上宮生子古爾 賜酺群臣 三月 以太公古尸于內新院 奉供如初封 王妹素利素元 弟素大素仁等 大仁及古尸出也.
10년(A.D.235) 을유 1월 상궁(태후)가 아들 고이를 낳았다.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3월 태공 고시를 내신원에 옮기게 하고 처음에 봉하여진 것과 같이 받들어 모셨다. 왕의 여동생 소리 · 소원, 남동생 소대 · 소원 등 대인이 고시가 낳은 자식이다.

十二年 丁巳 五月 帶方王淵 改國曰燕 大破漢兵 於大川河 王遣使賀之 沙氏生王女仇嬭
12년(A.D.237) 정사 5월 대방왕 공손연이 나라이름을 ‘연’으로 고쳤다. 한병(조조의 위병)을 큰 하천에서 물리쳤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사씨가 왕의 딸 구내를 낳았다.

十三年 戊午 二月 上宮生女古嬭 八月 魏伐燕大破之 王淵及太子修 遇舍 王弟沼立 爲帶方王 請救王 發兵五千 以赴之
13년(A.D.238) 무오 2월 상궁(태후)가 딸 고내를 낳았다. 위나라가 연을 쳐서 (연)왕 공선연과 태자 공손수를 크게 깨뜨렸다. 관청에서 왕(공손연)의 동생 공손소를 만나 왕으로 세워 대방왕으로 삼았다. 왕(공손소)가 구원을 청하여 군사 5천을 일으켜 이로써 나아갔다.

十四年 己未 三月 移帶方人三千 于國西 七月 王西巡至浿河口
14년(A.D.239) 기미 3월 대방인 3천명이 옮겨 와서 나라의 서쪽에 두었다. 7월 왕이 서쪽을 돌아 패하의 입구에 이르렀다.

十六年 辛酉 正月 沙氏生王女太嬭 命帶方人公孫讓 且定宗室位 次公卿禮儀.
16년(A.D.241) 신유 1월 사씨가 왕의 딸 태내를 낳았다. 대방인 공손양에게 명하여 장차 종실의 위계를 정하게 하여 버금가는 공경(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예로 존경하게 하였다.

二十二年 丁卯 五月 王都井渴 命民濬川取水
22년(A.D.247) 정묘 5월 왕도의 우물이 말라 백성들에게 하천을 파서 물을 취수하도록 명했다.

二十三年 戊辰 二月 重修宮室 命將軍眞格等 攻新羅母山城
23년(A.D.248) 무진 2월 궁실을 중수(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침)하였다. 장군 진격 등에게 명하여 신라 모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二十四年 己巳 七月 攻羅拘壤城 十月 勿太后崩 春秋七十二 太后新羅眞骨 性寬弘慈愛 田太后事之 以母國人重之 如泰山
24년(A.D.249) 기사 7월 신라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10월 물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72세였다. 태후는 신라 진골이었고, 성품이 널리 너그러웠으며 자애로웠고 전태후의 일로 모국인(신라인)들이 태산처럼 중히 여겼다.

二十五年 庚午 八月 攻羅圓山 鈌(신라본기 缶)谷大捷 於蛙山 加耶遣使來貢明珠
25년(A.D.250) 경오 8월 신라 원산성을 공격하였다. 와산에서 결(부)곡 대첩을 이루었다. 가야가 사신을 보내어 명주를 공물로 보냈다.

二十六年 辛未 二月 太公古尸卒 內新院 遣王弟素大迎喪歸 葬于漢城西院 古尸美風來好 奇謨而臨大事 有不忍之性 意爲王所制 唯以酒色自娛而終 其年臨卒 命其子素大 扶起東向 祝王及太后而絶 王聞之 歎曰 “吾固知 叔父之賢 而拘於外議 以封之也 靈必知矣” 素大曰 “父已自知 感兄大恩 自以爲死 無餘恨 但以幼蘗輩爲慮 而囑於臣” 而己王乃賜獵 戶八百 于素大 以養其蘗.
26년(A.D.251) 신미 2월 태공 고시가 내신원에서 죽었다. 왕의 동생 소대를 보내어 상을 맞이하여 돌아왔다. 한성 서원에 장사 지냈다. 고시는 아름다운 풍속을 남겼고, 기묘한 계책으로 큰일에 임하였으며, 참지 못하는 성품이 있어 왕을 뜻을 제어하는 바가 있었다. 오로지 주색을 스스로 즐겨서 종말에 이르니 그 해에 이르러 죽었다. 고시의 아들 소대에 명하여 동쪽을 향하여 일으키기를 도왔다. 왕과 태후가 끊어지기를 기도하였는데 왕이 그 말을 듣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숙부가 어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깥의 일에 한하여 의논하고자 이로써 봉하였는데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대가 말하기를 “아버지(고시)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다. 형(초고왕)의 큰 은혜를 느끼고 이로써 스스로 죽었다.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루터기(나무를 베고 남은 밑동) 무리들이 작아서 근심이 되는데 신하로 속하게 되었다” 고 하였다. 왕이 이내 사로잡은 800호를 소대에게 하사하고, 그 그루터기를 기르도록 하였다.

二十七年 壬申 九月 王有疾 命太子仇首監國 王倦於政事 日與方士丁髟輩 談論神仙國之大政 委於太子 太子剛明能察賢否 故上下相得國泰民安 倉廩充實 帶方之人來見 而願歸者日加
27년(A.D.252) 임신 9월 왕이 질병이 있어 태자 구수에게 명하여 나라를 살피도록 명하였다. 왕이 나랏일에서 쉬면서 매일 머리카락을 긴 무리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와 더불어 신선의 나라의 큰 정치에 대해 담론(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논의함)하며 태자에게 나라를 맡겼다. 태자가 강명(성질이 곧고 두뇌가 명색하다)하여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을 능히 살피어 그런 까닭에 위아래가 서로 국태안민(나라가 커지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됨)하게 되어 나라 안의 창고가 충실하게 되었다. 대방사람들이 와서 보고 살고자 원하는 자가 매일 늘어갔다.

二十八年 癸酉 三月 置狗原行宮 加耶女君 美理神王 遣使 獻絹及龍舟 請得王子 爲婿及弓矢槍刀 王命賜大刀七柄 槍五十而送之
28년(A.D.253) 계유 3월 구원에 행궁(임금이 나들이 할 때 머물던 별궁)을 두었다. 가야의 여군 미리신왕이 사신을 보내어 명주와 용주(임금이 타는 배)를 바치고 왕자를 청하여 남편으로 삼고 활과 화살, 창과 칼을 보내주기를 청하여 왕이 큰 칼 7자루와 창 50개를 선물로 주고 보냈다.

二十九年 甲戌 正月 王禪位於太子仇首 而自處於山宮及狗原 而主祭祀號曰 ‘太上神王’ 太子卽位於南宮 親執內外兵事 定沙氏苩氏眞氏解氏之爵位.
29년(A.D.254) 갑술 1월 왕이 태자 구수에게 선위했다. 스스로 산궁과 구원에서 거처하며 제사를 주제하며 부르기를 ‘태상신왕’이라 하였다. 태자가 남궁에서 즉위하여 친히 내외의 병사의 업무를 집정하고, . 사씨 · 백씨 · 진씨 · 해씨의 작위를 정하였다.

仇首王(구수왕)


諱仇首 肖古王長子也 身長七尺 威儀秀異 爲政以仁 執法以明
휘구수 초고왕의 장자로 키가 7척에 위엄과 예의가 다른 것보다 뛰어났고 나라를 다스림에 어질었으며 법을 집행함에 밝았다.

元年 甲戌 三月 立妹妃素嬭爲后
원년(A.D.254) 갑술 3월 여동생비 소내를 후로 세웠다.

二年 乙亥 二月 選壯丁能射者 屬新騎監
2년(A.D.255) 을해 2월 활쏘기에 능한 장정을 골라 뽑아 신기감에 모았다.

四年 丁丑 七月 龜宮太后宝皐夫人薨 春秋五十七 后以公孫渡王季女 有傾國知色 文母之德 事仇知肖古二君 生五女三子 至是從太子 于狗原得疾 而薨于密室
4년(A.D.257) 정축 7월 구궁 태후 보과부인이 죽었는데 춘추 57세였다. 후는 공손도왕의 막내로 경국지색의 아름다움과 문모지덕이 있었다. 구지왕과 초고왕 두 임금을 모시고 다섯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태자를 따름에 이르러 구원에서 병을 얻어 밀실에서 죽었다.

六年 乙卯 七月 地震侵羅邊鄙
6년(A.D.259) 을묘 7월에 지진이 신라의 국경 마을을 침입하였다.

七年 庚辰 十月 伯父餘勿公薨 以太王之兄有太白之德 讓國閑居不喜 論人長短 唯與方士 輩潛究仙道 太王敬以師之 以其三女爲小后 尊之曰 ‘仙舅太上’ 國人號 以北院大王
7년(A.D.260) 경진 10월 백부 여물공이 죽었다. 태왕(초고왕)의 형으로 태백지덕이 있었다. 사람의 장단점을 논하기를 오로지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와 같음이 있었다. 무리들과 숨어 선도를 구함에 있어 태왕이 여물공을 스승으로 존경하였고 이로써 여물공의 셋째 딸을 소후로 삼았는데 존경하여 말하기를 ‘선구태상’이라고 하였다(여기서 구는 장인). 나라사람들이 북원대왕이라고 불렀다.

八年 辛巳 四月 禁國人私通 于外交易 物貸價賣買女色 以損國情 嚴防水路
8년(A.D.261) 신사 4월 나라사람들이 교역 외에 사적으로 통하여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물건의 대가로 여색을 매매하여 이 때문에 나라가 손해를 보아서 엄하게 수로를 막았다.

九年 壬午 五月 太后田氏有疾 赦中外罪因
9년(A.D.262) 임오 5월 태후 전씨가 병이 들어 나라와 바깥의 죄인들을 사면했다.

十一年 甲申 六月王薨 太子沙伴卽位 幼少不能爲政 太王命王弟古爾代立 攝輔太子仍娶素嬭后 未幾太子薨 遂定大位 仇首王以聰明之姿 神威之質 銳意圖治發憤忘食 夙興夜處 竟損聖躬 壽只三十五 國人莫不傷之
11년(A.D.264) 갑신 6월 왕이 죽어 태자 사반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태왕이 왕의 동생 고이에게 왕위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태자를 도와 대신함으로 인하여 소내후에게 장가들게 하였는데 멀지 않아 태자가 죽어 드디어 왕위를 정하게 되었다. 구수왕은 총명한 자태로써 임금의 위엄이 순수하여, 다스림에 예민한 의도(생각)가 있어 화가 나면 식사를 잊어 버렸고 일찌기 일어나 밤까지 머물러 있어 결국 성스러운 몸을 망쳐 수명이 단지 35세에 끝이 나니 나라 사람들이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古爾王(고이왕)


諱古爾 肖古王之同母子也
휘는 고이, 초고왕의 같은 어머니 아들이다.
《참고》고이왕은 초고왕의 어머니 전씨와 초고왕의 부친 구지왕의 동생 고시사이에 낳은 아들이다.

元年 甲申 九月 立素嬭后爲后 仇嬭爲副后
원년(A.D.264) 갑신 9월 소내후를 후로 세우고 구내를 부후로 삼았다.

三年 丙戌 二月 沙伴王薨
3년(A.D.266) 갑술 2월 사반왕이 죽었다.

五年 戊子 五月 田太后崩 春秋七十二 葬於仇知王陵 是年秋旱而蝗田穀失稔 民相作盜 王巡行郡縣 以安撫之
5년(A.D.268) 무자 5월 전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72세였다. 구지왕릉에 장사 지냈다. 이해의 가을에 가물고 누리(황충)가 들어 밭의 곡식이 익지 않았다. 민간인들이 서로 도둑질을 하였다. 왕이 군현을 돌며 이로써 백성의 사정을 살펴 어루만졌다.

七年 庚戌 二月 築赤峴沙道二城 朦部民守之 十月 末曷來侵 沙道城焚門而走
7년(A.D.270) 경술 2월 적현 · 사도 두 성을 쌓아 동부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명하였다. 10월 말갈이 침입하여 사도 성문을 불사르고 도망쳤다.

八年 辛卯 二月 太王有疾赦因 秋 國南部蝗民多饑 王自責曰 “寡人之世 災異如此”
8년(A.D.271) 신묘 2월 태왕이 질병이 있어 죄인들을 사면했다. 가을 나라의 남부에 누리가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이 자책하여 말하기를 “과인(왕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의 치세에 재난이 이와 같이 뛰어난가(심한가).” 라고 하였다.

十年 癸巳 七月 西部人嗇(백제본기 茴)會 獲白鹿 而獻之 王以災異累見 而未見祥瑞 而憂及見白鹿大喜 賜以穀百石
10년(A.D.273) 계사 7월 서부사람 색(회)회가 백록(흰사슴)을 잡아 왕에게 바쳤다. 왕이 재앙이 누적되어 심화되고 있는데 상서로운 일(길한 일)을 보지 못하여 근심하고 있었는데 백록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곡식 100석을 (색회에게) 주었다.

十一年 甲午 七月 攻羅腰車城拔之 斬其城主 羅兵來侵沙峴城而退 九月 命北部眞菓 攻末曷取石門 十月 末曷來侵述川擊退之 太王崩於山宮 春秋六十一 太王鴻壯有神力 善射好騎馬 早有威德之名 晩好神仙 土木沈於聲色 國人惜之
11년(A.D.274) 갑오 7월 신라 요차(거)성을 빼앗아 그곳의 성주를 죽였다. 신라의 병사가 사현성을 침입하였으나 물러났다.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말갈을 공격하여 석문을 취하였다. 10월 말갈이 술천성을 침입하였는데 맞서 싸워 물리쳤다. 태왕(초고왕)이 산궁에서 죽었는데 춘추 61세였다. 태왕은 체격이 크고 힘이 좋아 활쏘기를 잘하고 말타기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위엄과 덕으로 명성이 높았다. 뒤늦게 신선을 좋아하여 음악과 여색보다 흙과 나무에 빠져들었다. 나라사람들이 그것을 애석해 하였다.

十三年 丙申 八月 末曷來圍赤峴城 城主固拒之 王帥勁騎八百 追賊於沙道城下大破之
13년(A.D.276) 병신 8월 말갈이 와서 적현성을 포위하여 성주가 단단히 막았다. 왕이 장수가 되어(친히) 날쌘 기병 800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사도성 아래에서 대파하였다.

十四年 丁酉 二月 設二柵於沙道城側 東西相去十里 分赤峴城守卒戍之
14년(A.D.277) 정유 2월 사도성 옆에 두개의 목책을 세웠다.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을 지키는 병사를 나누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十五年 戊戌 七月 攻羅獐山城
15년(A.D.278) 무술 7월 신라 장산성을 공격하였다.

十七年 庚子 十月 王城西門火 末曷寇北邊
17년(A.D.280) 경자 10월 왕성의 서문이 불탔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 했다.

十八年 辛丑 五月 國凍大水 山崩四十餘所 八月 大閱於漢水之西
18년(A.D.281) 신축 5월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산 40여개소가 무너졌다. 8월 한수의 서쪽에서 크게 사열했다.

十九年 壬寅 二月 修堤防 勸農事 六月 王都雨魚 太子責稽納帶方王女宝果 十月 攻羅牛頭鎭 抄掠民戶 羅將忠萱引五千兵 逆戰於熊谷 互有勝敗
19년(A.D.282) 임인 2월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6월 왕도에 물고기 비가 내렸다. 태자 책계가 대방의 왕녀 보과를 거두었다. 10월 신라의 우두진을 공격하여 민호(백성)를 노략질 하였다. 신라 장수 충헌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와서 웅곡에서 역전(공격을 받다가 역습하여 나아가 싸움)하였다. 서로 상호간에 승패가 있었다.

二十年 癸卯 二月 帶方王沼薨 子虔立 請婚王 以第五女烏右里妻之
20년(A.D.283) 계묘 2월 대방왕 공손소가 죽어 아들 공손건이 섰다. 왕에게 혼인을 청하여 다섯째 딸 오우리를 처로 삼게 했다.

二十一年 甲辰 七月 新羅來侵 戰于烽山不利 命太子責稽  盅內外軍事
21년(A.D.284) 갑진 7월 신라가 침입하여 봉산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책계태자에게 명하여 (봉산성) 내외의 군사를 비우도록 하였다.

二十三年 丙午 二月 麗伐帶方 帶方請救 王命太子救之 麗怨我將欲侵邊 乃發丁夫 修葺慰禮城及阿旦(백제본기 且)城蛇城而備之 十一月王薨太子責稽立 王以太王寵子 孝友愛民 夙興夜寐 勤儉下士 國家大治 而常憂外寇 未常晏居 而薨 春秋五十二 國人痛哀之.
22년(A.D.285) 병오 2월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왕이 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명하여 대방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고구려가 원망하여 장차 우리나라의 변경을 침략하고자 이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과 아단(차)성과 사성을 수선하고 지붕을 이어 이에 대비하였다. 11월 왕이 죽어 태자 책계가 섰다. 왕은 태왕(초고왕)의 총애를 받은 아들로써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일찍 일어나 밤에 잠을 자고 근검(부지런하고 검소함)을 아랫사람과 선비(관리)들에게 국가의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게 하고 항상 바깥의 도적들을 근심하였는데 때때로 밤늦게 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이 때문에) 죽었는데 춘추 52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애통해 하였다.


정성일 (2007-06-24 13:55:29)  
구지왕의 기록이 백제왕기 뿐만 아니라 박창화선생님의 아달라기의 p11에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신라 일성이사금에 이어 아달라이사금의 재위기도 밝혀지는 셈입니다.
지마이사금(159-191,재위기가 10년이 길다), 일성이사금(192-212), 아달라이사금(213-243), 신라본기의 재위기와 다릅니다.
현재는 저도 신라왕들이 재위기간을 찾고 있습니다.
정성일 (2007-10-15 19:20:14)  
정사 삼국지 공손도 전(퍼온글)

공손도는 자가 승제(升濟)이고, 본래는 요동군 양평현(襄平縣) 사람이다. 공손도의 부친 공손연은 어떤 사건으로 관리의 추적을 피해서 현도군(玄?郡)에서 살았고, 공손도는 군의 낮은 벼슬아치로 임명되었다. 당시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의 아들 공손표(公孫豹)는 열여덟 살로 요절했다. 어린 시절 공손도의 이름은 표(豹)였으며, 나이도 공손역의 아들과 같았으므로, 공손역은 그를 친자식처럼 사랑하였고 스승에게 보내어 학문을 닦도록 하였으며, 그를 위해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다. 나중에 유도과(有道科)에 천거되어 상서랑에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기주자사로 승진되었지만, 터무니없는 소문으로 해서 파면당했다.

그와 같은 군 출신인 서영(徐榮)이 동탁의 중랑장으로 임명되자, 공손도를 추천하여 요동태수가 되게 했다. 공손도는 현도군의 작은 관리로부터 집을 일으켰으므로, 요동군의 사람들에게 경시당했다. 이보다 앞서 요동속국의 공손소(公孫昭)는 양평현 영(令)의 지위에 있었을 때,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불러 오장(伍長)으로 임명했다.

공손도는 요동태수로 부임한 후 공손소를 체포하여 양평 시장에서 때려 죽였다.
군내의 호족과 명가인 전소(田韶) 등은 오랫동안 우대를 받았지만 은혜를 갚을 줄 몰랐으므로 모두 법에 따라 처형하였는데, 대가 끊기고 멸망한 집은 백여 가구에 이르렀으므로, 군 전체를 놀라게 했다. 공손도는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를 치고, 서쪽으로는 오환을 공격하였으므로 그의 위세는 밖까지 이르렀다.

초평 원년(190)에 공손도는 중원지역이 혼란스러운 것을 알고 자신과 친한 관원 유의(柳毅)와 양의(陽儀) 등에게 말했다. '한 왕조의 운명은 끝나려 하므로 나는 제군 등과 왕업을 취하기로 결정했소.'
그 당시 양평현의 연리(延里) 사(社)에 커다란 돌이 나타났는데, 길이가 한 장쯤 되고, 그 아래에는 작은 돌 세 개가 그것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공손도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한 선제(宣帝)의 관석(冠石)의 징조이고, 또 마을 이름은 당신의 부친(공손연)의 성함과 같습니다. 사(社)는 토지를 관리하는 귀신이므로, 당신이 토지(천자의 지위)를 지배하고, 삼공이 당신을 보좌한다는 징후입니다.'
공손도는 매우 기뻐했다. 원래 하내태수였던 이민(李敏)은 군의 유명인사로서 공손도가 하는 일을 싫어했지만, 그한테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바다로 해서 도망갔다. 공손도는 격노하여 그의 부친의 묘를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체를 불태웠으며 그의 종족을 주살했다. 그는 요동군을 구분하여 요서중료군(遼西中遼郡)을 세우고, 그곳에 태수를 두었다.
바다를 건너 동래군(東萊郡)의 여러 현을 정복하여 영주자사를 두었다. 그는 스스로 세워 요동후(遼東侯)ㆍ평주목(平州牧)이 되고, 그의 부친 공손연을 건의후(建義侯)로 봉했다.
한나라 두 왕조(고조와 광무제)의 제묘를 세우고, 단(檀)과 선( )을 양평 성남에 설치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으며, 적전의식을 행하고 열병식을 하였으며, 난거(鸞車)에 올라 구류(九旒)를 이용하고 모두( 頭)를 사용하는 기사와 우림기(羽林騎 ; 근위병) 병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조조는 상주하여 공손도를 무위장군으로 임명하게 하고, 영녕향후(永寧鄕侯)로 봉하게 하자, 공손도는 말했다.
'나는 요동에서 왕노릇할 뿐인데, 무엇 때문에 영녕향후가 되겠습니까!'

건안 9년(204)에 공손도는 인수를 무기창고 속에 감춰 두었다. 공손도가 죽은 후, 그의 아들 공손강이 자리를 계승하였으며, 동생 공손공(公孫恭)을 영녕향후에 임명했다.

건안 12년에 조조는 삼군(요서ㆍ요동ㆍ우북평)의 오환족을 정벌하고, 유성(柳城)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원상 등은 요동으로 도망갔지만, 공손강은 원상의 머리를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이 일은 《무제기》에 기록되어 있다.

조조는 공손강을 양평후(襄平侯)에 봉하고 좌장군으로 임명했다. 공손강이 죽은 후, 그의 아 들 공손황(公孫晃)ㆍ공손연(公孫淵) 등은 어렸기 때문에, 모두들 동생 공손공을 내세워 요동태수로 삼았다. 위문제는 황제에 즉위한 후, 사신을 보내어 공손경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하고 부절을 주고 그를 평곽후(平郭侯)로 봉했으며, 공손강에게는 대사마라는 관위를 추증했다.

본래 공손공은 음경이 위축되는 고자였으며, 자질이 부족하여 봉국(封國)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태화 2년(228)에 공손연이 공손공을 협박하여 자리를 빼앗았다. 명제는 즉위하여 공손연에게 양열장군(揚烈將軍)과 요동태수의 지위를 주었다. 공손연은 남쪽으로 사자를 보내 손권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예물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손권은 장미(張彌)와 허안(許晏) 등을 사자로 하여 금과 옥 및 진귀한 보물을 보내고, 공손연을 연왕으로 옹립했다. 공손연은 손권이 너무 먼 곳에 있어 의지할 수 없고 또 재물을 탐하는 것을 걱정하였으므로 사자를 파견하도록 유인하고, 장미와 허안 등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 명제는 그 결과 공손연을 대사마로 임명하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으며, 부절을 주어 이전과 같이 군수의 지위를 겸하도록 했다. 사자가 도착한 후, 공손연은 무장병을 배치하여 진을 만들고, 나와서 사자와 회견하였다. 또 여러 차례 국내의 빈객이 되어 사악한 말을 서슴지 않았다.

위나라 경초(景初) 원년(237)에 천자는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 등에게 천자의 도장을 찍은 문서를 갖고 가서 공손연을 응징하도록 했다. 공손연은 군대를 출동시켜, 요수(遼隧)에서 맞아 관구검과 교전하였다. 관구검은 상황이 불리하자 돌아왔다. 공손연은 스스로를 연왕이라 하고, 백관과 담당관리를 설치하였다.

사자에게 부절을 갖게 하고 파견하여 선비의 선우에게 옥새를 주고, 변방 백성들을 지배하도록 하였고 선비족을 꼬여 북방(위나라)을 침략했다.
경초 2년(238) 봄에 조정에서는 태위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도록 했다.
6월, 군대가 요동에 도착하니, 공손연은 장군 비연(卑衍)과 양조(楊祚) 등을 파견하여 보병 과 기병 수만 명을 요수에 주둔시켰으며, 주위에 20리 이상의 참를 팠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한 후, 공손연은 비연에게 명령하여 맞아 싸우도록 했다. 사마의는 장군 호준(胡遵) 등을 보내어 그들을 쳐부수게 했다. 사마의는 군대에 명령을 내려 주위에 참호를 파도록 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동남쪽으로 달려가더니, 동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매우 신속하게 양평으로 달려갔다. 비연 등은 양평이 무방비 상태로 있음을 걱정하고 밤중에 도주하였다.
사마의의 각 부대는 수산(首山)으로 나아갔으며, 공손연은 또 비연 등을 보내어 크게 무찌르고, 성 아래까지 진군하여 주위에 참호를 팠다. 마침 30여 일간 장마가 져 요수가 불어났으므로, 운송선은 요수 입구에서 성 아래까지 직행하였다. 비가 그치자, 사마의는 흙산을 쌓고 누대를 만들어, 그 위에서 연발식 화살을 성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급박해졌다. 성안에는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장군 양조 등은 투항했다. 8월 7일 밤에 길이가 수십 장 되는 유성이 수산의 동북쪽에서 양평성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23일, 공손연의 군대는 무너지고, 공손연의 아들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병대를 데리고 포위를 뚫고 동남쪽으로 도망갔다. 사마의의 대군은 이들을 급습하였는데,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죽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상국(相國) 이해 수천 명을 참수시켰으며 공손연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냈으니, 요동군ㆍ대방군(帶方郡)ㆍ낙랑군ㆍ현도군은 전부 평정되었다.

이전에 공손연의 집에는 기괴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를테면 개가 두건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지붕 위에 있었고, 밥할 때 어린 아이가 솥단지 안에 삶겨 죽었던 것이다. 양평 북쪽 시장에서 날고기를 팔았는데, 큰 것은 길이와 둘레가 각기 몇 척이고, 머리ㆍ눈ㆍ입술만 있고 발과 손은 없었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점[卜]에 말했다. '형체는 있으나 완전하지 않고, 몸은 있으나 소리가 없다는 것은 그 나라가 멸망하려는 것이다.'

중평 6년(189)에 공손도가 요동을 점거한 이래, 공손연에 이르기까지 3대를 지나, 총 50년 만에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