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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유리명왕(瑠璃明王), 소서노(召西奴)를 다시 ‘배달(倍達)어미’로 뫼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정성일 님.
이는 선생께서 ‘고구리 사략(유류왕(孺留王)’을 해석, 해설을 한 것을 보완(補完)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 사료(史料)는 유리명왕(瑠璃明王)의 삶과 시대에 관련, 고구리와 백제, 부여은 물론, 갈사국(曷思國)과의 관계를 규명함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성일 님께서는 지금까지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에 대해서 해석(解釋)만 하던 것을 “이는 이렇게 봐야 한다.”는 식의 해설(解說)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생께서 해설(解說)을 덧붙인 것은 이 유류왕(孺留王)에 관련된 사료(史料) 자체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印象)을 워낙 깨는 ‘엉뚱함’을 바탕으로 사료(史料)가 되어 있기 때문에, 혼선(混線)을 일어나는 것을 정리하기 위함이라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또한 간간히 사료(史料)와 사료(史料) 사이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서 경이(驚異)로운 ‘새로운 발견’을 담기 위해서 해설(解說)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맨처음 ‘정성일 님’의 해석을 읽고 좌계가 당황해 했던 것은  남당(南堂) 선생 자신이  “이것은 말이 안된다.”하고 삭선(削線)을 그엇다가 “어?? 이거 진짜 이구나!”하고 그대로 살린 흔적이 소서노(召西奴)가 유류왕(孺留王)의 황후(皇后)로 나타나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좌계 역시 ‘남당(南堂) 선생’과 똑같이 혼란 속에 빠져서 고생한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本文)의 해석과는 별도로 해설(解說)을 실어서 ‘몇가지의 혼란’을 막고, 이미 ‘정성일 님’께서 중요한 의미를 ‘들추어 낸 것’을 바탕으로 ‘좌계의 관점’을 첨가하는 해설(解說)을 겸비해서 글을 보완(補完)하고 져 합니다.  

아무튼 이 ‘고구리사략(유류왕(孺留王)’에는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1) ‘배달어미’의 제도가 확연히 들어날 뿐만 아니라,  고구리, 백제, 신라는 겉으로는 세 나라이지만, 소도(蘇塗)를 통해서는 하나의 나라임이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이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작(鵲)태자가 ‘석탈해(昔脫解)’가 되었다.”는 ‘정성일 선생’의 규명입니다.

2) 또한, 고주몽-동명성왕과 소서노-어라하 때, 이미 ‘아시아’를 천하삼분(天下三分)으로 세계경영(世界經營)하는 ‘틀’이 있었음이 들어납니다.

3) 고구리 수도인 ‘국내성’을 추정할   있는 ‘지리적 관계’도 새로이 발견이 됩니다.

4) 유리명왕(瑠璃明王)의 황조사(黃鳥詞)가 나오게 된 “치씨(雉氏)와 화씨(禾氏)가 왜 싸웠는지?” 또 그 후에 ‘치씨(雉氏)가 돌아와 딸 정(鄭)을 낳은 소상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5) 또한 삼한(三韓)을 이끄는 마한(馬韓)이 “우택(羽澤)이 개발한 축전신술(畜戰神術)에 의해서 거의 흡수통일이나 다름없이 ‘쉽게’ 관경삼국(管境三國)으로 편입하게 되었다.”는 신기한 정보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날카로운 분석’을 ‘정성일 선생’이 해석(解釋)과 더불어서 해설(解說)에서 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놀라운 것입니다.    

가급적 초벌 번역하신 선생의 글을 살리고, 좌계가 ‘정성일 선생’과 다른 해석을 하는 부분은 (**)로 앞 뒤에 표기(表記)해서, 달리 해석(解釋)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있는 ‘정성일 선생’의 해설은 ‘모두 살리고’ 가끔 좌계 역시 해설을 첨가해서 진행하였습니다.  

해석, 해설에 미흡한 부분이 있으시면, 기탄(忌憚)없는 질정(質正)을 부탁드립니다.


孺留王(유류왕)

원문(原文) :
辛巳七月東夫餘公主禮氏生孺留于柵城名曰類利者肖月之意也.

해석(解釋) :
신사(B.C.40) 7월 동부여 공주 예씨가 책성에서 유류를 낳았다. 이름은 類利인데 달을 닮았다는 뜻이다.

해설(解說) :
지금까지는 예(禮)씨를 ‘부여’사람이고, 그 신분(身分)도 은연중 서민(庶民)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금와왕(金蛙王)이 있던 ‘동부여’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 신분이 공주(公主)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원문(原文) :
壬辰彈雀而誤中汲婦, 婦罵曰無父之子無禮如此, 於是自警, 學禮于叔父解素太子, 學射于屋智, 書數於句鄒, 藥農於都祖, 而精熟然後請禮氏同往父處,

해석(解釋) :
임진년(B.C.29)년 - 이는 유류왕이 11살 때임을 뜻함 - 참새를 쏘아 잘못하여 물 긷는 아낙을 맞추었는데, 아낙이 욕하여 말하기를 “아비 없는 자식이 무례(無禮)함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숙부 해소(解素)태자에게서 예(禮)를 배우고, 옥지(屋智)에게서 활쏘기를 배우고, 구추(句鄒)에게서 글과 셈을 배우고, 도조(都祖)에게서 의약(醫藥)과 농사(農事)에 대해 배웠었다,.이런 학습(學習)이 정심(情深)하고 익숙해진 (어머니) 예씨(禮氏)에게 같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설(解說) :
여기서 유류왕의 소년 시절에 가르친 사람 가운데, “숙부(叔父) 해소(解素) 태자(太子)가 있었다.”는 것이 특히 중요함. 해소(解素)는 유화(柳花)와 금와(金蛙)의 아들로써 갈사국(曷思國)의 왕이 되는 사람인데, 고주몽-동명성왕과는 동복(同腹)형제가 되는 사이임.  그런데 이 갈사국(曷思國)은 남당(南堂)-유고(遺稿)에 등장하는 ‘부여 계’ 나라들 가운데, 가장 거대한 ‘관할영역’을 관장하는 나라임이 전제(前提)되어 있음.
특히 이런 “해소(解素)에게 예(禮)를 배웠다.”는 것이 중요함. 왜냐면 예(禮)는 고대에 ‘국제사회를 관통하는 정치 씨스템의 운영’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기 때문임.  유류왕의 어머니가 예씨(禮氏)로 이런 ‘국제정치의 운영’을 담당하고 교육하는 공주(公主)였을 가능성이 있음.
즉 유류왕(孺留王)은 그 당시 최고의 제왕(帝王) 수업(修業)을 받은 것이 들어남.  
또한 “유류왕(孺留王)이 이러한 제왕수업을 받은 ‘지리적 위치’가 어느 곳인가?”는 확실치 않음.  왜냐하면 갈사국(曷思國)의 관할영역이 가장 광대하기 때문임.  


원문(原文) :
禮氏知芻牟有召西奴而難容乃曰汝父去時藏物於七岺八谷石上松下曰搜此而來者來吾子也. 類利乃行山野尋之不得成, 病將死, 忽有聲自柱礎間出. 就而見之有斷刃挾在其間乃喜而進其母.

주(注) : 칠령팔곡(七岺八谷)
: 여기서 칠령(七岺)은 칠각형(七角形)의 돌 즉 칠능석(七陵石)을 뜻함. 팔곡(八谷)은 이런 칠각형의 봉우리 사이에 계곡이 7개있고, 이 칠능석이 기둥을 받치기 때문에, 기둥을 받치는 홈을 하나의 계곡으로 보아서 합쳐서 팔곡(八谷)이라 부름.  


해석(解釋) :

예씨(禮氏)는 추모(芻牟)가 소서노(召西奴)와 함께 있어 용납되지 않을 것을 알고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갈 때 칠령팔곡(七岺八谷)의  소나무아래 돌 위에 물건을 감추었는데 (아버지 추모가) 말하기를 이것을 찾아서 오는 자가 나의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유리가 이내 산과 들을 (뒤지며)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병이 들어 장차 죽을 것 같았다. 문득 스스로 기둥과 주춧돌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서 그것을 보니 부러진 칼이 그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내 기뻐하여 그 어머니에게 나아갔다.

원문(原文) :
禮氏無可止之術議於解素. 解素曰嫂勿慮時至矣. 阿兄欲行母后大祭密遣松義而作聖母像, 吾見此人可作大事且其母亦柵城人也. 禮氏大憙與類利隨義而來解素授黃金百斤曰以此悅其民衆然後謁父可也,

예씨(禮氏)는 막을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해소(解素)에게 계책을 의논하였다. 해소가 말하기를 “형수는 걱정하지 마라. 때가 이르렀다. 나의 형이 모후(母后: 유화(柳花)를 뜻함)의 제사에 성모상(聖母像)을 만들려고 송의(松義)를 은밀히 보냈다, 나는 그 사람(:송의(松義)를 뜻함)을 (**)만나서 큰일을 만들 것이다 (**)또한 그(송의) 어머니는 책성(柵城)사람이다.”
예씨(禮氏)가 크게 기뻐하여 유리와 함께 (송)의를 따랐는데 해소(解素)가 황금 백근(百斤)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그 민중을 기쁘게 한 연후에 아버지(추모)를 (**)알현(謁見)하면 가(可)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설(解說) :
여기서 놀라운 것은 갈사국(曷思國)의 재력(財力)입니다.
‘황금 백근(百斤)을 주면서 “이것으로 그 민중을 기쁘게 한 연후에 아버지(추모)를 (**)알현(謁見)하면 가(可)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구절입니다.
한 근(斤) 16량(兩)인데, 이는 황금 1,600 량(兩)을 뜻합니다.  어마어마한 돈인 것이지요.
이 ‘돈’으로 다음 문장을 보면, 병(病)든 민중을 치료하는 사업을 진행해서, 민심을 얻은 바탕 위에서 ‘아버지’인 고주몽-동명성왕을 만나야한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재력(財力)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리명왕’께서 나타날 때, 거의 재벌(財閥) 수준으로 나타났고, 또 민심(民心)을 얻기 위한 방략 즉 ‘병자(病者)들 구원’을 통한 민심 얻기 - 이는 화백회의에서 차기 황제 자리인 동궁(東宮)을 획득하기 위한 예비사업을 할 준비를 가지고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유리(類利)나 예씨(禮氏)가 “가난하다.”는 인상은 깨끗이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원문(原文) :
乃與屋智句鄒都祖等問民疾苦治人疾病施以衣食洽得人心然後謁鄒牟而卽東宮位沸流溫祚皆不敢爭而唯陜夫仇都烏干等以爲國本不可動與.

해석(解釋) :  
곧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과 더불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 위문(慰問)하고 (**) 질병을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흡족하게 베풀어 인심을 얻은 후에 추모(芻牟)를 만나 동궁(東宮)의 위(位 : 자리)에 나아갔는데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 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으나, 오로지 협부(陜夫), 구도(仇都), 오간(烏干) 등은 “나라의 근본은 움직일수 없다.”고 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祖) 편을 들었다.(=여(與))

해설(解說) :  
이 부분의 해석은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리(類利)가 고주몽-동명성왕을 만난 후, 소서노(召西奴)와 고주몽-동명성왕과의 ‘딸’인 아이(阿爾)를 부인(婦人)으로 ‘짝’지워 주어서 임신하기에 이르렀는데도 유리(類利)가 송양(宋讓)의 딸인 송화(宋花)와 준통(浚通)을 하자, 소서노(召西奴)께서 “어찌 아내가 산고(産苦)를 겪는데 그럴수가 있는가?!”하고 격노(激怒)하고, 이에 대해, 유류왕(孺留王) 자신도 “송화(宋花)는 조당병모(糟糖餠母)이기 때문에 버릴수 없다.”고 해서 격렬히 대립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유리(類利)와 소서노’의 날카로운 대립으로 말미암아, 소서노(召西奴)는  온조(溫祖)와 비류(沸流)와 함께 그들이 고주몽-동명성왕으로부터 받은 봉지(封地)로 떠나간 전사(前史)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좌계가  ‘(정성일님) 백제서기-소서노(召西弩) 어라하의 분노, 예(禮)씨 미스테리’로 쓴 글이 있습니다.  
또한 정성일 선생께서도 “비류와 온조가 ‘군더더기 삶(=저당잡힌 삶)’이 싫어서 떠났다.”고 밝혔습니다.
그런 뒤에 다음 고구리 황제 자리를 뜻하는 동궁(東宮) 자리를 “누가 차지해야 하는가?”하는 화백회의가 있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온조(溫祖)와 비류(沸流)는 이미 소서노(召西奴)와 합의(合議) 본 대로 동궁(東宮)의 자리에 출마(出馬)할 의향이 없음이 ‘비류온조개불감쟁(沸流溫祚皆不敢爭)’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때의 불감쟁(不敢爭)은 그 어감(語感)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자진(自進)해서 동궁(東宮)자리를 사퇴(辭退)하기 보다는, 세(勢)에 밀려서 감히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고구리(高句麗)의 창업공신이라 할 수 있는 ‘협부(陜夫), 구도(仇都), 오간(烏干) 등은 “나라의 근본은 움직일수 없다.”고 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祖) 편을 들었다.(而唯陜夫仇都烏干等以爲國本不可動與).’는 것이지요.
이는 소서노(召西奴)의 영향이 계속 고구리 본궁(本宮)에 그만큼 남아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놀라운 것은 우리가 유리명왕(瑠璃明王)은 그 당시 제도로 보아서는 화백회의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는 가장 정통성이 있었던 동궁(東宮)이란 사실입니다.  


원문(原文) :
召西奴退于牛壤. 溫祚謂其母曰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 有此四可從之義, 而不從而退將安往 吾不敢從母. 召西奴然之乃復入宮鄒母謂上曰吾子雖多唯沸流溫祖最可. 汝其三分天下而治之可也. 上受命而卽位於鸞坮改元光名.


주(注) 1 : 추모(芻母)에 대해

위 원문(原文)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추모(芻母)라는 말임.
이는 ‘정성일 선생’께서 추모(芻母)를 고주몽-동명성왕을 뜻하는 추모(芻牟)와 혼동(混同)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추모(芻母)는 분명히 어미 모(母)가 있어서, 여성(女性)을 지칭하는 단어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는 정확한 판독(判讀)이 된 상태를 전제로 해서입니다.)

(가) ‘어머니’와 ‘아내’의 개념에 대한 혼란
그런데, 바로 이 부분 - 소서노(召西奴)는 분명히 ‘유류왕’에게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황후(皇后) 즉 유류왕(孺留王) 즉 유리명왕(瑠璃明王)의 ‘아내’ 역할인 황후(皇后)로 임명되는 신기한 관계 때문에, 좌계 역시 엄청난 혼란(混亂)을 겪었습니다.
이는 원(原) 사료(史料)를 본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께서도 “아니 소서노(召西奴)가 유리명왕의 아내가 될 수 있나?!”하고 삭선(削線: 삭제하기 위해 그은 선(線)을 뜻함)을 그었다가 그 후의 문장을 읽어보고, “진짜 소서노(召西奴)가 유리명왕의 부인(婦人)이구나?!”하고 그대로 두는 원초적인 혼란(混亂)이 되는 부분입니다.
‘정성일 선생’께서는 원문(原文)의 포괄적 관계를 살피면서 해석했기 때문에,  다행히 ‘소서노(召西奴)=유리명왕의 황후(皇后)’라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등식을 소화해 내고 초벌 번역을 ‘혼란 없이 제대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좌계는 개인적으로 “이 해석 부분에 워낙 혼(魂) 줄이 났기 때문에...(싸이트(site)가 에러(error)가 나는 와중(渦中)에 이미 쓴 원고를 죄다 고치는 법석을 떠는 등등의 혼 줄이 났음.)” 자세히 문장을 살피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 ‘배달어미’의 여러 이칭(異稱)

 중요한 것은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에 등장하는 여자(女子)이면서, 정국(政局) 전체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직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사례(事例)가 “송화(宋花)를 기녀(基女)”라고 표현한 것이 그것이고, 그 다음에 표현된 것이 지금 주(注)를 달고 있는 추모(芻母)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 직책이 ‘배달(倍達)어미(=배달신(倍達臣))’ 혹은 ‘하백녀(河伯女)’라고 칭해지는 세 화백 V.I.P, 즉 화백회의 의장인 대로(對盧), ‘경우-판정관’인 패자(沛者)와 더불어서 반드시 화백회의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중책(重責)입니다.  
즉 추모(芻母) 역시 ‘배달어미’의 이칭(異稱)으로 봐야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좌계가 ‘울며 겨자 믹기 식’으로 진행시키고 있는 (A), (B), (C),...식으로 연재 형으로 쓰는 글에서 언급하게 될 기회가 있겠지만,  동궁(東宮)등 왕권을 이어받을 중요 직책일수록 이런 ‘배달어미’의 인증(認證)이 없으면, 왕(王)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소서노(召西奴)께서는 자신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유류왕(孺留王)과 갈등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배달어미’ 즉 ‘추모’로써 있었던 것이지요.

(다) 동명성왕(東明聖王)에 준(準)하는 ‘배달어미’의 개념으로써의 ‘추모’

그런데, 이런 ‘배달어미’ 가운데 ‘추모(芻母)’란 말이 있다는 것은 또다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뜻하는 추모(芻牟)와 동음(同音)이란 점인데, 고언어학 혹은 비교언어학적으로 ‘추모’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배달어미’를 뜻하는 ‘여성적 의미’와 동명성왕을 뜻하는 ‘남성적 의미’가 ‘추모’라는 발음(發音) 안에 동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소서노(召西奴)께서 같은 ‘배달어미’라고 해도 ‘추모’ 즉 ‘동명성왕’에 버금가는 매우 중요한 ‘배달어미’로 이미 유류왕(孺留王) 등극 직전에 ‘정신적 지주’로써 존경을 받고 있었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
유리명왕께서 왕이 되기 위해 수명(受命) 즉 “명(命)을 받았다.”고 할 때, 명(命)을 준 사람이 바로 배달어미인 ‘추모(芻母)’이라는 것이지요.  

주(注)2 : 우양(牛壤)에 대해.

원문(原文)인 ‘召西奴退于牛壤. 溫祚謂其母曰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은  ‘정성일 선생’께서 정확히 해석한대로 ‘소서노(召西奴)가 우양(牛壤)으로 떠나갔다. 온조(溫祚)가 그 모(母)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부인(婦人)은 남편을 따름이 마땅하고, 자식은 부모를 따름이 마땅하고, 아우는 형을 따름이 마땅하고, 신하는 임금을 따름이 마땅하다.’로써 우양(牛壤)이 소개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고구리 수도(首都)에서 우양(牛壤)이 멀지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조(溫祚)가 곧 쫓아와서 가종지의(可從之義)의 네가지를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설혹 온조(溫祚)가 멀리 한남(漢南)에 있다고 하여도, 이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
온조(溫祚)가 배(船)로 와서 수도(首都) 근처에 있는 접안(接岸) 시설이 있는 우양(牛壤)에서 만나기 쉬운 그런 지역이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해석하고 있는 글의 나중에 보면,  이궁(離宮)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이궁(離宮)이 있는 지역명이 바로 우양(牛壤)으로 보입니다.

주(注) 3 : 가종지의(可從之義)

소서노(召西奴)가 우양(牛壤)으로 물러나자, 온조(溫祚)는 우양(牛壤)으로 쫓아와서 가종지의(可從之義) 즉 ‘따러야할 의리(義理)관계’를 4가지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소위 ‘曰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입니다.
중요한 것은 온조(溫祚)께서 “이 말을 왜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이신 소서노(召西奴)께서 ‘배달어미’이기 때문에, “황제(皇帝)인 유리명왕의 ‘아내’로써 따러야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즉 “어머니는 ‘예법(禮法)상으로 남편’인 유류왕을 따러야하고, 나는 ‘어머니’의 뜻을 따러야한다.”는 중의법(重意法) 적인 어법(語法)을 쓰고 있다고 봅니다.  
 


해석(解釋) :

소서노(召西奴)가 우양(牛壤)으로 떠나갔다. 온조(溫祚)가 그 모(母: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부인(婦人)은 남편을 따름이 마땅하고, 자식은 부모를 따름이 마땅하고, 아우는 형을 따름이 마땅하고, 신하는 임금을 따름이 마땅하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가종지의(可從之義)가 있다.  이를 따르지 않고 물러남은 장차 어찌 편안히 갈수 있겠습니까?   저는 감히 어머니를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소서노(召西奴)가 이를 옳게 여겨 다시 궁(宮)으로 들어와 (**) 추모(芻母)로써(**) 상(上:유리명왕(瑠璃明王)을 뜻함)에게 말하기를, (**) “나의 자식들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가장 뛰어나다. 당신은 그 땅을 삼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게 옳다. 상(上: 유리명왕(瑠璃明王)을 뜻함)이 이런 추모(芻母)의 명(命)을 받아들여 난대(鸞坮)에서 즉위(卽位)하였고(**) 연호(年號)를 광명(光明)으로 고쳤다.

해설(解說) :
(1) 추모(芻母)로써의 ‘담판(談判)의 핵심’인 천하삼분(天下三分)

온조(溫祚)가 소서노(召西奴)에게 한 말의 진의(眞意)는 “‘배달어미’ 즉 추모(芻母)인 어머니께서 예법(禮法) 상 남편인 ‘유류왕’을 따러야만 분봉(分封)을 받은 한남(汗南 = 한남(漢南))으로 편히 갈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어머니이신 소서노(召西奴)는 배달어미를 계속 지키셔야 아들인 온조(溫祚)가 편히 한남(漢南)에 부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명백하게 “어머니 뜻대로 못하겠다.(=吾不敢從母)”로 분명히 뜻을 밝힌 것이지요.
그래서 소서노(召西奴)께서도 다시 입궁(入宮) 해서 추모(芻母)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서노(召西奴)는 ‘배달어미’ 즉 ‘추모(芻母)’로써 중요한 담판(談判)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자식들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가장 뛰어나다. 당신은 그 땅을 삼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게 옳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자식들이 많다.”고 한 것은 소서노(召西奴)께서 친(親)히 낳지 않아도, 고주몽및 우태가 다른 배로 낳은 모든 자식을 포괄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즉 “친(親)이 낳지 않은 자식을 포함하더라도, 유리(類利)인 당신을 빼고는 최고로 비류와 온조가 뛰어난 것이 아닌가?”하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하(天下)삼분(三分)함이 옳다.”고 강력하게 말했던 것이지요.  
이를 유리(類利)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리(類利)는 왕(王)이 될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자 유류왕(孺留王)은 이런 배달어미 즉 추모(芻母)의 명(命)을 받아들여 고구리(高句麗)의 제2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와의 대비

아무튼, 소서노(召西奴)께서는 이러한 유류왕(孺留王)과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합의한 연후에 비로서 ‘추모’ 즉 ‘배달어미’로써 ‘유류왕(孺留王)’에게 왕위(王位)를 넘겨주는 수명(受命) 의례(儀禮)를 치루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는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의 삼분지계(三分之計)와 대비해 볼 때, 더 규모가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리광명(琉璃光明) 삼년 갑진(三年甲辰) 조(條)에 ‘고구리의 오부(五部)체제를 유류왕(孺留王), 온조(溫祚), 그리고 비류(沸流) 삼자(三者)가 분할하는 장면에서 아주 리얼(real)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 이러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사실은 고주몽-동명성왕과 소서노(召西奴)-어라하께서 부부(夫婦)생활을 하실 때, 이미 충분이 거론(擧論)되어서, 동명성왕(東明聖王)께서 돌아가신 후에, ‘소서노-어라하’에 계승된 것임이 유리광명(琉璃光明) 십사년 을묘(十四年 乙卯) 조(條)에 거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유리명왕께서는 “짐(朕: 유리)과 경(卿: 황후)는 서(西)쪽으로 나아가고, 온조(溫祚)와 재사(再思)는 남진(南進)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제(先帝:추모)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原文) :
元年壬寅 九月阿爾妃生子都㘦. 十月封溫祚爲汗南王禮氏爲皇太后, 삭선된 부분(召西奴爲皇后阿爾妃溫公主亦爲皇后), 十二月黃龍王于仁殂烏伊代之以摩離爲卑離國王.

해석(解釋) :
원년 임인(B.C.19)년 9월 아이비가 아들 도근(도절)을 낳았다. 10월 온조를 한남왕으로 봉하고 예씨를 황태후로 삼았다. (소서노을 황후로, 아이와 온공주를 역시 황후로 삼았다). 십이월 황룡왕 우인이 죽어 오이를 대신하게 하고, 마리를 비리왕으로 삼았다.

해설(解說) :

‘정성일 선생’께서는 삭제된 부분(召西奴爲皇后阿爾妃溫公主亦爲皇后)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解說)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 (삭선(削線)된 부분은) 백제와 고구려를 나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소서노는 주몽의 황후이고 유리를 사위로 맞이하여 왕위를 물려주었으므로 소서노 역시 황태후가 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후세의 사가들이 삭선을 하면서도 그 글이 보이게 하여 미묘한 입장 정리를 한 것 같다. 그러므로 잘못 적힌 내용이 아닌 것이다. 당장에 유리왕 2년기사에도 황후가 있는데 아직 송비(송양의 딸)가 황후가 된 상태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소서노께서 유리명왕(瑠璃明王)의 황후가 되신 것을 정확히 파악하셨던 것입니다.
좌계는 이점 굉장한 혼란을 겪었고,  남당(南堂) 선생 또한 마찬가지임.
그러나 면밀히 검토해보면, 배달어미 - 때로는 기녀(基女), 때로는 추모(芻母)로 칭해지는 제도가 고구리 때 있었으며,  이들이 황후(皇后), 혹은 황태후(皇太后)로 그 직위(職位)를 겸직(兼職)함이 분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원문(原文) :
二年癸卯 正月再思太輔, 陜夫左輔主民大加. 扶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太子主宮大加, 屋智主穀大加, 仇鄒主刑大加, 都祖主樂大加, 松義主賓大加.

해석(解釋) :
2년 계유(B.C.18)년 1월 재사(再思)를 태보(太輔)로 삼고, 협부(협보)를 좌보(左輔) 겸 주민대가(主民大加)로, 부분노(扶芬奴)를 우보(右輔) 겸 주병대가(主兵大加)로, 고루(高婁)태자를 주궁대가(主宮大加)로, 옥지(屋智)를 주곡대가(主穀大可)로, 구추(句鄒)를 주형대가(主刑大加)로, 도조(都祖)를 주락대가(主樂大加)로, 송의(宋義)를 주빈대가(主賓大可)로 삼았다.

원문(原文) :
三月大閱水陸軍於河濱, 勞漢人來歸者千人. 九月與皇后觀稼西河如溫湯獲白獐而還. 十月神鸞又集新宮之庭, 皇后生女珍.

해석(解釋)
3월 수군과 육군을 하빈(河濱)에서 왕이 점검했다. 노역을 할 한인(漢人) 천명이 돌아왔다. 9월 황후와 더불어 서하에서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보고, (황후와 더불어) 온탕에서 흰 노루를 잡아 돌아왔다. 10월 신조(神鳥) 난(鸞)새가 또 (**)새 궁궐(**)의 뜰에 모였다. 황후가 딸 진(珍: 공주)를 낳았다.

원문(原文) :
三年甲辰 正月分國中爲五部以順奴絶(원문은 다른 한자)奴賜沸流治之都彌鄒忽(密山), 以勸奴桂婁賜溫祚治之都牛壤, 涓奴上治之兼統黃龍卑離荇人句茶諸國事, 五部置沛者于台使者評者等職.

해석(解釋) :
3년 갑진(B.C.17)년 정월 나라를 나누어 오부(五部)로 하고 순노부(順奴部), 절노부(絶奴部)는 비류(沸流)에게 주어 그 도읍을 미추홀(彌鄒忽 :밀산(密山))으로 하고, 권노부(勸奴部), 계루부(桂婁部)는 온조(溫祚)에게 주고 그 도읍을 우양(牛壤)으로 하고, 연노부(涓奴部)는 왕(王)이 다스리고 황룡국(黃龍國), 비리국(卑離國), 행인국(荇人國), 구다국(句茶國), 모든 나라 일을 통합하여 겸하고 오부(五部)에는 패자(沛者), 우태(于台), 사자(使者), 평자(評者) 등의 직(職)을 두게 하였다.

해설(解說) :
위의 3년 갑진(三年甲辰)의 기사(記事)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부(五部) 체제의 관리를 유리명왕(瑠璃明王), 비류(沸流), 그리고 온조(溫祚)가 각기 담당하는 ‘역할 배분’이 나오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리’의 강역(疆域)을 조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비류(沸流)가 맡은 것은 순노부(順奴部)와 절노부(絶奴部)인데,  순노부(順奴部)를 동부(東部), 그리고 절노부(絶奴部)를 북부(北部)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비류(沸流)가 개척한 것이 오늘날 산동(山東) 백제(百濟)라고 할 때, 이 지역과 동시에 친(親)아버지인 ‘우태’가 있었던 -만주지역- 곳을 승계(承繼)해서 북부(北部)를 동시에 관장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온조(溫祚)가 담당한 지역이 권노부(勸奴部), 계루부(桂婁部)인데,  권노부(勸奴部)는 남부(南部)이므로 오늘날 하남성(河南省)의 몽양시(蒙陽市)로 가정(假定)해 볼수  있고, 또 계루부(桂婁部)는 중앙 혹은 내부(內部)로 치기 때문에,  고구리 수도(首都)가 있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이나 ‘국내성(國內城)’ 즉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근처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온조(溫祚)가 이런 한남(漢南)을 다스리는 것이 우양(牛壤)이고, 이 우양(牛壤)은 유리명왕(瑠璃明王)께서 배달어미인 ‘소서노(召西奴)’에게 수명(受命)을 받기 전에 ‘온조(溫祖)와 네가지 가종지의(可從之義)를 이야기한 곳’이기 때문에, 고구리 수도(首都) 근처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유리명왕(瑠璃明王)께서 직접 다스리는 연노부(涓奴部)는 서부(西部)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섬서성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부여’의 전통지역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결국 소서노(召西奴)-어라하께서 추모(芻母)시절 때, 천하삼분(天下三分)이라고 하는 것은 온조(溫祚)에게 오늘날 하남성 몽양시(蒙陽市)에서 중국 최대의 지구대인 여량산맥과 태행산맥을 통해서 하북의 고구리로 들어오는 곳을 맡기고,
비류에게는 산동(山東)과 만주 지역을 맡겨 바다와 하천으로 고구리 수도로 들어오게 하고,
왕은 고구리 수도(首都)와 섬서성 태백산 주위와 만주등의 전략적 요충지(要衝地)를 관할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원문(原文) :
三月納禾黍女于後宮. 五月與太后如海山求神仙, 皇后及溫公主馬公主再思公主從之歷(?)山鹽山而還. 東明神宮成.

해석(解釋) :
3월 화서녀(禾黍女)를 후궁(後宮)으로 거두었다. 5월 태후와 더불어 해산(海山)에 가서 신선을 구하러 갔다. 황후와 온(溫)공주, 마(馬)공주, 재사(再思)공주가 따라갔고 ?산과 염산에 갔다가 돌아왔다. 동명신궁(東明神宮)이 완성되었다.

원문(原文) :
七月以松讓女爲妃. 作離宮於鶻川凉谷之東西與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入朝以牛壤挾小請移都於尉那城(鏡泊湖東岸)許之,

주(注) : 골천(鶻川)과 이궁(離宮)에 대해

여기서 이궁(離宮)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리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에도 있는 은하수(銀河水) 근처의 별자리입니다.
즉 하북성 고구리 수도(首都) 근처에 있는 골천(鶻川)이란 강(江)이 들어온 동서(東西)에 이궁(離宮)이 있기 때문에, 자연 이 골천(鶻川)이란 강(江)은 ‘남북(南北)’방향으로 흐르는 강(江)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 이궁(離宮)이 중요한 것은 바다와 하천(河川)을 통해서 이궁(離宮)까지 들어오면, 대부분의 배가 평저선(平底船)이기 때문에, 여기에 마차(馬車)를 마치 오늘날 ‘카(car) 센터(center)’에서 자동차를 ‘들어 올린 후’ 자동차의 밑에 있는 부품(部品)을 붙이고 떼듯이, 이착(離着)이 자유롭게 하는 장치 - 이교(離僑)들이 접안(接岸) 시설로 가득히 있기 때문에 취해진 명칭인듯 합니다.  즉 배를 타고오면 즉시 마차(馬車)로 변해서 달릴수가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이궁(離宮)에 “황후(皇后)인 소서노(召西奴)와 온(溫)공주가 살았다.”는 것을 보아서, 이는 분명 우양(牛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이 골천(鶻川)이 골령(鶻岺)과 같은 ‘골(鶻)’이란 명칭을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고구리 수도 근처에 약간의 거리(아마도 60·150리 정도)를 띠고 동서 이궁(離宮)으로는 남북을 향해서 흐르는 골천(鶻川)이란 강과 골령(鶻岺)이란 산맥이 있는 지형인식이 중요할 듯 합니다.
이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글은 좌계가 ‘정성일 님’의 글을 읽고 쓴 “황룡자웅(黃龍雌雄)과 고구리(高句麗)의 흘승골성(訖升骨城)”이란 글이 이 싸이트(site)에 있습니다.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
三年丙戌三月 黃龍雌雄 見於鶻岺.至王骨岺支(岐?) 首脫爪至南岺支(岐?) 蟠三日 乃以其山爲龍山 其水爲龍溝. 群神以爲發祥而請立宮室上, 以兵事未盡不許

해석(解釋) :

“3년 병술(B.C.35)년 3월 황룡의 자웅(雌雄)이 골령(鶻岺)에서 왕골령(王骨岺)의 ‘지맥(支脈)’에까지 보였다.  (암수 황룡(黃龍)의) 머리들이 서로의 발톱을 벗어나 (튀어나온 모양이 남령(南岺)의 지맥(支脈)에 까지 이르렀다.  (암수 황룡이 어울려서 섹스(sex)하느라고) 몸을 뒤트는 모습이 3일간이나 어우러졌다.   (이런 이유로(=내(乃)) 이 산(山)을 용산(龍山)이라하고, 이 물을 용구(龍溝)라고 부르게 되었다. 뭇 신(神)들이 (또한) 상서(祥瑞)로움을 뿜어내니, (사람들=군신(群臣)들이 왕(王)에게) 궁실을 (이 용산(龍山)과 용구(龍溝)) 위에 짓자고 청(請)했다.  그러나 (왕(王)은) 병사(兵事)에 관한 일이 다하지 못하였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즉 고구리 수도(首都)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本文) 해석(解釋) :

7월 송양(宋讓)의 딸은 비(妃)로 삼았다. 골천(鶻川)의 양곡(凉谷)에 동서(東西)로 (**) 이궁(離宮)(=접안(接岸) 시설을 갖춘 궁(宮)(**)을 지었는데 황후(皇后)인 소서노(召西奴)와 온(溫)공주가 살았다. 한남왕(汗南王) 온조(溫祚)가 입조하여 우양(牛壤)이 협소하다고 위나성(尉那城)(경박호 동안)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여 허락하였다.

(주의(注意)및 결론)

아무튼 소서노(召西奴)께서는 계속 이 이궁(離宮)에 살았기에 사실상 유리명왕과는 별거(別居)하고 실질적인 당당하게도 이궁(離宮)을 지닌 ‘배달어미’로 모셔진 황후(皇后)였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원문(原文) :
上謂皇后曰溫祚年雖十七奏事明白勝於沸流南方無憂矣. 皇后曰沸流幼多疾病未得敎誨故徒善而已溫祚自幼勇壯馬黎敎之故如此當爲陛下之一臂, 上曰豈徒臂哉, 渠是我而我是渠也. 皇后大喜曰豈料聖恩如此哉.

해석(解釋) :
왕(王)이 황후(皇后: 소서노(召西奴)를 뜻함)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온조(溫祚)는 이제 나이 겨우 열일곱이나 명백(또렷)하게 상소(上訴)를 올릴 줄 아니 비류(沸流)보다 낫다. 비류의 남쪽은 걱정이 없다.” 황후가 말하기를 “비류는 어렸을 때 질병이 많아 배우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해 이런 까닭으로 착하기만 하다. 온조는 어렸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여 마려에게 교육을 받은 까닭에 이는 마땅히 폐하의 한 팔이다.” 왕이 말하기를 “어찌 팔만 되겠는가. (**)온조(溫祚)는 나의 ‘논물’이 마르면 ‘봇물을 대는 도랑’이고, 나또한 온조(溫祚)의 ‘논’이 물이 마르면 ‘봇물을 대는 도랑’이다.” (**) 황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어찌 성은(聖恩)의 헤아림을이 여기에 이를 수까지 있겠습니까?!”(**)하였다.

해설(解說) :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의 지침(指針) - 남당(南堂)선생의 유고를 해석함에 있어 지명(地名)을 괄호에 넣은 것은 일단 무시하면서, 역사적 관계를 드러나도록 해석에만 치중한다는 - 을 존중하면서도, 감히 지역명 추정을 한다면, 소서노(召西奴)와 유리명왕(瑠璃明王)의 대화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왜냐?
비류가 ‘산동백제’인 동부(東部)와 ‘우태’의 본향(本鄕)인 만주(滿洲)를 맡고 있다고 일단 가정(假定)해도,  유리명왕(瑠璃明王)께서 “비류의 남쪽은 걱정이 없다.(沸流南方無憂矣)” 라는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미 유리명왕때 ‘사천(四川)백제’가 있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온조(溫祖)가 오늘날 하남성 몽양시(蒙陽市)만 맡은 것이 아니라, 이런 황하(黃河)의 남쪽인 ‘사천(四川) 백제’까지 맡았음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이지요.  

원문(原文) :

溫祚歸國皇后欲往汗南曰妾容皃已衰慚愧老牝請赴汗舐犢, 上止之曰先帝以卿遺朕而禁殉者欲固邦本也. 卿若赴汗栚與誰爲國追念, 先帝無使朕孤依, 旧宗國無失民望, 皇后乃喜而止.

주(注) 1: ‘溫祚歸國皇后欲往汗南曰妾容皃已衰慚愧老牝請赴汗舐犢,’에 대해

이에 대해서는 좌계가 ‘정성일 선생’께 이미 ‘댓글’로써 보완(補完)한 내용이 있는데 그 핵심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노빈(老牝)이라함은 ‘늙은 암소’입니다. 그리고 지독(舐犢)은 ‘어미소가 혀로 아픈 새끼 소의 상처를 핥는 것’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앞의 부한(赴汗)의 부(赴)는 ‘닥어간다’는 뜻이고, 한(汗)은 침(타액)을 뜻합니다.
따라서 ‘老牝請赴汗舐犢’의 뜻은 “늙은 암소가 청(請)컨대 (새끼 소 있는 한남(漢南)으로) 닥어가 침으로 (새끼 소인 온조(溫祚)의) 상처를 핥게 해 주소서”의 뜻이 된다고 봅니다.
즉 “온조를 돕고 싶어서 한남(漢南)으로 가겠다.”를 간곡히 표현한 것으로 봅니다.
즉 전체 문장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조가 자신의 나라(汗南)로 돌아간 후 왕후는 한남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말하기를 “첩의 용모가 이미 늙어 참괴(慙愧)하지만, 늙은 암소가 청(請)하건데, (새끼 소 있는 한남(漢南)으로 닥어가 침으로 (새끼 소인 온조의) 상처를 핥게 해 주소서”라고 했다.>

주(注) 2 : ‘旧宗國無失民望’에 대해

여기서 구종국(旧宗國)은 ‘예부터의 종국(宗國)의 나라’를 뜻함.  이는 고대 아시아가 광범위하게 이군이일민(二君而一民) 체제 즉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왕(王)과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왕(王)이 둘이 있는 사회를 뜻함.  
그런데 소도(蘇塗)의 왕(王) 즉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과 삼한(三韓)의 천군(天君)은 영역을 관장하는 상(相)과 왕(王)보다 힘이 강한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를 종국(宗國)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 소도(蘇塗)에서 마치 불교(佛敎)와 같은 종교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집니다.
유리명왕(瑠璃明王)께서 이 말을 하는 근본 뜻은 “소서노(召西奴)가 예부터 종국(宗國)을 맡은 나라의 희망인데, 이 희망을 종국(宗國)을 이어받는 짐(朕)이 잃어버릴 수가 있겠오?!”하고 강력히 한남(漢南)으로 가는 것을 만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유리명왕(瑠璃明王)은 “소서노(召西奴)를 ‘고조선 이래의 종국(宗國)의 희망’이라고 까지 이야기 하는가?”
좌계가 볼 때에는 바로 고주몽-동명성왕과 소서노-어라하께서 입안(立案)하고 다듬으신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라고 보는 것입니다.  

해석(解釋) :  

(**) 온조가 자신의 나라(汗南)로 돌아간 후 왕후는 한남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말하기를 “첩의 용모가 이미 늙어 참괴(慙愧)하지만, 늙은 암소가 청(請)하건데, (새끼 소 있는 한남(漢南)으로 닥어가 침으로 (새끼 소인 온조의) 상처를 핥게 해 주소서”라고 했다.(**)
왕(王)이 그 말을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선제(先帝: 고주몽-동명성왕)께서 경(卿)을 짐(朕)에게 남기고 순장(殉葬)을 금(禁)하라는 것은 나라의 근본이 굳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경(卿)이 만약 ‘닥아가 새끼소에 대한 침질’을 한다면, 짐(朕)은 누구와 더불어 국사(國事)를 밀어갈수 있겠는가?!” 또 “선제(先帝)께서는 짐(朕)에게 의지할데 없는 외톨이가 되게 하지 않았다.  또한 ‘예부터의 종국(宗國)은 민중의 희망(希望)을 잃지않는다.’고 했다. ”라고 말했다. 황후는 기뻐하며 한남(汗南)으로던 가려던 계획을 그쳤다.(**)  

원문(原文) :
十月溫公主難産而崩春秋二十. 上哀慟之減食二日. 十二月阿爾后生女玄.

해석(解釋) :
10월 온(溫)공주가 난산 끝에 죽었다. 나이 20세였다. 상이 애통해하여 2일동안 식사를 줄였다. 12월 아이후阿爾后가 딸 현(玄)을 낳았다.

해설(解說) :
‘정성일 선생’께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음 기록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3년(B.C.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궁(離宮)에 소서노(召西奴)가 있으면서, 한남(汗南)으로 가려고 했지만, 유리명왕(瑠璃明王)의 적극적인 만류(挽留)로 머무른 것이 ‘3년 갑진(B.C.17)’ 이후의 기록이기 때문에,  소서노(召西奴)께서 돌아가신 것은 분명히 백제의 수도인 하남 위례성에서 - 좌계는 이를 하남성 몽양시(蒙陽市)로 추정 - 돌아가심이 분명한데, 어느 때 한남(漢南)으로 간지는 확실치 않음이 밝혀진 것이 의의(意義)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3년 갑진(B.C.17)과 13년(B.C.6) 봄 2월 사이인 것만은 분명한 것이지요.  

원문(原文) :
四年乙巳 正月如溫湯. 二月勸耕巡視城戍. 四月皇后生艴于溫湯. 七月與后東巡柴吉獻硨磲?宝盒玉馬珊瑚恭?.  八月沸流溫祚入朝以劉河爲蠶師敎蠶. 松氏生子都助. 九月納馬公主及鄭共女雉氏. 平氏生女鱒. 十二月扶芬奴句鄒北沃沮敦河平之.

주(注) : ‘沸流溫祚入朝以劉河爲蠶師敎蠶’에 대해
이는 사서(史書)에서 <‘누구’+위(爲)+ 직위(職位)>로 표현이 되는 “누구를 어떤 직위(職位)에 임명한다.”라는 전형적인 문구(文句)임.
즉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모두 아시아 최대의 해운국(海運國)이므로 광대한 지역에서 가장 ‘누에치기’를 잘하는 사람인 유하(劉河)를 데리고 와서 잠사(蠶師)로 임명하고, 이를 고구리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에서 ‘누에치기’를 가르치게 했다는 뜻임.  

해석(解釋)
4년 갑진(B.C.16)년 왕(王)은 을사년 정월 온탕(溫湯)에  갔었다.
2월 밭갈기를 권장하고 성의 경비를 서는 자를 살펴보고 어루만졌다. 4월 황후(皇后)가 불(艴)을 낳았다.
7월 후(后)와 같이 (**) 동(東)쪽을 순수(巡狩)하였는데, 낙랑(樂浪)의 왕(王)인 시길(祡吉)이 차거, 보합, 옥마, 산호(?)를 바쳤다. (**)
(**) 8월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입조(入朝)하여 유하(劉河)를 잠사(蠶師)로 임명하여 누에치기를 왕궁(王宮)에서 가르치게 하였다. (**)
. 송씨(宋氏)가 아들 도조(都助)를 낳았다. 9월 마(馬)공주와 정공(鄭公)의 딸 치씨(雉氏)를 거두었다. 평씨(平氏)(한소의 딸?)가 딸 준을 낳았다. 십이월 부분노(扶芬奴), 구추(句鄒)가 북옥저(北沃沮)의 돈하(敦河)를 평정하였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다음과 같은 주(注)를 달았음.
= 차거(硨磲) :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돌
= 보합(宝盒) : 보석 수납함
= 平氏(한소의 딸?)生女鱒 : 고구려가 흉노의 풍속인 취모제가 있었다는 이야기 인가?

원문(原文) :
五年丙午 正月以香公主妻高婁. 三月禾氏雉氏移于凉谷. 乙豆智娶紫蒙王涉臣女皐頭來. 以曼公主爲沸流妃. 買東海神馬七千匹置車騎府乙豆智將軍菸賈注簿. 五月互市漢人于溝婁城(雙山). 八月觀稼西河勸一口十羊五豕. 十月大閱滸口(呼蘭) 曼公主生沸流陽人.

해석(解釋) :
5년 갑진(B.C.15)년 1월 향(香)공주를 고루(高婁)의 처로 삼았다. 삼월 화씨(禾氏)와 치씨(雉氏)가 양곡(凉谷)으로 이사했다. 을두지(乙豆智)가 자몽왕(紫蒙王) 섭신(涉臣)의 딸 고두(皐頭)에게 장가들어 돌아왔다. 만(曼)공주(계후의 딸)를 비류(沸流)의 처로 삼았다. 동해의 신마(神馬) 7천필을 사고 차기부(車騎府)를 설치했다. 을두지(乙豆智)를 장군 겸 어가주부(菸賈注簿)로 삼았다. 5월 구루성(溝婁城)(쌍산)에 한인(漢人)과 교역하는 호시(互市)를 열었다. 8월 서하에서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보며, 한사람 당 10마리의 양과 5마리 돼지를 키우기를 권방하였다. 10월 호구(湖口)(호란)에서 군사를 (**) 크게 사열(査閱)했다.(**) 만(曼)공주가 비류(沸流)의 자식 양인(陽人)을 낳았다.

해설(解說) :
‘정성일 선생’은 다음과 같은 주(注)를 남김.

= 香公主가 누구인지 모르겠다.(원문(原文)에는 만(曼)공주로 되어 있는데???) 고구려사초에는 비류의 처라고 되어있는데 혹시 비류의 딸을 착오로 기재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다.

원문(原文) :
六年丁未 三月皇后生子而夭. 四月增漢舘於西河汗濱招一技厚祿給其妻婢. 築豆谷行宮松妃居之. 七月伐盖馬國拔其都(開魯)虜其王命年貢羊五千牛馬各二百, 阿爾后生女眞.

해석(解釋) :
6년 정미(B.C.14)년 황후가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4월 서하(西河)와 한빈(汗濱)에서 한관(漢館)을 늘리고 한 가지 기술(技術)이라도 있으면 불러서 후하게 녹봉(祿俸)을 주었으며 처와 첩을 짝 지워주었다. 두곡(豆谷)에 궁(宮)을 지어 송비(松妃)가 거주하게 했다. 7월 개마국(盖馬國)을 쳐서 그 도읍(개로)을 빼앗고 그 왕(王)을 사로잡아 매년 양 오천 마리와 소와 말 각 2백 마리를 바치도록 명령했다. 아이(阿爾)후(后)가 딸 眞을 낳았다.

원문(原文)
七年戊申 正月艴太子薨. 四月皇后如汗南, 以勾鄒爲玄免太守戒以守城. 五月松妃生解明于豆谷, 上如汗南迎皇后而歸, 禾氏生稻公主

해석(解釋)
7년 정미(B.C.13)년 정월 불(艴)태자가 죽었다. 4월 황후(皇后)가 한남(汗南)으로 갔다. 이로써 구추(句鄒)를 현토(玄免)태수(太守)로 삼았고 경계하여 성을 지켰다. 5월 송비(松妃)가 두곡(豆谷)에서 해명(解明)을 낳았다. 왕이 한남(汗南)으로 가서 황후를 맞이하여 돌아왔다. 화씨(禾氏)가 도(稻)공주를 낳았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남겼음.
= 4월 황후가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한남으로 가자 유리가 자신의 심복인 구추를 현토태수로 삼았다는 내용인데 그 이전까지는 황후의 모사격인 을음이 태수로 있었는데 직위를 박탈하였다는 내용이다.

원문(原文)
八年己酉 五月柴吉死子昌特立. 納翊公主.

해석(解釋)
8년 기유(B.C.12)년 5월 시길(祡吉)이 죽어 아들 창(昌)을 특별히 세웠다. 익(翊)공주를 거두었다.

원문(原文)
九年庚戌 四月田(畋자의 오기)于箕山七日得眞珠於桂后陵返凉谷. 雉氏禾氏取遂 上追至樹下作黃鳥詞. 八月素奴女可治妻羊太子. 皇后生萱公主.

해석(解釋)
9년 경술(B.C.11)년 4월 기산(箕山)에서 7일간 사냥을 하다가 계후(桂后)의 무덤에서 진주(眞珠)를 얻어 양곡(凉谷)으로 돌아왔는데, 치씨(雉氏)와 화씨(禾氏)가 (서로) 가지려고 하다가 (치씨(雉氏)가 도망가자) 마침내 왕이 뒤따라가다 나무아래에 이르러 황조사(黃鳥詞)를 지었다. 8월 소노(素奴)(비리국왕)의 딸이 다스릴 만하여 양(羊)태자(황룡국 보득의 딸 화소비의 아들)의 처로 삼았다.

해설(解說) - “황조사(黃鳥詞)의 유래”와 관련
‘정성일 선생’은 다음과 같은 주(注)를 남겼음.  
= 可治가 사람이름인 모르겠다.
그런데 이 원문에 황조사(黃鳥詞)가 발생하게 된 자세한 경위가 나와있다는 것이 큰 소득으로 여겨집니다.  싸움 원인이 기산(箕山)에서 계후(桂后)의 능에 있는 진주(眞珠)를 서로 가질려다가 일어났음이 분명해진 것임.  


본문(本文)
十年辛亥 正月松妃生女穆. 涉臣請其子婚答以公主幼怒失和. 再思薨沸流太子太輔. 四月大鍊于南口以備盖馬紫蒙. 禾氏生子解術.

해석(解釋)
10년 신해(B.C.10)년 1월 송비(松妃)가 여아 목(穆)을 낳았다. 섭신(涉臣)(자몽국왕)이 그 아들의 혼인을 청하였는데 “공주가 어리다.”고 답하여 화목(和睦)을 잃었다. 재사(再思)가 죽어 비류(沸流)태자(太子)를 태보(太輔)로 삼았다. 4월 남구(南口)에서 (군사)훈련을 하여 개마국(盖馬國)와 자몽국(紫蒙國)에 대비했다. 화씨(禾氏)가 아들 해술(解術)을 낳았다.

본문(本文)
十一年壬子 四月涉臣反扶芬奴拔其上都(北?都)臣南奔, 臣鮮卑也. 稚氏生女鄭, 鵲氏生蛙.

해석(解釋)
11년 임자(B.C.9)년 4월 섭신(涉臣)이 반란을 일의켜 부분노(扶芬奴)가 그 도성을 치니 (섭)신이 남으로 달아았다. 섭신(涉臣)은 선비(鮮卑)다. 치씨(雉氏)가 여아 정(鄭)을 낳았고, 작씨(鵲氏)가 와(蛙)를 낳았다.

해설(解說) - 황조사(黃鳥詞)의 위력(威力)
놀라운 것은 화씨(禾氏)와 치씨(雉氏)가 진주(眞珠) 때문에 싸워서 치씨(雉氏)가 화가 나서 도망간 것이 ‘9년 경술(B.C.11)년 4월’으로 기록되고 이때 유리명왕(瑠璃明王)께서는 유명한 황조사(黃鳥詞)를 읊었는데,  놀랍게도 ‘11년 임자(B.C.9)년’에 돌아와서 딸 정(鄭)을 낳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임신 기간을 생각하면, 친정(親庭)으로 도망가서 있었던 기간이 겨우 1년 밖에 안됨이 밝혀진 것입니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의 황조사(黃鳥詞)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원문(原文)
十二年癸丑 二月松妃生女殷. 皇后生藍公主.

해석(解釋)
12년 계축(B.C.8)년 2월 송비(松妃)가 여아 은(殷)을 낳았다. 황후(皇后)가 람(藍)공주를 낳았다.

원문(原文)
十三年甲寅 正月阿爾后崩. 金蛙老王殂帶素立. 納漢公主以松妃爲后. 溫祚立東明廟.

해석(解釋)
13년 갑인(B.C.7) 1월 아이(阿爾)후(后)가 죽었다. 금와(金蛙)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한(漢)공주(한소의 딸 평씨의 딸)을 거두고, 송비(松妃)를 후(后)로 삼았다. 온조(溫祖)가 동명묘(東明廟)를 세웠다.

해설(解說)
‘정성일 선생’은 다음과 같은 주(注)를 남김.  
= 금와가 죽은 것과 온조가 동명묘를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백제서기에 의하면 온조와 금와는 조부와 조손간이다.

원문(原文)
十四年乙卯 正月都㘦如柵城娶帶素女. 七月溫祚立柵漢山下盖有南進之意也, 上謂皇后曰朕與卿西進溫祚與再思南進先帝之靈應有喜也, 時再思爲溫祚妃故也.

주(注) ‘漢山下盖有南進之意也’
‘한산(漢山) 아래서 개(盖)를 했다.’는 의미가 한산하개(漢山下盖)의 뜻임.
왜냐하면 개(盖)는 ‘숭상할 만한 성(聖)서런 맹세나 제사(祭祀)’를 뜻하고, 고대에는 신성한 산(山) 밑에서 중요한 맹세나 제사를 지내는 의식(儀式)이 있었기 때문임.


해석(解釋)
14년(B.C. 6)을묘년 1월 도근(도절)이 책성(柵城)에 가서 대소(帶素)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7월 온조(溫祚)가 (**) 한산(漢山)의 아래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신성한 맹세’를 했는데, 그 가운데는 남진(南進)의 뜻이 있었다.(**)
왕(王)이 황후(皇后)에게  말하기를 “짐(朕: 유리)과 경(卿: 황후)는 서(西)쪽으로 나아가고, 온조(溫祚)와 재사(再思)는 남진(南進)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제(先帝:추모)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 이때는 재사(再思)가 비류의 妃가 되어있던 까닭이다.

해설(解說):
바로 이 ‘14년(B.C. 6)을묘년’의 기사(記事)에 의해, 소서노(召西奴)가 추모(芻母)라고 칭해지는 ‘배달어미’로 있을 때, 천하(天下) 삼분(三分)의 계책이 실은 고주몽-동명성왕의 유지(遺志)와 동일한 것임이 들어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
비류는 동쪽에서 만주를 맡고, 또 온조(溫祖)는 남쪽을 맡고, 유리명왕(瑠璃明王) 자신은 각지의 요충지와 오늘날 섬서성 태백산을 비롯한 ‘부여’의 지역을 각기 고구리(高句麗)의 오부(五部)와 관련해서 배치했었는데, 이것이 바로 천하(天下) 삼분(三分)의 뜻이었는데,  온조(溫祖)가 목책(木柵)을 세우면서 ‘주(注)에서 말했듯이’ 한산하개(漢山下盖)를 하자, 유리명왕(瑠璃明王)이  “선제(先帝)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고주몽-동명성왕과 소서노-어라하가 함께 있었을 당시부터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위대한 구상은 물론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희망이 있었음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