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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지리지

요사 지리지 중경도, 중경 대정부, 고주, 유주, 의주, 금주, 내주 등 전문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            중경 대정부

中京大定府, 虞為營州, 夏屬冀州, 周在幽州之分. 秦郡天下, 是為遼西. 漢為新安平縣. 漢末歩奚居之, 幅員千里, 多大山深谷, 阻險足以自固. 魏武北征, 縱兵大戰, 降者一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抜氏乗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 温渝河水之北. 唐太宗伐髙麗, 駐蹕於此. 部帥蘇支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内附, 為置饒樂都督府. 咸通以後, 契丹始大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 舉族臣屬. 聖宗常過七金山土河之濵, 南望雲氣, 有郛郭樓闕之狀, 因議建都. 擇良工於 燕 薊, 董役二歳, 郛郭 宫掖 樓閣 府庫 市肆 廊廡, 擬神都之制. 統和二十四年, 五帳院進故奚王牙帳地. 二十五年, 城之, 實以漢户, 號曰中京, 府曰大定.

중경대정부, 虞舜(우순)때에 營州(영주)가 되었고 夏國(하국)때에는 冀州(기주)에 속하였으며 周國(주국)에서는 幽州(유주)의 일부였다. 秦國(진국)이 천하를 군으로 삼았는데 이곳은 遼西(료서군)이 되었다. 漢國(한국)에서는 新安平縣(신안평현)이 되었다. 漢國(한국) 말기에는 步奚(보해)가 살았는데 폭원 1000리였으며 큰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서 험준한 산기슭으로 스스로 견고히 하였다. 魏國(위국) 武帝(무제)가 북쪽으로 정벌하려고 병사를 보내 크게 싸우니 항복한 자가 10여 만명이었으며 (나머지는) 松漠(송막)으로 달아났다. 그 후에 拓抜氏(척발씨)가 乗遼하여 아장(牙)을 이곳에 건설하였으니 당연히 饒樂河水(요락하수)의 남쪽과 温渝河水(온유하수)의 북쪽이다. 唐國(당국) 太宗(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이곳에서 말을 머물렀다. 장수를 거느린 연개소문(蘇支)을 쫓아 정걸한 공로가 있다. 奚(해)의 추장 可度(가도)가 무리를 이끌고 내부하니 饒樂都督府(요악도독부)를 설치하였다. 咸通(함통) 이후에 거란이 처음으로 강성해지니 奚族(해족)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太祖(태조)가 나라를 세우자 종족들이 다함께 신속하였다. 聖宗(성종)이 항상 七金山(칠금산) 土河(토하)가를 지날때에 남쪽으로 구름의 기운들을 바라보니 부곽과 누각과 형상이 있음으로 인하여 도읍을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능숙한 기술자를 燕(연)과 薊(계)에서 골라 2년동안 감독하여 郛郭(부곽) 宫掖(궁액) 樓閣(루각) 府庫(부고) 市肆(시사) 곁채(廊廡) 등을 지었는데 神都(신도)의 법도에 비기는 것이다. 統和(통화) 24년에 五帳院(오장원)에까지 진출하였는데 옛 奚(해족)의 왕이 거하는 牙帳(아장)의 땅이었다. 25년에 성을 쌓고 지나인의 민호로 채우고 中京(중경)이라고 부르고 府(부)를 大定(대정)이라고 하였다.

皇城中有祖廟, 景宗 承天皇后御容殿. 城池湫濕, 多鑿井泄之, 人以為便. 大同驛以待宋使, 朝天館待新羅使, 來賔館待夏使. 有 七金山 馬盂山 雙山 松山 土河. 統州十縣九.

皇城(황성) 가운데에는 祖廟(조묘)가 있는데 景宗(경종)과 承天皇后(승천황후)의 어용전이다. 성의 연못은 습기가 다말라버렸으므로 우물을 많이 뚫어서 물을 흘려보냈는데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였다. 大同驛(대동역)에서는 宋國(송국)의 사신을 맞이하고 朝天館(조천관)은 신라의 사신을 맞이하는데 來賔館(래빈관)에서는 西夏(서하)의 사신을 맞이한다. 七金山(칠금산)과 馬盂山(마우산)과 雙山(쌍산)과 松山(송산)과 土河(토하)가 있다. 관할하는 주는 10개이고 현은 9개이다.

1)      大定縣. 白霫故地. 以諸國俘户居之.

대정현. 白霫(백습)의 옛 땅이다. 여러 나라의 포로들로 이곳에 살게하였다.

2)      長安縣. 本漢賔從縣. 以諸部人居之.

長安縣(장안현).[1] 원래 漢國(한국) 요서군 빈종현이다. 여러 부의 사람들로 살게하였다.

3)      富庻縣. 本漢新安平地. 開泰二年析京民置.

부서현. 원래 漢國(한국)의 신안평현의 땅이다. 開泰(개태) 2년에 京(경)의 백성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4)      勸農縣. 本漢賔從縣地. 開泰二年析京民置.

권농현. 원래 漢의 요서군 빈종현의 땅이다. 개태 2년에 京의 백성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5)      文定縣. 開泰二年析京民置.

문정현. 개태 2년에 京의 백성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6)      升平縣. 開泰二年析京民置.

승평현. 개태 2년에 京의 백성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7)      歸化縣. 本漢柳城縣地.

귀화현. 원래 漢國(한국) 柳城縣(유성현)의 땅이다.

8)      神水縣. 本漢徒河縣地. 開泰二年置.

신수현. 원래 漢의 도하현의 땅이다. 개태 2년에 설치하였다.

9)      金源縣. 本唐青山縣境. 開泰二年析京民置.

금원현. 원래 唐 청산현의 지경이다. 개태 2년에 京의 백성들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10)  恩州, 懐徳軍, , 刺史. 本漢新安平縣地. 太宗建州. 開泰中, 以渤海户實之. 初隸永興宫, 後屬中京. 統縣一..

恩化縣. 開泰中渤海人户置.

恩州(은주), 懐徳軍(회덕군), 下, 刺史. 원래 漢의 新安平縣(신안평현) 땅이다. 太宗(태종)이 주를 건설하였다. 開泰(개태) 연간에 渤海(발해)의 민호로 이곳을 채웠다. 처음에는 永興宫(영흥궁)에 예속되었다가 후에 중경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1개이다..

-        恩化縣(은화현). 開泰(개태) 년간에 발해의 민호로 설치하였다.

 

11)  惠州, 惠和軍, , 刺史. 本唐歸義州地. 太祖俘漢民數百户兎麛山下, 創城居之, 置州. 屬中京. 統縣一..

惠和縣. 聖宗遷上京惠州民, 括諸宫院落帳户置.

惠州(혜주), 惠和軍(혜화군), 中, 刺史. 원래 唐의 歸義州(귀의주) 땅이다. 太祖(태조)가 포로된 漢民(한민) 수백 가구로 兎麛山(토미산) 아래에 살게하였는데 비로소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하고 주를 설치하였다. 중경에 속하며 현은 1개이다.

-        惠和縣(혜화현). 聖宗(성종)이 상경의 惠州(혜주) 백성을 옮겨 括諸宫院落帳户置.

12)  髙州, 觀察. 唐信州地. 萬歳通天元年, 以契丹伊斯琿部置. 開泰中, 聖宗伐髙麗, 以俘户置髙州. 有 半頂山 樂河. 屬中京. 統縣一.

三韓縣. 辰韓為扶餘, 弁韓為新羅, 馬韓為髙麗. 開泰中聖宗伐髙麗, 俘三國之遺人置縣. 户五千.

髙州(고주), 觀察. 唐國(당국) 信州(신주)의 땅이다. 만세통천 원년에 거란의 伊斯琿部(이사혼부, 실활부室活部)를 이용하여 설치하였다. 開泰(개태) 년간에 聖宗(성종)이 髙麗(고려)를 정벌하고 포로로 잡은 민호로 髙州(고주)를 설치하였다. 半頂山(반정산)[2]과 樂河(낙하)[3]가 있다. 중격에 속하며 현은 1개이다.

-        삼한현. 진한은 부여가 되고 변한은 신라가 되고 마한은 고구려[髙麗]가 되었다. 개태 년간에 성종이 고려를 정벌하고 3국의 포로로 잡은 유민들로 현을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5000이다.

13)  武安州, 觀察. 唐沃州地. 太祖俘漢民居木葉山下, 因建城以遷之, 號杏堝新城. 復以遼西户益之, 更曰新州. 統和八年改今名. 初刺史, 後升. 有 黄栢嶺 約囉水 格黙勒水. 屬中京. 統縣一.

沃野縣.

武安州(무안주), 觀察. 唐國(당국) 沃州(옥주)의 땅이다. 태조가 포로된 漢民(한민)으로 木葉山(목엽산) 아래에 거하게 하고 성을 쌓고 그들을 옮겨 杏堝新城(행과신성)이라고 불렀다. 더불어 요서의 민호를 더하였는데 이름을 바꾸어 新州(신주)라고 하였다. 統和(통화) 8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刺史州(자사주)였다가 후에 승격되었다. 黄栢嶺(황백령)[4]과 約囉水(약라수, 뇨라수裊羅水)[5]와 格黙勒水(격묵륵수, 개몰리수箇沒里水) 가 있다. 중경에 속하고 현은 1개이다.

-        沃野縣(옥야현).

14)  利州, , 觀察. 本中京阜俗縣. 統和二十六年置刺史州, 開泰元年升. 屬中京. 統縣一.

阜俗縣. 唐末, 契丹漸熾, 役使奚人, 遷居琵琶川. 統和四年置縣. 初隸彰愍宫, 更隸中京, 後置州. 仍屬中京.

利州(리주), 中, 觀察. 원래 중경의 阜俗縣(부속현)이다. 統和(통화) 26년에 刺史州(자사주)로 설치하였고 開泰(개태) 원년에 승경시켜 중경에 소속되었다. 현은 1개이다.

-        阜俗縣(부속현). 唐國(당국) 말기에 거란이 점차 강성해져서 奚人(해인)들을 부려먹었으므로 琵琶川(비파천)으로 옮겨 살았다. 統和(통화) 4년에 현을 설치하였다. 초기에는 彰愍宫(창민궁)에 예속시켰다가 고쳐 중경에 예속시켰고 후에 주를 설치하여 중경에 속하게 하였다.

15)  榆州, 髙平軍, , 刺史. 本漢臨渝縣地, 後隸右北平驪城縣. 唐載初二年, 析慎州[6]置黎州. 處靺鞨部落, 後為奚人所據. 太宗南征, 横帳嘉哩以所俘慎州民置州. 開泰中没入. 屬中京. 統縣二.

和衆縣. 本新黎縣地.

永和縣. 本漢昌城縣地. 統和二十二年置.

榆州(유주), 髙平軍(고평군), 下, 刺史. 본래 漢의 臨渝縣(임유현)의 땅이었는데 후에 右北平(우북평) 驪城縣(여성현)에 예속되었다. 唐(당) 載初(재초, 689~690) 2년에 慎州(신주)[7]를 쪼개어 黎州(려주)를 설치하였다. 靺鞨(말갈) 부락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는데 후에 奚人(해인)들이 점거하였다. 太宗(태종)이 남쪽을 정벌하고 横帳(횡장)인 嘉哩(가리, 해리解里)가 慎州(신주)[8]의 사로잡은 백성들로 주를 설치하였다. 開泰(개태) 년간에 몰수하여 중경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

-        和衆縣(화중현). 원래 新黎縣(신려현)의 땅이다.

-        永和縣(영화현). 본래 漢의 昌城縣(창성현)의 땅이다. 統和(통화) 22년에 설치하였다.

16)  澤州, 廣濟軍, , 刺史. 本漢土垠縣地. 太祖俘蔚州民, 立寨居之, 採煉陷河銀冶. 隸中京留守司. 開泰中置澤州. 有 松亭關 神山 九宫嶺 石子嶺 灤河 撒河. 屬中京. 統縣二.

神山縣. 神山在西南.

灤河縣. 本漢徐無縣地. 屬永興宫.

澤州(택주), 廣濟軍(광제군), 下, 刺史. 원래 漢의 土垠縣(토은현) 땅이다. 太祖(태조)가 蔚州(울주)의 사로잡은 백성으로 작은 성을 짓고 살게 하였는데 陷河(함하)에서 은을 채집하게 하였다. 中京留守司(중경유수사)에 속한다. 開泰(개태) 년간에 澤州(택주)를 설치하였다. 松亭關(송정관)과 神山(신산)과 九宫嶺(구궁령)과 石子嶺(석자령)과 灤河(난하)과 撒河(살하)가 있다. 중경에 속하며 현은 2개이다.

-        神山縣(신산현). 神山(신산)이 서남쪽에 있다.

-        灤河縣(난하현). 원래 漢의 徐無縣(서무현) 땅이다. 永興宫(영흥궁)에 속한다.

17)  北安州, 興化軍, , 刺史. 本漢女祁縣地, 屬上谷郡. 晉為馮跋所據, 唐為奚王府西省地. 聖宗以漢户置北安州. 屬中京. 統縣一.

利民縣[9]. 本漢且居縣地.

北安州(북안주), 興化軍(흥화군), 上, 刺史. 원래 漢의 女祁縣(녀기현) 땅인데 上谷郡(상곡군)에 속했었다. 晉때에는 馮跋(풍발)이 점거하였고 唐때에는 奚王(해왕)의 府西省의 땅이다. 聖宗(성종)이 漢의 가구들로 北安州(북안주)를 설치하였다. 중경에 속하고 현은 1개이다.

-        利民縣(리민현)[10]. 본래 漢의 且居縣(차거현)의 땅이다.

18)  潭州, 廣潤軍, , 刺史. 本中京之龍山縣, 開泰中置州, 仍屬中京. 統縣一.

龍山縣. 本漢交黎縣地. 開泰二年以習家寨置.

潭州(담주), 廣潤軍(광윤군), 下, 刺史. 원래 중경의 용산현이었다. 開泰(개태) 년간에 주를 설치하였고 아울러 중경에 예속시켰으며 현은 1개이다.

-        龍山縣(용산현). 원래 漢의 交黎縣(교려현)의 땅이다. 開泰(개태) 2년에 習家寨(습가채)로 설치하였다.

19)  松江州, 勝安軍, , 刺史. 開泰中置. 統和八年省, 復置. 屬中京. 統縣一.

松江縣. 本漢文成縣地. 邉松漠, 啇賈㑹衝. 開泰二年置縣. 有松山川.

松江州(송강주)[11], 勝安軍(승안군), 下, 刺史. 開泰(개태) 년간에 설치하였다. 統和(통화) 8년에 없앴고 다시 설치하였다. 중경에 속하며 현은 한 개이다.

-        松江縣(송강현)[12]. 원래 漢의 文成縣(문성현) 땅이다. 변두리에 松漠(송막)이 있고 상점들이 뒤얽혀 모여 있다. 개태 2년에 현을 설치하였고 松山川(송산천)이 있다.

 

宋王曾上契丹事曰.., 出燕京北門, 至望京館. 五十里至順州. 七十里至檀州, 漸入山. 五十里至金溝館. 將至館, 川原平曠, 謂之金溝淀. 自此入山, 詰曲登陟, 無復里堠, 但以馬行記日, 約其里數. 九十里至古北口, 兩傍峻崖, 僅容車軌. 又度徳勝嶺, 盤道數層, 俗名思鄉嶺, 八十里至新館. 過 雕窠嶺 偏槍嶺, 四十里至如來館. 過烏灤河, 東有灤州, 又過黒斗嶺, (一名) 度雲嶺, 芹菜嶺, 七十里至柳河館. 松亭嶺甚險峻, 七十里打造部落, 東南行五十里至牛山館. 八十里至鹿兒峽館. 過蝦蟆嶺, 九十里至鐵漿館. 過石子嶺, 自此漸出山, 七十里至富谷館. 八十里至通天館. 二十里至中京大定府. 城垣卑小, 方圓纔四里許. 門但重屋, 無築闍之制. 南門曰朱夏, 門内通歩廊, 多坊門. 又有市樓四.., 曰 天方 大衢 通闤 望闕. 次至大同館. 其門正北 曰 陽徳 閶闔. 城内西南隅岡上有寺. 城南有園圃, 宴射之所. 自過古北口, 居人草庵板屋, 耕種, 但無桑柘., 所種皆從壠上, 虞吹沙所壅. 山上長松鬱然, 深谷中時見畜牧牛馬槖馳, 多青羊黄豕.

宋國(송국) 王曾(왕증)의 上契丹事(상계단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燕京(연경)의 북문을 나와서 望京館(망경관)에 이르렀다. 50리를 더 가니 順州(순주)에 이르렀고 70리를 더 가니 檀州(단주)에 이르렀다. 점차 산속으로 들어갔다. 50리를 가니 金溝館(금구관)에 이르렀다. 장차 금구관(館)에 이르려고 할때에 강가의 들판들이 평평하고 넓었는데 이를 金溝淀(금구정)이라고 하였다. 이곳으로부터 산속으로 들어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는데 재차 길의 거리를 알만한 흙무더기[오늘날에 길안내판을 말한다, 無復里堠]도 없었으며[13] 다만 말로 여행한 날수로 그 거리를 계산하였다. 90리를 가면 古北口(고북구)에 이르는데 양쪽 벼랑이 험준한 낭떨어지로 겨우 수레만 다닐 수 있었다. 또한 徳勝嶺(덕승령)를 지날때에 구불구불한 길이 층층이 나 있었는데 세속에서는 思鄉嶺(사향령)이라고 한다. 80리를 가서 新館(신관)에 이르렀다. 雕窠嶺(조과령)과 偏槍嶺(편창령)을 지나는 40리의 길을 가니 如來館(여래관)[14]에 이르렀다. 烏灤[15](오란하)를 지나니 동쪽에 灤州(란주)가 있었다. 또한 度[16]雲嶺(도운령)이라고도 하는[17] 黒斗嶺(흑두령)[18]과 芹菜嶺(근채령)을 지나는 70리의 길을 가면 柳河館(류하관)이 있다. 松亭嶺(송정령)은 아주 험준한데 70리를 가면 打造部落(타조부락)[19]에 이르며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면 牛山館(우산관)에 이른다. 80리를 가면 鹿兒峽館(록아협관)에 이른다. 蝦蟆嶺(하마령)을 지나는 90리의 길을 가면 鐵漿館(철장관)에 이른다. 石子嶺(석자령)을 지나면서부터 점차 산에서 나오게 되는 70리를 가면 富谷館(부곡관, 부욕관)에 이른다. 80리를 가면 通天館(통천관)에 이른다. 20리를 가면 中京大定府(중경대정부)에 이른다. 성의 담장은 낮고 작으며 方圓(방원)이 겨우 4리 밖에 되지 않는데 문 하나에 여러 집으로 통하며 망루를 만들지 않았다. 남쪽의 문은 朱夏(주하)라고 하는데 문 안에는 통하는 복도가 많고 마을로 들어가는 문이 많다. 또한 시장[市樓]이 4개인데 天方(천방)과 大衢(대구)와 通闤(통환)과 望闕(망궐)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大同館(대동관)에 이르렀다. 그 문의 정북쪽은 陽徳(양덕)과 閶闔(창합)이다. 성의 안의 서남쪽[20] 귀퉁이 언덕 위에는 사찰이 있다. 성 남쪽에는 동산[園圃]이 있는데 잔치와 궁술을 하는 장소이다. 古北口(고북구)를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은 풀로 초막을 짓고 널판지로 집을 짓고 살았는데 밭을 갈고 씨을 뿌려 농사를 지었지만 다만 뽕나무와 산뽕나무를 경작하지 않았다. 씨를 심을때에는 모두 밭두둑을 따라 심었는데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산 위에는 길게 소나무가 우거져있고 깊은 산골짜기 안에 사찰에는 소와 말과 낙타(槖馳[21])등을 키우는 것이보이며 푸른 양[青羊[22]]과 누런 돼지도 많다.

 

2.            성주 흥부군 절도주

成州, 興府軍, 節度. 晉國長公主以媵户置, 軍曰長慶, 隸上京. 復改軍名. 統縣一.

-        同昌縣

성주, 흥부군, 節度. 晉國(진국) 長公主(장공주)가 보낸 가족들을 이용하여 설치하였는데 軍(군)은 長慶(장경)이라고 부르고 上京(상경)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軍(군)의 이름을 고쳐서 (중경에 소속시켰다). 현은 한 개이다.

-        同昌縣(동창현).

 

3.            흥중부

興中府. 本覇州彰武軍, 節度. 古孤竹國. 漢柳城縣地. 慕容皝以柳城之北, 龍山之南, 福徳之地, 乃築龍城, 構宫廟, 改柳城為龍城縣, 遂遷都, 號曰和龍宫. 慕容垂復居焉, 後為馮跋所滅. 元魏取為遼西郡. 隋平髙保寧, 置營州. 煬帝廢州置柳城郡. 唐武徳初改營州總管府, 尋為都督府. 萬歳通天中, 陷李萬榮. 神龍初, 移府幽州. 開元四年復治柳城. 八年西徙漁陽. 十年還柳城. 後為奚所據. 太祖平奚及俘燕民, 將建城, 命韓知方擇其處. 乃完葺柳城, 號霸州彰武軍, 節度. 統和中, 制置 建 霸 宜 錦 白川 等五州. 尋落制置, 隸積慶宫. 後屬興聖宫. 重熙十年升興中府. 有 大華山 小華山 香髙山 麝香崖 天授皇帝刻石在焉 駐龍峪 神射泉 小靈河. 統州二, 縣四.

1)       興中縣. 本漢柳城縣地. 太祖掠漢民居此, 建霸城縣. 重熙中置府, 更名.

2)       營丘縣. 析霸城置.

3)       象雷縣. 開泰二年以麥務川置. 初隸中京, 後屬.

4)      閭山縣. 本漢且慮縣. 開泰二年以羅家軍置. 隸中京, 後屬.

5)       安徳州, 化平軍, , 刺史. 以霸州安徳縣置, 來屬. 統縣一.

-              安徳縣. 統和八年析霸城東南龍山徙河境户置. 隸乾州, 更屬霸州, 置州來屬.

6)       黔州, 阜昌軍, . 刺史. 本漢遼西郡地. 太祖平渤海, 以所俘户居之, 隸黒水河提轄司. 世宗置州, 析 宜 霸 二州漢户益之. 初隸永興宫, 更隸中京, 後置府, 來屬. 統縣一.

-              盛吉縣. 太祖平渤海, 俘興州盛吉縣民來居, 因置縣.

興中府(흥중부). 원래 覇州(패주) 彰武軍(창무군), 節度이다. 옛날 孤竹國(고죽국)이며 漢의 柳城縣(류성현)의 땅이다. 慕容皝(모용황)이 柳城(류성)의 북쪽과 龍山(룡산)의 남쪽을 福徳(복덕)의 땅이라고 하여 龍城(룡성)을 쌓고 궁궐과 사당을 만들고 류성을 고쳐 龍城縣(룡성현)이라 하고 드디어 도읍을 옮겼고 和龍宫(화룡궁)이라고 불렀다. 慕容垂(모용수)가 돌아와 거하였지만 후에 馮跋(풍발)에게 멸망당하였다. 북위(元魏)가 취하여 遼西郡(료서군)이라고 하였다. 隋(수국)이 髙保寧(고보녕)을 평정하고 營州(영주)를 두었다. 煬帝(양제)가 주를 폐하고 柳城郡(류성군)을 두었다. 唐(당국) 武徳(무덕) 초기에 營州總管府(영주총관부)로 고치고 얼마 안있어 都督府(도독부)라고 하였다. 만세통천 년간에 李萬榮(리만영)에게 함락당하였다. 神龍(신룡)초기에 도독부를 유주로 옮겼다. 開元(개원) 4년에 다시 돌아와 柳城(류성)에서 다스렸다. 8년에 서쪽으로 漁陽(어양)으로 옮겼다. 10년에 류성으로 돌아왔다. 후에 奚(해)들이 거하는 곳이 되었다. 太祖(태조)가 奚(해)와 燕(연)을 백성들을 평정하여 포로들로 성을 건설하려고 할때에 韓知方(한지방)[23]에게 명하여 그 터를 택하도록 하였다. 이내 류성을 수선[完葺]하여 霸州(패주) 彰武軍(창무군), 節度라고 불렀다. 統和(통화) 년간에 建州(건주) 霸州(패주) 宜州(의주) 錦州(금주) 白川州(백천주) 등 5개의 주를 두었다. 尋落制置하고 積慶宫(적경궁)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興聖宫(흥성궁)에 예속시켰다. 重熙(중희) 10년에 興中府(흥중부)로 승격시켰다. 大華山(대화산)과 小華山(소화산)과 香髙山(향고산)과 麝香崖(사향애) 즉 하늘이 皇帝(황제)에게 준 새겨진 돌이 있는 곳과 駐龍峪(주룡욕)과 神射泉(신사천)과 小靈河(소령하)가 있다. 주는 2개이고 현은 4개이다.

1)    興中縣(흥중현). 원래 漢의 柳城縣(류성현) 땅이다. 太祖(태조)가 漢의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여기에 살게하고 霸城縣(패성현)을 건설하였다. 重熙(중희) 년간에 府(부)를 설치하고 이름을 바꿨다.

2)    營丘縣(영구현). 霸城(패성)을 쪼개서 설치하였다.  

3)    象雷縣(상뢰현). 開泰(개태) 2년에 麥務川(맥무천)으로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중경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중흥부로 소속시켰다.

4)    閭山縣(려산현). 원래 漢의 且慮縣(차려현)이다. 開泰(개태) 2년에 羅家軍(라가군)으로 설치하였고 중경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중흥부로 소속되었다.

5)    安徳州(안덕주), 化平軍(화평군), 下, 刺史. 원래 霸州(패주) 安徳縣(안덕현)으로 설치하였던 것인데 내속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한 개이다.

-              安徳縣(안덕현). 統和(통화) 8년에 霸城(패성) 동남쪽의 龍山(룡산) 徒河(도하) 지경에 있는 가구들로 설치한 것이다. 건주(乾州)에 속하였는데 고쳐서 패주(霸州)에 소속되었다가 안덕주를 설치하자 내속하였다.

6)    검주(黔州), 부창군(阜昌軍), 下. 刺史. 원래 漢의 료서군(遼西郡) 땅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평정하고 포로로 잡은 자들로 이곳에 거하게 하였으며 흑수하(黒水河) 제할사(提轄司)에 예속시켰다. 세종(世宗)[24]이 주를 설치하였는데 의주(宜)와 패주(霸)의 漢의 사람들로 이곳에 더하였다. 처음에는 영흥궁(永興宫)에 소속시켰다가 고쳐서 중경에 소식시켰고 후에 중흥부에 소속시켰다가 내속하였다. 현은 한 개이다.

-        성길현(盛吉縣). 태조(太祖)가 발해를 평정하고 (발해의) 흥주(興州) 성길현(盛吉縣)의 사로잡은 백성들을 이곳에 거하게 하고 현을 설치한 것이다.

 

4.            의주 숭의군

宜州, 崇義軍, , 節度. 本遼西絫縣地. 東丹王毎秋畋于此. 興宗以定州俘户建州. 有墳山, 松栢連亘百餘里, 禁樵採.., 浚河, 累石為堤. 隸積慶宫. 統縣二.

弘政縣. 世宗以定州俘户置. 民工織絍, 多技巧.

聞義縣. 世宗置. 初隸海北州, 後來屬.

의주, 숭의군, 上, 節度. 원래 요서군 絫縣(류현)의 땅이다. 東丹王(동단왕)이 매년 가을마다 이곳에서 사냥하였었다. 興宗(흥종)이 定州(정주)의 포로들로 주를 설치하였다. 墳山(분산)이 있는데 송백나무가 100여리를 뻗어져 있고 나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浚河(준하)가 있는데 많은 돌로 방죽을 쌓았다.[25] 積慶宫(적경궁)에 소속되었고 현은 2개이다.

-        弘政縣(홍정현). 世宗(세종)이 定州(정주)의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포로들 중에 베를 짜는 장인들이 있는데 아주 재주가 많다.

-        聞義縣(문의현). 世宗(세종)이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海北州(해북주)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이곳으로 내속하였다.

 

5.            금주 림해군

錦州, 臨海軍, , 節度. 本漢遼東無慮縣. 慕容皝置西樂縣. 太祖以漢俘建州. 有 大胡僧山 小胡僧山 大查牙山 小查牙山 淘河島. 義宫. 統州一, 縣二.

-        永樂縣.

-        安昌縣.

-        嚴州, 保肅軍, , 刺史. 本漢海陽縣地. 太祖平渤海, 遷漢户雜居興州境, 聖宗於此建城焉. 義宫, 來屬. 統縣一. 興城縣.

錦州(금주), 臨海軍(림해군), 中, 節度. 원래 漢의 요동군 無慮縣(무려현)이다. 慕容皝(모용황)은 西樂縣(서락현)을 설치하였다. 太祖(태조)가 漢의 포로들로 주를 설치하였다. 大胡僧山(대호승산)과 小胡僧山(소호승산)과 大查牙山(대사아산)과 小查牙山(소사아산)과 淘河島(도하도)가 있다. 弘義宫(홍의궁)에 속하고 관할하는 현은 한 개이고 현은 두 개이다.

-        永樂縣().

-        安昌縣(안창현).

-        嚴州(엄주), 保肅軍(보숙군), 下, 刺史. 원래 漢의 海陽縣(해양현) 땅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漢의 백성들로 하여금 興州(흥주)의 지경에서 서로 섞어 살게 하였다. 성종은 이곳에 성을 건설하였다. 弘義宫(홍의궁)에 속하였다가 내속하였다. 현은 한 개로 興城縣(흥성현)이다.

 

6.            천주 장녕군

川州, 長寧軍, , 節度. 本唐青山州地. 太祖弟明王安圖置. 會同三年, 詔為白川州. 安圖子察克以大逆誅, 沒入, 省白川州. 初隸崇徳宫, 統和中屬文忠王府. 統縣三.

-        理縣. 統和八年以諸宫提轄司户置.

-        咸康縣.

-        宜民縣. 統和中置

川州(천주), 長寧軍(장녕군), 中, 節度. 원래 唐(당국) 青山州(청산주) 땅이다. 태조의 동생 明王(명왕) 安圖(안도)[26]가 설치하였다. 會同(회동) 3년에 조서를 내려 白川州(백천주)로 하게 하였다. 安圖(안도)의 아들 察克(찰극)[27]이 대역죄를 지어 목을 베어 죽임을 당하였고 (주를) 몰수하고 간략하게 川州(천주)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崇徳宫(숭덕궁)에 속하였다가 和中(화중)에 文忠王府(문충왕부)에 속하였으며 현은 3개이다.  

-        弘理縣(홍리현). 統和(통화) 8년에 諸宫提轄司(제궁제할사)의 가구로 설치하였다.  

-        咸康縣(함강현).

-        宜民縣(의민현). 統和(통화) 년간에 설치하였다.

 

7.            건주 보정군

建州, 保靜軍, , 節度. 唐武徳中, 置昌黎縣. 太祖完葺故壘, 置州. 漢乾祐元年, 故石晉太后詣世宗, 求於漢城側耕墾自贍. 許於建州南四十里給地五十頃, 營構房室, 創立宗廟. 州在靈河之南, 屢遭水害, 聖宗遷於河北唐崇州故城. 初屬武寧軍, 隸永興宫, 後屬敦睦宫. 統縣二.

-        永霸縣.

-        永康縣. 本唐昌黎縣地.

建州(건주), 保靜軍(보정군), 上, 節度. 唐(당국) 武徳(무덕) 년간에 昌黎縣(창려현)을 설치하였다. 太祖(태조)는 옛날의 보루[壘]를 수리하여 주를 설치하였다. 漢(한) 乾祐(건우) 원년에 옛 石晉(석진)의 太后(태후)가 世宗(세종)에게 나아가 漢城(한성) 옆에서 밭을 경작하면서 살기를 구하였으므로 건주 남쪽 40리에 50경의 땅을 공급하기를 허락하였다. 집을 짓고 종묘를 세웠다. 주는 靈河(령하)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여러 번 수해를 당하였기에 聖宗(성종)이 령하의 북쪽, 옛 唐(당국) 崇州(숭주)의 성으로 옮겼다. 초기에는 武寧軍(무녕군)에 속하였고 永興宫(영흥궁)에 속하였다가 후에는 敦睦宫(돈목궁)에 속하였다. 현은 2개이다.

-        永霸縣(영패현).

-        永康縣(영강현) 원래 唐의 昌黎縣(창려현) 땅이다.

 

8.            래귀 귀덕군

來州, 歸徳軍, , 節度. 聖宗以女直五部歳饑來歸, 置州居之. 初刺史, 後升隸永興宫. 有 三州山 六州山 五脂山. 統州二縣一.

1)    來賔縣. 本唐來逺縣地.

2)     隰州, 平海軍, , 刺史. 慕容皝置集寧縣. 聖宗括帳户遷信州, 大雪不能進, 建城於此, 置焉. 隸興聖宫, 來屬. 統縣一.

-        海陽縣. 本漢縣. 瀕海, 地多鹻鹵, 置鹽場於此

3)     遷州, 興善軍, , 刺史. 本漢陽樂縣地. 聖宗平大延琳, 遷歸州民, , 來屬. 有箭笴山. 統縣一.

-        遷民縣.

4)     潤州, 海陽軍, , 刺史. 聖宗平大延琳, 遷寧州之民, 居此, 置州. 統縣一.

-        海濵縣. 本漢陽樂縣地, 遷潤州, 本東京城内渤海民户, 因叛移於此.

來州(래주), 歸徳軍(귀덕군), 下, 節度. 聖宗(성종)이 여진(女直) 5부(部)가 해마다 흉년이 들어 와서 의탁하므로 주를 설치하고 살게 하였다. 처음에는 자사주였다가 후에 승격시켜 永興宫(영흥궁)에 속하게 하였다. 三州山(삼주산)과 六州山(륙주산)과 五脂山(오지산)이 있다. 관할하는 주는 2개이고 현은 1개이다.

1)    來賔縣(래빈현). 원래 唐의 來逺縣(래원현) 땅이다..

2)    隰州(습주), 平海軍(평해군), 下, 刺史. 慕容皝(모용황)이 集寧縣(집녕현)을 설치하였다. 聖宗(성종)이 帳(아장)의 민호들을 한데 묶어 信州(신주)로 옮길때에 큰 눈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므로 이곳에 성을 건설하고 주를 설치하였다. 興聖宫(흥성궁)에 속하였다가 내속하였다. 현은 한 개이다.

-        海陽縣(해양현). 원래 漢의 현이다. 바닷가에 있어 땅이 염분이 많으므로 이곳에 鹽場(염장)을 설치하였다.

3)    遷州(천주), 興善軍(흥선군), 下, 刺史. 원래 漢의 陽樂縣(양락현) 땅이다. 聖宗(성종)이 大延琳(대연림)을 평정하고 歸州(귀주)의 백성을 옮겨 설치하고 내속하게 하였다. 箭笴山(전가산)이 있다. 현은 한 개이다.

-        遷民縣(천민현).

4)    潤州(윤주), 海陽軍(해양군), 下, 刺史. 聖宗(성종)이 大延琳(대연림)을 평정하고 寧州(녕주)의 백성들을 이곳에 살게하고 주를 설치하였다. 현은 한 개이다.

-  海濵縣(해빈현). 원래 漢의 陽樂縣(양악현) 땅인데 潤州(윤주)로 옮겼다. 본래 東京(동경) 성안의 渤海(발해) 백성들인데 반란을 일으켜 이곳으로 옮겼다.

 

 



[1] 長興縣이라고도 한다.

[2] 平頂山이라고도 한다.

[3] 河라고도 한다.

[4] 柏嶺라고도 한다.

[5] 汝羅守捉(여라수착)이 있는 곳일 수도 있다. 본문에 約囉(약라)란 곧 만주어로서 響箭 즉 鳴鏑(명적)을 뜻한다. 다른말로 “우는살”이라고도 한다.

[6] 鎭州라고도 한다.

[7] 鎭州라고도 한다.

[8] 鎭州라고도 한다.

[9] 興化縣이라고도 한다.

[10] 興化縣이라고도 한다.

[11] 松山州라고도 한다.

[12] 松山縣이라고도 한다.

[13] 里堠: 亦作里候. 古道旁分程里所的土堆,今之里程碑.

[14] 臥如來館이라고도 한다.

[15] 濼으로도 쓴다.

[16] 渡로 쓰기도 한다.

[17] 一名이 없는 판본도 있다.

[18] 黑을 墨으로 쓰거나 摸로 쓰기도 한다.

[19] 七十里至打造部落館으로 적혀있기도 한다.

[20] 城西內로 된 판본도 있다.

[21] 橐駝 혹은 橐駞로 써있기도 하다.

[22] 靑鹽(청염)으로 써 있기도 한다.

[23] 韓知古라고 하기도 한다.

[24] 安帝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다.

[25] 개로왕이 쌓은 방죽?

[26] 安端이라고도 한다

[27] 察割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