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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지리지

요사 지리지 상경도, 상경임황부, 조주, 회주, 경주, 태주, 장춘주, 오주, 영주 등 전문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1.           상경도(上京道)

 

1)      상경임황부

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 太祖取 天梯 博囉 等三山之勢于葦甸, 射金齪箭以識之, 謂之龍眉. 神冊三年城之, 名曰皇都. 天顯十三年, 更名上京, 府曰臨潢.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원래 한국(漢)의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의 땅이다. 신국(新)왕망(莽)은 북안평(北安平)으로 고쳤었다. 태조(太祖)는 천제산(天梯)과 박라산(博囉) 등 3개의 산의 기세를 위전(葦甸)에서 취하여 금착전(金齪箭)을 쏘아 그것을 깨달아 룡미궁(龍眉)이라고 하였다. 신책(神冊) 3년에 그곳에 성을 쌓았고 황도(皇都)라고 불렀다. 천현(天顯) 13년에 이름을 상경(上京)으로 바꾸었고 부(府)를 림황(臨潢)이라고 하였다.

 

淶流河自西北南流, 遶京三面, 東入于曲江, 其北東流按春河. 又有 御河 沙河 河 潢河 鴨子河 塔魯河[1] 狼河 蒼耳河 輞子河 臚胊河 涼河 瀦河 鴛鴦湖[2] 興國惠民湖 廣濟湖 鹽 百狗 火神淀[3] 馬盂山 兒山[4] 野鵲山 鹽山 鑿山 松山 平地松林 大斧山 列山 庫哩山 魯塔山 唐所封達呼哩氏 勒特王 墓 存焉. 三萬六千五百, 轄 軍 府 州 城 二十五, 統縣十.

래류하(淶流河)가 서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상경(上京)의 3면을 에워쌓고 동쪽으로 흘러 곡강(曲江)으로 들어가는데, 곡강(其)의 북동쪽 흐름은 안춘하(按春河, 혹은 按出河)이다.[5] 또한 어하(御河)와 사하(沙河)와 흑하()와 황하(潢河)와 압자하(鴨子河)와 탑로하(塔魯河, 他魯河 혹은 撻魯河)와 랑하(狼河)와 창이하(蒼耳河)와 망자하(輞子河)와 려구하(臚胊河)와 음량하(涼河)와 저하(瀦河)와 원앙호(鴛鴦湖, 혹은 鴛鴦)과 흥국혜민호(興國惠民湖)와 광제호(廣濟湖)와 염락(鹽)과 백구락(百狗)과 화신정(火神淀, 혹 大神淀)과 마우산(馬盂山)과 토아산(兒山)[6]과 야작산(野鵲山)과 염산(鹽山)과 착산(鑿山)과 송산(松山)과 평지송림(平地松林)과 대부산(大斧山)과 렬산(列山)과 고리산(庫哩山, 혹은 굴렬산屈劣山)과 로탑산(魯塔山, 혹은 륵득산勒得山)이 있는데 당국(唐)이 봉한 달호리씨(達呼哩氏) 륵특왕(勒特王)의 묘가 있는 곳이다. 가구수는 3,6500이고 다스리는 군(軍)과 부(府)와 주(州)와 성(城)은 25개이며 다스리는 현은 10개이다.

 

      臨潢縣. 太祖 天贊 初, 南攻 燕 薊 以所 俘人 散居 潢水之北, 縣臨 潢水, 故以名. 地宜種植. 三千五百.

림황현(臨潢縣). 태조(太祖)가 천찬(天贊) 초기에 남쪽으로 연(燕)과 계(薊)를 공격하여 사로잡은 사람들로 황수(潢水)의 북쪽에 흩어져 살게 하였었다. 현(縣)에서는 황수(潢水)가 바라다보였으므로 림황현이라고 이름지었다. 땅은 파종하기에 마땅하다. 가구수는 3500이다.

      長泰縣. 本渤海國長平縣民, 太祖伐大, 先得是邑, 遷其人於京西北, 與漢民雜居. 四千.

장태현(長泰縣). 원래 발해국(渤海國)의 장평현(長平縣)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조(太祖)가 대인선(大)을 벌하고, 그 마을을 취하기 전에 그곳의 백성들을 상경의 서북쪽에 옮겨놓고 지나인(漢民)과 같이 살게 하였었다. 가구수는 4000이다.

      定霸縣. 本扶餘府强師縣民, 太祖下扶餘, 遷其人於京西, 與漢人雜處, 分地耕種. 統和八年, 以諸提轄司人. 隸長寧. 三千.

정패현(定霸縣). 원래 부여부(扶餘府) 강사현(强師縣)의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태조(太祖)가 부여(扶餘)를 下하여 그 백성들을 상경의 서쪽으로 옮긴 뒤에 지나인(漢人)과 같이 살게 하였고 땅을 나누어 경작하게 하였다. 통화(統和) 8년에 제궁제할사(提轄司)들의 사람과 가족들을 가지고 설치하였다. 장녕궁(長寧)에 속한다. 가구수는 3000이다.

      保和縣. 本渤海國富利縣民, 太祖破龍州, 盡徙富利縣人散居京南. 統和八年, 以諸提轄司人. 隸彰愍. 四千.

보화현(保和縣). 원래 발해국(渤海國) 부리현(富利縣)의 백성으로 구성되었었다. 태조(太祖)가 룡주(龍州)를 격파하고 부리현(富利縣)의 백성들을 모두 옮겨 상경의 남쪽에 흩어져살게 하였다. 통화(統和) 8년에 제궁제할사(諸提轄司)의 가족들로 설치하였다. 창민궁(彰愍)에 속한다. 가구수는 4000이다.

      潞縣. 本幽州潞縣民, 天贊元年, 太祖破薊州, 掠潞縣民, 布於京東, 與渤海人雜處. 隸崇徳宫. 三千.

로현(潞縣). 원래 유주(幽州) 로현(潞縣)의 백성들로 구성되었었다. 천찬(天贊) 원년에 태조(太祖)가 계주(薊州)를 격파하고 로현(潞縣)의 백성을 노략하여 상경의 동쪽에 놓고 발해사람들과 같이 살게 하였다. 숭덕궁(崇徳宫)에 속하며 가구수는 3000이다.

      易俗縣. 本遼東渤海之民, 太平九年, 大延琳結構遼東人叛, 圍守經年, 乃降, 盡遷於京北, 置縣居之. 是年, 又徙渤海叛人家屬置焉. 一千.

역속현(易俗縣). 원래 료동(遼東)의 발해(渤海)의 백성들이다. 태평(太平) 9년에 대연림(大延琳)이 료동(遼東) 사람들과 결탁하여 배반하였는데 경계하며 지키기를 몇 년이 경과하니 이에 항복하였다. 모두 상경의 북쪽에 옮겨 현을 설치하고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해에 또 반란을 일으킨 발해사람들을 옮겨 이곳에 속하게 하여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1000이다.

      遷遼縣. 本遼東諸縣渤海人, 大延琳叛, 擇其謀勇者置之左右. 後以城降, 戮之, 徙其家屬於京東北, 故名. 一千.

천료현(遷遼縣). 원래 료동(遼東)에 있던 여러 현(縣)의 발해사람으로 구성되었었다.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키자 꾀가 있고 용맹한 자들을 가려서 그들의 좌우에 설치하니 후에 성이 항복하여 그들을 도륙하였다. 그곳의 사람들을 옮겨 상경의 동북에 속하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천료현이라고 한 것이다. 가구수는 1000이다.

      渤海縣. 本東京人. 因叛, 徙置.

발해현(渤海縣). 원래 동경(東京)사람이었는데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옮겨서 설치한 것이다.

      興仁縣. 開泰二年置.

흥인현(興仁縣). 개태(開泰) 2년에 설치하였다.

      宣化縣. 本遼東神化縣民, 太祖破鴨. 盡徙其民居京之南. 統和八年, 以諸提轄司人. 隸彰愍. 四千.

선화현(宣化縣). 원래 료동(遼東) 신화현(神化縣) 백성들로 구성되었었다. 태조(太祖)가 압록부(鴨)를 격파하고 그 백성을 모두 옮겨 상경의 남쪽에 살게하였다. 통화(統和) 8년에 제궁제할사(諸提轄司)의 사람과 가족들로 설치하였다. 창민궁(彰愍)에 속한다. 가구수는 4000이다.

 

上京, 太祖創業之地. 負山抱海, 天險足以. 地沃宜耕植, 水草便畜牧. 金齪一箭, 二百年之基, 壯矣. 天顯元年, 平渤海歸, 乃展, , 名以天贊. 起三大殿.. , 開皇 安 五鑾. 中有代帝王御容, 每月朔望 節辰 忌日, 在京文武百官並赴致祭. 又於城東南隅建天雄寺, 奉安烈考宣簡皇帝遺像. 太祖崩, 應天皇后於義節寺斷腕, 寘太祖陵. 即寺建斷腕樓, 樹碑焉. 太宗援立晉, 遣宰相 馮道 劉煦 等持節, 具鹵簿 法服至此, 上太宗及應天皇后尊號. 太宗詔部並依漢制, 御開皇殿, 闢承天門受禮, 因改皇都上京.

상경(上京)은 태조(太祖)가 창업한 땅이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어 지세가 험한 것에 만족하고 굳건히 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경작하기에 좋으며 물과 풀들이 목축을 편하게 한다. 金齪一箭하여 200년의 웅거함이 장대하다. 천현(天顯) 원년에 발해(渤海)를 평정하고 돌아가 이네 부곽()을 펼치고[展] 궁실()을 세우고 천찬(天贊)라고 연호를 세웠으며 삼대전(三大殿)을 일으켜 세웠으니 개황전(開皇)과 안덕전(安)과 오란전(五鑾)라고 한다. 가운데에는 역대 제왕의 어용(御容)이 있다. 매월 삭망(朔望) 절진(節辰) 기일(忌日)에 상경의 문무백관들이 다같이 제사에 나아간다. 또한 내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천웅사(天雄寺)를 지어서 렬고(烈考)[7] 선간황제(宣簡皇帝)의 초상[遺像]을 봉안하였다. 이 해에 태조(太祖)가 죽으니 응천황후(應天皇后)가 의절사(義節寺)에서 팔목을 끊었고 태조(太祖)의 릉에 안치하였다. 곧 의절사에 단완루(斷腕樓)를 세우고 비석을 세웠다. 태종(太宗)이 후진(晉)을 건국하는 것을 돕고 재상(宰相)인 풍도(馮道)와 류후(劉煦) 등의 지절(持節)을 보내 로부(鹵簿)와 법복(法服)을 갖추고 이곳에 이르러 태종(太宗)과 응천황후(應天皇后)의 존호를 올리었다. 태종(太宗)을 번부(番部)에 조서를 내리고 아울러 한국(漢)의 제도를 의지하게 하였다. 개황전(開皇殿)에 어거하여 승천문(承天門)을 열어 예를 받으니 황도(皇都)를 고쳐 상경(上京)이라 하였다.

 

二丈, 不設敵樓, 幅員二十七里. , 東曰迎春, 曰鴈兒., 南曰順陽, 西曰金, 曰西鴈兒, 曰南福. 其北謂之皇城, 三丈, 有樓櫓. , 東曰安東, 南曰大順, 西曰乾, 北曰拱辰. 中有大. 南門曰承天, 有樓閣., 東門曰東華, 西曰西華. 此通出入之所. 正南街東, 留守司衙, 次鹽, 次南門, 龍寺街. 南曰臨潢府, 其側臨潢縣. 縣西南崇孝寺, 承天皇后建. 寺西長泰縣, 又西天長觀. 西南國子監, 監北孔子廟, 廟東節義寺. 又西北安國寺, 太宗所建. 寺東齊天皇后故宅, 宅東有元妃宅, 即法天皇后所建也. 其南有聖尼寺, 綾錦院 省司 麴院, 贍國 省司二倉, 皆在大西南, 八作司與天雄寺對. 南城謂之漢城, 南當, 各有樓對峙, 下列井肆. 東門之北潞縣, 又東南興仁縣. 南門之東鶻營, 回鶻商販留居上京, 置營居之. 西南同文驛, 諸國信使居之. 驛西南臨潢驛, 以待夏國使. 驛西福先寺. 寺西宣化縣, 西南定霸縣, 縣西保和縣. 西門之北易俗縣, 縣東遷遼縣.

(城)의 높이는 2장[8]이고 적루(敵樓)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폭원(幅員)이 27리이다. 문은 동쪽에 있는 것으로 영춘문(迎春)과 안아문(鴈兒)이 있고, 남쪽에는 순양문(順陽)이 있고, 서쪽에는 김봉문(金)과 서안아문(西鴈兒)과 남복문(南福)이 있다. 그 북쪽을 황성(皇城)이라고 하는데 높이가 3장이며 루로(樓櫓)가 있다. 문은 동쪽에 있는 것이 안동문(安東)이고 남쪽에 있는 것이 대순문(大順)이며 서쪽에 있는 것이 건덕문(乾)이고 북쪽에 있는 것이 공진문(拱辰)이다. 가운데에는 큰 內(내)가 있는데 內(내)의 남쪽문이 승천문(承天)이며 루각(樓閣)이 있고, 동쪽 문은 동화문(東華)이고, 서쪽문은 서화문(西華)인데 이곳이 (내)와 통하여 출입하는 곳이다. 정남쪽의 거리 동쪽은 留守司衙(류수사아)이고 다음은 鹽(염철사)이고 다음은 南門(남문)과 龍寺街(룡사가)이다. 남쪽은 臨潢府(림황부)라고 하는데 그 옆은 臨潢縣(림황현)이다. 림황현(縣) 서남쪽은 崇孝寺(숭효사)인데 承天皇后(승천황후)이 건설하였다. 숭효사(寺) 서쪽은 장태현(長泰縣)이고 또한 서쪽은 천장관(天長觀)이다. 서남쪽은 國子監(국자감)이고 국자감 북쪽은 孔子廟(공자묘)이며 공자묘의 동쪽은 節義寺(절의사)이다. 또한 서북쪽은 安國寺(안국사)인데 太宗(태종)이 건설한 것이다. 안국사의 동쪽은 齊天皇后(제천황후)의 옛 집[宅]이 있고 집[宅]의 동쪽은 元妃宅(원비댁)이 있는데 즉 法天皇后(법천황후)가 건설한 것이다. 그 남쪽으로는 聖尼寺(성니사) 綾錦院(릉금원) 省司(내성사) 麴院(국원)이 있는데 나라를 구휼하는 省司(성사)의 2 창고는 모두 큰 (내)의 서남쪽에 있으며 八作司(팔작사)와 더불어 天雄寺(천웅사)와 마주보고 있다. 남쪽의 성(城)은 한성(漢城)[9]이라고 하는데, 남쪽으로는 길이 가로질러 있고 각각 망루가 우뚝솟아 마주보고 있으며 아래로는 우물이 늘어서 있다. 동쪽 문의 북쪽은 로현(潞縣)이고 또한 동남쪽은 흥인현(興仁縣)이다. 남쪽 문의 동쪽은 회골영(鶻營)인데 회골(回鶻)[10]의 상판(商販)[11]들이 상경(上京)에 머물러 살았으므로 영(營)을 설치하여 살게한 것이다. 서남쪽은 동문역(同文驛)인데 여러 나라들의 믿을만한 사신들이 거주한다. 동문역(驛)의 서남쪽은 림황역(臨潢驛)인데 하국(夏國)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림황역(驛)의 서쪽은 복선사(福先寺)이며 복선사의 서쪽은 선화현(宣化縣)이고 서남쪽은 정패현(定霸縣)이다. 정패현의 서쪽은 보화현(保和縣)이다. 서쪽 문의 북쪽은 역속현(易俗縣)이며 역속현의 동쪽은 천료현(遷遼縣)이다.

 

周廣順中, 胡嶠記曰.., 上京西樓, 有邑屋市肆, 交易無錢而用布. 有綾錦諸工作 宦者 翰林 伎術 坊 角觝 儒 僧尼 道士. 中國人 汾 幽 薊 .

후주(周) 광순(廣順, 951~954) 년간에 호교기(胡嶠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상경의 서쪽 망루에는 마을의 집들이 시장을 이루어 늘어서 있는데 돈을 이용하지 않고 옷감를 이용하여 교역한다. 비단[綾錦]이 있는데 모두 벼슬아치[宦者]와 한림(翰林)과 기술(伎術)과 교방()과 각저(角觝)와 유생(儒)과 승니(僧尼)와 도사(道士)를 위한 것이다. 중국인들도 더불어 성한데 유주(幽)와 계주(薊)가 다수를 이룬다.

 

宋大中祥符九年, 薛映記曰.., 上京者 中京正北八十里至松山, 七十里至崇信, 九十里至廣寧,五十里至姚家寨, 五十里至咸寧館, 三十里度潢水石橋, 旁有饒州, 唐於契丹嘗置饒樂, 令渤海人居之. 五十里保和館, 水河七十里宣化, 五十里長泰. 西二十里有佛舍 民居, 即祖州. 又四十里至臨潢府. 自過崇信館乃契丹舊境, 其南奚地也. 入西門, 門曰金, 有臨潢. 子城東門曰順陽. 北行至景福門, 又至承天門, 有 昭 宣政 二殿與, 皆東向. 臨潢西北二百餘里號涼淀, 在饅頭山南, 避暑之處. , 掘地丈餘即有堅氷.

송국(宋)의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9년에 설영기(薛映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상경(上京)은 이러한데, 중경(中京)에서 정북쪽으로 80리를 가면 송산관(松山)에 이르고 70리를 가면 숭신관(崇信)에 이르고 90리를 가면 광녕관(廣寧)에 이르고 50리를 가면 요가채관(姚家寨)에 이르고 50리를 가면 함녕관(咸寧館)에 이르고 30리를 가서 황수(潢水)를 건너 석교(石橋)의 옆으로 요주(饒州)가 있는데 당국(唐)이 거란(契丹)에 일찍이 요악(饒樂)을 설치하였으며 지금은 발해(渤海) 사람들이 살고 있다. 50리를 가면 보화관(保和館)인데 흑수하(水河)를 건너 70리는 선화관(宣化)이고 50리는 장태관(長泰)이다. 장태관() 서쪽 20리에 불사(佛舍)들이 있어 백성들이 사는데 즉 조주(祖州)이다. 또한 40리를 가면 림황부(臨潢府)에 이른다. 自過 숭신관(崇信館)을 지나면서부터 거란(契丹)의 옛 경내인데 그 남쪽으로 해(奚)의 땅이다. 서쪽 문으로 들어가는데 문의 이름은 금덕문(金)이고 안에는 림황관(臨潢)이 있다. 자성(子城)[12]의 동쪽 문은 순양문(順陽)이라고 한다. 북쪽으로 가면 경복문(景福門)에 이른다. 또한 승천문(承天門)에 이르는데 안쪽에는 소덕(昭)과 선정(宣政) 등 2개의 전(殿)이 전려()와 더불어 있는데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다. 림황(臨潢)의 서북쪽 200여리를 량정(涼淀)이라고 부르는데 만두산(饅頭山) 남쪽에 있으며 더위를 피하는 곳이다. 풀들이 많으며 파놓은 땅은 여러 장이 되는데 굳게 언 얼음이 있다.

 

2)      조주천성군

祖州, 天成軍. , 節度. 本遼右八部紳穆里地. 太祖秋獵多於此, 始置西樓. 後因建城, 號祖州. 祖昭烈皇帝 祖莊敬皇帝 祖考簡獻皇帝 皇考宣簡皇帝 所生之地, 故名. 二丈, 無敵棚, 幅員九里. , 東曰望京, 南曰大夏, 西曰液山, 北曰興國. 西北隅有. 殿曰兩明, 奉安祖考御容., 曰二儀, 以白金鑄太祖像., , , 各有太祖時兵仗器物及服御皮毳之類, 存之以示後嗣, 使勿忘本. 南門曰興聖, 凡三門, 上有樓閣, 東西有角樓. 州廨及諸官廨舍, 綾錦院, 班院祗候 漢 渤海 三百人, 供給府取索. 東南, 四隅有樓對峙, 下連市肆. 東長霸縣, 西咸寧縣. 有祖山, 山有太祖天皇帝廟, 御靴. 又有 龍門 黎谷 液山 液泉 白馬 獨石 天梯之山. 水則南沙河 西液泉. 太祖陵鑿山殿, 曰明殿. 殿南嶺有膳堂, 以備時祭. 門曰. 東偏有聖蹤殿, 立碑述太祖遊獵之事. 殿東有樓, 立碑以紀太祖創業之功. 皆在州西五里. 天顯中太宗建, . 統縣二, 城一.

      長霸縣. 本龍州長平縣民, 遷于此. 二千.

      咸寧縣. 本長寧縣. 破遼陽, 遷其民置. 一千.

      越王城. 太祖伯父裕王實西伐 党項 吐渾, 俘其民放牧於此, 因建城. 在州東南二十里. 一千.

조주(祖州), 천성군(天成軍). 上, 節度. 원래 료(遼)의 우 8부(部) 신목리(紳穆里, 혹은 세몰리世沒理)의 땅이다. 태조(太祖)는 가을에 이곳에서 사냥을 많이 했으며 처음으로 서루(西樓)를 두었고 후에 성을 건설하고 조주(祖州)라고 불렀다. 고조() 소렬황제(昭烈皇帝)와 증조() 장경황제(莊敬皇帝)와 조고(祖考) 간헌황제(簡獻皇帝)와 황고(皇考) 선간황제(宣簡皇帝)가 태어난 곳이라서 이렇게 이름지었다. 성의 높이는 2장이고 적붕(敵棚)이 없으며 폭원(幅員) 9리이다. 문은 다음과 같은데, 동쪽 문은 망경(望京)이라고 하고 남쪽 문은 대하(大夏)라 하고 서쪽 문은 액산(液山)이라 하고 북쪽 문은 흥국(興國)이라 하였다. 서북쪽 귀퉁이에는 내성()이 있다. 량명전(兩明殿)에는 조고(祖考)의 어용(御容)이 봉안되어 있고, 이의전(二儀殿)에는 백금으로 태조(太祖)의 형상을 주조하였고, 흑룡전(龍殿)과 청비전(秘殿)에는 각각 태조(太祖)가 미약할 때에 병장기물이나 복어(服御)와 가죽과 털옷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후사들에게 보여주어 그 근본을 잊지말게하려는 것이다. 안쪽 남문(南門)은 흥성문(興聖)이라 하여 무릇 3개의 문이 있고 위에는 루각(樓閣)이 있으며 동서쪽에는 각루(角樓)가 있다. 동쪽은 주(州)의 관아나 모든 관해사(官廨舍)와 릉금원(綾錦院)이 있고 원(院)을 나누어 땅의 기후를 살핀다. 번()과 한(漢)과 발해(渤海) 등 300명은 내부를 탐색하는데로 공급된다. 동남쪽은 길들이 가로놓여져있는데 사방 귀퉁이에는 누각이 서로 마주보고 치솟아 있으며 아랫쪽에는 시장들이 죽 늘어서 있다. 동쪽은 장패현(長霸縣)이고 서쪽은 함녕현(咸寧縣)이다. 조산(祖山)이 있는데 산에는 태조(太祖)천황제(天皇帝)의 묘가 있으며 어화(御靴)가 있다. 또한 룡문산(龍門山)과 려곡산(黎谷山)과 액산(液山)과 액천산(液泉山)과 백마산(白馬山)과 독석산(獨石山)과 천제산(天梯山)이 있다. 물길로는 남사하(南沙河)와 서액천(西液泉)이 있다. 태조(太祖)의 릉을 뚫은 산을 전(殿)으로 하여 이름을 명전(明殿)이라 하였다. 명전의 남쪽 산봉우리에는 선당(膳堂)이 있는데 시제(時祭)를 위하여 갖추어 놓았다. 문은 흑룡()이라고 한다. 동쪽으로 치우쳐 성종전(聖蹤殿)이 있는데 태조가 사냥하며 놀았던 일들을 기록한 비를 세워 놓았다. 성종전(殿)의 동쪽으로는 누각이 있고 이곳에 태조가 창업한 공로들을 기록한 비를 세워 놓았다. 모두 주의 서쪽 50리에 있다. 천현(天顯) 년간에 태종(太宗)이 건설하였고 홍의궁(弘義)에 속한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고 성이 1개이다.

      장패현(長霸縣). 본래 룡주(龍州) 장평현(長平縣) 백성들이고 이곳으로 옮겼다. 가구수는 2000이다.

      함녕현(咸寧縣). 원래 장녕현(長寧縣)인데 료양(遼陽)을 격파하고 그곳 백성을 옮겨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1000이다.

      월왕성(越王城). 태조(太祖)의 백부 유열왕(裕, 혹은 우월왕于越王) 실로(實, 혹은 술로述魯)가 서쪽으로 당항(党項)과 토혼(吐渾)를 정벌하고 그 포로된 백성을 이곳에 놓고 성을 건설하였다.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20리에 있고 가구수는 1000이다.

 

3)      회주 봉릉군

, 奉陵軍, , 節度. 本唐歸誠州. 太宗行帳放牧於此. 天贊中, 從太祖破扶餘城, 下龍泉府, 俘其人, 築寨居之. 同中, 掠燕薊所俘亦置此. 太宗崩, 葬西山, . 大同元年, 世宗置州以奉焉. 是年, 有騎十餘, 獵于祖州西五十里大山中, 見太宗白馬, 獨追白狐, 射之, 一發而斃., 忽不見, 但獲狐與矢. 是日, 太宗崩于. 後於其地建廟, 又於州之凰門繪太宗馳騎貫狐之像. 穆宗被害, 陵側, 凰殿以奉焉. 涼殿, 行幸避暑之所. 皆在州西二十里. 隸永興. 統縣二.

      扶餘縣. 本龍泉府. 太宗遷渤海扶餘縣降於此, 世宗置縣. 一千五百.

      顯理縣. 本顯理府人, 太祖伐渤海, 俘其王大, 遷民於此. 世宗置縣. 一千

회주(), 봉릉군(奉陵軍), 上, 節度. 원래 당국(唐)의 귀성주(歸誠州)이다. 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장막을 옮겨다니며 방목하였다. 천찬(天贊) 년간에 태조(太祖)로부터 부여성(扶餘城)을 격파하고 룡천부(龍泉府)를 물리쳐 그곳 사람들을 포로로 삼아 채(寨)를 쌓고 살게하였다. 회동(會同) 년간에 연(燕)과 계(薊)를 약탈하고 포로를 가지고 다시 설치하였다. 태종(太宗)이 죽자 서산(西山)에 장사지내고 회릉()이라고 불렀다. 대동(大同) 원년에 세종(世宗)이 주(州)를 설치하여 받들었다. 이해에 말탄 자가 10여인이 있어 조주(祖州) 서쪽 50리에 있는 대산(大山) 가운데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태종(太宗)이 흰말을 타고 홀로 흰 여우를 추격하여 화살로 쏘았는데 한발에 맞추었으나 홀연히 (태종이) 보이지 않고 오직 여우와 화살만 얻었을 뿐이었다. 이 날에 태종은 란성()에서 죽었다. 후에 이곳에 묘를 설치하였다. 또한 회주(州)의 봉황문(凰門)에 태종이 말을 달리며 여우를 쏘는 형상의 그림을 그려넣었다. 목종(穆宗)이 해를 당한 후에 회릉() 곁에 장사를 지내고 봉황전(凰殿)를 지어 받들었다. 청량전(涼殿)이 있는데 행차할 때 더위를 피하는 곳이다. 대개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영흥궁(永興)에 예속되었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

      부여현(扶餘縣). 원래 룡천부(龍泉府)의 (사람들이다). 태종(太宗)이 발해(渤海) 부여현(扶餘縣)의 항복한 가구들을 이곳에 옮기었고 세종이 현을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1500이다.

      현리현(顯理縣). 원래 현리부(顯理府) 사람들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정벌하고 그 왕인 대인선을 사로잡고 백성들을 이곳에 옮겼다. 세종이 현을 서리하였다. 가구수는 1000이다.

 

4)      경주현녕군

慶州, 寧軍, , 節度. 本太保山河之地, 巖谷險峻. 穆宗建城, 河州, 毎歳來幸, 射虎障鷹, 軍國之事多委大臣, 後遇弑於此. 以地苦寒, 統和八年, 州廢. 聖宗秋畋, 愛其, 建號慶州. 遼國五代祖巴圖, 貌異常, 有武略, 力敵百人, 衆推. 生于巴圖山, 因以名., , 葬山下. 在州二百里. 慶雲山, 嶺也. 聖宗駐蹕, .., 吾萬, 當葬此. 興宗遵遺命, 建永慶陵. 有望仙殿 御容殿. 置 番 漢 守陵三千, 並隸大都總管司. 在州西二十里. 山 赤山 太保山 老翁嶺 饅頭山 興國湖 錫沙 . 景福元年復置, 更隸興聖. 統縣二

      . 河之地. 景福元年, 括落帳人, 從便居之. 六千.

      孝安縣.

      富義縣. 本義州, 太宗遷渤海義州民於此. 重熙元年降義, 後更名隸.

경주(慶州), 현녕군(玄寧軍),[13] 上, 節度. 원래 태보산(太保山) 흑하()의 땅이며 바위와 골짜기가 험준하다. 목종(穆宗)이 성을 세우고 흑하주(河州)라고 하였는데 해마다 행차하여 호랑이를 쏘아잡고 매를 가둬잡던 곳이다. 목종은 군국의 일을 대신들에게 맡기었으므로 후에 이곳에서 살해를 당하였다. 이 땅은 거칠고 차기 때문에 통화(統和) 8년에 주를 폐하였다. 성종(聖宗)은 가을에 사냥하면서 그곳이 남달리 빼어난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경주(慶州)라고 하였다. 료국(遼國)의 5대조 파도(巴圖, 혹은 발돌勃突)은 외모가 이상하고 군사적 계략을 가지고 있고 100명을 상대할 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파도산(巴圖山, 발돌산)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고 죽어서도 파도산 아래에 장사지냈다. 파도산은 경주의 (XX쪽으로) 200리에 있다. 경운산(慶雲山)은 원래 흑령()이다. 성종(聖宗)이 말을 머물다가 “내가 만세를 마치면 이곳에 장사지내야만 한다.”고 탐내며 말하였다. 흥종(興宗)이 유명(遺命)을 좇아 영경릉(永慶陵)을 세웠다. 망선전(望仙殿)과 어용전(御容殿)이 있다. 번(番)과 한(漢)의 사람들로 릉을 지키는 가구로 3000호를 세웠으며 아울러 대내도총관사(大都總管司)에 소속시켰는데 주(州)의 서쪽 20리에 있다. 흑산()과 적산(赤山)과 태보산(太保山)과 로옹령(老翁嶺)과 만두산(饅頭山)과 흥국호(興國湖)과 석사락(錫沙)과 흑하()가 있다. 경복(景福) 원년에 다시 설치하여 흥성궁(興聖)에 예속시켰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14]

      현덕현(玄). 원래 흑산()과 흑하()의 땅이다. 경복(景福) 원년에 括落帳人, 從便居之. 가구수는 6000이다.

      효안현(孝安縣).

      부의현(富義縣). 원래 의주(義州)였는데 태종(太宗)이 발해(渤海)의 의주(義州)의 백성을 이곳에 옮겼다. 중희(重熙) 원년에 항복을 받아 의풍현(義)으로 하였다가 후에 이름을 바꾸었으며 홍의궁(弘義)에 예속되었다.

 

5)      태주덕창군(泰州昌軍)

泰州, 昌軍, 節度. 本契丹二十部族放牧之地. 黒䑕族累犯通化州, 民不能禦, 遂移東南六百里來, 建城居之, 以近本族. 黒䑕穴居, , , , 故以名. 州隸延慶, 兵事屬東北統軍司. 統縣二..

      樂康縣. 倚郭.

      興國縣. 本山前之民, 因罪配遞至此, 興宗置縣. 七百.

태주(泰州), 덕창군(昌軍), 節度. 원래 거란(契丹) 20부가 방목하던 땅이다. 흑서족(黒䑕)이 자주 통화주(通化州)에 침범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능히 막지 못하였다. 드디어 동남쪽 600리로 옮겨와서 성을 건축하고 그곳에 거하였으며 以近本族(본래 종족에 가까워졌다). 흑서족(黒䑕)들은 동굴에 살고 피부가 검고 입술이 뾰쪽하여 쥐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주(州)는 연경궁(延慶)에 속하고 병사와 관련된 일은 동북통군사(東北統軍司)에 속한다. 현은 2개이다.

      낙강현(樂康縣). 성곽에 의지한다.

      흥국현(興國縣). 원래 산전(山前)의 백성인데 죄를 지어 점차 이곳으로 귀향들을 왔었는데[因罪配遞至此] 흥종(興宗)이 현을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700이다.

 

6)      장춘주 소양군

長春州, 韶陽軍, , 節度. 本鴨子河春獵之地. 興宗重熙八年置. 隸延慶, 兵事屬東北統軍司. 統縣一.

長春縣. 本混同江地. 燕 薊 犯罪者流配於此. 二千.

장춘주(長春州), 소양군(韶陽軍), 下, 節度. 원래 압자하(鴨子河)에 있는 봄에 사냥하는 땅이다. 흥종(興宗) 중희(重熙) 8년에 설치하였다. 연경궁(延慶)에 속한다. 병사와 관련된 일은 동북통군사(東北統軍司)에 속한다. 현이 한 개이다.

      장춘현(長春縣). 본래 혼동강(混同江)의 땅이다. 연(燕)과 계(薊)의 범죄한 자들을 이곳에 유배보냈다. 가구수는 2000이다.

 

7)      오주 정안군.

烏州, 靜安軍, 刺史. 本烏丸之地, 東胡之種也. 遼北大王布拉占, 建城, 後官收. 隸興聖. 有遼河 夜河 烏丸川 烏丸山. 統縣一.

愛民縣. 布拉王從軍南征, 俘漢民置于此. 一千.

오주(烏州) 정안군(靜安軍). 자사주(刺史)이다. 본래 오환(烏丸)의 땅인데 동호(東胡)의 종족이다.료(遼)의 북대왕(北大王)인 포랍(布拉, 또는 발랄撥剌)이 차지하여 牧이 되었다가 성을 건설하였지만 후에 관청을 몰수하였다. 흥성궁(興聖)에 속한다. 료하(遼河)와 야하(夜河)와 오환천(烏丸川)과 오환산(烏丸山)이 있다. 관할하는 현은 한 개이다.

      애민현(愛民縣). 포랍왕(혹은 발랄왕)이 군대를 따라 남쪽을 정벌하여 한(漢)의 백성을 사로 잡고 이곳에 (현을)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1000이다.

 

8)      영주 영창군

永州, 永昌軍, 觀察. 承天皇太后所建. 太祖於此置南樓. 乾亨三年, 置州于皇子罕巴墓側. 東潢河, 南土河, 二水合流, 故號永州. 冬月牙帳多駐此, 謂之冬巴納. 有木葉山, 上建契丹始祖之廟, 善汗在南廟, 哈屯在北廟, 繪塑二聖八子神像. 相傳有神人白馬, 自 馬盂山 浮 土河 而東, 有天女駕牛車由 平地松林 泛 潢河 而下. 至木葉山, 二水合流, 相遇配偶, 生八子. 其後族屬漸盛, 八部. 行軍及春秋時祭, 必用白馬, 示不忘本云. 興王寺, 有白衣觀音像. 太祖 援 石晉 主中國, 自潞州迴, 入幽州, 幸大悲閣, 指此像曰.., 我夢神人令送石郎為中國帝, 即此也. 因移木葉山, 建廟, 春秋告賽, 家神. 興軍必告之, 乃合符傳箭於諸部. 又有 淀山 林淀, 亦曰馬淀. 隸彰愍. 統縣三.

      長寧縣. 本顯府縣名. 太祖平渤海, 遷其民於此. 四千五百.

      . 利府義州. 遼兵破之, 遷其民於南樓之西北, 仍名義州. 元年廢州, 改今縣. 在州西北一百里. 又嘗改富義縣, 屬慶州. 始末不可具考, 今兩存之. 一千五百.

      慈仁縣. 太宗以皇子濟色古勒亡, 置慈州墳西. 重熙元年州廢, 改今縣. 四百.

영주(永州), 영창군(永昌軍), 관찰주(觀察)이다.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건설하였다. 태조(太祖)는 이곳에 남루(南樓)를 설치하였었다. 건형(乾亨) 3년에는 주(州)를 황자(皇子) 한파(罕巴, 혹은 한팔韓八)묘의 옆에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황하(潢河)가 있고 남쪽에는 토하(土河)가 있는데 2개의 강물이 합류한 곳이므로 영주(永州)라고 불렀다. 겨울철에 아장(牙帳)[15]이 많아 말을 이곳에 머물게 할 수 있으므로 동파납(冬巴納, 혹은 동날발冬捺鉢)이라고 한다. 목엽산(木葉山)이 있으며 산위(上)에는 거란시조의 묘를 지었다. 기선가한(善汗, 기수가한)의 묘는 남쪽에 있고 합둔(哈屯, 가둔可屯, 극돈克敦, 가돈可敦)의 묘는 북쪽에 있다. 繪塑二聖八子神像. 相傳有神人白馬, 自 馬盂山 浮 土河 而東, 有天女駕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 而下. 至木葉山, 二水合流, 相遇配偶, 生八子. 그 후에 족속들이 점차 번성하여져서 8부로 나뉘었다. 항상 군사로 다니거나 해마다 시제를 지낼때에는 항상 백마(白馬)와 청우()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근본을 잊지 말라고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흥왕사(興王寺)에는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있다. 태조(太祖)[16]는 석진(石晉)을 도와 중국의 주인이 되어 로주(潞州)로부터 돌아 유주(幽州)로 들어가 대비각(大悲閣)에 행차하여 이러한 신상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꿈에 신인(神人)이 석랑(石)를 보내 내가 중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목엽산(木葉山)으로 옮겨 묘를 짓고 해마다 고하여 굿을 하고 이를 높여 가신(家神)이라고 하였다. 군사를 일으킬 때 항상 여기에 고하였고, 乃合符傳箭於諸部. 또한 고정산(淀山)과 류림정(林淀)이 있는데 또한 마정(馬淀)이라고도 한다. 창민궁(彰愍)에 속한다. 현은 3개이다.

      장녕현(長寧縣). 원래 현덕부(顯)의 현縣의 이름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백성을 이곳에 옮겼다. 가구수는 4500이다.

      의풍현(義). 원래 철리부(利府) 의주(義州)이다. 료(遼)의 병사들이 그들을 격파하여 그 백성을 남루(南樓)의 서북쪽에 옮겼고 이름을 의주(義州)라고 하였다. 중희(重) 원년에 주를 폐하였고 지금 현으로 고쳤다. 주에서 서북쪽으로 100리에 있다. 또한 일찍이 부의현(富義縣)으로 고쳐 경주(慶州)에 소속시켰었는데 그 연원을 상고하는 것이 불가능하하여 지금 양쪽에 다 적는다. 가구수는 1500이다.

      자인현(慈仁縣). 태종(太宗)이 황자(皇子)인 제색고륵(濟色古勒, 只撒古)이 죽자, 자주를 무덤 서쪽에 설치하였었다. 중희(重熙) 원년에 주를 폐하였고 지금 현으로 고쳤다. 가구수는 400이다.

 

9)      의곤주 계성군

儀坤州, 聖軍, 節度. 本契丹右大部地. 應天皇后建州. 回鶻諾蘇居之, 至四世孫庸安穆, 生應天皇后舒, 適太祖. 太祖開拓四方, 平渤海, 后有力焉. 俘掠有伎藝者多歸帳下, 謂之舒新. 以所生之地置州. 州建聖院, 儀寧殿, 太祖天皇帝 應天地皇后 銀像在焉. 隸長寧. 統縣一.

      廣義縣. 本回鶻部牧地. 應天皇后以四征所俘居之, 因建州縣. 統和八年, 以諸提轄司置來, 十三年. 二千五百.

의곤주(儀坤州), 계성군(聖軍), 절도주(節度)이다. 원래 거란 우대부(右大部)의 땅인데 응천황후(應天皇后)가 주를 설치하였다. 회골낙소(回鶻諾蘇, 회골나사回鶻糯思)의 땅에 살다가 4세손 용안목로(庸安穆, 容我梅里) 에 이르러 응천황후(應天皇后) 서로씨(舒)를 낳아 태조(太祖)에게 시집보냈다. 태조가 사방을 개척하여 발해를 평정할때에 응천황후의 힘이 있었다. 사로잡은 자 중에는 재주있는 사람들이 많아 아장(帳)아래로 돌아가게 했는데 이를 서신(舒新, 屬珊) 이라고 한다. 태어난 땅에 주를 설치하였고 주에는 계성원(聖院)을 지었고 가운데를 의녕전(儀寧殿)으로 하였으며 이곳에는 태조천황제(太祖天皇帝)와 응천지황후(應天地皇后)의 은상(銀像)이 있다. 장녕궁(長寧)에 속한다. 현은 1개이다.

      광의현(廣義縣). 원래 회골부(回鶻部)가 방목하던 땅이다. 응천황후(應天皇后)가 사방을 정벌하여 사로잡은 자들로 거하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주와 현을 설치하였다. 통화(統和) 8년에 제궁제할사(諸提轄司)의 가족들로 래원현(來)을 설치하였다가 13년에 병입되었다. 가구수는 2500이다.

 

10) 용화주 흥국군

龍化州, 興國軍, , 節度. 本漢北安平縣地. 契丹始祖善汗居於此, 稱龍庭. 太祖建東樓. 唐天復二年, 太祖 徳哷勒部 額爾, 破 代北, 遷其民, 建城居之. 明年, 伐女直, 俘數百實焉. 天祜元年, 修東城, 制度頗壯麗. 十三年, 太祖 於城東 金鈴岡 受尊號 曰 大聖大明天皇帝, 建元神. 天顯元年, 崩于東樓. 太宗升節度. 隷彰愍, 兵事屬北路女直兵馬司. 刺史州一, 未詳. 統縣一.

i)                龍化縣. 太祖東伐女直, 南掠 燕 薊, 所俘建城置邑. 一千.

룡화주(龍化州), 흥국군(興國軍), 下, 節度. 원래 한국(漢國) 북안평현(北安平縣)의 땅이다. 거란 시조 기선한(善汗, 기수가한)이 이곳에서 살았고 룡정(龍庭)이라고 칭하였다. 태조(太祖)는 동루(東樓)를 건설하였다. 당국(唐) 천복(天復) 2년에 태조(太祖)는 덕렬륵부(徳哷勒部, 질렬부迭烈部)의 액이기목(額爾, 이리근夷離菫)이 되어, 대북(代北)을 치고 그 백성을 옮겨서 성을 짓고 그곳에 살게 하였다. 다음해에 여진(女直)을 정벌하여 포로들 100가구로 채웠다. 천호(天祜) 원년에 동성(東城)을 증축하였는데 제도(制度)가 자못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13년에 태조는 성의 동쪽 금령강(金鈴岡)에서 존호를 받고 대성대명천황제(大聖大明天皇帝)라고 하였으며 연호를 신책(神)이라고 하였다. 천현(天顯) 원년에 동루(東樓)에서 죽었다.  태종(太宗)이 절도(節度)의 주(州)로 승격시켰다. 창민궁(彰愍)에 속하며 군사의 일은 북로여진병마사(北路女直兵馬司)에 속한다. 자사주(刺史州)가 하나인데 자세하지 않다. 관할 현은 한 개이다.

      룡화현(龍化縣). 태조(太祖)가 동족으로 여진(女直)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연(燕)과 계(薊)를 노략질하여 사로잡은 자들로 성을 건설하고 마을을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1000이다.

 

11) 강성주(降聖州) 개국군(開國軍)

降聖州, 開國軍, , 刺史. 本大部落東樓之地. 太祖春月行帳多駐此. 應天皇后夢神人金冠素服, 執兵仗, 貌甚 丰美, 異獸十二隨之. 中有兎躍入后, 因而有娠, 遂生太宗. 雲覆帳, 火光照室, 有聲如雷, 諸部異之. 穆宗建州. 四面各三十里, 禁樵採放牧. 先屬延昌, 後隸彰愍. 統縣一.

      永安縣. 本龍原府慶州縣名. 太祖平渤海, 州之永安, 遷其人置寨於此, 建縣. 八百.

강성주(降聖州), 개국군(開國軍), 下, 刺史. 원래 대부락(大部落)의 동루(東樓)의 땅이다. 태조(太祖)가 봄에 아장(帳)에 나가 이곳에서 여러 번 말을 머물르게했다. 응천황후(應天皇后)가 꿈에 신인(神人)이 금관과 소복을 입고 병장기를 쥐었는데 모양이 심히 이쁘고 아름다웠다. 이상한 짐승 12마리가 그를 따르고 가운데에 검은 토끼가 있어 뛰어들어 응천황후에게로 들어와 품으니 이로 인하여 아이를 갖게되고 드디어 태종(太宗)을 낳았다. 때에 검은 구름이 아장(帳)을 뒤덮었고, 불과 빛이 실(室)을 비추었으며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나니 모든 부(部)들이 이를 이상히 여겼다. 목종(穆宗)이 주(州)를 설치하였다. 사면 각각 30리에는 초채(樵採)와 방목(放牧)을 금하였다. 전에는 연창궁(延昌)에 속하였다가 후에 창민궁(彰愍)에 속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한 개다.

      영안현(永安縣). 원래 룡원부(龍原府) 경주(慶州)에 있던 현의 이름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평정하고 회주()의 영안현(永安)을 파하고 그 백성을 옮겨 채(寨)를 이곳에 설치하고 현을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800이다.

 

12) 요주(饒州) 광의군(匡義軍)

饒州, 匡義軍, , 節度. 本唐饒樂府地. 貞觀中, 置松漠府. 太祖完葺故壘. 有潢河 長水 穆丹河 山 大福山 松山. 隸延慶. 統縣三.

      長樂縣. 木遼城縣名. 太祖伐渤海, 遷其民, 建縣居之. 四千, 一千.

      臨河縣. 本永縣人, 太宗分兵伐渤海, 遷於潢水之曲. 一千.

      安民縣. 太宗以渤海諸邑所俘雜置. 一千.

요주(饒州), 광의군(匡義軍), 中, 節度. 원래 당국(唐) 요락부(饒樂府)의 땅이다. 정관(貞觀) 년간에 송막부(松漠府)를 두었다. 태조(太祖)가 完葺故壘(?). 황하(潢河)와 장수락(長水)과 목단하(穆丹河, 몰타하沒打河) 와 청산()과 대복산(大福山)과 송산(松山)이 있다. 연경궁(延慶)에 속한다. 관할 현은 3개이다.

      장악현(長樂縣). 본래 료성(遼城)의 현(縣)의 이름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정벌하고 그 백성을 옮겨 현을 설치하여 살게하였다. 가구수는 4000인데 一千納鐵.

      임하현(臨河縣). 본래 영풍현(永) 사람들이다. 태종(太宗)이 병사를 나누어 발해를 정벌하고 황수(潢水)의 마을(曲)으로 옮겼다. 가구수는 1000이다.

      안민현(安民縣). 태종(太宗)이 발해의 여러 마을에서 잡은 자들을 섞어서 설치하였다. 가구수는 1000이다.

 

13) 두하군주

頭下軍州, 皆諸王 外戚 大臣及諸部從征俘掠, 或置生口, 各團集建州縣以居之. 帳諸王 國舅 公主許創立州城, 自餘不得建城郭. 朝廷賜州縣額. 其節度使朝廷命之, 刺史以下皆以本主部曲充焉. 官位九品之下及井邑商賈之家, 各歸頭下., 唯酒課納上京鹽.

두하군주(頭下軍州), 모두 여러 왕들과 외척과 대신들과 여러 부락들이 나아가 정벌하고 약탈한 자들로 설치하였는데 각 집단이 주와 현을 설치하여 그곳에 거하였다. 횡장()의 여러 왕들과 국구(國舅)와 공주(公主)들에게 주(州)와 성(城)을 창립하는 것을 허하였다. 그러나 남은 것으로 성곽을 건축하지는 못하였다. 조정에서 주와 현의 수효를 하사하였다. 그곳의 절도사는 조정에서 명한 것이고 자사주 이하는 모두 본래 주로 부곡(部曲)으로 가득하였다. 관위(官位)가 9품의 아래로 정읍(井邑)과 상가(商賈)의 가구에는 세금을 각기 두목(頭) 아래로 매기는데 오직 술에 대한 세금은 상경(上京) 염철사(鹽鐵司)에 바친다.

 

i)                徽州, , 節度. 景宗女秦晉大長公主所建. 媵臣萬, 在宜州之北二百里, 因建州城. 北至上京七百里. 節度使以下, 皆公主府署. 一萬.

휘주(徽州), 선덕군(宣), 節度. 경종(景宗)의 딸 진진대장공주(秦晉大長公主)가 건설하였다. 신하들 1000가구를 보냈고 의주(宜州)의 북쪽 200리에 있으며 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북쪽으로 상경까지 700리이다. 절도사 이하는 공주가 관리[府署]한다. 가구수는 1,0000이다.

ii)              成州, 長慶軍, 節度. 節度. 聖宗女晉國長公主以上賜媵臣. 在宜州北一百六十里, 因建州城. 北至上京七百四十里. 四千.

성주(成州), 장경군(長慶軍), 성종(聖宗)의 딸 진국장공주(晉國長公主)가 황제[上]가 보낸 신하들의 가구로 설치하였다. 의주(宜州) 북쪽 160리에 주와 성을 건설하였다. 북쪽으로 상경까지 740리이다. 가구수는 4000이다.

iii)            懿州, 廣順軍, 節度. 聖宗女燕國長公主以上賜媵臣. 在顯州東北三百里, 因建州城. 西北至上京八百里. 四千.

의주(懿州), 광순군(廣順軍), 節度. 성종(聖宗)의 딸 연국장공주(燕國長公主)가 황제가 보낸 신하의 가구들로 설치하였다. 현주(顯州) 동북쪽 300리에 주와 성을 건설하였다.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800리이다. 가구수는 4000이다.

iv)           渭州, 陽軍, 節度. 駙馬都尉蕭昌裔建. 秦國王隆慶女韓國長公主, 以所賜媵臣建州城. 顯州東北二百五十里. 遼制, 皇子嫡生者, 其女與帝女同. 一千.

위주(渭州), 고양군(陽軍), 節度. 부마도위(駙馬都尉)인 소창(蕭昌)의 후손이 건설하였다. 오래전에 진국왕(秦國王) 륭경(隆慶)의 딸인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가 신하들을 하사받고 주와 성을 건설하였다. 현주(顯州)에서 동북쪽으로 250리에 있다. 遼制, 皇子嫡生者, 其女與帝女同. 가구수는 1000이다.

v)             壕州. 國舅宰相南征, 俘掠漢民, 居遼東西安平縣故地. 在顯州東北二百二十里, 西北至上京七百二十里. 六千.

호주(壕州). 국구(國舅) 재상(宰相)이 남쪽을 정벌하고 한민(漢民)을 사로잡고 료동(遼東)서안평현(西安平縣)의 옛 땅에 살게하였다. 현주(顯州) 동북쪽 22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720리이다. 가구수는 6000이다.

vi)           原州. 本遼東北安平縣地. 顯州東北三百里. 國舅金俘掠漢民建城. 西北至上京八百里. 五百.

원주(原州). 원래 료동(遼東) 북안평현(北安平縣)의 땅이다. 현주(顯州)에서 동북쪽으로 300리에 있다. 국구(國舅)인 김덕(金)이 한민(漢民)을 사로잡아 성을 건설하였다.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800리이다. 가구수는 500이다.

vii)         福州. 國舅蕭寧建. 南征俘掠漢民, 居北安平縣故地. 在原州北二十里, 西北至上京七百八十里.三百.

복주(福州). 국구(國舅)인 소녕(蕭寧)이 건설하였다. 남쪽으로 한민(漢民)을 정벌하여 사로잡고 북안평현 옛 땅에 거하게 하였다. 원주(原州) 북쪽 2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780리이다. 가구수는 300이다.

viii)       . 國舅蕭克忠建. 部下牧人居漢故遼陽縣地, 因置州城. 在遼州西北九十里, 西北至上京七百二十里. . 二百.

횡주(). 국구(國舅)인 소극충(蕭克忠)이 건설하였다. 부(部) 아래에 방목하는 사람들이 한국(漢)의 옛 요양현의 땅에 살았으므로 주와 성을 설치하였다. 요주(遼州) 서북 9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720리이다. 횡산()이 있다. 가구수는 200이다.

ix)            . 果囉國故地. 渤海之安寧郡境, 南王府五帳分地. 在韓州北二百里, 西北至上京九百里. 四千.

봉주(). 과라국(果囉國, 고리국槀離國)[17]의 옛 땅이다. 발해의 안녕군(安寧郡) 지경으로서 남왕부(南王府)의 오장(五帳)이 땅을 나누었다. 한주(韓州) 북쪽 20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900리이다. 가구수는 4000이다.

x)              遂州. 州地, 南王府五帳放牧於此. 在檀州西二百里, 西北至上京一千里. 五百.

수주(遂州). 원래 고주()의 땅이다. 남왕부(南王府) 오장(五帳)이 이곳에서 방목하였다. 단주(檀州) 서쪽 20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1000리이다. 가구수는 500이다.

xi)            . 本遼澤大部落, 約尼氏僧隱牧地. 北至上京三百五十里. 五百.

풍주(). 본래 요택(遼澤) 대부락(大部落)로서 약니씨(約尼氏, 遙輦氏) 승은(僧隱)이 방목하던 땅이다. 북쪽으로 상경까지 350리이다. 가구수는 500이다.

xii)          順州. 本遼隊縣地. 帳南王府俘掠 燕 薊 順州 之民, 建城居之. 在顯州東北一百二十里, 西北至上京九百里. 一千.

순주(順州). 원래 요대현(遼隊縣)의 땅이다. 횡장() 남왕부(南王府)가 연(燕)과 계(薊)과 순주(順州)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성을 건설하고 살게하였다. 현주(顯州) 동북쪽 12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900리이다. 가구수는 1000이다.

xiii)        閭州. 羅古王牧地, 近醫巫閭山. 在遼州西一百三十里, 西北至上京九百五十里. 一千.

여주(閭州). 라고왕(羅古王)이 방목하던 땅이고 의무려산과 가깝다. 요주(遼州) 서쪽 130리에 있고 서북쪽으로 상경까지 950리이다. 가구수는 1000이다.

xiv)       松山州. 本遼澤大部落, 帳布庫王牧地. 有松山. 北至上京一百七十里. 五百.

송산주(松山州). 원래 료택(遼澤) 대부락(大部落)이고 횡장() 포고왕(布庫王)이 방목하던 땅이다. 송산(松山)이 있다. 북쪽으로 상경까지 170리이다. 가구수는 500이다.

xv)         豫州. 帳陳王牧地. 南至上京三百里. 五百.

예주(豫州). 횡장() 진왕(陳王)이 방목하던 곳이다. 남쪽으로 상경가지 300리이다. 가구수는 500이다.

xvi)       寧州. 本達呼哩氏勒特山, 帳固寧王牧地. 在豫州東八十里, 西南至上京三百五十里. 三百.

녕주(寧州). 원래 달호리씨(達呼哩氏)의 륵특산(勒特山)이다. 횡장() 고녕왕(固寧王)이 방목하던 땅이다. 예주(豫州) 동쪽 80리에 있고 서남쪽으로 상경까지 350리이다. 가구수는 300이다.

 

14) 변방성

防城. 遼國西北界防, 因屯戍而立, 務據形勝, 不資丁賦. 具列如左..

변방성(防城). 료국(遼國)의 서북쪽 경계를 지키는 변방의 성으로 수비성을 두어 설치한 것이다. 지형의 뛰어남에 의거하였다. 정부(丁賦)를 거두지 아니하였고 다음과 같다.

i)                靜州, 觀察. 本泰州之金山. 天慶六年升.

정주(靜州), 觀察. 원래 태주(泰州)의 김산(金山)이다. 천경(天慶) 6년에 승격되었다.

ii)              , 建安軍, 節度. 本古哈屯城. 統和二十二年, 皇太妃奏置. 選諸部族二萬餘騎充屯軍, 專捍禦 室韋 伊濟 等國, 凡有征討, 不得抽移. 渤海 女直 漢人 配流之家七百餘, 分居 防 維 二州. 東南至上京三千餘里.

維州, 刺史.

防州, 刺史.

진주(), 건안군(建安軍), 節度. 원래 합둔성(哈屯城, 가돈성可敦城)이다. 통화(統和) 22년에 황태비(皇太妃)가 아뢰어 설치하였다. 여러 부족에서 2,0000여 기병을 뽑아 군사를 주둔시켜 채웠으며 오로지 실위(室韋)와 이제(伊濟, 우궐羽厥) 등의 나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무릇 그들을 공격하여도 추이를 얻지 못하였다. 발해와 여진과 한인(漢人) 등을 유배보낸 가구수가 700여호이며 나누어 진주() 방주(防) 유주(維) 등의 2주에 거하게 하였다. 동남쪽으로 상경까지 3000여리이다.

유주(維州), 刺史.

방주(防州), 刺史.

iii)            河董城. 本回鶻哈屯城, 語訛河董城. , 遼人完之以防. 州界女直常, 掠行旅, 遷其族於此. 東南至上京一千七百里.

하동성(河董城) 본래 회골(回鶻)의 합둔성(哈屯城)인데 말이 잘못전하여져서 하동성(河董城)이 되었다. 폐한지가 오래되었는데 료인(遼人)들이 그것을 지켜 변방의 근심을 막았다. 고주() 경계의 여진은 항상 도적이 되어 무리로 다니면서 노략질하였으므로 그들의 종족을 이곳으로 옮기었다. 동남쪽으로 상경까지 1700l이다.

iv)           . 本契丹二十部族水草地. 北隣伊濟, 每入, 建城, 置兵千餘騎防之. 東南至上京一千五百里.

정변성(靜). 본래 거란 20부족의 수초지(水草地)이다. 북쪽으로 이제(伊濟, 우궐羽厥)과 이웃하여 항상 들어와서 도적이 되었으므로 성을 건설하고 병사 1000여 기병을 두고 그들을 막았다. 동남쪽으로 상경까지 1500리이다.

v)             皮被河城. 地控北, 置兵五百於此防托. 皮被河出回紇北, 東南經伊濟, 入臚, 沿河董城北, 東流合沱漉河, 入于海. 南至上京一千五百里.

피피하성(皮被河城). 북쪽 변방의 땅이 위급하여 병사 500을 이곳에 두고 맡기어 지키게하였다. 피피하(皮被河)가 회흘(回紇) 북쪽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이제(伊濟, 우궐羽厥)을 지나고 려구하(臚)로 들어가고 하동성(河董城) 북쪽을 따라가다가 동쪽으로 흘러 타록하(沱漉河)와 합하여져서 바다(海)로 들어간다. 남쪽으로 상경까지 1500리이다.

vi)           招州, , 刺史. 開泰三年以女直. 隸西北路招討司.

초주(招州), 수원군(綏), 刺史. 개태(開泰) 3년에 여진의 가구로 설치하였다. 서북로초토사(西北路招討司)에 속한다.

vii)         塔哩珠城. 太康九年置. 在臚.

탑리주성(塔哩珠城, 탑라주성塔懶主城) 태강(太康) 9년에 설치하였다. 려구하(臚)가 있다.

 



[1] 他魯河 혹은 撻魯河로 쓴다.

[2] 鴛鴦으로도 쓴다.

[3] 火는 大로도 쓰는데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4] 吐로도 쓴다. 免으로도 볼수 있다.

[5] 其北東流按春河를 다르게 번역하여 “곡하는 북동쪽으로 흘러 안춘하가 된다”로 할 수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6] 吐로도 쓴다. 免으로도 볼수 있다.

[7] 이름을 떠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말한다.

[8] 약 3m이다.

[9] 백제의 한성이 이곳인가?

[10] 위구르(Uigur)의 음역어(音譯語). 몽골 고원에서 일어나 뒤에 투르키스탄 지방으로 이주한 터키계(系)의 유목 민족 <DAUM 한자사전>. 회흘(回紇)이라고도 쓴다.

[11] 상인들을 말하는 것 같다.

[12] 본 성(城)에 딸려 따로 쌓은 성을 말한다.

[13] 본기에 따르면 大康 10년 12월에 慶州大安軍을 고쳐 興平으로 했다고 하였다.

[14] 3개인데 2개로 적혀있다.

[15] 신당서에는 衙帳이라고 하였는데 군장들이 머무는 장막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16] 태종(太宗)이 되어야 올바르다.

[17] 이곳이 현도군 고구려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도군 고구려현을 추모왕이 세운 고구려로 잘못이해하고 있다. 고구려현은 고리국(槀離國)을 한(漢)이 차지하고 현도군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