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심당전서 단서대강 조선기 제2세 웅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8.

第二世檀帝(제2세 단제)

地一洪帝諱䧺泰帝太子也. 元年壬戌在位六十六年.
地一洪帝(지일홍제)이며 諱(휘)는 䧺(웅)이고 泰帝(태제)의 太子(태자)이다.
元年(원년)은 壬戌(임술)년이고 재위기간은 66년이다.

壬戌元年. 帝親謁先帝廟, 禋于山川. 謹按, 檀典曰.., 帝英姿豪偉, 敬承父命, 弘濟衆生, 施德, 行恩.
壬戌(임술, BC2399) 원년. 帝(제)가 친히 謁 泰帝(태제)의 묘를 조알하고 산과 강에 제사를 지냈다. 謹按: 檀典(단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帝(제)는 英姿(영자)하고 豪偉(호위)하였고 아비의 명을 삼가 이었으니,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덕과 은혜를 베풀었다.

癸亥二年. 帝納楡伯女神熊爲皇后.
癸亥(계해, BC2398) 2년. 帝(제)는 楡伯(유백)의 딸 神熊(신웅)을 皇后(황후)로 삼았다.

丙寅五年. 命康來于饒河, 敎以飼養制度.
丙寅(병인, BC2395) 5년. 康(강)에게 饒河(요하)로 오게 명하여 먹이고 기르는 제도를 가르쳤다.

丁卯六年. 帝登完達山, 築壇祭天.
丁卯(정묘, BC2394) 6년. 帝(제)는 完達山(완달산)에 올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己巳八年. 高辛氏名嚳卽軒轅之曾孫也, 擧兵侵境, 帝命力通拒守.
己巳(기사, BC2392) 8년. 高辛(고신)씨는 이름이 嚳(곡)으로 軒轅(헌원)은 증손자인데,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였다. 帝(제)는 力通(력통)에게 명하여 막아 지키게 하였다.

庚午九年. 命蘇豊練兵于綏東.
庚午(경오, BC2391) 9년. 蘇豊(소풍)에게 병사를 綏(수, 수분하?)의 동쪽에서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辛未十年. 高辛再侵, 帝遣吳將軍, 率薰鬻之兵, 西進, 迎擊, 大破之. 高辛不敢復侵, 軍民斥高辛氏, 而定界曰負辛.
辛未(신미, BC2390) 10년. 高辛(고신)이 다시 침범하여 왔는데 帝(제)가 吳將軍(오장군)을 보내어 薰鬻(훈죽)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저들을 맞아 격퇴하여 크게 이겼다. 고신은 감히 다시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군사와 백성들이 고신을 물리친 것이다. 이에 국경을 정하니 負辛(부신)이라 하였다. .

壬申十一年. 命句望築白城, 敎以武功.
壬申(임신, BC2389) 11년. 句望(구망)에게 명하여 白城(백성)을 쌓도록 하였고, 武功(무공)을 가르쳤다.

甲戌十三年. 命延夏爲興凱湖水師.
甲戌(갑술, BC2387) 13년. 延夏(연하)에게 명하여 興凱湖水師(여개호수사)가 되도록 하였다.

丙子十五年. 命伊慶爲雙城太守, 敎以稼法.
丙子(병자, BC2385) 15년. 伊慶(이경)에게 명하여 雙城太守(쌍성태수)가 되도록 하였고 벼 심는 방법을 가르쳤다.

戊寅十七年. 命元康作舟, 渡河.
戊寅(무인, BC2383) 17년. 元康(원강)에게 명하여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도록 하였다.

庚辰十九年. 㝎法度制食飮節次婚姻規則.
庚辰(경진, BC2381) 19년. 음식과 절차와 혼인과 규칙의 법제를 정하였다.

甲申二十三年. 命農官橋成制農機于對靑山, 敎稼用法.
甲申(갑신, BC2377) 23년. 農官(농관) 橋成(교성)에게 명하여 농기구를 對靑山(대청산)에서 만들도록 하였고 벼 심는 용법을 가르쳤다.

丙戌二十五年. 命魯淸築北安城.
丙戌(병술, 2375) 25년. 魯淸(로청)에게 명하여 北安城(북안성)을 쌓도록 하였다.

丁亥二十六年. 命彭基爲監星官, 觀測天度.
丁亥(정해, BC2374) 26년. 彭基(팽기)에게 명하여 監星官(감성관)이 되게 하였고 天度(천도)를 관측하게 하였다. .

戊子二十七年. 命申匡爲遼城伯.
戊子(무자, BC2377) 23년. 申匡(신광)에게 遼城伯(료성백)이 되게 하였다. .

庚寅二十九年. 命置嫩江浴塲, 敎習漁獵.
庚寅(경인, BC2371) 29년. 嫩江(눈강)에 浴塲(욕장)을 설치하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辛卯三十年. 皇后神熊氏誕皇太子儉.
辛卯(신묘, BC2370) 30년. 황후 神熊(신웅)씨가 皇太子(황태자) 儉(검)을 낳았다.

壬辰三十一年. 命置舟師于洮水之南, 敎渡涉之便.
壬辰(임진, BC2369) 31년. 舟師(주사)를 洮水(도수) 남쪽에 설치하도록 명하고 강을 건너는 방법을 가르쳤다.

癸巳三十二年. 有良氏侵境, 帝遣馬鎭討之.
癸巳(계사, BC2368) 32년. 有良(유량)씨가 변경을 침범하여 帝(제)가 馬鎭(마진)을 보내 토벌하였다.

甲午三十三年. 命甘泰造舟橋于甘河之濱
甲午(갑오, BC2367) 33년. 甘泰(감태)에게 舟橋(주교)를 甘河(감하) 물가에 만들라고 하였다.

丁酉三十六年. 命築天坪山城, 營造宮室.
丁酉(정유) 36년. 天坪山城(천평산성)을 쌓도록 명하고 궁실을 지었다.

己亥三十八年. 命置監星官龜濱敎以晨時.
己亥(기해, BC2362) 38년. 監星官(감성관) 龜濱(귀빈)을 설치하도록 하였고, 晨時(신시)를 가르쳤다.

辛丑四十年. 摯卽嚳之子也. 擧兵侵境, 帝遣兵拒守.
辛丑(신축, BC2360) 40년. 摯(지)는 곧 嚳(곡)의 아들인데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공하니 帝(제)가 병사를 보내 막아내었다.

癸卯四十二年. 陳克己上言曰.., 摯亂政諸侯請以可伐, 帝不許.
癸卯(계묘, BC2358) 42년. 陳克己(진극기)가 글을 올려 “摯(지)는 어지러운 정치를 하는 제후이므로 마땅히 벌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지만 帝(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甲辰四十三年. 唐堯伐其兄摯, 而卽位, 引兵來侵. 帝命橋牛遣于碣石, 練兵拒守, 堯軍自退.
甲辰(갑진, BC2358) 42년. 唐堯(당요)가 그 형 摯(지)를 벌하고 즉위하였으므로 병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다. 帝(제)가 橋牛(교우)에게 碣石(갈석)에서 훈련된 병사로 막아 지키기를 명하니 당요가 스스로 물러갔다.

 乙巳四十四年. 命慶道爲神檀縣, 令練兵固守.
乙巳(을사, BC2356) 44년. 慶道(경도)를 神檀縣(신단현)으로 하기를 명하고 훈련된 병사로 굳건히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丙午四十五年. 命薛昊爲遼陽伯, 敎農務.
丙午(병오, BC2355) 45년. 薛昊(설호)에게 遼陽伯(료양백)이 되도록 명하고 농사에 힘쓸 것을 가르쳤다. .

丁未四十六年. 命桂完爲錦縣太守, 勸稼農.
丁未(정미, BC2354) 46년. 桂完(계완)을 錦縣太守(금현태수)가 될 것을 명하고 벼농사를 권장하였다.

戊申四十七年. 堯擧兵再侵, 帝避于神檀縣.
戊申(무신, BC2353) 47년. 당요가 다시 병사를 일으켜 침략해 왔는데 帝(제)가 神檀縣(신단현)으로 피하였다.

壬子五十一年. 帝遣上將陣靈, 據遼潡戰擊退堯軍.
壬子(임자, BC2349년) 51년. 帝(제)가 상장(上將) 陣靈(진령)을 보내 遼潡(료돈)에 의지하여 싸워 당요의 군대를 격퇴하여 물리쳤다.

癸丑五十二年. 帝還京師, 記功于阜新縣.
癸丑(계축, BC2348) 52년. 帝(제)가 京師(경사)로 돌아왔고 阜新縣(부신현)에 당요를 물리친 공을 기록하였다.

甲寅五十三年. 命置煙臺, 饋軍, 賞功. 煙臺在遼陽縣東北地.
甲寅(갑인) 53년. 煙臺(연대)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군사들에게 선물을 주고 공적에 따라 상을 내리었다. 煙臺(연대)는 遼陽縣(료양현) 동북쪽 땅에 있다.

丙辰五十五年. 帝率風伯雨師至天坪定都.
丙辰(병진, BC2345) 55년. 帝(제)가 風伯(풍백)과 雨師(우사)를 거느리고 天坪(천평)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였다.

丁巳五十六年. 命楊震造桓箾, 築城營室.
丁巳(정사, BC2344) 56년. 楊震(양진)에게 명하여 桓箾(환소)를 짓도록 하였고 성을 쌓고 室(실)을 경영하였다.

戊午五十七年. 命築天坪外城, 天坪在吉林東部巨野.
戊午(무오, BC2343) 57년. 天坪(천평) 外城(외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天坪(천평)은 吉林(길림) 동부 큰 들판에 있다.

己未五十八年. 命陳泰營造宮室開通道路.
己未(기미, BC2342) 58년. 陳泰(진태)에게 명하여 궁실을 영조(營造)하였다. 도로를 개통하였다.

辛酉六十年. 命築長樂宮鑿池
辛酉(신유, BC2340) 60년. 長樂宮(장락궁)을 쌓도록 명하고 못을 팠다.

壬戌六十一年. 命伊敦練武于大東島.
壬戌(임술, BC2339) 61년. 伊敦(이돈)에게 명하여 大東島(대동도)에서 병법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癸亥六十二年. 命虞源于凌河作舟通涉.
癸亥(계해, BC2338) 62년. 凌河(릉하)에서 虞源(우원)에게 명하여 배를 만들어 건너도록 하였다.

乙丑六十四年. 命橋勤于札關練兵固守.
乙丑(을축, BC2336) 64년. 橋勤(교근)에게 札關(찰관)에서 명하여 군사를 단련시키고 단단히 지키도록 하였다.

丙寅六十五年. 堯軍又擧, 入境. 帝遣兵于札關凌河討却之. 太子儉與伊鳯率五萬軍守河口, 與堯軍相戰不利, 乃潜軍于大弧山, 引渡遼河而還.
丙寅(병인, BC2335) 65년. 당요가 또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였다. 帝(제)가 병사를 札關(찰관) 凌河(릉하)로 보내 그들을 쳐서 물리쳤다. 太子(태자) 儉(검)은 伊鳯(이봉)과 함께 5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河口(하구)를 지키었는데 당요의 군대와 싸우기에는 불리하였으므로 이내 군사를 大弧山(대호산)에 숨기고 遼河(료하)를 건너 돌아왔다.

丁卯六十六年. 太子旣還都, 帝命王簡馬續討堯軍而相戰. 不決, 堯欲奪遼瀋之地. 帝遣書于堯曰.., 惟我皇祖繼天立極德敎日新協和萬邦四方賓服, 軒轅不軌掠奪炎都而悔過來貢, 少昊不循父志而謝罪返旅, 高辛蠱侵, 而通書修和摯, 亦亂政, 而尙不敢犯, 實有明義之道也. 惟伊祈何以忘義取利專行殺戮不奪不饜耶, 將畏天討之罪克念克誠敬受天威. 堯見書慚愧遂命返旅, 通其隣交. 是歲秋帝崩. 君臣擧哀如喪考妣. 軍民擁護太子儉, 作圖們慶賀, 而立, 是爲聖帝.
丁卯(정묘, BC2334) 66년. 태자가 이미 도읍으로 돌아왔다. 帝(제)가 王簡馬(왕간마)에게 명하여 계속 당요의 군대를 토벌하라고 명하였는데, 서로 싸웠으나 결판이 나지 않자 당요는 遼瀋(료심)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帝(제)가 서신을 당요에게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오직 우리 조상만이 하늘을 계승하여 나라를 세워 극에 달하여 덕으로 가르치고 날마다 새로와 협화(協和)하여 사방 만방의 나라들이 빈복(賓服)함에도 불구하고, 軒轅(헌원)은 법도를 따르지 않고 남서울(炎都)에서 약탈을 일삼았으나 과오를 뉘우치고 내공(來貢)하였고, 少昊(소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사죄하여 군사를 돌이켰으며, 高辛(고신)은 독하게 침입하였을 때 서신을 받고 마음을 수양하여 화합함에 이르렀으나 역시 정치를 어지럽였었지만 오히려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明義(명의)의 길이다. 오직 너는 전행(專行)과 살육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뜻과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는지 만을 기도하고 해라.[각주:1] 원컨대 하늘이 너의 죄를 벌할지 두려워하고 지극정성으로 하늘의 위엄을 공경하여 받아들여라.” 당요는 서신을 보고 참회와 부끄러움으로 군사를 드디어 돌렸으며 이웃나라들과 교통하였다. 이 해 가을에 帝(제)가 세상을 떠났다. 군신들이 슬퍼하여 자신의 어미를 장사지내듯 하였다. 백성과 군인들이 圖[각주:2]們慶賀(도문경하)를 지어 태자 儉(검)을 옹호하였고, 즉위하니 이가 곧 聖帝(성제)이다.[각주:3]

 

  1. 不奪不饜(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孟子(맹자)에 나오는 구절이므로, 위 2세 檀帝(단제)인 洪帝(홍제)의 서신은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2. (人+圖)으로 되어 있지만 이런 글자는 없다. [본문으로]
  3. 唐堯(당요)가 침입하여 洪帝(홍제)가 죽은 것인데 위와 같이 거짓으로 꾸몄는가? 支那國(지나국) 기록에도 당요가 조선을 침공한 기록이 있는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