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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신당서 고구려 열전 번역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31.
고려(高麗)는 본래 부여(夫餘)의 별종이다.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고, 북은 말갈(靺鞨)과 접한다.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平壤城)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한 대(漢代)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장안에서 5천리 밖에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외성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浿水)와 연해있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을 지어놓았다. 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별도라 부른다. 물은 대요(大遼)와 소요(少遼)가 있다. 대요는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흐른다. 소요는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양수(梁水)가 새외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물빛이 기러기의 머리색과 같아 압록수(鴨淥水)로 불린다. 국내성의 서쪽을 거쳐 염난수(鹽難水)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안시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 사람들이 건너다니므로 이를 해자로 여긴다. 관직은 모두 12등급이 있다. (가장 높은 것은) 대대로(大對盧)인데 혹은 토졸(吐捽)이라고도 하며 국정을 총괄한다. 3년에 한번씩 바꾸는데, 직책을 잘 수행하면 바꾸지 않기도 한다. 무릇 교체하는 날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서로 싸움을 한다. 왕은 궁궐문을 닫고 지키다가 이긴 자를 인정해준다. 그 아래는 울절(鬱折)로 호적과 문서를 관장한다. 다음은 태대사자(太大使者)이다. 다음은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으로 이른바 조의라는 것은 선인(先人)을 말한다. 다음은 대사자(大使者)이다. 다음은 대형(大兄), 다음은 상위사자(上位使者), 다음은 제형(諸兄), 다음은 소사자(小使者), 다음은 과절(過節), 다음은 선인(先人), 다음은 고추대가(古雛大加)이다. 60여개의 주현이 있으며, 큰 성에는 욕살(褥薩) 한명을 두는데, 도독과 비슷하다. 나머지의 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는데, 도사(道使)라고도 하며, 자사(刺史)와 비슷하다. 그리고 보좌하는 속료를 두어 일을 분담시킨다. 대막달(大漠達)은 위장군(衛將軍)과 비슷하고, 말객(末客)은 중랑장(中郞將)과 비슷하다. 5부로 나뉘어져 있다. 내부(內部)는 곧 한대의 계루부(桂婁部)로서 

황부(黃部)라고도 한다. 북부(北部)는 곧 절노부(絶奴部)로서 후부(後部)라고도 한다. 동부(東部)는 곧 순노부(順奴部)로서 좌부(左部)라고도 한다. 남부(南部)는 곧 관노부(灌奴部)로서 전부(前部)라고도 한다. 서부(西部)는 곧 소노부(消奴部)이다. 왕은 5채(采)로 된 옷을 입고 백라관(白羅冠)을 쓰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 대신은 청라관(靑羅冠)을 쓰고, 다음은 강라관(絳羅冠)을 쓰는데, 두 개의 새깃을 꽂고 금테와 은테를 섞어 두른다. 저고리는 통소매이고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띠를 두르고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서인(庶人)은 갈(褐)을 입고 고깔을 쓴다. 여자는 머리에 건괵(巾幗)을 쓴다. 풍속은 바둑·투호·축국(蹴鞠)을 즐긴다. 식기는 변(籩)·두(豆)·보(簠)·궤(簋)·뢰(罍)·세(洗)를 쓴다. 거주지는 산골짜기에 있으며, 이엉으로 지붕을 덮고 왕궁·관부·불사만이 기와를 쓴다. 가난한 백성들은 한겨울에 구덩이를 파고 불을 지펴 방을 덥힌다. 그들의 정치는 엄격한 법률로서 아랫사람을 다스리기 때문에 법을 범하는 자가 적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사람들이)모여서 횃불로 몸을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 가족은 적몰한다. 항복한 자·패전한 자·사람을 죽인 자·겁탈한 자는 목을 벤다. 도둑질한 자는 열배로 갚아야 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때문에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혼인할 때에는 폐백을 쓰지 않으며, 받는 자가 있으면 수치로 여긴다. 부모의 상에는 3년복을 입고,

형제의 경우는 다음달에 (상복을)벗는다. 풍속은 음사(淫祠)가 많고, 영성(靈星)·해·기자(箕子)·가한(可汗)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나라 왼쪽에 큰 굴이 있어 신수(神隧)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 왕이 항상 직접 제사를 올린다.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 커다란 집을 지어 국당(扄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우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수나라 말에 그 나라의 왕 고원(高元)이 죽고, 이복동생인 건무(建武)가 뒤를 이었다. 무덕(武德:618-626)초에 두 번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高祖)는 조서를 내려 우호를 닦고 고려인으로 중국에 있는 자들을 호송할 것을 약속하고, 중국인으로 고려에 있는 자들을 돌려보내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건무가 망명한 중국인들을 모두 찾아서 해당 관사에 돌려보냈는데, 그 수가 무려 1만이었다. 3년 뒤에 사신을 보내 (건무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에 배하였다. 도사에게 명하여 상법(像法)을 가지고 가서 「老子」를 강의하게 하니, 건무가 크게 기뻐하며 나라사람들을 이끌고 함께 들었다. 그 숫자가 날마다 1천명에 달하였다. 고조가 주위 신하들에게 “명분과 실제는 모름지기 서로 부응해야 하는 법이다. 고려가 비록 수에 신하라고 칭하였으나 끝내 양제(煬帝)에게 저항하였으니, 어찌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짐이 힘쓸 바는 인민을 편안히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신하로 받아들여야 하는가?”하니, 배구(裵矩)와 온언박(溫彦博)이 간하기를 

“요동은 본래 기자의 나라이며, 위·진때까지는 봉역안에 있었으니 칭신하지 않는 것은 불가합니다. 중국과 이적(夷狄)은 태양과 열성의 관계와 같으니 낮추어서는 안됩니다.”하여서 이에 그만 두었다. 다음해에 신라와 백제가 글을 올려 건무가 길을 막아서 사신이 입조할 수 없으며, 또 자주 침입한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에게 부절을 주어 화해하도록 설득하니, 건무가 사죄하고 두 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돌궐(突厥)의 힐리(頡利)를 사로잡자, 건무가 사자를 보내어 하례하고 아울러 봉역도를 바쳤다. 태종은 조서를 내려 광주사마 장손사(長孫師)에게 (고구려에) 가서 수나라 군사의 해골을 거두어 묻고 고려가 세운 전승기념물을 헐어버리게 하였다. 이에 건무가 두려워하여 천리의 장성을 쌓으니, 동북으로 부여, 서남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얼마 뒤 태자 환권(桓權)을 보내 조공하고 방물을 바치니 태종이 후하게 보답하였다. 조서를 내려 사자 진대덕(陳大德)에게 부절을 주어 그 노고에 답하는 한편,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진대덕이 그 나라에 들어가 방비하는 관리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실정을 낱낱이 파악하고, 중국 유민들을 만나 친척들의 생사를 전해주니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사녀(士女)들이 길 양편에 나와 구경하였다.

건무가 사자에게 열병을 성대하게 하였다. 대덕이 귀국하여 아뢰자, 태종이 기뻐하였다. 대덕이 또 “고창(高昌)을 멸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의 대대로가 세 번이나 관사에 찾아와 축하하였습니다.”하니, 태종은 “고려의 땅은 4군뿐이다. 우리가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면 다른 여러 성이 구원하러 올 것이다. 우리가 수군을 동원하여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들어간다면 아주 쉬울 것이다. 그러나 천하가 겨우 평정되었는데, 또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하였다.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 한다. 성은 천씨(泉氏)이며, 자신이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버지는 동부대인 대대로이다. (그가) 죽자 개소문이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지만 나라사람들이 미워하여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임시직을 청하면서 마땅치 않으면 그 때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악한 짓을 하여, 여러 대신이 건무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알고 여러 부를 불러 모아 크게 열병한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연회를 베풀어 대신들을 청하였다. 손님들이 오자 모두 죽이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이고 시체를 찣어 도랑에 던졌다. 이어 건무 동생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는) 당의 병부상서 중서령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용모가 걸출하고 준수하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관복을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다.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귀인을 시켜 땅에 엎드리게 하고 밟고 말을 탔으며, 출입할 때에는 군사를 벌려놓고 큰소리로 엄격히 금하여 길가는 사람들이 두려워 도망하여 도랑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태종은 건무가 부하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다. 어떤 이가 태종에게 토벌하자고 권유했으나, 태종은 상을 기회로 하여 남을 치고 싶지 않았다. 이에 장을 요동군왕 고려왕에 배하였다. 태종이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으므로, 짐이 공격하여 취하기는 쉽다. 그러나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 어찌해야 하겠는가?”하니 사공 방현령(房玄齡)이 “폐하의 군사가 용기와 힘이 남아도는데도 접어두고 쓰지 않는 것은 이른바 ‘지과위무(止戈爲武)’라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사도 장손무기(長孫无忌)는 “고려가 한번도 어려움을 호소해온 적이 없었으니, 조서를 내려 위안하고 환난을 불쌍히 여기며 생존한 자를 어루만져 주면 그들도 마땅히 명을 받들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태종이 옳다고 하였다. 이 때에 신라가 사자를 보내 글을 올려 “고려와 백제가 결탁하니 침입을 받을 것 같습니다. 삼가 천자께 알립니다.”하였다. 태종이 “어떻게 하면 면할 수 있겠는가?”하니 

사자는 “계책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였다. 태종이 “우리가 일부 군사로 거란·말갈을 이끌고 요동으로 들어간다면 그대의 나라가 한 해는 조용할 수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우리가 군복과 군기 수천 벌을 그대 나라에 내려주어서 군진에 꽂아 둔다면 두 나라가 보고 우리 군사가 도착한 것으로 여겨서 반드시 달아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가 바다를 믿고 대비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수군 수만을 이끌고 공격하고, 또 그대 나라는 왕이 여자이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았으니 우리가 종실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왕을 삼았다가 안정이 된 뒤에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사자는 계책 중에 어느 것을 취하겠는가?”하니 사자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보내어 고려를 나무라고 또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자가 채 이르기 전에 개소문이 벌써 신라의 두 성을 빼앗았다. 현장이 태종의 교지를 알리자, 답변하기를 “지난 날 수의 침략을 당하였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았소. 지금 그 땅을 모두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중지할 수 없소.”하니 현장이 “지난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요동은 본디 중국의 군현이지만 천자께서는 취하지 않으셨소. 고려가 어찌 조명(詔命)을 어길 수 있겠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와서 아뢰자 태종은

“막리지가 왕을 죽이고 함정과 같이 아랫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니, 원망이 길에 넘치고 있다. 우리가 출병하는데 명분이 없겠는가?”하니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이 “폐하의 군사가 요하를 건넜다가 승리를 거둔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만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군사를 써야하고 다시 군사를 쓴다면 그때는 안위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적(李勣)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 설연타가 변방에 침입하여 폐하께서 추격하려 하실 때 위징(魏徵)이 간언하여 그만 두었습니다. 만약 추격하였다면 한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텐데 뒤에 다시 배반하여 지금까지 한이 되고 있습니다.”하였다. 이에 태종은 “진실로 그러하다. 다만 한번의 실수를 가지고 그를 원망한다면 이후에 누가 나를 위해 계획을 세우겠는가?”하였다. 신라가 계속 원병을 청하자 이에 오선(吳船) 4백척에 군량을 실어 보내고 영주도독 장검(張儉) 등에게 조서를 내려 유주·영주의 군사 및 거란·해·말갈 등을 거느리고 토벌케 하였다. 마침 요수가 넘쳐서 돌아왔다. 막리지가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서 백금(白金)을 바쳤으나 태종이 받지 않았다. 사자가 또 “막리지가 숙위를 위하여 관원 50명을 보냈습니다.”하니 태종이 화를 내며 사자에게 “너희들은 고무(高武)에게 처음 벼슬하고도 절의를 바쳐 죽지 않았으며, 또 반역자를 위해 계책을 꾸미니 용서할 수 없다.”하고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며, “요동은 옛 중국땅이며, 도적 막리지가 그 군주를 죽였으므로, 짐이 친히 경략하려 한다. 그러므로 부로(父老)들과 약속을 하겠는데, 나를 따라 나서는 아들이나 손자들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하고 곧 포와 곡식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는 출정하지 말 것을 청하자 태종은 “나도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가는 이 세 가지는 좋지 못한 일로서 고려를 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소문이 군주를 시해하고 또 대신을 죽여 충족시킴으로 온 나라 사람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논의하는 자들은 이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하였다. 이에 군량을 북으로는 영주에 수송하여 쌓고, 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쌓게 하였다. 태종은 낙양에 거동하여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상하(常何)와 좌난당(左難當)을 부총관으로, 염인덕(冉仁德)·유영행(劉英行)·장문간(張文幹)·방효태(龐孝泰)·정명진(程名振)을 총관으로 삼아서 강(江)·오(吳)·경(京)·낙(洛)에서 모은 군사 4만과 오(吳)의 전선 5백척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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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왕 도종을 부총관으로, 장사귀·장검·집실사력·계필하력·아사나미사·강덕본·국지성·오흑달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예속시켜서, 기사(騎士) 6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칙을 내리기를 “짐이 들리는 곳에 진영을 구미지 말며, 음식을 사치스럽게 하지 말라. 건널 수 있는 물에는 다리를 놓지 말며, 행재소에서 가깝지 않은 주·현에서는 학생과 기로(耆老)의 영알(迎謁)을 금지하라. 짐이 지난날 창을 잡고 난을 평정할 적에는 한달 먹을 양식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는 곳마다 바람처럼 휩쓸었다. 오늘날은 다행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오직 운반하는 수고로움이 염려될 뿐이다. 그런 까닭에 소와 양을 몰아다 군사들을 먹이려 한다. 그리고 짐이 반드시 승리를 거둘 조건이 다섯 있다. 우리의 대(大)로 저들의 소(小)를 치고, 우리의 순(順)으로써 저들의 역(逆)을 치며, 우리의 안(安)으로써 저들의 난(亂)을 치고, 우리의 일(逸)로써 저들의 노(勞)를 치고, 우리의 열(悅)로써 저들의 원(怨)을 치고 있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하였다. 또 거란·해·신라·백제의 여러 군장의 군사를 징발하여 모이게 하였다. 19년 2월에 태종이 낙양에서 정주로 옮겨가서 주위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의 후사가 사마(士馬)의 강성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싸움을 유도하므로 전쟁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짐이 친히 그를 쟁취하여 후세의 걱정을 없애려 한다.”고 하였다. 태종이 성문에 앉아서 지나가는 군사를 일일이 위로하고, 질병이 있으면 친히 살펴보고 주․현에 명하여 치료하게 하니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장손무기가 상주하여 “천하의 관리가 모두 따르고 있으나 궁관(宮官)은 열명뿐이니 세상 사람들이 황제의 위를 경시하겠습니다.”하자 태종은 “요하를 건너는 십만의 군사가 모두 집안을 버리고 떠나왔다. 짐은 열명이 따르는 것도 오히려 많다고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공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하고 몸소 배낭을 메고 두개의 화살통을 안장에 달았다. 4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니, 고려가 모두 성을 에워싸고 지켰다. 태종은 군사들을 잘 먹인 후 유주 남쪽에 장막을 치고 장손무기에게 조서하여 서사(誓師)를 행한 뒤,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이적이 개모성을 쳐 함락시켜 2만호와 식량 십만 석을 얻고 그 땅을 개주로 삼았다. 정명진은 사비성을 공격하는데, 밤에 그 서쪽으로 침입하자 성이 궤멸되었다. 8천명을 사로잡았고, 군사를 이끌고 압록수 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적이 드디어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태종은 요택에 머물며 조서를 내려 널려있는 수나라 전사의 해골들을 묻게 하였다. 고려가 신성과 국내성의 기병 4만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였다.

도종이 장군예를 거느리고 맞아 싸웠는데 장군예가 퇴각하였다. 도종이 기병으로 달려가자 고려군이 놀라 후퇴하였다. 이에 그들의 다리를 빼앗고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바라보다가, 고려의 진열이 소란한 것을 보고 재빨리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군예의 목을 베어 (군영에) 돌렸다. 태종은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의를 다지게 하였다. 마수산에 진영을 설치한 후, 태종은 성밑에 이르러 군사들이 흙을 져다 참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 말위에 싣고 가니, 여러 신하들이 놀랍고 송구스러워 앞을 다투어 흙을 날랐다. 성안에 주몽의 사당이 있는데, 그 사당에 보존하고 있는 갑옷과 창이 전연(前燕)때에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라는 망령된 말이 있었다. 한창 포위되어 다급해지자 미녀를 꾸며 여신으로 만들어두고는 주몽이 기뻐하고 있으니 성은 반드시 온전할 것이라고 속이기도 하였다. 이적이 포차를 벌려 놓고 큰 돌을 3백보 이상 날려 보내니, 맞는 곳은 모두 무너졌다. 적들은 나무를 쌓아 누각을 만들고 그물을 이었으나 되지 않았다. 다시 충차로 성벽과 성루를 때려 부수었다. 이때에 백제가 金髤鎧를 바치고, 또 현금(玄金)으로 山五文鎧를 만들어오니 사졸들이 입고 종군하였다. 태종과 이적이 모이자 갑옷이 햇빛에 빛났다. 마침 남풍이 거세게 불어서 군사들이 서남쪽으로 불을 놓자, 불길이 성안으로 번져 집은 거의 다 탔으며, 

불에 타 죽은 사람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사졸들이 성벽에 오르자 적들은 방패로 막았다. 사졸들이 장창을 들고 돌격하자 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성이 드디어 무너지자 군사 1만·호구 4만·군량 50만석을 노획하고, 그 땅을 요주로 삼았다. 당초에 태종은 태자가 있는 곳부터 행재소까지 30리마다 봉화를 설치하고, 요동을 함락시키면 봉화를 올릴 것이라 하였다. 이날 봉화를 올리게 하여 변방의 요새안으로 (소식을) 전했다. 백애성을 진공하는데, 성이 산을 등지고 물가에 연해있어 매우 험하였다. 태종이 성벽의 서북쪽에 있는데, 고구려의 추장 손벌음이 몰래 항복하기를 빌었다. 성중을 일치시킬 수 없으므로 태종을 기를 주며, “만약 항복을 하겠다면 신호로 성가퀴에 꽂으라.”하였다. 조금 후에 그 기가 꽂히자, 성중의 사람들은 모두 당병이 온 것으로 여기고 항복하였다. 손벌음이 중도에 후회를 하자, 태종은 노하여 모든 포로를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약속했었다.(손벌음이 다시 항복하려하여 이를 취소하자) 이때 이적은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해서입니다. 이제 성이 막 함락되려 하는데, 항복을 허락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하였다. 태종은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군사를 풀어 살육을 자행하고, 남의 처자식을 사로잡는 일을 짐은 차마 못하겠소.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의 물품으로 상을 줄 수 있으니 장군에게 성 하나를 사려고 하오.”하였다. 남녀 1만 명과 군사 2천명을 노획하였다. 

그 땅을 암주로 삼고 손벌음을 자사로 배하였다. 막리지는 가시 사람 7백 명으로 개모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적이 이들을 사로잡았다. 충성을 다할 것을 청하자 태종은 “너희들의 집이 가시에 있으니, 우리를 위해 싸운다면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 집안을 없애가며 한 사람이 힘을 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하고 모두 놓아 보냈다. 안시에 주둔하니 고려의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군대 및 말갈의 무리 15만을 이끌고 와서 구원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군사를 정비하여 안시와 연합을 하여 성벽을 쌓고, 높은 산에 의거하여 성중의 곡식을 날라다 먹으면서 말갈의 무리를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약탈한다면,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중의 무리를 이끌고 밤에 도망가는 것이 중책이다. 우리와 싸움을 벌이면 사로잡힐 것이다.”하였다. 어떤 대대로가 고연수에게 “내가 들으니 중국이 어지러우면 영웅들이 모두 일어난다고 한다. 진왕은 총명하고 용감하여 무너지지 않는 적이 없고 싸움을 상대할 적이 없으므로,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군림하니, 북적이나 서융에서 칭신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지금은 온 나라를 쓸어 와서 모신(謀臣)․중장(重將)이 다 몰려 있으니 그 예봉은 비교할 수가 없다. 지금은 군사를 돈좌시켜 시간을 끄는 한편,

몰려 기습군을 보내어 그들의 군량로를 끊는 것보다 더 나은 계책이 없다. 한달이 못되어 군량이 떨어져 싸우려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길이 없게 되니 그때에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으나 고연수가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안시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태종은 “오랑캐가 나의 계책에 빠져들었다.”하고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을 이끌고 가서 유인하게 하였다. 고구려가 늘 말갈의 정예병을 앞세우므로 사이의 군사가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고연수는 “당은 상대하기가 쉽다.”하고 30리를 진격하여 산기슭에 진을 쳤다. 태종이 “내가 너의 나라에 강폭한 신하가 있어 자기 왕을 죽였기에 그 죄를 물으러 왔다. 교전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하니 고연수도 그렇다하여 행동을 멈추고 기다렸다. 태종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이적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산고개에 진을 쳐서 적과 대적하게 하였다. 장손무기와 우진달로 하여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고려의 후면 협곡으로 나가게 하였다. 태종은 기병 4천을 이끌고 깃발을 눕히고 고려 북쪽 산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모든 군사에게 북과 피리소리가 나면 돌격하게 하였다. 이어 조당(朝堂)에 장막을 설치하고 말하기를 “내일 한낮에 이곳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하였다. 이날 밤 고연수의 진영에 유성이 떨어졌다. 다음날 고구려가 이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바로 싸움을 벌였다.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과 피리를 불고 군기를 사방에서 함께 들게 하였다. 고구려가 당혹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무리가 이미 어지러워졌다. 이적은 창을 든 보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고 장손무기는 그 후미를 공격하였다. 태종이 산에서 달려 내려오니 고구려군은 크게 와해되어 2만여 급이 머리를 베었다. 고연수는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산을 등지고 굳게 지켰다. 장손무기와 이적이 합세하여 포위하고 개울의 다리를 철거하여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태종은 말고삐를 잡고 고구려의 영채를 살펴보고 “고려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왔으나 (대장기를) 한번 흔들어 깨뜨렸으니,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하고 말에서 내려 하늘에 두 번 절을 올려 감사하였다. 고연수 등이 상황이 곤궁함을 헤아리고 바로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원문(轅門)에 들어와서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가서 절을 올리고 처분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후에도 감히 천자와 싸우겠는가?”하니 두려워서 땀을 흘리며 대답을 못하였다. 태종은 추장 3천 5백 명을 가려내어 모두 벼슬을 주어서 내지로 들여보내고, 나머지 3만 명은 돌려보냈다. 말갈인 3천명은 목을 베었다. 노획물은 소와 말 10만 필과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이었다.. 고려가 크게 놀라서 후황과 은의 두 성이 스스로 빠져 달아나니 수백 리에 인가의 연기가 끊겼다. 이에 역(驛)을 통하여 태자에게 전하고, 아울러 여러 신하들에게 글을 내려 “짐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니 이와 같다. 어떠한가?”하였다.

거동했던 산을 주필산이라 이름하고, 파진도를 그렸으며 전공을 기념하는 글을 돌에 새겼다. 고연수에게는 홍려경을 제수하고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을 제수하였다. 척후를 하던 기병이 첩자를 잡아왔는데, 태종이 그 포박을 풀어주었다. 그가 사흘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하자 밥을 먹이게 하였다. 그리고 신발까지 주어서 보내며 “돌아가서 막리지에게 전하라. 만약 군사의 동정을 알려면 부디 내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가라.”하였다. 태종은 모든 영채에 참호를 파지 않고 척후만 근엄히 할 뿐이었으나, 군사들이 군량을 운반할 적에 비록 단기(單騎)일지라도 고구려는 감히 약탈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이적과 공격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태종이 “내가 들으니 안시는 지세가 험하고 무리들이 사나워 막리지가 공격하였지만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안시성은 그대로 두자. 건암은 험준함을 믿고 있는데, 군량은 많으나 군사가 적으므로 만약 불의에 나아가 친다면 서로 구원해주지 못할 것이다. 건안을 차지하면 안시는 우리 뱃속에 있게 될 것이다.”하자, 이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동에 군량을 쌓아두고 서쪽으로 건안을 친다면 적들이 장차 우리의 귀로를 막을 것이므로 안시를 먼저 치는 것만 못합니다.”하였다. 이에 태종이 동의하고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오골성의 욕살은 이미 늙었으므로 아침에 치면 저녁에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오골을 탈취한다면 곧 평양도 탈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고,

또 여러 신하들도 장량의 군대가 사성에 있으니 불러온다면 하룻밤에 도착할 것이요, 만약 오골을 탈취한다면 압록강을 건너 그들의 심장부를 죌 수 있으므로 이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였다. 그러나 장손무기가 “천자가 군사를 움직임에 있어 요행수는 쓰지 않는다. 안시의 10만 무리가 우리 뒤에 있으니, 그들을 먼저 쳐부수고 이어서 남으로 진주하는 것이 만전의 형세이다.”하여서 그만두었다. 성중 사람들이 태종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벽에 올라가 소리 질렀다. 태종이 노하자, 이적은 성을 함락하는 날에 남자들을 다 죽이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인들이 듣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강하왕 도종이 거인(距闉)을 쌓아 동남쪽을 공격하니, 고구려는 성가퀴를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수비하였다. 이적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당차로 무너뜨렸으나, 무너진 곳은 곧바로 목책으로 누각을 만들었다. 태종은 성중의 닭과 돼지의 울음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포위된 지 오랫동안 굴뚝에 검은 연기가 나지 않았었다. 이제 닭과 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리니 반드시 (그것들을) 죽여 군사를 먹이는 것이다. 오랑캐가 밤에 나올 것이다.”하고 군사들에게 경계를 삼엄히 하게 명하였다. 병야(丙夜)에 수백 명의 고구려군이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모두 사로잡았다. 도종은 나뭇가지로 흙을 싸서 쌓아올렸다. 거인이 완성되자 성에 몇 길도 못 될 만큼 육박하였다. 과의도위 부복애(傅伏愛)에게 수비하게 하였는데, (토산이) 자연 높아져서 그 성을 밀어냈다. 성이 막 무너지는데, 복애가 사사로이 제 부서를 떠나고 없어서 고구려군사가 무너진 성틈으로 빠져나와 점거하고

참호를 파서 길을 차단하고 불을 놓고 방패를 둘러쳐서 수비를 굳게 하였다. 이에 태종은 노하여 복애의 목을 베고 모든 장수에게 공격을 명하였는데, 사흘동안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회군을 명하고 함락시킨 요주와 개주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군대가 성밑을 지나자 성중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깃대를 눕혔으며, 성주는 성위에 올라가 재배(再拜)하였다. 태종은 그들이 잘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백 필을 내려주었다. 요주는 곡식이 아직 십만 곡이 남아있었고 군사들도 다 모을 수 없을 정도였다. 태종이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진창에 막혀서 8십리 정도가 수레와 말이 다니지 못하였다. 장손무기․양사도 등이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다 길을 쌓고 수레를 연결하여 다리를 놓으니, 태종은 말위에서 나무를 져다 날라 역사를 도왔다. 10월에 군사들이 마지막으로 건너는데, 눈이 매우 많이 내렸다. 조서를 내려 건널 때까지 횃불을 들고 기다려 주라고 명하였다. 처음 떠날 적에는 병사가 십만, 말이 1만 필이었는데, 돌아올 때에는 사람은 겨우1천명이 죽었으나 말은 열에 여덟은 죽었다. 수군은 7만 명 중 역시 수백 명이 죽었다. 조서를 내려 전사한 시체를 거두어 유성(柳城)에 장사하는데 태뢰(太牢)로 제사하였다. 태종이 곡을 하니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태종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임투관(臨渝關)에 들어가자 황태자가 길옆에서 맞이하였다. 당초 태종은 태자와 작별할 때에 갈포(褐袍)를 입으며, “너를 보고나서 갈아입을 것이다.”하였다. 두 계절이 지나도록 갈아입지 않아서 구멍이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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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하들이 갈아입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은 “군사들은 모두 해진 옷을 입고 있는데, 나만이 새옷을 입을 수가 있겠는가?”하고 이때에 와서 태자가 깨끗한 옷을 올리자 드디어 갈아입었다. 항복한 요사람 1만 4천명은 모두 적몰하여 노비로 삼아 먼저 유주에 모아놓고 장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주려 하였다. 태종이 부모처자가 모두 흩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 담당관서에 명하여 포백(布帛)으로 대속을 받고 용서하여 백성으로 만들어 주게 하니, 줄을 서서 절을 올리고 기뻐서 춤을 추기를 사흘동안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항복한 후 근심으로 죽고 홀로 고혜진만 장안에 이르렀다. 이듬해 봄에 장이 사자를 보내어 방물을 올리고 사죄하였다. 두 미녀를 바치자, 태종은 돌려보내라는 명을 내리고 사자에게 “미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나 그 친척을 떠나와 마음 아파하는 것이 불쌍하여 내가 취하지 않겠다.”하였다. 지난번 회군때에 태종이 개소문에게 궁복(弓服)을 내려주었는데, 이것을 받고도 사자를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공을 줄이게 하였다. 또 이듬해 3월에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을 부총관으로 삼아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과 우둔위대장군 정인태를 부총관으로 삼아 영주도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도를 거쳐 진군하게 하였다. 남소·목저에 진주하였을 때에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외성만을 불태웠다. 7월에 우진달 등이 석성을 빼앗고 적리성으로 진격하여 수천 급의 머리를 베고 모두 돌아왔다. 장이 아들 막리지 고임무를 보내와서 조공하고 사죄하였다. 22년에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장군 배행방을 부총관으로 삼아 해도(海道)로부터 들어가게 하였다. 부장 고신감이 고구려와 갈산(曷山)에서 싸워 고구려가 궤멸되었다. 어둠을 틈타 배를 습격해온 고구려군을 또 복병으로 쳐부수었다. 설만철이 압록강을 건너서 박작성에 진주하여 40리 밖에 진을 쳤다. 고구려군이 두려워서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대추(大酋) 소부손이 저항하여 싸웠으나 만철이 격퇴시켜 그의 목을 베고 드디어 성을 포위하여 원병 3만 명을 무찌르고 돌아왔다. 태종이 장손무기와 계획하기를 “고려는 우리군사의 침입에 지쳐서 호구가 줄고 수확이 없는데도, 개소문이 성책만 증설하여 아랫 백성들은 굶주리고 구덩이에 쓰러져 죽으니 

그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년에 3십만 군대를 징발하고 공이 대총관이 된다면 한번의 출전으로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이어서 검남에 조를 내려 많은 배를 만들게 하였다. 한편, 촉인이 재화를 강남으로 수송하기를 원하므로 그 액수를 계산하여 배를 만들되, 배 한 척당 비단 1천 2백 필을 받아들이니, 巴·蜀이 크게 소란하고 공주(邛州)·미주(眉州)·아주(雅州) 등 3주의 관속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농서(隴西)와 협내(峽內)의 군사 2만을 동원하여 평정하였다. 일찍이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섬주자사 손복가와 내주자사 이도유에게 명하여 군량과 병기를 삼산포와 오호도에 비축하게 하는 한편, 월주도독에 명하여 큰 배와 우방(偶舫)을 만들어 대기하게 하였다. 마침 태종이 죽자 모두 중단되었다. 장이 사자를 보내 조문하였다. 영휘 5년(654)에 장이 말갈병을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여 신성에서 싸웠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화살이 모두 되돌아오자 거란이 이틈을 타서 (공격하니) 크게 패하였다. 거란이 들판에 불을 놓고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서로 엉겨 죽었으므로 시체를 쌓아 묻었다. (거란이) 사자를 보내 승리를 알리자 고종(高宗)이 조정에서 이를 포고하였다. 6년에 신라가 고려와 말갈이 36성을 빼앗아갔음을 호소하고, 천자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해주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위중랑장

소정방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신성에 이르러 고려군을 무너뜨리고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현경 3년(658)에 다시 정명진을 보내어 설인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년 뒤에 천자가 백제를 평정하였다. 이에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우무위대장군 소정방·좌효위장군 유백영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패수·요동·평양도로 각각 진군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용삭 원년(661)에 많은 군사를 모으고 열러 장수를 임명하여, 천자가 친히 나서려 하였는데, 울주자사 이군구가 “고려와 같은 작은 오랑캐에게 무엇 때문에 중국의 힘을 기울여서 나갈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려를 멸하고 나면 반드시 군사를 파견하여 지켜야 하는데, 군사를 적게 파견하면 위엄이 떨치지 않고, 군사를 많이 파견하면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할 것이니 이로ㅓ써 천하가 군비에 피폐하게 됩니다. 신이 보건대, 고구려를 치는 것은 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고구려를 멸하는 것은 멸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고 건의하였다. 또 마침 무후(武后)의 심한 반발이 있어서 고종이 그만 두었다. 8월에 소정방이 패강에서 고구려군대를 쳐부수어 마읍산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이듬해에 방효태가 영남병(嶺南兵)을 거느리고 사수(蛇水)에 진주하였다가, 

개소문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소정방은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건봉 원년(666)에 고장이 아들 남복(南福)을 보내어 천자의 태산봉선에 참예하고 돌아갔다.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남건과 남산 두 아우가 있었는데 서로 사이가 나빴다. 남생이 국내성을 점거하고 아들 헌성을 보내어 입조하여 구원을 청하니, 개소문의 아우 정토도 역시 땅을 베어 항복할 것을 청해왔다. 이에 조서를 내려 계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삼고, 좌금오위장군 방동선과 영주도독 고 암(高偘)을 행군총관으로 삼는 한편, 좌무위장군 설인귀와 좌감문장군 이근행을 후속부대로 떠나보냈다. 9월에 방동선이 고려병을 쳐부수니 남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조서를 내려 남생에게 특진 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를 제수하고 현토군공에 봉하였다. 또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아 계필하력·방동선과 협력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독고경운을 압록도행군총관으로, 곽대봉을 적리도행군총관으로

유인원은 필열도행군총관으로, 김대문을 해곡도행군총관으로 각각 삼고, 이적에게 절도(節度)를 주는 한편, 연(燕)·조(趙)에 있는 군량을 요동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듬해 1월에 이적이 도(道)를 이끌어 신성에 진주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계획하기를 “신성은 적의 서쪽 변경의 요충이므로 먼저 함락시키지 않으면, 다른 성도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하고 드디어 서남쪽 산에 올라가서 성에 가까이 붙어 성벽을 올리니, 성중의 사람들이 추장을 묶어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적은 계속 진격하여 16성을 빼앗았다. 한편 곽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였다. 3년 2월에 이적이 설인귀를 이끌고 가서 부여성을 빼앗으니, 다른 30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방동선과 고간은 신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남건이 군대를 보내어 습격하였다. 설인귀는 고간을 구원하느라 금산(金山)에서 싸움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려군이 북을 울리며 진군하는데, 예봉이 날카로왔다. 설인귀가 측면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어 머리 5만 급을 베었다. 남소·목저·창암의 3성을 빼앗아 군사를 이끌고 점령한 후 이적과 합류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군사작전관계로 돌아왔다. 고종이 군중의 상황을 물으니 답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지난날 선제께서 문죄(問罪)할 적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에 내응하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남생의 형제가 집안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하여 주고 있으니, 우리는 오랑캐의 내부 사정을 다 알 수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의 비기( 秘記)에 9백년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고 하였는데, 고씨가 한(漢)때로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적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고구려는 기근이 거듭되어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여 팔고,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중에 들어가고 두더지가 성문에 굴을 뚫어 인심이 불안에 떨고 있으므로, 이번 걸음에 다시는 출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남건이 군사 5만으로 부여(성)를 습격하자, 이적이 살하수(薩賀水) 위에서 그를 쳐부수어 5천 급의 머리를 베고, 3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병장기 및 소와 말도 이에 맞먹었다. 진격하여 대행성을 빼앗았다. 유인원이 이적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뒤늦게 도착하였다. 소환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나 용서하여 요주(姚州)로 귀양보냈다. 계필하력은 이적의 군대와 압록에서 합류하여 욕이성(辱夷城)을 빼앗고, 모든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포위하였다. 9월에 고장이 남산에게 수령 1백 명을 주어 보내며 흰 깃발을 세워 항복을 청하는 한편, 입조를 청하므로 이적이 예의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그러나 남건은 오히려 굳게 지키며 나와 싸웠으나, 여러 번 패하였다. 대장인 승려 신성이 첩자를 보내 내응을 약속하였다. 닷새만에 성문이 열렸다. 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들어가서 성문에 불을 놓아 

불길이 사방에서 솟으니 남건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이에 고장․남건 등을 사로잡고 5부의 1백 76성과 69만호를 몰수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적에게 지름길을 택하여 소릉(昭陵)에 헌부(獻俘)하고 개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12월에 고종이 함원전에 앉아서 이적 등을 인견하고 조정에서 포로를 헌상받았다. 고장은 평소에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으로 삼고 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삼았다. 남건은 검주(黔州)에 유배시켰으며, 백제왕 부여륭은 영외로 유배보냈다. 헌성은 사위경으로 삼고,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로 삼았다. 남생은 우위대장군으로 삼고 계필하력은 행좌위대장군으로 삼았다. 이적은 겸태자태사로 삼고, 설인귀는 위위대장군으로 삼았다. 그 나라의 땅을 9도독부․42주․1백현으로 분할하였다.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추호(酋豪)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자사․령에 각각 제수하여, 중국인관리와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설인귀를 도호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케 하였다. 이 해에 교제(郊祭)를 지냈는데, 고려를 평정한 것에 대해 하늘에서 일을 이루어준 것을 사례하였다. 총장 2년(669)에 고려 백성 3만 명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고려의 대장 겸모잠(鉗牟岑)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고장의 외손(外孫) 안순(安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고, 이근행을 연산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사평태상백 양방(楊昉)을 보내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泉山)에서 쳐부수고 신라의 구원병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로하(發盧河)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 수가 1만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의 패잔병들은 다시 군열(軍列)을 정비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신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년 만에 평정되었다. 지난날 이근행이 아내 유씨를 시켜 벌노성(伐奴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공격해오자 유씨는 갑옷을 입고 대오를 정렬하여 수비하니 적들이 물러났다. 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에 봉하였다. 의봉(儀鳳) 2년(677)에 고장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고구려이주민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고장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추방하고 나머지 이주민들은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노약자와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고장이 영순(永淳) 초년(682)에 죽으니, 위위경을 추증하여 힐리의 묘 왼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예전의 성들은 자주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의 군장(君長)은 모두 끊겼다. 수공(垂拱) 연간(685-688)에 고장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 초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다시 충성국왕에 봉하여 안동구부(安東舊部)를 다스리게 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이후로 조금씩 나라의 기틀이 잡혀갔다. 원화(元和) 말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어 악공(樂工)을 헌상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