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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서자(庶子)의 3가지 의미(意味), 동궁(東宮) 미스테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좌계가 볼 때에는 사천(史穿) 김성겸 님께서 해석하신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의 사료(史料)적 가치는 이미 번역하신 ‘시조 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보다 훨씬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봅니다.  

1.  인식소(認識素 : 근본 지식) - 에피스테메(episteme)가 다르면, 인지(認知) 자체가 힘들다.  

 그런데, 인간의 두뇌는 자신의 ‘기본적인 지식관’ 다시 말하면,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대거(大擧)등장할 때에는 신기하게도 인지(認知) 자체가 안되는 현상이 있는 듯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사천(史穿) 선생께서 먼저 ‘초벌 해석’한 ‘시조 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는 그런대로 우리의 인식체계를 송두리째 흔드는 그런 내용이 2번째 해석하신 ‘광명대제기’보다 적다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번역한 글을 읽기도 쉽고, “새로운 정보를 소화(消化)할 수 있는 사전준비가 되어 있는 해석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명대제기’는 워낙 인식소(認識素) - 에피스테메(episteme) 자체가 기존 지식과는 상이한 바탕 위에서 전개되는 내용이 많은지라,  “해석문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인식 자체도 힘든 이상한 내용이 많다고 봅니다.


2.  세가지의 개념으로 쓰인 서자(庶子)

좌계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고대 아시아의 서자(庶子) 개념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광명대제기’에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자(庶子)의 개념을 적서(嫡庶)의 개념 - 즉 본처(本妻)의 아들을 적자(嫡子)라 하고, 첩(妾)의 아들을 서자(庶子)라고 칭하는 이른바 유교(儒敎) 측의 용어에만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자(庶子)의 개념은 이런 적서(嫡庶)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쓰이는 것이 2가지나 되는 그런 용어(用語)입니다.

가. ‘환웅(桓雄)이 서자(庶子)’라는 말의 뜻.

서자(庶子)의 서(庶)는 ‘뭇(=중(衆)’이 원래 기본 뜻입니다.  그리고 자(子)는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에서 보다시피, ‘중요한 학파의 스승’이란 개념도 있고,  또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이란 작위(爵位)의 개념이기 때문에 자(子)는 요컨대 ‘사회적인 존칭’으로 쓰이는 말인 것으로 보면 됩니다.
좌계가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고서(古書)에 “서자(庶子) 환웅(桓雄)께서....”라는 이야기가 등장할 때, 코메디(comedy)같은 해석을 명색이 학자(學者)라는 분들이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환웅(桓雄)을 ‘첩(妾)의 자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서자(庶子) 콤플렉스(complex)’ 어쩌구 저쩌구 하는 이야기까지 등장하는데에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단호(斷乎)히 말씀드리면, 서자(庶子) 환웅이란 뜻은 ‘뭇 대중(大衆)에 의해서 옹립된 분’이란 뜻이지, 결코 ‘첩(妾)의 아들’이란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서자(庶子)로써 모시는 방법이 바로 화백(和白)회의였겠지요.  

나.  가신(家臣)의 개념으로 썼던 서자(庶子)

그런데, 이처럼 ‘뭇 대중에 의해서 옹립된 분’이란 개념이 아닌 서자(庶子)의 또다른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신(家臣)이라는 개념을 이 서자(庶子)로써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널리 썼다는 것입니다.

이 용례(用例)가 구체적으로 들어나는 것이 바로 상군서(商君書)입니다.
진(秦)이 중국대륙을 통일하는 밑바닥 이론을 제공한 상앙(商鞅)의 저술입니다.  
조선(朝鮮) 시대를 거치면서, 지독한 유교(儒敎) 이데올로기에 휩쌓여있는 우리나라의 지식풍토에서는 법가(法家) 계통의 이 명저(名著)를 읽은 사람이 의외로 적습니다.

그런데,  상군서(商君書) 19 경내(境內) 편(篇)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작위(爵位)를 가진 사람은 작위가 없는 사람을 나라에 신청하여 가신(家臣)으로 삼을수 있으며, 등급(等級)대로 한 사람의 가신(家臣)을 신청할 수 있다.
(원문(原文) : 기유작자(其有爵者) 걸무작자(乞無爵者) 이위서자(以爲庶子)

전쟁이 없으면 가신(家臣)은 주인(主人 : 원문(原文)은 대부(大夫))에게 매달 6일을 복역하고, 전쟁이 나면 가신(家臣)은 주인을 따라 군대에 가서 주인을 봉양하여야 한다.
(원문(原文) : 기무역사야(其無役事也) 기서자역기대부(其庶子役其大夫) 월육일(月六日)
기역사야(其役事也) 수이양지군(隨而養之軍)”

이 경내(境內) 편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때,  남의 가신(家臣)이 되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모시는 주인(主人)’을 대부(大夫) - 즉 ‘큰 아버지’로 불렀고, 이런 대부(大夫)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신을 받드는 가신(家臣)을 “우리 서자(庶子)”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내(境內) 편(篇)에 들어나듯이 전쟁에서도 이 서자(庶子)들은 ‘큰 아버지’인 대부(大夫)를 봉양(奉養)하여야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수이양지군(隨而養之軍)’이란 구절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3.  송양(宋讓)과 광명대제(光明大帝)의 관계에 대해

좌계가 이런 서자(庶子)에 얽힌 이야기를 상세히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천(史穿) 선생께서 해석한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에 광명대제(光明大帝) 즉 유리왕(瑠璃王)과 비류국(沸流國) 국왕(國王)과의 관계가 전형적인 [‘큰 아버지(=대부(大夫)’ - 서자(庶子)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일단 비류국(沸流國) 국왕(國王) 송양(宋讓)은 고주몽-동명성왕과 ‘활쏘기’ - 이는 배달화백(倍達和白)을 상징하는 것임 -을 하여, 다물후(多勿侯)로 모셔지긴 했어도, 고구리(高句麗) 왕가(王家)로 보아서는 분명 가신(家臣)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신(家臣)인지라, 고주몽(高朱蒙)-동명성왕의 아들인 유리왕(瑠璃王) - 다시 말하면 광명대제(光明大帝)의 가신이기도 하다는 것이고, 자연히 유리명왕(瑠璃明王)에게 서자(庶子)가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송양(宋讓) 다물후(多勿侯)께서 ‘머리가 흰 노인(老人)’이라고 할지라도 광명대제(光明大帝)를 보고, “큰 아버님” 이렇게 칭(稱)했음이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풍습으로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리왕께서도 실제 “내 서자(庶子) - 내 아들”로 생각하고,  아들에 준(準)하는 예법(禮法)으로 대하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풍습으로는 당연하다는 말씀을 좌계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때, 우리는 사천(史穿) 선생께서 해석하신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가 사료(史料)로써 엄청나게 중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4.  동궁(東宮) 미스테리

그런데, 광명대제기(光明大帝記)에 보면, 해명(解明) 태자가 강요(强要) 받은 자살을 한 뒤에 아주 특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문(原文)이 다음과 같습니다.  

(*) 원문(原文)
<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좌계는 ‘태자(太子)의 자리’ = ‘동궁(東宮)의 자리’로 해석했고, 사천(史穿)선생께서는 ‘서로 다른 자리’로 해석하였습니다.

좌계는 사천(史穿) 선생께서 ‘서로 다른 자리’로 해석하는 것도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나.”에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좌계가 생각한 것을 먼저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송양(宋讓)은 서자(庶子)이므로 ‘동궁(東宮) 자리’를 탐(貪)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송양(宋讓)은 유리왕(瑠璃王) 즉 광명대제(光明大帝)의 서자(庶子) 즉 아들입니다.  그래서 광명대제(光明大帝)의 아들인 해명(解明) 태자(太子)께서 ‘강요된 자살’을 하자,  그 ‘자리’를 탐(貪)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왜냐?
서자(庶子)이긴 하지만, 다물후(多勿侯)로 존경을 받는 특별한 서자(庶子)이기 때문에, 차기(此期) 고구리 왕의 우선권(優先權)이 있는 ‘태자(太子) 자리’ 혹은 동궁(東宮)자리에 나갈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점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에 좌계가 올린 ‘댓글’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ㄱ 같습니다.  

1) 서자(庶子)인 송양(宋讓)이 동궁(東宮)을 탐한 과정과 그 결말

 - 이하 ‘댓글’ 옮김 -
‘<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
- (이 부분의 해석은)
“송양(宋讓)은 망녕되게 자신을 과장(誇張)하는 바가 있어서 질책(叱責)을 (상(上)으로부터 받는 것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명(解明) 태자가 죽는 것을 보고(=見<解明>之死), (그 빈자리인) 동궁(東宮)이 (되기를) 욕망하였다.”

‘使其妻<曼>公主請于上’
- (이 부분의 해석은)
“(송양의) 처(妻)인 만(曼) 공주로 하여금 상(上: 광명대제)에게 (송양(宋讓)을 동궁(東宮)으로 삼아달라는) 청(請)을 하게 했다.”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而吐歐不起.’
이런 우줍짢은 부탁을 받은 만(曼) 공주의 말이 나오는데,
- (위 구절의 해석은)
“만(曼)공주 말하기를 “(그냥 현 직위(職位)에 그대로 )있으면서, 스스로 수양(修養)만 하세요! (=在自修), (남편께서) 청(請)한 것을 못하겠습니다.(=而不在請) (그 청(請)이 의미하는 바가) 번민(煩悶)되어 스스로 여름 땡볕에 접한 것처럼 불탑니다. (=煩悶自焦觸暑)”라고 또악질을 하고, (까딱않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 (이 부분의 해석은)
이때 세상사람들은 말하기를 “ (동궁(東宮)자리라는 것은) 용감해도 죽는 자리이고, (만(曼)공주처럼) ‘결벽(潔癖)해서 몸을 사려 겁(怯)먹어도(=유(懦))’ 죽는 자리이구나!”라고 했다.
- 이상 ‘댓글’ 옮김 마침 -

2) 해석(解釋)의 정확성과 무관한 인지(認知)-혼란(混亂)의 문제에 대해

이제 좌계가 “왜 이글을 쓰는지?”를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좌계는 상군서(商君書)를 읽었기 때문에,  송양(宋讓)이 고구리(高句麗) 왕가(王家)에 ‘특별 대우를 받는 서자(庶子)’ 즉 가신(家臣)이어서 “해명(解明) 태자가 강요된 자살을 한 후, 그 빈자리를 노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사천(史穿) 선생께서 해석한 글을 보고 ‘전혀 혼란이 안일어났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때, 가신(家臣)을 서자(庶子)로 취급했다는 인식소(認識素) , 근본지식- 즉 에피스테메(episteme)가 없는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도대체 광명대제기(光明大帝記)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감(感)이 안잡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  동궁(東宮)을 ‘움직이게 하는 궁궐’로 볼 경우.

그런데, 이런 좌계의 견해를 ‘댓글’로써 밝히자, 사천(史穿) 선생께서는 “그 점은 미처 못살폈지만, 나중에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라고 일단 수긍(首肯)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반응을 보고, 좌계는 “동궁(東宮)이 ‘태자 자리’를 뜻하는 표현이긴 하나, 다른 뜻일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
동(東)의 금문(金文)에 보면, 신(身)과 동(東)을 합쳐져 있는 글자 - 말하자면 ‘身+東’인 글자가 보이고,  ‘멜빵 위에 무엇을 둥둥 띄워 지고 다니는 모습’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고구리 왕이 늘 서토(西土)의 왕(王)에게 동주(東主)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단순히 ‘중국대륙 동쪽을 많고 있는 주인(主人)’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시(神市) - 경제 씨스템(system)에서는 나라를 신시의 화폐로써 ‘흘러다니게 할 수’있는데,  이처럼 다양한 중국대륙의 부족국가를 중국대륙 안에 흘러오게 하는 왕을 동주(東主)로도 나타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궁(東宮)의 의미가 ‘나라들을 흘러다니게 하는 궁(宮)’으로 볼수도 있는 것이지요.


(*) 원문(原文)
<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이상 원문(原文)에 대해서 사천(史穿) 선생의 관점은
첫째 동궁(東宮)과 ‘태자의 자리’는 다른 것이다.  
둘째 “죽은 해명(解明)이 이 동궁(東宮)에 들어갈 수 있다. ” 가 가장 큰 해석ㅎㅇ싀 축(軸)이 되는 것입니다.

즉 황룡국(黃龍國) 국왕(國王)인 오이(烏伊)을 - 좌계의 추정으로는 현(現) 섬서성 태백산 지역의 국왕 - 모욕해서 ‘자살을 강요’받은 것을 ‘고구리가 여러 나라를 신시(神市)의 화폐로 바꾸어서 움직이도록 하는 동궁(東宮)에 정신적인 상징’으로 모실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섬서성 태백산은 중국대륙을 사통오달(四通五達)케 하는 손자병법의 구지(衢地)인지라, “이를 중요시여기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해명태자를 그 동궁(東宮)의 신(神)으로 모시자”라고 할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천(史穿) 선생의 원래의 견해(見解)를 존중해서 좌계가 보완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고 봅니다.  
(***) 사이에 좌계의 보완적 설명을 넣어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1) <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
???<송양>은 자신을 과장하여 (***)유리왕(瑠璃王)인 광명대제(光明大帝)로부터(***) 여러차례 질책을 받았고,

(2) 見<解明>之死,慾爲東宮 使其妻<曼>公主請于上,
(***) 송양(宋讓)은 (***)<해명>이 죽는 것을 보았다. (송양은 <해명>을) (***)신시(神市)의 화폐로써 여러 중국 외부의 부족국가를 옮김에 있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신(神)인 (***) 동궁으로 만들고 싶어서  자기의 처인 <만>공주를 시켜서 상(上)께 청하라 하니,

(3)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而吐歐不起.
<만>공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행실을 바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청을 할 것인가? 번민이 불타올라 덥다." 말하고,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4)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그 시절 사람들은 “(해명태자 처럼) 용감해도 죽고, (또 신(神)으로써 모심에) 유약해도 (신(神)으로 모셔지지 않아) 죽음뿐이다.”라고 (동궁(東宮)의 성격(性格)에 대해) 말했다.

- 이상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에 대한 주해(註解)를 마침 -

좌계가 볼 때에는 “‘태자의 자리’를 ‘동궁(東宮)의 자리’와 다르다.”라고 생각한 사천(史穿) 선생의 견해(見解)도 존중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물후(多勿侯)인 송양은 ‘해명(解明) 태자를 동궁(東宮)의 신(神)’으로 모심으로써, 은연중 유리왕인 광명대제(光明大帝)의 정치적 약점을 노출(露出)시켜 영향력을 크게 할 수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런 주청(奏請)을 할수 있는 것도 해명(解明)이 태자(太子)로써 ‘아들’인 것처럼, 송양(宋讓)이 서자(庶子)로써 ‘아들’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같은 형제(兄弟)를 신(神)으로 모시자고 아버지인’ 유리왕(瑠璃王)에게 주청(奏請)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5.  일사(逸史)의 해석은 정사(正史)의 해석보다 어렵다.

좌계는 늘 사서(史書)를 해석함에 있어서 “정사(正史)보다 일사(逸史)가 훨씬 어렵다.”는 견해를 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사(正史)의 문장(文章)은 우리가 아는 ‘패러다임’ ‘에피스테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 비하여,  일사(逸史)는 ‘사라진 패러다임’과 ‘에피스테메(episteme)’가 듬뿍 묻어있는 이상한 문장(文章)이기 때문입니다.

(해석하기 쉬운 정사(正史)도 외면하는 사학 풍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일사(逸史)는 일단 해석되고,  다양한 시각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실감(實感)이 잘 안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머리 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상한 면(面)이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

사천(史穿) 선생과 ‘정성일’ 선생께서  인지(認知)-혼란(混亂)을 부르는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집의 해석에 도전하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두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9)


백송 (2007-05-02 14:02:32)  
평소 좌계님과 김성겸님의 해박한 지식에 대하여 존경하고 있습니다.
두가지 대목에 대하여 제 견해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 가신이 보낸 활을 부러뜨리고 무시하여 죽음을 당한 해명태자는 용감한 분이고, 두번째 다물후 송양에게 시집간 만공주는 남매지간으로 남편의 청을 황상이신 아버지에게 청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군요.

위 글에서 3,4번은 이러한 남매의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3)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而吐歐不起.
<만>공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행실을 바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청을 할 것인가? 번민이 불타올라 덥다." 말하고,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토하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것은 중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즉, 남편이 동궁의 자리를 노리고 어쩌면 반역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아차린 만공주가 차마 남편의 뜻을 따라 아버지에게 거역하지 못하고 자진한 상황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토하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즉, 독약을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지요. 이것이 세인이 볼때 유약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4)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세인이 왈, 용감해서 죽고, 유약해서 죽었다.
즉, 왕자인 해명은 용감해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공주 '만'은 남편의 청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 못하는 유약한 성격이어서 고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상황을 그린 것이 아닌지 생각됩니다.
좌계 (2007-05-02 14:37:17)  
/백송 님.
과감히 죽은자를 만(曼) 공주로 파악하셨군요!
토악질을 이미 죽기 전의 징조(徵兆)로 보면....
절묘(絶妙)! 우(又) 절묘(絶妙)!
하하. 좌계의 해석도 죽었습니다.
정훈 (2007-05-04 13:03:10)  
東宮? 동궁? 이란 무엇을 의마하는 것인가?
새궁, 앞으로 왕이 될 사람 즉 동은 새것을 의미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지리연구에서 동부가 있고(연개소문의 영지) 지금의 요하(비류수) 동쪽을 지칭하는데 그런데 고구려는 동부가 있고 북부가 있는데 북부는 지리적을만 본다면 만주 북방이 돼야 한다. 그런데 북부고노자는 신성제인데 북부는 과연 어딘가? 지금의 천진 동쪽으로 비류수(금요하) 사이를 말한다. 그곳은 동명제가 창업을 개시한 졸본부여(광개토비문에는 홀본), 동명제는 다음 비류수 강가에서 비류왕 송양을 복속합니다.
동명제는 동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려의 개성은 동도가 되고 평양은 서경이라 했는데 그것은 북이나 서는 앞선 설치며 동은 후에 설치된 것을 말합니다. 중원도 서진이 있고 동진이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북은 태초 최초며 서는 동 보다 앞선 것으로 이해 하여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