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 산재되어 있고 헷갈리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문제인 것은 산재되어 있는 기록들을 모아 하나의 편년으로 만들다보니 여기가 저기인지 저기가 여기인지 알아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도읍의 이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 글에서는 후기 고조선의 도읍인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의 정확한 위치 비정보다는 그 곳은 고조선 봉국 중 하나인 옛 부여의 도읍이었다라는 것을 보이겠습니다. 대략의 위치는 그림에 보였습니다. 제외시켜야 할 것들 우선 고조선 도읍이라고 여겨지는 여러가지 이름들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겠습니다. * 임검성(壬儉城): 이는 도읍의 이름이 아니라 역대 단군이 살던 성을 이름하는 것입니다. "청와대"와 비슷한 것이지요. 壬은 북방색인 "검은"을 나타내고 儉은 壬儉의 어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壬儉은 "임검"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후대에 백제에서는 고마성(固麻城)이라 했습니다. 검성(壬儉城)과 고마성(固麻城)은 다 같은 말로 임금이 사는 성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도읍의 이름은 아닙니다. * 왕험성(王險城): 이는 임검성(壬儉城)을 지나인들이 잘못이해하여 왕이 사는 곳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험한 곳에 도읍하였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임검성(壬儉城)을 왜곡하여 왕험성(壬險城)이라 한 것입니다.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따라서 도읍의 이름은 아닙니다. * 왕검성((王儉城): 후대 사대주의자들이 지나사서의 왕험성(王險)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왕검(王儉)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도읍의 이름은 아닙니다. 포함시켜야 할 것들 사서에 나오는 고조선 도읍들 중에 포함시켜야 할 것들을 모아봤습니다. ① 아사달(阿斯達):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이죠. 위서를 인용하면서 단군이 도읍하였다고 한 곳입니다. ②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삼국유사에 나오기도 하고 한단고기에 나오기도 합니다. 한단고기에서는 1)의 아사달과 다른 곳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같은 곳입니다. ③ 평양(平壤): 고구려의 후기 도읍이며 마한의 도읍이기도 한 곳입니다. 지금의 평양과는 다른 곳입니다. 역사상 서경(西京)은 항상 평양이라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④ 당장경(唐藏京): 아주 비밀스러운 곳입니다. 과연 이것이 도읍의 이름인지 단군들의 휴양지인지 아니면 성스러운 사원이 있는 곳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말하기를 아사달 바로 아래에 위치하였다고 합니다. 이름도 장당경이라 하기도 하고 장장평 당당평 제멋대로 입니다. ⑤ 고시씨(高矢氏)의 봉국의 도읍: 규원사화에서는 고시씨를 동남쪽에 봉하고 도읍의 이름을 낙랑홀이라고 하였으나 낙랑이란 곳을 고조선 동남쪽으로 잡은 것은 신라지역을 낙랑으로 보는 후대의 사대주의 사학에 근거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⑤고시씨의도읍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대략적으로 그림에 표시하였습니다. 백산은 대흥안령산맥으로 보았습니다. 도읍의 변천 이 제 고조선 약 2000간 도읍의 변천에 대해서 알아 본 후 백악산 아사달이 어디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규원사화에서는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단군의 치세 동안 도읍을 4번 옮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 2000년간의 도읍 변천이 아니라 전기 고조선 약 1000년간의 도읍 변천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제가 규원사화와 한단고기 삼국유사 등을 종합한 결과로는 도읍의 변천은 아래와 같습니다. 전 | i) ①아사달(阿斯達) (BC2333) | ↓ 기 | ii) ③평양(平壤) (BC2323) | ↓ 고 | iii) ④당장경(唐藏京) (BC2303) | ↓ 조 | iv) ③평양(平壤) (BC2240) | ↓ 선 | v) ⑤고시씨의도읍 (BC1342) ___ ↓ 후 | vi) ②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BC1285) | ↓ 기 | vii) ④당장경(唐藏京) (BC425) 전기고조선의 도읍이동은 규원사화를 따랐으며 후기고조선의 도읍이동은 한단고기를 따랐습니다. 혹 빠진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중요한 것은 위 도읍을 이동시킨 것은 각각 이유가 있기때문이라는 것이지요. * i) → ii)의 이동 아 사달에서 평양으로 옮기는데, 이때에 비로소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합니다. 대동사강에 보면 나라이름을 원년에는 진단(震檀, 辰檀)이라 하였다가 23년이 지나서 평양에 도읍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했으나 저는 규원사화를 따라 10년 후에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과연 "조선"이 나라이름이냐 하는 것의 문제가 있는데 저는 "조선" 나라이름이 아니라 진단(辰檀)과 마한(馬韓,鮮明國)을 합하여 이름한 것이고 평양은 원래 마한의 도읍이었으나 진단(辰檀)이 마한을 병합하고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아사달은 백산의 서남쪽에 있고 평양은 백산의 남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사달은 동남쪽에 평양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 ii) → iii)의 이동 평 양에서 당장경으로 옮깁니다. 이때 홍수가 있어 패수가 불어 넘쳐 더이상 평양에 살기 어려워 도읍을 옮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장경은 평지가 아니라 높은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규원사화에서는 당장경은 아사달 아래에 위치해 있다고 말합니다. * iii) → iv)의 이동 이때는 당장경에서 다시 평양으로 오는데, 홍수가 해결되었고 부루가 단군을 이어 임금에 오르는 시기입니다. 거의 1000년간 고조선은 평양에 도읍하게 됩니다. 당 장경에서 평양으로 옮기기 전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건국 40년만에 고조선 서북쪽에 있었던 알유(猰猶)가 난을 일으켜 그들을 단군의 아들 부여가 처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 부여의 봉국인 부여국에게 서북쪽의 땅을 더 주게 되죠. 이 말은 고조선 봉국 옛부여의 도읍이 고조선 초기 도읍 " ①아사달"과 같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①아사달이 ②백악산아사달과 같은 곳이냐 다른 곳이냐 뒤에서 따져볼 것인데 저는 같은 곳이라고 봅니다. * iv) → v)의 이동 BC1342에 평양에서 도읍을 고시씨봉국의 도읍으로 옮깁니다. 사서에는 이 이유에 대해서 크게 부각시키지 아니하였으나 이때부터 고조선은 분열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규원사화 기록을 보면 遷都樂浪忽, 使眞番侯監舊都. 수도를 고시씨봉국의 도읍으로 옮기고 진번眞番의 왕으로 하여금 평양성을 감찰하게 하였다. 돌려서 쓴 것이지만 이말은 고조선이 분열되어 봉국으로 있던 진번眞番의 왕이 평양성을 차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루문임금은 동남쪽으로 도읍을 이동시켜 고시씨봉국에 도읍을 옮기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 v) → vi)의 이동 고 시씨의도읍에서 백악산아사달로 옮깁니다. 정확히 말하면 도읍을 옮긴 것이 아니라 고조선이 분열되어 약해진 틈을 타서 고등(혹은 등고)의 아들이 고조선의 정권을 잡고 도읍을 아사달에 한 것입니다. 한단고기에서는 위 규원사화에 나온 도읍 이동과정이 모두 빠져있기에 아사달에서 백악산아사달로 옮긴 것처럼 되어 있으나 아사달에서 백악산아사달로 옮겼다는 것은 사서를 잘못해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사달과 백악산아사달은 같은 곳이기때문이죠. 같은 곳이라는 것은 뒤에서 밝히겠습니다. * vi) → vii)의 이동 백악산아사달에서 당장경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이것도 역시 도읍을 옮겼다기 보다는 백민성욕살이 고조선의 정권을 잡고 도읍을 당장경에 한 것입니다. 아사달을 백악산아사달로 볼 조건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단군이 처음 도읍한 아사달과 고등의 아들이 도읍한 백악산아사달이 같은 곳임을 보이겠습니다. 《삼국유사》 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岳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 위서에서 말하기를 2000년 전에 단군임검이 있었는데 아사달에 도읍하였다(경에서 말하기를 무엽산이하기도 하고 혹 말하기를 백악白岳이라 하기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 또 말하기를 개성의 동쪽에 있는데 지금 백악궁이 이것이다) 이 기록은 처음 도읍한 곳인 ①아사달(阿斯達)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혹 백악白岳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백악白岳이란 백산白山을 달리 쓴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도읍인 ①아사달(阿斯達)은 백산의 서남쪽에 있기때문이죠. 개성의 동쪽이니 한것은 후대 사대사학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 기록에서 아사달이 백악산아사달과 같은 곳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孕生子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아 들을 나아 단군임검이라 하였다. 요堯임금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고려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로 옮겼다. 또 이곳은 궁홀산(혹은 방홀산)이라 하기도 하는데 고려의 미달彌達이라고도 한다. 약 1500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 즉위 기묘년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 단군은 후에 당장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후에 아사달로 옮겨와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는 1908세라 하였다. 이 기록에는 위사도 있고 실사도 있고 사서를 곡해한 결과도 있습니다. 도읍이동과정을 하나씩 보면 * 都平壤城(평양에 도읍하였다): 이것은 처음으로 ①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한 과정을 빼먹고 i) → ii)의 이동과정만 보여 ③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도읍을 백악산아사달로 옮겼다): 이것은 모든 도읍이동과정은 보이지 않은체 고등의 아들이 고조선 정권을 잡고 ②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도읍한 v) → vi)의 과정을 보인 것입니다. 이때가 BC1285년입니다. * 乃移於藏唐京(도읍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이것은 vi) → vii)의 이동과정을 보인 것인데 이 역시 백민성욕살이 정권을 잡아 ④당장경(唐藏京)에 도읍을 세운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가 BC425년입니다. 식 민사학자들은 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이란 구절을 근거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단군이 당장경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말하지만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해는 BC1122년이고 당장경으로 옮긴 해는 BC425년입니다. 더군다나 백악산아사달로 옮긴해는 BC1285년입니다. 식민사학자들은 도읍이동과정과 연도를 하나도 검토하지 않은체 그냥 글자만 해석하여 기자가 오자 단군이 당장경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으나 연도를 보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封箕子於朝鮮을 앞구절에 붙여 "고조선의 도읍을 백악산아사달에 옮긴 이유가" 기자를 조선에 봉한 것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도읍을 백악산아사달로 옮긴 것은 BC1285년이요, 기자가 온 것은 BC1122년이기때문이죠. 封箕子於朝鮮을 뒷구절에 붙여 "고조선의 도읍을 당장경에 옮긴 이유"가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 때문이라 한다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뒤 700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 옮긴 것이므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즉, 삼국유사의 封箕子於朝鮮는 그냥 집어 넣은 것입니다. 앞뒤구절과 전혀 개연성이 없습니다. 또 이야기가 밖으로 샜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아 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다): 이것은 보통 고조선의 임검들이 나라가 분열되면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라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그냥 뒤에 붙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도읍이동과정은 i) → ii) → iii) → iv) → v) → vi) → vii) 중에 어느것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적으로 넣는 구절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됩니다. 신채호선생님의 《조선상고문화사》에 보면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고기(古記)에서는 말하기를 "단군의 후세에 부여로 옮겼다"고 하였다. 허미수(許眉叟)의 단군세기(檀君世紀)나 순암 안정복의 동사고이에서는 이 말을 따르고 있다.』 단군이 후세에 부여로 옮겼다? 처음듣는 말이라 의아해할 것입니다. 동 사고이란 동사강목 중 고이를 말하는 것일테고 단군세기란 허목의 미수기언 중 동사의 단군세가를 말하는 것 같아서 찾아봤으나 이러한 구절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신채호선생이 본 동사강목이나 허목의 동사는 우리가 지금 보는 것과는 다른 필사본이고 그곳에는 단군이 후세에 부여로 옮겼다라고 나와있었다는 것이지요. 신채호선생님께서 혹 실수하신 것은 아니실지 하여 다른 단군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단군이 부여로 옮겼다라는 구절이 정말로 있더군요. 《東史輯略》 季年移居白岳以沒, 子孫相傳, 凡千有十七年. 徙于濊地(或曰北夫餘), 後一百九十六年而箕子東來云. 말년에 백악으로 옮겨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자손은 대대로 이어져 무릇 1017년이나 되었다. 예의 땅(혹은 말하기를 북부여라고 하였다)으로 옮긴 후 196년이 지나서 기자가 동쪽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1017 년에 백악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는 제가 말한 v) → vi)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 뒷구절입니다. "예의땅(북부여)으로 옮긴후 196년 뒤에 기자가 왔다" 이것 역시 연도를 따져보면 제가 말한 i) → ii) → iii) → iv) → v) → vi) → vii)의 이동과정 중 v) → vi)의 이동과정에 해당됩니다. 《東史輯略》은 여러곳에 산재한 단군의 도읍이동과정을 모으다보미 "백악(백산)"과 "북부여"를 그냥 써놓고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 따져보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왜 같은 곳이냐 하면 규원사화에 아들 단군의 아들 "부여"의 나라 "부여"의 영토를 넓혀주어 백산의 서남쪽에 있었던 아사달을 더하여 주었다라는 구절때문입니다. 즉, 첫 도읍인 ①아사달(阿斯達)은 "부여"에게 주었고, 이곳에 백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등의 아들이 정권을 잡고 도읍한 ②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도 역시 부여에 있었던 ①아사달(阿斯達)과 같은 곳이기에 《東史輯略》에서는 단군이 말년에 백악으로 옮겼다고 해놓고 기자가 오기 196년 전에 부여로 옮겼다고 썼던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할 구절이 한단고기에도 보입니다. 《한단고기 단군세기》 於是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 이에 우현왕 고등은 주변 좌우 신하와 獵戶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였다. 부여의 신궁에 즉위하였다고 해놓고선 그 아들이 임금에 오를때에는 정작 어디에서 즉위하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말은 고등이 즉위한 곳과 같은 곳에 그 아들이 즉위하였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선 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단고기 단군세기》 辰丑六年臣智陸右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以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帝不許曰新都已宅更何他往 신 축 6년(B.C.1280) 신지(臣智)인 육우(陸右)는,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大運)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합니다. 청컨데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신도(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아사달이 제업帝業"이라 한 것은 고조선 전기에 도읍이동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체 아사달이 고조선의 도읍인줄 알고 쓴 것이며, "아사달은 천년의 땅"이라고 한 것은 이곳에 옛부여의 도읍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등을 두막루라 하였다 했습니다. 《한단고기 단군세기》 壬辰四十九年蓋斯原褥薩高登潛師襲鬼方減之...중략...遣人請爲右賢王帝憚之不允屢請乃許號爲豆莫婁 임 진 49년(B.C.1289), 개사원(蓋斯原)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중략...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았으나 거듭하여 이를 청하므로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豆幕婁)라 불렀다. 두막루란 지나사서에 나오는 나라이름입니다. 그 런데 한단고기에 나오는 고등왕 두막루와 지나사서에 나오는 두막루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무도 이야기하짐 못하지만 이유는 고등과 그아들이 도읍한 백악산아사달이 바로 옛부여의 도읍이고 그들이 또한 그곳에 도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나사서에 이런 구절이 존재합니다. 《魏書卷一百》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去洛六千里舊北扶餘也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1000여리에 있는데 옛 북부여(北扶餘)이다. 그래서 고구려에서 고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북사에서는 고등신이 부여의 시조라고 한 것입니다. 《北史卷九十四》 有神廟二所一曰夫餘神刻木作婦人像一曰髙登神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고구려에는) 신묘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상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인데, 이 사람이 시조로서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아 무도 고구려에서 고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와 그가 누구인지조차 말하지 못하지만 한단고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습니다. 후기고조선의 첫 임금의 아버지가 고등이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후기고조선의 도읍이 부여의 도읍과 같으며, 고구려는 부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여에서 출발한 백제에 부아악(負兒嶽)이라는 곳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이 백악산아사달이 아니라 백제인들이 부여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도읍에 있던 백악을 옮겨와 부아악이라고 한 것이기때문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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