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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백송님) 남당(南堂)의 일사(逸史)와 현록표도(懸鹿漂都) 미스테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현록은 항복의 의미로 보고 표도는 지명으로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

짧은 소견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김성겸 (2007-05-04 18:51:46)  
수제(隧祭)"와 "현록표도(懸鹿漂都)"를 제가 깔끔하게 번역해올리지 못하여
여러 분들께서 수고하시는 것 같아, 감히 저의 생각을 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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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에 보이는 <신시/대인지시/대인지당>의 상상 속의 모습과
아래에 적힌 평양이 겹쳐지고,
아래의 돌궐의 초창기 집단거주지인 평양의 산비탈 동굴들이
<수제>와 겹쳐지는 느낌을 저만이 가지고 잇는 것은 아닐 것으로 봅니다.

수서(隋書) 북적(北狄)전에

"평양(平壤)"이라는 글자가 여지껏 겉핥기로 접해본 사서에서는 <수서>에서 가장 먼저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고구리>와 뿌리가 같거나 유사하 것으로 보이는 <돌궐>이 등장하는 초기의 모습 기록에

...산밑에는 굴이 있고,
...산위에는 고운 흙이 넓게 이백여리 펼쳐지고 풀이 무성한 곳...평양(平壤)"이 나타납니다.
<구자일>씨가 주장하는 <평양>을 포함한 고구리의 우명한 성들의 모습도
저 돌궐의 큰 평양과 같은 모습을 가지는 것으로 저는 느끼고 있읍니다.

"옛조선"과 "고구리"의 "평양"도
돌궐(突厥)의 시원지(始原地) 모습처럼
"平壤茂草, 地方二百余裡"였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고(아래 인용문 참조),

#隋書卷84-列傳第49-突厥-01/15
<突厥>之先, <平량>雜胡也, 姓<阿史那氏>.
<後魏><太武;AD423-452>滅<沮渠氏>, <阿史那>以五百家奔<茹茹>, 世居<金山>, 工於鐵作.
<金山>狀如兜무, 俗呼<兜무>爲<突厥>, 因以爲號. 或雲, 其先國於<西海>之上,
爲린國所滅, 男女無少長盡殺之.
至一兒, 不忍殺, 월足斷臂, 棄於大澤中. 有一牝狼, 每銜肉至其所, 此兒因食之, 得以不死.
其後遂與狼交, 狼有孕焉. 彼린國者,復令人殺此兒,而狼在其側. 使者將殺之,
其<狼>若爲神所憑, 然至於<海>東, 止於山上.
其山在<高昌>西北, 下有洞穴, 狼入其中, 遇得[平壤茂草, 地方二百余裡].
其後<狼>生十男, 其一姓<阿史那氏>, 最賢, 遂爲君長, 故牙門建狼頭纛, 示不忘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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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힘겨운 작업을 하는 중에 '祭隧'가 나타나길래 고민하다가 스쳐가는 생각이...
<隧祭>가 어느 사람무리의 원초적 고향이었을, 조상들의 체취(기억)와 유골도 남아있었을
동굴(隧)에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읍니다.

"현록표도(懸鹿漂都)"는
자신의 상황이 나빠져서, 패권을 다투던 상대에게 자기 나라를 몽땅 바쳐야 하는 서글픈 상황으로 보여집니다.
이미 도읍이 큰물로 물에 잠기거나 무너지거나 떠내려가 초라하게 되었고
남은 것(재상/백성/왕권) 모두를 조그만 사슴 한 마리에 줄로 매어달고 탈탈거리며 항복하러 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또한 <대한국>은 묘사된 기록이 글자 몇 자밖에 아니되지만, <부상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지금도 북방 황인종이라는 에스키모인들이 사슴을 집단적으로 기르듯이
그리고 그 당시 이미 서토에서 소를 기르듯이,
사슴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읍니다.
<송양>의 <비류국(황룡국?)>에서도 사슴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가축이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귀한 사람들이 타는 조그만 수레를 끌거나 애완으로 여기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아,
초벌번역을 하면서 <송양>왕조의 서글픈 모습이 눈에 선하였었읍니다.
스스로 '선족(仙族)'이니 '적자(嫡子)'임을 칭하였다면
그네들도 해모수, 해부루, 추모, 대소 등과 크게 격에 있어 차이가 나지 않는 귀족들의 후예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까지의 제 말씀이 도움이 되시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