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史抄/高句麗史略卷之一/始祖<芻牟大帝>紀)* 의 중요성
사천(史穿)선생께서 이미 해석한 ‘시조-추모대제기’는 우리 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미 ‘정성일 님’께서 해석한 백제서기(百濟書記)와 관련, 비류(沸流)와 온조(溫祖)는 분명 우대왕(優臺王)의 ‘친자식’으로 나오는데, ‘시조 추모대제 기’에서는 고주몽의 자식으로 나와서 혼란(混亂)을 부를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점 좌계는 “설혹 비류와 온조가 우대왕의 친자식이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풍습(風習)으로는 소서노(召西奴) 께서 고주몽과 대화하면서 “두 놈다 당신에게서 나왔어요. 어찌 진짜 가짜가 있겠습니까?! (=后笑曰: "皆汝出也,何有眞乎)”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
당시의 풍속(風俗)에 마복자(摩腹子) 제도가 있었습니다.
즉 선가(仙家 : 화랑, 원화)의 풍습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배고, 왕(王)이나 저명한 화랑(花郞)에게 가서, 같이 동숙(同宿)한 상태에서 ‘배를 쓰다듬는 의식’을 치루게 되면,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마복자(摩腹子 - 이는 ‘배를 쓰다듬어서 난 아이’란 뜻임)여서, 친자식과 똑같이 자기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소서노(召西奴)-어라하 입장에서 비류(沸流)와 온조(溫祖)를 배었을때, 고주몽-동명성왕께 가서 ‘마복(摩腹)’하는 의식을 치루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즉 선가(仙家) 풍속으로 소서노(召西奴)는 설혹 우대왕(優臺王)이 살아계신다고 하더라도, 마복(摩腹)하는 혼례(婚禮)를 이미 ‘고주몽’과 한 - 다시 말해 ‘임신한 아이’가 있었을 때, 마복자(摩腹子)로 삼기 위해서 잠시 - 배만 쓸어주는 관계를 형성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사천(史穿) 선생께서야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 가운데 -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화랑세기’이고, 이곳에 바로 마복자(摩腹子)란 문화인류학적으로 매우 놀라운 이상한 결혼제도와 부자(父子)관계가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우대왕(優臺王)이 돌아가신 후에, 마복(摩腹)-혼례(婚禮)가 아닌 ‘정식 혼례’를 치룬 사이로 변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해석된 사료(史料) - 즉 삼국사기, 혹은 백제서기(百濟書記)등과 상관없이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를 해석해 나가는 작업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호 모순이 일어나는 점을 기점(起點)으로 해서, “우리의 ‘해석의 틀’이 오늘날의 사회상이라 할까, 혹은 패러다임(paradyme)에 너무 짜맞추는 식의 해석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는 ‘우리 역사의 신대륙’임에 틀림 없습니다.
따라서 원문(原文)에 가급적 충실하게 해석하려고 애를 쓰는 사천(史穿) 김성겸 님과 ‘정성일 님’에게 좌계는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하는 것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사천(史穿)선생께서 이미 해석한 ‘시조-추모대제기’는 우리 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미 ‘정성일 님’께서 해석한 백제서기(百濟書記)와 관련, 비류(沸流)와 온조(溫祖)는 분명 우대왕(優臺王)의 ‘친자식’으로 나오는데, ‘시조 추모대제 기’에서는 고주몽의 자식으로 나와서 혼란(混亂)을 부를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점 좌계는 “설혹 비류와 온조가 우대왕의 친자식이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풍습(風習)으로는 소서노(召西奴) 께서 고주몽과 대화하면서 “두 놈다 당신에게서 나왔어요. 어찌 진짜 가짜가 있겠습니까?! (=后笑曰: "皆汝出也,何有眞乎)”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
당시의 풍속(風俗)에 마복자(摩腹子) 제도가 있었습니다.
즉 선가(仙家 : 화랑, 원화)의 풍습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배고, 왕(王)이나 저명한 화랑(花郞)에게 가서, 같이 동숙(同宿)한 상태에서 ‘배를 쓰다듬는 의식’을 치루게 되면,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마복자(摩腹子 - 이는 ‘배를 쓰다듬어서 난 아이’란 뜻임)여서, 친자식과 똑같이 자기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소서노(召西奴)-어라하 입장에서 비류(沸流)와 온조(溫祖)를 배었을때, 고주몽-동명성왕께 가서 ‘마복(摩腹)’하는 의식을 치루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즉 선가(仙家) 풍속으로 소서노(召西奴)는 설혹 우대왕(優臺王)이 살아계신다고 하더라도, 마복(摩腹)하는 혼례(婚禮)를 이미 ‘고주몽’과 한 - 다시 말해 ‘임신한 아이’가 있었을 때, 마복자(摩腹子)로 삼기 위해서 잠시 - 배만 쓸어주는 관계를 형성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사천(史穿) 선생께서야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 가운데 -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화랑세기’이고, 이곳에 바로 마복자(摩腹子)란 문화인류학적으로 매우 놀라운 이상한 결혼제도와 부자(父子)관계가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우대왕(優臺王)이 돌아가신 후에, 마복(摩腹)-혼례(婚禮)가 아닌 ‘정식 혼례’를 치룬 사이로 변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해석된 사료(史料) - 즉 삼국사기, 혹은 백제서기(百濟書記)등과 상관없이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를 해석해 나가는 작업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호 모순이 일어나는 점을 기점(起點)으로 해서, “우리의 ‘해석의 틀’이 오늘날의 사회상이라 할까, 혹은 패러다임(paradyme)에 너무 짜맞추는 식의 해석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遺稿)는 ‘우리 역사의 신대륙’임에 틀림 없습니다.
따라서 원문(原文)에 가급적 충실하게 해석하려고 애를 쓰는 사천(史穿) 김성겸 님과 ‘정성일 님’에게 좌계는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하는 것입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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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계님 도움이 될까 해서 한 말씀 올립니다 님의 말씀대로 지금의 기준대로 봐서 그렇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결혼제도에 대해 읽은 글이 있는데 저 시대에는 부부라는 개념이 없었답니다 소서노가 어떤 남자와 관계해서 아이를 가져도 저 시대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소서노가 낳은 아이를 누구를 주더라도 그건 소서노의 권리입니다 님이 언급하신 마복자란 자기 친자식을 확인 시키는과정일수도 있고 설혹 다른 남자의 아이일지라도 주겠다는 의사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저 시대엔 아이란 재산이고 군사이고 자식수가 곧 세력입니다 막말로 할 일은 많고 사람은 적던 시절이니까요 아이를 주겠다는 의미 바로 선물이면서 연합을 하는 징표입니다 그런면에서 저 시대 근친혼은 성은 같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안되는 풍속이지요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데려 가는 과정도 그런 맥락이지요 우리 사서나 전설에 나오는 결혼도 안하고 합방해서 아이를 가지는 행위 저시대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금도 농경사회에서는 자식을 많이 두는이유가 자식이 재산이고 곧 노동력이까요 오래전에 읽은 내용이라 두서가 없네요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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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史抄/高句麗史略卷之一/始祖<芻牟大帝>紀의 끝 부분 쯤에 가면 <화랑세기>필사본에 나오는 소위 마복자 제도 보다도 현세의 정조개념으로는 머리가 저절로 흔들릴만큼 더욱 어지러운 혼인관계가 쓰여 있읍니다. 지금의 속도로 초벌번역을 해 나아간다면 두 달쯤이면 그 내용을 소개할 수 잇을 것으로 보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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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복자 제도는 신라의 독특한 풍습으로 이해됩니다. 흉노의 후예인 신라와 고구려,백제의 풍속을 일반화 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 아닐까요?(물론, 그 계통은 비슷하지만, 당시에도 상당한 풍습의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고구려는 형사취수제 등 혈연적 통합이 강했고요. 신라는 상.하급자 관계의 뭐라할까 서열적 통합이 강했습니다. 딴지거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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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와 고구려는 그 생산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런 혼인 제도도 다릅니다 백제 신라는 비단과 베등 여자들이 잘하는산업으로 성장한 나라라 여자의 발언권이 쎕니다 경제권을 여자가 쥐고 있기 때문에 여자가 주도 하고 남자를 여럿 만나도 남자가 행세를 못합니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비슷했지만 남자들 힘으로 일하는 힘의 산업 즉 광산업의 발달로 남자의 발언권이 세기에 여자들이 힘을 못 씁니다 후기 고구려에서 이 힘이 더 강력해서 다른 남자와 통정한 여자는 차별을 받았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