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八世<故國襄大帝>紀 제18세<고국양대제>기
전해오는{기록된} 바에 의하면 제는 휘가 <이련> 또는 <어지지>이고 <수림>의 동복아우이다. <해>태후가 꿈에 <용산>에 올라 <추모>가 용을 타고 상천하는 모습을 보고파 하였더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서 육족오로 변하였었고, 적{모용황}이 {<해>태후의} 승은을 입고나서 생겼다고 하여{그 시점에 임신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점보는 이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주>태후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 아이는 <추모>가 현신한 것이라 하였다. <모용황>의 난리 중에, {제는 <해>}후를 따라 <연>으로 끌려갔었다. <황>은, 후의 궁으로 올 때마다, 제는 높이 여겼으나 후는 경시하면서 말하길;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하여 귀하게 될 것이오.”라 하였으며, {<연>의} 사람들이 <모용황>에게 제{이련}를 해치우라고 하였을 때, “천명은 억지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어찌하려 하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오.”라 하더니만, 오래 있지 않아서 돌려보냈다. 어려서는 신선을 즐겨 찾고 산천을 유람하였으며, 부모님과 형님이신 제{소수림제}를 효성으로 섬겼다. 장성하여서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물었으며, 새로운 율령을 정하였고, 종척의 자녀를 교육함에 부지런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앞을 미리 내다보고 그 요체를 처결하였더니, <수림>은 그를 아끼며 이르길, “이 사람은 내 분신이다.”라 하였으며, 정사를 맡기고는 묻지 않는 적이 많았으니, 나라사람들은 버금황제라 불렀다. <수림>이 죽음을 앞두고 보검과 옥새를 넘겨주며, 이르길; “중원의 나라들은 소란하나, 오직 동방만은 점점 고요해지는구나. 조상님들의 음덕이 있음인 것이야. 자네도 잘 지켜서 <담덕>에게 물려주게나.”라 하였더니, 상은 소리 없이 눈물 흘리며 받았다.참조;“...<소수림>이 죽자, <해>태후의 명으로, 「서도」<란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때 춘추 마흔 셋이었다...”라는 기록이 00322342.pdf의 말미 내지에 쓰여 있음.
傳曰; 帝, 諱<伊連>, 亦曰<於只支>. <獣林>之胞弟也. <觧>太后夢, 登<龍山>, 欲見<芻牟>乘龍上天之状, 忽有大蝶化為六足烏. 賊受幸而娠. 巫以不祥, <周>太后獨以為不然, 此兒乃<芻牟>之現也. <皝>賊之乱, 從后至<燕>. <皝>, 每至后宮, 必敬帝而輕后, 曰; "汝以此兒貴.” 有人勧<皝>害帝, 則<皝>曰; "天命不可強, 強之則反受殃, 未幾放還.” 幼, 好神仙遊山川, 孝事父母及兄帝. 及長, 問民疾苦, 新定律令, 敎誨宗戚子女. 國有大事預決其要, <獣林>愛之, 曰; "此, 吾身也.” 委之而不問者亦多, 故國人號為副皇. <獣林>将崩, 傳釼璽于帝, 曰; "中國多乱, 唯東方稍安, 乃祖蔭也. 汝其善守以傳<談德>.” 上涕泣受之.
참조; “...<小獸林>崩. 以<解>太后命, 卽位於「石」<鸞宮>, 時春秋四十三...”
이라는 기록이 00322342.pdf의 말미 내지에 쓰여 있음.
◎ 元年甲申, 十二月, 葬大行于<獣林>. 以<天罡>為皇后, 乃遺命也. <觧克>太輔, <椽興>左輔, <朋連>右輔․主兵大加, 尊后父<天原公><琳>為太上皇, 后兄<鞱>為中畏大夫․都綂內外採供事. 以<周德>為大主簿兼羽林将軍.
○ 원년{단기2717년/AD384}갑신, 12월, 대행을 <수림>에 장사하였다. <천강>을 황후로 삼았는데, 이는 유명을 따름이었다. <해극>을 태보로, <연흥>을 좌보로, <붕련>을 우보․주병대가로 삼았다. 후의 부친 <천원공><림>은 태상황으로 높이고, 후의 오빠 <{연}도>를 중외대부도통내외채공사로 하였으며, <주덕>은 대주부와 우림장군을 겸하게 하였다.
◎ 二年乙酉, 六月, 聞<苻堅>被殺於<姚萇>, 四十八. 宗戚多以佛不可信, 請廢寺逐僧. 上曰; "先帝, 以僧淸淨高行為法. 朕亦雖好色, 知淸淨之高不與淫穢之仙. 其勿議, 二寺高僧之存廢.” 命皇弟<朋連>, 率<龍厥>․<觧彦>等, 引四萬兵, 伐<菟城(奉天)>․<章武>等拔之, 斬其将<郝景>等十人, 掠<龍城>男女一萬余口而還, 珍寶․器玩無数. 自<苻堅>破<鄴>之後, <遼東>為與<秦>相持之地而久不用兵, 使<契丹>坐大. 至是, 廷議復發而復此二城.
○ 2년{단기2718년/AD385}을유, 6월, <부견>이 나이 48살에 <요장>에게 피살되었다 들었다. 종척들 중 많은 이들이 불법은 믿을 바가 못 되니, 절을 폐하고 중을 내치자고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선제께서는 승려들을 써서 청정․고행하는 것을 법으로 삼으셨소. 짐 역시 호색하지만 그들이 보이는 청정함의 정도가 선도들의 음란․추악함과 같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두 절과 고승들의 존폐를 의론하지 마시오.”라 하였다. 황상의 아우 <붕련>에게 명하여, <용궐>․<해언> 등을 데리고 4만병을 끌고나가 <도성(봉천)>과 <장무> 등을 쳐서 빼앗게 하였더니, 그곳의 장수 <학경> 등 열 사람의 목을 베었으며, <룡성>을 노략하여 남녀 1만여 명을 잡아서 돌아왔다. 노획한 진보와 값진 노리개들도 무수하였다. <부견>이 <업>을 깨뜨린 이후로 <요동> 땅은 <진{前秦}>과 마주하여 지키기만 하고 군병을 써 본 적이 오래되었더니, <거란>이 그 땅을 넓게 깔고 앉게 만들었기에, 지금에 이르러서 조정이 이 두 성을 되찾기로 하여 군대를 보내서 되찾은 것이었다.
◎ 八月, <慕容垂>, 聞<龍城>之敗, 招其弟<農>於<蠮翁>. 歷<凢城>而入<龍城>. 其行至速, 人不知焉. 宻練三万精兵, 外修墳墓而示不戦之意. 十一月, 猝攻<章武>, <紐庳>敗死. 移攻<菟城>, <龍厥>迎擊破之. <農>, 以<龐淵>為<章武令>, 自稱<遼東>太守, 招誘<幽>․<冀>投民. 民多霑皇化, 不肯[皈]之. 以<天原公>正妃<觧>氏為太上后, 置僚屬. 以其外兄<淵億>為大夫.
是年, 二月, <枕流>, 創寺于<漢山>, 十月成, 度僧十人, 而死. 其弟<辰斯>継之, 強勇聦慧有智略. <枕流>妻, 悅之, 迎為継夫而專政, 以其子<莘>為嗣.
以<天龍>為<胥狗>妃.
○ 8월에 <모용수>는 <용성>이 떨어진 것을 듣고 <열옹>에 있는 자기 동생 <모용농>을 불러들였더니, <범성>을 거쳐서 <용성>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행적이 지극히 신속하였기에 우리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였었다. 3만 정병을 몰래 훈련시키면서, 겉보기엔 분묘를 손보는 것처럼 하여 싸울 뜻이 없는 체 하다가는, 11월에 돌연 <장무>를 공격해오니 {우리의} 장수 <뉴비>가 패하여 죽었고, 군대를 돌려서 <도성{菟城}>으로 쳐들어오자 <용궐>이 맞싸워서 깨뜨렸다. 이에 <모용농>은, <방연>을 <장무령>으로 삼아놓고, 자신은 <요동>태수를 칭하고, <유주>와 <기주>의 투항해 온 백성들을 불러 꼬드겼으나, 많은 이가 황상의 백성이 되기로 하고,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천원공>의 정비 <해>씨를 태상후로 삼고 관료를 딸려주었으며, 그녀의 외가 오빠인 <연억>을 대부로 삼아주었다.
이해 2월에 <침류>가 <한산>에 절 짓기를 시작하여 10월에 완성하고, 열 사람을 중이 될 수 있게 허락하고는 죽었다. 그의 아우 <진사>가 뒤를 이었는데, 강하고 용맹하였으며, 총기도 있고 지혜로웠으며, 지략도 있었다. <침류>의 처는 <진사>를 매우 좋아하여 새 남편으로 삼더니 정사를 독차지하였고, 자신의 아들 <신>을 후사로 정하였다.
<천룡>을 <서구>의 비로 삼았다.
◎ 三年丙戌, 正月, 以<談德>太子為正胤, 置東宮僚. 以<鞴>為東宮大夫. <談德>, 年十三, 力能扛鼎, 善射, 能御衆. 先皇長子<岡>亦賢, 以先皇遺詔, 竟立<談德>. <拓跋[珪]>爲<代>王, <慕容垂>稱帝. 八月, <龍厥>等伐<濟><関彌城>, 不克. 十月, 桃李華, 牛生馬八足二尾. 上宴群臣以娛之. <辰斯>, 發丁十五以上設<関防>, 自<靑木岺>北距<八坤城>西至於<海>, 以備我, 而霜飢.
○ 3년{단기2719년/AD386}병술, 정월, <담덕>태자를 정윤으로 삼고, 동궁 관료를 딸려주었으며, <비>를 동궁대부로 삼았다. <담덕>은 나이가 13살이었는데, 힘은 능히 가마솥을 들어 올렸고, 활도 잘 쏘고 무리를 능히 이끌었다. 선황의 장자 <강> 또한 현명하였는데, 선황의 유지를 받들어, 끝내 <담덕>을 태자로 세웠다. <탁발규>가 <대>의 왕이 되고, <모용수>가 제를 칭하였다. 8월, <용궐> 등이 <백제>의 <관미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0월,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소가 발이 여덟에 꼬리가 둘인 말을 낳았다. 상은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서 즐겁게 해주었다. <진사>가 15살 이상의 장정을 뽑아서 <관방>을 설치하였다. <청목령>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에 이르게 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해{호수, 강, 개활지, 바다 등}>에 다다르게 하여, 우리 쪽에 대비하게 하였더니, 서리가 내리고 사람들은 굶주렸다.
◎ 四年丁亥, 九月, 命左将軍<觧猩>率<鞨>兵攻<関彌城>, <濟>達率<真嘉謨>․恩率<豆知>等来拒于岺, 敗入城中不出, 圍之不拔. 以<天乙>為<春>太子妃. <代><珪>稱<魏>.
○ 4년{단기2720년/AD387}정해, 9월, 좌장군 <해성>에게 명하여 <갈>군을 이끌고 <관미성>을 공격하게 하였더니, <백제>의 달솔 <진가모>와 은솔 <두지>가 와서 고개에서 막아섰다가 패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이에 그 성을 포위였었으나 빼앗지는 못하였다. <천을>을 <춘>태자비로 삼았다. <대>의 <규>가 {나라이름을} <위>라 하였다.
◎ 五年戊子, 四月, 大旱. 上與后及太子祈雨於<肖門寺>七日, 小雨. 五月, 如溫湯. 以旱, 命停伐<濟>. 東宮曉聞布穀而歎, 曰; “鳥尙如是, 况人乎.” 八月, 蝗.
○ 5년{단기2721년/AD388}무자, 4월, 가뭄이 심했다. 상이 후와 태자를 데리고 <초문사>에서 기우제를 올렸더니 7일 만에 비가 조금 내렸다. 5월, 온탕에 갔다. 가뭄이 계속되어 <백제>정벌을 그만두게 하였다. 동궁이 새벽에 <포곡>이 {처량하게} 우는 소리를 듣더니만 “새들도 {비가 오길} 바라기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8월, 황충이 일었다.
◎ 六年己丑, 二月, 后生<談允>太子, 亦英勇奇偉無遜於東宮, 故乃名<談允>. 命 東 宮, 賑飢民. 是年, <羅>亦大疫․雨土而不登. <濟>亦不熟而聞我民飢, 使<嘉謨>来侵, 為<龍能>所敗而去. 九月, 大破<豆知>于<阿旦城>. <周德>右輔․主兵大加.
○ 6년{단기2722년/AD389}기축, 2월, 후가 <담윤>태자를 낳았다. 역시 뛰어나게 용감하였고 특출하게 몸집이 듬직한 것이 동궁에게 손색이 없었기에 <담윤>이라고 이름 하였다. 동궁에게 일러서 굶는 백성을 진휼하게 하였다. 이해엔 <신라> 역시 병이 크게 돌고 흙이 비처럼{심한 황사? 화산재?} 내렸고 곡식도 영글지 않았다. <백제> 또한 곡식이 여물지 않았는데, 우리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소릴 듣고 <진가모>를 시켜 쳐들어왔다가 <용릉>에게 패하여 돌아갔다. 9월, <아단성>에서 <두지>를 크게 깨뜨렸다. <주덕>을 우보․주병대가로 삼았다.
◎ 七年庚寅, 九月, <嘉謨>襲<都押城>掠二百人[而]去. <辰斯>大喜, 以<嘉謨>為兵官佐平, 獵于<狗原>七日以慰<嘉謨>. <嘉謨>, <辰斯>之妻兄也. 初, <高道>得<馬山>女為妾而生<嘉謨>及<枕流>妾<佳利>. <枕流>死, <佳利>継為<辰斯>妻專政. <嘉謨>勇而無謀雪使軍士, 故人以為無謀. 是, <嘉謨>不振乃<辰斯>. <天龍>生子<華德>, 賜<杜訥>鯉宅及庄.
○ 7년{단기2723년/AD390}경인, 9월, <가모>가 <도압성>을 습격하여 2백 인을 잡아갔더니, <진사>가 크게 기뻐하며 <가모>를 병관좌평으로 삼고는 <가모>를 위해 <구원>에서 7일간이나 사냥하였다. <가모>는 <진사> 처의 오빠이다. 애초에 <고도>가 <마산>녀를 처로 삼더니 <가모>와 <침류>의 첩 <가리>를 낳았다. <침류>가 죽으매 <가리>는 계속하여 <진사>의 처가 되어 정사를 전횡하였다. <가모>는 용감하였으나 무모한 설욕을 위하여 군사를 부렸더니, 사람들이 그를 무모하다고 하였었다. 정말로 <가모>는 <진사>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천룡>이 아들 <화덕>을 낳았더니, <두눌>의 리택과 장원을 내려주었다.
◎ 八年辛卯, 四月, <觧猩>, 引<鞨>兵二千, 拔<濟><赤峴>․<沙道>二城. 時, <倭>侵<加>․<羅>至<濟>南, <辰斯>與<佳利>奢其宮室, 穿池造山以養奇禽. <異世>卒, 聞此報, 逃入國西大島, 已而<倭>退, 還入<橫岳(高達塞)>. 恐人之笑, 假托射鹿. 其不振甚矣. 以<吐山>為東宮妃. 五月, 上, 與后如溫湯, 飮酒而崩. 時, 東宮在西練兵, 聞報而至. 上已不能言命, 后傳璽而崩. 東宮號泣而卽位於溫宮殯殿, 寶算十八. 嗚呼, 上以仁明, 好德之姿, 精通物人之心, 而自幼好色沈酒, 無意於世. 政之大者委於<觧克>, 細者委於<淵鞱>, 而使東宮監之. 至是, 中酒而棄民, 惜哉. 春秋四十九. 葬于<故國壤(羊角山之東)>.
○ 8년{단기2724년/AD391}신묘, 4월, <해성>이 <갈>병 2천을 이끌고 <백제>의 <적현>과 <사도> 두 성을 빼앗았다. 이때, <왜>가 <가야>와 <신라>에 침입하고 <백제>의 남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진사>는 <가리>와 함께 궁실에서 사치하며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특이한 새를 기르고 있었다. <이세>가 죽자, 이 소식을 듣자, 나라의 서쪽에 있는 큰 섬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왜>가 물러나자 돌아왔다가 {또다시금} <횡악>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비웃을까 걱정하여, 사슴을 잡는다는 핑계를 대었으니, 그의 기세 허약함이 이토록 심했다. <토산>을 동궁비로 삼았다. 5월, 상이 후와 함께 온탕에 가서 술을 마시다 죽었다. 이때 동궁은 서쪽에서 군병을 조련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도착하였으나, 상은 이미 말을 할 수 없었기에, 후에게 옥새를 전하게 하고 죽었다. 동궁은 울부짖으며 <온궁>의 빈전에서 즉위하였다. 보산 18세였다. 슬프다, 상은 어질고 사리에 밝았으며, 덕행 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고, 세간의 인심에 정통하였었으나, 어릴 적부터 호색하고 술에 젖어 세상사에 뜻이 없었으니, 정사에 있어서 큰일은 <해극>에게 맡기고, 작은 일은 <연도>에게 맡겼으며, 동궁을 시켜서 이들을 감독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술 마시다가 백성을 버렸으니 애석하였다 할 것이다. 춘추 49세였고, <고국양(양각산지동){옛 나라의 평양/땅?}>에 장사하였다.//끝
강영구 (2008-01-10 18:51:54)
·招誘<幽>․<冀>投民. 民多霑皇化不肯, [皈]之.<유주>와 <기주>로 투항해 왔던 백성들을 불러 꼬드기니, 그들 중 많은 이가 황상의 백성이 되기를 마다하고 그에게로 귀의하였다. =>저는 불긍귀지를 붙여 해석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백성들 대부분이 황상의 교화를 입어 귀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枕流>妻, 悅之, 迎為継父而專政, =>父->夫
·敗入城中不出, 圍之不拔.이에 성을 포위만 하고 빼앗지는 않았다. =>성을 포위하였으나 빼앗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어감 상 더 부드럽지 않나요?
·亦英勇奇偉. 無遜於東宮, 故乃名<談允>. 동궁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기에 <담윤>이라고 이름 하였다. =>이런 식으로 보면 어떨까요? “또한 영용기위함이 동궁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담윤으로 이름하였다.”라고 말입니다.
·朦宮賑飢民.=>朦宮賑飢民이던데, 글자입력이 안 되나요?(입력이 안 되네요.)
·獵于<狗原>七日以為<嘉謨>. =>獵于<狗原>七日以慰<嘉謨>.
”入國西大島, 已而<倭>, 退還入<橫岳(高達塞)>. 恐人之笑, 假托射鹿. 나라의 서쪽에 있는 큰 섬으로 피하여 들어갔으나, 거기엔 이미 <왜>가 와있는지라, 물러나 <횡악>으로 다시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비웃을까를 겁내어 사슴을 잡는다는 핑계를 대었다.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나라의 서쪽에 있는 큰 섬에 피하여 들어갔다. 얼마 후 왜가 물러나자 황악으로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비웃을까 겁내서 사슴을 사냥하러 갔었다는 핑계를 댔다.”
김성겸 (2008-01-11 11:59:29)
강 선생님, 성심으로 살펴 주심에 고맙습니다.
八年辛卯, 四月, <觧猩>, 引<鞨>兵二千, 拔<濟><赤峴>·<沙道>二城. 時, <倭>侵<加>·<羅>至<濟>南, <辰斯>與<佳利>奢其宮室, 穿池造山以養奇禽. <異世>卒, 聞此報, 逃入國西大島, 已而<倭>, 退還入<橫岳(高達塞)>. 恐人之笑, 假托射鹿. 其不振甚矣.
문귀는,
상황을 보면,
고구리가 남진하여 쳐들어오고,
<가야>와 <신라>에는 <왜>가 쳐들어왔고, 이미 <백제>의 남쪽에도 <왜>가 들어와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실컷 놀고 있다가 <이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가슴이 콩알만하여져서
{아직 <고구리>도 <왜>도 <진사>가 노닥거리던 곳 까지는 오지도 않았었는데, 미리 겁을 먹고}
안전하리라 생각되는 남쪽의 큰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려고 했더니, 거기에도 가보니 이미 <왜>가 들어와 있는지라, <횡악>으로 돌아들어왔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 것을 염려하여 사슴잡으러 갔었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진사>와 <왜> 중에 어느 일방이 그 큰 섬에 먼저 갔었느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잠시, 문구 일부만 수정하고, 보류하겠습니다.
강영구 (2008-01-11 14:39:20)
정황 상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다만 보통 '已而'를 '얼마 후'라고 해석하고, 왜가 그곳에 있었다는 동사가 없어서 그렇게 해석했었습니다.
김성겸 (2008-01-20 16:50:24)
고맙습니다.
김영채 (2008-03-15 00:14:01)
(1) 2년기사 : 迎為継父而專政 -> 迎為継夫而專政
(2) 6년기사 : 東宮, 賑飢民 -> 命 東宮, 賑飢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