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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지명유래

by 부르칸 2015. 4. 3.

* 서울 경기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구미라는 이름은 탄천이 굽이져 흐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위치 - 구미동은 성남시와 분당구의 최남단, 탄천과 동막천이 만나 휘돌아 흐르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 다. 동쪽은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서쪽은 용인시 수지읍 동천리, 북쪽은 분당구 금곡동, 불정동 과 접하고 있다. 탄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금곡동과의 경계를 이루며 서쪽에서 흘러내린 동막 천(머내; 머흐내, 험천)이 이곳에서 탄천에 합류한다. - 연혁 - 조선시대에 탄천 남쪽은 용인군 수진면(水眞面) 구미리였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 구역 폐합 때 수진면의 죽전(竹田), 원천동(遠川洞), 구미동의 각 일부 및 광주군 낙생면의 정자 동 일부를 합하고 낙생면에 편입되어 구미리(九美里)가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ㆍ독립하면서 여기에 편입되었고,1975년 3월 17 일 성남시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된후 1991년 9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분당구 구미동이 되었다. 관내에 오리동(五里洞). 미금동(美金洞)이 있으나 별개의 행정ㆍ법정동이 아니다. 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에는 골안(石村: 돌말), 넘말, 가운데구미(中九美), 낭떠러지말, 뒷구미(後九美), 벌말 (坪村), 머내(遠川), 앞구미(前九美), 오리뜰, 잣골 등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 지명유래

구미라는 이름은 탄천이 굽이져 흐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하천의 곡류 (曲流)지역 땅이름에는 구만리(굼안), 구비내(구비안),구만동 등의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있는 데 ‘구미동’도 ‘굼 - 구미’를 뜻하는 하천곡류지명으로 볼 수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구미’가 ‘후 미’를 뜻하면서 ‘금’ ‘기미’ ‘꾸미’ 같은 형태로 변하여 신바꾸미(사천시), 큰구미(단양), 막그미 (진도)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경남 양산의 물금(勿禁)은 ‘물구미’의 표기로 보기도 한다. 한편 1900년대 초기 문헌에는 ‘구미동(九尾洞)’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남시지>에는 전주 이씨 등 아홉 성씨가 각각 부락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구성리(九姓里)’라 하였는데 그 성씨들이 모두 음(音)이 다르므로 ‘구음(九音)’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또 그들이 서로 화목하였으므로 ‘구순(九順)’이라 하였다든지, 마을에 아름다운 일이 많아서 ‘구미(九美)’라 불렀다고 한다. 구미동의 유래에는 이외에도 뒷산이 거북이처럼 생겨서 ‘구산(龜山)’이라 불렀다는 설, 아홉 개 마을로 되어 있어 ‘구미’라고 부른다는 설, 거북이처럼 생긴 산밑 마을로 ‘거북이 그늘’이란 뜻에 서 ‘구음(龜陰)’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생각건대, ‘구성리’는 ‘구석리’를 소리 그대로 표기한 것이며, ‘구음’역시 ‘굼’의 차음(借音)으로 보여진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금곡(金谷)' 은 토박이말 '쇠골' 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 위치 - 금곡동은 성남시 분당구 서남단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용인시 수지읍과, 동쪽으로 구미동, 불정 동과 접하고, 또 경부고속도로 동쪽으로 신기동, 정자동과 접하며, 서쪽은 운중동, 북쪽은 판교 동과 잇닿아 있다. 까치마을과 하얀마을 경계에 의하여 구미동과, 탄천에 의하여 불정도과 나누 어진다. 동의 남서쪽을 동막천이 동류하면서 용인시 수지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연혁 - 지금의 금곡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의 금곡리(金谷里:지금의 신기동을 포함한다)지역이 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시 동막동(東幕洞)과 원천동(遠川洞)을 합하여 낙생 면 동원리('동' 막+'원' 천)가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독리 독립 하면서 낙생면의 금곡리, 동원리, 궁내리가 모두 여기에 편입되었고, 1975년 3월 17일에는 다시 성남시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9 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분당구 금곡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궁내동, 동원 동, 구미동은 1977년 6월 금곡동에서 통합, 관할하여 왔으나 1996년 1월 15일 구미동이 금곡동 에서 독립 행정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에 금곡동은 샛터말, 쇠골, 승주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샛터말은 신설괸 신기동에 편입되었다. 또 법정동인 동원동은 광주머내, 동막골, 샛터, 안골동의 마을이, 궁내동은 궁안과 밀린동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밀린동, 샛터말, 승주골 등은 폐동되었다. 

* 지명유래

'금곡(金谷)' 은 토박이말 '쇠골' 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곳 '쇠골' 마을의 유래에 대하 여는 옛날 이곳에서 금을 채굴하였으므로 쇠골=금곡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지 촌로 들의 증언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쇠골=금곡으로 불리우는 마을은 수십 개 지역에 달하고 있으나 쇠는 지역에 따라서 소(牛), 새(동쪽: 예, 샛바람), 새(신:新), 사이(間), 수렁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쇠=새는 사투리에서 혼용되면서 새=해로 사용되어 새=일(日)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곧 닷새 (5日), 엿새(6日)의 예와 같다. 또 안동 권씨 참의공파 족보에는 '쇠골'을 쇠곡(釗谷), 쇄곡(鎖谷)이라 하였는데, 이는 '쇠골'의 한자식 차음표기로 보인다. 자연부락인 '샛골 = 쇠골' 이거나, 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사이골 = 새골' 이거나, 골짜기 사이에 위치한 '사이골 = 새골' 로 부르 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분당’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合性地名)이다.

- 위치 - 분당동은 분당구의 중앙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옛부터 경기도 광주군과 통하던 교 통의 요충지로서 삼거리를 이루었던 곳이며, 태재(추령:가실고개)를 비롯하여 새마을고개, 봉적 골고개 등이 모두 광주군 오포면과 통한다. 이곳 삼거리 분점(동이점)마을은 장터, 주막집, 옹기 점 등이 있어 매우 번창했던 곳이다. 그러나 분당동이 ‘분당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면서 개발이후의 ‘분당’은 옛날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동쪽으로는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서 쪽은 분당 중앙공원과 내정동, 남쪽은 수내동, 북쪽은 서당동, 서현동(율동)과 접하고 있다. 분 당동의 북쪽에는 분당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분당천이 동쪽→서쪽으로 흘러 분당 중앙공원으로 들어가며, 돌마로, 불정로에 의하여 서현동, 서당동과 경계하고 있다. - 연혁 - 분당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분점리(盆店里)와 당우리(唐隅里)지역이었다. 일제의 통감 정치 시절인 1906년 당우리(堂隅里)는 ‘당우리(唐隅里)’로 ‘당(唐)’자가 바뀌었으며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두 마을이 하나의 리(里)로 통합되면서 ‘분당리(盆唐里)’가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 분당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청 관 할이 되었다. 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분당동이 되었으며, 1992년 5월 1일 분당 동에서 초림동, 서현동이 나누어졌고, 1993년 1월 20일에는 서당동이 분동되었으며, 1993년 6 월 5일에는 내정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지명유래

분당’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合性地名)이다. 그 해에 일 제가 전국의 부, 군, 면, 리, 동을 일제히 폐치·분합할 때, 이곳에 있었던 분점리(盆店里:동이점, 장터)와 당우리(當隅里:안당모루, 새당모루)를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盆唐)’ 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때 합성지명의 의의(意義)가 갖는 「결합지역 땅이름의 보존적 합성」 을 간과한 오류를 범하였다.‘당우리(唐隅里)’의 ‘당(唐)’자는 본래 ‘집 당(堂)’자였는데 1906년에 ‘당(唐)’으로 바뀐 후 1914년에 ‘분당(盆唐)’이 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당우리(堂隅里)’로 확인되 고 있다. 곧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관청의 공식문서인 「경기도 광주군 양안(量案, 양안은 당시의 토지대장으로서 지금의 지적도면+등기부에 해당함)」에도 ‘당우리(堂隅里)’로 표기되 어 있다.‘당(堂)’자가 들어간 지명은 불당(부처당,미륵당), 산신당, 서낭당(성황당), 할미당, 각 시당, 산제당, 기우제당, 동제당, 칠성당, 천제당, 별신당, 사직당, 당산나무 등이 있었던 곳에 붙여지는데 이곳 역시 당집이 있었던 곳을 ‘당골’이라 불렀으며 ‘당모루’도 그래서 생겨난 이름 이다.혹자는 이곳이 신창 맹씨(新昌孟氏)의 세거지로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므로 ‘당(唐)’자를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중국인이 거주하여 붙여진 서울의 당인리(唐人里), 당주동(唐珠洞), 또 중국과의 교역로로 인하여 붙여진 충남의 당진(唐津), 경기도 화성군 구봉산 당성(唐城) 의 경우와는 다르다.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가 많으나, 그로 인하여 ‘당 (唐)’자를 붙인 예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분당(盆唐)은 ‘분당(盆堂)’으로 바로 잡아야 할 땅이름 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1동
돈서촌에서 ‘서(書)’자를 취하고 양현리에서 ‘현(峴)’자를 취하여 ‘서현리(書峴里)’

- 위치 - 서현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중앙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면적도 운중동, 판교동, 금곡동 에 이어서 네번째로 넓다. 동쪽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직리와 접하고, 남쪽은 분당구 분당동, 서당동, 내정동의 중앙공원과 접하며 서쪽은 분당구의 초림동, 판교동과, 북쪽은 이매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서북방은 낙생로에 의하여 판교동과 나누어지며 서남쪽은 분당로에 의하여 초림동, 내정 동(중앙공원)과, 돌마로에 의하여 서당동과 경계가 되고 있다. - 연혁 - 행정동인 서현동은 그전에 법정동인 율동과 서현동이 하나로 통합되어 지금의 서현동이 된 곳 이다. 서현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돈서촌(遯書村), 양현리(陽峴里), 통로동(通路洞) 등 의 마을로 되어 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시 ‘돈서촌’과 ‘양현리’의 가운데 글자를 합 하여 ‘서현리’가 되었으며 율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율리(栗里)라고 부르던 곳이다. 1971년 9월 13일 도조례 제470호에 이하여 서현동과 율동이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서현동과 율동이 되었으며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성남시 돌마 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9년 5월 1일에는 분당 신도시가 건설되기 전이므로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 1991년 9월 17일 서현동과 율동이 각각 분당구의 동이 되 었다. 1992년 5월 1일 분당동에서 서현동을 나누면서 율동의 전체와 서현동 중 77의 1번지- 90 번지가 모두 행정동인 서현동의 관할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명유래

현(書峴)’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었던 마을명칭인 ‘돈서촌(遯書村)’과 ‘양현(陽峴)’이라는 두 마 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의 돈서촌, 양현, 통로골 등의 마 을로 이루어진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분합때 돈서촌에서 ‘서(書)’자 를 취하고 양현리에서 ‘현(峴)’자를 취하여 ‘서현리(書峴里)’라 부르게 된 곳이다. 이를 더 거슬 러 올라가 보면 ‘돈서촌’은 현지에서 ‘된섬말’이라 부르던 곳이며, 양현리는 ‘볕고개’라 부르던 곳 으로 돈서촌의 경우,어느 선비가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양현리는 글자 그대로 ‘햇볕이 잘 드는 고개’로 풀이되어 ‘양현리’가 되었지만, 토착지명의 ‘볕고개’는 ‘볕’이 받, 백, 뱃 등에서 비롯된 산지지명으로 산골짜기나 고개, 산 사이를 뜻하는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서현동에 통합 된 율동은 그전에 율리(栗里)라고 부르던 곳으로, 현지에서 서근배미, 또는 서근바미로 통하던 유명한 밤의 생산지였다. 지금의 서현동에 딸린 법정동이 되었으나 율리는 조선조 때 청주 한씨 (淸州韓氏)의 집단세거지였던 곳으로 1990년대 이후 행정동인 서현동에 통합된 곳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2동
‘서당(書堂)’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법정동인 서현동에서 ‘서(書)’자와 그전 분당동의'당'

- 위치 - 서당동은 그전 분당동과 서현동의 일부가 합해져서 새로 생겨난 동이다. 분당구의 중심부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동쪽과 남쪽은 분당동에, 서쪽 끝은 분당 중앙공원과, 북쪽은 서현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중심 을 동에서 서쪽으로 분당천이 흘러서 중앙공원으로 들어가며, 동의 서남쪽은 분당로에 의하여 분당동과 경계가 되고, 동남쪽은 돌마로에 의하여 서현동 시범단지와 접하고 있다. - 연혁 - 서당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당우리(堂隅里)와 분점리(盆店里) 등에 속한 곳으로 이곳 에 점골, 새당모루, 벌터 등의 마을이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 분합 때 분점리와 당우리를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리라 하였으며,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동과 서현동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돌마출장소에 편입되 었다가, 1985년 5월 1일에는 성남시 중원구에 속하였다. 1991년 9월 17일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 속하였으며, 1993년 1월 20일 분당동에서 서당동이 나 누어지고, 서현동 일부를 합하였다.

* 지명유래

 ‘서당(書堂)’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법정동인 서현동에서 ‘서(書)’자와 그전 분당동의 ‘당’자를 합 하여 ‘서당동(書堂洞)’이라 하였다. 그러나 ‘분당(盆唐)’의 ‘당(唐)’자를 고쳐서 원래의 이름인 ‘집 당(堂)’자로 바로 잡아 1993년 1월 20일 서당동을 신설한 것이다(분당동의 이름 유래 참조). 그런데 ‘서당’이라는 이름은 옛날 학생들이 글공부를 하던 서당(書堂)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것 은 서현동에 속한 돈서촌(遯書村)에 옛날 초가집의 서당이 있어서, 은거한 선비가 이곳에서 아 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곳이 서당동과 인접한 곳이므로 ‘서당’과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특히 ‘서당동’이라는 이름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떠올리게 한다. 곧 맹자의 어머 니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공동묘지 가까이 가서 살았 다. 그런데 자식(맹자)이 장사지내는 흉내를 잘 내므로 다시 시장가로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흉내만 내므로 세번째는 서당 옆으로 이사를 갔더니 그제야 공부를 열심히 하 였다는 이야기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1동
‘초림’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전까지 없었던 이름으로 신도시가 조성

- 위 치 - 초림동은 분당구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탄천을 끼고 있으며, 분당 중앙공원의 서쪽과 남쪽에 접 하고 있다.동쪽은 내정동과 중앙공원, 서쪽은 신기동, 북쪽은 판교동과 서현동에 둘러싸여 있 다. 서북쪽으로 탄천이 흘러서 북류하며 초림동에서 분당천(순내천)이 탄천에 합류한다.초림동은 내정로에 의하여 동쪽에서 내정동과 나누어지고, 분당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북쪽에서 나누어지 며, 백현로에 의하여 신기동과 서남쪽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현 역 - 초림동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92년에 새로 설치된 동으로 이 동의 대부분은 그전 수내동 에 속하였고, 일부는 정자동과 궁내동에 속하였던 곳이다.이 지역은 그전 광주군 돌마면 수내 촌 지역에 속한 곳으로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1973 년 7월 1일 성남시 수내동이 되었고,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 년 5월 1일에는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된 곳이다.이후 분당구의 다른 동과 마찬가지로 분당출장 소 관할을 거쳐서 1991년 9월 17일에는 분당구 수내동이 되었고, 1992년 5월 1일 성남시 조례 1192호에 의거, 이 지역을 관할하던 분당동에서 동을 나누어 ‘초림동’이라는 새이름의 행정동이 되었으며, 초림동의 지번은 모두 그전 법정동인 ‘수내동’으로 되어 있다. - 관공서 등 - 초림동 관내에는 분당구청이 탄천변의 분당천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교육기관으로 분당고등학 교, 초림초등학교가 있고, 양지마을에 초림동사무소가 있다. 유통시설로 롯데백화점, 궁전프라 자 등이 들어서 있다.

* 지명유래

‘초림’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전까지 없었던 이름으로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새로 만들 어진 이름이다. 본래 수내동에 속하였던 곳이므로 이곳의 지번은 수내동 1번지부터 50번까지 새 로 지번이 부여되었다.1992년 5월 1일, 분당구의 동별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분당동에서 동의 관할구역을 나누면서 새로 동을 만들고 이 지역이 그전에 풀과 숲이 무성한 곳이었다 하여 ‘초 림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초림’에 대하여는 ‘풀’과 ‘숲’이 중복되는 데다가 ‘풀’이 먼저이고 ‘숲’이 뒤에 나오는 등 그 이름 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번 붙여서 사용하는 이름을 금방 바꾼다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2동
‘숲안’마을은 지금의 중앙공원 한산 이씨 묘역 남쪽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 위치 - 내정동은 그전 수내동에서 나누어진 동으로, 관내의 중앙공원과 함께 분당 신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분당동, 남쪽은 수내동과 정자동, 서쪽은 초림동, 북쪽은 서현동과 접하고 있 다. 동의 동북방은 분당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동남방은 돌마로에 의하여 분당동과, 남서방은 백현로에 의하여 내정동과, 서북방은 성남대로에 의하여 초림동과 경계가 되며 분당천이 동쪽 에서 흘러와 서쪽의 초림동으로 흘러 나간다. - 동의 연혁 - 내정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수내촌에 속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의 폐치·분합에 따라 돌마면 수내리가 되었으며,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시 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수내동이 되었고,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청 관할이 되었다. 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수내동이 되었으며, 1992년 5월 1일 수내 동에서 초림동이 분동되었고, 다시 1993년 6월 5일에는 수내동에서 내정동이 분동 되어, 법정동 인 수내동의 51번지 ~ 70번지에 속한 지역이다.

* 지명유래

내정(內亭)’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법정동명인 ‘수내동’과 인근의 ‘정자동’에서 ‘내’와 ‘정’을 취하 여 1993년 행정구역 조정 시 ‘내정동’이라 한 것이다. 수내동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수내(藪內)’라 는 이름은 그전 ‘숲안’마을을 한자로 적으면서 이를 훈역하여 지금의 ‘수내’가 되었을 것으로 보 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탄천의 우리말 표기가 ‘숯내(발음은 순내)’인데, 탄천 의 지류인 분당천이 또한 ‘수내’ 라 불렀다는 조사기록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수내, 내정동이라는 이름의 근원이 된 ‘숲안’마을은 지금의 중앙공원 한산 이씨 묘역 남쪽에 있 었던 마을 이름이다. 〈경원학보〉에는 조선 후기 이병태라는 이가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혹 은 숙종 때 이병익이라는 사람이 숲을 조성하였다고도 한다) 마을 앞 분당천변에 숲을 가꾸었는 데, 그 숲의 안쪽 마을이므로 ‘숲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중앙공 원의 영장산 꼭대기에는 8각정인 영장대(靈長臺)가 있고, 또 분당호변에는 돌마각(突馬閣)이라 는 누정이, 그리고 수내정(藪內亭)이라는 정자와 옛날의 ‘정자터’ 라는 땅이름도 남아 있다. 그 래서 수내동+정자동의 합성지명(合成地名)인 ‘내정동’보다도 옛 이름과 정자를 살려서 ‘숲정동 (숲안+정자동)’이나 ‘수정동(藪亭洞)’같은 이름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참고로 전국의 도, 시 ,군, 읍, 면, 동, 리의 행정구역 명칭 중 순 우리말 지명은 ‘서울’ 하나 뿐이 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어서 두번째 기록이 될 한글 행정구역 명칭의 탄생이 50년이상 걸리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3동
수내(藪內)’라는 이름은 이곳의 ‘숲안’마을에서 비롯된 이름

- 위치 - 수내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중앙부 동쪽에 위치하며, 불곡산의 북쪽 줄기인 형제봉의 서북사면 에 자리잡고 있다.분당 신도시 개발 이전의 수내동은 그 지역이 탄천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광주 군 오포면 경계까지 길게 자리를 잡았으나 신도시 개발 후 행정동의 관할구역이 대폭 조정되면 서 탄천을 향한 서북방은 초림동,내정동 등으로 분할되어 지금은 푸른마을을 중심으로 한 동남 방 지역만을 관할하고 있다. 수내동은 동쪽으로 광주군 오포면, 남쪽은 불정동, 서쪽은 정자동 과 내정동, 북쪽은 내정동, 분당동과 접한다. 이 동의 서쪽은 돌마로에 의하여 내정동과, 서남쪽 은 백현로에 의하여 정자동과,동북쪽은 수내로에 의하여 분당동과 구분되고 있다. - 연혁 - 수내동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수내촌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 행정구역 의 폐치·분합에 따라 돌마면 수내리가 되었으며,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 었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수내동이 되고,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 입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 관할이 되었다. 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수내동이 되었으며 1992년 5월 1일 수내 동에서 초림동이 분동되었고, 1993년 6월 5일에는 다시 내정동이 분동되었다. 그러므로 수내동 1번지∼50번지는 행정동인 초림동에, 수내동 51번지∼70번지는 내정동에 속한다.

* 지명유래

수내(藪內)’라는 이름은 이곳의 ‘숲안’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숲 또는 늪을 뜻하는 ‘수(藪)’ 와, ‘안 내(內)’ 자를 취한 것이다. 여기서 ‘수’는 늪지대의 얕은 곳에 무성하게 이루어진 덤불을 뜻하는 글자이므로,그전에 분당천변의 숲이 무성한 마을을 뜻하는 ‘숲안’이라는 이름을 한자화 한 것이다. 이 ‘숲안’이라는 마을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 청주목사를 지낸 이병익 이 이곳 마을 앞 분당천(수내)변에 숲을 가꾸었으므로 ‘숲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고, <경 원학보>에는 이병태(李秉泰:1688∼1758)라는 이가 부락 앞에 숲을 가꾸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서 고려 공민왕 때에는 이곳 숲안마을을 ‘부계(部溪)’라 불렀다고 하는데 ‘부계’ 는 ‘무리내’, 즉 ‘물내’=수내로 유추할 수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상고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종전의 수내동이 탄천의 동쪽에 위치하였고, 탄천(炭川)의 우리말 표기가 ‘숯내’이며 이 지역에서도 ‘숯내’로 통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 분당천(탄천 의 지류)을 이 지역(숲안의 역말 등)에서 ‘수내’라 하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분당천=수내, 탄천= 숯내의 관련설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숲안’은 그 소리가 ‘수반’ ‘수펑‘ ‘수펄’ 등으로 연철되기 때문이다. ‘수내동’ 이라는 이 름이 붙게된 ‘숲안’마을은 지금의 내정동(중앙공원)지역에 속한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1동
‘야탑’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처음으로 명명되었으며

- 위치 - 야탑동은 분당구의 최북단 중앙부에 자리잡은 동이다. 북쪽은 중원구 여수동과 접하고, 서쪽은 중탑동과, 남쪽은 하탑동과, 서쪽은 중원구 사송동과 접한다. 야탑동은 동(洞)의 동북쪽에서 여 수천이 흘러 내리다가 탄천으로 유입하고, 용인시에서 흘러내린 탄천이 북류하여 중원구 여수 동과 둔전동 사이를 빠져나가 한강으로 흐른다. 야탑동은 북쪽의 매화로 부근에서 중원구 여수동과 경계를 이루고 송림로의 일부에 의하여 동 쪽은 중탑동과 마주 대한다. 서쪽은 낙생로에 의하여 수정구 시흥동과 경계가 되고 남쪽은 번영 로에 의하여 하탑동과 대하고 있다. 동의 북서쪽으로 판교-구리간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 나간다. - 연혁 - 야탑동은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돌마면의 오야소동(梧野所洞),상탑동(上塔洞),하탑동(下塔洞) 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가 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이들을 모두 합하고, 오야소의 ‘야’자와 상탑, 하탑의 ‘탑’ 자를 취하여 야탑리라 하였으며,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 다. 1973년 7월 1일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됨에 따라 성남시 야탑동이 되었다가,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구제 실시에 따라 중원구에 편입 되었다. 그후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서 1991년 9월 17일 분당구 야탑 동이 되었으나 관할 행정동은 이매동이었다. 1993년 6월 5일 이매동에서 야탑동과 중탑동이 각 각 독립된 행정동으로 나누어졌다. 

* 지명유래

 ‘야탑’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처음으로 명명되었으며, 그전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 이 광주군 돌마면의 오야소동(梧野所洞), 상탑동(上塔洞), 하탑동(下塔洞)지역이었다. ‘야탑’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전국의 부,군,면,동,리를 일제히 폐치, 분합할 때 오야소동의 ‘야 (野)’자와 상탑,중탑의 ‘탑(塔)’자를 취하여 야탑동이라 한 것이다. ‘탑’에 대하여는 중탑동에서 따로 설명하였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2동
'하탑'이라는 이름은 그전에 이 지역을 탑골 아래쪽 마을이라는 뜻으로

- 위치 - 하탑동은 분당구의 북부 동쪽에 위치한 동(洞)이다. 북쪽은 야탑동, 동쪽은 중탑동, 남쪽은 중탑 동과 이매동, 매송동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수정구 시흥동(사송동)과 접하고 있다. 동쪽의 영 장산(매지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모여 야탑천을 이루고, 이 물이 중탑동을 거쳐서 하탑동 을 지나 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탄천이 하탑동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류하며 영장산의 물줄 기를 받아들이고 있다. 하탑로에 의하여 남쪽은 중탑동과 나누어지고, 벌말로, 송림로에 의하여 동쪽은 중탑동과 구분 되고 있다. 서쪽은 낙생로에 의하여 수정구 시흥동과 나누어지며, 번영로에 의하여 북쪽으로는 야탑동과 경계가 되고 있다. - 연혁 -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의 오야소동(梧野所洞), 상탑동(上塔洞), 하탑동(下塔洞)지 역이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부령 제111호에 의거 이들 마을을 합하고, 오야소의 ‘야’자와 상탑·하탑의 ‘탑’자를 따서 ‘야탑리’라 하였다.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광주군에서 나누어지고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3년 7 월 1일 성남시로 승격하자 야탑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성남시 돌마출장소 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중원구의 관할이 되었다. 1991년 9월 17일 성남시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행정동인 이매동 관할구역내의 야 탑동이 되었고, 이때 사송동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였으며 1993년 1월 20일 이매동에서 하탑동 이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명유래

'하탑'이라는 이름은 그전에 이 지역을 탑골 아래쪽 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래 탑골’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원래의 탑은 지금의 중탑골에 있었는데 이 탑을 기준으로 동쪽(산지쪽)은 윗탑골, 또 는 상탑골이라 하였고 아래쪽(서쪽)은 아랫탑골, 또는 하탑골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당 신도시의 이름에 대하여 1989년 성남시청 자문위원회에 보고된 내용에는 ‘금탑(金塔)’이라는 이름이 있다. 여기서 ‘금탑’은 금곡동의 ‘금(金)’자와 야탑동의 ‘탑(塔)’자를 합하여 만 든 합성지명으로 분당 지역에서 이 일대의 ‘탑’자가 갖는 지역적 의미가 매우 컸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3동
중탑동은 본래 ‘탑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 위치 - 중탑동은 분당구의 북단 동측에 위치하며 광주군 광주읍과 접하고 있다. 동쪽은 한남정맥에 해 당하는 이왕산, 영장산 줄기가 천연의 경계를 이루어 광주군 광주읍 직리와 접하고, 남쪽은 분 당구의 이매동, 서현동과, 서쪽은 이매동, 하탑동, 야탑동과, 북쪽은 중원구 여수동과 접하고 있 다. 큰매지봉, 곧 영장산 줄기에서 발원한 야탑천이 서쪽으로 흘러 탄천과 합류하며 북쪽으로 는 여수동의 갈마치 일대에서 발원한 여수천이 흘러와 서쪽의 탄천에 합류하고 있다. 동(洞)의 서쪽은 송림로, 벌말로에 의하여 야탑동, 하탑동과 경계가 되고, 동의 남부 서쪽은 성남로에 의 하여 이매동과 접하며, 하탑동과는 하탑로에 의하여 구분되고 있다. - 연혁 -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광주군 돌마면 하탑동에 속한 곳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전국의 행정구역이 통폐합 될 때 돌마면의 오야소동, 상탑동, 하탑동이 통합되어 야탑리(野塔里)가 되었으며,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광주군에서 분리되고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 다.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야탑동이 되었고, 1975년 3월 17일에는 시조례에 의거 돌마출장소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시조례에 따라 중원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분당 신도 시 개발계획에 따라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 1991년 9월 17일 분당구의 이매동에 속하게 되었으 며 1993년 6월 5일 이매동에서 중탑동이 별도의 행정동으로 나누어졌다.

* 지명유래

중탑동은 본래 ‘탑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이곳 중탑마을에 그전에 탑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탑 이 언제, 누가 세웠고, 어떤 경위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곳은 원래 윗탑골의 아래(서 쪽)쪽에 해당되고 탑천과 가까운 오야소 마을과는 중간지점에 위치하므로 처음에는 광주군 돌 마면 하탑리였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에 ‘중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탑(塔)’은 본래 ‘탑파(塔婆)’의 준말이며, 탑파는 산스크리트어의 ‘stupa’ 또는 팔리어의 ‘thupa’를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다. 탑은 스리랑카에서는 ‘dagaba’ 미얀마에서는 ‘pagoda’라고도 한다. 탑은 공덕을 상징 하고, 공양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동양적인 제천(祭天)의식의 소산이 라 할 수 있다. 동양의 탑이 신불의 강림처, 축원과 숭배의 상징이라면, 서양의 탑은 ‘바벨탑’이 뜻하듯이 하늘로 통하는 문으로 인간의 상승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운중(雲中)' 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이름

- 위치 - 운중동은 성남시와 분당구의 서동단에 위치한 동(洞)이다. 광교산과 바라산, 청계산 줄기가 남 북으로 뻗은 산맥의 동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분당구 판교동과 접하고 서쪽은 의왕시 청 계동과, 남쪽은 용인시 수지읍과, 동남쪽은 분당구 금곡동과 접하고 있다. - 연혁 - 운중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에 속한 곳으로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석운리(石雲里: 도루 니), 산운리(山雲里: 하산운리, 중산운리, 상산운리), 대장리(大庄里: 혹은 태장리)로 나누어졌 던 곳이다.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분합에 따라 중산운리와 산운리는 합해서 운중리가 되 었고, 두밀과 하산운리가 합해져 하산운리가 되었으며, 태릉, 장투리, 무두만이가 합해져 대장 리, 바라미(망산), 도루니가 합해져 석운리가 되었다. 1971년 9월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 남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운중동이 되었 다. 그후 다른 동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75년 3월 15일 낙생출판소→1989년 5월 1일 중원구→1989년 6월 20일 분당지구개발지원사업소→1991년 7월 1일 분당출장소→1991년 9월 17일 분당구 관할이 되어 현 재에 이르고 있다. 

* 지명유래

'운중(雲中)' 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이름이며 그전에는 중산운리 (中山雲里), 산운리(山雲里), 하산운리(下山雲里)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이때 산운리와 중 산운리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운중리(雲中里)' 가 되었다. 이 지역은 석운동(石雲洞)이 '돌우니 (도루니)' 이고 산운동(山雲洞)이 '뫼루니' 하산운동(下山雲洞)이 '아랫뫼루니' 로 불리워지던 것을 한자 이름을 붙이면서 돌 석(石), 뫼 산(山)을 붙이고 뒷소리 '루니' 는 '운(雲)'을 취한 것 이다. 그러므로 '석운동=도루니' 는 '산으로 둘러 싸인 마을' '산운동=뫼루니' 역시 산골마을을 뜻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또 '운중동' 의 유래에 대하여 '산에 항상 구름이 머물러 있어 서…' 운중동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어디인들 산이 없고 구름이 없으랴마는, 산과 구름은 꼭 풍 류스런 멋이 아닐지라도 자연스럽게 조화가 되므로 '루니=룬'을 '운(雲)' 으로 표기한 옛 사람들 의 뛰어난 작명법(作名法), 곧 현지 토착 발음에 유사한 한문표기와 아취를 곁들여 땅이름을 창 출한데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1동
‘이무슬’과 ‘매화낙지’를 취하여 이매동이라 하였다.

- 위치 - 이매동은 분당구의 중심부에서 북쪽에 위치하며 탄천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전에는 지리 적으로 광주군 돌마면의 중심부가 되어 한때는 면사무소, 지서 등이 있었다. 동쪽은 영장산 줄 기(매지봉)에 의하여 서현동(율동) 중탑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서현동과, 서쪽은 탄천을 사이에 두고 매송동과 마주 대하고 있다. 북쪽은 중탑동, 하탑동과 경계가 된다. 이매동은 영장산 산줄기가 좌우로 흘러내린 그 안에 자리 잡아서 탄천을 향하여 서면(西面)하 고 있는 형상이다. 동의 서쪽을 남에서 북으로 탄천이 흐르고, 이매동의 4개 소하천은 모두 동쪽에서 흘러내려 서 쪽의 탄천으로 들어간다. 남쪽은 서현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북쪽은 성남대로에 의하여 중탑 동, 하탑로에 의하여 하탑동과 경계가 되고 있다. - 연혁 - 이매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지역으로 1760년대에는 문헌상 상동리 ,하동리 뿐이었으므 로 어디에 속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후 돌마면 이매동(1906년)이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 정구역 폐합 때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가 되었다.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조례에 의하여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 출장소 → 시의 승격에 따라 성남시 이매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관내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89년 5월 1일에는 구제 실시에 따 라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분당 신도시 개발과 함께 분당출장소 관할을 거쳐서 1991년 9월 17 일 분당구 이매동이 되었다. 1993년 6월 5일 이매동에서 행정동인 야탑동, 중탑동이 나누어지고, 1995년 10월 17일 수정구 사송동 일부가 분당구 이매동과 야탑동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 지명유래

'이매’라는 이름은 1906년에 만들어진 「구 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 나오기 시작하는 데 그 내력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 물방아거리 마을 앞의 탄천사이에 있는 들판을 ‘이무슬들’이라 하는데, 이 마을이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곧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길지이므로 ‘이무 슬’과 ‘매화낙지’를 취하여 이매동이라 하였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동쪽의 영장산(413.5m)을 ‘매지봉’이라고도 하는데, 이 줄기에 큰 매지봉과 작은 매지 봉의 두 매지봉(梅址峰)이 있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이무기와 관련된 전설이다. 옛날 탄천변의 구렛들에 물막이 방죽이 있어서, 주민들이 이곳에서 천렵을 즐기다가 한 아름되 는 큰 물고기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물고기는 천년만에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던 이무기였다. 그 이무기가 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저주를 받으리라” 하면서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내 고 사라졌다. 이에 이무기의 저주를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이 상의한 후 이무기의 위령 승천제 를 구렛들에서 지냈는데, 이때 제상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다시 그날 밤 주민들 꿈 에 이무기의 화신인 백발노인이 나타나 동민들의 정성에 보답하여 저주를 풀었다고 하며 그후 승천제를 지냈던 자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다. 마지막으로 〈진주 유씨 세보〉에는 ‘임의곡(任意谷)’또는 이매곡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의술’ 로 불리웠다는 설도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2동
매송(梅松)’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3년 새로 생겨난 이름이다.

- 위치 - 매송동은 분당구의 북단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탄천의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았으 며, 북쪽은 하탑동, 수정구 시흥동(사송동)과 마주 대하고, 동쪽은 탄천을 사이에 두고 이매동 과 마주 대하며, 남쪽은 서현동, 서쪽은 판교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서쪽에서 금토천(金土川), 성내천(城內川)의 물을 합한 운중천(雲中川)이 동류하다가 매송 동을 가로 질러 방아교 부근에서 탄천에 합류한다. 매송동은 북쪽에서 하탑로에 의하여 하탑동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낙생로에 의하여 수정구 시 흥동과 접하며, 남쪽은 서현로에 의하여 서현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연혁 - 매송동 지역은 분당구의 이매동 지역과 수정구의 사송동 지역 각 일부가 병합되어 1993년 1월 20일 매송동이 생겨났으며, 그 이전의 연혁은 분당구의 이매동 및 수정구 사송동의 연혁과 같다 (이매동은 이미 설명하였다). 사송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대왕면(大旺面) 사촌리(沙村里)와 송현동(松峴洞) 일부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거 두 마을을 통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사송동(沙松洞)’이라 하였다.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제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사송 동이 되었으며,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에 의거 대왕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시 조례에 따라 수정구에 편입되었다.

* 지명유래

매송(梅松)’이라는 이름은 분당 신도시 개발에 따라 1993년 새로 생겨난 이름이다. 그 당시 건설 부와 한국토지공사가 검토한 안과 성남시 지명위원회가 검토한 안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 때 사송동, 이매동, 백현동의 일부를 합하였으므로 사송동과 이매동에서 가운데 한 글자씩을 취 하여 ‘매송동(梅松洞)’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런데 원 이름인 이매동의 ‘이매’는 ‘이무술’이란 토착지명이 한자화 되면서 ‘이매동(二梅洞)’ 이 되었고, 또 ‘사송동’은 자연부락인 ‘사촌(沙村)’과 ‘송현(松峴:솔고개)’의 머리글자를 따서 ‘사 송동(沙松洞)’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사송동’의 이름의 연원이 된 ‘사촌(沙村)’은 탄천의 범람으로 마을주변에 모래사장이 형성 되었기 때문이며, ‘송현(松峴)’은 고갯마루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고개’라 불렀던 곳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1동
'신기'라는 이름은 토박이말의 '샛터'에 대한 한자식 표기

- 위치 - 신기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남쪽 중앙부에 위치하며 탄천이 동의 중앙을 관류하고 있다. 북쪽으로 정자동, 서쪽은 경부고속도로를 경계로 금곡동, 남쪽 역시 금곡동, 동쪽은 불정동과 접하고 있다. 남·북을 가로 지르는 내정로에 의하여 불정동, 정자동과, 백현로에 의하여 북쪽의 초림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연혁 - 신기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 금곡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에서 성 남출장소가 분리·독립하면서 낙생면 금곡리에 속하였고,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낙생출장소 관 할이 되었다. 1989년 5월 1일 성남시 중원구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9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 당구로 승격될 때 금곡동에 속하였다. 1996년 1월 15일 분당구 금곡동과 정자동 일부를 나누어 행정동인 신기동을 신설하였으며 그전 법정동인 정자동, 궁내동, 금곡동의 각 일부에 걸쳐 있었 으나 법정동간 경계조정으로 현재 법정동은 정자동이다. 

* 지명유래

신기’라는 이름은 토박이말의 ‘샛터’에 대한 한자식 표기이며, 지금은 폐동이 된 탄천변의 서쪽 샛터말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은 본래 농경지로 들판이었으나 차츰 취락이 형성되어 큰 마을 의 집단취락이 된 곳이다. 토박이말인 ‘샛터말’은 ‘새로(新) 터를(基)잡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전국의 취락지 땅이름 중에 서 같은 이름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한문 표기로는 ‘신기’ 또는 ‘신대(新垈)’로 쓰기도 한 다. ‘새’는 오늘날 대부분 ‘새=신(新)’으로 의역되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새’가 사이(間)를 뜻하는 ‘새’로서 들 사이의 마을, 산 사이의 마을, 골짜기 사이의 마을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또 새터의 ‘새’는 새=풀(草), 새=동(東), 새=조(鳥), 쇠=새=철(鐵), 소=새=우(牛)의 뜻을 지닌 경우 도 있다. 새터=신기(신대)라는 이름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취락지가 처음 터를 잡으 면 ‘새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용 쓰고 있는 샛별, 새벽, 샛바람의 ‘새(샛)’은 동쪽 을 뜻하는데.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요, 날이 밝아오는 곳이며, 태양의 고향이자 밝음의 원 천이 된다. 이와 같이 ‘새’의 어원이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게 된 까닭은 새=동쪽이 곧 ‘새로움’을 뜻하면서 신성함을 갖춘 해=새가 되어 5일=닷새, 6일=엿새라 함과 같이 우리 민족의 광명이세 (光明理世)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샛터’에서 ‘터’는 텃밭, 텃새, 일터, 장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자리(곳), 즉 특정한 용도에 공여되는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터’ 의 중세어 표기는 ‘터ㅎ’로써 ‘ㅅ다(地)’와 같은 말의 뿌리로 보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2동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 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위치 - 정자동은 성남시의 분당구 중심부에 위치하며 탄천이 동의 서쪽을 남출북류(南出北流)하고 있 다. 불곡산의 북서쪽 기슭에 해당되며 분당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기존의 정자동 행정구역에서 불정동, 신기동 등이 새로 생겨나면서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다. 동의 북쪽은 백현로에 의하여 수내동·내정동과, 동의 남쪽은 정자로에 의하여 불정동과, 동의 서쪽은 내정로에 의하여 신기동 과 구분되고 있다. - 연혁 - 정자동 지역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정자동(亭子洞)이었다. 일제 때인 1914년 부령 제111 호에 의거 전국의 부·군·면·리 등을 통폐합 할 때도 광주군 돌마면 정자리였으며 1971년 9월 13 일 도조례 제470호로 광주군에서 성남출장소가 분리·독립할 때 성남출장소에 편입되었고, 1973 년 7월 1일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성남시 정자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시조례 제133호에 따라 성남시 돌마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89년 5월 1일에 는 성남시 중원구 정자동이 되었다. 1991년 7월 1일 성남시에 분당출당소가 설치되고, 같은 해 9월 17일 분당출장소가 분당구로 승 격될 때 여기에 편입되었으며, 분당 신도시 개발 후인 1996년 1월 15일 성남시 조례에 의거 법정 동인 정자동을 행정수요에 맞게 신기동과 불정동, 정자동 등으로 나누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명유래

정자동’이란 이름은 이 지역이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 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그로 인하 여 붙여진 이름이다. 곧 조선 제 9대 임금 성종의 아들(12남) 무산군(茂山君)의 제 5자인 태안군 (泰安君) 이팽수(李彭壽:1490∼1525)의 묘역과 그 자손들이 터를 잡았으며, 태안군의 증손이 되 는 이경인(李敬仁:1575∼1642)이 이곳에 낙향하면서부터이다. 이경인은 자를 극보(克甫), 호를 정촌(亭村)이라 하였고, 1642년 (인조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이 되고 함흥판관, 안산현감, 이천도호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 야학(閑雲野鶴)으로 소일하였다. 그후 그가 즐기던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정자리’가 되었고, 그의 호 ‘정촌’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정자는 옛 사람들이 자연에 귀의하여 맑고 깨끗한 산천에 심신을 씻어내는 한편 혼탁한 세상으 로부터 떠나 있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자는 산이 수려하고 물이 맑으며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짓는 것이 상례로 옛 사람들이 자연에 동화되고,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고 하였던 정신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절벽 위, 강가, 산봉우리 등 어디에 존재하건 인공구조물인 정자(건물)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눈에 거슬리지 않 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정자의 멋과 풍류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규보는 그의 <사륜정기>에서 ‘사방이 툭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라고 하였지만 <후한서>에는 ‘여행길에 숙식시설이 있고, 관리가 백성의 시비를 가리는 곳’이라고도 한 것을 보면 「정자」의 의미가 옛날의 ‘주막집 정’ ‘역말 정’ ‘기를 정’ ‘머무를 정’ ‘우뚝 솟을 정’에서 오 늘날의 그냥 ‘정자 정(亭)’으로 통용되어온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3동
불정동 지역은 전체가 그전 정자동에 속한 지역

- 위치 - 불정동은 성남시 분당구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동쪽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과 불곡산 줄기에 의하여 나누어지며, 남쪽은 구미동과 금곡동, 서쪽은 신기동, 북쪽은 수내동 정자동과 접하고 있다. 정자로가 동서로 뻗으면서 정자동의 경계를 이룬다. 분당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탄천의 동 쪽에 자리잡은 신설(新設)동으로 분당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기존의 행정구역이 새도시의 구조 와 아파트 입지여건에 맞추어 관할 행정동 편제가 바뀌었는데, 1996년 1월 15일 정자동을 나누 어 불정동을 신설하였다. - 연혁 - 불정동 지역은 조선시대의 광주군 돌마면 정자리(亭子里)였다. 일제 때인 1914년 부령 제111호 에 의거 전국의 부, 군, 면, 리 통폐합 시에도 그대로 정자리라 하였다. 1971년 9월 13일 광주군 에서 성남 출장소가 분리·독립할 때 성남 출장소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성남 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성남시 정자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성남시 조례에 의거 성남시 관내의 돌마·낙생·대왕 출장소가 설치되었는데, 이 때 돌마 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5월 1일 시 조례에 따라 성남시 중원구에 소속되었다. 1991년 7월 1일 성남시에 분당출장소가 설치되고, 같은 해 9월 17일 동 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 될 때 여기에 속했다가 1996년 1월 15일 성남시 조례에 의거 법정동인 정자동을 행정편의상 신 기동과 불정동, 정자동으로 나누어 현재에 이르렀다.

* 지명유래

불정동 지역은 전체가 그전 정자동에 속한 지역으로 동 관내에 위치한 불곡산(佛谷山)에서 ‘불 (佛)’ 자와 정자동에서 ‘정(亭)’자를 취하여 ‘불정동(佛亭洞)’이라 한 것이다. 불곡산은 분당 남쪽 지역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으며, 불정동의 동쪽에 위치하여 광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높이 344.5m의 산이다. 여기서 ‘불(佛)’은 부처, 불타, 불가, 불교를 상징하는 말로서 범어의 Buddha 의 음역이기는 하 지만, ‘불곡산’의 ‘불‘이 꼭 불교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고대어에서 ‘밝’이 광명을 뜻하면서 벌, 불, 부리, 박, 백, 배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거니와, 이런 이름들 이 뒷날 불교적 영향을 받아 ‘불(佛)’ ‘비로(毘蘆)’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불곡산’이란 이름도 경 기도 양주군, 북한의 평원군 등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정자동의 ‘정자’에 대하여는 정 자동편에서 따로 설명하였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판교(板橋)' 라는 이름은 그전 낙생면 소재지인 이곳 '너더리'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 위치 - 판교동은 분당구의 북쪽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 고속도로가 동(洞)을 남·북으로 관통하 고 판교-구리간 서울외곽 순환고속도로가 동의 북단을 동·서로 지나가고 있다. 또 동의 동쪽에 는 남·북을 가로질러 내곡-분당간 도시고속화도로가 지나간다. 북쪽은 수정구 신흥동, 동쪽은 매송동, 동남쪽은 서현동과 초림동, 남쪽은 정자동, 신기동과 금곡동, 서쪽은 운중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서쪽에는 운중천이 서출동류(西出東流)하다가 삼거리 동쪽에서 금토천을 합한 후 탄천으 로 흘러든다. - 연혁 - 판교동 지역은 법정동인 백현동, 삼평동, 판교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행정동인 판교동 관할로 된 곳이다. 판교동은 그전에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였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너분바위(광암)를 병합하여 판교리라 하였다. 삼평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낙생면 삼거리와 보 평리 지역이었는데 1914년 이를 통합하여 '삼평리(三坪里)' 로 고쳤으며, 백현리는 변동이 없었 다. 1971년 9월 13일 도조례에 의거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성남시 관 내의 판교동, 백현동, 삼평동이 되었다. 1975년 3월 17일 시조례의 의거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 고, 1989년 5월 1일 중원구에 편제되었다. 1991년 7월 1일 성남시 분당출장소가 설치되고, 이어 서 1991년 9월 17일 동 출장소가 분당구로 승격되면서 분당구에 딸린 삼평동, 백현동, 판교동이 되었으나 1973년부터 관할 행정동은 판교동이다. 

* 지명유래

'판교(板橋)' 라는 이름은 그전 낙생면 소재지인 이곳 '너더리'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너더 리는 '널다리' 가 변한 말로 보고 있으며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널 판(板)' 자와 '다리 교(橋)' 자를 취하여 지금의 '판교' 라는 이름이 생겼다. 곧 옛날 이 마을의 운중천 위에 판자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널' 은 '넓다' 는 뜻이거나 '늘어졌다(산줄기, 또는 하천이 길게 늘어진 모양)' 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널재' '널문이' '널다리' 등의 이름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데, '널' 이 지형상 '넓' 거나 '늘어' 진 곳에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더리' 의 경우 '넓은 들' 이 변하여 '너드리' 가 되고, 너드리가 다시 '너더리' 로 된 경우도 많다. 곧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의 '널' 이 널(너르,너리), 놀(노루,노리), 늘(느리,느르) 등이 널=판(板), 들(달=다리)=교(橋)로 변한 경우도 나타나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경기도(京畿道)
‘경기’란 ‘서울을 둘러싼 그 문지방’이라는 뜻이다.



* 지명유래

‘경기’란 ‘서울을 둘러싼 그 문지방’이라는 뜻이다. 곧 도읍지의 주변지역을 말한다. ‘경기’라는 이름은 1018년(고려 현종 9)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충청도의 북부 일부가 들락날락하 였으나 대체로 경기좌도는 한강이남 지역, 경기우도는 한강 이북지역이 해당되었다. (좌.우도 는 서열상 좌도가 먼저이다.) 관찰사는 처음 수원에 주재하였다가 뒤에 광주(廣州)로 옮겼으 며, 감영을 기영(畿營), 감사(관찰사)를 기백(畿伯)이라 부른 것도 모두 경기의 ‘기’를 붙인 것이 다.
고양(高陽) 일산(一山)
- 한씨 미녀와 고구려 안장왕이 상봉한 곳

◆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白石), 마두동(馬頭), 장항동(項) 등 일원 ◆ 면 적 : 4,760,053평(15,735,712m2) ◆ 연 혁 : - 고양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고봉(高峰)으로 고쳐서 교하군에 딸린 현이 됨. - 행주(幸州)는 고구려의 개백현(皆白)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逢)으로 고쳐 한양군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초(940년)에 행주 또는 덕양(德陽)이라 함. - 1394년(조선 태조 3) 고봉에 감무를 두고 행주, 부원, 황조향을 붙였으며 1413년(태종13) 고봉과 덕양의 두 현을 합하고, 글자를 합하여 고양으로 고침. - 1471년(성종 2) 경릉(敬陵)과 창능(昌陵)의 두 능이 있으므로 고양군으로 승격됨. - 1504년(연산군 10) 군의 땅을 비워서 놀이터를 만들고, 그 나머지 땅은 이웃 고을에 갈라붙임. -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에 의하여 다시 고을이 복구됨. -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지방관제 개혁으로 고양군이 됨.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경성부의 서강, 용산, 연희, 은평, 숭신, 인창, 두모, 한지면의 8개면을 병합함. - 1936. 4. 1 용산, 서강, 연희, 한지 등이 경성부로 편입됨. - 1949. 8. 15 은평, 숭인, 뚝도 등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됨. - 1992. 2. 1 고양군이 고양시로 승격됨. - 1996. 3. 1 고양시에 덕양구와 일산구를 설치함.

* 지명유래

- '고양(高陽)'이라는 이름은 1413년(조선 태종 13)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치 분합할 때 고봉과 덕양(행주)의 두 고을을 합하고 여기서 한 글자씩 취하여 고양현이 되었다. - 고양의 옛 이름인 달을성- 고봉에 있어서 '달을'은 tara, 또는 toro를 표기하면서 산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 고을(읍)을 뜻하는 고어로 보고 있다. 곧 '달=고'는 높다는 뜻으로 산을 나타내면서, 읍리(邑里)를 나타내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보고 있다.) - 한편 행주(幸州)의 옛 이름인 왕봉(王逢)에 대하여는 한씨미녀가 높은 산 봉우리에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이에 사랑을 언약한 고구려 안장왕이 달려와 서로 상봉하였고, 이로 인하여 왕봉(王逢)이라 부른다고 한다. - 일산구(一山)의 이름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곧 1904~1905년 경 일제가 경의선을 부설할 때 송포면 덕이리 한산 부락의 '한메'를 일산(一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 또 다른 설은 일산=고봉산을 뜻하며, 우리말로는 큰 산을 뜻하는 한산인데 이것을 일제가 일산(一山)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 일산구 백석동(白石)은 원래 흰둘리, 핸들리라 부르던 곳이며 크기가 약 1m 쯤 되는 흰 돌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 마두동(馬頭)은 원래 '말머리'라고 부르던 곳이다. 정발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전체가 말의 머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 장항동(獐項)은 그전에 '노루메기'라 부르던 곳이다. 노루=장(獐)이며, 메기→목=항(項)이 된 것이다. 마을 생김새가 노루목처럼 생겼다는 설과 정발산에 노루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너르(넓은)목'이 노루목으로 변전한 경우도 있다
고양(高陽) 중산(中山)
- 고봉산이 고양의 중심 산이라는 뜻

◆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一山) 일산동, 탄현동(炭峴) 일원 ◆ 면 적 : 257,398평(850,902m2)

* 지명유래

- 중산(中山)은 고봉산록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며, 혹은 고봉산이 고양군의 중심이 되므로 '중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 생각컨대 '고봉산'은 고양의 옛 고을 이름인 '고봉'을 붙인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고을의 진산(鎭山:고을을 지켜주는 산)으로 볼 수 있으니 '고을의 중심 산'이라는 설명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 중산에 인접한 왜굴은 임진왜란때 왜적이 고봉산 전투에서 패하여 이 마을로 후퇴해 오다가 이 곳에서 포위되자 굴복한 곳이므로 왜굴 이라 부른다고 한다. - 탄현동(炭峴)은 그 전에 숯을 구워서 내다 팔았던 곳으로서 숙고개=숯고개라 부르던 곳이다. 본래 참나무가 많았으므로 참숯을 구워서 팔았던 곳이라고 한다
구리(九里) 교문(橋門)
- '한다리'와 '이문안' 마을을 합한 이름

◆ 위 치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일원 ◆ 면 적 : 100,964평(333,765m2) ◆ 연 혁 - 구리시 지역은 원래 양주군의 구지면(九旨)과 망우리면(忘憂里)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두 면을 합하고 '구(九)'자와 '리(里)'자를 합하여 양주군 구리면이 됨. - 1963. 1. 1 서울시 확장에 따라 망우리 등이 서울시에 편입됨. - 1973. 7. 1 구리면이 구리 읍으로 승격됨. - 1980. 4. 1 양주군에서 남양주군이 분리됨. - 1986. 1. 1 구리 읍이 구리시로 승격됨

* 지명유래

- '구리(九里)'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구지면(九旨)과 망우리면(忘憂里)이 합해지면서 '구리면'이 탄생하였다. - 그전 구지면의 '구지'는 한강 북안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지형이 곶을 이룬 곳이므로 고지→구지가 된 것이다. - 망우리면의 '망우(忘憂)'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이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의 기초를 세웠으나, 자신이 묻힐 땅을 정하지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던 차에, 다행히 신후지지(죽어서 묻힐 곳)를 검암산(동구릉)에 정하고 돌아오다가, 이 고개에서 능 쓸 자리가 있는 산을 바라다보며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하였으므로, 그 뜻을 따서 망우리 고개라 한다. - 교문동(橋門)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생겨난 이름으로서 그전 백교(白橋:일명 한다리)와 이문안(里門) 마을 등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교'자와 '문'자를 취하여 만든 이름이다
구리(九里) 토평(土坪)
- 그전 '토막'과 '평촌'마을이 합해진 이름

◆ 위 치 :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수택동(水澤), 교문동 일원 ◆ 면 적 : 236,920평(783,207m2)

* 지명유래

- 토평동(土坪)은 그전 양주군 구지면에 속하였던 곳으로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평촌리(坪村)와 토막(土幕)마을 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 글자를 따서 토평동이라 하였다. - 토막리는 그전에 흙으로 쌓은 막이 있어서 토막이라 불렀던 곳이며, 평촌은 벌말이라 부르던 곳이다. -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되면서 토평동이 되었다. - 수택동(水澤)은 늪말, 수늪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옛날 어느 부자가 어찌나 인색하였든지 시주를 청하는 중에게 쌀대신 쇠똥을 퍼다준 죄로 그 집터가 늪이 되었다고 하며 이를 장자늪, 장자소라 불렀다. 수택동은 늪이 많아서 부르는 이름이다
기전(畿甸)
경기도의 별칭이며, 기중(畿中), 또는 적기(赤畿)라고도 한다.



* 지명유래

경기도의 별칭이며, 기중(畿中), 또는 적기(赤畿)라고도 한다. ‘기(畿)’는 원래 중국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5백 리 이내의 땅을 말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서울을 둘러싼 땅, 그 주변지역을 말한 다. 곧 ‘기’가 문지방, 뜰, 또는 안마당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호(畿湖)지방
경기도지방과 호서(충청도)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 지명유래
김포(金浦) 장기(場基)
- 옛날 5일장이 섰던 장터거리

◆ 위 치 :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 일원 ◆ 면 적 : 253,000평(836,364m2) ◆ 연 혁 - 김포지역은 백제의 금포현(黔浦)으로서 757년(신라 경덕왕 16) 지금 이름인 김포(金浦)로 고쳐서 장제군(부평)에 붙임. - 1182년(고려 명종 2) 감무를 둠. - 1198년(신종 원년)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현령으로 승격함. (현감보다 현령이 위이며, 현감은 종전의 감무를 두었던 곳임) - 1414년(조선 태종 14) 양천현(陽川)을 합하고 김포와 양천의 머리글자를 따서 김양현(金陽)이라 하였다가 그해 10월 다시 나누고 양천현은 금주(시흥군)로, 김포는 부평부에 붙임. - 1416년(태종 16) 김포현으로 복구되어 현령을 둠. - 1627년(인조 5) 양주로부터 원종(인조의 생부)의 묘소를 이장하고 그 10년(1632)에 군으로 승격됨. -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인천부에 딸렸다가 그 다음해 경기도 관할이 됨. - 1914. 4. 1 일제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통진군의 11개면, 양천군의 5개면을 합하여 김포군이 됨. - 1963. 1. 1 양동(陽東) 양서(陽西) 2개면이 서울시로 편입됨. - 1979. 5. 1 김포면이 김포읍으로 승격됨. - 1998. 4. 1 김포군이 김포시로 승격됨

* 지명유래

- 김포의 옛 이름 금포의 '금(黔)'은 '검'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기한 글자이며 개=포 이므로 김포는 '검개'라는 말이 된다. - '검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김포의 지형을 나타낸 말로서 검=금(金)=금(黔)이 모두 '큰 개펄'을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 또 '김포(金浦)'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고려 때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길가에서 금덩어리를 주웠다가 그 금으로 인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상할까 걱정되어 한강에 금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리하여 그곳을 '투금뢰' 또는 '투금탄(投金灘)'이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김포'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 장기동(場基)은 본래 '장터'·'장텃거리'라 부르던 곳으로 5일장이 섰던 곳이다. 그전 김포군의 석한면으로서 장터→장기로 한자화한 이름이다
남양주(南楊) 창현(倉峴)
- '화도'는 서로 화합하여 잘 살라는 뜻

◆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和道) 창현리 일원 ◆ 면 적 : 109,552평(362,155m2) ◆ 연 혁 - 양주지역은 옛 풍양현(豊壤)과 양주(楊州)고을을 나누어서 살펴봄. - 양주는 고구려의 매성(買城) 또는 창화군(昌化)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내소(來蘇)로 고침. - 940년(고려 태조 23) 견주(見州)로 승격되고 1018년 (현종 9) 지금의 이름인 양주(楊洲)로 고치고 치소를 한양으로 옮김. -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으로 개칭하고 유수관(留守官)을 둠. - 1394년(조선 태조 3)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한성부 또는 한양부라 하였으며 양주고을을 동촌(東村) 대동(大洞)으로 옮김. - 이때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부(府)로 올림. - 1397년(태조 6) 부청을 견주(주내면 고읍리)로 옮기고 양주라 하다가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됨. - 1429년(세종 11) 목(牧)이 되고 진(鎭)을 두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양주 고을을 없애고 그 땅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그 나머지 땅을 갈라서 이웃 고을에 나누어 붙임. - 1511년(중종 6) 다시 주로 복귀하고 고을을 불국산 남쪽에 세움. - 풍양현은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지명을 당나라식으로 바꿀때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에 딸린 현이 됨. - 940년(고려 태조 23) 풍양(豊壤)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양주에 붙였다가 다시 포천에 붙임. - 1427년(세종 9) 다시 양주에 붙였는데 진건, 진접, 별내, 미금, 구리 지역이 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시 양주군이 됨. - 1963. 1. 1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 - 1980. 4. 1 구리읍, 미금읍, 별내면, 진접면, 진건면, 수동면, 화도면, 와부면이 남양주군으로 분리됨. - 1981. 7. 1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

* 지명유래

- 양주(楊州)는 우리말의 '버들골'로 풀이되는데 이 버들골의 '버들'을 '박달'의 갈래말로 본다. - 박달의 은 「머리 박」의 박, 「태백산」의 백, 들판의 벌 또는 불, 부리가 모두 배달=박달에서 비롯된 말이다. - 남양주(南楊州)는 양주군을 나누면서 군의 남쪽을 뜻하여 붙인 이름이다. - 화도읍(和道)은 본래 하도면(下道)이라 부른 곳이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큰 길 아래쪽을 하도면, 위쪽을 상도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상도면 하도면을 합하고 서로 화합하라는 뜻에서 '화도면'이라 한 것이다. - 창현리(倉峴) 역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창벌(마현),장현리(獐峴)등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창현리라 하였다
남양주(南楊州) 마석(磨石)
- '맷돌모루'라고 부르던 맷돌 생산지

◆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和道) 마석우리(磨石隅) 일원 ◆ 면 적 : 135,000평(446,281m2)

* 지명유래

- '마석(磨石)'이란 곡식을 빻는데 쓰이는 도구로서 맷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지명어미(語尾)로서의 '우(隅)'는 모퉁이-모루 또는 머리-모루를 나타내는 한자로서 당모루, 솔모루, 돌모루 등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 마석우리는 원래 양주군 하도면 지역으로서 맷돌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고 하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화도면에 편입된 곳이다
남양주(南楊州) 평내(坪內)
- 의안대군 이화의 궁집이 있었던 곳

◆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일원 ◆ 면 적 : 257,000평(849,587m2)

* 지명유래

- 평내동(坪內) 역시 남양주시 호평동과 마찬가지로 양주군 상도면(上道)에 속하였던 곳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그전 담안이라고 부르던 장내리(墻內), 궁평리(宮坪)등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평'자와 '내'자를 취하여 평내리가 되고 미금면에 편입된 곳이다. - 궁평리는 조선초의 개국공신으로 정몽주등을 죽였고, 또 정도전의 난, 박포의 난에 공을 세운 의안대군 이화(李和)의 궁이 있었으므로 궁평리라 불렀다
남양주(南楊州) 호평(好坪)
- '호평(好評)' 받는 사업지구 이름으로 적합

◆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평내동(坪內)일원 ◆ 면 적 : 329,000평(1,087,603m2)

* 지명유래

- 호평리(好坪)는 그전 양주군 상도면에 속하였던 마을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분합때 호만리(好滿), 평촌(坪村:벌말)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호평리라 하였으며 미금면(미금읍)에 편입된 곳이다. - 호평은 '호평(好評)'으로도 전달될수 있는 명칭이므로 호감이 가는 사업지구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동두천(東豆川) 생연(生淵)
- '생골'과 '연동'을 합하여 생긴 이름

◆ 위 치 :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지행동(紙杏) 일원 ◆ 면 적 : 183,000평(604,959m2) ◆ 연 혁 : - 양주는 '고구려의 매성(買城)' 또는 '창화군(昌化)'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내소(來蘇)로 고침. - 940년(고려 태조 23) 견주(見州)로 승격되고 1018년(현종 9) 지금의 이름인 양주(楊州)로 고쳐 한양으로 옮김. -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으로 개칭하고 유수관(留守管)을 둠. 1394년(조선 태조 3)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한성부 또는 한양부라 할때 양주고을을 동촌(東村) 대동(大洞)으로 옮김. - 이때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부(府)로 올림. - 1397년(태조 6) 부청을 견주(주내면 고읍리)로 옮기고 양주라 하다가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됨. - 1429년(세종 11) 목(牧)이 되고 진(鎭)을 두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양주 고을을 없애고 그 땅을 비워서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그 나머지 땅을 갈라서 이웃 고을에 나누어 붙임. - 1511년(중종 6) 다시 주로 복구하고 고을을 불국산 남쪽에 세움. - 풍양현은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지명을 당나라식으로 바꿀때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에 딸린 현이 됨. - 940년(고려 태조 23) 풍양(風陽)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양주에 붙였다가 다시 포천에 붙임. - 1427년(세종 9) 다시 양주에 붙였는데 진건, 진접, 별내, 미금, 구리 지역이 됨. - 양주는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시 양주군이 됨. - 1963. 1. 1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 - 1981. 7. 1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됨

* 지명유래

- 동두천(東豆川)은 양주군 이담면(伊淡)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동편내가 머리를 동쪽으로 두르고 흘러 들어오므로 이 내를 동두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 그러므로 원래의 동두천은 동편내, 탑동천, 탑골내라고 부르던 개울로서 탑동 동쪽 국사봉.왕산.해룡산에서 발원하는 내를 뜻한다. - 생연동(生淵)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생골리, 연동리(淵洞)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생연동이 되었다. - 생골리는 그전에 산골이 났던 곳이므로 산골=생골이 되었고 연동은 못골이라 부르던 마을이다. - 지행동(紙杏)은 그전 지동리(紙洞)와 행단(杏丹)마을을 1914년에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지동은 조이골(종이골)이라 하여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었던 곳이며 행단은 은행나무단이 있었다고 한다.
부천(富川) 상동(上洞)
- 옛 석천면의 위쪽이 되는 웃말 지역

◆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 송내동 일원 ◆ 면 적 : 9,433,000평(3,118,347m2)

* 지명유래

- 상동(上洞)은 '웃말'이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부평군 석천면의 위쪽이 되었기 때문이다. - 또 사래리 또는 사랑리(沙浪)라고도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계남면(소사읍)의 상리(上)가 되었고, 1973년 부천시에 편입되어 상동이 된 곳이다. - 인천시와 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생활권이 크게 부천권과 인천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곳이다.
부천(富川) 심곡(深谷)
- '깊은골'이라고 불렀던 골짜기 마을

◆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素砂) 심곡동, 송내동(松內) 일원 ◆ 면 적 : 40,680평(134,479m2) ◆ 연 혁 - 부천시 지역은 백제의 주부토군(主夫吐)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통일신라에서 당나라 식으로 지방제도를 바꿀 때 장제(長堤)로 고침. - 940년(고려 태조 23) 수주(樹州)로 고치고 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둠. - 1005년(목종 8) 단련사를 폐지하고 1018년(현종 9) 지주사(知州事)로 고침. - 1150년(의종 8) 안남(安南) 도호부라 하였다가 1215년 (고종 2) 계양(桂陽) 도호부로 고침. - 1308년(충렬왕 34)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 (충선왕 2) 부평부(富平府)로 됨. - 1413년(조선 태종 13) 다시 도호부가 되고 1438년(세종 20) 현령으로 강등되었다가 1446년(세종 20) 복구됨. - 1505년(연산군 11) 고을 사람이 환관 김순손을 죽였으므로 고을을 없앴다가 그 다음해(1505) 복구됨. - 1685년(숙종 11) 진영을 설치하였고, 1698년(숙종 24)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숙종33) 복구됨. -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부평군이 됨. - 1914. 3. 1 일제의 부군면 폐합에 따라 인천부의 12개면과 남양군의 2개면 등을 합하여 부천군이 됨. - 1973. 7. 1 소사읍 일원이 부천시로 승격됨. - 1975. 10. 1 김포군 오정면이 부친시에 편입됨

* 지명유래

- '부천(富川)'이라는 이름은 1914. 3. 1 전국의 행정구역을 새로 정할 때 이곳 부평군(富平)과 인천부(仁川) 남양군의 일부를 합하고 부천의 '부(富)'와 인천의 '천(川)'자를 취하여 부천군이 되었다. - 소사구(素砂)는 그전 부평군 옥산면 소사리였다가 1899년 경인선 개통때 소사역이 설치된 곳이다. - 본래 '소새'라 불렀다고 하며 모래가 많았으므로 '소사'라 부른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 심곡동(深谷)은 그전 부평군 석천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마을이 깊은 골짜기가 된다하여 깊은 골, 깊은 구지라 불렀으며 이를 훈역하여 심곡동이 되었다. - 송내동(松內)은 '솔안말'이라 부르던 곳이다. 마을이 소나무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며, 부평군 석천면에 속하였던 곳이다
부천(富川) 작동(鵲洞)
- '까치울', '까치말'이라 부르던 곳

◆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梧亭) 작동 일원 ◆ 면 적 : 63,712평(210,618m2)

* 지명유래

- 오정구(梧亭)는 그전 부평군 상오정면(上吾丁)이었다. 그런데 오정(吾丁)→오정(梧亭)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 - 이 지역은 머귀정이, 오동정이라 부르던 곳으로서 오동나무 정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한다면 오정(梧亭)이 바른 표기이다. - 1900년대 이후 지명표기 간소화 바람에 '오(梧)'의 '나무 목(木)'과 정(亭)자의 '정(丁)'만을 살려서 오정(吾丁)이라 하였던 것 같다. - 작동(鵲洞)은 마을 뒤에 까치산이 있으므로 '까치울', '까치말'이라 부르던 곳이며 부평군 상오정면에 속했던 곳이다
부천(富川) 중동(中洞)
- 간뎀, 간데미라고 부르던 중간마을

◆ 위 치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遠美) 중동 일원 ◆ 면 적 : 366,878평(1,212,820m2)

* 지명유래

- '원미구(遠美)'라는 이름은 높이 123.8m의 원미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심곡동과 원미동, 역곡동 경계에 있는데 이 산을 멀미산, 장자미, 둔대산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멀미산의 '멀=원(遠)'의 훈차(訓借)와 미=미(美)를 음차(音借)하여 원미산으로 쓰고 있다. - 중동(中洞)은 그전 부평군 석천면 중리(中里)였고, 동제를 실시 하면서 중동이 되었다. 간데미, 간뎀이라고도 불렀는데 '간데미'는 가운데 즉 중간을 뜻한다
상사도(上四道)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위(북)에 있는 4개 지방을 말한다.



* 지명유래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위(북)에 있는 4개 지방을 말한다. 곧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이 다. 
서울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왕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서나벌...



* 지명유래

서울의 어원에 대해 정확히 밝혀기는 어려운 일이고 지금도 여러 학자가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 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주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에 대해 알아봅시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순우리말인 서울이라는 이름은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여러가지 주장 중에 한가지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왕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서나벌 (徐那伐)이라 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건국 후에 나라 이 름을 서나벌, 서벌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서울인 서나벌 또는 서벌이나 나라 이름인 신라, 시림 등으로 부르는 이 모두 지 금 우리말의 수도를 뜻하는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이라는 말에서 서울의 어원을 찾을 수 았다는 주장도 있습니 다. 서울의 한자 표기가 가능할까? 지금까지 서울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순우리말 이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최근 발견된 『증 보문헌비고』라는 책 신라편에 "여지승람에 후인들이 모든 서울(徐蔚)을 일컬어 서벌(서벌)이 라고 했다가 후에 변하여 서울(徐蔚)로 했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이 처음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 습니다. ※ 증보문헌비고 : 조선 영조 때 정부가 편찬한 전통문화 대백과 사전 
서울 개포(開浦)
- 한강변 갯벌에 있는 마을 '개펄'이 변한 것

◆ 위 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江南) 개포동 일원 ◆ 면 적 : 512,302평(1,693,560m2)

* 지명유래

- 경낙(京洛)과 경사(京師)라는 이름도 서울을 뜻하는 이름인데, 경낙은 낙양을 말하며 경사 역시 낙양을 낙사(洛師)로 표기한 예를 본딴 것이다. - 또 경조(京兆)란 궁성이 있는 도시 곧 서울을 말하며, 경도(京都)는 서울과 도읍지라는 두 가지 뜻이 겹쳐진 이름이다. - 한편 서울을 뜻하는 이름으로 광릉(廣陵)과 수선(首善)이라는 이름도 있다. - 광릉이란 넓고 큰 언덕이란 뜻으로 분지화된 거대한 도읍지를 뜻하며 수선은 교화(敎化)의 시초, 곧 천하에 모범을 세운다는 뜻으로 수도를 '수선지지(首善之地)'라 하는 데서 따온 것이다. - 이 외에도 궁성의 아랫거리를 뜻하는 도하(都下), 도성의 성문 안을 뜻하는 문안, 국왕이 있는 성이라는 뜻의 왕성(王城)등이 있고, 또 고려시대에는 서울의 풍수지리를 논하면서 목멱양(木覓壤) 또는 오덕구(五德丘)라 했던 것도 참고로 밝혀 둔다. - 한양(漢陽)은 한산(漢山:북한산)의 남쪽,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이다.한문표기 지명에서 '양(陽)'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에 붙이는 지명 접미사이기 때문이다. - 한편 '서울'이라는 이름은 순 우리말이므로 한문글자로 표기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이로 인하여 중국, 대만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아직도 서울을 '한성(漢城)'으로 쓰고 있으므로 '서울'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의역(意譯)이 아닌 소리 그대로의 음역(音譯)에 의한 표기방법이 필요하고, 또 발음만이 아닌 좋은 의미도 담길 수 있도록 관계당국과 학계의 충분하고 진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 서울의 강남구(江南)는 한강이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크게 남북으로 나누므로 대개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한다. 강남구는 한강 이남의 전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같다. 본래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新東面)과 광주군 언주면(彦州面)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신동면 지역은 영등포구로, 언주면 지역은 성동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강남구가 신설되었다. 1979년 10월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나누어졌고, 1988년 1월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나누어졌다. - 개포동(開浦)은 한강변에 위치하여 갯벌에 있으므로 '개펄'이라 하던 것이 '개패'로 변하였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소리가 비슷한 글자를 빌려 '개포(開浦)'라 한 것이다
서울 고덕(高德)
- 옛 선비의 높은 덕을 기린다는 뜻

◆ 위 치 : 서울특별시 강동구(江東) 고덕동(高德), 하일동(下一) 일원 ◆ 면 적 : 952,405평(3,148,446m2)

* 지명유래

- 강동구(江東)는 한강의 남쪽, 강남지역에서는 동쪽 끝에 위치하므로 강동구라 하였다. 이 지역은 광주군 구천면(九川面), 중대면(中垈面), 대왕면(大旺面)에 속한 곳이었으며 1963년 1월 성동구에 편입되었다가, 1979년 10월 강남구에서 나누어져 강동구가 신설되었고, 1988년 1월에는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나누어졌다. - 고덕동(高德)은 일명 고더기라고 부르며, 부근에는 고지봉(高志峰)이라는 산이 있다. - 고려 말엽에 형조참의를 지낸 이양중(李養中)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이양중은 '두 임금을 섬길 수가 없다' 하여 이곳에 숨어 살았다. 그 후 왕이 된 태종이 옛 친구의 정을 생각하여 이양중을 한성부윤(府尹) 곧 서울시장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받지 않았으며, 또 태종이 광주(廣州)에 거동하여 그를 부르자 평민 옷차림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임금을 찾아 뵈옵고 밤새도록 서로 술잔을 권하며 옛 우정을 회고하였다고 한다. - 태종은 그의 아들 우생(遇生)을 데려다가 벼슬을 시켜 그의 높은 덕에 보답하였으므로, 이곳을 고덕리(高德里) 또는 고더기라 부르다가 뒤에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고덕동이 되었다. 또 이곳 한강가에 있는 산은 그가 세상을 피하여 은거한 곳이므로, 그의 높은 뜻을 기려 고지봉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 하일동(下一)은 한강으로 흐르는 해천(蟹川) 곧 게내의 아래쪽(동쪽)이 되므로 하일동이라 하였다. 그전 가래울(가래여울), 말우물, 능골, 벌말 등의 마을을 합하여 하일동이 되었고 행정동사무소인 강일동(江一洞)은 '하(下)'자를 '강(江)'자로 바꾼것이다.
서울 문정동(文井洞)
마을에 문씨가 많이 살고 우물물 맛이 좋은데서...



* 지명유래

문정동 동명 유래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 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에 많이 사는 문씨(文氏)성을 따서 문정이라 한데서 비롯되었 다고 하며, 일설에는 이 마을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다 한 다. 또한 문정동은 조선시대에는 문씨들이 문중을 형성하고 거주한 곳으로 주로 문씨가 많이 살던 제집마을(기와집 마을)과 김씨·이씨가 많이 살던 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정동(文井洞)의 옛지역을 보면 두댐이마을 옛날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는 마을 헤경마을 약 백년전에 석씨(昔氏)라는 노인이 길가에 집을 짓고 낮이면 잡화를 팔고, 밤이면 비워두었다 하여 [헛가게 머리]로 불리던 것이 차차 집이 들어서자 이말이 와전되어 헤경머리로 되었다. 
서울 양동(陽洞)
- 우리말의 '볕골'을 뜻하는 이름

◆ 위 치 : (4)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일원(재개발) (5)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일원(재개발) ◆ 면 적 : (4)1,104평(3,650m2) (2)2,637평(8,717m2)

* 지명유래

- 양동(陽洞)은 행정동인 남대문로 5가동에 속한 법정동이었으나 1980. 7. 1 동명을 폐지한 곳이다 - 조선시대에 서부 반석방(盤石坊)에 딸렸고 일제때는 어성정(御成町)이라 불렀으며, 1946. 10. 1 왜식 동명을 바로 잡을 때 그전 이름을 되찾아 양동이라 하였다. - 양동은 우리말의 '볕골'을 뜻하는 한자표기지만 그에 관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큰 이문골, 작은 이문골, 동정골, 못아래골 등이 있었다. - 지형이 벼랑이나 비탈지고 가파른 경우 '볕골' 이라 하고, 이것이 한문의 볕=양(陽)으로 된 경우도 많다.
서울 잠실동(蠶室洞)
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



* 지명유래

잠실동은 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 실이라 불리어졌다. 원래 잠실, 신천지역은 한강의 범람원으로 발달했던 부리도(浮里島)에 위치 했었다는 설과 자양동과 이어진 반도였다는 설이 있다. 잠실섬은 1930년대만 해도 온 섬에 뽕나 무가 무성했으며 1945년 이후 채소밭(땅콩, 우엉, 청참외)으로 변했다가 1971년 잠실섬이 하안 남쪽에 연육(連陸)되는 물막이 공사로 인해 육지로 변했다. 
서울 중계(中溪)
- 중랑천에 인접한 마을중 중간마을

◆ 위 치 : 서울특별시 노원구(蘆原) 중계동, 하계동(下溪), 공릉동 (孔陵) 일원 ◆ 면 적 : 481,767 평(1,592,618m2)

* 지명유래

- 노원구(蘆原)는 그전에 이곳이 갈대만 무성하고 인가가 없어서 행인들이 불편했으므로 나라에서 갈대밭에 원을 세우고 그 뜻을 따서 노원(蘆院)이라 하였다. 그후 양주군 노원(蘆原)면이 되었으나 해등면(海等)과 합하여 노해면(蘆海)이 되었고, 1963년 1월 성북구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나누어질 때 도봉구에 속하였으며, 1988년 1월 도봉구에서 나누어져 노원구가 신설되었다. - 중계동(中溪)과 하계동(下溪)은 의정부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중랑천(中浪川:'중량천'임에도 중랑천으로 바뀌고 말았다)에 인접하여 위에서부터 차례로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이라 하였다. - 공릉동(孔陵)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에 속한 곳으로 공덕(孔德)굴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곳에 조선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강릉(康陵)과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의 능인 태릉(泰陵)이 있으므로 공덕굴의 공(孔)자에 릉(陵)자를 합해 공릉동이라 하였다. - 이곳에 육군사관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교내에는 육군박물관이 설치되어 있다. 또 국제종합사격장이 있어서 총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이것은 문정왕후가 여왕처럼 군림하여 조정에 피바람 그칠 날이 없었던 그녀의 생애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주위에 태릉 푸른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서울 풍납동(風納洞)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풍납리로 불리어...



* 지명유래

풍납동은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풍납리로 불 리어지게 되었다. 풍납동의 자연부락 명칭을 살펴보면 웃바람드리(上風納里) 천호대로 주변 일대와 극동시티아파트가 있는 일대 아랫바람드리(下風納里) 웃바람드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자벌말 현재 풍납동 152-154 일대로 벌판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 낮은 산목에 있다하여 흐리목 또는 흘리향(屹里項)이라고 불리었다. 
성남(城南) 분당(盆唐)
- 그전 '동이점'과 '당모루' 마을의 머리글자

◆ 위 치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등 ◆ 면 적 : 5,940,864평(19,639,220m2) ◆ 연 혁 - 성남시 지역은 광주군에서 분리 독립한 지역임. - 광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50여국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에 속하였던 것으로 봄. - 백제의 남한산성과 그 인접지역에 해당함. - 371년(근초고왕 26) 도읍을 남평양성(서울)으로 옮김.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산성이 함락되고 이 지역은 고구려 지배에 들어감. - 551년 백제 성왕이 한강유역을 되찾았으나 2년만에 동맹국인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차지함. - 553년(진흥왕 14) 한산성에 신주를 두었고 그 다스리는 터를 광주(廣州)에 둠. - 670년(문무왕 10) 한산주를 남한산주로 고쳐 부름. - 757년(경덕왕 16) 남한산주→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침. - 940년(고려 태조 23) 한주를 광주(廣州)로 바꾸었으며,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광주목이 됨. - 995년(성종 12) 광주에 봉국군(奉國軍) 절도사를 둠. - 1413년(조선 태종 13) 지방제도 개편때 전국 20목의 하나인 광주목이 됨. - 그 후 광주 지역은 도호부, 광주유수, 광주부 등으로 바뀌기를 거듭하다가 구한말에 광주군이 됨. - 1971. 10. 14 서울시내 무허가건물 일소대책에 의한 철거민 이주지로서의 광주대단지가 '성남단지'로 바뀜. - 1973. 7. 1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됨 - 1989. 4. 27 분당신도시 건설계획 발표(분당 일대 540만평에 10만 5천호. 42만명 상주인구의 신도시 건설) - 1991. 9. 17 성남시에 분당구를 설치함

* 지명유래

- 분당(盆唐)지역이 속했던 광주(廣州)는 이미 서기 940년경에 '광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곳이다. - 혁거세왕이 거세(居世)=누리지왕이듯이, 유리왕=누리왕, 위례성= 누리성=누리잦으로 풀이하고 있다. - 그러므로 '광주(廣州)'나 '광나루'라는 이름도 광(廣=너른 나루=누릿나루=광진(廣津)으로 보며, 광주=누릿골로 풀이하고 있다. - 이와 함께 온조왕=온누리=광(廣)=백제(白濟)로 보며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赫居世=弗炬內=弩禮=儒理=儒禮(新羅系), 瑠璃=儒留=類利=琉璃=慰禮(尉那)=廣(津)=廣州=百濟(온제)=溫祚(高句麗, 百濟系)로 볼 수 있으며 이것들의 뜻은 누리, 온누리, 밝은 누리로 풀이한다.4) - 성남(城南)이라는 이름은 남한산성의 남쪽을 뜻하는 이름이며, 성내미, 성나미라고도 불렀으므로 '남한산성 너머'의 뜻으로도 보고 있다. 빛나는 정자 높이 한강 물가에 임하니 성남(城南)지척 사이에 홍진이 막혔구나. 목란주를 달밤에 띄우니 연기는 개울에 비끼고… (원문생략) 이글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누정조의 이문형(李文炯: ?~1466)의 『압구정기』에 나오는 '성남'에 관한 내용이다. - 분당(盆唐)지역은 원래 분점(盆店:동이점)과 당우리(堂隅里:당모루) 마을로 되어 있었던 곳인데 1906년 당우리(堂隅里)가 당우리(唐隅里)로 바뀌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 분점+당우리의 머리 글자를 따서 분당리(盆唐里)가 된 곳이다. - 그러므로 분당의 '당(唐)'자는 '집 당(堂)'자로 바로 잡아야 하며 '당나라 당(唐)'자는 의미없는 글자이다
수원(水原) 구운(九雲)
- 아홉마리 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한 곳

◆ 위 치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勸善) 구운동, 서둔동(西屯) 일원 ◆ 면 적 : 160,766평(531,458m2)

* 지명유래

- 구운동(九雲)은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지만 그와는 관련이 없는 곳이다. - 이 일대는 상구운돌(上九雲乭)과 하구운돌로 나누어져 있었던 곳이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일형면 구운리가 된 곳이다. - 전설에는 머리가 아홉인 용이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였으므로 그 산을 청룡산이라 하고 마을은 구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서둔동(西屯)은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고 그 서쪽에 축만제라는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그 물을 이용하여 둔전(屯田)에 농사를 짓게 하였으므로 이를 서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수원(水原) 권선(勸善)
- 고려 학자 이고의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기리는 곳

◆ 위 치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일원 ◆ 면 적 : 726,941평(2,403,111m2) ◆ 연 혁 - 수원은 삼한시대에 마한 50여국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 지역으로 봄. -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매홀군(買忽)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수성(水城)으로 고침. - 고려 태조가 남쪽의 견훤을 공격할 때 이 고을의 김칠, 최승규, 등 200여명이 귀순하여 공이 있으므로 918년 수주(水州)로 승격함. - 1018년(고려 현종 9) 지주사(知州事)를 두었고, 1217년(원종 12) 수원도호부가 설치되었다가 수주목으로 승격됨. - 1310(충선왕 2) 모든 목을 혁파함에 따라 수원부가 됨. - 1362(공민왕 11) 홍건적이 선봉을 보내 항복을 권유할 때 이 고을이 먼저 항복하였으므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고을 사람들이 재상 김용에게 뇌물을 주어 다시 부(府)가 됨. - 1413년(조선 태종 13) 도호부가 되고 세조때 진을 두었으며, 또 판관을 두고 한성을 지키는 사보(四輔)의 하나가 되어 군대가 주둔함. - 1526년(중종 21) 고을 백성이 제 부모를 죽인자가 있으므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535년(중종 30)에 복구됨. - 1789년(정조 13) 7월 현륭원(顯隆園:사도세자의 묘=서울 배봉산)을 수원에 옮기기로 정하고 수원고을을 지금의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옮기는 한편 유수(留守)를 둠. - 1794년부터 2년여에 걸쳐서 수원에 화성(華城) 성곽을 축성하고 행궁 등을 건축함. - 1820년(순조 2) 수원에 총리사(摠理使)를 둠. - 1895년(고종 32년) 갑오경장에 따라 지방관제가 개정되어 수원군이 됨. - 1931. 4. 1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됨. - 1949. 8. 15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됨. - 1988. 7. 1 장안구와 권선구를 설치함. - 1993. 2. 1 팔달구를 설치함

* 지명유래

- 수원(水原)의 옛 이름인 모수국의 '모(牟)'와 매홀군의 '매(買)'는 모두 물(水)를 나타내는 옛말이다. 무, 매, 미가 모두 물을 나타내는데 미나리(물나리), 무좀, 무소, 등이 그 예이다. 이진매(伊珍買)→이천, 어사매(於斯買)→횡천의 경우 '매'가 물을 뜻하는 천(川)과 대응하여 쓰였다. - 그 후의 수성(水城), 수주(水州) 등이 모두 '물골' 또는 '물펄'을 뜻하는데, 옛부터 수원에서 우물이 없는 집은 흉가라고 할만큼 물이 흔한 곳이었고, 지금도 광교저수지, 일월저수지, 원천저수지, 서호 등 항상 물이 풍부한 곳이므로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알 수 있다. - 한편 '화성(華成)'이라는 이름은 정조때부터 부르게 된 이름이다. 『정조실록』에는 "현륭원(사도세자묘)이 있는 곳이 화성(花成')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옛날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임금에게 세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成)이라 하였는데 '화'(華)자와 '화(花)'자는 서로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개의 봉우리가 이 한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라 마치 꽃송이 같다하여 이른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화봉인이 요임금에게 세가지를 축원한 내용은 이렇다. "축원하오니 오래사십시오"하니 요임금이 "싫다"하였다. 이어서 화봉인이 요임금에게 "부자가 되십시오"하니 요임금은 다시 "싫다"하였다. 이어서 화봉인이 "자손을 많이 두십시오"하니 요임금이 역시 "싫다"하였다. 그러자 화봉인이 수(壽) 부(富) 다남(多男)은 모든 인간이 바라는 바인데 혼자서 싫다고 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요임금이 말하기를 "다남은 걱정이 많고, 부는 일이 많으며, 수는 욕됨이 많다. 따라서 이 세가지는 덕을 기르는 소이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 한편 '화성'의 이름이 붙게된 화성(花成)의 '화(花)'는 바다로 지형이 돌출한 '곶(cape)'을 뜻하며 곶=꽃=화(花)로 된 것이다. 화성군 해안에는 '화'자가 들어간 지명이 10여개소인데, 대부분 '곶(cape)'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 권선구(勸善)와 권선동은 이곳에 살았던 고려말 한림학사 이고(李皐)에 의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그는 벼슬을 내놓고 이곳에 와서 후진들에게 어질고 선하게 살 것을 가르쳤으므로 그의 뜻을 따서 '권선리'라 불렀던 곳이다. 
수원(水原) 매탄(梅灘)
- 매봉에서 흘러내린 '매여울'이 매탄

◆ 위 치 : (1)경기도 수원시 팔달구(八達) 매탄동 일원 (2)상동 ◆ 면 적 : (1)288,715평(954,430m2) (2)231,394평(764,939m2)

* 지명유래

- 팔달구(八達)의 '팔달'이란 팔방으로 통하다는 뜻과 함께 막힘이 없다거나 정통한 경우에 쓰는 말이며 '사통팔달'이라고도 한다. - '팔달구'라는 이름은 수원의 진산인 팔달산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이고(수원 권선지구 참조)가 수원의 광교산 남쪽 이 산 밑에 내려와 살았다. - 그는 세상 일을 다 잊어버린다는 뜻에서 호를 망천(忘川)이라 하였고, 연못에서 고기를 낚거나 망천에 나가 송산 조윤(趙胤:성남시 청계산 망경대), 둔촌 이집(李集:서울 둔촌동) 등 8학사와 벗하며 세상을 잊고 소요하며 살았다. - 이때 공양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일에는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느냐'를 물으니, '집 뒤에 있는 탑산의 경치가 무한히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 즐겁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이고의 경륜과 어진 심성을 알고 경기우도접겸사(京畿右道接兼使)에 임명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누차 권고했으나 끝내 나서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화공을 시켜 이고가 살고 있는 탑산을 그려오라 하였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고는 '역시 아름다운 산'이라 크게 감탄하고 산 이름을 '팔달산'이라 지어 불렀다고 한다.5) - 매탄동(梅灘)은 '매여울'이라 부르던 개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매교동과 매탄동 경계의 매봉에서 시작된 물줄기를 '매여울'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수원(水原) 영통(靈通)
-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 위 치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영통동 일원 ◆ 면 적 : 986,307평(3,260,519m2)

* 지명유래

- 영통동(靈通)은 본래 지형이 염통처럼 생겨서 염통골, 또는 영통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 혹은 이 지역이 '영(靈)과 통(通)하는 곳'이라 하여 영통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안영통에서 뒷골로 넘어가는 구렁굴 고개에 신령스런 노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설, 근처의 청명산에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보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6) - 본래 수원부 장주면에 속하는 곳이며 1914년의 대개편때 화성군 태장면이 되었고, 1994. 12. 26 수원시에 편입된 곳이다.
수원(水原) 원천(遠川)
- 수원고을에서 멀어 먼내, 머내라 부른 곳

◆ 위 치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八達) 원천동, 매탄동(梅灘) 일원 ◆ 면 적 : 125,428평(414,638m2)

* 지명유래

- 원천동(遠川)은 우리 말의 '먼내' 또는 '머내'를 한자화한 이름이다. 이 지역이 수원고을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본래 수원부 장주면에 속하였다가 1914. 4. 1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태장면 원천리가 되었고 1963. 1. 1 수원시에 편입된 곳이다
수원(水原) 천천(泉川)
- 큰 샘이 흘러내려 내를 이룬 곳

◆ 위 치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 일원 ◆ 면 적 : 75,000평(247,934m2)

* 지명유래

- 천천동(泉川)은 이곳에 큰 샘이 있어서 샘물이 내를 이루어 서호천으로 흘러들어 갔으므로 샘내→천천(泉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몇가지 설이 있다. - 첫째는 큰 샘[泉]이 있어서 그 물이 흘러내려 내[川]를 이루었기 때문에 샘내, 또는 천천(泉川)이라 부른다고 한다. 동네안에 상보(上堡), 중보(中堡), 하보(下堡)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샘이 끊이지 않고 솟아나와 내를 이루어 흘러 내려서 식수는 물론 농업 용수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옛 사람들은 샘 '천(泉)'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천천리라고 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도 세 개 우물 가운데 상보는 마을 동쪽에 그 실체가 있고 중보와 하보는 농지 정리로 없어졌다고 한다. - 둘째는 길가에 큰 샘이 있어서 샘내 마을이라고 했다. 길가에 큰 샘이 있었는데 다른 물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고 물맛이 아주 좋아 정조 대왕이 화산릉에 행차를 할때 이 물을 떠다가 지지대 고개에 놓아두면 행차 행렬이 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현재는 택지로 개발되어 샘내 마을이라 불리는 아파트촌이 형성되어 있다. - 셋째 샘내는 '싯내'가 변한 것이다. 샘내는 원래 '싯내'였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싯내의 '싯'은 골짜기의 옛말로서 '골짜기 사이의 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원(水原) 파장(芭長)
- 1796년 화성 신도시건설때 '파동'이라 한 곳

◆ 위 치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長安) 파장동, 송죽동(松竹) 일원 ◆ 면 적: 10,071평(33,293m2)

* 지명유래

-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은 '서울장안' '장안의 명소'라는 말처럼 한나라의 도읍지를 뜻한다. - 본래 장안이란 중국에서 주(周)나라 이래 진, 전한, 수, 당 등의 수도 이름으로 쓰이면서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 수원에 화성을 축성한 정조임금은 화성의 북쪽문을 장안문(長安門)이라 하여 조선의 주체적 영화를 재현하려는 의지를 담았던 것이며 이 문의 남서쪽 지역을 장안동이라 하였고 구(區)의 명칭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 파장동(芭長)은 1796년 정조의 화성 신도시 건설때 북부 14개동의 하나인 파동(芭洞)이었다가 그후 파장동이 되었는데 저간의 사정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송죽동(松竹)은 1899년의 『수원군읍지』에 대송죽리(大松竹里)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지역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서 '솔대'라 불렀기 대문이다. - 흔히 '송죽매(松竹梅)'라 하여 이들을 '세한삼우(歲寒三友)'라고 하는데 추위를 견디어 내는 고절한 성품을 지닌 것으로 보며 선비의 지조, 여인 정절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천(仁川) 가좌(佳佐)
- 가재 많은 곳이 아니라 '가재이'를 뜻함

◆ 위 치 :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일원 ◆ 면 적 : 94,180평(311,339m2)

* 지명유래

- 가좌동(佳佐)은 그전 부평군 석곶면에 속하였던 곳이며 가재울 또는 가좌리라 한 곳이다. -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천대전정이라 하다가 해방후 다시 가좌동이 된 곳이다. - 이곳은 가재라 많아서'가좌리'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대개 들 가장자리, 강가의 마을을 갓(변두리)이라는 뜻에서 '가재이' '가재울'이라 하며, 이를 한자로 쓸 때 '가좌동'으로 된 곳이다.
인천(仁川) 갈산(葛山)
- 산, 강, 길 등이 갈라지는 곳에 붙는 이름

◆ 위 치 : 인천광역시 부평구(富平) 갈산동 일원 ◆ 면 적 : 199,569평(71,147m2)

* 지명유래

- 갈산동(葛山)은 그전에 갈울, 갈월(葛月) 또는 갈산이라 부르던 곳으로서 '갈월리'로 표기된 곳이다. -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길야정(吉野町)이라 하였고, 해방후 갈산동으로 고쳐졌다. - 토착어 지명의 '갈'은 산줄기가 갈라지는 곳, 강이나 큰 길이 나누어지는 곳 등에 붙는데, 이 갈에 '칡 갈(葛)'자 또는 '목마를 갈(渴)'자 등을 음차(音借)한 경우가 많다.
인천(仁川) 계산(桂山)
- 인조 임금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

◆ 위 치 : 인천 광역시 계양구(桂陽) 계산동 일원 ◆ 면 적 : 649,999평(2,148,757m2)

* 지명유래

- 이 지역은 그전 부평군에 속한 지역 (연혁은 인천 부평지구 참조) 이었으나 1940. 4. 1 인천부에 편입된 곳이다. - 계산동(桂山)은 그전 부평군 부내면에 속한 곳으로서 부평도호부가 있었으므로 이 지역을 부평구읍, 부평읍이라 하였다. - '계산동'이라는 이름은 김포와 경계에 있는 높이 396m의 계양산(桂陽山)에서 비롯된 이름으로서 부평도호부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산)에서 따온 것이다. - 계산동 162번지에는 그전 부평도호부 청사가 일부 남아 있으며, 부평고을의 사직단, 부평향교가 있었다. - 계산동 주막거리에 있는 욕은지(浴恩池)는 조선 인조가 장릉에 갈 때 이곳에서 목욕재계하였던 못이므로 '욕은지'라고 하며, 그 동쪽에는 그때 인조가 활을 쏘았다는 어사대(御射臺)가 있다.
인천(仁川) 계양(桂陽)
- 옛 부평고을 수호산인 계양산 있는 곳

◆ 위 치 : 인천 광역시 계양구 계양동 일원 ◆ 면 적 : 49,221평(16,268m2)

* 지명유래

- '인천'은 인천 항동지구 참조 - 계양구(桂陽)는 이곳에 높이 396m의 계양산이 있어서 산 이름을 딴 것인데, '계(桂)'란 계수나무 또는 달을 뜻한다. - 옛 부평도호부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산) 인 계양산에는 삼한시대에 쌓았다는 산성이 남아 있고 만일사(萬日寺)터, 명월사(明月寺)터 등이 있다. … 어떤 사람이 이름지어 명월이라 하였는고. 달을 가져 마음을 깨끗이 하려 함인가. 혹시 달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던가 … 이것은 고려때 이규보가 명월사에서 쓴 시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 이 산이 있어서 옛날 부평고을의 별호가 '계양'이며, 『계양관기(桂陽管記)』라는 기록도 있다 - 한편 계산동에는 고려때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정자가 있었다는 자오당터(自娛堂)가 있고, 또 부평고을의 귀양지로 중봉 조헌(趙憲)선생이 귀양살이를 하였다는 고양골(귀양골)도 있다.
인천(仁川) 구월(九月)
- 아사달'에서 비롯된 이름일 수도 있다

◆ 위 치 : 인천광역시 남동구(南洞) 구월동, 남구 관교동(官校), 주안동 (朱安) 일원 ◆ 면 적 : 378,962평(1,252,767m2)

* 지명유래

- '인천'은 인천 항동지구, '남동'은 인천 남촌지구 참조 - 구월동(九月)은 그전 인천부 주안면(朱雁) 구월리였던 곳이며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개편때는 부천군 다주면(多朱) 구월리였다가 1936년 인천부에 편입된 후 구월동이 된 곳이다. - 본래 땅이 질어서 구리울, 구울이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표기 하면서 '구월'이 된 것이라고 한다. - 그러나 국조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운 아사달(阿斯達)에 대하여 앗달→아홉달→구월산(황해도)으로 보기도 하는데, 아사달과 같은 말의 한 갈래로 볼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것은 구월동의 백석말이 '박달'(백=박, 석=돌→달)의 다른 이름으로 볼수 있고, 옛날 성이 있었다는 성동(城洞:성말) 등이 있어서 비류의 미추홀 건국과 함께 아득한 옛 역사를 떠올릴수 있기 때문이다. - 아사달의 '아사'는 아침(朝), 아이, 아시(처음) 등의 뜻을 가진 말로서 '달'이 땅을 뜻하므로 처음의 땅, 시작의 땅으로 풀이하고 있다. - 남구 관교동(官校)은 그전에 인천부내, 인천읍내라고 부르던 곳이다. 이곳에 인천도호부청이 있어서 관청말이라 하였고, 여기에 향교말을 합하고 '관'자와 향교말의 '교'자를 합한 이름이다. - 주안동(朱安)은 그전에 주안(朱岸) 또는 주안(朱雁)으로 표기한 경우가 있는 데 근래의 표기는 주안(朱岸)이었고 다시 1914년을 전후하여 쓰기 쉽고 뜻이 좋은 주안(朱安)으로 바뀐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안산(朱雁山)과 주안사라는 절이 나오는데 글자 그대로 '붉은 기러기'를 뜻하는 것인지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인천(仁川) 남동(南洞)
- 중국 가는 사신들이 모여 의논하던 곳

◆ 위 치 : (1)인천광역시 남동구 고잔동(古棧) 일원 (2)인천광역시 남동구 고잔동, 논현동(論峴)등 일원 ◆ 면 적 : (1)802,777평(2,653,808m2) (2)2,072,331평(6,850,681m2)

* 지명유래

- 고잔동(古棧)은 그전 인천부 남촌면 고잔리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남동면 고잔리가 되었다가 인천시에 편입되어 고잔동이 된 곳이다. - '고잔'이라는 이름은 지형이 바다나 강쪽으로 돌출한 반도를 '곶'(串) 또는 '갑(岬)'이라 하는데 그 안쪽을 곶의 안→곶안→고잔으로 된 것이다. - 논현동(論峴)에 대하여는 서울의 논현동처럼 고개에 논이 있어서 '논고개'라 하고, 이곳이 논현동으로 표기 되었다는 설이 있다. - 또 옛날 중국으로 떠나던 사신들이 송도 능허대나 사모지 고개를 넘어서 고잔동 해안에서 배를 탔는데, 이때 망망한 황해바다를 바라보며, 일행들이 서로 의논하던 곳이므로 논현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인천(仁川) 남촌(南村)
-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

◆ 위 치 : 인천 광역시 남동구(南洞) 남촌동 일원 ◆ 면 적 : 25,000평(82,645m2)

* 지명유래

- 인천시 남동구(南洞)의 '남동'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새로 생긴 이름으로서 그전 인천부의 남촌면(南村)과 조동면(鳥洞)을 합하고, 여기서 '남(南)'자와 '동(洞)'자를 취하여 남동면이 되었다. - 그후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었고, 1988. 1. 1 남동구로 승격된 곳이다 - 남촌동(南村)은 남동구의 모태라 할 수 있으며 '남(南)'자를 남동구에 빌려준 이름이다. - 이곳은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우골(臥牛), 왯골, 와우동이라 하였던 곳이며, 옛 인천부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남촌'이라 한 곳이다. - '산너머 남촌'을 뜻하는 이름으로서 농촌 생활을 연상할 수 있는 정감있는 이름이다.
인천(仁川) 마전(麻田)
- 그전 김포에서 '삼바지'라고 부르던 곳

◆ 위 치 : 인천광역시 서구 마전동, 왕길동(旺吉), 금곡동(金谷) 일원 ◆ 면 적 : 68,478평(226,374m2)

* 지명유래

- 1995. 3. 1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광역시 서구에 편입되었다. - 마전동(麻田)은 그전 김포군 검단면에 속한 곳으로서 '삼바지'라 부르던 곳인데 삼=마(麻), 바지(밭)=전(田)으로 훈역된 곳이다. - 왕길동(旺吉)은 그전에 외리라고 부르던 곳이며 '왕길'이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그 내력을 알수 없으나 마을의 운세가 길하고 왕성하기를 기원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얼핏 '홍길동'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 금곡동(金谷)은 쇳골이라 부르던 곳이므로 '금곡동'으로 표기된 곳이다. 그전에 쇠를 캐냈던 곳이라고도 하고 혹은 김생골에 김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인천(仁川) 부개(富開)
- 부개'는 풍요로움이 처음 시작되는 곳

◆ 위 치 : 인천광역시 부평구(富平) 부개동 일원 ◆ 면 적 : 21,522평

* 지명유래

- 부개동(富開)은 부개동과 일신동 경계에 복개봉(覆蓋峰)이 있어서 '부개봉'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를 따서 '부개동'이라 하였다 (부:覆→富로 고쳤다) - 부개동은 그전에 말무덤(큰무덤)이 있어서 마분리(馬墳)라고 하였고,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된후 명치정(明治町)이 되었다가 해방후 부개동이 된 곳이다. - 실제의 명칭이야 어떻든지 '부개(富開)'는 풍요로움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어서 사업지구 명칭으로 어울리는 이름이다.
인천(仁川) 부평(富平)
- 넓은 땅이 풍요로운 들판 되었다는 뜻

◆ 위 치 :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갈산동(葛山) 일원 ◆ 면 적 : 104,675평(346,033m2) ◆ 연 혁 : - 부평지구는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장제군(長堤)이 됨. - 940년(고려 태조 23) 수주(樹州)로 고쳤으며 995년 (성종 14) 단련사를 둠. - 1005년(목종 8) 이를 폐지 하였다가 1018년 (현종 9) 지주사를 둠. - 1150년(의종 4) 안남도호부로 고쳤으며 1215년(고종 2) 계양도호부로 고침. - 1308년(충렬왕 34)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고 1310년(충선왕 2) 부평부로 강등됨. - 1413년(조선 태종 13) 다시 도호부가 되었고 1438년(세종 20) 온천지역임에도 이를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현으로 낮추어졌고, 1446년(세종 28)다시 복구됨. - 1505년(연산군 11) 부평 출신 환관 김순손이 살인한 사건이 있어 도호부를 혁파하였다가, 1506년(중종 원년) 복구됨. - 1698년(숙종 24) 장릉에 방화한 죄인 최필성의 태읍(胎邑)이라 하여 현으로 낮추었다가 1707년(숙종 33)복구됨. - 198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 개정시 부평군이 되었으며 1914. 3. 1 인천의 일부와 부평군을 합하여 부천군이 만들어짐. - 1995. 3. 1 북구를 부평구로 이름을 바꾸고 계양구를 분리함.

* 지명유래

- 부평(富平)의 옛 이름인 '주부토'에 대하여는 두 설이 있는데, '줄보뚝'이라는 뜻으로서 부평평야에 뚝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이것은 주부토(主夫吐)=장제(長堤)를 해석하는데 유력하다. - 이에 대하여 주부토의 '주(主)'를 님으로 보고, '토(吐)'는 터로서 '님터'(고을터, 도읍지)로 풀이하는데, 그후의 이름인 수주(樹州)의 '수'=나무=남과 님이 서로 변전(變轉)하는 것으로 본다. - 또 부평(富平)이라는 이름은 넓은 땅을 개척하여 풍요로운 들판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풀이한다.
인천(仁川) 연수(延壽)
- 모두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들이다.

◆ 위 치 : 인천 광역시 연수구 연수동, 동춘동(東春), 선학동(仙鶴), 청학동(靑鶴) 일원 ◆ 면 적 : 1,856,078평(6,135,795m2)

* 지명유래

- 연수동(延壽) 부근에는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장수동(長壽), 수산동(壽山), 만수산(萬壽山) 등의 이름이 분포하고 있다. - 연수동의 '연수(延壽)'라는 이름도 수명이 연장되는 것, 장수를 뜻하는 이름으로서 그전에 부천군 문학면 연수리였던 곳이다. - 또 부근의 선학동(仙鶴), 청학동(靑鶴)의 '학' 역시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서 장수하는 새이므로 '연수'라는 이름과 뜻이 통한다. - 동춘동(東春)은 본래 마을이 청량산 동쪽에 있어서 동촌(東村)이라 불렀는데, '동춘'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이 명칭도 '춘(春)'=봄(젊음)을 뜻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이다. - 청학동(靑鶴)은 지리산의 도인촌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청량산 밑 청릉(靑陵)마을과 문학산(文鶴山)에서 '청'과 '학'자를 취하여 청학동이 된 곳이다. - 사업지구의 명칭과 지구내의 땅이름이 모두 장수와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장수촌(長壽村)'으로 홍보할 수 있는 곳이다.
인천(仁川) 항동(港洞)
- 개항되어 부두가 된 곳

◆ 위 치 :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일원 ◆ 면 적 : 28,143평(93,035m2)

* 지명유래

- 인천은 백제의 미추홀국(彌鄒忽國)인데, 뒤에 고구려에서 매소(조) 홀현(買召忽)이라 함 (비류가 미추왕국을 세웠다고 함). - 757년(경덕왕 16) 신라에서 소성(邵城)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과천)에 딸린 현이 됨. - 1018년(고려 현종 9) 수주군(부평)의 속현이 됨. - 고려 숙종때 (1096-1105) 문종의 왕비 인예(仁睿)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경원군(慶源)이 됨. - 고려 인종(仁宗)때 (1123-1146) 그 어머니 순덕(順德)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고치고 지주사를(知州事) 둠. - 1390년(공양왕 2) 7대 임금(문종~인종)의 고향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됨. - 1392년(조선 태조 원년) 인주(仁州)로 강등되었고, 1413년(태종 13) 지금의 이름인 인천군(仁川)이 됨. - 1460년(세조 6)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어머니(심온의 부인)고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됨. - 1526년(중종 21) 수원진을 이곳으로 옮김. - 1688년(숙종 14) 요망한 중으로 역적 여환(呂還)이 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97년(숙종 34)군으로 복구됨. - 1883년(고종 20) 개항되면서 인천감리서가 설치되고 감리가 부사를 겸직함. - 1895년 (고종 32) 갑오경장의 지방관제 개정으로 인천관찰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감리서가 됨. - 1896년 인천군이 되었고 1897년 경인철도공사에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좋은 땅은 그들이 차지하였고, 여러 개의 일인촌과 일본식 지명이 생겨남. - 1914. 4. 1 인천부와 부평군을 병합하여 부천군이 됨. - 1936?1940 부천군 일부가 인천부에 편입됨. - 1981. 7. 1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인천직할시로 됨. - 1988. 1. 1 남구에서 남동구가 분리됨. - 1995. 1. 1 인천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개편됨. - 1995. 3. 1 인천 북구가 부평구로 명칭변경됨. 이때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시에 편입됨.

 

 

* 강원도

 

강릉(江陵) 내곡(內谷)
- 골짜기 안쪽을 뜻하는 '안골'

◆ 위 치 :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일원 ◆ 면 적 : 20,090평(66,413m2) 

* 지명유래

- '내곡(內谷)'은 우리말의 '안골'에 대한 한문표기이다. - 이 지역이 골짜기 안쪽이 되므로 '안골' 또는 내곡이라 하였다. - 처음에는 강릉군 남이리면이었다가 1914년 성남면에 편입되었고, 다시 1920년에는 성덕면이 되었으며, 1955년 강릉시제 실시에 따라 내곡동이 되었다. - 보물 제37호로 지정된 신복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신라때의 절터와 그 유적이 있다
강릉(江陵) 노암(魯岩)
- '노암'은 노산군(단종)이나 공자의 노나라를 뜻함

◆ 위 치 : 강원도 강릉시 노암동 일원 ◆ 면 적 : 19,935평(65,901m2) ◆ 연 혁 - 강릉지방은 부족국가 시대에 예국(濊國) 또는 철국(鐵國)의 땅이었다고 하며 B.C. 128년 한무제때 창해군(滄海郡)이 되었다가 B.C. 108년 한무제가 우거를 토벌하고 한사군을 정할 때 임둔(臨屯)이라 하였음(이설이 있다) - 고구려때 하서량(河西良), 아슬라(阿瑟羅) 또는 하슬라(何瑟羅)라 하여 주를 두었으며 639년 신라 선덕여왕때 이곳에 소경(小京)을 두고 사신(仕臣)을 배치함. - 658년 태종무열왕 때 말갈과 가까우므로 주(州)를 만들고 도독(군주)를 두어 지키게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통일신라에서 명주(溟洲)로 고쳤음. - 776년(혜공왕 12) 다시 소경을 두었고 936년(고려 태조 19) 동원경(凍原京) 이라 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움. - 1940년(태조 23) 다시 명주로 고쳤으며, 983년(성종 2) 하서부(河西府)라 하다가 명주도독부로 함. - 992년(성종 11) 목(牧)을 두었다가 단련사→방어사로 바꿈. - 1036년(정종 2) 고려에서 5도 양계제도를 실시할 때 동계(東界)가 됨. - 1178년(명종 8) 연해명주도라 하였다가 1260년(원종원년) 공신 김흥취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로 승격시킴. - 1263년(원종 4) 강릉도(도)라 하였고, 1308년(충열왕 34) 강릉부(府)로 고침. - 1356년(공민왕 5) 강릉삭방도라 하였다가 1389년(공양왕 원년) 강릉대도호부로 승격됨. - 1666년 (조선 현종 7) 강릉에 옥지라는 여자가 시아버지의 못된 질병이 자식에 옮길까 두려워 부친을 생매장한 죄로 강릉 삭방도를 원양도(原壤道)로 고침. - 숙종때 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1782년(정조 6) 역적 이택징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현감으로 낮추고 강릉삭방도를 원춘도(原春道)로 고침 - 그후 몇번의 개편이 있은 후 1896년 군(郡)이 됨. - 1916년 군내면(郡內面)이 강릉면이 되었고, 1931. 4. 1강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55. 9. 1 강릉읍이 강릉시로 승격되고 강릉군이 명주군으로 됨. - 1995. 1. 1 강릉시와 명주군이 통합되어 강릉시가 됨

* 지명유래

- 강릉(江陵)은 별호로 예국(濊國), 임둔, 하슬라, 하서량, 명주, 동원, 임영, 동온(東溫), 창해, 경흥, 명원(溟源), 철국, 예국(蘂國), 도원경(桃源京), 북빈경(北濱京)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 동원경(東原京)의 '동(東)'은 새(예:샛바람=동풍)이며, '예국'의 '예(濊)'가 곧 '새'로 읽었을 것으로 본다. 또 '철국'의 '철(鐵)'도 쇠이며 '원(原)'은 '벌', '불' 로서 쇠벌→서불→서울을 뜻한다. - 옛 이름 '하서' '하슬'은 임금의 고어이거나 큰 바다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등 이설이 있으며, 수려한 산과 바다를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 '창해'는 진시황을 박랑사에서 철퇴로 죽이려 하였던 창해역사 여강중이 바로 강릉출신이라고 하며 강릉지방의 민담에는 그에 관하여 구전되는 이야기가 많다. - '강릉'이라는 이름은 중국에도 있으며 우리나라 지명중에는 광주(廣州), 한양(漢陽), 호남(湖南), 강릉 등과 같이 중국의 이름을 본딴 경우도 많다. - 노암동(魯岩洞)은 그전 남이리면에 딸린 마을로서 노가니 또는 노간리(魯間里)라고 부르던 곳이다. 본래 너레바우가 있어서 너레바웃골이라고도 하였으며 노간리+너레 바웃골을 합하여 노암동이 된 것이다. '너레바우'는 넓은 바위를 뜻하는 지역방언이다. - 노간리는 이 마을의 냇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이 중국 노나라의 냇물과 같으므로 '노간리'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노나라 보다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임금이 서쪽(서울)에서 동쪽(영월)으로 귀양갔는데, 그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 우리나라의 '노(魯)'자가 들어간 이름은 대개 쫓겨난 조선조 임금 단종을 추모하여 붙였거나,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강릉(江陵) 포남(浦南)
- '포남'은 경포대 남쪽을 뜻하는 이름

◆ 위 치 :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 일원 ◆ 면 적 : 57,288평(189,382m2) 

* 지명유래

- 그전 강릉군 북일리면에 딸린 지역이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때 남일리면의 일부를 합하고 군내면(강릉읍)에 편입되었다. - 1955년 강릉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포남동이 되었다. - '포남(浦南)'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여 바닷가의 '개앞'으로 볼수도 있으나 강릉시 포남동은 바닷가가 아닌 경포호의 남쪽을 뜻한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거석리(擧石里)
든돌마을. 와석리의 김삿갓 묘소 못미쳐서 계곡의 길가에 있는 큰 돌이다.



* 지명유래

든돌마을. 와석리의 김삿갓 묘소 못미쳐서 계곡의 길가에 있는 큰 돌이다. 바위가 길가에 들려 있으니 뜬 돌이요, 거석(擧石)이 곧 부석(浮石)이다. 김삿갓이 험한 세상을 뜬구름처럼(浮雲), 부평초(浮萍草)처럼 살았으니, 이 바위가 외롭고 고달펐던 한 시인의 에뜨랑제와 같은 생애를 증언하기 위하여 그 묘소 어구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臥石里)
김삿갓이 이곳에 돌아와 누울 줄 알고 미리 붙여져 있었던 것



* 지명유래

천하를 주유하며 방랑하던 시인의 육신이 이곳에 와서 누웠으니 와석리라는 이름도 김삿갓이 이곳에 돌아와 누울 줄 알고 미리 붙여져 있었던 것 
강원도(江原道)
‘강원’이란 이름은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의 머리 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 지명유래

‘강원’이란 이름은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의 머리 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강원지방은 삭방도, 춘주도, 동주도, 연해명주도, 교주도 등의 이름으로 불렀으며, 1395년(조선 태조 4) ‘강 원’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관찰사는 원주에 주재하였으므로 감영을 원영(原營), 감사 를 동백(東伯)이라 불렀는데, ‘동’은 관동의 ‘동(東)’자를 붙인 것이다. 
관동(關東)과 관서(關西), 영동(嶺東)과 영서(嶺西)
강원도의 별칭



* 지명유래

강원도의 별칭이며, 관동, 관서의 ‘관(關)’은 대관령이 아닌 철령관(鐵嶺關)의 동쪽과 서쪽을 말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한편 영동과 영서는 대관령 서쪽을 뜻하는 이름이므로 이들이 근래 에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관동은 무방하되, 관서는 평안도를 말하므로 대관 령 서쪽의 강원도 지방은 ‘영서’라는 이름으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동해(東海) 북평(北坪)
- '북평'은 우리말 '뒷들'을 뜻하는 한자표기

◆ 위 치 : (주택)강원도 동해시 구미동(九美), 단봉동(丹鳳), 대구동 (大口) 일원 (공단)강원도 동해시 추암동(秋岩), 구호동(九湖), 북평동 일원 ◆ 면 적 : (주택)411,811평(1,361,359m2) (공단)782,831평(2,587,871m2) ◆ 연 혁 - 고대 부족국가인 실직국(悉直國)이 있었다고 하며, 신라 제5대 파사왕때 신라에 병합됨. - 505년(지증왕 6) 실직국에 주(州)를 두어 군주를 배치하였고 639년(선덕여왕 8) 진주(眞州)도독부를 둠. - 658년(무열왕 5) 북진(北鎭)으로 고쳤으며, 760년(경덕왕 19) 삼척군이라 함. - 995년(고려 성종 14) 삼척에 척주(陟州)단련사를 두었고, 1018년(현종 9) 강등하여 삼척현이 됨. - 1319년(조선 태조 2) 목조의 외가라 하여 삼척부로 승격시켰으나 1404(태종 4) 삼척도호부가 됨. - 1892년(고종 32) 다른 부, 군의 예와 같이 삼척군으로 되었고, 1942. 10. 1 강릉군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1945. 7. 1 삼척군 북삼면이 북평읍으로 승격됨. - 1980. 4. 1 묵호읍과 북평읍을 합하여 동해시를 설치함

* 지명유래

- 동해시(東海)는 동해안에 있는 항구이므로 '동해시' 라고 이름한 것이기 보다는 정라동 육향산에 「척주동해비」라는 1662년(현종 3)에 세운 비가 있으므로 '동해' 라 한 것이다. - '동해' 라는 이름은 동해안 제1의 항구도시를 표방하면서 이런 비석의 역사성을 고려한 이름이다. - 북평(北坪)의 옛 이름인 박곡리 1598년 이후 천곡동 이남지역을 삼척군 박곡리라 하였다. - 그후 박곡리 지역은 도상, 도하, 견박면의 3개면이 되었다가 1914년 위 3개면을 합할 때 북삼면(北三面)이 되었고, 1945년 북삼면 지역을 북평읍으로 고쳤다. - '북평'이란 우리말의 '뒷뜰(들)'을 뜻하는데, 『훈몽자회』에 의하면 '북=뒤'로 풀이하고 있다. - 구미동(九美)은 그전 삼척군 견박면에 속했던 곳으로 거북 바위산이 있어서 구미리(龜尾)라 불렀다고 하며, 혹은 물이 구비지는 곳이라고도 하는데 뒤에 간편한 글자로 바뀐것이다. - 단봉동(丹鳳)은 그전 단곡동(丹谷)과 봉정동(鳳亭) 등을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1914년에 단봉리가 되었다. - 대구동(大口)은 마을이 큰 언덕위에 있으므로 대구(大邱) 또는 대고전(大皐田)이라 하다가 지금의 대구로 바뀌었다. - 추암동(秋岩)은 원래 '추암'(湫岩)으로 표기했다. 용추(龍湫)에 기이한 바위가 있어서 추암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 구호동(九湖)은 이곳에 굴바우가 있으므로 굴암(窟岩)이라 불렀으며 1914년 이후 '구호리' 라 하였으나 그 내력은 알수 없다
동해(東海) 해안(海岸)
-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사업지

◆ 위 치 :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泉谷), 평릉동(平陵), 부곡동(釜谷) 일원 ◆ 면 적 : 125,000평(413,223m2) 

* 지명유래

- 천곡동(泉谷洞)은 그전에 '샘실'이라 부르던 곳이다. 샘=천(泉), 실=곡(谷) 으로 훈차(訓借)된 이름이다. - 이곳에 좋은 샘이 있어서 천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찬물내기, 덕골, 한골 등을 병합하고 북삼면(북평읍)에 편입된 곳이다. - 평릉동(平陵)은 본래 삼척군 도하면에 속했던 곳으로 이곳에 조선시대 평릉역(驛)이 있었다. -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상평(上平), 하평(下平)을 합하고 북삼면(북평읍)에 편입되었다. 여기서 '능(陵)'이란 구릉지를 뜻한다. - 부곡동(釜谷)은 그전에 가매말, 개말, 개맬이라 부르던 곳이다. 가마=부(釜), 말=곡(谷)을 취한 이름이다. - 그전 강릉군 망상면(묵호읍)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갯가의 마을이므로 개말이라 하다가 변하여 '가매말'이 되었다고 하며 1916년 행정구역 개편때 도두동, 돌담, 승지골 등을 병합하였다
삼척(三陟) 교동(校洞)
- 옛날 지방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던 곳

◆ 위 치 : 강원도 삼척시 교동 일원 ◆ 면 적 : 143,000평(472,727m2) 

* 지명유래

-.교동(校洞)은 향교말, 또는 교리라고 부르던 곳으로 삼척군 부내면(삼척읍)에 속하였던 곳이다. - 이곳에 삼척 고을의 향교가 있어서 교리, 교동, 향교말이라 하였으며, 교동에는 자손없는 귀신, 길거리에서 죽은 귀신등을 제사지내는 여제단(礪祭壇)도 있었다. - 향교(鄕校)는 고려-조선시대에 도읍지가 아닌 지방의 교육기간으로서 일종의 관립학교이다. 유학교육 기관으로서 경전, 사서, 시문을 가르쳤고, 향시라는 시험을 거쳐서 생원이나 진사의 초시를 볼 수 있도록 하였던 교육기관이다
삼척(三陟) 사직(史直)
- 고대 부족국가 '실직'국이 변한 이름

◆ 위 치 : 강원도 삼척시 사직동 일원 ◆ 면 적 : 20,279평(67,038m2) 

* 지명유래

- '사직(史直)'은 삼척에 있었던 부족국가 '실직(悉直)'의 와전이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밝히고 있다. - 이 지역은 본래 삼척군 부내면(삼척읍)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사직역이 있었다. - '사직'을 '사직단터'가 있었던 곳 쯤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직→실직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 사직리에는 실직군왕비묘가 있어서 1838년(헌종 4)에 무덤을 파보니 관이 돌로 되었고, 와전(瓦塼) 등이 발견되었다. - 이 묘는 삼척 김씨들이 조상의 묘로 받들고 있다
삼척(三陟) 정라(汀羅)
- 바닷가 모래 사장을 뜻하는 이름

◆ 위 치 :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汀上洞) 일원 ◆ 면 적 : 22,530평(74,479m2) ◆ 연 혁 - 고대 부족국가인 실직국(悉直國)이 있었다고 하며 468년 고구려 장수왕이 쳐서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가 신라 제 5대 파사왕때 신라에 병합됨. - 505년(지증왕 6) 실직국에 주(州)를 두어 군주를 배치하였고 639년(선덕여왕 8) 진주(眞州)도독부를 둠. - 658년(무열왕 5) 북진(北鎭)으로 고쳤으며, 760년(경덕왕 19) 삼척군이라 함. - 995년(고려 성종 14) 삼척에 척주(陟州)단련사를 두었고, 1018년(현종 9) 강등하여 삼척현이 됨. - 1393년(조선 태조 2) 목조의 외가라 하여 삼척부로 승격 시켰으나 1404(태종 4) 삼척도호부가 됨. - 1892년(고종 32) 다른 부.군의 예와 같이 삼척군으로 되었고 - 1980. 4. 1 북평읍지역이 동해시에 편입되었으며, 1981. 7 .1 장성읍과 황지읍이 태백시로 통합 승격되어 떨어져 나감. - 1986. 1. 1 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되었고 1995. 1. 1 삼척시와 삼척군이 단일시로 통합됨.

* 지명유래

- 삼척의 옛 국가인 '실직'을 '곧은 고을'로 풀이하고 평야가 적은 이 지역에 크고 작은 여러 고을 (혹은 부족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 '삼척(三陟)'은 여러 고을 중에서 세 개의 큰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들 셋은 삼척의 오십천(五十川), 근덕의 마읍천, 북평(동해시)의 전천(箭川)지역에 근거한 고을들을 뜻한다고 한다.1) - 정라(汀羅)는 부래, 불래, 무태, 사근(沙根), 사원(沙原)등으로 불리워진 곳이며, 모두가 동해 바닷가 모래톱으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다. - 부래, 불래는 동해안 방언에 모래사장을 '불'이라 하기 때문이며, 정(汀)은 물가를 뜻한다. - 이 정라진을 중심으로 위쪽은 정상리(汀上里), 아랫쪽은 정하리(汀下里)라 하였으며, 이곳에 '척주동해비'가 있다. - '척주동해비'의 척주(陟州)는 옛 삼척고을을 말하며 1662년 (현종 3) 이 비를 세우자 동해의 조류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퇴조비(退朝碑)라고도 하며 육향산에있다. - 이 비는 삼척부사로 부임한 미수 허목(許穆)이 동해바다의 크고 장엄함을 노래한 자작시 『동해송』 (東海頌) 192자를 새긴 것이다. 그 내용은 영해망양(瀛海莽瀁)하여 백천(百川)이 모여드니 그 큼이 무궁하도다. … 크고도 빛나도다. 그 다스림이 넓고 넓어 유풍 길이 영원하리라. 로 끝을 맺는데, 전서(篆書)로 새겨진 글씨가 신필(神筆)이며, 내용이 웅장하고 경건하여 비 앞에 서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 비를 세우게 된 것은 동해에 풍랑이 심해 어민들의 고초가 크므로 허미수가 『동해송』을 지어 비를 세웠더니 그 후로부터는 이상하게도 풍랑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 그후 허미수와는 당파가 다른 사람이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그럴리가 있겠느냐" 하고 비를 뽑아버렸더니, 당장 풍랑의 화가 거듭되므로 당황한 부사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 삼척지방에서는 이 비명(碑銘)의 탁본을 떠서 병풍으로 만들어 집안에 두면 잡귀가 범접하지 못한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구전되어오고 있으며 다른 지방에도 그 탁본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속초(束草) 교동(校洞)
- 속초초등학교가 있어서 '교동'이라 한 곳

◆ 위 치 : 강원도 속초시 교동일원 ◆ 면 적 : 19,396평(64,119m2) ◆ 연 혁 - 속초시 지역은 본래 양양군에 속한 소천면(所川面)지역임. - 양양군은 고구려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라 부르던 곳이나 757년(경덕왕 16) 통일신라에서 익령(翼嶺)으로 고치고 수성군 (지금 고성군의 영현(領縣)으로 함. - 1018년(고려 현종 9) 현령을 두었고 1221년(고종 8) 글안병을 잘 막아낸 공으로 양주(襄州:陽州) 방어사로 승격되었다가 1267년(고종 44) 오랑캐에게 항복한 사건으로 인하여 다시 덕령현(德寧)으로 강등됨. - 1260년(원종 원년) 지양주사(知襄州事)로 되었고 별호를 양산(襄山)이라 함. - 1397년(조선 태조 6) 목조의 외향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되고, 1413년 (태종 13) 도호부를 두었으며 1416년(태종 16) 양양(襄陽)으로 고침. - 1783년(정조 7)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가 되었고 1819년(고종 32) 군으로 됨. -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생기어 국토가 양단됨에 따라 양양군도 남북으로 나누어졌으며 1951년 전지역이 수복됨. - 1942. 10. 1 속초읍으로 승격됨. - 1962. 1. 1 양양군 속초읍이 속초시로 승격됨

* 지명유래

- 속초(束草)는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의 지형이 소머리 형국이며 청호동이 소꼬리 모양의 와우형(臥牛形)인데 송도가 마치 누워있는 소 앞에 풀단을 묶어 놓은 것 같다하여 속초(束草)라 부른다는 설이 있다. - 속초는 본래 '속새' 또는 '속진'이라 부르던 마을이며 교동(校洞)은 본래 속초 4구에 속한 곳이다. - 6. 25 사변후 속초 6구가 되었고 1966. 1. 1 속초시에 처음으로 동제를 실시할 때 속초국민학교가 있으므로 교동(校洞)이라 하였다. - 대개 전국의 각 고을마다 향교가 있고, 이 향교가 있었던 곳을 '교동'이라 부르고 있으나 전국 90여개소의 교동중 국민학교(초등학교)로 인하여 '교동'이라 부르는 곳도 8개소가 있다
속초(束草) 조양(朝陽)
- '조양'은 천하가 태평할 좋은 징조

◆ 위 치 :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 일원 ◆ 면 적 : 129,583평(428,374m2) 

* 지명유래

- '조양(朝陽)'이란 아침 볕을 뜻하며, 『시경』에서는 봉황이 산 동쪽에서 우는 것을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 하여 "천하가 태평할 성스러운 조짐"으로 보았다. - 이곳 조양동은 1966. 1. 1 동제를 실시할 때 논산, 부월, 청대리, 온정리를 합하여 조양동이라 하였다. - 조선시대에 '소야 8경'이라 하여 소야평야 일대의 여러 경승을 꼽았는데 그중 '논산조양(論山朝陽)' (논산의 아침볕)이 8경의 하나였다
속초(束草) 청초(靑草)
- 관동의 명승 '청초호'에서 따온 이름

◆ 위 치 : 강원도 속초시 교동 일원 ◆ 면 적 : 65,186평(215,488m2) 

* 지명유래

- '청초(靑草)'는 속초시에 있는 둘래 5km의 '청초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청초호는 '푸른 풀'을 뜻하며 호수의 물빛을 푸른 풀에 비유한 것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하고 황진이 무덤앞에 한잔 술을 부었던 임백호의 시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 고려때부터 호수의 바다쪽에 수군만호영을 두고 병선을 정박시켜 바다를 지켰던 곳이며 쌍성호(雙成湖) 또는 진성호(震成湖)라고도 하였다. - 『택리지』에는 '관동 8경'에 양양 낙산사 대신 이곳을 넣어서 8경의 하나로 들었던 명승지이다. - 한 겨울에 청초호에 얼음이 얼면 마치 갈아놓은 논두렁 처럼 되어서 이를 용갈이 또는 용경(龍耕)이라 하였으며 옛 사람들이 그 얼음의 형태를 보고 그 이듬해 농사의 풍년, 흉년을 점쳤다고 한다
양북(兩北)지방
강원도지방과 함경도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영월(寧越) 하송(下松)
- 소나무 정자 아랫마을을 뜻함

◆ 위 치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일원 ◆ 면 적 : 20,000평(66,166m2) ◆ 연 혁 - 4세기 초부터 한강유역의 백제세력에 의하여 그 영토가 됨. 2)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내생군(柰生郡)으로 고쳤으며 757년 (경덕왕 6) 내성군(奈城郡)이 됨. - 1330년(공민왕 13) 내성현을 지금의 이름인 영월현으로 고치고 충청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1372년 이 고을 사람 환자 연달마실리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공을 세워 영월군으로 승격됨. - 1401년(조선 태종 원년) 영월군을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옮김. - 1698년(숙종 24)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관례에 따라 영월군이 됨. - 그 해에 원주군의 좌변면, 우변면, 주천면을 편입함. - 1960. 1. 1 군내면이 영월읍으로 승격됨

* 지명유래

- 옛 이름인 백월(百越)은 이 지역의 지세가 험하여 민가 백호(百戶)를 넘기기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 한편 '영월'도 멀고 험한 이 지역에 무사히 넘나들기를 기원하는 이름으로서 '편안히 넘는다'는 뜻이다. - 그래서 옛 시인은 이런 시를 남겼다. 칼같은 산들은 얼키고 설켰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이 비추고 비단결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한데, 풀과 나무에는 연기가 잠겼다. 주인이 학창의를 헤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풍류가 그림으로서 전할만 하다. 3) - 그러나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왕비 송씨와 생이별한 단종은 영월로 넘어 오면서 울었으므로 '우래실(명라곡)'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 '영월(寧越)' 이라는 이름은 중국에도 있으며, 옛이름 내성(奈城)의 '내'를 '내(乃)'로 보아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 하송리(下松)는 송정촌(松亭村) 또는 송정말이라고 부르는 마을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송리라 하였으며 송정말에 큰 소나무정자가 있었다
영월군 남면(南面)
경기도 양주시 북부에 있는 면.

◆위치:경기 양주시 ◆인구:8,968명(2003) ◆면적:36.53㎢ ◆주요문화재:이준선생묘(李準先生墓) 

* 지명유래

매화동(뫼둔골) 본말 남쪽에 있는 골이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좌측으로 10여 마지기의 다락논이 있으며 숲 사이로는 맑은 개울물이 흐른다.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는데, 옛날 절이 있었다는 두 번째 집인 진두만 씨네 뒤안에는 차고 맑은 샘이 바위 속에서 솟아난다. 그 뒷산인 국지산에는 T.V무 선중계소가 있다. 국지산의 뫼둔지로 올라가는 골짜기이므로 '뫼둔골'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묘 가 많아서 '뫼동골'이라고 했는데 그 후 어감이 좋지 않아서 '매화동(梅花洞)'으로 이름을 바꾸 었다고 한다. 장승백이 국지골과 돌고개로 갈라지는 버스 종점 부근이다. 옛날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이라고 쓰 여진 두 개의 큰 장승이 서 있었던 곳으로 장승은 길손들의 이정표와 쉼터 역할을 했으며, 우리 조상들은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기도 하였다. 국지골 매화동 입구에서 남향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이다. 조전리, 흥월리, 광천리로 이어지는 해발 625.6m의 웅장한 국지산 자락에 묻혀 있어서 '국지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 다. 자작이골 매화동과 국지골 입구를 지나 자작나무가 많은 자작이재 밑에 있으므로 '자작이골'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면 흥월리의 뒷골을 거쳐 다릿말(달이말)로 간다. 안골(內谷) 본말 북쪽에 있는 광천리 서낭다을 지나면 있다. 본말 안쪽에 있어서 '안골'이라 하는데 현재 4 가구가 살고 있다. 너분골 광천리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흑염소와 토종닭을 방목하고 있으 며 골짜기 안자락이 넓다고 하여 '넓은 골→너분골'이라 한다. 솔안이골(松內谷) 너분골 입구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는 골이다. 길게 뻗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약초를 캐는 집 이 살고 있으며, 옛날 이곳은 산판을 하기 전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솔안이골'이라 하 였다. '솔안이골'은 '소나무안에 있는골→솔안이 골→소라니골'로 그 어원이 변하였다. 이 골짜 기를 지나면 조전리의 오락동으로 간다. 장수혈터 본 마을의 서낭당 뒷산 봉우리에 있다. 광천리는 국지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산수가 수려하 여 옛부터 큰 인물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큰 쇠못을 박아 장수의 혈(血)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돌고개에 사는 엄동 석(嚴東錫, 63세)씨가 30cm정도의 쇠못을 뽑았다고 한다. 
영월군 북면(北面)
경기도 가평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경기 가평군 ◆인구:3,866명(2001) ◆면적:230.93㎢ 

* 지명유래

무동실(舞童室) 나산이의 북서쪽에 있으며 마을의 진산(鎭山)인 무동산(522.3m)은 아이가 춤을 추는 형상이므 로 '무동실'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옛날 지솟덕(紙所垈)에 살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 친상을 당했는데, 그 아버지가 평소에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생전에 정해둔 묫자리를 파 면 큰 너럭 바위가 나올 것이니, 내 시신을 그 바위 위에 거꾸로 묻고 그 대신 봉분을 크게 만들 어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상주들이 장사를 지내기 위해 그 자리를 파 보았더니 큰 너럭바위가 나왔다. 그러나 상주들은 아버지를 그 바위에다 그냥 모실 수 없다는 생각에 망치 로 돌을 깨어 내니 그 속에서 세 마리의 두꺼비가 기어 나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때 김 씨집안의 어린 손자가 갑자기 춤을 추며 정신이 이상해지고 그 집안의 가세(家勢)도 기울어져 버렸으므로 이때부터 이산을 '무동산'이라 하고 이 마을도 '무동실'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전 해진다. 일제시대 때 철광이 있었으며, 말구리재를 넘어 평창군 시동과 마지리(馬池里)로 가는 길이 있다. 전씨 효자효부각(孝子孝婦閣) 공기 1리 도릉계와 굴앞말 사이에 있다. 이곳에 사는 전(全)씨 가문에 효자와 효부가 있었는데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죽은 후에도 3년간 시묘를 살았으므로 1924년 6월 엣 석비(石碑)와 함께 각(閣)을 세웠다. 말구리재 무동실의 서북쪽에 있으며 고덕치 아랫마을인 평창군의 다래(달래)로 넘는 고개이다. 고개의 경 사가 워낙 심하고 높아서 '말구리재'라고 한다. 말구리는 '말(크다)+구리(골짜기)' 즉, 큰 골짜기 를 의미하는 뜻이지 실제로 이곳에서 말이 굴러 떨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속새골 무동실 동쪽에 있다. 다년생 풀로 토끼가 잘 먹고, 즐기는 나무, 뿔 등의 기구를 닦는데 쓰이는 속새풀이 많이 자라는 골짜기이므로 '속새골'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옻물은 차고 약효가 뛰 어나서 옻 오른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기와집말(瓦村) 복지회관과 경찰전적비,서낭당이 있는 공기2리의 중심마을로 예전에 부자인 예안 김씨가 살던 큰 기와집 한채가 있었으므로 '기와집 마을"이라고 불렀다. 이 기와집은 집터가 세다고 소문이 났는데 6.25사변때 폭격당했으며 , 그 위치는 현재 2층집 앞이다. 이 마을은 300여년전 숙종임금 때 선성(宣城) 예안 (禮安)김씨들이 경상도 지방에서 이주하여 배판했던 곳이다. 영천(靈泉) 공기초등학교 앞에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바위 속에서는 항상 차고 맑은 물이 줄지 않고 솟아 나는 신비스러운 샘이므로 '영천(靈泉)'이라 한다. 옛날 영천의 너래 바위에다 송아지를 매어 났 는데 영천에 살던 큰 메기가 송아지를 잡아먹었으므로 그 바위를 '메기바위굴'이라 한다는 얘기 도 있다. 가매실(釜室) 기와집 마을 위쪽으로 마을의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으므로 '가마솥마을→가매실'이라고 한 다. 마을 앞에는 나무를 하던 연림비알이 있으며 이 마을에는 온천이 날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 지고 있다. 고산골(高山谷) 가매실의 남서쪽에 있으며 , 서북쪽에서 뻗어내린 절개산(절개산876.1m)과 삼방산의 높은 산 밑에 있으므로 '고산골'이라 한다. 새터(新基洞) 공기의 가장 북쪽마을로 삼방산(三芳山,979.1m)밑에 있다. 화전민들이 새로 터를 잡고 생활하 던 곳이므로 '새터(新基)'라 했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진등(長山登) 삼방산 줄기가 길게 뻗어내려 도마치, 상도마치, 하도마치를 형성하였다. 진등의 유래는 새터에 서 도마치로 가는 긴 산등성이가 늘어져 있으므로 '긴등→진등' 또는 '산등마을'이라고 하였다. '긴'이 '진'으로 발음되는 것은 기름이 지름이 되듯 이 고장 방언의 일종이다. 옛날에는 공기 사 람들이 진등과 도마치를 넘고 평창읍 샘골(泉洞里)과 종부리(鍾阜里)의 음지말을 지나 평창장 (平昌場)까지 걸어서 다녔는데 30리 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영월군 상동읍(上東邑)
강원도 영월군 동부에 있는 읍.

◆위치:강원 영월군 동부 ◆인구:1,751명(2001) ◆면적:139.48㎢ ◆문화재:유영복 효자각, 영월 구래리 사지 

* 지명유래

- 본구래(본마을) 구래리(九來里)의 본마을이다. 본구래로 가자면 하천평리(下川坪里, 냇들) 봉우재 마을에서 내 덕리의 반쟁이로 건너가는 봉우교를 지나야 한다. 1923년 상동 중석광이 개광되기 전에는 이곳 이 상동의 중심지였으며 마을 뒤에는 백운산(白雲山, 1,426.2m)을 경계로 정선군(旌善郡) 고한 읍(古汗邑) 박심마을과 접하고 있다. 1962년 본구래 물래방아골의 산지당 부근에서 텃밭을 일구다가 27cm 크기의 삼국시대(7C) 금 동불상이 출토되어 서울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자장법사(慈臧法師)는 644년(신라 선덕 여왕)에 당(唐)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와서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금강계단, 오대산 월정사(月情寺)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점암, 영월 수주면 사자산의 흥령사(興寧寺, 법흥사), 그리고 정선 정암사(淨巖寺, 일명 曷來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한 후 사 리를 봉안하였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자장의 꿈에 문수보살이 현몽하여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절터를 구하라.』고 하여 상동 본구래를 아홉 번이나 왔다 갔으므로 '구래리(九來里)'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자장법사는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된 본구래 물방아골에다 관음전과 요사채를 건립한 후 명당터를 찾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절터를 찾아다니던 자장법사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칡넝쿨에 앉아 쉬게 되었 는데, 이 넝쿨이 워낙 크고 신비하여 그 줄기를 따라가보니 상동을 지나 정선 땅까지 뻗어 있었 다고 한다. 자장은 기진맥진하여 그곳에 당도해보니 가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만한 천하으 명 당으로 그곳에는 흰 눈이 쌓인 겨울철인데도 세송이의 붉은 칡 꽃이 피어 있었다. 정암사는 칡 줄기가 뻗어서 점지해 준 삼갈반처(三曷盤處)이므로 일명'갈래사(葛來寺)'라고 한다. 자장은 이 곳 삼갈반처(三葛盤處)에다 서해 용왕이 보내준 마노석으로 돌탑인 '수마노탑(보물 410호)'를 세우고 그곳에다 사리를 모셨으므로 그아래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안치되지 않으며 창을 통해 이 탑을 바라보며 예불을 드리고 있다. 이 전탑은 전돌이 아닌 마노석이라는 고급석재로 축조했는데 서해에서 가져온 마노석이므로 수 (水)자를 써서 '수마노팝(水瑪瑙塔)'이라고 하였다. 정암사는 가파른 산자락에 지은 절집으로 탄광촌인 사북의 검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별천지로 맑은 계곡과 주목나무가 너럭바 위와 함께 어울려져 장중하면서도 아늑한 절집 분위기를 느끼게끔 해준다. 봉우재와 반정이를 지나 본구래로 들어가는 도로 옆 깊은 계곡에는 여름 한 철 찾아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 다. - 법호실 녹전면 직동리 화절치 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법호실 마을은 본구래 남서쪽으로 경사진 비탈길 을 따라가면 대여섯 가구가 사는 고원지대로 고랭지 채소와 약초 재배, 산채재배 등이 주 소득 원이다. 법호실에는 구한말 나성일 의병장이 살던 집이 남아있으며, 토종벌과 사냥을 업으로 하 는 문석주 씨와, 고랭지 채소와 약초를 재배하는 방창원 씨 등이 동네를 지키면서 살고 있다. 이곳은 일명 법궁리(法弓里라고도 하는데, 옛날 '법궁사'라는 절이 양지 뜸의 절골에 있었는데 지금도 기와장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 아우라지 민백산에서 시작되는 천평천(川坪川)과 어평에서 흐르는 물이 농거리에서 합쳐진 후 찰랑리에 이르러서는 백운산에서 시작되는 구래천(九來川) 물줄기와 하나로 어우러진다. '어우르다'의 작 은 말로 '아울'에 접미사 '지'가 붙어서 '아울+(아)지→아울아지→아우라지'로 변했다. 따라서 이곳 역시 천평천과 구래천의 두 물줄기가 아울어(합쳐)지는 곳이므로 '아우라지'라 한다. - 저잿거리(시장터) 칠랑리와 구래국민학교 사이에 있는 마을로 버스종점과 시장이 있어서 '저잿거리'라 한다. - 신대골(新垈谷) 상동광업소 부속병원에서 민골로 가는 길에 있다. 구래리의 중심이 본말에서 광업소 쪽으로 옮 겨오면서 이곳 긴 골짜기에 새로운 마을이 만들어 졌으므로 '신대골'이라 한다. 민골쪽을 윗신 대골,병원쪽을 아랫신대골이라 한다. - 민골 상동광업소 부속병원 뒤쪽에 있다. 신대골과 접하고 있는데 전에는 30여가구가 살았으나 지금 은 1가구만 남아있다.
영월군 서면(西面)
강원도 홍천군 서부에 있는 면.

◆위치:강원 홍천군 ◆인구:3,609명(2001) ◆면적:123.33㎢ ◆주요문화재 : 홍천 한서 남궁억 묘역(강원기념물 77) 

* 지명유래

- 배일치(拜日峙) 광전리 중심 마을인 여촌(麗村) 동남쪽에 있다. 단종(端宗)이 영월로 귀양올 때 서선에 기우는 해를 보고 절을 했다고 하여 '배일치'라 하였다. 이때 단종은 배일치를 넘고 북쌍리(北雙里)의 점말과 분뇨처리장이 있는 갈골, 옥녀봉, 선돌을 지나 유배지인 청령포로 갔다. 배일치재를 중심으로 남면 배일치와 서면 배일치 마을이 있는 데, 원래의 배일치제는 표지석이 서 있는 지금의 위치에서 좌측으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점말 의 북골로 질러가는 길이었다. - 날그랭이 서면 배일치 밑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배일치산의 높은 등날 밑에 있으므로 '등날 구댕이→ 날구댕이'라 하였다. - 돌티미 여촌 동쪽인 마지라오(馬岩洞) 서낭당(成皇堂)앞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돌탑을 쌓아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고 재앙을 막기를 원하였다. 돌탑은 풍수학적으로 동네의 허(虛)한 지역이나 서낭 당 주위에 축조하였다. - 풍덕골(風德谷) 마지라오(馬岩洞) 동쪽으로 덕상리(德上里)의 고전동(高田洞)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지대가 높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이므로 '풍덕골'이라 한다.지금은 지일사라는 절이 있는데, 일설에 는 허풍을 잘 떠는 장풍덕이라는 사람이 살던 곳이라 '풍덕골'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다. - 마지라오(馬岩洞) 배일치를 지나 여촌 어구에 있다. 서낭당의 당목(堂木)이 울창하고 말 형상의 큰 바위가 있으므 로 '마지라오', 또는 '마암동(馬岩洞)'이라고 하는데 풍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이다. - 물푸레골 마지라오에서 골말(고운말)로 가는 골짜기이다. 도끼나 호미 낫자루릏 만드는 물푸레나 무가 많 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 자사골 여촌의 마지라오에서 골말(고운말0로 가는 골짜기이다. 호미 낫자루를 만드는 물푸레나무가 많 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 괴정(槐亭) 뱃말(舟村)의 응고개 밑에 있다. 402번 지방도가 없었을 때의 옛길은, 마지라오에서 골말을 지 나 응고개의 괴정에서 쉬었다가 당마루를 넘어 신천리로 왕래하였다. 예전의 이곳은 여름 한철 그늘이 드리워진 큰 느티나무 정자(槐亭)가 있어서 많은 행인들이 쉬었다 갔으므로 '괴정(槐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세고개 뱃마을에서 신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봉우리 셋을 넘는다고 하여 "세고개'라 한다. - 뱃말(舟村, 뱃마을) 골말(고은마을)앞에 있는 마을로 순조 임금 때는 광운리(廣雲里)라 불렀다. 402번 지방도가 개 통되기 전에는 영월에서 신천, 주천으로 가는 모든 사람들이 뱃말을의 나룻배를 이용하여 건너 다녔다. 즉, 배를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던 마을이므로 '뱃마을→뱃말'이라 한다. - 멍석마리소 뱃말 앞 평창강에 있다. 장마로 큰 물이 나갈 때는 소(沼)우의 물이 빙글빙글 돌아 마치 큰 멍석 을 감는 것 같아서 '멍석머리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 황새바우 뱃말 건너편인 당마루 밑에 있는 큰 너럭바위이다. 가뭄 때 평창 강물이 줄어들면 이곳에 큰 웅 덩이가 생기고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황새들이 모여들었다. 즉, 황새가 많이 모여드는 바위이 므로 '황새바우'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에 황새가 모여들면 가뭄이 든 것을 알 수 있었 다. - 살땀골 뱃말의 배거리산 줄기에 형성된 작은 골짜기이다. 늦가을 강물이 줄 때 물을 한 곳으로 돌리고 돌담을 쌓은 후, 살(싸리가지)을 설치하여 고기를 잡는 '살담'여울이 있어 '살담골'이라고 불렀 다 
영월군 수주면(水周面)
강원도 영월군 북서부에 있는 면.

◆위치:강원 영월군 ◆인구:1,742명(2001) ◆면적:153.34㎢ ◆주요문화재 :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탑비(보물 612), 영월 징효국사 부도(강원유형문화재 72), 영월 법흥사 부도(강원유형문화재 73), 영월 무릉리 마애여래좌상(강원유형문화재 74), 영월 법 흥사 석분(강원유형문화재 109), 흥녕선원지(강원기념물 6), 요선정(강원문화재자료 41), 영월 원용성 가옥(강원문화재자료 73) 

* 지명유래

- 구레골 햇골 위쪽에 있으며, 이 골짜기에는 삿갓모양으로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옛날 호환(虎患)이 심 하던 시절에 호랑이가 마을의 처녀를 물고 이 곳 삿갓바위밑에서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후부 터 마을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구레미골'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구레골'이 되었 다. '구레미'란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이 호랑이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 꽃바우 약수터 요선정 입구에서 안도내(內島內)로 들어가는 도로 우측에 있다. 기암절벽의 병창에서 나오는 물 을 호수로 연결하여 이용하는데 여름철에는 제천, 원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영 월군 수질검사 314호로 지정 받은 곳으로 약수터 표지석은 1993년도 전국 지파출서 친절봉사 1 위로 전 직원이 특진한 수주지서장(이진우)과 수주면장(이태희)이 주위의 조경을 하였다. - 꽃바우 각시바위와 삿갓바위 사이에 있다. 이른 봄부터 이 곳 바위틈에서는 이름모를 꽃들이 많이 피어 나므로 '꽃바우'라고 한다는 얘기와 각시바위와 신랑바위 사이에 있으므로 '꽃바우'라고 부르 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큰 바위가 꼴뚜서 있으므로 '꼴뚜바위'가 '꽃바우'로 변 한 것 같다. - 신랑바우 도원리 동쪽인 중방보 입구에 있는 바위로 신랑이 사모관대를 하고 서 있는 형상의 바위이다. 꽃바우 건너편에 있다. - 각시바우 꽃바우 서쪽에 우뚝 속은 바위로 그 형상이 족두리를 쓴 새색시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건너편인 설구산(雪龜山)밑에는 신랑바위가 있어서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 다. - 도원산성(桃源山城) 핵솔(화약골)과 꽃바우 뒤에 있는 산성(山城)이다. 법흥산성, 공기산성과 같이 평창방면에서 넘 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형식으로 지금은 2km정도의 흔적이 남아 있 다. 이 근처에는 횟골(화약골), 병지내(兵陣川)등 군인들의 주둔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 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891년 원주의 토호세력인 양길(梁吉)의 부하가 된 궁예가 이 곳에서 진(陳)을 치고 柰城(영월), 郁烏(평창), 御珍(진부), 溟州(강릉)를 공격했었다고 한다. - 성안이(城內) 안도내 마을의 동북쪽으로 도로에서 약 2km쯤 올라가면 산 중턱에 넓고 평평한 도원산성(桃源山城)이 있었으므로 '성안'이라고 불렀고 한때는 화전민들이 살던 곳이다. - 말무덤 도원리의 저치재(低峙)밑에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옛날 용마가 장수를 찾으며 울부짖다가 이 곳 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그러나 '말'이란 '크다'는 뜻이고, '말무덤'은 '큰무 덤'을 의미한다. - 용마개울 도원리에서 주천강으로 흐르는 개울로 이 곳에서 용마가 태어났으므로 '용마개울'이라고 부른 다. 
영월군 영월읍(寧越邑)
강원도 영월군 중부에 있는 읍.

◆위치:강원 영월군 중부 ◆인구:45만명(2003) ◆면적:172.25㎢ ◆문화재 : 장릉(사적 196), 영월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76), 자규루 및 관풍헌(강원유형문화 재 26), 창절사(강원유형문화재 27), 영모전(강원유형문화재 56), 영월향교(강원유형문화재 100),영월 정조대왕태실 및 태실비(강원유형문화재 114) 

* 지명유래

- 용마굴, 용담 거운리에 사는 정씨(丁氏)네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3일만에 시렁 위에 올라가서 병정놀이 를 하는 등 보통아이와는 달랐다. 집안에서는 역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작두로 목을 잘라도, 큰 연자방아로 눌러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기장수에게 독한 술을 3일 동 안 먹이고 잠이 든 후에 겨드랑이 밑에 있는 참새 날개 만한 쭉지를 인두로 태워서 죽였다. 그 후 거운 다리 밑의 용마굴에서는 흰 백마가 나와서 만지 쪽으로 뻗은 백말등(산능성이)을 치 달리며 3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 무덤은 강건너 섭사에 있었는데, 1936년, 1972년, 1990 년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없어졌다. 그리고 아기가수의 무덤은 성황당 터 건너편에 있는데, 지금 도 장수묘라고 부르고 있다. - 납작굴 비둘기굴 서남쪽에 있는 작은 굴인데 납작하게 생겼으므로 '납작굴'이라 한다. - 비둘기굴 딱밭소와 용마굴 사이에 있다. 역암(역암)으로 된 강가의 가파른 벼랑 굴속에 산비둘기들이 많 이 산다고 하여 '비둘기굴'이라 한다. - 딱밭굴 서낭당 터 밑으로 거운리 남족 강가에 있다. 백 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굴로 둔덕 위에 있 는 밭두렁이 문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밭이 있어서 '딱밭굴'이라고 한다. 그 앞에 있는 '딱밭소'에 다 닥나무를 담그었다가 가마솥에 푹 삶은 다음 노끈이나 종이를 만들었다. - 서낭당터 거운리 마을 입구에 있다. 1970년대 정부의 미신타파의 일환으로 불태워 졌으며 , 지금은 큰 나 무를 신목으로 모시고 있다. - 덜미기 예전에 숯막이 있었던 숯검은골 좌측에 있다.나무들이 울창하고 양지바른 산성으로 짐승을 잡 기위한 '덫'을 많이 놓았기 때문에 '덫메기→덜메기→덜미기로 와전되었다. - 숯검은골 선 바우와 안검은골 남쪽에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와 참나무등을 이용하여 숯을 만드는 숯가마 가 있었으므로 '숯검은골'이라 한다. 숯검은골 안쪽에도 숯장이들이 막을 치고 숯을 구어내 던 '안검은골'이 있다. 
영월군 주천면(朱川面)
전라북도 진안군 북서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진안군 북서부 ◆인구:1,894명(2001) ◆면적:95.92㎢ ◆문화재:태평봉수대(전북기념물 36) 

* 지명유래

- 공순원고개(公順院峙) 주천면 금마리에서 신일리의 공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공순원재'라 한다. - 금마리 독립만세 기념비 신일리와 금마리 사이인 솔치고개에 있다. 1919년 4월 20일 금마리 옛 장터에서 주민 수백 명이 영월 군순 석명선(石明瑄)을 위협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던 영월 지방의 거족적인 항일만세운동 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하였다. 기념비는 4천 5백 20평의 부지에 사업비 1억 8천여만원을 들여 서 폭 1.5m, 길이 3.2m의 화강암 밑받침에 높이 4.55m의 청동 조형물로 세워졌다. - 솔치재(松峙) 금마리 북쪽의 597번 지방도이며 신일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곳 고갯 마루에는 큰 소나무들 이 무성하므로 '솔치재'라 부른다. - 곳집골 금마리의 북서쪽에 있으며 , 상여(행상)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서 '곳집골'이라 부른다. - 주막거리 금말리의 중심지역으로 금마국민학교 앞에 있는 도로주변을 말한다. 예부터 이곳에는 길손들 이 쉬었다 가는 주막집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방아숲 곳집 동쪽에 있다. 예전에 밤나무숲 속에 작은 연자방아가 있었으므로 '방아숲'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 이곳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은 금마리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 배재(梨峙) 큰 마을 북서쪽에 있다. 고개 입구에 큰 돌배나무가 있었으므로 '배재(梨峙)'라고 부르게 되었 다. 이 재를 넘으면 충북(忠北) 송학면(松鶴面) 오미리(五味里)의 평촌으로 간다. 이곳의 물은 금마리 간이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있는데 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 때마다 이 나무가 운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외지에 있는 조경업자가 이 소나무를 사서 뿌리 돌림 을 한 후 영월군에 반출 허가를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군에서는 이 나무를 살리기 위하여 수간 주사를 놓으면서 보살폈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이 소 나무는 청령포의 관음송, 녹전리 솔치고개에 있는 소나무와 함께 영월의 기념비적인 나무였다. - 너블목재 뱃재(이치)를 지나 신림면 송게리와 송학면 오미리의 평촌으로 넘어가는 재이다. 이재를 넘으 면 오미리의 넓은 평지 마을인 평촌으로 가는 길목이 나오므로 '넓은목재→너분목재→너블목 재'가 되었다. - 방갓재 금마리에 있는고개로, 상주가 쓰는 방갓처럼 생겼다 하여 '방갓재'라 한다. - 사기막(沙器幕) 주막거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백토를 구워서 빚어낸 단단하고 매끄러운 사기그릇 을 판매하던 곳이므로 '사기막'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이곳에는 파편인 사금파리가 많이 있다. - 사기막 연자맷간 사기막에 있었다. 예전 큰 황소로 연자먀\ㅐ를 돌려 곡식을 찧는 연자맷간이 있었던 곳이다. - 골사기막 서낭당(城皇堂) 사기막에 있었는데 당(堂)은 1970년 새마을운동으로 불태워지고 지금은 커다란 가랍나무(참나 무)만 당목(堂木)으로 보존되고 있다. 전에는 성황님이 타고 다닌다는 철마 다섯 마리가 있었 고 당집 안에는 『城皇神位』라고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 학산벌(鶴山坪) 옛날 두루미와 학이 서식하던 들녘이다. - 골사기막 사기막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에는 대여섯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마을 앞에 좋은 묘자리가 있었는데 산의 주인은 금마리 갑부인 임부자의 터였다고 한다. 그 때 같은 마을에 사는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부친상을 당하자 그곳에다 아무도 모르게 밀장(密葬) 을 하였다. 그 후부터 밀양 박씨 집안은 차츰 번성하였다고 한다. 
영월군 중동면(中東面])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면.

◆위치:경북 상주시 ◆인구:2,162명(2001) ◆면적;51.61㎢ ◆문화재:수암종택(경북민속자료 70), 청룡사, 낙암서원, 회상리 고분군 

* 지명유래

- 녹반리(碌磻里) 녹전1리로 중동면사무소,우체국,지서가 있는 양지마을로 중동면의 중심지다. 상동읍 천평리의 치랭이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내덕리와 녹전리, 그리고 옥동을 지나 남한가으로 유입된다. 이 곳 계곡은 맑고 오염되지 않아 물과 바위가 항상 푸른 색을 띄고 있으므로 '푸를 녹(碌)자'와 '시 내 반(磻)자'를 써서 '녹반리'라 하였다. - 녹전시장(碌田市場) 녹전리의 양지마을에 5일 장이 개설되어 녹전 내리, 유전, 직동사람들이 이용했는데 옛날에는 송이버섯으로도 유명한 장터였다. - 양지마을 녹전리의 중심지로 면사무소, 지서, 녹전중학교 등이 있다. 음지마을의 건너편으로 항상 햇빛이 비치는 곳이므로 '양지마을'이라 한다. - 녹전소(碌田沼) 양지마을에 있는 녹전중학교의 느티나무 앞에 있다. 일명 무당소라고도 하는 푸르고 깊은 소 (沼)로 옛날에 어떤 무당이 굿을 하다가 이곳에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주막소 녹전리 주막앞에 있는 소(沼)이다. 예전부터 마방(馬房)이 딸린 주막을 운영해서 택호(宅號)를 마방집이라 부르던 주막 밑에 있는 소이므로 '주막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 장승백이 신작로가 나기 전에는 이목리(梨木里)의 선령약수(仙靈藥水)에서 장구목쟁이를 넘어 녹반리의 장승백이로 갈 수 있었다. 장승은 영월, 하동, 태백으로 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길손 들이 지나 다니는 교통의 중심지로 행인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장승의 일반적인 기능은 도로의 이정표와 노신(路神)의 역할을 하는 노표(路標)장승, 동네의 虛 한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우는 비보(裨補)장승, 마을로 들어오는 재앙과 액을 물리치는 부락 수호장승 등이 있었다. - 신배나무골 장승배기 서남쪽에 있으며 , 마을입구에 큰 신배나무가 있었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 추자나무골 신배나무골에서 제비바위로 가는 서쪽에 있다. 큰 가래추자나무가 있어서 '추자나무골'이라 하 였다. - 장고목재 31번 지방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은 장승배기에서 장고목재(장구목쟁이)를 넘어 선령약수 가 있는 이목리를 지나 영월쪽으로 걸어 다녔다. 이곳은 양쪽 산마루가 볼록하고 허리가 잘록 한 장고(杖鼓)의 목처럼 생긴 고개이므로 '장고목재'라 한다. 일설에는 옛날에 장군이 넘어온 고 개라는 얘기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다. 6.25때 녹전리의 청년 방위군이 이곳에서 북괴 군을 맞아 싸우다가 10여명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 녹반리 서낭당 녹전중학교 앞에 있으며, 수령이 300년의 느티나무 신목(神木)이 있다.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 이 되었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이 단종 대왕의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당제(堂祭)를 지냈으나 1972년 새마을운동 때 서낭당은 불태워 졌다. 이곳 서낭당은 소를 자방 제물을 쓸 정도로 큰 당 고사를 지냈으며 마을 사람들의 화합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 음지마을 양지마을건너편(남쪽)으로 험준한 목우산 밑의 마을이다. 항상 햇볕이 비치지 않으므로 '음지마 을'이라고 한다. 300여년전 한양 이씨가 이곳에서 터전을 살고 살기 시작했다. - 녹전 경찰전적비 녹전리 음지마을에 있는 경찰전적비이다. 강원 경찰의 최대 공방전이었던 녹전리 전투를 기념 하기 위해서 건립한 비석이다. 6.25 당시영월은 화력발전소, 상동중석광산, 마차광업소 등이 있 었으므로 이를 사수하기 위해 김인호(金麟鎬) 총경이 파견되었다. 그 당시 상동에 주둔하고 있 던 전경 제 1중대장 김해수(金海洙) 경위는 50명의 대원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영월화력발전 소에 집결하려고 상동을 출발하여 솔치고개를 넘으면서 북괴의 척후병 2명을 사살하고 녹젼교 부근에 집결해 있는 1개 소대를 격퇴시켰다. 이어서 후방에 있는 적 1개 대대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숫적으로 불리한 경찰은 피비린내 나 는 백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우리 쪽에서도 김해수 대장과 석상익(石商益) 경 위 등 24명이 7월 7일 전사하고 나머지 경찰들도 대부분 중경상을 입은 대격전이었다. 
영월군 하동면(下東面)
강원도 영월군 남동쪽에 있는 면.

◆위치:강원 영월군 남동쪽 ◆인구:2,050명(2001) ◆면적:170.99㎢ ◆문화재:순의사, 영월 용담굴(강원기념물 23), 영월 대야동굴(강원기념물 32), 영월 고씨굴(천 연기념물 219) 

* 지명유래

- 뱃나드리 하동면 대야리(大野里) 맛밭과 각동(角洞)으로 이어지는 나루터이다. 1950년 전만 해도 정선과 임계 등지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들어진 뗏목과 영월 지방 특산물인 담배, 콩, 옥수수 등 잡곡 을 실은 돛단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을 따라 서울 광나루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의 계곡 사이로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에 돛단배를 띄어놓고 구성진 정 선 아라리를 부르는 뱃사공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뱃사공들은 소금, 광목, 석유 등의 생필품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각동에서도 보 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이곳은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 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 진촌(津村) 일명 중말(중간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강 건너에 위치한 오룡동(五龍洞)과 두름 마을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으므로 '진촌'이라고 불렀다. - 길론 (吉論) 중말에서 고씨동굴이 있는 노리곡 뒤에 있는 마을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었으면 하는 염원에 의 해 만들어진 지명이다. - 봉우재 두름마을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이 고개를 지나면 영춘면(永春面) 용진리(龍津里)로 간다. 봉우 재 밑에는 석성(石城)인 대야산성(大野山城)이 있으므로 삼국시대의 왕검성, 완택산성, 태화산 성, 그리고 단양의 온달성을 연결시키는 봉수터(烽燧基)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에는 영월에 봉수대(烽燧臺)와 파발마(擺撥馬)제도가 없었다. 봉수제란 밤에는 불로서 보내는 봉(烽)과 낮에는 이리의 똥을 태운 연기로 연락하는 수(燧)를 합친 합성어로 평상시에는 1거 (炬), 적이 나타나면 2거(炬),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거(炬), 국경을 넘으면 4거(炬), 전쟁이 벌어 지면 5거(炬)로 연락을 하였다. - 물골 봉우재 밑에 있는 골짜기로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서 '물골'이라 부른다. - 두름 중말(中村)앞 나루터 건너에 있다. 맛밭에서 가재골을 지나야 갈 수 있는 교통의 오지로 자연 경 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10가구가 살았는데 가구 수가 조금만 늘어나도 마을 에 화재가 나거나 가축이 죽는 등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두름'이란 '생선을 10마리 씩 두 줄로 엮은 것'을 말하는데, 이 마을은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므로 그 지명을 '두 름'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언덕위 마을'이라는 뜻인 '두릉'이 '두름'으로 변한 것 같다. - 잿말 골마을(골말) 옆으로 예전에 이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다. 기와집은 재와집으로 소리가 나며 '기 와집 마을→재와집 마을→잿마을→잿말'이 되었다. 일설에는 재(둔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얘 기도 있다. - 오룡동(五龍洞) 중말의 강 건너에 있다. 두름으로 가기 전에 있는데 마을 뒤 구슬봉에서 뻗어 내리는 다섯 줄기 산등성이의 맥이 모이는 곳으로 그 형상이 용의 모습과 같다.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如意珠) 를 놓고 다투는 오룡쟁주(五龍爭珠)의 명당이 있어 '오룡동(五龍洞)'이라 한다. 1984년까지도 정태섭, 고온영씨의 두 가구가 살았었다. 오룡골 앞에는 '오룡소'가 있다. - 골마을 각동리가 소(沼) 형국이라면 골마을은 소가 물을 마시는 입에 해당하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이므 로 '골마을'이라고 한다. - 바디리굴 골말 위쪽에 있는 큰 굴로 각동을 소의 형상으로 보았을 때 황소의 눈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다. 예전에 난리가 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이 굴에서 피난을 하며 베틀을 준비하여 베를 짜던 곳이 다. 베틀기구인 바디가 이곳에서 발견되었으므로 '바디리굴'이라 하였다. - 솔고뎅이(혈구뎅이) 바디리굴 위에 있다. 각동리는 목마른 소가 물을 먹는 갈우음수형국(葛牛飮水形局)의 명당으로 이곳은 황소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하 여 이곳에다 쇠못을 박아 명당의 혈을 끊었으므로 '혈구뎅이→솔고뎅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원주(原州) 구곡(邱谷)
- 단구동과 서곡에서 한 글자씩 취한 절충지명

◆ 위 치 :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丹邱洞), 명륜동(明倫洞), 무실동 (茂實洞), 판부면(板富面) 서곡리(瑞谷) 일원 ◆ 면 적 : 428,685평(1,417,140m2) ◆ 연 혁 -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이었고, (혹은 백제에 속했다가 장수왕때 고구려 영토가 된 것으로 보기도 함) 678년 (신라 문무왕 18) 이곳에 북원소경 (北原小京:오늘날의 광역시)을 둠. - 940년(고려 태조 23) 원주목(原州牧)으로 고쳤고, 1019년(현종 9) 지주사를 둠. - 1259년(고종 46) 송필이라는 자가 원주 금대성에 웅거하여 반역하였으므로 일신현을 강등함. - 1260년(원종 원년) 다시 지주사로 복구되었고, 1269년(원종 10) 임유무(林惟茂)의 외갓집이라 하여 정원(靖原) 도호부로 승격됨. - 1291년(충렬왕 17) 글안병을 잘 막아냈으므로 익흥(益興) 도호부로 고쳤으며 1308년(충렬왕 34) 원주목으로 승격됨. - 1310년(충선왕 2) 강등하여 성안부(成安府)가 되었으며, 1353년(공민왕 2) 태를 치악산에 묻었으므로 원주목으로 승격됨. - 1396년 조선 태조때 강원도 감영을 이곳에 두었으며, 세조때 진(鎭)을 두어 보강함. - 1683년(숙종 9) 현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원주목으로 복구함. - 1728년(영조 4)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가 1895년(고종 32) 관례에 따라 원주군이 됨. - 이때 원주의 강원감영이 폐지되고 충주관찰부 관할이 됨. - 1917년 본부면이 원주면으로 되었고, 1937년 원주읍으로 승격됨. - 1955. 9. 1 원주읍이 원주시로, 원주군이 원성군이 됨. - 1995. 1. 1 원주시와 원주군을 통합하여 원주시가 됨

* 지명유래

- '원주(原州)'란 글자 그대로 지역이 개활(開闊)하고 넓은 벌판이라는 뜻이다. 옛 이름 평원(平原)이나 북원(北原)도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벌판이었음을 뜻한다. - 이 지역은 4통 8달의 요충지로서 싸움때마다 전략적으로 중요시된 곳이다. - 단구동(丹邱)은 조선시대 단구역 찰방이 있었던 곳이며, 판부면 서곡리는 서리골이 '서곡(瑞谷)'으로 변한 곳이다. - 단구동과 서곡리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구곡(邱谷)지구라 이름하였다. - 판부면(板富)은 본래 널다리(판자로 놓은 다리)가 있어서 판제면(板梯)이라 부르던 곳이었으나 1914년 일제가 부흥사면과 합하면서 두 면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판부면이 된 곳이다. - 원주시 명륜동(明倫)의 '명륜'은 주로 향교가 있는 곳에 붙이는 이름으로서 인륜을 밝히는 일을 뜻하며, 공자를 모신 건물이거나, 유학을 강화하는 건물의 이름이다. - 원주시 무실동(茂實)의 '무실'은 열매가 무성하다는 뜻이나 따로 전해지는 지명유래는 확인할 수 없다.
원주(原州) 단관(丹觀)
- '단구'와 '관설'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

◆ 위 치 :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丹邱洞), 관설동(觀雪洞) 일원 ◆ 면 적 : 305,000평(1,008,264m2) ◆ 연 혁 : 원주 구곡지구 참조

* 지명유래

- 단구(丹邱)는 본래 '단구(丹丘)'로 쓴 곳이다. '단구'는 신선이 사는 언덕을 뜻한다. - 조선 영조때 대구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대구(大丘)의 '구(丘)'자가 공자의 이름 '구'와 같으므로 이를 바꿀 것을 청원하였다. - 이에 따라 전국의 '구(丘)'자가 든 이름들이 '구(邱)'로 바뀌었으며, 원주의 단구동도 당시는 단구역이 있었던 곳이므로 그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4) - '관설(觀雪)'은 현지에서 '벌눈'이라 부르던 곳으로서 조선 인조때 현감 허후가 이곳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관설(觀雪)'이라 하였다. - 이는 '눈을 바라본다'는 뜻인데 벌>볼=관(觀)이요, 눈=설(雪)이기 때문이다
원주(原州) 무실(茂實)
- '무리실'이라 하여 크고 좋은 우물 있던 곳

◆ 위 치 : 강원도 원주시 무실동 일원 ◆ 면 적 : 228,000평(753,719m2) 

* 지명유래

- 무실동(茂實)은 원주군 판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 흥업면(금물산면)에 편입되었다. - 그후 1973. 7. 1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실리가 원주시에 편입되어 무실동이 되었다. - 1999. 1. 1 단계동 일부를 편입하였으며 본래 '무리실'이라 불렀으므로 '무실(茂實)'로 쓰게된 것이다. - 이곳에 크고 좋은 우물이 있어서 '무리실(무리=물)'이라 불렀다고 하며 판제면 시절에는 삼리(三里)라고도 하였다
춘천(春川) 거두(擧頭)
- '거두'는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는 뜻

◆ 위 치 :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東內) 거두리 일원 ◆ 면 적 : 72,000평(215,488m2) 

* 지명유래

- '동내면(東內面)'은 1989. 4. 1 신동면 신촌출장소지역을 면으로 승격시키면서 명명한 이름이다. - '동내'라는이름은 춘천의 동쪽에 위치하여 북쪽도 동면(東面), 남쪽도 동산면(東山面), 서쪽도 신동면(新東面) 으로써 모두 '동(東)'자가 들어가는 그 안에 있다는 뜻으로 '동내면'이라 하였다. - 거두리(擧頭)는 현지에서 '거들'이라 부르는 곳으로 이를 소리가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여 '거두(擧頭)'로 쓴 것이다. - '거두'는 고개를 든다는 뜻이며 이태백의 시에 '거두망산월(擧頭望山月)'이라는 구절이 있다. - 곧 고개를 들어 산 위에 뜬 달을 바라 보며 고향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춘천(春川) 석사(碩士)
- '석사(石沙)'가 '석사(碩士)'된 후 석사배출

◆ 위 치 : 춘천시 석사동, 효자동(孝子) 일원 ◆ 면 적 : (1)99,454평(329,074m2) (3)149,972평(495,775m2) 

* 지명유래

- 석사동(碩士)은 그전 춘천군 동내면 지역으로 '벌말'이라 불렀던 곳이다. - 그 벌판에 돌과 모래가 많아서 석사리(石沙里)라 하였다.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부내면(뒤에 춘천읍)에 편입되었다. - 이때를 전후하여 돌과 모래를 뜻하는 석사리(石沙里)가 큰 선비를 뜻하는 석사리(碩士里)로 된 것이다. 이곳은 부근에 춘천교육대학교, 춘천농대, 강원대학교가 들어서서 많은 석사를 배출하고 있다. - 효자동(孝子)은 본래 '효자문거리'라 부르던 곳이다. 이곳에 반효자의 정문이 세워져 있어서 '효자문거리'라 하였고, 효자동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춘천(春川) 칠전(漆田)
- 옛날 옻나무가 많았던 옻나무 밭

◆ 위 치 :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일원 ◆ 면 적 : 96,362평(318,552m2) 

* 지명유래

- '칠전(漆田)'이란 옻나무 밭을 뜻하며 이 지역에 옻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 대나무밭을 뜻하는 죽전(竹田),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 밭의 저전(楮田), 기장과 조 밭을 뜻하는 속전(粟田) 등 이와 비슷한 여러 종류의 지명이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하고 있다. - 그전에 춘천군 남부내면에 딸렸고, 상칠전리, 하칠전리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때 신동면 칠전리가 되었다가 1973. 7. 1 이 지역이 춘천시로 편입되었다
춘천(春川) 퇴계(退溪)
- 하천 흐름이 바뀐 '물러난 개울'

◆ 위 치 :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 온의동(溫衣洞) 일원 ◆ 면 적 : 180,242평(595,841m2) 

* 지명유래

- 퇴계동(退溪)은 조선조의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연상케하는 지명이다. - 이곳은 본래 현지에서는 '무린개'·'무리개'·'무릉계'라고 부르던 곳이다. - 그전 춘천군 남부내면 지역으로서 공지천이 하천 유로 변경에 따라 동북쪽으로 물러났으므로 '물러난 개울'이 무린개, 무리개, 무릉계로 불리워졌고, 이를 훈역(訓譯)하여 '퇴계'라 한 것이다. - 한문 글자의 '퇴(退)'는 해가 처음 동쪽에 떠서 서쪽으로 지기까지 그 운행이 느려서 깨닫기 어려우나, 이것이 하루의 진퇴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사람의 진퇴도 깨닫기가 쉽지 않으니 역시 인간사의 '퇴'가 어려운 일이다. 7) - 온의동(溫衣洞)은 춘천군 남부내면에 딸렸던 곳으로 오뉘골, 오눗골이라 불렀다. - 온의동은 글자 그대로 '따뜻한 옷'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 '이라는 현지 토착지명에 가깝게 한자를 표기한 음차(音借) 지명이다. - 왜정때는 상반정이라 불렀다가 해방후 왜식동명을 바꾸면서 '온의동'이 된 곳이다
춘천(春川) 후평(後坪)
- '후평'은 봉의산의 뒤쪽 들을 뜻함

◆ 위 치 :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 일원 ◆ 면 적 : (1)75,212평(248,635m2) (2)51,427평(170,007m2) (3)35,920평(118,744m2) ◆ 연 혁 - 춘천은 고대 부족국가인 맥국(貊國)의 고도(古都)로 전해오며 우수주(牛首週) 또는 우두주(牛頭州)라 함. - 637년(신라 선덕여왕 6) 이 지역에 군주(軍主)를 두었고 673년(문무왕 13) 이 지역을 수약주(首若州), 오근내(烏斤乃), 조근내(鳥斤乃), 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함. - 통일신라 경덕왕때 (757년) 삭주(朔州)로 고쳤는데 '삭'은 수약, 또는 수차약의 음근(音近)한 말임. - 그후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가 940년(고려 태조 23) 춘주(春州)라 함. - 995년(성종 14) 단련사를 두고 안변부에 딸리게 하였으며 1203(신종 6) 지방사람들이 안변부에 다니는 것이 멀고 험하여 힘들다고 하였음. - 이에 조정의 최충헌에게 뇌물을 주어 안양(安陽)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지춘주(知春州)로 강등됨. - 조선 태종때인 1413년 지금의 이름인 춘천군으로 고쳤으며, 1415년(태종 15) 도호부를 둠. - 1627년 (인조 5) 방어사 및 포토사를 두었으며, 1747년(영조 23)방어사를 철원으로 옮기고, 부사겸 좌영을 둠. - 1755년(영조 31)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765년(영조 41)도호부로 승격됨. - 1888년(고종 25) 유도부를 두고 경기도에 편입되었다가 1895년(고종 31) 강원도로 옮기고 춘천부가 됨. - 1896. 8. 4 도청을 춘천으로 옮김. - 1931. 4. 1 춘천면이 춘천읍이 됨. - 1949. 8. 15 춘천부가 춘천시로 개칭됨. - 1995. 8. 1 춘천시와 춘천군을 통합하여 춘천시로 함

* 지명유래

- 춘천(春川)의 옛 이름 '맥'은 Koma의 차훈 표기로서 군(君), 상(上), 신(神)을 뜻하고, 오근내는 Koma와 같은 '가막골'의 표기로 보며 수약, 수차약의 '수(首)'는 어른을 뜻하는 장(長), 즉 K si의 표기이다. 5) - 우두, 우수는 모두 '쇠머리'로서 우두머리(수리머리)를 뜻하고 있으며 이 지역이 삼한시대 도읍지임을 뜻한다. - 현지 촌로들은 신연강 6)과 소양강이 흐르는 이 지역은 샘이 많아서 '천전리(泉田里)'같은 이름이 있고 , 또 봄이 빨리 오므로 '춘천(春川)' 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 우두, 우수라는 이름은 춘천시 우두동의 우두산(牛頭山) 꼭대기에 '소슬뫼' 라는 곳이 지금도 있다. 이곳은 꼭대기에 묘가 있는데, 소가 뿔로 봉분을 파 버려도 하루밤만 지나면 도로 메꾸어지고 솟아 난다고 하여 이를 '소슬뫼' 라 불렀다고도 한다. - 이 소슬뫼를 일제때 일본인들이 내선일체를 합리화 하기 위하여 그들의 조상인 스사노오노 미꼬도가 우리나라에 와서 살았다는 소시모리(소슬뫼)를 이곳으로 보았다. - 그리하여 이곳에 신사를 지어 놓고 참배하는 등 소란을 떨었으나 그것과는 관계없는 이름이다. - 후평동(後坪)은 우리말의 '뒷들'을 뜻하며, 이곳이 춘천의 명산인 봉의산의 뒤쪽들이 되기 때문이다
태백(太白) 황지(黃池)
- 황부자의 전설지닌 하늘 못

◆ 위 치 :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일원 ◆ 면 적 : 20,532평(67,874m2) ◆ 연 혁 - 고대 부족국가인 실직국(悉直國)이 있었다고 하며 468년 고구려 장수왕이 쳐서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가 신라 제5대 파사왕때 신라에 병합됨. - 505년(지증왕 6) 실직국에 주(州)를 두어 군주를 배치하였고 639년(선덕여왕 8) 진주(眞州)도독부를 둠. - 658년(무열왕 5) 북진(北鎭)으로 고쳤으며, 760년 (경덕왕 19) 삼척군이라 함. - 995년(고려 성종 14) 삼척에 척주(陟州)단련사를 두었고, 1018년(현종 9) 강등하여 삼척현이 됨. - 1393년(조선 태조 2) 목조의 외가라 하여 삼척부로 승격시켰으며 1404(태종 4) 삼척도호부가 됨. - 1892년(고종 32) 다른 부, 군의 예와 같이 삼척군으로 되었고 - 1961. 1. 1 상장면이 장성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 7. 1 황지출장소가 황지읍으로 승격됨. - 1980. 4. 1 북평읍지역이 동해시에 편입되어 떨어져 나갔으며, 1981. 7. 1 장성읍과 황지읍이 태백시로 통합 승격됨

* 지명유래

- '태백(太白)'은 우리말의 으로서 대광명(大光明)을 뜻한다. - 그것은 '크게 밝은 뫼'이며 '한박달' (달=땅, 산)이요, 은 '배와 호전(互轉)되므로 한박달은 '한배달'로 되며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처음 신시(神市)를 열었던 민족의 터전이 태백산이다. -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 환웅천황이 내려 온 그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고 그 신비하고 성스러운 신산(神山)을 태백산(太白山)이라 이름하여 영험스러운 성역(聖域)으로 숭배하여 온 것이다. - 민족의 이동에 따라 여러 곳에 태백산이라는 이름이 생겨 났으며 민족은 분열되어도 풍습은 같아 남쪽으로 이동한 우리 민족(삼한)은 북쪽의 태백산(白頭山)과 지리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산을 찾아 태백산이라 이름하고 그 산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옛 풍습대로 하늘에 제사 지내니 그것이 지금의 태백시에 있는 태백산이다. - 하늘을 상징하는 것은 태양이며, 태양(太陽)은 밝은 빛을 의미하니 천신자손(天神子孫)인 우리 민족을 밝은 민족(白民)이라 하였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산을 밝은산(白山)이라 하였다. 밝은산(白山)에 제사 지내는 풍습을 가진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白山民族)라 하였고 태백산(太白山)은 많은 밝은산(白山) 가운데 가장 큰 밝은산(太白山)이란 뜻이다. - 이러한 의미를 가진 태백산 밑에 형성된 장성읍(長省邑)과 황지읍(黃池邑)이 인구의 증가로 시(市)로 승격되면서 합쳐지게 되었는데 시(市)의 명칭을 두고 장성시로 할 것이냐 아니면 황장시(黃長市) 또는 장황시(長黃市)로 할 것이냐, 하다가 두 읍(邑)이 모두 태백산 밑에 있으니 공평하게 태백시로 하기로 한 것이다. 8) - 황지동(黃池)은 황부자 전설을 지닌 '황지(黃池)'라는 못이 있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 황지는 낙동강 원류의 하나이며 여기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 옛날 이곳에 살던 황부자집에 태백산 중이 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이때 마굿간을 치우던 황부자가 곡식을 주지 않고 소똥을 퍼주니, 이것을 본 황부자의 며느리가 민망하게 여기고 시부모 모르게 쌀 1되를 퍼다가 중에게 시주하며 사죄하였다. - 이에 중이 며느리에게 "이 집이 곧 망할 것이니 나를 따라오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홍천(洪川) 연봉(蓮峰)
- 옛날 보안도 찰방에 딸린 연봉역 있던 곳

◆ 위 치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연봉리 일원 ◆ 면 적 : 26,027평(86,040m2) ◆ 연 혁 - 홍천지방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임. -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때 중국식의 두 글자 지명으로 바꾸면서 녹요 로 고치고 삭주(춘천)의 영현이 됨. - 940년(고려 태조 23) 지금의 이름인 홍천으로 고침. (혹은 고려 현종 때인 1018년 설도 있음) - 1043년(인종 21) 감무를 두고 별호를 화산(花山)이라 함. - 1413년(조선 태종 13) 관례에 따라 감무를 두었던 곳에는 현감을, 영현에는 현령을 두었는데, 이때 감무를 둠. - 1895년(고종 32) 관례에 따라 홍천군이 됨. - 1945년 38°선이 그어짐에 따라 인제군의 남쪽 지역을 신남면이라 하고 인제군 내면과 함께 편입함. - 1951년 인제군 전체가 수복되자 1954년 신남면은 다시 인제군으로 환원하고, 내면은 그대로 관할함. - 1963. 1. 1 홍천면이 홍천읍으로 승격됨

* 지명유래

- 홍천(洪川)은 이름 그대로 '넓은 내'인 '홍천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이름과 현실이 일치한다. 그래서 홍천을 찾은 옛 시인은 "산과 물이 한 쌍의 족자를 이루었는데, 연기와 산안개는 오랜 이웃이라네" 하고 노래하였다. - 북한강의 상류지역으로서 옛 이름 '벌력천'도 물이 많고 궁벽한 산간지대를 뜻한다. - '연봉'은 옛 문헌에 '연봉(連峰)'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산 봉우리가 중첩함을 나타냈는데 뒤에 '연꽃연(連)'자로 바뀌었다. 9) - 연봉(連峰)은 조선시대에 보안도 찰방이 관할하던 연봉역이 있었던 곳으로 연봉리 관운터가 그 터이며, 남쪽의 백동역(白冬), 북쪽의 천감역(泉甘)과 연결되었다

 

* 충청남도

공주(公州) 신금(新錦)
-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뜻을 지닌 곳

◆ 위 치 : 충남 공주시 신관동(新官), 금흥동(錦興) 일원 ◆ 면 적 : 173,000평(571,901m2) ◆ 연 혁 - 본래 백제의 고마나루, 곰내로서 이를 웅천(熊川) 이라 함. - 개도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의하여 한강의 아차산에서 피살되매 그 아들 문주왕이 한성을 버리고 이곳 웅진에 도읍을 옮김. (63년간) - 538년(성왕 16) 다시 도읍을 남부여(부여)로 옮겼고 백제가 망하자 660년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됨. - 676년(문무왕 16) 웅진도독부가 당나라로 물러갔으므로 686년(신문왕 6) 웅천주로 고치고 도독을 둠. - 757년(경덕왕 16) 웅주(熊州)로 고치고, 940년(고려태조 23) 지금의 이름인 공주(公州)로 고침. - 983년(성종 2) 공주목이 되고 995년(성종 14) 절도사를 두고 하남도에 붙임. - 1012년(현종 3) 안찰사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강등하여 지주사(知州事)가 됨. - 1341년(충혜왕 2) 원나라 평장사 활활치의 아내 경화옹주의 외향이 되므로 공주목으로 승격됨. - 조선 세조때 공주에 진을 두었으며 그 후 세차례 공주현으로 강등되기도 함. -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공주부가 되었고 이듬해 공주군이 됨. - 1931. 4. 1 공주면이 공주읍으로 승격됨. - 1986. 1. 1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되고 잔여지는 공주군이 됨. - 1995. 1. 1 공주시와 공주군이 통합되어 공주시가 됨

* 지명유래

- 공주(公州)의 곰나루, 고마나루=웅진(熊津)의 곰 전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여기에 수록하지 않는다. - 다만 고마=곰의 관계는 삼국시대 중기를 전후하여 '고마'와 '곰'이라는 말이 혼용되었고, 이 '곰'을 나타내기 위하여 공(公), 공(功), 공(工), 궁(弓)이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마=곰→금강이 되고 곰→공주가 된 것으로 본다. 5) - 이와 함께 곰=웅(熊)의 뜻은 동물 곰을 뜻하는 외에 신(神), 대(大), 다(多), 그리고 뒤(後) 또는 북(北)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그에 따르면 경북 경주시의 남천=알천(閼川)은 앞을 뜻하는 (前)을 나타낸 것이며, 공주의 금강에 대한 고마나루의 '고마'는 뒤, 북을 나타내므로서 대조되는데, 다만 동물 '곰'과 동음이의어로 보았다. 6) - 공주시 신관동(新官)은 공주군 장기면에 속하였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일신역(日新驛)의 관청이 있어서 관동(官洞), 관골이라 하였는데 그 북쪽에 새로된 마을이므로 신관동이라 하였다. - 금흥동(錦興)은 그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마을앞 금강(錦江)과 장흥리(長興)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금흥동이라 부른 것 같다. - 신관동은 그전 일신역(日新)의 관청으로 인한 이름인데 '일신'은 날로 새로와 진다는 뜻으로서 이 지역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금산군
충청남도 금산군 중앙부에 있는 읍.

◆위치 : 충남 금산군 중앙부 ◆인구 : 2만 5281명(2001) ◆면적 : 21.55㎢ ◆문화재 : 금산향교(충남기념물 121), 탑선리 석탑(충남문화재자료 326), 아인리 석탑(충남문 화재자료 327), 금산 대원정사(충남문화재자료 337) 

* 지명유래

▶신대1리 - 무주선변에 인접된 마을로써 예로부터 유기그릇을 만드는 새로운 점터가 있어 새점터 또는 증티라 하였고 - 엄정리는 마을뒷산에 엄나무가 많아 엄정리라 불림 ▶신대2리 - 송림고개 남쪽에 위치하여 앞에는 금산천이 흐르고 양지바른 곳으로 심신이 편하다하여 영 처라불림 ▶중도1리 - 지형이 섬처럼 되어있어 중도리라 했으며 이지역은 그 중다리(中茶里)이라 불림 ▶중도2리 - 흥촌리(興忖里)라 불림 ▶중도3리 - 금산의 냇가에 있으므로 "냇가동네"라는 뜻의 강변담이라고 불림 ▶중도4리 - 옛날에 활 쏘는 곳이 있다하여 사정골 이라 불렀다 ▶중도5리 - 아주 외졌다하여 뒷담말 또는 뒷고내라고 하였다 ▶중도6리 - 탑이 있어서 탑선(塔仙)이라 불림 ▶중도7리 - 아들이 많다하여 만자동 또는 큰부자가 나다하여 만재동이라 했는데, 지금 금산중ㆍ고등 학교가 생겨 그 이름과 부합된다고 말하고있다 - 옹기점은 마을에 옹기점이 있음으로 마을 이름도 옹기점이라 했다 
금산군 군북면(郡北面)
충청남도 금산군 북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인구 : 3,306명(2001) ◆면적 : 57.82㎢ 

* 지명유래

▶호티1리 응골 : 옛날부터 선비로서 행세해야 할 사람들이 숨어 산다 해서 응골 이라하고 참샘이 있는 마 을이라 해서 오수물이라 부른다. ▶호티2리 마을에 네거리가 있다하여 사거리 또는 사무리 흰 구름을 항시 벗삼는 마을이라 백운이라 부르 다가 백원리 →배원리로 변함 ▶호티3리 마을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송림이라 부른다. ▶내부1리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배말이라 부르고 1995년에 정착농원으로 이룩된 마을로 부촌을 이룩 하기 위해 생긴 마을이라 부(富)말 ▶내부2리 가마실 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가마실 이라고 부른다 마을 입구 양쪽에 효자문이 있고 천안전씨가 많이 거주한다 ▶내부3리 마을앞에 시원한 우물이 있으므로 처음에는 시린물이라고 불러 오다가 변하여 시드물 이라고 부른다 ▶천을리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한을, 한눌, 천을 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학문에 깊은 노익장들이 많이 주거하는 마을이라 노른이라고 부른다. ▶조정리 산과 들에 숩이 우거져서 새들이 많이 서식한다 하여 조정리라 부른다 옛날에 장자가 이 마을에 살 때에 그 집에 큰 대문이 있었는데 그 안쪽에 마을이 있어 대문안이 리고 부름 
금산군 금성면(錦城面)
충청남도 금산군 중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인구 : 5,111명(2001) ◆면적 : 34.77㎢ ◆주요문화재 : 칠백의총(사적 105), 금산 충렬사(충남문화재자료 17), 온양이씨 어필각(충남문 화재자료 22), 고경명선생비(충남문화재자료 28) 

* 지명유래

▶양전1리 -양전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양지쪽에 밭이 많다하여 양전이라 함 -마을내 큰길너머공원등 자연공원과 유적지 고경명 선생의 비각이 있음 ▶양전2리 -양전리의 음지쪽에 있다하여 음전이라 하며 씨족 집단의 마을로 김해김씨가 60%로 구성 ▶양전3리 -금산읍과 인접 생활권이 금산읍이며 금성근로자아파트와 위성지구국이 있음 -다목적군민회관이 건립한 지역으로 앞으로 획기적인 발전이 기대되는 마을임 ▶도곡1리 -금산군의 서일면 지역으로 평원산(264m) 있음 -군내 최고의 복숭아재배 단지로 매년 4월이면 복사꽃이 만발 ▶도곡2리 -마을앞에 못이 있다하여 못안과 마을 주위에 다섯봉우리의 산이 있는 오룡에는 성주배씨와 나주임씨등 소수 씨성들로 구성 ▶화림1리 -마을 주위에 12봉의 산이 둘러싸고 있어 계절따라 꽃이 피는 숲이 우거져 화림동이라 하며 군 도4호선이 금산읍 양지리와 연결되어 있음 ▶화림2리 -마을 주위에 12봉의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군도 4호선이 진산면 엄정리와 연결되고 있음 -마을위에 달처럼 생겼다하여 지어진 월봉산(498m) 이 있음 ▶상가1리 -금성면의 소재지로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이 왜군을 맞아 격전한 곳으로 옛날에 길을 안내하는  관집 금곡원이 금곡(金谷) 또는 쇠실이라 함
금산군 남이면(南二面)
충청남도 금산군 남서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인구 : 2,690명(2001) ◆면적 : 98.19㎢ ◆주요문화재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 보석사 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 143), 금산 백령성(충남기념물 83), 의병승장비(충남문화재자료 23), 의선각(충남문화재자료 29) 

* 지명유래

▶하금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쇠내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쇠내, 아래새내, 하 금천, 하금천리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용동리, 항강리, 중금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금리라 부름 ▶상금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 쇠내 위쪽이 되므로 웃쇠내, 웃새내 또는 상금천 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중금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금리라 부름 ▶건천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산이 많은 그 사이에 흐르는 냇물과 들에 흐르 는 냇물에 돌이 많아서 물이 돌속으로 흐르므로 냇물이 말라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건천(乾川)이라 부름 ▶역평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제원역의 말을 먹이던 곳이므로 역들 또는 역 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역평리라고 부름 ▶대양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양지바른 곳이라 해서 양짓말, 양지촌 또는 대 양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명고리, 두문동, 역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양리라 부름 ▶흑암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검은바위가 있으므로 검은바위 또는 흑암이 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혁 때에 성산리를 병합 흑암리라 부름 ▶구석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거북바위 또는 구 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모티리, 고답리를 병합하여 구석리라 부름. 원래는 거북바위 마을이라 하여 구석리(龜石里)라고 쓰였으나, 일제시대 일인들이 구(龜)자가 쓰기가 어렵다하여 구(九)자로개명 되었다고 함 ▶매곡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매실나무가 많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으므로 통 칭 매실 또는 매곡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풍전리, 호티리 일부를 병합하여 매곡리 라고 부름
금산군 남일면(南一面)
충청남도 금산군 남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인구 : 3,488명(2001) ◆면적 : 47.14㎢ 

* 지명유래

▶덕천리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마을 앞으로 봉황천이 흐르고 뒤에는 덕망을 준 다는 덕기봉이 있어 덕천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평대리, 월평리, 초현리, 홍 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덕천리 함. - 면적은 6.0㎢이며 130가구에 337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마장리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말을 키우는 마장이 있어 마장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삼태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장리 함. - 면적은 6.7㎢이며 175가구에 442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상동리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동수 위쪽이 되므로 웃동수 또는 상동수, 상동리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하동리,마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동리라 함. - 면적은 5.5㎢이며 116가구에 312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신동리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사기소 아래에 새로 마을이 크게 생김으로 새 말 또는 신동리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수철리, 사기리를 병합하여 신동리라 함. - 면적은 3.7㎢이며 85가구에 211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신정리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큰 정자나무가 새롭게 단 장함으로 신정이란 이 름이 유래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덕흥 리, 홍도리 일부를 병함하여 신정리라 함 - 면적은 5.6㎢이며 130가구에 336명이 거주하고 있다 ▶신천리 -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일면의 지역으로 봉황천, 즉 새내가 가되 므로 새내 또는 신천이 라는 이름이 유래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양대리와 남이면 매곡리 일부를병합하여 신 정리함 - 면적은 4.9㎢이며 72가구에 200명이 거주하고 있다 
금산군 복수면(福壽面)
충청남도 금산군 북서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인구 : 4,276명(2001) ◆면적 : 56.24㎢ ◆주요문화재 : 조헌사당(표충사)(충남문화재자료 20), 수심대(충남문화재자료 26) 

* 지명유래

▶용진1리 복수면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삼면이 산으로 가려있으나 마을 서쪽으로 넓은들이 조성된 기름 진 농토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추부면과 접하고 남쪽으로 목소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마을주민 들은 부지런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살기 좋은 마을로서 가호수 75호에 190명 인구가 살고 있다. ▶용진2리 자라밭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며 삼면을 산으로 두루고 남쪽으로는 들이 트인곳에 깊숙이 마을 이 자리해 있다.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전씨(全氏)들이 피난을 와서 차즘 이룩한 마을이라 처음 에는 자래전(自來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자라전(自羅全), 그리고 자라밭이라고 부르는 마 을이며, 그후 제주고씨(濟州高氏)들이 많이 정착하여 조선시대 말기에는 많이 세거했던 마을로 서 가호수 67호에 141명 인구가 살고 있다. ▶용진3리 옛날부터 마을지형이 배터라고 하며 지금의 용진분교 자리가 배의 한 복판이 된다고 하며, 마 을 어디를 파도 물이 잘 나오고 물이 흔한 것은 용이 나온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서 마을 도 용나리, 용나루, 용진이라고 부르며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많이 살고있으며 가호수 67호에 164명 인구가 살고 있다. ▶다복1리 원다복 마을은 복수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오곡마을에서 들 건너 산골짜기에 자리한 마을 다 복골 또는 다복동이라 부르며 남쪽으로는 진산면 만악리로 넘어가는 고개 동면재가 있으며 옛 날부터 마을에 수난없이 복을 누리는 마을이라 해서 다복골, 다복동이라 부르며 가호수 70호에 169명인구가 살고 있다.월곡마을은 냇가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모양이 반달과 같다 해 서 월곡이라 부른다 ▶다복2리 월곡마을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오곡(梧谷)아라 부르며, 또한 오동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동나 무가 많이 있다 해서 오동골, 오곡이라 부르는 마을로서 경주김씨의 집성부락이 있었던 마을이 다. ▶지량1리 구만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을 지랑이, 지량이라고 부르며 산 높이 333m의 조중봉을 서남쪽에 두고 그 아래 버드내를 안고 있듯이 지렁이처럼 길게 뻗어 있는 마을로 연주현씨(延州玄氏)와 김제김씨(金堤金氏),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옛날부터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지량2리 지랑이 동북쪽에 있는 큰 마을을 구만리(九萬里, 龜萬里)라고 부르며 대전으로 흘르는 안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지형이 거북이가 물에 잠겨있는 형국이라 해서 그리 부르며 회덕황씨(懷德黃氏)들의 집성부락 이었던 마을이다.구만리 서쪽으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한우물, 대정리(大井里)라고 부르며 마을에 큰 우물이 있으므로 한우물 또는 대정리라고 하며 해주오씨(海州吳氏)들이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금산군 부리면(富利面)
충청남도 금산군 남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인구 : 4,318명(2001) ◆면적 : 66.44㎢ ◆주요문화재 : 청풍사(충남문화재자료 16), 덕산사(충남문화재자료 281), 귀암사(충남문화재 자료 301), 금산 물페기농요(충남무형문화재 16) 

* 지명유래

▶창평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부서면의 지역으로서 사창이 있었으므로 창들, 창평이라 부르던 지 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때 내답리, 나천리 일부와 부북면의 백암리를 병합하여 옛날에 큰 사창이 있었던 창들의 이름을 따서 창평리라 하였다. ▶선원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부서면의 지역으로서 선원, 가덕리, 기물리 등 세 마을이 있었던 지 역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선인등대의 형국이라 하여 1914년 행정 구역 폐합때 이 지역을 리 단위로 편성할 때에 그 형국의 뜻을 따라 선원리라 하고 부리면에 속하게 됐다. ▶관천리 관천리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갓바래 또는 비파리라고 불러오다가 1914년경에 관천리라고 부르 게 되었다. 뒷산에 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며 마을 중앙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므로 관천 또는 관천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부동면에 속했던 지역이었다. ▶불이리 고려시대에는 부화(富禾)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즉, 부리현에서 가장 벼가 잘 익으며 따라서 부 를 누린다는 곳이다. 지금의 부화지라고 부르는 골짜기나 부아지들이 고려시대 말기 이전에는 이지역에서 가장 큰 부락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개국과 함께 태종 이후에 야은 길재의 불사이군의 업적을 높이 사서 그가 자랐던 이 지역이 불이동(不二洞)으로 지명이 바뀌었 으나 원 지명은 부화(富禾)였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부화지 또는 불이동으로 불러지던 지역이 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때에 이웃의 이정리를 병합하여 불이리라 해서 부리면에 속하게 되 었다. ▶양곡리 조선시대 초기에느 통칭 경당두라고 불러오던 지역이다. 현내리의 머녀골과 평촌리의 들말, 불 이리의 부화골 부근에서 발굴되는 와당의 흔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에는 많은 기와집이 자 리를 잡았던 지역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두곡에 마을이 들어서고 미량리가 마을로 등 장하면서부터 세 동네가 이 지역 마을의 전부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때에 부서면의 불이 리 일부, 부북면의 수파리 일부를 병합하여 미량과 두곡의 이름을 따서 양곡리라 하고 부리면 에 속하게 되었다. ▶평촌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동면의 지역으로서 부동면소가 있었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에 상평리, 하평리와 부북면의 수파리 일부를 병합하여 들에 마을이 있으므로 평촌리라 하였다. ▶신촌리 조선시대 초기에는 마을이 없었던 곳으로 사료되나 임진왜란 후에 서서히 마을이 들어선 것 같 다. 현재 거주하는 사람들도 임진왜란 후에 이곳에 정착한 그 후손들 같다. 새로 터를 잡고 이룩 한 지역이므로 새터, 신촌이라고 불려온다. 조선시대에는 금산군 부동면의 지역이었다. 1970년 대부터는 신촌리에서 새터, 춘호리, 내장리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금산군 제원면(濟原面)
충청남도 금산군 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동부 ◆인구 : 4,007명(2001) ◆면적 : 64.30㎢ ◆문화재 : 신안사 대광전(충남유형문화재 3), 금산 천내리 용호석(충남유형문화재 4), 용강서 원(충남유형문화재 19), 신안사 극락전(충남유형문화재 117) 

* 지명유래

▶구억리 제원면의 중앙 위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는 발군산을 기점으로 한 산악지대이며 서쪽으로는 넓 은들이 펼쳐진 지역에 구억리는 자리한다. 동쪽으로는 대산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수당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제원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동곡리, 명곡리와 경계를 한 지역에 있다. 옛날에는 깊은 산골이었으나 근래에 와서 군북면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놓여지고 또한 그 도로 가 포장됨에 따라 교통이 편리해진 지역이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후로 본다. 백제 때는 진내군 의 지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진례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도 그리 속해 전해오다가 제 25대 충 렬왕 31년(1305)에 승격한 금주에 속했으며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금성리 동쪽으로는 산 높이 309m의 소사봉이 우뚝 서서 그 여맥으로 산악지대를 조성한 그 안팎에 묘 한 분지를 조성한 주위에 금성리는 자리한다. 남쪽으로는 동쪽으로 흐르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부리면 신촌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용화리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부리면 평촌리, 선원리와 접 하고, 그리고 북쪽으로는 저곡리와 경계를 나누는 지역에 금성리가 자리한다. 소사봉 아래에는 금바들이라고 부르는 들이, 소사봉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냇물을 끼고 넓게 들을 조성하고 있으며 마람들, 산점들 등이 풍부한 전답 조성에 이용되는가 하면, 북 쪽으로는 저곡리 닥실로 넘어가는 닥실재가 있고 서쪽으로는 명암리로 넘어가는 술내미재가 있 는가 하면, 금성골 동쪽에는 산 높이 261m의 큰봉이 우뚝 서서 묘하게 인맥을 조성하는 적지로 지목되는 곳이 이 지역이라 할 것이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후로 본다. 백제 때는 진내군에 속했 으며 신라 때는 진례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도 그리 속해 내려오다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한 금주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 기 태종 13년(1413)부터 금산군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그리 큰 부락의 형성이 없었 던 지역이었으나 새롭게 단장되는 부락의 형성을 가져오기는 연산조시대 이후로 보아야겠다. 연산군의 사화를 피하여 은퇴한 김초산공, 즉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많이 거주한다. ▶길곡리 제원면의 북쪽 중앙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신안리와, 서쪽으로는 동곡리와 접하며, 남쪽으로 는 대산리와, 그리고 북쪽으로는 군북면 산안리와 경계를 나누는 지역에 길곡리는 자리한다. 군북면과 접한 지역에는 산 높이 667M의 국사봉이 준엄하게 서있으며, 남쪽으로도 대산리와 접 하는 지역에 산높이 502m의 천앙봉이 땅을 괴고 있는 듯 우뚝 서서 온통 산봉으로 하늘을 가리 고 있으나 그래도 그 사이사이로 물이 흐르는 냇물이 있고 사람의 인적이 들리는 길이 있는 것 을 볼 때에 사람의 목숨도 자연만큼 끈질긴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지역이다. 첩첩산중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엄두도 못냈을 옛날을 생각해 볼 때에 현대에는 어디든 먹을 것을 채울 수 있다면 사람의 발길은 언제나 들어서기 마련이라는 한 경제학자의 말이 지당하게 끔 생각하게 하는 산 골이 길곡리다. 인류의 정착은 고려시대 전후로 본다. 백제 때는 진내군의 영역이었으며 신라때는 진례군의 영 역이었다. 고려 때에도 그리 속해 내려오다가 제 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한 금주에 속했 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금산군에 속했었다. 산간벽지인 길곡리의 취락과정은 문헌의 빈약으 로 확인할 길이 없으나 부락의 형성은 조선시대 광해군조 이후가 아닌가 한다. 사화 및 정변의 잦은 발생에 따라 한 씨족의 피난과 함께 이지역이 개간되고 부락이 형성되었다는 구전과 길곡 이란 지명은 상당한 고통이 따랐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은 인상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동일면의 지역으로서 긴 골짜기가 되므로 질골, 길골 또는 질곡,길곡 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티후리와 신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길곡리 라 하고 전라북도 금산군 제원면에 편입 금산군 제원면 길곡리가 되었다. 리의 면적은 7.3㎢에 가호수는 60호이며 인구는 288명이다. 
금산군 진산면(珍山面)
충청남도 금산군 중서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중서부 ◆인구 : 4,337명(2001) ◆면적 : 80.44㎢ ◆문화재 : 진산향교(충남기념물 122), 금산 이치대첩지(충남기념물 154), 태고사 대웅전(충남 문화재자료 27), 만악리 지석묘, 묵산리 성터 

* 지명유래

▶만악1리 다른 마을보다 늦게생긴 마을로써 처음에는 만락(晩落)이라 부르다가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많으므로 만악동,만악골이라 고쳐부르게 된 풍류의 마을로 소문난 곳임 ▶만악2리 초미동(初味洞) : 만악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초내밋골 또는 초내미라고 부르고 그 골짜기가 안고있는 것같은 지형이라 하여 초미동으로 부르게됨 ▶만악3리 놋종골 : 유점(鍮店)동이라고도 부르며, 옛날에 놋그릇 점이 있었던 마을임 신동(新洞) : 마을이 새로 생겨다 하여 신동이라 부름 탱석동 :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된 마을로 지석묘가 있어 괸돌이라고도 부르며, 상탱석(위괸돌) 하탱석(아래괸돌) 이라고도 부름 ▶엄정리 산이 아기자기해서 풍수지리설에 따른 지관들이 명당자리를 찾아 많이 출입했던 마을로 엄나무 정자가 있었다하여 엄나무정이, 엄정이, 엄정(嚴亭) 이라고도 함 ▶부암1리 일명 뜬바우 또는 부수바우라고도 부르며, 마을 동쪽에 있는 바위로 큰바위 위에 작은바위가 얹어 있는 바위로 긴 실을 마주잡고 바위틈에 가로 넣으면 그 실이 거침없이 빠져나가는 바위 이므로 뜬바위라고도 부름. ▶부암2리 가막골 : 옛날 마을에 그릇가마가 있었으며, 또한 마을에서 분토가 났으므로 가막골, 분톳골 이 라 부름 ▶부암3리 목(木) 골: 마을 큰 못이 있어 못골이 변하여 목골(목동)이라 부름 ▶석막리 원래 돌이 많아서 돌매기. 돌막 또는 석막이라 불러 왔으며, 말거리, 명막골, 잔디울, 달박골, 장 막골의 자연부락 형성하고 있으며, 산간마을로써 돌이 병풍처럼 있다는 데서 유래
금산군 추부면(秋富面)
충청남도 금산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남 금산군 북부 ◆인구 : 7,728명(2001) ◆면적 : 49.10㎢ ◆문화재 : 금산 행정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84), 태조대왕태실(충남유형문화재 131), 추정리 성터 

* 지명유래

▶추정리 - 동정리 : 가래울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동쪽에 큰 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지 금은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어 문화마을이라 불린다. ▶마전리 - 미사기(미사리) : 마전 동북쪽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다. - 붉은 뎅이 : 마전 서쪽에 있는 마을 붉은 흙이 많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 숲들 : 마전 동쪽 숲이 많은 들에 있으므로 숲들이라 했다. - 양청이 : 마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양청이 고개(추부리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으므로 고 개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 태봉촌 : 마전 서북쪽에 태봉산 밑에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 홍문거리 : 마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홍살문이 있었으므로 홍문거리라 했다. - 시장촌 : 마전의 중심부에 있는 마을로 시장이 있고 4,9일 장이 선다. - 섹길이 : 마전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돌길이었으므로 석길이 변하여 섹길이 되었다 - 진도리 : 땅이 너무 질퍽하여 진다리라 했다가 진도리로 변했으며 한자화하여 진도리가 되었 다. ▶용지리 - 못골(목골, 지동) : 용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큰 못이 있었으므로 못골이라 하였으며, 못골 이 변하여 목골이 되었고, 지동 이라고도 한다. 지상동과 지하동으로 나누어 부른다. - 용골(용지, 용동) : 웃못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용난 굴이 있으므로 용골, 또는 용동이라 했다. - 장바위 (장암) : 용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장바위라는 큰바위가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비례리 - 마랑골(마음동) : 새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말이 소리치며 뛰는 지형이라 하여 마랑골 또는 마음동이라 했다. - 골말 : 새터 서쪽 골짜기에 있으므로 골짝마을, 변하여 골말이라 했다. - 새터(신터) : 비려울 옆에 새로된 마을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청용골 : 새터 왼쪽 곧 청룡 끝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바디울 : 마음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바디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부리 - 남산리 : 웃자부리 남쪽 남산 밑에 있으므로 산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 어덕말 : 상촌 서북쪽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옥대 : 상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동이면의 감옥이 있었으므로 옥대라 했고, 좋은 글자로 구슬 옥자을 써서 옥대라 개칭했다. ▶장대리 - 숭암 : 동면장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 어귀에 문바위 (문처럼 생긴 바위로 옛적 효자 감 사 김천석이 독서 하던 곳 )가 있으므로 숭암이라 했으며 위치에 따라 상하숭암으로 나누어 부른다. ▶요광리 - 검한리 : 요광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칼고리 같다해서 붙인 이름으로 변하여 검한리 라 했다. - 박오재 : 복호산 밑에 있는 마을로 박우재 아래에 있으므로 박오재라 했다. - 은행정이 : 요광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으므로 은행정이 또는 행정이라 했으며 은행나무 밑에는 행정헌이란 정자가 있어서 행인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 장산미 : 마달령(머들령) 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긴 산의 꼬리부분에 있으므로 장산미라 했다. ▶신평리 - 노루골 (장동) : 벌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노루가 많았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 벌말 : 신평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벌판이 되므로 벌말 또는 평촌이라 했다. - 신탑리 : 벌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큰 절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성당리 - 금동 : 성당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주변환경이 비단같이 아름다우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지경수 : 금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북, 충남, 충북, 3개도의 경계가 되므로 지경수 또는 지경리라 했다. - 성덕리 : 성덕산 밑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기호(畿湖)지방
경기도지방과 호서(충청도)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논산(論山) 강산(薑山)
- 생강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강매'라 한 곳

◆ 위 치 : 충남 논산시 부창동(富倉), (그전에 은진면 강산리 포함) ◆ 면 적 : 111,119평(367,336m2) ◆ 연 혁 - 논산지역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서 '놀미'(논산)라 하여 황등야산군(黃等也山), 덕근군(德近)에 걸쳐 있던 지역임. - 이외에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 가지내현(加知奈)(갈내:乫奈 또는 신포현: 薪浦)도 논산지역에 있었음. -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 황등야산군은 황산군(黃山)으로, 덕근군은 덕은군(德殷)으로, 가지내현은 시진(市津)으로 고쳐서 덕은군 영현으로 하였으며, 열야산현은 이산(尼山)으로 고쳐서 웅진(공주)의 영현이 됨. - 940년(고려 태조 23) 황산군은 연산현(連山)으로, 덕은군은 덕은(德恩)으로 고쳐졌으며, 1018년(현종 9) 이산현은 공주에 붙였다가 갈라서 감무를 두었고, 덕은과 시진현도 공주에 붙임. - 1397년(조선 태조 6) 시진현이 다시 설치되었다가 1406년(태종 6) 덕은현에 편입되었고, 1419년(세종 원년) 은진현(恩津)으로 되면서 시장으로 변했다가 금강의 흐름이 장마에 하천 유로(流路)가 바뀌자 쇠퇴 하여짐. (현재 논산시 등화동 일대이다) - 한편 연산현은 1413년(태종 13) 관례에 따라 현감을 두었고 이산현은 1414년 석성현(石城)을 합하여 이성현(尼城)이라 함. 7) - 1646년(인조 24) 연산과 은진현을 합하여 은산현(恩山)이라 하였다가 1656년(효종 7) 다시 나누어짐. - 이때 이성현을 노성현(魯城)으로 고침. -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혁시 관례에 따라서 노성군, 연산군, 은진군이 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전국 행정구역 폐합 때 은진군과 연산군 전부, 노성군의 소사면을 제외한 전부, 석성군의 일부를 합하고 논산군이 됨. - 1987. 1. 1 은진면의 강산, 내동, 관촉리가 논산읍에 편입됨. - 1996. 3. 1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됨

* 지명유래

- 논산(論山)의 옛 이름 '황산(黃山)'은 '황(黃)'이 '누르다(노랗다)'의 뜻이므로 누르메→놀메가 되고 놀메→논산(論山)으로 되었다. - 연산(連山)이라는 이름도 '연(連)'이 '늘어(느러)'로서 산세가 높지 않고 길게 늘어진 모습을 나타내는데 눌(누르)→황(黃)과 늘(늘어)→연(連)이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로 쓰인 것이다. - 논산의 옛 이름 '황산'이 말해주듯이 이 지역은 백제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가 신라의 김유신군 5만을 맞아 싸워 전사한 황산벌이다. - 또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과 싸우다가 이곳에서 등창이 나서 죽은 곳이다. 곧 백제가 망하고, 후백제가 패망했던 땅이 논산으로서 논산 개태사는 왕건이 견훤을 꺾고 나서 이를 기리어 세운 절이다. - 강산리(薑山)의 '강(薑)'은 생강(새앙, 생이라고도 함)을 말한다. 이곳에 생강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생매, 강매라 불렀기 때문이다. - 강산리는 은진군 성본면에 속한 곳이며, 1914년 논산군 대조곡면에 편입된 곳이다. - 부창동(富倉)은 본래 해창(海倉)이라는 나라의 창고가 있어서 창말이라 불렀으므로 "부유한 창고"라는 뜻으로 부창동이라 하였다
대덕(大德) 주거·연구단지
- 덕을 품고 베풀어 좋은 세상 만드는 곳

◆ 위 치 : 주거 (1)대전광역시 유성구(儒城) 궁동(弓), 어은동(魚隱) 일원 (2)대전광역시 유성구 신성동(新城), 장동(長), 문지동 (文旨), 전민동(田民) 일원 (2-2)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 전민동 일원 연구 (1)대전광역시 유성구 궁동, 어은동, 가정동(柯亭), 구성동 (九城), 신성동 일원 (2)대전광역시 유성구 신성동, 장동, 문지동, 화암동 (花岩), 도룡동(道龍) 일원 (3)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원촌동(院村) 일원 ◆ 면 적 : 주거 (1)149,619평(494,608m2) (2)236,264평(781,038m2) (2-2)111,314평(367,980m2) 연구 (1)1,018,737평(3,367,726m2) (2)1,155,778평(3,820,754m2) (2-2)108,000평(357,025m2) (3)263,469평(870,972m2) ◆ 연 혁 - 이 지역은 삼한시대 마한의 땅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과 우술현(雨述)(일명 후천현:朽淺), 그리고 진현현(眞峴)으로 되어 있었음. -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 노사지현은 유성현(儒城)으로, 우술현은 비풍현(比豊)으로, 진현현은 진령현(鎭嶺)으로 고쳐짐. - 비풍현은 고려 성종 때 회덕현(懷德)으로 고쳐졌으며, 1018년(현종 9) 공주에 속하였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 현감을 둠. - 진령현은 고려 성종때 진잠현(鎭岑)으로 고쳐졌으며, 1018년(현종 9) 공주에 속하였다가 역시 조선 태종때 회덕과 마찬가지로 현감을 둠. - 1018년(고려 현종 9) 유성현은 공주 관할에 들어갔으며 대전지역은 1413년(조선 태종 13)공주군 관내면이 됨. - 1895년(고종 32) 대전지역이 회덕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1901년 경부선 철도의 대전역을 설치함에 따라 급속히 발전함. - 1914년 일제하 전국의 부군면을 폐합할 때 회덕군의 13개면과 진잠군의 4개면, 공주군과 연산군의 각 3개면중 일부를 합하고 새로 대전군을 신설하여 대전면 등 12개면을 관할함. - 1931. 4. 1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됨. - 1935. 10. 1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고, 대전군이 대덕군으로 고쳐짐. - 1989. 1. 1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 이때 대덕군이 대전광역시에 편입되어 대덕구가 됨

* 지명유래

- '대덕(大德)'이란 높은 덕 또는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이나 고승을 일컫기도 하고 한편 변함없는 천지의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곧 '일대왈천(一大曰天)'이다. - '대덕구'는 1935년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될 때 '대전'과 이 지역의 옛 '회덕군'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대덕군'으로 된 곳이다. - 그전 이름인 '회덕(懷德)' 역시 덕성을 품는다는 뜻이며, 이 덕성을 베푸는 포덕(布德)에 의하여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곳이 곧 '대덕(大德)'이라 정의한다. - 유성구(儒城)의 '유성(儒城)'이라는 이름은 757년(신라 경덕왕 16) 백제의 노사지현을 통일신라에서 바꾼 이름인데, 이곳에 백제의 유림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 - 한편 '유성'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오늘날 호사가들은 유성=선비고을인데, 이곳에 국내 석학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서 그 이름과 현실이 맞아 떨어진 것이라 하였으며, 또 1984년에 충남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유성→선비의 고장 →충남대학교를 연결하여 풀이하기도 한다. - 유성구 궁동(弓洞)은 본래 '활골'이라 부르던 곳이다. 지형이 굽어진 활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1895년 회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공주군 현내면의 장현리, 남작동, 봉암리를 합한 곳이다. - 유성구 어은동(魚隱洞)은 원래 은골, 언골이라 부르던 곳이다. 지형이 산골짜기를 이루므로 부르게 된 이름인데 여기에 한자를 붙이면서 '언=어은'으로 표기된 것이다. - 유성구 신성동(新城洞)은 새로 쌓은 성이 있어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다. 산이 성곽처럼 둘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전에 공주군 탄동면에 속했다가 1914년 일부 마을을 병합하고 대덕군 탄동면에 편입된 곳이다. - 유성구 장동(長洞)은 장자울, 장재울이라 부르는 곳이다. 장자(長者)는 부자를 말하며 그전에 부자가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이 지역도 공주군 탄동면에 속한 곳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 개혁시 회덕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대전군(대덕군)에 편입되었다. - 문지동(文旨)은 원래 민마루라고 부르던 곳이다. 마을이 낮은 산 기슭에 있었기 때문에 민마루라고 불렀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문지'라 하였다. - 본래 회덕군 서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 때 대전군(대덕군) 구즉면에 속하게 되었다. 
대전(大田) 가수원(街水院)
- 갑천 강변의 물이 아름다운 마을

◆ 위 치 : 대전광역시 서구 가수원동 일원 ◆ 면 적 : 103,866평(343,359m2)

* 지명유래

- 가수원(佳水院)은 본래 진잠군 동면에 속한 곳이었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용소리, 괴곡리의 일부를 합하고 가수원리라 하여 대덕군 기성면에 들어갔다. - 1983. 2. 15 대전시에 편입되었으며 서구에 들어간 곳으로 조선시대에 원(院)이 있어서 가수원이라 하였다. - '가수원'은 마을이 갑천 강변가에 위치하여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며 원터가 있던 곳은 원모랭이라고 불렀다. - 또 이곳의 태봉재는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태(胎)를 묻었기 때문인데, 그 유적을 한밭도서관 향토사료관에 보존하고 있다
대전(大田) 가오(加午)
- 옥녀의 살림살이에 필요한 지명들

◆ 위 치 : 대전광역시 동구 가오동, 판암동(板岩), 대성동(大成) 일원 ◆ 면 적 : 298,000천평(985,124m2)

* 지명유래

- 가오동(加午)은 본래 '가오터' '가위터'라 부른 곳이므로 이를 한자로 쓰면서 가오리(加午里)라 부르게 되었다. - 그전 회덕군 외남면에 속한 곳으로서 1914년의 전국 행정구역 폐합 때 도사리, 오리, 석교리의 각 일부를 합하고 대전군 외남면이 되었다. - 가오동에는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밥상을 뜻하는 반상봉, 젓가락을 뜻하는 젓가락날, 부엌골(구억골) 등이 있다. - 이런 지명들은 풍수지리상 옥녀가 부엌에서 밥을 차리고 살림을 하는데(가위터 포함) 필요한 지명들로 명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판암동(板岩)은 너더리 또는 판교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이곳에 널(판자)로 만든 다리가 있어서 널다리(너다리, 즉 판교)라 하였다. - 회덕군 외남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대전군(대덕군) 외남면이 되었으며, 이때 저전리(닥밭골), 상신리, 산소리, 구정리 일부를 합하였다. - 일제때는 판암정(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 왜식동명을 바로 잡을 때 판암동이라 하였다. - 대성동(大成)은 마을이 대성산 아래 있으므로 대성동이라 하며 '대성'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큰 일을 이룬다"는 뜻을 따서 붙인 미화지명으로 보인다
대전(大田) 내동(內洞)
- 산 안쪽에 있어 '안골'이라 부르던 곳

◆ 위 치 : 대전광역시 서수 내동 일원 ◆ 면 적 : 28,286평(93,507m2) 

* 지명유래

- 그전에 공주군 천내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안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 '안골=내동(內洞)'으로 훈역된 이름인데, 마을이 산 안쪽에 있다하여 부른 이름이다. - 1895년(고종 32) 회덕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때 가장리, 예정리 등의 일부를 합하고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 1935. 11. 1 대전부로 승격될 때 대덕군에 편입되었다가 63. 11. 1 대전시 확장에 따라 대전시에 편입되었다
대전(大田) 노은(老隱)
-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이름

◆ 위 치 : (1)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동, 지족동(智足) 일원 (2)대전광역시 유성구 지족동, 하기동(下基), 반석동(盤石), 죽동(竹) 일원 ◆ 면 적 : (1)592,000평(1,957,025m2) (2)470,000평(1,553,719m2)

* 지명유래

- 노은동(老隱)은 현지에서 '논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마을이 들에 있거나 논이 많은 경우에 노은(老隱) 또는 노은(魯隱) 등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 이곳은 그전에 공주군 현내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정리, 용의동, 덕미동, 소읍리, 죽곡리의 각 일부를 합하고 대전군(대덕군) 유성읍에 편입된 지역이다. - '노은'이란 이름은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이름으로서 노인복지나 실버타운 건설에 적합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 지족동(智足)의 '지족'은 지혜로움(슬기로움)이 넉넉하다는 뜻이 되지만 '지족(知足)'을 잘못 쓴 이름으로 보인다. - 노자는 '지족(知足)'을 풀이하기를 "족함을 알아서 분수를 지키고 탐내지 않음"으로 풀이하였다. 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다고 하였다. '지족'이란 마음이 부유한 사람, 그러므로 속되지 아니하고 항상 여유있는 사람을 뜻한다. - 지족동은 본래 마을이 두메골짜기이므로 지족실이라 불렀던 곳이며, 1914년 대전군 유성읍에 편입된 곳이다. - 하기동(下基)은 본래 '아래텃골'이라 불렀으므로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하기동이 된 곳이다. - 반석동(盤石)은 마을에 너레바우, 즉 반석이 많이 깔려 있어서 탄동면 반석리라 불렀던 곳이다. - 죽동(竹)은 본래 '대울'이라 불렀던 곳이다. 마을에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전(大田) 도마(桃馬)
- 도마뱀 닮은 '도마달(산)'이 있었다

◆ 위 치 :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 일원 ◆ 면 적 : 39,283평(129,861m2) ◆ 연 혁 - 대전시지역은 삼한시대 마한의 땅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과 우술현(雨述)(일명 후천현:朽淺), 그리고 진현현(眞峴)으로 되어 있었음. -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 노사지현은 유성현(儒城)으로, 우술현은 비풍현(比豊)으로, 진현현은 진령현(鎭嶺)으로 고쳐짐. - 비풍현은 고려 성종 때 회덕현(懷德)으로 고쳐졌으며, 1018년(현종 9) 공주에 속하였다가 1413년 (조선 태종 13)에 현감을 둠. - 진령현은 고려 성종 때 진잠현(鎭岑)으로 고쳐졌으며, 1018년(현종 9) 공주에 속하였다가 역시 조선 태종 때 회덕과 마찬가지로 현감을 둠. - 1018년(고려현종 9) 유성현은 공주 관할에 들어갔으며 대전지역은 1413년(조선태종13) 공주군 관내면이 됨. - 1895년(고종 33) 대전지역이 회덕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1901년 경부선 철도의 대전역을 설치함에 따라 급속히 발전함. - 1914년 일제가 전국의 부군면을 폐합할 때 회덕군의 13개면과 진잠군의 4개면, 공주군과 연산군의 각 3개면 중 일부를 합하고 새로 대전군을 신설하여 대전면 등 12개면을 관할함. - 1931. 4. 1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됨. - 1935. 10. 1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고, 대전군이 대덕군으로 고쳐짐. - 1949. 8. 15 대전부가 대전시로 승격됨. - 1977. 9. 1 대전시에 동구와 중구를 설치함. - 1988. 1. 1 대전시에 서구를 설치하여 3개구가 됨. - 1989. 1. 1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 이때 대덕군이 편입되어 대덕구가 되고 유성구가 설치되어 5개구가 됨. - 1995. 1. 1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됨. - 1999. 12. 31 시청사를 서구 둔산동으로 이전함

* 지명유래

- 대전(大田)은 본래 '한밭'이라고 부르던 지역으로서 한밭이란 '큰 밭'을 뜻하기보다는 큰 들을 의미한다. - 이 일대가 대전천, 갑천, 유등천 등에 의하여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처음 경부선 철도역으로 '태전역(太田驛)'이라 하였다가 이또오히로부미(이등박문)에 의하여 '태(太)'를 '대(大)'를 고쳐서 오늘의 '대전(大田)'이 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유성현 동쪽 25리에 대전천(大田川)이 있다고 하였고, 유포천, 성천과 함께 세 하천이 합하여 회덕현의 갑천이 된다고 하였다. - 또 1904년~1909년 까지 관보에 나타나는 '태전(太田)'이 오히려 일본식 표기법(대전과 태전이 발음이 같으므로 혼용)에 따라 그들이 7년간 사용한 표기법일 뿐이라고 한다. 1) - 그러므로 '대전'이라는 이름은 5백년전에도 이 일대를 불렀던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도마동(桃馬)'은 본래 '도마다리'라고 부르던 곳이다. 물 위에 놓은 교량으로서의 '다리'가 아니라 '도마달'('달'=산)을 하며, 높이 189m 되는 산으로서 도마뱀을 닮았는데, 그 아래 마을을 '도마다리'라 불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 이 지역은 공주군 유등천면에 속한 곳이었으며, 1895년(고종 32)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사마리, 산적리, 송산리, 변동 등을 합하여 도마리가 되고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 1935. 1. 1 대전부가 신설될 때 대덕군 유천면이 되었다가 1963년 대전시에 편입되었다
대전(大田) 둔산(屯山)
- 대둔산과 둔산의 차이는 무엇일까

◆ 위 치 : (1-1)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갈마동(葛馬), 삼천동(三川), 탄방동(炭坊), 월평동(月坪), 괴정동(槐亭) 일원 (1-2)상동 (1-3)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갈마동, 월평동 일원 (2)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갈마동, 삼천동 일원 ◆ 면 적 : (1-1)509,561평(1,684,499m2) (1-2)1,052,574평(3,479,583m2) (1-3)683,715평(2,260,215m2) (2-1)200,000평(661,157m2) (2-2)179,558평(593,580m2)

* 지명유래

- 서구 둔산동(芚山)의 '둔산'이라는 이름은 이 보다 남쪽에 위치한 '대둔산(大芚山)' (충남 금산과 전북 완주군 경계)과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 양주동은 『고가연구』에서 '둠'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두메'는 '둠메'의 변형이라 하므로, 둠뫼=둔뫼=둔산(屯山)으로 풀이할 수 있다. 3) - 곧 '두메'라 함은 산이 둥글게 둘러싼 마을을 뜻하며 둔산은 곧 대전분지를 뜻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 한편 '둔'을 돋음(도두음=두음=둔)으로도 풀이하는데 『문헌비고』에는 '두음'과 '둔'이 대응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 따라서 대둔산은 「크게 솟은(돋은) 산」이라는 뜻이요, 대전의 둔산(屯山)은 산으로 둘러싸인(산으로 두른=둔뫼)(대전분지) 땅을 뜻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 현지에서 둔산은 '둔지미(屯之尾)' (높이 62m)로 인하여 붙은 이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둔지미는 '둔지+미(뫼)'로서 '둔지'라는 이름은 '산으로 두른' 곳이며 이곳의 작은 산을 둔지미라 하였을 것이다. - 둔산동은 원래 공주군 천내면이었다가 1895년(고종 32) 회덕군 천내면으로 바뀌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된 곳이다. - 갈마동(渴馬)의 '갈마'에 대하여는 이 지역에 풍수지리상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갈마음수형'이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을 뜻하며 전국적으로 같은 유형의 땅이름 많이 분포하고 있다. - 물이 갈라진다는 뜻에서 강을 '가람'이라 하듯이 은 나누어진다는 뜻 또는 변두리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가랭이(다리), 가루(밀가루 등) 갈대 등이 있다. - '갈마'의 '갈'도 물가마을을 뜻하는 갓말→갈마 이거나 작은 산→갈미(갈마)가 있거나 혹은 산이 갈라지는 곳 중의 하나일 것이다. 4) - 갈마동 역시 공주군 천내면→회덕군 천내면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던 곳이다. - 삼천동(三川)은 세 개의 큰 내가 있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 이 지역에는 버드내(유등천), 대전천, 갑천이 있으므로 삼천리(三川)라 하였으며 원래 회덕군 서면에 속하였다. -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 때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고 뒤에 대전시 삼천동이 된 곳이다. - 탄방동(炭坊)은 그전 공주군 천서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숯방이'라고 불렀으므로 한자로는 '탄방'이라 하였다. 
대전(大田) 용운(龍雲)
- 용이 구름을 만나면 만사형통한다

◆ 위 치 :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 일원 ◆ 면 적 : 146,776평(485,210m2)

* 지명유래

- '용운(龍雲)'이라는 이름은 일제 때 새로 붙여진 이름이며 그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 그러나 '용'은 구름을 타고 승천한다고 하므로 용과 구름은 긴밀한 관계이며 용이 구름을 만나므로서 만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 이곳은 회덕군 외남면의 '용방(龍坊)'이라 부르던 곳인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선랑리, 모오리, 초동을 합하고 그대로 용방리라 하였다. - 그후 1935년 대덕군 외남면이 되었다가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 때 편입되어 용운정(町)이라 불렀고, 1946년 해방 후 왜식동명을 바로 잡으면서 '정→동'만 바꾸어 용운동이 된 것이다
대전(大田) 중리(中里)
- 송씨 집성촌의 중간에 있는 마을

◆ 위 치 :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일원 ◆ 면 적 : 263,809평(872,096m2)

* 지명유래

- 중리(中里)는 본래 회덕군 내남면에 속한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봉동, 오정동, 상오리, 법동 등의 일부를 합하여 중리라 하고 대전군 내남면(뒤에 대덕군 내남면)에 편입되었다. - 이 마을이 송촌(宋村)의 중간이 되므로 중리라 하였으며, 송촌은 송씨들이 살았던 집성촌이다. - 송촌은 조선 초기 쌍청당 송유가 살기 시작하면서 송씨들이 계속 살아왔다고 하며, 이곳에 조선 효종 때 동춘 송준길(宋浚吉)의 서재인 동춘당(同春堂)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쌍청당(雙淸堂) 등의 문화재가 있다. - 한편 송촌에서 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소리고개라 불렀다. 옛날 회덕고을 사또가 송촌을 찾아 올때는 송촌에 고관과 명현이 많이 살았으므로 벽제소리를 그치고 조용히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 법동(法洞)은 범샛골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이곳은 계족산과 매봉의 높은 산 깊은 골짜기가 있으므로 범이 살아서 '범샛골' 이라 하였고, 이것이 뒤에 비슷한 소리를 붙여 '법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대전(大田) 중촌(中村)
- 마을이 산 중간에 있어 중말이라 부른 곳

◆ 위 치 :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 일원 ◆ 면 적 : 66,563평(220,043m2)

* 지명유래

- 중촌(中村)은 원래 마을이 산 중간에 있으므로 중말이라 부르던 곳이다. - 공주군 산내면 속했던 곳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개편 때 회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신촌과 목동의 일부를 합하고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 1936년 대전읍의 중촌정(町)이 되었고, 1946년 왜식 동명을 일제히 바로 잡을 때 정→동으로 바꾸어 중촌동이 된 곳이다
보령시 청라면(靑蘿面)
충청남도 보령시 북동부에 있는 면.

◆ 위 치 : 충남 보령시 북동부 ◆ 인 구 : 5,835명(2001) ◆ 면 적 : 69.85㎢ ◆ 연 혁 : - 본 면은 고백제신촌현에 속 하였다 - 신라가 백제를 통일한 후 웅천 공주 결성 현신읍 이라 부르다가 - 고려시대에 이르러 하남도 보령현에 속하였으며 또한 운주 홍주에도 속 하였었다. - 조선시대에 고려주포에 첨사진을 설치한 후 수사영으로 되어 이 영 관할에 속 하였고 - 태종 13년, 고종 32년에 보령현 보령시 편입되어 서기1914년 면제개혁에 의하여 오삼전면과 청라면이 통합 청라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 지세는 북쪽에 오서산 동남쪽에 성주산, 동쪽에는 백월산, 서쪽에는 오봉산으로 둘러있어서 분지가 되어있고 칙과 당대미가 많았으므로 청라면이라 하며 현재는 11개리 20개구역 나원리 원우상중, 소양리정산, 둔대, 내현리 상내백현, 의평리원의, 평정, 광산촌, 향천리, 장산리장곡, 장문, 옥계리정동서촌, 황룡리용두, 송중, 장현리 장전오대, 신산리 및 엄현리로 분할되어 관할하고 있음. 

* 지명유래

69.89㎞의 면적과 1~2천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도 참설에는 내포땅에 이대천자지지와 만년 영화지지가 있다고 한다. 이중 북쪽에 있는 천자지지는 홍선대원군이 차지하고 남쪽에 있는 만 년영화지지는 아직 주인이 안나타나고 있는데, 그 명당이 바로 이곳이라는 설로 유명한 곳이 이 고장 청라이다. 욕심이 많았던 흥선대원군은 오서산을 나라에서 몽땅 차지해버려 그 후 묘도 못쓰게 했다고 한 다. 이같은 연유때문인지는 몰라 청라지방에는 많은 양반)들이 낙향 사족이 많은 것이 특징의 하나이다. 청라를 가리켜 삼다향이라고 부르는데 양반 반다, 돌 석다, 말이 많은 것 언다 때문이라고 한 다. 반다는 많은 인사가 배출되었고, 돌이 많은 것은 유명한 오석이 이곳 인근에서 나오고 있음 을 뜻하고, 언다는 지조가 굳은 선비들이 살았기 때문에 바른말 직언과 상소를 많이했기 때문이 다. 서지문가활만인지지의 터였던 이 곳에 살던 양반들은 지금은 청라저수지에 일부가 묻힌 창벽기 슭에서 시를 짓는등 인생을 즐겼다. 지금도 창벽에는 옥계라는 글씨가 쓰여있는데 50여년전에 는 이곳의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지음은 물론 국논도 논의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95.1월 1일 법 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이 되었다. 
보령시 천북면(川北面)
천북면(川北面)

◆ 위 치 : 충남 보령시 북서부 ◆ 인 구 : 5,347명(2001) ◆ 면 적 : 55.03㎢ ◆ 연 혁 -마한시대(馬韓時代)는 감계비미국에 속했으며 -백제시대는 결기현(結己縣)에 속했고 -신라시대(新羅時代)는 결성군(結城郡) -통일신라(統一新羅)때는 결성군(結城郡), 경덕왕때 -고려(高麗)때 현종 9년(1018)에 흥양현(興陽縣)이라 해서 운주(運州 現 洪城)에 속했음. -영조(英祖) 9년(1173)에 보령군(保寧郡)속함 -영조 12년(1736)에 홍성군에 귀속했음 -고종 광무5년(1901) 5월 오천군에 편입되어 오천군의 북쪽에 있는 면이라 해서 천북면이라 하였고 관할하는 동리는 61개 마을이었음.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결성군(結城郡) 가산면(加山面)의 6개리를 병합하여 다시 천북면이라 호칭 보령군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이 되었다. 

* 지명유래

◆ 하만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 광무 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하궁리, 종평동, 주항동, 동산동, 각음동, 두만동, 대천1동, 화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하 궁과 두만의 이름을 따서 하만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하만리로 되었다. -고 망 골(하만리<동음의 남쪽마을>) 동음(冬音)의 남쪽 마을을 가리켜서 한말이다. 이 동명(洞名)은 고마(古馬, 高馬)와 두만(斗滿) 의 뜻이 혼힙(混入), 오용(互用)되고 있다. 두만(斗滿)은 글자 뜻 그대로 매년 풍년이 들어 추수된 곡식이 말에 가득 넘는다 해서 두만이라 했다. 한편, 고만이란 말 역시 가을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말로될 때 전년보다도 고봉이- 넘게 농사가 풍작이란데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 고마(古馬)와 두만(斗滿)의 옛 상태를 추정(推定)해 보기로 한다. 오래된 옛 지명은 고 마(古馬), 금마(金馬), 짐마(藎馬)등의 한자음(漢字音)을 음차기록(音借記錄)해왔다. 백제의 도 성(都城)을 고마(固麻)라 기록함도 이에 관련된다. 여기에서 맨처음으로 불리운 동명이 고마라 는 것을 알수 있다. 고마(古馬)의 마(馬)는 옛 기록에 남쪽(南)을 가리키는 어휘로 쓰여왔다. 그 한 예가 마(馬)파람을 남풍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고망골은 동음의 남쪽마을이 란 뜻이된다. 고망골은 조선중기 이후 두만동이라고 불려왔다. 두만(斗滿)은 한국 지명에서 두리계(系)에 속 하는 바 주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두리(周)의 뜻이 된다. 만(滿)자를 사적(史的)으 로 더듬어 보면 조선중기에는 「많-」으로 대응되다가 그 이후로는「가득」이란 개념으로 쓰여 왔다. 직역하면 추수 마당에서 벼나락이 말(斗)섬에 가득가득 넘었다는 데서 말두자를 첨가한 것이다. 언덕·산·물로 둘러 싸인 이고장은 언제나 풍작(豊作)을 이루고 있따는 지명으로 쓰여온 것이다. 그후 두리계의 두만동이란 한자 지명은 쇠퇴하고 동음(冬音)이란 지대(地帶)에 대응되는 고만 골이 더욱 강하게 언중(言衆)의 의식에 깊이 파고 들고 있다. 그리하여 천북의 남쪽 즉 동음(冬音)의 남쪽 마을이란 뜻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학성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 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염성리, 중랑리, 오학동, 오룡동, 혜똑동, 호변동, 율도동을 병합하여 오학과 염성의 이 름을 따서 학성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 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학성리로 되었다. ◆ 사호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 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사정동, 상판동, 하판동, 열호동, 명포동, 통포동, 사기점동, 봉상동, 하선동을 병합하 여 사정과 열호의 이름을 따서 사호동이라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95.1월 1일 법률 제4774호 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로 되었다. 여기에는 수령 400년가량의 느티나 무가 있어 마을에서 보호하고 있다. 
서산(瑞山) 읍내(邑內)
- 옛 서산 고을의 읍내가 되는 곳

◆ 위 치 : 충남 서산시 읍내동 일원 ◆ 면 적 : 84,452평(279,180m2) ◆ 연 혁 - 삼국시대에는 백제에서 기군(基郡)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부성(富城)으로 고침. - 1144년(고려 인종 22) 강등하여 현령을 두었고, 1182년(명종 12) 고을 사람들이 영위(令尉)를 핍박하여 잡아 가두었으므로 관호를 없앰. - 1284년(충렬왕 10) 고을사람 정인경이 공을 세웠으므로 지금의 이름인 서산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함. - 1308년(충렬왕 34) 서주목으로 승격하였고, 1310년(충선왕 2) 다시 낮추어서 서령부(瑞寧府)로 하였다가, 또 낮추어서 지서주사(知瑞州事)로 함. - 1413년(조선 태종 13) 다시 서산이라 하고 군이 됨. - 1695년(숙종 21)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13년(숙종 39) 다시 복구됨. - 1733년(영조 9) 강등하여 현이 되었다가 1742년(영조 18)다시 복구됨. - 1776년(영조 52) 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85년(정조 9) 다시 복구됨.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산군, 태안군, 해미군의 3개군을 합하여 서산군이 됨. - 1942. 10. 1 서산면이 서산읍으로 승격됨. - 1989. 1. 1 서산읍이 서산시로 승격되고 태안군이 분리됨. - 1995. 1. 1 서산시와 서산군이 통합되어 서산시가 됨

* 지명유래

- 서산(瑞山)은 주산(主山)인 부춘산(富春山)의 아름다운 승경으로 인하여 옛 이름을 부성(富城)이라 하였다. - 이와 함께 서산을 서령, 서주 등으로 불러온 것은 부춘산의 영험한 정기를 받으므로 상서(祥瑞)로운 고을이라는 뜻에서 서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 읍내동(邑內)은 그전 서산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서산읍의 읍내가 되었으므로 읍내동이라 한 곳이다. - 이곳에 옛 서산고을의 사직단(터)을 비롯하여 빙고터(얼음창고), 성암서원, 서산읍성터 등의 유적이 있다
서천군 마산면(馬山面)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곳에 있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산면이라 하였다.

◆ 위치 : 충남 서천군 ◆ 인구 : 2,266명(2001) ◆ 면적 : 26.34㎢ 

* 지명유래

조선시대에는 한산군 하북면(韓山郡 下北面)의 지역으로서 한산군과 임천군의 경계에 놓인 한 산군의 면이었다.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이전으로서 백제때부터 상당한 문화의 요 람지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산모시의 원산지 시장(市場)으로서 각광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3.1운동때에는 만세사건으로 많은 인사가 궐기한 지역이기도 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곳에 있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산면이라 하였다. 이 곳에는 거주하는 성씨(姓氏)의 대성(大姓)으로서 한산이씨(韓山李氏)를 비롯하여 장수황씨 (長水黃氏) 연안차씨(延安車氏) 강릉함씨(江陵咸氏)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있으며 그 집성부락 과 함께 홍주이씨(洪州李氏) 부안김씨(扶安金氏) 금능김씨(金陵金氏) 해주오씨(海州吳氏) 온양 방씨(溫陽方氏)의 집성부락도 있었다. 가양리 (嘉陽里) : 한산군 하북면(下北面)의 지역으로서 고이바위가 있어 곰말 갬말 갱말이라 부르다가 햇빛 아래의 산수가 아름다우므로 가양(嘉陽)이라고 불렀던 지역이다.1914년 행정구 역 개혁때에 가양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장수황씨(長水黃氏) 30여호와 경주최씨(慶州崔氏) 온양방씨(溫陽方氏) 10여호의 집성부락도 있다. 관포리 (冠浦里) : 한산군 상북면(上北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관촌(冠村) 과 대포(大浦)의 이름을 따서 관포리라 하였다. 강릉함씨(江陵咸氏) 20여호와 금릉김씨(金陵金氏) 10여호의 집성부락이 있다. 개말 : 개멀 관촌(冠村)이라고도 부른다. 냇가 강변에 마을이 있으므로 개말,개멀,관포라고 부 른다. 구렛들 : 구례(九禮)라고도 부른다. 큰마을 한쪽에 있으며 예(禮)에 밝은 사람이 살던 부락이 라 그리 부른다 한다. 대포 (大浦) : 대포리(大浦里)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배가 드나들었던 포구이며 풍수설에 따 르면 앞으로 많은 배가 왕래할 포구라 대포라고 부른다 한다. 음산말 : 음산촌(陰山村)이라고도 부른다. 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군간리 (軍干里) : 한산군 상북면(上北面)의 지역으로서 한때 군사들이 진을 쳤던 자리라 군간 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군간리(軍干里)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 다. 금릉김씨(金陵金氏) 해주오씨(海州吳氏)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많이 살던 지역이다. 산정말 : 산정촌(山亭村)이라고도 부른다. 산직집이 있었으므로 산정말 산정촌이라고 부른다. 전장말 :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이 있다는 전장산(戰場山)이 있으므로 이에 연유해서 그리 부른다. 
서천군 마서면(馬西面)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마동(馬東)과 서남(西南)의 이름을 따서 마서면이라 하였다.

◆ 위치 : 충남 서천군 ◆ 인구 : 8,052명(2001) ◆ 면적 : 38.34㎢ ◆ 주요문화재 : 봉남리 3층석탑(峰南里三層石塔 

* 지명유래

서천군의 군청소재지인 서천읍 남서쪽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하고 장항읍과 접하고 있는 면이다. 원래 서천군 마길면(馬吉面)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마동(馬東)과 서남(西南)의 이름을 따서 마서면(馬西面)이라 하였다. 마서면내에는 500여년간을 뿌리하고 사는 100여호의 대성(大姓)이 4성이나 있을 정도로 전통성 이 강한 지역이다.집성부락의 양상은 다양하나 나주나씨(羅州羅氏)가 300여호, 평해구씨(平海丘氏), 280여호, 금녕김씨(金寧金氏)200여호, 파평윤씨(坡平尹氏)12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그 외에도 광산김씨(光山金氏)70여호 남포백씨(藍浦白氏)60여호 전주최씨(全州崔氏)50여호 등 이 있으며 집성촌은 각양각색이다. 계동리 (桂東里) : 서천군 서부면(西部面)의 지역으로서 계동과 동죽의 이름을 따서 계동리라 하였다. 평해구씨(平海丘氏)의 집성촌이 있다. 계룡말 : 마을 지형이 닭 벼슬과 용꼬리 같다 하여 계룡말이라고 부른다. 계룡리(鷄龍里)계룡당 리(鷄龍堂里)라고도 부르며 신당(神堂)이 있었다. 까치다리 : 작교(鵲橋)라고도 부른다.옛날에는 까치가 많았던 마을이라 까치다리 작교라고 부 른다. 너멍굴 : 마을 너머에 마을이 있으므로 너머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너멍굴이라고 부른다. 동죽 (東竹) : 큰마을 동쪽에 있으며 대밭이 많으므로 동죽(東竹)이라고 부른다. 새암굴 : 천곡(泉谷)이라고도 부른다. 큰 샘이 있는 마을이다. 안태 : 안터 내기(內基)라고도 부른다. 안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다. 옥굴 : 고려때 서주군(西州郡)의 옥(獄)이 있었던 마을이다. 옥곡(獄谷)이라고도 부른다. 남전리 (南田里) : 서천군 남부면(南部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개혁때에 남산(南山) 과 합전(蛤田)의 이름을 따서 남전리라 하였다. 나주나씨(羅州羅氏)와 파평윤씨(坡平尹氏)가 집 성촌을 이루는 지역이다. 말무덤 : 마을에 큰 무덤이 있으므로 말무덤이라고 부른다. 백사장 (白沙場) : 쇄팽이 백사리, 백사정리라고도 부른다. 서쪽 바닷가에 모래가 많으며 목은 (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백사정(白沙亭)이 있었다. 서사리 (西沙里) : 비야장이라고도 부른다. 백사장 서쪽에 있으며 물새가 많이 나르는 마을이 라 비야장이라고도 부른다. 윷밭골 : 칠전(漆田), 칠전리(漆田里)라고도 부른다. 옻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조개티 : 합전(蛤田), 합전리(蛤田里)라고도 부른다. 마을 산의 형국이 조개같다 한다. 당선리 (堂仙里) : 서천군 마길면 (馬吉面)의 지역으로서 당산이 있으므로 당선이 당산 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서천군 서천읍(舒川邑)
서천이란 호칭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작은 냇물이 펼쳐져서 수려한 지역을 이뤄 서천이라 함

◆ 위치 : 충남 서천군 중앙부 ◆ 인구 : 1만 4867명(2001) ◆ 면적 : 27.73㎢ ◆ 문화재 : 서천 신송리의 곰솔(천연기념물 353), 서천 남산성(충남기념물 96), 서천읍성(충남 문화재자료 132), 서천향교 

* 지명유래

서천(舒川)은 옛날부터 호칭이 많은 지역이다. 설림(舌林) , 서림(西林) , 서주 (西州) . 그리고 서천 (舒川)이라고 근대에 와서는 그리 부른다.그 전에 남양 ( 南陽)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서천이란 호칭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작은 냇물이 펼쳐져서 수려한 지역을 이룬 곳이라 하여 서 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천에 본관은 둔 성씨는 서림이씨(西林李氏)가 있으며 , 집성부락을 이루고 토성(土姓)으로는 백(白), 나(羅), 구(丘) , 노(盧) . 이(李) . 정(丁) . 전(全)씨가 있으나 현시조는 고려때의 공신으 로 서림군(西林君)에 봉해진 18세손 이세공(李世公)이 처음이 되어 20세손 이언충(李彦忠)이 고 려의 원훈이 l되어 서주군 ( 西州君)에 봉해짐으로써 연안이씨(延安李氏)에서 분적 이곳을 본관 으로 하고 있다. 구암리(九岩里) : 거북바위 구암(龜岩)이라고도 부른다. 지역에 거북바위가 있으므로 이에 연 유하여 그리 부른다. 보모루 : 강을 막고 물을 고이게 하는 보(洑) 머리에 있는 마을이라 보머리라고 부르다가 변하 여 보모루라고 부른다. 송동(松洞) : 옛날에는 노송에 둘려싸였던 마을이라 송동이라고 부른다. 군사리(郡司里) : 서천군의 군처이 있으므로 군사리라 부른다. 동변(東邊) : 동변리라고도 부른다. 서천읍성 동쪽에 있으므로 동변 동변리라고 부른다. 생교골 : 서천향교(舒川鄕校)가 있는 마을이라 생교골이라고 부른다. 서변(西邊) : 서변리라고도 부른다. 서천읍성 서편에 있는 마을이다. 서편 서편리라고 부른다. 웃다락골 : 상루(上樓)라고도 부른다. 누각위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웃다락골 그 아래쪽 마을은 아래쪽다락골 하루(下樓)라고 부른다. 인살뫼 : 인산(仁山)이라고도 부른다. 산이 수려하여 산덕분에 인물이 많이 태어나는 마을이라 해서 인산뫼라고 부르다가 인살뫼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남산리(南山里) : 남산아래쪽의 지역임으로 남산리라고 부른다. 산정말 : 산정촌(山亭村)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선비가 쉬어 갈 산의 정자같은 위치에 자리해 있다 해서 산정말 산정촌이라고 부른다. 신리(新里)라고도 부른다. 동산리(同山里) : 동산(東山)아래쪽의 지역에 위치해 있으므로 동산리 동산매 동산리라고도 부 른다. 발송매 : 이 지역의 처음 마을이 원동산 바깥쪽에 있었으므로 밖송매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발 송매라고 부른다. 안쪽 마을은 안솔매라고 부른다. 두왕리(斗旺里) : 서천군 판산면(板山面)의 지역으로서 두모동(斗毛洞)과 선왕리(先旺里)의 이 름을 따서 두왕리라 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집성촌을 이루는 지역이다. 
서천군 화양면(華陽面)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 곳에 있는 화양산(華陽山)의 이름을 따서 화양면이라 하였다

◆ 위치 : 충남 서천군 남부 ◆ 인구 : 3,886명(2001) ◆ 면적 : 31.18㎢ 

* 지명유래

남쪽은 금강(錦江)으로 면해서 풍부한 수원으로 농어업에 종사하는 이상적인 전원지대이다. 한 산군(韓山郡)의 남쪽이 되므로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이 곳에 있는 화양산(華陽山)의 이름을 따서 화양면이라 하였다. 지역을 개발하고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뿌리로 한 성씨(姓氏)로는 나주정씨(羅州丁氏),교하노 씨(交河盧氏), 양천허씨(陽川許氏), 나주임씨(羅州林氏), 한산이씨(韓山李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남원양씨(南原梁氏)등이 있다. 나주정씨는 210여호, 교하노씨 80여호,양천허씨 60여호, 나 주임씨 120여호, 한산이씨 80여호, 안동권씨 70여호, 남원양씨 70여호가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 다. 고마리 (叩馬里) : 한산군 남상면(南上面)의 지역이었다. 지역이 고맛들 가운데가 되므로 고마 (叩馬)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고마리(叩馬里)가 되었다. 교하노씨(交河盧氏) 와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집성부락이 있다. 금당리 (琴堂里) : 한산군 남상면(南上面)의 지역으로서 검당이란 신당이 있으므로 금당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때에 금당리(琴堂里)가 되었다. 기복리 (箕福里) :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기복리라 하 였다. 나주정씨(羅州丁氏)의 집성부락이 있다. 나주정씨가 이곳에 내려오게 된 처음 중시조부 터 현재 10대 손이 거주한다. 두루재 : 원봉(圓峯)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이 둥글게 생겼으므로 두루재 원봉이라고 부른 다. 치울재 : 기산(箕山)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의 형국이 치와같이 생겼다해서 치 울재라고 부른다. 남성리 (南星里) : 한산군 남하면(南下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남생이처럼 생겼으므로 남생이 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남성이라고 부르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후에 남성리(南星里)가 되었 다.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많이 살며 옛날부터 집성부락의 형성이 있었던 곳이다. 오얏골 : 옛날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으므로 오얏골이라고 부른다. 광생이 : 광생(光生), 광생리(光生里)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을 두르고 있는 일광산(日光山)과 제월봉에 비치는 해와 달이 마을로 하여금 번성하게 한다고 해서 광생이라고 부른다 한다. 
아산(牙山) 용화(龍禾)
- '용정'과 '화리'에서 머리글자를 딴 이름

◆ 위 치 : (1)충남 아산시 용화동, 온천동(溫泉) 일원 (2)충남 아산시 용화동 일원 ◆ 면 적 : (1)60,829평(201,088m2) (2)102,465평(338,727m2) ◆ 연 혁 -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아술현(牙述)이며,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 음봉(陰峰) 또는 음잠(陰岑)으로 고치고 탕정군(온양)의 영현이 됨. - 고려 초에 인주(仁州)로 고치고, 995년(성종 14) 자사(刺使)를 둠. - 1005년(목종 8) 자사를 폐지하고 1018년(현종 9) 천안에 붙였으며 그후에 아주(牙州)로 고쳐서 갑무를 둠. - 1413년(조선 태종 13) 아산현이 되었다가 1458년(세조 4) 현을 없애고 온양, 평택, 신창의 세 고을에 나누어 붙임. - 1465년(세조 11) 다시 현을 두었고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에 붙였다가 중종때 복구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천안군 일부를 편입함.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 때 온양군의 5개면, 신창군의 5개면, 천안군의 일부를 합하고 아산군이 됨. - 1941. 10. 1 온양면이 읍으로 승격됨. - 1986. 1. 1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되고 아산군에서 분리됨. - 1995. 1. 1 온양시와 아산군이 도농복합형태의 아산시로 통합됨

* 지명유래

- '아산(牙山)'이라는 이름은 '어금니빨산'을 뜻한다. -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인주면 경계에 높이 363m의 영인산(靈仁山)이 있고 이곳에 어금니 바위(일명 부처바위, 불암)가 있다. - 이 바위가 어금니처럼 생겨서 '어금니 아(牙)'자를 붙여서 아술, 아산, 아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영인산의 어금니바위는 그 모양이 매우 기괴하여 아산고을 아전들이 사또를 해치고 미치거나 바보가 되어 3년 동안 사또 다섯이 갈린 것이라 하며, 토정 이지함이 아산고을 사또로 일하다가 죽은 것도 그 때문이라 한다. - '온양(溫陽)'은 이 지역에 옛부터 온수가 솟아 나와서 탕정(湯井), 온주(溫州) 등으로 불렀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다가 몸이 쇄약하여지자 요양차 다녀가기도 한 곳으로서 온수가 솟아나는 따뜻한 지방을 뜻한다. - '용화동(龍禾)'은 온양군 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상하리, 하화리, 용정리, 판교리 등을 합하여 용화리라 하고 아산군 온양면에 편입되었다. - 용정리(龍井里)는 용샘 또는 용우물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기 때문인데, 옛날 이곳에서 용이 올라갔다고 한다. - 화리(禾里)는 상화리, 하화리로 나누어진다. 화리는 우리말의 수골(수:禾)에 대한 이두식 표기이며 아래숫골, 웃숫골로 부르기도 한다. - 용화동은 용정과 화리에서 머리글자를 딴 합성식 절충지명으로서 1914년 명명된 이름이다
아산(牙山)국가산업단지 「충남 고대(古垈)
- '고잔'과 '대대리'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

◆ 위 치 : 충남 당진군(唐津) 송악면(松嶽) 고대리, 한진리(漢津) 일원 ◆ 면 적 : 674,818평(2,230,803m2) ◆ 연 혁 - 당진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 또는 부지군(夫只)이었음. - 통일신라에서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이름인 당진으로 고쳐서 혜성군(면천)의 영현이 됨. - 1018년(고려 현종 9) 운주(홍성)에 붙였다가 1105년(예종 원년) 감무를 둠. - 1413년(조선 태종 13) 관례에 따라 현감을 둠. - 1895년(고종 32) 관례에 따라 당진군이 됨.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면천군 22개면, 해미군의 일부, 예산군의 일부를 합함. - 1957. 11. 6 서산군 대호지면, 정미면이 당진군에 편입됨. - 1963. 1. 1 당진면에 당진읍으로 승격됨

* 지명유래

- '당진(唐津)'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러온 이름이며, 이 지역이 당나라와 교통로(해로)이기 때문이다. - 곧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리가 당나라와 연결되는 나루터의 포구이므로 이를 군명칭으로 한 것이다. - 한편 당진의 '당(唐)'은 '대(大)'를 뜻하고 우리말의 '크다'는 뜻을 나타내는 kara의 표기로 보며 '당진=큰 나루'로 풀이하기도 한다. 8) - 송악면(松嶽)은 관내에 높이 148m의 송악산이 있으므로 이를 면이름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인근의 아산시에도 송악면(松岳面)이 있으므로 서로 차이를 두고 구별하기 위하여 당진군 송악면은 '악(嶽)'으로, 아산시 송악면은 '악(岳)'으로 표기하고 있다. - 고대리(古垈)는 본래 홍주군(홍성) 신북면 속하였던 곳이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시 면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 때 고잔리(古棧), 대대리(大垈), 내도리 등을 합하였다. - 이때 고잔과 대대리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고대리(古垈)라 한 것이다. - 한진리(漢津)는 우리말의 '큰 나루'라는 뜻이다. 아산만의 큰 나루로서 면천, 당진, 서산, 태안, 해미, 홍주, 결성, 보령, 남포, 서천, 비인, 한산 등지에서 서울로 통하는 큰 길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 그러므로 한진, 대진(大津)이라고도 불렀는데 한=대=큰 나루를 의미하며 면천군에 속했던 지역이다. - 고대 지구는 옛이름 '대대리(大垈)'에 나타나듯이 '큰 집터'를 뜻하는데, 이곳에 아산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어 큰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옛 이름이 훗날을 예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산(牙山)국가산업단지 「충남 부곡(富谷)
- 잘 살기를 기원하는 미화지명

◆ 위 치 :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일원 ◆ 면 적 : 941,411평(3,112,102m2)

* 지명유래

- 부곡(富谷)은 본래 '길마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길마골은 큰 길마골, 작은 길마골로 나누어지며, 모양이 길마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 부곡(富谷)은 가멸곡을 뜻하는데 '부곡'과 관련한 지명의 유래가 따로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잘 살기를 기원하는 미화(美化)지명으로 볼 수 있다. - 한편 큰말 서북쪽에 보두막골이 있는데, 옛날 도적을 잡기 위하여 설치한 포도막(浦盜幕)이 있었다고 한다.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면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소대리, 대동, 오사리의 각 일부를 합하고 당진군 송악면에 편입되었다
양호(兩湖)지방
충청도(호서)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예산군 고덕면(古德面)
고덕면(古德面)

◆ 위 치 : 충남 예산군 ◆ 인 구 : 7,329명(2001) ◆ 면 적 : 44.97㎢ ◆ 연 혁 -백 제 시 대 : 금물현으로 칭함 -통일신라시대 : 금무현으로 개칭 -고 려 시 대 : 덕풍현으로 개칭 -조선시대(태종13년) : 덕산현 고현내면으로 개칭 -조선시대(헌종13년) : 덕산군 고현내면으로 개칭 -1914. 4. 1 고현내면, 도용면, 고산면, 거등면을 통합하여 -예산군 고덕면으로 칭함 -1991. 12. 30 예산군 조례 제1221호(91. 12. 30)로 26개리에서27개리(구만3리 분리)로 개편 -1996. 10. 1 예산군 조례 제1383호(96. 10. 1)로 27개리에서 -28개리(용3리 분리)로 개편 

* 지명유래

◆ 구만리(九萬里) "리" 이름으로 본래 덕산군 도용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구미(후미) 안쪽이 되므로 '굼안' '구만이' 구만'이라 하였는데, 포리, 황금리, 천변리를 병합하여 구만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 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구만 1,2,3리로 되어 있으며 260세대에 788명이 거주하고 있고 자연 마을은 새터, 새뜸, 포리, 천변, 아랫뜸, 중뜸, 황감뜸 황금리 등이 있다. ◆ 대천리(大川里) 본래 덕산군 고현내면의 지역으로서 하내(도, 산천)가가 되므로 '한내' 또는 '대천'이라 하였는 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별리, 내성리, 외성리, 옥동, 고곡리, 해상리, 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천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대천 1, 2, 3리로 되어 있으며 530세대에 1,666명이 거주하고 있고 자연마을은 한내 (대천리), 성동(잿골), 해상골, 별아미, 상별, 송장골, 옥굴,(옥골), 등이 있다 ◆ 사리(四里) 본래 덕산군 도용면의 지역으로서 '사리' 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일리, 이리, 삼리, 저산리와 대조지면 하룡리 일부를 병합하여 그대로 '사 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사 1,2리로 되어 있으며 148세대에 449명이 거주 하고 있고 자연마을은 계명리(鷄鳴里), 군모루, 말머리(마두, 말뫼리) 세빗들, 정동, 죽말(죽동) 등이 있다 ◆ 석곡리(石谷里) 본래 덕산군 고현내면의 지역으로서 '석골' 또는 '석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방축리, 신동을 석곡리라 해서 고덕면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석곡 1, 2, 3리로 되어 있으며 249세대에 691명이 거주하고 있고 자연마을은 갱갱이 (강경), 고혈내(고현내), 남살미, 공경굴, 방죽안(내석곡), 보통이, 석곡(석굴), 정착지, 진틀이 등이 있다 ◆ 호음리(好音里) 본래 덕산군 고산면의 지역으로서 '홈골' 또는 '호음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상리, 공수동, 매동, 황매동, 천변리 일부를 병합하여 호음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에 편 입되었다. 행정구역은 호음 1, 2리 되어 있으며 161세대에 525명이 거주 하고 있고 자연마을은 고수골(공 수골), 굴량골, 굴말, 덕령골, (신상), 황매실, 분재골, 삼봉, 재호지, 점텃골, 호음동(홈골) 등이 있다 ◆ 지곡리(紙谷里) 본래 덕산군 고산면의 지역으로서 종이를 만들었므로 '조실' '지곡' 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상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지곡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지곡리로 되어 있으며 63세대에 182명이 거주하고 있고 자연 마을은 마강골, 새뜸, 아래조실(하지<下紙>), 윗조실(상지<上紙>), 마랫들 등이 있다 ◆ 용리(用里) 본래 덕산군 도용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용수(龍首)처럼 생겼 으므로 '용수말' 또는 '용수'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리와 대조지면의 상룡리, 하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리라 해서 예산군 고덕면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용 1, 2, 3리로 되어 있으며 162세대에 486명이 거주 하고 있고 자연 마을은 구억뜸, 김가말, 도룡이(도용면 <道用面> 현청이 있었다 함), 도봉뜸, 서냇들, 안들, 중리, 서냇들 등이 있다 
 예산군 광시면(光時面 )
광시면(光時面 )

◆ 연혁 ◆ 위치 : 충남 예산군 ◆ 인구 : 4,623명(2001) ◆ 면적 : 58.04㎢ ◆ 연혁 -마한시대 : 임존(거침국 관할) -백제시대 : 임존성 관할 -통일신라 : 충주군 관할 -고려시대 : 충주군(임존군개칭)-일남면, 이남면 -1914년 광시면(일남면,이남면 통합) -1975년 행정구역 개편(서초정리, 장신리, 시목리분리) -1980년 행정구역 개편(운산리 분리) -1982년 행정구역 개편(광시리 분리) -1996년 행정구역 개편(가덕리 분리) 

* 지명유래

◆ 관음리(觀音里 : 관음골, 관음등) 본래 대흥군 일남면의 지역으로서 관음사가 있어서 관음골 또는 관음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현암리, 갈산리를 합하여 관음리라 해서 광시면에 편입됨. 갈미(갈산) 〔마을〕담안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갈모처럼 생긴 산 밑에 있어서 갈미라 한다. 갈 모란 갓위에 덮어쓰는 유지로 만든 우비를 말한다. 담안(검은바위, 현암)〔마을〕관음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동네에 검고 큰 바위가 있으므로 검은바위라고도 부른다.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 관음리에 있는 최익현의 대의비 아래말 [마을] 갈산 아래에 있는 마을 ◆ 구례리(九禮理 : 구례, 구례골, 구례등) 본래 대흥군 일남면의지역으로서 물이 좋고 땅기 건들이 있으므로 구례골 또는 구레동이라 하 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강진리, 상구례동, 하구례동, 상촌, 황곡리를 병합하여 구 례리라 해서 광시면에 편입됨. [풀이] 구례란 뜻은 협곡사이에 넓은 들이 발달한 곳으로 수렁배 미논이 많고 물이 풍족한 곳인 데 예전에는 상답으로 여겼다. 구례동이란 이러한 지형에 자리잡 은 부락을 말한다. -강쟁이 [마을] 구례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마을 생김이 강뚝에 자리한 것 같다하여 강진, 강쟁이, 강진리라고도 한다. -황수리(황실, 황곡, 황곡리) [마을] 구례동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황실, 황곡, 황곡리라고도 부른다. -구룡산(九龍山) [산] 구례리 윗구례마을 서쪽에 있는 산을 구룡산이라고 부른다. 땅이 기름진 들을 끼고 산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사는 산이라고 해서 구룡산이라고 부른다. ◆ 광시리(光時理) 광세역, 역말, 역촌, 광시)[리] 본래 대흥군 일남면의 지역으로서 이조때 광세역(光世驛)이 있 었으므로 역말, 역촌, 광세역, 광시라하였다. 1914년 행정규역 페합에 따라 대광시리, 웅산리,탑 동을 병합하여 광시리라 하며 또 이마을의 이름을 따서 광시면이라 하여 예산군에 편입됨. -고무래봉 [산] : 새장터 서쪽에 있는 산으로 마치 고무래처럼 생겼음. -광세역터 [터] : 역말에 있을 이조때 광세역의 터 -광시장 [장] : 광시리 장터에 있는 시장으로 3일과 8일에 장이선다. -바라티 [마을] : 새장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었다함. -구리(구대) : 새장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 구장터가 있었음. -상여바위 [바위] : 구리미산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상여처럼 생겼음. -새장터(장터) [마을] : 광시 남쪽에 있는 마을, 시장을 구장터에서 이곳으로 옮겼음. 면사무소, 지서가 이곳에 있음. -시느굴(신은동) [마을] : 새장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은자들이 자리하며, 편안하고 다복하게 사는 마을이라 하여 신은동이라고도 불른다. -큰광시(대광시:원광시) [마을] : 새장터 서쪽에 있는 큰 마을 -탑골 [마을] : 수네 동쪽에 있는 마을로 탑이 있었음. -수미(웅산말) : 새장터 서북쪽에 잇는 마을을 말한다. -구리미산 [산] : 오래된 마을 구리(舊里)에 있는 산이라 구리미라고 부른다. ◆ 마사리(馬沙理 : 마사, 마새, 매사) 본래 대흥군 일남면의 지역으로서 이조때 망를 먹이던 곳이므로 마사 또는 마새라 하였다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막사리, 상마사리, 하마사리, 내상산리, 점촌리를 병합하여 마 사리라 해서 광시면에 편입됨. -가막사리(可莫沙理) [마을] : 마새 서북쪽에 있는 마을, 봉수산 밑이 됨. -내상산(內上山) [마을] : 마새 서북쪽에 잇는 마을, 봉수산 밑이 됨. -대흥마새 [마을] : 마새가 홍성 대흥군에 걸쳐 잇는데 이곳이 대흥군에 딸려 있음. 주위에 풀이 좋아 말을 먹임. -산숫골 [마을] : 절골 서쪽에 잇는 마을 산소가 있음. -절골 [마을] : 마새 서북쪽에 잇는 마을로 절이 있었음. -점촌(店村) [마을] : 가막사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 신흥리(新興理) 본래 대흥군 이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산직리, 대계리, 소대리를 병합 하여 신흥리라 해서 광시면에 편입됨. -김효자문 [정문] : 안솟티에 있는 김효자의 정문 -대계(臺溪) [마을] : 산직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한 복판에 큰 개울이 있으므로 대계라 함. -모랭이 고개 [고개] : 신흥리에서 청약눈 운곡면 미량리의 미중굴로 넘어가는 고개 -산직말 [마을] : 부락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옛날 산직이 촌이었다 함. -놋티 [마을] : 산직말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솥을 만들던 곳이라하여 놋티, 소대, 소대리라고도 부른다. -장개월 [마을] : 놋티 북쪽에 있는 마을 
예산군 삽교읍(揷橋邑)
삽교읍(揷橋邑)

◆ 위 치 : 충남 예산군 서부 ◆ 인 구 : 1만 1340명(2001) ◆ 면 적 : 49.65㎢ 

* 지명유래

◆ 삽교리(揷橋里)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의 지역으로서 삽다리의 이름을 따라 삽다리 또는 삽교라 하였는데, 1914 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흥리와 평촌, 상성리, 하성리의 각 일부와 장촌면의 도리 일부를 병 합하여 삽교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읍)에 편입되었다. 76세대에 244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자 연마을로는 잿뜰, 교동, 감적나다리, 등이 있다. ◆ 평촌리(坪村里)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이 되므로 벌말또는 평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 역 폐합에 따라 삽교리 일부와 대덕산면의 이리 일부를 병합하여 평촌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 (읍)에 편입되었다. 95세대에 278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자연마을로는 새말, 벌말, 장재벌 등이 있다. ◆신리(新里) 본래 덕산군 대덕산면의 지역으로서 새로 이룩된 마을이므로 새말 또는 신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리, 삼리, 목리의 각 일부와 현내면의 원리 일부, 대조지면의 안 티리 일부를 변합하여 신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읍)에 편입되었다. 115세대에 348명의 주민 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오생이, 봉재이, 조창들등이 있다. ◆송산리(松山里)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으므로 솔미 또는 송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언티리 일부와 대덕산면의 신리 일부와 현내면의 역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산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읍)에 편입되었다. 72세대에 18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솔미, 건너말등이 있다. ◆가리(駕里)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마새, 가마시 또는 가산이 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룡이, 역하리 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읍)에 편입되었다. 77세대에 265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가마시,강산이, 곤배깃들등이 있다. ◆용동리 본래 덕산군 대조지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라 하 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동, 상룡리, 하룡리, 상동, 하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 동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용동1·2·3리로 되어 있으며 264세대에 784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자연마을로는 주래, 상용, 배나다리등이 있다. ◆신가리(新佳里) 본래 덕산군 장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흥리와 가곡리를 병합하여 신 가리라 해서 예산군 삽교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신가1·2·3·4·5리로 되어있으며 468세대에 1,385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자연마을 로는 지형이 독처럼 생겼다하여 독골, 가재울, 꽃산, 역신이 있다. 
 예산군 신양면(新陽面)
신양면(新陽面)

◆ 위치 : 충남 예산군 ◆ 인구 : 4,734명(2001) ◆ 면적 : 61.79㎢ ◆ 연혁 -백제시대 : 임존성(任存城) 거변소(居邊所)에 속하였으나 그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흥군 (大興郡) 원동면(遠東面) 거변면(居邊面)으로 분할됨 -1914년 3월 1일 예산, 대흥,덕산군을 통합해 예산군을 설치할 당시에 원동면과 거변면을 합하여 신양면(新陽面)을 설치하고 16개리로 분할 -1968년 1월 12일 귀곡리 분구 -1971년 3월 1일 일 신양리 분구 -1974년 1월 24일 죽천리 분구 -1980년 5월 1일 서계양리, 시왕리,가지리를 분구하여 현재의 23개리가 구성되었음 

* 지명유래

◆ 황계리(黃鷄里) 대흥군 원동면의 지역으로서 황계라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풍암리를 병합 황계 리라 하여 예산군 신양면에 편입됨 ◆ 무봉리(無鳳里) 대흥군 원동면의 지역으로서 무봉골 또는 무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 곡리, 성곡리와 근동면의 석천리를 병합 무봉 리라 하여 예산군 신양면에 편입됨 ◆ 녹문리(鹿門里) 대흥군 원동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겨 노루목 또는 장항이 변하여 녹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암리, 박산리, 신양리를 병합 녹문리라 하여 신양면 에 편입됨 ◆ 불원리(不元里) 대흥군 원동면의 지역으로서 불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 합에 따라 신대리, 하원리 와 공주군 신상면의 시왕리를 병합 불원리라 하여 예산군 신양면에 편입됨 ◆ 시왕리(時旺里) 대흥군 원동면의 지역으로서 시왕이, 시왕 또는 삼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 라 상불운리, 하불운리를 병합 시왕리라 하 여 예산군 신양면에 편입됨. ·행정구역은 시왕1,2리로 되어 있음. 
예산군 오가면(吾可面)
오가면(吾可面)

◆ 위 치 : 충남 예산군 ◆ 인 구 : 7,313명(2001) ◆ 면 적 : 32.32㎢ ◆ 연 혁 오가면의 태고 연혁은 역사에 의한바 없으나, 약 300년전 오원면, 우가 산면, 거구화면의 3개면 이 있었습니다. 서기 1906년 처음 면장을 두고, 1914년 3월 면폐합에 의하여 3개면을 통합 오가 면으로 개칭하고 13개리를 설치 하였습니다. 당시 면사무소를 오원면은 우촌리에 우가산면은 신석리, 거구화면은 분천 리에 두었으나, 1914 년 3월 면폐합 실시에 의하여 좌방리에 두었으며, 그후 신석리로 이동하였다가 동년 12월 17일 에 역탑리로 이동하여 13개리 20개 마을로 형성되었던중 1983년 2월 15일 4개마을이 삽교읍에 편입되어 12개 리 26개 마을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지명유래

 ◆ 오가면 오가면의 지명유래는 당초 오원리의 이름을 따서 오원리의 '오'자와 간가산의 '가'자를 따서 오 가면이라고 하였습니다. ◆ 원평리 우가산면의 지역으로서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 또는 벌리, 평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 합에 따라 상벌리, 하벌리를 병합하여 원평리가 되었고, 행정구역은 원평 1, 2리로 되어 있으며, 179세대 547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주민의 00%이상 과수재배에 종사하고 있으며 재배하고 있어 곡창지역으로 미질이 우수한 쌀로 유명하다. ◆ 신석리 신대리, 신벌리, 백석리를 병합하여 신대와 백석의 이름을 따서 신석리라 하였으며, 자연부락 과 우성아파트가 있어 대조적이기도하나 인심이 좋고 대부분의 주민이 순박하다. 행정구역은 단일구로 4개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343세대에 51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 특산물로는 미질이 우수한 쌀이 주소득원이고 마을내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있으며, 또 한 사과, 배등 과일 재배농가도 상당수가 있다. ◆ 분천리 본래 거구화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농소리, 광진리를 병합하여 분천리 라 하고 있으며행정구역은 분천 1, 2, 3, 4리로 되어 있으며, 218세대 667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부나내라는 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6.25사변 당시에는 평화촌이라하여 이재 민을 집단 정착시키기도 했다. 주민들의 주소득원은 축산과 답작 소득이 대부분이며, 마을 분위 기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 좌방리 거구화면의 지역으로 방하리, 좌천리, 덕산군 장촌명의 방리 일부를 병합하여 방하와 좌천의 이 름을 따서 좌방리라 하였으며행정구역은 좌방 1, 2리로 되어 있으며, 170세대 52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지형적으로 광활한 평야지대로 미질이 뛰어나 주부들에게 인기가 좋으며 주민 대부분이 답작에 종사하고 있다. ◆ 역탑리 본래 예산군 오원리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역촌리와 탑동을 병합하여 역 탑리라 해서 오가면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역탑 1, 2리로 되어 있으며, 370세대 1,131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오가면의 소재지로 농업과 상업이 주이며, 각급 기관단체가 집결되어 있다. 
천안시 읍면동 성거읍(聖居邑)
성거읍(聖居邑)

◆ 위 치 : 충남 천안시 중앙부 ◆ 인 구 : 1만 6534명(2001) ◆ 면 적 : 31.43㎢ ◆ 연 혁 -본래 직산군의 남쪽이 되므로 이남면(二南面)이라 하여 천흥(天興), 자동, 정동(貞洞), 오색당(五色堂), 막거리(幕巨里), 신리(新里), 월경(月境), 소도(所造), 명우(鳴牛), 복덕(福德), 문성(文城), 석교(石橋), 요동(料洞), 분반(芬芳), 수월(水越), 송당(松堂), 남창(南倉)의 17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동면(二東面)의 신전(莘田), 모관(茅串), 삼곡(三谷), 오목(五木)의 4개리와 동변면(東邊面)의 남산리(南山) 일부와 천안군 북이면(北二面)의 독주막(獨酒幕)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있는 명산 성거산의 이름을 따서 성거면이라 하여 천흥, 저리, 점촌, 오색당, 신월, 소우, 문덕, 석교, 요방, 송남, 신전, 삼곡, 오목등 13개리로 편입하여 성거면에 편입되었다가 -1985년 10월1일 대통령령 제11772호로 성거면에서 성거읍으로 승격되었다. 신이 기거하는 산이라하여 이름지어진 성거산 기슭 북서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거읍은 시내 에 인접해 있고 고속도로.국도등이 통과하는 교통이 매우 발달된 지역으로 31.43k㎡의 면적에 13개법정리 31개행정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80개 기업체에 7,000여명의 근로자가 종사하고 있 는 농공복합 지역입니다. 특히, 지역 특산물인 거봉포도의 재배로 부농의 꿈을 일구어가고, 천흥공단을 중심으로한 공업 지역으로 부상중이며, 천흥사지 5층석탑등 유구한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농업과 공업,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해외동포의 영원한 안식처인 망향의 동산, 세계적인 마라토너를 기리는 이봉주로, 충남 예술고, 성거도서관, 중부농축산물 물류센터, 성거-입장, 성거-직산간 도로가 4차선으로 확.포 장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가고 있는 미래의 땅임.

* 지명유래

◆ 직산군 -직산군 이남면 지역인데 천흥사가 있었으므로 천흥리라 불러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도 그대로 천흥리라 하여 성거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거읍 천흥리가 되었다. 산신제 : 천흥부락에서 정월초사흘경 지내는데 리장이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 두 사람을 선정하여 함께 지내는데 제관 1명, 축관 1명과 보조인 1명이고 삼색 실과 통돼지를 제물로쓰고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삼일간 담배를 금하고 옷 샘에서 목욕하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다. 각 호마다 소지를 올려 주고 평안을 빈다. -만일고개(晩日) : 만일령 매일고개라고도 하는데 천흥리에서 목천면 산방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구랑골·구암동(龜岩洞) : 바위골. 거북바위라고도 하는데 바위 모양이 거북이 처럼 생겼으며 천흥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구암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사리목 고개 : 사리현이라고도 하는데 천흥리에서 북면 납안리 도촌으로 넘어 가는 고개. 성거산 줄기가 되며 산이 높고 고개가 험하여 여러 사리 를 이루었다. 병인교란때 이곳에서 천주교인 여러 명이 관원에게 체포된 곳이다. -뱀산 : 사산이라고도 하는데 천흥 서쪽에 있는 산. 산모양이 뱀처럼 생겼다한다. -배랑골 : 천흥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문수곡(文殊谷) : 무수골이라 하며 오얏골 뒤에 있는 골짜기 -무프렛골 : 상암(上岩)골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삼도바위 : 삼도암(三道岩) 매일절(만일사) 밑에 있는 큰 바위. 길게 가로 누어있어 세골짜기의 물이 각기 이 바위를 거쳐 흐르게 되는데 얼음이 많이 얼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가운데는 충청도, 남쪽은 경상도로 구분한다. -상암골(上岩) : 원통골 위쪽에 있는 골. -원통골(員通) : 원통곡. 오얏골 윗쪽으로 원통암이 있었다. -매일절(晩日寺) : 만일사 구량골 동쪽에 있는 절. 오층탑이 있고 만일사 법당(法堂)이 지방문화재 자료 제 250호로 지정되었다. -중앙광산 : 직산광산 이라고도 하였다. 1894년에 발견되어 1910년에 영국사람이 개발하고 1925년에 일본인이 인수하려다가 1945년 한국인이 경영하였었다. -천흥사 당간 지주 : 천흥리 천흥사 터에 있는 당간 지주. 높이가 7m나 되고 60척의 구리 장대가 있어서 그 위에 큰 등을 달면 그 빛이 수백리를 비추었다고 하며 고종때 당백저를 만들기 위하여 흥성 대원군이 구리 빗장과 장대를 가져갔다 한다. 보물 제 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흥사지 오층석탑 : 천흥 저수지 및에 있는 천흥사 오층석탑 보물 제 354호로 지정되었다. -천흥사터 : 천흥에 있는 천흥사 터. 고려때 세운 절이라 하며 큰 절로 저리까지 연해 있었다고 한다. 언제 없어졌는 지는 알 수 없고 종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굴골 : 300여명이 들어갈수 있는 천연굴이 있다고 한다. -서돌골 : 대원군 섭정시 병인교난 때 리델이신부, 페롱권신부, 칼레강신부등 불란서 신부와 경상도 내포 교인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신부들은 무사히 중국 천진으로 탈출했으나 교인 다수가 관원에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사형되었다. -삿갓바위 : 돌이 얹혀 있는 것이 삿갓 같이 생겼다 한다. -아갈바위 : 바위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천안시 읍면동 성환읍(成歡邑)
성환읍(成歡邑)

◆ 위 치 : 충남 천안시 북서부 ◆ 인 구 : 2만 7564명(2001) ◆ 면 적 : 57.07㎢ ◆ 연 혁 -성환읍은 백제시대 위례성이라 칭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파산현으로 개칭, -조선시대에는 직산군 이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천안군 성환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4년 성환읍으로 승격되는 등 많은 변화를 거쳐 1995. 5. 10 천안시·군 통합 후 현재에 이르고 있음. 본읍은 충남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서로는 아산, 북으로는 경기도 평택과 접경한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지세는 대개 평탄하여 과수와 낙농의 적지로 성환신 고배는 세계 각지로 수출되어 외 화 획득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성환 개구리참외는 일제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이 고장의 특산물임과 동시에 낙농은 국립종축원과, 낙농조합의 기술지도로 낙농성환으로 발전하 고 있으며, 또한 122개기업에 3,000여명이 종사하고 있는 농공도시를 이루고 있음. 특히 국도1 호선과 지방도가 읍 전지역을 4통8달로 인근지역과 연결하여 수도 서울이 1시간 생활권내에 있 는 교통이 편리한 곳이며, 문화재로는 국보7호 "봉선홍경사사적갈비"가 대홍리 국도변에 자리잡 고 있는 유서깊은 고장으로 주민과 "21세기 천안발전은 성환부터"라는 구호아래 35명의 공무원 이 노력하는 활기찬 읍임. 

* 지명유래

◆ 신방리 -직산군 이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방축리, 신무리가 병합 하여 신무리의 신자와 방축리의 방자를 따라 신방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다 가 면이 읍으로 승격되므로 성환읍 신방리가 되었다. -박두개제(朴頭介堤) : 방축 뒤쪽에 있는 방죽인데 박두개(朴頭介)가 만들었다고 한다. -방축(防築) : 방죽리라고도 하며 신무리 서쪽에 있는 마을. 방죽이 있다. -담안밭 : 냇가쪽에 살다가 도둑이 많아 동쪽으로 이사왔으며 담을 쌓고 살았 다고 한다. -천냥골 : 논이 매우 좋아 천냥자리라고 한다. -개조지 : 갓골, 논이 나쁘고 천수답이므로 개쫓 같다 하였으며 매우 나쁜 논을 말한다. -신무리(新茂里) : 지형이 와우형(소가 누운형)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의 정자도 와우정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영구젓탈 : 논이 젓탈에 있는데 항상 모를 못심을 때가 없으므로 영구답이라고 한다. -한심덕골 : 고개가 얕아 한숨에 넘어간다고 한다. -막내각골 : 옛날 어떤 사람이 이곳의 전답을 막내 아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진잠골 : 골이 매우 길다. -깃대골 :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쟁의 승리로 깃대를 꽂았다 한다. -방똥 말랭이 : 소 구수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천안시 읍면동 입장면(笠場面)
입장면(笠場面)

◆ 위 치 : 충남 천안시 북부 ◆ 인 구 : 1만 2773명(2001) ◆ 면 적 : 42.69㎢ ◆ 연 혁 - 본래 직산군은 이동면(二東面)과 삼동면(三東面)지역으로, 이동면의 사장동(沙場洞), 기로촌(耆老村), 상장리(上場里), 하장리(下場里), 홍천동(弘泉洞), 동계리(東溪里), 호아촌(孝兒村), 구덕구(九德里 : 龜德里), 신대리(新垈里), 양대리(良貸里), 시랑리(侍郞里), 도장리(道壯里), 당곡리(堂谷里), 호계리(虎溪里), 복덕리(福德里)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2년 지장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삼동면(三東面)의 하리(下里), 연봉리(延峯里), 우지곡리(于只谷里), 산정리(山井里), 차중리(次中里), 흑암리(黑岩里), 차상리(次上里), 토산리(土山里),가좌동(可座洞), 용두리(龍頭里), 강당리(講堂里), 적정리(赤井里), 신두리(新頭里), 독정리(獨井里), 발림리(發林里), 도낭리(道郎里), 가연리(加連里)의 17개리와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笠場面)의 신흥리(新興里), 일부와 간곡면(干谷面)의 구정리(九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에서 편입된 입장면의 지병을 그대로 사용하고 천안군 입장면이 되어 도하, 연곡, 산정, 흑암, 가산, 용정, 신두, 독정, 도림, 유리, 기로, 상장,홍천, 효계, 양대, 대장, 호당, 신덕리의 19개리를 관할 하였다. -그후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입장면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천안군 조례1084호 1988. 12. 31) 도하라를 선환읍에 편입시키고 18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동쪽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남쪽은 북면과 성거읍, 서쪽은 성환읍과 직산면, 북쪽은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과 서운면에 접하고 있다. 입장면의 입(笠)자는 본래 자라는 설도 있다. 

* 지명유래

입장면은 경기·충북과 접경하고 천안시 최북단에 위치하여 천안시 관문역할을 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국도·지방도등 주요도로가 관통하고 구릉평야 지역으로서 과수등 고소득 작목과 미곡 및 축산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거봉포도 주산지 고장으로서 '93년도 제1회 거봉포도축제 를 시작으로 제9회 거봉포도축제를 개최한바 있으며 거봉포도는 송이가 크고 맛이 좋고 당도가 다른 품종에 비해 월등히 높으며 병충해에 강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생식요 및 포도즙, 식초등 음료를 가공하는 고소득 작물입니다. 주요시설물로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있으며 위례산성, 양 대기미독립만세탑 등 소박하고 진취적이며 온후한 성품을 지닌 애국충절의 고장임. 
충청도(忠淸道)
‘충청’이라는 이름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 지명유래

‘충청’이라는 이름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충청’은 1106년(고려 예종 원년) ‘양광충청주도’라고 할 때 최초로 ‘충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대 체로 충청좌도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청우도는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해당된다. ( 좌.우도는 모두 서울의 궁궐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의 방향임) 관찰사의 영은 공주에 두었으므로 감영을 금 영(錦營), 감사를 금백(錦伯)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모두 금강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삼도(下三道) 또는 삼남(三南)지방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 지명유래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이들은 모두 궁성의 남 쪽에 위치하므로 하삼남 또는 삼남지방이라고도 하였다. 
호서(湖西)
충청도의 별칭으로 호중(湖中)이라고도 한다.



* 지명유래

충청도의 별칭으로 호중(湖中)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도 ‘호(湖)’를 제천의 의림지로 보는 견해 가 있으나 금강 상류의 강변에는 호서루(湖西樓)니, 금호루(錦湖樓)니 하는 누정들이 있고, 금 강의 옛 이름이 호강으로서 이 강이 충청지방을 휘돌아 흐르기 때문이다.

 

* 충청북도

 

기호(畿湖)지방
경기도지방과 호서(충청도)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보은군 내북면(內北面)
충청북도 보은군 북서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인구 :2,287명(2001) ◆면적 : 63.48㎢ 

* 지명유래

■ 감투-바우[바위] 다락골 서북쪽에 있는 바위. 감투처럼 생겼다 함. ■ 건너-앞들[들] 곰골 서남쪽에 있는 들. 보청천 건너에 있음. ■ 곰쟁이-고개[고개] 곰골에서 두평리 곰쟁이로 넘어가는 고개. ■ 곰쟁이-골[골] 곰골 동쪽. 곰쟁이 고개로 가는 골짜기. ■ 꼬깜-바우[바위] 제비티 중간에 있는 바위. 곶감처럼 생겼음. ■ 굴봉-골[골] 백운동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다락골-앞[들] 다락골 앞에 있는 들. ■ 대산-골[골] 중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대나무가 울창했다 함. ■ 도장이-골[골] 곰골에서 도장으로 가는 골짜기. ■ 뒷-골[골] 곰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 뒤편에 있으며 백운동으로 통하는 골짜기가 됨. ■ 말-바우[바위] 선바우 동쪽에 있는 바위. 말처럼 생겼다 함. ■ 배나무-골[골] 다락골 앞에 있는 골짜기. 한 아람 반이나 되는 배나무가 있었다고 함. ■ 북증-산(北甑山)[산] → 시루산 ■ 비재-고개[고개] 곰골에서 성티리(星時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별재고개'가 변한 것임. ■ 비재-골[골] 이원 동북쪽 비재고개로 통하는 골짜기. ■ 산재당-골[골] 백운동 동쪽 시루산에 딸린 골짜기. 옛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제당이 있었 다 함. ■ 삽작-고개[고개] 다락골에서 상궁리로 넘어가는 고개. 마을을 드나드는 고개라 하여 붙인 이 름으로 사립문처럼 생겼음. ■ 삽작재-골[골] 삽작고개로 통하느 골짜기 ■ 상도-골(上頭谷)[골] 다락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상두골'이라고도 부른다. ■ 상도골-보[보] 다락골 북쪽 보청천에 있는 보앞 골짜기가 상도골이다. ■ 새-들[들] 곰골 서쪽에 있는 들. 전에 논이 아닌 땅을 개답하여 새로 생긴 들이라고 한다. ■ 선-바우[바위] 도장이 남쪽에 서있는 바위. 바위가 우뚝 서 있음. ■ 시루-산(證山:482m)[산] 곰골 북쪽에 있는 산. 산의 형태가 시루를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 며, 속리산 아래있는 4개의 시루산 가운데 북쪽에 있다하여 북증산(北證山)이라 한다. ■ 웃-머리(上頭)[골] → 상도골 ■ 작은-다락골[골] 다락골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다래나무가 다락골보다 조금 적다 함. ■ 장자불-골[골] 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재피-골[골] 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제비-티[골] 다락골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다락골에서 보은읍 상초리로 넘어가는 길이다. 골짜기의 형태가 제비가 집을 짓는 형상이라 함. ■ 증티-고개[고개] 백운동에서 산외면 중티리로 넘어가는 고개 ■ 증산-골[골] 이원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현 이원리와 백운동, 도장이 마을의 중간에 위치 하 였다 함. ■ 큰곡-골(大谷)[골] 다락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다락골에서 가장 크다고 함. ■ 해골-바우[바위] 아랫말 남쪽에 있는 바위. 어느 장마때 해골이 떠내려와 이바위에 걸렸었 다 함. ■ 호너무-실[골] 백운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산이 무너져내려 생긴 골로써 밤이면 돌이 구르 는 소리가 난다 함. 

보은군 내속리면(內俗離面)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인구 : 3,017명(2001) ◆면적 : 92.32㎢ ◆주요문화재 :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5), 법주사 팔상전(국보 55), 법주사 석련지(국보 64),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15),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216),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15), 신 법천문도 병풍(보물 848), 법주사 대웅전(보물 915),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916), 속리산 법주 사 일원(사적 및 명승 4), 속리의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 보은속리산의 망개나무(천연기념 물 207), 순조대왕태실(충북문화재 11), 복천암 수암화상탑(충북문화재 12), 복천암 학조등곡화 상탑(충북문화재 13), 법주사 희견보살상(충북문화재 38), 법주사 사천왕문(충북문화재 46) 

* 지명유래

■ 가마-골[골] 진터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숯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함. ■ 대목-고개[고개] 새목이에서 대목리로 넘어가는 고개 ■ 도래-골[골] 지방바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속리중학교가 있음. ■ 면화-골[골] 칠송정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쟁시 화를 면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피난하였던 곳이라 함. ■ 바우-골[골] 지방바우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있음. ■ 반시기-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 봉화-터(봉화불터)[터] 지방바우 북쪽에 있는 봉화터 ■ 불탕-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 사기장-골[골] 새양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상북-들[들] 지방바우 동쪽에 있는 들. 들보가 제일 먼저 생기고 제일 위에 위치하고 있 어 '상보(上洑)'라 하고 그 용수로 농사를 지으므로 '상보들'이라 부르던 것이 변한 것임. ■ 새-들[들] 지방바우 서쪽에 있는 들. 새보의 물로 관개함. ■ 새목이-재[고개] 새목이에서 대목리로 넘어가는 고개. '대목고개'라고도 함. ■ 새반시기-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 새양-골[골] 새양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있던 마을은 없어지고 '속리산유스타운'이 새로 자리잡고 있음. ■ 서북-들[들] 지방바우 동북쪽에 있는 들 ■ 심배나무-골[골] 새양골 서쪽 속리천 넘어에 있는 골짜기 ■ 어든이-골[골] 새목이에서 삼가리 불목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 옥강-수[소] 주걱수 동쪽에 있는 소. 모양이 요각처럼 생겼다 함. ■ 은구-모랭이(은구모퉁)[모롱이] 생양골 북쪽에 있는 몰옹이. 은구석이 있었던 곳 ■ 은구-석(恩救石)[바위] 은구모롱이 길가에 있었던 선돌 모양의 큰돌, 도로확장으로 없어졌으 나 근래에 속리천에서 찾아 복원하였으나 진위는 모름. ■ 작은-가마골[골] 새목이에서 삼가리 불목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 작은-상투바우[바위] 장터 서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음. ■ 작은-성지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 주걱-수[소] 지방바우 서남쪽에 있는 소. 모양이 주걱처럼 생겼다 함. ■ 중봇-들[들] 장터 서쪽에 있는 들. 중보(中洑)로 관개함. ■ 지방산-골[골] 샘고이에서 삼가리 불목이로 가는 길에 있는 골짜기 ■ 지피-골[골] 지방바위 동남족에 있는 골짜기. 엣부터 지피나무라는 약초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함. ■ 큰-골[골] 지방바우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큰-상투바우[바위] 장터 서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다 함. ■ 큰-새믹이골[골] 새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대목리까지 이어짐. ■ 큰-성지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 험한-골[골] 새목이 동쪽. 큰새믹이골에 딸린 골짜기. 

보은군 마로면(馬老面)
충청북도 보은군 남동부에 위치한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인구 : 3,694명(2001) ◆면적 : 68.48㎢ ◆주요문화재 : 보은원정리 3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118), 고봉정사(孤峰精舍 

* 지명유래

■ 갈전소류지 : 치랏골에 있는 소류지. ■ 강대박골 : 갈전 2리에 있는 골짜기 ■ 등로골 : 갈전 2리에 있는 골짜기. ■ 삼두봉 : 치랏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셋임. 삼 형제봉이라고도 함. ■ 오무뜰 : 치랏골 서쪽에 있는 들 ■ 중매기들 : 갈전 북쪽 세중리와 경계되는 들 ■ 치봉골 : 갈전 2리에 있는 골짜기 ■ 효자고개 : 갈전리 저수지에서 수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효자 정재수가 아버지와 함께 갈전 고개를 넘어 큰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고 가는데 억수같이 눈발이 쏟아지는 추위속에서 부자 는 그 고개에서 눈속에 파묻혀 죽고 말았는데 효자 정재수가 아버지를 품고 죽었다 하여 효자고 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정재수의 비석과 묘가 있음. 

보은군 보은읍(報恩邑)
충청북도 보은군 중앙부에 있는 읍.

◆위치 : 충북 보은군 중앙부 ◆인구 : 1만 7730명(2001) ◆면적 : 62.29㎢ ◆문화재 : 삼년산성(사적 235), 보은의 백송(천연기념물 104), 보은향교(시도유형문화재 95), 보은동헌(시도유형문화재 115), 김수온부조묘(시도기념물 48), 성운묘소 및 묘갈(시도기념물 70) 

* 지명유래

■ 까막샘 : 동헌(東軒) 서쪽 제방 밑에 있는 우물. 이곳에 큰 느티나무가 있고 버드나무도 여 러 그루 있었는데, 돌림병으로 죽은 애기시신을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는데, 까마귀들이 애기 시 신을 파먹으려고 날아들고 하였으나 느티나의 밑의 샘물은 전보다 물 맛이 좋아져 까막샘이라 했다고 하며, 또한 동헌(東軒)의 감옥 뒤의 샘이었기 때문에 '감옥샘'이 변하여 '까막샘'이라고 했다고 함. ■ 까막샘 둥구나무거리 : 삼산4리 까막샘옆 둥그나무가 있는 제방 ■ 남다리 : 왕산미의 남쪽에 있는 다리 ■ 동다리 : 왕산미의 동쪽에 있는 다리 ■ 사산(蛇山) : 산이 길게 뻗쳐 뱀 같이 생겼으므로 사산이라 함. ■ 삼산(三山) : 옛 보은현의 읍호(邑號)로 관아(官衙) 주위에 있는 세 봉우리를 말하는 것으로 주산(主山)은 뱀의 형상이라 하여 사산(蛇山), 안산은 개구리 형상이라 하여 와산(蛙山: 죽전리 소재)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산은 멧돼지 형상이라 하여 저산(猪山 : 장신리 소재. 이 산 은 쥐와 같다 하여 ○山이라고도 불렀음)이 있으나 좌청룡(左靑龍)이 없으므로 세산만 갖춘 고 을이라 하여 삼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 삼산교 : 왕산미의 서남쪽에 있는 다리로 1942년에 준공 후 수차례 보수타가 수해로 다시 준 공하였음. ■ 십마지 : 보청천과 삼산, 종곡, 누청리에서 나오는 물과 동다리 밑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十 자로 만난다 하여 십마지라 부름. ■ 안장터 : 사다리를 경계로 죽전과 삼산리에서 장이 번갈아 섰는데, 삼산쪽의 장터가 읍내 안 쪽에 있기 때문에 안장터 

보은군 산외면(山外面)
충청북도 보은군의 북쪽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인구 : 2,378명(2001) ◆면적 : 58.71㎢ 

* 지명유래

■ 대부-산 : 방아재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큰 부자들이 살았다고 함. ■ 방아-재 : 거북티에서 두무골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디딜방아 같이 생겼다는 고개. ■ 샛-골 : 거북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이 철분이 많아서인지 쇳물 이 흘러 나온다고 해서 쇳골이던 것이 구개음화되어 샛골이 되었음. ■ 숫돌-배기 : 거북티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칼을 가는 숫돌이 많이 나왔음. ■ 아게미-골 : 거북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생겼다고하여 아가미골이라 던 것이 변하여 아게미골이 됨. ■ 아래-재피산 : 거북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재피나무가 많다고 함. ■ 여수-골 : 샛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여우가 살았다고 함. ■ 작은-고개 (작은 거북티) : 구티에서 갈탕리 주막거리로 넘어가는 고개. 큰거북티재보다 작다 고 하여 작은재라고도 함. ■ 장-터 : 구티리 시장터로서 1975년도 까지 5일마다 장이 크게 서기도 하였으나 시내버스가 생 기고 교통이 편리하게 되자 보은장으로 생활권이 변하여 없어지게 되었음. ■ 차돌-배기 : 거북티 동쪽의 골짜기로 큰차돌이 3개 박혀 있음. ■ 참샘-골 : 아세미-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찬 샘이 있어 찬샘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참샘 골이 됨. ■ 거북티 마을비 : 수령이 5백여 년으로 추정되는 마을 중앙에 위치한 느티나무 밑에 마을 유래 비가 세워져 있음. ■ 대골 : 호랑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매우 커서 대골이라고 함. ■ 두무골 : 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철광이 있어 드나들던 골로서 지금은 길탕2리가 된다. ■ 메기바위 : 예부터 큰 메기가 살고 있었다고 함. ■ 방죽골 : 탕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고 방죽이 있음. ■ 빈정산 : 탕골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호랑봉을 빗겨 있다고 함. ■ 산지당골 : 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솟대봉 밑에 산제당이 있음. ■ 솟대봉 : 탕골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배의 돛대형 모양으로 생겼다고 함. ■ 시루산 : 중티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함. ■ 아랫고개 : 질골에서 내북면 두평리로 넘어가는 고개 ■ 웃고개 : 질골에서 봉계로 넘어가는 고개 ■ 장고개 : 질골에서 봉계로 보은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 중티고개 : 탕골에서 창리로 넘어가는 군도 고개로 탕골에는 가경관광농원이 조성되어 있다. ■ 하들 : 탕골 동북쪽에 있는 들녘으로 마을 제일 아래쪽에 있음. ■ 호랑봉 : 탕골 동쪽에 있는 사능로 산 모양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함. ■ 자연경관 : 속리산에서 발원하는 시냇물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어종이 다양할 뿐아니 라 피서지로도 적합하여 이 고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충주 남한강 달천으로 가 는 젖줄이다. 충주에서 청주를 거쳐 보은으로 보은에서 상주를 잇는 내륙 소고도로가 시루봉을 뚫고 이것을 지나가게 된다. 

보은군 삼승면(三升面)
충청북도 보은군 남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인구 : 3,597명(2001) ◆면적 : 28.28㎢ 

* 지명유래

■ 가재-골[골] 워내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가재가 많았다 함. ■ 공심이-골[골] 워내미 서쪽에 있는 골짜기. 삼승면사무소 뒤에 있음. ■ 바우-배기[들] 샛골 동쪽에 있는 들. 큰 바위가 박혀 있음. ■ 바우배기-바우[바위] 바우배기에 있는 큰 바위 ■ 삼밭-골[들] 상원암 북쪽에 있는 들. 옛날에 삼밭이 있었다 함. 오리골 위에 있음. ■ 삿갓-들[들] 워내미 서쪽에 있는 들. 칼밭골샘이 유명해서 가마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삿갓같이 보였다 함. 중간에 삼승면사무소가 있음. ■ 새터-골[골] 온배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상여-바우[바위] 상원암 북쪽 금적산 중턱에 있는 바우. 모양이 상여처럼 생겼다 함. ■ 서낭-골[골] 상원암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선지-들[들] 원남 북쪽에 있는 들 ■ 안-산(案山)[산] 상원암 남쪽에 있는 산. 높이 191m ■ 여수-골[골] 상원암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오리-골[골] 상원암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오리나무가 많았음. ■ 오미기-들[들] 장터 동쪽에 있는 들. 오덕천 건너 내망리에 있음. ■ 온배미-고개[고개] 온배미에서 샛골로 넘어가는 고개 ■ 온배미-골[골] 온배미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절-골[골] 상원암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 정구지-소류지[못] 원남 북쪽에 있는 못. ■ 정구지구렁-골[골] 원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사람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구릉지라 부르던것 이 변하였음. 정구지 소류지 동쪽에 있음. ■ 칼-바우[바위] 칼박골에 있는 바위. 모양이 칼처럼 생겼음. ■ 칼박-골[골] 상원암 남쪽에 있는 골짜기. 칼바위가 있음. ■ 칼박골-샘[샘] 칼바우 밑에 있는 샘 ■ 텃-골[골] 상원암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 통수-골[골] 상원암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통소가 있었음 ■ 통수골-고개[고개] 샛골에서 상원암으로 넘어가는 고개 

보은군 수한면(水汗面)
충청북도 보은군 남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인구 : 2,396명(2001) ◆면적 : 48.72㎢ ◆주요문화재 : 조중봉 후율사(충북기념물 15) 

* 지명유래

■ 곱단지골 : 안말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 곱단이라는 여자가 살다 죽은 후 화장하였다 함. ■ 금박골 : 안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김씨 박씨 2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여기에 서 사련 부자가 되어 잘 산다 하여 금박골이라 함. ■ 너더리골 : 원너머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매봉산 준령에 돌이 돌출되어 경치가 좋았다 함. ■ 느래재 : 느랫재 ■ 느랫재 : 병원리와 오정리의 중간지점에 있는 고개. 험준하여 느릿느릿 고개를 넘었다 함 ■ 도장골 : 너더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좁은 길이 있어 도보로 먼 길을 왕래하여 나무를 하 던 곳이라 함. ■ 매봉재 : 원너머 북쪽에 있는 산. 가련 부락 앞의 매봉산에서 사냥꾼이 사냥매를 키우면서 매 로 사냥을 하였다 함. ■ 메기바위 : 원너머 서쪽 항건천변에 있는 바위. 밑에 메기가 많다 함. ■ 반목고개 : 안말에서 산척리 반목으로 가는 고개. ■ 샘밭고개 : 안말에서 보은읍 용암리로 가는 고개. 안말에 살던 김씨 3형제가 병원에서 용암리 로 넘아디니며 놀던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 ■ 샘밭구렁 : 안말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샘이 많다고 함. ■ 샘아홉마지기논 :생밭구렁에 있는 논. 면적이 아홉마지기 정도라고 함. ■ 약물내기펀던 : 너더리골 서남쪽에 있는 버덩. 반목고개 중턱에 서낭당에 있는데 서낭당 밑 에 샘이 있어 이 샘물을 마시면 약이 되고 옻이 오른 사람이 물을 먹고 펀던에 누워 있으면 병 이 낫는가고 함. ■ 연정골 : 작은골 동북쪽에 있는 조용한 골짜기. 밑에 학문을 닦기 위하여 지은 연정사가 있었 던 곳이라고 함. ■ 작은골 :병원 서북쪽 작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 금박골 밑에 김씨의 박씨가 살던 곳으로 아주 작은 마을이 처음으로 병원 부락에 생겼기 때문에 작은골이라 함. ■ 장기바위 : 바위모양이 장기판처럼 생겨서 지나가던 선비들이 장기를 두었다고 함. ■ 학수대 : 미지랭이 서남쪽에 있는 바위. 항건산 주령 밑에 있는 바위로서 가련 부락 각 가정 에 불길한 일이 있으면 이 바위에 와서 청수를 떠 놓고 무운을 비는 바위라 함. ■ 항근천 : 항건산에서 내려오는 큰 냇물로 평소에는 맑고 차지만 가뭄에는 물이 보이지 않아 항상 건조한 내를 보인다 함. 

보은군 외속리면(外俗離面)
충청북도 보은군 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동부 ◆인구 : 1,793명(2001) ◆면적 : 29.87㎢ ◆문화재 : 보은 선병국 가옥(중요민속자료 134) 

* 지명유래

■ 거무샘(黑石井) : 서봉 서쪽에 있는 샘. 아무리 가뭄 해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빛이 검 푸르다하여 검음샘이라 하던 것이 거무샘이 됨. ■ 사격장 : 작은 항가골과 큰 항가골 사이에 군 부대 사격장을 1984년에 설치하였음. ■ 소재비골 : 장내 2리에 있는 골짜기로 일제시대 주민들이 굶주려서 소를 끌어다 잡아 먹었다 하여 '소잡이골'이라 허던 것이 소재비골이 됨. ■ 승지골(聖地) : 서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선녀들이 신선바위 옥녀봉에 내려와서 덕행을 쌓 았다하여 성스런 곳이란 뜻으로 성지(聖地)라고 함. ■ 신선바위 : 장안 북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이곳에서 신선들이 놀았다고 함. ■ 옥녀봉(玉女峰) : 장안 서북쪽에 있는 산. 옥여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 함. ■ 작은 항기골 : 승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함씨(咸氏)들이 살았 다고 하여 함가골하던 것이 항기골이 됨. ■ 큰항가골 : 작은 항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토골 : 서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최씨들이 기와를 굽던 곳이라하여 토골 또는 최동 (崔洞)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은 예비군 종합교육장이 되고 있다 

보은군 탄부면(炭釜面)
충청북도 보은군 남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남동부 ◆인구 :2,738명(2001) ◆면적 : 31.63㎢ ◆문화재 : 이명백 정충문, 이제현 영당, 익재영정(충북유형문화재 72), 상장리 선사유적 

* 지명유래

■ 감재-들(감저티)[들] 닭모랭이 남쪽에 있는 들. 벼농사가 잘 되지 않아 감자를 심었더니 풍년 이 되어 들 전체에 감자를 심었다고 함. ■ 도장-골[골] 진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졸밭골의 첫 번째 골짜기로 골안이 안방처럼 아늑하 다함. ■ 동오리-산[산] 진미 동남쪽에 있는 산. 높이 153m. 원앙들 복판에 있는 둥근산. ■ 뒤-께[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오래전부터 깨의 생산지였다 함. ■ 뒷-골[골] 진미 뒷쪽에 있는 골짜기 ■ 비선-골[골] 가평이씨의 덕을 기리기 위한 비가 서있는 골짜기 ■ 샘-고개[고개] 샘이 있는 고개 ■ 샘-너머[들] 청계샘 서쪽 너머에 있는 들 ■ 서당-골[골] 진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이 있었음. ■ 숲-밖(쑤밧)[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전에 버드나무 숲이 있었는데, 경지정리시 없어졌 음. 숲의 바깥쪽이 됨. ■ 숲-안(쑤안)[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버드나무 숲 안쪽이 됨. ■ 욋-들[들] 진미 남쪽에 있는 들 ■ 웃-골[골] 진미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 원앙-들[들] 진미 남쪽에 있는 들.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잘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함. ■ 이문이-골[골] 진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잔-허리(자노리)[산] 진미 동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잘록하게 되어 있음. ■ 정문-거리[거리] 진미동쪽 월성명정의 정문이 있는 거리 ■ 줄밭-골[골] 진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 모양이 긴 밭 모양이라 함. ■ 청계-샘[샘] 진미 서쪽에 있는 샘. 물이 맑고 수원이 좋음. ■ 청양-골[골] 지형이 청룡형이라 함. ■ 친한-바위[바위] 진미 서쪽에 있는 바위, 이 바위에 언제나 모여앉아 친하게 노는 사람이 많 다고 함. ■ 하당-저수지(下唐貯水池)[못] 진미 북쪽에 있는 못 ■ 홑깨미-동산[산] 하장 북쪽에 있는 산. 산제당이 있음. 

보은군 회남면(懷南面)
충청북도 보은군 남서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남서부 ◆인구 : 889명(2001) ◆면적 :46.61㎢ ◆문화재 : 마전사지, 매곡산성지 

* 지명유래

■ 강판-말[골] 뒷골에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골짜기. 새앙이라는 식물의 뿌리로 즙을 내어 팔 던 마을 뒤에 있는 고개. ■ 까치-고개[고개] 뒷골에서 새별로 넘어가던 고개. ■ 구승-골[골] 양종지 서쪽에 있는 골짜기. 장래에 정승 아홉이 나온다는 골짜기라 함. ■ 논-꼬맹이[고개] 뒷골 동쪽으로 해서 거교2리로 가는 고갯길. 고개가 작아 붙여진 이름. ■ 뒷-골[골] 뒷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어성고개까지 이어짐. ■ 매람부리-산(楓巖山):138m)[산] 양종지 서쪽에 있는 산. 회인천을 따라 서남쪽으로 길게 뻗 어 있어 금강에 이르렀다. 금강의 바람이 모두 이곳에 쳐 온다 .회남대교 동쪽에 있다. ■ 매-봉[산] 뒷골 동남쪽에 잇는 산. 매의 형체를 닮았다 함. ■ 새모-봉[산] 산형이 세모가 났음.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다. ■ 안뫼-골[골] 뒷골 남쪽에 있었던 골짜기.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어부동-고개[고개] 양중지 서쪽에 있는 고개. 회남대교 입구에 있음. ■ 어성-고개[고개] 뒷골에서 어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 영귀-대 영당 북쪽 회인천가에 있던 바위 절벽.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熱)이 찾아 놀던 곳이 라고 함. 뒤에 우암선생 유상지처라 하여 유상대(遊賞臺)라고도 불렀다.19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 되었음. ■ 장-고개[고개] 뒷골 동북쪽으로 해서 남대문으로 넘어가는 고개 ■ 철정이-고개[고개] 새별에서 양중지로 넘어가는 고개. 큰 무쇠솥을 가지고 넘어간다 해서 붙 여진 이름 ■ 회남-대교(懷南大橋)[다리] 신곡리에서 사음리로 가는 다리. 1980년 12월 대청호반 위에 놓 은 다리로 길이 450m. 너비 10m의 철근콘크리트로 된 다리로 교각의 높이가 75m(상판 포한 60m)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다리임. 

보은군 회북면(懷北面)
충청북도 보은군 서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보은군 서부 ◆인구 : 2,726명(2001) ◆면적 : 54.04㎢ ◆문화재 : 상현사, 회인향교(충북유형문화재 96), 아미산성, 후성영당, 호점산성, 봉석주 부조 묘 

* 지명유래

■ 금수봉(錦繡峯:219m)[산] 하마실 서남쪽에 있는 산. 이 산의 우거진 단풍나무는 회인팔경의 하나 ■ 도살-장[터] 마평 동쪽에 있는 터. 도축장이 있었던 곳이로 현재는 게이트볼 경기장이 있음. ■ 말-무덤[산] 하마실 남쪽에 있는 산. 높이는 143m로 금수봉 밑에 있는 작은 봉우리로 최영장 군이 말을 묻었다고 함. 주위는 현재 밭으로 변했음. ■ 망-골(望谷)[골] 중앙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에서 발원되는 망골천은 중앙리 중간을 지 나며 1,2리의 경계를 이룬다. ■ 망월사(望月寺,망골절)[절] 망골에 있었던 절. 지금도 법당과 요사가 있으나 승려는 없고 요 사에는 민간인이 살고있음. ■ 먹티-고개[고개] 중앙리에서 문의면 마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회인현과 문의현의 통로 로 고개가 높고 검은 구름이 항상 모여 비가 자주 왔었다고 함. 이 고개와 말구렁 사이에는 옛날 부터 숫돌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함. 지금도 이 고개의 돌은 모두 숫돌로 사용할 수 있다. ■ 반월-지(반월지)[못] 송정봉 밑에 있는 반달모양의 연못으로 회인초등학교 구내에 있음. ■ 사직-봉(社稷峯:213m)[산] 사자골 서쪽에 있는 산. 봉우리 아래에 옛 회인현의 사직단이 있 었음. 하마산의 동쪽 줄기로 회인현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됨. 이 산에 우거진 소나무는 회인팔 경의 하나. ■ 송정-봉(松亭峯:242m)[산] 마평 서쪽에 있는 산. 정상에 기우제를 지냈던 우단(雩壇)이 있었 다고 하며, 그 아래 백학(白鶴)이 살던 집이 있어 항상 수백마리의 학이 무리지어 날아 들어 회 인 팔경의 하나가 되었으며, 하마산 서쪽줄기로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됨. ■ 쇠전-거리[거리] 마평 동쪽에 있는 거리. 옛날 우시장이 섰던 자리로 현재는 복지회관이 있 음. ■ 수-각(水角)[절벽] 옥도래 남쪽에 있는 절벽. 옥녀봉 밑이 되며 남류하던 회인천이 이 절벽 에 부딪히며 물줄기가 직작으로 휘여 동쪽으로 흘렀으나, 1980년 수해복구공사로 회인천이 개 수되여 지금은 볼 수 없음. ■ 수걱-모퉁이(수각모랭이)[모롱이] 수각절벽 끝에 있는 모롱이. 회인∼대전간 도로의 분기점 ■ 수각-못(水各못)[소] 수각 아래에 있었던 웅덩이. 남쪽에 있다하여 옛 선비들은 남담'(南潭)'이라 불렀으며, 여름철 어린이들의 수영놀이가 성행하였으나, 회인천 개수공사로 없어 졌 음. ■ 신작로-들[들] 사자골 동쪽에 있는 들. ■ 아래-수꼬리[거리] 아미산 남쪽에 있었던 숲.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웃수머리'와 연계하 여 '꼬리'라 불렀으나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자 '숲거리'라 고쳐 불렀고 숲도 없어졌음. 현재 부 수1리에 속한 '아래숲거리'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중앙1리의 평창동 에 속 한 마을 이었음. ■ 아미산소(蛾眉山沼)[소] 아미산 절벽 아래로 흐르는 회인천에 있던 웅덩이 ■ 아미산-앞[들] 평창동 동쪽에 있는 들. 아미산 아래에 있음. ■ 안은산-골[골] 하마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욕녀-봉(玉女峯:157m)[산] 옥도래 남쪽에 있는 산.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 하며 회인 팔경의 하나 ■ 웃-수머리[거리]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숲. 회인중학교 앞에 있으며, 현재는 두어그루의 느 티 나무가 남아있음. 이 숲 아래인 아미산 남쪽에 있던 숲을 '아래수꼬리'라 불렀으며 이 숲 아 래의 시원한 것을 '북수청풍(北數淸風)'이라 하며 회인팔경의 하나로 일컬어왔음. ■ 작은-먹티골[골] 하마실 서북쪽에 잇는 골짜기. ■ 찬샘-골[골] 말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찬샘물 옻샘이 있음. ■ 찬샘물-옻샘[샘] 찬샘골에 있는 약수터. 피부병에 좋다 함. ■ 큰-먹티골[골] 하마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하마-삼(河磨山:280m)[산] 중앙리 서쪽에 있는 산. 옛 회인현의 진산(鎭山)으로 좌우 줄기 에 송정봉과 사직봉이 있음. 

앙성면 지당리(智堂里)
지당리(智堂里)

◆앙성-면(仰城面)【면】 충주시 13면의 하나.1903년 3월1일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앙암면과 복성면 2개면을 병합하여 그 이름을 따서 앙성면이라 하고, 단암(丹岩), 중전(中田), 강천(江泉), 모점(毛店), 목미(木尾), 영죽(永竹), 지당(智當), 본평(本坪), 용포(龍浦), 용대(龍垈), 사미(沙美), 마련(馬蓮), 돈산(敦山), 능암(陵岩), 조천(釣川)의15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가금면(可金面), 남쪽은 노은면(老隱面), 서쪽은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점동면(占東面)과 음성군(陰城郡) 감곡면(甘谷面), 북쪽은 소태면(蘇台面)과 강원도 원성군(原城郡) 부론면(富論面)과 닿고있음. 

* 지명유래

◆ 지당-리(智堂里)【리】 본래 중원군 복성면(福城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장리(智庄里), 삼당리 (三堂里), 하지장(下智庄), 벌말, 상지장(上智庄)을 병합하여 지장과 삼당의 이름을 따서 지당리 라 하여 앙성면에 편입됨. ◆ 대-촌(大村) [본말]【마을】 지당리에서 제일 큰 마을. 이 관할하에 있는 군소마을로 공말, 건너마을, 먹뱅이, 벌말, 지장골 등이 있으며 이를 통틀어 상대촌이라고 함. ◆ 이문-고개 [이문현]【고개】 삼당 앞에서 경기도 장호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 근처에 "오두훼시혈(烏 ◆ 태-봉(胎峰)【산】 본말 북쪽에 있는 둥근 산. 왕의 태봉으로 잡았던 곳이라 함.

양성면 능암리(陵岩里)
능암리(陵岩里)

◆ 앙성-면(仰城面) 충주시 13면의 하나.1903년 3월1일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앙암면과 복성면 2개면을 병합하여 그 이름을 따서 앙성면이라 하고, 단암(丹岩), 중전(中田), 강천(江泉), 모점(毛店), 목미(木尾), 영죽(永竹), 지당(智當), 본평(本坪), 용포(龍浦), 용대(龍垈), 사미(沙美), 마련(馬蓮), 돈산(敦山), 능암(陵岩), 조천(釣川)의15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가금면(可金面), 남쪽은 노은면(老隱面), 서쪽은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점동면(占東面)과 음성군(陰城郡) 감곡면(甘谷面), 북쪽은 소태면(蘇台面)과 강원도 원성군(原城郡) 부론면(富論面)과 닿고있음. 

* 지명유래

◆ 능암-리(陵岩里) 본래 충주군 복성면(福城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능동(陵洞)과 죽암리(竹岩里) 일부를 병합하여 능암리라 해서 앙성면에 편입됨. ◆ 능-골[능동]【마을】 능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19번 국도변에 위치하며, 옛날에 능자리로 잡혔던 곳이 라 함. 이 마을 관할에 있는 군소마을로는 새바지, 새말, 주막거리 등의 마을이 있다. ◆ 대평-촌【마을】 대평촌의 대표마을로서는 큰말(大村)이 있는데, 능골 동남쪽에 위치하며 전에는 능골보다도 큰 마을이었다. 이에 딸린 군소마을로는 평촌(벌말), 봉황내, 양짓말, 태자우, 새터 등이 있다. 

양호(兩湖)지방
충청도(호서)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영동군 매곡면(梅谷面)
충청북도 영동군 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인구 : 2,529명(2001) ◆면적 : 45.61㎢ ◆주요문화재 : 사로당(충북유형무화재 151) 

* 지명유래

▶장척리 長尺里 본래 황간군 오곡면(梧谷面) 지역으로서 장자(長者- 백만장자-부자)가 많이 살았다하여 장자 울 또는 장척(長尺)이라고 하였다. 못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지촌(池村)이라고도 하며 1914년 행 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촌리(泥村里)를 병합하여 장척리(長尺里)라 해서 영동군(永同郡) 매곡 면(梅谷面)에 편입되었다. ▶노천리 老川里 본래 황간군(黃澗郡) 오곡면(梧谷面)의 지역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장교천(長橋川) 물의 내폭 이 넓어 흐름이 매우 느려서 "느리내" 또는 "노내(老川)"로 불리다가 "노래", "노천"으로 변하였 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노천리(中老川里), 대노천리(大老川里) 일부와 내동(內洞)을 병합하여 영동군 매곡면에 편입시켰으며, 매곡면의 소재지로 매곡면사무소가 있다. 행정 리를 1971년 2월 23일 노천상구(老川上區, 노래웃마), 노천중구(老川中區, 노래중마, 옛赤良), 노천하구(老川下區, 노래아랫마, 잿말, 옹기동막), 내동(內洞, 안골)으로 분리하였다. 매곡면사 무소와 매곡초등학교가 노천하구에 있다. ▶강진리 江津里 본래 황간현의 내남매하면 지역으로 큰 냇가에 있으므로 강진이라 하였고 1909년 황간군 매하 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물여대리(勿如大里) ·동점리(銅店里) ·옥늑촌(玉勒村) ·해평동(海平洞)과 곤덕리 일부를 병합하여 강진리라 하고 영동군 매곡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는 해평리(옥늑촌, 강진:江津, 동점:통점)와 개춘리(개춘:開春, 물여대)가 있다 ▶옥전리 (玉田里) 본래 황간현 동오곡면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오곡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 라 옥사(玉沙:龜沙) ·남양(南陽) ·평전(平田) ·안녕(安寧)을 병합하여 "옥사"와 "평전"의 이름을 따서 옥전리라고 하고 영동군 매곡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 옥전리(옥전:玉沙:龜沙, 남양:내매이)와 평전리(평전:평밭, 안녕:안이)가 있다. ▶유전리 (楡田里, 느랏) 본래 황간현 동오곡면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오곡면에 속하였고 지대가 평평해 밭이 많으므 로 느랏, 유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오곡리, 외오곡리와 대노천리 일부, 매하면의 곤덕리(坤德里) 일부를 병합하여 유전리라 되었다. 행정리로 유전리(유전:느랏)와 내오곡리(내오곡:오리실, 외오곡:바깥마:배긋마, 곤덕)가 있다. ▶공수리 (公須里) 본래 황간현의 내남매하면 지역으로 조선조 공수전(公須田)이 있었으므로 공숫골, 공수동이라 하였고 1909년 황간군 매하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야동(沙也洞)과 오리 동(吾里洞) 일부를 병합하여 공수리라 칭하고 영동군 매곡면에 편입되었다. 1984년 행정리 분리로 공수 1리(공수, 오리곡:오리골), 공수 2리(사야, 새별:새빌)와 사야에 천 덕(天德)초등학교가 있다. 

영동군 상촌면(上村面)
충청북도 영동군 남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인구 : 2,980명(2001) ◆면적 : 137.60㎢ ◆주요문화재 : 영모재(충북유형문화재 176), 영동 삼괴당(충북기념물 22) 

* 지명유래

▶상도대리 -웃상대 본래 황간현 남상촌면 지역으로 도대 위쪽이므로 웃상대, 상도대라 하였으며, 고종 광무 10년 (1906년) 황간군 상촌면에 속하였다. 1914년 반점리(盤店里)와 선화티리를 병합하여 상도대리 라 하고 영동군 상촌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 차유(車踰 : 수레미), 어촌(어리 : 어두니 : 어니), 반점, 선화티, 양평(陽坪 : 양지들)이 있다. ▶흥덕리 興德里 본래 황간현 남상촌면 지역으로 1906년 황간군 상촌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낙은동(樂隱洞), 송정(松亭), 죽전(竹田), 설보름(흥덕리의 으뜸 마을로 옛날에 서(徐) 처사(處士)가 경상도에 갔다가 설을 쇠러 돌아오는 길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막혀 이곳에서 설과 대보름을 쇠었던 곳이라고 함.)을 병합하여 흥덕리(興德里)라 해서 영동군 상촌면에 편입되었 다. 행정리명은 흥덕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송정, 죽전, 흥덕, 낙은동(낙은터, 날근터, 난민동(難民洞) : 독골 1985년 11월 난민사업장으로 발전한 마을)이 있다. 수령이 약 300년 되는 두 그루 의 전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왜놈들이 일본에서 옮겨다 심은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믿을 수가 없 다. 우두령 고개는 경상도를 연결하며 일제때는 금광(金鑛)으로 호경기를 이루었다. ▶둔전리 屯田里 본래 황간현 남상촌면 지역으로 1906년 황간군 상촌면에 속하였다. 조선 때 둔전(屯田 : 주둔병 (兵)의 군량(軍糧)을 지급하기 위해 마련했던 밭임.)이 있었으므로 둔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영동군 상촌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명도 둔전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 둔 전이 있던 마을인 묵은터에서 밑으로 내려와 새로 이룩한 새터(新基)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자리 高子里-고자골 본래 황간군 상촌면 지역으로 1906년 영동군 군동면에 속하였으며 도마령(刀馬嶺) 앞이 되므로 고자골, 고자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고자동, 하고자동, 중기동(中基洞) 과 지통동(紙筒洞) 일부를 병합하여 고자리라 칭하고 영동읍에 편입하였다가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촌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동으로 하고자리(하고자, 중터 : 中基, 지동)와 상고자 리(상고자)가 있다. 일제 때는 금광(金鑛)으로 경기가 좋았었다. ▶임산리 (林山里) 본래 황간혀의 내남매하면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매하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양주리(楊州里) ·관가리(官基里)를 병합하여 임산리라 하여 영동군 상촌면에 편입되었 다. 둘레의 산이 아름다워서 임산팔경(林山八景) 곧, 돌고개의 붓끝 같은 봉우리인 석티필봉(石峙筆鋒) ·대실의 괘방사(掛榜砂:?峙金榜) ·고반대의 봄꽃(般臺春花) ·세심정의 가을달(心亭秋月) ·용바위의 대나무(龍岩奇竹) ·달라침산의 소나무(撻羅遲松) ·닭재의 저녁연기(鷄城夕煙) ·학 숲의 새벽바람(鶴藪晨風) 이라 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며, 상촌면에서 가장 발전하여 면사무소와 상촌초등학교가 있다. 행정리로 임산 1리(시장:장터), 임산 2리(수산:壽山:무수, 양주)와 관기리(관기:관터:召?縣의 縣舍가 있던 곳이라 함, 낙천:樂天:1945년 피난민 정착지, 새터, 비니실:비래곡)가 있다. ▶물한리 (勿閑里) 본래 황간현 남상촌면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상촌면에 속하였고 삼도봉(三道峰) 밑이 되어 물 이 많으므로 물한이 또는 물한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의 폐합에 따라 상물한리와 하물한 리로 나누고 송면리(松面里)까지를 병합하여 물한리라 칭하고 영동군 상촌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 물한 1리(황점:黃店, 직평:稷坪:핏돌, 괴현:槐峴:괴재), 물한 2리(중리:中里, 가정:佳亭:가루점, 한천:寒泉)와 물한초등학교가 있고, 물한계곡(勿閑溪谷)은 근래에 피서지로 각광을 받아 본격적인 개발을 서두르고 있어 기대된다. 

영동군 심천면(深川面)
충청북도 영동군 북서쪽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인구 : 4,463명(2001) ◆면적 : 77.80㎢ ◆주요문화재 : 난계사(충북기념물 8), 영동 김자수 유적(충북기념물 41), 박연 묘소(충북기념 물 75) 

* 지명유래

▶각계리 覺溪里 본래 영동현(永同縣) 서이면(西二面)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서이면에 속하였다. 영동천변에 위치해 있으므로 각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직동(稷洞)과 점촌동(店村洞) 일부와 서일면의 대초지리(大草旨里) 일부를 병합하여 각계리라 해서 영동군 심천면에 편입되 었다. 행정리로 각계1리(상각계 : 웃객기, 하각계 : 아래객기), 각계2리(점촌 : 점말, 직동 : 핏 골, 깨막재 : 회곡 : 灰谷)가 있다. 중종 연간인 16세기에 설치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학문당 (敎學文堂)인 선지당(先志堂)이 지방유형문화재 제43호로 1973년 12월 23일 지정받았으며, 경 내에는 김은(金牀), 김추의 정효각 이 리(里)에 속해있다. ▶약목리 藥沐里 본래 영동현(永同縣) 서이면(西二面)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서이면에 속하였다가 약물탕이 있으므로, 약목골 또는 약목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목동(沐洞)이라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영촌동(嶺村洞), 어곡동(漁谷洞)과 서일면에 대초지리(大草旨里) 일부를 병합하여 약목 리라 하고 영동군 심천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목동(沐洞 : 약목골), 어곡(漁谷 : 어 실)과 영촌(잿말)이 있다. ▶마곡리 麻谷里 본래 영동현(永同縣) 서이면(西二面)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서이면에 속하였다. 산골이어서 삼 종사를 많이 하였으므로 삼실 또는 마곡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탄항동 (炭項洞)과 서티동을 병합하여 마곡리라 해서 영동군 심천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 삼실 과 서재, 탄항(炭項 : 솔목이 : 탄공동: 숯묵이)이 있다. ▶장동리 獐洞里-노루골 본래 영동현(永同縣) 서서일면 지역으로노루가 많았으므로 노루골 또는 장동이라 하였다. 1909 년 영동군 서일면(西一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차곡리(車谷里)와 옥천 군(沃川郡) 이내면(伊內面)의 내동(內洞) 일부를 병합하여 장동리라해서 영동군 심천면에 편입 되었다. 행정리로 장동1리(노루골)와 장동2리(차곡 : 수리실)가 있다. ▶구탄리 九灘里-구미여울, 구미열, 구탄 본래 영동현(永同縣) 서서일면 지역으로 양강이 굽이쳐 흐르므로 구미여울, 구미열, 구탄이라 고 하였다. 1909년 영동군 서일면(西一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무동 (牛舞洞)을 병합하여 구탄리라 해서 영동군 심천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 구탄(구탄이), 절골(절골)이 있다. ▶길현리 (吉峴里) 본래 영동현 서서일면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서일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곡동(後谷洞), 길동(吉洞) 및 당현동(塘峴洞) 일부를 병합하여 길현(吉峴)과 당현(塘峴) 의 이름을 따서 길현리라 하여 영동군 심천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길현리이고 자연부락으로 후곡(상단리:뒷구리) ·길동(길가막골) ·당치(塘峙洞:장터: 당현:당재)가 있다. 

영동군 양강면(楊江面)
충청북도 영동군 중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인구 : 4,4424명(2001) ◆면적 : 82.00㎢ ◆주요문화재 : 영동 자풍서당(충북유형문화재 73) 

* 지명유래

▶쌍암리 雙岩里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마을 입구에 맞바위가 있으므로, 맞바우, 쌍암이라 하였다. 1909 년 영동군 남이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법곡동(法谷洞)과 신기동(新基洞) 을 병합하여 쌍암리라하여 영동군 양강면에 편입하였다. 1978년 신기동과 법곡동은 군부대 편 입으로 없어지고 쌍암리만 남게 되었으나 그 나마 완전 철수하고 지금은 군부대 아파트만 남아 있다. ▶구강리 九江里 본래 영동군 남이면(南二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계동(淸溪洞), 동남동 (東南洞) 구만동(九灣洞)과 양남이소면(陽南二所面)의 명양동(鳴陽洞) 일부를 병합하여, 구만 (九灣)과 금강(金江)의 이름을 따서 구강리(九江里)라 해서 영동군 양강면에 편입하였다. 행정 리명은 구강리(구만동 : 신구만동, 명양 : 미랭이)와 청남리(청남리(淸南里, 청계, 차남 : 수례 남)가 있다. ▶두평리 斗坪里 본래 영동군 남이면(南二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동(坪村洞), 목과정 동(木果亭洞), 두피실과 양남이소면(陽南二所面)의 자풍동(資風洞)과 양은동(養隱洞)을 병합하 여 두피실과 평촌의 이름을 따서 두평리라 해서 영동군 양강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평촌(벌담), 목과정, 양은동, 자풍동이 있다. 자풍골에 자풍서당(資風書堂) 옆 밭에서 두평리사 지(斗坪里寺址) 또는 풍곡사지(豊谷寺址)에서 5층석탑(五層石塔)이 발견되어 서당 경내에 세웠 으며, 서당 오른쪽에는 자풍재(資風齋) 창녕성시의 재실이 잇으며, 왼쪽에는 창녕성씨재실(昌寧成氏齋室)이 있기도 하다. ▶가동리 (佳洞里, 가야골, 개골) 본래 영동현 남남일면 지역으로 영동천변이 되므로, 개골, 가야골, 가동이라 하였다. 1909년 영 동군 남일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 구역의 폐합에 따라 두릉동(杜陵洞)을 병합하여 가동리 라 칭하고 영동군 양강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는 가동리(가동, 창촌:蒼村:창담, 음지개골)와 두룡리(두릉:두릉골:개골)가 있다. ▶묘동리 (妙洞里) 본래 영동현 남남일면 지역으로 묘한 바위가 있으므로 못골, 묘동이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남일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 구역의 폐합에 따라 전동(田洞)과 구고림동(舊古林洞)을 병합 하여 묘동리라 부르고 영동군 양강면에 편입하였다. 1982년 1월 1일 군부대 편입으로 전동을 폐 지하고 신전동(新田洞)을 설치하였다. 행정리명은 묘동리이고 자연부락으로 묘동·환산(環山洞:古林:고림이) ·목동(牧洞) ·晨전동이 있 으며 이(里) 내에 양강초등학교가 있다. ▶양정리 (楊亭里) 본래 영동현 남남일면 지역으로 버드나무 정자가 많았으므로 양정리라 하였고, 1909년 영동군 남일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의 폐합에 따라 양정동을 양정리라 고치고 영동군 양강군에 편입시켰으며 행 정리명도 양정리(양정:양잠이)이다. 

영동군 양산면(陽山面)
충청북도 영동군 서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인구 : 2,682명(2001) ◆면적 : 57.10㎢ ◆주요문화재 : 영국사 부도(보물 532), 영국사 3층석탑(보물 533), 영국사 원각국사비(보물 534), 영국사 망탑봉 3층석탑(보물 535), 영동 영국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3), 영동 영국 사 대웅전(충북유형문화재 61), 영동 영국사 석종형부도(충북유형문화재 184), 영동 영국사 원 구형부도(충북유형문화재 185) 

* 지명유래

▶죽산리 竹山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沃川郡) 양내면(陽內面)에 속하였다가 고종(高宗) 광무 10년 (1906년)에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정동(梧亭洞), 죽항동(竹項洞)과 남이면(南二面), 중심동(中深洞)을 병합하여 죽항과 마니산(摩尼山)의 이름을 따서 죽산 리라하고 영동군 양산면에 편입도이었다. 행정리명은 죽산리이고 자연부락(自然部落)으로 오정 (오정골), 신기(샛터), 석전(石田 : 석바탱이), 중심(중심이), 비암(飛岩 : 비암칭이, 배암동)이 있다. 마니사지(摩尼寺址)는 중심이 북쪽 마니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고사찰(고사찰)인데 3층석 탑(三層石塔)과 석조여래입상은 현재 송호리 솔밭 여의정(如意亭)에 세워져 있다. 원모재(遠慕齋)는 죽산리 622-9번지에 함창현감(咸昌縣監) 박인정(朴仁挺)의 위패(位牌)를 봉양하기 위해 서 1989년 후손들이 세웠고, 오정골 추모재(追慕齋)는 성산배씨(星山裵氏)의 재실이다. 노고산 밑의 추원재(追遠齋)는 밀양박씨 문중 재실이다. ▶원당리 (元塘理, 원댕이)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대왕산(大王山)에 원당(願堂)이 있었으므로 원당(元堂), 원댕이라 하였 다. 옥천군 양내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촌 (梧村)을 병합하여 원당리라 해서 영동군 양산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원당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원당(윗댕이)과 오촌(너그말, 노구말)이 있다. ▶봉곡리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봉우재 밑이 되므로 봉골, 봉곡이라 하였는데, 옥천군 양내면에 속했다 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동리(大洞里)를 병합하였다. ▶송호리 (松湖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내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 역 폐합에 따라 현리(縣里)와 창리(倉里)를 병합하여 이곳에 소나무와 금강(錦江)이 있으므로 송호리라 부르고 영동군 양산면에 편입하였다. 1914~1924년까지 면사무소가 있었으며, 양산팔경 중에 속하는 여의정(如意亭)과 용암(龍岩)이 있어 송호유원지(松湖遊園地)에는 여름철 경향 각지에서 수십만의 관광피서객이 모여들고 있 다. 행정이명은 송호리이고 자연부락명도 송호리(솔밭말)이다. 그리고 양산장터 동남쪽에 옛날 금 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삼남(三南) 일대의 소금을 공급하기 위해 집산하던 곳이 큰 홍수로 유로 가 변천되어 지금은 들이 된 소금실(염평:鹽坪)이 있다. 1991년 충청북도 옥천 장계, 단양, 천동, 영동 송호지구 등 국민관광지 보완 개발사업에 22억 2 천만원을 투입, 오수처리 취수탑(장)을 보완하기로 하였다. 이(里) 내에 정수중학교가 있다. ▶가선리 (加仙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내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 역 폐합에 따라 가내동(加乃洞)과 장선동(長仙洞)을 병합하여 가선리라 칭하고 영동군 양산면 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명은 가선리이고 자연부락으로 가선(加仙:加來)과 장선(아래장선:깊은장선이, 웃장선 이, 웃장선:높은 장선이)이 있다. ▶호탄리 (虎灘理)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내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범여울이 있었 으므로 범여울 또는 호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晨기동(新基洞)과 양남일소 면의 모리(毛里) 일부를 병합하여 호탄리라 부르고 영동군 양산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호탄리이고 자연부락으로 호탄(범여울, 평촌:坪村) ·곡촌(谷村:작두골) ·모리주막동 (毛里酒幕洞) ·신기(새터)가 있다. 

영동군 영동읍(永同邑)
충청북도 영동군 중부에 있는 읍.

◆위치 : 충북 영동군 중부 ◆인구 : 2만 2550명(2001) ◆면적 : 100.20㎢ ◆문화재 : 영동 매천리의 미선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364), 영동 송재휘가옥(중요민속자료 140), 영동향교(충북유형문화재 99), 영동 심원리 부도(충북유형문화재 122), 영동 화수루(충북 유형문화재 165) 

* 지명유래

▶동정리 桐井里 본래 영동현 동동면 동정리(東亭里)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군내면 동정(東丁)리였다가 1914 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석동·신기동(新基洞)·비립동(碑立洞) 을 병합하여 이곳에 오동나무 와 우물이 있으므로 동정리라 해서 영동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동정리(東井里)로 자 연부락에 새터 가마실 비석거리가 있다. ▶산이리 酸梨里 본래 영동현 서이면 오정리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서이면에 속하였고, 신 배(梨)가 많이 생산 되어 신뱃골, 산리동이라 했던 것이 변하여 심복골이라 했다.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이 면 점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이리라해서 영동읍에 편입되었다.행정리명은 산이리라하고 자연 부락은 심복골(평리말) 백두골(배두골), 양지말 등이 있다. 관내에 영동읍 위생처리장이 있다. ▶회동리 (會洞里, 會寧) 본래 영동현 동동면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동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재 궁동(才宮洞) ·장평동(長坪洞) ·장내동(檣內洞)을 병합하여 회령 사람이 와서 살았으므로 회동 리라 하여 영동면(읍)에 편입되었고, 행정리명은 회동리로 자연부락으로는 회동 ·담안(檣內) ·마 평(馬坪:마우뜰) ·재궁골이 있다. ▶당곡리 (堂谷里, 당골) 본래 영동현 고곡리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동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 기동(新基洞)과 삼봉동(三奉洞)을 병합하였다. 삼봉산(三奉山) 밑의 마을로 관우사당(關羽祠堂 : 고자리 산중에 있었는데 당곡리로 이전하였으며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셔 매년 정 월 14일에 제사를 올린다. 본당(本堂)과 별각(別閣)으로 되어 있으며 관우 등의 장군(將軍)을 모 시고 있다)이 있어 당골(堂谷)이라 해서 영동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당곡리이며 자연 부락으로 당곡·신기(새터) ·삼봉이·양지말(陽村)이 있다. ▶매천리 (梅川里) 본래 영동현 남남일면 마군천리(馬郡川里)로 1909년 군내면 매천리로 이름을 바꾸었고, 1914 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심동(鳥心洞)과 반곡동(盤谷洞)을 병합, 산막천(山幕川)과 가리천 (加里川), 산익천(山益川)의 세 내(川)가 합하므로 매끄네 또는 매천(梅川)이라 이름을 따라 매 천리라 하여 영동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도 매천리(매끄네, 밴드골 : 반곡동) ·조심리(조심 동 : 새심이)가 있다. ▶임계리 (林溪里) 본래 영동현 동동면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군동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내주 곡동(內主谷洞, 임실:林實)과 미당동·지통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임실과 임실내의 뜻을 따라 임계리라 하여 영동면(읍)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함께 임계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임실, 안점 (내점, 옛날 옹기점이 있었다)이 있다. 

영동군 용산면(龍山面)
충청북도 영동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북부 ◆인구 : 4,597명(2001) ◆면적 : 66.90㎢ 

* 지명유래

▶용산리 龍山里 본래 영동현(永同縣)의 북북일면(北北一面) 풍천리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북일면에 속하였다 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중용동(중용산)과 유정동(柳丁洞 : 有亭洞 : 유정마)을 병합하여 용 산(龍山)의 이름을 따서 용산리라 하고 용산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부락으로 유정마가 있고, 옛 풍곡부곡(楓谷部曲)터가 있다. 용산면사무소가 있었으나 1921년 구촌리로 이전하였다. 영산김 씨(永山金氏)의 풍천당(楓川堂)이 아직 남아 있으며, 그 옆에 풍계사(楓溪社)가 있다. 또한 38-2 번지(답)에서 1980년 5월 31일에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것으로 추정되는 간돌검 1점이 출 토되어 청주박물관에 소장되고 있음. ▶한곡리 閑谷里-한골, 질골 본래 영동현 북이면 대동리 지역으로서 큰 골짜기이므로 한골 또는 한곡이라 하였는데 (한곡리 에서 부상리까지의 큰 골짜기임으로 길다고 질골이라고도 한다. 한곡리 너머에 있는 동네를 통 한다.) 1909년 영동군 북이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한곡동과 동문동(東門洞)을 병합하여 한곡리라 하고 용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 한골, 중동(담지), 동문동이 있다. 1호선돌은 마을 입구 동쪽에 화강석으로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고 크기는 높이 154㎝, 너비 56 ㎝, 두께 32㎝이다. 2호선돌은 서쪽에 있으며, 화강석 윗부분을 편평하게 다듬었는데 크기는 높 이 75㎝, 너비56㎝, 두께 38㎝이다. 매년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사를 올린 다. 지방기념물로 천관산(天貫山) 산 18-1에 있는 김수온(金守溫)의 묘소가 있다. ▶가곡리 佳谷里-가리실 본래 영동현 북이면 와촌리(瓦村里)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북이면에 속하였다가 지형이 가리 처럼 생겼으므로 가리실 또는 가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가곡동과 평촌동(平村洞) 일부를 병합하여 가곡리라 칭하고 용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가래실과 창바 우(平村:倉岩)가 있다. ▶시금리 詩今里-시금동, 시궁골 본래 영동현 북이면 어천리 지역으로 높은 지대에 있으므로 시궁골 또는 시금동이라 하였는데, 1909년 영동군 북이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광탄동(廣灘洞)과 구비동(龜飛洞)을 병합하여 시금리라 해서 영동군과 용산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 광탄(너분열), 시금동, 구대동(구비재)가 있다. 또한 구비재 입구에 성산배씨(星山裵氏) 안렴사(按廉使) 대호 군(大護軍) 압교선생(鴨橋先生) 휘(諱) 구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원모재(遠慕齎) 재 실이 있다. 또한 시금동 산 5-3번지에 어천(漁川) 금포대(錦浦臺) 위에 침강정(枕江亭)이 있 다. ▶법화리 (法化里) 본래 영동현 북북일면 송림리 지역으로 법화사(法化寺)가 있어 법화(法化)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북일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법화리라 해서 용산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법화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절터, 마산이굴, 부도(浮屠)와 탑(塔) 그리고 중샘(泉)이 있는 절골(寺洞) ·으뜸마을인 중간말(中里) ·구시골 ·아랫말이 있고, 동구앞에는 선돌 1기가 서 있다. ▶매금리 (梅琴里) 본래 영동현 북북일면 송림리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북일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월동(琴月洞)과 매남동(梅南洞) 일부를 병합, 매금리라 하여 용산면에 편입되었 다. 행정리명은 매금리이고 자연부락으로 검달골(琴月洞)과 매내미(梅南洞)가 있다. 

영동군 용화면(龍化面)
충청북도 영동군 남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남부 ◆인구 : 1,125명(2001) ◆면적 : 59.30㎢ 

* 지명유래

▶자계리 紫溪里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상 구백동(上九栢洞), 하구백동(下九栢洞)과 옥천군 양남이소면(陽南二所面)의 횡지리(橫池里), 중자작동(中自作洞)을 병합하여 자계리라 하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하였다. 행정리로 자계리 (중자작동), 횡지리(중동 : 中洞, 윗빗근뱅이, 구백, 구백이, 하동 : 下洞, 아랫빗근뱅이)가 있 고, 리(里)내에 자계초등학교가 있었으나 1992년에 폐교가 되었다. ▶용화리 (龍化里)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고려 때 용화, 용화동이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하 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룡동(內龍洞) ·창촌동(倉村洞) ·창곡동(倉谷洞)을 병합, 용 화리라 부르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하였다. 면사무소가 월전리에 있었으나 1935년에 경찰지서 와 1936년 면사무소를 용화리로 옮겨왔다. 행정리로 용화리(용화:창촌), 내룡리(내룡:안용화:안 용해, 창곡:창골)가 있고 용화초등학교가 있다. ▶조동리 (肇動里, 새골)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민주지산(珉周之山)과 천마령(天摩嶺)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므 로 새골 또는 조동(鳥洞)이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상촌동(上村洞)과 중촌동(中村洞)을 병합하여 조동리라 하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하 였다. 행정리로 상촌리(상말, 불당골:佛當谷)와 평촌리(평촌:坪村:평지말)가 있다. ▶안정리 (雁汀里, 안징이)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안정이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용화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원당동(院塘洞)을 병합하여 마을 앞에 흐르는 하천에 기러기가 많이 놀았다 는 뜻에서 안정리라 하였다. 행정리명은 안정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안정동(안정이) ·원당동(元塘:鴛塘:원댕이)이 있다. ▶월전리 (月田里, 달전) 본래 영동현 남이면 지역으로 달밭이 많다고 하여 달밭, 월전이라 하였으며 1909년 영동군 용화 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흘계동(屹溪洞)과 남악동(南岳洞)을 병합하여 월 전리라 부르고 영동군 용화리에 편입하였다. 행정리로 흘계리(흘계:흘기)와 월전리(월전, ▶용강리 (龍江里) 본래 관성군(官城郡, 옥천) 속현인 양산현(陽山縣) 지역으로 1313년 옥천군에 편입되었다. 조 선에 이르러 옥천군 양남이소면(陽南二所面)에 속하였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 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소동(漁沼洞)과 저치동(猪峙洞)을 병합하여 용강리라 부르고 영동 군 용화면에 편입하였다. 행정리명도 용강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상용강(어소) ·하용강(선암:仙岩:선바우)이 있다. 

영동군 추풍령면(秋風嶺面)
충청북도 영동군 북동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북동부 ◆인구 : 3,178명(2001) ◆면적 : 55.20㎢ ◆문화재 : 장지현장군순절비 및 전적지(충북기념물 96), 죽전리 절터, 신안리 불상, 지봉리 불 상·고분 

* 지명유래

▶지봉리 池鳳里 본래 경상도 금산현 지역으로 1896년 경북 금산군 황금소면에 속하였고, 1906년(고종 광무 10 년) 황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지봉리(池山), 행동(杏洞), 각금(角金), 신 평(新坪)과 학동(鶴洞)을 병합하여 지산과 현재에 폐동된 봉동(鳳洞)의 이름을 따서 지봉리라하 여 영동군 황금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 행동(산골), 지산(모산), 동구정(동구징이), 각 금 등이 있다. 학동(鶴洞) 마을의 도로를 중심으로 고분군(古墳群) 34기가 있으며, 석불좌상(石佛坐像-대략 고려말 것으로 추정함) 오른쪽 팔과 머리 윗부분이 손상을 입기도 하였다. 학무산 (鶴舞山)는 해발 684㎞로 학이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는데 통신중계소가 정상에 있음. ▶신안리 新安里 본래 경상도 금산현 지역으로 1896년 경북 금산군 황금소면에 속하였고, 석불(石佛)의 은덕으 로 동리가 편안하다하여 신안리라 하였다. 1906년 황간군에 편입되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방현리(方峴里), 사기점, 검곡리(儉谷里), 반수리를 병합하여 신안리라 칭하고 영동군 황금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 상신안리(상신안 : 반고개, 方峴里, 안마), 하신안리(하신안 : 반진개 : 방수, 사기점 : 沙器店)가 있고, 검곡(儉谷)은 폐동되었다. 반고개 마을에서 서쪽 90m 도러변 언덕에 석불입상(石佛立像)이 마을 입구에 세워진 미륵불이다. ▶추풍령리 秋風嶺里 본래 경상도 금산현 지역으로 1896년 경북 금산군 황금소면에 속하였으며, 고종 광무 10년 (1906) 황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암리(馬岩里), 대평리(大坪里)와 관리, 은편리(銀片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있는 추풍령의 이름을 따라 영동군 황간면 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는 추풍령1리, 추풍령2리(금마, 대평), 은평리(은평)가 있다. 은편마을 뒤에 우뚝 솟은 해발 743.3m의 누리산에는 봉수대(烽燧坮)가 있으며 일제시대에는 등대(燈坮) 가 있어 항공(航空) "애야포켓드"지대라 했다. 또한 수형답(水衡畓)이라하여 삼남지대에서 가 장 높은 지대이며,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洛東江) 서쪽으로 흐르면 금강(錦江)을 이룬다. 마 암산 운수봉에는 일제의 풍수 침략인 쇠 말뚝이 있었으나 1995년 6월2일에 제거했다. ▶관 리 (官里) 본래 경상북도 금산현 지역으로 1896년 경북 금산소면에 속하였으며, 조선 때 황금소면에 속하 였다. 조선 때 추풍령역(秋風嶺驛)이 있어서 역마 또는 관리라 하였는데 1906년 충청북도 황간 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리와 관리, 학동(鶴洞)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 리라 칭하고 영동군 황금면에 편입하였다. 행정리로 관리(원관리:역마) ·후마(후리:뒷마) ·학동리(학동)가 있으며, 원관리(元官里) 뒤에 옛 날 역말의 제사를 지내던 당집마당이 있고, 당 안에는 쇠로 만든 말 형상을 모셨다. 또한 1935 년 설립된 기상관측소가 있다. ▶계룡리 (溪龍里) 본래 황간현 동오곡면(東吾谷面)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오곡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 역의 폐합에 따라 덕곡리(德谷里) ·회곡리(檜谷里) ·포촌리(咆村里)와 광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계룡리라 부르고 영동군 황금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명은 계룡리이고 자연부락을 덕곡·상표(上表) ·추곡(楸谷:추목골) ·회곡(저실)이 있다. ▶사부리 (沙夫里) 본래 경상도 금산현 지역이다. 백사장(白沙場)이 많아서 사부(沙阜)라 하였으며 1896년 경북 금 산군 황금소면에 속하였다가 1906년 황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패괴 정(沛槐亭) ·보현리(寶賢里) ·은편리(隱片里) 일부, 오고면의 보현리(寶賢里)를 병합하여 사부리 라 하고 영동군 황금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명은 사부리이고 자연부락으로 괴정(槐亭:沛槐亭) ·원사부(元沙夫) ·황보·금보가 있다. 

영동군 학산면(鶴山面)
충청북도 영동군 남서쪽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남서쪽 ◆인구 : 4,135명(2001) ◆면적 : 73.50㎢ ◆문화재 : 영동 성위제가옥(중요민속자료 144), 서산리 사지, 노고산성, 용절사, 대왕산성 
* 지명유래

▶봉소리 鳳沼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남일소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삼동(內三洞) ·외삼동(外三洞) ·압티동(鴨峙洞)과 무가동(茂加洞) 일부를 병합하여 봉소리라 하고 영동군 학산면에 편입하였다. 행정리로 삼정리(三亭里, 내삼:안삼정, 외삼:바깥삼정, 무가:사락호:四樂浩:큰주막거리)와 압티리(압티:웃담:앞재, 새터:신기:새발)가 있다. ▶범화리 範華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남일소면에 속하였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시동(上矢洞), 하시동(下矢洞), 하천동(下川洞)을 병합하여 범화리라 칭하고, 영동군 용화면에 편입했다가 1947년 학산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 하시리(하시 : 아 래살목 : 살구목 : 아랫골), 상시리(상시 : 웃살목 : 살못)가 있다. 자연부락 원계(遠溪 : 원천 : 멀지내 : 모시내)는 1990년 자연폐동되었다. 또한 살목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이 넘고, 1905년(을사년)에 이 느티나무가 크게 울었다고 한다. ▶서산리 鋤山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남일소면(陽南一所面)에 속하였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 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입석동(內立石洞), 행지동(杏旨洞), 서곡동(鋤谷洞), 아평동 (鵝坪洞)을 병합하여 서곡과 대왕산(大旺山)의 이름을 따서 서산리라하여 영동군 학산면에 편 입하였다. 행정리로 아평1리, 아평2리, 입석리(立石里 : 입석, 선돌 : 돌세우골), 서곡리가 있고, 학산면의 중심지역이다. ▶학산리 (鶴山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남일소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곡동(馬谷洞) ·당곡동(堂谷洞) ·양호동(楊湖洞) ·학촌동(鶴村洞)을 병합하 여 학촌(鶴村)과 양산현(陽山縣)의 학산리라 부르고 영동군 학산면에 편입했다. 행정리로 학촌리(학촌:황새끼미, 당곡:당골, 서당골)와 마곡리(마곡:마실, 양호:뱀고개, 비암고 개)가 있다. ▶지내리 (池內里)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남일소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큰 못 안쪽 이 됨으로 못안, 지내(池內)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모리(毛里) 일부와 광평동 (廣坪洞) ·조령동(鳥嶺洞)을 병합하여 지내리라 하고 영동군 학산면에 편입했다. 행정리로 조령리(조령:새재) ·지내리(지내:못안, 갓담, 넘벌) ·광평리(광평) ·모리(모리:아랫도 리, 웃모리)가 있고 이(里) 내에 광평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교됐다. ▶박계리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남일소면에 속했다가 1906년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지형이 바 구니(바구니)처럼 생겼다고 바구리, 박계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순양동(順陽洞) ·상지동(上池洞)을 병합하여 박계와 순양의 이름을 따서 박양리라 해서 영동군 학산면에 편 입되었다. 1918년 박계리로 개칭하였으며 행정리로 상지리(상지:웃모리:구룡촌, 제실말)와 하지리(하지: 아랫모리:새터) ·순양리(순양동) ·박계리(박계동:박우리:바구니:박양리)가 있다. 

영동군 황간면(黃澗面)
충청북도 영동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영동군 북부 ◆인구 : 5,964명(2001) ◆면적 : 90.20㎢ ◆문화재 : 황간향교(충북유형문화재 100), 영동 반야사 삼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186), 영동 송우암유허비(충북기념물 46) 

* 지명유래

▶우천리 牛川里-쇠내 본래 황간현(黃澗縣) 서면(西面) 지역으로 냇가에 소를 많이 먹이던 곳이라하여 쇠내, 우천이 라 하였다. 1909년 황간군 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화동(蓮花洞)과 도동(桃洞)을 병합하여 우천리라 해서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로 우천리(우천 : 쇠 내 : 소내, 연화동)와 도동리(상도골 : 독골 : 소태배기, 중도골, 하도골)가 있다. 그리고 우천리 에는 선돌 3기가 있는데 1호 선돌은 밭에 세워져 있고, 북동향으로 높이 160㎝, 너비 150㎝, 두 께 400㎝이며, 2호 선돌은 논둑에 있는데 크기는 높이 200㎝, 너비 110㎝, 두께 55㎝이며 북서향 이다. 3호 선돌은 밭에 있는데 속칭 "사모바위"라 불린다. 북서향으로 높이 130㎝, 너비 110㎝, 두께 46㎝로 되어 있다. ▶원촌리 院村里-서원촌, 서원말 본래 황간현 읍내면 지역으로 한천서원(寒泉書院)이 있었으므로, 서원말, 서원촌(書院村)이라 하였다. 1909년 황간군 군내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우티리(우티리)를 병합하여 원촌리라 해서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명은 원촌리이고 자연부락으로 원 촌(서원말), 사직단(社稷壇), 솔티(우티곡, 소재), 구터가 있다. 서원말 입구에는 우암(尤庵) 송 시열(宋時烈)이 강학하던 한천정사(寒泉精舍)가 있고, 그 아래는 기미정(己未亭)이 세워져 있으 며, 송우암유러비각이 한천팔경(寒泉八景)인 월류봉 및 송천이 흐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원 촌리 50번지에 첨모재(瞻慕齋)가 있으며, 구터에는 또한 은진송씨(恩津宋氏) 재각(齋閣)이 있 고 심묘사지(深妙寺址)가 서원말에 남아 있기도 하다. 사직당 마을의 송천(宋川)과 석천(石川) 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에 있는 바위 그늘은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유적(遺蹟)으로서, 너 비는 약 10m,높이 5~6m의 원촌교(院村僑) 북단 동쪽의 남향바위다. 또한 구터마을 북서쪽 용 산방면으로 약 500m떨어진 밭 가운데 비교적 큰 고인돌이 있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260×210× 30㎝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노근리 (老斤里, 녹은) 본래 황간면 서면 지역으로 노근, 녹은(鹿隱)이라 하였다. 1909년 황간군 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근리·안대리(安大里)·목화곡리(木花谷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 여 노근리라 해서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로 노근리(노근:鹿隱)·안화 1리(安花:안 대)·안화 2리(목화실:木花實)가 있다. ▶마산리 馬山里-말미 본래 황간현 읍내면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군내면에 속하였고 뒷 산 모양이 말처럼 생겼으므 로 말미, 마산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옥포동(玉浦洞)과 미평리(渼坪里)를 병합 하여 마산리라하여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리로 마산리(마산)와 옥포1리(옥포), 옥 포2리(옥포)가 있다. 신흥역에 소속된 말을 키우던 산이었으므로 마산이란 동명을 칭하였다. 옥 포동 황간역 광장에는 1963년 11월 10일에 건립한 대한의사이건석선생기념비(대한의사이거석 선생기념비)가 높이 3m, 폭 0.8m, 두께 0.4m의 화암오석으로 음각되어 있다. 또한 에넥스씽크 공장은 1978년 7월 28일 박유재(朴有載) 사장이 창설한 공장 부지 6,000평의 큰 공장이 다. 옥포 동에서 남성리 우회도로가 가설되었고 황간교가 새로 세워졌다. ▶난곡리 본래 황간현 읍내리 지역으로 황간읍 내 뒤 골짜기 안에 있으므로 도라니 또는 난곡이라 하였 다. 1909년 황간군 군내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오도리(吾道里)와 신흥리 일부 를 병합하여 난곡리로 개칭,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하였다. 행정리로 난곡리(난곡:도라니)와 소난곡리(사업장:事業場, 실티:주막거리, 소난곡:五道峙)가 있 다. ▶서송원리 (西松院里) 본래 황간현 서면 지역으로 조선 때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던 원집 서송원(西松院)이 있었으므 로 서송원(徐松院, 西松院)이라 하였다. 1909년 황간군 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 합에 따라 서송원리·탄막리(炭幕里)·신의티리(新儀峙里) ·목화곡리·노근리의 각 일부와 영동군 군동면 상가리(上加里) 일부를 병합하여 서송원리라 칭하고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하였다. 행정 리로 신탄 1리(신탄:新炭)와 신탄 2리(탄막, 명륜동:明倫洞) ·서송원리(서송원동:新松戾:시누재) 가 있다. 

오송(五松) 보건단지
- 옛날 큰 소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던 곳

◆ 위 치 : 충북 청원군 강외면(江外) 일원 ◆ 면 적 : 1,919,000평(6,343,802m2)

* 지명유래

- 강외면(江外)은 그전 청주군의 연강(沿江) 서쪽 밖이 되므로 서강외일하면(西江外一下)이라 하였던 곳이다.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서강외일상면(西江外一上)을 합하고 강외면(江外)이라 하였다. -'오송(五松)'이라는 이름은 강외면 소재지의 리명칭으로서 그전에 큰 소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어서 오송리라 불렀다고 한다. - 강외면에는 정중리(正中)라는 마을이 있고, 이곳은 중간정좌터 또는 중정척(中正尺) 이라 부른다. 그 이름이 뜻하는 바는 나라 안의 중간 지점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이 마을은 정동리(正東), 정남리(正南) 등의 마을 일부를 합한 것이다. - 소나무의 솔잎은 생식(生食)이나 민간에서 여러가지 약재로 쓰이는데 이곳에 보건단지가 들어선 것도 모두 인연있는 땅이기 때문인것 같다

오창(梧倉) 과학산업단지
- 은혜를 갚은 두꺼비 설화로 유명한 곳

◆ 위 치 : 충북 청원군 오창면, 옥산면(玉山) 일원 ◆ 면 적 : 2,856,000평(9,441,322m2) ◆ 연 혁 - 청주지역은 마한땅에 속하였다가 백제 지역이 된 곳으로 상당현(上黨) 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 함. - 685년(신라 신문왕 5) 직할시에 해당하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689년(신문왕 9) 서원경에 성을 쌓음. - 770년(혜공왕 6) 왕이 친히 서원경에 행차하였고, 신라 말기에는 태봉과 후백제의 국경이 되기도 함. - 940년(고려 태조 23) 지금의 이름인 청주로 고쳤으며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됨. - 995년(성종 14) 전국에 십도(十道)를 둘 때 청주는 중원도에 속하여 절도사를 둠. - 1018년(현종 9) 전국에 8목을 둘 때 청주목이 됨. - 1449년(조선 세종 31) 관찰사가 목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세조 때에는 진을 둠. (이하 청원군 연혁은 청주 신봉지구 참조) - 오창면은 청주군 북강외일하면(北江外一下面)이라 하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북강외일상면, 북강외2면, 서강외2상면 등의 지역을 합하고 오창면이라 하였다

* 지명유래

- 오창면(梧倉)은 이 지역내에 있었던 오공창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오공창은 원래 '오공창(蜈蚣倉)'이라 하였고, 이것이 변하여 오근창(吳根倉)이 되었으며 북창(北倉)이라고도 하였다. - 그런데 '오공'이란 지네를 말하며 여기에 사연이 있다. 오공창은 1669년(현종 10) 목사 윤세교가 중창하고 1694년(숙종 20) 목사 박규증이 증축하였던 규모가 큰 창고이며, 이 일대를 지금까지 창리라 부르고 있다. - 옛날 이 창고에 괴이한 일이 있어서 해마다 주민들이 한번씩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내 왔다고 한다. 그것은 창고에 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그 다음날 문을 열어보니 없어졌어야 할 처녀가 살아 있고, 그 옆에는 큰 두꺼비 한 마리와 대들보만한 지네가 죽어 있었다. - 처녀를 구제하여 자초지종을 들어본 즉, 죽은 두꺼비는 10여년 전 처녀가 장마에 떠내려 오는 것을 구해주고 밥을 먹여서 길러온 것이라고 하였다. - 처녀가 인신공양에 뽑혀서 이곳에 잡혀오자 두꺼비도 따라서 들어와 큰 지네와 싸워 함께 죽으므로서 처녀를 살리고, 은혜에 보답하였다는 것이다. - '오공창'은 이 지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 옥산면(玉山)은 본래 청주의 서쪽 강 바깥이 되므로 서강외이하면(西江外二下面)이라 부르던 곳이다. -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서강외이상면, 서강내이하면, 북강외이면의 각 일부를 합하고 면소재지인 오산리(烏山里)의 이름을 미화하여 '까마귀 오(烏)'를 피하고 옥산면(玉山)이라 하였다

옥천군 군서면(郡西面)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면.

◆위치:충북 옥천군 ◆인구: 2,910명(2001) ◆면적: 45.99㎢ 

* 지명유래

▣ 상중리 상중리는 원래 군서면 동오리(東五里)에 속해있던 마을로서 후에 하동리(下東里)와 상중리(上中里)로 나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서면 동오리(東五里)라 하여 81호가 살았고 1890년의 기록에는 109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으며 1908년 군,면의 행정구역 조정때 군서면을 일소면(一所面)과 이소면(二所面)으로 나누었는데 동오리(東五里)는 일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의 전면 조정때 일소,이소면을 합쳐 다시 군서면(郡西面)이라 고치고 이때 동오 리(東五里)를 하동리(下東里)와 상중리(上中里)로 나누었다. 상중리(上中里)라 부르게 된 것은 일소면과 이소면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하여 상중리라 하였으 며 안동오리,새터말, 능골, 분터골등 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 사정리 사정리는 원래 군서면 은행정리(銀杏亭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은행리(銀杏里)와 사정리 (沙亭里)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서면 은행정리라 하여 56호가 살았으며, 1890년의 기록에는 67호가 살았 다고 되어 있다. 1908년 군,면을 조정하면서 군서면을 일소면(一所面)과 이소면(二所面)으로 나 누면서 은행정리는 이소면에 속하게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을 전면 조정할 때 일소면, 이소면 을 합쳐 다시 군서면으로 고치고, 은행정리를 은행리와 사정리로 나누었다. 사정리(沙亭里)라 부르게된 것은 사기(沙器)마을의 사(沙)자와 행정(杏亭:살구정)의 정(亭)자 를 한자씩 취하여 사정리(沙亭里)라 하였다. 사기점(沙器店)은 이 마을에 고려때 부터 청자(靑磁)와 백자(白磁)를 굽던 곳이기 때문에 사기 점(沙器店)이라 하였고 , 행정(杏亭)은 이 마을에 살구나무가 많고 살구나무 숲이 있어 "살구 정"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쓰면서 살구행(杏),정자정(亭)자를 써서 행정(杏亭)이라 부르게 되었 으며 자연마을으로는 사기점, 살구정,마전동 등이 있다. ▣ 사양리 사양리는 원래 군서면(群西面) 사음동리(舍音洞里)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상지리(上地里)와 사양리(舍楊里)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서면 사음동리(舍音洞里)라 하여 68호가 살았으며, 1890년 기록에는 74호 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08년 군,면의 행정구역 조정때 군서면을 일소면(一所面)과 이소면(二所面)으로 나누었고 사 음동리는 이소면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전면 조정때 일소,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 서면(郡西面)이라 고치면서 이때 사음동리(舍音洞里)를 상지리(上地里)와 사양리(舍楊里)로 나 누었다. 사양리(舍楊里)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이 골짜기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마을은 분지로 산이 둘러 쌓여 있어, 마치 마당에 울타리를 한 것 같다 하여 "마랑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쓰면 서 "마음"(馬音)이라 하였으며 그후 집사(舍)사시나무양(楊)자를 써서 사양(舍楊)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연마을으로는 서성골, 마살미, 마랑골, 뱀골, 논골 등이 있다. ▣ 은행리 은행리는 원래 군서면 은행정리(銀杏亭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사정리(沙亭里)와 은행리 (銀杏里)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 기록에는 군서면 은행정리(銀杏亭里)라 하여 56호가 살았고, 1890년에는 67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8년 군,면의 일부 조정때 군서면(郡西面)을 일소면(一所面)과 이소면(二所面)으로 나누면서 은행정리는 이소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의 전면 조정때 일소,이소면을 합쳐 다시 군서면이 되고, 이때 은행정리(銀杏亭里)를 사정리(沙亭와里)와 은행리(銀杏里)로 나누었다. 은행리라 부르게 된 것은 원래 마을을 "양심이"라 불러 왔는데 조선초기(朝鮮初期) 이곳을 지나 던 도사(道師)가 이 마을에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있으니 양심이라 하지 말고 "은행리"라 부르 면 잘살게 될것이라 하여 그후부터 은행리(銀杏里)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연마을으로는 양심이 (下銀), 윗양심이(上銀) 두마을이 있다. 

옥천군 동이면(東二面)
충청북도 옥천군 중앙부에 있는 면.

◆위치: 충북 옥천군 ◆인구: 4,028명(2001) ◆면적: 60.20㎢ 주요문화재 옥천 지석묘(충북유형문화재 10), 옥천 석탄리 입석(충북유형문화재 156), 사서공 (전식) 영정(충북유형문화재 171), 옥천 청마리 제신탑(충북민속자료 1), 옥천 양신정(충북기념 물 29), 이기윤 망북비(충북문화재자료 15) 

* 지명유래

▣ 평산리 평산리는 원래 이남면이 현재의 이원면에 속해 있다가 그 후 동이면이 되면서 이에 속하여 오늘 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남이소면의 소도리와 북상리일부를 병합하고 평 산리라 하여 동이면에 속하게 되었다. 평산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의 옛 이름을 "들뫼"라 불렀는데 이는 들 가운데에 있는 산이란 뜻으로 이를 한자화하면서 들평, 뫼산이라 하여 평산이 라 부르게 되었다. 소도 마을의 옛 이름은 "바드리"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화하면서 "바"눈 바소 로, "드리" 는 길도로 써서 소도가 되었다. 자연 마을로는 들뫼, 바드리가 있다. ▣ 금암리 금암리는 원래 군동면의 용암리와 군남면의 목금리 지역인데 후에 동이면이 되면서 금암리 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군동면의 용암리와 군남면의 목금리를 병합하 여 목금리의 금 자와 용암리의 암자를 취하여 금암리라 하고 동이면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 명 칭의 유래 중 용암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뒤편에 고려 때의 용암사란 절이 있었고 마을 앞에 는 큰 바위돌이 용같이 길게 뻗어 있어 용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목금리는 원래 "목쇠"라 부르 기 때문에 한자화하면서 목금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용암말,압구정,황새골,목쇠,건 너말,앙고말,오꼬대,새말,솔밭말이 있다. ▣ 적하리 적하리는 원래 이남면의 하리와 적령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동이면에 속하면서 적하리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적령리와 하리를 병합하여 적령의 적자와 하 리의 하자를 취하여 적하리라 하고 동이면에 속하게 되었다. 적하리로 부르게 된 것은 적령이 원래 "부릉개"인바 이를 한자화하면서 "붉은재"로 하여 적령이라 하고, 하리는 마을아래 편에 있 다 하여 하리라 불리웠다. 자연마을로는 부릉개, 부평, 학사골, 연줄, 용소말, 대발말, 올목등이 있다. ▣ 세산리 세산리는 원래 이남면의 상리와 하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동이면이 되면서 세산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이남이소면의 남상리, 하리, 북상리, 평산리의 일 부를 합병하여 동이면에 소속케 하였다. 세산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의 옛 이름이 "가느 메"라 불리우고 있는 데서 유래된다. 이를 한자화하면서 가늘세, 뫼산자를 써서 세산이라 부르 게 되었으며, 석화마을은 옛 이름이 "돌꽃이"이라 이도 돌석 꽃화로 한자화하였고, 용암마을은 당초에는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괴촌이라 부르다가 마을 가운데 용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있 어 용암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마을의 앞 동네가 탁운 마을이기때문에 용암말의 용자와 탁운 마을의 운자를 따서 용운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들꽃이, 천수골, 용암말, 탁운, 오가 골 등이 있다. 

옥천군 안내면(安內面 )
충청북도 옥천군의 북쪽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옥천군 ◆인구 : 2,662명(2001) ◆면적 : 64.32㎢ ◆주요문화재 : 옥천 후율당(충북기념물 13), 가산사 영정각 및 산신각(충북기념물 115) 

* 지명유래

▣ 현리 현리(顯里)는 본래 신라때부터 고려때 까지 현의 관아가 있던 곳이므로 현리라 부르게 되었 다. 1739년 여지도서에는 현리로 59호가 살았으며, 1890년의 신유장적에는 현리로 29호가 산것 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리는 창말과 신촌 탑산이동 3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창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안읍창이란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읍창은 인근 2km 지점에 금강과 이곳 에 화인진이 있기 때문에 근방에서 거두어들인 각종 조세와 물품을 안읍창에 모아 두었다가 금 강물이 많을 때에 금강을 통하여 서울 등지로 운반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창고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창고라 하겠다. 신촌 마 을은 근자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이라 불렀지만 대청댐 수몰로 모두 이주하고 현재는 집터만 쓸쓸히 남아있다. 탑산이는 현리사지가 있는 곳이며 1979년까지 탑이 있었기 때문에 탑 산이라 불렀고, 이 곳에는 6.25때 월남한 피난민들이 4∼5호 정착하면서 마을이 되었다. ▣ 정방리 정방리(正芳里)는 원래 정곡리에 속해있던 마을이며 후에 정곡 마을과 방곡 마을이 합하여 정 방리가 되었다. 1739년 기록에 보면 정곡리라 하여 85호가, 1890년에는 113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안내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는데 이 정곡리는 지금의 정곡, 방곡, 도이리등 3개 마을 을 관할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 정비하면서 정곡과 방곡을 합하여 정방리라 하였 고, 도리골을 따로 분할하여 현재에 이른다. 정방리라 부르게 된 것은 두 마을 을 합하면서 정곡 리의 정자와 방곡의 방자를 한자씩 합하여 정방리하 하였다. 정곡은 "정실"이를 한자화 하면 서 "정"을 바를 정으로 "실"은 골짜기란 뜻으로 골곡을 써서 정곡이라 하였으며, "정실"이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정착을 한 사람들이 연일 정씨이었기 때문에 "정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 다. 방곡은 방골이라 불리었는데 고려 때 이곳으로 귀양을 왔다가 돌아가게 되면서 이곳 주민들이 인정 많고 덕성스러움을 기리 남겨놓기 위하여 덕행지미란 뜻으로 덕성스러울 방자와 골곡자 를 써서 방곡이라 하였다 한다. 자연마을은 정실이와 방골, 두개마을 뿐이다. ▣ 도이리 도이리는 원래 정곡리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으나, 후에 도리골, 또는 도이동이라 하였는데, 도 이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 기록에 보면 정곡리에 85호가 살았고, 1890년에는 113 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도이동과 지내를 병합하여 도이리 라 하고 현재에 이른다. 도이는 "도리골"을 한자화하면서 한글 발음대로 도이라 썼다. 그런데 "도이"란 뜻은 복숭아와 오얏이란 뜻으로 보기 쉬우나, 이는 어진 사람을 비유한 말로 후 율당을 이곳으로 옮긴 후 어진 사람이 많이 탄생하라는 뜻으로 도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을 "도리골"이라고 불렀는데 월래는 "도리골"이 아니고 "다리골"이란 옛글로 "다 리"가 "들"이란 뜻이 되므로 "다리골"은 마을앞에 "들이 있는 골"이 된다. 즉 "다리"라 하면 흔히 해석하기를 내을 건너다니는 다리로 보고있고 거의가 교로 쓰고 있으나 잘못된 해석으로 옛글 에서 들이 되는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양지말, 음지말, 못안골 등으로 나뉘어진다 ▣ 동대리 동대리(東大里)는 본래 대동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대동리가 분구되면서 동대리라 불리어지며 오늘에 이른다. 1739년 기록에 보면 대동리에 56호가 살았고, 1890년 기록에는 109호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 구역 일제 정비 때 대동리를 분구하여 동대리와 서대리등 2개 리동으로 나누었다. 동대리와 부르게 된 것은 대동리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동쪽의 대 동이란 뜻으로 동대리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벌말, 음지말, 양지말, 쓰리, 새터말, 가래티 등이 있다. ▣ 서대리 서대리(西大里)는 원래 대동리에 속해있던 마을이었으나, 서대리라 불리게 되었다. 서대리가 속 해 있던 대동리는 1739년에는 56호에 15세이상 된 사람이 187명이 살았고, 1890년 기록에는 109 호에 472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상당히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조정시에 대동리를 동대리와 서대리등 두개 리동으로 나누었다. 서 대리라 부르게 된 것은 대동리의 서쪽에 위치하였다하여 서대리라 하였다. 자연 마을로는 뱀골, 용촌골, 터골, 새말, 꽃박골 등 5개 마을로 되었다. 

옥천군 옥천읍(沃川邑)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

◆위치 : 충북 옥천군 중앙부 ◆인구 : 3만 963명(2001) ◆면적 : 47.54㎢ ◆문화재 : 옥천 용암사 쌍석탑(충북유형문화재 3), 용암사 마애불(충북유형문화재 17), 옥천향 교(충북유형문화재 97), 옥천 사마소(충북유형문화재 157), 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충북유 형문화재 193), 옥천 척화비(충북기념물 6) 

* 지명유래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기에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불렸으 나 통일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에 관성군(管城郡)을 고쳤고 고려 현종 때에는 경산부(京山府) 에 예속되었다가 인종(仁宗) 때에 현(縣)이 되었다. 1181년(명종 12)에 일시 폐현 되기도 하였으나 1313년(충선왕 5) 주(州)로 승격, 옥주(沃州)라 했고 경산부의 소속인 이원 (伊源)·안읍(安邑)·양산(陽山)의 3현을 받아들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옥천으로 개칭하고 관할도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변경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는 군이 되었고, 1914년에는 신라시대에 굴산현(屈山縣)·기산(耆山)으로 불리 었던 청산군(靑山郡)을 병합하고 학산면(鶴山面)·용화면(龍化面)·양산면(陽山面)은 영동군(永同郡)에 이관하였다. 1929년에는 이내(伊內)·이남(伊南) 두면을 합하여 이원면(伊院面)으로 하 고 청서(靑西)·청남(靑南) 두 면을 합하여 청성면(靑城面)으로 개편하였으며 1949년에는 옥천면 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1읍 8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옥천군 이원면(伊院面 )
충청북도 옥천군 남부에 있는 면.

◆위치: 충북 옥천군 남부 ◆인구:6,197명(2001) ◆면적:66.37㎢ ◆문화재:금강의 어름치(천연기념물 238), 옥천 두암리 삼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120), 옥천 경 현당(충북유형문화재 158), 충의공 김문기 유허비(충북기념물 44), 옥천 송우암 유허비(충북기 념물 45), 창주서원 묘정비(충북기념물 105 

* 지명유래

이원면은 본래 신라 초에는 소리산현(所利山縣)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16년 757년에는 이산현 (利山縣)이라 고쳐 부르고, 현재의 옥천인 관성군에 소속케 되었다.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에 경상도 성산부에 소속 시켰다가 충선왕 5년 1313년에는 옥주에 소속 되었다. 조선 태종 3년인 1413년 지방행정제도 일제 개편 때에 이산현이 없어지고 이남면(利南面)과 이 내면(利內面)으로 분할되었다. 1739년 『여지도서』의 기록에 보면 이내면이라 하여 현리(縣里)·역리(驛里)·칠방리(漆方里)·구 룡리(九龍里)·원동리(院洞里)·백지리(白池里)·지동리(池洞里)·우두미리(牛頭尾里) 등 8개 리와 이남면에 평산리·하리·상리·장찬리·건천리·윤동리·개심리·세곡등 8개 리로 되어 있었다. 1890년 신묘장적(辛卯帳籍)에서는 이내면에 현리·역리·칠방리·구룡리·원동리·백지리·지동리·우 두미리·두단동리·지탄리 등 10개리와 이남면에 평산리·하리·상리·장찬리·강청리·건천리·윤동리· 개심리·세곡리·소도리·적령리·문평리 등 12개리가 있었다. 고종 32년인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이산현의 안쪽이 되므로 이내면이라 하여 우산리· 지동리·지탄리·백지리·원동리·구룡리·칠방리·현리·현남리 등 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이남일소면의 건천리·강청리·일부와, 이남이소면의 하리 일부와 영동군 남일면의 당현리·장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우산리·지탄리·백지리·원동리·용방리·이원리등 6개 리로 개 편 관할 하였는데, 1929년 4월 1일 지방행정 구역 변경에 따라, 이 남면의 건진리·장찬리·강청리· 윤정리·미동리·의평리·지정리·개심리·평계리·수점리등 10개 리를 병합하여 이원의 이름을 따서 이원면이라 고쳐서 16개 리가 되었다. 그후 1973년 7월 1일 이원면 우산리를 동이면에 편입시킨 후 오늘에 이른다. 

옥천군 청성면 (靑城面 )
충청북도 옥천군 중동부에 있는 면.

◆위치:충북 옥천군 중동부 ◆인구:3,496명(2001) ◆면적:82.90㎢ ◆문화재:산계리 성지·고분군, 저점산 성지, 거포리 사지, 대안리 사지 

* 지명유래

능월리는 원래 청산현 서면 두능리에 속해있던 마을로서, 후에 두능과 망월을 합쳐 능월리라 하 여 오늘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옥천군에 소속되면서 청서면이 되었고, 두능리를 망 월리와 합하면서 능월리로 고쳐 청서면에 소속케 하였다. 1929년에는 청서면과 청남면을 합하 여 청성면이라 하고 이에 속하였다. 능월리라 부르게 된 것은 두능의 "능"자와 망월리의 월"자 를 합쳐 능월리라 하였으며, 두능의 이름을 막을두에서 현재는 말두로 고쳐 두능이라 쓴다. 자 연마을로는 두릉댕이, 중방, 망월이 있다 ▣ 도장리(道場里) 도장리는 원래 청산현 서면 마장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대안리와 도장리로 나뉘어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옥천군에 속하게 되었고 서면이 청서면으로 고쳐지면 서 마장리가 대안리와 도장리가 되어 청서면 관할이 되었다. 1929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시 청남 청서 양면이 하나로 되어 청성면이 되면서 이에 관할로 들어갔다. 도장리라 부르게 된 것은 마 을들을 합하여 하나로 이름 지을 때 도곡리의 "도"자와 마장의 "장"자를 한자씩 취하여 마장리 가 되었다. 도곡은 "오도골"을 한자로 쓰면서 "도골"이라 하여 발음대로 도곡이라 하였다. 마장리는 원래 공무로 여행중인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여 주던 은천원이 있던 곳으로서 "말바 탱이" 라 불리웠다. 말바탱이란 타고 가던 말을 쉬게할 때, 이곳에 메어 두는 곳으로서 이를 한 자로 쓰면서 마장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외도곡, 내도곡, 마장, 지령이가 있다. ▣ 대안리(大安里) 대안리는 원래 청산현 서면 마장리에 속해있던 마을로서, 그후에 도장리와 대안리로 갈라져 현 재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청산현이 없어지고 옥천군에 소속되면서 서면이 청서면 으로 되고 마장리가 이때 도장리와 대안리로 나뉘어 졌다. 대안리라 부르게 된 것은 "한재미"라 하여 "한"은 크다는 옛 말이고 "재"는 고개 즉 티를 말하는바 마을 뒤에는 안남면 도농리로 넘어 가는 큰재가 있어 사실은 대티이나, 질마재라 하여 안티라 부르면서, 대티의 대자와 안티의 안 자를 붙여서 대안리라 하였다. 귀평은 "귀골"을 귀곡이라 부르고 "평지마"를 평촌이라 부르면서 귀곡의 "귀"자와 평촌의 "평" 자를 한자씩 취하여 귀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추동, 평촌, 양촌, 곤남, 지령, 상귀, 하귀, 성촌, 소목이 있다. ▣ 화성리(和城里) 화성리는 원래 청산현 서면 석성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후에 화동 마을을 합하여 화성리라 이름지어 오늘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청산현이 없어지고 옥천군에 소속되면서 청 서면으로 되고 이때 석성리가 화동과 합하여 화성리가 되었다. 화성리라 부르게 된 것은 두 마 을이 합하면서 한 이름으로 될 때 화동의 "화"자와 석성의 "성"자를 한자씩 취하여 화성리라 하 였다. 석성은 마을 뒤 산계리와 경계되는 산위에 저점산성인 석성이 있기 때문에 석성리라 부르 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대기, 소화동, 교촌, 양짓말, 음짓말이 있다. ▣ 장연리(長連里) 장연리는 원래 청산현 북면 장연동리에 속한 마을로서 후에 마을이름을 장연리로 바꾸어 오늘 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청산현이 없어지고 옥천군에 소속되면서 북면에서 청서면 관할이 되었고, 이때 장연동리를 장연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29년 청서면과 청남면이 합 하여 청성면이 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장연리라 부르게 된 것은 골짜기가 한없이 길게 이 어졌다 하여 긴장(長), 이을련(連) 자를 써서 장연(長連里)리라 하였으나 원래 옛 이름은 "장명 골"로서 골짜기가 깊어서 노루들이 우는 골이라 하여, 노루"장(獐)", 울"명(鳴)"자를 써서 장명 (獐鳴)골이라 불렀다. 자연마을로는 장명골, 귀재가 있다. 

음성(陰城)유통단지
- '큰 곳'을 뜻하는 대소에 유통단지 들어선다

◆ 위 치 : 충북 음성군 대소면(大所) 일원 ◆ 면 적 : 81,000평(267,769m2) ◆ 연 혁 -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잉홀현(仍忽) 으로서 757년(경덕왕 16) 신라에서 당나라 식으로 지명을 바꿀때 지금의 이름인 음성(陰城)으로 고쳐 흑양군(진천)의 속현이 됨. - 995년(고려 성종 14) 충주에 속하였으며 감무를 둠. - 1592년(선조 25) 일시 청안현에 붙여서 폐현 되었다가 1618년(광해군 10) 고을 백성들의 상소로 복구되어 음성현이 됨. - 1413년(조선 태종 13) 관례에 따라 감무를 둔 곳은 현감을 배치함. -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으로 지방관제 개정시 관례에 따라 음성군이 됨. - 1914. 3. 1 일제에 의한 부군면(府郡面) 폐합시 충주군 일부, 경기도 음죽군의 일부 등을 합하여 음성군이 됨. - 1956. 7. 8 군내면이 음성읍으로 승격됨

* 지명유래

-'선화공주(善花公主) 주은(主隱)'(선화공주님은)에서 '주은'을 nimi-ni의 표기로 보는데, 음성의 '음(陰)'도 주은의 '은'과 같은 계열어로서 nama, 등 차음표기의 형태인 ama의 표기와 동계어로 보며 이는 대성(大城) 또는 장성(長城)을 뜻하는 옛말이다.1) - 한편 음성의 옛이름 '잉홀(仍忽)'을 잉=물(水), 홀=골로 보아서, 이 지역이 물이 풍부한 물골을 뜻하는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 - 대소면(大所)은 이 지역이 고려때 대조곡처(大鳥谷處)가 있어서 대조곡면이라 하였으며 1914년 부군면 폐합때 소탄면(所呑) 등을 합하고 대조곡면과 소탄면의 머리글자를 따서 대소면이 되었다. - 대소면 오류리(五柳)에는 조선 이태조의 환궁을 위하여 함흥차사로 갔다가 죽은 마지막 함흥차사 충민공 박순(朴淳)의 사당이 있다. - 대소란 '큰 곳'을 뜻하는데 이곳에 유통단지가 들어서서 문물이 풍성해지는 큰 곳을 예언하고 있는 것 같다

제천(堤川) 박달재
충북 제천시 봉양면(鳳陽面) 원박리(院朴里)와 백운면(白雲面) 평동리(平洞里) 경계

-충북 제천시 봉양면(鳳陽面) 원박리(院朴里)와 백운면(白雲面) 평동리(平洞里) 경계에 있는 고개. 

* 지명유래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 동리에 이르렀다.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 는 과년한 딸이 이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초초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았다.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졌다.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었다. 밤마다 두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싸리문 앞을 떠나지 앉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詩)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科場)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달은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내 보내고는 날마다 서낭에서 빌었다. 박달의 장원급제를,그러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 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달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 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은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의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제천(堤川) 신월(新月)
- 반달은 커지는 달이므로 신월(새달)

◆ 위 치 : 충북 제천시 신월동, 청전동 일원 ◆ 면 적 : 195,000평(644,628m2)

* 지명유래

- 신월리(新月)는 본래 '새월이'라 부르던 곳이며 지형이 반달형국으로 된 산밑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제천군 현좌면(縣左)으로서 근우면(近右面)의 일부지역을 합하고 읍내면에 편입된 곳이다. - 반달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므로 이를 '새달'→'새월'→신월로 된 것이라고 한다. - 옛 지명에서 달→월(月)은 아사달, 응달, 비탈 박달 등과 같이 '달'이 산이나 땅 자체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제천(堤川) 왕암(旺岩)공단
- 큰 바위가 있어서 '왕바위'라 부르던 곳

◆ 위 치 : 충북 제천시 왕암동 일원 ◆ 면 적 : 357,000평(1,180,165m2)

* 지명유래

- 왕암동(旺岩)은 원래 제천군 근우면 지역으로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묵지리, 소사리, 한의동 등을 합한 곳이다. - 그 때 이곳에 있던 왕바우의 이름을 따서 왕암리라 하였으며 1920년 9월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 그 후 1983. 2. 15 제원군 금성면 일부와 함께 봉양면 왕암리도 제천시에 편입되었다. - 왕바우는 왕암리앞 들 가운데 있는 큰 바위로서 '큰 바위'를 뜻하며 '임금'과 관련된 다른 전설은 없다. 다만 1894년 갑오경장때 큰 바위가 세 쪽으로 갈라졌는데, 당시는 동학운동, 청일전쟁 등으로 나라 안팎이 뒤숭숭하였던 시대이므로 이 바위가 세 조각으로 갈라진 것이라고 한다. - 왕바위 옆에는 또 마귀할머니가 가져다 놓았다는 '마구할미 바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알수 없다. - 왕암리의 '왕(旺)'은 '왕(王)'으로 써야 옳다. 그러나 1900년대 이후 전국의 많은 지명이 왕(王)→왕(旺)으로 바뀌었으며 '왕(旺)'을 파(破)자(字)하면 「일(日)왕(王)」이 되는데, 이런 현상을 모두 1890년대 부터 침투하기 시작한 일본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예:서울 인왕산(仁旺山)→ 인왕산(仁王山)

제천(堤川) 청전(靑田)
- '청전'은 벼가 푸릇푸릇한 논을 뜻함

◆ 위 치 : (1)충북 제천시 청전동, 고암동(古岩) 일원 (2)충북 제천시 청전동, 장락동(長樂) 일원 ◆ 면 적 : (1)49.395평(163,289m2) (2)76.723평(253,630m2) ◆ 연 혁 - 제천지방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내토군(奈吐) 또는 대제(大堤)군이라 부르던 곳이며,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때 내제(奈堤)군으로 고침. - 940년(고려 태조 23) 제주(堤州)로 고쳤고 그후 별호를 의원(義原) 또는 의천(義泉)이라 함. - 995년(성종 14)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폐지하였고, 중원도(中原道)에 속함. - 1018년(현종 9) 원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예종때 5도양계제를 시행할 때 양광도(楊廣道)에 속함. - 1395년(조선 태조 4) 양광도 일부가 충청도로 개편되고 충주목에 딸리게 됨. - 1413년(태종 13) 지금의 이름인 제천으로 고쳤으며 현감을 둠.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시 관례에 따라 군을 둠. - 1914년 일제의 군면폐합시 청풍군을 제천군에 합함. - 1940. 11. 1 제천면이 제천읍으로 승격됨. - 1980. 4. 1 제천읍이 제천시로 승격됨. - 1995. 1. 1 제천시와 제천군이 통합되어 제천시로 됨

* 지명유래

- 제천(堤川)의 옛 이름 '내토'는 '냇둑'의 이두식 표기이며, 그 이후 대제(大堤), 제주(堤州), 제원(堤原) 등의 '제(堤)'도 모두 큰 제방으로부터 비롯된 이름으로 보고 있다. - 제천의 별호를 의원, 의천이라 하고, 또 의림지(義林池)라는 삼국시대의 큰 저수지가 있는데, 의림이란 이 저수지를 축조한 현감의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고을의 별호인 의원, 의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 그러나 그보다는 제천은 '의(義)'의 고장이다. 이곳은 구한말 항일의병활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고장으로서 구국의병운동의 일번지인 곳이다. - 수십명에 달하는 의병장과 의사들이 왜적과 싸우고 산화한 곳으로의 '의(義)'의 '숲(林)'을 이룬 곳이니 의림이란 말과 맞아 떨어지는 곳이다. - 그래서 제천에는 의병장의 묘와 사당이 많으며 어느 동네, 어느 골목도 의병의 피어린 싸움터 아닌 곳이 없다. - '청전(靑田)'은 그냥 '푸른 밭'이 아니라 '벼가 푸릇푸릇한 논'을 뜻한다. 옛날에는 전답을 합하여 '전(田)'이라 하였으므로 '밭'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 이곳은 그전 제천군 현우면 지역으로서 1914년 읍내면(제천면)에 편입된 곳이며 조선시대에 연원도 찰방에 딸린 감원역이 있었던 곳이다. - 고암동의 '고암(古岩)'은 글자 그대로 옛바위인데, 이 지역에 고인돌과 같은 큰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무곡 마을에는 고려장으로 추측되는 옛 묘도 있었다고 한다. - 장락동의 '장락(長樂)'은 원래 창락사(昌樂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므로 '창락'→'장락'으로 변한 것이다. - 그러나 '장락'은 '무궁한 즐거움'을 뜻한다. 오래 살면서 즐긴다는 뜻인데, 이곳에 있는 창락사 칠층 전탑을 '장수탑(長壽塔)'이라 부르고 있다. - 장수탑은 시주를 청하는 노승에게 부자집 주인이 모래를 퍼 주었는데, 그 벌로 부자집은 탑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시아버지 몰래 노승에게 쌀을 퍼 준 며느리는 집을 나와 노승을 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 한편 장수탑이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옛날 탑옆에 있는 연못에서 붕어를 잡으려던 형제가 이 못에 빠져 죽었다. 그로 인하여 탑이 그 형제의 집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진천군 덕산면 (德山面)
충청북도 진천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충북 진천군 ◆인구:6,414명(2001) ◆면적:35.26㎢ ◆주요문화재:진천산수리 백제요지(사적 325), 송인묘소(충북기념물 91), 진천산수리 마애여래 좌상(충북문화재자료 20) 

* 지명유래

 용몽리 - 구말 : 임진왜란 당시 어느 채씨가 피난하다가 현몽하여 터를 잡았다 하여 꿈마을이라 하던것 이 구말로 변함. - 묘봉 : 앞산의 봉우리가 묘하게 생겨 묘봉이라 함. - 안구말 : 구말장터 동남쪽안에 있는 마을 - 용소말 : 옛날 마을앞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용이 승천하였다하여 용소라 함. 신천리 - 가신말 : 가재울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 마을이 매우 빈한하여 간신히 생계를 이어오 다 점차 부유해져 간신말이라 함. - 가재울 : 신척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조선 국초 최효검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고 마을형국이 가재와 같다하여 가재울이라 이름 - 홍개 : 가신 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에 충성하던 경주김씨들이 고려 패망후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 낙향하여 홍포를 벗고 살았다하여 홍포라 하였고 일제말 행정구역 개편으로 홍개라 함. - 꽃샘골 : 예로부터 이곳에 샘이 있었는데 물맛이 좋고 주위에 꽃이 많아 꽃샘골이라 함. 한천리 - 구실 : 현재의 하천부락을 말하는데, 주변의 평야가 땅이 비옥하며, 매년 풍년을 기약하는 살 기좋은 마을이고 곡식의 열매가 잘여문다 하여 구시울이라 하던것이 구실로 변함. 합목리 - 목골 : 합목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큰 못이 있어 못동이라 하던것이 목동 목골로 변함 - 신촌 : 합목리에 새로생긴 마을 - 하목 : 목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 - 가마샘 : 성주암에 있는 우물로 물이 하도 차가와서 목욕도 하고 물도 마시기 위해 양반들이 장가마를 타고 다녔다하여 가마샘이라 함. 산수리 - 고수말 : 웃방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이 아름다워 시조를 읊고 창을 부르며 놀던 장 소였으며 장단을 맞추어 북을 잘 치는 유명한 고수가 살았다 하여 고수말이라 함. - 골방골 : 방골 마을중 골안에 위치하고 있어 골방골이라 함. - 매산 : 방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 산형이 매화처럼 생겼다하여 매산이라 함. - 중방 : 골방골 위에 있는 마을 화상리 - 고재 : 화상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산에 진달래, 철죽꽃이 매우 많아 꽃재로 하던 것이 고재 로 변함. - 지미실 : 위고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농부들이 농작물을 거두어 들일때 비가 조금만 와 도 땅이 너무 질어 짐을 잘 며때렸다 하여 지미실이라 함. 인산리 - 어지미 : 옛 선인들이 앞들에 있는 못에서 고기를 낚아 먹어보니 그 맛이 일품이라 어지미, 어 진 사람이 노는 산이라 하여 인산이라 함. - 널번지 : 인산에서 옥동으로 가는 넓은 산과 들이라 널번지라 함. 구산리 - 개미실(가미실) : 상구앞 도로변에 벗꽃나무가 길게 뻗어 있어 가미실, 구산리의 산세가 개미 를 닮았다 하여 개미실이라 함 - 도장굴 : 동산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수도자가 이곳 바위에서 100일 기도후 도사가 되었 다 하여 도장굴이라 함 - 동산말 : 개미실 앞 동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동산말이라 함 기전리 - 선옥 : 화전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입구 산에 수정같은 차돌이 많이 있어 선옥이라 함. - 트미실 : 가전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베틀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트미실이라 함. - 화전 : 선옥 남쪽에 있는 마을로 그곳에 큰 꽃밭이 있어 화전이라 함. 두촌리 - 강당말(강당) : 안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강당이 있어 강당이라 함 - 상대 : 강당말과 차돌배기에 걸쳐 있는 마을 - 선옥골 : 안말 서쪽에 있는 마을 - 선옥신 : 강당말 남쪽 500m지점에 있는 마을로 기전리 선옥마을에서 이주해온 사람이 최초 로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선옥신이라 함 - 원봉 : 안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 - 차돌배기 : 강당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에 차돌이 박혀 있어 차돌배기라 함 석장리 - 돌실(석실) : 석맥이 석장리 일대에 뻗쳐 있어 돌실이라 함 - 바리목골 : 대월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토산품을 한양 으로 운반 할 때 소에 바리를 싣고 가다가 이곳에서 옮겨 싣고 갔다 하여 바리목골이라 함 - 아래들실(장암, 하석) : 돌실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아래들실이라 함 옥동리 - 암(양푼바위) : 양푼바위가 있는 마을 - 옥골 : 평야지대로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 걱정을 하지 않아 옥같은 쌀이 생산된다 하여 옥골, 옥동 - 작은옥골 : 옥골 서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진천군 문백면(文白面)
충청북도 진천군 남부에 있는 면.

◆위치:충북 진천군 ◆인구:4,549명(2001) ◆면적:60.33㎢ ◆주요문화재:진천농교(충북유형문화재 28), 정송강사(충북기념물 9), 충간공남지묘소 및 신도 비(충북기념물 80), 이정부부묘와 묘표석(충북기념물 94), 송강정철신도비(충북기념물 187) 

* 지명유래

 옥산마을 옥산마을을 오미라고 한다. 오미는 약 360여년전에 조선 중엽(中葉) 진주 이씨가 정착하였고 그 후 역촌이라 하여 이 곳에서 오고 가는 길손과 역부들이 점심 참을 대었고, 염소국에 점심을 잘 먹었다고하여 점심오(午)자 양미(未)자를 써서 오미라 하였다. 그 후 행정구역 개편시 마을 옆에 옥과 같은 산이 있다고 하여 옥산(玉山)이라 칭하였다 한다. 또 한 설(設)은 지형상으로 어 미알이 누어있는 형국으로 오메라 하였든것이 오미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오미란 순수한 우 리말이며 평지보다 조금 얕고 수초(水草)가 나고 또 물이 늘 고여 있는 곳을 말한다. 오미란 동 명이나 지명은 전국에도 많이 있다. 바사리-바사리는 문백면 옛 소재지를 말한다. 원은 마살리(馬殺里)라 한다. 여기서 임진왜란 당 시 일본군의 말을 죽이어 마살리라 하였는데 그 후 바사리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 설은 지 형이 말의 바를 사리어 놓은 형국으로 바사리라고 하는 설도 있다. 따라서 오미마을은 오메말, 갈마지(渴馬池)마을은 목마른 망아지의 형국이라고 한다. 파재-두성(豆城)마을 두성마을을 파재(芭城)라고 한다. 성(城)안이 파초(芭焦)잎과 같이 생겨 파재라고 하였다. 일정 시대에 토지 측량을 하고 팥두(豆)자를 써서 두성(豆城)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땅히 파성(芭城)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상 싶다. 파재는 삼국시대에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의 흔적이 있고 동네안에 절샘과 절터가 있어 지금도 기와조각이 나온다. 마을 10여호에 문화류씨(文化柳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류희원(柳希源)선생의 효자 정문(旌門)이 있다. 동네 앞산을 차일 봉(遮日峰)이라 하는데 양천산(350m) 내맥(來脈)이 뻗치어서 이루어진 산으로 그 모양이 차일 (遮日)을 쳐 놓은 것 같이 생겨 차일봉이라 하는데 이런 예는 전국 도처에 많이 있다. 예(例)를 들면 ① 함경남도 풍산군과 신흥군 사이에 있는 산. 높이 2,508m ② 함경남도 정평군과 평양남도 영원군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742m ③ 함경남도 북천군에 있는 산. 높이 1,663m ④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높이 1,529m 이 마을은 한때 피난곳이라 이름이 났으나 6?25격전지로 유명하며 호되게 혼이 난 곳이기도 하 다. 파재-두성(豆城)마을 능과 같은 큰 무덤이 있어 능골이라 전한다. 이 무덤은 누구의 무덤인지 아직 확인이 되고 있지 않다. 마을어구에는 옛 절터가 있으며 축대가 소롯이 남아 있다. 말부리고개-문백면 소재지에서 진천으로 오는 첫고개를 말부리 고개라고 한다. 우암 (尤庵) 송 시열(宋時烈) 선생께서 말을 타고 이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게 되었다. 고개마루에 마침 바위가 두개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우암이 타고온 말을 가리키며 "이 바위는 네 불랄 같구나." 하였 다. 그 후 말부랄고개가 말부리고개로 변하였다 하며 이 고개에서 산세를 관망하시고 송강(松江) 정 철(鄭澈) 선생의 묘소를 잡았다 한다. 

진천군 이월면 (梨月面)
충청북도 진천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충북 진천군 북부 ◆인구:7,757명(2001) ◆면적:55.19㎢ ◆문화재:신잡 영정(충북유형문화재 45) 

* 지명유래

 내촌리 내촌(內村)마을 내촌마을을 당골이라 한다. 옛날에는 내당마을이라고 하였다. 당(堂)이라 하면 집 당(堂)자이 니 옛날 어떤 큰 건물이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30여호 가구에 문화 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신대(新垈)마을 신대마을을 새터라 한다. 또는 새터말이라 한다. 이 마을은 옛날부터 새로 지을 집터가 많다고 하여 새터, 새터말이라 하였다. 마을이 형성되기는 역사가 길지 않다. 신촌(新村)마을 이 마을은 난민 정착촌으로 30여호 가구에 인구 150여명으로 굳센 의지와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 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희망에 벅차 있다. 서울로 가는 도로가에 위치하며 신촌이라 한다. 근어(謹語)마을 조선 시대에 어느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학문도 많이 아는 학자요, 또 묘자리와 집자리를 잘 보는 풍수였다. 그는 자기 동네에서 임금이 탄생하는 좋은 자리가 있다 하여 마을 사람들에 게 퍼뜨렸다. 그리하여 근방 사람이 임금이 탄생할 마을이라 하여 왕곡(王谷)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해에 풍수는 아들을 낳았다. 그제야 쇠를 놓고서 자기 집자리를 살피 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우리 집 자리가 임금이 날 자리인데 오늘에야 알았구나!"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자기 아들의 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오! 내 아들이 임금이 될 상(相)이로구나" 하 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임금이 났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점점 장성하여 소년 시절이 되자 열심히 공부를 가르쳤다. 머리가 민첩하기에 공부도 잘 하였다. 근 방에 있는 학자들이 자주 놀러 온다. 그러면 손님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 내 아들 저놈이 임 금이 될 상을 타고 났어! 공부를 시켜 보니 재주도 있고 의견도 넓고……" 한다. 그러면 모두 들 "얼굴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그것도 그럴 듯한 이야기여!" 하면서 몇 해 동안을 지냈다. 이 런 이야기는 퍼지기 시작하여 관가에까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이를 어이 하리오? 포졸 (捕卒 지금의 경찰관) 들이 몰려 와서 풍수의 집을 에워 쌌다. 주인과 그의 아들은 묶이어 갔다. 풍수의 부인은 몇 해 동안 주인과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 은 임금의 아들을 두었다하여 자랑도 많더니 이제는 망해 버리고 말았다 하면서 동네 이름을 망 골(亡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근방에 있는 학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풍수는 본래부터 입이 너 무 가볍더니 화를 입고 말았고나 말을 조심해야지 하면서 근어(謹語), 즉 말을 조심해야한다 하 면서 근어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 시대에는 역적으로 몰리게 되거나 음모 즉, 유언 비어를 퍼뜨리다가 벌을 받으면 성까지도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이야기가 여기저 기 전하고 있지마는 성명조차 전하지 않고 있다. 이 풍수 역시 연대나 성명은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 

청주(淸州) 가경(佳景)
- 산수가 아름다워 살기 좋은 곳

◆ 위 치 : 충북 청주시 가경동, 개신동, 복대동 일원 ◆ 면 적 : 104.821평(346,516m2)

* 지명유래

- '가경(佳景)'이란 볼만한 경치, 아름다운 경치를 뜻하며, 이 지역의 산수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 청주군 서주내면에 속했다가 1914년 사주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 청주시로 들어온 지역이다. - 개신동(開新)의 '개신'에 대해서는 특별한 유래가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개신'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 하므로 이 지역 택지개발에 따라 '새롭고 활기찬 생활'이 시작됨을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 개신동도 청주군 서주내면에 속했다가 1914년 사주면에 들어왔고 1963년 청주시에 합해졌다. - '복대동'에 대하여는 따로 설명하였다

청주(淸州) 복대(福臺)
- '복받는 땅'을 기원하는 이름

◆ 위 치 : 충북 청주시 복대동 일원 ◆ 면 적 : 115.821평(382,879m2)

* 지명유래

- '복대(福臺)'란 짐대, 즉 당간지주를 말한다. 이곳은 짐대가 서 있었던 곳이므로 짐대마루, 복대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복대(卜大)' 또는 '복대(福臺)'라고도 썼다. - 그러나 그 짐대가 용두사 철당간(국보 제 201호)과 같은 어느 특정한 사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조선 선조때 토정 이지함 선생이 보은으로 가는 길에 청주를 지나다가 청주의 부모산(아양산)에서 청주를 관망하니 그 아래 마을이 행주형(行舟形:배가 가는 형국)임을 알게 되었다. - 이에 이토정은 이 지역이 장차 수천, 수만명의 인구가 모여들 것이나 행주형 지세 이므로, 사람들이 정착하기 보다는 뜨내기로 지내는 사람이 많을 것을 예견하였다. -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 정착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무쇠로 만든 당간을 세웠으므로, 그 마을을 짐대마루라 부른다. - 이 짐대는 돛단배가 바람을 타고 흘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그때 쇠로 만든 대를 박았는데 그것이 지동리(池東里)의 '쇠대박'이라 부르는 곳이라고 한다. - '복대'는 그 이름대로 복받는 땅을 기원하는 이름이며, 그 의미를 사업지구 명칭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본래 청주군 서주내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죽천리, 화진리의 일부 등을 합하고 사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 '복대'는 그 이름대로 "복받는 땅"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청주(淸州) 봉명(鳳鳴)
- 봉의 울음은 지극히 상서로운 징조

◆ 위 치 : (1)충북 청주시 신봉동, 봉명동 일원 (2)충북 청주시 봉명동 일원 ◆ 면 적 : (1)108,000평(357,025m2) (2)69,467평(229,643m2

* 지명유래

- 무슨 일이 잘되는 경우에 "그 집안에 봉이 울었다"고 말한다. '봉명(鳳鳴)'이란 '봉이 울었다'는 뜻이다. 또 집안에 출세한 인물이 나오면 "선산에서 봉이 울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모두 '봉명'을 뜻하는 것이다. - 이 마을 이름을 '봉명'이라고 한 내력은 알수 없지만 마을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이름임에 틀림없다. 봉황은 군자의 상징이라. 오동나무가 아니면 살지않고, 감천수(甘泉水)가 아니면 마시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몸에는 오색(五色)을 감추었고, 울음소리에는 오음(五音)이 들어있다. 천하에 도가 바르면 나타나고, 도가 없어지면 숨는다. 날개로 나는 동물 360종중에서 으뜸이니라. 하였다. - '봉명'이란 '훌륭한 말을 하는 것'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봉황이 산 동쪽에서 운다는 뜻으로 '봉명조양(鳳鳴朝陽)' 을 줄여서 '봉명'이라고도 한다. - 곧 천하가 태평할 상서로운 징조를 뜻하며, 뛰어난 재능이나 행동을 봉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주(淸州) 산남(山南)
- '산남'은 구룡산 남쪽에 자리잡은 마을

◆ 위 치 :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산남동, 분평동(粉坪) 일원 ◆ 면 적 : 359,000평(1,186,777m2)

* 지명유래

- 산남동(山南)은 이 지역이 구룡산(九龍山) 남쪽이 되므로 '산남'이라 부르게 된 곳이다. - 그 전 청주군 남주내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산직리, 신곡리, 탑동리, 분동리 일부 등을 합하고 사주면에 편입된 곳이다. - 구룡산은 높이 163m이며, 구렁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므로 구렁산 → 구룡산으로 미화되었다고 한다. - '구(九)'는 극수라 하여 수효의 끝, 완성의 수라고도 한다. 또 주역에서는 3×3=9로서 양수(陽數)가 겹치는 길한 수, 상서로운 수로 본다. 그러므로 구(九)자를 따서 '구궁팔괘'라든지, '3교구류'라든지, '구천(九天)'이라든지, '구중궁궐', 구(九)자를 따라서 '구사일생'과 같은 용어가 있다. - '용'은 상상의 동물, 전설적 동물이다. 큰 뱀 같은데 몸은 비늘로 덮여있고, 뿔이 있으며, 날카로운 발톱을 갖추었다. 변화무쌍하여 능히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임금이나 제왕에 비유되며 용안(임금의 얼굴), 용가(임금의 가마), 용수(임금의 수염), 용당(임금이 앉는 자리)등 '용'이 관형사로 쓰였다. - 분평동은 그전에 청주군 남주내면의 분동(粉洞), 원평리(院坪), 대촌리 등으로 나누어진 마을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이들을 합하고 분동과 원평의 앞 뒤에서 한글자씩 취하여 '분평동'이 된 곳이다. - 원평은 '원마루'라 불리웠던 곳으로 옛 원(院)과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보며, '분동'은 풍수지리상 옥녀(玉女)의 화장(분을 바르는)으로 인하여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청주(淸州) 신봉(新鳳)
- 신담(新潭)과 상·하봉(上·下鳳)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

◆ 위 치 : 충북 청주시 신봉동, 봉명동(鳳鳴洞) 일원 ◆면 적 : 285,217평(942,866m2) ◆연 혁 - 청주 지역은 처음 마한땅에 속하였다가 백제 영토가 된 곳으로 상당현(上黨) 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 함. - 685년(신라 신문왕 5) 직할시에 해당하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689년(신문왕 9) 서원경의 성을 쌓음. - 770년(혜공왕 6) 왕이 친히 서원경에 행차하였고, 신라 말기에는 태봉과 후백제의 국경이 되기도 함. - 940년(고려 태조 23) 지금의 이름인 청주로 고쳤으며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됨. - 995년(성종 14) 전국에 십도(十道)를 둘 때 청주는 중원도에 속하여 절도사를 둠. - 1018년(현종 9) 전국에 8목을 둘 때 청주목이 됨. 이때 예하에 7개 현을 둠. - 1449년(조선 세종 31) 관찰사가 목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세조 때에는 진을 둠. - 1505년(연산군 11) 이 고을 사람 환관 이 공신이 나라에 죄를 짓고, 목이 잘리웠으므로 청주고을을 쪼개어 옆 고을에 나누어 붙임. 이에 따라 충청도를 공충도(公忠道)라 하였으며 중종 초년에 다시 청주목이 되고 '충청도'가 됨. - 1656년(효종 7) 노비 억이가 상전을 살해한 변이 일어났으므로 서원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667년(현종 8) 다시 청주로 복구됨. - 1680년(숙종 6) 생원 박상한의 기우제문 가운데 반역의 뜻이 있다하여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89년(숙종 15) 다시 청주목으로 복구됨. - 이인좌의 난, 곧 청주지방에서는 신천영의 난리가 있었으므로 영조때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영조 16년에 복구됨. - 1777년(정조 원년) 역적 효임의 태생지라 하여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86년(정조 10) 청주로 복구됨. - 1804년(순조 4) 대역부도의 죄인 한해옥의 태생지라 하여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70년(고종 7) 청주로 복구됨. - 1896년(고종 33) 전국을 13도로 할 때 청주군이 됨. - 1908. 6. 5 관찰부를 충주로부터 청주로 옮김. (충청북도 도청소재지가 됨) - 1931. 4. 1 청주면이 청주읍으로 승격함. - 1946. 6. 1 청주읍이 청주부로 승격되었고, 1949. 8. 15 청주부가 청주시로 승격됨. - 1995. 1. 1 청주시에 상당구와 흥덕구를 둠. - 1998. 2. 1 우리나라 행정구역 명칭중 한자표기가 아닌 우리말 지명으로서 '서울'에 이어서 두 번째 이름인 '성안동' 이 탄생함

* 지명유래

- 청주(淸州)의 '청(淸)'의 15세기 훈(訓)이 이고 은 'koro'의 r이 s로 음운변화한 것으로 보며 '청주'는 'koro- '로서 대읍(大邑)을 뜻하는 이름으로 본다. 3) - 한편 낭비성의 '낭(娘)'은 '가시'이고, '비(臂)'는 로서 '가시벌'이며, '낭자곡'도 '가시(각시)벌'로 보고 있다. 4) - 또 이 일대는 미호천, 무심천, 미원천 등 맑은 하천이 흐르고 인심이 순후한 고장이므로 '청주(淸州)'라 하였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 '신봉(新鳳)'은 그전 청주군 서주내면에 속한 곳인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그전 신담리(新潭), 상봉리(上鳳), 하봉리(下鳳), 운천리(雲川) 일부, 사천리(斜川) 일부를 합하였다. - 이때 신담과 상 . 하봉리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신봉리라 부르게 된 곳이며, 1963년 청주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 상봉은 웃 소생이, 하봉을 아래소생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그 유래는 확인할 수 없다. - 봉명동의 '봉명(鳳鳴)'은 '봉이 울었다'는 뜻이다. '봉황'은 옛 사람들이 상서로운 짐승으로 꼽은 네가지 전설적 동물의 하나이다. 마을이 크게 길하기를 기원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 '봉명'이란 훌륭한 말을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또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 하여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주 봉명지구 참조)

청주(淸州) 용암(龍岩)
- 용바위가 있어서 '용박골' 이라 부르던 곳

◆ 위 치 : (1)(2)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일원 ◆ 면 적 : (1)378,793평(1,252,208m2) (2)493,000평(1,629,752m2)

* 지명유래

- 용바위가 있어서 용바윗골. 줄여서 용박골이라 부르던 곳이다. - 용암동(龍岩)에는 바위가 용처럼 생겼다는 용바위를 비롯하여, 못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물구뎅이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장사가 무예를 단련하려고 이 산으로 들어왔는데, 이 산 동굴에는 승천하려는 용이 살고 있었다. - 무사는 용을 죽여서 그 정기를 차지하려고 동굴밖에서 기다렸으나, 천둥번개로 인하여 용을 잡지 못하고, 용은 무사히 승천하고 말았다. - 용박골에는 그 당시 장사가 용을 잡지 못하여 발을 구른 흔적이 발자국으로 남아 있으며, 일설에는 그 장사가 용물구뎅이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 그전 청주군 동주내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현리(楡峴)를 합하고 사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청주시에 편입된 지역이다

청주(淸州) 운천(雲泉)
- 큰 우물이 있어서 구루물이라 불렀던 곳

◆ 위 치 : 충북 청주시 운천동, 신봉동 일원 ◆ 면 적 : 208.956평(690,764m2)

* 지명유래

- 운천동(雲泉)은 본래 '구루물'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우리 말의 '구루물' (구름+우물)을 한자로 훈역하면서 구루=구름=운(雲), 우물=천(泉)이 된 것이다. - 본래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우물이 어느 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 한편 운천동의 '북수'는 북쪽 숲으로서 조선시대에 '봉림(鳳林)'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효종이 잠저때(임금되기 전)의 군호가 봉림 대군이었으므로 여기서 '봉림'을 취했던 것이라고 한다

청주(淸州) 하복대(下福臺)
- 복대동 아래쪽으로 비하리와 연결

◆ 위 치 : 충북 청주시 홍덕구 복대동, 비하동(飛下洞) 일원 ◆ 면 적 : 277,000평(915,702m2)

* 지명유래

- '하복대(下福臺)'는 복대동의 중간말 서쪽(대농 남쪽)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 복대동의 아래쪽을 뜻하는 이름이며, 인근에는 왕대나무가 많았다는 왕대굴, 하천가에 대나무가 많았다는 죽천마을 등이 있었다. - 비하동(飛下)은 행정구역상 강서1동에 속한 법정동으로서 인근의 비행장으로 인하여 지명과 현실이 우연히 일치하게 되었다 하여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킨 곳이다. - 이 일대는 문필봉, 삼부봉등 산 형세가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비홍리(飛鴻)라 하였고, 1914년부터는 비상리(飛上), 비중리(飛中), 비하리로 구분하였으며, 그 중 비하리는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 그런데 이 지역에 청주국제공항입지가 결정되면서 공항의 대활주로를 비상리와 비하리를 축으로 조성하게 되었는데, 글자 그대로 비하리쪽은 비행기가 착륙하는 곳, 비상리는 비행기가 뜨는 곳으로 되었다고 한다. - 그 후 비행장 설치에 관한 이견이 있었으므로 그 후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충주(忠州) 교현(校峴)
- 향교말과 풀무고개에서 비롯된 이름

◆ 위 치 : 충북 청주시 교현동 일원 ◆ 면 적 : 56,400평(186,446m2) ◆ 연 혁 - 충주는 삼국시대에 고구려에 속한 곳으로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 완장성 , 탁장성(託長城)이라고도 하였던 곳임. - 그러나 충주지역내 여러 지명에는 백제왕과 관련한 설화들이 현지에 구전되고 있어 이 지역이 초기 백제 영토였거나 백제가 한 때 통치하였던 곳으로 보고 있음. - 475년(신라 자비왕 18)신라에 병합되었고, 진흥왕 때 이곳에 소경(小京: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을 두어 귀족의 자제와 6부(六部)의 민가를 옮겨 살게 하였다고 함. - 757년(경덕왕 16)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침(혹은 경덕왕 원년인 741년이라고도 함). - 940년(고려 태조 23)지금의 이름인 충주(忠州)로 고치고 983년(성종 2) 목(牧)을 둠. - 995년(성종 14) 절도사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하고 중원도에 예속되었으며 별호를 대원(大原)이라 함. - 1012년(현종 3) 절도사를 폐하고 안무사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목을 둠. - 1254(고종 41)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가 그후 다시 목이 됨. - 1281(충렬왕 3)때 충주성의 개축을 튼튼히 하게 하고 성벽의 초석에 아름다운 연꽃을 조각하게 하였으므로 그 뜻을 따서 별호를 예성도(蘂城都)라 함. - 1449년(조선 세종 31) 관찰사가 목사를 겸하게 하다가 다시 없애고 진(鎭)을 둠. - 1550년(명종 5) 이곳 출신 이홍남이란 자가 그 아우 홍윤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 유신현(維新)으로 강등됨. - 1576년(명종 22) 위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져서 다시 진이 됨. - 1613년(광해군 5) 역적 유인발로 인하여 충원현(忠原)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원년)다시 복구됨. - 1628년(인조 6) 역적 안집중 등의 일로 인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7년(인조 15) 다시 복구됨. - 1644년(인조 22) 역적 채문형의 일로 인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현종 5)에 복구됨. - 1680년(숙종 6)(비슷한 일로)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89년(숙종 15)에 복구됨. - 1730년(영조 6) 역적 이조겸의 일로 인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39년(영조 15)에 복구되었고 이듬해인 1740년에 또 강등되었다가 1748년(영조 24)에 복구됨. - 1756년(영조 32) 유수원이란 자의 일로 인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65년(영조 41)에 다시 복구됨. 

* 지명유래

- '충주(忠州)'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때부터 불러온 이름으로서 나라의 중앙, 중심부를 뜻하는 이름으로 보고 있다. - 그것은 이 지역을 '중원(中原)'이라 불렀기 때문이며, 「중심(中心)」이라는 두 글자를 합하면 「충(忠)」자가 되기 때문이다. - 충주시에 있는 중앙탑은 신라때 남쪽과 북쪽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게 하여 만난 곳에 이 탑을 세웠으므로 중앙탑이라 부른다고 한다. - 별호로 국원성, 완장성, 탁장성, 중원경, 창화, 대원, 예성도, 유신, 충원 등의 여러 이름이 있는데 '국원'은 '나라벌'을 뜻하고, 탁장성은 '맏(머리)성'으로서 우두머리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6) - '대원'은 '큰벌'을 뜻하며 '예성'은 1286년(충렬왕 8) 왕이 공주와 함께 충주를 순행하며 충주성 초석의 연꽃무늬에 감탄하여 성이름을 '예(꽃술)성'이라 이름하였다. - 교현동(校峴)의 '교현'은 교동(校洞)과 야현(冶峴)리에서 앞, 뒤 한글자씩 따온 이름으로 1914년 일제때 붙여졌다. - 교동(校)은 충주향교가 있었던 곳이므로 '향교말' 또는 교동이라 하였던 곳이며, 이곳에 교현천이 흐르고, 또 교현교라는 다리도 있다. - '야현(冶峴)'은 우리 말의 '풀무고개'를 뜻한다. 교동의 서북쪽의 고개로서 옛날 근처에 대장간이 있어서 풀무질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 교현동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 때 교동, 야현리, 대가미리, 봉계리, 어림리 등의 여러 마을이 합해져서 '교현동'이 된 곳이다

충주(忠州) 금릉(金陵)
- '금제'와 '능암'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

◆ 위 치 : 충북 충주시 금릉동, 교현동, 칠금동(漆琴) 일원 ◆ 면 적 : 208,212평(688,304m2)

* 지명유래

- 금릉동(金陵)은 충주군 북변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이 만들어진 이름이 '금릉'이다. - 당시 금제(金堤), 호암, 칠교동, 연원동, 능암동(陵岩) 등의 여러 마을을 합하고 '금제'와 '능암'의 머리글자를 따서 금릉동이라 하였다. - '능암'은 세조때 공신에 봉해진 양정공 만휴당 권언의 별묘가 있으므로 '능바위'라 한 것이며, '금제'는 '응골못'이 있었기 때문인데, '능바위'라 부르게 된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 - '칠금동(漆琴)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칠지동(漆枝), 금대리(琴臺) 등의 여러 마을을 합하고 이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칠금동이라 한 곳이다

충주(忠州) 살미면 (乷味面) 재오개
本來 忠州郡의 地域으로 乷味谷의 이름을 따서 乷味谷面 乷味面이라 했다

◆위치 : 충북 충주시 ◆인구 : 2,707명(2001) ◆면적 : 91.60㎢ ◆연혁 - 본래 沙乙味谷이란 이름으로 沙자와 乙자를 합하여 乷味面이라함 - 本面의 事務所는 1911年에는 乃沙洞에 두었다가 1914年에 武陵洞으로 옮겼으며 1923年에 忠州~大邱線의 交通編을 理由로 洗星洞으로 옮기게된 것이다. - 1989. 1. 1 上芼面 文江里, 土界里가 乷味面으로 編入 - 1995. 1. 1 市․郡統合에 따라 忠州市 乷味面으로 改稱 

* 지명유래

- 재오개 살미면 재오개는 마을 이름도 되고 고개 이름도 된다. 어느날 재고개 밑을 지나가던 늙은 선비 한 사람이 외딴집을 보고 찾아가 냉수 한 그릇을 청했 다. 아낙네가 나와 물을 떠 주었는데 그 부인이 잉태하고 있었으므로 산월을 물었다. 그리고 잠 시 후에 그 집을 떠나면서 이르기를 [아기를 낳게 되면 재고개의 정기와 금봉산의 기를 받아 범 상치 않은 인물이 태어날 것이니 아무쪼록 조심해서 기르시오.]했다. 그런데 그 노 선비는 고갯 마루에 서더니 다시 한 번 주면 산천을 살피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자말을 했다. [애석한 지고 그 기운에 요절기가 있단 말이야...] 그런지 얼마 후에 그 분이 몸을 풀었는데 재고개에서부터 산실까지 무지개가 이어졌다. 그런데 보통 무지개색은 5색으로 보인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한 가운데 검은 색을 띠고 있 었다고 한다. 아기는 나면서부터 비범했다. 석 달 만에 말을 하고 세 살짜리가 쌀 한 짝을 들고 재주도 비상해 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다. 그러자 소문이 그 인근 뿐만이 아니라 원근에까지 퍼져 가족이 나 동리에서 장한 아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것이 관가에까지 알려져 조정에서도 관심을 갖 게 되었다. 때마침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이 충주를 살피고 간 후에 충주 땅에 왕의 기운이 있으 니 조심해야 된다하고 재오개 땅에서 비상한 인물이 크고 있으니 재오개에다 혈을 질러야 할 것 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철창대를 지르기에 이르렀는데 그 때 그 철장대를 지르던 사람은 피를 토 하며 죽었고, 산천 초목이 시들더니 기어코 그 장사 아이도 죽고 말았다. 이 장사 아이가 죽을 때 [내가 죽거든 나를 꼭 이 마을 동구에다 묻어 주세요]하고 유언을 했으므로 그에 따라 동구 에다 묻었는데 그 날부터 이 재오개에는 이변이 일어났다. 바람이 불면 슬프고 원한에 찬 소리 가 바람을 타고 원근에 퍼지므로 지방민이 모두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 소리는 아기장사가 요 절한 원한의 소리하고 해서 모두 모여 제단을 만들고 동제를 지내주었더니 그 후로 그 소리가 멎었다. 그 다음 해 이 아기장수를 묻었던 곳에서 한 느티나무가 싹이 트더니 무럭무럭 자랐다. 그 후 동 민들은 이 나무에도 동제를 지내 주고 있는데 잎이 잘 돋고 하는 상황에 따라 풍작과 흉작을 점 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재주 있는 아기 장사가 다섯 살 때 죽었다는 뜻으로 [재오개(才五介)]라고 지명 을 붙였다.

충주(忠州) 살미면 대림산 창골
길에서도 안 보이는 협곡으로 천연의 요새지

◆위치 : 충북 충주시 ◆인구 : 2,707명(2001) ◆면적 : 91.60㎢

* 지명유래

- 대림산 창골 살미면 향산리 대림산성 서편에 창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고려 고종 때 내습한 몽고군이 충주성에 임박할 때 일이다. 수성장을 맡고 있던 우종주(宇宗柱) 는 몽고병의 수가 많은 것을 보자 모든 백성들을 남한산성과 대림산성으로 모아가지고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서 대항할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을 알게 된 몽고병은 우선 대림산성을 포위하 고 풀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산 밑에서 포진을 하고 성 안과의 교통을 차단해서 무기와 식량의 공급을 막은 것이 다. 따라서 성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40여일이 지나니 이제는 먹을 것도 떨어지 고 사기도 떨어져 최후의 수단밖에 남지 않았다. [자결이냐, 항복이냐]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수성장은 상대를 확인하려 들자 노인은 조용한 어조로 그를 따라 오라고 말하고 남쪽 성벽을 빠 져 나갔다. 얼마쯤 가더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 골짜기에 이르러 큰 돌더미를 가리키며 [이곳을 헐어보면 앞으로 100일 동안 살 수 있는 식량과 적병 3천병을 도륙할 수 있는 무기가 들 어 있으니 용기를 내서 최선을 다하시오.] 했다. 수장이 놀라워서 황급히 [대체 누구시냐?]고 물으니 미소를 지으며 [나는 이 산천을 지켜오고, 지켜가는 산신이오]라고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수장이 그 돌벽을 헐어보니 과연 산의 암벽 을 뚫어 창고를 짓고 그 안에 물건을 넣어 두었는데 창검을 비롯한 무기, 식량 등 풍족한 물자였 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병사들은 의기가 충천해서 마침내는 몽고군을 격파하기에 이르렀다. 그곳을 지금도 [창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길에서도 안 보이는 협곡으로 천연의 요새지라고 하는 곳이다.  

충주(忠州) 살미면 이시회의 쌍효각
효자이야기

◆위치 : 충북 충주시 ◆인구 : 2,707명(2001) ◆면적 : 91.60㎢

* 지명유래

- 이시회의 쌍효각 수몰 전 살미면 신당초등학교 앞에 쌍효각이라고 현판한 정문이 있었고 수몰로 인하여 동량면 대전리 배일부락으로 옮겼는데 다음과 같은 효자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260년 전에 이 곳 상로라는 마을에 조촐한 초가 삼칸에 노부모를 모시고 두 형제 가 살았다. 형의 이름은 이시희, 동생의 이름은 이시걸이라고 했으며 관향은 연안이었다. 이 형제는 효성 이 지극해서 효종대왕께서 형에게는 승지, 동생에게는 장사랑이란 벼슬까지 내린 일이 있고 경 종대왕 2년(1723)에 왕명에 의해서 쌍효각이 건립되었다. 이 형제는 이을 나가도 항상 번갈아 가며 부모 곁을 비우지 않고 지성으로 봉양했으므로 이들 의 효행은 항간에 칭송이 자자했다. 어느 겨울날 이야기다.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명약이란 모두 구해서 써 봤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의원에게 물어보니 잉 어가 좋다는 말을 듣고 [벽대소]에 가서 얼음을 깨고 애를 써봤으나 원래 깊은 물에 잡힐 리가 없었다. 형제가 갖은 방법을 써봤으나 도리가 없어 번갈아 얼름위에 가서 기도를 올리기로 했 다. 어는 날 무릎자국의 얼음이 녹아서 구멍이 뚫리면서 잉어가 뛰어 올라와 약으로 썼다는 이 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더 기이한 이야기는 어느 엄동에 부친께서 병이 나셨는데 백약이 신통 치 않고 꼭 산딸기가 약이라고 해서 노력했으나 구할 도리가 없어 또 다시 험한 비탈에 가서 모 든 것을 금기하고 기도를 올리니 별안간 훈풍과 함께 딸기 송이가 주렁주렁 나타나 병을 고쳤다 는 이야기 등이 있어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탓이라고 명성이 인근에 자자했다. 세월은 흘러 부친은 이미 돌아가시고 늙은 모친을 모시느라고 효성을 다하였다. 중환으로 실시 한 때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뽑아 마시게 하므로 위기를 모면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읻 형제는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나 원래 노쇠한 지라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루는 큰아들이 모친의 병이 낫도록 해 달라고 산신에 기도를 올렸다. 별안간 소복을 한 선인 이 나타나 하는 말이 [네 정성은 가상하나 치병의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즉 연소한 인(人)고 기를 삶아 복용하는 길밖에 없다.] 깜짝스런 꿈을 깨니 꿈이 아닌 산속의 순간이었고 노인은 간 곳이 없었다. 그 당시 이시희에게는 6살 되는 아들이 월악산 [덕주사]에 가서 글을 배우느라 통학을 하고 있 었다. 이 날부터 두 내외는 고심과 초조 속에 뜬 눈으로 2-3일이 지났다. 마침내는 결심을 했다. [자식은 또 두면 된다. 어머님은 살려야지] 산 기슭에다 솥을 걸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 다. 돌아오는 어린 것을 부둥켜안고 솥 앞에 서자 차마 어린 것을 넣을 수가 없어 아들대신 자기 가 솥 속으로 뛰어들어 가려는 순간 갑자기 뇌성이 요란하더니 눈앞에 먼저의 신선 노인이 서있 고 자신이 부둥켜 안은 아들은 사람이 아니고 산삼이었다고 한다. 노인은 [내가 네 정성을 시험해 봤노라, 장하도다 하늘이 감동할 효자로다.]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 산삼을 봉양하니 그 모친의 병도 쾌유하고 장수했다고 전해진다. 

충주(忠州) 살미면 장수 죽인 명마재 골
말이 울었다고 [명마재골]이라고 부르고 말이 죽은 밭둑을 [말밭둑]

◆위치 : 충북 충주시 ◆인구 : 2,707명(2001) ◆면적 : 91.60㎢

* 지명유래

- 장수 죽인 명마재 골 살미면 문강리 문라산 기슭에 명마재라고 부르기도 하고 용마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골짜기 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때는 이조 말엽이었다. 자손을 못두고 명산을 찾아 치성을 올리기 위해서 초가삼간을 짓고 사는 내외가 있었는데 괴산 군 소리실에서 이사를 왔으므로 소리실 집으로 불리고 있었다. 치성의 덕분인지 어느덧 임신이 되어 크게 기뻐하고 있었는데 10개월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 색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수군대었고 두 내외도 몹시 고민을 하였다. 어느날 밤에 그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문밖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자기가 낳은 아이의 얼굴이 희고 몸집이 거 대한 장수라고 하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장수 아기는 큰 말을 타고 있었는데 그 말이 앞발로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자기 배를 밟는 바람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는데 그와 동 시에 잠도 깨고 해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밖에서 불을 때고 있던 남편이 아내의 고함소리를 듣고 황급히 달려 들어와 보니 아내는 신음을 하고 있었고 방 윗목 선반 위에는 웬 난데 없이 벌거벗은 큰 아이가 하나 올라 앉아 있었 다. 20개월만에 탄생한 아기였다. 그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그는 자기 꿈에서 말을 타고 들어온 장수아이의 얼굴 그대로였다. 두 내외는 자못 당황하다가 마침내 처치해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옛날엔 민간에 서 장수가 태어나면 역적으로 몰려 온 집안이 멸망지환을 당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선반에 올라 앉은 어린 아이를 안아 내리는데도 남자 하나의 힘 만으로는 안되었다. 이웃 사람들까지 동원되어 목을 졸라 죽인 뒤에 정성껏 뒷산에 묻고 산제를 지내 주었다. 바로 그 때였다. 뒷산 바위가 무너지면서 용마 한 마리가 나타나서 큰 소리로 울며 그 소리실집 을 빙빙 돌다가 다시 어린 장수의 무덤에 가서 또 다시 돌아다니며 울어댔다. 이때 이 마을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천하 장수로 태어났다가 시대를 잘못만나 용마 한번 못 타보고 요절을 하다니 앞으로 닥쳐올 국난을 어찌한 단 말이요]하고 탄식을 하며 마을 사람들에는 [저 용마가 나온 곳을 정성껏 제사 지내라]고 말 하고 사라졌다. 동민들의 용마가 나온 골짜기에 가서 고사를 지내주니 용마는 마을앞 밭둑에서 가서 하늘을 보 고 슬피 울며 죽어 갔다. 그래서 이 골짜기 이름을 말이 울었다고 [명마재골]이라고 부르고 말이 죽은 밭둑을 [말밭둑] 이라고 부르고 있다. 

충주(忠州) 상모면(上芼面)
충청북도 충주시 남단에 있는 면.

◆위치 : 충북 충주시 ◆인구 : 4,540명(2001) ◆면적 : 73.44㎢ ◆연혁 본래 연풍군(괴산군)으로서 고사리면이라하여 미륵, 석문, 대사 냉천, 발화, 뇌곡, 안보, 온정의 8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회면의 고운, 중산, 주막, 강진, 문산, 토계의 6개리를 합하여 고구려 때의 상모현의 이름을 따서 상모면이라 하여 미륵, 사문, 화천, 온천, 안보, 고운, 중산, 수회, 문강, 토계의 10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63년 1월 11일 중원 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로 편입되었음. 동쪽은 제천군 한수면, 북쪽 은 살미면, 서쪽은 괴산군 장연면, 남쪽은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와 접함.

* 지명유래

온천리(溫泉里) 상모면 법정리동의 하나. 고려사에 보면 '長延縣 高句麗 上芼縣 顯宗 9년 稱今名來屬有溫泉'이 라 하여 고려 현종 9년(1018)까지 상당 기간 '上芼縣'으로 호칭되었을 뿐만아니라 온천과 유관 한 지역임을 알 수 있음. 1895년 연풍현이 군으로 승격될 때까지 온정동(溫井洞)으로 고사리면 에 속하던 것이 1914년 전국 부군면 통폐합 조처에 따라 행정 체계상 연풍군이 괴산군에 속하 게 되면서 수회면과 고사리면을 통합하여 상모면으로 개칭하였는데 온정동도 온천리로 개명되 었음. 1937년 자연부락 단위로 분구할 때 오산, 탑동, 관동으로 분리되었음. 온천 1구는 3번 국 도 서쪽(양짓말, 물탕거리, 장터거리 일부), 온천 2구는 3번 국도 동쪽(새터말, 장터거리 일부) 으로 나누어졌으며, 1985년 10월 1일 면사무소 남쪽을 온천3구로 분리하였다가 다시 광덕 빌라 지역을 온천 4구로 분구하였음. -동진(이)(東津-) 면사무소 남쪽, 관동 입구에 있는 마을로 온천리 동쪽을 흐르는 개울 근처에 있다는 뜻임. -물(안보)(水安堡, 물안비) 물탕거리가 있는 마을을 말했는데, 수안보로 통용됨. -물탕(거리) 물탕(온천) 주변을 일컬었음. -새터(말)(新垈) 수안보 북쪽 입구, 도로 동북쪽 산 밑에 형성된 마을. -수안보(석탑) 수안보 지서 내에 3층석탑과 미륵불이 있음. -수안보(온천) 高麗史 顯宗條에 상모현에 온천이 있다는 기록이 있음.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온천지대가 농경지로 있을 때 피부병을 앓던 거지가 이 근처에 쌓아 놓은 볏짚 속에 살면서 땅속에서 솟아 나오는 온천수를 먹고 씻고 하였더니, 드디어 병이 완치되었으므로 이 때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 었음. 이 온천은 유황, 라디움 온천으로 피부병, 위장질환에 효험이 있음. -양지(말) 석문천 서쪽 들판에 있는 마을. -장터(거리) 물탕거리 남동쪽에 있는 5일장이 열리던 곳. -조산(趙山, 造山) 수안보 남쪽, 천주교 뒤에 있는 산. 조감사 묘지가 있으며, 정상에 팔각정이 있음. -황-산(黃山) 수안보 서북쪽에 있는 산. 높이 294m. 흙이 황토로 온천수가 발원된다고 하여 옛부터 명산으로 알려짐. 

충주(忠州) 엄정면 (嚴政面)
-억정사(億政寺)의 뜻을 따서 엄정면(嚴政面)이라하였다

◆위치 : 충북 충주시 ◆인구 : 4,665명(2001) ◆면적 : 56.47㎢ ◆연혁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용산, 율능, 목계, 논강, 미내, 신만, 괴동, 추평, 원곡, 유봉, 가춘 리 등 11개리로 개편되었고, 소재지는 용산리로 1925년 청사를 건축하였다.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의 시 승격에 따라 중원군 엄정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84년 구 면사무 소 가 낡고 비좁아 현재의 청사를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음.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 엄정면으로 개칭되었음 

* 지명유래

엄정면 추평 저수지가 준공됨으로써 엄정면을 물론 소태면, 산척면까지도 수리 혜택을 입게 되 었다. 그런데 저수지가 되면서부터 그곳의 지명 몇가지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첫째 '주동'쪽으로 올라가면 '배터'라는 마을이 있는데 침수지이기 때문에 집을 모두 철거했고 현재 물이 이곳까지 차 있는데 이 저수지에 배를 띄울 경우 배가 닿을 수 있을 터이니 옛부터 배 터라고 지은 이름이 공교롭다는 것이다. 또 이 저수지 밑으로 물여울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저수지가 되기 전에 여울물을 볼 수 없었던 곳에서 제방을 넘어 오는 여울물을 보게 되었다는 것도 예사로운 이름이 아니다. 또 한가지는 '추동'부락에서 춘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 달랑고개라고 하는데 그 고부락에서 춘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 달랑고개라고 하는데 그 고개 옆을 제방으로 쌓아 올려서 물이 이 고갯길에 달랑달랑 하고 있다. 이 또한 묘한 명칭 이 아닐 수 없다고 말들을 하고 있다. 

충주(忠州) 이류면 꺼먹바위
동남쪽에 거대한 바위 언덕

◆위치 : 충북 충주시 남부 ◆인구 : 5,711명(2001) ◆면적 : 62.73㎢ ◆연혁 고려시대까지 다인철소로 불이어 오던 철산지로서 고려 고종42년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군을 물리처 공을 세워 고려 고종때에는 그 공을 인정하여 이 지방을 익안현으로 승격시킨 일도 있 음 본래 충주군의 지역으로서 이안면이라 하여 천동 금곡 당정 거리곡 검단리의 5개리를관할하 다가 그 후 천동리를 빼고 영평 두산 대소 마치 장재동 성종 부연 독동 본리 노옥 흑평 불방 주 정 가정의14개리를 더하여 19개리로 개편 관할 하였으며,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류 등면 만적 독정 두담 소용 궁동 탄동 산정 내포 수현 기동 매산 장승 월은 수주 문박 팔봉 즉문 하담의 18개리를 통합하여 이류면이라 하였으며 검단 금곡 대소 두정 만정 매현 문주 본리 영 평 완오 장성 탄용 하문의 13개리를 개편 관할하다가,1956년 7월 8일 충주읍의 시 승격으로 중 원군 이류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12호로 하문리를 괴산군 불정면 에 편입시킴으로써 현재는 12개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면청사는 당초는 현재 농협자리에 있었 으나 낡고 노후하여 1978년 12월 23일 철근콘크리트 슬라브 2층을 건립 현위치로 이전하였으 며, 1980년 소도읍 가꾸기 사업 추진으로 가로 환경을 크게 일신하였고, 1995년 1월 1일 시, 군 통합으로 충주시 이류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음. 

* 지명유래

마을의 동남쪽에 거대한 바위 언덕이 있는데 바위 색깔이 검다하여 꺼먹바위라는 명칭이 붙었 따. 옛날에는 이 바위 밑으로 맑은 시냇물이 흘렀고 이 바위 밑은 깊은 소로되어 있어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경승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바위 밑에는 북향으로 두 개의 굴이 있어 그 굴은 서로 통했다고 하는데 동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굴의 깊이가 10리쯤된다 고 한다. 이 굴에는 조선시대 도적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웃마을에 다니며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때로 는 부녀자를 잡아가는 경우도 있어 동민들은큰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이 도둑들은 다른 마을에 는 피해를 주었지만 문박 마을에는 피해를 주지 않았을 뿐더러 가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성골마을에서 동민들이 모여 의논을 한 끝에 그 굴의 입구를 막아버리 기로 합의를 하고 막았더니 도둑들이 다시 그 입구를 열고 여전히 행패를 부렸다. 그 후부터 성골마을과 도둑 사이에 입구를 열고 닫는 실갱이를 계속하다가 결국 도둑들이 그 자 리를 뜨고 말았는데 그 후부터 어찌된 일인지 굴의 입구를 막으면 성골의 풍년이 들고 구멍을 열으면 문박에 풍년이 들어 동네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 후 오랜 기간을 두고 굴의 개폐문제를 놓고 불화가 계속되다가 새마을 운동이 진행되면서 이 굴을 서로 양보하자는데 합의가 되면서 절반만 막길 했다고 전해진다. 

충주(忠州) 이류면 신립장군과 상사바위
신립장군과 상사바위

◆위치 : 충북 충주시 남부 ◆인구 : 5,711명(2001) ◆면적 : 62.73㎢ ◆연혁 고려시대까지 다인철소로 불이어 오던 철산지로서 고려 고종42년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군을 물리처 공을 세워 고려 고종때에는 그 공을 인정하여 이 지방을 익안현으로 승격시킨 일도 있 음 본래 충주군의 지역으로서 이안면이라 하여 천동 금곡 당정 거리곡 검단리의 5개리를관할하 다가 그 후 천동리를 빼고 영평 두산 대소 마치 장재동 성종 부연 독동 본리 노옥 흑평 불방 주 정 가정의14개리를 더하여 19개리로 개편 관할 하였으며,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류 등면 만적 독정 두담 소용 궁동 탄동 산정 내포 수현 기동 매산 장승 월은 수주 문박 팔봉 즉문 하담의 18개리를 통합하여 이류면이라 하였으며 검단 금곡 대소 두정 만정 매현 문주 본리 영 평 완오 장성 탄용 하문의 13개리를 개편 관할하다가,1956년 7월 8일 충주읍의 시 승격으로 중 원군 이류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12호로 하문리를 괴산군 불정면 에 편입시킴으로써 현재는 12개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면청사는 당초는 현재 농협자리에 있었 으나 낡고 노후하여 1978년 12월 23일 철근콘크리트 슬라브 2층을 건립 현위치로 이전하였으 며, 1980년 소도읍 가꾸기 사업 추진으로 가로 환경을 크게 일신하였고, 1995년 1월 1일 시, 군 통합으로 충주시 이류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음. 

* 지명유래

신립은 권율의 막내사위로서 인품도 빼어났고 학행도 뛰어나서 장인으로부터 가장 총애 받았지 만 또한 많은 여성들로부터 흠모를 받아오고 있었다. 어느날 신립장군이 이류면 만정리 황대마을에 권율장군의 사위 즉 동서지간인 김영관의 집에 들렀을때 한 처녀에게 연정을 느껴 정까지 맺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 립은 팔도 도순변사로 8천명의 관군을 이끌고 충주 탄금대에서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병 10만을 맞아 필사의 힘을 다해 싸우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이런 소식이 황대마을의 그 처녀에 게 전해지자 그 여자는 밤낮을 노심초사하면서 날마다 항상 바위에 올라 탄금대를 바라보며 기 도를 하면서 승전하기를 빌었다. 결국 탄금대 전투는 역부족으로 패전을 하게 되었고 신립장군 을 비롯한 8천 병사는 장렬히 죽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그 여자는 낙심을 하더니 신립을 따르겠 다며 매일 올라가던 앞 산 바위에서 투신자결을 하였고 그 후부터 이 바위를 신립을 사모하다 죽은 바위라 해서 상사바위라 부르고 있다. 

충주(忠州) 주덕읍 (周德邑)
주위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주류면(周柳面)

◆ 위치 : 충북 충주시 ◆ 인구 : 7,370명(2001) ◆ 면적 : 47.47㎢ 

* 지명유래

-주덕-읍(周德面) 충주시 행정읍의 하나. 본래 충주군의 지역으로서 주위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주류면(周柳面)이라하여 망청(望淸), 신대(新垈), 창전일(倉田一), 창전이(倉田二), 창전삼(倉田三), 창전 사(倉田四), 창전오(倉田五), 창전칠(倉田七), 동산(東山), 월암(月岩), 칠성(七星), 대곡(大谷), 마치(馬致), 양지(陽地), 내청(內淸), 평지(平地), 능촌(陵村), 미락(美樂), 이목(梨木), 삼방(三方), 상청(上淸)의 21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덕면(德面)의 상류(上柳), 하류(下柳), 당우(堂隅), 석우(石隅), 신대(新垈), 조동(鳥洞), 장내(墻內), 창동(倉洞), 초처(草處), 지내(池內), 장록(長 ), 풍덕 (豊德), 제내(堤內), 매남(梅南), 엄동(奄洞), 정구(井口), 사락(社樂), 중리(中里), 계막(桂莫), 이암(耳岩), 화곡(花谷)의 21개 리와 신니면(申尼面)의 수청동(水淸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주류 와 덕면의 이름을 따서 주덕면이라 하고, 당우(堂隅), 덕련(德蓮), 장록(長 ), 제내(堤內), 사락 (社樂), 화곡(花谷), 신중(新中), 창전(倉田), 대곡(大谷), 신양(新陽), 삼청(三淸)의 11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이류면(利柳面), 북쪽은 노은면(老隱面), 서쪽은 신니면(薪尼面)과 음성군 소이면(蘇伊面), 남쪽은 괴산군 불정면(佛頂面)에 닿음. 1995년 3월 20일 충주시조례 제144호 ('95. 2. 28공포)로 주덕면이 주덕읍으로 승격함. 

충주(忠州) 충의(忠義)
- '충성'과 '절의'를 합하여 이르는 말

◆ 위 치 : 충북 충주시 충의동, 교현동, 연수동 일원 ◆ 면 적 : 126,766평(419,061m2)

* 지명유래

- '충의(忠義)'란 충성과 절의를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 지역은 충주읍이었을 때 일제가 읍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그중 북쪽을 대수정(大手町)이라 하였고, 이곳은 대수정 2구에 해당된 곳이다. - 1946년 해방 후 왜식 동명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이름을 고칠 때 뜻이 좋은 권장지명으로서 '충의동'이라 하였다. - 당시는 이 일대가 싸전거리와 쇠전거리였다. 인근의 대수정 1구는 나무전거리, 장터골목 등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 충인동으로 고쳐졌다. - 연수동(連守)은 원래 충주군 북변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옛날 연원도 찰방의 역이 있었던 연원(連原)과 연원도 찰방의 동쪽을 지키는 망대가 있었던 동수(東守) 등으로 되어 있었는데, 연원과 동수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1914년 연수리라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충청’이라는 이름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 지명유래

‘충청’이라는 이름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충청’은 1106년(고려 예종 원년) ‘양광충청주도’라고 할 때 최초로 ‘충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대 체로 충청좌도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청우도는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해당된다. ( 좌.우도는 모두 서울의 궁궐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의 방향임) 관찰사의 영은 공주에 두었으므로 감영을 금 영(錦營), 감사를 금백(錦伯)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모두 금강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삼도(下三道) 또는 삼남(三南)지방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 지명유래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이들은 모두 궁성의 남 쪽에 위치하므로 하삼남 또는 삼남지방이라고도 하였다. 

호서(湖西)
충청도의 별칭으로 호중(湖中)이라고도 한다.



* 지명유래

충청도의 별칭으로 호중(湖中)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도 ‘호(湖)’를 제천의 의림지로 보는 견해 가 있으나 금강 상류의 강변에는 호서루(湖西樓)니, 금호루(錦湖樓)니 하는 누정들이 있고, 금 강의 옛 이름이 호강으로서 이 강이 충청지방을 휘돌아 흐르기 때문이다. 

*  경상북도

 

경산(慶山) 사동(巳洞)
- '사동'은 뱀골, 뱅골이라 불렀던 곳

◆ 위 치 : (1)경북 경산시 사동, 삼풍동(三豊), 평산동(坪山) 일원 (2)경북 경산시 사동, 백천동(栢川), 평산동 일원 ◆ 면 적 : (1)181,519평(600,063m2) (2)275,000평(909,091m2)

* 지명유래

- 사동, 삼풍동, 평산동은 그전 경산군 압량면에 속하였던 곳이다. - 사동(巳)은 그전에 뱀골, 뱅골 또는 백양동(白羊)이라 불렀던 곳으로 지형이 뱀의 형국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 삼풍동(三豊)은 이곳에 삼천제(三千堤)라는 못이 있어서 삼천동이라고도 불렀으며 혹은 삼청동이라고도 하였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때 '삼풍동'으로 굳어졌다. - 평산동(坪山)은 마을이 들가운데 있으므로 평산동이라 하였고, 한편 동을산(冬乙山)이라고도 하였다. - 백천동(栢川)은 경산군 경산읍에 속하였던 곳으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때 그전 백동(栢洞)과 천동(泉洞)을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합하여 백천동이라 하였으나 천(泉)→천(川)으로 바뀌었다. - 백동은 백자산(栢紫山)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백동이라 하였고, 천동은 찬 샘이 있어서 샘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경산(慶山) 옥산(玉山)
- 옥산은 옛 경산고을의 고려때 별호

◆ 위 치 : 경북 경산시 옥산동, 사정동(士亭) 일원 ◆ 면 적 : 155,977평(515,626m2) ◆ 연 혁 - 경산지방은 삼한시대에 압량(押梁) 소국 또는 압독(押督) 소국으로서 102년(신라 파사이사금 23)(혹은 지마왕때라고도 함) 신라에 병합되어 군이 됨. - 그후 압량주(州)가 되어 김유신이 군주(軍州)로도 근무함. - 757년(경덕왕 16) 신라에서 장산군(獐山)으로 고침. - 940년(고려 태조 23) 장산(章山)으로 고침. - 1018년(현종 9) 경주에 붙였고, 1172년(명종 2) 감무를 둠. - 1310년(충선왕 2) 충선왕의 이름과 '장(章)'자가 같으므로 지금의 이름인 '경산'으로 고침. - 1317년(충숙왕 4) 『삼국유사』를 쓴 국사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하여 현령으로 승격함. - 1391년(공양왕 2) 왕비 노씨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태조때(1395) 현으로 낮춤. - 1601년(선조 34) 왜적의 침입으로 고을이 피폐하여져서 대구에 붙임.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경산군이 됨. - 1914. 3. 1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자인군, 하양군 및 신령군 남면을 병합함. - 1956. 7. 8 경산면이 경산읍으로 승격됨. - 1981. 7. 1 안심읍과 고산면이 대구시로 편입됨. - 1989. 1. 1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되고 경산군과 나누어짐. - 1995. 1. 1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로 경산시와 경산군이 합해져서 경산시가 됨

* 지명유래

- 경산(慶山)의 옛 이름인 압량의 '압(押)'과 장산의 '장(獐)'을 풀어보면 장(獐)=노 (노루), 압(押)=누르(누를)는 nara를 나타내기 위한 동계어로서, 국(國)을 뜻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 부족국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4) - 그 이후에 붙여진 경산의 '기쁠 경(慶)'자는 경주, 문경 등의 글자에도 사용되어진 미화지명으로서 고려 충선왕때 붙여진 것이다. - 옥산동(玉山)의 '옥산'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기에 경산군의 별호로 사용된 이름인데, 이곳 옥산동에 그전에 64m쯤 되는 동그랗게 생긴 오목산이 있어서 이를 옥산이라 불렀기 때문인데, 그 산은 경부선 철도공사때 없어졌다. - 사정동(士亭)은 그전에 사정리(史丁) 또는 사정방리라고도 부른 곳인데, 당사나무골(당제를 지내는 당사나무가 있었다)과 경산역 앞에 있다하여 정거동(停車)이라 한 마을들을 합하고 비슷한 글자를 붙여 사정동(士亭)이 된 곳이다

경산(慶山) 임당(林堂)
- 삼한시대 압량국의 도읍지였던 곳

◆ 위 치 : 경북 경산시 임당동, 조영동(造永), 대동(大), 압량면 부적동 (夫迪) 일원 ◆ 면 적 : 129,085평(426,727m2)

* 지명유래

- 임당동(林堂)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장림리(長林)와 궁당리(弓堂) 등의 마을을 합하고 장림과 궁당의 뒷 글자를 합하여 임당동이라 하고 경산면에 편입된 곳이다. - 장림의 숲은 버드나무, 가래나무,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였던 큰 숲으로서 경림숲 또는 장림숲이라 불렀다. - 조영동(造永)은 그 이름의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며 고촌(古村:박동)과 대안동을 병합한 마을이다. - '대동(大)'은 그전에 한골, 또는 대곡이라 부르던 곳이다. 그러나 그 이름의 내력을 알 수 없다. - '압량면(押梁)'의 이름은 삼한시대에 부족국가인 압량소국의 이름이 지금까지 면이름으로 남아있다. - 부적동(夫迪)은 1914년 일제의 지명개편 이전부터 불러온 이름으로서 '부적'이란 사나이의 나아갈 길을 뜻한다. 이 지역이 옛 압량국의 터전이라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경상도(慶尙道)
‘경상’이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 지명유래

‘경상’이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1106년(고려 예종 원 년) 경상진주도라고 할 때 처음 ‘경상’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동남도, 영남도, 산남도, 경상 진주도 등으로 불렀으며, 1314년(충숙왕 원년) 경상도로 되었고, 1407년(조선 태종 7) 좌, 우도 로 나누었는데, 낙동강 동쪽을 좌도, 서쪽을 우도라 하였다. 관찰사는 대구에 주재하였으며, 그 감영을 영영(嶺營), 감사를 영백(嶺伯)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영’은 지금 영남의 ‘영(嶺)’ 과 같이 고개를 뜻하는 이름이다. 

경주(慶州) 건천읍(乾川邑)
마을은 약 150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하였다.

◆위치 : 경북 경주시 서부 ◆인구 : 1만 2705명(2001) ◆면적 : 92.36㎢ ◆연혁 조선말기 : 경주군 내서면 1910.10 : 경주군 서면으로 개칭 1913.03 : 면사무소를 모량리에서 현 건천리로 이전 1917.10 : 광명동을 경주면에 고지동을 영천면에 편입 1928.01 : 행정리동 19개를 29개리동으로 분동 1952.07 : 29리를 35리로 분동 1955.09 : 경주읍이 시승격으로 월성군 서면으로 개칭 1973.07 : 11법정리 24행정리로 분리 건천읍으로 승격 1989.01 : 월성군 명을 경주군으로 환원 1995.01 : 시군통합으로 경주시제 실시 

* 지명유래

 -건천리 마을은 약 150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하였다. 마을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여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 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태종 23년에 경주 대도독부, 조서조때는 경주부에 예속,1895년 경주군 서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부군통폐합시 마을 이름을 건천(乾川)이라고 하였고 1973년 읍(邑)으로 승격하면서 건 천읍 소재지가 되었다. 건천 1.(乾川)[마을] ; 거치내,건치내라고도 하며, 천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건천 2.(乾川)[내] ; 거치내,건치내,건천내라고도 하는 건천 앞으로 흐르는 내. 건천교(乾川橋)[다리]; 건천 앞 국도에 있으며, 모량과 아화를 잇는 다리이다. 건천읍장(乾川邑場)[장]; 건천에 있는 건천읍의 시장으로 건천장,서면장이라고도 했다. 예전에 는 3일,8일에 섰으나 지금은 5일, 10일에 장이 선다. -작원 신라 제29대 무열왕때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정복하고자 군사 5만을 인솔하여 왕성을 떠나 30리 쯤 되는 이곳에서 첫날 진을 치고 있을 때 서쪽에서 까치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날아와 진영의 상공을 날다가 대장기 끝에 앉았다. 군사들은 그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여 진중(陳中)이 어수선해지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김장군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까치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니, 까치는 땅에 떨어지면 서 홀연히 여자로 변신하였다. 그 여자는 다름아닌 백제의 공주였다. 김유신의 군사가 백제를 침공한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까 치로 변해서 염탐코자 신라군의 진지로 날아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장군은 까치가 이미 백제의 공주임을 알고 소리쳤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빌었고 이런 까닭에 이곳을 작성(鵲城)이라고 불렀고 마을 이름 을 작원이라고 하였다. -금척리 금척(金尺)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금자(金尺) 를 주었는데, 꿈을 깨 보니 손에 금자가 쥐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꿈에 가르쳐준 신인 의 말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唐)의 황재가 사신을 보내어 이 신 기한 금자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이를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38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후 이 금척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금척' 이라고 부르기 시작 하였다고 한다. -방내리 마을이 단석산(斷石山) 기슭에 있는데, 산에 둘러싸인 품이 마치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 고 해서 '방내(房內)' 라고 불렀다고 한다. 단석산 속에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고 하 여 '방내(芳內)'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용명리 ㆍ장승(長承) : 약 100년 전 과수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마을 남 쪽 큰길 거리에 돌로 만든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장승(長承)'혹은 ' 장생이'라 불렀다. 지금은 장승의 행방은 알 수가 없고, 마을 이름만이 ' 장승'으로 남아 있다. ㆍ새마을 : 약 370년 전 임진왜란 때, 경주김씨(慶州金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 성을 가 진 두 사람이 마을을 새로 일구어 '새마을' '새마실' 이라고 한다. ㆍ밀구(密耳) : 구미산으로 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용암(龍岩)이 있었던고로, 용암 의 용 (龍)자와 명장(明莊) 마을의 명(明)자를 따서 '용명(龍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혹은 귀가 없는 미륵불이 있었다고 하여 '밀이촌(密耳村)'또는 '밀귀' 라고 부르던 것이 그 후 '밀구'로 바뀌어 불려졌다 한다. ㆍ명장(明莊) : 파평윤씨(坡平尹氏) 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하였다. 깊은 산골 이라 산나물이 많아 부근에 명성이 났다고 하여 '명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깊은 산골 에 마을이 있어서 호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ㆍ탑골(塔谷) :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버리고 그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신라 때의 3층석탑이 마을옆에 있었으므로 '탑골' 혹은 '탑리(塔里)'라고 부 르게 되었다. ㆍ웃명장 : 명장부락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상명장(上明莊)' 이라고도 하였는데, 6.25동란으로 민가가 철거되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경주(慶州) 내남면(內南面)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의 청정지역

◆위치 : 경북 경주시 ◆인구 : 6,663명(2001) ◆면적 : 121.98㎢ ◆주요문화재 : 경주 남산동 3층석탑(보물 124), 경주 천군동 3층석탑(보물 168), 경주남산 용장 사곡 3층석탑(보물 186),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187),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 물 913), 천룡사지 3층석탑(보물 1188) ◆연혁 -1906 군구역 조정으로 경주군 내남면이라 칭함. -1912 면사무소를 배리 박씨 정각에서 임시 설치 집무하였음. -1914 이동 통폐합에 따라 박달리 일부(상목골)가 산내면 내일리에 편입. -1941 면사무소를 용장리로 이전. -1954 이동 행정구역을 16개리 41개 분동으로 조정. -1975 율동 및 배리가 경주시로 편입 13개 법정리동 34개 행정리동으로 분동. -1991 면사무소를 이조리 156-2번지로 신축 이전하였음. 

* 지명유래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의 청정지역으로 경주시와 더불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 는 세계적인 문화 관광도시로 가꾸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경주시에서 천마총 서편 정남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능, 나정, 포석정, 삼능솔밭을 지나면 경주시 내남면에 이릅니다. 현재 는 남산의 1/3-4을 지니고 있으나, 행정구역이 바뀌기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남산의 태반은 내남 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남산옥돌의 산지는 용장골을 중심으로 한 내남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의미 에서 내남은 경주남산의 어머니요, 남산옥돌의 요람이었던 셈입니다. 이제 경주시 내남면 홈페 이지를 '남산옥돌'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 기인합니다. 내남면은 경주시의 서남쪽 에 자리하며, 동으로는 외동읍과 경계하고, 남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경계하며, 서북로는 산내면, 건천읍과 경계합니다. 남산 서쪽비탈과 함께 형상강의 상류가 관통하고, 그야말로 물좋 고 산좋은 청정지역을 이룹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전까지만 해도 언양, 양산을 거쳐 부산에 이 르는 교통의 중추지였습니다. 경주-부산간 경부고속도로 역시 내남을 관통합니다. 이로 인해 신 라시대부터 도읍 경주의 젖줄이었고, 각종 유적이 산재해있는 유서깊은 고장입니다. 面의 연혁(沿革)을 말씀드리면 1906년 군구역 조정(郡區域調定)으로 그 지명을 경주군 『내남 면(內南面)』으로 지칭하여 현재까지 내남면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리동명은 상명(上椧), 하명 (下椧), 백운(白雲), 노곡(奴谷), 월산(月山), 이조(伊助), 용장(茸長), 배리(拜里), 굴석(窟石), 월남(月南), 탑리(塔里), 도초(道草), 율동(栗洞), 두대(斗岱), 두동(杜洞), 신리(新里), 화곡(花谷), 송림(松林), 와지(瓦旨), 천면(川面), 신을(辛乙), 남성(南星), 구왕(九旺), 평리(平里), 상 신(上辛), 광석(廣石), 안심(安心), 구일(九日), 고사(古舍), 박달(朴達), 비지(飛只)의 31개 법정 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914.4.1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명계,노곡,월산,이조,용장,배리,율동, 망성,화곡,부지,덕천,상신,안심,박달,비지,탑리의16개 법정리로 개편하였습니다. 1975.10.1 행정 구역 개편으로 율동과 배리가 경주시로 편입되어 법정동은 13개,행정동은 34로 분동시켜 현재 에 이릅니다. 1989.1.1 군 명칭 환원으로 월성군 내남면을 옛날의 지명과 같이 경주군 내남면으로 고쳐 부르 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95.1.1 시군통합으로 경주시 내남면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 다. 우리면의 지형은 금오산과 고위산을 잇는 금오산맥(金鰲山脈)과 단석산 고헌산을 잇는 주사 산맥(朱砂山脈)이 남쪽으로 뻗쳐있어 각각 동과 서의 경계를 이루고 이들 산맥사이로 형산강 상 류인 인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형산강 상류인 내남은 평야가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일찍이 쌀 농사를 비롯한 오곡백과의 본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시설채소, 과수와 같은 원예작 물과 특용작물, 한우,양돈, 양계등의 축산농가로 전업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면은 경부고속도로와 국도 35호선이 중앙부의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편 지방도 904호선이 동서로 연결되어있습니다. 교육시설로는 내남초등학교, 삼성고등학교가 각각 한 개교가 있고 문화재는 용장사지삼층석탑을 비롯한 보물과 경덕왕릉과 같은 사적지등 24점의 지정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곳입니다. 

경주(慶州) 안강읍(安康邑)
신라 경덕왕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여 안강이라 부르던 것을 그대로 읍 소재지 마을명칭

◆위치 : 경북 경주시 북서부 ◆인구 : 3만 8403명(2001) ◆면적 : 138.69㎢ ◆연혁 삼한시대 - 진한의 음계 대국으로 성립 신라시대 - 파사이사금 23년에 비화현이라 칭함.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 안강현으로 개칭.의창군(현 영일군)으로 귀속 고려 시대 - 현종 9년 경주군 안강현으로 복현 조선시대 - 태조때 귀성현으로 개칭 - 정종때 안강현으로 복현 - 태종 13년 경주부에 속함 - 고종 32년 경주부를 경주군으로 개칭 근대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주군 강서면으로 개칭 - 1949년 안강읍으로 승격 - 1955년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 군명칭을 월성군으로 함. - 1973년 천북면 청령리를 안강읍으로 편입. - 1995년 경주군을 시로 편입. 

* 지명유래

-안강리 신라 경덕왕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여 안강이라 부르던 것을 그대로 읍 소재지 마을명칭으 로 부르고 있음. -양월리 신라 시대에는 양월방이라 하다가 약 70여년전 마을 주위에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달을 보면 마음이 쾌활하였다고 하여 양월이라 칭하게 되었음. -구강(자연부락) 조선태조가 안강현을 구성현으로 개칭할 때 마을의 동남쪽에 거북을 닮은 산이 있어 마을을 구 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익재 이재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구강 서원을 세워서 이마을을 구강이라 불렀다고 하며 거북은 물이 있어야 산다고 믿어 마을 앞에 연 못을 파고 항상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부에서는 마을을 구강(江)이라 부르 기로 함. -창마을(자연부락) 신라시대부터 이마을에 군량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창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월성이 씨가 많이 살아온 마을인데 이마을에는 용두지란 큰 연못이 있었다. 그 용두지로부터 수로를 만 들기 위해 창석을 파헤치니 붉은피가 솟아 올랐다는데 그 후로는 월성이시 가문에 벼슬길이 막 혔고 자식이 성하지 못했다 한다. 그 이유는 용두지의 수로를 파헤칠 때 솟은 피는 용의 머리가 잘린탓이었다고 한다. -칠평 옛날 큰 홍수가 져서 안강전역이 침수된 일이 있었다. 그때 현 양월6리의 칠평 정도의 땅이 물 에 잠기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의 땅모양이 칠자형(七字形) 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각단, 신평, 양월 옛날 신라때부터 수양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양월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곳에 집이 들어서 고 주민이 늘어나 새로 생긴 마을같다하여 새각단 혹은 신평이라 불렀다. 이곳은 광복전에 없었 던 시장이 새로 생기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현재 안강읍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북부리 안강읍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북부리라 부르게 되었다. -개버들 현 안강2리와 안강3리 사이 근계 도로변에 개버들이란 지명이 있었는데 옛날 웅덩이 옆에 버드 나무가 있어 개버들이라 불렀으 며 대추밭 각단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이 웅덩이로 들어와 수 리 시설이 없던 시대에는 벼농사의 샘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볼수 없음. -대추밭 각단 현 안강5리의 사과밭 주변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한일 합병으로 일제가 경주군 강서면 안강리를 설치하여 행정을 할때 신사를 이곳에 두고 일본 천황에게 참배케한데서 유래됨. -육통리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 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 부 르게 되었다. -원당 서기 1500년경 월성김씨가 개척하여 족친간 집단 부락을 형성했 는데 인근부락중 제일위쪽에 있다하여 으뜸원(元)자를 붙여 원당이라 칭함. 일설로는 고려시대때 이 마을에 원절이라고 하 는 큰절이 있었는 데 그 이름을 따서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능골 신라 흥덕왕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 부르게 됨. -존당 고려대 존재선생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존당이라 하였는데 조선 말엽부터는 서당이 있었던 마 을이라 하여 존당이라 개칭하였다. -못밑 신라 42대 흥덕왕릉을 축조할 때 지관이 능 앞에 못이 있어야 좋다고 하여 육곡 앞에 못을 막았 다. 그 못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는 그 못이 존재하지 않는다. -황새말 · 학지 조선시대 정재우라고 하는 선비가 처음 개척 할 당시 마을에 참 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황새가 이 참나무에 와서 서식하였다고 하여 학지라 부르게 되었다. 

경주(慶州) 양남면(陽南面)
하서리, 환서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양남면

◆위치 : 경북 경주시 ◆인구 : 7,047명(2001) ◆면적 : 85.06㎢ ◆연혁 -신라6부시대 : 금산가리촌 -고려(서기 987년) : 성종3년 삼경의 하나인 동경에 속함 -조선(서기1413년) : 태종13년 경주부에 래속 -서기 1895년 : 경부군 동해면으로 개칭 -서기 1906년 : 경주군 지역편성시 장기군 양남면으로 개칭 -서기 1914년 : 군부 통폐합에 따라 경주군에 귀속 -서기 1955년9월1일 : 경주시제 실시에 따라 월성군 양남면 으로 개칭 -서기 1987년1월1일 : 양북면 봉길리 일부(월성원전부지) 양남면 편입 -서기 1989년1월일 : 법률 제 4050호로 월성군을 경주군으로 개칭 -서기 1995년1월1일 : 법률 제 4774호로 도농복합형태의 경주시 양남면으로 개칭 -경주시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동해(해안선 11.5km), 남은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서는 외동읍, 북은 양북면에 접하고 있음 -북서간에 동대산령이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하천변에 농경지가 산재되어있으며, 주로 임야가 79%를 차지하고 있음 -지질은 주로 사질양토로서 주식작물 재배 적지임 -하천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하므로 지하수가 부족한 편임 

* 지명유래

- 하 서 (下 西) 리 하서는 남은 수렴,북은 환서,동은 바다,서는 신서로 동해해변가의 온화한 기온에 옥토를 가진 농어업 겸업의 환경좋은 마을이다. 하서리는 애일.월아.오곡. 망정.진리.후리 등 7개이 자연부 락으로 형성되어 1리,2리,3리,4리로서 신라때 부터 살던 육부촌중의 금산가리촌의 촌하서지 이 다 ㆍ하서리(下西里) : 면소재지이며 농상권의 중심지이다 신라육부촌의 하나인 금산가리촌의 촌 장인 00가 입주개척한 후 하서지라 칭해오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부, 1895년 경주군 동해면에, 1914년 부군통폐합시엔 경주군 양남면 하서리, 1955년 월성군에 영속되어, 1989년경주군 양남 면 하서리로 환원 되었다가 1995년 1월1일 법률제4774호로 도농복합형태의 경주시 양남면 하서 리로 개칭 됨. ㆍ애일(愛日) : 하루종일 햇볕이 비치는 곳이라하여 애일리라 함. ㆍ월아(月牙) : 마을 向背의 形谷이 초승달과 같다 하여 월아라 함. ㆍ오곡(梧谷) :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오곡이라 불림. ㆍ망정(望亭) : 槐木나무의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의미에서 망정이 라 부르게 됨. ㆍ진리(津里) : 신라 눌지왕때 충신박제상이 왕명으로 왕자를 구하러 일본국으로 떠날 때 여기 서 출범했다하여 票里라 해오다가 진리로 개칭 함. ㆍ후리(後里) : 진리마을 또 뒷마을이라 하여 후리라 부르고 있다. -환 서(環 西) 리 환서리는 남이 하서, 북이 나산, 서북이 기구리이고 동은 석읍 으로 동해안 지대로 일반영농과 함께 축산도 하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 전방, 송정, 구만 3개부락에 1리.2리로 현성되어 있는 토 질좋은 곳이다 ㆍ환 서리(環西里) : 1914년 부군통페합 당시에 그 동네주위가 고리같다하여 고리환자 環西리 가 되었다 하며 또는 옛날 김씨 노인이 입주정착 할 당시에 밭이 많은 곳이라 하여 전방 또는 화 살전자 箭坊으로도 호칭 하였다. ㆍ전방(箭坊) : 밭이 많은 곳이라하기도 하며 화살전자 전방이라고도 함. ㆍ송정(松亭) : 소나무의 정자가 좋다하여 그이름을 따서 松亭이라 함. 구만(九万) : 약 400년전 윤씨가 개척한 후에 九万石이나하는 거부가 생겼다하여 九万里라 부르게 되었으며 역시 앞 평 야들이 비옥한 점을 보아 개정자라고도 한다 ㆍ이내봉(里內峰) : 이내봉에는 묘를쓰면 마을주민에게 큰 화가나서 동네가 문을 닫는다 하여 그 후손도 금한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마을산에 주민들몰래 묘를 쓴 구만석하 던 거부가 화를 당하자 이장하였다는 말이 전해 지고 있다 -수 렴 (水 念) 리 수렴리는 경주의 최동남해안의 울산강 동면에 인접한 해변의 동해 마을이다. 서는 환서, 북은 하서리와 접하며 해안바위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배동향의 마을이라 관광촌이 대부 분으로 수영포, 관성, 영암리, 지경리,등 4개리로 형성되고 1리.2리로 구분되었다. 어업이 주업 이나 농경지가 좋아 농사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옛날 왜적의 침입이 많은 곳이라 성질이 강 하여 성공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임진왜란때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하여 수영포리라 하였는데 1914 년에 행정리명을 수렴리 라 하였다. ㆍ관성(觀星) : 옛날 시계가 없을때에 별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는 첨성대같은 것이 있었다하여 관성 이라함. ㆍ영영암(靈岩) : 바위에 매년 무사고 제를 올린다 하여 영암인데 3년마다 별신굿도 한다 ㆍ지경(地境) : 경상북도의 지경이라 하여 지경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굼바위. 그무바위 등의 주 위의 바위를 이용하여 미역,전복 등의 양식업을 하고 있다 ㆍ이내봉(里內峰) : 이내봉에는 묘를쓰면 마을주민에게 큰 화가나서 동네가 문을 닫는다 하여 그 후손도 금한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마을산에 주민들몰래 묘를 쓴 구만석하 던 거부가 화를 당하자 이장하였다는 말이 전해 지고 있다 -신 서 (新 西) 리 신서리는 북에 대성광산, 남에 수렴리 그리고 서에 상계로 경계하고 동남해안에 위치한 광산마 을로 자연환경이 좋은 마을이다. 범실,섬안,다곡,지수곡.고평,억수하리 6개마을이 형성되어 신 서리를 이루고 있다 1914년 부군통폐합시 행정리명이 신서리로 부르게 되었다 ㆍ범실(凡室): 지형이 凡자라 하여 범실이다 ㆍ섬안(島內) : 엣날 주위가 하천이라 섬마을이다 신서 중심 마을이다 ㆍ다곡(多谷) : 마을 형곡이 多자형이어서 다곡이라 한다 ㆍ지영곡(池永谷) : 옛날에는 기름이 낫다하여 지름골이 池永谷이 되었다 ㆍ고평(高坪) : 높고 평평하여 고평이라 하였다 ㆍ억수(億樹) : 옛날 마을뒷산에 나무가 무성하여 億樹라 칭하였다 

경주(慶州) 용강(龍江)공업단지
- 경주의 소금강산에서 비롯된 이름

◆ 위 치 : 경북 경주시 용강동, 황성동(隍城) 일원 ◆ 면 적 : 161,598평(534,208m2) ◆ 연 혁 - 경주는 신라의 발상지이자 그 천년도읍지로 상고에는 진한의 땅이었고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등 6촌으로 구성됨. - 기원전 57년 상기 6촌장이 알천(북천) 언덕위에 모여 임금을 세워 나라를 이룩할 것을 의결하고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임금으로 추대함. - 이에 나라 이름을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서야, 사로, 신로(新盧) 등으로 부름. - 32년(유리이사금 9) 6촌의 이름을 촌→부로 모두 바꿈. - 65년(탈해이사금 9) 시림(始林)에서 흰닭이 울어 그곳에서 한 옥동자를 얻었으므로 이 숲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함. - 307년(기림왕 10) 국호를 신라로 부르기 시작함. - 503년(지증왕 14) 국호를 신라로 고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국명과 수도명을 거의 동일시하여 왔음. - 688년(문무왕 8) 삼국을 통일함. - 922년(경명왕 6)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 구역을 조정함. -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가 망하매 수도를 지금의 이름인 경주로 고치고 김부(金傅 : 경순왕)를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다스리게 함. - 940년(태조 23) 경주에 대도독부를 둠. - 987년(성종 6)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고쳐서 유수(留守)를 둠.(또 별호를 낙랑:樂浪이라 함) - 1012년(현종 3) 경주 방어사로 하였다가 1014년(현종 5) 안동(安東) 대도호부로 고침. - 1027년(현종 18) 목(牧)으로 하였다가 1030년(현종 21) 다시 동경이라 하고 유수를 둠. - 1202년(신종 5) 동경의 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울진, 운문산의 도적들과 합세하여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토벌함. - 1204년(신종 7) 다시 동경 사람들이 여러 곳에 격문을 보내고 "신라가 다시 일어난다"하면서 반란을 꾀하므로 동경유수를 폐지하고 지경주사(知慶州事)로 내림. - 1219년(고종 6) 다시 동경유수로 복구되었고 1308년(충렬왕 34) 계림부(府)로 고침. - 1392년(조선 태조 원년) 계림부의 겸직과 관할구역을 축소함. - 1408년(태종 8) 경상도의 감영을 상주로 이전하고 경주에는 좌우병영만 둠. -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고침. - 1519년(중종 14)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경상좌도 감영을 경주에 둠. - 1593년(선조 26) 경상좌도 감영을 성주로 옮겼다가 다시 1601년(선조 34) 대구로 옮김. 

* 지명유래

-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서야벌(徐耶伐), 서나벌(徐那伐),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 서야, 서라, 서울(徐苑), 계림(鷄林), 시림(始林), 동경(東京), 낙랑(樂浪), 금성(金城), 월성, 문천, 금오 등의 많은 이름이 있다. - 이렇게 많은 이름들이 있지만 그 대부분이 →서울을 나타낸 것이며, 서울이란 새벌:새나라의 도읍지를 뜻한 것으로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나 도읍지의 구분없이 사용되어 왔다. - 가령 신로의 신(新)=새, 금성의 금(金)=쇠(새), 동경의 동(東)=새(예, 동풍을 샛바람이라 함), 계림의 계(鷄)=닭:새이며 나머지 서(徐), 사(斯), 시(始)는 모두 '새'를 나타내는 이두식 표기인 것이다. - 한편 서울의 '울'에 해당하는 지명어미로서 벌(伐), 라(羅), 림(林)에서 벌(伐)은 소리 그대로의 '벌'을 표기한 것이고, 라(羅)=벌(벌림), 림(林)=수풀(숲벌)의 벌로 풀이된다. - '낙랑'이라는 이름은 신라 진평왕때 수나라에서 신라임금을 '낙랑군왕(樂浪君王)'으로 봉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으나 '낙랑'은 '나라'의 표기로 보고 있다. - 경주시 용강동(龍江)은 경주시 금강산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금강산(金剛山)은 소금강산, 북악이라고도 하는 높이 143m의 산으로서 법흥왕때 이차돈의 목이 이곳으로 날아왔다고 전해지는 산인데, 소금강산 내룡(來龍)의 아래가 되므로 용강동이라 부른다고 한다.(강: 剛→江의 차이가 있다) - 황성동(隍城)은 행정자치부의 『지방행정구역요람』(2000년판)에 의한 것인데,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경북편)에는 '황성(皇城)'으로 표기하고 있다. - 곧 '황(皇)'은 임금중에서도 천자를 뜻하고, '황(隍)'은 성을 지키기 위한 해자(도랑)을 말하므로 그 출처가 확실하지 않다

경주(慶州) 현곡면(見谷面)
신라때부터 3기 8괴의 하나로 경치가 빼어나 기러기도 경치에 취하여 쉬어갔다고 한다

◆위치 : 경북 경주시 북서부 ◆인구 : 1만 858명(2001) ◆면적 : 55.87㎢ ◆연혁 신라육부촌중 모량부의 무산대수촌으로 현실이라 칭하였으며 고려시대 계림부에 속하였다가 1906년 경주군 현곡면으로 칭함. 1955년9월1일 월성군 현곡면으로 개칭(10개법정리 23개행정리로 구분) 1995.1.1도농복합형태의 경주시 현곡면으로 개칭되었다. 위치는 북위35。5' 동경129。 13'로 경주시의 북서쪽에 있다. 남동부의 형산강을 경계해서 경주시와 접하고 서부는 어임산과 구미산의 준령을 경계로 해서 건천읍, 서면 및 영천군 고경면과 접하며 북부는 금곡산 준령을 경계로 해서 안강읍과 접하고 있다. 연간강우량은 1000㎜정도이며 특히 경주시와 인접해 있으며 천도교의 발상지인 용담정은 그주위를 포함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 지명유래

-金丈里:金丈은 金臟落雁이라하여 신라때부터 3기 8괴의 하나로 경치가 빼어나 기러기도 경 치에 취하여 쉬어갔다고 하며, 이곳에 금장대가 있어 '금장'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암자에 한 스님이 살고 있었는데 금 지팽이가 움직여 혼자 시주를 해 왔다고 하여 금장이라 한다고 함 -金丈2里(옹기골):약100년전부터 옹기를 많이 생산한 지역임 -金丈2里(가삼동);약250여년 전까지 가삼재배지였다고 한다. -上邱里: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상이라 구미산이라 하였고 마을이 이산 위쪽에 위치한다 하여 상구미라 했다. -下邱1里(하구미):구미산의 아래쪽이라 하여 하구미라 한다. -下邱2里(고천):산의 형세가 한자의 川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어 고천이라 칭하였다 한다. -下邱3里(다경):일제시대에 생긴마을로 자연스럽게 생각 것이 다행스럽다 해서 다경이라 한다. -柯亭1里: 정자나무 마을이라하여 이름이 붙었다. -柯亭2里(갓질,지곡):갓과 같고 그 밑마을이라 해서 갓골이라 했다. 또 여강 이씨의 할아버지 이름자인 芝자를 따서 芝谷이라 했다. -柯亭3里(마룡골): 현용담정 위에 용치에서 용마가 났다 해서 용마골이라 한다. 일설에는 이곳 에 龍처럼 생길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전한다. -南莎1里- 마을 앞 가마들에 잔디가 많았고 마을이 남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여 남사라 했다. -南莎2里(북골,종동): 전설에 의하면 孫順이란 사람이 신라 흥덕왕때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린 자식이 노모의 반찬을 먹어 그 부부는 자식을 생매장하기로 하였다. 그래 서 마을 남쪽산에 가 땅을 파니 종이 나왔다. 그종을 치니 소리가 궁성까지 들렸다. 왕이 손순 을 효자라 표상하고 종을 얻은 산을 북골이라 하고 마을을 鍾洞이라 명명했다 한다. -來台1里(나태):산림이 우거져 하늘에 별만 보인다해서 마을 이름이 됐다. -來台2里(곰바우): 어느날 뒷산 바위에 곰의 몽둥이가 비쳤다 해서 그 바위를 곰바위.熊岩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여기서 왔다. -武科里:신라시대 武科시험 장소로 이용했던 곳이라 한다. -小見1里:신라도성에서 마을이 조그마하게 보인다 해서 소현이라 했다 한다. -小見2里(智日):마을의 동쪽산이 높아 해가 뜬 것을 알려면 한나절이 지나야 알수 있다 해서 붙 여진 이름이다. -五柳里:마을앞에 버드나무 다섯그루가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이 됐다. -羅原里:신라헌덕왕때 건립한 蘭原寺터에 이해 난원이 됐다가 나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김천(金泉) 교동(校洞)
- 그전 금산고을 향교가 있던 곳

◆ 위 치 : 경북 김천시 교동, 삼락동(三樂), 문당동(文唐) 일원 ◆ 면 적 : 76,321평(252,301m2) ◆ 연 혁 - 김천지방은 신라의 금산현(金山) 또는 풍무현(風茂)이라 하였으며 감문군(甘文:개령)의 영현(領縣)임. - 1018년(고려 현종 9) 경산부(京山府:성주)에 붙였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둠. - 1392년(조선 태조 원년) 현을 없앴다가 다시 경산부로 복귀함. - 1393년(태조 2) 다시 감무를 두었고, 1398년(정종 원년) 왕의 태를 황악산에 봉안하고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별호를 금릉(金陵)이라 함. - 1629년(인조 7) 양천석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금산을 「모역지군」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40년(인조 18) 다시 복구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금산군(金山)이 됨. - 1914. 3. 1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개령군, 지례군과 성주군 신곡면을 병합함. - 1931. 4. 1 김천면이 김천읍으로 승격됨. - 1949. 8. 15 김천읍이 김천시로 승격되고 잔여지역은 금릉군이 됨. - 1995. 1. 1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에 의하여 김천시와 금릉군이 합해지고 김천시가 됨

* 지명유래

- '김천(金泉)'이라는 이름은 유명한 샘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이 샘은 남산동 산기슭에 있었는데, 그 물맛이 좋아 「금지천(金之泉)」이라 하였고, 그 물로 술을 빚으면 그 맛이 일품이므로 이 샘을 주천(酒泉)이라 하고 그 술을 과하주(過夏酒)라 하였다고 한다. - 또 임진왜란때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샘의 물맛을 보고 중국 금릉의 과하천과 물맛이 꼭 같다고 하여 '금릉'이라고 별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 금릉의 금지천에서 만든 과하주는 조정의 진상품인데 조정에서 요구하는 양이 점점 늘어나자 견딜수 없어서 그 샘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 교동(校洞)은 향굣골, 변하여 생깃골 또는 교리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그전 금산고을의 향교가 있었던 곳이므로 교동이라 하였다. - 삼락동(三樂)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새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내력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옛부터 군자의 3락(三樂)이라 하여 집안이 무고한 일,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 없는 일, 그리고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일을 3락이라 하였다. 혹은 사람으로 태어남, 남자로 태어남, 장수하는 것을 삼락이라고도 하였는데 그 뜻을 딴 것으로 보인다. - 문당동(文唐)은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폐합때 그전 문산동(文山)과 당동(唐) 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문당동이라 하였다.

김천(金泉) 구성(龜城)공업단지
- 옛 지례고을 별호가 '구성'임

◆ 위 치 :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松竹) 일원 ◆ 면 적 : 245,000평(809,917m2)

* 지명유래

- 구성면(龜城)은 조선시대 지례군의 북면이었으나 193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옛 고을 지례군의 별호인 '구성(龜城)'을 따서 구성면이라 하였다. - 송죽동(松竹)은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폐합때 그전 송평(松坪)과 죽방(竹方) 등의 여러 마을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송죽동이라 하였다

김천(金泉) 부곡(富谷)
- 옛날 그릇굽던 가마실이 바뀐 이름

◆ 위 치 : 경북 김천시 부곡동 일원 ◆ 면 적 : 64,358평(212,754m2)

* 지명유래

- 부곡동(富谷)은 원래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어서 가마실, 개미실이라 불렀던 곳이다. -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그전 금산군 미곡면 지역의 여러 마을을 합하고 금릉면(김천시)에 편입되었으며 이때 '가마솥 부(釜)'자를 '부할 부(富)'자로 고쳐쓴 것이다. - 가마실 보다는 '부곡(富谷)'이라는 이름이 사업지구 명칭으로 어울리는 이름이다

달성(達城) 논공(論工)공업단지
- 옛 이름과 오늘의 현실이 일치한다

◆ 위 치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북동(北) 일원 ◆ 면 적 : 1,241,916평(4,105,507m2)

* 지명유래

- 대구(大邱)는 옛 이름이 다벌(多伐), 달벌(達伐), 다대(多大),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火), 대구(大丘) 등으로 불리워 왔다. - 여기서 달=다=대(大)는 서로 음근(音近)하고, 또 벌(伐)=불(弗)→화(火)는 '불 화(火)'의 훈차(訓借) 관계이다. - 평지, 분지, 벌판을 뜻하는 '벌'이 신라어지역에서는 '불(화:火)'로, 백제어지역에서는 '부리(夫里)'로 사용되었다. - 따라서 달구벌의 '달구'를 '닭(鷄)'으로 풀이하는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구'의 달은 원(圓), 주(周)의 뜻을 지님으로써 달구벌이 대평원, 큰 벌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 이에 대하여 달구화의 '달(達)'을 'tara'의 표기로 보고 '구(句)'를 접미사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에 따르면 '달'은 신라에서 '읍'(고을 소재지)을 부르는 호칭으로 보기도 한다. - '달성'과 '대구'는 그 이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이름이 나누어진 것이며 달불성(達弗城 : 대구 달성공원의 토성을 말한다)을 줄여서 달성(達城)이라 한 것이다. - 논공읍(論工)은 그전 현풍군에 속하였던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달성군에 편입된 곳이다. - 이 지역을 '논공면'이라 한 것은 이곳에 살던 황별감(별감은 벼슬 이름)이라는 식견이 뛰어난 사람이 "논(論)은 학문이요, 공(工)은 기술을 뜻한다"고 하면서 학문으로 지식을 넓히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습득하여 문명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논공면」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 과연 그의 선견지명이 맞아 떨어졌는지 이곳에 한국토지공사에서 1백 2십만평에 달하는 달성논공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경상북도와 대구지역의 공업단지로서 큰 몫을 하게 된 것이다. - 이 '논공'의 의미는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의하여 논이 동양의 학문, 공이 서양의 문명이기(利器)를 뜻하는 것과 서로 통한다. - 북동(北)은 '뒷마'라고 불렀던 곳이다. 이곳은 안인동 마을에서 남쪽과 뒷쪽이 되기 때문이며, 뒤=북(北)으로 표기한 것이다

달성(達城) 논공(論工)주택단지
- '논'은 학문이요, '공'은 기술을 뜻함

◆ 위 치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남동(南), 북동(北) 일원 ◆ 면 적 : 145,610평(481,355m2) ◆ 연 혁 - 달성은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 또는 달구불, 달구벌, 달불성(達弗城)임. - 757년(경덕왕 16) 통일신라에서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 두 글자 체계로 바꾸면서 지금의 이름인 대구(大丘:'구'자만 틀림)로 고치고 수창군(대구 수성구)의 영현이 됨. -1018년(고려 현종 9) 수창군 영현에서 경산부(京山:성주)에 붙여, 그 속현이 됨. - 1143년(인종 21) 대구에 현령(縣令)을 둠. - 1401년(조선 정종 원년) 인구가 천호(千戶)이상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가 됨. - 1466년(세조 12) 도호부로 승격되고 진(鎭)을 두었으며 12개 고을을 관할함. - 1601년(선조 34) 경상도감영을 안동에서 대구로 옮기고 도호부사가 관찰사를 겸함. - 1607년(선조 40) 경산현, 하양현을 대구도호부에서 분리함. -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 이양채(李亮采)가 상소하여 '대구'의 이름을 고칠 것을 청원하여 1778년(정조)경부터 대구를 '대구(大邱)'로 씀.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대구감영이 폐지되고 대구부(府)가 됨. - 1914. 3. 1 대구군 13개면을 재편하여 대구부는 대구면만을 관할하고 나머지는 달성군에서 관할함. - 1995. 1. 1 대구직할시를 대구광역시로 개편함. - 1995. 3. 1 달성군 전지역을 대구광역시에 편입함

* 지명유래

- 대구는 옛 이름이 다벌(多伐), 달벌(達伐), 다대(多大), 달불성(達弗城), 달구불(達句弗),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으로 불러 왔다. - 여기서 달=다=대(大)는 서로 음근(音近)하고, 또 벌(伐)=불(弗) 화(火)는 '불 화(火)'의 음차(音借)관계이다. - 평지, 분지, 벌판을 뜻하는 '벌'이 신라어지역에서는 '불(화:火)로, 백제어지역에서는 '부리(夫里)'로 사용되었다. - 따라서 달구벌의 '달구'를 '닭'으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달구'의 달은 원(圓). 주(周)의 뜻을 지님으로써 달구벌이 대평원, 큰 벌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 이에 대하여 달구화의 '달(達)'을 'tara'의 표기로 보고 '구(句)'를 접미사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에 따르면 '달'은 신라에서 '읍(고을 소재지)'을 부르는 호칭으로 보기도 한다. - '달성'과 '대구'는 그 이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이름이 나누어진 것이며 달불성(達弗城:대구 달성공원의 토성을 말한다)을 줄여서 달성(達城)이라 한 것이다. - 논공읍(論工)은 그전 현풍군에 속하였던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달성군에 편입된 곳이다. - 이 지역을 '논공면'이라 한 것은 이곳에 살던 황별감(별감은 벼슬이름)이라는 식견이 뛰어난 사람이 "논(論)은 학문이요, 공(工)은 기술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가 학문으로 지식을 넓히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습득하여 문명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논공면 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 과연 그의 선견지명이 맞아 떨어졌는지 이곳에 한국토지공사에서 1백 2십만 평에 달하는 달성 논공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경상북도와 대구지역의 공업단지로서 큰 몫을 하게 된 것이다. - 이 '논공'의 의미는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의하여 논이 동양의 학문, 공이 서양의 문명이기(利器)를 뜻하는 것과 서로 통한다. - '남동(南)'은 그전에 '남마'라고 불렀고, 북동은 '뒷마'라고 불렀던 곳이다. 이곳은 안인동 마을에서 남쪽과 뒷쪽이 되기 때문이며, 뒤=북(北)으로 표기한 것이다.

달성(達城) 천내(川內)
- 인흥천 안쪽이 되므로 '내내'라고 부른 곳

◆ 위 치 : (1)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花園) 천내동 일원 (2)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천내동, 구라동(九羅) 일원 ◆ 면 적 : (1) 50,032평(165,395m2) (2) 58,563평(193,597m2)

* 지명유래

- 천내동(川內)은 현지에서 '내내'라고 불렀던 곳이다. 곧 '내의 안쪽'이라는 뜻인데, 마을이 인흥천 안쪽이 된다하여 '내내'라 불렀다. - 화원읍의 '화원(花園)'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때부터 불러온 이름이다. 이 지역은 신라의 설화현(舌火)으로서 통일신라 경덕왕때 화원현으로 고쳐서 수창군의 속현이 되었다. - 전설에는 신라 애장왕이 이곳에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었으므로 아홉번이나 꽃을 구경하러 왔으며 이때 구라동의 산봉우리를 상화대(賞花臺)라 이름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2) - 화원(園)과 화원(苑)은 같은 말로서 꽃을 심은 동산, 꽃밭을 뜻하지만, 그보다는 화원의 별호가 금성(錦城)이었으므로 「설화(舌火)=화원(花園)=금성(錦城)」으로서 설(舌)·화(花)·금(錦)이 대응하고 있으므로 이를 풀어보면 고대 국어에서 설(舌)은 Koro로 발음되었으며, 화(花) 역시 꽃>곶> >골이었을 것으로 본다. - 한편 '비단 금(錦)' 역시 '고로'라 하였으므로 설화, 화원, 금성이라는 옛 이름은 성읍을 뜻하는 고대어 '고로'의 표기로 보고 있다. 3) - 구라동(九羅)은 우리 말의 '구레'를 한자로 쓰면서 '구라동'이라 한 곳이다. '구레'는 물이 좋아서 농사짓기에 적당한 기름진 들판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 천내동에 깨구리산이 있고, 구라동에 배암산과 통통고개가 있다. 속전에는 배암산의 뱀이 깨구리산의 개구리를 많이 잡아 먹어서 배가 통통하게 나온 곳이 이 통통고개라고 한다. 지금은 이런 산이나 고개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수 없다

대구(大邱) 달서(達西)
- 달구벌의 서쪽을 뜻하는 이름

◆ 위 치 :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本里), 송현동(松峴) 일원 ◆ 면 적 : 85,360평(282,182m2) ◆ 연 혁 - 108년(신라 파사이사금 29) 신라군에 의하여 당시 부족 국가인 다대국(多大國)이 점령되었는데, 이를 대구에 있었던 부족국가로 보고 있음. - 이후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또는 달구불, 달구벌, 달불성(達弗城)임 - 668년(문무왕 8) 삼국을 통일하고, 689년(신문왕 9)에는 수도가 너무 동남쪽에 치우쳐 있다하여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려 하였으나 신라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함. - 757년(경덕왕 16) 통일신라때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 두 글자 체계로 바꾸면서 지금의 이름인 대구(大丘:'구'자만 틀림)로 고치고 수창군(대구 수성구)의 영현이 됨. - 1018년(고려 현종 9) 수창군 영현에서 경산부(京山:성주)에 붙여, 그 속현이 됨. - 1143년(인종 21) 대구에 현령(縣令)을 둠. - 1401년(조선 정종 원년) 인구가 천호(千戶)이상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가 됨. - 1466년(세조 12) 도호부로 승격되고 진(鎭)을 두었으며 12개 고을을 관장함. - 1601년(선조 34) 경상도 감영을 안동에서 대구로 옮기고 도호부사가 관찰사를 겸함. - 1607년(선조 40) 경산현(慶山), 하양현(河陽)을 대구도호부에서 분리함. -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 이양채(李亮采)가 상소하여 '대구(大丘)'의 이름을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1778년(정조)경부터 대구를 '대구(大邱)'로 씀.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대구감영이 폐지되고 대구부(府)가 됨. - 1896년(건양 원년)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경상도를 남.북 2도로 나누어서 경상북도가 되는 동시에 대구부가 폐지되고 대구군이 됨. - 1910년 지방관제 개정시 경상북도 대구군을 경상북도 대구부로 함. - 1914. 3. 1 대구군 13개면을 재편하여 대구부는 대구면만을 관할하고 나머지는 달성군에서 관할함. - 1949. 8. 15 대구부를 대구시로 고침. - 1981. 7. 1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고 6개구를 관할함. - 1988. 1. 1 달서구를 신설함.( 6개구→7개구) - 1995. 1. 1 대구직할시를 대구광역시로 개편함. - 1995. 3. 1 달성군 전지역을 대구 광역시에 편입함

* 지명유래

- 대구(大邱)는 옛 이름이 다벌(多伐), 달벌(達伐), 다대(多大), 달불성(達弗城), 달구불(達句弗), 달구화(火), 대구(大丘) 등으로 불리워 왔다. - 여기서 달=다=대(大)는 서로 음근(音近)하고, 또 벌(伐)=불(弗) 화(火)는 '불 화(火)'의 음차(音借)관계이다. - 평지, 분지, 벌판을 뜻하는 '벌'이 신라어 지역에서는 '불(화:火)'로, 백제어지역에서는 '부리 (夫里)'로 사용되었다. - 따라서 달구벌의 '달구'를 '닭(鷄)'으로 풀이하는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구'의 달은 원(圓), 주(周)의 뜻을 지님으로써 달구벌이 대평원, 큰 벌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 이에 대하여 달구화의 '달(達)'을 'tara'의 표기로 보고 '구(句)'를 접미사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에 따르면 '달'은 신라에서 '읍'(고을 소재지)을 부르는 호칭으로 보았다. 1) - 오늘날의 '대구(大邱)'라는 한자표기는 1750년 영조때 대구의 유생 이양채가 대구의 '구' 자가 공자의 이름 '구(丘)'와 같으므로 성현의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 조정에서는 새롭고 기이한 것을 즐기는 선비들의 경망한 풍조라 하여 묵살되었으나, 이러한 경우는 '피휘(避諱)'라 하여 임금, 부친 또는 성인의 이름 글자를 피하는 예가 있었다. - 따라서 정조때인 1778년경부터 대구(大丘)→대구(大邱)로 고쳐 썼으나 '언덕 구'자의 뜻이 달라진 것은 아니며, 이때 다른 지역에서도 '구(丘)'자를 쓰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구(邱)'자로 바뀌게 되었다. - '달서(達西)'라는 이름은 달성군의 서쪽을 뜻하기보다는 그전 달성군 달서면(達西)지역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구(區)의 명칭이 된 곳이며, "달구벌의 서쪽"으로 풀이할 수 있다. - 본리동(本里)은 본 마을이라는 뜻이며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당초의 원마을에 붙는 이름이기는 하나 '본동'이 아닌 '본리동'이라 하여 리(里)와 동(洞)이 중첩되는 모순이 있는데, 대구지방에 이런 지명이 있다. - 본리동은 그전 달성군 성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98.1.1 대구시 달서구로 편입되었다. - 송현동(松峴)은 본래 '솔고개' 라고 부르던 곳이다. 그 전 대구부 감물천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소나무가 많은 솔고개(월촌고개)가 있어서 송현동이라 하였다. - 1914년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월배면에 들어갔고, 뒤에 대구시로 편입된 곳이다

대구(大邱) 동호(東湖)
- 조선시대 유림 모신 동호사(東湖祠) 있던 곳

◆ 위 치 : 대구광역시 동구 동호동, 각산동(角山), 금강동(琴江), 신서동(新西), 괴전동(槐田) 일원 ◆ 면 적 : 192,585평(636,645m2)

* 지명유래

- 동호동, 각산동, 금강동, 신서동, 괴전동은 모두 행정구역상 동구 안심 3-4동에 속하는 법정동이다. (안심동은 대구 안심지구 참조) - 동호동(東湖)은 그전 경산군 북면에 속한 곳으로 조선시대에 오례역(吾禮驛)이 있어서 오례촌, 오례리라 부르던 곳이다. - 이 오례마을을 중심으로 동, 서 두 마을이 나누어지므로 동쪽을 동오리, 또는 동호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근 동내동에는 동호사(東湖祠)라는 사당이 있어서 조선시대 유림의 학자를 모셨던 곳이다. - 각산동(角山)은 이 마을 무덩찌미에 쇠뿔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이 골짜기를 뿔방우, 소방우, 또는 우암(牛岩)이라 하므로 마을 이름도 각산동이라 한 곳이다. - 금강동(琴江)은 마을 앞을 흐르는 금호강을 따서 금강동이라 하였으며, 또 찬 우물이 솟아나는 냉천이 있어서 냉천, 냉칭이라고도 불렀다. - 신서동(新西)은 그전 하양군 안심면에 속하였던 곳으로서 1914년 일제에 의하여 행정구역이 폐치·분합될때 그전 신촌곡과 서곡(西谷)을 합하고 그 머리글자를 따서 신서동이라 하였다. - 괴전동(槐田) 역시 그전 하양군 안심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그전 괴동(槐洞)과 송전동(松田)을 합하고 여기서 한 글자씩 취하여 괴전동이 되었다.

대구(大邱) 불로(不老)
- 장수하는 곳, 늙지 않는다는 뜻

◆ 위 치 :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일원 ◆ 면 적 : 35,503평(117,365m2)

* 지명유래

- 불로동(不老)은 본래 신라의 치성화현(雉省火) 또는 미리(美里)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757년(경덕왕 16) 해안현(解顔)으로 고쳐 장산군(경산)에 붙였다가 1018년(현종 9)에는 경주에 붙였고, 조선 태조때 대구에 병합된 곳이다. - 옛 이름인 '해안'은 안색을 부드럽게 하거나 웃음을 띄우는 것을 말하면서 한편 얼굴을 폈다는 뜻으로 (주름살이 없어짐을 뜻함)도 볼 수 있다. - 이 곳의 불로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주름살이 없어지는 것과 서로 통한다. - 불로(不老)야 말로 유한한 인간이 죽음을 향해 나가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숙명을 면해 보고자 하는 오랜 인류의 소망이기도 하다. - 불로는 늙지 않는 곳, 장수를 기원하는 곳으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노후를 대비 하는 곳'으로 홍보할 수 있다.

대구(大邱) 성서(城西)
- 옛날 대구부 성의 서쪽을 뜻함

◆ 위 치 :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新塘), 이곡동(梨谷), 용산동(龍山), 장기동(長基) 일원 ◆ 면 적 : 951,310평(3,144,826m2)

* 지명유래

- 성서(城西) 지구의 '성서'는 그전 달성군 성서면(城西)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옛 대구부 성의 서쪽이 된다는 뜻으로 성서면이라 한 곳이다. - 신당동(新塘)은 이곳에 신당지(新塘池)라는 못이 잇어서 신당동이 된 곳으로 1914년 인근의 점터마을을 병합하여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 이곡동(梨谷)은 '배실'이라 부르던 곳이므로 배=이(梨)와 실=곡(谷)을 취하여 이곡동이라 하고 1914년 성서면에 편입되어 면소재지가 된 곳이다. - 용산동(龍山)은 '교육가촌'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 곳에 도씨(都氏)들이 많이 살았는데 1980년대에 교육가가 한 마을에 3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 와룡산(臥龍山) 밑이 되므로 용산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에 용상동, 용하동을 병합하였다. - 장기동(長基)은 옛날 장이 섰던 곳이므로 구장터 또는 장터라 부르던 곳이며, 그 의미대로라면 '장기(場基)'라 써야 옳다

대구(大邱) 안심(安心)
- 안심하고 정착할 수 있는 살기좋은 지역

◆ 위 치 :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栗下), 신기동(新基) 일원 ◆ 면 적 : 142,074평(469,666m2)

* 지명유래

- 동구(東)는 대구시에서 처음 구제(區制)를 실시할 때인 1963. 1. 1 그전 동부출장소와 동촌 출장소를 합하여 그 위치가 대구시의 동북쪽이 되므로 동구라 하였다. - 율하동과 신기동은 행정구역상 동구 안심동에 속한 법정동이므로 사업지구 명칭을 안심 지구라 한 것이다. - 안심동(安心)은 그전 경산군 안심읍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하양군(河陽)에 속하였고, 고려때 안심소(安心所)가 있었기 때문이다. - 율하동(栗下)은 원래 반야월(半夜月), 반계(磻溪), 반계촌이라고도 불렀던 곳이며, 율상리의 아래쪽이 되므로 율하동이라 하였다. - '반야월(半夜月)'은 신라 말기에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구하려고 견훤의 뒤를 쫓아 이 곳에 이르렀는데, 밤중에 달이 훤하게 밝으므로 '반야월'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 '반야월'은 시정(詩情)이 넘치는 이름으로 인근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반계(磻溪)'는 전국적으로 같은 이름이 많은데, 이것은 중국 주나라때 반계에서 태공망(太公望)이 낚시질을 하며 때를 기다렸기 때문에 이것을 인용한 것이다. - 신기동(新基)은 원래 '새터'라 부른 곳으로서 마을이 터를 잡아 새로 형성되었으므로 부르게 된 이름이며 '신촌'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이름중의 하나이다. - 이 지역은 글자 그대로 '안심'하는 지역이므로 사업지구 명칭으로 부르기 좋은 이름이며, 또 '반야월'이라는 멋진 이름도 있어서 더욱 애착이 가는 곳이다

대구(大邱) 월배(月背)
- 옛 이름 '달비골'을 한자화한 이름

◆ 위 치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上仁), 진천동(辰泉)일원 ◆ 면 적 : 189,135평(625,240m2)

* 지명유래

- 상인동(上仁)은 원래 '달비골'이라 부르던 곳이며 그전 월배면(月背)이라는 이름이 이 '달비골'에서 비롯되었다. - 상인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달비골은 달비산 밑이 되므로 달배, 달비, 또는 한자로 월배라 하였고, 조선시대 월배면 사무소가 있었다. - 상인동의 '상인'은 '상인산(上仁)'(월촌 마을 뒤에 있는 산)에서 따온 이 름인데 그전에 상인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 진천동(辰泉)은 본래 '미리샘' '미리샘동' 이라 불렀던 곳이다. '미리샘'은 옛날 큰 용이 이 샘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후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 물이 차서 땀띠에 좋았다고 한다. - 우리말의 '미리'는 용 또는 은하수를 뜻하며 12간지중 진(辰)은 용을 나타내므로 미리샘=진천이 된 것이다

대구(大邱) 칠곡(漆谷)
- 칠곡(七谷)이 칠곡(漆谷)으로 바뀐 곳

◆ 위 치 : (1) 대구광역시 북구 태전동(太田), 관음동(觀音) (2) 대구광역시 북구 관음동, 구암동(鳩岩), 동천동(東川) 일원 (3)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동, 동천동, 국우동(國優), 학정동 (鶴亭) 일원 ◆ 면 적 : (1) 541,324평(1,789,501m2) (2) 206,229평(681,749m2) (3) 682,455평(2,256,050m2) ◆ 연 혁 - 칠곡지구는 경북 칠곡군에 속했다가 1981. 7. 1 칠곡군 칠곡읍이 대구 시 북구에 편입됨. - 칠곡군은 신라의 팔거리현(八居里)으로서, 북치장리(北恥長里), 인리 현(仁里)이라고도 함. - 757년(경덕왕 16) 당나라식으로 지방관제 개혁시 팔리(八里)로 고치고 수창군(대구 수성)에 딸림. - 940년(고려 태조 23) 팔거 로 고치고, 현종때 성주에 붙였으며 별호를 칠곡(七谷)이라 함. - 1640년(조선 인조 18) 가산성을 쌓고 부(府)를 두어 지금의 이름인 칠곡이라 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시 칠곡군이 됨

* 지명유래

- 지금의 칠곡(漆谷)이라는 이름은 고려 현종때의 별호인 칠곡(七谷)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 지명에서 '옻나무 칠'자를 쓰는 경우는 대개 옻나무를 이용한 칠기나 칠전(옻나무 밭) 등에서 비롯되는데, 칠곡군의 경우는 그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 - 『예기』에 나오는 '제제칠칠(濟濟漆漆)' 즉, 전력을 기울이다, 삼가하다는 뜻을 따서 '칠곡'이라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태전동(太田)은 본래 '한밭'이라 부르던 곳이다. 대전광역시의 대전=한밭이듯이, 태전도 큰 밭이 있었으므로 '한밭'이라 불렀다. - 관음동(觀音)은 이 지역의 토착지명인 '가나골'을 한문 표기하면서 '관음동'으로 된 것인데, 그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 '관음'은 불교의 관음보살을 뜻하는 불가적 이름으로도 볼 수 있다. 관음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경지를 뜻한다고도 한다. - 읍내동(邑內)은 그전 칠곡군 칠곡읍의 읍내가 되었던 곳으로서 그전 칠곡고을의 객사터, 동헌터, 성황당 등이 있었던 곳이다. - 구암동(鳩岩)은 '비둘기가 울었다'는 뜻을 지닌 구명(鳩鳴) 마을과 운암동 마을 등을 합하면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구암동'이라 하였다. - 동천동(東川) 역시 1914년 일제에 의하여 행정구역이 통·폐합될때 동대(東帶) 마을과 구천(龜川) 마을 등을 합하면서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동천동이라 하였다. - 국우동(國優)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국동(菊洞)과 완전동(莞田), 자지동 등을 합하면서 국동의 '국(菊)'을 '나라 국(國)'자로 바꾸고 '넉넉할 우(優)'자를 써서 국우동이라 하였는데, 나라가 부강해지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 학정동(鶴亭)은 1914년에 새로 생겨난 이름이다. 이곳 주지미 동쪽에 있는 높이 126m의 산을 '학 날개'를 뜻하는 학익산(鶴翼山)이라 하고, 또 정지못(亭池), 일명 적지못이 있으므로 '학'자와 '정'자를 따서 학정리라 하였다

문경(聞慶) 흥덕(興德)
- "기쁜 소식을 듣고 잘 되는 곳" 으로 풀이

◆ 위 치 : 경북 문경시 흥덕동 일원 ◆ 면 적 : 62,907평(207,957m2) ◆ 연 혁 - 문경은 신라시대 이전에는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 하였고 신라때는 관문현(冠文) 또는 관현(冠)이라 함. - 757년(경덕왕 16) 신라에서 관산(冠山)으로 고치고 고령군(함창)의 영현으로 함. - 940년(고려 태조 23) 문희(聞喜)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상주에 붙임. - 1390년(공양왕 2) 지금의 이름인 문경으로 고치고 감무를 둠. - 1413년 (조선 태종 13) 호계현을 병합하고 현감을 두었으며 가은현을 붙임.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의하여 문경군이 됨. - 1949. 3. 10 문경군청이 문경면에서 호서남면 점촌리로 이전함. - 1956. 8. 8 호서남면이 점촌읍(店村邑)으로 승격됨. - 1986. 1. 1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됨. - 1995. 1. 1 도농 복합형태의 시설치에 따라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합되어 문경시가 됨

* 지명유래

- '문경(聞慶)'이나 '문희(聞喜)'라는 이름은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으로,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한 후 반가운 소식을 문경 새재 넘어로부터 듣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 '점촌(店村)'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옛날 옹기를 만드는 '점(店)'이 있었던 마을이므로 점촌이라 불렀으며 조선시대의 '점'이란 광물의 채굴, 용기의 제작, 물건의 판매 등 여러 곳에 붙는 이름이다. - '흥덕동(興德)'은 특별한 내력을 확인할 수 없으며 마을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부쳐진 기원지명, 미화지명으로 볼 수 있다

양남(兩南)지방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영남(嶺南)
경상도의 별칭으로 교남(嶠南)이라고도 불렀다.



* 지명유래

경상도의 별칭으로 교남(嶠南)이라고도 불렀다. 영남의 ‘영’은 고개를 뜻하며 조령(鳥嶺), 죽령 (竹嶺), 추풍령(秋風嶺) 등의 고개가 그 경계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고개 중에서도 대표적인 고개가 조령(제 1관문 - 제 3관문이 있음)이 되므로 조령이남을 영남이라 한다. 교남은 영남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영호남(嶺湖南)지방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포항시(浦項市) 대송면 (大松面)
마을 뒤쪽에 응봉령이라는 높은 고개가 있는데...

◆위치 : 경북 포항시 ◆인구 : 8,564명(2001) ◆면적 : 32.28㎢ ◆연혁 삼한시대 : 진한(辰韓) 12국중 근기국(勤耆國)의 영역 삼국시대 신라초기 : 근오지현(斤烏支縣, 일명 烏良友 烏川이라고도 함)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757) 임정현(臨汀縣), 의창군(義昌郡 ;후의 興海郡)의 영현 고려시대 : 태조13년(930)에 영일현(迎日縣 또는 延日懸)으로 개명하고, 현종 9년(1018) 경주부(慶州府)에 내속 조선시대 : 영일현(현감 : 종 6품),경주부의 영현 1765년 : 8면(邑內·夫山·驛·古縣·南·舊邑·西·北面) 1789년 : 8면 82리(읍내면 11리, 북면 10리, 서면 6리, 구읍면 3리, 역면 2리, 남면 11리, 부산면 17리 고현리 21리) 1832년 : 구읍면이 남면에 편입되어 7면 78리가 됨 (읍내면 16리, 북면 9리, 서면7리, 남면13리, 고현면 13리, 부산면 18리, 역면 2리) 1871년 : 7면 104리(고읍면에 해도·상도·하도·분도·죽도등의 섬마을이 개척됨) 1895년 5월 26일 : 영일현이 영일군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함, 8면 102리 (고현면을 분면하여 일월면을 신설, 1면이 늘어남) 1896년 8월 4일 : 13도제(道制)실시로 영일군이 연일군이 되어 경상북도(41군)의 관할이 됨. 일제강점기 1912년 1월 : 8면 104리 (읍내면-17, 서면-8, 남면-18, 고현면-15, 일월면-12, 동해면-18, 동면-8, 북면-8), 군청 소재지 : 읍내면 생지동 1914년 3월 1일 : 흥해·연일·장기·청하군을 영일군으로 통폐합할 시연일군 지역을 연일면·동해면·오천면·대송면·포항면(북면지역) 5개면으로 분면하여, 대송면을 15개동(구 연일면의 남면과 동면·서면 각 일부를 통폐합) 으로 개편. 면사무소: 남성동 1934년∼1938년 : 대송면의 면사무소가 남성(南城)동에서 괴동(槐東)등으로 이전 대한민국시대 1967년 10월10일 : 북부지역 5개리(장흥·괴동·동촌·송내·송정)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건설 1970년 6월10일 : 면사무소를 괴동 135번지에서 제내동(堤內洞)335-15번지로 이전 1973년 7월1일 : 대송면의 괴동동·장흥동·동촌동·송정동·송내동을 포항시에 편입. 관할동 10개동으로 축소됨 1987년 1월 1일 : 대송면 호동(虎洞)일원 및 송동·옥명동·제내동 각 일부가 포항시로 편입 되고 연일읍 오천동 일부를 대송면 제내동으로편입함. 관할동은 9개동 1988년 5월 7일 : 동(洞)을 리(里)로개정 1990년 4월 : 동남부지역 3개리(송동 대각 옥명)에 포항제철(주) 제2연관단지 조성 1994년 5월 24일 : 면사무소를 제내 3리 335-15번지에서 송동(松洞) 2리 790-1번지로 이전 1994년 10월 말 현재 :법정리 9리, 행정리 17리 

* 지명유래

매봉리 홍계마을 마을 뒤쪽에 응봉령이라는 높은 고개가 있는데 옛날 대홍수때 이 고개 꼭대기까지 바닷물이 차 올라 겨우 매 한마리 앉을 정도의 자리만 남았다 하여 응봉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도 이 고 개에서 바다조개 화석과 바다모래가 발견되기도 한다. 바로 이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응 봉리라고 부른다. 또, 마을 앞으로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배를 댈 정도로 넓 었다고 한다. 그래서 넓은 계곡이란 뜻으로 홍계라고 부른다. 덕동 서북쪽에는 깊은 골짜기 인 강가곡이 있는데 임진왜란때 강씨가 피난을 이곳에서 하였다고 한다. 홍계 남서쪽에는 사라 재라는 고개가 있어 경주군 강동면 왕산리로 넘어가는 길목이 된다. 창오봉 아래에는 신라 때 화랑들이 심심을 수련했다고 전해지는 용마바우, 용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높이가 90m, 둘레가 450m이며, 말처럼 생겼기에 용마바우라고 했다. 그 앞에는 장군바위, 장군암이 있는데, 큰 바위가 곧게 서있어서 마치 장수가 버티고 있는 것 같다. 홍계 마을 뒷산 기슭에는 수백년 생 소나무 당산목이 있어 매년 음력 이월 초승에 좋은 날을 택하여 골메기 할배에게 동제를 지내고 있다. 1972년 건립된 태고종인 용암사가 있다. 덕계마을 월성김씨에 의하여 개척된 마을로서 홍계 북동쪽에 있다. 용암사, 홍계폭포, 장군암, 용마암 등 암벽과 송림이 어울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신라 때 화랑들이 심신을 연마하 던 곳이라고도 한다. 덕동 입구의 큰 골짜기인 서당골 위에는 부채방우, 불암이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높이 약 300cm쯤 되는 바위가 병풍처럼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 굴이 있어 신 라 때 금부처를 모셔 두었더니 일본사람들이 훔쳐 가버렸다고 한다. 

포항시(浦項市) 동해면(東海面)
동해면 최남단에 위치하며 구룡포읍 성동리, 장기면 죽정리와 경계

◆위치 : 경북 포항시 ◆인구 : 1만 5519명(2001) ◆면적 : 43.61㎢ ◆연혁 삼한시대 : 진한(辰韓)12국중 근기국(勤耆國)의 영역 삼국시대 신라초기 : 근오지현(斤烏支縣, 또는 烏良友라고도 함)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757) 임정현(臨汀縣)으로 고치고, 의창군(義昌郡:후의 興海郡)의 영현(領縣) 고려시대 : 태조 13년(930)에 영일현(迎日縣)으로 고치고, 현종 9년(1018) 경상도(慶尙道)의 경 주대도호부(慶州大都護府)에 내속(內屬) 조선시대 : 영일현(迎日縣, 또는 연일현(延日縣)으로 경주부에 속함 1765년 : 8면(邑內·夫山·驛·古縣·南·舊邑·西·北面) 1789년 : 8면 82리(읍내면 11리, 북면 10리, 서면 6리, 구읍면 3리, 역면 2리, 남면 11리, 부산면 17리, 고현면 21리) ※ 부산면(夫山面) : 세계원(世界院), 일광(日光), 약전(藥田), 정천(亭泉), 중(中), 조사율(造士津), 임곡(林谷), 백덕(白德), 입암(立巖), 마산(馬山), 연화(蓮花), 하피곡(下波谷), 직환(稷串), 오산(오山), 대동배(大冬背), 보천(甫川), 정족(鼎足) 1832년 : 7면 78리(읍내면 16리, 북면 9리, 서면 7리, 남면13리, 고현면 13리, 부산면 18리, 역면 2리) ※ 부산면(夫山面) : 세계원(世界院), 세곡(細谷), 정천(井川), 중(中), 도구(都丘), 약전(藥田), 임곡(林谷), 백덕(白德), 입압(立岩), 마산(馬山), 상흥(上興), 하흥(下興), 피환(皮串), 여사(余仕), 정천(爭川), 대동배(大冬背), 거사(居士), 보천(甫川) 1871년 : 7면 104리(읍내면 10리, 고읍면 18리, 서면 7리, 남면 18리, 고현면 22리, 부산면 27리, 역면 2리) ※ 부산면(夫山面) : 세계(世界), 신흥(新興), 일광(日光), 도구(都丘), 입석(立石), 약전(藥田), 중(中), 염정(廉亭), 정천(亭泉), 금광(金光), 조사(造士), 저동(猪洞), 임곡(林谷), 흥덕(興德), 입암(立岩), 마산(馬山), 연화(蓮花), 상흥(上興), 하흥(下興), 직환(稷串), 오산(오山), 여사(余士), 거사(居士), 정족(鼎足), 정천(爭川), 구만(九萬), 보천(甫川) 1895년 5월 26일 : 전국 23부제(府制) 및 336군제(郡制) 실시로 영일현이 영일군(迎日郡)으로 되어 동래부(東萊府)에 속함. 8면 102리(동면, 북면, 읍내면, 서면, 남면, 고현면, 일월면, 동해면) ※ 동해면(東海面) : 도구(都邱), 입석(立石), 약전(藥田), 저동(猪洞), 조사(造士), 임곡(林谷), 흥덕(興德), 입암(立岩), 마산(馬山), 상흥(上興), 직환(稷串), 오산(오山), 여사(余士), 대동배(大冬背), 정천(爭川), 구만(九萬), 정족(鼎足) 1896년 8월 4일 : 13도제(道制)실시로 연일군(延日郡)이 경상북도의 관할이 됨 대한민국시대 1973년7월 1일 : 오천면의 일월동·금광동·신정동을 동해면에 편입 (16개 법정동, 31개 행정동) 1983년2월15일 : 동해면 일월동을 포항시에 편입 (15개 법정동, 30개 행정동) 1986년4월 1일 : 대보출장소가 대보면으로 승격될 시 동해면의 대동배동을 대보면에 편입 (14개 법정동, 28개 행정동) 1988년5월 7일 : 洞을 里로 통일 개정 1995년 6월 21일 : 동해면 금광리 일부를 장기면 정천리에 편입 2002년 7월 현재 : 14개 법정리, 28개 행정리, 면사무소 : 도구2리 648-2번지 

* 지명유래

공당리(孔堂里) 동해면 최남단에 위치하며 구룡포읍 성동리, 장기면 죽정리와 경계를 접하는 마을로 1리인 공 당, 2리인 도래말, 새태말, 안말골, 3리인 뱃돌골, 하수리 등 6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 다. 주변에 수기의 지석묘가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으며,남쪽에 옛 내북면의 이름 을 딴 내북초등학교가 있고, 학교 어귀에는 옛 숲의 흔적으로 300년생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세 그루의 노거수가 남아 있다. - 공당(孔堂) 조선 선조때의 학자 정응성(鄭應星)이 임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공맹(孔孟)의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라 하여, 혹은 지형이 구멍의 형상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오천 정씨의 세거지로 정사하(鄭師夏)와 정동환(鄭東煥)을 추모하는 북계서사(北溪書社)가 있 으며, 매년 11월초에 마을 앞 제당에서 부부 동신과 종 등 3신위를 모시고 동제를 지낸다. - 도래말[廻洞] 마을의 형세가 본동인 공당을 돌아 위치한다고 하여 불려지게 된 이름이며 창녕 이씨의 세거지 이다. -새태말 본동에 있던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 안골말 안쪽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2리에서는 매년 정월에 팽나무와 돌감나무가 있는 제당에서 동 제를 지낸다. -뱃돌골[舟石谷]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에 큰 바위가 있어 배 모양을 연상케 하므로 그렇게 불러 왔으며, 개울의 위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상수리라 부르기도 한다. - 하수리(下水里) 개울의 아래쪽에 위치하므로 아르무자골 또는 수척리라고도 불러오고 있다. 

포항시(浦項市) 연일읍
부족국가 시절에는 근기국으로 영일만 주변에 형성

◆ 위치 : 경상북도 동해안의 중앙에 있는 시. ◆면적 : 1,127.69㎢ ◆인구 : 51만 1703명(2003) ◆연혁 고려시대 -태조 13년(930)에 영일현(迎日縣 또는 延日懸)으로 개명하고, 현종 9년(1018) 경주부(慶州府) 에 내속 조선시대 - 영일현 (현감 : 종 6품), 경주부의 영현 - 1765년 : 8면(邑內·夫山·驛·古縣·南·舊邑·西北面) - 1789년 : 8면 82리(읍내면 11리, 북면 10리, 서면 6리, 구읍면 3리, 역면 2리, 남면11리, 부산면 17리, 고현면 21리) - 1832년 : 구읍면이 남면에 편입되어 7면 78리가 됨(읍내면 16리, 북면9리, 서면 7리, 남면 13리, 고현민 13리, 부산면 18리, 역면 2리) - 1871년 : 7면 104리(고읍면에 해도·상도·하도·분도·죽도등의 섬마을이 개척됨) - 1895년 5월 26일 : 영일현이 영일군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함, 8면 102리(고현면을 분면하여 일월면을 신설, 1면이 늘어남) - 1896년 8월 4일 : 13도제(道制)실시로 영일군이 연일(延日)군이 되어 경상북도 (41군)의 관할이 됨 일제강점기 - 1912년 1월 : 8면 104리(읍내면 17, 서면 8, 남면 18, 고현면 15, 일월면 12, 동해면 18, 동면 8, 북면 8), 군청 소재지 :읍내면 생지동 - 1914년 3월 1일 : 흥해·연일·장기·청하군을 영일군으로 통폐합할 시 연일군 지역을 연일면·동해면·오천면·대송면·포항면(북면 지역) 5개면으로 분면하여, 연일면을 13개동(구연일군의 읍내면과 서면 및 구 경주군 강동면 중명리를 통폐합)으로 개편, 면사무소 : 생지동 대한민국 - 1957년 10월 29일 달전면을 폐지하여 학전·달전·자명·유강동을 연일면에 편입하고, 나머지는 의창면에 편입함으로써 17개동을 관할 - 1980년 12월 1일 : 연일면이 연일읍으로 승격 - 1983년 2월 15일 : 연일읍의 대잠동·이동·지곡등·효자동·생지동 일부 오천동 일부를 포항시로 편입하여, 관할면 13개동이 됨. - 1987년 1월 1일 : 오천동 일부가 대송면 제내동으로 편입함 - 1988년 5월 7일 : 洞을 里로 개정 - 1992년 11월 12일 읍사무소를 생지리 226번지에서 괴정리 289-1번지로 신축 이전 - 1993년 7월 22일 생지리를 생지 1·2리로, 동문리를 동문 1·2리로 분리 법정리 13, 행정리 21리 관할함 - 1998년 2월 12일 생지3리 분동 법정리 13, 행정리 22리 관할함. - 2000년 10월 21일 유강3리 분동 법정리 13, 행정리 23리 관할함 - 2002년 6월현재 : 법정리 13, 행정리 23리 관할함 

* 지명유래

부족국가 시절에는 근기국으로 영일만 주변에 형성되었고, 신라초기 근오지현 또는 오천현, 오량지현으로 칭해왔다. 경덕왕16년에 임정현으로 개칭하여 의창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 해가 뜨는 곳이라 하여 영일현으로 개칭하고 현종 9년에 동경유수관의 속읍이 되었다가 공양왕 2년에 감무를 두어 관군만호와 겸했다. 조선 태종 3년에 연일현으로 개칭하 고 진을 두어 병마사와 지현사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때는 병마겸 절제사로 개칭하고 후에 현감을 두었다. 고종 건양원년에 건국의 현을 군으로 승격된 뒤에 현청이 대잠리에서 생지리로 옮겼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읍내면과 서면 북면의 일부마을을 관할하는 연일면으로 격하되었다. 4개군(장기, 연일, 흥해, 청하)의 통합으로 영일군 소재지를 생지리 에 두고 경무서(경찰서)와 독립되었다. 따라서 연일면 소재지를 택전리에 두었고 1917년 영일군청이 포항으로 이전하여 면 소재지를 생지리로 옮겨왔다. 1957년 10월 달전면이 폐지되면서 학전, 달전, 자명, 유강 4개리를 연일면에 이속되고 1980년 12월 1일자로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에 의해 효자, 지곡, 대잠, 생지, 이동, 형산강, 북쪽지역 일부의 마을이 포항시로 편입되었다. 현재 본읍은 36.01㎦로 13개법정리를 관할 하고 있다. 

포항시(浦項市) 오천읍(烏川邑) 문덕리
가마골,부곡(釜谷) 문덕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

◆위치 : 경북 포항시 남서부 ◆인구 : 3만 9369명(2001) ◆면적 : 70.50㎢ 

* 지명유래

문덕리(文德里) 가마골,부곡(釜谷) 문덕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로 지형이 마치 가마솥 같이 생겼다 하 여 가마골 혹은 부곡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하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마을 이다. 대밭 죽전(竹田) 옛날부터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마을 이름을 대밭 혹은죽전 이 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마을 곳곳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문덕.원문덕(元文德) 가마골.대밭.새터.천마산.문덕동 5개 마을을 병합하여 문덕리이라 명명하 게 되자 본래 있었던 문덕마을을 원문덕 이라 하여 법정동명 문덕리과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 다. 새터신기(新基) 가마골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불러 왔는 데 지금은 주민들이 마을을 거의 떠나고 겨우 한 가구만이 남아 옛터를 지키고 있다. 천마산(天馬山)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말의 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천마산이라 불러오고 있으 며 마을 옆에는 해군 해병사단 사격장이 있고 또, 대단위 양계장이 있는데 현재는 아파트가 신 축되어 500여세대의 가구가 입주해 생활하고 있어 발전이 기대되는 마을이다. 문덕 4리 1968년 9월 포항제철공장 부지로 편입된 부근 대송면 동촌동과 송정 송내동의 철거 주 민들의 주택단지로 조성되어 처음 300여 가구가 입주해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원래의 문덕동에 속한 자연 부락들을 행정 이동 1, 2, 3동으로 하고 이 마을을 문덕 4동이라 하게 되었다. 그 뒤 마을이 번창하여 현재 400여 가구로 주민들 대부분은 종합제철 연관단지에 종사하고 있고 마을 남쪽에는 해군 해병 하사관주택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포항시(浦項市) 오천읍(烏川邑) 항사리
안항사.내항사(內恒事) 550년 경부터 촌락으로 형성

◆위치 : 경북 포항시 남서부 ◆인구 : 3만 9369명(2001) ◆면적 : 70.50㎢ ◆연혁 삼한시대 - 진한(辰韓) 12국중 근기국(勤耆國)의 영역 삼국시대 신라초기 - 근오지현(斤烏支縣, 일명 烏良友·烏川 이라고도 함)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757) 임정현(臨汀縣), 의창군(義昌郡 : 후의 興海郡)의 영현 고려시대 - 태조 13년(930)에 영일현(迎日縣 또는 延日懸)으로 개명하고 - 현종 9년(1018) 경주부(慶州府)에 내속 조선시대 - 영일현(현감 : 종 6품), 경주부의 영현 - 1765년 : 8면(邑內·夫山·驛·古縣·南·舊邑·西·北面) - 1789년 : 8면 82 (읍내면 11리, 북면 10리, 서면 6리, 구읍면 3리, 역면 2리, 남면 11리, 부산면 17리,고현면 21리) - 1832년 : 구읍면이 남면에 편입되어 7면 78리가 됨(읍내면 16리, 북면 9리, 서면 7리, 남면 13리, 고현면 13리, 부산면 18리, 역면 2리) - 1871년 : 7면 104리(고읍면에 해도·상도·하도·분도·죽도 등의 섬마을이 개척 됨) - 1895년 5월 26일 : 영일현이 영일군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함, 8면 102리 (고현면을 분면하여 일월면을 신설, 1면이 늘어남) - 1896년 8월 4일 : 13도제(道制)실시로 영일군이 연일군이 되어 경상북도(41군)의 관할이 됨 일제강점기 1912년 1월 - 8면 104리 (읍내면 17, 서면 8, 남면 18, 고현면 15, 일월면 12, 동해면 18, 동면 8, 북면 8) - 군청소재지 : 읍내면 생지동 - 1914년 3월 1일: 흥해·연일·장기·청하군을 영일군으로 통폐합할 시 연일군 지역을 연일면·동해면·오천면·대송면·포항면(북면 지역) 5개면으로 분면하여 오천면을 16개동 (구 연일군 고현면, 일월면 구 경주군 내동면(內東面) 왕산리(旺山里)일부 리동을 통폐합으로 개편 (면사무소 : 용덕동) 대한민국시대 - 1973년 7월 1일 : 오천면의 신정동·금광동·일월동을 동해면으로 인덕동·청림동을 포항시로 편입하여 관할동이 11개동이 됨 - 1980년 12월 1일 오천읍으로 승격 - 1988년 5월 7일 : 洞을 里로 개정 - 1991년 5월 31일 : 읍사무소를 용덕리 263-1번지에서 문덕 3리 27번지로 이전 - 1994년 10월 말 : 현재 : 법정리 11리, 행정리 28리 관할 - 1995년 5월 : 포항시 · 영일군 통합 

* 지명유래

항사리(恒沙里) 안항사.내항사(內恒事) 550년 경부터 촌락으로 형성되었다 하며 본래는 영일군 고현면의 지역 으로 옛날부터 이 부근에 항사사(현 오어사)가 있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항사 라 하였다 하며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안항사라 불렀다고 한다. 항사사(恒沙寺)(현 吾魚寺) 이 절은 신라 26대 진평왕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고찰로서 처음 에는 항사사라 하였으나 문무왕때 신라 고승 원효와 혜공대사가 이 절에서 수도할때 어느 날 양 사가 누구의 법력이 더 신통한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못에 있는 생어를 잡아먹고는 한참 뒤에 고 기를 다시 뱉아 놓았는데 한 마리는 생기 있게 돌아 다니고 다른 한 마리는 죽어버렸는데 양사 가 살아 있는 고기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 후 절 이름을 오어사라 하였다고 전해 지고 있다. 바깥항사 외항사(外恒沙) 항사에서 경주로 넘어가는 대곡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바깥항 사라 부른다 하며 지금은 10여 가구의 주민이 사는 작은 촌락이다. 

하삼도(下三道) 또는 삼남(三南)지방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 지명유래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이들은 모두 궁성의 남 쪽에 위치하므로 하삼남 또는 삼남지방이라고도 하였다.

* 경상남도

거제(巨濟) 옥포(玉浦)
'우리 님 첫번 승첩이 바로 여기'

◆ 위 치 : 경남 거제시 옥포동 일원 ◆ 면 적 : 159,890평(528,562m2) ◆ 연 혁 - 거제지역은 원래 변한에 속하였다가 신라 법흥왕때는 소가야국에 들어갔으며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됨. - 677년(문무왕 17) 상군(裳郡)을 두었고, 685년(신문왕 5) 상주군(尙州)으로 고침. -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이름인 거제군으로 고침. - 983년(고려 성종 2) 기성현(岐城)으로 고치고, 둔덕에 성을 축조함. - 1018년(현종 9) 현령을 두었다가 1271년(원종 12) 왜란으로 인하여 거창 가조현에 임시로 옮김. - 그보다 앞선 1170년(목종 24) 상장군 정중부가 반란을 일으켜 국왕이 거제군의 폐왕성에 유폐됨. (둔덕면 거림리) - 1413년(조선 태종 13) 거제현으로 고쳤으며 1423년(세종 5) 고현성을 축조하고 고을을 사등성으로 옮김. - 1489년(성종 20) 거제부로 개편하고 거제의 7개 진을 통할하는 진영으로 고현에 기성관을 세움. - 1711년(숙종 37) 거제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어해정(禦海亭)을 세우고 해군을 양성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관례대로 거제군이 됨.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때 전부 통영군에 편입되었다가 1953. 1. 1 거제군으로 분리됨. - 1935. 10. 1 이운면이 장승포읍(長承浦)으로 승격됨. - 1989. 1. 1 장승포읍이 장승포시로 승격됨. - 1995. 1. 1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로 장승포시와 거제군이 통합되어 거제시가 됨

* 지명유래

- '거제(巨濟)'란 신라 경덕왕때 부터 부른 이름으로서 '클 거(巨)' 자는 거제도가 '큰 섬'임을 뜻한다. - 한편 '거제'의 '제(濟)'를 '건질 제'로 풀이하여 크게(많은 사람을) 구(救)하는 섬이라 하는데, 옛부터 '거제 계룡산하 구백만(巨濟 鷄龍山下 救百萬)'이라 전해져 왔다고 한다. - 그 예로서 첫째는 6·25 이후 거제에 수용된 10만명의 포로가 이 섬으로 와서 구제된 것이며, 둘째는 1·4 후퇴때 20만명의 피난민이 거제도로 들어와 구제되었고, 세번째는 산업화에 따라 대우조선소와 삼성중공업조선소가 거제도에 세워져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옥포동(玉浦)은 '옥개'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임진왜란때 이 충무공이 처음으로 왜적을 무찌른 곳이므로 옥포대승기념탑이 서 있고 여기 에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다. 한바다 외로운 섬 옥포야. 작은 마슬 고난의 역사위에 네 이름 빛나도다. 우리 님 첫번 승첩이 바로 여기더니라. 창파 구비 구비 나르는 저 갈매기 승전고 북소리에 상기도 춤을 추니 우리도 자손 만대에 님을 기리오리다. - '옥포대첩'은 거제라는 이름이 이미 임진왜란 때 이 나라를 또 한번 '크게 구한 곳(거제)'임을 일깨워 준다

거제(巨濟) 장승포(長承浦)
- 옛날 장승이 서 있었던 곳

◆ 위 치 :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 일원 ◆ 면 적 : 12,849평(42,476m2)

* 지명유래

- '장승포동(長承浦)'은 그전에 거제군 이운면(二運)에 속하였던 곳이며, 1914년에는 거제군 전체가 통영군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 그후 장승포지역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1936. 7. 8 이운면이 장승포읍으로 승격되었고, 1953년 거제군이 통영군에서 분리되었다. - 이곳은 그전에 장승이 서 있었던 곳이므로 '장승개'라 불렀다고 하며 '장승배기', '장선거리', '장승백' 등 장승으로 인하여 생긴 이름은 전국적으로 매우 많다

거제(巨濟) 장평(長坪)
- 원래 '고현'인데 '신현'으로 바꾼 곳

◆ 위 치 : 경남 거제시 신현읍(新縣) 장평동 일원 ◆ 면 적 : 65,799평(217,517m2)

* 지명유래

- 신현읍(新縣)은 본래 '고현읍(古縣)'으로 불러야 할 곳이었으나 인근에 남해군 고현면, 진동면 고현리 등이 있어서 1963년 '새로운 고을'이라는 뜻의 신현면이 된 곳이다. - 이 지역은 1423년(세종 5) 고현성을 축조하고 고을을 옮겨 왔으며, 임진왜란때 고현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자 거제 일운면으로 옮겼다. - 그후 1956. 7. 8 거제군청이 장승포에서 고현으로 이전하여 군청소재지가 되었다. - 장평(長坪)은 그전 거제군 일운면 지역이며 긴 들이 있으므로 한자로 풀이하여 장평이라 하였다

거제시 남부면(南部面)
경덕왕(景德王) 16年(757) 주군현(州郡縣) 개편으로 거제군(巨濟郡)

◆위치 : 경남 거제시 ◆인구 : 2,471명(2001) ◆면적 : 31.84㎢ 

* 지명유래

경덕왕(景德王) 16年(757) 주군현(州郡縣) 개편으로 거제군(巨濟郡)이라 칭하고 속현으로 송변 현(松邊縣)이 율포(栗浦)에 있었는데 그 관할이었다. 원종(元宗) 12年(1271) 왜구(倭寇)의 침범으로 거창현(居昌縣)에 속하는 가조현(加祚縣)으로 현 민(縣民) 모두가 피난갔다가 세종(世宗) 4年(1422) 옛터로 돌아왔다. 세종(世宗) 14年(1432) 면제(面制) 시행으로 동부면(東部面) 관하에 속하였다. 현종(縣宗) 5年(1664) 거제현(巨濟縣)을 서부면(西部面)으로 옮겨오고 읍내면(邑內面)이 되었 으며 서부(西部)와 동부(東部)를 관할하였다.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고다대포(古多大浦), 저구말(猪仇말), 갈곶(乫串), 망포(網浦)등 4坊이 있었다. 고종(高宗) 26年(1889) 리제(里制) 실시로 탑포(塔浦), 저구(猪仇), 다대(多大), 다포(多浦), 갈 곶(乫串)등 5里로 개칭하였다. 고종(高宗) 32年(1895) 칙령(勅令) 第98號 면리제(面里制) 개편으로 동부면(東部面)이 되고 갈 곶(乫串), 다대(多大), 다포(多浦), 저구(猪仇), 근포(芹浦), 탑포(塔浦)의 6里가 되었다. 1915年 6月 1日 도령(道令) 第20號 법정동리령(法定洞里令)으로 탑포(塔浦), 저구(猪仇), 다포 (多浦), 다대(多大), 갈곶(乫串)등 5里가 되었다. 1915年 6月 1日 조선지적령(朝鮮地籍令) 시행에 따라 일본 대마도(日本 對馬島)에서 60km 지점 (地点) 천장산(天長山) 275m에 1914年 5月 1日 경상남도(慶尙南道) 도근(圖根) 第1號의 삼각점 (三角点) 표석(標石)을 매설(埋設)하여 토지세부측량(土地細部測量)의 기점(基点)이 되었다. 1942年 5月 1日 2차대전(二次大戰)때 부락구제(部落區制) 실시로 탑포(塔浦), 쌍근(雙芹), 저구 (猪仇), 명사(明沙), 근포(芹浦), 대포(大浦), 다포(多浦), 다대(多大), 갈곶(乫串), 도장포(陶藏浦)등 5里 10부락(部落)이었으나 1969年 홍포(虹浦)와 여차(汝次)를 신설하고 1995年 1月 14日 거제시조례(巨濟市條例) 第112號로 갈곶(乫串)을 해금강(海金剛)으로 개칭하여 12個 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1958年 4月 1日 동부면(東部面)의 남부지역(南部地域) 5里 10부락(部落)을 관할하는 저구지소 (猪仇支所)를 설치하였으나 이듬해 2月 20日 출장소(出張所)를 승격하였다. 1968年 12月 31日 건설부고시(建設部告示) 第164號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에 일 운면 서이말(一運面 鼠이末), 외도(外島)와 남부면 병대도(南部面 竝대島), 명사일대(明沙一帶) 를 공원지역(公園地域)으로 지정(指定)되었다. 1971年 3月 23日 갈곶(乫串)과 갈도일대(葛島一帶) 204,000m를 명승(名勝) 第2號 거제해금강 (巨濟海金剛)으로 지정(指定)되어 기암절벽(奇岩絶壁)과 난대수림(暖帶樹林)에 해중(海中)의 수자원(水資源)등 천혜(天惠)의 관광명소(觀光名所)가 되었다. 1983年 2月 15日 대통령령(大統領令) 第11027號(1983年 1月 10日 公布)로 동부면(東部面) 저구 출장소(猪仇出張所)를 남부면(南部面)으로 승격하였다. 남부면(南部面)은 거제도(巨濟島)의 최 남단(最南端)에 위치하고 대한해협(大韓海峽)을 끼고 있는 따뜻한 남국(南國)의 식물(植物)이 자생(自生)하는 곳이라 남부면(南部面)으로 이름하였다. 

거제시 둔덕면(屯德面)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이라 칭하다

◆ 위치 : 경남 거제시 ◆ 인구 : 4,251명(2001) ◆ 면적 : 33.69㎢ ◆ 주요문화재 : 폐왕성지(경남기념물 11) 

* 지명유래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이라 칭하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2年 (983) 진주목(晋州牧)에 속하고 동 14년(同14年:995) 산남도(山南道)의 기성현(岐城縣)이라 개 칭(改稱)하여 거림리(巨林里)에 토성(土城)을 쌓고 현지(縣址)가 되었으며 현종(顯宗) 9年 (1018) 거제현(巨濟縣)으로 개칭하였다. 의종(毅宗) 24年(1170) 8月 30日 정중부(鄭仲夫)가 숭문주의에 경인난을 일으켜 그 해 10月 2日 왕이 거제도(巨濟島)로 쫓겨와 거제현(巨濟縣)에 3년간 살면서 우두봉(牛頭峯) 중허리에 견내 량을 내려보고 기성(岐城)을 쌓았으나 명종(明宗) 3年(1173) 8월에 동북면(東北面 경주:慶州) 병마사(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왕의 복위를 획책하여 경주(慶州)에 나갔다가 이의민(李義旼)에 시해되자 폐왕성(廢王城)이라 부르며 1974年 2月 16日 지방기념물(地方紀念物) 제 11호 (第11號)로 지정(指定)되었다. 원종(元宗) 12年(1271) 왜구(倭寇)의 침범으로 거제현민(巨濟縣民)은 거창현(居昌縣)의 속현 가 조현(加祚縣)으로 피난가니 거제현(巨濟縣)은 없어졌고, 세종(世宗) 4年(1422) 태평성세로 거제 현(巨濟縣)의 사등성(沙等城)으로 돌아오니 피난가지 못한 사람은 153호에 423명이였고 논과 밭은 709결(1결(結) 100짐)이었다. 세종(世宗) 14年(1432) 거제읍성(巨濟邑城)인 고현성(古縣城)을 쌓고 관하에 7면을 두었으니 둔 덕면(屯德面)이라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하였다.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제(坊里制) 실시에 따라 영등(永登), 한산도(閑山島), 하둔덕(下屯德), 산방(山芳), 거림치(巨林峙), 상둔덕(上屯德), 법동포(法東浦)의 7방(坊)을 두었다가 고종 (高宗) 26年(1889) 면리제(面里制) 개편으로 상둔(上屯), 상서(上西), 시목 ( 枾木 ), 마장(馬場),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 하둔(下屯), 적도(赤島), 술역(述亦), 신호(新湖), 영 등(永登), 어구(於九), 법동(法東), 소랑(小浪)등 15리(里)로 하고 한산면(閑山面)으로 분리하 여 산달도(山達島)를 관할 하였다. 고종(高宗) 32年 5月 26日 칙령(勅令) 제19호(第19號) 면리제(面里制) 개편으로 읍내면(邑內面) 을 서부(西部)와 동부면(東部面)으로 분리하고 서부면(西部面)에 소랑(小浪), 법동(法東), 산달 (山達)이 편입되었으며, 둔덕면(屯德面)은 옥동(玉洞), 유지(柳枝), 상서(上西), 시목(시木), 마 장(馬場),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 방하(芳下), 죽전(竹田), 하둔(下屯), 어구(於九), 녹산(鹿山), 술역(述亦), 화도(花島), 학산(鶴山)과 한산도(閑山島)를 다시 편입하여 17리 (里)가 되었다. 광무(光武) 4年(1900) 5月 16日 칙령(勅令) 제20호(第20號)로 진남군(鎭南軍) 설치에 따라 한산 면(閑山面)이 분리되었다. 1915年 6月 1日 경상남도령 제20호에 의하여 상둔(上屯), 시목( 枾木 ),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방하(芳下), 하둔(下屯), 어구(於九), 술역(述亦), 학산( 枾木 )의 9리(里)가 법 정(法定)되었다. 1942年 5月 1日 세계2차대전때 옥동(玉洞), 유지(柳枝), 상서(上西), 시목( 枾木 ), 거림(巨林), 농막(農幕), 산방(山芳), 방하(芳下), 죽전(竹田), 하둔(下屯), 어구(於九), 녹산(鹿山), 술역(述亦), 화도(花島), 학산(鶴山)의 15구제(區制)를 실시하였다. 1960年 12月 26日 제2공화국때 법정리단위 이장(里長) 직선을 하였으나 1961년 10月 1日 제3공 화국이 1개리에 2인 이상의 이장(里長)을 둘 수 있어 15개 행정리(行政里)로 환원하였으며, 현 재는 마장(馬長), 방답(芳踏), 내평(內坪), 호곡(虎谷), 아사(衙舍)가 분리되어 20개의 행정리 (行政里)이다. 둔덕면(屯德面)은 고려(高麗) 의종왕(毅宗王)이 상하(上下)에 호위군의 주둔지를 두었으므로 이름하였으며 넓은 들판에는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식량을 생산 공급하였다. 

거제시 마전동(麻田洞)
조선시대에는 거제군 이운면(二運面)이었는데,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면서 통영군에 속함

◆위치 경남 거제시 ◆인구 6,143명(2001) ◆면적 1.87㎢ ◆문화재 거제 옥녀봉 봉수대(경남기념물 129) 

* 지명유래

면적 1.87㎢, 인구 6,143명(2001)이다. 동쪽은 장승포만에 접해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서쪽은 옥녀봉(玉女峰: 555m)이 솟아 있 으며, 북쪽에는 장승포동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거제군 이운면(二運面)이었는데,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면서 통영군에 속하였 다. 1935년에 이운면이 장승포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53년에 다시 거제군에 속하게 되었다. 1989 년 1월에 장승포읍이 시(市)로 승격함에 따라 마전리가 마전동이 되었다. 1995년 1월 장승포시 와 거제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태(都農複合形態)의 거제시가 됨으로써 거제시에 속하였다. 행정동인 마전동은 법정동인 장승포동의 일부를 관할한다. 해운항만청, 여객선종합터미널, 선박출입국관리소, 장승포등대(흰색), 옥녀봉 봉수대 등이 있 고, 옥립아파트 단지가 있다. 주요 도로는 14번 국도가 거제대교를 거쳐 마전동까지 해변을 따라서 이어져 있으며, 1018번 지 방도가 지나고 있다. 부산항과의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문화재로는 거제 옥녀봉 봉수대(巨濟玉女峰烽燧臺: 경남기념물 129)가 있다. 

거제시 사등면(沙等面)
BC 94 삼한시대(三韓時代) 변한(弁韓)의 12개(個) 토후국(土侯國)중(中) 독로국

◆위치 : 경남 거제시 ◆인구 : 8,964명(2001) ◆면적 : 34.40㎢ 

* 지명유래

BC 94 삼한시대(三韓時代) 변한(弁韓)의 12개(個) 토후국(土侯國)중(中) 독로국(瀆盧國)으로 사등(沙等)에 왕도(王都)를 정하였으며 대리(大里) 뒷산에 천신제(天神祭)를 지내는 소도(蘇塗) 를 정하고 군장(君長)을 다스렸다. AD 42 가락건국(駕洛建國)으로 육가야(六伽倻)와 포상팔국(浦上八國)을 두었는데 거제(巨濟) 는 독로국(瀆盧國)이었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7年(677) 상군(裳郡)이라 하였고, 신문왕(神文王) 5年(685) 상주군 (尙州郡)이라 개칭(改稱)하고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 관하(管下) 해상방어진(海上防禦鎭) 축 성계획(築城計劃)에 따라 사등성(沙等城)을 축성(築城)하였으며 동쪽 초석(礎石)에 상주(尙州) 라 조각(彫刻)되어 있고 1974年 2月 16日 지방기념물 제9호(地方紀念物 第0號)로 지정(指定)되 었다.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으로 개칭(改稱)하여 관아지(官衙地)였으나 고려(高麗) 성종(成宗) 2年(983) 기성현(岐城縣)으로 개칭(改稱)하고 둔덕면(屯德面) 거림(巨林)에 토 성(土城)을 쌓고 현지(縣址)가 되었다. 현종(顯宗) 9年(1018) 거제현(巨濟縣)으로 개칭하였고 원종(元宗) 12年(1271) 왜구(倭寇)의 침 범으로 현민(縣民)은 모두 거창현(居昌縣)에 속하는 가조현(加祚縣)으로 피난(避難)갔다가 조 선(朝鮮) 세종(世宗) 4年(1422) 지현사(知縣事)를 파견(派遣)하고 사등성(沙等城)으로 돌아왔 다. 세종(世宗) 14年(1432) 사등성(沙等城)이 협소하여 옛날의 고정부곡(古丁部曲)에 거제읍성(巨濟邑城)을 낙성하고 현아(縣衙)를 사등(沙等)에서 고현(古縣)으로 옮기고 관하(管下)에 칠면(七面)을 두었는데 사등면(沙等面)이라 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執政)하였다.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왜성(倭城), 오양(烏壤), 가조도(加助島), 지석(支石), 사등(沙等), 두동(豆洞) 등 6방(坊)을 두었다. 고종(高宗) 26年(1889) 리제(里制) 개편으로 두동(豆洞), 사등(沙等), 성촌(城村), 장좌(將佐), 지석(支石), 사근(沙根), 청곡(靑谷), 서갈(西乫), 가조(加助), 오량(烏良), 신계(新溪), 왜성(倭城) 등 12리(里)가 되었다. 고종(高宗) 32年(1895) 5月 26日 칙령 제98호(勅令 第98號) 리제(里制) 개편으로 덕호(德湖), 신 계(新溪), 오량(烏良), 부평(富坪), 내사(內沙), 사등(沙等), 청곡(靑谷), 지석(支石), 사근(沙斤), 장좌(將佐), 사곡(沙谷), 가좌도(加佐島) 등 12리(里)로 개편되었다. 광무(光武) 4年(1900) 5月 16日 칙령 제19호(勅令 第19號) 진남군(鎭南郡) 설치(設置)로 한산면 (閑山面) 신설과 가좌도(加佐島)는 동면(東面)에 편입되었다가 융희(隆熙) 3年(1909) 3月 13日 칙령 제28호(勅令 第28號)로 용남군(龍南郡)으로 개칭하고 가조면(加助面)으로 개칭하여 독립 하였다. 1913年 사등면사무소(沙等面事務所)를 처음으로 사등(沙等)에 두었으나 1919年 지석(支石)으 로 옮겼다가 1936年 다시 성포(城浦)로 이전하였다. 1915年 6月 1日 도령 제20호(道令 第20號) 법정동리령(法定洞里令)에 의하여 사곡(沙谷), 사등 (沙等), 성포(城浦), 지석(支石), 청곡(靑谷), 오량(烏良), 덕호(德湖)등 7리(里)로 통합되었다. 1929年 4月 1日 부령 제79호(府令 第79號:1928年 12月 4日 공포(公布))로 통영군(統營郡) 가조 면(加助面)을 폐지하고 사등면(沙等面) 창호리(倉湖里)로 환원하였다. 1942年 5月 1日 2차대전(二次大戰)때 전시행정을 위하여 부락구제(部落區制)실시로 사곡(沙谷), 두동(豆洞), 성내(城內), 언양(彦陽), 대리(大里), 금포(金浦), 사근(沙斤), 지석(支石), 장 좌(將佐), 청곡(靑谷), 오량(烏良), 신계(新溪), 견내량(見乃梁), 광리(廣里), 창회(倉外), 신전 (薪田), 창촌(倉村), 실전(實田), 유교(유橋) 등 20개(個) 부락(部落)을 두었으며 광복후(光復後) 항도(項島), 청포(靑浦), 신촌(新村), 계도(鷄島), 신교(新橋), 군령포(軍令浦)를 분리하여 26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1965年 5月 30日 거제대교(巨濟大橋)를 기공하여 1971年 4月 8日 준공개통됨으로써 전하도(殿下渡) 560M의 거제도(巨濟島)는 육지(陸地)가 되었다. 1987年 10月 20日 거제군조례 제986호(巨濟郡條例 第986號:1987年 10月 12日 공포(公布))로 사 등면 가조출장소(沙等面 加助出張所)를 설치하고 창호리(倉湖里)의 8개(個) 행정리(行政里)를 관할하였다. 사등면(沙等面)은 거제도(巨濟島)의 서부(西部) 관문(關門)이고 한려수도(閑麗水道) 교통(交通)의 중심(中心)인 성포항(城浦港)이 있으며 사암(砂岩)의 사양토질(砂壤土質) 농지(農地)로 전(田)이 47%인 433㏊인바 거제시(巨濟市) 평균(平均) 35%에 비(比)하여 모래땅이 많아 사등면 (沙等面)이라 하였다. 

거제시 아주동(鴉州洞)
신라 문무왕 17년(677) 거제(巨濟)에 처음으로 상군(裳軍)

◆위치 경남 거제시 ◆인구 3,872명(2001) ◆면적 12.43㎢ ◆문화재 거제 아주동고분(경남기념물 161) 

* 지명유래

신라 문무왕 17년(677) 거제(巨濟)에 처음으로 상군(裳軍)을 두었는데 삼속현(三屬縣) 의 거로 현(居老縣)이라 하다가 경덕왕 16년(757) 거제군(巨濟郡) 아주현(鵝洲縣) 으로 개칭하고 성을 쌓았으며 감무(監務)가 다스렸으나 고려 원종 12년(1271) 왜구의 침범으로 거창현(居昌縣)의 속 현인 가조현(加祚縣)으로 현민 모두 피난 갔다가 조선 세종 4년(1422) 거제현(巨濟縣)의 옛터 로 돌아왔으며, 1989년 1월 1일 장승포시(長承浦市) 설치로 아주동(鵝洲洞)이 되었다. 세종 14年(1432) 거제현을 사등성에서 고현성으로 옮기고 관하에 7면을 두었는데 이운면(二運面)이라 개칭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하였다. 영조 45년(1769) 방리(坊里) 개펀으로 아주방(鵝洲坊)이라 하였는데 고종(高宗) 26年(1889) 상 아(上鵝)와 하아리(下鵝里)로 나뉘었으나 1915年 6月 1日 아주리(鵝洲里)로 법정(法定) 되었으 며 1942年 5月 1日 부락구제(部落區制)로 장기(場基), 탑곡(塔谷), 내곡(內谷), 용소(龍沼)의 4 구(區)를 1969年 5月 15日 거제군조례(巨濟郡條例) 제157호(第157號) 전래의 고유지명으로 바 꾸었는데 1989年 1月 1日 장승포시(長承浦市) 설치에 따라 아양리(鵝陽里)와 아주리(鵝洲里) 지 역을 아주동(鵝州洞)으로 행정동(行政洞)이 되어 관하에 6통(統)을 두었으며 아주(鵝洲)는 용소 (龍沼)의 늪에 거위가 서식하여 이름하였다. 

거제시 연초면(延草面)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의 아주현(鵝洲縣)에 속하는 죽토부곡

◆ 위치 : 경남 거제시 ◆ 인구 : 8,964명(2001) ◆ 면적 : 40.00㎢ ◆ 주요문화재 : 거제 한내리 모감주나무군(경남기념물 112) 

* 지명유래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의 아주현(鵝洲縣)에 속하는 죽토부곡(竹吐部曲)이 있었다.  원종(元宗) 12年(1271) 왜구(倭寇)의 침범(侵犯)으로 주민(住民)모두가 거창현(居昌縣)에 속하 는 가조현(加祚縣)으로 피난(疲難)갔다가 세종(世宗) 4年(1422) 태평성대(泰平聖代)로 본래의 죽토부곡(竹吐部曲)으로 돌아왔다. 세종(世綜) 14年(1432) 거제현(巨濟縣)을 사등성(沙等城)에서 고현성(古縣城)으로 옮기고 관하 (管下)에 7면(面)을 둘때 연초면(延草面)이라 하고 권농관(勸農官)이 집정(執政)하였다.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때 이물도(利勿島), 외포(外浦), 덕포(德浦), 이곡(梨谷), 문암(門岩), 명동(明洞), 한해, 오비(烏飛), 다공(茶貢), 연사(烟沙), 송정(松亭), 죽토(竹土) 등 12방(坊)이었다. 고종(高宗) 26年(1889) 리제개편(里制改編)으로 한내(汗內), 대오(大烏), 소오(小烏), 연사(烟沙), 죽토(竹土), 관암(冠岩), 죽전(竹田), 다공(茶貢), 덕치(德峙), 문암(門岩), 이목(梨木), 천 곡(泉谷), 상송(上松), 하송(下松), 명상(明上), 명하(明下), 외포(外浦), 덕상(德上), 덕하(德下) 등 19리(里)가 되었다. 고종(高宗) 32年(1895) 칙령(勅令) 제98호(第九八號)에 의하여 외포면(外浦面), 신설(新設)되 어 이물도(利勿島), 외포(外浦), 덕포리(德浦里)를 편입(編入)하고 한내(汗內), 대오(大烏), 소 오(小烏), 연사(烟沙), 죽토(竹土), 관암(冠岩), 죽전(竹田), 다공(茶貢), 덕치(德峙), 문암(門岩), 이목(梨木), 이남(梨南), 명상(明上), 명하(明下), 상송(上松), 하송(下松), 천곡(泉谷), 주 령(珠嶺)등 18리(里)로 개편하였다. 1915年 6月 1日 도령(道令) 제20호(第二十號)에 법정동리령(法定洞里令)에 의하여 한내(汗內), 오비(烏飛), 연사(烟沙), 죽토(竹土), 다공(茶貢) 덕치(德峙), 이목(梨木), 명동(明洞), 천곡(泉谷), 송정(松亭) 등 10리(里)가 되었다. 1942年 5月 1日 2차대전(二次大戰)때 부락구제(部落區制) 실시로 한내(汗內), 한곡(汗谷),  오 비(烏飛), 소오비(小烏飛), 연사(烟沙), 연중(烟中), 효촌(孝村), 임전(荏田), 죽전(竹田), 관암 (冠岩), 죽토(竹土), 다공(茶貢), 중리(中里), 덕치(德峙), 명상(明上), 명하(明下), 천곡(泉谷), 이목(梨木), 이남(梨南), 상송(上松), 하송(下松) 등 21개(個) 부락(部落)이었으나 광복이후(光復以後) 중촌(中村), 야부(冶釜), 연행(烟行), 봉송(峯松)이 분리(分離)되어 25개(個) 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1979年 이목(梨木)댐을 준공(竣工)하여 저수면적(貯水面積) 22만평에 저수량 470만 M/T으로 1 日 1만 6천 M/T을 공급하여 거제시민과 조선공단(造船工團) 용수(用水)로 충족하게 되었다. 연초면은 거제현의 동북쪽 중앙지역에 위치하여 현령(縣令)을 맞이하는 권농(勸農)의 지대(地帶)로 연초라 하였으며 또한 연사(烟沙)의 이름을 따랐다는 설도 있으며 고현(古縣)과 옥포(玉浦)의 중간지역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일진(日進) 발전(發展)하고 있다. 

거제시 일운면(一運面)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으로 개칭

◆위치 : 경남 거제시 ◆인구 : 5,589명(2001) ◆면적 : 30.40㎢ ◆문화재 : 지세포성(경남기념물 203), 구조라성(경남기념물 204) 

* 지명유래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年(757) 거제군(巨濟郡)으로 개칭하고 속현의 명진현(溟珍縣)의 관할이었다. 고려(高麗) 원종(元宗) 12年(1271) 왜구(倭寇)의 침범으로 거창현(居昌縣)에 속하는 가조현(加祚縣)으로 피난 갔다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4年(1422) 태평성대(泰平聖代)로 옛터로 돌아왔 다. 세종(世宗) 5年(1423) 사등성(沙等城)이 협소하여 거제읍성(巨濟邑城)을 옛 고정부곡(古丁部曲)에 기공하여 동(同) 14年(1432) 낙성하고 거제현(巨濟縣)을 옮겨 읍기(邑基)가 되었다. 성종(成宗) 원년(元年)(1470) 거제현(巨濟縣)에 칠진(七鎭)을 두었는데 지세포(知世浦)와 조라 (助羅)에 진(鎭)을 두고 만호병정(萬戶兵政)을 하였다. 선조(宣祖) 25年(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5月 12日 읍성(邑城)이 함락되어 현종(顯宗) 5 年(1664) 거제현아(巨濟縣衙)의 질청(秩聽)을 서부면(西部面)에 옮겨 읍내면(邑內面)이라 하고 옛 읍내(邑內)는 고현면(古縣面)이라 하였다. 영조(英祖) 45年(1769) 방리(坊里) 개편으로 고현면 일운(古縣面 一運)에 남문(南門), 서문(西門), 사동(寺洞), 문동(門洞), 삼거리(三巨里)와 지세포(知世浦), 주림포(舟林浦), 항리(項里), 왜구미(倭仇味), 망치(望峙), 양화정(楊花亭) 등 11방(坊)을 두었다. 고종(高宗) 26年(1889) 면리제(面里制) 개편으로 고현면(古縣面)을 일운(一運)과 이운면(二運面)으로 분리하였으며 장평(長坪), 연곡(淵谷), 서문(西門), 동문(東門), 용산(龍山), 문동(門洞), 삼거(三巨)와 소동(小洞), 주림(舟林), 대동(大洞), 회진(會珍), 교항(橋項), 선창(船艙), 와 현(臥峴), 미조(彌助), 왜구(倭寇), 지심도(只心島), 조라도(助羅島), 항리(項里), 망치(望峙), 양 화(楊花) 등 21리(里)로 개편하였다. 고종(高宗) 26年(1889) 11月 12日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이 구조 라(舊助羅)와 지세포(知世浦)에 117호(戶) 688名이 이주(移住)하자 1913年 처음으로 고현리 남 문(古縣里 南門)에 일운면사무소(一運面事務所)를 두었는데 1928年 지세포리(知世浦里)로 옮겼 다. 고종(高宗) 32年(1895) 5月 26日 칙령 제98호 면리제(勅令 第98號 面里制) 개편으로 미조리(彌助里)를 폐지하고 상동리(上東里)를 신설하여 21리(里)를 관할하였다. 1915年 6月 1日 경상남도령 제20호 법정동리령(慶尙南道令 제20號 法定洞里令)에 의하여 망치 (望峙), 구조라(舊助羅), 와현(臥峴), 지세포(知世浦), 소동(小洞), 옥림(玉林)과 장평(長坪), 고 현(古縣), 상동(上東), 문동(門東), 삼거(三巨)의 11리(里)로 통합(統合) 되었다. 1942年 5月 1日 2차대전(二次大戰)때 전시행정(戰時行政)을 위하여 부락구제(部落區制) 시행으 로 양화(楊花), 망치(望峙), 구조라(舊助羅), 와치(臥峙), 예구(曳龜), 선창(船艙), 교항(橋項), 회진(會珍), 대신(大新), 대동(大洞), 상촌(上村), 하촌(下村)과 와치(臥峙), 연곡(淵谷), 서문 (西門), 동문(東門), 상동(上東), 용산(龍山), 문동(門東), 삼거(三巨) 등 11리(里) 22부락(部落) 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었다. 1944年 11月 20日 고현지역(古縣地域 ) 5개리(個里) 8부락(部落)의 행정(行政)을 위하여 일운 면 고현출장소(一運面 古縣出張所)를 설치하였다. 1953年 5月 9日 UN 군(軍) 포로수용소(捕虜收容所) 지역주민(地域住民) 1,116세대(世帶)의 소 개(疎開)로 8月 23日 고현출장소(古縣出張所)를 일운면(一運面 )에 통합(統合)하였다. 1953年 7月 27日 6.25사변(事變)의 휴전협정(休戰協定)으로 소개민(疎開民)이 복귀(復歸)하자 1956年 7月 1日 고현출장소(古縣出張所)를 복귀(復歸)하였다. 1963年 1月 1日 법률 제1175호(法律 第1175號:1962年 11月 21日 공포(公布))로 신현면(新縣面) 을 설치(設置)하고 일운면(一運面 )은 6리(里) 14행정리(行政里)가 되었으나 그 후 망치(望峙) 에서 망양(望洋), 구조라(舊助羅)를 삼정(三亭)과 수정(水晶)으로 분리 개칭하고, 소동(小洞)에 서 신촌(新村)을 분리하여 모두 17행정리(行政里)가 되었다. 1987年 1月 1日 대통령령 제12007호(大統領令 第12007號:1986年 12月 23日 공포(公布))로 일운 면(一運面) 옥림리(玉林里) 중촌(中村) 1,2동(洞)(0.12㎢)을 장승포읍(長承浦邑) 장승포리(長承浦里)에 대림(大林) 1,2동(洞)으로 개칭하고 편입하였다. 일운면(一運面)은 거제도(巨濟島)를 동북과 서남으로 양분(兩分)하는 중앙지역(中央地域)이며 와치(臥峙)에서 와현(臥峴)으로 길게 뻗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의하여 일운면(一運面)이 라 하였다. 

거창(居昌) 상동(上洞)
- 상림은 궁궐의 정원을 뜻함

◆ 위 치 :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上林), 가지리(加旨) 일원 ◆ 면 적 : 86,000평(284,298m2) ◆ 연 혁 - 거창은 본래 신라의 거열군(居烈) 또는 거타군(居陀)으로서 757년(경덕왕 16) 당나라식으로 지명을 고칠때 지금의 이름인 거창으로 고침. - 1018년(고려 현종 9) 그의 생모인 헌정왕후의 친정이 합천이고,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전 대량원군(大良은 합천) 이었으므로 다른 고을들과 함께 합천에 딸림. - 1413년(조선 태종 13) 가조지방에 피난해 와 있던 거제현을 합쳐서 제창현(濟昌)이라 하다가 1432년(세종 14) 160년만에 거제도로 돌아가고 제창현이 다시 거창현이 됨. - 1495년(연산군 초) 연산군비 신씨의 관향이라 하여 거창군으로 승격되었고, 1507년 중종반종으로 신씨가 폐위되면서 현으로 낮춤. - 1658년(효종 9) 종이 주인을 죽인 변고가 일어나 안음고을에 편입되었다가 1660년(현종 원년) 다시 거창현으로 복구됨. - 1728년(영조 4) 역적 정희량의 난으로 안음현을 없애고 그 절반을 거창에 붙여 부로 승격하고 부사가 다스리다가 1736년 안음현이 설치되면서 거창현이 됨. - 1739년(영조 15) 중종왕비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키면서 다시 거창부로 승격되었다가 1788년(정조 12) 도로 거창현으로 격하됨. - 1799년(정조 23) 다시 거창부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시 거창군이 됨. -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안의군 5개면, 삼가군 2개면 등을 합하고 거창군이 됨. - 1988. 8. 1 거창읍 상동(上洞)이 상림리(上林)로 고쳐짐

* 지명유래

- 거창(居昌)의 옛 이름 '거열(居烈)'은 의 표기이고 '거창'은 거열의 r이 s음화한 또는 의 표기로서 큰 고을, 큰 벌, 도읍지를 뜻하는 이름으로 보고 있다. - 여기서, '거(居)'는 '크다'는 뜻의 음차로 볼 수 있고, '열(列, 烈)'은 벌판을 뜻하는 것으로서 '큰 터'로 풀이된다. 8) - 한편 거창을 '크고 밝은 들판'으로 풀이하는데 거타=큰 터, 거열 등과 같은 뜻으로 본다. - 상동(上洞)은 1988. 8. 1 상림리로 바뀌었는데 '상림'은 주로 궁궐의 숲, 정원을 뜻하는 용어이기는 하나 상동→상림으로 바뀐 내력을 알 수 없다. - 상동은 우리 말의 '윗골'을 뜻하는 이름으로 보이며, 상림은 진시황이 아방궁을 지었던 곳이기도 하고, 창덕궁 밖의 임금 정원을 뜻하기도 한다. - 가지리는 그전 거창군 갈지면 소재지이므로 '가지리'가 된 곳이며 가을지라고도 하는 곳인데, 그 이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경상도(慶尙道)
‘경상’이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 지명유래

‘경상’이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1106년(고려 예종 원 년) 경상진주도라고 할 때 처음 ‘경상’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동남도, 영남도, 산남도, 경상 진주도 등으로 불렀으며, 1314년(충숙왕 원년) 경상도로 되었고, 1407년(조선 태종 7) 좌, 우도 로 나누었는데, 낙동강 동쪽을 좌도, 서쪽을 우도라 하였다. 관찰사는 대구에 주재하였으며, 그 감영을 영영(嶺營), 감사를 영백(嶺伯)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영’은 지금 영남의 ‘영(嶺)’ 과 같이 고개를 뜻하는 이름이다. 

김해(金海) 내동(內洞)
- 남·녀가 혼인하여 내외되는 것과 같다

◆ 위 치 : 경남 김해시 내동, 외동(外) 일원 ◆ 면 적 : 232,287평(767,891m2) ◆ 사업기간 : 82. 9. 15 지구지정, 83. 12. 17 착공, 87. 12. 29 준공 ◆ 연 혁 - 김해지방은 원래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워 가야국(伽倻) 혹은 금관국(金官)이라 부르던 곳임. - 491년 가야국 10대 구해왕(양왕)까지 491년간 존속하다가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이 됨. - 680년(문무왕 20) 금관군을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고침. -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이름인 김해로 바꾸어 김해소경을 둠. - 940년(고려 태조 33) 김해도호부로 하였다가 임해현(臨海)으로 강등됨. - 그후 곧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995년(성종 14) 금주(金州) 도호부로 고침. - 1012년(현종 3) 방어사로 강등되었다가 1270년(원종 11) 방어사 김훤 이 밀성의 난 평정과 삼별초의 난을 막아서 공을 세웠으므로 김녕(金寧) 도호부로 승격함. - 1276년(충렬왕 2) 안렴사 유호를 죽였으므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 금주목이 됨. - 1310년(충선왕 2) 모든 목을 없앨 때 도호부로 고치고 1413년(조선 태종 13) 그대로 도호부로 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군이 됨. - 1931. 11. 1 김해면이 읍으로 승격됨. - 1981. 7. 1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고 잔여지는 김해군이 됨. - 1995. 5. 10 김해시와 김해군이 통합되어 김해시가 됨

* 지명유래

- '김해(金海)'는 글자 그대로'쇠바다'요, 금주(金州), 금녕(金寧)은 '쇠고을'을 뜻하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삼한시대부터 쇠의 주산지로서 낙랑, 대방, 일본과의 무역중계지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1설로 통하고 있다. - 다른 설은 김수로왕이 금란(金卵)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을 김씨로 하고 나라를 뒤에 금관국이라 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 국어학적으로는 '김해'라는 이름이 군(君), 신(神), 상(上)을 뜻하는 Koma에서 온 말로 보고 있으며, '고마', 왕검의 '검', 이사금의 '금'과 같은 계열어로 본다. - 김해시 내동(內)과 외동(外)은 행정구역상 김해시 내외동(內外)에 속하는 법정동 들이다. - 내동은 내리(內里)라고 불렀고 마을이 안쪽에 있기 때문이며, 외동은 그 반대가 되는데 그전 김해군 우부면에 속하였던 곳이다. - 외동에 있는 임호산(林虎山)은 일명 유민산(流民山), 악산(惡山), 안민산(安民山)이라고도 하며 그 전설이 있다. - 옛날 가락국의 여의낭자가 정혼한 황세장군을 가락국왕이 그의 딸 유민공주와 혼인시키니 여의낭자는 굶어 죽고 말았다. - 이에 황세장군도 여의낭자를 따라서 죽자 유민공주가 이 산에 들어와 수도하였으므로 유민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 한편 산이 호랑이처럼 생겨서 임호산이라 하고 그 벌린 입이 너무 악하므로 악산이라 하는데 가락국 장유화상이 그 악귀를 없애기 위해 절을 지어 백성을 편안케 하였으므로 안민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 내동과 외동은 행정동인 '내외동(內外)'

녹산(菉山) 주택·공업단지
- 가락국 김수로왕비의 발길이 닿은 곳

◆ 위 치 : (주택)경남 진해시 용원동(龍院) 일원 (공업)부산 광역시 강서구 송정동(松亭) 일원 ◆ 면 적 : (주)505,826평(1,672,152m2) (공)2,105,625평(6,960,744m2) ◆ 연 혁 - 녹산이 속했던 김해지방은 원래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워 가락국(駕洛國) 또는 가야국(伽倻) 혹은 금관국(金官)이라 부르던 곳임. - 491년 가야국 10대 구해왕(양왕)까지 491년간 존속하다가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이 됨. - 680년(문무왕 20) 금관군을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고침. -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이름인 김해로 바꾸어 김해소경을 둠. -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도호부로 하였다가 임해현(臨海)으로 강등됨 - 그후 곧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995년(성종 14) 금주(金州) 도호부로 고침. - 1012년(현종 3) 방어사로 강등되었다가 1270년(원종 11) 방어사 김휜 이 밀성의 난 평정과 삼별초의 난을 막아서 공을 세웠으므로 김녕(金寧) 도호부로 승격함. - 1276년(충렬왕 2) 안렴사 유호를 죽였으므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1308년(충혈왕 34) 금주목이 됨. - 1310년(충선왕 2) 모든 목을 없앨 때 도호부로 고치고 1413년(조선 태종 13) 그대로 도호부로 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군이 됨. - 강서구 지역은 김해군 대저면과 녹산면을 흡수하여 신설된 구로서 1989. 1. 1 강서구를 신설하고 김해시 대저동(당시는 북구)과 김해군 녹산면(菉山)을 편입함. - 1995. 3. 1 진해시 용원동 일부지역을 강서구에 편입함. - 송정동은 강서구 녹산동(동사무소)에 속한 법정동임

* 지명유래

- '김해(金海)'는 글자대로라면 '쇠바다'요, 금주(金州), 금녕(金寧)은 '쇠고을'을 뜻하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삼한시대부터 쇠의 주산지로서 낙랑, 대방, 일본과의 무역중계지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 1설로 통하고 있다. - 다른 설은 김수로왕이 금란(金卵)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을 김씨로 하고 나라를 뒤에 금관국이라 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 국어학적으로는 '김해'라는 이름이 군(君), 신(神), 상(上)을 뜻하는 Koma에서 온 말로 보고 있으며, '고마', 왕검의 '검', 이사금의 '금'과 같은 계열어로 본다. 3) - 녹산(菉山)은 그전 김해군 녹산면이었으며, 그 이름에 대하여는 이곳 산에 작물인 녹두가 잘 되었기 때문에라는 설과, 산이 녹두콩처럼 보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 용원동(龍院)은 그전에 의창군 웅동면에 속하였던 곳이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용재리(龍在), 원리(院里) 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용원리가 된 곳이다. - 이곳에 수로왕비 허씨부인이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돌배를 타고 와 엎어 놓은 것이라는 쪽박섬과 망상도 등이 있고 그외에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 송정동(松亭)은 그전 김해군 녹산면에 속하였던 곳으로서 그전에 장이 섰던 곳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송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산시 구산면(龜山面)
- 구산면은 신라때 성법부곡이라 불렀으며, 고려에 와서 구산현으로 승격하였다.

◆ 위치 : 경남 마산시 ◆ 인구 : 6,315명(2001) ◆ 면적 : 43.24㎢ 

* 지명유래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산세가 대체적으로 거북이 같은 형태를 하고 흡사 거북이가 바다에 들어가 는 형국이므로 거북이 구, 뫼 산이라 이름 지어졌다. 그 뒤 웅신현 웅천에 영속되었고 다시 금주에 이관되고 뒤에 칠원현에 편입 되었다. 조선 고종 32년(1895년) 칠원군 구산면이라 칭하였으나, 1908년 칙령 제69호로 창원군에 편입되 었다가 1910년 다시 마산부에 편입되고 1914년 다시 창원군에 이속되었다 1973년 군면폐합시 대통령령 제6542호로 예곡, 우산, 현동, 덕동 4개리를 마산시에 분할하고 수 정, 유산, 마전, 석곡, 옥계, 반동, 구복, 심리, 남포, 내포등의 10개리를 관할에 두었다. 1995년 1 월 1일 시군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산시 내서읍(內西邑)
- 마산시 북쪽에 위치한다.

◆위치 : 경남 마산시 ◆인구 : 4만 9001명(2001) ◆면적 : 55.34㎢ ◆문화재 : 마산 호계리 공룡발자국화석(경남기념물 170) 

* 지명유래

 내서읍은 고종 32년 창원군에 소속되었으며, 1910년 마산부에 예속되었다가 1914년 다시 창원 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외서면 구역인 회원, 교방, 산호 등 5개 리와 함안군 산인면 일부가 병합되어 19개의 리로 되었다. 1943년 10월 1일 부로 양덕, 산호, 교방, 회원, 석전리가 다시 마산부로 편입되어 나갔고 1973년 7월 1일자로 다시 구암, 회원, 합성, 두척 등 4개 리가 마산시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폐합에 따라 창원군이 폐지되면서 중리, 평성, 호계, 용담, 상곡, 원계, 삼계, 신감, 감천 등 10개 리의 내서면이 마산시에 통합되었고, 1995년 3월 1일자로 읍으로 승격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산시 진동면(鎭東面)
- 경상남도 마산시에 있는 면.

◆위치 : 경남 마산시 ◆인구 : 1만 188명(2001) ◆면적 : 32.18㎢ ◆문화재 : - 진해현관아 및 관사유지(경남유형문화재 244) - 고현리 공룡발자국화석(경남기념물 105) - 마산 가을포봉수대(경남기념물 169) - 제말장군의 묘(경남문화재자료 226) 

* 지명유래

鎭東面(진동면) 은 조선시대 러시아가 현재의 마산을 租借(조차)해서 해군 극동함대 기지로 사 용할 시점에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길목을 잡기 위해 군항지를 진동(당시 : 진해만)에서 웅천 (現 진해)으로 옮긴 후, 당시 鎭海縣(진해현) 관할의 동면, 북면, 서면 중 동면을 "鎭東" (진동)으 로 이름지어 선포함에 따라 "鎭東" (진동)이라고 불리워지게 됐다. 이후, 鎭東面(진동면)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산면과 진북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昌原府(창원부)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창원부의 승격으로 의창군에 통합된 후, 1995년 1월 1 일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산 신평(新平)·장림(長林)공업단지
- 모래구찌에 새로 들어선 공업단지

◆ 위 치 : 부산광역시 사하구(沙下) 신평동, 장림동 일원 ◆ 면 적 : 282,636평(934,334m2)

* 지명유래

- 사하구 신평동(新平)은 망끼, 또는 망후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동래군 사하면에 속한 곳이며 '모래구찌'라고 부르던 곳에 새로 된 마을이므로 신평이라 하였다. - '망끼', '망후'라는 이름은 이 일대가 다대포 수군 첨사 진영이 있던 곳으로서 적의 배를 감시하고 망보던 곳이므로 망끼, 망후라 불렀던 것 같다. - 장림동(長林)은 밧장림(외장림)과 안장림(내장림)으로 되어 있었고 장림포라 불렀던 곳인데 긴 숲을 뜻하는 '장림'에 대해서는 그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 - 생각컨대 '장림'은 해안가에 방풍림으로 길게 조성된 숲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신평'은 모래구찌에 새로 들어선 공업단지를 예견한 것 같다

부산(釜山) 과학 지방산업단지
- '지혜있는 선비' 뜻하는 곳에 과학단지 들어선다

◆ 위 치 : 부산광역시 강서구(江西) 지사동(智士) 일원 ◆ 면 적 : 976,673평(3,228,671m2)

* 지명유래

- 강서구(江西)는 1989년 1월 김해군 가락면과 녹산면, 의창군 천가면을 편입하면서 구로 승격된 곳이다. - 이 지역은 우리나라 최대의 삼각주 평야지대로서 낙동강의 서쪽이 되므로 강서구(江西)라 하였으며 김해국제공항도 강서구에 있다. - 지사동(智士)은 그전 김해군 태야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의 일제 지명개편 이전부터 '지사(智士)'라고 불러왔으나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 다만 지사(智士)란 지혜있는 선비를 뜻하는데, 이곳에 과학지방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우수한 인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므로 옛 이름이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알 수 있다

부산(釜山) 다대(多大)
- '다대'는 「다다익선(多多益善)」과 같은 뜻

◆ 위 치 : (1)부산 광역시 사하구(沙下) 다대동 일원 (2) 상동 ◆ 면 적 : (1)104,542평(345,593m2) (2)38,313평(126,655m2) ◆ 연 혁 - 부산지방은 삼한시대에 변한 12국중 독로국(瀆盧國)에 속하였던 곳으로 보며, 이에대하여 『삼국사기』등은 동래지역에 거칠산국(居漆山國), 혹은 장산국 또는 내산국(萊山國)이 있었떤 것으로 보기도 함. - 신라 지증왕때 병합되고 거칠산국이 됨. - 757년(경덕왕 16) 신라에서 당나라식으로 지명을 고칠 때 거칠산국은 동래군(東萊)으로 대증현(大甑)은 동평현(東平)이 됨. - 1018년(고려 현종 9) 울주(울산)에 붙였다가 뒤에 현령을 두었고, 같은 현종 12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망미동 부근에서 동래지역으로 고을을 옮김. - 또 이때에 지금의 '부산(釜山)'이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부산부곡(富山部曲), 형변부곡, 생천향 등의 이름이 보임. - 조선시대에 들어와 부산항 일대를 부산포(釜山浦)라 하였고, 동래도호부 관할에 들어감. - 1397(태조 6) 동래가 일본과 마주 대하는 국방의 요새이므로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가 고을을 겸하여 다스림. - 1592년 임진왜란때 적이 맨먼저 공략한 곳이므로 현으로 낮추어졌으나 구원병으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들의 접대를 위해 도호부로 승격시켜 당상관(堂上官)의 부사를 둠. - 이보다 앞서서 조선 태종때 울산 개운포로 옮겨갔던 경상좌수영을 선조때 동래 남촌(南村)으로 옮기고, 인조때 다시 감만이포로 옮김. - 경상좌수영 밑에 10여개의 수군만호영이 있었는데, 다대포가 수군 첨사영으로 승격됨. - 1690년(숙종 16) 부사가 방어사를 겸임케 하다가 곧 방어사를 폐지하였고, 영조때(1739년)는 동래부사가 금정산성 수성장을 겸임함. - 1876년(고종 3) 수치스런 강화조약이 맺어지고, 이듬해 조일수호조규 부록으로 부산구(釜山區) 조계조약(租界條約)이 맺어짐에 따라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조차지(租借地)라는 명목으로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를 정하고 동리 이름을 제 멋대로 붙이기 시작함. - 1895년(고종 32) 동래부가 되었고, 1896년 동래부를 부산부로 고쳤으며 경상남도 관할이 됨. - 1914년, 1936, 1942년의 부산지역 확장으로 서면, 사하면(沙下面), 동래읍, 남면등을 병합함. - 1950. 6. 25 북한군의 남침으로 부산이 임시 대한민국 수도가 되었으며 8. 18 정부가 부산으로 내려옴. 

* 지명유래

- '부산(釜山)'은 '부산(富山)'으로도 썼으므로 釜山=富山이 되는데 이를 중세국어로 비교해 보면 가마뫼=가멸뫼가 되어 같은 소리체계임을 알수 있다. - 곧 부(釜)=가마솥이며, 부(富)는 그 훈이 '가멸'이기 때문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동래군 산천조에는 "부산이라는 이름이 동평현에 있는데 산이 가마솥모양으로 생겨서 그 아래를 부산포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따라서 '부산'은 좌천동 뒤 시루산으로 알려진 증산(甑山)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며 시루=가마솥을 동일하게 보기도 한다. - 한편 옛 이름인 거칠산(居漆山)→동래(東萊)에 있어서 동(東) : kasi, 래(萊):거츨로서 '동래'는 kasi의 중복표기로 보았고, 거칠산과 현존하는 황령산(荒嶺山)의 '황(荒)'도 '거칠다'는 뜻이므로 같은 이름을 나타내고 있는데 kasi는 長, 王으로서 부족국가의 도읍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1) - 사하(沙下)와 사상(沙上)이라는 부산의 구(區)이름은 그전 부산시 서구에 속한 지역으로서 낙동강 하구의 광대한 모래밭으로 인하여 그 상단은 동래부 사상면, 하단을 사하면이라 하다가 뒤에 부산시의 구로 승격된 것이다. 그러나 모래위에 세운 건물을 '사상누각(沙上 樓閣)'이라 하므로 기초가 약하거나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데 더 좋은 행정구역 명칭으로 다시 검토를 해야 할 것이다. - 다대(多大)는 글자풀이만으로도 '많고 크다'는 뜻이니 좋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이 『삼국사기』에는 '답달(沓達)'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이 다다라(多多羅), 다다량(多多良), 다대(多大)로 변천해 왔다. - 이 명칭은 '답(沓)'이 이두식 표기에서 '거듭'을 나타내고, '달(達)'은 '이르다' '나타내다' '뛰어나다'는 뜻이므로 국방의 요충지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대포는 당시 수군첨절제사가 배치된 해안방어의 변경 요새지임) - '다대'는 사업지구 명칭으로서도 나무랄데 없는(뜻이나 어감상) 좋은 이름으로서 되풀이 설명하자면 '다다익선(多多益善)'과 통하는 이름이다

부산(釜山) 만덕(萬德)
- '만덕'은 이 세상의 온갖 덕을 망라한 것

◆ 위 치 : (1)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일원 (2)상동 ◆ 면 적 : (1)167,969편(555,269m2) (2)74,052평(244,800m2)

* 지명유래

- '만덕동(萬德)'은 본래 동래군 사상면의 지역으로서 그전에 만덕사라는 절이 있어서 만덕골이라 부르던 곳이다. - 만덕동은 1896년 지방관제 개혁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동래군 좌이면(뒤에 구포읍)에 포함되었고, 1963년 부산시 부산진구에 편입되었다가 1978년 북구에 편입된 곳이다. - '만덕(萬德)'은 이 세상의 온갖 덕(德)을 망라하여 '만덕'이라 부르며, 불가의 현세구복적 명칭으로 볼 수 있다. - 사업지구 명칭으로서 '만덕'이라는 이름은 그 뜻이 좋은 이름이다

부산(釜山) 모라(毛羅)
- 옛 말 에서 파생된 이름

◆ 위 치 : 부산광역시 사상구(沙上) 모라동,덕포동(德浦) 일원 ◆ 면 적 : 206,365평(682,198m2)

* 지명유래

- 모라동(毛羅)은 그전 동래군 사상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모라리'라고 부르게 된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 - 우리의 옛말에서 은 높다거나 크거나 으뜸을 나타냈으며 여기서 비롯되어 마루=宗, 머리=首, 마루=山, 마립간(임금), (막리지)등으로 사용되었다. 2) - 이곳 '모로동' 역시 '모로'가 마루>모로로 변하여 산골을 뜻하거나, 또는 모래가 많은 곳이므로 모래>몰>모로로 변하였을 수도 있다

부산(釜山) 안락(安樂)
- 이름 그대로 편안하고 살기 좋은 곳

◆ 위 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東萊) 안락동, 명장동(鳴藏) 일원 ◆ 면 적 : 35,142평(116,172m2)

* 지명유래

- '안락(安樂)'이라는 이름은 '편안하고 즐거움'을 뜻하기도 하고 극락정토를 뜻하기도 한다. 또 '안빈낙도(安貧樂道)'라 하여 가난한 생활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을 지니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줄여서 '안빈'이라고도 한다. - 이곳에 임진왜란때 왜적과 사우다가 장열하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비롯하여 부산진첨사 정발(鄭撥)의 두 장군과 윤흥신(尹興信), 조영규(趙英圭)등 여러 장수 및 열녀 김씨 등을 모신 안락서원이 있어서 안락동이라 하였다. - 안락서원은 충렬사(忠烈祠)라 부르며 '안락'이란 순절한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이름이다. - '안락'이라는 이름은 택지개발 사업지구 명칭으로도 잘 어울리는 이름으로서 「편안하고 즐거운 곳」 (살기좋은 곳)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 명장동(鳴藏)은 동 이름의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 글 뜻은 '울음을 감춘다'는 뜻이지만 그 내력이 전해지지 않는다. '명장(鳴將)'이라 하여 수탉이 홰를 쳐서 새벽을 알리고 , 무리를 모으는 것을 뜻하는데 그 '명장'의 글자가 바뀐 것인지 알 수 없다

부산(釜山) 주례(周禮)
- 농업 공동체인 '두레'를 한문표기한 것

◆ 위 치 : 부산광역시 사상구(沙上) 주례동 일원 ◆ 면 적 : 72,331평(239,111m2)

* 지명유래

- 주례동(周禮)은 그전 동래군 사상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두레'라고 부르던 곳이며, 이를 한자를 차자(借字)하여 '주례'라고 표기한 것이다. - 한편 『주례(周禮)』는 주나라 때 주공(周公) 단(旦)이 지었다고 전하는 책으로서 주대의 예를 기록하였다. - 여기에는 천관(天官:이조), 지관(地官:호조), 춘관(春官:예조), 하관(夏官:병조), 추관(秋官:형조), 동관(冬管:공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분(이·호·예·병·형·공조의 6조)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 한편 '두레'는 농촌에서 일손을 구하기 어려울 때 마을 주민들이 서로 협력하여 농사를 짓는 공동 작업체를 뜻한다

부산(釜山) 화명(華明)
- '화명'은 빛이 밝은 곳을 뜻하기도 함

◆ 위 치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일원 ◆ 면 적 : 24,395평(80,645m2)

* 지명유래

- 화명동(華明)은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합때 새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 출처가 확실하지 않다. - 당시 화잠(華岑)이란 마을을 비롯하여 수정동, 대천동, 용당동 등을 합하였는데 '화'를 '화잠'에서 취하고 '명(明)'은 아화(雅化)하기 위하여 그냥 붙였던 것 같다. - '화(華)'는 일월광화(日月光華)라 하여 빛, 색채, 광택을 뜻하기도 하므로 "빛이 밝은 곳"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 원래 동래군 좌이면에 속하였고, 뒤에 구포읍이 되었으며, 1978년 북구에 편입된 지역이다

양남(兩南)지방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영남(嶺南)
경상도의 별칭으로 교남(嶠南)이라고도 불렀다.



* 지명유래

경상도의 별칭으로 교남(嶠南)이라고도 불렀다. 영남의 ‘영’은 고개를 뜻하며 조령(鳥嶺), 죽령 (竹嶺), 추풍령(秋風嶺) 등의 고개가 그 경계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고개 중에서도 대표적인 고개가 조령(제 1관문 - 제 3관문이 있음)이 되므로 조령이남을 영남이라 한다. 교남은 영남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영호남(嶺湖南)지방
영호남(嶺湖南)지방 :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울산(蔚山) 구영(九英)
- 신라때 병영이 있었던 구영터(舊)

◆ 위 치 :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凡西) 구영리 일원 ◆ 면 적 : 218,000평(720,661m2)

* 지명유래

- 범서면(凡西)은 울산의 모태가 되는 옛 굴아화현이 이곳 굴화리(屈火)에 있었으며 옛 이름 '굴아화(屈阿火)는 '가라벌'로서 kara- 의 표기로 보는데, 이는 큰 고을, 큰 성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6) - 한편 '굴아화'를 '태화강이 굽이치는 벌'로 풀이하기도 한다. - 구영리(九英)는 이곳에 신라때 굴화현의 병영(兵營)이 있어서 '구영(舊營)'이라 하다가 1914년 이후 쉬운 글자로 고치고 아화(雅化)하여 구영리(九英)가 되었다고 한다

울산(蔚山) 복산(福山)
- 마을 서쪽에 복천이 흐른다

◆ 위 치 : 울산광역시 중구 복산동 일원 ◆ 면 적 : 80,449평(265,947m2)

* 지명유래

- 복산동(福山)은 그전 울주군 상부면에 속하였던 곳으로서 마을의 서쪽에 복천(福川)이 흐르므로 복산동이라 하였다. - 한편 복산동의 계변고개, 개뱅이고개는 울산의 옛 이름인 '계변성(戒邊城)'이라는 이름이 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본다. - '복산'은 복이 산처럼 쌓이는 곳으로 풀이할 수 있으니 집터나 마을이름으로 선호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울산(蔚山) 삼호(三湖)
- 신라말 경순왕의 발걸음이 멈춘 곳

◆ 위 치 : 울산광역시 남구 무거동(無去), 옥동(玉) 일원 ◆ 면 적 : (1)162,527평(537,279m2) (2)67,663평(223,679m2)

* 지명유래

- 무거동(無去)은 그전 울주군 범서면 지역이었으며 여기에 신라 경순왕의 망국의 전설이 남아있다. - 신라 경순왕이 나라의 운이 이미 다한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버티다가는 백성을 다 죽일 터이니 왕건(王建)에게 투항함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자는, 나라의 운명은 하늘에 달렸는데, 어찌 열성조가 이뤄 놓은 천년 사직을 그냥 넘길 수 있으며, 부왕께서는 망국의 왕이 되려 하느냐 하고, 신라의 국운을 바로잡기를 주장했다. - 왕은 이 말을 듣지 않다가 영취산의 문수보살을 만나 계시를 받기로 하고, 먼저 울산의 태화사에 가서 참배한 후 영취산으로 가는 도중에 한 동자중을 만났다. 동자중이,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인도하기 위하여 왔읍니다'라고 하므로, 왕은 매우 반갑게 여기며 그를 따라 갔었다. 삼호에 이르러 태화강을 건너자 몇 걸음 걷더니, 동자중의 하는 말이, '더 이상 가실 필요가 없읍니다'하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 왕은 그가 바로 문수보살임을 깨닫고 '하늘이 이미 과인을 버렸으니 어쩔 수 없도다'하며 크게 세 번 탄식하였다. 경순왕은 혹시 가까이에 문수보살이 숨지 않았나 싶어 그를 세 번 불러 보았으나, 허사였으므로, 체념하고 곧 환궁하여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 말았다. - 이런 전설에 따라, 동자중이 간 곳 없이 사라졌으므로 '무거(無去)'라고 하였다 하며, 왕이 문수보살을 세 번 불러 본 자리를 '삼호(三呼)', 왕이 크게 세 번 탄식한 자리를 '삼탄(三嘆)', 왕의 일행이 길을 가다가 말을 멈춘 자리를 '말정', 왕이 '이젠 할 수 없다'고 체념한 자리를 '헐수정'이라 했다고 한다. - 그 후 변하여 지금은 삼호(三呼)가 삼호(三湖)로, 삼탄(三嘆)이 삼탄(三灘)으로 되었고, 헐수정이 세워졌던 자리는 지금의 신복마을 남쪽이라고 전한다. 4) - 삼호(三湖)는 무거동의 태화강가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 태화강에 큰 물이 질때마다 사호(沙湖:큰 웅덩이)가 생겨서 호수가 형성되므로 삼호라 하였다고 한다

울산(蔚山) 옥동(玉洞)
- 옛날 옥을 캐내서 옥터라 부른 곳

◆ 위 치 : 울산광역시 남구 옥동, 신정동(新亭) 일원 ◆ 면 적 : 52,703평(174,225m2) ◆ 연 혁 - 울산지방은 본래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신라가 파사왕때 이 지역을 점령하여 굴아화현을 둠. - 757년(경덕왕 16) 하곡(河曲) 또는 하서(河西)로 고치고 임관에 딸린 현이 됨. - 940년(고려 태조 23) 이 고을 사람 박윤웅이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두 현을 병합하여 흥례부(興禮府)로 승격됨. - 그후 공화현(恭化)으로 강등되었다가 지울주사(知蔚州事)가 됨. - 1018년(현종 9) 방어사를 두고 별호를 학성(鶴城)이라고도 하고 계변성(戒邊城)이라고도 함. - 1397년(조선 태조 6) 진을 두어 병마사가 고을을 겸하여 다스리게 함. - 1413년(태종 13) 진을 없애고 지금의 이름인 울산으로 고쳐서 군이 됨. - 1415년(태종 15) 고을을 계변성 북쪽 5리에 옮기고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영이 됨. - 1426년(세종 8) 다시 고을을 영서쪽 7리에 옮겼으며 그후 다시 병마첨절제사가 군을 다스리게 함. - 1437년(세종 19)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낮춤. - 1599년(선조 32) 체찰사 이덕형이 임진왜란때 이 고을 사람들의 공이 많다고 글을 올려 조정에서 도호부로 올림.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군이 됨. - 1914. 4. 1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언양군이 합병됨. - 1931. 11. 1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됨. - 1962. 6. 1 울산읍이 울산시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울주군이 됨. - 1985. 7. 15 울산시에 중구, 남구를 설치함. - 1988. 1. 1 울산시에 동구를 설치함. - 1995. 1. 1 울산시와 울산군(그전 울주군)이 병합되어 울산시가 됨. - 1997. 7. 15 울산시가 울산광역시로 승격되고 1개군 4개구로 됨

* 지명유래

- 울주, 울산의 '울(蔚)'자는 울산지방에 있었던 옛나라 우시산국(于尸山國)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 고어 표기에 있어서 '우시산'은 우(于)+시(尸)+산(山)인데 '시(尸)'는 'ㄹ' 발음을 적기 위한 표기이므로 '우+ㄹ=울'이 되기 때문이다. - 여기에 고을의 장래가 울흥(蔚興)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서 울산, 울주라 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 남구의 옥동(玉)은 울산군 내현면의 지역으로서 그전에 옥을 캐냈던 옥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신정동(新亭)도 그전 울산군 내현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때 신흥(新興), 소정(蘇亭) 등의 여러 마을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신정동이라 하였다

울산(蔚山) 태화(太和)
- 천하가 태평하고 화목하다는 뜻

◆ 위 치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다운동(茶雲) 일원 ◆ 면 적 : 174,839평(577,980m2)

* 지명유래

- 중구 태화동(太和)은 울주군 상부면의 지역으로서 이곳에 태화루(太和樓)가 있었기 때문이며, 울산의 태화강이나 태화교, 태화루 등의 이름은 신라때 이곳에 태화사(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 태화사는 신라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아들 김선종(金善宗)의 법명(法名)인데, 그의 어머니가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가슴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 탄신일인 4월 초파일에 낳았다 한다. - 일찌기 양친을 여의고 수도에 전념하고 있는데, 나라에서 높은 벼슬자리에 앉히려고 임금이 여러 번 불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아니하였다. - 왕은 도저히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짐작하고 불가(佛家)의 귀의를 윤허했다. 그 때부터 불교 중흥에 힘을 기울여 여러 곳에 절을 세웠는데, 신불산(神佛山:상북면 등억리) 기슭에 간월사를 창건하였다.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 당나라에 들어가 8년간 수도하였다. - 그가 어느날 당나라의 태화지(太和池) 가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알과 불아(佛牙) 및 홍가사(紅架裟)를 주면서 해동 신라국으로 돌아가거든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라고 당부하였다 한다. - 자장이 당부를 받고 떠나오려는데, 태화지에 살고 있는 용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해동 신라국에는 나의 작은 아들이 살고 있으니, 자기 아들의 식복(食福)을 빌어 주는 절을 세워 달라고 간청하였다. - 신라로 돌아온 그는 문수보살과 태화지의 용의 소원대로 여러 사찰을 세워 신라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양산 통도사와 황룡사 탑, 울산 태화사를 세웠다. - 문수보살이 준 석가모니 진신사리 100알을 나누어 황룡사 탑과 울산 태화사 부도, 양산 통도사 계단(戒壇)에 각각 나누어 봉안하였다. 태화사는 당나라 태화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고, 태화사 앞으로 흐르는 강을 태화강이라 하였다. 그리고 태화지의 용의 아들이 편안히 머물게 하였다는 지금의 태화교 위쪽의 속칭 용궁소를 황룡연(黃龍淵)이라 하였다. - 이 황룡연 절벽 위에 높이 솟아 있었던 태화루(太和樓)는 옛 태화사의 남쪽 종루각을 중수하여 명명하였는데, 누각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서거정(徐居正)의 현액(懸額)은 이휴정(二休亭)에 걸려 있다. 5) 

울산(蔚山) 화봉(華峰)
- 중국 오악(五岳)의 하나인 화산(華山)을 뜻함

◆ 위 치 : 울산광역시 북구 화봉동, 연암동(蓮岩) 일원 ◆ 면 적 : 320,862평(1,060,701m2)

* 지명유래

- 북구 화봉동(華峰)은 그전 울주군 농동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때 화산동(華山), 화동(華東), 지당동, 송내 등을 합하고 화봉동이라 하였다. - '화봉'은 중국에서 오악(五岳)의 하나인 화산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따로 전해지는 내력은 알 수 없다. - 연암동(蓮岩)은 그전 울주군 하부면에 속하였던 곳이며 이곳에 백련암(白蓮岩)이라는 바위와 암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蔚山)석유화학단지
- 신라 처용설화의 현장인 개운포가 이곳

◆ 위 치 : 울산광역시 남구 성암동(城岩), 상개동(上開), 울주군 청량면 (靑良), 상남리(上南), 용암리(龍岩) 일원 ◆ 면 적 : 249,083평(823,415m2)

* 지명유래

- 남구 성암동(城岩)은 그전 울주군 현남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진의 성이 있었던 곳이다. - 이곳은 또 신라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개운포(開雲浦)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졌고 성내동(城內洞)이라고도 하였다. - 청량면(靑良)은 이곳에 있는 높이 600m의 문수산을 청량산이라 하므로 면이름도 청량면이 되었다. - 청량면 상남리(上南)는 그전 상창리(上倉)와 성남리(城南, 또는 석남), 남포리(南浦) 등을 합하고 상창과 남포의 머리글자를 따서 1914년에 상남리가 되었다. - 청량면 용암리(龍岩)는 그전에 울주군 온산면에 속했다가 1987. 1. 1 청량면에 편입된 곳으로서 이곳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바우가 있어서 용암리라 하였다

진장(珍庄) 유통단지
- 고려때 바위에 흰 연꽃무뉘가 솟아났다

◆ 위 치 : 울산광역시 북구 진장동, 연암동(蓮岩), 화봉동(華峰) 일원 ◆ 면 적 : 138,000평(456,198m2)

* 지명유래

- 북구 진장동(珍庄)은 조선시대에 좌병영의 군사들이 진(陣)을 연습하는 진장(陣場)이었다고 하며, 이것이 진장(陣長), 진장(珍庄)으로 바뀐 것이다. - 연암동(蓮岩)은 조선 예종때는 백연암리(白蓮岩)라 하였고 뒤에 연암동으로 바뀐 곳이다. 고려 충렬왕때 이곳 바위에서 흰 연꽃무늬를 수 놓은 것처럼 꽃무늬가 피어나서 당시의 문인들이 시를 지어 칭송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 화봉동(華峰)은 그전 울주군 농소면에 속했다가 1952년 울산시에 편입된 곳이다. 이곳은 동화산(東華山)과 무릉도원에서 비롯된 도화산(桃花山)의 뜻을 따서 '화봉동'이라 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중국의 '화산'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진장(珍庄) 유통단지
- 고려때 바위에 흰 연꽃무뉘가 솟아났다

◆ 위 치 : 울산광역시 북구 진장동, 연암동(蓮岩), 화봉동(華峰) 일원 ◆ 면 적 : 138,000평(456,198m2)

* 지명유래

- 북구 진장동(珍庄)은 조선시대에 좌병영의 군사들이 진(陣)을 연습하는 진장(陣場)이었다고 하며, 이것이 진장(陣長), 진장(珍庄)으로 바뀐 것이다. - 연암동(蓮岩)은 조선 예종때는 백연암리(白蓮岩)라 하였고 뒤에 연암동으로 바뀐 곳이다. 고려 충렬왕때 이곳 바위에서 흰 연꽃무늬를 수 놓은 것처럼 꽃무늬가 피어나서 당시의 문인들이 시를 지어 칭송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 화봉동(華峰)은 그전 울주군 농소면에 속했다가 1952년 울산시에 편입된 곳이다. 이곳은 동화산(東華山)과 무릉도원에서 비롯된 도화산(桃花山)의 뜻을 따서 '화봉동'이라 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중국의 '화산'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진주시 문산읍(文山邑)
- 1914년, 진주군 문산면 상이동(象耳洞), 일동(一洞) 일부로서 상문리라고 하였다.

◆ 위치 : 경남 진주시 남부 ◆ 인구 : 8,985명(2001) ◆ 면적 : 40.89㎢ ◆ 문화재 : - 두방암다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200) - 연관장(경남무형문화재 18) - 박세항공신록권 및 상서문(경남문화재자료 282) 

* 지명유래

1914년, 진주군 문산면 상이동(象耳洞), 일동(一洞) 일부로서 상문리(象文里)라 하였다. - 상이(象耳) : 형태가 코끼리 귀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이마을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옛날 진 주에서 등짐 장사꾼이 새벽 일찍이 먼동이 트기전에 마산방면으로 장사길을 떠나서 상이마을 에 이르면 날이 새어야 귀내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날이 새는 이 상이마을을 「새태」라고 하 여 이 말이 널리 알려져왔다. - 빈대골 : 법륜사(法輪寺)가 있던 골이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사찰로서 임진왜란 때 폐사되어 산 중턱에 절터만 남아있다. 폐사(廢寺)된 원인은 「빈대」가 극심했다는 설도 있 고, 임진왜란 때 승려가 모두 승병으로 출정하고 절은 소실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이곳에서 는 사찰터 부근을 빈대터라고 부른다. 지금도 부근의 돌밑에는 빈대껍질이 붙어있다. 조선조 말 기까지 13층석탑이 남아 있었으나 상문리 2번지 소재 두방사에 옮겨져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 장군봉(將軍峰) : 봉화대는 군사상의 목적을 위하여 설치한 통신수단으로서 서로 신호를 보내 는 것이다. 평시에는 일거(一炬)이지만 적형(賊形)이 나타나면 이거(二炬)로, 또 경(境)에 가까 워오면 삼거(三炬), 경(境)을 범하게 되면 사거(四炬)이고, 접전(接戰)이 시작되면 오거(五炬)로 서 이와같이 단계별로 알리는 요령을 정해놓고 있었다. 그 식별(識別)을 쉽게하기 위하여 낮에 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서 상전(相傳)했다고 한다. 전국의 봉화대는 약623개소로서 문산은 상문리 2번지 두방사 뒤 산정(山頂)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장군봉(將軍峰)이라 한다. 이 장군봉 봉화대에는 항시 군인 16명 오장(伍將) 2명이 상근(常勤)하면서 이상(異常)이 발생하 면 직봉(直峰)으로 동래(東萊)를 거쳐 광주천림산(廣州天臨山)으로, 여기서 또다시 서울 남산 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봉화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장군봉 근처에는 그 화력에 의하여 암석(岩石)이 끓어흘러 용암(熔岩)처럼 보이니 등산객들이 자연석 또는 괴석인 가하여 거의 채굴(採掘)하여간 실정이다. 그리고 이 장군봉 봉화대를 국사봉(國師峰)이라 했다 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 애티고개 : 문산면과 진성면 간의 면 경계(境界)를 이루고 있는 고개이다. 일명 귀내고개라고 도 하며 국도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길이 험(險)하고 고개가 깊었으므로 혼자서는 도적떼나 맹 수 때문에 넘지를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간이 유원지로 조성되어 통행하는 사람이나 차량이 쉬 어갈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다. - 가는골 : 귀내고개 아래에 위치한 가늘고 길게 꼬부라진 골짜기이며 6·25사변 당시 많은 시체 가 묻힌곳이기도 하다. - 중티 : 상문리 동편에서 갈촌리로 넘어가는 막다른 골짜기의 고개이다. 이 고개의 정상에는 진 양보육원(1995. 6. 대평면 내촌리에서 이전)이 있으며 서쪽 아래에는 중티 못이 있다. - 황서방갓골 : 황씨성을 가진 사람이 골짜기에 자기소유의 산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붙여진 골짜기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실밤실 : 세율곡(細栗谷)이 언제부터인지 근거는 없으나 토박이들로부터 바뀌어 불러진 이름 이다. 6·25사변 당시는 골짜기가 길고 산이 무성할 뿐만 아니라 산정은 사방의 동정을 살피기 좋 은 곳으로서 유일한 피난(避難)지였다고 한다. 70년대를 전후하여 「단감」「배」밭으로 개간 되었다. - 후도골 : 법륜고개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논밭에 일하러 나온 농부들이 가져다 놓은 점심 참을 지나가던 길손이나 도적들이 훔쳐먹다가 일하던 주인이 보고 멀리서 소리치면 도망쳤다 고 하여 도적을 쫓는 골짜기라고 후도골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 막대는 골 : 상문리 동북쪽에 있는 아주 험한 골짜기이다. 고개만 넘으면 진성면(晋成面)이 다. 문산면에서는 막다른 골짜기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늦은티 : 경사가 완만한 늦은 고개라 하여 '늦은티'라고 한다. 상이마을 안골짝을 물통골이라 고 한다. 골짜기의 막바지에 위치한 이 '늦은티'가 문산읍과 진성면의 경계이다. 1974년에 남해 안 고속도로를 개설할 때 상행성 550m, 하행선 719m의 진주터널이 관통되었다. - 깐치골 : 진성면으로 가는 국도 왼편 골짜기가 까치처럼 생긴 지형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 금은 이 골짜기 일대에 진주전문대학이 있다. 

창원시 명곡동(明谷洞)
- 도계동(道溪洞), 명서(明西)1동, 명서2동 3개의 행정동이 통합된 곳

◆ 위치 경남 창원시 ◆ 인구 6만 769명(2001) ◆ 면적 6.62㎢ 

* 지명유래

명곡동(明谷洞)은 1997년 7월 14일 창원시의 대동제 시행에 따라 도계동(道溪洞), 명서(明西)1 동, 명서2동 3개의 행정동이 통합됨으로써설치되었다. 앞서서 도계동은 1995년 행정동 의안동(義安洞) 이 의안동과 도계동으로 분동됨으로써 만들어 졌고 명서1동과 명서2동은1992년 명서동의 분동으로 설치되었다. '명곡동'이란 명칭은 '明'은 서(西)를 뜻하는 '발~바라'의 변이형태인 '발'을나타내는데 서, '谷'은 골짜기를 뜻하는 '골'을 표기하기 위한 차자로 사용된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明'은 훈이 '밝다' 이고, '谷'의 훈이 '골'이기 때문에 명곡동은 '서쪽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을 뜻하는 것에서 유래된 명칭 이라 한다. 다음으로 '도계동'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면, 도계동의 도(道)는'북'을 뜻하는 '달~ 다라'의 변이형태로, 계(溪)는 '시내'를 표기하기 위한 차자일 것으로 간주되어 도계동의 의미 는 '북쪽에 있는 시내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전해져 온다. 그리고 '명서동'은 1986년 법정동으로 설치되었고 명칭은 명곡동의 明과서곡동(西谷洞)의 西가 합성되어 생겨났을 것으로 추측. 

창원시 사파동(沙巴洞)
- 쌀밭들에서 살무정, 살푸정으로 다시 사파정으로 말이 변했다 합니다.

◆위치 : 경남 창원시 ◆인구 : 5만 6723명(2001) ◆면적 : 7.89㎢ ◆문화재 :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436), 불곡사 일주문(경남유형문화재 133) 

* 지명유래

◆ 사파동 사파동은 사파정동에서 유래된 말로, 사파정동은 본래 창원군 당시 상남면 사파정리인데, 이 마 을은 품질 좋은 남면쌀의 주산지이며, 쌀밭들에서 살무정, 살푸정으로 다시 사파정으로 말이 변 했다 합니다.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개월촌, 구지촌, 동산을 병합 하여 사파정이라 하였습 니다. - 개 월 촌 : 사파정 마을에 있는 정맥산의 고개이름인데, 이 고개는 김해 군 진례면으로 나아가 는 길목이다.(일명 남산재) - 구 지 촌 : 사파정 마을의 동편을 가리켜 일컫는데, 지세가 약간 둘러꺼진 곳이어서 구석진 마 을이다.(일명 구석간단,현 대동아파트일대) - 동 산 : 사파정 정면에 있는 들판인데, 남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작은 독매가 있는데 이 근 처에 생긴 마을을 말한다. (현 상남초등학교 밑 자연부락) ◆ 대 방 동 본래 대방동(大舫)을 대방(大方)이라 고쳤으며, 대방동은 들 가운데 배 (舟:배 주)가 떠있는 형 상으로 음지와 양지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양지마을은 대방마을의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며 현재 양지길(황토방APT와 디지털APT사이의 도로)을 기준으로 아래쪽(황토방APT, 상가지역, 대방초교, 대방중, 안남초교등이 있는곳) 을 말합니다. 음지마을은 대방마을의 음지쪽에 있는 마을을 말하며, 현재 양지길을 기준으로 위쪽 (디지털 APT, 대암초교, 안남중등이 있는곳)을 말합니다. - 부 칫 골 : 大方里에서 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있는 들이며, 이들의 맞은 편에 절 (현 불곡사)이 있다. - 새 엣 들 : 음지와 양지사이에 있는 들. - 진 등 : 김해시와 동읍 무성리 사이에 있는 큰 재의 아래쪽 들을 말한다. - 최 산 : 남산리와 대방리 사이에 있는 최씨들의 산 - 문 동 골(問童골) : 대방 뒷 산인데 일제시에 병참소로 가는 골짜기 - 새 치 골 : 사파정과 대방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 - 큰 골 : 음지 동쪽에 있는 큰 골 - 작 은 골 : 큰골에 딸린 작은 골짜기 - 뒷 골 : 양지 동쪽에 있는 골 - 삼 밭 골 : 양지마을 동쪽 위의 밭 일대를 말함. - 서 제 등 : 양지마을 동쪽 옛날 서제에서 관리한 산 - 백 산 : 양지마을 북쪽에 있는 수원백씨의 선산 - 황새바우 : 양지마을 남쪽 약 1㎞지점 - 놀 이 골 : 양지마을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창원시 팔룡동(八龍洞)
- 대원, 두대, 삼동의 마을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의 동

◆ 위치 경남 창원시 ◆ 인구 4만 5354명(2001) ◆ 면적 14.13㎢ - 팔룡동은 행정조격으로 팔용, 반계, 사화, 내리, 차룡, 죽전으로 되어있다가 1997.7.14 창원시 가 대동제를 시행함으로써 대원동의 대원, 두대, 삼동의 마을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의 동이다. 

* 지명유래

팔룡동의 지역유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다음 두가지 설이 있다. 그 첫째가 현재 팔용산 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盤龍 즉 반룡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옛날 죽전과 평산, 사화와 용산 사이로 흐르는 개울을 盤溪라고 하였다. 한자로 반은 "서릴반","소반반"등의 뜻으로 쓰이고, "소 반"을 경상도에서는 "판", 즉 작은 반상기를 뜻한다. 이것을 우리 발음 그대로 읽으면 "판룡"이 되고 판룡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음하기 쉬운 팔룡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설이다. 그 다음으로 반룡산위에 일제시대에 상수용으로 만든 수원지가 있었는데 그 수원지가 언제부 터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옛날 옛적에 팔용산 저수지에서 용이 여덟마리가 살다가 승천했다 는 전설이 있어 "팔룡"이라는 지면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알 수 없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반룡은 처음에 우리말에서 동쪽을 뜻하는 盤과 산이나 꼭대기를 뜻하는 마루, 또는 머리 를 표기하는 龍이 조합된 말이다. 이는 마산의 중심산인 용마산의 동쪽산이라는 의미로 창원도 호부가 중심이 되기 이전 마산(당시 골포)이 이 지역의 중심이었던 가야시대에 이미 형성된 지 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 반룡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발음하기 쉬운 팔용으로 바뀌었다 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삼도(下三道) 또는 삼남(三南)지방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 지명유래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이들은 모두 궁성의 남 쪽에 위치하므로 하삼남 또는 삼남지방이라고도 하였다. 

* 전라북도

군산(群山) 국가 공업 단지
- 황해 바다로 돌출한 솔고지 반도

◆ 위 치 : 전북 군산시 소룡동(少龍) 일원 ◆ 면 적 : 2,065,470평(6,828,000m2)

* 지명유래

- 소룡동(少龍)은 그전에 '솔고지'라 부르던 곳으로서 바닷가에 소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 솔고지는 군산항의 맨 서쪽끝이 바다로 돌출하여 '곶'을 이루는 반도이기 때문에 솔고지라 하였다. - 이 지역은 그 전에 신풍동에 속한 지역으로서 1973. 7. 1 옥구군 미면 신풍리의 나머지 지역을 전부 흡수하고 이때 나운동, 소룡동을 신설하였다

 

군산(群山) 나운(羅雲)
- 「운중 반월형」의 명당이 있는 살기 좋은 곳

◆ 위 치 : (1)전북 군산시 나운동 일원 (3)전북 군산시 나운동, 지곡동(紙谷) 일원 ◆ 면 적 : (1)214,922평(710,486m2) (3)214,545평(709,240m2) ◆ 연 혁 - 군산시 지역은 삼한시대 마한의 땅이었으며, 백제의 마서량현(馬西良)에 속한 지역임. - 757년(경덕왕 16) 신라에서 당나라 식으로 지명을 바꿀 때 지금의 이름인 옥구로 고치고 임피군에 붙임. - 1397년(조선 태조 6) 옥구진(鎭)을 두고 병마사가 고을을 겸하여 다스리게 함. - 1423년(세종 5) 병마사가 첨절제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뒤에 옥구현감을 둠. - 따라서 1397년부터 군산진영이 설치되었고 수군이 주둔함. - 1895년(고종 32) 옥구현이 옥구군이 되었으며, 군산지역은 1899년(광무 3) 군산항으로 개항되어 각국의 거류지가 됨에 따라 일본인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됨. - 1910. 10. 1 군산부로 승격됨. - 1949. 8. 15 군산부가 군산시로 개편됨. - 1995. 1. 1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어 군산시가 됨

* 지명유래

- 군산(群山)은 고려때 진포(鎭浦)라 불렀던 곳으로 1379년(고려 우왕 6) 우리나라 해전사상 최초로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왜구를 섬멸한 진포해전의 현장이다. - '진포'라는 이름은 수군 진지가 있는 해변을 뜻하며 그후 군산창(倉)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 진포는 곧 고려 12창의 하나로의 조세미가 집결하는 곳이었으며, 이를 약탈하려던 왜선 5백여척이 최무선의 화약에 의하여 격멸된 것이다. - '군산(群山)'이란 우리 말의 '무리 뫼'를 뜻하는데, 군산 앞바다에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열도의 13개 섬들이 무리지어 산처럼 떠 있으므로 부른 이름이며 옛 이름은 군산포이다. - 나운동(羅雲)은 본래 나룬이, 나랭이라고 불렀던 마을이다. - 이 마을은 운중 반월형(雲中半月形), 곧 구름속에 반달이 떠 있는 형국의 명당이 있어서 '나운'이라 불렀다고 하며, - 부자집에서 시주를 청하는 스님을 박대하였다가 그 집은 연못이 되고, 며느리는 아이를 업은 채 바위가 되었다는 애기업은 바위도 있다. - 이 '장자설화'와 관련된 바위들은 한국 토지공사에서 따로 공원을 조성하여 보존토록 하고 있다. - 지곡동(紙谷)은 회실, 지실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지역 흙에서 백회가 나왔으므로 회실이라 하였으며, 그전에 한지(韓紙)를 만드는 지소(紙所)가 있었으므로 지실이라 하였다. 지곡동이라는 이름도 지소에서 비롯되었다

군산(群山) 수송(秀松)
- '수송'은 뛰어난 소나무를 뜻하는데....

◆ 위 치 : 전북 군산시 수송동, 나운동 일원 ◆ 면 적 : (1)370,000평(1,223,140m2) (2)211,000평(697,521m2)

* 지명유래

- '수송(秀松)'은 자태가 뛰어난 소나무를 뜻하지만 이곳에 보기 좋은 소나무가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수송동(秀松)은 본래 군산시 경장동에 속한 곳인데, 1973. 7. 1경장동의 일부를 나누고 이곳에 있었던 송교(松橋)를 따서 수송동이라 하였다. - 경장동(京場)은 본래 서래장터, 스래장터라 불렀던 곳이며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서래(스래)-서울=경(京)자를 붙여 경장동이라 한 곳인데, 그 자세한 내력은 확인 되지 않는다

군장(群長) 국가 산업단지 「군산(群山)지구」
- 조선 시대에 나라의 소 기르던 곳

◆ 위 치 : 전북 군산시 오식도동(筽篒島)서측 해면 일원 ◆ 면 적 : 4,816,000평(15,920,661m2)

* 지명유래

- 군장(群長)은 군산과 장항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합성지명이며, 사업지역이 군산과 장항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 오식도(筽篒島)는 행정구역상 소룡동에 속하는 법정동이며 군장국가 산업단지는 이 오식도의 서쪽 해면에 조성되고 있다. - 오식도는 조선시대에 세곡미를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지나다가 난파하기 쉬운 곳이었으므로 이곳에 까마귀떼가 날아 들어서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오사도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또 조선시대에 나라의 소를 기르던 목장이 있었으므로 '버들고리 오(筽)'자를 써서 오식도라 불렀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 그전에는 옥구군 미면(미성읍)에 속하였고, 1989. 1. 1 오식도리, 비응도리가 모두 군산시에 편입되었다

김제(金堤) 요촌(堯村)
- 어진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

◆ 위 치 : 전북 김제시 요촌동, 검산동(劍山) 일원 ◆ 면 적 : 143,366평(473,937m2) ◆ 연 혁 - 김제지역은 삼한시대 마한의 땅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벽골군(碧骨) 이라 함. - 757년(경덕왕 16) 통일신라에서 지방관제를 정비하고 당나라식 지명 으로 바꿀 때 지금의 이름인 김제로 고치고 전주에 속하게 함. - 한편 김제시 관내에는 백제의 구지산현(仇知山)과 두내산현(豆乃山)이 있었으며, 신라 경덕왕때 구지산현은 금구(金溝)로, 두내산현은 만경(萬頃)으로 고쳐서 김제에 딸린 현이 됨. - 김제군은 1143년(고려 인종 21) 현령을 두었고, 금구현은 1170년(의종 24) 이의방(李義方)의 집이 있다 하여 현령으로 승격하였으며, 만경현은 고려초 임피에 붙였다가 1106년 (예종 원년)감무를 둔 후 뒤에 현령으로 승격함. - 김제군은 1403년(조선 태종 3) 명나라 환자 한첩목아의 청에따라 군으로 승격되었고, 만경군은 1620년(광해군 12) 흉년이 들어 고을사람들이 흩어졌으므로 현을 폐하여 김제에 붙였다가 1622년 전주에 편입되었고, 1637년(인조 15) 다시 현으로 복구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시 김제군은 전주에 딸리고, 만경과 금구는 각각 군이 됨. - 1914년 일제의 부, 군, 면 폐합때 만경군, 금구군, 김제군의 세 군을 합하여 김제군이 됨. - 1931. 11. 1 김제면이 김제읍으로 승격됨. - 1989. 1. 1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 - 1995. 1. 1 김제시와 김제군을 통합하여 김제시가 됨

* 지명유래

- 김제(金堤)의 백제때 이름 '벽골'은 '볏골'(쌀)로서 도향(稻鄕)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 따라서 벽골제라는 백제때의 저수지(혹은 삼한 시대의)도 이러한 도작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 신라때 '김제'라 하였는데, 벼의 색깔이 황금빛이므로 '금(金)'을 따고 벽골제의 '제'를 붙여 '김제'라 부른 것으로 보고 있다. - 그러나 김제지역은 신라때 이후 냇가나 뚝 어디서든지 금을 캐냈고, 일제때까지 사금을 캤던 곳이므로 '김제'라 부른다고도 한다. - 김제시 요촌동(堯村)의 '요촌'은 중국 고대의 성군으로 추앙되는 '요임금 요(堯)'자를 쓰는 마을이다. - 그러므로 '요촌'이라는 이름은 '요순지민가 비옥이봉(堯舜之民可 比屋而封)', 곧 요순시대에는 백성들도 모두 성덕에 감화되어 어질었으므로 집집마다 벼슬에 봉할만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요촌은 그런 이상적인 마을을 지향하는 이름일 것이다. - 검산동(劍山)은 대검산과 소검산 마을로 나누어지며, 대검산마을 뒤의 산줄기가 칼처럼 생겼으므로 검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김제시 검산동(劍山洞)
입천면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칼(檢)처럼 생겨 "검산리"라 불림.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9,972명(2001) ◆ 면적 : 14.14㎢ 

* 지명유래

◆ 검 산 동( 劍 山 洞)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칼(檢)처럼 생겼다 하여『검 산리』로 불리어졌다 한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입천면의 대검리, 소검리, 용곳리, 순동리의 일부와 백산면 상말리 일부, 금구군 일북면 난봉리 일부를 합하여 『검산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 에 편입되었다. 그 뒤로 마을이 나누어지고 이름도 바뀌어서 대검산, 소검산, 화동골로 불리다가, 다시 행정구 역 명칭을 따서 검산 1구(화동곡), 검산 2구(소검산), 검산 3구(대검산), 검산 4구(성당촌), 검 산 5구(됫배-升岩), 검산 6구(양지편)로 불렀는데, 사람들은 화동골, 소검산, 대검산, 성당촌, 호 잠, 상록, 양지편이라는 이름을 즐겨 불렀다.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에 편입된 『검산동』에는 화동(花洞), 소검산(小劍山), 대검산(大劍山), 성당(聖堂), 호잠(湖잠), 상록(常綠), 양지(陽地), 7개 마 을이 있다. ○ 소금배미 대검산 남쪽 들 가운데 있는 논을 가리킨다. 바닷물이 포내 앞까지 드나들던 옛날 소금을 가득 싣고 오던 배가 이곳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뒤짚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이곳은 논으로 변하였 는데, 소금배가 뒤짚힌 논이라 하여『소금배미』라고 부리었다. 지금도 가뭄이 심하면 그 옛날 뒤짚힌 소금배 탓인지 제일 먼저 논이 마른다고 한다. ○ 장군묘(將軍墓) 대검산 동쪽에 있는 밀양 박씨의 후손 박석정(朴石精)의 묘이다. 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 진왜란 당시 박석정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를 구하려고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지금의 진 안 곰티재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힘이 모자라 박석정은 전사하고 말았다. 

김제시 교동월촌동(校洞月村洞)
본래 김제군 읍내면 지역이었던 교동은 향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9,193명(2001) ◆ 면적 : 27.96㎢ ◆ 문화재 : 김제향교 대성전(전북유형문화재 9), 김제동헌(전북유형문화재 60), 김제내아(전북 유형문화재 61), 김제 전교비(전북유형문화재 65), 재궁리 석등(전북유형문화재 78), 조필달장 군 유물(전북유형문화재 104), 월촌입석(전북민속자료 7), 장화리 쌀뒤주(전북민속자료 11) 

* 지명유래

◆교동월촌동 유래 본래 김제군 읍내면 지역이었던 교동은 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향교골, 또는 향교곡, 교동리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 대리, 중앙리, 옥리, 서변리, 입천면 내리, 월산 면의 입석리와 제남리 일부를 합하여 교동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에 편입하고 향교골, 사직 단, 새터로 나누어 불렀다. 한때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교동 1구, 교동 2구, 교동 3구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인구증가와 함 께 향교골은 향교와 교남으로, 성산골은 성산과 신동으로 나누어 부르다가 1989년 1월 1일 김제 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 교동이 되었다. 월촌동은 원래 달재의 이름을 딴 월산면 지역으로 18개 마을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대촌면의 신흥 등 16개 마을과 우산면의 신흥리 일부와 홍산면의 내리 일부를 합하여 월산면의 머리글자「월」자와 대촌면의 끝글자 「촌」자를 따서 월촌면이라 하여 복죽, 명덕, 연정, 장화, 신덕, 월봉, 신월, 제월, 입석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여 오다가 1989년 1월 1일 김제 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월촌면 전지역이 김제시에 편입되어 월촌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1998. 9. 26일 과소동 통폐합으로 교동과 월촌동이 통합되어 교동월촌동이 되었다. ◆ 향교마을유래 향교는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와 거기에 따른 한문교습소로 오늘날의 학교와 같은 것이다. 그 래서 옛날부터 고을마다 향교를 지어 후학(後學)들을 길러 냈다. 향교는 보통 그 고을에서 터가 제일 좋은 명당을 골라지었는데, 우리 김제에는 시가지를 한 눈 에 굽어볼 수 있는 성산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향교마을은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 을로 향교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 사직마을유래 사(社)는 토지지신(土地之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뜻하는데, 백성은 땅과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새로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되면 제단을 쌓고 나라의 평안함과 백성의 복 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제단을 사직단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왕 783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으 며, 그 후 고구려 고국양왕, 고러 성종, 조선 태조 때 각각 사직단을 세워 토지신과 곡신에게 제 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교동 서남쪽 사직마을은 조선 초기 심한 가뭄 때 쌓았던 사직단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김제시 금구면(金溝面)
본래 금구군 동도변 지역으로서 금구읍내가 되므로 "금구"라 하였다.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6,372명(2001) ◆ 면적 : 42.53㎢ ◆ 주요문화재 : 장태수선생유물(전북유형문화재 105), 남강정사(전북기념물 64), 금구향교 대 성전(전북문화재자료 113) 

* 지명유래

*금구면 행정구역 변천사 백제시대 : 구지산현 신라시대 : 경덕왕16년 전주 금구현 고려시대 : 금구현 조선시대 : 전주속현 1910 : 금구군(10개면 관장) 1914 : 김제군에 합병 금구면 1995. 1. 1 : 도.농통합형 김제시금구면 *각 리별 변천사 금구리 본래 금구군 동도변 지역으로서 금구읍내가 되므로 "금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에 따라 성길리, 장교리, 상학리를 합하여 "금구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서도리 본래 금구군 서도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신리, 양명리, 하하리 일부를 합하여 "상신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는데, 1995년 8월31일자 김제시 조례 제144호(읍면동의 명칭 개정조례) 에 따라 "상신리(上新里)"가 서도리(西道里)로 명칭이 변경되 었다. 서도리에는 양명, 상하, 서계 등 3개 마을이 있다. 용복리 [ 용복리 ]에는 대복, 하천, 선락 등 3개 마을이 있다. 선암리 본래 금구군 동도면 지역으로 곧게 선 바위가 있어 "선바우" 또는 "선암" 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적리, 영천리와 전주군 우림면의 축령리를 합하여 "선암리(仙岩里)"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 에 편입되었다. "선암리"에는 영천, 축령 두 마을이 있다. 월전리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월과 봉산, 동도면의 어전리를 합하여 당월과 어전의 이름을 따 "월전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월전 리"에는 어전, 연동, 봉산, 당월 등 4개 마을이 있다. 오봉리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양리, 지봉리 목련의 일부를 합 하여 오양과 지붕의 이름을 따 "오봉리"라는 이름으로 김 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오봉리(五鳳里)"에는 양석, 오산, 지상, 봉림, 목련 등 5개 마을이 있다. 대화리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장리, 오양리, 동화리 일부와 전 주군 이서면의 앵곡리 일부를 합하여 대장과 동화의 이름을 따 "대화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대화리"에는 금천, 대야, 장항 등 3개 마을이 있다. 산동리 본래 금구군 낙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둔산리와 동면의 율암리, 대장 리 일부를 합하여 [산동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폅이되었다. [산동리]에는 대율, 구 암, 동둔, 서둔 등 4개 마을이 있다 낙성리 본래 금구군 낙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흥이, 장흥리, 사방리를 합하 여 [낙성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낙성리]에는 신흥, 분토, 장흥, 상사, 사방 등 5개 마을이 있다. 청운리 본래 금구군 낙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불로리와 중평리, 서도면의 상 리, 이북면의 용은리와 옥성리 일부를 합하여 [청운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 었다. "청운리"에는 불로, 사동, 상리 등 3개 마을이 있다 용지리 본래 금구군 동도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광현, 용산, 우산, 반용 등을 합 하여 용사와 이곳에 있는 웅지(熊池) 이름을 따 [용지]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 다. [용지리]에는 우산, 광현, 용사 등 3개 마을이 있다. 옥성리 본래 금구군 이북면 지역으로 [옥성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도면의 용정리 일부를 합하여 [옥성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쌍감(황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 월 15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옥성리]에는 용전, 사동, 율산 등 3개 마을이 있다 하신리 본래 금구군 서도면 지역으로 [하신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북면의 학성리 일부를 합하여 [하신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하신리]에는 상 송, 하송, 개전, 정농 등 4개 마을이 있다. 

김제시 만경읍(萬頃邑)
만경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만경군청이 있었기 때문에 만경읍내라 하였다.

◆위치 : 전북 김제시 북부 ◆인구 : 4,638명(2001) ◆면적 : 24.01㎢ ◆문화재 : 만경향교대성전(전북문화재자료 114), 만경향교 동서재, 만경향교 명륜당, 능제, 회 동서원, 성모암, 진묵사, 조앙사, 만경두릉성 

* 지명유래

1. 만경리(萬頃里) 만경리는 만경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만경군청이 있었기 때문에 만경읍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 정구역 통폐합에따라 --외신, 외동, 독곡, 중리(으뜸이 되고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 외서 (말이 죽으면 묻던 지역이라 말무덤이라 했고 만경읍성 성밖 서쪽에 있는 마을), 대문내(대문 안, 사대문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 동문내(동문안, 만경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교동이라 부 름), 송전의 일부를 합하여 만경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만경리에 편입되었다.--만경리는 서문 외, 대문내, 외서리, 북리, 내남, 상원, 남리, 남산, 중리, 교동, 산본 등 11개 마을이 있다. 2. 장산리(長山里) 서쪽은 소토(小土), 남쪽은 관상, 동쪽은 청하면 대청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마을의 산 이 길게 뻗어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본래 만경군 군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에 따라 --大竹(삭녕최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고 원래 푸르 른 대나무가 많이 난다하여 만경군 현내면 죽청리로 불리었음)--龍 洞(백제시대 마을이 형성될 때 용제동, 용지동이라 불리웠고 용이 올라간 연못이 있는 동네라하여 용동이라 하였다 함)--農村(만경현 당시에는 천민들이 살던곳이라 하여 民村이라 불리우다 농촌으로 바뀌었다 함)--대 동, 산본(마분을 버렸다 하여 마분리하고 불리웠고 산중턱까지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산본이 라 함)의 일부와 북면의 송상리(松上里)일부를 합하여 장산리가 되었음. 현재는 장산, 대죽, 황상동(원래 여자가 누런 치마를 이룬 형상이라 하여 황상골, 누런 황토흙 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황상골), 용지동 등 4개 마을이 있다. 3. 대동리(大東里) 동쪽은 백산면 수록리, 남쪽은 백산면 부거리, 서쪽은 장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본래 만경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만경읍내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죽(小竹) : 내죽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내죽의 대밭에 비해 대밭이 작다하여 소죽이라 불리우고 거운동 또는 거름골, 거롱골이라함.--내죽(內竹) : 대동 서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가운데 좋은 대밭이 있는데 그 대밭 가운데에서 기죽(旗竹)이 나왔다 하여 내죽이라 하였음. 소동, 농촌의 일부와 남일면의 부흥일부 김제군 연산면의 산치리 일부 를 합하여 김제군 만경에 편입되어 현재는 대동, 소동, 동상동(동상골이라고 부르며 주변에 있 는 동산에서 늘 물이 흘러 내린다 하여 붙여진이름), 내죽등 4개 마을이 있다. 

김제시 백구면(白鷗面)
본래는 김제군 지역으로 공동면(公洞面)이라 하였다.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6,755명(2001) ◆ 면적 : 21.98㎢ 

* 지명유래

본래는 김제군 지역으로 공동면(公洞面)이라 하여 마전, 난산, 반월, 신모,둑령, 맥산, 창산, 영 천, 상모, 중모, 석담, 신복, 신성의 13개 동리를 관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 라 회포면(匯浦面)의 상도, 상신, 신덕,쌍강, 도도, 신흥, 유강의 7개 동리, 목연면(木淵面)의 봉 산, 화죽, 월연, 부용, 외가전, 내가전, 유천, 강좌, 율포, 신정, 장신, 제내, 백구, 신천, 우담, 고 잔, 의 16개 동리, 모촌면(母村面)의 이작리 일부, 익산군 춘포면(春浦面)의월포리, 고잔리, 신 덕리, 회화리 일부, 익산군 남일면(南日面)의 감상리, 동자포리 일부, 전주군 이북면(伊北面)의 신오리 일부, 만경군 북이도면(北二道面)의 동계리 일불를 합하여「백구정(백구리)」의 이름 을 따「백구면」이라하여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의하여 만경강을 경계로 삼정리 일부를 이리시 에, 반월리, 강흥리 일부를 익산군 춘포면에 넘겨 주는 동시에 익산군 오산면의 목천리, 남전 리, 신지리의 일부를 편입시켰다. 동쪽은 완주군 이서면, 서쪽은 공덕면, 남쪽은 용지면, 북쪽은 만경강 건너 익산군은 오산면과 춘포면, 이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구면」에는 월봉, 부용, 유강, 삼정, 백구, 반월, 석 담, 학동, 마산, 영상, 도도, 강흥, 도덕 등 13개리가 있는데, 1994년 12월 22일자로 도도리 강흥 리, 도덕리 등 3개 리가 전주로 편입되어 10개 리가 있는데, 1995년 1월 1일자로 김제군이 김제 시와 통합됨에 따라서 김제시 「백구면」이 되었다. 

김제시 봉남면(鳳南面)
봉남면의 동남부는 노령산맥계의 연봉이 뻗어 내려가는 금구면, 금산면이 인접 하고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4,029명(2001) ◆ 면적 : 23.74㎢ ◆ 주요문화재 : 김제 봉남면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280), 김제 봉남면의 왕버들(천연기념물 296) 

* 지명유래

 연 혁 조선시대 : 금구면관하 하서면, 남면 1914 년 : 하리면, 초처면 1935 년 : 하리면. 초처면 통합 봉남면 1989. 1. 1 : 월성리 김제시 봉황동 편입 1990. 8. 1 : 도장리, 서정리, 양전리 봉황동 편입 1994. 12. 28 : 황산면 남산리 상교마을 봉남면 편입 1995. 1. 1 : 도농복합형 시·군통합 김제시 봉남면 지형유래 봉남면의 동남부는 노령산맥계의 연봉이 뻗어 내려가는 금구면. 금산면이 인접 하고 서북부는 신풍동. 황산면이 인접하여 많은 소구릉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 는 중앙좌지에 봉남면이 아담하게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정읍시 감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봉남면의 변천과정은 조선조 말엽에 금구현 관하 하서면과 남면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하리면이라 개칭하였으며, 또다시 1935년 행정구역 변경과 동시에 하리면과 초처면을 병합하여 봉남면이라 칭하였습니다. 또한 용산리를 금산면으로 오정리를 황산면으로 각각 이속시켰습니다.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되면서 월성리가 김제시에 편입되었고 이듬해인 1990년 8월 1일 양전리, 서정리, 도장리가 김제시에 또다시 편입되어 현재 법정리로 대송리, 평사리, 화봉리, 신호리, 신응리, 종덕리, 행촌리, 구 정리, 회성리, 내광리, 용신리로 총11개리, 행정분리 기준 총36마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봉남면의 주 소득원은 쌀농사 중심으로 지난 김제군 시절에는 "제1봉남", "제2 oo" 말처럼 잘살고 풍요로운 부촌면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김제시 탄생과 더불어 법정리 4개리가 신풍동으로 편입된 지금에는 면세가 많이 약화된 편이며, 21세기 들어 세계무역 개방화, 관세철폐 움직임에 쌀값하락등 어려운 시점 에 봉남농협RPC에서 쌀의 차별화 전략으로 "푸른마을 쌀" 및 "알짜미"를 생산하여 봉남농민 들의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면 출신 주요인사로는 국회의원 2-3대를 지내신 구정리 구성마을 송방용의 원(현서울거주)과 전라북도 초대 도의회 의장을 지내신 신호리 구호마을 임종엽 도의원(사망)이 있어서 봉남면을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우리고장 봉남면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 280호인 동령마을 느티나무와 296호인 성덕마을 왕버들나무가 존재하므로 현재의 봉남면을 우뚝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제시 부량면(扶梁面)
수백년전에 있었던 용초라는 큰 못에서 용이 출수하였다 하여 용성 리라 칭하게 됨

◆ 위치 전북 김제시 ◆ 인구 2,449명(2001) ◆ 면적 20.12㎢ ◆ 주요문화재 김제 벽골제비 및 제방(사적 111) 

* 지명유래

◆ 용성리(龍成里) 수백년전에 있었던 용초라는 큰 못에서 용이 출수하였다 하여 용성 리라 칭하게 됨. 복촌(福村) : 일명 되평안이라 불리우며, 빈한한 농가가 형성한 부 락으로 복을 빌기 위한 의미 로 복촌이라 칭하게 됨. 포교(浦橋) : 부락이 섬과 같이 되어 다리로 통행하게 되므로 포교 라 칭하고 또 개다리라고도 불리움. 상방(上芳) : 화초밭의 웃 부락에 위치하여 상방이라 하고 꽃다운 화초밭의 웃마을을 의미하여 웃 방화리라고도 칭함. 하방(下芳) : 화초밭의 아래 부락에 위치하여 하방 또는 아래 방화 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연못 이 있어 방하(芳荷)라고도 불리움. 금화(金禾) : 일제시대 화호리 웅봉농장의 어민촌으로 부락을 형성 하고 가을철에 벼빛이 금빛 같았다는 의미로 금화라 칭하게 됨. 대성(大成) : 빈한한 농가가 형성되어 크게 이룬다는 의미로 대성 이라 칭하게 됨. ◆ 금강리(金江里) 지역이 낮아 동진강 물이 접근되고 그 물빛이 금과 같아 금빛의 금 과 동진강의 강을 따서 금강 리라 칭하게 됨. 전포(前浦) : 포강의 전면에 위치되어 있어 전포라 칭하였고 김씨 가 많이 거주한다하여 김촌 (金村)이라고도 불리움. 후포(後浦) : 포강이 후면에 위치되어 있어 후포라 칭하였고 강씨 가 많이 거주한다 하여 강촌 (姜村)이라고도 불리움. 금신(金新) : 행정구역 금강리 내에 신설부락이라고 하여 금신이며 일제시대 농토를 따라 이민 을 왔다하여 일명 이민촌이라고도 하고 행정구역인 금강리의 금강신기라고도 함. 

김제시 성덕면(聖德面)
본래 만경군 지역이며 남일면 이라는 명칭으로 71개리 관할.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3,087명(2001) ◆ 면적 : 22.27㎢ 

* 지명유래

 ○ 연 혁 - 본래 만경군 지역이며 남일면 이라는 명칭으로 71개리 관할. - 1914년 남이면의 4개리와 상서면, 군내면, 대촌면의 일부를 통합, 성덕산의 명칭을 따 성 덕면으로 불리어짐. - 지금은 대목,대석,묘라,석동,남포,성덕등 6개리 31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 1995.1.1. 시군통합으로 김제시 성덕면으로 변경. ◆ 지명유래 ○ 대목리(大木里) 대목리는 큰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대목리」라 불렀는데 신흥,다복동,탄상,탄하,대목산,옥동, 소목산등 7개 마을로 구성된다. ○ 대석리(大石里) 돌샘 근처의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석이라 하였는데 대석리는 대석,소석,용소,신등,신평,수교 등 6개 마을로 구성된다. ○ 묘라리(妙羅里) 약 300년전 두사총이라는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이 이곳을 지나면서 풍취라대(風吹羅帶)의 지형 이라 하여 「묘라」라 불렀으며 이 마을에 맨처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은 임씨라고 한 다. 묘라리는 묘라,후리 두무동등 3개 마을로 구성된다. ○ 석동리(石洞里) 「돌팍재」(석동 동쪽에 있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어서 「돌팍재」 또는 「석동」이라 불렀 으며 석동리는 석동1,석동2, 상리,도하,양지등 5개 마을로 구성된다. ○ 성덕리(聖德里) 본래 김제군 만경면 지역이었던 「성덕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모산, 나시, 남포 의 각 일부와 상서면의 부동 정동의 일부를 합하여 성덕리라 불리워진다. 성덕리는 모산,나시, 고현등 3개 마을로 구성된다. ○ 남포리(南浦里) 본래 만경군 남이면 지역으로 남쪽의 바닷가에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남포」라 하였고 이범 산,한포,남포1,2,3,4,5등 7개 마을로 구성된다. 

김제시 신풍동(新豊洞)
신풍동은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1913년 김제역이 새로 생겼다..

◆ 위치 : 전북 군산시 ◆ 인구 : 1만 2636명(2001) ◆ 면적 : 1.22㎢ 

* 지명유래

신풍동은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1913년 김제역이 새로 생김에 따라 이 일대가 왕래하 는 사람이 많아지고 풍성하게 되었다 하여 풍년촌, 또는 신풍촌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914 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용진리(龍津里), 내호리(內狐里), 사진리(沙津里), 소검산(小劒山), 용호 리(龍湖里)의 각 일부가 흡수되어 신풍리로 김제면(읍)에 편입되었다. 그 뒤 모새멀, 잿배기, 소속골, 안터등으로 불리다가 다시 신풍1구(평강,당사), 신풍 2구(역전 통), 신풍3구(전기회사뜸), 신풍4구(모새멀, 잿배기, 쇠전터), 신풍5구(안터) 신풍6구(전기회사 뜸, 소속골)로 불리었는데 인구증가에 따라 신풍 1구(샛터), 신풍 2구(역전통), 3구(전기회사 뜸), 4구(잿배기), 5구(전기화사뜸), 6구(소속골), 7구(쇠전터), 8구(모새멀), 9구(안터), 10구(쇠 전터), 11구 (소속골)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정구역 명칭보다 샛터, 당사골, 남신, 역전통,가마니조합 뒤, 전기회사뜸, 잿 배기, 모새멀, 안터, 소속골, 쇠전터, 창고마을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불렀다. 최근에는 또다시 마을 이름이 바뀌어서 평강, 당사, 남신 , 역촌, 동신 ,금성 ,화신 ,신흥, 대촌, 내기, 당산, 신당, 대흥, 대동으로 불리었는데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 라 용동지역과 함께 김제시에 편입되어 신풍동이라 부르고 있다. 용동에는 여수해, 용호, 예동, 신기 4개 마을이 있다. 봉황동은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동으로 봉남면의 월 성리와 황산면의 황산리, 난봉리, 오정리를 합하여 봉남면과 황산면의 머리글자를 따서 봉황동 이라는 이름으로 김제시에 편입되었다. 봉황동에서는 황산동, 난봉동, 오정동, 월성동과 1990년 8월 1일 김제시에 편입된 도장동,서정 동,양전동등 7개의 법정동이 있다. 그 후 1998년 9월 26일 봉황동지역(7개동)과 신풍동지역(2개동)이 통합되어 김제시 신풍동으로 되었다. 

김제시 요촌동(堯村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성황리, 외리, 도동리 일부와 입천면의 내리 일부를 합하여 요촌리로 김제면에 편입함.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1만 2776명(2001) ◆ 면적 : 11.08㎢ 

* 지명유래

1. 요촌동 김제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요촌동은 동쪽으로는 검산동, 서쪽으로는 서암동, 남쪽으로는 옥산동, 북쪽으로는 하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요촌동은 본래 김제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성황리, 외리, 도 동리 일부와 입천면의 내리 일부를 합하여 요촌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에 편입되어 됫배, 성황댕이, 관웅이, 나무전거리로 나누어 불렀고, 다시 되바우, 성황당, 삼정목, 본정통, 시장통, 진밭머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행정구역 명칭으로 요촌 1구, 요촌 2구, 요촌 3구, 요촌 4구, 요촌 5구, 요촌 6구롤 부 르기도 하였으며, 후에 또다시 되바우, 성황당, 새장터, 삼정목, 묵은 소전거리, 본정통, 사정거 리, 사장통, 진밭머리로 불렀다. 그러던 것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마을의 수가 늘어나자 평화, 후암, 성황, 용성, 요륜, 벽성, 화동, 문동, 중동, 정동, 장전, 영동, 궁전 등 13개 마을로 나누어졌는데, 1989년 1월 1일 김제읍 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 요촌동이 되었다. 요촌동은 조용하고 사람들이 온순하여 요순시대와 같은 평화로운 마을이란 뜻으로 요촌이라 부 르게 되었다고 한다. (1) 서낭댕이(성황댕이) 토지의 부락을 수호하는 신을 성황신이라고 하는데, 길가의 큰 나무 아래나 사당(성황사)이 성 황신의 거처가 되며, 이곳을 성황당 또는 서낭댕이라고 부름.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동멩이를 정성껏 올려 놓고 지나가는데, 이는 성황신에게 재난을 물리 쳐 주고, 복을 내려 주기를 빌며, 아울러 소원성취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함. 김제 군지를 보면 군의 동쪽 2리 지점에 성황사가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으로는 그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주민의 말에 의하면 김제 국민학교와 중앙국민학 교 사이에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사있길이 있는데, 그 중간 지점에 정자나무와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일대를 서낭댕이, 성황댕이로 불렀다고 한다. (2) 나무전거리 김제국민학교에서 박약국 앞으로 해서 원예조합까지의 도로변 (옛 벽서중학교자리)을 가리킨 다. 연탄이나 석유가 흔하지 않던 시절, 아궁이레 불을 지펴서 밥을 짓고, 난방 시설도 온돌이 고작 이었기 때문에 나무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땔감이었다. 그래서 백산면 등지에서 소나무 잔가지나 솔잎, 억새풀, 갈대 등을 말려 지게에 짊어지고 나와 팔았기 때문에 날마다 나무시장이 섰다. 그래서 이곳을 나무전거리라고 불렀다. (3)닭전머리 박약국 사거리에서 시장으로 들어가는 도로변 양측으로 장날이면 닭을 사고 팔던 장소가 있었 다. 이곳을 닭을 팔고 사는 장소라는 뜻으로 닭전머리라고 불렀다. (4)솥전거리 구시장(상설시장통)과 현 조해양조장 뒤인 묵은 쇠전거리 사이에 있는 마을로 솥을 파는 거리라 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처럼 양은솥이나 압력솥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모두 주물로 만든 검정솥을 사용했기 때문에 솥을 사려면 이곳에 와야만 했다. 지금도 솥전거리 모퉁이에서는 주물로 만든 검정솥을 팔고 있어 마을이름의 유래를 말해 주고 있다.
김제시 검산동(劍山洞)
입천면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칼(檢)처럼 생겨 "검산리"라 불림.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9,972명(2001) ◆ 면적 : 14.14㎢ 

* 지명유래

◆ 검 산 동( 劍 山 洞)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칼(檢)처럼 생겼다 하여『검 산리』로 불리어졌다 한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입천면의 대검리, 소검리, 용곳리, 순동리의 일부와 백산면 상말리 일부, 금구군 일북면 난봉리 일부를 합하여 『검산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 에 편입되었다. 그 뒤로 마을이 나누어지고 이름도 바뀌어서 대검산, 소검산, 화동골로 불리다가, 다시 행정구 역 명칭을 따서 검산 1구(화동곡), 검산 2구(소검산), 검산 3구(대검산), 검산 4구(성당촌), 검 산 5구(됫배-升岩), 검산 6구(양지편)로 불렀는데, 사람들은 화동골, 소검산, 대검산, 성당촌, 호 잠, 상록, 양지편이라는 이름을 즐겨 불렀다.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에 편입된 『검산동』에는 화동(花洞), 소검산(小劍山), 대검산(大劍山), 성당(聖堂), 호잠(湖잠), 상록(常綠), 양지(陽地), 7개 마 을이 있다. ○ 소금배미 대검산 남쪽 들 가운데 있는 논을 가리킨다. 바닷물이 포내 앞까지 드나들던 옛날 소금을 가득 싣고 오던 배가 이곳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뒤짚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이곳은 논으로 변하였 는데, 소금배가 뒤짚힌 논이라 하여『소금배미』라고 부리었다. 지금도 가뭄이 심하면 그 옛날 뒤짚힌 소금배 탓인지 제일 먼저 논이 마른다고 한다. ○ 장군묘(將軍墓) 대검산 동쪽에 있는 밀양 박씨의 후손 박석정(朴石精)의 묘이다. 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 진왜란 당시 박석정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를 구하려고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지금의 진 안 곰티재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힘이 모자라 박석정은 전사하고 말았다. 
김제시 교동월촌동(校洞月村洞)
본래 김제군 읍내면 지역이었던 교동은 향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9,193명(2001) ◆ 면적 : 27.96㎢ ◆ 문화재 : 김제향교 대성전(전북유형문화재 9), 김제동헌(전북유형문화재 60), 김제내아(전북 유형문화재 61), 김제 전교비(전북유형문화재 65), 재궁리 석등(전북유형문화재 78), 조필달장 군 유물(전북유형문화재 104), 월촌입석(전북민속자료 7), 장화리 쌀뒤주(전북민속자료 11) 

* 지명유래

◆교동월촌동 유래 본래 김제군 읍내면 지역이었던 교동은 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향교골, 또는 향교곡, 교동리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 대리, 중앙리, 옥리, 서변리, 입천면 내리, 월산 면의 입석리와 제남리 일부를 합하여 교동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에 편입하고 향교골, 사직 단, 새터로 나누어 불렀다. 한때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교동 1구, 교동 2구, 교동 3구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인구증가와 함 께 향교골은 향교와 교남으로, 성산골은 성산과 신동으로 나누어 부르다가 1989년 1월 1일 김제 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 교동이 되었다. 월촌동은 원래 달재의 이름을 딴 월산면 지역으로 18개 마을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대촌면의 신흥 등 16개 마을과 우산면의 신흥리 일부와 홍산면의 내리 일부를 합하여 월산면의 머리글자「월」자와 대촌면의 끝글자 「촌」자를 따서 월촌면이라 하여 복죽, 명덕, 연정, 장화, 신덕, 월봉, 신월, 제월, 입석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여 오다가 1989년 1월 1일 김제 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월촌면 전지역이 김제시에 편입되어 월촌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1998. 9. 26일 과소동 통폐합으로 교동과 월촌동이 통합되어 교동월촌동이 되었다. ◆ 향교마을유래 향교는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와 거기에 따른 한문교습소로 오늘날의 학교와 같은 것이다. 그 래서 옛날부터 고을마다 향교를 지어 후학(後學)들을 길러 냈다. 향교는 보통 그 고을에서 터가 제일 좋은 명당을 골라지었는데, 우리 김제에는 시가지를 한 눈 에 굽어볼 수 있는 성산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향교마을은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 을로 향교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 사직마을유래 사(社)는 토지지신(土地之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뜻하는데, 백성은 땅과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새로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되면 제단을 쌓고 나라의 평안함과 백성의 복 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제단을 사직단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왕 783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으 며, 그 후 고구려 고국양왕, 고러 성종, 조선 태조 때 각각 사직단을 세워 토지신과 곡신에게 제 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교동 서남쪽 사직마을은 조선 초기 심한 가뭄 때 쌓았던 사직단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김제시 금구면(金溝面)
본래 금구군 동도변 지역으로서 금구읍내가 되므로 "금구"라 하였다.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6,372명(2001) ◆ 면적 : 42.53㎢ ◆ 주요문화재 : 장태수선생유물(전북유형문화재 105), 남강정사(전북기념물 64), 금구향교 대 성전(전북문화재자료 113) 

* 지명유래

*금구면 행정구역 변천사 백제시대 : 구지산현 신라시대 : 경덕왕16년 전주 금구현 고려시대 : 금구현 조선시대 : 전주속현 1910 : 금구군(10개면 관장) 1914 : 김제군에 합병 금구면 1995. 1. 1 : 도.농통합형 김제시금구면 *각 리별 변천사 금구리 본래 금구군 동도변 지역으로서 금구읍내가 되므로 "금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에 따라 성길리, 장교리, 상학리를 합하여 "금구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서도리 본래 금구군 서도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신리, 양명리, 하하리 일부를 합하여 "상신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는데, 1995년 8월31일자 김제시 조례 제144호(읍면동의 명칭 개정조례) 에 따라 "상신리(上新里)"가 서도리(西道里)로 명칭이 변경되 었다. 서도리에는 양명, 상하, 서계 등 3개 마을이 있다. 용복리 [ 용복리 ]에는 대복, 하천, 선락 등 3개 마을이 있다. 선암리 본래 금구군 동도면 지역으로 곧게 선 바위가 있어 "선바우" 또는 "선암" 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적리, 영천리와 전주군 우림면의 축령리를 합하여 "선암리(仙岩里)"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 에 편입되었다. "선암리"에는 영천, 축령 두 마을이 있다. 월전리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월과 봉산, 동도면의 어전리를 합하여 당월과 어전의 이름을 따 "월전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월전 리"에는 어전, 연동, 봉산, 당월 등 4개 마을이 있다. 오봉리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양리, 지봉리 목련의 일부를 합 하여 오양과 지붕의 이름을 따 "오봉리"라는 이름으로 김 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오봉리(五鳳里)"에는 양석, 오산, 지상, 봉림, 목련 등 5개 마을이 있다. 대화리 본래 금구군 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장리, 오양리, 동화리 일부와 전 주군 이서면의 앵곡리 일부를 합하여 대장과 동화의 이름을 따 "대화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대화리"에는 금천, 대야, 장항 등 3개 마을이 있다. 산동리 본래 금구군 낙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둔산리와 동면의 율암리, 대장 리 일부를 합하여 [산동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폅이되었다. [산동리]에는 대율, 구 암, 동둔, 서둔 등 4개 마을이 있다 낙성리 본래 금구군 낙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흥이, 장흥리, 사방리를 합하 여 [낙성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낙성리]에는 신흥, 분토, 장흥, 상사, 사방 등 5개 마을이 있다. 청운리 본래 금구군 낙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불로리와 중평리, 서도면의 상 리, 이북면의 용은리와 옥성리 일부를 합하여 [청운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 었다. "청운리"에는 불로, 사동, 상리 등 3개 마을이 있다 용지리 본래 금구군 동도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광현, 용산, 우산, 반용 등을 합 하여 용사와 이곳에 있는 웅지(熊池) 이름을 따 [용지]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 다. [용지리]에는 우산, 광현, 용사 등 3개 마을이 있다. 옥성리 본래 금구군 이북면 지역으로 [옥성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도면의 용정리 일부를 합하여 [옥성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쌍감(황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 월 15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옥성리]에는 용전, 사동, 율산 등 3개 마을이 있다 하신리 본래 금구군 서도면 지역으로 [하신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북면의 학성리 일부를 합하여 [하신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금구면에 편입되었다. [하신리]에는 상 송, 하송, 개전, 정농 등 4개 마을이 있다. 
김제시 만경읍(萬頃邑)
만경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만경군청이 있었기 때문에 만경읍내라 하였다.

◆위치 : 전북 김제시 북부 ◆인구 : 4,638명(2001) ◆면적 : 24.01㎢ ◆문화재 : 만경향교대성전(전북문화재자료 114), 만경향교 동서재, 만경향교 명륜당, 능제, 회 동서원, 성모암, 진묵사, 조앙사, 만경두릉성 

* 지명유래

1. 만경리(萬頃里) 만경리는 만경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만경군청이 있었기 때문에 만경읍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 정구역 통폐합에따라 --외신, 외동, 독곡, 중리(으뜸이 되고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 외서 (말이 죽으면 묻던 지역이라 말무덤이라 했고 만경읍성 성밖 서쪽에 있는 마을), 대문내(대문 안, 사대문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 동문내(동문안, 만경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교동이라 부 름), 송전의 일부를 합하여 만경리라는 이름으로 김제군 만경리에 편입되었다.--만경리는 서문 외, 대문내, 외서리, 북리, 내남, 상원, 남리, 남산, 중리, 교동, 산본 등 11개 마을이 있다. 2. 장산리(長山里) 서쪽은 소토(小土), 남쪽은 관상, 동쪽은 청하면 대청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마을의 산 이 길게 뻗어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본래 만경군 군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에 따라 --大竹(삭녕최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고 원래 푸르 른 대나무가 많이 난다하여 만경군 현내면 죽청리로 불리었음)--龍 洞(백제시대 마을이 형성될 때 용제동, 용지동이라 불리웠고 용이 올라간 연못이 있는 동네라하여 용동이라 하였다 함)--農村(만경현 당시에는 천민들이 살던곳이라 하여 民村이라 불리우다 농촌으로 바뀌었다 함)--대 동, 산본(마분을 버렸다 하여 마분리하고 불리웠고 산중턱까지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산본이 라 함)의 일부와 북면의 송상리(松上里)일부를 합하여 장산리가 되었음. 현재는 장산, 대죽, 황상동(원래 여자가 누런 치마를 이룬 형상이라 하여 황상골, 누런 황토흙 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황상골), 용지동 등 4개 마을이 있다. 3. 대동리(大東里) 동쪽은 백산면 수록리, 남쪽은 백산면 부거리, 서쪽은 장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본래 만경군 군내면 지역으로서 만경읍내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죽(小竹) : 내죽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내죽의 대밭에 비해 대밭이 작다하여 소죽이라 불리우고 거운동 또는 거름골, 거롱골이라함.--내죽(內竹) : 대동 서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가운데 좋은 대밭이 있는데 그 대밭 가운데에서 기죽(旗竹)이 나왔다 하여 내죽이라 하였음. 소동, 농촌의 일부와 남일면의 부흥일부 김제군 연산면의 산치리 일부 를 합하여 김제군 만경에 편입되어 현재는 대동, 소동, 동상동(동상골이라고 부르며 주변에 있 는 동산에서 늘 물이 흘러 내린다 하여 붙여진이름), 내죽등 4개 마을이 있다. 
김제시 백구면(白鷗面)
본래는 김제군 지역으로 공동면(公洞面)이라 하였다.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6,755명(2001) ◆ 면적 : 21.98㎢ 

* 지명유래

본래는 김제군 지역으로 공동면(公洞面)이라 하여 마전, 난산, 반월, 신모,둑령, 맥산, 창산, 영 천, 상모, 중모, 석담, 신복, 신성의 13개 동리를 관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 라 회포면(匯浦面)의 상도, 상신, 신덕,쌍강, 도도, 신흥, 유강의 7개 동리, 목연면(木淵面)의 봉 산, 화죽, 월연, 부용, 외가전, 내가전, 유천, 강좌, 율포, 신정, 장신, 제내, 백구, 신천, 우담, 고 잔, 의 16개 동리, 모촌면(母村面)의 이작리 일부, 익산군 춘포면(春浦面)의월포리, 고잔리, 신 덕리, 회화리 일부, 익산군 남일면(南日面)의 감상리, 동자포리 일부, 전주군 이북면(伊北面)의 신오리 일부, 만경군 북이도면(北二道面)의 동계리 일불를 합하여「백구정(백구리)」의 이름 을 따「백구면」이라하여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의하여 만경강을 경계로 삼정리 일부를 이리시 에, 반월리, 강흥리 일부를 익산군 춘포면에 넘겨 주는 동시에 익산군 오산면의 목천리, 남전 리, 신지리의 일부를 편입시켰다. 동쪽은 완주군 이서면, 서쪽은 공덕면, 남쪽은 용지면, 북쪽은 만경강 건너 익산군은 오산면과 춘포면, 이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구면」에는 월봉, 부용, 유강, 삼정, 백구, 반월, 석 담, 학동, 마산, 영상, 도도, 강흥, 도덕 등 13개리가 있는데, 1994년 12월 22일자로 도도리 강흥 리, 도덕리 등 3개 리가 전주로 편입되어 10개 리가 있는데, 1995년 1월 1일자로 김제군이 김제 시와 통합됨에 따라서 김제시 「백구면」이 되었다. 
김제시 봉남면(鳳南面)
봉남면의 동남부는 노령산맥계의 연봉이 뻗어 내려가는 금구면, 금산면이 인접 하고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4,029명(2001) ◆ 면적 : 23.74㎢ ◆ 주요문화재 : 김제 봉남면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280), 김제 봉남면의 왕버들(천연기념물 296) 

* 지명유래

 연 혁 조선시대 : 금구면관하 하서면, 남면 1914 년 : 하리면, 초처면 1935 년 : 하리면. 초처면 통합 봉남면 1989. 1. 1 : 월성리 김제시 봉황동 편입 1990. 8. 1 : 도장리, 서정리, 양전리 봉황동 편입 1994. 12. 28 : 황산면 남산리 상교마을 봉남면 편입 1995. 1. 1 : 도농복합형 시·군통합 김제시 봉남면 지형유래 봉남면의 동남부는 노령산맥계의 연봉이 뻗어 내려가는 금구면. 금산면이 인접 하고 서북부는 신풍동. 황산면이 인접하여 많은 소구릉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 는 중앙좌지에 봉남면이 아담하게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정읍시 감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봉남면의 변천과정은 조선조 말엽에 금구현 관하 하서면과 남면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하리면이라 개칭하였으며, 또다시 1935년 행정구역 변경과 동시에 하리면과 초처면을 병합하여 봉남면이라 칭하였습니다. 또한 용산리를 금산면으로 오정리를 황산면으로 각각 이속시켰습니다.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되면서 월성리가 김제시에 편입되었고 이듬해인 1990년 8월 1일 양전리, 서정리, 도장리가 김제시에 또다시 편입되어 현재 법정리로 대송리, 평사리, 화봉리, 신호리, 신응리, 종덕리, 행촌리, 구 정리, 회성리, 내광리, 용신리로 총11개리, 행정분리 기준 총36마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봉남면의 주 소득원은 쌀농사 중심으로 지난 김제군 시절에는 "제1봉남", "제2 oo" 말처럼 잘살고 풍요로운 부촌면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김제시 탄생과 더불어 법정리 4개리가 신풍동으로 편입된 지금에는 면세가 많이 약화된 편이며, 21세기 들어 세계무역 개방화, 관세철폐 움직임에 쌀값하락등 어려운 시점 에 봉남농협RPC에서 쌀의 차별화 전략으로 "푸른마을 쌀" 및 "알짜미"를 생산하여 봉남농민 들의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면 출신 주요인사로는 국회의원 2-3대를 지내신 구정리 구성마을 송방용의 원(현서울거주)과 전라북도 초대 도의회 의장을 지내신 신호리 구호마을 임종엽 도의원(사망)이 있어서 봉남면을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우리고장 봉남면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 280호인 동령마을 느티나무와 296호인 성덕마을 왕버들나무가 존재하므로 현재의 봉남면을 우뚝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제시 부량면(扶梁面)
수백년전에 있었던 용초라는 큰 못에서 용이 출수하였다 하여 용성 리라 칭하게 됨

◆ 위치 전북 김제시 ◆ 인구 2,449명(2001) ◆ 면적 20.12㎢ ◆ 주요문화재 김제 벽골제비 및 제방(사적 111) 

* 지명유래

◆ 용성리(龍成里) 수백년전에 있었던 용초라는 큰 못에서 용이 출수하였다 하여 용성 리라 칭하게 됨. 복촌(福村) : 일명 되평안이라 불리우며, 빈한한 농가가 형성한 부 락으로 복을 빌기 위한 의미 로 복촌이라 칭하게 됨. 포교(浦橋) : 부락이 섬과 같이 되어 다리로 통행하게 되므로 포교 라 칭하고 또 개다리라고도 불리움. 상방(上芳) : 화초밭의 웃 부락에 위치하여 상방이라 하고 꽃다운 화초밭의 웃마을을 의미하여 웃 방화리라고도 칭함. 하방(下芳) : 화초밭의 아래 부락에 위치하여 하방 또는 아래 방화 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연못 이 있어 방하(芳荷)라고도 불리움. 금화(金禾) : 일제시대 화호리 웅봉농장의 어민촌으로 부락을 형성 하고 가을철에 벼빛이 금빛 같았다는 의미로 금화라 칭하게 됨. 대성(大成) : 빈한한 농가가 형성되어 크게 이룬다는 의미로 대성 이라 칭하게 됨. ◆ 금강리(金江里) 지역이 낮아 동진강 물이 접근되고 그 물빛이 금과 같아 금빛의 금 과 동진강의 강을 따서 금강 리라 칭하게 됨. 전포(前浦) : 포강의 전면에 위치되어 있어 전포라 칭하였고 김씨 가 많이 거주한다하여 김촌 (金村)이라고도 불리움. 후포(後浦) : 포강이 후면에 위치되어 있어 후포라 칭하였고 강씨 가 많이 거주한다 하여 강촌 (姜村)이라고도 불리움. 금신(金新) : 행정구역 금강리 내에 신설부락이라고 하여 금신이며 일제시대 농토를 따라 이민 을 왔다하여 일명 이민촌이라고도 하고 행정구역인 금강리의 금강신기라고도 함. 
김제시 성덕면(聖德面)
본래 만경군 지역이며 남일면 이라는 명칭으로 71개리 관할.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3,087명(2001) ◆ 면적 : 22.27㎢ 

* 지명유래

 ○ 연 혁 - 본래 만경군 지역이며 남일면 이라는 명칭으로 71개리 관할. - 1914년 남이면의 4개리와 상서면, 군내면, 대촌면의 일부를 통합, 성덕산의 명칭을 따 성 덕면으로 불리어짐. - 지금은 대목,대석,묘라,석동,남포,성덕등 6개리 31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 1995.1.1. 시군통합으로 김제시 성덕면으로 변경. ◆ 지명유래 ○ 대목리(大木里) 대목리는 큰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대목리」라 불렀는데 신흥,다복동,탄상,탄하,대목산,옥동, 소목산등 7개 마을로 구성된다. ○ 대석리(大石里) 돌샘 근처의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석이라 하였는데 대석리는 대석,소석,용소,신등,신평,수교 등 6개 마을로 구성된다. ○ 묘라리(妙羅里) 약 300년전 두사총이라는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이 이곳을 지나면서 풍취라대(風吹羅帶)의 지형 이라 하여 「묘라」라 불렀으며 이 마을에 맨처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은 임씨라고 한 다. 묘라리는 묘라,후리 두무동등 3개 마을로 구성된다. ○ 석동리(石洞里) 「돌팍재」(석동 동쪽에 있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어서 「돌팍재」 또는 「석동」이라 불렀 으며 석동리는 석동1,석동2, 상리,도하,양지등 5개 마을로 구성된다. ○ 성덕리(聖德里) 본래 김제군 만경면 지역이었던 「성덕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모산, 나시, 남포 의 각 일부와 상서면의 부동 정동의 일부를 합하여 성덕리라 불리워진다. 성덕리는 모산,나시, 고현등 3개 마을로 구성된다. ○ 남포리(南浦里) 본래 만경군 남이면 지역으로 남쪽의 바닷가에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남포」라 하였고 이범 산,한포,남포1,2,3,4,5등 7개 마을로 구성된다. 
김제시 신풍동(新豊洞)
신풍동은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1913년 김제역이 새로 생겼다..

◆ 위치 : 전북 군산시 ◆ 인구 : 1만 2636명(2001) ◆ 면적 : 1.22㎢ 

* 지명유래

신풍동은 본래 김제군 입천면 지역으로서 1913년 김제역이 새로 생김에 따라 이 일대가 왕래하 는 사람이 많아지고 풍성하게 되었다 하여 풍년촌, 또는 신풍촌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914 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용진리(龍津里), 내호리(內狐里), 사진리(沙津里), 소검산(小劒山), 용호 리(龍湖里)의 각 일부가 흡수되어 신풍리로 김제면(읍)에 편입되었다. 그 뒤 모새멀, 잿배기, 소속골, 안터등으로 불리다가 다시 신풍1구(평강,당사), 신풍 2구(역전 통), 신풍3구(전기회사뜸), 신풍4구(모새멀, 잿배기, 쇠전터), 신풍5구(안터) 신풍6구(전기회사 뜸, 소속골)로 불리었는데 인구증가에 따라 신풍 1구(샛터), 신풍 2구(역전통), 3구(전기회사 뜸), 4구(잿배기), 5구(전기화사뜸), 6구(소속골), 7구(쇠전터), 8구(모새멀), 9구(안터), 10구(쇠 전터), 11구 (소속골)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정구역 명칭보다 샛터, 당사골, 남신, 역전통,가마니조합 뒤, 전기회사뜸, 잿 배기, 모새멀, 안터, 소속골, 쇠전터, 창고마을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불렀다. 최근에는 또다시 마을 이름이 바뀌어서 평강, 당사, 남신 , 역촌, 동신 ,금성 ,화신 ,신흥, 대촌, 내기, 당산, 신당, 대흥, 대동으로 불리었는데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 라 용동지역과 함께 김제시에 편입되어 신풍동이라 부르고 있다. 용동에는 여수해, 용호, 예동, 신기 4개 마을이 있다. 봉황동은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동으로 봉남면의 월 성리와 황산면의 황산리, 난봉리, 오정리를 합하여 봉남면과 황산면의 머리글자를 따서 봉황동 이라는 이름으로 김제시에 편입되었다. 봉황동에서는 황산동, 난봉동, 오정동, 월성동과 1990년 8월 1일 김제시에 편입된 도장동,서정 동,양전동등 7개의 법정동이 있다. 그 후 1998년 9월 26일 봉황동지역(7개동)과 신풍동지역(2개동)이 통합되어 김제시 신풍동으로 되었다. 
김제시 요촌동(堯村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성황리, 외리, 도동리 일부와 입천면의 내리 일부를 합하여 요촌리로 김제면에 편입함.

◆ 위치 : 전북 김제시 ◆ 인구 : 1만 2776명(2001) ◆ 면적 : 11.08㎢ 

* 지명유래

1. 요촌동 김제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요촌동은 동쪽으로는 검산동, 서쪽으로는 서암동, 남쪽으로는 옥산동, 북쪽으로는 하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요촌동은 본래 김제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성황리, 외리, 도 동리 일부와 입천면의 내리 일부를 합하여 요촌리라는 이름으로 김제면(읍)에 편입되어 됫배, 성황댕이, 관웅이, 나무전거리로 나누어 불렀고, 다시 되바우, 성황당, 삼정목, 본정통, 시장통, 진밭머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행정구역 명칭으로 요촌 1구, 요촌 2구, 요촌 3구, 요촌 4구, 요촌 5구, 요촌 6구롤 부 르기도 하였으며, 후에 또다시 되바우, 성황당, 새장터, 삼정목, 묵은 소전거리, 본정통, 사정거 리, 사장통, 진밭머리로 불렀다. 그러던 것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마을의 수가 늘어나자 평화, 후암, 성황, 용성, 요륜, 벽성, 화동, 문동, 중동, 정동, 장전, 영동, 궁전 등 13개 마을로 나누어졌는데, 1989년 1월 1일 김제읍 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 요촌동이 되었다. 요촌동은 조용하고 사람들이 온순하여 요순시대와 같은 평화로운 마을이란 뜻으로 요촌이라 부 르게 되었다고 한다. (1) 서낭댕이(성황댕이) 토지의 부락을 수호하는 신을 성황신이라고 하는데, 길가의 큰 나무 아래나 사당(성황사)이 성 황신의 거처가 되며, 이곳을 성황당 또는 서낭댕이라고 부름.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동멩이를 정성껏 올려 놓고 지나가는데, 이는 성황신에게 재난을 물리 쳐 주고, 복을 내려 주기를 빌며, 아울러 소원성취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함. 김제 군지를 보면 군의 동쪽 2리 지점에 성황사가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으로는 그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주민의 말에 의하면 김제 국민학교와 중앙국민학 교 사이에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사있길이 있는데, 그 중간 지점에 정자나무와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일대를 서낭댕이, 성황댕이로 불렀다고 한다. (2) 나무전거리 김제국민학교에서 박약국 앞으로 해서 원예조합까지의 도로변 (옛 벽서중학교자리)을 가리킨 다. 연탄이나 석유가 흔하지 않던 시절, 아궁이레 불을 지펴서 밥을 짓고, 난방 시설도 온돌이 고작 이었기 때문에 나무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땔감이었다. 그래서 백산면 등지에서 소나무 잔가지나 솔잎, 억새풀, 갈대 등을 말려 지게에 짊어지고 나와 팔았기 때문에 날마다 나무시장이 섰다. 그래서 이곳을 나무전거리라고 불렀다. (3)닭전머리 박약국 사거리에서 시장으로 들어가는 도로변 양측으로 장날이면 닭을 사고 팔던 장소가 있었 다. 이곳을 닭을 팔고 사는 장소라는 뜻으로 닭전머리라고 불렀다. (4)솥전거리 구시장(상설시장통)과 현 조해양조장 뒤인 묵은 쇠전거리 사이에 있는 마을로 솥을 파는 거리라 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처럼 양은솥이나 압력솥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모두 주물로 만든 검정솥을 사용했기 때문에 솥을 사려면 이곳에 와야만 했다. 지금도 솥전거리 모퉁이에서는 주물로 만든 검정솥을 팔고 있어 마을이름의 유래를 말해 주고 있다.
김제시 청하면(靑蝦面)
본래 만경군 지역으로 북일도면이라 하여 장산등 18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 위치 : 전북 김제시 중북부 ◆ 인구 : 3,166명(2001) ◆ 면적 : 19.79㎢ ◆ 문화재 : 덕성사, 청운사 

* 지명유래

○ 1914 이전 : 본래 만경군 지역으로 북일도면이라 하여 장산등 18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 1914 ∼ :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경군 북면의 송상, 송중, 송하의 일부와 김제군 마천면 의 관상외 13개동리, 동이도면의 신기리 일부를 합하여 청하산의 이름을 따 청하면이라는 이름 으로 김제군에 편입 ◆ 관상(官上) 조선시대 중엽 전(全),송(宋),오(吳),조(趙)씨 등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씨는 고종 초에 참판을 지냈고, 오씨는 오사황(吳事惶)은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좌랑, 정령, 현 감 등을 지냈다고 하는데, 이처럼 벼슬한 사람이 많이 살게 되자 마을이름을 '관촌'이라 부르다 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관동' 위쪽에 있다 하여 '관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 대청(大靑) 조선시대 선조 14년 무렵 과거시험에 떨어진 이씨가 고향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가 산세가 좋은 이곳 '박막동(대청)'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 만경현 김제현 등의 벼슬아치들이 전주나 서울 등 먼길을 갈 때 이곳에서 말을 갈아탔다고 하여 '백마동' 또는 '박막동'이라 불렀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청하산 밑에 있는 큰 마을이라 하여 '대청'이라 했다고 하며, 옛날 이 마을에 관리들이 말을 갈 아타던 역이 있어 '대청역' 또는 '역마촌'이라고도 불렀다한다. ◆ 석한(石寒) '월현'북쪽에 있는 마을로 '돌챙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고종 때 동래 정씨 정석홍씨가 터를 잡 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뒷산에 서 있던 돌이 얼음처럼 차다고 하여 '돌 찬' 또는 '돌챙이'라고 부르던 것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한자로 적는 과정에 '석한'으로 바뀌 었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돌틈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매우 차다 하여 '석한'이라 했다는 사람 도 있다. ◆ 목교(木橋) '월현'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중엽 부안에 살던 임씨가 이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 었다고 하는데, 임씨는 당시 부안을 휩쓸던 전염병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 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의 이름은 마을 동쪽에 있는 태산의 이름을 본떠'태뫼'또는'태메'라도 하였 는데, 그 후 마을 입구에 흐르던 조그만 시냇물에 나무다리가 놓여 있어 마을이름을 '목교'로 고 쳐 불렀다고 한다. 
남원(南原) 도통(道通)
- '도통'은 뛰어난 인재 배출을 기원하는 이름

◆ 위 치 : (1)전북 남원시 도통동, 향교동(鄕校) 일원 (3)전북 남원시 도통동, 월락동(月洛) 일원 ◆ 면 적 : (1)78,931평(260,929m2) (3)115,097평(380,486m2) ◆ 연 혁 -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으며, 백제의 고룡군(古龍)으로서 별호를 용성(龍城)이라 함. - 206년(백제 초고왕 41) 대방군(帶方)이 되고, 그후 다시 남대방군이라 함. - 685년(신라 신문왕 5) 남원소경(小京)으로 승격됨. - 757년(신라 경덕왕 16) 전국의 지방조직과 지명을 당나라식으로 비꿀 때 지금의 이름인 남원이라 칭함. - 940년(고려 태조 23) 남원소경을 남원부(府)로 함. - 1310년(충선왕 2) 다시 대방군이라 하였다가 도로 남원군이 됨. - 1360년(공민왕 9) 다시 남원부로 승격됨. - 1413년(조선 태종 13) 관례에 따라 남원부는 남원도호부가 됨. - 세조때 진을 두었고, 1739년(영조 15) 일신현(一新)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인 1740년에 복구됨.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남원부를 둠. - 1914년 부군면 폐합에 따라 남원군이 됨. - 1931. 11. 1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됨. - 1981. 7. 1 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됨. - 1995. 1. 1 남원시와 남원군이 통합되어 남원시가 됨

* 지명유래

- '남원'은 통일신라에서 9주 5소경을 둘 때 설치한 다섯 소경의 하나로서 소경은 대개 5방(五方)에 대응하여 설치하였다. - 5방은 북원=원주, 서원=청주, 중원=충주, 남원=남원, 금관경=김해의 5소경을 말한다. - '남원(南原)'은 나라안에서 중요한 '남쪽 벌'을 뜻하며 '서라벌'이 '새벌'이었음과 서로 통한다. - 도통동(道通)은 그전 동도(東道) 마을과 신통리 마을이 었었는데, 두 마을의 뒷 글자를 따서 '도통'이라 부르면 많은 인재가 나올 것을 기대한 이름이라고 한다. - 이곳은 남원군 통한면에 속한 곳이었으며 1914년 도통리라 하여 남원읍에 편입된 곳이다. - '도통'이란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다는 뜻이며, 그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를 뜻한다. - '향교(鄕校)'는 서울(京)에 대하여 '지방(鄕)의 학교' 라는 뜻이다. 관립학교로서 각 고을에 두었는데, 향교가 있었던 곳을 향교동, 교동 등으로 부르고 있다. - 월락동(月洛)의 '월락'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이다. - 본래 남원군 갈치면 지역으로서 낙현리(洛峴:누룩쟁이)와 월천(月泉)리 마을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월낙리라 한 것이다. - 월락동에는 천사봉(天使峰)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은 정유재란때 천사(天使=명나라 사신) 송대빈이 이 산에 올라가 왜적의 형세를 살폈기 때문이라고 한다.(하늘의 천사가 아닌 명의 사신을 말한다.)
양남(兩南)지방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양호(兩湖)지방
충청도(호서)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영호남(嶺湖南)지방
경상도(영남)지방과 전라도(호남)지방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익산(益山) 마동(馬洞)
- 조선시대 말 먹이던 목장 있던 곳

◆ 위 치 : 전북 익산시 마동, 주현동(珠峴), 동산동(銅山) 일원 ◆ 면 적 : 134,088평(443,266m2) ◆ 연 혁 - 기자조선의 끝 임금 기준(箕準)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와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고 함. - 그 후 백제 시조 온조왕이 차지하여 금마저(金馬渚)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금마군(金馬)으로 고침. - 옥야현(沃野)은 백제의 소력지현(所力支)인데 신라 경덕왕때 옥야현으로 고쳐서 금마군에 딸린 고을이 됨. - 함열현(咸悅)은 백제의 감물아(甘勿阿)현인데, 신라 경덕왕때 지금의 이름인 함열로 고쳐서 임피군에 딸린 현이 됨. - 1344년(고려 충혜왕 5) 이 고을 사람 기자오의 막내딸 기씨(奇氏)가 몽고에서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어, 이곳은 그 친정이 되므로 익주(益州)로 승격됨. - 소력지현은 고려초 전주에 붙였다가 1176년(명종 6) 감무를 두었고, 뒤에 다시 전주에 붙임. - 함열현은 고려초 전주에 붙였고, 1176년(명종 6) 감무를 두었으며, 용안현(龍安)은 함열현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 또는 창산소(蒼山所)라 부르던 곳인데, 1339년(고려 충숙왕 8) 이 고을사람 백안부개가 원나라에서 본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용안'으로 고쳐서 군을 둠. - 1413년(조선 태종 13) 금마군을 익산군으로 고쳤고, 여기에 소력지현도 병합됨. - 용안군은 1390년(공양왕 3) 전주에 딸린 풍제(豊堤)현과 합해졌으여, 1409년(태종 9) 함열과 용안을 합하여 안열현(安悅)이 되었다가 1413년 현감을 두었고, 1416년(태종 16) 다시 함열과 용안현으로 나누어짐.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용안현은 용안군으로, 함열현은 함열군으로, 익산현은 익산군이 됨. - 1914년 일제에 의한 부군면 폐합때 용안군, 함열군, 익산군, 여산군이 합해져 익산군이 됨. - 1931. 4. 1 익산면이 익산읍으로 승격되고, 1949. 8. 15 이리부가 이리시로 바뀜. - 1995. 5. 10 이리시와 익산군이 병합되어 익산시가 됨

* 지명유래

- 그전 이리시(裡里)는 솝리(속리)라고 부르던 곳이다. 곧 우리말의 '속(리:裡)리(里)'가 된 것이다. - '속리(솝리)'는 옛날 만경강가의 갈대 우거진 강변 안쪽 마을이었으므로 '속마을'이라 하여 부르게 된 명칭이라고 한다. - 한편 '익산(益山)'은 '이리'보다도 더 광범위한 지역에 대하여 더 오랜 연원을 가진 이름이다. - 옛 이름 '금마(金馬)'를 '익산'으로 바꾼 것이 고려 충혜왕때인데, 이때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이 고을 출신으로 큰 덕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명칭에 '익(益)'자를 넣어 익주, 익산이라 하였다. - 익산의 옛 이름 '금마'에서 '금'은 성스러움, 높음, 임금, 또는 크다는 뜻을 나타내는 옛말 에서 온 이름이다. - 따라서 '금마'는 공주의 옛 이름 '고마나리'의 '고마'나 일본말의 가미(神), 개마고원의 '개마'와 같은 말줄기이다. - '마동(馬洞)'은 그전에 말을 먹이던 곳이므로 마골 또는 마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전 전주부 남일면이었으며 1899년 익산군 남일면이 되었고, 뒤에 이리읍에 편입된 곳이다. - 마(말)는 높다거나 크거나 신성함을 나타내는 옛말로서, 이것이 오늘날 마(馬)로 해설되는 경우가 많은데, '마동'은 큰 골, 또는 산골을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할 수 있다. - 주현동(珠峴)은 본래 '구슬고개'라고 부르던 곳이다. 일제때인 1933년에는 이 지역을 서정(西町)이라 하였고 해방후 '구슬 주(珠)'자를 따서 주현동이라 한 것이다. - 동산동(銅山)은 우리말 풀이 그대로 '구리메'라 불렀던 곳이다. 그러나 광물인 구리가 생산되는 곳이 아니라 땅이 질퍽한 곳을 구리뫼, 구리개 등으로 부르는데, 이곳 역시 흙이 질어서 구리메라 한 곳이며, 구리=동(銅)을 훈차하여 '동산'이 된 것이다
익산(益山) 산업단지
- 그전 익산군 팔봉면에 속한 지역

◆ 위 치 : (2-1)전북 익산시 팔봉동(八峰), 용제동(龍堤), 부송동(富松) 일원 (2-2)전북 익산시 팔봉동, 용제동 일원 ◆ 면 적 : (2-1)146,531평(484,440m2) (2-2)229,248평(757,845m2)

* 지명유래

- 팔봉동(八峰)은 그전 익산군 팔봉면이었으며, 이곳 팔봉리에 팔봉산(八峰山)이 있는데, 꼭대기가 여덟 봉우리로 되어 있다. - 용제동(龍堤)은 그전 익산군 팔봉면 용제리였으며, 그 이전에는 익산군 두천면에 속한 용연(龍淵)과 이제(梨堤:배못)마을로 되어 있었다. -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하면서 용연과 이제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용제리가 된 합성지명이다. - 부송동(富松) 역시 그 이름이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조립된 합성 지명이다. - 이 지역이 익산군 두천면에 속한 곳인데, 부평(富坪)마을과 송정(松亭)마을 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부송리라 하였다
익산(益山) 영등(永登)
- 민속행사인 '영등맞이'에서 비롯된 이름

◆ 위 치 : 전북 익산시 영등동, 어양동(於陽) 일원 ◆ 면 적 : 104,302평(344,800m2)

* 지명유래

- 영등동(永登)은 곡영(谷永)=골영등, 동영(東永)=동영등, 신성(新成)=새터영등 등으로 나누어 부르는 곳인데 지형이 긴 등성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 그러나 이 설에 대해서는 중부이남지역, 특히 호남지역에서 음력 2월에 영등할머니를 맞아 들이는 것을 영등맞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지명으로 볼 수 있다. - 어양동(於陽)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어양'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여진 곳이다. 그전 '느릇'이라 불렀던 어곶(於串)과 양지리 등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어양동'이라 한 것이다
전라도(全羅道)
‘전라’란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합성지명이다.



* 지명유래

‘전라’란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합성지명이다. 1018년(고려 현종 9) 처음으로 ‘전라도’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그전에는 강남도, 해양도, 전광도라고도 불렀 다. 1407년(조선 태종 7)군사 행정상 편의에 의하여 좌, 우도로 나누었는데, 동쪽 산악지대를 좌 도, 서쪽 평야지대를 우도라 하였다. 관찰사는 전주에 두었으므로 감영을 완영(完營), 감사를 완백(完伯)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완’은 옛 이름 완산주의 머리글자를 취한 것이다. 
전주(全州) 공업단지
- 온·완·전(全)이 같은 뜻의 완전한 땅

◆ 위 치 :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일원 ◆ 면 적 : 207,719평(686,674m2)

* 지명유래

- 전주(全州)의 옛 이름인 '비자화' '비사벌'의 '비(比)'는 병(竝), 등(等), 쌍(雙), 첩(疊), 중(重)을 나타내는 말로서 옛 말 '가라' 또는 '고로'의 표기이며 그 뜻은 장성(長城), 대성(大城)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 또 완산과 전주의 '완(完)' '전(全)'은 모두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로서 「온=전=완」을 같은 말로 본다. 3) - '완'과 '전'은 온누리, 온세상, 온통의 '온'을 나타낸 말로서 '백제(百濟)'와 그 옛이름 '십제(十濟)'의 백(百), 십(十)의 고어가 on(온) 이었을 것으로 본다. - 따라서 시조 온조왕의 이름인 '온'과 국호 십제의 '십', 백제의 '백'을 같은 새김음으로 보는데, 완주(완산), 전주의 '완', '전'은 이 '온'을 나타내는 훈차표기라 할수 있다. 4) - 현지 노인들은 전주가 평야를 낀 산자수명한 고을이자 전략적 요새지로서 완전무결한 고을이므로 완산, 전주라 부른다고 풀이하기도 하고, 『주례고공기』에 나오는 '천자용전(天子用全)'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 덕진구 팔복동은 그전 팔과정(八科亭)(터)과 신복리(新福)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1957. 12. 12일부터 팔복동이라 불렀다. - 팔과정은 조선 인조때 과거에 오른 판교 홍남립, 사간 이흥발, 목사 이흥록, 필선 이기발, 장령 이후선, 진사 이생발, 이순선, 송상주의 8인이 세웠던 정자라고 한다. - 신복리는 신교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그 이름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전주(全州) 동전주(東全州)
- 전주의 동부지역을 뜻하는 이름

◆ 위 치 : 전북 전주시 덕진구(德津) 우아동(牛牙) 일원 ◆ 면 적 : 195,996평(647,921m2) ◆ 연 혁 - 삼한시대에는 전주지역이 마한의 땅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완산(完山), 비자화(比自火)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 함. - 백제 위덕왕때인 555년(위덕왕 2) 완산주(完山州)로 하였고, 565년(같은 왕 12)주를 페지함. - 660년 (의자왕 20)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자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관할이 됨. - 670년(문무왕 10) 신라에 딸린 후 685년(신문왕 5) 다시 완산주라 함. - 757년(경덕왕 16) 통일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인 전주(全州)로 고치고 신라 9주의 하나가 됨. - 900년(효공왕 4) 견훤이 이곳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고 견성(甄城)이라 함. - 견훤의 아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하매 936년(고려 태조 19) 태조가 친히 신검을 쳐 없애고 안남(安南)도호부를 둠. - 940년(태조 23) 다시 전주로 고치고 995년(성종 14) 12주(州)에 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 됨. - 1018년(현종 9) 강남도(江南道:지금의 전라북도), 해양도(海陽道:지금의 전라남도)를 합하여 전라도(全羅道)가 되고 전주는 안남 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022년(현종 13) 전주목이 됨. - 1392년 (조선 태조 원년)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 유수부(完山 留守府)로 승격되었고, 1403년(태종 3) 전주부로 고침. ※ 전주이씨 시조 이 한(李 翰)공으로부터 목조(穆祖:태조의 5대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세거한 곳. - 1447년(세종 29) 전라도 안찰사라는 관직을 도관찰출척사로 바꾸고 세종 33년에는 전주부윤을 겸임케 함. - 1914. 10. 1 전주면이 설치 되었다가 1931. 4. 1 전주읍으로 승격됨. - 1935. 10. 1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되어 완주군에서 분리됨. - 1949. 8. 15 전주부가 전주시로 고쳐짐. - 1989. 5. 1 구제 실시에 따라 완산구와 덕진구가 설치됨

* 지명유래

- 전주(全州)의 옛 이름인 '비자화' '비사벌'의 '비(比)'는 병(竝), 등(等), 쌍(雙), 첩(疊), 중(重)을 나타내는 말로서 옛말 '가라' 또는 '고로'의 표기이며 그 뜻은 장성(長城), 대성(大城)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1) - 또 완산(完山)과 전주의 '완(完)' '전(全)'은 모두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로서 「온=전=완」이 같다. - '완'과 '전'은 온누리, 온세상, 온통의 '온'을 나타낸 말로서 '백제(百濟)'와 그 옛이름 「십제(十濟)」의 백(百), 십(十)의 고어가 on(온) 이었을 것으로 본다. 2) - 따라서 시조 온조왕의 이름인 '온'과 국호 십제의 '십', 백제의 '백'을 같은 새김음으로 보는데, 완주(완산), 전주의 '완', '전'은 이 '온'을 나타내는 훈차표기라 할수 있다. - 또 현지 노인들은 전주가 평야를 낀 산자수명한 고을이자 전략적 요새지로서 완전무결한 고을이므로 완산, 전주라 부른다고 풀이하기도 하고, 『주례고공기』에 나오는 '천자용전(天子用全)'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 한편 '완산'은 남복산이라고도 하고 완산칠봉이라고도 하는 높이 159m의 산이기도 하다. 전주의 남쪽을 지키고 방어하는 산으로 꼽는다. - 덕진구(德津)의 '덕진'은 이곳에 유명한 덕진(德津:德眞)연못이 있기 때문이다. 덕진동의 중앙에 있는 못으로서 넓이는 3만평이 넘고 연꽃이 유명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깊은 못을 일망(一望)하니 푸른 하늘이 비쳐있네. 고래로 이 못을 파기에 몇사람 공이 들었을까. 가을연기 멀리끼어 가을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이것은 덕진 연못에서 옛 시인이 그 풍광을 노래한 시이다. - 이 덕진지(池)는 신라말기에 도선대사가 전주지세를 살펴보니 북쪽이 허전하여 기맥이 흘러나가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건지산과 기련산을 연결하는 큰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 - '우아동(牛牙)'이라는 이름은 1957년 11월 6일 행정구역 재편때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이다. - 행정구역을 통합하면서 그전 완주군 초포면 우방리(牛方)와 용지면 아중리(牙中)를 합하면서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우아동'이 된 것이다. 
전주(全州) 삼천(三川)
- 세 개의 하천 아닌 「세 내」가 흐르는 곳

◆ 위 치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평화동(平和), 효자동 일원 ◆ 면 적 : 219,707평(726,304m2)

* 지명유래

- 삼천동(三川)은 이 마을에 '세내' 또는 '시내'라고 부르는 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삼천동이라고 하며 세 개의 하천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삼천, 즉 세내는 완주군 구이면과 임실군 운암면 경계의 오봉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전주시 경계에서 용복리 물을 합하고, 또 삼천동, 평화동에서 오는 물을 합하여 팔복동 동남쪽에서 가리내가 되는 하천이다. - 그전에는 전주군 우전면에 속하였으며, 1957년에 인근 마을을 통합하여 지금은 삼천 1동·삼천 3동으로 되어 있다. - 평화동(平和)이라는 이름도 1957. 11. 6 조례개정에 의하여 새로 붙여진 이름이다. - 그전 완주군 우전면의 석불리, 문정리, 장천리등을 합하고 새로 평화동이라 하였는데, '평화'에 대하여는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전주(全州) 서곡(西谷)
- 마랏마을 서쪽 골짜기를 뜻

◆ 위 치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덕진구 팔복동(八福) 일원 ◆ 면 적 : 172,739 평(571,038m2)

* 지명유래

- '서곡(西谷)'은 효자동에 딸린 마을로서 그전에 숫골, 섯골, 또는 서중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마랏마을의 서북쪽 골짜기가 되므로 서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 덕진구 팔복동(八福)은 그전 팔과정(八科亭)(터)과 신복리(新福)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1957. 12. 12일부터 팔복동이라 불렀다. - 팔과정은 조선 인조때 과거에 오른 판교 홍남립, 사간 이흥발, 목사 이흥록, 필선 이기발, 장령 이후선, 진사 이생발, 이순선, 송상주의 8인이 세웠던 정자라고 한다. - 그런데 '팔복동'이라는 이름은 성서의 '8복(八福)'을 떠올리게 된다. 곧 마태복음 5장의 그리스도 산상설교중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까지를 8복이라 하기 때문이다. - 신복리는 신교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그 이름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전주(全州) 서신(西新)
- 들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는 뜻

◆ 위 치 : 전북 전주시 덕진구 서신동 일원 ◆ 면 적 : 172,950평(571,736m2)

* 지명유래

- 서신동(西新)은 그전에 전주군 이동면의 지역으로 이곳이 고삿들 가운데가 되므로 고사평(古沙坪)이라 하였고, 또 새터 서쪽에 새로 된 마을이므로 서신이라고 하였다. - 고삿들은 농부들이 농사일을 하다가 들판에서 음식을 먹을 때 산신에게 고사를 지냈으므로 고삿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 새터는 감나무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냇가에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라 부른다. - 서신동은 1940. 10. 1 전주시에 편입되어 서신정이라 하였다가 해방후 왜식동명을 고치면서 서신동이 된 것이다.
전주(全州) 첨단과학산업연구단지
- 봉황이 날아오르는 상서로운 땅

◆ 위 치 :전북 완주군 봉동읍(鳳東) 둔산리(芚山), 장구리(長久) 일원 ◆ 면 적 : 931,000평(3,077,686m2)

* 지명유래

- 봉동읍(鳳東)은 그전에 '봉상면(鳳翔)'이라 부르던 곳이었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한 군, 면, 리 동 폐합시 우동면(紆東)을 합하고 두 면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봉동면이라 한 곳인데, '봉상'은 "봉황이 날아오름"을 뜻한다. - 둔산리(芚山)는 그전 완주군 우동면에 속한 곳이었으며, 뒷산이 '둔산' 이므로 마을 이름도 둔산이라 한다. (대전 둔산지구 참조) - 둔산은 '듬뫼' '돔뫼' 또는 '두메'에 한자를 빌려 쓴 이름이다. - 장구리(長久) 역시 그전 완주군 우동면에 속하였던 곳이며, 이곳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으므로 '장구리'라 부른다고 한다. - 그러나 '장구(長久)'는 '천장지구(天長地久)'의 줄임말로 볼 수 있으며, 그 뜻은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는 뜻이다. - '봉황이 날아오를 상서로운 땅'에 국가의 '장구'한 발전을 위한 첨단과학산업연구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전주(全州) 화산(華山)
- 조선시대 화산서원이 있었던 곳

◆ 위 치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中華山), 효자동 일원 ◆ 면 적 : 172,339평(569,716m2)

* 지명유래

- 중화산동(中華山)의 뒷골에 조선시대 화산서원(華山書院)이 있었으므로 남화산동, 북화산동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곳이다. - 화산서원은 1572년(선조 11) 봄에 세워졌는데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문충공(文忠公), 송인수(宋麟洙)를 모셨고, 1664년(현종 5) 사액을 받았다. - 대원군때 폐철하여 없어졌고, 그후 이완용이 그의 증조모의 묘를 썼다고 한다. - 이곳은 본래 전주군 부서면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화한리라 하였고, 1940. 10. 1에는 왜식명칭으로 화산정(町)이라 하였다. - 해방후 화산동으로 고쳐졌으며, 1957. 12, 12 행정구역 개편때 중산동과 합하여 중화산동이라 하였다. - '화산(華山)'이라는 이름은 전국적으로 매우 많으며, 주서(周書)에 나오는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과 같은 글의 뜻을 따서 붙인 이름이거나 옛 사람들이 '화(華)'자를 특히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 가령 수원성의 본 이름은 화성(華城)인데, 그 유래는 옛날 화(華)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임금에게 세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덕을 기리는 고을이 되라는 뜻으로 '화(華)'자를 쓴 경우와 같다
전주(全州) 효자(孝子)
- 효자 장개남의 지극한 효성이 깃든 곳

◆ 위 치 : 전북 전주시 완산구(完山) 효자동 일원 ◆ 면 적 : 166,555평(550,595m2)

* 지명유래

- 효자동(孝子)은 글자 그대로 효자가 살았으므로 '효자동'이라고 이름한 곳이다. - 효자리 남쪽에 장개남(張凱南) 효자정문이 있는데, 이 정문은 1627년(인조 7)에 정려한 문이다. - 효자 장개남은 그 어머니가 병이 들어서 새의 고기를 원하므로 하늘에 지성으로 빌었더니 기러기 한 마리가 떨어져서 어머님께 봉양하였다고 하며, 기러기가 떨어진 논을 기러기배미 또는 천수(天受:하늘이 주었다는 뜻) 배미라고 불렀다. - 또 그가 모친을 위하여 수박을 구하려고 헤매다녔던 곳을 지금도 수박골이라고 부르며 -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기 몫의 밥을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려고 시내를 건너는데 냇물이 갈라졌다는 이이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 그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서 효자의 이야기는 많이 전해 질수록 좋은 것이며, '효자동'이란 이름도 많을수록 좋다
정읍시 감곡면(甘谷面)
전라북도 정읍시 북쪽 평야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5,256명(2001) ◆면적:41.72㎢ 

* 지명유래

감곡면은 백제시대에는 대시산군에 속하였으며 고려시대는 고부군 인의현에 그리고 조선시대 에는 태인현에 속하여 감산면, 은기동면, 사곡면으로 각각 나뉘어 존재하다 왜정시대 1914년 소 규모 면 통폐합계획에 따라 3개면을 합하여 감산면의 감과 사곡면의 곡을 따서 감곡면으로 명명 하였다. 당시에 동으로 천애산 줄기따라 산골마을로 형성된 감산면은 통석리, 계룡리, 화봉리, 대신리 가 속하였고 무쇠, 질그릇 등을 주로 생산하던 은기동면은 반전 반답 지역으로 방교리, 진흥리 가 그리고 조수로 인하여 형성된 모래톱과 갯벌로 형성된 사곡면은 유정리, 삼평리, 용곽리, 승 방리, 오주리가 속하여 잘생긴 고구마 모형으로 동서로 길다랗게 지역구분 된다. 
정읍시 고부면(古阜面)
전라북도 정읍시 북서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5,012명(2001) ◆면적:40.00㎢ ◆주요문화재:장문리 5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13) 

* 지명유래

고부는 본래 백제의 고사부리인데 신라때에는 고부군으로 바뀌었고 고려태조 19년 병신년에는 영주관찰사를 두었고 광종2년 신해년에는 안남도호부로 고쳤으며, 고려 충렬왕때 잠시 영광군에 예속되었다가 다시 고부군으로 회복되어 조선시대는 전기간 에 걸쳐 그대로 고부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정읍현을 휠씬 능가하는 고부군이었다. 즉 조선시대에 정읍은 현이었으나 고부는 군이었다. 광무10년(1904년) 행정구역 개편때 부안면을 흥덕으로 넘겨주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태인군과 함께 정읍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읍시 농소동 (農所洞)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동.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5,618명(2001) ◆면적:18.87㎢ ◆문화재:망제동 석불입상(전북유형문화재 118) 

* 지명유래

원래 정읍현 서이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읍군 정읍면 농소리로 되어 하평리, 효죽리, 농소리, 북면의 하아리, 기영리, 고부군의 소정면, 공평리의 신기리, 복룡리로 편성되었고, 그리고 1931년 4월 1일 읍(邑)승격으로 구역 분리로 효죽동, 하평동, 농흥동으로 나누어졌다. 1981년 7월 1일 시발족으로 농소동으로 격상되었고 1983년 2월 15일 행정 구역 조정에 따라 정읍군 덕천면 망제리, 북면 영파리 구역과 하북리의 기산마을이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읍시 덕천면(德川面)
전라북도 정읍시 중앙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3,177명(2001) ◆면적:20.67㎢ ◆주요문화재:천곡사지 7층석탑(보물 390), 황토현 전적지(사적 295) 

* 지명유래

조선시대때 고부군 우덕면과 달천면으로 명명하여 오다가 일제시대 1914년 4월 1일 에 고부군 우덕면과 달천면을 통합 정읍군 덕천면으로 개칭 그이후 1982년 2월15일 덕천면 망제리가 정주시로 편입 6개리에서 5개리로 축소 1987년 1월1 일 이평면의 도계리가 덕천면으로 편입 6개리로 되어오다가 1995년 1월1일 도 농통합으로 정읍시 덕천면으로 칭하게 됨. 
정읍시 북면(北面)
경기도 가평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경기 가평군 ◆인구3,866명(2001) ◆면적:230.93㎢ 

* 지명유래

원래 정읍군 북일면과 북이면으로 나뉘어졌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2개면 을 병합하여 북면으로 개칭되고 1935년 10월 보림, 우순, 2개면이 폐합되어 보림면의 마정, 보림과 우순면의 화해, 남산 영파가 편입되었다. 북면은 칠보산의 여맥이 서북으로 뻗어내린 구릉지대로 아주 작은 면이었으나 고부군 동부지역과 태인군의 서부지역을 흡수하여 면세 신장을 보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읍시 산내면(山內面)
전라북도 정읍시 남동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2,140명(2001) ◆면적:65.00㎢ 

* 지명유래

산내면은 백제시대 太尸山郡 (태시산군)에 속하였으며 고을터는 칠보면 시산리 였고, 조선시대 산내면으로 개칭하여 부르다가 조선말기부터 산내일변면, 산내이변면으로 나누어 불렀으며, 1914. 3. 1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합 산내면으로 고쳐 불렀 다. 산내면은 정읍의 동남방향에 위치하고 산내의 동으로는 성주산, 서로는 감투봉, 남쪽으로는 회문산, 종석산 등 높은산과 깊은 계곡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다하여 산내(山內)면이라 명명하였다. 
정읍시 산외면(山外面)
전라북도 정읍시 동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3,659명(2001) ◆면적:62.73㎢ 주요문화재 정읍 김동수씨 가옥(중요민속자료 26) 

* 지명유래

원래 산외라는 명칭을 사용하게된때는 1914년이전에 산변방에있는 작은고을 이라는 뜻 으로서 본래 태인군 산외일변면과 이변면구역으로 나누어져 1914년행정구역 개편 에따라 두면을 병합하여 산외면이라하였고 그후1973년 산내면 종산리.목욕리를 편입 하여정읍군 산외면으로 1995년1월1일부터는 정주시와 정읍군 도농통합으로 정읍시 산외면으로 8개리 33분리 67반으로 오늘에이르고 있다 
정읍시 상교동(上橋洞)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동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6,023명(2001) ◆면적:46.17㎢ ◆문화재:유애사(전북기념물 18), 고암서원 묘정비(문화재자료 81) 

* 지명유래

상교동은 상평동과 과교동을 1998년도 인구 5,000미만의 동을 통합설치 하였데 상평이란 3보평 의 ‘윗들’이란 뜻을 한자 표기한 것이며 아랫들이란 하평리라한다. 상평동은 원 정주읍의 상평리와 하모리 구역으로 상평리의 상평, 칠정 당현, 신기, 용흥, 향재, 산중동과 하모리의 모촌,월천으로 분리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모리는 용흥,월천,상모,하모 고부군 소정면 공평리의 일부, 상평리 는 당고리, 상평 서기리, 삼거리, 산우, 향지, 성재, 칠정, 와룡, 향자 일부로 나누어졌다. 1936년 에는 상평리, 당고리, 서기리, 삼거리, 산우리, 향지리, 성재리, 칠정리를 묶어 상평동이라 하였 다. 1981년 시 구역편성 때 상평동이 되었다. 과교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의 삼산리는 삼산, 신흥, 연기, 내동, 쌍계, 자노리로 나누 어졌고 과교리는 신계, 백운, 구계, 월암, 낙포, 고안, 궁계, 칠정, 과교로 나누어졌으며, 진산리 는 영정, 화산, 삼군, 서암, 궁계, 남이면 제내, 서이면 자노일부와 진산으로 나누어졌다. 과교동은 정주읍의 삼산, 과교, 진산리의 3개 리 구역으로 불리는 삼산리의 삼산동, 음성동, 과 교동, 백운동, 구계동과 진산리의 진산, 삼군등으로 나누어졌는데 1981년 4월 시 구역편성에 따 라 과교리가 과교동이 되었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에 내장의 용산, 교암, 신월 리가 편입되었 고 용산리의 와룡, 현월, 신정, 부암, 석산, 신촌, 남성동리와 교암리의 석고, 구암, 부사, 교동, 삼거리, 계화, 내지, 외지, 고안, 반암 그리고 신월리의 죽산, 월성, 칠성, 구정, 신성이 편입되었 다. 
정읍시 소성면(所聲面 )
전라북도 정읍시 남서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3,657명(2001) ◆면적:29.01㎢ ◆주요문화재:창산군 장관의 원종공신녹권(보물 726),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보물 914), 금동 느티나무(전북기념물 93), 옥산서원(전북문화재자료 141) 

* 지명유래

소성면은 일찍이 백제시대에 고사부리군 (古沙夫里郡)에 속한 지역 이었다. 고려시대에는 939년인 태조 19년에 영주(瀛州)라고 불리우는 지역에 속해 있었으며 그 뒤 951년 인 光宗 2년에는 이 지역에 安南이라고 부르고 도호 부(都護府)를 두었다. 조선시대 1765년인 英祖 41년에 고을 터를 고부면 성황산에 자리하게 되었으며 소성면은 고부 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에는 군폐합이 되어 고부군의 18개면이 부안군, 고창군, 정읍군으로 폐합 되었으며 이때 소정면, 성포면이 합쳐져 소성면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4개리 10개마을이 정주시와 입암면에 편입되었 으며 고창 군 성내면 조동리 일부가 소성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정주시 와 정읍군 통합으로 정읍시 소 성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또한, 1996년 1월 1일 소성면 주천리 향지 마을이 상평동에 편입되어 소성면은 10개리 35개마을 에 42개 자연부락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읍시 수성동(壽城洞)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있는 동

◆위치:대구 수성구 ◆인구:5만 1913명(2001) ◆면적:1.87㎢ 

* 지명유래

수성동은 1914년 정읍현 군내면에서 수성이라 불리우고 고을이 생긴지 오래인데도 그 역사의 기록이 없어 아쉽다. 수성동의 근간을 이루는 마을은 서성, 구미 , 선은 마을로 성황산 자락을 따라 남쪽으로 위치하 고 있으며 앞으로는 조곡천이 동서로 흐르고 하천을 끼고 있어 사계절 물이 풍부하여 농사에 적 당한 지역으로 주민들의 성품이 선하고 온순하여 옛부터 도둑이 없고 남을 해하는 일이 없어 정 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이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인간사회에 살고 싶어하는 신선이 선량한 주민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 이곳 에 숨어 살았다는 구전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인 지석묘 및 선돌이 고을 주위에 산재해 있는 것 으로 볼 때 역사를 기록하기 훨씬 전부터 고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현재 수성동은 1981년 7월1일 정읍시 승격과 함께 하북동일부를 흡수하여 수성동으로 승격 오 늘에 이른다. 
정읍시 시기동(市基洞)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동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7,067명(2001) ◆면적;0.45㎢ 

* 지명유래

▶ 시기(市基)라는 명칭은 장터의 한자 표기이며, 조선정조 (1789년)때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보이지 않으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정읍군 군내면 시기리로 명칭된 기록이 보인 다. ▶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자료인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 일람』에는 정읍군 정 읍면 시기리가 시기리, 수침리, 광교리, 미동리, 중사리,서중리,종산리(현재 내장상동으로 일부 편입됨)로 편성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1931년에 시기리, 수침리, 광교리, 서중리, 미동리를 합쳐 시기리라 하였다가 1981년 정주읍이 정주시로 승격되면서 시기리를 정읍천과 초산로등을 경계로하여 시기1,2,3동으로 분할하였다. ▶ 1981년 시 발족 당시에는 시기1동은 광교, 평화, 남교, 영동으로, 시기2동은 청수,태평,신흥, 대흥으로 편성되었으며 1998년 10월30일 과소동 통폐합으로 인하여 시기1동과 시기2동이 통합 되어 현재의 시기동이 되었다 
정읍시 신태인읍(新泰仁邑)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읍.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1만 7명(2001) ◆면적:29.67㎢ ◆문화재:육리사당, 정평구묘 

* 지명유래

신태인이란 이름은 지명보다 역명이 먼저 붙여졌다.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고 1914년 1월 11일 김제와 정읍구간이 영업을 개시 하자 때를 같이해 신태인역도 문을 열었다. 이때 붙여진 이름이 인근 (舊) 태인과 구별되는 신태인역 일제의 한반 도 강점 과정에서, 다시말하면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대전과 익산 또한 이러한 과 정에 의해 생긴 이름이고, 신대륙 미국의 도시들이 영국 특정지역의 이름을 따다, 앞에new나 neo를 붙여 작명한 것과 비슷한 발상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전까지 면행정의 중심은 화호였 다. 화호가 물산과 교통의 중심지였으나 신태인에 역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도권을 빼았 겼다. 신태인읍은 옛 태인의 용구산면과 북촌면을 합해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용북면이라 불 렀다. 그러다 1933년 역명을 따 신태인면으로 개칭하였고 1940년 11월 1일 읍으로 승격하여 오 늘에 이르고 있다. 역이 자리잡은 곳은 한촌에 불과했던 삼천리였다. 삼천리는 원래 북촌면 지역 으로 1914년 구역 개편때 표천리에서 "천"자를 따고 상삼, 하삼에서 "삼"자를 따 삼천리라 했다. 신태인은 일제침 략과 농지수탈의 산 역사를 그대로 지닌 곳, 평야부의 중심에 위치, 일본인들이 많이 옮겨 살았 고 경제적 실권도 그들이 휘둘렀다. 당시 호남평야의 중심의 자리잡은 김제, 옥구, 익산, 정읍지역은 수탈의 주무대 였으며 신태인 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정읍시 연지동(蓮池洞)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 있는 동.

◆위치:부산 부산진구 ◆인구:2만 4030명(2001) ◆면적:0.98㎢ 

* 지명유래

원래 정읍현(井邑縣) 군내면(郡內面)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정읍군 정읍면 연지리 (井邑面 蓮池里)가 되어 분리(分里)는 연지리(蓮池里), 죽지리(竹支里), 서외리 (西外里)일부로 편성 되었는데 1931년 4월 1일 읍(邑) 승격으로 분리(分里)의 구역이 연지(蓮池), 서연지(西蓮池), 죽 림(竹林), 미창(米倉), 명덕(明德)동으로 나누어 졌다. 『蓮池』의 동명은 옛날 이곳에 연못(蓮池)이 있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연지동(蓮池洞)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高麗)이후 이곳에는 연지원 (蓮池院, 혹 연지원)이 있어 교통에 이용되어 왔다. 지금도 이곳을「연지원(蓮池院)」 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914년 호남선 철도개통에 정읍역(驛)이 들어서게 되니 1천년 동안 교통의 요지로 이어 온 셈이다. 

정읍시 입암면(立岩面)
경상북도 영양군 남서부에 있는 면.

◆위치:경북 영양군 남서부 ◆인구:3,721명(2001) ◆면적:79.03㎢ ◆문화재:영양 연당동 석불좌상(경북유형문화재 111) 

* 지명유래

원래 정읍군의 남이면(南二面),서일면(西一面)과 흥덕군(興德郡)의이동면 (二東面)으로 나누어 져 있었는데, 1914년 3월 3개면을 병합하여 입암면 (笠岩面)으로 되었으니, 명칭의 유래는 입암 산으로 말미암아 불리워진 것이다. 이때의 행정구역은신정리(新井里),접지리(接芝里),신면리(新綿里),하부리 (下富里),등천리(登川里·이상 南二面),천원리(川原里),연월리(蓮月里),단곡리 (丹谷里),마석리(磨石里·이상 西一面), 지선리(芝仙里이;興德郡二東面)등이었다. 본면은 갈재밑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교통의 요 지였다. 고대 교통수단의 기관 이었던 왕신원(往信院)과 삼례도(參禮道)의 천원역(川原驛;현川原里) 이있었 으며, 조선중종때는 갈재에 산적이 많아 한때 교통이 불편해지자 노령군보 (盧嶺軍堡)를 두었으니, 현 입암면 등천리(登川里)의 군령교(軍令橋)는 당시의 군보(軍堡)의 영(營) 이 있었던 곳이다. 또 입암산성(笠岩山城)은 호남의 요새(要塞)로 국난이 있을때마다 국방의 거점 이 되었으니 임 진란에도 많은 의병들이 순절한 곳이다. 그리고 최근세에 와서 호남선 철도가 노령으로 개통되 고 또 국도와 호남고속 도로가 모두 이곳을 통과하니 역시 교통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천원리 (川原里) 는 교통의 요충인 동시에 군사의 요지인 것이다. 몇가지 기록에서 간추려 볼 때 1592년 (宣祖25年) 임진란에 호남의병들이 장성(長城)에서 출발하여 11월 천원(川原)에 이르러 군사훈 련을 하였으며, 1894년 봄 동학농민군들이 장성 (長成)에서 전주(全州)로 올라가다 천원에서 밤 을 지냈으며 그해 12월 일본군 과 이규태(李圭泰)의 관군이 천원에서 며칠을 머물며 작전을 한 곳이다. 또 근래에는 차천자(車天子)의 보천교(普天敎)로 유명해다. 1909년(隆熙3年) 대흥리(大興里)에 자리를 잡은 보천교는 전국에 교도 6백만을 헤아리는 교세로 일세를 풍미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백제(百濟) 정촌현(井村縣)의 고을터인 정해(井海)가 신정리(新井里) 에 있다. 구한국말엽 전주(全州)감옥에서 순절한 애국열사 남사 유병우(南史 柳秉禹)의 출생지 가 단곡리 차단(丹谷里 次丹)이며 차단 마을의"백낙골"은 그의 전적지이기도 하다. 하부리(下富里)의 "복조리"와 대흥리(大興里)의 직조가 이 고장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다. 노령(盧嶺)은 속칭 "갈재"라하며 입암산(笠巖山)에서 방장산(方丈山)으로 연결 되는 능선으로 서울에서 제주도(濟州島)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였으니 옛부터 이곳에는 "갈대"가 많아 "갈재"라 일컬어 왔다. 그리하여 원래는 위령(蔿嶺) 으로 표기 되었던것같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정읍현 (井邑縣) 산천조(山川條) 에 위령(蔿嶺)이 위(蔿)는 혹 노(蘆)로 만들기도함. 고을의 남쪽 30리 장성 (長城)고을의 경계에 있으며 또 소위령(小蔿嶺)이 있는데 흥덕(興德)고을의 경계에 있다 고 하였다. 소위령은 속칭 소갈재로 방장산(方丈山)에서 북으로 뻗어 밤고개를 이루고 두승산 (斗升山)에 머물렀는데 입암면(笠岩面)과 고창군 신림면(高敞郡 新林面)과 경계를 이루고 있 다. 

정읍시 장명동(長明洞)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동.

◆위치:전북 정읍시 ◆인구:5,576명(2001) ◆면적:6.71㎢ ◆문화재:정읍향교 대성전(문화재자료 73) 

* 지명유래

원래 정읍현(井邑縣) 군내면(郡內面)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정읍면 장명리 (井邑面 長明里)로 입석(立石), 씨교(氏橋), 장명(長明), 상경(上京), 하경(下京), 명륜 (明倫)동으로 개편되었다. 1931년 4월 1일 정주읍(井州邑) 승격으로 구역의 분리도 입석(立石), 씨교(氏橋), 명륜(明倫)동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83년 2월 15일 정읍군 북면(北面), 용호(龍虎), 구량(九良), 매기(梅基)가 편입되어 구룡동(九龍洞·法定洞名)이 되었다. 1998년 10월 30일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상동(元上洞·法定洞名)도 편입되었다. 

정읍시 정우면(淨雨面)
전라북도 정읍시 중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중부 ◆인구:4,556명(2001) ◆면적:30.42㎢ 

* 지명유래

본래 고부군 우일면(雨日面),장순면(長順面),벌미면(伐未面),수금면 (水金面),오금면 (梧琴面)구역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우일면과 장순면을 병합하여 우순면 (雨順面)이라 하고 벌미,수금,오금 세 면을 병합하여 이곳 중심부에 있는 정토산 (淨土山)의 이름을 따서 정토면(淨土面)이라 하여 각각 정읍군에 편입하였다가 그뒤 1935년 4월1일 행정구역 조정때 우순면 구역 3개리(花海里,南山里,暎波面)를 떼어 북면에 편입하고 나머지 두 면을 병합하여 정우면이라 했다. 그뒤 1973년 7월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오금리(梧琴里)가 떨어져 이웃 이평면에 편입되고 그 나머지로 지금에 이르렀다. 

정읍시 칠보면(七寶面)
전라북도 정읍시 동북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동북부 ◆면적:49.47㎢ ◆인구:3965명(2001년) ◆문화재:김회련공신녹권(보물 437), 이태조사년및육년왕지(보물 438호), 무성서원(사적 166), 남천사(전북문화재자료 154), 무성리 삼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158), 무성리 석불입상(전북유 형문화재 157), 백암리 남근석(전남민속자료 13), 송정(전북문화재자료 133) 

* 지명유래

본래 태인군 고현면내면과 남촌일변면의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이 두면을 병합하여 이 지역에 있는 칠보산 이름을 따서 칠보면이라하고 정읍군에 편입. 

정읍시 태인면(泰仁面)
전라북도 정읍시 중북부에 있는 면.

◆위치:전북 정읍시 중북부 ◆인구:6,386명(2001) ◆면적:34.25㎢ ◆문화재:피향정(보물 289), 태인 신잠선생영상(전북민속자료 4), 신잠비(전북문화재자료 105), 태인동헌(전북유형문화재 75), 태인향교대성전(전북문화재자료 75), 태인향교 만화루(전북유형 문화재 121), 서현사지(전북기념물 48) 

* 지명유래

태인면은 유교문화가 흥성했던 곳으로 그 연원은 신라 말엽 헌강왕(875∼885년)때 우리나라 유 학의 시조인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역임한 데서 비롯한다. 태산군은 본래 백제의 太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때 太山으로 고쳤다(太는 泰로도 통한다.)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불우헌 정극인이 향학당을 설치하였고 현감 영천 신잠이 사학(四學) 을 설립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다. 그리고 1696년(조선 숙종 22년) 태인 피향정을 국고로 중건하 였으니 모두 최치원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는 사업으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교문화 의 흥성을 이루었다. 태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시대 太尸山郡으로서 그 고을터가 현 칠보면 시산리에 있었다고 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태산군이라 일컫고 정읍·인의현 등 이웃 고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영주(고부) 관찰사의 속현이 되었다가 태산현인(泰山賢人)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몽고에 들어가 활동하다 1354년(공민왕 3년) 고려에 원병을 청하는 원나라의 사신으 로 본국인 고려에 돌아오자 그 공으로 태산현을 군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또 인의현은 백제 때 빈굴현(또는 부성)으로 그 고을터가 현 태인면 백산리에 있었던 자그마한 고을이다. 757년(신 라 경덕왕 16년) 무성이라 개칭하여 태인군의 영현(嶺縣)이 되었으며 936년에는(고려 태조 19 년) 인의현이라 일컫고 영주(고부) 관찰사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산현감이 겸임하게 되어 인의현민들이 동쪽에 떨어져 있는 태산읍(칠보) 에 왕래하기가 불편하여 1409년(조선 태종 9년) 두 고을을 합하여 비로소 태인이라 일컫게 되었 다. 1416년(태종 16년) 8월 현감 황경돈이 고을터를 중간지점인 거산연(현 태인면 거산리)으로 옮겼으나 터가 좁아서 1418년(태종 18년) 현감 오치선이 거산리에서 다시 현재의 위치인 태인초 등학교로 옮기고 1419년 현아 건물을 세웠으며, 1421년(세종 3년)에는 현감 안기가 향교성전을 세웠다. 태인현 구역 변천 상황을 보면, 서촌면·남재이변면이 보림면, 군내면·인곡면·흥천면이 태인면으 로 되었다가 다시 보림면과 합쳐서 태인면이 되었으며, 용산면·북촌면이 용북면→신태인면→신 태인읍이 되었다. 옹지면·동촌면이 옹동면으로, 고현내면·남촌일변면이 칠보면으로, 산내일변면 ·산내이변면이 산내면으로, 산외일변면·산외이변면이 산외면이 되었다. 

하삼도(下三道) 또는 삼남(三南)지방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 지명유래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3개 지방을 말한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이다. 이들은 모두 궁성의 남 쪽에 위치하므로 하삼남 또는 삼남지방이라고도 하였다. 

호남(湖南)
전라도의 별칭으로 금강하류 남쪽을 뜻한다.



* 지명유래

전라도의 별칭으로 금강하류 남쪽을 뜻한다. 대개 호남의 ‘호(湖)’자를 호수를 뜻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김제 벽골제 이남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금강의 옛 이름이 호강(湖江)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호’는 조선시대에 강변이나 바닷가에도 흔하게 붙여져 있었으며, 서울의 동 호(東湖,지금 동호대교 부근의 한강), 마호(麻湖, 지금 마포 앞 한강)와 같은 이름들이 많다. 또 고려 때에도 호남을 강남도(江南道)라 불렀는데, 이것도 역시 금강의 남쪽을 뜻한다. 

* 전라남도

고흥군 과역면(過驛面)
전라남도 고흥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 : 전남 고흥군 ◆인구 : 5,770명(2001) ◆면적 : 42.35㎢ ◆주요문화재 : 고흥도천리 지석묘군(전남문화재자료 197), 고흥과역리 민등지석묘군(전남기념 물 161) 

* 지명유래

◐신곡리 구곡마을 元來 新谷里 地域에 속하며 마을의 地形이 풍수지리상 九龍爭珠形이므로 마을名을 "九龍"이 라 하였으며 마을의 좌우에 있는 오병산의 줄기가 아홉골짜기이므로 九谷이라 改稱하여 오늘 에 이르고 있으며 이곳에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 휘하에서 大功을 세운 여산인 宋希立장군을 제향하는 사우가 있고 고령신씨 제각인 추모제가 있다. ◎성씨별 분포 전주최:32 , 동복오:6 , 김해김:5 , 경주한:4 , 김영김:5 , 計: 52호 ◐신곡리 심포마을 元來 新谷里地域에 속하며 옛날 바닷물이 마을앞 150m까지 들어왔다고하여 마을명을 "지푼 개"라 불리어왔으나 1930년 일제시대에 지방 행정구역개편시 마을名을 한자화할 때 깊은심(深) 개포(浦)를 한자로 想起하여 深浦로 改稱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씨별 분포 초계최:14 , 진주강:4 , 김해김:3 , 전주최:2 , 동복오:4 , 其他: , 計: 27호 ◐신곡리 신기마을 마을 地形이 돼지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저洞으로 이름하여 일명 "도수골"이라 불리어오다가 마 을확장으로 마을뒷산 地形이 잉어와 같이 생겨 "잉어등"이라 하였으나 한일합방이후 1914년 일 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통폐합시 제방축조로 인하여 새로터를 잡은 마을이라하여 마을名을 新基로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씨별 분포 김녕김:5 , 여산송:6 , 남양송:3 , 우봉이:4 , 其他: , 計: 18호 ◐신곡리 인학마을 元來 新谷里地域에 속하며 옛날 설촌시 안인이란 부자가 살던 古基라고 전하여 마을뒷산 形局 이 鶴처럼 생겼다하여 부자의 이름은 安仁의 어진 仁자와 새 鶴자를 따서 마을名을 仁鶴이라 칭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지금도 安仁의 부자집터의 옛집 기와장이 발굴되고 있다. ◎성씨별 분포 여산송: 15, 김녕김:5 , 고흥유:4 , 인동장:3 , 박:9 , 其他:2 , 計: 38호 ◐백일리 내백마을 조선시대에 여도진에 속하였다가 鎭이 없어진 뒤에 突山郡 옥정면에 편입되었으나 1914년 지 방행정구역폐합시 고흥군 남면에 소속되었는데 섬안에 日月明地가 있어 밝고 흰 것을 나나낸다 는 뜻으로 마을명을 "해나리"라고 불리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白日島라 하였으며 해방이후 1956 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白日里의 안에 있는 마을이므로 마을名을 內白이라 칭하여 현재 에 이르고 있다. ◎성씨별 분포 전주이:58 , 경주최:9 , 김해김:9 , 其他: , 計: 76호 ◐백일리 원주마을 당초에는 突山郡 玉井面에 소속되었을시 마을名을 돈 圓자에 구슬 珠자를 합하여 圓珠로 하였 으나 일제초기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폐합에 따라 고흥군 남면에 편입되면서 마을의 섬 地形 이 구슬 같다고하여 또는 새우가 구슬을 건진다는 뜻으로 구슬 珠자를 따서 마을 명을 元珠로 改稱한 이래 독립마을로서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씨별 분포 광산노:7 , 빌양박:7 , 탐진최:6 , 인동장:4 , 其他:1 , 計: 25호 ◐백일리 외백마을 조선시대 전라좌수영관할 여도진에속한 마을로서 돌산군 옥정면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일제 초기에 행정구역폐합시 고흥군 남면으로 편입되었으며 그후 1937년 남면과 남양면 일부가 폐합 되면서 過驛面으로 소속되었는데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섬밖에 위치하므로 마을 명 을 外白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設村당시 崔忠이 심은 고목이 좋아 마을名을 朴吉島 라고 칭했다함) ◎성씨별 분포 김해김:31 , 김녕김:24 , 해주최:6 , 동복오:3 , 其他: , 計: 64호 ◐백일리 옥금마을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는 마을 명은 未詳이나 일제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폐합시 고흥군 남면으로 편입되였으며 다시 1937년 과역면으로 편입되면서 마을 뒷산이 玉女峯이라 불러 山 의 地形이 玉女彈琴形이라 하였고 마을 옆으로 띠박금이라는 곳이있어 그곳에서 金이 나왔다하 여 玉자와 金자를 따서 마을명을 玉金으로 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씨별 분포 동복오: 8 , 경주정: 7 , 밀양박:3 , 計: 18호 ◐연등리 독대마을 元來 과역면의 가장 북동쪽에 위치하여 마을의 地形이 거미(독)와 같은 形局이며 또 마을 대지 가 짐승같이 생겼다고하여 독垈라고 부르다가 獨垈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임진왜란때 흥양현감 裵興立이 충무공 위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장군의 충현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가 2001년 과역면 소재지 현충탑 비석거리로 이설되었다. ◎성씨별 분포 김해김: 43, 밀양박: 38, 성산배: 25, 동복오: 9 , 경주정: 15, 탐진최: 10, 計: 1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