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에서 말하기를 진조선 이후 람국이 그 패권을 가지게 되는데 람국은 약 BC12세기 경에 수도를 고죽국으로 옮깁니다.
을
묘년은 두홀 임금의 원년이다. 비류후가 큰 자라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속진후가 용가가 되었다. 처음 흘달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邠)․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나라 탕왕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빈천한 백성으로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자들은 여전히 그 땅에 흩어져 살면서 오랫동안 풍속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남후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거처하였다. 그 곳은 은나라와 매우 가까우므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빈(邠)․기(岐)
사이로 나아가게 하여 그 유민들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우고 ‘여(黎)’라고 이름 짓고 여홀(黎忽)에서 다스리게 하니,
이에 마침내 은나라의 제후 및 서융(西戎)의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거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후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여
졌으며, 임금의 명령 또한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달음(達音)이 임금이 되었다.
즉, 고열가 이후부터는 고죽국이 고조선의 수도가 되는것이죠. 그런데 고죽국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강단에서는 고죽국이 난하에 위치하였다고 하고 연나라는 북경에 위치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되면 고죽국은 연나라
동쪽에 위치한 것이되는데 사서에서는 고죽국이 연나라 남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春秋本義》 卷八 (元나라때 지은 것입니다)
木訥趙氏曰, 山戎去中國逺, 在舜之營州古孤竹國之地. 東距遼, 北距燕.
목눌조씨(木訥趙氏)가 말하기를 산융(山戎)은 도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순(舜)의 영주(營州) 고죽국(孤竹國)의 땅이다. 동으로 요수(遼)가 떨어져 있고, 북으로 연(燕)이 떨어져 있다.
《春秋明志錄》 卷三 (明 나라때 지은 것입니다.)
山戎東距遼, 北距燕, 今薊遵化至永平古孤竹國. 漢志古北平無終之地舜營州也.
산
융은 동으로 요수(遼)와 떨어져 있고, 북으로 연(燕)과 떨어져 있는데 지금의 계(薊) 준화(遵化)에서 영평(永平)에 이르는
고죽국의 땅이다. 한서지리지는 옛 북평군(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의 땅이라 하였는데 순(舜)의 영주(營州)이다. (한서지리지에
북평군 무종현에 고죽국의 땅이라고 하였기에 한서지리지를 찾아봤으나, 한서지리지 우북평군 무종현에는 이런 말이 없습니다. )
《春秋辯義》卷七 (明나라때 지은 것입니다.)
熊過氏曰, 山戎東距遼, 南距北燕, 今薊遵化至永平古孤竹國. 漢志右北平無終之地舜營州也
웅
과씨(熊過氏)가 말하기를 산융(山戎)은 동쪽으로 요수(遼)와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 북연(北燕)과 떨어져 있는데 현재 계(薊)
준화(遵化)에서 영평(永平)에 이르는 옛 고죽국의 땅이다. 한서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우북평군 무종현의 땅인 순(舜)의
영주(營州)이다.
여기서는 연(燕)의 북쪽에 고죽국이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고죽국의 위치가 연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뀐 것이지요. 원나라때 지은 책에는 고죽국이 분명 연나라 남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명나라에 들어서면서 고죽국이 갑자기 연나라 북쪽을 바뀝니다. 모화사상에 의해서 위작을 한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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