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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고구려사략 (동명왕)**1차보정** 유류왕 일부추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壬午春與樂浪王柴吉定界以奄利東興?之使安其心. 遣再思于卒本修和. 卒本王延陀勃以女召西奴妻之. 解(원문 角+羊)弗以禮氏爲妻.
임오(B.C.39)년 봄 낙락왕 시길(柴吉)과 경계를 정하여 이로써 편안하게 되어 엄리의 동쪽이 일어나게 되었다. 재사를 졸본으로 보내어 나라를 합쳐 다스리게 되었다. 졸본왕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처로 삼았다. 해불이 예씨를 처로 삼았다.

癸未春練兵于汗濱(三姓)都于鶻岺上(西湖景)
계미(B.C.38)년 봄 한빈(졸본부여의 3부족)의 도읍인 골령의 위쪽(서호경)에서 병사를 훈련하였다.

元年甲申春二月延陀勃薨. 召西奴以國獻于芻牟. 四豪三賢請卽帝位上固辭不得卽位於沸流谷西城山(勃利縣 二龍山)國號高句麗建元東明. 三月末曷(?)(?)(?). 用漢人, 漢素造船, 鄭共製兵, 馬黎畜馬. 末曷大擧入寇汗濱上親征斬首千級. 五月訪松讓于沸流(湯原)以德義曉之妄稱仙族而不屈遂奪其珍宝妻子而來. 七月松讓大擧入寇大破其軍渡河追擊虜南女二千余口. 讓(?)行請罪命修歲貢而示七縱之意. 八月練兵於汗濱. 壯士來歸者二千余人. 上與后觀稼而歸喜年大豊曰黍稷豆梁足矣奈無麥何須史雙, 鳩含麥而下庭乃聖母宮鳩也. 自是鳩群含麥來播者無數名鳩麥. 十月祀神隧而謝豊. 十一月率精騎渡汗水(牧丹江)至中川(拉林河)召黃龍王羊吉畏惧不敢出遣其兄子于仁定界割箕丘(老岺山)印之爲獵場. 十二月烏伊鍊兵五千于中川, 羊吉以女妻烏伊而請和徵, 黃龍國壯丁而築眞珠城(眞河). 帶素殺其兄帶伯娶其妻烏花.
원년 갑신(B.C.37)년 봄2월 연타발이 죽었다. 소서노가 나라를 추모에게 바쳤다. 4명의 호걸과 3명의 현자들이 제위에 나아가 오르기를 청하여 고사하였으나 〔비류곡 서성산(발리현 이룡산)에서〕 즉위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나라의 연호를 동명이라 하였다. 3월 말갈???. 漢人을 등용하여 한소에게 배를 만들게 하고, 정공에게 병사의 옷(갑옷)을 만들게 하고, 마려에게 말을 비축하도록 하였다. 말갈이 대거 들어와 한빈을 도둑질하여 왕이 친히 정벌하여 적 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5월 비류(탕원)에 가서 송양을 만나 덕과 의로써 선인자손이라고 망령되이 칭하는 것을 깨우치게 하였으나 굴하지 않아 진귀한 보배와 처자식을 빼앗아 왔다. 7월 송양의 무리가 대거 들어와 도둑질하여 대파하였다. 송양의 군대가 물을 건너자 추격하여 남여 이천 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송양이 죄를 청하여 와서 매년 조공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칠종(칠금)의 뜻이다(???). 8월 한빈에서 병사를 훈련했다. 장사 이천 여명이 돌아왔다. 상(추모)과 후(소서노)가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가며 올해는 대풍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올해는 黍稷(메기장과 찰기장), 콩 대들보 (식량)가 족한데 (비록 역사적으로 쌍 풍년은 없다고 할지라도) 보리가 수확이 없어 어찌할까. 보리를 머금은 비둘기는 뜰아래 있는데 성모궁의 비둘기다. 보리를 머금은 비둘기의 무리가 와서 보리를 파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鳩麥(비둘기 보리)라고 이름 하였다. 10월 동굴에서 신에게 제사지내어 풍년에 감사했다. 11월 훈련된 기병을 거느리고 汗水(목단강)을 건너 중천(납림하)에 이르러 황룡왕을 불렀다. 양길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고 그 형의 아들 우인을 보내어 기구(노령산)로 경계를 정하여 이로써 동쪽을 수렵장으로 하였다. 12월 오이가 중천에서 병사 오천을 훈련시켰다. 양길이 딸을 주어 오이의 처로 삼게 하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황룡국의 장정을 동원하여 진주성(진하)을 쌓았다. 대소가 그 형 대백을 죽이고 그 처 오화를 취하다.
= 여기서 聖母는 추모의 母인 유화를 일컫는다.(아래 글 참조)

二年乙酉正月徵黃龍馬三千匹鍊兵于中川. 羊吉憂惧而死. 子宝得浸於酒色, 于仁懦弱無謀. 二月桓那國女主桂婁來降以其地爲桂林(吉林)烏干(烏伊弟)爲沛子(太守)桂婁爲夫人. 命松讓出兵三千人來五千石. 四月皇后生子沸流女溫于溫水宮. 六月松讓懸鹿於蟹原. 七日大雨漂都上發兵救之賑其飢民. 讓自知德薄獻國爲臣. 上以其地爲故國原而松讓爲多勿候. 多勿復(?)之意也. 盖聖父解慕漱與聖母柳花逍遙之地也. 七月以黃龍國男丁三千人爲軍女丁五千人爲婢. 冶工三十取?兵船二百隻成. 八月鍊兵二萬於汗濱及中川, 上親自跋涉櫛風沐, 兩一飯三起晏眠夙興殆無虛日, 屈己下人喜, 聞自過上自公卿下室小卒皆能直諫, 每召漢人習其風俗聞其治亂喜形於色, 無大故則不廢. 烏伊摩離扶芬奴各領三千軍伐河北羯?平之以其地爲湯西質山二軍. 九月畋于質山鍊兵八千. 神馬五千匹自東扶餘隨拘而至畜於石河.
2년 을유(B.C.36)년 1월 황룡국의 말 3천필을 징발하여 중천에서 병사를 훈련하였다. 양길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죽었다. 아들 보득은 주색에 빠져 있고, 우인은 나약하고 꾀가 없었다. 2월 환나국의 여주인 계루가 항복하여 왔다. 그 땅을 계림(길림)으로 하고 오간(오이의 제)을 패자(태수)로 삼고 계루를 부인으로 삼았다. 송양에게 삼천명의 출병을 명했고 곡식 오천섬이 왔다. 4월 황후가 아들 비류와 딸 온을 온수궁에서 낳았다. 6월 송양이 해원에서 사슴잡기 내기를 하였다. 7일간 큰비 후에 도읍이 떠내려가고 왕이 군사를 일의키어 (백성을) 구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송양은 스스로 지혜와 덕이 없음을 알고 나라를 바치고 신하가 되었다. 왕이 그 땅을 고국원으로 삼고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 다물이란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땅은 추모(盖가 추모를 뜻함)의 아버지 해모수가 어머니 유화와 더불어 소요하던 땅이다. 7월 황룡국 남정(성년남자) 3천명을 군인으로 하고 여정(성년여자) 5천명을 하녀로 삼았다. 대장장이 30명을 구하고 싸움하는 배 2백척을 만들었다. 8월 병사 2만을 한빈에서 중천까지 훈련시켰다. 왕이 스스로 걷고(밟고), 건너고, 늘어서서 바람으로 머리를 감고 (병사와) 친하게 되었으며, 한번의 식사와 세 번의 훈련에 어울리고, 해가 저물면 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아침 해를 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자신을 낮추어 아랫사람들이 기뻐했다. 왕이 스스로의 잘못을 공경하게 듣고, 아랫사람의 거처에서 병사들이 능히 직접 간하는 소리를 할 수 있었다. 매번 漢人을 불러 그 풍속을 익혔으며 그곳의 다스림에 대해 듣고 얼굴색을 보고 기뻐하였다. 큰 사고가 없으면 떠나지 아니하였다. 오이, 마리, 부분노의 영지에서 각 3천의 군대로 하북 양평의 땅을 쳐서 그 땅을 탕서, 질산 이군으로 삼았다. 9월 질산에서 사냥을 하며 병사 8천명을 훈련하였다. 동부여를 통하여 석하에서 모은 신마 오천 필을 잡아끌고 왔다.
= 逍遙 :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
= 大故 : 큰 사고

三年丙戌三月黃龍雌雄見於鶻岺. 至王骨岺支(岐?)首脫爪至南岺支(岐?)蟠三日乃. 以其山爲龍山其水爲龍溝. 群神以爲發祥而請立宮室上, 以兵事未盡不許. 十月設東明大會於神隨群鳩. 播麥於神田. 桂婁夫人生子高婁. 十二月以宝得女禾爲小妃. 練兵一萬於河濱(哈爾濱)召荇人國王祖天不來.
3년 병술(B.C.35)년 3월 황룡의 자웅이(추모와 황룡왕) 鶻岺에서 만났다. 王骨岺의 갈림길 首脫爪에서 岺의 남쪽 갈림길 蟠까지 3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산을 龍山이라 하고 물 이름을 龍溝라 하였다. 군신들이 상서롭다하여 궁실을 짓기를 청하였으나 병사에 관한 일이 다하지 못하였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0월 동명대회 열어 신성한 동굴에서 비둘기 무리들에게 신전에 보리를 뿌릴 수 있도록 제사하였다. 계루부인이 아들 고루를 낳았다. 12월 보득의 딸 화씨를 小妃로 삼았다. 하빈(합이빈)에서 병사 1만을 훈련시키고, 행인국 왕 조천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 여기서 神은 유화부인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됨. 위에 글 참조

四年丁亥正月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賊(末曷)十部落逐于水外. 召樂浪王柴吉獵于河南(富錦). 六月 (?)(?)(?). 七月東明神宮成茅茨土階. 九月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4년 정해(B.C.34)년 1월 탕동(오둔하상류지방)의 적(말갈) 열 부락을 쳐서 水外로 쫓아냈다. 낙랑왕 시길을 불러 하남(부금)에서 사냥하였다. 6월 ???. 7월 동명신궁을 흙 층계위에 띠로 지붕을 이어 지었다. 9월 화비(황룡국왕의 딸)가 아들 을두지를 낳았다. 시길의 딸 시화를 협부(협보)의 처로 삼았다
= 여기서 水는 흑룡강을 뜻한다.(남당 박창화님의 유고 고구려사초)

五年戊子正月皇后生子溫祚. 說漢舘於河濱以迎漢人使之敎民. 拿荇人國獵騎于羅淵探其虛實. 大閱于滸口. 五月金蛙移都柵城
5년 무자(B.C.33)년 1월 황후가 아들 온조를 낳았다. 하빈의 한관에서 교육을 하였는데 한인을 맞이하여 시켜서 백성들을 교육을 하였다. 행인국을 손에 넣기 위해 나연에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그 곳의 허실을 찾았다. 허구에서 왕이 군대를 정열하여 점검하였다. 5월 금와가 책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六年己丑正月桂婁夫人生女高曼. 陞爲小妃. 五月上至質陽命舟師治滸作站荇人來拒而大敗, 祖天遁北棘. 七月扶分奴定荇南諸郡進駐滸原天之取?都也. 十月拔北棘天北走海山以其地爲三部.
6년 기축(B.C.32)년 1월 계루부인이 딸 고만을 낳았다. 小妃로 (직을) 올렸다. 5월 왕이 질양에 이르러 주사에게 명하여 滸(호)를 다스리게 하고 역마을을 만들게 하여 행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크게 깨뜨렸다. 조천이 북극으로 숨어들었다. 7월 부분노가 행남의 모든 군을 (평)정하고, 나아가 (군대를) 주둔하고 호원천의 도읍을 취하였다. 10월 북극을 빼앗아 天(조천)이 海山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그 땅을 3부로 삼았다.
= 天은 제사장을 뜻함(?)

七年庚寅三月定百官之秩三輔爵太大兄紫袖金花銀魚, 五大加紫衫而同兵刑民宮穀也. 神賓藥農畜銀花而同幷亦太大兄大注簿大褥薩(大將軍)大使者大對盧(都督), 幷中大兄同而銅魚于台沛者將軍大仙人. 次大兄緋?杉而同都尉仙人評者使者注簿, 中兄雉花而同烏拙褥奢意候校尉小評, 小兄而鐵魚輔. 一品稱公金花, 二品大卿銀花大加, 三品稱少卿中大兄, 四品上大夫次大兄, 五品中大夫中兄, 六品次大夫小兄, 七品稱上士, 八品中士, 九品下士 皆靑衫羽毛. 四月勸農桑. 八月率沸流軍三千親征句茶國虜其王閃尼. 十月親行隧祭(祭天)置郊豕及神鹿. 十一月桂皇后崩春秋三十二. 后本黃龍國屬國桓那部女主也. 能騎射槍刃(원문은 金+刃). 慕聖上之德獻國爲臣妾每有征伐必扈駕以忠, 荇人句茶之役皆有大功中流矢於黃山創未合而崩. 上慟哀之作吾妻曲. 以皇后禮葬之. 生古婁太子曼公主皆賢.
7년 경인(B.C.31)년 3월 백관의 질서를 정하였다. 삼보는 태대형 벼슬을 주고 자주색 소매, 금화 머리장식, 은어 허리장식을 하고, 오대가는 자주색 적삼과 나머지는 같고 병사, 형벌, 백성, 궁실, 곡식을 담당했다. 제사, 손님대접, 의료 ,농업, 축업은 은화 머리장식에 나머지는 같고 역시 태대형, 대주부, 대욕살(대장군), 대사자, 대대로(도독)을 겸했다. 중대형은 동어 허리띠에 나머지가 같고 우태, 패자, 장군, 대선인을 겸했다. 차대형은 비색(?) 적삼에 나머지는 같고 도위, 선인, 평자, 사자, 주부를 겸했다. 중형은 꿩깃털 머리장식에 나머지는 같고 욕사, 의후, 교위, 소평을 겸했다. 소형은 철어 허리장식에 보조하는 직책이다. 일품은 공이라 칭하고 금화 머리장식을, 이품은 대경이라 칭하고 은화 머리장식을 또는 대가로, 삼품은 소경 또는 중대형, 사품은 상대부 또는 차대형, 오품은 중대부 또는 중형, 육품은 차대부 또는 소형이라 했고 칠품은 상사 팔품은 중사 구품은 하사라 칭하고 모두 청색 적삼에 깃털 모자를 썼다. 사월 농사와 잠업을 권장하였다. 팔월 비류의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왕이 친히 구다국 정벌하여 그 왕 섬니를 사로잡았다. 10월 친히 동굴무덤에 가서 제를 지내고, 성밖의 돼지와 신록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었다. 11월 계황후가 죽었다. 춘추 32세. 후는 본래 황룡국의 속국 환나부의 여주인이다. 騎射(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 창, 칼 쓰는 솜씨가 뛰어났다. 왕이 그 (나라를 바치고 신하와 첩으로써 매번 정벌 전쟁시에는 어가의 뒤를 따라다녔으며 충성을 다했다.) 덕을 추모하였다. 행인국 구다국에서 임무를 처리하는 중에 큰 공을 이루었으나 황산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아 상처가 치료되지 않아 죽었다. 왕이 애통해하여 ‘오처곡’을 지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황후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자식으로는 고루태자와 만공주가 있었는데 모두 다 어질었다.

八年辛卯正月命烏伊沿黑水立亭. 黃龍王寶得姐命于仁伐之. 八月卑離國紫蒙國來貢. 十月上不豫瞑山川, 再思請簡政養神嘉納之.
8년 신묘(B.C.30)년 1월 오이에게 명하여 흑수 물가에 정자를 세웠다. 황룡국왕 보득이 죽어 우인을 치도록 명하였다. 8월 비리국 자몽국이 공물을 바치러 들어왔다. 10월 왕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산천에 기도하도록 명했다. 재사가 편지를 보내 나라를 안정시키고 신들이 기뻐하도록 공물을 바치도록 청하였다.

九年壬辰五月聖母遣神巫二人爲上祈禱. 類利太子彈雀誤中汲盆問父皇消息禮氏曰汝夫去時藏物於七嶺八谷石上松下索之則可往. 十月烏伊摩離等伐北沃沮破其十二部落(今猶太人自治州也). 皇后生馬公主問曰妾聞扶余有太子皇后何不率來乎妾不妬矣, 上曰棄母后而安忍(引?)率妻子來乎, 鄕其安心.
9년 임진(B.C.29)년 5월 성모(유화)가 무당2명을 보내고 왕을 위하여 기도했다. 유리태자가 참새를 쏘았는데 잘못하여 물 긷는 동이를 깨뜨리고 아버지 소식을 물었는데 예씨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갈 때 칠령팔곡의 소나무 아래 돌 위에 물건을 숨겼는데 그것을 찾아야 갈 수 있다고 했다. 10월 오이, 마리 등이 북옥저를 쳐서 그 12부락(유태인자치주)을 깨뜨렸다. 황후가 마공주를 낳고 물어 말하기를 “첩은 부여에 태자와 황후가 있는 것으로 들었는데 어찌 거느리고 오지 아니한가. 첩은 시샘하지 않겠다.”고 했다. 왕이 말하길 “어머니를 버리고 처자를 데리고 오면 편안하겠는가, 고향에 있는 것이 안심이 된다.”

十年癸巳二月徵黃龍荇南桂林民丁萬人營石于汗水(或作鴨水)比東都稍壯亦以質朴爲主(今阿城). 九月白鸞集石王臺名曰鸞, 上與皇后受朝于臺上而移居焉. 十一月扶尉厭馬黎菸狗等伐北沃沮拓地千餘里虜其生口八万置杜訥之西名曰梁貊谷
10년 계사(B.C.28)년 2월 황룡, 행인, 계림의 민정 만 명을 불러 모아 한수(혹은 압수라고 한다)의 서도를 다스리고, 동도도 본떴는데 점점 성하게 되었고 역시 수수하고 검소하였으며 이로써 다스리게 하였다(아성). 9월 흰 란새들이 서도 왕대에 모였기에 이름을 란(대)라고 하였다. 왕이 왕후와 (란)대(관청)에서 朝(政)을 받았고 왕이 이사하여 거주하게 되었다. 11월 부위압, 마려, 어구 등이 북옥저를 쳐서 그 땅 천 여리를 넓혔고 팔만 명을 사로잡아 두납의 서쪽에 두었는데 양맥곡이라 이름 하였다.
= 質朴 : 검소하고 수수함.

十一年甲午五月上至梁貊谷與卑離王素奴相見, 以其不敬拿來東都. 松讓妄稱北扶余之仙宗, 素奴妄稱北扶余嫡孫以梁貊谷不毛之地爲其地而推曷民之垠拓故也. 八月烏伊拔不而城(或作不耐今洮南也)徙其大姓於湯東以烏伊爲卑離假王. 十二月烏干馬黎等伐長岺高顯不利.
11년 갑오(B.C.27)년 5월 왕이 양맥곡에 이르러 비리왕 소노와 마주쳤다. 이로써 그가 불경스러워 동도로 잡아왔다. 송양이 북부여의 선종이라고 망령되이 칭하더니 소노는 북부여의 적손이라고 망령되이 칭하여 이런 까닭으로 양맥곡은 불모의 땅(여기서는 비어있는 땅)이 되었는데 그 땅에 어느 때엔가 백성을 그곳으로 옮기고 옛 땅의 경계를 넓혔다. 8월 오이가 불이성(혹은 불내라 부르고 현재의 조남)을 깨뜨리고 그 곳의 큰 성씨를 탕동으로 옮기고 이로써 오이를 비리국 임시왕으로 하였다. 12월 오간, 마려 등이 장령과 고현을 쳤는데 이로움이 없었다.
= 양맥곡에 관한 기사는 10년조의 내용과 연결됨.

十二年乙未,正月親征長岺觸毒氣而疾作還. 三月皇后生翊公主. 五月以沸流爲淹遞?沛者. 七月親征西河拔之(長春), 西河本屬黃龍而來貢與長岺共謀故拔之也, 以扶尉厭爲西河太守鎭北大將軍伐長岺拔之. 九月禾小妃(황룡국왕의 딸)生羊太子. 封爲小后. 十月摩離伐海山拔之虜朝天送東都, 上謂天曰宝得之國修文而淫汝國好仙而淫文與仙皆好道也. 過則失國如食與色皆好道也. 過則傷人汝其知之乎, 天叩頭請罪, 上曰朕爲天子, 豈殺無咎, 况汝好仙者哉命居湖上而養神.
12년 을미(B.C.26)년 1월 왕이 장령을 친정하였는데 독기운을 느끼고 질병이 생겨 돌아왔다. 3월 황후가 익공주를 낳았다. 5월 비류를 엄체(또는 엄호)패자로 하였다. 7월 왕이 친정하여 서하(장춘)를 빼앗았다. 서하는 본래 황룡(국)에 속하여 공물을 바치었으나 장령과 더불어 공모하여 이런 까닭으로 그 땅을 쳐서 빼앗았다. 이로써 부위압을 서하태수 진북대장군에 임명하고 (지키게 하고), 장령을 쳐서 빼앗았다. 9월 화소비가 양태자를 낳았다. 소후에 봉했다. 10월 마리가 해산을 쳐서 조천을 붙잡아 동도로 끌고 갔다. 왕이 (조)천에게 이르기를 보득의 나라(황룡국)의 文(여기서는 도덕 또는 경전을 의미)을 닦으나 지나치고, 너의 나라는 선을 행하나 지나치다. 文과 仙은 모두 다 좋은 방법이다. 과하면 나라를 잃게 되고 식사를 하는 것 같이 색을 하는 것 같이 하라, 모두 좋은 방법이다. 과하면 사람을 상하게 한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조)천이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천자다 어찌 허물이 없으면 죽이겠느냐, 더더군다나 네가 선을 좋아하니 호수에서 거주하며 기운을 키워라고 명했다.

十三年丙申二月烏伊伐高顯拔地(開通膽柳). 五月扶尉壓伐南口(遼原)拔之以乙音爲玄菟太守以營南口. 乙音皇后召西奴之外兄也. 納造船大加漢素女平氏爲夫人. 九月親播鳩麥于西河與平氏如溫湯(今臺九). 十月畋杜訥原置鯉宅十取.
13년 병신(B.C.25)년 2월 오이가 고현(개통담류)을 쳐서 빼앗았다. 5월 부위압이 남구(요원)를 쳐서 빼앗았는데 이로써 을음이 현도태수로써 남구를 다스렸다. 을음은 황후 소서노의 바깥 형제이다. 조선대가 한소가 딸 평씨를 바쳐 부인으로 삼았다. 9월 친히 서하에서 평씨와 더불어 구맥(비둘기보리)을 뿌리고(파종하고), 온탕(대구)에서도 같았다. 10월 두눌원에서 사냥하고 잉어 기르는 집을 열 가구를 구했다.

十四年丁酉二月以祖天爲荇南沛者. 八月柳花太后崩於柵城. 上擧哀于東都遣皇宮大加仇都於柵城吊金蛙老王解素太子及三公主而歸. 立聖母神廟於龍山南岺.
14년 정유(B.C.24)년 2월 조천을 행남패자로 삼았다. 8월 유화태후가 책성에서 죽었다. 왕이 애통해하며 동도까지 들고 왔다. 황궁대가 구도를 보내고 책성에서 늙은 금와왕과 해소태자와 삼공주가 조문 왔다가 돌아갔다. 성모신묘를 용산 남령에 세웠다.

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納柴吉女鵲氏爲夫人. 八月閱神馬二千匹于汗濱. 十月以溫祚太子爲正胤以烏干女爲太子妃以馬黎爲東宮大夫使習文字入講經籍上與皇后亦聽之.
15년 무술(B.C.23)년 5월 동쪽을 순행하여 낙랑에 이르고 배를 타고 건너서 시길이 딸을 바치니 작씨를 부인으로 삼았다. 8월 신마 2천필을 한빈에서 검열하였다. 10월 온조태자를 후계자로 삼고 오간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 마려를 동궁대부로 하여 문자를 익히게 하고 경서(사서오경)를 공부하게 하였다. 왕과 왕후가 역시 그것을 들었다.

十六年己亥正月平氏生漢公主. 多勿候松讓薨. 以其子義代之爵中兄. 九月大豊宴父老于西河行宮. 皇后不豫瞑山川生子而夭.
16년 기해(B.C.22)년 1월 평씨(한소의 딸)가 한공주를 낳았다. 다물후 송양이 죽었다. 이로써 그 자식 (송)의가 대신하게 하고 중형이라는 관작을 주었다. 9월 대풍년이 들어 어버이와 노인잔치를 서하행궁에서 열었다. 황후가 미리 산천에 기도하라고 명하지 않아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十七年庚子八月行聖母大祭于南岺, 解素護送禮氏及類利太子沸流松義之家. 時上獵于倭山. 類利來獻刃片服皆上古服也. 使居鸞坮而命摩離將兵万人而衛之, 妻以阿爾爲及溫. 阿爾爲皇后前夫仇台之出也.
17년 경자(B.C.21)년 성모대제를 남령에서 지냈다. 해소가 예씨와 유리태자를 비류땅 송의(송양의 자)의 집에 보내 주었다. 이때 왕은 왜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유리가 와서 칼조각과 옷을 바치었는데 모두 왕의 예전의 옷이었다. 사람을 부리어 난대(왕이 집부을 보는 곳)에서 거주하게 하고 마리에게 장병 일만으로 지키게 하고, 아이와 온공주를 처로 삼게 하였다. 아이는 황후의 전남편 구태에게서 낳은 딸이다.

十八年辛丑五月神馬巨婁死. 上不樂久之有無何之症. 六月化小后崩春秋三十三葬于中川之原桂后之塚西. 十月上與禮氏類利謁神隧會群臣議正胤. 皇后大努與仇都仇賁等退居牛壤, 上憂恨添病秘之.
18년 신축(B.C.20)년 5월 신마 거루가 죽었다. 상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같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병증이 없는가. 6월 화소후가 죽었는데 나이는 33세였고 장지는 중천지원 계황후의 무덤서쪽이다. 10월 왕이 예씨, 유리와 더불어 동굴을 방문하여 신을 알현하고 군신들을 모아 후계자를 세울 것을 의논 했다. 황후가 크게 화가 나서 구도, 구분 등을 데리고 우양으로 가버렸다. 왕이 근심하고 후회하여 병이 더하였으나 그것을 감추었다.

十九年壬寅正月以類利爲正胤阿爾爲爲東宮妃溫公主副之. 二月鵲氏生鵲太子. 三月以溫祚太子爲桓那沛者. 四月上崩於石新宮傳刃璽于正胤類利太子. 七月皇太后禮氏生再思公主. 九月葬大行于龍山春秋四十. 以遺命禁殉葬. 仙記曰上不樂居位命太子治國. 來黃龍而上天遺棄玉鞭處爲龍山陵云.
19년 임인(B.C.20)년 1월 유리가 후계자가 되고 아이가 동궁비, 온공주가 곁에서 보좌했다. 2월 작씨(낙랑태수 시길의 딸)가 작태자를 낳았다. 3월 온조태자를 환나패자로 하였다. 4월 왕이 돌아가셨는데 서도 신궁에서 후계자인 유리태자에게 칼과 인장을 넘겨주었다. 7월 황태후 예씨가 재사공주를 낳았다. 9월 용산에서 크게 장사를 지냈는데 춘추가 40세였다. 남기는 말로는 순장을 금지하라는 것이었다. 선기에 이르기를 왕이 지위를 즐거워하지 않아 태자에게 명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황룡이 와서 임금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남긴 옥채찍을 남긴 곳이 용산릉이 되었다고 전한다

孺留王(유류왕)

辛巳七月東夫餘公主禮氏生孺留于柵城名曰類利者肖月之意也. 壬辰彈雀而誤中汲婦, 婦罵曰無父之子無禮如此, 於是自警, 學禮于叔父解素太子, 學射于屋智, 書數於句鄒, 藥農於都祖, 而精熟然後請禮氏同往父處, 禮氏知芻牟有召西奴而難容乃曰汝父去時藏物於七岺八谷石上松下曰搜此而來者來吾子也. 類利乃行山野尋之不得成, 病將死, 忽有聲自柱礎間出. 就而見之有斷刃挾在其間乃喜而進其母. 禮氏無可止之術議於解素. 解素曰嫂勿慮時至矣. 阿兄欲行母后大祭密遣松義而作聖母像, 吾見此人可作大事且其母亦柵城人也. 禮氏大憙與類利隨義而來解素授黃金百斤曰以此悅其民衆然後謁父可也, 乃與屋智句鄒都祖等問民疾苦治人疾病施以衣食洽得人心然後謁鄒牟而卽東宮位沸流溫祚皆不敢爭而唯陜夫仇都烏干等以爲國本不可動與. 召西奴退于牛壤. 溫祚謂其母曰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 有此四可從之義, 而不從而退將安往吾不敢從母. 召西奴然之乃復入宮鄒母謂上曰吾子雖多唯沸流溫祖最可. 汝其三分天下而治之可也. 上受命而卽位於鸞坮改元光名.
신사(B.C.40) 7월 동부여 공주 예씨가 책성에서 유류를 낳았다. 이름은 類利인데 달을 닮았다는 뜻이다. 임진년(B.C.29)년 참새를 쏘아 잘못하여 물 긷는 아낙을 맞추었는데, 아낙이 욕하여 말하기를 아비없는 자식이 무례함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경계하였다. 숙부 해소태자에게서 예를 배우고, 옥지에게서 활쏘기를 배우고, 구추에게서 글과 셈을 배우고, 도조에게서 의약과 농사에 대해 배워, 이로써 정숙하여진 연후에 (어머니) 예씨에게 같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예씨는 추모가 소서노와 함께 있어 용납되지 않을 것을 알고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갈 때 칠령팔곡의  소나무아래 돌 위에 물건을 감추었는데 (아버지 추모가) 말하기를 이것을 찾아서 오는 자가 나의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유리가 이내 산과 들을 (뒤지며)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병이 들어 장차 죽을 것 같았다. 문득 스스로 기둥과 주춧돌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서 그것을 보니 부러진 칼이 그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내 기뻐하여 그 어머니에게 나아갔다. 예씨는 막을 방법이 없음을 할고 해소에게 계책을 의논하였다. 해소가 말하기를 형수는 걱정하지 마라. 때가 이르렀다. 나의 형이 모후의 제사에 성모상을 만들려고 송의를 은밀히 보냈다, 나는 그 사람을 보러가서 큰일을 이룰 것이다 또한 그(송의) 어머니는 책성사람이다. 예씨가 크게 기뻐하여 유리와 함께 (송)의를 따랐는데 해소가 황금 백근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그 민중을 기쁘게 한 연후에 아버지(추모)를 볼 수 있다. 곧 옥지, 구추, 도조 등과 더불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듣고 질병을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흡족하에 베풀어 인심을 얻은 후에 추모를 만나 동궁의 위(자리)에 나아갔는데 비류와 온조는 감히 싸울 수 없고, 오로지 협부, 구도, 오간 등이 나라의 근본이라 함께 움직일 수 없었다. 소서노가 우양으로 떠나갔다. 온조가 그 모(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부인은 남편을 따름이 마땅하고, 자식은 부모를 따름이 마땅하고, 아우는 형을 따름이 마땅하고, 신하는 임금을 따름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네 가지의 따름이 옳음이 있다. 이로써 따르지 않고 물러남은 장차 편안히 갈 수 없음이니 내가 어찌 감히 어머니를 따르지 않으리오. 소서노가 그런 연후에 다시 궁으로 들어와 추모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자식들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바라건데 비류와 온조가 뛰어나므로 당신은 그 땅을 삼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게 옳다. 왕이 받아들여 명하였다. 이로써 난대에서 즉위하여 연호를 광명으로 고쳤다.

1차보정은 원문에 있는 한자의 착오를 고쳤습니다.
유리왕이 졸본으로 오게 된 경위가 유류왕편에 수록되어 있어 추가하였으니 참고하기시 바랍니다.
시간과의 싸움이라 시간이 매우 지체되고 있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이 제글을 복사해 가셔서 자신이 한것으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왕 하시려면 나머지 부분을 보완하여 주시던지...
꼭 제가 한 부분까지만 해 놓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하시면 힘빠집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1)


高句麗帝國 (2007-05-05 11:03:44)  
김성겸 선생님. 그런데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대소가 선봉장 괴유와 유격장군 마로에게 죽는데 여기서는 동생인 대불에게 죽는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음 기록에서 대소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송양은 이미 동명왕 때 죽었는데 광명태왕때도 등장하고 대무태왕때도 등장합니다. 이상하군요.
高句麗帝國 (2007-05-05 11:06:45)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전투도중 대소가 죽었다고 하는데 대불이 죽는데요? 삼국사기 기록이 틀렸나요? 아니면 고구려사략이 더 정확한 것인가요? 어떻게 된 것이죠?
김성겸 (2007-05-05 17:24:17)  
1. <삼국사>를 찬할 때 <김부식>등이 <대불>을 따로 인식하지 못하였거나
후세에 손 타는 과정에서 <대불>이 떨려났을 수도 있다고 추정만 합니다.

2. 광명제 27년기 관련한 것이라면 원문기사를 제가 끊어읽기를 잘 못한 때문입니다.
해당 부분에 정정하여 놓았읍니다.

깊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더욱 조심스럽게 남당 선생께서 흘리신 땀을 다루도록 하겠읍니다.//
정성일 (2007-05-06 14:41:19)  
고구려 추모왕의 아들 작태자가 석탈해이다.

고구려 동명왕
十九年壬寅正月以類利爲正胤阿爾爲爲東宮妃溫公主副之. 二月鵲氏生鵲太子
19년 임인(B.C.20)년 1월 유리가 후계자가 되고 아이가 동궁비, 온공주가 곁에서 보좌했다. 2월 작씨(낙랑태수 시길의 딸)가 작태자를 낳았다

고구려 유리왕
29년 경오년(A.D.10) 6월, 鵲태자가 新羅太輔가 되다.

신라 남해차차웅
7년(A.D.10) 가을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정성일 (2007-05-07 20:01:40)  
원문 해석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이 오늘 한 것을 올립니다.
김성겸 선생님의 해석하시는 고구려사략은 글은 말그대로 요약분이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내용만 있으므로 사건의 전후를 알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하는 작업이 소중한 줄은 알지만 문맥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네요.
일단 의미전달이 중요하기 때문에 뜻 그대로 직역을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元年壬寅九月阿爾妃生子都㘦. 十月封溫祚爲汗南王禮氏爲皇太后, 삭선된 부분(召西奴爲皇后阿爾妃溫公主亦爲皇后), 十二月黃龍王于仁殂烏伊代之以摩離爲卑離國王.
원년 임인(B.C.19)년 9월 아이비가 아들 도근(도절)을 낳았다. 10월 온조를 한남왕으로 봉하고 예씨를 황태후로 삼았다. (소서노을 황후로, 아이와 온공주를 역시 황후로 삼았다). 십이월 황룡왕 우인이 죽어 오이를 대신하게 하고, 마리를 비리왕으로 삼았다.
= 삭제된 부분(召西奴爲皇后阿爾妃溫公主亦爲皇后)은 백제와 고구려를 나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소서노는 주몽의 황후이고 유리를 사위로 맞이하여 왕위를 물려주었으므로 소서노 역시 황태후가 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후세의 사가들이 삭선을 하면서도 그 글이 보이게 하여 미묘한 입장 정리를 한 것 같다. 그러므로 잘못 적힌 내용이 아닌 것이다. 당장에 유리왕 2년기사에도 황후가 있는데 아직 송비(송양의 딸)가 황후가 된 상태가 아니다.

二年癸卯正月再思太輔, 陜夫左輔主民大加. 扶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太子主宮大加, 屋智主穀大加, 仇鄒主刑大加, 都祖主樂大加, 松義主賓大加. 三月大閱水陸軍於河濱, 勞漢人來歸者千人. 九月與皇后觀稼西河如溫湯獲白獐而還. 十月神鸞又集新宮之庭, 皇后生女珍.
2년 계유(B.C.18)년 1월 재사를 태보로 삼고, 협부(협보)를 좌보 겸 주민대가로, 부분노를 우보 겸 주병대가로, 고루태자를 주궁대가로, 옥지를 주곡대가로, 구추를 주형대가로, 도조를 주락대가로, 송의를 주민대가로 삼았다. 3월 수군과 육군을 하빈에서 왕이 점검했다. 노역을 할 漢人 천명이 돌아왔다. 9월 황후와 더불어 서하에서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보고, (황후와 더불어) 온탕에서 흰 노루를 잡아 돌아왔다. 10월 신조 난새가 또 신궁의 뜰에 모였다. 황후가 딸 진(공주)를 낳았다.

三年甲辰正月分國中爲五部以順奴絶(원문은 다른 한자)奴賜沸流治之都彌鄒忽(密山), 以勸奴桂婁賜溫祚治之都牛壤, 涓奴上治之兼統黃龍卑離荇人句茶諸國事, 五部置沛者于台使者評者等職. 三月納禾黍女于後宮. 五月與太后如海山求神仙, 皇后及溫公主馬公主再思公主從之歷(?)山鹽山而還. 東明神宮成. 七月以松讓女爲妃. 作離宮於鶻川凉谷之東西與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入朝以牛壤挾小請移都於尉那城(鏡泊湖東岸)許之, 上謂皇后曰溫祚年雖十七奏事明白勝於沸流南方無憂矣. 皇后曰沸流幼多疾病未得敎誨故徒善而已溫祚自幼勇壯馬黎敎之故如此當爲陛下之一臂, 上曰豈徒臂哉, 渠是我而我是渠也. 皇后大喜曰豈料聖恩如此哉. 溫祚歸國皇后欲往汗南曰妾容皃已衰慚愧老牝請赴汗舐犢, 上止之曰先帝以卿遺朕而禁殉者欲固邦本也. 卿若赴汗栚與誰爲國追念, 先帝無使朕孤依, 旧宗國無失民望, 皇后乃喜而止. 十月溫公主難産而崩春秋二十. 上哀慟之減食二日. 十二月阿爾后生女玄.
3년 갑진(B.C.17)년 정월 나라를 나누어 오부로 하고 순노부, 절노부는 비류에게 주어 그 도읍을 미추홀(밀산)으로 하고, 권노부, 계루부는 온조에게 주고 그 도읍을 우양으로 하고, 연노부는 왕이 다스리고 황룡국, 비리국, 행인국, 구다국, 모든 나라 일을 통합하여 겸하고 오부에는 패자, 우태, 사자, 평자 등의 직을 두게 하였다. 3월 화서녀를 후궁으로 거두었다. 5월 태후와 더불어 해산에 가서 신선을 구하러 갔다. 황후와 온공주, 마공주, 재사공주가 따라갔고 ?산과 염산에 갔다가 돌아왔다. 동명신궁이 완성되었다. 7월 송양의 딸은 비로 삼았다. 골천의 양곡에 동서로 이궁(다른 궁)을 지었는데 황후와 온공주가 살았다. 한남왕 온조가 입조하여 우양이 협소하다고 위나성(경박호 동안)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온조는 이제 나이 겨우 열일곱이나 명백(또렷)하게 상소를 올릴 줄 아니 비류보다 낫다. 비류의 남쪽은 걱정이 없다. 황후가 말하기를 비류는 어렸을 때 질병이 많아 배우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해 이런 까닭으로 착하기만 하다. 온조는 어렸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여 마려에게 교육을 받은 까닭에 이는 마땅히 폐하의 한 팔이다. 왕이 말하기를 어찌 팔만 되겠는가. 온조가 커지면 나도 커진다. 황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어찌 성은을 헤아려 따르지 않겠습니까. 온조가 자신의 나라(汗南)로 돌아간 후 왕후는 한남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말하기를 첩의 용모가 이미 쇠하여 부끄럽고(임신중이므로) 늙은 여자라고 책망하여 부탁하건데 임금의 명령과 사랑을 알리겠다. 왕이 그 말을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선제께서 경(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말, 여기서는 왕후)을 짐(임금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게 남기고 순장을 금하라는 것은 나라의 근본이 굳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경이 만약 나의 말(汗: 임금의 호령)을 전한다면 짐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위하고 과거 일을 생각하겠는가. 선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짐은 외롭고 의지하고 싶다. 옛날의 종주국은 백성의 바람을 지나침이 없었다. 황후가 곧 웃음을 그쳤다. 10월 온공주가 난산 끝에 죽었다. 나이 20세였다. 상이 애통해하여 2일동안 식사를 줄였다. 12월 아이후가 딸 현을 낳았다.
= 舐犢 = 舐犢之愛 : 어미 소가 송아지를 사랑하여 혀로 핥아 준다는 뜻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여기서 미추홀(밀산)은 인천이 아니다. 미추홀이 누구에게 공격을 당했는지 백제서기에서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알 수 없게 했다는 것은 내부의 적으로부터 공격당했다는 것이다. 즉, 유리의 고구려가 아니면 대소의 동부여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비정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나의 생각은 유리가 비류와 온조가 추모왕의 유지대로 나라를 나누어 가니 그것을 인정해 주면서도 교묘하게 비류를 견제했던 것 같다. 위치상으로 密山은 동부여와 가까워 동부여가 군사를 이끌고 와 미추홀을 함락시킨 것으로 아닌지 의문스럽다. 다만 비류가 고구려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니 고구려가 공격한 것은 아니다.
= 참고문 : 삼국사기 백제서기
온조왕(B.C.18~A.D.28.재위기간 46년)
13년(B.C.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