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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략에 광개토왕의 재위년은 왜 삼국사기보다 2년 더 길까?

by 부르칸 2015. 4. 3.


고구려


391

진사왕(辰斯王)

광개토왕廣開土王 제위오름

가을7월 남쪽 백제정벌 10성을 함락. –(가.고구려)

겨울10월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함락.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나.고구려)

 

392

가을7월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4만으로 북쪽변경을 공격, 석현성石峴城등 10여 성을 함락.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가.백제)

겨울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狗原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백제)

아신왕阿莘王이 제위 오름.

8월 백제가 남쪽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아홉 개의 절을 평양平壤에 창건하였다. –(다.고구려)


393

가을8월 왕은 진무에게 관미성은 북쪽 요해지이므로 반드시 설욕하라고 하니 진무는 1만으로 남쪽을 치고 석현성石峴城 등 5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으나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 군량수송이 이루어지지 못해 돌아옴 –(다.백제)

가을7월 백제가 침략해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라.고구려)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394

가을7월 고구려와 수곡성水谷城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라.백제)

가을8월 패수浿水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마.고구려)

 

395

가을8월 좌장 진무(眞武) 등에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함. 고구려왕 담덕談德은 친히 군사 7천으로 패수浿水가에서 싸우니 우리군사가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마.백제)

겨울11월 패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으로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령靑木嶺 밑에 머무름.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죽자 군을 돌려 한산성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가.백제) = (가.고구려)

(나.백제) = (나.고구려)

(다.백제) = (다.고구려)

(라.백제) = (라.고구려)

(마.백제) = (마.고구려)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구려 기록과 백제 기록이 딱 2년 차이가 납니다.

만1년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관습상 이건 2년입니다.

혹 고구려사초에 광개토왕의 재위년을 삼국사기와 비교하여볼 때  2년 긴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해답...

AD391 = 영락대왕 원년

AD392 = 영락대왕 2년 = 광개토대왕 원년

AD393 = 영락대왕 3년 = 광개토대왕 2년

 

즉, 고구려본기상에

(가.고구려)와 (나.고구려)의 기록은 광개토대왕 원년이므로 AD392년 기록이고

(다.고구려) 기록은 광개토대왕 2년 기록이므로 AD393년 기록이고

(라.고구려) 기록은 광개토대왕 3년 기록이므로 AD394년 기록이고

(마.고구려) 기록은 광개토대왕 4년 기록이므로 AD395년 기록임.

 

따라서 백제본기가 맞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