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북부여기 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 계 유 13년(기원전108) 한(漢)의 유철(劉澈)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강단은 이것을 위사라고 할 것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4군을 설치하였으나 고두막한이 이들을 다 내쫓았다고 말하고 있고 백성들도 고두막한을 따라 한나라를 몰아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들을 찾아보겠습니다. 비류국은 한나라 요서군 차려현(且慮縣) 고구려는 졸본부여에서 건국하여 동명성왕 2년에 비류국을 차지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2년조 二年夏六月松讓以國來降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동명성왕 2년(서기전 36) 여름 6월에 (비류국왕)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왔다.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비 류국을 차지한 뒤 그곳을 다물도, 즉 고조선 옛 땅을 회복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왜그럴까요? 비류국이 만약 강단의 주장처럼 요하이고 고구려 중부인 계루부라면 비류국을 다물도라고 한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비류국을 다물도라고 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고조선 옛 땅이고 고구려 서쪽 혹은 서남쪽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비류국이 어딜까요? 바로 한나라 요서군 차려현입니다. 《前漢書》卷二十八下 遼西郡.....且慮有高廟, 海陽, 新安平, 栁城, 令支, 肥如, 賔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 전한前漢의 요서군... 버려(且慮)현에는 고묘(高廟)가 있다. 해양현. 신안평현, 류성현, 령지현, 비여현, 빈종현, 고려현, 양악현, 호소현, 도하현, 문성현, 임투현, 류현. 且 慮를 차려라고 읽지 않고 버려라고 읽었습니다. 且는 "버금"이라는 뜻인데 그 훈을 택하여 읽었습니다. 왜나하면 그 이름의 뜻이 한자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 우리나라식 이두글자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중국에서 지은 군현의 이름이라면 安平(살기 좋은 땅), 遼陽(요수의 북쪽) 등으로 지어야 하나, 且慮는 그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즉, 且慮는 "버려"이며 이 곳은 "비류"일 가능성이 큽니다. 요서군 버려且慮현이 계속 한나라 땅이 유지되었다면 전한을 이은 후한 요서군에도 버려且慮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후한서 요서군에는 버려且慮현이 없습니다. 《後漢書》卷三十三 遼西郡.....陽樂, 海陽, 令支, 肥如, 臨渝 후한의 요서군에는 양악, 해양, 령지, 비여, 임투현이 있습니다. 이 현들은 모두 전한前漢때에도 있었던 현입니다. 그리고 많은 현들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빼앗기지 않았나 합니다. 음운에만 맞추어서 억지주장에 가깝죠.^^ 불내성(國內城)은 한나라 낙랑군 불이현(不而縣) 《삼국사기》유리명왕 21년조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 21 년(서기 2) 봄 3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지방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아뢰었다. 《삼국사기》유리명왕 21년조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22년(서기 3)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잡지 제6 國內州一云不耐或云尉那嵓城 국내주(國內州) 또는 불내(不耐) 혹은 위나암성(尉那城)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로 옮긴 도읍인 국내성, 즉 불내성은 그 이름이 한나라 낙랑군에 있던 불이현과 이름이 아주 흡사합니다. 그리고 위 삼국사기 기록은 불내성이 다른 나라의 영토가 아니라 이미 고구려의 영토 중 하나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낙랑군 불이현이 이미 고구려땅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죠. 《前漢書卷二十八下》 樂浪郡, 朝鮮, 염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 東이, 不而(東部都尉治),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위 낙랑군 중에 불이현(不而縣)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부도위가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바로 고구려 불내성, 즉 국내성인 것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동부도위는 지나인들의 자존감을 나타내기위한 그들만의 역사 기록 방법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뒷부분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또한 후한서에는 위 불이현이 없습니다. 《後漢書》卷三十三 樂浪郡, 朝鮮, 염邯, 浿水, 貪資, 占蟬, 遂城, 増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樂都. 전한과 후한의 낙랑군의 속현들을 비교해보시면 몇개가 빠져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에게 빼앗긴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북부여 고두막한이 차지한 것이겠죠. 고구려 불내성이 한나라 낙랑군 불이현임을 증명 《三國志》卷三十 漢 武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為四郡以沃沮城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 한 무제 원봉이년 위만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자 우거을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는데, 옥저성은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맥(夷貊)이 침입하여, 마을을 고리국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가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이 기록에서 현도군이 이맥의 침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냐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맥이 침입하여 더이상 그곳에 현도군을 두지 못하자 그 이름이라도 남기려고 다른 곳에 현도군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환단고기와 비교해보면 이말은 위만조선의 현도군은 이미 북부여의 땅이 되었다는 말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옥저가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고하였으나 어느 기록을 봐도 낙랑군에는 옥저현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三國志》卷三十 漢以土地廣逺在單單大領之東分治東部都尉治不耐城 别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漢光武六年省邉郡都尉由此罷其後皆以其縣中渠帥為縣侯不耐華麗沃沮諸縣皆為侯國 '한'의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에서 다스렸다. 주령 동쪽을 나누어 칠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건무' 육년 변방의 군을 살피고 '도위'를 없엤다. 그 후로 현에 있는 거사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는데, '불내', '화려', '옥저'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여기서도 옥저가 현이 되었다고 하지만 옥저현이라는 곳은 어느곳을 찾아봐도 없습니다. 지나인의 특이한 자존감의 표시죠. 그리고 불내성에 불내후를 두어 그들의 속국처럼 말하고 있으나 후국이 아니라 고구려에 빼앗긴 것을 저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三國志》卷三十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帯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舉邑降其八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 정 시 육년(서기 245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들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팔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받치니, 다시 '불내예왕'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고하였다. 이 사건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보입니다. 비록 1년의 차이가 있으나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동천왕 20년조 (원문 생략) 20년(246) 가을 8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범하여 왔다........ 이 전쟁 때 위나라 장군이.....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위 두개의 기록을 잘 살펴봅시다. 삼국지에는 단단대령 동쪽의 예濊를 침략하여 그곳의 항복을 받고 그곳의 지도자를 불내예왕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불내성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유리왕이 천도한 불내성, 즉 국내성은 예濊 나라에 속한 곳이었는데 그 땅은 이미 고구려 땅이었고 유리왕이 그곳으로 천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을 동천왕때 빼앗겨 그곳의 지방관을 중국에서 불내예왕이라고 명한 것입니다. 즉, 이 말은 고구려 유리명왕이 천도한 불내성은 한나라 낙랑군이고 동천왕때 위나라가 침입하여 다시 빼앗은 곳이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삼국지에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예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였고 동으로 대해에 끝나는데, 지금 낙랑군 조선현의 동쪽 땅은 모두 예나라 땅이다.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불이현 혹은 불내현이 있는데 그곳은 낙랑군 조선현 동쪽이라는 말이며 고구려가 차지하여 유리명왕이 불내성으로 천도하였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낙랑군의 불내현, 예국(濊國)의 불내성, 고구려 수도 불내성.... 제가 볼때는 모두 같은 곳입니다. 그렇기에 아래 삼국사기 기사는 번역을 고쳐야 합니다.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유리명왕은 불내로 도읍을 옮겨서 예나라(尉那, = 濊國)에 있는 바위에(巖) 성을(城) 쌓았다. 尉那巖城이란 고유명사가 아니라 예나라의 바위에 성을 쌓았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고죽국이 고구려라는 기록은 사실이다 사 서에 고죽국이 고구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국의 사가들이 잘못알고 말한 것일까요? 고죽국은 한나라 요서군에 위치한 나라인데 이 곳이 고구려라고 하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어설프게) 주장한 바와 같이 고구려는 한나라 요서군 일부, 낙랑군 일부, 현도군 일부에서 시작한 나라이기에 고구려를 고죽국이라고 말한 것일겁니다. 《後漢書》卷三十三 遼西郡...令支, 有孤竹城莽曰令氏亭應劭曰故伯夷國今有孤竹城 요서군 령지현에는 고죽성이 있는데 莽이 말하기를 令氏亭이라 했고 응소는 말하기를 옛 백이의 나라라고 했다 지금 고죽성이 있다. 《隋書卷六十七》 髙麗之地本孤竹國也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요 서 령지현에 고죽성이 있는데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고죽국의 수도인 령지현에 도읍하지는 않았지만 령지현이 있던 요서군 버려현(且慮縣)의 비류국에서 시작하였고, 이 근방에 있던 낙랑군 불내현에 또한 도읍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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