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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高句麗史略卷之二/第六世<神明仙帝>紀--초벌번역--(**삼정**)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알림 ; 금번부터는 "고구리사초"라는 말을 아니 쓰겠읍니다.
        추정하건대,
        남당 선생께서 사초를 쓰겠다고 준비하신 곳에다는 사략을 필사하신 것으로
        이해되거나
        표지가 관리도중에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내용상으로 보아 내용의 제목이 "~사략"이고, 또한 "~사초"의 성격이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탈한 모본제기 다음의 것입니다. 다시 서토를 공취하는 시대가 됩니다.
조의선인의 냄새도 납니다.

계속하여 샅샅이 훑어 조언하여 주시길 앙망합니다.

<라디오>님의 고마우신 도움으로 다시 한 번 살펴서 정정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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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世<神明仙帝>紀

◎ 帝諱<再思>又曰<鹿臣>, <大武神帝>別子也. 母, 曰<曷思>太后, 其父<解素>, <柳花>夫人所生<金蛙>子也. 性, 聰悟好仁, 讀仙書, 通醫藥, 又能用兵, 善辯, 而常黙然如不知. 哀其胞兄<好童>死於非命故也. <閔中帝>崩, 國人欲立之, 固辭曰; “嫡子在, 比庶子之所勘當也.”, 遂奉母而走. <慕本>亦義其志, 封爲<仙王>. 平<扶余>亂有功. <慕本>被弑, <麻藥(樂)>等迎之, 卽位於東都神宮. 大赦. 改元曰<神明>.

○ 제의 휘는 <재사> 또는 <록신>이며, <대무신제>의 별자이다. 친모는 <갈사>태후이고, 부친은 <유화>부인이 낳은 <금와>의 아들 <해소>이다. 성품은 총민하고 어짊을 좋아하며, 선서(仙書)를 읽고, 의약에 통달하였으며, 또한 용병에 능란하고 말솜씨가 좋았다. 항상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말이 적고 태연하였다. 동복형인 <호동>이 비명에 죽은 것을 슬퍼하였다.  <민중제>가 죽으매, 나라사람들이 그를 보위에 세우려 하였으나, 고사하며 말하길; “적자가 있는데, 서자가 감당할 만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생모를 모시고 피하여 달아났다. <모본>도 그 뜻을 옳게 여기고, <선왕>을 봉하였다. <부여>를 평정함에 공이 있었다.  <모본>이 시해되자 <마약(락)> 등이 그를 모시니, 동도의 신궁(神宮)에서 즉위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고, 연호를 <신명>으로 고쳤다.

◎ 元年癸酉, 冬十二月, 以<麻勁>爲大芻加<淹호公>. <松寶>, 太輔. <穆卓>·<達賈>, 左·右將軍. 以<葦花>·<芦花>, 爲皇后. <麻>氏·<羽>氏, 副后. <葦花>, <好童>女也.  <芦花>, <玉文>女也, <曷思>太后之弟也.  <麻勁>女·<羽眞>女, 皆<慕本>后也. 因太輔之請, 皆納後宮.  以<慕本>子<翊>爲太子.  
□林使<八阪比邪>來朝.

○ 원년(단기2406년/AD73)계유, 겨울 12월, <마경>을 대추가<엄호공>으로, <송보>를 태보로, <목탁>과 <달가>를 좌·우 장군으로 삼았다.  <위화>와 <호화>를 황후로 삼고,  <마>씨와 <우>씨를 부후로 삼았다.  <위화>는 <호동>의 딸이다.  <호화>는 <옥문>의 딸이며, <갈사>태후의 동생이다.  <마경>의 딸과 <우진>의 딸은 모두 <모본>의 후였었는데, 태보의 요청에 따라 후궁이 되었다.  <모본>의 아들 <익>이 태자가 되었다.

◎ 二年甲戌, 正月, 立<宮>太子爲東宮, 與<芦>皇后習政事. 是年, 七世, 能知大體事, 多得中.  
八月, <濟>侵<羅>邊.  
十月, <朱那>反.  
<漢>攻西域車師,破之.

○ 2년(단기2407년/AD74)갑술, 정월, <궁>태자를 동궁으로 세웠는데, <호>황후와 함께 정사를 배웠다. 그 해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는데, 능히 큰 체험을 소화해 알고, 운영함에 적중함이 많았다.  
8월, <백제>가 <신라>의 변방을 쳤다.  
10월, <주나>가 반란하였다.  
<한>이 서역의 거수를 쳐서 파하였다.

◎ 三年乙未, 三月, 開仙院, 以<尙仁>爲師, <仁>能通<漢>音及字, 以畵敎人. 人皆仰之如神.  <羅>飢, 賑. 十月, 奪<濟><蛙山>{<濟>奪<蛙山>?}.  平<朱那>.  
八月, 漢主□死□曰十八子明帝□立年二八單師□□

○ 3년(단기2408년/AD75)을미, 3월, 선원을 열었다. <상인>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상인>은 <한>의 음(음가)과 자(쓰는 법)에 능통하여,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사람들은 이들을 신과 같이 추앙하였다.  <신라>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10월, <백제>의 <와산>을 빼앗았다.{<백제>가 <와산>을 빼앗았다?}.  <주나>를 평정하였다.  
8월, --이하 해득 불능 ---

◎ 四年丙子, 十月, <東沃沮>反, 討平之.  
九月, <羅>復<蛙山>.

○ 4년(단기2409년/AD76)병자, 10월, <동옥저>가 반란하였기에 토벌 평정하였다.  
9월, <신라>가 <와산>을 되찾았다.

◎ 五年丁丑, 二月, <松寶>薨, <烏希>太輔, <羽眞>左輔, <高敬>右輔.  
八月, <羅><吉門>與<加耶>戰于<黃山津口(漢江昭陽江合水地)>, 獲千餘級, 爲海湌.  
十月, <扶余>獻三角鹿長尾兎, 以爲太后瑞, 大赦.  至月雪三尺.

○ 5년(단기2410년/AD77)정축, 2월, <송보>가 죽어, <오희>를 태보로, <우진>을 좌보로, <고경>을 우보로 삼았다.  
8월, <신라>의 <길문>이 <황산진구(한강소양강합수지)>에서 <가야>와 싸워, 천여 급을 베고, 해찬이 되었다.  
10월, <부여>가 뿔이 셋인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고, 태후가 상서로운 일이라 여기니, 죄수들을 크게 풀어줬다.  눈이 달포가 되도록 내려 3 척이나 쌓였다.

◎ 十年壬午, 正月, 設五部仙院.  雖執戟之士亦授仙道.  以仙師<尙仁>爲海山高士, 以摠仙政.  以寡慾(愼食色權)靜黙(不動不言)合天(窮理自知)爲其仙要.  <羅>勸農桑, 整兵仗.  <麻>后生女<芸>.  復<烏>氏爲太后.

○ 10년(단기2415년/AD82)임오, 정월, 5부에 선원을 두었다. 미륵창(끝이 둘로 갈라진 창)을 잡은 남자 역시 선도를 가르쳤다.  선사 <상인>이 해산고사가 되어 선정을 총괄하였다.  과욕(식색권을 탐하는데 신중함), 정묵(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음), 합천(이치를 찾아 스스로 터득함)함이 선의 요체였다.
<신라>가 뽕나무 키우기를 권장하고, 병장기를 정비하였다.
<마>후가 딸 <운>을 낳았다.  <오>씨가 태후로 복위되었다.

◎ 十四年乙酉, 五月, 築<南蘇城>.  <麻>后子邯{<麻>后{生}子<邯>?}.  
<羅>·<濟>相爭.

○ 14년(단기2419년/AD86)을유, 5월, <남소성>을 쌓았다.  <마>후의 아들이 죽었다. {<마>후가 아들 <감>을 낳았다.}?
<신라>와 <백제>가 서로 싸웠다.

◎ 十六年丁亥, 正月, 命<尙仁>修<三代鏡>. <烏希>薨, <羽眞>太輔, <高敬>左輔, <乙祥>右輔, <乙景>主兵大加.
<羅>築<加召>·<馬頭>二城(加□平州).

○ 16년(단기2421년/AD88)정해, 정월, <상인>에게 <삼대경>을 다듬으라 하였다. <오희>가 죽어, <우진>을 태보로, <고경>을 좌보로, <을상>을 우보로, <을경>을 주병대가로 삼았다.  
<신라>가 <가소>과 <마두> 두 곳에 성을 쌓았다(가□평주).

◎ 二十一年癸巳, 四月, 巡觀五部, 選民俊才.  爾德六藝, 禁民崇尙, 淫亂, 賣子, 賣妻.  <羽眞>薨, <高敬>·<乙祥>陞, 拜<扶謙>右輔, <高英>主宮.  
<羅><允良>伊湌, <啓其>海湌.  
<濟><橫岳>大石一時墜落.

○ 21년(단기2426년/AD93)계사, 4월, 5부를 돌아보고 재능이 뛰어난 민간인을 선발하였다.  도덕과 6례에 따라서, 민간에서 음란함을 숭상하거나 자식과 처첩을 파는 것을 금하였다.
<우진>이 죽어 <고경>과 <을상>을 승차시켰고, <부겸>을 우보로, <고영>을 주궁(대가)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윤량>을 이찬으로, <계기>를 해찬으로 삼았다.  
<백제>에서는 <횡악>의 큰 돌이 일시에 추락하였다.

◎ 二十二年甲午, 二月, <乙祥>薨, <扶謙>左輔, <乙景>右輔.  <羅><吉元>與<加>戰于<馬頭城(麗州/麗川?)>大 捷.  <烏>太后崩, 葬于<閔中原>, 年八十.

○ 22년(단기2427년/AD94)갑오, 2월, <을상>이 죽어 <부겸>을 좌보로, <을경>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의 <길원>이 <가야>와 <마두성(여주)>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오>태후가 죽어 <민중원>에 장사하였는데, 나이 80이었다.

◎ 二十四年丙申, 七月, <曷思>太后崩, 春秋七十七, 上減食遠色, 葬于<大武獸林陵>.  七日, 仙人會者萬數.
<羅><加召城>主<長世>與<加耶>戰, 死.  
<蒙蒙>主<射旭>殂, 弟<射滿>立.

○ 24년(단기2429년/AD96)병오, 7월, <갈사>태후가 죽었다. 춘추 77세였다. 상은 감식하고 색을 멀리했다. <대무수림릉>에 장사했다.  7일, 선인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만 얼마쯤 되었다.  
<신라>의 <가소성>주 <장세>가 <가야>와 싸우다 죽었다.  
<몽몽>주 <사욱>이 죽고, 그의 동생 <사만>이 섰다.

◎ 二十五年丁酉, 正月, 詔曰; “御園長尾兎三角鹿, 似, 是年, 久之物, 能知人意, 况民年久者, 豈無可師者. 其令, 中畏年老有識者, 敎其所長於隣里以爲文字, 以記之.”  
<加耶>與<羅>修和.  
<濟>有二龍見於<漢水>云.  
<旭>子<鷄山>殺<滿>而自立. <應黙>賁漠北.

○ 25년(단기2430년/AD97)정유, 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어원의 ‘장미토’와 ‘삼각록’도 비슷하게 나이가 들어 사람의 뜻을 잘도 알아채는데, 하물며 나이 많은 백성이 (사람을) 가르치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으로서 자기가 다스리는 주변의 마을에 문자를 가르치는 이를 기록하여 올리라.” 하였다.  
<가야>와 <신라>가 화친하였다.  
<백제>의 <한수>에 용 두 마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사욱>의 아들 <계산>이 <사만>을 죽이고 위에 올랐다. <응묵>이 막북으로 도망했다.

◎ 二十六年戊戌, 三月, 上東巡,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入城, 宴父老守吏有道之士, 賜物暇有差, 紀功于大岩.  十月, 還是行. 上遠至<東海谷>, 望日岺壯觀湖, 受<藻那>·<朱那>·<貫那>之貢. 諸島酋之獻白熊膃肭者亦多. 以<穆卓>爲<沸流>沛者. <卓>, <東明>功臣<黙居>之女孫也. 鎭<扶余>之亂而有功.  鸞集于石王庭, 命有司祭之.

○ 26년(단기2431년/AD98)무술, 3월, 상이 동쪽을 순행하여 <책성> 서쪽의 <계산>에서 흰 사슴을 잡아가지고 성에 들어가서 나이 든 부로, 수자리 관리 및 ‘유도지사’ 등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공적에 따라 재물과 말미를 주고, 그 공적을 큰 바위에 새겨 주었다.  10월, 금번 순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상이 멀리 <동해곡>에 행차하여 해 뜨는 고개와 호수의 장관을 보았고, <조나>·<주나>·<관나>의 공물도 받았다. 여러 섬의 추장들이 바친 물개도 또한 많았다.  <목탁>을 <비류>패자로 삼았다. <목탁>은 <동명>제의 공신 <묵거> 딸의 손자이다. <부여>의 반란 진압에 공이 있었다.  란 새 들이 서도의 궁궐 뜰에 모여들어, 관리에게 란 새 들에게 제사하라 하였다.

◎ 二十九年 辛丑, 二月, <高敬>薨, <扶謙>太輔, <乙景>左輔, <禾玄>右輔.  
<羅>移<月城>, 周千二十三步云.

○ 29년(단기2434년/AD101)신축, 2월, <고경>이 죽어 <부겸>을 태보로, <을경>을 좌보로, <화현>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가 <월성>으로 이사했고, 이 <월성>의 둘레는 1,023보가 된다고 한다.

◎ 三十年壬寅, 正月, 以<高朱利>爲<東海谷(今尼港)>太守, 使鎭<北海(白羽岺)>及島(樺太)酋. <朱利>, <高婁>之孫也. 質重似愚而內明.  上以<東海谷>爲可守而設官, 遠無欲去, <朱利>自請往之. 人皆危之.  八月, 遣使<朴>者于賑民失農者, 給牛羊而勸蓄.  十月, 行<東明>大祭. <扶余>姬子八人吐舞. 神馬五十匹犍于<巨婁原>.  
是年八月, <音汁伐國>興, 與<悉直谷國>爭彊. <羅>召<首露>次之, 而還, 使六部餞之. <韓祇>獨以位卑者待之也. 皆伊湌待之. <首露>奴<耽下里>殺<韓祇>{守}, <保齊>而逃依于<音汁伐>主也. 鄒于家, 索之, 不送. 故<羅>遂伐<音汁伐國>, 滅之. 是年, <羅>又使<居道>滅<悉直>·<押督>. 先是, <羅>使<巨道>牧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馳戱樂, 以爲常事, 二國在傍見之而不怪曰; “馬叔之, 年例. 至是, 其兵士遂襲二國.”云.

○ 30년(단기2435년/AD102)임인, 정월, <고주리>를 <동해곡>태수로 삼아 <북해(백우령)>와 섬(화태)들의 추장을 잘 다독거리라고 하였다. <주리>는 <고루>의 손자이다. 본바탕이 묵직하여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속은 명철하다. 상은 <동해곡>을 지켜내야 할 것으로 보고 관리를 두려고 하는데, 멀다고 아무도 가려하지 않고 있었는데, <고주리>가 자청하여 가겠다고 하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동해곡>으로 부임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보았다.  8월, <박>이라는 사람을 농지를 잃은 백성을 돌보는 곳으로 보내어 소와 양을 나누어주고 짐승 키우는 것을 장려하였다.  10월, <동명>대제를 치렀다. <부여>의 여인과 사내아이 여덟이 노래하며 춤을 추었고, 신마 50필을 <거루원>에서 거세했다.  
이 해 8월 <음즙벌국>이 흥성하여 <실직국>과 땅을 놓고 다투었다 <신라>가 <수로>를 오게 하여 처리한 후 돌아갈 때, 6부에게 송별하게 하였는데, <한기>부 혼자만 직위가 낮은 사람을 내어 접대하려 했다. 모두 이찬을 내어 보냈었다. <수로>의 종자 <탐하리>가 <한기>의 {수}를 죽이니, <보제>가 <음즙벌국>주에게로 도망가 의탁하였다. 쫓아가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내어놓지를 않았다. <신라>가 <음즙벌국>을 쳐서 없애버렸다. 이 해에 <신라>는 <거도>를 시켜 <실직>과 <압독>도 쳐서 없애버렸다. 이에 앞서 <신라>는 <거도>를 시켜 <장토>벌에서 말을 키우게 하였고, 병사들을 시켜 말달리고 즐기는 것은 늘상 있어 왔기에, 곁에 있던 두 나라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말하길; “말을 모으는 것은 매년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병사들이 끝내 두 나라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 三十二年甲辰, 正月, <扶謙>薨, <乙景>太輔, <禾玄>左輔, <尙仁>右輔.  三月, <麻>皇后崩, 春秋六十二. 后以<勁>之女, 忠直好善. 初爲<慕本>后, 生子<翊>及<典>公主·<宋>公主·<馬>公主, 以直諫見廢. 上卽位之初, 納之爲副后. 以年高, 以有德, 諸后皆敬之以兄. 豊富而善産生, 上七子二女, 皆賢.  上, 以是益賢之, 封爲第三皇后.  
<羅>與<悉直>相戰.  
<射滿>子<應黙{點?}>立國於漠北, 遣子<査功>獻駝五匹.

○ 32년(단기2437년/AD104)갑진, 정월, <부겸>이 죽어, <을경>을 태보로, <화현>을 좌보로, <상이>을 우보로 삼았다.  3월, <마>황후가 죽었다. 춘추 62세였는데, <마경>의 딸이었고, 충직하고 선한 것을 좋아했다. 초에는 <모본>의 후가 되어 <익>태자와 <전>공주·<송>공주·<마>공주를 낳았는데, 직간하다가 폐위 당했다. 금상이 즉위 초에 부후로 받아들였다.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어 여러 후들이 형으로서 존경하였다. (외모는) 풍만하고 여유가 있어, 아이를 탈 없이 잘 낳아, 7남 2녀를 (더) 낳아 바쳤는데, 모두가 현명하였다. 상이, 좀 더 현명하여 졌음을 보아, 제3 황후로 봉하였다.  
<신라>와 <실직>이 서로 싸웠다.  
<사만>의 아들 <응묵{점?}>이 막북에 나라를 세우고, 아들 <사공>을 보내 낙타 다섯 필을 바쳤다.

◎ 三十三年乙巳, 正月, <扶余>獻, 丈二黃虎, 丈一白熊毛色明無尾. 使御苑, 大壯虎, 字之以取種.  三月, 鎭北將軍<麻樂>重修<盖馬>諸城, 率<貊>騎, 伐<遼東>, 取<白岩(法庫)>·<長岺(鐵岺)>·<菟城(玄菟舊治令奉天)>·<汶城(新氏)>·<章武 (遼□□府今漳武)>·<屯有(遼中)>等六城, <漢>人大驚慌忙, 以<耿夔>爲守而來戰. <宮>太子與使者<穆度婁>率輕騎, 深入敵陣, 左右衝突, 而大破之.  
<羅>·<濟>復和.

○ 33년(단기2438년/AD105)을사, 정월, <부여>가 두 길이나 되는 누런 호랑이와 한 길 되는 흰 곰을 바쳤는데, 곰은 털 색깔이 맑았고 꼬리가 없었다.  어원에 명하여 크고 우람한 호랑이를 먹이를 주어 기르고 새끼를 내게 하였다.  3월, 진북장군 <마락>이 <개마>의 여러 성을 다시 쌓고, <맥>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백암(법고)>·<장령(철령)>·<토성(현토구치영봉천)>·<문성(신씨)>·<장무 (요□□부금장무)<둔유(요중)> 등 6 성을 얻었다.
<한>인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경기>가 수장{守將}이 되어 나와서 싸웠다.  <궁>태자가 사자 <목도루>와 함께 경기병을 이끌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좌우를 들이쳐서 크게 파하였다.   <신라>와 <백제>가 다시 화친했다.

◎ 三十四年丙午, 正月, <白岩>太守<鄭元>, 與<耿夔>戰于<章武>, 失利, <宮>太子親征, 復之, 以<松豆智>爲<遼東>太守.  左輔<禾玄>薨, <尙仁>代之. <麻樂>右輔.  
<羅>賑<押督>, 而命<馬頭城>主伐<加耶>.

○ 34년(단기2439년/AD106)병오, 정월, <백암>태수 <정원>이 <경기>에 맞서 <장무>에서 싸우다 밀려나니, <궁>태자가 친정하여 복구하고는, <송두지>를 <요동>태수로 삼았다.  좌보 <화현>이 죽어 <상인>이 이를 대신하게 하고, <마락>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가 <압독>을 진휼하고, <마두성>주에게 <가야>를 치라고 명했다.

◎ 三十五年丁未, 七月, <乙景>薨, <尙仁>代之, <高德>左輔.  九月, 獵<質>陽, 獲紫獐雌雄, 育之.

○ 35년(단기2440년/AD107)정미, 7월, <을경>이 죽어 <상인>이 대신하게 하고, <고덕>을 좌보로 삼았다.  9월, <질산> 남쪽에서 사냥을 하여 자색 노루 한 쌍을 잡아, 이를 길렀다.

◎ 三十七年乙酉, 三月, <麻樂>伐<右北平>, 虜生口二千, 經籍之士七人而歸.  
<羅>幷<比只(星州)>·<多伐(大丘)>·<草八(草漢)>三國. 秋, 飢賑民.  <末曷>掠<濟><牛谷>.  
七月, <漢>使<張吉>來獻, 檀香及道德, 言靑和.

○ 37년(단기2442년/AD109)을유, 3월, <마락>이 <우북평>을 쳐서 생구 2 천을 잡았는데, 잡혀온 ‘경적지사’ 일곱이 귀복하였다.  
<신라>가 <비지(성주)>·<다벌(대구)>·<초팔(초한)> 세 나라를 병합하였다. 가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말갈>이 <백제>의 <우곡>을 노략질하였다.
7월, <한(漢)>이 <장길>을 시켜 단향과 도덕경을 바쳐오고, 화친을 청하였다.

◎ 三十九年辛亥, 二月, <松頭智>與<漢>定彊, 有失, 上怒, 配<頭智>于<沸流>.  三月, 置<大藥>·<肖門>·<孝經>等院, 敎民<本草>, 遠衆孝道. 命<麻樂>伐<漢>.  四月, <尙仁>病退, <高德>代之, <麻樂>左輔, <羽靖>右輔. <好萬>中畏大夫, <葦>皇后弟也.

○ 39년(단기2444년/AD111)신해, 2월, <송두지>가 <한(漢)>과 국경을 정하였는데, 잃은 것이 있어서, 상이 이에 노하여, <두지>를 <비류>로 귀양 보냈다.  3월, <대약>·<초문>·<효경> 등을 가르치는 학원을 두었고, 민간에게는 <본초>를 가르치고, 멀리 있는 민간에는 효도하는 것을 가르쳤다.  4월, <상인>이 병들어 물러나 <고덕>이 대신하였고, <마락>이 좌보를, <우정>이 우보를 맡았다. <호만>이 중외대부가 되었는데, <위>황후의 동생이었다.

◎ 四十年壬子, 二月, <羽靖>薨, <好萬>右輔.  五月, 上(行{幸?})<海山>. 禪位于<宮>太子, 自爲<海山>仙皇, 總執內外仙政.  以<尙仁>·<高德>, 左·右太師. <好萬>爲仙相. <葦>皇后·<羽>皇后, 爲左·右仙后. 以<芦>后爲攝政太后.  於是, 軍國之政總歸於太子. 卽位於石鸞臺.

○ 40년(단기2445년/AD112)임자, 2월, <우정>이 죽어 <호만>이 우보가 되었다.  5월, 상은 <해산>으로 납시었다. <궁>태자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해산선황>이 되어 내외선정을 총괄하시었다. <상인>과 <고덕>을 좌·우 태사로 삼았고, <호만>을 선상(仙相)으로 삼았다. <위>황후와 <우>황후는 좌·우 선후로 하고, <호>후를 섭정태후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군국정사'는 태자에게로 돌아갔고, 서쪽 도성의 란대에서 즉위하였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후부터는 좀 더 길어집니다.

정정해야 할 것 들을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2)


좌계 (2007-05-12 13:44:20)  
십년(十年) 임오(壬午) 조(條)의 이야기 가운데, ‘<羅>勸農桑, 精兵伏.’의 해석을 “<신라>가 뽕나무 키우기를 권장하고, 병역 면제요건을 다듬었다.”로 하셨습니다.

1) 병복(兵伏)은 일반적으로 ‘병졸(兵卒)’을 칭하는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즉 “신라가 뽕나무를 키우기를 권장하고, 병졸을 정예화했다.”인듯 합니다.

2) 또한 병복(兵伏)은 “병(兵)을 복(伏)하다.” 즉 “복병(伏兵)을 숨겨놓다.”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예(例)를 들면, 삼국사기 지비 마립간 6년에 다음같은 기사(記事)가 있습니다.

「자비마립간 6년(A.D 463년) 봄 2月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왕은 伐智, 德智에게 왜인을 치도록 命하였다. 德智는 ‘군사를 거느리고 길목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쳐서 크게 무너뜨렸다. 王은 왜인이 자주 국내를 침범하는 까닭으로 바닷가에 2성을 쌓았다. 六年 春二月 倭人侵삽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德智 領 ‘兵伏’ 候於路 要擊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역緣邊築二城」

‘병역 면제조건’을 면역(免役)으로 표현하지, 병복(兵伏)으로 표현 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개 ‘<羅>勸農桑, 精兵伏’와 같은 기사(記事)는 ‘경제적 내실과 전쟁준비를 동시에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충분히 준비한 신라(新羅)가 어떤 나라와 전쟁을 하는 기사(記事)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14년의 기사(記事)로 나타난 것으로 좌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 十四年乙酉, 五月, 築<南蘇城>. <麻>后子邯. <羅>·<濟>相爭.

○ 14년(단기2418년/AD85)을유, 5월, <남소성>을 쌓았다. <마>후의 아들이 죽었다(?). <신라>와 <백제>가 서로 싸웠다.

그러나, 혹 병복(兵伏)의 개념을 ‘병역 면제’의 개념으로 쓰는 용례(用例)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분명한 것은 설혹 ‘병역 면제’의 개념으로 병복(兵伏)을 썼다고 해도, 이런 병역면제를 실시한 나라는 문맥(文脈)으로 봐서 신라(新羅)이지, 결코 고구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면, 농업을 권장하면서, ‘병역 면제’를 실시하는 것은 고구리 백성을 신라가 대외적인 사민(徙民 : 이민(移民)을 뜻함)정책으로 유도하기 위함인데,
그 후에 고구리 백성의 사민(徙民)현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병복(精兵伏)은 일반적인 의미... “신라가 병졸들을 정예화해서 전쟁준비를 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참고하시길 빕니다.
좌계 (2007-05-12 15:18:19)  
습정사(習政事)와 대체사(大體事)에 대해.

사천(史穿) 김성겸 님.
해석의 ‘큰 흐름’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미묘한 어감(語感)의 차이가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언급해보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2년 갑술조의 다음 문장입니다.

원문(原文) :
◎ 二年甲戌, 正月, 立<宮>太子爲東宮, 與<芦>皇后習政事. 是年, 七世, 能知大體事, 多得中. 八月, <濟>侵<羅>邊. 十月, <未那>反. <漢>攻西域車師,破之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 :

○ 2년(단기2407년/AD74)갑술, 정월, <궁>태자를 동궁으로 세웠는데, <호>황후와 함께 정사를 배웠다. 그 해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는데, 정사의 대체적인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제대로 꿰뚫었다. 8월, <백제>가 <신라>의 변방을 쳤다. 10월, <미나>가 발란하였다. <한>이 서역의 거수를 쳐서 파하였다.

좌계의 견해:

1) 습정사(習政事)에 대해
위 해석에서 ‘與<芦>皇后習政事.’을 “<호>황후와 함께 정사를 배웠다.”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런데, 좌계의 생각에는 “정사(政事)를 익혔다.”가 좋을 듯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정사(政事)는 화백회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말발’을 이동시키고, 정리하는 복잡한 과정을 ‘실천’과 더불어 ‘익힘’ 즉 습(習)이 필요로 한 것이고, 이럴 때에는 ‘도우미’가 필요합니다. 좌계의 의견으로는 호황후께서 이때 ‘미래의 고구리 제(帝)’가 될 분을 위해서 이것 저것 보살피며, ‘도우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화백회의를 어린아이들에게 지도도 해본 경험이 좌계에게는 있는데, 이때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아는 ‘아주머니’들이 ‘도우미’로 등장할 때 습득(習得)이 잘되는 경향을 관찰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아마도 “고구리 역시 황후(皇后)들을 동원한 이런 왕실(王室) 교육이 있었지 않았나?”하는 생각입니다.

2) 태자(太子)와 동궁(東宮) -고구리 황실(皇室) 교육

중요한 것은 위 사료(史料)에서 ‘立<宮>太子爲東宮, 與<芦>皇后習政事.’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유교(儒敎) 문화에 익숙해져서 ‘태자(太子)=동궁(東宮)’이라는 등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위 사료(史料)는 은연중 태자(太子) 보다 동궁(東宮)을 더욱 높은 지위(地位)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위(爲)+직위(職位)”는 사서(史書)에서 “누구를 직위(職位)로 임명한다.”는 항상적인 용례(用例)가 있습니다.
즉 태자를 동궁(東宮)으로 임명하고, 이 동궁(東宮)은 화백회의를 비롯한 어떤 정사(政事)를 익히는 ‘황실(皇室)의 차기 황제를 위한 교육기관’과 관련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동궁(東宮)이란 황실교육장에 들어가면, 황후들이 그 교육을 ‘도우미’로 맡는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일으키게 하는 대목입니다.

3) 대체사(大體事)에 대해.

아무튼 궁(宮)이 동궁(東宮)에 들어갔을때의 나이가 7살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다음의 구절에 대해서 사천(史穿) 선생께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원문(原文) : 是年, 七世, 能知大體事, 多得中.
해석(解釋) : 그 해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는데, 정사의 대체적인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제대로 꿰뚫었다.

좌계의 의견 :
그런데, ‘능지대체사 다득중 (能知大體事, 多得中.)’의 해석 가운데 다득중(多得中)을 ‘많은 것을 제대로 꿰뚫었다.’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명해석으로 봅니다.
그러나 능지대체사(能知大體事)를 해석함에 있어서, 체(體)를 좌계는 체험(體驗) 교육(敎育), 내지 실습(實習) 교육으로 봅니다.
이런 좌계의 견해(見解)는 사물을 체(體)와 용(用)으로 나누어 보는 동양의 ‘패라다임’과 관련됩니다. 즉 체험으로 포괄적인 전체적인 그 구성(構成)을 알게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능지대체사(能知大體事)가 복잡하고 유기적인 것을 체험으로 파악하는 것을 뜻하고, 그 다음 다득중(多得中)은 실제 운영(運營) - 용(用)을 통해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봅니다.

좌계의 해석:
“그 해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는데, 능히 큰 체험을 소화해 알고, 운영함에 적중함이 많았다. ”로 봅니다.

4) 참고 제안

즉 사천 선생님과 같이 해석하여도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으나, 기왕이면 다홍치마! 라는 속담이 있듯이 ....

좌계의 의견은 단지 고구리 황실 교육을 약간이라도 조명(照明)해 주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 같아서 드리는 의견에 불과합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김성겸 (2007-05-12 19:06:52)  
좌계 선생님/
반영하였읍니다. 고맙습니다.
"<羅>勸農桑, 精兵伏."은 신라의 사정 얘기입니다.
精兵伏의 번역에 애먹었읍니다.
命兵伏은 병사들이 숨어서 기다라기 있게 하였다는 것이어 문제가 없었을 것이나
精兵伏은 복병술을 다듬었다, 또는 伏의 별도의 의미인 '면제하다'라는 뜻을 살려서
(상하좌우에서 침탈해 들어오는 상대를 막아내기 위해 병역면제자를 줄일 필요가 있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가지고 번역했던 것이었읍니다.//

라디오님/
표지에 무어라 되어 있든 내용이 사략이고,
내부의 큰 타이틀이 사초가 아닌 사략입니다.
표지의 타이틀을 포기할 의향입니다.
책으로 발간할 경우 필요하다면 서두에서 설명하여 주면 될 것으로 봅니다.
라디오 (2007-05-12 20:34:06)  
잘 알겠습니다.
김성겸님의 의견을 받아 들이겠습니다. 혼란은 불가피한 것이니까요..
대신, 해석글 서두에 "고구려사략(원래 표지 제목:고구려사초)" 라고 명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소한의 혼란을 막기 위한 배려차원에서..
이 정도는 명기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좌계 (2007-05-13 14:31:53)  
좌계 역시 ‘라디오’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해석 글 서두에 "고구려사략(원래 표지 제목:고구려사초)" 라고 명기(銘記)하는 것이 중요한 엉뚱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구리 사초 (<高句麗>史抄)’는 결국 남당(南堂) 선생께서 ‘사서(史書)를 발췌했다’는 의미의 초(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 황실 서고(書庫)에 있는 ‘고구리 역사책’이 있고, 이를 한문(漢文) 실력이 뛰어난 남당(南堂) 선생에게 아마도 ‘초벌 번역’을 의뢰하였다고 봅니다. 물론 감시를 은연중 하였겠지요.
생각건대, 신집(新集)이며 ‘배달유기’ 등등이 “일본 황실 서고 어디엔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이 사초(史抄)라는 표현이라고 좌계는 생각합니다.
초(抄)는 문자 그대로 초록(抄錄)이거든요. 남당(南堂)이 자신의 유고(遺稿) 앞에 이처럼 사초(史抄)라고 쓴 이유는 “나는 보고 베껴 쓴 것이다. 절대 지어낸 것이 아니다. 굳이 내가 어디서 베낀 것에 대해서는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알아 달라.”라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계 (2007-05-13 16:57:37)  
사천(史穿) 김성겸 님. - ‘경기(耿夔) 군(軍)’에 대하여

남당(南堂)선생의 모든 유고(遺稿)가 그렇겠지만, ‘신명선제기(<神明仙帝>紀)’는 특히 소도(蘇塗)에서 시행되었던, 화백(和白)과 신시(神市)를 연구하는 좌계로써는 귀중하기 이를데 없는 자료입니다.
사천(史穿) 선생의 명 번역을 오늘 꼼꼼히 읽어보다가 ‘놀라운 단어(單語)’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경기(耿夔)’라는 단어인데, 이는 좌계가 ‘벅수군’이라고 통칭하는 ‘국가에 소속되지 않는 군대’의 여러 이칭(異稱) 가운데 하나입니다. 양자강 지방 즉 초(楚)나라 지역에서는 형시(荊尸)로 불리워졌고, 황하 주변에는 경군(耿軍) 즉 ‘빛의 군대(軍隊)’로 불리워 졌었습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상투쓰는 습관과 관련해서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기(夔)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결승(結繩)으로써 대화’할 때 이를 조작(操作)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벅수군’인 경군(耿軍)과 이런 기(夔)는 성격상 합성어(合成語)가 되기 쉬운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벅수군’은 국제적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이런 기(夔)들에 의해, 통역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이니깐 말입니다.
아무튼, ‘신명선제기’에 이 경기(耿夔)라는 군대(軍隊)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三十三年乙巳,’ 조(條)에 ‘鎭北將軍<麻樂>重修<盖馬>諸城, 率<貊>騎, 伐<遼東>’ 즉 해석하셨다시피...“3월, 진북장군 <마라>이 <개마>의 여러 성을 다시 쌓고, <매>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칠 때”
‘<漢>人大驚慌忙, 以<耿夔>爲守而來戰’ 하게 되는데...(사천(史穿) 선생의 해석대로 ...“<한>인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경기>를 시켜 지키게 하고는 나와서 싸웠다.”인 것이지요.
여기서의 의미는 경기(耿夔)가 분명히 군대(軍隊)의 개념인 것입니다. ‘한인(漢人)들이 거주하는 성곽(城郭)은 ‘벅수군’인 경기(耿夔) 군대에 맡기고, 한병(漢兵)들은 성곽을 나와서 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전략에 대해서 궁(宮) 태자가 사자 ‘목도루’와 함께 경기병(輕騎兵)으로 한병(漢兵) 적진 깊히 들어가서 대파(大破)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三十四年丙午, 正月’ 조(條)에 또다시 이 경기(耿夔)란 단어가 나옵니다.

원문(原文)
◎ 三十四年丙午, 正月, <白岩>太守<鄭元>, 與<耿夔>戰于<章武>, 失利, <宮>太子親征, 復之.

(사천(史穿) 선생의 해석)
: “34년(단기2439년/AD106)병오, 정월, <백암>태수 <정원>이 <경기>와 ,장무>에서 싸우다 밀리니, <궁>태자가 친정하여 복구하였다.”로 해석하셨습니다.
이 해석이 결코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백암 태수 정원이 (어떤 적(敵)과) 경기(耿夔)와 장무(章武)에서 싸웠다.”로 착각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33년 조(條)에서는 경기(耿夔)를 ‘군대(軍隊)’로 해석하고 있음이 확실하나, 34년 조(條)에서는 “그것이 군대(軍隊) 이름인지? 혹은 적장(敵將)이름인지? ‘지명(地名)’인지?”가 명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모호함 속에서 경기(耿夔)를 적장(敵將)이름도 아니고, 지명(地名)이름도 아닌, ‘위지 동이전’에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경군(耿軍)이었음을 분명히 드러나도록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군대(軍隊)의 개념으로 ‘찍어서’ 해석)
“34년(단기2439년/AD106)병오, 정월, <백암>태수 <정원>은 -문맥으로 보아서 고구리 편인듯 - 경기(耿夔) 군대(軍隊)와 ,장무(章武)>에서 싸우다 밀리니, <궁>태자가 친정하여 복구하였다.”로 바꾸어야할 듯 합니다.

사천(史穿) 김성겸 님.

좌계가 굳이 잘 해석한 ‘글’을 보다 분명히 ‘찍어서 해석’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명선제기’에
궁(宮) 태자가 친(親)히 병사를 끌고 나가서 ‘싸우는 것’은 이처럼 ‘벅수군’과 한병(漢兵)이 어울려서 고구리 군(軍)과 대적(對敵)해서, 아군(我軍)이 불리해졌을 때에만 한정(限定)해서 친정(親征)한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궁(宮) 태자가 ‘고구리 군마(軍馬)’를 경기(耿夔) 군(軍)에게 바치면서, 경기(耿夔) 군과도전(刀錢)으로써 협상할 권리가 유일하게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친정(親征)할 필요성이 있다고 좌계는 보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언젠가는 좌계가 집중적으로 ‘벅수군’과 강역(疆域)군(軍)이 복합된 상황에서 전쟁을 끌고 나간 사례를 이 싸이트(site)에서 다룰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例)가 바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인데, 이는 우리가 이런 ‘빛의 군대’인 경군(耿軍) 즉 경기(耿夔)를 적절히 활용하여 100만 대군을 몰살시킨 전쟁이라고 좌계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선제기’는 역(逆)으로 경기(耿夔)가 적(敵)을 돕는 상황에서의 전쟁이란 매우 특이한 사례가 됩니다.

명 해석을 한 문장이긴 하지만, 부각(浮刻)시킬 것은 ‘확실히’ 부각시키는 것이 또한 해석을 가다듬는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생각되어 글을 남깁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라디오 (2007-05-13 17:53:03)  
경기(耿夔)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나오는 요동태수의 이름입니다.
耿=빛 경 ㉠빛 ㉡굳다 ㉢편안치 않다 ,또한 사람의 姓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夔=조심할 기 ㉠조심하다 ㉡두려워하여 삼가는 모양 ㉢외발짐승

夔 字 역시, 군대랑은 별로 상관없이 보입니다.
논의할 꺼리도 못됩니다.

후한서에도 나온다 하니 해석해 보세요...
제 말이 맞는지 내기해 보시겠습니까?

Re:
1. 동족설은 흉노사람이 서천한 제1지점은 오손(烏孫)의 땅, 즉 이리강(伊犂河) 유역이라고 했다. 주된 근거는『후한서·袁安傳』이다,: “이듬해(和帝 永元3年, AD 년),북(흉노) 선우는 경기(耿夔)한테 얻어터져 오손(烏孫)으로 달아나니, 새(塞) 북쪽 땅은 텅 비었고 (북흉노의) 남겨진 부(部)는 소속을 몰랐다. [北單于爲耿夔所破, 遁走烏孫, 塞北地空, 餘部不知所屬]”. 지금 검토한다.: 영원(永元) 3년의 전쟁은 같은 책「화제기(和帝紀)」에 또한 이렇게 실려있다.

(영원 3년) 2월, 대장군 두헌(竇憲)은 좌교위 경기(耿夔)를 추천하여 거연새(居延塞)를 나가게 했다. (경기는) 북(흉노) 선우를 금미산(金微山)에서 에워싸고 이들을 크게 깨부수고 그의 어머니 연지(閼氏)를 사로잡았다.

[永元三年]二月, 大將軍竇憲遷左校尉耿夔出居延塞, 圍北單于於金微山,大破之, 獲其母閼氏.

같은 책「경기전(耿夔傳)」에:

(영원) 3년, (두)헌은 다시 하서(河西)땅을 나가면서 (경)기를 대장군좌교위로 삼았다. (경기는) 정예기병 8백을 거느리고 거연새를 나가 곧장 북(흉노) 선우정(單于庭)으로 부리타게 달려가 금미산에서 연지와 아무개 왕 아래로 5천 여 모가지를 베었다. 선우는 몇몇 기병과 함께 몸을 빼 달아났다. (경기는) 그 흉노의 값진 재물과 가축을 다 빼앗고 새(塞)로부터 5천 여 리나 멀리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三年, 憲復出河西, 以夔爲大將軍左校尉. 將精騎八百, 出居延塞, 直奔北單于庭, 於金微山斬閼氏•名王以下五千餘級, 單于與數騎脫亡, 盡獲其匈奴珍寶財畜, 去塞五千餘里而還.
라디오 (2007-05-13 18:17:48)  
고구려사초에서 건질만한 사항은..
친인척 관계..누가 누구 아들, 많이 등장하는 후궁들의 계보,
압축, 편집된 삼국사기에 비해 내용이 자세하므로..
고구려의 강역을 더 파악하기 쉽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강역 연구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 정도이지.. 주역과 같이 수십번 읽어야만 하는 심오한 면은 적다고 봅니다.
역사서는 역사서입니다.
라디오 (2007-05-13 18:36:16)  
여러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박창화님은 고수급의 역사학자는 못 된다고..
시중에 이미 책을 낸 분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강역 연구를 좀 했던 분으로 판단되지.. 왕의 연대를 조작할 만한 흔적은 잘 안 보인다고 얘기합니다.
연대조작을 할 정도로 높은 레벨은 못 된다는거죠.
저도 그 점에서는 동의를 하는 편입니다.

고구려사초도 이미 어떤 저자가 지어낸 책을 단순 필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지어낸 시기는 고려시대이거나 조선시대이겠지요.
서지학자가 그 시기에 대해서는 더 잘 판단할 수 있겠죠.

박창화님이 유기같은 여러권으로 된 책을 요약하여 '고구려사초'를 지었다..
아니라고 봅니다.거기에 지명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서..완성?
선입견인지 몰라도.. '사초'은 그렇게 보기 어렵군요.
원고지 사략도 이미 존재한 어떤 底本를 보고 그 위에 제2,제3의 사서를 보면서 첨가,보완했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좌계 (2007-05-13 19:17:32)  
/ ‘라디오 님’께 - 경기(耿夔)= ‘요동태수’

좌계가 ‘내기’에 졌습니다. 승복(承服)합니다.
내기에 지고 많은 것을 얻었으니, 매우 상쾌합니다.
사람마다 사서(史書)를 읽는 이유가 다른 듯 합니다. 좌계의 경우는 ‘세계체제’에 대안(代案)으로써, 우리 고대사(古代史)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다 보니, 몇가지 집요하게 찾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일종의 오버(over)현상이 생겼음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라디오’ 님이 규명한 ‘경기(耿夔)=요동태수’이고, 이 경기(耿夔)의 활동반경이 중국 사서(史書)에 나오므로, 이와 접촉 전쟁을 한 고구리의 영역과 활동반경을 살피는데 새로운 ‘잣대’를 얻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좌계 (2007-05-13 19:18:06)  
/ ‘라디오 님’
남당(南堂) 선생의 일사(逸史)들이 어떤 면에서 가치가 있는가?
또 이런 일사(逸史)의 저본(底本)이 되는 사서(史書)는 무엇이었을까?
등등에 대한 글 너무나 감사합니다.
객관적 시각을 지니면서 남당(南堂) 선생의 일사(逸史) 해석의 ‘도우미’가 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해 주셨습니다.
"역사서는 역사서일 따름이다.” 큰 공부가 되었고, 또 님의 말씀이 큰 가르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