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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高句麗史略卷之二/第四世<閔中帝>紀 - 초벌번역(**수정**)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벌써 애들이 자라나 곁을 떠나니 오늘 '어린이 날'엔 좀 허전합니다.
미루려 했던 "민중제기"를 올립니다. 꼼꼼히 보아주시면 고맙겠읍니다.
틀린 것은 빨리 고쳐야 우리들의 이 싸이트에 누가 아니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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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史略 卷之二

第四世<閔中帝>紀

帝諱<解邑朱>, <光明帝>之季子也. 母,<松>太后. 性,寬厚好賢. <大武>之伐<扶余>時, 守都,得宜故信其能, 而臨崩,寄以大事, 群臣以<慕本>爲不肖,而立之. 卽位於<鸞臺>. 以<解憂>爲太子, 戒之以善.
제의 휘는 <해읍주>이고, <광명제>의 막내아들이었다. 모친은 <송>태후이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며, 어짊을 좋아했다. <대무>가 <부여>를 정벌할 때, 도읍을 (잘) 지켜내어 마땅한 까닭 있게 능력을 인정받았고, **선제가 임종에 이르러서는 (해읍주에게) 큰 일을 맡겼다.** 군신들이 <모본(해우)>이 불초함을 들어, <해읍주>를 보위에 세웠다. <란대>에서 즉위하였다. <해우(모본)>를 태자로 세우고, 선함으로 가르쳤다.

◎元年甲子,十一月,大赦. 群臣請改元,辭以無德. 以<烏>后爲皇后, <解憂>爲嗣. 是年<濟>攻<羅><蛙山><狗壤>.
◎원년(단기2397년/AD64)갑자, 11월,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다. 군신들이 연호를 바꾸길 청하였으나, 스스로 쌓은 덕이 없다 하고 고사하였다. **<오>후를 황후로 삼고, <해우>를 후사로 정한 것은 <모본>을 선하게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해에 <백제>가 <신라>의 <와산>과 <구양>을 공격하였다.

◎二年乙丑, 三月, 宴群臣於石. 五月, 東都大水, 上與皇后問民賑飢. 九月, <烏>皇后生<鶴>公主,以后兄<烏 >爲右輔. (<漢>度<遼>營,斷南北<虜>).
◎2년(단기2398년/AD65)을축, 3월, 서도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5월, 동도에 큰물이 나서 상과 황후는 백성들을 문안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9월, <오>황후가 <학>공주를 낳으니, 황후의 오라비를 우보로 삼았다. (<한>이 <요>를 건너 영을 설치하여 <로>의 남북을 끊었다.)

◎三年丙寅,七月,與<烏>皇后東狩獲白獐,飼之. <濟>取<蛙山>置戌二百人,尋失. 東都無雪. 以后弟<烏希>爲中畏大夫,<麻勁>太輔,<松보>左輔.
(<漢><□>殺其弟<荊>. <荊>以 類於<秀>, 言三十得天下, 欲起兵, 而伏罪弟<莫好佛>, □□□□).
◎3년(단기2399년/AD66)병인, 7월, <오>황후와 함께 동쪽으로 몰이사냥을 가서 흰 노루를 잡았는데, 먹이를 주어 길렀다. <백제>가 <와산>을 (신라로부터) 빼앗고 수자리 이백명을 두었으나, 다시 빼앗겼다. 동도에 눈이 오지 않았다. 후의 남동생 <오희>를 중외대부로, <오경>을 태보로, <송보>를 좌보로 삼았다.
(<한><□>이 자기 동생<형>을 죽였다. <형>은 <수>와 모습이 비슷하였는데, 나이 삼십이면 천하를 얻을만하다 말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동생 <막호불>을 꿇리어 죄를 묻고 □□□□하고자 했다).

◎四年丁卯,四月,與<烏>后田于<閔中原(橫川縣石門子)>,祀<烏伊>祠. 七月,于田見石窟而謂<烏>后,吾死,宜葬于此,后曰粗殘奈何. 上曰; "<東明>茅茨不剪, <松讓>朽木爲宮. **吾安敢奢其死骨哉.** 汝亦從我于斯可也." 后笑曰; "女必從夫,陛下雖無言,妾當自從." <解憂>太子遊三賢古基,尋<熊心山>聖母古宅,名其地曰<慕本原>. 九月,東海使人<高朱利>獻鯨目于<烏>后,夜有光,當燭時. <烏>后又産<悅>公主. 上謂后曰; "<解憂>改過而孝我夫妻,可以傳位. 與汝爲仙何如." 后曰; "<解憂>雖吾出,其心未可測, 待我産一男子傳之未晩."  上笑曰; "汝亦老矣. 安能久産哉." 后不悅. <扶余>內亂,命<再思><麻藥>等,率<達賈><穆卓><杜魯>往鎭之. <羅>以<順貞>爲伊 ,委政. <漢>置五經師,<羽林>通經,<匈奴>入學.
◎4년(단기2400년/AD67)정묘, 4월, <오>후와 함께 <민중원>으로 가서 사냥하고, <오이>사당에 제사하였다. 7월, 다시금 사냥을 나가 석굴을 발견하고는 <우>후에게 이르길; "내가 죽거든 이곳에 나를 장사하면 좋겠다." 하니, <오>후가 답하길; "추하고 허술하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상이 "<동명>께서는 풀로 지붕을 잇고 끝도 다듬지 않았으며, <송양>은 썪은 나무로 궁을 지었소. 내가 어찌 죽은 내 해골을 위하여 사치할 수 있겠오. 당신도 나를 따라 이곳으로 왔으면 하오." 하니, 후가 답하길; "여필종부입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실 필요없읍니다. 첩도 응당 기꺼이 따르겠읍니다."하였다. <해우>태자가 (자기를 따르는) 세 명의 현신과 함께 (나라의) 옛터에서 놀다가 <웅심산> 성모고택을 찾아보고는 그곳 땅을 <모본원>이라고 이름지었다. 9월, 동해의 사신 <고주리>가 <오>후에게 고래눈알을 바쳤는데, 밤에는 빛이 났고, 촛불을 켠 것 같았다. <오>후가 또 <열>공주를 낳았다. 상이 <후>에게 말하길; "<해우>가 개과천선하여 우리 내외에게 효도를 하오. 임금자리를 물려줘도 될 것 같소, 그리하고 나서 당신과 나는 선이나 함이 어떻겠소?" 하였더니, 후가 "<해우>는 내가 낳긴 하였어도 그 속내는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들 하나를 더 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새로 낳은 아들에게 물려주어도 늦지 않습니다."라 답하기에, 상이 웃으면서; "당신 역시 이미 나이가 많은데, 어찌 별 탈없이 오래도록 낳을 수 있겠소?"하고 말하니, 후는 달가와 하지 않았다. <부여>에서 내란이 일어났기에, <재사>와 <마약> 등에게 <달가><목탁><두로>를 데리고 가서 진압하라 하였다. <신라>는 <순정>을 이찬으로 삼고 국정을 맡겼다. <한>은 오경사를 두고, <오림>에게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흉노>가 입학하였다.

◎五年戊辰,正月,<扶余>亂平. <再思>請娶<王文>之女,許之. 五月,上崩東都,遺命立<解憂>太子. <解憂>卽位於東都新宮,改元<慕本>. 葬帝于石窟. 群臣欲作陵, <烏>后曰; "吾止禪位之事,以違夫志. 且作新陵,是重違夫志也. 吾亦死當歸此. 使後人知帝之儉德,而爲皇后者勿違夫志可也. 群臣 伏.
◎5년(단기2401년/AD68)무진, 정월, <부여>의 내란이 수습되었다. <재사>가 <왕문>의 딸과 혼인하고자 청하였고, 허락되었다. 5월, 상이 동도에서 죽었는데, <해우>태자를 임금으로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해우>태자가 동도의 신궁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모본>으로 바꿨다. 선제를 석굴에 장사했다. 여러 신하들이 새로이 릉을 쌓으려 하자, <오>후가 이르길; "나는 (선제의) 양위를 말려 지아비의 뜻을 어긴 바 있다. 새로이 릉을 쌓게 되면 지아비의 뜻을 또 다시 어기는 것이 된다. 나 역시 죽으면 당연히 이곳으로 와야 한다. 후세의 사람들에게 선제의 검소하신 덕을 알게 하고, 황후들도 지아비의 뜻을 거스르지 않게 하라." 하니, 신하들이 칭송하고 따랐다.

論曰;"<閔中>受顧命,行<伊周之事>, 以傳位於<慕本>則賢矣, 不識其詐則惛矣. 或之以善,則好矣. 不擇師以敎之, 設官以制之, 則欠矣."
찬자가 평하길; "<민중>이 고명을 받고, (은주시절에 뉘우치고 행실을 바로잡은 이에게 먼저의 자리를 돌려주었던) <이주지사>를 행하여, <보본>땅에서 (모본왕 즉 해우에게) 보위를 물려 준 것은 현명한 일이었고, 거짓됨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였음은 명석하지 못하였음이었다. 혹 (모본왕에게 보위를 전한 것)은 선(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이는 간사(奸邪)함을 불렀다. **스승을 두어 교육도 시키지 않고, 관리를 두어 제도적으로 견제를 하지도 아니 한 것이** 결함이었다." 한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잘못된 곳을 고칠 수 있게 도와주시면 고맙겠읍니다.

다음의 모본왕부터는 골육상잔(?)이 움틉니다. 이미 씨앗은 뿌려졌고요....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1)


좌계 (2007-05-05 16:38:04)  
사천(史穿) 김성겸 님.

맨 끝의 구절의 해석을 좀더 친절하게 함이 좋을 듯 싶습니다.
(원문(原文))
論曰;"<閔中>受顧命,行<伊周之事>, 以傳位於<慕本>則賢矣, 不識其詐則 矣. 或之以善,則好矣. 不擇師以敎之, 設官以制之, 則欠矣."
(해석(解釋))

“후세에 말한다면; "<민중>이 고명을 받고, <이주지사>를 행하여 <보본>땅에서 보위를 물려 준 것은 현명한 것이었고, 거짓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음은 혼미함이었다. 혹시나 선함에 의한 것이었다면 잘 한 일이다. 적절한 이를 시켜 가르치지 아니하고 관리를 두어 제도화 한 것은 흠이 되었다."고 할 만하다.”
로 하셨으나,

(1) 이주지사(伊周之事)는 주(周) 초기에 태갑(太甲)이 불초(不肖)하자, 이윤(伊尹)이 대신 정치를 이끌고 나가다가, 그가 반성하자 자리를 물려준 것을 뜻함을 잘 아실 겁니다.
즉 ‘민중제기(<閔中帝>紀.)’ 첫부분에 “군신들이 <모본>이 불초함을 들어, <해읍주>를 보위에 세웠다.”과 관련이 되어 민중제가 올랐으나, 나중에 ‘모본’에게 보위를 물려줌을 뜻함을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함이 좋다고 봅니다.

(2) 논왈(論曰)을 “후세(後世)에 말하기를...”라고 하셨으나, 이는 사서(史書)에서 ‘글을 적는 사람’ 사관(史官)의 평론(評論)을 흔히 지칭합니다.
즉 “사관(史官)이 평론(評論)하기를” 로 고침이 좋은 듯 싶습니다.

(3) ‘或之以善,則好矣. 不擇師以敎之, 設官以制之, 則欠矣.’의 해석에 관해서는 좌계의 해석으로는

“ 혹 (모본왕에게 보위를 전한 것)은 선(善)한 것이나, 이는 간사(奸邪)함을 불렀다.(=或之以善,則好矣.)
스승을 택하여 교육을 시키지 않고, 관료를 두어 제도적 견제를 하려고 한 것이 결함을 불렀다. (設官以制之, 則欠矣.)”입니다.
참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날 덕분에 사천 선생의 해석을 일찍보게 되어 기쁩니다.
김성겸 (2007-05-05 16:57:32)  
좌계 선생님, 고맙습니다.
최대한 반영하겠읍니다.
제가 좋아 하는 짓이지만, 실수할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크고 작은 실수를 하다보니 겂이 납니다.
원래 한문문장이 띄어쓰기 등을 하여놓지를 않아서
번역하는 사람의 끊어읽기에 원래 쓰고자 했던 내용이 잘 못 전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인데,
저 역시 자초한 괴로움을 당하는가 싶습니다.

아울러서
우리 이 싸이트를 아끼고 우리역사를 밝히고자 애쓰시는 많은 네티즌 여러분들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정성일 (2007-05-06 12:36:30)  
삼국사기와 비교해 보시라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해석본을 올립니다.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고 참고하시라고 올리는 것입니다.

4.민중왕(A.D.44~A.D.48.재위기간 5년)
원년(A.D.44)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이며,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겨울 11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A.D.45) 봄 3월, 여러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3년(A.D.46) 가을 7월,왕이 동쪽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12월,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4년(A.D.47) 여름 4월, 왕이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7월, 다시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보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에 장사할 것이며, 별도로 능묘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9월,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1만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5년(A.D.48)에 왕이 별세하였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호를 민중왕이라 하였다.
백송 (2007-05-07 14:47:25)  
김성겸님의 노고 덕분에 편안히 사서를 보고 있습니다.
몇가지 대목에 대하여 제 해석을 덧붙여 봅니다.

, 而臨崩,寄以大事, 群臣以<慕本>爲不肖,而立之. 卽位於<鸞臺>, 以<解憂>爲太子, 戒之以善.
선제가 임종할 때에도 기묘하게도 큰 일을 잘 치러내니, 군신들이 <모본(해우)>이 불초함을 들어, <해읍주>를 보위에 세웠다. <란대>에서 즉위하고, <해우(모본)>를 태자로 세웠고, 태자를 선함으로 가르쳤다.

*而臨崩,寄以大事 :선제가 임종할 때에 대사(나라를 다스리는 것)를 맡겼다
以<解憂>爲太子, 戒之以善. : <모본>이 불초하여 <해우>를 태자로 세웠으니 이것은 곧 善함을 지키도록 교훈을 내린 것이다. (불초한 자를 태자로 세우지 아니한 것은, 다시 선하게 되라고 징계한 것이다)

<宋讓>朽木爲宮. 吾安敢奢其死骨哉
나는 내 죽은 해골을 편안하고 맘껏 자유롭게 해주고 싶소.

*송양은 썩은 나무로 궁궐을 지었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죽은 해골을 위해 (무덤을 만들어)사치할 것이오.

不擇師以敎之, 設官以制之, 則欠矣."
스승을 택하여 교육을 시키지 않고, 관리를 두어 제도적 견제를 하려고 한 것이 결함을 불렀다." 한다.

* 不擇이 뒤 두개 문장 모두를 한정한 것으로서, 스승을 택하여 교육도 시키지 아니하고, 관리로 하여금 왕을 견제하도록 장치를 마련하지도 아니한 것은 흠결이라 하겠다.
김성겸 (2007-05-08 00:36:21)  
백송 선생님,
고맙습니다...반영하여 놓겠읍니다.
<해우>는 휘이고, 모본은 시호입니다.
<해읍주>는 <민중제>의 동생으로, <민중>의 아들인 <해우(모본)>에 앞서 즉위하였다가,
훗날 <해우>에게 양위하려가 그러지 못하고 전위를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백송 (2007-05-08 09:46:23)  
김성겸님/
해우과 모본가 동일인인데, 자세히 읽지 못하고 단지 문장만 검토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계속 수고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