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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祗摩紀(지마기) (A.D.159 - A.D.191:재위33년) - 해석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二十一年 正月 束己伊伐飡 吐乙稟主 以私臣繼相 自此始 逸聖廣樹其黨 仍以其臣代 已 文父爲大書頭
21년(A.D.179) 정월 속기(束己)를 이벌찬으로, 토을(吐乙)을 품주로 삼았다. 사신(私臣)이 재상을 이은 것은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일성이 그 무리(黨)를 널리 심었다. 거듭하여 그 신하로 대신하게 하고, 조금 있다가 문부(文父)를 대서두(大書頭)로 삼았다.

二月 角干馬知那薨 葬于卞山 以其妻兪生爲二品權妻 其子兪知那爲殿中郞
2월 각간 마지나(馬知那)가 죽어 변산(卞山)에 장사를 지냈다. 마지나의 처 유생(兪生)을 2품 권처로, 아들 유지나(兪知那)를 전중랑으로 삼았다.

賜米 七利生 旭亥女旭山
쌀을 내렸다. 칠리(七利)가 (감문국) 욱해(旭亥)의 딸 욱산(旭山)을 낳았다.
≪견해≫ 다른 문장과는 순서가 바뀌어 있다.

火自高井南門起 延及西北民戶 若鬼火 命禳之
고정(高井) 남문에서 저절로 불이 나서 멀리 서북의 민가에까지 미치었는데, 귀신불(鬼火)과 같았다. 푸닥거리(禳, 혹은 제사)를 하도록 명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21년 기사
21년 2월 궁궐 남문이 불탔다.

三月 所松生班君子忽郞君 上洗之
3월 소송(所松)이 반군(班君)의 아들 홀랑군(忽郞君)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試武士 于北川 取各藝 三百人
북천(北川)에서 무사(武士)를 시험하였다. 각각의 기예에서 300명을 뽑았다.

以逸聖子日長爲班君兵官
일성의 아들 일장(日長)을 반군(태자) 병관으로 삼았다.

碩孝爲右部執書 申權左部執書 屛旨爲北路將軍
석효(碩孝)를 우부집서로, 신권(申權)을 좌부집서로, 병지(屛旨)를 북로장군으로 삼았다.

七月 上幸蚊川祠 祭阿世木我 禱年豊
7월 왕이 문천사(蚊川祠)에 행차하여, 아세(阿世)와 목아(木我)의 제사를 지내어, 풍년이 들기를 기도하였다.

雄宣西路 艾老南路 巨完護城將軍 君啓別軍使
웅선(雄宣)을 서로, 애노(艾老)를 남로, 거완(巨完)을 호성장군으로, 군계(君啓)를 별군사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于沙伐
9월 사벌(沙伐)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十二月 君啓護城將軍 巨完加召城主
12월 군계(君啓)를 호성장군으로, 거완(巨完)을 가소성주로 삼았다.

二十二年 正月 汗門伊伐飡 春宅大母捺生稟主 乃逸聖女也 屛旨爲京路將軍 文父爲右部執書 有禮爲北路 碩孝爲左部執書 申權爲波珍飡 竹春京都兵官
22년(A.D.180) 정월 한문(汗門)을 이벌찬으로, 춘택대모 날생(捺生)을 품주로 하였다. 곧 날생은 일성의 딸이다. 병지(屛旨)를 경로장군으로, 문부(文父)를 우부집서로, 유례(有禮)를 북로로, 석효(碩孝)를 좌부집서로, 신권(申權)을 파진찬으로, 죽춘(竹春)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다.

二月 上巡狩西路
2월 왕이 서로를 돌며 두루 살피었다(혹은 사냥을 하였다).

五月 召文妙隆太子來朝 命以上女洪只內禮妻之
5월 소문 묘륭(妙隆)태자가 입조하였다. 왕의 딸 홍지내례(洪只內禮)를 처로 삼도록 명하였다.

七月 以汗門女高文爲七品權妻
7월 한문汗門의 딸 고문高文을 7품 권처로 삼았다.

九月 水酒太守碧公卒 洪尸代之
9월 수서태수 벽공(碧公)이 죽어, 홍시(洪尸)를 대신하였다.

行大場 于推火
추화(推火)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只珍內禮生 逸聖子阿達羅
지진내례(只珍內禮)가 일성의 아들 아달라(阿達羅)를 낳았다.

十一月 鳥好大母薨 葬以神禮 乃果多黑齒之母也
11월 조호대모(鳥好大母)가 죽어 신(神)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조호대모는 과다흑치(果多黑齒)의 어머니다.

十二月 召文太上崇德殂 允明太子卽位 遣使來告 上命小光公與妙隆往吊
12월 소문의 태상(太上) 숭덕(崇德)이 죽었다. 윤명(允明)태자가 즉위하였다. (소문국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보고하였다. 왕이 소광공(小光公)과 묘륭(妙隆)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二十三年 正月 永公爲伊伐飡 春宅大母永吉稟主 申權大等伊飡 順宣波珍飡 大羊水母
23년(A.D.181) 정월 영공(永公)을 이벌찬으로, 춘택대모 영길(永吉)을 품주로 하였다. 신권(申權)을 대등이찬, 순선(順宣)을 파진찬, 대양(大羊)을 수모로 삼았다.
≪견해≫ 순선과 대양은 부부사이이니, 순선이 수로장군을 겸하고 있다.

召文允明 請娶骨女 乃以順宣女多山妻之 順宣妻大羊 乃逸聖之胞妹 而美 而聰慧 上太子時 愛逸聖兄弟 常造其家 大羊自幼 受幸于上 而生女 恐累上德而仍嫁順宣 上因幸之 順宣不敢妻其妻 又生 上女阿羊 上卽位首 拔順宣爲級飡 而寵幸之 以其母馬元爲大母 順宣以順貞之子 馬貞之外孫 久屈不伸 至是大昌 初順貞流至駒令 憤而欲死 有唐科者卜之 曰 “三年而事平 十五年而生貴子 六十年之後復大昌” 其言 果驗
소문 윤명(允明)이 골녀(骨女)에게 장가가기를 청하여 이에 순선(順宣)의 딸 다산(多山)을 시집보냈다. 순선의 처 대양(大羊)은 일성의 포매(胞妹, 같은 어머니 여동생)다. 아름답고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왕이 태자일 때 일성형제를 사랑하여 항상 그 집안사람을 기르도록 하였다. 대양이 어렸을 때부터 왕의 행차를 받아 딸을 낳았다. 왕의 덕이 더럽혀질까 두려워하여 이에 순선에게 시집을 갔다. 왕의 행차로 인하여, 순선은 그 처 대양을 감히 처라고 하지 못했다. 다시 왕의 딸 아양(阿羊)을 낳았다. 왕이 즉위 시 첫 인사에 순선을 뽑아 급찬으로 삼고, 총애의 행차가 있었다. 순선의 어머니 마원(馬元)을 대모로 삼았다. 순선은 순정(順貞)의 아들이고, 마정(馬貞)의 외손이다. 오랫동안 엎드려 허리를 펴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크게 창성하게 되었다. 처음에 순정이 유배를 가 구령(駒令)에 이르렀을 때, 괴로워하여 죽으려 하였다. 당과(唐科)라는 사람이 있어 점치며 말하기를 “3년이 있으면 일이 평탄해지고, 15년이 있으면 귀인을 얻게 되고, 60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크게 번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결과적으로 영험이 있었다.

三月 伊伐飡永公薨 于政堂 申權代之 初上欲以申權爲相 而申權力薦其叔兄 至是竟爲相 稟主永吉 永公之女 而申權之妻也
3월 이벌찬 영공(永公)이 정당(政堂)에서 죽어, 신권(申權)을 대신하게 하였다. 처음에 왕이 신권을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신권이 힘써 둘째형을 천거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재상이 되었다. 품주 영길(永吉)은 영공의 딸인데, 신권의 처다.
≪견해≫ 이벌찬(또는 이찬)과 품주가 부부관계가 아닌 경우도 있었나 보다. 때로는 품주를 먼저 고르고, 이벌찬을 임명한 후 두 사람을 결혼시킨 경우도 있다.

四月 自春大旱 班君太子祈雨 于蚊川 而得疾薨 上怒 命毁蚊川祠 初阿世大母有私臣木我者 不知何許人也 其根肥大 沈沈有味 阿世藏于密室 而好之 日知大王聞而惡之 遂焚于川上 自後有大蚊生于川 上多害人 命卜之 則木我之化也 乃配阿世 而作祠 而祭之 蚊自不見 而雨調 年豊 旱魃之時 其蚊復見 至是 其蚊又生 太子被咬 乃命羽林軍 焚其祠 火燒蚊川林 時板久從太子 而不謹故 降其爵
4월 봄부터 가물었다. 반군(班君)태자가 문천(蚊川)에서 기우제를 행하였는데 병을 얻어 죽었다. 왕이 노하여 문천사(蚊川祠)를 헐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아세대모(阿世大母)에게 목아(木我)라는 사신(私臣)이 있었는데, 언제 쯤 사람인지 모른다. (목아의) 성기가 크고 왕성하여 맛이 있어, 아세가 밀실에 감추어 두고 좋아하였다. 일지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더럽다하여, 문천 위에서 태워죽이기에 이르렀다. (목아를 죽인) 후로부터 하천에 왕모기를 생겼다. 왕이 사람에게 해로움이 많으므로 점을 치도록 명하였다. 곧 목아가 변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아세와 짝 지워 사당을 짓게 하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 때부터 모기가 보이지 않고, 비가 고르게 와서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가물었을 때 그 모기가 다시 나타났고, 이 때에 이르러 그 모기가 생겨나니, 태자가 모기에 물렸다. 이에 우림군에게 명하여 그 사당을 불사르고, 문천림을 불로 소각하였다. 이때에 판구(板久)가 태자를 따라갔는데, 열심히 하지 않은 연유로 작위를 내렸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23년 기사
23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8월 왕이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견해≫ 통설은 문천(蚊川)을 경상북도 경주시의 남천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천이 유두행사가 열린 곳이며, 가물 때는 모기가 극성이었는지 확인해 볼일이다.

以南君太子爲正統太子 所松爲五品權妻
이로써 남군태자(南君太子)를 정통태자(正統太子)로, 소송(所松, 반군의 妃)을 5품 권처로 삼았다.

六月 以大宣爲太子兵官
6월 대선(大宣, 순선과 대양의 아들)을 태자병관으로 삼았다.

七月 太子妃達亥生太孫 太子洗之 上名之 曰小南君
7월 (남군)태자비 달해(達亥)가 태손(太孫, 왕의 손자)을 낳았다. 태자가 아기를 씻겼다. 왕이 소남군(小南君)이라 이름 지었다.

八月 以逸聖爲副君 命輔太子 監國 詔于中外 曰 “朕爲天子卄三年 災異甚多 自愧無德 妃父逸聖 我太孫之祖 而朕之半體 可使攝行天子事 以彰其德可也”
8월 일성을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태자를 도와 감국(監國)하도록 명하였다. 나라안팎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천자로 지내온 지 23년 동안 재앙이 특출하게 심하였다. 덕이 없음을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태자)비(妃)의 아버지 일성은 나의 태손(소남군)의 (외)할아버지로, 짐의 반체(半體)다. 가히 (일성으로) 하여금 천자의 일을 섭행(攝行, 대신)하게 하고, 그 덕(德)을 밝힘이 옳다”고 하였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부군(副君)으로 임명한 기사를 새로운 왕이 등극한 것으로 옮겨 적고 있다. 한 나라에 두 명의 군주가 있다는 기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서 일 것이다. 지마이사금의 후반부의 기사와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초기 기사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九月 副君 以順宣爲護城伊飡 日長爲護城將軍 君啓爲京路將軍 屛旨別軍使 汗門子長汗爲京都兵官
9월 부군이 순선(順宣)을 호성이찬으로, 일장(日長)을 호성장군으로, 군계(君啓)를 경로장군으로, 병지(屛旨)를 별군사로, 한문(汗門)의 아들 장한(長汗)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다.

十月 南君有疾 中外禱之
10월 남군(南君)태자가 병이 들어, 나라안팎에서 (병이 낫도록) 빌었다.

十二月 召文獻方物 于副君
12월 소문(召文)이 방물(方物)을 부군(副君, 일성)에게 바쳤다.

上入奈歷
왕이 내력(奈歷)으로 들어갔다.

雄宣以其女骨氏 妻副君子日長
웅선(雄宣)이 그의 딸 골씨(骨氏)를 부군의 아들 일장(日長)에게 시집보냈다.

行大祭 于閼川
알천(閼川)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二十四年 正月 副君與太子妃達亥抱太孫 以受朝 于高井
24년(A.D.182) 정월 부군과 태자비 달해(達亥)가 태손(소남군)을 안고, 고정(高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文父伊伐飡 春宅代母昭夫那稟主 文斗右部執書 順宣左部執書
문부(文父)를 이벌찬, 춘택대모 소부나(昭夫那)를 품주, 문두(文斗)를 우부집서, 순선(順宣)을 좌부집서로 하였다.

五月 權妻所松生 上子方君 上洗之
5월 권처 소송(所松)이 왕의 아들 방군(方君)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以多婁妻暖花公主爲歌仙 汗昔太子爲歌兄
다루(多婁)의 처 난화(暖花)공주를 가선(歌仙)으로, 한석(汗昔)태자를 가형(歌兄)으로 삼았다.

七月 上與所松忽郞君方君 禳于蚊川三日 是夜 愛后與逸聖副君潛通 而娠 是爲好禮娘主也
7월 왕이 소송(所松)과 홀랑군(忽郞君)과 방군(方君)이, 문천(蚊川)에서 3일 동안 푸닥거리(또는 제사)를 하였다. 이날 밤 애후와 일성 부군이 잠통(潛通)하여 아기를 가졌는데, 이 사람이 호례낭주(好禮娘主, 구도 갈문왕의 어머니)다.

九月 南君太子與方乙宅頭等 復立蚊川祠
9월 남군(南君)태자와 방을(方乙) 택두(宅頭) 등이 다시 문천사(蚊川祠)를 세웠다.

上幸太子妃達亥娘主 于東宮 命賜衣酒 于味生 逸聖自始 漸入放色 群臣莫能諫焉
왕이 태자비 달해낭주에게 행차하여 동궁(東宮)으로 갔다. 옷과 술을 미생(味生, 달해의 母, 지마의 여동생)에게 내리도록 명하였다. 일성이 이때부터 시작하여 점점 여색에서 어긋났으나, 군신들이 어찌 간언할 수 없었다.
≪견해≫ 남당유고가 달해의 어머니를 알려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상장돈장을 보지 않으면 해석이 막힌다. 달해의 출생이 164년이니, 미생은 당시 구추태자의 처로 있을 때이다. 벌휴의 父인 석추갈문왕이 일성과 매우 친한 사이로 나타난다. 석추와 구추의 관계가 신라사초에 나타나지 않으나 父子사이로 보인다.

二十五年 正月 順宣伊伐飡 大羊稟主
25년(A.D.183) 정월 순선(順宣)을 이벌찬으로, 대양(大羊)을 품주로 삼았다.

日暑如夏 春草皆生 命雪童大頭洪可 禳于桃山
날이 여름처럼 더웠다. 봄의 풀들이 다 자라났다. 설동대두 홍가(洪可)에게 명하여 도산(桃山)에서 푸닥거리를 하도록 명하였다.

二月 南君太子巡視 西北路
2월 남군태자가 서북로를 순시(巡視, 돌아보며 살펴봄)하였다.

七月 命權妻所松爲南君太子妃 達亥妃君入 爲五品權妻 暖花公主爲四品權妻 以視朝夕
7월 권처 소송(所松)을 남군태자비(南君太子妃)로 삼았다. 달해비군(達亥妃君)을 들어오게 하여 5품권처로 삼고, 난화(暖花)공주를 4품권처로 삼았다. 이로써 아침저녁으로 살펴보게 하였다.

九月 行大場 于推火
9월 추화(推火)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上巡狩 至卞山
왕이 두루 살피며(혹은 사냥을 하며), 변산(卞山)에 이르렀다.

愛后與逸聖入祖廟 告好禮 此乃告私之始也 仍厚賜廟主廟法
애후와 일성이 조상의 사당에 들어와 호례(好禮)를 고하였다. 이것이 곧 사사로이 자식을 고(告)한 시작이다. 이에 묘주(廟主)와 묘법(廟法)에게 후하게 내렸다.

阿瑟羅太守兵君卒 臼臣繼之
아슬라 태수 병군(兵君)이 죽어, 구신(臼臣)이 자리를 이었다.

十一月 上還 自卞山
11월 왕이 변산(卞山)에서 돌아왔다.

二十六年 正月 行靑鼠大祭 于兄山 上與達亥親臨之
26년(A.D.184) 정월 청서(靑鼠=甲子)대제를 형산(兄山)에서 행하였다. 왕이 달해와 친히 지켜보았다.
≪견해≫ 자(子=鼠)의 방위는 북(北)쪽에 해당한다. 통설은 형산(兄山)을 포항이라 한다. 포항지역이 호랑이가 출몰하던 지역인지 옛 자료를 확인 해 볼 필요가 있다.

特命果多黑齒爲伊伐飡 福生爲稟主 齒以妖術得 寵于上 以其無父骨 不得大展 上乃令 汗門爲父 使鳥好發言 曰 “汗門幼時 祓命集 神果 而來仍浴于鳥好 井中 相通而生” 云 而齒實漢岐奴之潛通 于鳥好 而生也
특별한 명령으로 과다흑치(果多黑齒)를 이벌찬으로 삼고, 복생(福生)을 품주로 삼았다. (흑)치는 요술(妖術)을 얻어 왕에게 총애를 있었으나, 아버지의 골품이 없음으로 인하여 크게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왕이 이에 한문(汗門)을 아버지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조호(鳥好)를 시키어 말하기를 “한문은 어렸을 때 푸닥거리를 하여 수명이 이르렀고, 신(神)이 내린 결과로 장차 이에 조호와 정중에서 목욕하고 상통하여 태어났다”고 일렀다. 실제로는 (흑치는) 한기(漢岐=漢祗)부의 종(奴)이 조호와 잠통(潛通, 몰래 통함)하여 생긴 자식이다.
≪견해≫ 1. 흑치(黑齒)라는 이름은 특이하기도 하고, 예전에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사전2리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는 산 사람들이 모두 검은 치아를 가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폐쇄되었으나, 실제 과다흑치(果多黑齒)가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이 신라6부중의 하나인 한지부의 위치가 아닌가 합니다.
         2. 통설은 청도군은 이서국이 있고, 의성군에 소문국이 있는데, 하나 같이 신라의 경주를 둘러싸고 있으니, 무언가 잘못이 있습니다. 만약 신라와 백제가 경계를 다투려면 주변의 이서국이나 소문국을 정벌하고 난 후에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경주의 주변에 하나같이 이서국과 소문국이 있는 것으로 혼돈하는 이유는 신라의 상수리제도, 고려의 기인제도와 같은 볼모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신라는 주변의 국가를 정벌하고 그 종실사람들을 6부에 집과 농장을 내리며 살도록 하여, 신라 중앙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신라인으로 동화 흡수하는 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또 반란이 발생하면 그들이 인질이 되어 억제하는 효과가 동시에 발생하는 셈입니다.

三月 達亥生 上子猩公 先是上與亥 宿兄山 亥夢見 靑鼠化爲猩猩 故上 曰 “當以猩 命吾子矣” 至是果矣
3월 달해(達亥)가 왕의 아들 성공(猩公)을 낳았다. 먼저 번에 왕과 (달)해가 형산(兄山)에서 잠을 잤는데, (달)해의 꿈에 푸른 쥐(靑鼠=甲子)가 성성이(오랑우탄)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까닭에 왕이 말하기를 “당연히 성성이다. 나의 아들로 명하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른 결과다.
≪견해≫ 달해가 권처가 된 것은 183년 7월이고, 태몽을 꾼 것이 184년 정월의 기사다. 성공의 친부가 지마인지 남군인지 애매하다.

五月 雄宣兵官伊飡 碩孝大等伊飡 有禮骨門伊飡 艾老西路 屛旨北路 君啓南路 日長京路 多婁神官伊飡 洪可護城將軍 文拜右部大書
5월 웅선(雄宣)을 병관이찬, 석효(碩孝)를 대등이찬, 유례(有禮)를 골문이찬, 애노(艾老)를 서로, 병지(屛旨)를 북로, 군계(君啓)를 남로, 일장(日長)을 경로, 다루(多婁)를 신관이찬, 홍가(洪可)를 호성장군, 문배(文拜)를 우부대서로 삼았다.

七月 汗昔太子淸立女根祠 于女根谷中 先是女根谷中 有女根 多迷村丁 果多黑齒使人檢之 以爲有神 乃令汗昔爲其法 請置寡公主爲主 盖齒之廣其黨也
7월 한석(汗昔)태자가 여근사(女根祠)를 여근곡(女根谷)에 세우기를 청하였다. 앞서 여근곡에 여근(女根)이 있어 시골 장정들이 혼미해짐이 많았다. 과다흑치가 사람을 시키어 검사하도록 하였는데, 신(神)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한석으로 하여금 여근사법(女根祠法)으로 하였다. 과부인 공주를 그 곳의 주(主)로 두도록 하였다. 모두 (흑)치가 그 무리를 넓히기 위함이다.
≪견해≫ 통설은 경주시 건천읍에 여근곡이 있다고 한다. 옥문곡이라는 이름은 비교적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九月 行大場 于達勾火
9월 달구화(達勾火)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上與達亥份其市 巡狩 至捺己 遊神山 份乃黑齒女也 黑齒以爲捺己神山 有天子氣 使其女誘上出遊 欲孕而歸也 齒內結逸聖副君 外托鷄亥 竟至上 相廣占田宅 分置子女妾屬 曰彌伐社 威振一世
왕과 달해(達亥), 빈기시(份其市)가 돌아다니며 날기(捺己)에 이르러, 신산(神山)에서 유람하였다. 빈기시는 곧 흑치의 딸이다. 흑치는 날기신산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그 딸로 하여금 왕을 유혹하여 밖으로 놀러갔다가 임신하여 돌아오고자 하였다. 흑치는 안으로는 일성부군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계해에게 의지하였다. 끝내 왕에게 미치어 서로 넓은 밭과 집을 차지하여, 자녀와 첩과 족속들에게 나누어 두었다. 미벌사(彌伐社)라 불리었는데, 위세가 1세(30년)동안 떨쳤다.

十月 洪可妻文其 生黑治子杜齒 于桃山 黑齒洗 以神池 桃山聖地 而非賤骨之産地 而齒敢以私妾産子 又用神池 山主怒 而畏威不敢言 文其者文父之女 而好淫善媚 盡事黑齒 擢其夫爲護將 以其女文介爲汗昔正妻 權碩稟主 時人歌之 曰 “彼城之城 以女爲貴 彼女之女 以淫爲貴” 盖言 洪可之薦妻 得官也
10월 홍가(洪可)의 처 문기(文其)가 흑치의 아들 두치(杜齒)를 도산(桃山)에서 낳았다. 흑치가 도산의 신지(神池)의 물로 아기를 씻겼다. 도산은 성스러운 땅으로 천한 자들이 아기를 낳은 곳이 아니다. 흑치가 감히 사사로운 첩의 아들을 낳고, 또 신지의 물을 사용하여, 도산주(桃山主)가 화를 내었으나 위세가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했다. 문기(文其)는 문부(文父)의 딸인데 음란함을 좋아하고, 아첨함이 좋았다. 흑치를 섬기기를 다하니 흑치가 그 남편을 호(성)장(군)으로 발탁하였다. 문기의 딸 문개(文介)는 한석(汗昔)의 정처로 권세가 품주만큼 컸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저 성(城)의 성은 여자로써 귀하여지고, 저곳의 여자의 딸은 음란하여 귀하여 졌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 말은 모두 홍가(洪可)의 천거한 처가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다.

臼臣逐洪彘 于南地 彘乃女主之私臣也
구신(臼臣)이 홍체(洪彘)를 (아슬라의) 남쪽으로 쫓아내었다. (홍)체는 아슬라여주(女主, 臼君)의 사신(私臣)이다.
≪견해≫ 홍체(洪彘)와 홍체(虹彘)가 혼돈되어 섞여 쓰인 듯 하다.
阿盧(虹門) -  虹盧(彘君) - 虹彘(臼君) - 臼人(內公)

上自捺己 還都
왕이 날기(捺己)에서 환도하였다.

召文女主好妙 廢其夫允明 自立
소문의 여주 호묘(好妙)가 남편 윤명(允明)을 폐하고 스스로 섰다.

十二月 行月歌 于大井
12월 대정(大井)에서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所松生 南君子英君
소송(所松)이 남군(南君)의 아들 영군(英君)을 낳았다.

二十六年 正月 行靑鼠大祭 于兄山 上與達亥親臨之
26년(A.D.184) 정월 청서(靑鼠=甲子)대제를 형산(兄山)에서 행하였다. 왕이 달해와 친히 지켜보았다.
≪견해≫ 자(子=鼠)의 방위는 북(北)쪽에 해당한다. 통설은 형산(兄山)을 포항이라 한다. 포항지역이 호랑이가 출몰하던 지역인지 옛 자료를 확인 해 볼 필요가 있다.

特命果多黑齒爲伊伐飡 福生爲稟主 齒以妖術得 寵于上 以其無父骨 不得大展 上乃令 汗門爲父 使鳥好發言 曰 “汗門幼時 祓命集 神果 而來仍浴于鳥好 井中 相通而生” 云 而齒實漢岐奴之潛通 于鳥好 而生也
특별한 명령으로 과다흑치(果多黑齒)를 이벌찬으로 삼고, 복생(福生)을 품주로 삼았다. (흑)치는 요술(妖術)을 얻어 왕에게 총애를 있었으나, 아버지의 골품이 없음으로 인하여 크게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왕이 이에 한문(汗門)을 아버지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조호(鳥好)를 시키어 말하기를 “한문은 어렸을 때 푸닥거리를 하여 수명이 이르렀고, 신(神)이 내린 결과로 장차 이에 조호와 정중에서 목욕하고 상통하여 태어났다”고 일렀다. 실제로는 (흑치는) 한기(漢岐=漢祗)부의 종(奴)이 조호와 잠통(潛通, 몰래 통함)하여 생긴 자식이다.
≪견해≫ 1. 흑치(黑齒)라는 이름은 특이하기도 하고, 예전에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사전2리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는 산 사람들이 모두 검은 치아를 가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폐쇄되었으나, 실제 과다흑치(果多黑齒)가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이 신라6부중의 하나인 한지부의 위치가 아닌가 합니다.
         2. 통설은 청도군은 이서국이 있고, 의성군에 소문국이 있는데, 하나 같이 신라의 경주를 둘러싸고 있으니, 무언가 잘못이 있습니다. 만약 신라와 백제가 경계를 다투려면 주변의 이서국이나 소문국을 정벌하고 난 후에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경주의 주변에 하나같이 이서국과 소문국이 있는 것으로 혼돈하는 이유는 신라의 상수리제도, 고려의 기인제도와 같은 볼모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신라는 주변의 국가를 정벌하고 그 종실사람들을 6부에 집과 농장을 내리며 살도록 하여, 신라 중앙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신라인으로 동화 흡수하는 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또 반란이 발생하면 그들이 인질이 되어 억제하는 효과가 동시에 발생하는 셈입니다.

三月 達亥生 上子猩公 先是上與亥 宿兄山 亥夢見 靑鼠化爲猩猩 故上 曰 “當以猩 命吾子矣” 至是果矣
3월 달해(達亥)가 왕의 아들 성공(猩公)을 낳았다. 먼저 번에 왕과 (달)해가 형산(兄山)에서 잠을 잤는데, (달)해의 꿈에 푸른 쥐(靑鼠=甲子)가 성성이(오랑우탄)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까닭에 왕이 말하기를 “당연히 성성이다. 나의 아들로 명하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른 결과다.
≪견해≫ 달해가 권처가 된 것은 183년 7월이고, 태몽을 꾼 것이 184년 정월의 기사다. 성공의 친부가 지마인지 남군인지 애매하다.

五月 雄宣兵官伊飡 碩孝大等伊飡 有禮骨門伊飡 艾老西路 屛旨北路 君啓南路 日長京路 多婁神官伊飡 洪可護城將軍 文拜右部大書
5월 웅선(雄宣)을 병관이찬, 석효(碩孝)를 대등이찬, 유례(有禮)를 골문이찬, 애노(艾老)를 서로, 병지(屛旨)를 북로, 군계(君啓)를 남로, 일장(日長)을 경로, 다루(多婁)를 신관이찬, 홍가(洪可)를 호성장군, 문배(文拜)를 우부대서로 삼았다.

七月 汗昔太子淸立女根祠 于女根谷中 先是女根谷中 有女根 多迷村丁 果多黑齒使人檢之 以爲有神 乃令汗昔爲其法 請置寡公主爲主 盖齒之廣其黨也
7월 한석(汗昔)태자가 여근사(女根祠)를 여근곡(女根谷)에 세우기를 청하였다. 앞서 여근곡에 여근(女根)이 있어 시골 장정들이 혼미해짐이 많았다. 과다흑치가 사람을 시키어 검사하도록 하였는데, 신(神)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한석으로 하여금 여근사법(女根祠法)으로 하였다. 과부인 공주를 그 곳의 주(主)로 두도록 하였다. 모두 (흑)치가 그 무리를 넓히기 위함이다.
≪견해≫ 통설은 경주시 건천읍에 여근곡이 있다고 한다. 옥문곡이라는 이름은 비교적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九月 行大場 于達勾火
9월 달구화(達勾火)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上與達亥份其市 巡狩 至捺己 遊神山 份乃黑齒女也 黑齒以爲捺己神山 有天子氣 使其女誘上出遊 欲孕而歸也 齒內結逸聖副君 外托鷄亥 竟至上 相廣占田宅 分置子女妾屬 曰彌伐社 威振一世
왕과 달해(達亥), 빈기시(份其市)가 돌아다니며 날기(捺己)에 이르러, 신산(神山)에서 유람하였다. 빈기시는 곧 흑치의 딸이다. 흑치는 날기신산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그 딸로 하여금 왕을 유혹하여 밖으로 놀러갔다가 임신하여 돌아오고자 하였다. 흑치는 안으로는 일성부군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계해에게 의지하였다. 끝내 왕에게 미치어 서로 넓은 밭과 집을 차지하여, 자녀와 첩과 족속들에게 나누어 두었다. 미벌사(彌伐社)라 불리었는데, 위세가 1세(30년)동안 떨쳤다.

十月 洪可妻文其 生黑治子杜齒 于桃山 黑齒洗 以神池 桃山聖地 而非賤骨之産地 而齒敢以私妾産子 又用神池 山主怒 而畏威不敢言 文其者文父之女 而好淫善媚 盡事黑齒 擢其夫爲護將 以其女文介爲汗昔正妻 權碩稟主 時人歌之 曰 “彼城之城 以女爲貴 彼女之女 以淫爲貴” 盖言 洪可之薦妻 得官也
10월 홍가(洪可)의 처 문기(文其)가 흑치의 아들 두치(杜齒)를 도산(桃山)에서 낳았다. 흑치가 도산의 신지(神池)의 물로 아기를 씻겼다. 도산은 성스러운 땅으로 천한 자들이 아기를 낳은 곳이 아니다. 흑치가 감히 사사로운 첩의 아들을 낳고, 또 신지의 물을 사용하여, 도산주(桃山主)가 화를 내었으나 위세가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했다. 문기(文其)는 문부(文父)의 딸인데 음란함을 좋아하고, 아첨함이 좋았다. 흑치를 섬기기를 다하니 흑치가 그 남편을 호(성)장(군)으로 발탁하였다. 문기의 딸 문개(文介)는 한석(汗昔)의 정처로 권세가 품주만큼 컸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저 성(城)의 성은 여자로써 귀하여지고, 저곳의 여자의 딸은 음란하여 귀하여 졌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 말은 모두 홍가(洪可)의 천거한 처가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다.

臼臣逐洪彘 于南地 彘乃女主之私臣也
구신(臼臣)이 홍체(洪彘)를 (아슬라의) 남쪽으로 쫓아내었다. (홍)체는 아슬라여주(女主, 臼君)의 사신(私臣)이다.
≪견해≫ 홍체(洪彘)와 홍체(虹彘)가 혼돈되어 섞여 쓰인 듯 하다.
阿盧(虹門) -  虹盧(彘君) - 虹彘(臼君) - 臼人(內公)

上自捺己 還都
왕이 날기(捺己)에서 환도하였다.

召文女主好妙 廢其夫允明 自立
소문의 여주 호묘(好妙)가 남편 윤명(允明)을 폐하고 스스로 섰다.

十二月 行月歌 于大井
12월 대정(大井)에서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所松生 南君子英君
소송(所松)이 남군(南君)의 아들 영군(英君)을 낳았다.

二十七年 正月 雄宣伊伐飡 骨花稟主 近宗一吉飡
27년(A.D.185) 정월 웅선(雄宣)을 이벌찬, 골화(骨花)를 품주, 근종(近宗)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견해≫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3년 기사
3년 정월 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근종이 일길찬이 되었다.

二月 上復愛愛后 先是上與愛后不和 別處一年 而副君終始扶護 至是復寵 乃賜大酺 于群臣
2월 왕이 다시 애후를 사랑하게 되었다. 먼저 왕과 애후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여 1년 동안 별거하고, 부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보호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다시 총애를 하여 군신들에게 대연회를 베풀었다.

四月 大宣爲平部理方 大宣精於察民 善決是非 時人以爲少年廷尉大宣子 明見 秋毫泣鬼神 又曰 生子當如大宣子 勿生賣妻洪可郞
4월 대선(大宣)을 평부이방으로 삼았다. 대선은 백성들을 살핌에 정밀하여, 시비를 훌륭하게 가리었다. 당시 사람들은 소년정위(少年廷尉) 대선자(大宣子, 여기서 子는 접미사로 나이어린 사람에 대한 경칭)는 현명한 의견으로 귀신도 울고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대선자(大宣子) 같은 아들을 낳고, 마누라를 판 홍가랑(洪可郞)을 낳으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용어≫ 추호(秋毫) : 가을철에 털갈이 한 짐승의 털, 몹시 작음

運古大母薨 其夫文支殉之 葬于壤井
운고(運古)대모가 죽어 그 남편 문지(文支)가 따라죽었다. 양정(壤井)에 장사를 지냈다.
≪견해≫ 운고대모는 남해차차웅의 딸이다.
次雄(今堂) - 運古(文支) - 文父

五月 稟主骨花難産而薨 上痛哀之 特用聖母禮葬之 骨花有姿容德行 上自幼寵幸 賞賜甚多 惜乎 盛年棄寵後宮 上下皆惜其人 上命立骨花祠 而祀之
5월 품주 골화(骨花)가 난산 끝에 죽었다. 왕이 아파하고 슬퍼하였다. 특별히 성모례로 장사를 지냈다. 골화는 용모와 자태를 지니고 있으며, 어질고 너그러웠다. 왕이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총애가 있어, 상을 내림이 심히 많았다. 아깝도다. 젊은 나이에 후궁의 총애를 버렸다. 위 아랫사람들이 그 인간됨을 아까워하였다. 왕이 골화사(骨花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以逸聖女潛爲新稟主 行吉 鮑祠
일성의 딸 잠위(潛爲)를 새로운 품주로 하였다. 포사에서 결혼을 행하였다.
≪견해≫ 골화(骨花, 142.2 ~ 216.5, 壽75)는 신라사초에 명확히 생몰년이 기록되어 있는 분이다. 그런데도 본 기사이외에 사망기사가 또 나타나고, 동명이인이라는 객관적인 정황도 나타나지 않는다.

七月 會諸侯 於黃山之上 副君主盟
7월 제후들이 황산(黃山)위에서 모였다. 부군의 동맹을 주관하였다.
≪견해≫ 황산강은 가야와 신라를 관통하고, 황산(黃山)은 가야와 신라의 국경에 있다. 백제 멸망시 계백과 신라가 전쟁을 한 곳은 황산의 벌판(黃山之原)이다.

九月 鷄徒尊黑齒爲天帝 以爲尊莫大焉 副君禁止 曰 “神國之尊 莫如我今 齒何爲帝” 以此黑齒不悅副君 時齒女份其市受上寵 齒使份其市 密告于上 曰 “副君內合愛后 陰結死 黨將謀 不軌” 上乃疑副君
9월 계도(鷄徒)가 흑치를 높이어 천제(天帝)라고 하였다. 이로써 존막대언(尊莫大焉)으로 하였다. 부군(副君)이 금지하며 말하기를 “신국(神國)의 존칭은 아금(我今)과 같음이 없는데, 흑치는 어찌 제(帝, 천자)라 칭하는 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흑치가 부군을 순종하지 않았다. 이때 흑치의 딸 빈기시(份其市)가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흑치가 빈기시로 하여금, 은밀히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부군이 애후와 안으로 합심하여 음(陰)으로 죽기를 맹세하여, 무리들이 장차 반역을 꾀하려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부군을 의심하게 되었다.

十一月 洪可爲京路將軍 文其京母 黑齒子加多馬利爲護城將軍 皆上特旨也 黑齒淫日長妻邊失 日長出奔西路
11월 홍가(洪可)를 경로장군으로, 문기(文其)를 경모, 흑치의 아들 가다마리(加多馬利)를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모두 왕의 특지(特旨)가 있었다. 흑치가 일장(日長)의 처 변실(邊失)을 음란하였다. 일장이 서로로 도망하였다.

以果多黑齒復爲伊伐飡 福生爲稟主 命鷄徒十萬 入京護城 時天寒大雪 鷄徒之弊甚多 副君請禁之 上以爲有異志 流副君 于一善州
과다흑치를 다시 이벌찬으로, 복생(福生)을 품주로 하였다. 계도(鷄徒) 10만 명을 입경하게 하여 성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 때 날이 차갑고 큰 눈이 내렸다. 계도의 폐단이 심히 많았다. 부군이 금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일성에게) 다른 뜻이 있다고 하여, 부군을 일선주(一善州)에 유배를 보냈다.

角干天門卒 賜爵其嗣天德
각간 천문(天門)이 죽어, 그 후사인 천덕(天德)에게 작위를 내렸다.

十二月 鷄徒圍上 于高井
12월 계도(鷄徒)가 고정(高井)에서 왕을 둘러쌌다.

大門大母薨
대문(大門)대모가 죽었다.

二十八年 正月 黑齒逼上 以其女份其市爲聖母 黜達亥 上不能禁之
28년(A.D.186) 정월 흑치가 왕을 다그쳐서 흑치의 딸 빈기시(份其市)를 성모로 삼고, 달해(達亥)를 낮추었다. 왕이 금지할 수 없었다.

甘文太子旭亥卒 以服方代之 妻以七利
감문(甘文)태자 욱해(旭亥)가 죽었다. 복방(服方)이 대신하여, 칠리(七利)를 처로 삼게 하였다.

愛后生上女內禮 黑齒以爲非上女 上欲洗 而不得
애후가 왕의 딸 내례(內禮)를 낳았다. 흑치가 왕의 딸이 아니라고 하였다. 왕이 아기를 씻기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견해≫ 신라본기에는 아달라이사금의 처와 내해이사금의 어머니가 내례(內禮)로 이름이 같다. 동명이인이 아니다.

二月 黑齒自稱爲大副君 强淫達亥 爲密妻 分暑鷄徒之酋 于州郡 以爲州郡大監
2월 흑치가 자칭 대부군(大副君)이라고 하였다. 달해를 강제로 음란하여 밀처로 삼았다. 계도(鷄徒)의 추장들을 나누어 주군(州郡)에 보냈는데, 주군대감(州郡大監)으로 삼았다.

黑齒以邊失妻板日
흑치가 변실(邊失)을 판일(板日)에게 시집보냈다.

命宅頭 新建政堂 于金城 名馬豆大井 置四部執書 皆鷄徒也
택두(宅頭)에게 새로운 정당(政堂, 시골의 관아)을 금성(金城)에 짓도록 명하였다. 마두대정(馬豆大井)이라 이름 지었다. 4부집서(四部執書)를 두었는데 모두 계도(鷄徒)의 무리이다.
≪비교≫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5년 2월 기사
5년 2월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였다.
≪견해≫ 신라사초에 처음으로 금성(金城)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앞부분이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아쉽다.

以執書兪知那爲北路 屛旨爲水酒太守
이로써 집서(執書) 유지나(兪知那)를 북로로, 병지(屛旨)를 수주태수로 하였다.

三月 黑齒逼淫愛后 曰 “吾有天子之命 當以汝爲后” 后不得已應之曰 “汝爲天子 則我夫何歸” 齒曰 “我乃汝夫 他非汝夫也 運已去矣 當付蚊川祠也” 盖示簒弑之意也 后乃佯以爲歡 而密發信符 命討黑齒 于各路
3월 흑치가 애후를 다그쳐 음란하며 말하기를 “나에게 천자(天子)의 운명이 있으니, 마땅히 너를 후(后)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후가 부득이 응하며 말하기를 “네가 천자가 되면, 나의 남편(지마이사금)은 어디로 돌아갈꼬?”라고 물었다. (흑)치가 말하기를 “내가 곧 너의 남편이다. 다른 사람이 너의 남편이 아니다. 운이 이미 자나갔고 문천사(蚊川祠)에 당부(當付, 어찌어찌하라고 단단히 부탁함)하였다”라고 하였다. 모두 찬탈하여 윗사람을 죽이려는 뜻을 보이기 위함이다. (애)후가 이에 기뻐하는 체하고, 은밀히 신부(信符, 도성문을 갑가기 열어야 할 때, 대궐에서 문을 열게하는 표지)를 보내어, 흑치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각로(各路)에 전달하였다.

五月 副君引西路軍 入京 與鷄徒大戰 于桃山 時洪可以京軍 拒南軍 于南郊 其妻文其說之 曰 “我等 皆以尼今之臣 今爲黑齒之臣不 若助尼今 而迎副君” 洪可可之 乃與南軍相合入都 破護城軍 誅加只馬利 黑齒方與愛后達亥 飮酒作樂 聞變而驚 愛后笑 曰 “鷄徒偏天下 我夫何懼” 齒曰 “吾妻可謂天后也 天后在我 誰敢亂乎” 乃大醉 而舞 不應告變已 而大軍至 官軍皆應 捕誅鷄徒 亂言索齒 齒戰戰 走抱愛后 后叱之 曰 “叛奴何爲” 乃命家奴斬之梟 其首于井上 洪可君啓等入 拜于后 后曰 “我夫見囚 不見天日久矣 汝等何不奉我 而去” 於是洪可等奉后 至上所 相見 上抱后 而悲喜 后乃命 洪可君啓分路 與副君軍 夾攻 挑山賊 大破之 桃山爲之 殘破神器聖跡 多不保焉 仙骨爲之悲泣 亦奈何
5월 부군이 서로군(西路軍)을 이끌고 입경하여, 계도(鷄徒)와 도산(桃山)에서 크게 싸웠다. 이 때 홍가(洪可)가 경군(京軍)으로 남군(南軍)을 남교(南郊)에서 막았다. 홍가의 처 문기(文其)가 달래어 말하기를 “우리들 모두는 니금의 신하이므로, 지금은 흑치의 신하가 아니다. 만약 니금을 도우려면 부군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홍가가 옳다고 하여 이에 남군과 합하여 입도(入都)하여 호성군(護城軍)을 깨뜨리고 가지마리(加只馬利, 흑치의 아들, 호성장군)의 목을 베었다. 흑치는 바야흐로 애후와 달해와 함께 술을 마시며 노래를 짓고 있었는데, 변란을 듣고 놀랐다. 애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가 계도에게 기울었는데, 나의 남편(흑치)이 어찌 두려워하는가”라고 하였다. 흑치가 말하기를 “나의 처가 가히 천후(天后)인데, 천후가 내게 있고 누가 감히 란(亂)을 일으킨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취하여 춤을 추며, 이미 세상이 변했음을 고(告)하였지만 응하지 아니하였다. 대군(大軍)이 이르자 관군이 모두 화답하여 계도를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다. 난리 중에 하는 말로 흑치를 찾으라 하니, 흑치가 무서워 벌벌 떨며 애후를 안으로 달려갔다. (애)후가 꾸짖어 말하기를 “배반한 노예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가노(家奴)로 하여금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정상(井上, 성 위)내걸도록 명하였다. 홍가(경로)와 군계(君啓, 남로) 등이 들어와 (애)후에게 절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나의 남편(지마)이 죄수중에 보이느냐. 하늘의 태양이 보이지 않는 지 오래이다. 너희들은 나를 받들어 어찌 (왕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고 하였다. 이때부터 홍가 등이 (애)후를 받들어 왕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서로 얼굴을 보자 왕이 (애)후를 안으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였다. (애)후가 이어 명하여 홍가와 군계가 길을 나누어 부군의 군대와 더불어 도산의 적을 협공하도록 하여, 적을 크게 쳐부수었다. 도산에서 싸움으로 인하여 남은 신성한 그릇과 성스러운 발자취가 남김이 없어지고, 모두 지키지 못했도다. 선골(仙骨)들이 그것을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 역시 어찌할꼬?

副君引諸路軍入謁 于南挑 上與愛后 執副君之手 而慰之
부군이 제로군(諸路軍, 5로군)를 이끌고 들어와 남도(南挑)에서 알현하였다. 왕과 애후가 부군의 손을 잡아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命副君兼行伊伐飡 只珍內禮爲稟主 大賞諸路壯士 以日長爲護城將軍
(일성을) 부군 겸 이벌찬으로 명하고, 지진내례를 품주로 하였다. 제로장사(諸路壯士)들에게 큰 상을 주었다. 이로써 일장(日長)을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臼君以其女兵人 妻洪彘
(아슬라) 구군(臼君)이 그녀의 딸 병인(兵人)을 홍체(洪彘)에게 시집보냈다.
≪견해≫ 홍체(洪彘)와 홍체(虹彘)가 혼돈되어 섞여 쓰인 듯 하다. 184년 10월 기사와 연결된다.

副君奏曰 “黑賊狂暴 不知天命 而妄動 其徒甚多 不可勝誅 不若宥而安之” 上許之
부군이 아뢰어 말하기를 “흑치의 도적(黑賊)는 경망하고 조급함이 있어 천명을 알지 못하고 망동(妄動, 분수없이 행동함)하였는데 그 무리가 심히 많습니다. 뛰어난 형벌도 용서하여 편안함을 얻음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七月 副君俸 上及愛后達亥 大閱諸路軍 於閼川之西 宰牛犒之
7월 부군이 왕과 애후와 달해를 모시고 제로군(諸路軍)을 알천(閼川)의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소고기를 썰어(저미어) 군사들에게 먹였다.
≪비교≫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5년 7월 기사
5년 7월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達亥獻其妹槀 于上 以代己
달해가 그 여동생 달고(達槀)를 왕에게 비치고,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다.

十月 上與愛后 巡狩北路 親祀 于捺己神山
10월 왕과 애후가 북로로 순행하여, 날기신산(捺己神山)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비교≫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5년 10월 기사
5년 10월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견해≫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28년 기사와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5년 기사에 차이가 있다. 날기(捺己)는 북쪽, 태백산(太白山)은 우두주 혹은 서쪽이라고 나온다. 통설은 날기(捺己)를 경상북도 영주시라 합니다.

達亥生黑齒子 欲棄之 副君命 爲南君太子之子
달해가 흑치의 아들을 낳고 자식을 버리려고 하였다. 부군의 명으로 남군태자(南君太子)의 아들로 삼았다.

三十年 正月 艾老伊伐飡 毛細稟主 阿道左部執書 有禮兵官伊飡 昔鄒京路 日長南路 洪可屬別軍使 副君 命只珍內禮爲京母 骨氏爲南母
30년(A.D.188) 정월 애노(艾老)를 이벌찬, 모세(毛細)를 품주, 아도(阿道)를 좌부집서, 유례(有禮)를 병관이찬, 석추(昔鄒)를 경로, 일장(日長)을 남로, 홍가(洪可)에게 별군사를 맡겼다. 부군이 지진내례(只珍內禮)를 경모로, 골씨(骨氏)를 남모로 삼았다.
≪견해≫ 벌휴이사금은 석추와 지진내례의 아들이다. 석추가 경로로, 지진내례를 경모로 하였다는 것은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副君 以文其女洪介爲枕婢 文其自失 黑齒恐勢去 姐事副君得幸 自言有娠 不修南母之職 副君責之 歸南 不二月 而復歸 與其女洪介 共事副君 文其能善細魚羹 副君嗜之 名曰羹君 至是果生 副君子 乃以洪介爲婢
부군이 문기(文其)의 딸 홍개(洪介)를 침비(枕婢)로 삼았다. 문기의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렸다. 흑치의 두려운 기세가 가자, 여자로써 부군을 섬기어, 부군과 행차를 얻었는데, 스스로 임신했다하며 남모(南母)의 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부군이 꾸짖어 남로로 돌아갔는데, 2달이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딸 홍개와 함께 주군을 섬겼다. 문기는 세어(細魚)탕을 능히 잘하였는데, 부군이 즐겨하였다. 아기의 이름 짓기를 갱군(羹君)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결과로 부군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홍개(洪介)를 비첩으로 삼았다.

三月 上有疾 愛后與副君 禱山 復與相通 自是無異夫婦 人莫敢言
3월 왕이 병이 들어 애후와 부군이 산에서 빌며, 다시 상통하였다. 이때부터 다른 부부와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七利公主與服方 歸甘文
칠리(七利)공주가 복방(服方)이 감문(甘文)으로 돌아갔다.

以副君女毛可爲南君太子正妃 副君 主吉
부군의 딸 모가(毛可, 모리의 딸)를 남군(南君)태자의 정비(正妃)로 삼고 부군이 결혼을 주재하였다.

四月 上疾益篤 命副君與南君太子 攝行天子事
4월 왕의 병이 점점 위독하여, 부군과 남군태자에게 천자의 일을 대신하도록(攝行) 명하였다.

洪可爲西路 文其西母 君啓護城伊飡 南君寵愛馬突 而擢其父 洪可亦以內寵 赴大閫邊 人憂之
홍가(洪可)를 서로(西路)로, 문기(文其)를 서모, 군계(君啓)를 호성이찬으로 하였다. 남군이 마돌(馬突)을 총애하여, 그 아버지를 뽑은 것이다. 홍가 역시 문기의 총애로, 왕후의 거처 주변에 나아갔다. 사람들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七月 上疾稍愈 與副后達亥 入卞山 護疾 愛后遂與副君 同居高井 南君呼 副君以聖父 不敢自決政事 大權遂歸于副君
7월 왕의 병이 점점 나이지자, 부후(副后) 달해와 변산(卞山)에 들어가 병을 간호하였다. 애후가 드디어 부군과 고정(高井)에서 동거하게 되었다. 남군이 부군을 성부(聖父)라 부르고, 감히 스스로 정사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대권이 드디어 부군에게 돌아갔다.
≪견해≫ 파사이사금과 허루를 보는 듯 합니다.

甘門女主順山卒 其女旭京 繼夫服君
감문여주(甘門女主) 순산(順山)이 죽어, 그의 딸 욱경(旭京)이 복군(服君)을 남편으로 계승하였다.

九月 穀大登 大農大師大光太子 請副君 行場 副君乃與愛后 臨場 百姓皆呼新今萬歲 副君聞而禁止 曰 “我非新今 誰使憂民亂言” 命索其人 將罪 愛后止之 曰 “汝與我同枕而宿 幷騎而行 安知不爲新今乎” 副君乃止 百姓皆以爲新今有聖德 天降大穀 頌聲連野 擧火十里而衛之 愛后曰 “此天也 不以此時立汝爲天子 則何時爲之乎” 副君曰 “太子在 臣何立乎” 愛后曰 “我之子卽汝之子也 以汝爲天子 以南君爲汝子 不亦好乎” 乃命雄宣等 率百僚 尊副君爲彡尼今 與愛后 行大吉 于神井 有瑞光連天 人皆以爲神命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대농대사(大農大師) 대광태자(大光太子)가 부군에게 (대)장을 행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부군이 애후와 함께 (대)장 행사에 참석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신금만세(新今萬歲)”라고 외쳤다. 부군이 듣고 금지하며 말하기를 “나는 신금(新今)이 아니다. 누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어지럽히는 말을 시키느냐?”라고 하며 그 사람을 색출하도록 명하였다. 장차 벌을 주려하자, 애후가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너와 나는 같은 베게에서 잠을 자고, 함께 말을 타고 돌아다니니, 어찌 신금이 아닌지를 알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부군이 이에 벌주려는 것을 그쳤다. 백성들이 모두 신금이 성덕이 있어 하늘에서 많은 곡식을 내렸다고 하였다. 풍년을 기리는 노래가 들에 이어지고, 횃불의 10리을 이어져 호위하였다. 애후가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다. 이 때에 너를 천자로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즉 어느 때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태자가 강녕한데 신이 천자가 될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애후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곧 너의 아들이다. 너를 천자로 삼고, 남군(태자)도 너의 아들로 삼으면, 역시 좋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웅선(雄宣) 등에게 벼슬아치들을 거느리고, 부군을 삼니금으로 높이도록 명하였다. 애후와 더불어 대길(大吉, 천자에 오르는 일)을 신정(神井)에서 행하였는데,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이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신명(神命, 신의 명령)이라고 하였다.

以阿道爲伊伐飡 加市爲稟主 南君太子爲正統太子 毛可爲正統妃 大赦天下
아도(阿道)를 이벌찬으로, 가시(加市, 수류의 어머니)를 품주로, 남군태자를 정통태자(正統太子)로, 모가(毛可)를 정통비(正統妃)로 삼았다. 천하에 대사면을 하였다.

雄宣奏於彡尼今 曰 “陛下新立 而威令不加諸侯 臣等復出閫師 以示羽翼” 彡尼今大喜 乃以雄宣爲西路 潛爲西母 碩孝爲北路 圓阿北母 艾老南路 毛細南母 命洪可方乙日長爲其軍相
웅선(雄宣)이 삼니금(彡尼今)에게 여쭈어 말하기를 “폐하는 새로 왕위에 올랐는데, 위엄과 명령이 제후(諸侯)에게 더하여지지 않습니다. 신등이 왕비의 신하에게 다시 나가서 보좌(羽翼)하여 보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삼니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써 웅선을 서로, 잠위(潛爲)를 서모, 석효(碩孝)를 북로로, 원아(圓阿)를 북모, 애노(艾老)를 남로, 모세(毛細)를 남모로 삼았다. 홍가(洪可), 방을(方乙), 일장(日長)을 그 군상(軍相)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十月 上聞彡尼今自立爲天子 發怒不食 副后達亥爲之流涕 曰 “妾不幸 爲女不能發兵討父 以悅夫今之心” 上爲之同食以解 遂以達亥爲雌神聖母 行吉 于卞池 故世稱卞池聖母
10월 왕이 삼니금(彡尼今)이 자립하여 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고 화가 나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부후(副后) 달해가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첩은 불행합니다. 딸이기 때문에, 병사를 일으켜 아버지를 토벌하고, 부금(夫今, 왕후가 왕을 부르는 말)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하고 마음을 풀었다. 드디어 달해를 자신성모(雌神聖母)로 하여, 변지(卞池)에서 길한 일(왕후로 승차한 일)을 행하였다. 그런 연유로 세인들이 칭하는 변지성모(卞池聖母)다.
≪견해≫ 변지성모(卞池聖母)란 지마이사금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뜻이 아니고 사초를 편찬한 시기의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虹盧子彘與臼臣 爭之 命彘爲南太守 臼臣北太守
홍노(虹盧)의 자 (홍)체가 구신(臼臣)과 다투었다. (홍)체를 (아슬라) 남태수로, 구신을 북태수로 삼았다.

愛后與彡尼今 巡行六部 大賞仙門務恤窮民 曰 “新今德高 天神命 我配之 爾等奉之如大今可也” 咸皆悅服
애후가 삼니금과 6부를 돌아다니며, 가난한 백성들의 구휼에 힘쓴 선문(仙門)에게 큰 상을 내렸다. (애후가) 말하기를 “신금(新今)은 덕이 높아, 천신(天神)의 명으로 나와 짝을 지웠다. 너희들은 대금(大今)과 같이 받들어야 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모두 다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十一月 彡尼師今與愛后 謁始祖廟 禱子 時愛后娠彡今之子 已滿 乃行神禱
11월 삼니사금(彡尼師今)과 애후가 시조의 사당을 알현하여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당시 애후가 삼니금의 자식을 임신하였는데 이미 만삭이었다. 이에 신도(神禱)를 행하였다.

十二月 彡尼今奉愛后 入桃山
12월 삼니금이 애후를 모시고 도산으로 들어갔다.

三十一年 正月 愛后與彡尼今 受朝 于桃山
31년(A.D.189) 정월 애후와 삼니금이 도산에서 조회를 받았다.
有禮伊伐飡 雲生稟主 汗國平部理方 彡今庶子也
유례(有禮)를 이벌찬, 운생(雲生)을 품주, 한국(汗國)을 평부이방으로 하였다. 한국은 삼(니)금의 아들이다.

二月 彡今大宴骨門
2월 삼(니)금이 골문에게 큰 잔치를 열었다.

瓜姬生女羅亥 上洗之 加爵
과희(瓜姬)가 딸 나해(羅亥)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고, 작위를 더하였다.

愛后生 彡今子三公 彡今洗之
애후가 삼(니)금의 아들 삼공(三公)을 낳았다. 삼(니)금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견해≫ 삼금(彡今)은 삼니금(彡尼今)의 略字

三月 立尹公祠 尊尹公爲葛文王 伊利生爲太聖大母
3월 윤공(尹公, 일성의 아버지)의 사당을 세웠다. 윤공을 높이어 갈문왕(葛文王)으로, 이리생(伊利生, 일성의 어머니)은 태성대모(太聖大母)라고 하였다.
≪견해≫ 왕의 부친에게도 갈문왕(葛文王)의 벼슬이 추증됨을 알 수 있다.

洪介粉生爲權妻
홍개(洪介)와 분생(粉生)을 권처로 삼았다.

文其生 彡今女文君 彡今洗之
문기(文其)가 삼금의 딸 문군(文君)을 낳았다. 삼금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以日知宅賜雄宣角干 奉閑帝大母
일지댁(日知宅)을 웅선(雄宣)각간에게 주어, 한제(閑帝, 웅선의 모, 운제의 막내딸)대모를 모시도록 하였다.

四月 彡今與愛后彡公 謁尹公祠 行大祭
4월 삼금과 애후와 삼공이 더불어 윤공의 사당을 찾아뵙고, 큰 제사를 지냈다.

只珍內禮生 昔鄒子伐休 彡今臨洗 賜米
지진내례(只珍內禮)가 석추(昔鄒)의 아들 벌휴(伐休)를 낳았다. 삼금이 대면하여 아기를 씻겨주고 쌀을 내렸다.
≪견해≫ 아달라이사금과 벌휴이사금은 동모형제(同母兄弟)다.

護城將軍大宣潛通完郞太子妃解生 生子大郞 完郞怒 欲害大宣 羽林軍知之 夜襲完郞力士 殺之 仙軍大起 與羽林軍 戰于閼川 彡今聞之 流大宣于音汁伐 完郞于骨火 仍罷仙軍 仙軍者雪童草童之衛軍也
호성장군(護城將軍) 대선(大宣)이 완랑(完郞)태자비 해생(解生)과 잠통(潛通, 간통)하여 아들 대랑(大郞)을 낳았다. 완랑이 화서 나서 대선을 해치고자 하였다. 우림군(羽林軍, 호성장군의 수하)이 그것을 알고, 야습하여 완랑의 역사(力士)를 죽였다. 선군(仙軍)이 크게 일어나 우림군과 알천(閼川)에서 싸웠다. 삼(니)금이 소식을 듣고, 대선을 음즙벌(音汁伐)로, 완랑을 골화(骨火)로 유배를 보냈다. 이에 선군(仙軍)을 방면하였다. 선군이란 설동(雪童)과 초동(草童)의 호위군이다.

亥鄒爲護城將軍 妻彭仙 捺生淫 奔于圓孝故也
해추(亥鄒)를 호성장군으로, 팽선(彭仙)을 (해추의) 처로 삼았다. (해추의 처) 날생(捺生)이 바람을 피워(淫은 바람피우다의 옛말), 원효(圓孝)에게 도망간 때문이다.

七月 聞鷄徒將作亂 流汗昔太子于駒令 以其妻文介妻汗國 國與昔同母 而昔爲上子 國爲彡今子 國欲娶文介 讒其兄于彡今 流之 走抱文介 曰 “今日方得嫂爲吾妻” 文介曰 “汝兄雖在吾 爲汝相合 又何讒而流之” 國曰 “潛而通之 不如妻而樂之” 文介不忍 送昔流涕鳴咽 而國强命婢女 洗淚粧飾 而行吉 時人歌之 曰 “兄卽仁 弟卽暴多 情婦亦有淚 淚幾斗 黃山江水 緫是淚”
7월 계도(鷄徒)가 장차 난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한석(汗昔)태자를 구령(駒令)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 때문에 한석의 처 문개(文介)를 한국(汗國)에게 시집보냈다. (한)국과 (한)석은 같은 어머니의 자식인데, (한)석은 지마의 아들이고, (한)국은 일성의 아들이다. (한)국은 문개에게 장가들기를 원하여, 그 형을 삼금에게 참소하여 유배를 보냈다. 달려가 문개를 안으며 말하기를 “오늘 바야흐로 형수를 얻어 나의 처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문개가 말하기를 “너의 형이 비록 내에게 있을 때도 너와 상합(相合)하였는데, 다시 어찌 참소하여 유배를 보내느냐?”라고 하였다. (한)국이 말하기를 “숨어서 간통하는 것은 처로 삼아 즐거워하는 것과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문개가 참지 못하고, (한)석을 보내며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도록 불렀다. 이에 (한)국이 비녀(婢女)에게 강제하길 명하여 눈물을 씻기고 장식을 하여, 결혼식을 행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형은 인자한데 동생은 사납기가 이를 데 없다. 정부(情婦, 문개) 역시 눈물을 흘리고, 눈물이 몇 말(斗)이던가. 황산강(黃山江)의 물이 모두 이 눈물이라네”라고 하였다.
≪견해≫ 신라의 도읍이 황산강의 유역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八月 放完郞大宣歸京 以解生爲大宣妻 夏山爲完郞妻 行吉 鮑祠 夏乃大宣胞妹 而解生日長胞妹也
8월 완랑과 대선이 풀려나 귀경하였다. 해생(解生)을 대선의 처로, 하산(夏山)을 완랑의 처로 하였다. 포사에서 결혼을 행하였다. 하산은 곧 대선의 같은 어머니 여동생이고, 해생은 일장(日長)의 같은 어머니 여동생이다.

九月 上爲行大祭 與達亥還都 彡今出 迎于郊外 愛后不肯相見 彡今固請之 從彡今背 后睨上 而不肯相坐 上進抱之 曰 “汝何爲新夫 而踈舊夫乎” 愛后曰 “吾受天神之夢 配之新今 汝雖舊夫 而天命已盡 奈何” 上怒 欲打之 愛后命 彡今拒之 彡今護愛后 而受其杖 曰 “臣之罪也 請打臣 而釋怒” 上益怒 欲擊彡今 愛后命南君 奪其杖 南君奪之 上曰 “汝爲母 而不爲父乎” 南君不能對 流涕而已
9월 왕이 큰 제사를 행하기 위하여 달해와 더불어 환도하였다. 삼금이 나가 교외에서 맞이하였다. 애후는 서로 만나는 것을 긍정하지 않았다. 삼금이 한결같이 청하여, 삼금의 뒤를 따랐다. 애후가 왕을 흘겨보며, 서로같이 자리에 앉기를 긍정하지 않았다. 왕이 나아가 (애후를) 안으며 말하기를 “너는 새로운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옛 남편을 멀리 하느냐”라고 하였다. 애후가 말하기를 “나는 천신(天神)이 신금과 짝 지워주는 꿈을 받았다. 네가 비록 옛 남편이나, 천명이 이미 다한 걸 어찌하란 말이오”라고 하였다. 왕이 화가 나서 애후를 치려하였다. 애후가 삼금에게 막으라고 명하자, 삼금이 애후를 보호하여 그 지팡이를 받으며 말하기를 “신의 죄입니다. 신을 때리고 노여움을 푸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더욱 화를 내며 삼금을 치려고 하자, 애후가 남군에게 지팡이를 빼앗으라고 명하였다. 남군이 지팡이를 빼앗자, 왕이 (남군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머니는 위하고, 아버지는 위하지 않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남군은 대꾸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三十二年 正月 文拜伊伐飡 昭夫那稟主 大宣京路 解生京母 昔鄒爲右部執書
32년(A.D.190) 정월 문배(文拜)를 이벌찬, 소부나(昭夫那)를 품주, 대선(大宣)을 경로, 해생(解生)을 경모, 석추(昔鄒)를 우부집서로 삼았다.

服君幸七利 生子七君 遣使報喜
복군(服君)이 칠리(七利)에게 행차하여, 아들 칠군(七君)을 낳았다. (감문국이) 사신을 보내어 기쁜 일을 보고하였다.

二月 上與愛后 復和相見 于桃山 彡今爲之 大宴骨門
2월 왕과 애후가 다시 화목하게 되어 도산에서 서로 만났다. 삼금이 이를 위하여 골문에 큰 잔치를 열었다.

閑帝大母薨 春秋八十九 雲帝聖母之季女 而雄宣角干之母也 彡今親幸執喪 曰 “大母聖骨 而有功 可以聖母禮葬之” 雄宣辭之 不得
한제(閑帝)대모가 죽었는데 춘추 89세였다. 운제(雲帝)성모의 막내딸이고, 웅선 각간의 어머니이다. 삼금이 친히 행차하여 상을 집행하였다. (삼니금이) 말하기를 “대모는 성골(聖骨)이므로 공이 있다. 성모례(聖母禮)로 장사지냄이 옳다”라고 하였다. 웅선이 사양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文介生 汗昔女汗介
문개(文介)가 한석(汗昔)의 딸 한개(汗介)를 낳았다.

三月 上與達后 復歸卞山 愛后與彡今 送于郊外
3월 왕과 달후가 다시 변산으로 돌아갔다. 애후와 삼금이 교외에서 송별하였다.

以艾老爲西路 洪可爲大書 日長爲南路 方乙爲別軍使
애노(艾老)를 서로로, 홍가(洪可)를 대서로, 일장(日長)을 남로로, 방을(方乙)을 별군사로 삼았다.

五月 彡今與愛后 巡西路 次于捺己
5월 삼금과 애후가 서로(西路)를 순찰하고, 다음으로 날기(捺己)에 갔다.

彡今本妻婁生大母 以疾薨 以聖母禮葬之
삼금의 본처 루생(婁生)대모가 병이 들어 죽었다. 성모례(聖母禮)로 장사지냈다.

六月 達后生 上女彡亥 于卞山 上洗之 命報于彡今 彡今遣汗國 獻時物賀之
6월 달후가 변산(卞山)에서 왕의 딸 삼해(彡亥)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며, 삼금에게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삼금이 한국(汗國)을 보내어, 계절에 따라 나오는 산물을 바치고 축하하였다.

七月 彡今與愛后巡 至音汁伐 聞南君太子疾篤 急歸 太子食香蕈 暴疾于夜 太子妃毛可 年幼 而不能早救 愛后奔抱撫之 則連呼阿母 而薨 春秋才二十八 仁而聰明 不喜爭利 多有神奇事 上下惜之
7월 삼금이 애후와 돌면서 음즙벌(音汁伐)에 이르렀는데, 남군(南君)태자가 질병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 태자는 향기로운 버섯을 먹고 한밤중에 갑자기 병이 들었는데, 태자비 모가(毛可)가 나이가 어려 일찍이 구할 수 없었다. 애후가 급히 와서 남군태자를 끌어안고 어루만졌다. 곧 어머니(阿母)를 연달아 외치며 죽었다. 나이 겨우 28세였다. (태자는) 어질고 총명하며, 이익을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기(神奇)한 일이 많았는데, 상하(上下)가 남군태자의 죽음을 아까워하였다.

以左玉太子爲正統太子 命妻南君妃毛可 行吉 神井
이로써 좌옥(左玉)태자를 정통태자로 하였다. 남군비(南君妃) 모가(毛可)를 시집보내도록 명하였다. 신정(神井)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八月 上與達亥還都 哭南君太子墓 甚哀 愛后止之 曰 “汝病尙未全快 哭于甚哀 恐傷汝體” 上曰 “吾與汝少 而相親 尙不容易得子 況今老而相遠 安得 不悲” 愛后乃與上 宿
8월 왕과 달해가 환도하여, 남군태자의 묘에서 울었다. 심히 슬퍼하여 애후가 그치게 하며 말하기를 “너의 병은 더욱이 완전치 쾌차하지 않았으니, 심히 슬퍼하며 우는 것은 너의 몸을 다치게 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와 내가 젊었을 때 서로 친하였을 때도 오히려 아들을 얻기가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늙은 지금 서로 멀리 있는데 어찌 (아들을) 얻을 수 있고, 슬프지 아니하리오”라고 하였다. 애후가 이에 왕과 더불어 잠을 잤다.

九月 放汗昔太子 歸京
9월 한석(汗昔)태자가 풀려나 귀경하였다.

十月 上與達后 復入卞山
10월 왕과 달후가 다시 변산으로 들어왔다.

大行月歌 以文介爲歌頭 馬突爲蹈頭
월가를 크게 행하였다. 문개(文介)를 가두(歌頭)로, 마돌(馬突)을 도두(蹈頭)로 하였다.
≪견해≫ 歌와 蹈를 합하면 노래하며 밟는다는 뜻이다. 혹시 월가月歌의 행사에 지신밟기나 놋다리밟기를 한 것은 아닐까?

三十三年 正月 以馬公太子爲伊伐飡 淡理稟主 馬公乃愛后之寵壻也 胞弟也 愛后特授上相 馬公辭之不得
33년(A.D.191) 정월 마공(馬公)태자를 이벌찬, 담리(淡理)를 품주로 하였다. 마공은 애후의 총애를 받는 사위이고, 같은 어머니의 동생이다. 애후가 상상(上相, 이벌찬이나 각간)의 작위를 내렸다. 마공이 사양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三月 以洪可爲波珍飡 方乙爲西路 兪知那爲護聖伊飡 巨完爲大等伊飡 近宗爲加召城主
3월 홍가(洪可)를 파진찬으로, 방을(方乙)을 서로로, 유지나(兪知那)를 호성이찬으로, 거완(巨完)을 대등이찬으로, 근종(近宗)을 가소성주로 삼았다.

五月 上復疾 命國中行禱
5월 왕이 다시 병이 들어 나라 안에 기도를 하도록 명하였다.

八月 上崩於卞山 返葬蛇陵 達后殉從先今 國人美之 曰 “吾君之女 先今之妻 有斯后兮 有斯后兮” 彡今乃與愛后 行祥 卽帝位 改元 大赦 阿道伊伐飡 加市稟主
8월 왕이 변산에서 죽어, 사릉(蛇陵)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달후가 선금을 모시어 따라 죽으려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나라 왕의 딸은 선금(先今)의 아내인데, 잠시 왕후로 있었다, 잠시 왕후로 있었다”라고 하였다. 삼금이 이에 애후와 함께 상서로운 천자의 즉위식을 행하였다. 나라의 연호를 고치고(改元) 대사면을 하였다. 아도(阿道)를 이벌찬으로, 가시(加市)를 품주로 하였다.
≪견해≫ 1. 일성이사금이 연호를 고쳤다면, 지마이사금도 천자를 칭한 것일까? 개원(改元, 연호를 고침)이라는 표현은 위의 기사와 법흥왕기에 두 번 등장한다.
         2. 위의 기사를 읽어보면, 달해가 지마를 따라죽었는지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다. 245년 11월 기사에 달해의 사망기사가 재차 있는 것을 보면 따라 죽은 것은 아닌 듯 하다.

十月 立先今廟曰祇摩尼師今之廟 先今英勇善政 而惑於方士 廣起土木 又多內寵 醉或暴怒 愛后疑懼 遂與副君相結 正統遂歸 不亦天乎
10월 선금의 사당을 짓고 이름하여 지마이사금지묘(祇摩尼師今之廟)라고 하였다. 선금은 영특하고 용감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방사(方士)에게 미혹되어 넓게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또 여자를 총애함이 많아 지나치게 빠지거나 혹은 갑자기 화를 내었다. 애후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끝내 부군과 서로 결합하였다. 정통으로 드디어 돌아오니, 역시 하늘이 뜻이 아니겠는가.
≪견해≫ 신라에 2개의 하늘이 있다가 지마가 죽음으로 인하여, 1개의 하늘이 존재하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보인다.

十一月 太子妃毛可生 子墨公 上洗之
11월 태자비 모가(毛可)가 아들 묵공(墨公, 지마의 아들)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十二月 行先今大祭 愛后體肥而娠滿 鈍於行步 上爲手扶而上 后乃依上而坐 諸仙羅拜 后謂諸仙 曰 “汝等看我新夫 勝前夫十倍 我腹如此脹高 宜知我多福天子也” 諸仙皆拜賀 獻酒后 遂與上大醉 樂甚而歌 命上起舞 太子亦舞 祭半 后忽引上而起 “吾往汝父祠宿” 上不得已遂幷輦而出
12월 선금대제(先今大祭)를 행하였다. 애후의 몸이 임신으로 뚱뚱해져, 행보가 둔하여졌다. 왕이 (애후를) 위하여 손을 잡아 위로 오르는 것을 도왔다. 애후가 이에 왕을 의지하여 자리에 앉았다. 제선(諸仙)들이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애후가 제선(諸仙)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새로운 남편을 살펴보라. 전남편보다 10배 더 낫다. 나의 배가 이처럼 높은 것은 내가 복이 많은 천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선(諸仙)이 모두 하례하여 절을 하고, 애후에게 술을 바쳤다. 드디어 왕과 더불어 대취하였는데, 심히 즐거워 노래를 불렀다. 왕에게 일어나 춤추도록 명하고, 태자 역시 춤을 추었다. 제사가 절반쯤 이르렀을 때 애후가 문득 왕을 끌고 일어나, “나는 너의 아버지의 사당에 가서 잘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부득이 함께 가마를 타고 나가기에 이르렀다.



김영채 (2009-02-15 21:04:49)  
(1) 10년 7월기사 : 이때에 꾸짖으러 나갔다가, 돌아왔다. -> 이때에 꾸지람을 당하여 나갔다가, 돌아왔다.
(2) 10년 7월기사 : ≪견해≫ 일성이사금이 어디로 가서 꾸짖고 왔는지 구체적인 명시가 없으나 위의 4월의 기사와 연관된다고 판단된다. -> 1월 남로군사로 나갔다가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 같음
(3) 14년 8월기사 : 타산(朶山) (성)주 알랑(謁郞)이 죽어, 자성(子成)이 이었다. -> 타산(朶山) (성)주 알랑(謁郞)이 죽어, 아들 알성(謁成) 이었다.
(4) 18년 정월기사 : 其女宮巳之夫也 -> 其女宮己之夫也; 해석: 창영의 딸 궁사(宮巳)의 남편이다. -> 창영의 딸 궁기(宮己)의 남편이다.
(5) 20년 10월기사 : 10월 백학사(白鷄祠)에서 -> 10월 백계사(白鷄祠)에서
(6) 26년 7월기사 : 汗昔太子淸立女根祠 -> 汗昔太子請立女根祠
(7) 27년 4월기사 : ≪견해≫ 운고대모는 남해차차웅의 딸이다. 次雄(今堂) - 運古(文支) - 文父 -> ≪견해≫ 운고대모는 탈해의 딸이다.(상장돈장 57쪽) 脫解(今堂) - 運古(文支) - 文父
(8) 28년 7월기사 : 七月 副君俸 -> 七月 副君奉
(9) 29년 기사 전체가 빠졌네요
(10) 31년 4월기사 : 彡今與愛后彡公 -> 彡今與愛后三公
(11) 34년 11월기사 : 태자비 모가(毛可)가 아들 묵공(墨公, 지마의 아들)을 낳았다. -> 태자비 모가(毛可)가 아들 묵공(墨公, 좌옥의 아들)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