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중대한 논의(論議)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단(旦)=신(神)>이란 문자학적인 바탕으로써 설명하는 글을 모으셨군요.
1. 《禮·郊特牲》所以交於旦明之義。에 대해서
먼저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는 ‘不敢用褻味而貴多品. 所以交於旦明之義’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가) ‘不敢用褻味而貴多品’에는 어려운 한자인 설(褻)이 있는데, 이 뜻은 ‘더럽다’, ‘친압(親狎)하다’ - 이는 ‘버릇없이 함부로할 정도로 친하다’는 뜻인데, 설미(褻味)는 ‘일일히 맛보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不敢用褻味而貴多品’의 뜻은 ‘감히 일일이 맛보아 많은 품목을 귀(貴)하다 품평(品評)치 않고’의 뜻으로 보입니다.
이 말의 대구(對句)로써
나) ‘所以交於旦明之義’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소이(所以)의 뜻은 ‘~한 까닭’, ‘~하게하는 (실체(實體))바’의 뜻입니다.
단명(旦明)이 곧 신명(神明)이 되기 때문에, 이 구절의 뜻은 다음과 같다고 봅니다. “신명(神明)의 - 정신작용을 뜻함- 뜻과 (외부 사물이) 교류하게하는 바에 따라서”...
결국 가)와 나)를 함께 읽으면, “어떠한 사물(음식)을 품평할 때에는 일일이 맛보지 말고 단명(旦明)의 작용에 맡기어야한다.”는 뜻입니다.
결
국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서 하는 말은 교제(郊祭)를 - 제천(祭天)행사를 뜻함- 지낼때, 희생(犧牲)된 제물(祭物)을
일일이 시건방지게 일일이 ‘맛을 보아서’ 올리지 말고, 정신적인 판단으로 ‘맛보지 말고’ 올려야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2. 《莊子》有旦宅而無情死 에 대하여
이는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편에 나오는 문장인데, 단택(旦宅)은 신택(神宅) 즉 ‘정신의 집’인 사람의 몸 자체를 뜻하는 것이고, 무정사(無情死)의 정(情)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感情)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문장이 있게 되냐?”면, 도가(道家)는 사람의 몸이 변화하는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그 때의 정신, 마음도 변하는가?”하는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원문(原文)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且方將化(차방장화) : 대체 일단 변해 버리면
惡知不化哉(악지불화재) : 변하기 전의 일을 어지 알겠으며
方將不化(방장불화) : 아직 변하지 않았으면
惡知已化哉(악지이화재) : 변한 뒤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
吾特與汝(오특여여) : 나와 너만이
其夢未始覺者邪(기몽미시각자사) :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자가 아닐까
且彼有駭形而無損心(차피유해형이무손심) : 또한 그는 외형의 변화에 놀라기는 하지만 마음에는 손상(損傷)되지 않고,
(**) 有旦宅而無耗精(유단택이무모정) (**) : ‘정신의 집’만 찾았을 뿐, 정(精)이 소모되는 바는 없을 뿐이다.
- 약간 판본(板本)이 다르기는 하지만, 단택(旦宅) 앞의 유(有)의 개념은 ‘있다’가 아니라, ‘찾는다’입니다.
아무튼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설혹 신택(旦宅)인 몸이 신선(神仙)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작용 자체는 지속적으로 있게 되는것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蓋昔之傳書者遺其上半,因譌爲旦耳。에 대해
이는 “대개 예부터 글을 (옮겨서) 전(傳)할 때에, 그 윗 쪽 반(半)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이로 인(因)하여 단(旦)이라고 와전(訛傳)된 것이다.”의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그
것은 신(神)의 뜻을 지닌, 문제의 글자에서 윗부분인 순(旬)부분을 남겨놓고 - 이는 버려둠을 뜻함 - 그 밑의 단(旦)만 옮겼기
때문에, 원래는 신(神)으로 읽어야하는 것인데, 단(旦)으로 읽는 오류(誤謬)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 따라서 <단택(旦宅)>이라 읽지말고, 신택(旦宅)으로, 단명(旦明)으로 읽지말고, 신명(旦明)으로 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단(旦)=신(神)”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물론 이희석 님이 말씀하신 ‘태양신’의 개념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 각설(却說)
좌
계의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신(시(示)+순(旬)+단(旦))이 원래의 신(神)이고, 또 그 의미가 태양신이기 때문에 ‘밝달’을
뜻하는 데에다가 글자가 유사한 단(檀)으로 와전(訛傳)되었다.”는 이희석 님의 견해(見解)를 탁견(卓見)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논리를 핌에 있어서 가장 적절(適切)한 ‘고전적 문장’ - 즉 제천(祭天)을 뜻하는 교특생(郊特牲)에서, 또 선가(仙家)의 대종사(大宗師) 편에서 - 실 문자(文字)가 쓰인 사례를 고증(考證)하였습니다.
이는 제천(祭天)과 선가(仙家)가 ‘고조선 법맥(法脈)’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논거(論據)를 찾았다고도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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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此說甚是,②非旦可作神也”의 해석을 잘못하였습니다.
이희석 선생께서는 “① 이러한 설명은 매우 올바른 것인데, ② 旦을 神으로 적는 것은 옳지 않다.”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나 ②부분은 “단(旦)이 아니라, 신(神)으로 써야(=작(作)) 옳은 것이다”로 해야합니다.
즉 위 문장 전체가 말하는 것은 쉽게 표현하자면, 단(旦)은 신(神)의 약자(略字)라는 이야기를 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