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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A.D.126 - A.D.158:재위33년) - 해석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二十年 正月 發良爲伊伐飡 干時爲稟主
20년(A.D.145) 정월 발량(發良)을 이벌찬으로, 간시(干時)를 품주로 삼았다.

七月 大風三日 大井南神樹 自倒 命巫祓之
7월 큰바람이 3일 동안 불었다. 대정(大井)의 남쪽 신령스러운 나무가 스스로 넘어져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도록 명하였다.

九月 加耶女與半阿 爭位 加耶襲居陀 長世聞 急救之戰沒 上怒 命吉門率京騎一千 引南水勇士五千 三路掩殺 大獲勝利
9월 가야녀와 반아(半阿)가 자리를 다투었다. 가야가 거타(居陀)를 습격하였다. 장세(長世, 가소성주)가 소식을 듣고 급히 구하러 갔으나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 왕이 노하여 길문에게 경기(京騎) 1천을 거느리고 가게하여 (길문이) 남로, 수로의 병사 5천을 끌어들여 3로(경로, 남로, 수로)의 병사가 별안간 엄습하여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아 승리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7년 기사
17년 7월 남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十月 上與美禮 入冬宅 愛有公稟主 干時妬之 曰 “妾以承寵稟主 反屈於前稟乎” 上曰 “汝亦生子 如此 則當如此” 干時曰 “人言 夫今不好色 我謂大好色” 上怒 復以美禮爲稟主 摩帝伊伐飡 流發良干時 于推火
10월 왕과 미례(美禮)가 동택(冬宅)으로 들어왔다. 사랑함이 있어 공적으로 품주의 예로 대하였다. 간시(干時)가 시새움하며 말하기를 “첩이 총애를 계승하여 품주가 되었는데, 반대로 전 품주에게 굽힐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도 역시 아들을 낳으면 이처럼 대할 것이다. 곧 마땅히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간시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금(夫今, 왕은 품주는 君夫)은 색을 좋아하지 않으나, 나에겐 대호색(大好色)하다고 합니다.” 왕이 노하여 다시 미례를 품주로, 마제를 이벌찬으로 삼고, 발량(發良)과 간시를 추화(推火)로 유배를 보냈다.

二十一年 正月 吉門將伐加耶 其世主正見 遣其次子朱日 謝罪 願世世爲藩 上命朱日留都 召吉門歸
21년(A.D.146) 정월 길문이 장차 가야를 치려하자, 가야의 세주(世主) 정견(正見)이 둘째아들 주일(朱日)을 보내어 사죄하고, 세세대로 번국이 되기를 원하였다. 왕이 주일에게 경도에 머물도록 명하고, 길문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8년 기사
18년 정월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를 치려하였으나,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2.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美禮生 上子馬公 上洗之
미례(美禮)가 왕의 아들 마공(馬公)을 낳아 왕이 그 아기를 씻겨주었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召發良干時歸京 先是 吉門出 在推火 復通干時 歸 告于上 曰 “干時流涕言 過大悔前非” 云 故放之也
3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하였다. 발량과 간시를 불러 경도로 돌아오게 하였다. 앞서 길문이 나가서 추화(推火)에 있을 때 다시 간시와 통하고 돌아왔는데, 왕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간시가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후회한다고 다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유배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五月 以吉元爲京路軍事 沙乙那爲軍母 樊吾爲馬政大師 曷名爲馬母
5월 길원(吉元)을 경로군사로, 사을나(沙乙那)를 군모로, 번오(樊吾)를 마정대사로, 갈명(曷名)을 마모로 삼았다.

二十二年 三月 以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樊五爲京軍事 吉元爲南軍事 支所禮軍(爲)西軍事 晉公爲骨門伊飡 吉門爲中外大軍事
22년(A.D.147) 3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미례를 품주로, 번오를 경군사로, 길원을 남군사로, 지소례를 서군사로, 진공을 골문이찬으로, 길문을 중외대군사로 삼았다.

五月 摩帝吉門奏 曰 “太聖上天已久 許婁爾生爲妻 尙尊聖父僣矣 臣等皆 以陛下赤子 安敢以陛下爲子乎” 上不許 齊居勢漢等亦 贊其奏 許婁見機請罪 上乃以聖父爲太公 以齊居勢漢左右上輔 摩帝吉門爲左右大相 先時吉元妻沙乙那 若許婁召幸 求出南路 許婁乃奪沙乙那 而不許同赴 吉門亦與沙乙那 相通有娠 吉門請 使同赴 則許婁怒 曰 “爾父子 以吾之恩得貴 而奪我寵姬 聚麀交娠 可以流汝” 吉門乃與摩帝結託 曰 “今天下之權 有在我等二人 互相依託 何事不成” 摩帝素有異志 故許之 許婁乃解軍 神之權 時大旱月餘 祈而無雨 聖父去號 天大雨 人皆曰大刀雨
5월 마제와 길문이 아뢰어 말하기를 “태성(太聖, 아리)이 하늘로 올라감이 이미 오래입니다. 허루는 도생(道生, 파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오히려 성부로써 숭상됨에 참람함이 있습니다. 신들은 모두 폐하의 적자(赤子, 어린 아기, 백성)인대, 어찌 감히 폐하를 자식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제거(齊居)와 세한(勢漢) 등 역시 그 상소를 도왔다. 허루가 기회를 엿보다 죄를 빌었다. 왕이 이에 성부를 태공(太公)으로 삼았다. 제거와 세한을 좌우상보(左右上輔)로, 마제와 길문을 좌우대상(左右大相)으로 삼았다. 앞서 길원의 처 사을나가 허루가 불러 행차함을 약속하여, (사을나가) 남로를 나옴을 구하였다. 허루가 이에 사을나를 빼앗아, (길문이 사을나와) 함께 (관직에) 나아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길문 또한 사을나와 상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길문이 (사을라로) 하여금 함께 나아가기를 청탁하였다. 성부가 곧 화내며 말하기를 “너희 부자는 나의 은혜를 입어 귀하게 되었으나 나의 총애를 받는 계집 암사슴(麀)과 함께 사귀어 임신을 시켰다. 너는 유배를 가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길문이 이에 마제와 결탁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권력은 우리 두 사람 등에게 있으니, 서로 몸과 마음을 의지하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제가 본디 다른 뜻이 있었던 까닭으로(140년 3월의 기사참조) 승낙하였다. 허루는 이에 군사적 충돌을 풀고 신의 권능으로 당시 한 달여 동안 크게 가물어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지 않았다. 성부가 떠나기를 부르짖자, 하늘에서 큰비가 왔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도우(大刀雨)라 하였다.

二十三年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沙乙那爲稟主 以摩帝女茶耶 妻吉元 以甘生干時爲吉門密妻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23년(A.D.148) 3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사을나를 품주로, 마제의 딸 다야(茶耶)를 길원에게 시집보내고, 감생과 간시를 길문의 밀처로 삼았다. 마제를 중외대군사로, 미례를 대군모로 삼았다.

七月 以吉元爲京軍事 樊五爲南軍事 沙乙那思吉元 欲歸南軍 故召之地
7월 길원을 경군사로, 번오를 남군사로 삼았다. 사을나가 길원을 사모하여, 남군(南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 경(도)로 불렀다.

二十四年 三月 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吉門爲中外大軍事 沙乙那爲大軍母
24년(A.D.149) 3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미례를 품주로, 길문을 중외대군사로 사을나을 대군모로 삼았다.

五月 月瓠卒 以角干禮葬之 瓠性精敏勤厚 不爭功名 只帶頭上虛位 而不介于意 惟以國家爲念開 導少壯 人皆惜其卒
5월 월호(5군두상)가 죽어 각간례로 장사 지냈다. (월)호는 성품은 정민(精敏, 자세하고 민첩함)하고 근후(勤厚, 부지런하고 온후함)하여, 공명(功名)을 다투지 않았다. 다만 두상(頭上)이라는 형식적인 직위를 차고 있어서,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를 위한 생각만은 열어두어, 젊은 장수들을 이끌었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아까워하였다.

以五軍頭上爲左右頭上 以白馬爲左 車門爲右 以允良爲北軍事 妻吉門女成門 發良爲水酒太守 漢烏爲別軍事
이로써 5군두상(五軍頭上)을 좌우두상(左右頭上)으로 나누고, 백마(白馬)를 좌(두상)으로, 차문(車門, 길문의 형제)을 우(두상)으로, 윤량(允良)을 북군사로 하여 길문의 딸 성문(成門)을 시집보내고, 발량을 수주태수로, 한오(漢烏)을 별군사로 삼았다.

七月 大雹 殺鳥群 于推火 命還朱日 于加耶 其妻靑氏正子 同歸
7월 추화(推火)에서 우박이 내려 새떼가 죽었다. 주일(朱日)을 가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그의 처 청씨(靑氏)와 아들이 함께 돌아갔다.

十月 大震 破屋傷命 上躬訪宗老太公 責己
10월 대지진이 발생하여,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왕이 몸소 종노(宗老, 알지신군)와 태공(太公 허루)을 방문하고, 자신을 책망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1년 기사
21년 7월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죽었다.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민가가 쓰러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二十五年 正月 加耶世主 遣其三子靑裔 入朝
25년(A.D.150) 정월 가야세주(加耶世主, 정견)가 그 셋째아들 청예(靑裔)를 보내어 입조하였다.
≪견해≫ 540년 5월 기사에 수로(首露)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수로(首露)가 청예(靑裔)를 말하는지, 그 조상중의 한분을 말하는 지 알 수 없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茶耶爲稟主 沙乙那愛吉元 而不肯爲稟主 上許其志 遂以茶耶代之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3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삼고 다야(茶耶)를 품주로 삼았다. 사을나가 길원을 사모하여 품주로 삼은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왕이 그 뜻을 허락하고, 다야가 대신하게 되었다. 마제를 중외대군사로 삼고 미례를 대군모로 삼았다.

十二月 音汁伐與悉直谷爭界 王命其地老辨之 地老曰 “加耶王子靑裔多智 可以立議” 上許之
12월 음즙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이 그 땅의 노인들로 하여금 (경계를) 변별하도록 하였다. 노인들이 말하기를 “가야왕자 청예(靑裔)가 지혜가 많으니 그의 의견으로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기사
23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우두머리를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이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보제의 종이 도망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돌려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
≪견해≫ 음즙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은 나라이름이 아니다. 실직곡(悉直谷)은 실직국, 음즙벌(音汁伐)은 압독국의 영토다.

汗門爲京都兵官 汗兒子也
한문(汗門)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는데, 한아(汗兒)의 아들이다.

二十六年 二月 靑裔巡遊六部 部氓以其神智聚觀之 部主皆以伊干迎之厚饗 漢祇主保齊 獨以家奴接之 甚薄 靑裔之臣耽下里恥之 殺其奴 逃依音汁伐主 上命索之不應 命吉元伐之 以爲郡
26년(A.D.151) 2월 청예(靑裔)가 6부를 순찰하며 유람하였다. 부맹(部氓, 部의 서민)들이 그의 신지(神智, 영묘한 지혜)를 살펴보러 모여들었다. 부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이간(伊干, 지방벼슬로 추측)으로 후하게 잔치를 열어 맞이하였는데, 한지(漢祇)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만이 홀로 가노(家奴)로 접대하여 심히 박하게 대하였다. 청예의 신하인 탐하리(耽下里)가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노비를 살해하였다. (탐하리가) 음즙벌주(音汁伐主)에게 도망하여 의지하였는데, 왕명으로 (탐하리)를 찾았으나 응하지 아니하였다. 길원에게 음즙벌을 벌하도록 명하여, 군(郡)으로 삼았다.

悉直君奉治押督君王乙 皆以其地納之
실직군(悉直君) 봉치(奉治)와 압독군(押督君) 왕을(王乙)이 모두 그 땅을 바쳤다.

三月 摩帝爲伊伐飡 吉門爲中外大軍事
3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길문을 중외대군사로 삼았다.

九月 穀大登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加樹爲馬頭城主
가수(加樹)를 마두성주로 삼았다.

十月 桃李皆華 誦歌連野
10월 복숭아와 오얏(자두)꽃이 호화로웠다. 들판에서 노래를 읊는 소리가 이어졌다.

二十七年 正月 大軍事吉門爲賊所弑 上痛哀之 葬以角干禮 以摩帝爲中外大軍事 吉元爲伊伐飡 沙乙那爲稟主 茶耶爲祖主 君乙爲京軍事 啓其爲水路軍事 虹盧爲南軍事
27년(A.D.152) 정월 대군사 길문이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길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각간(角干)례로 장사지냈다. 이 때문에 마제를 중외대군사로, 길원을 이벌찬으로, 사을나를 품주로, 다야를 조주(祖主)로, 군을을 경군사로, 계기(啓其)를 수로군사로, 홍노(虹盧)를 남군사로 삼았다.

三月 以支所禮爲伊伐飡 吉元爲西軍事 沙乙那爲摩帝密妻 茶耶爲西軍母
3월 지소례를 이벌찬으로, 길원을 서군사로, 사을나를 마제의 밀처로, 다야를 서군모로 삼았다.

四月 以摩帝女愛禮爲祇摩太子妃 上與美禮主吉 于神井 太子兵官玉權爲韓飡
4월 마제의 딸 애례(愛禮)를 지마태자비(祇摩太子妃)로 삼았다. 왕과 미례(美禮)가 신정(神井)에서 그 혼사를 주재하였다. 태자병관 옥권(玉權)을 한찬으로 삼았다.

十月 以吉元爲左頭上 樊五爲右頭上 白馬爲西軍事 車門爲別軍事
10월 길원을 좌두상으로, 번오를 우두상으로, 백마를 서군사로, 차문을 별군사로 삼았다.

二十八年 正月 星隕如雨 不至于地 史后有疾 上減膳自責
28년(A.D.153) 정월 별들이 비처럼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사후가 병이 들어 왕이 반찬을 줄이며 자책하였다.

吉元伊伐飡 茶耶稟主 支所禮左頭上 太子太師昌永加爵匝判
길원을 이벌찬으로, 다야를 품주로, 지소례를 좌두상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 창영(昌永)에게 잡판의 직위를 더하였다.

三月 崔好請娶扶余芍平女 許之
3월 최호(崔好, 일모성주)가 부여 작평(芍平)의 딸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七月 奉治卒 其臣牟斗等作亂 支所禮討平之 徙其衆 于南鄙各地
7월 봉치(奉治, 悉直君 혹은 悉直太守라고 섞여 쓰였다)가 죽어 그의 신하 모두(牟斗)가 난을 일으켜 지소례가 쳐서 평정하였다. 남은 그 무리들을 남쪽 시골 각지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5년 기사
25년 정월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7월 실직이 배반하자 군사를 보내 토벌 평정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十月 樊五伊伐飡 曷名稟主 吉元右頭上
10월 번오를 이벌찬으로, 갈명(曷名)을 품주로, 길원을 우두상으로 삼았다.

二十九年 正月 扶余獻其骨女二人 請和 許之
29년(A.D.154) 정월 부여가 골녀(骨女) 2명을 바치며 화해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二月 雪深三尺 兩山不通 加童三十人
2월 눈이 3자 깊이로 내려, 양산(兩山, 地名은 아닌 듯, 두개의 산)이 불통되었다. 어린아이 30명을 더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6년 기사
26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
2월 서울에 석 자 깊이의 눈이 내렸다.

六月 支所禮伊伐飡 加亥稟主 樊五左頭上
6월 지소례를 이벌찬으로, 가해(加亥)를 품주로, 번오를 좌두상으로 삼았다.
≪견해≫ 支所禮伊伐飡는 支所禮爲伊伐飡를 생략한 표현이다.

勾利與遼 大戰 取其地爲郡
구리(勾利, 고구려)와 요(遼, 거란)가 크게 싸웠다. 그 땅을 취득하여 군(郡)으로 삼았다.
≪견해≫ 요(遼)나라의 건국은 907년의 사실이다. 당시에도 요(遼)나라라는 명칭이 쓰였는지 의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이런 기사를 찾을 수 없다.

三十年 正月 稟主加亥病免 上以愛女毛利 命爲稟主
30년(A.D.155) 정월 품주 가해(加亥)가 병이 들어 사직하였다. 왕이 사랑하는 딸 모리(毛利)를 품주로 삼기를 명하였다.
≪견해≫ 이벌찬 지소례(支所禮)와 품주 모리(毛利)는 지진내례의 어머니이다. 지진내례는 일성이사금과 사이에서 아달라이사금을 낳고, 석추갈문왕과 사이에서 벌휴이사금을 낳는다. 지진내례의 출생기사가 없고, 사망기사에 나이를 적어 두지 않아 태어난 해를 알 수 없으므로, 위의 기사에서 대략적인 출생시기의 파악이 가능하다.

上與史后幸押督 賑民
왕과 사후가 압독(押督)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三月 上還都 以吉元爲伊伐飡 茶耶稟主 支所禮右頭上
3월 왕이 (경)도로 돌아왔다. 길원을 이벌찬으로, 다야를 품주로 하고, 지소례를 우두상으로 하였다.

七月 大蝗 王遍祭 神山大川而禳之 曰 “朕德衰歟 臣下奸歟 昨夏大水 十道民饑 今此大蝗 奈蒼生 何果蝗減 而有年” 時閼智神君薨 上臨之則 曰 “臣以宗老 無有上報 昇天 則可以除蝗” 果以薨日之夜 臭雨大降 虫自除 而穀大醒 故人曰 閼智穀 立其廟 于南郊
7월 메뚜기 떼가 창궐 하였다.왕이 두루 신산(神山)과 대천(大川)에서 제사를 지내어, 푸닥거리를 하며 말하기를 “짐의 덕이 쇠하였는지, 신하 중에 간사한자가 있는지, 작년 여름에는 큰물이 져서 10도의 백성들이 굶주리더니, 지금은 이처럼 메뚜기 떼가 창궐할 수가 있는가. 어떠한 결과로 메뚜기 떼가 감소한 해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때 알지신군이 죽었다. 왕이 알지신군의 죽음을 대면하자, (알지)가 말하기를 “신(臣)은 종노(宗老)로써 왕의 (은혜에) 보답함이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오르면 곧 메뚜기를 없애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과로 알지신군이 죽은 밤에 몹시 큰 비가 내렸다. 메뚜기들이 스스로 없어지고 곡식들이 깨어났다. 그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지곡(閼智穀)이라 하였다. 알지신군의 사당을 남교(南郊)에 세웠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9년, 30년 기사
29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30년 7월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다. 메뚜기 떼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八月 比只與多伐草八 作亂 命虹盧加樹 討平之 比只太子宝日 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 主和 其弟靑裔 奔于金官
8월 비지(比只), 다벌(多伐), 초팔(草八)이 함께 난을 일으켜 홍노(虹盧, 남로군사)와 가수(加樹,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평정하였다. 비지의 태자 보일(宝日)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둘째 주일(朱日)은 소문(召文)으로부터 돌아가 화친을 주장하고, 동생 청예(靑裔)는 금관(金官)로 도망쳤다.
≪견해≫ 비지(比只)는 162년 5월 기사에 재등장하고, 초팔(草八)는 포상(浦上)8국 중 1국이라 하므로, 당시에 모두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아니다.

十二月 太公許婁薨 上與史后痛哀之 以尼今禮葬之 追尊爲葛文王 其妃道生 欲赴殉地 摩帝扶之 曰 “何不爲新太公生子” 上知摩帝意 乃以摩帝爲太公 吉道生 于神井 爲妃 是日 以樊五伊伐飡 曷名稟主 吉元左頭上
12월 태공 허루가 죽어, 왕과 사후가 애통해 하였다. 이로써 니금례(尼今禮)로 장사지내고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허루의 비(妃) 도생(道生)이 따라 죽는 장소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마제가 곁에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신태공(新太公)의 아들을 낳으려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마제의 뜻을 알아듣고 이에 마제를 태공으로 삼았다. 도생이 신정(神井)에서 결혼을 하고 (마제의)비로 삼았다. 이날 번오를 이벌찬으로, 갈명(曷名)을 품주로, 길원을 좌두상으로 삼았다.
≪견해≫ 尼今과 王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三十一年 正月 上與史后 祭火神 于井中
31년(A.D.156) 정월 왕과 사후가 정중(井中)에서 화신(火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以摩帝次子莫兮爲京軍事 君乙爲北軍事 以支所禮女加車爲莫兮妻 行京軍母 以玉君之子玉權爲護城大師 尹公之子逸聖爲太子兵官 使屬祇摩 日知之子馬日爲殿中郞 昌永爲大井大師神籬將軍 母三軍 乃京路護城太子之軍也
마제의 둘째아들 막혜(莫兮)를 경군사로, 군을을 북군사로, 지소례의 딸 가거(加車)를 막혜의 처로 하여 경군모(京軍母)직을 행하게 하였다. 옥군(玉君)의 아들 옥권(玉權)을 호성대사로, 윤공(尹公)의 아들 일성(逸聖)을 태자병관으로 하여 지마(祇摩)에게 속하여 부리게 하였다. 일지(日知)의 아들 마일(馬日)을 전중랑으로, 창영(昌永)을 대정대사(大井大師) 신리장군(神籬將軍)으로 삼아 삼군을 살펴보게 하였다. 삼군(三軍)은 이에 경로(京路), 호성(護城), 태자의 군대를 말한다.

狗壤主河己卒 子屯己立
구양(狗壤)의 우두머리 하기(河己)가 죽어, 아들 둔기(屯己)가 섰다.
≪견해≫ 구양(狗壤)은 백제와의 변경이다.

二月 上命祇摩太子與妃愛禮 聽政 摩帝率百僚 朝于大井
2월 왕이 지마(祇摩)태자와 (태자)비 애례(愛禮)에게 나랏일을 듣도록 명하였다. 마제가 백료(百僚=百官, 모든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하였다.

三月 祇摩太子 宴摩帝美禮 于大井 太子謂美禮 曰 “爾女已娠我子 可以繼天 但我無威難 制天下何” 美禮大喜 曰 “汝乃吾女之愛夫 與吾一體也 可以大符委之也” 摩帝亦醉 而許之
3월 지마(祇摩)태자가 대정(大井)에서 마제와 미례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자가 미례에게 까닭을 말하기를 “당신의 딸은 이미 나의 자식을 임신하였으니, 가히 하늘(왕위)을 계승할 수 있다. 다만 나에게 위엄이 없는 어려움이 있으니, 천하를 무엇으로 제어해야 할까”라고 하였다. 미례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 딸이 사랑하는 남편이다. 너와 우리는 한 몸이다. 대부(大符, 마제의 符節을 의미하는 듯)를 맡길 만 하다”라고 하였다. 마제 역시 취하여, 허락하였다.

太子 以吉公爲伊伐飡 馬知那爲京軍事 馬知那妻兪生爲京軍母 乃太子之胞妹也 吉公妻暖生爲稟主 莫兮爲太公私臣
태자가 길공(吉公)을 이벌찬으로, 마지나(馬知那)를 경군사로, 마지나의 처 유생(兪生, 유리이사금의 딸)을 경군모로 삼았다. 유생은 태자의 같은 어머니 동생이다. 길공의 처 난생(暖生)을 품주로, 막혜(莫兮)를 태공사신으로 삼았다.

七月 上與史后 遊卞山 親祀雙神
7월 왕과 사후가 변산(卞山)으로 놀러가서, 친히 쌍신(雙神, 일지와 한나)에게 제사지냈다.

十月 愛禮妃君 生子班君 太子洗之 上聞之 自卞山歸 見 賜妃玉寶金紫大衣
10월 애례비군(愛禮妃君)이 아들 반군(班君)을 낳아 태자가 아기를 씻겨주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변산에서 돌아와 아기를 살펴보았다. (애례)비(妃)에게 옥보(玉寶, 임금의 존호를 새긴 도장)과 금자대의(金紫大衣)를 내려주었다.

三十二年 正月 上與史后祇摩愛禮班君 受朝 于大井 讌嚮兩門 是日 上幸愛禮妃君
32년(A.D.157) 정월 왕과 사후, 지마(祇摩), 애례(愛禮), 반군(班君)이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양문(兩門, 두 집안)의 잔치가 있었다. 이날 왕이 애례비군(愛禮妃君)에게 행차하였다.

三月 復以支所禮爲伊伐飡 毛利稟主 吉公爲骨門角干 樊五爲右頭上
3월 지소례를 다시 이벌찬으로, 모리(毛利)를 품주로, 길공(吉公)을 골문각간으로, 번오를 우두상으로 삼았다.

四月 暖生(生) 太子女暖花 太子洗之
4월 난생(暖生)이 태자의 딸 난화(暖花)를 낳았다. 태자가 아기를 씻겨주었다.

大井城門自毁 上謁廟 問過
대정(大井)의 성문이 스스로 무너져, 왕이 사당을 알현하여 잘못을 물었다.

七月 命中外仙巫祈雨 太子與妃君 露處三日 乃雨 時旱魃橫行三月 民心洶洶 至是始得種播 人以爲太子雨
7월 중외선무(中外仙巫)에게 비를 내리도록 기도하도록 명하였다. 태자와 (애례)비군이 노처(露處, 한데서 거처함)에서 3일을 지냈다. 이에 비가 왔다. 당시 3달 동안 가뭄 귀신이 횡횡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씨앗을 파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태자우(太子雨)라고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2년 기사
32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九月 太子幸稟主毛利 于政堂 兵官逸聖諫之 曰 “政堂非吉所 恐爲人譏” 太子曰 “善 吾旣被譏 汝獨無譏 可乎” 乃强使逸聖 繼濡之 人非之 曰 “誰謂諫之 不似甚於贊之 不似邪
9월 태자가 품주 모리(毛利)에게 행차하러 정당(政堂)에 갔다. 병관 일성(逸聖)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정당은 결혼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됨을 비웃음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옳도다. 나는 이미 비웃음을 입은바 있다. 너는 홀로 비웃지 않았는데 옳은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강제로 일성으로 하여금 이어 젖도록 하였다. 사람들이 그릇되었다며 말하기를 “누군가 설명하여 간언하니, 심히 그것을 도운 것과 같지 않고, 사악함이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十月 太子閱三軍車騎 于北川
10월 태자가 북천(北川)에서 삼군(三軍)의 수레와 기병을 검열하였다.

三十三年 正月 以樊五爲伊伐飡 曷名稟主 支所禮右頭上 扶余骨女加利 生上子居利
33년(A.D.158) 정월 번오를 이벌찬으로, 갈명을 품주로, 지소례를 우두상으로 삼았다. 부여의 골녀 가리(加利)가 왕의 아들 거리(居利)를 낳았다.
≪견해≫ 거리(居利)는 박제상의 4대조이다.

二月 以玉權爲京軍事 馬知那爲南軍事 虹盧爲北軍事 允良爲神籬將軍 翌宗爲護城大師 逸聖爲京都大頭太子私臣
2월 옥권(玉權)을 경군사로, 마지나를 남군사로, 홍노(虹盧)를 북군사로, 윤량(允良)을 신리장군으로, 익종(翌宗)을 호성대사로, 일성(逸聖)을 경도대두(京都大頭) 태자사신으로 삼았다.

五月 上有疾 妃君禱天不寐 上下稱之
5월 왕이 병이 들어 (애례)비군이 잠을 자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하(上下, 위아래사람들)이 그것을 칭찬하였다.

七月 上復疾 召太公及左右頭上大井大師太子大師 入寢殿 傳位于祇摩太子 太子號泣 受之 大赦 天下呼太子小今
7월 왕이 다시 병이 들어, 태공(太公, 마제)과 좌우두상(左右頭上, 길원과 지소례), 대정대사(大井大師, 창영), 태자대사(太子大師)를 침전으로 불러 들어왔다. 지마태자에게 전위(傳位)를 하였다. 태자가 소리 내어 울며 전위를 받았다. 죄인들을 사면했다. 천하가 태자를 소금(小今)이라고 불렀다.

十月 上夢見惠后 喉渴而崩 史后引小今 于仙寢 而行祥 葬上 于蛇陵門
10월 왕이 꿈에 혜후(惠后, 아혜)를 만나고, 목구멍이 말라 죽었다. 사후가 소금(小今n 지마)를 선침(仙寢)으로 이끌어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왕을 사릉문(蛇陵門)에 장사를 지냈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3년 기사
33년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以允良爲伊伐飡 吉元爲神籬將軍 昌永爲左頭上 君乙爲水酒太守
윤량을 이벌찬으로, 길원을 신리장군으로, 창영을 좌두상으로, 군을을 수주태수로 삼았다.

十一月 上與史后愛禮 受大朝 于南桃 以愛禮爲雌神聖母 史后爲太聖
11월 왕과 사후가 애례와 남도(南桃)에서 큰 조회를 받았다. 애례(愛禮)를 자신성모(雌神聖母)로 삼고, 사후를 태성(太聖)으로 삼았다.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가야세주 정견(正見)이 죽어 아들 주일(朱日)이 섰다. 스스로 아시금(阿豉今)이라 칭하였다.

十二月 上立先今廟 于高井 命王女十二人分 朔遞祭之
12월 왕이 선왕의 사당을 고정(高井)에 세웠다. 왕녀 12명을 나누어 (매월) 초하루에 교대하여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擇六部仙女三十六人 妻雪草兩童 命十部王子 主其吉 于鮑祠
6부선녀 36명을 골라서 설동(雪童)과 초동(草童)에게 시집가게 하였다. 10부의 왕자들에게 명하여 포사(鮑祠)에서 혼사를 주재토록 하였다.
≪견해≫ 앞에서는 六部라 하고 뒤에는 十部라 하였다. 十部는 오기인 것 같다.

行先今大祭 于新廟 炬火連十里 先今性溫慈好仁節儉 省用 愛民如己 御下爾 勞來諸候 疆土益加 亦中興之聖祖也.
선금(先今, 파사)의 제사가 새로운 사당에서 행하여졌다. 횃불이 10리에 연이어졌다. 선금의 성품은 온자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며, 절약하여 검소하며, 사람을 살펴 쓰고, 백성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였다. 아랫사람을 다룸에 도리가 있으며, 오고자 하는 제후(諸候)의아 수고를 위로하고, 강토(疆土)가 더하여 늘어났다. 또한 중흥(中興)의 성조(聖祖)다.
≪견해≫ 파사이사금 당시 병합된 주변 영토는 거타(居陀, 144년 9월), 압독(押督, 151년 2월), 실직(悉直, 151년 2월)이 있다.



김영채 (2009-01-31 23:23:26)  
(1) 4년 3월기사 : 掌中外兵馬事 爲祖主 -> 掌中外兵馬事 阿世爲祖主
(2) 4년 4월기사 : 復以爲太聖 -> 復阿利以爲太聖
(3) 5년 9월기사 : 以史省毛施納慧爲聖母 -> 以史省毛施訥慧爲聖母, 해석: 납혜(納慧)를 -> 눌혜(訥慧)를
(4) 6년 정월기사 : 達文生許婁子許乙 -> 達門生許婁子許乙, 해석: 달문(達文)이 -> 달문(達門)이
(5) 8년 2월기사 : 許爲仙孝私臣 -> 許爲善孝私臣, 해석: 선효(仙孝)의 -> 선효(善孝)의
(6) 9년 9월기사 : 是夜伊理生 -> 是夜伊利生
(7) 14년 4월기사 : 왕아 말하기를 -> 왕이 말하기를
(8) 14년 7월기사 : 이에 옥군(玉君), 모모(侔毛), 모지(毛知), -> 이에 옥군(玉君), 방모(方侔), 모지(毛知),
(9) 17년 7월기사 : 稟主果老腹通 -> 稟主果老復通, 해석도 수정해야 합니다.
(10) 19년 7월기사 : 남번(南藩)이 삼아주십시오 -> 남번(南藩)을 삼아주십시오
(11) 21년 5월기사 : 樊吾爲馬政大師 -> 樊五爲馬政大師, 해석: 번오(樊吾)를 -> 번오(樊五)를
정성일 (2009-02-16 09:31:40)  
김영채 선생님//
소소한 부분까지 확인하시어 지적하여 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요즈음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은 직장에서 바빴던 것도 있으나, 검토해 오던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그에 대한 고민해결이 되지 않아 보완의 보완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님당유고의 해석 이외에 개인적인 의견을 삽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간혹 삭제하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을 삽입해오고 있습니다.
첨해이사금기 까지를 일단 목표로 삼아 수정해 볼 생각입니다.
현재 제가 한글2002를 사용하다 보니 간혹 한자 변환이 되지 않는 한자를 계속 고집하고 있음에 속터져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이 투자되더라도 한글2005로 혹은 상위제품을 구입하여 고쳐놓도록 하겠습니다.
이점은 양지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elly (2009-07-08 20:28:33)  
158년에 가야세주 정견(正見)이 죽어 아들 주일(朱日)이 섰다. 스스로 아시금(阿豉今)이라 칭하였다.
라고 나오는데 저 주일이 대가야의 사조인 뇌질주일 [惱窒朱日] 즉, 이진아시왕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