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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작(鵲)태자=석탈해 설’과 ‘한반도=대한국(大漢國)설’로 본 <수서(隋書),통전(通典)>의 가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4.
최근 ‘남당(南堂) 박창화 선생의 유고’집에 대한 해석(解釋)의 ‘대장정’이 사천(史穿) 김성겸 님과 또한 ‘정성일 님’께서 각기 한 분야씩을 맡아서 선도(先導)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두 선생님의 해석에 대해서 좌계가 가끔 교필(校筆)을 가하면서, “두분의 연구가 ‘아시아 역사’를 새롭게 보는 중요한 초석(礎石)을 마련하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씁니다.  

여러 동학(同學)들 께서 잘 아시다시피, ‘정성일 선생’께서는 ‘작(鵲)태자=석탈해(昔脫解) 설’을 입론(立論)해 주셨고, 또한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께서는 ‘한반도=대한국(大漢國)설’을 입론(立論)해 주었습니다.
이 두 가지 학설(學說)은 ‘아시아 고대사’를 재정립함에 있어서 중요한 관건(關鍵)이 되는 것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학설’ 때문에,  정사(正史)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사학계(史學界)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는 사서(史書)인 ‘수서(隋書)’가 돌연히 비중(比重)이 높아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수서(隋書)의 신라국(新羅國)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1.  수서(隋書)의 ‘놀라운 정보’

가.  ‘작(鵲)태자가 석탈해(昔脫解)가 됨’을 기록하고 있는 수서(隋書)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 해석하자면,
“그 나라 왕은 -물론 신라입니다. - 본디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부터 신라에 도망해 들어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로 되어 있습니다.

‘백제 사람으로써 신라(新羅)에 도망가서 왕(王)이 된 사람’을 우리 측의 사서(史書)에서 확인이 안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 수서(隋書)의 이부분의 이야기가 ‘신뢰성을 잃고’ - 나아가서 수서(隋書)가 서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실(史實) 전체를 비중 높게 다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일 선생’의 ‘작(鵲)태자=석탈해(昔脫解)’설을 확실한 사료(史料) 상호간의 비교검토로 입론(立論)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수서(隋書)를 ‘신뢰할 수 있는 정사(正史)’로 취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수서(隋書) 신라국(新羅國) 부문이 중요한 것은 대륙 삼국설에 핵심적인 정보가 아주 노골(露骨)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  신라의 지형(地形)에 대한 묘사(描寫)

이 수서(隋書)의 신라국(新羅國) 편 말미(末尾)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 - 해석하자면
“신라(新羅)라는 나라는 그 땅이 산(山)이 많고 험(險)해서, 비록 백제와 사이가 벌어졌어도, 백제(百濟)는 도모(圖謀)할 수가 없었다.”입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신라(新羅)의 주 강역이 오늘날 절강성(浙江省)에 들어섰음을 시원스럽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라를 에워싸고 있는 선하령(仙霞嶺) 산맥은 정말 산(山)이 많고, 험(險)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물론 신라(新羅)의 주강역을 오늘날 한반도의 경상도로 보고, 백제(百濟)의 주강역을 역시 전라도 지방으로 볼 때, 그 중간에 있는 노령산맥(蘆嶺山脈) 역시 산(山)이 많아 험(險)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서(隋書) 전체를 읽어보면, 놀랍게도 당시 한반도에는 왜(倭)가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음은 물론, 고구리, 백제, 신라가 모두 대륙에 자리 잡았음을 확연하게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한 첫 번째 기사(記事)

그런데, 이 수서(隋書)에 백제(百濟) 부문에서는 탐라국(耽羅國)의 이칭(異稱)인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해서 두 번이나 나옵니다.

첫째가 다음의 원문(原文) 내용입니다.

원문(原文)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3
◉平<陳>之歲, 有一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來相體悉.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使者舞蹈而去.

해석(解釋)
진(陳)이 평정된 해(589년)에 전선(戰船) 한척이 떠돌다 바다의 동쪽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닿았다. 그 배가 수(隋)나라로 돌아올 적에 백제(百濟)를 경유하니, 여창(위덕왕)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다.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진(陳)나라를 평정함을 축하하였다. 고조(高祖 : 수문제를 뜻함)가 이를 착하게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백제왕이 이미 진(陣)이 평정되었음을 듣고, 먼 곳에서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하였으나, 왕래(往來)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風浪)을 만난다면 인명(人命)이 손상될 것이오. 백제왕의 진실한 심정은 짐이 잘 알고 있소, 서로 거리는 멀다 하여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반드시 사신(使臣)을 자주 보내와 서로 다 알아야 되겠소. 이후로는 해마다 따로 조공(朝貢)을 바칠 것이 없소. 짐도 역시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알아서 하시오”라고 하였다. 사신(使臣)이 춤을 추고, 돌아갔다.

즉 수(隋)나라 전선(戰船)이 표류하다가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도착한 것을 , 이때 탐라국을 지배하던 ‘백제’가 긴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을 가득 실어서 주자, 수(隋)의 고조(高祖)가 고마워서 “우리가 이처럼 위급사항에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이니, 앞으로 조공(朝貢)을 안해도 되고, 서로가 사신(使臣)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고, 또 이 이야기를 들은 백제 사신(使臣) 역시 조정(朝廷)안에서 ‘춤을 추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응수(應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사(記事)를 보고 “수(隋)나라 전선(戰船)이 지금 제주도(濟州道)에 도착한 것을 위덕왕(威德王)께서 구출한 것이구만...”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습니다.

2)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한 두 번째 기사(記事)

그러나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한 두 번째 기사(記事)가 수서(隋書) 백제국 부분에서 또한번 거론되고 있습니다.  

원문(原文)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7
◉其南海行三月, 有<躭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해석(解釋) :
그 ‘남쪽 바다’로 삼 개월을 가면, 탐모라국(耽牟羅國)이 있는데, 남북(南北)이 천여리(千餘里)이고, 동서(東西)가 수백리이다.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부용(附庸)한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三日)을 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

여기서 탐모라국(耽牟羅國)의 지형의 모습이 나옵니다.  즉 남북(南北)으로 1,000여리되고, 동서로는 수백리가 되는 지형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대만(臺灣)이 꼭 이런 지형입니다. 섬 전체가 남북(南北)으로 길게 되어있는 형태인 것이지요.  반면 제주도(濟州道)는 동서(東西)로 긴 모양입니다.

3) 사서(史書)에서 여행(旅行)일수(日數)는 ‘수도(首都)를 기점(起點)으로, 사행(使行)과 행상(行商)의 속도를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상식(常識)이긴 하지만, 사서(史書)에서 여행일수가 거론(擧論)될때가 많습니다.
이때에는 수도(首都)가 그 기점(起點)이 되고, 또 여행일수의 속도(速度)는 ‘평화스런 사행(使行)과 행상(行商)들의 속도’가 그 기준(基準)이 됩니다.
즉 긴급히 연락한 급사(急使)의 속도가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신(使臣)을 보낼 때에는 조공(朝貢)때 따러가는 행상은 물론, 서서히 가는 것이 ‘국제적인 예의’인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國民)들에게 선전(宣傳)이 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온통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하면서, 국제(國際) 교린(交隣) - 평화스러움을 ‘만끽’하게하는 것이 경세(經世)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 대만(臺灣)인 ‘탐모라국(耽牟羅國)’까지 당시 백제 수도인 사비성(泗泌城)이 있었던 산동(山東)으로부터 백제(百濟)가 탐모라국(耽牟羅國)에 사신(使臣)을 일반 백성들에게 ‘볼꺼리’로 제공하면서 가는 속도가 3개월 정도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산동백제로부터 한 3일 가면 맥국(貊國 -고구리(高句麗)의 이칭(異稱)임)이 있다.”는 것은 바로 황하(黃河)에 버티고 있는 동명(東明)을 - 아마도 여기에 동명(東明)신사(神社)가 있었을 것임 - 뜻한다고 보여 지는 것입니다.

4)  연합국(聯合國)일 경우, 모든 부용국(附庸國)을 대동(對同)하고 와야만 예법(禮法)에 맞는다.

그런데, “엄연히 사서(史書)에 적혀있는 사실(史實)을 사학자들이 외면했을까?”하는 문제입니다.  
일차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隋) 고조(高祖)가 한 말에 보면- “왕래하기 극히 힘들다.”, 혹은 “만약에 풍랑을 만나면 인명(人命)이 상할 것이다.”는 등등의 말이 오해를 부르기 쉽기 때문인 것이지요.

수(隋)나라와 백제 수도 사이에 ‘큰 바다’가 있는 듯한 ‘뉴앙스’를 줍니다.

그래서 ‘오늘날 황해(黃海) 건너에 백제 수도(首都)가 있었다.’라는 착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수많은 부용국(附庸國)을 거느린 나라가 올 때에는, 이런 “부용국(附庸國)을 모두 대동(帶同)하고 와야 된다.”는 당시 국제사회의 예법(禮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자국(天子國)을 맡은 나라의 임금이 제후국(諸侯國)을 맡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을 ‘고대 아시아 ’국제사회의 예법(禮法)으로 순수(巡狩)라고 하고,
제후국(諸侯國)의 임금이 천자국(天子國)의 임금을 만나러 가는 것을 술직(述職)이라고 하는데, 이 술직(述職)은 문자(文字) 그대로 “맡은바 직책(職責)을 술(述) - 숨김없이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용국(附庸國)을 전부 대동(帶同)해야만, 술직(述職)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 수도가 산동이 아니라 오늘날 하남성(河南省) 몽양시(蒙陽市)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천자국(天子國)의 수도가 있는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이 지척이라도,
수많은 부용국(附庸國)을 거느린 백제왕의 술직(述職)에 대해서 중국 천자(天子)가 말할 때에는 “바다를 건너 풍랑을 만날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서 왕래(往來)해오니....” 이런 식으로 말해야 천자(天子)답게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백제서기(百濟書記)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서(隋書)의 백제국

그런데, ‘정성일 선생’님이 번역을 하고 있는 백제서기(百濟書記)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는 달리 ‘우대왕(優臺王)’의 이야기가 백제사(百濟史)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서(隋書) 역시 이 ‘우대왕(優臺王)’을 ‘구태(仇台)’라고 ‘유사한 음운(音韻)’으로 똑같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서(隋書) 백제(百濟)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 [有物狀如卵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捨之. 後遂生一男, 棄之  , 久而不死, 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歷十餘代, 代臣中國, 前史載之詳矣. <開皇>初, 其王<餘昌>遣使貢方物, 拜<昌>爲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백제'의 선조는 '고리국'에서 나왔다. - 물론 여기의 고리국은 고구리(高句麗)가 아니라, (북)부여의 전신(前身)인 ‘고리-튜메드’를 뜻한다. -
그 나라의 왕을 모시는 ‘수행(修行) 시종’(=시비(侍婢))이 한명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를 배니 왕(王)이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시비(侍婢)가 말하길, “달걀같은 상태의 형상이 있었는데, 나에게 와서 감응(感應)되어 임신하게 되었다.” 왕이 이를 내버려 두니, 후에 남자아이를 하나 낳으니,  이를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고 신령스러움이 있어서, “양육(養育)하라.”고 명(命)을 내리고 '동명(東明)'이라 이름하였다. - ‘해모수-동명성왕’임-

이 동명(東明)이 자라남에, '고려'왕은 이를 꺼리게 되었는데,  동명(東明)이 두려워하여, 달아나 '엄수(淹水)'에 이르니, '부여'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모셨다.
'동명(東明)'의 후손중에 '구태(仇台)'가 있는데, 인자하고, 믿음이 있어 처음 나라를 '대방(帶方)'의 옛 땅에 세웠다. '한(漢)''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의 여자를 처(妻)로 하고, 점점 창성해지더니,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처음 백개의 선단(船團)이 바다를 건너서 이루어졌기에  '백제(百濟)'라 불렀다.
십여 대를 지나면서 ‘중국(中國)을 대신(代身)하는 신하국(臣下國)’이 되었는데, 앞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다. '개황(開皇)'초에 그 왕 '여창(餘昌)'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받치자, '창(昌)'을 상개부(上開府)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百濟王)'을 내리었다.

이런 수서(隋書)의 사료(史料)가 특별한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사실(史實) 때문에 중요합니다.

1)  첫째는 구태(仇台) 즉 우대왕(優臺王)이 백제의 초기의 왕(王)이라고 분명히 거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백제서기(百濟書記)에서는 우대왕(優臺王)이라고 되어 있으나, 음운학(音韻學)적으로 구태(仇台)와 우대(優臺)는 상호 전환이 가능하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동일한 인물(人物)로 봐도 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백제(百濟)란 명칭 자체가 100여개의 가문(家門)들의 선단(船團)들이 바다를 건너서 모여 만든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한(馬韓)이래 아시아 최대의 선박(船舶) 민족이 삼한(三韓)이고, 이들이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모여들었다가 흩어지는 것을 현록표도(懸鹿漂都)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3)  구태(仇台) 즉 우대왕(優臺王)의 처(妻)에 ‘공손도(公孫度)의 딸’이 거론(擧論)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대왕(優臺王)은 제1황후로 소서노(召西奴)를, 제2황후로 공손도의 딸로써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역십여대(歷十餘代) 대신중국(代臣中國)’이란 표현의 중요성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백제(百濟)를 소개하는 수서(隋書)에서 언급한 글 가운데,  ‘역십여대(歷十餘代) 대신중국(代臣中國)’이란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 사서(史書)에 이런 표현(表現)이 있다.”는 자체가 경악스러운 것입니다.

왜냐?!
대신(代臣)이라 함은 천자(天子) 앞에 제후(諸侯) 즉 왕(王)을 대신(代身)하는 신하(臣下)를 뜻합니다.  즉 왕(王)을 대신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실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이런 대신(代臣)의 표현(表現)이 있습니다.
그것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聖德王) 33년 조(條)’에 당(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는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委員外將軍) 김충신(金忠臣)이 올리는 글 가운데 이 대신(代臣)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신(臣)의 본국왕(本國王)은 신(臣)이 오래도록 당나라 조정에 머물러 모시게 되었으므로, 종질(從姪) 지렴(志廉)을 대신(代臣)으로 하여 지금 이미 여기에 도착해 있으므로, 신(臣)은 곧 돌아가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원문(原文) :
신본국왕(臣本國王) 이신구시천정(以臣久侍天庭) 견사종질지렴(遣使從姪志廉) 대신(代臣) 금이도흘(今已到訖) 신즉합환(臣則合還)

즉 위 기사(記事)는 결국 김충신(金忠臣)이란 사람이 대신(代臣)으로 있다가, 그 자리를 후임 대신(代臣)인 지렴(志廉)이 왔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상주(上奏)를 하는 말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신(代臣)의 개념인 것이지요.
이는 천자(天子) 앞에 제후(諸侯)가  ‘그 거리가 워낙 멀 경우 제후(諸侯) 즉 왕(王)을 대신해서 신하(臣下)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김충신(金忠臣), 지렴(志廉) 모두 신라왕을 대신하는 신하(臣下)인 것이지요.

문제는 “대신중국(代臣中國)의 개념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 황제(皇帝)가 사해(四海) 밖의 세계에 대해서 천자(天子)로써의 일을 못할 때, 이를 대신(代身)해서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百濟)가 중국 천자(天子)가 하는 일을 대신해서 하는 나라라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적혀있는 것이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천자국(天子國)이 바뀌어도 즉 역십여대(歷十餘代)해도, ‘중국 천자’의 자리를 대신(代臣)하는 나라는 여전히 백제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즉 “중국(中國)의 천자(天子)가 바뀌어도 사해(四海) 밖의 아시아 전체의 세계경영을 하는 것은 백제(百濟)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수서(隋書)에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3.  수서(隋書)와 통전(通典)의 놀라운 기록

가.  수서(隋書) 신라국(新羅國)의 놀라운 기록

그런데, 수서(隋書)에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사(記事)입니다.

원문(原文)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

해석(解釋)
신라(新羅)는 원래 먼저 백제(百濟)에 부용(附庸)하였었다.  그런데 이로 인(因)해, 백제(百濟)가 고구리(高句麗)를 정벌할 때에는 따렀었는데,  이런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융역(戎役 : 백제의 신라에 대한 군사동원을 뜻함) 을 감당하지 못하고, 서로가 군사(軍師)를 이끌고 각기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드디어 강성(强盛)함에 이르러, 백제(百濟)를 습격하였는데, 이는 가라국(伽羅國)에 부용(附庸)을 했기 때문이다.  (즉 가라국(伽羅國)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다.)

이 수서(隋書)의 기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백제(百濟)가 중국(中國) 천자(天子)가 바뀌어도 사해(四海) 밖의 ‘아시아 전체의 세계경영’을 담당하는 대신중국(代臣中國)을 공식 사서(史書)에 묘사하고 있는 수서(隋書)의 기록이기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이런 막강한 백제의 융역(戎役)을 따라서 고구리(高句麗)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백제(百濟)의 막강함 보다도 가라국(伽羅國)에 부용(附庸)하게 되자, 그 힘이 배가(倍加)되어서 드디어 백제를 습격하여 멸(滅)하게 이러렀다는 이유 즉 인(因)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가라국(伽羅國)이 어떤 나라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일단은 신라(新羅)가 백제(百濟)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있으면서 고구리(高句麗)에 대항했던 그 과정을 다른 사서(史書) 즉 통전(通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나.  통전(通典)의 획기적인 두 가지 기사(記事)

일단 통전(通典)의 신라(新羅)에 대한 원문(原文)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新羅
  新羅國,魏時新盧國焉,其先本辰韓種也。辰韓始有六國,稍分為十二,新羅
則其一也。 初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 其國在百濟東南五百餘里, 亦
在高麗東南,兼有漢時樂浪郡之地。 東濱大海。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
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
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其國小,不能
自通使聘。
  苻堅時,其王樓寒遣使衛頭朝貢。堅曰:「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何也?」
答曰:「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今焉得同。」梁武帝普通二年,王姓慕
名秦,始使人隨百濟獻方物。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喙評」, 喙
,呼穢反。 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喙評、五十二邑勒。土
地肥美,宜植五穀,多桑麻果菜鳥獸,物產略與潢。

  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 隋東蕃風俗記云:「
金姓相承三十餘葉。」 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 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
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 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
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 並三韓之地。 其西北界犬牙出
高麗、百濟之間。

  官有十六等,其一曰伊罰于,貴如相,次伊尺于,次迎于,次破彌于,次大河
尺于,次河尺于,次乙吉于,次沙咄于, 咄,都骨反。 次及伏于,次大奈摩,次
大舍,次小舍,次吉土,次大烏,次小烏,次達位。外有郡縣。文字、甲兵同於中
國。選人壯健者悉入軍,烽、戍、邏 郎佐反。 俱有屯營部伍。風俗、刑政、衣服
略與高麗、百濟同。

  大唐貞觀二十二年,其王金春秋來朝,拜為特進,請改章服以從華制


위 기록 가운데 놀라운 기록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1)  소도(蘇塗)의 별칭이 훼평(喙評)이었다.

그 첫째가 “소도(蘇塗)의 별칭이 훼평(喙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음 원문(原文)에 들어나는 것이지요.
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喙評」, 喙,呼穢反。 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喙評、五十二邑勒。土地肥美,宜植五穀,多桑麻果菜鳥獸,物產略與潢。

해석(解釋)
: 향속(鄕俗)말로 성(城)을 일컬어 건모라(健牟羅 - ‘큰 마을’인듯 )라 했고, 그 읍(邑) 안에 있는 것을 말하여 훼평(喙評)이라 했다. 훼(喙)는 반절법(半切法)으로 호(呼)의 ‘ㅎ’과 예(穢)의 ‘ㅖ’를 합하여 ‘혜’라고 읽는다. 읍(邑) 밖을 일컬러 읍륵(邑勒)이라했는데, 이는 중군의 군현(郡縣)을 뜻한다. 나라에 여섯 개의 훼평(喙評)가 52개의 읍륵(邑勒)이 있다.

토지는 기름지고 풍광(風光)이 아름다워 오곡(五穀)을 심기에 마땅했고, 뽕나무와 삼, 그리고 과일 새들과 짐승이 풍부했으며, 물산(物産)는 화하(華夏)와 대략적으로 같았다.

이 기사(記事)가 중요한 것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마한(馬韓) 조(條)에서 소도(蘇塗)ㄹ를 묘사하고 있는 장면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읍(邑) 안에 있는 것은 호수(湖水)와 그 주변 옥토(沃土)이고, 이들이 강(江)을 타고 네트워크(network)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즉 소도(蘇塗)의 관경삼국(管境三國) 시대의 명칭이 훼평(喙評)임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호수(湖水)와 그 주변 옥토(沃土) 즉 훼평(喙評) 밖에 있는 읍(邑)의 이름이 읍륵(邑勒)이었는데,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훼평(喙評)에 있는 이상한 제도(制度)는 중국(中國)과는 다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이 훼평(喙評)이 “토지는 기름지고 풍광(風光)이 아름다워 오곡(五穀)을 심기에 마땅했고, 뽕나무와 삼, 그리고 과일 새들과 짐승이 풍부했으며, 물산(物産)는 화하(華夏)와 대략적으로 같았다.”로 표현하고 있는 점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합니다.

호수(湖水)는 중국 땅에 많지, 한반도에는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물산(物産)이 화하(華夏)와 같다면, 그 땅 역시 중국이라는 것이지욜.  이는 현 중국대륙에 신라(新羅)가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문장인 것입니다.

“나라에 훼평(喙評)이 6개 있고, 52읍륵(邑勒)이 있었다.”는 것은 수많은 읍(邑)들이 ‘큰 호수’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있음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곤란한 지형이고, 이 정도의 크기의 호수(湖水)는 한반도에는 없는 것입니다.  

2)  ‘其西北界犬牙出 高麗、百濟之間’이란 무서운 기사(記事)

그런데 통전(通典)에는 놀라운 기사(記事)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수서(隋書)에서 말하고 있는 “신라(新羅)가 맨처음 백제(百濟)에게 부용(附庸)하다가, 백제와 고구리의 전쟁 때문에, 가라국(伽羅國)에 부용(附庸)하였다.”는 똑같은 기사(記事)가 등장하는 다음의 원문(原文)입니다.


원문(原文)
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 並三韓之地。 其西北界犬牙出高麗、百濟之間。

해석(解釋):
신라(新羅)는 원래 백제(百濟)에 먼저 부용(附庸)하였었다.  이로 인(因)해 백제(百濟)가 고구리(高句麗)를 정벌할 때 융역(戎役)에 동원되었었는데, 신라 사람들은 이 융역(戎役)을 감당하기 힘들어 했다.
고구리(高句麗)와 백제(百濟)가 서로 그 군사(軍師)를 이끌고 돌아가자, 드디어 신라는 강성하게 되었다. 이는 가라국(伽羅國)과 임나(任那)의 여러 나라들을 스며들어(=습(襲))멸하면서, 삼한(三韓)의 땅을 병합(幷合)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신라(新羅) 의 땅이 서북(西北)쪽으로 고구리(高句麗)와 백제(百濟)의 땅 사이로 ‘개 이빨(=견아(犬牙)’처럼 뻗어났기 때문이다.

(구문(構文)의 해석 관점)
일단 위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 ‘인(因)....., ...., .....’이란 연결된 구문(構文)의 실제 원인(原因)은  그다음에 나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수서(隋書)에서도 동일한 구문(構文)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좌계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설혹 대의(大義)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위 문장의 문법적(文法的)인 해석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혹 이 글을 읽고, 구문(構文)의 해석상 문법적 고찰이 문제가 있으면, ‘댓글’로써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설(却說)
위 통전(通典)의 내용이 극히 중요한 것은 바로 맨 끝 문장 때문인 것이지요.
신라(新羅)의 중심 강역이 오늘날 중국 절강성(浙江省)임에는 틀림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구리(高句麗)와 백제(百濟) 땅 사이를 마치 ‘개 이빨(=견아(犬牙))’처럼 뚫고, 서북계(西北界)로 나아갔다.(其西北界犬牙出高麗、百濟之間)”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백제(百濟)가 오늘날 광동성(廣東省), 사천성(四川省)에 자리잡았음을 뜻합니다.
또한 고구리(高句麗)가 오늘날 강소성(江蘇省)까지 침투해왔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양자강 최대의 지류(支流)이면서 섬서성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는 한수(漢水)가 있습니다.
이는 신라(新羅)의 주강역인 ‘절강성’ 입장에서 보면 정확히 서북계(西北界)에 해당합니다.

즉 통전(通典)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신라가 삼한일통(三韓一統)을 하게 된 계기는 바로 한수(漢水)지역과 황하(黃河)의 원류(源流)가 있는 섬서성 태백산(太白山) 지역을 확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이 놀랍게도 중국(中國) 사서(史書)에 명백하게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4.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의 ‘한반도=대한국설’과 수서(隋書)

가.  수서(隋書)의 언급
이제 다시 수서(隋書)로 돌아가기로 합시다.
모두(冒頭)에 ‘작(鵲)태자=석탈해(昔脫解) 설’을 주장한 ‘정성일 선생’의 입론(立論)과 수서(隋書) 신라국(新羅國)에서 말하는 ...........

“그 나라(=신라)왕은 본디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부터 신라에 도망해 들어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로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수서(隋書)에서 “한반도(韓半島)에 대해서 어찌 이야기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수서(隋書)에서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는 왜국(倭國)에서 거론(擧論)되고 있습니다.

이 왜국(倭國)에 대한 처음 이야기는 다음 원문(原文)과 같이 진행됩니다.

원문(原文)

倭國 (왜국)

1)<倭國>, 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里, 於大海之中依山島而居.
2)<魏>時, 譯通中國. 三十餘國, 皆自稱王.
3) 夷人不知里數, 但計以日.
4) 其國境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5) 其地勢東高西下.
6) 都於<邪靡堆>, 則《魏志》所謂<邪馬臺>者也.
7) 古云去<樂浪郡>境及<帶方郡> 一萬二千里, 在<會稽>之東, 與<聃耳>相近.

이 원문(原文)을 위에 붙인 번호대로 몇 개로 쪼개서 다시 해석함이 좋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중요한 기사(記事)이기 때문입니다.  

1)<倭國>, 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里, 於大海之中依山島而居.

해석(解釋):
왜국은 백제(百濟)와 신라의 동남(東南)쪽에 있다. 수륙(水陸)으로 삼천리인데, ‘큰바다(=대해(大海)’가운데 산(山)과 섬(島)에 의지해 거주한다.

주의(注意):
여기서 가장 유의(有意)해야할 것은 ‘大海之中依山島而居’라는 문장이
(1) 대해지중(大海之中) 산거(山居)와
(2) 대해지중(大海之中) 도거(島居)을 합쳐놓았다는 것입니다.

(1)은 한반도(韓半島) 지형에 딱들어 맡는다는 것입니다.  즉 동해(東海), 남해(南海=현해탄). 황해(黃海)라는 대해지중(大海之中)의 산(山)인 것이지요.  반면 현재 일본 열도(列島)는 문자 그대로 섬(島)이므로 (2)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명쾌한 인식이 없으면, 다음 문장은 전혀 해석하기 힘들게 됩니다.
즉 수서(隋書)에서는 오늘날 만주지역을 포함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왜국(倭國)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魏>時, 譯通中國. 三十餘國, 皆自稱王.

해석(解釋)
위(魏)나라 때 중국말로 통역(通譯)이 가능한 나라가 (무려) 삼십여국에 이르렀는데, 이 나라들은 모두 스스로 왕(王)이라고 칭하였다.

3) 夷人不知里數, 但計以日.

해석(解釋)
이인(夷人)들은 리수(里數)를 모르고, (모든 거리를) 단지 날짜로 계산했다.
주의(注意)
이 이야기는 특히 중요함. 왜냐하면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전형적인 선박(船泊)을 중심으로한 기동(機動)-민족임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선박(船泊) ‘안’에서 잠을 자고, 또 멀리가고, 설혹 육지(陸地)에 접안(接岸)한다고 하더라도 ‘배 안’에 있는 가축(家畜)을 꺼내어 수레를 끌고 다니기 때문에, 굳이 리수(里數)를 알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곳에서 저곳까지 몇 리(里)이다.”라는 상세한 정보를 아는 것은 그곳에 북박이-생활을 하는 경우에만 잘 아는 것입니다.

항상적으로 오긴 하지만, ‘북박이 생활’을 안하는 경우에는 이런 ‘리수(里數)’가 오히려 번거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한반도 및 만주’는 ‘아시아 최고의 기동민족’의 ‘독점적 경유지’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4) 其國境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해석(解釋):
이 나라의 국경(國境)은 동서(東西)가 ‘다섯달’이나 걸려서 서해(西海)와 창해(蒼海 : 울릉도가 있는 동해(東海))에 도달하고, 남북(南北)으로는 ‘세 달’이나 걸려서 남해(南海: 현해탄이 있는 바다)와 ‘바이칼’에 각각 도달한다.

주의(注意):
이 문장(文章)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왜냐?  섬(島)을 이야기할 때에는 굳이 ‘그 국경(國境)이 얼마 걸리는데 바다에 이른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지(陸地)일 경우에만 이런 어법(語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남북(南北)으로 ‘세 달’이나 걸려서 바다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한반도 남해(南海)에서 저 ‘바이칼’까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서(史書)에서 ‘몇개월 걸린다.’라고 말할 때에는 행상(行商)의 보행(步行)속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서(東西)로 다섯달이나 걸려서 바다에 이른다.’라고 할 때의 바다는 오늘날 청해(靑海)로 일컸어지는 서해(西海)에서부터 송화강(松花江)이 흑룡강(黑龍江)이 합쳐져서 연해주를 끼고 바다로 나가는 흑룡강 하구(河口)를 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행상의 흐름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점을 수서(隋書)는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5) 其地勢東高西下.
해석(解釋)
이 왜국(倭國)의 땅의 지세(地勢)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주의(注意)
바로 이 구절(句節)이 영락없이 한반도(韓半島)지형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현(現) 한(韓), 중(中), 일(日) 삼국 가운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세(地勢)는 유일하게 한반도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4)의 문장과 함께 수서(隋書)에서 말하는 왜국(倭國)이 바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주에서 청해(靑海)까지 이르는 지역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6) 都於<邪靡堆>, 則《魏志》所謂<邪馬臺>者也.
해석(解釋)
이 왜국(倭國)의 수도는 ‘사마퇴’에 있었는데, 즉 위지(魏志)에서 말하는 ‘사마대’를 말한다.

주의(注意)
대륙에 있는 사신(使臣)을 맞을 때에는 신기하게도 현 일본열도 구주(九州) 지역으로 꼭 끌고 들어와서 접견(接見)하는 ‘외교적 책략’을 왜국(倭國)에서는 시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고구리, 백제, 신라와 같이 하나의 소도(蘇塗)아래에 있는 나라들을 접견할 때에는
구원행궁(狗原行宮) - 산책 선생님 고증에 의하면 오늘날 김포지역 -에서 접견을 ‘외교적 책략’을 쓴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또한 멀리 인도(印度)에서 왔을 경우에는 오늘날 밀양(密陽)에서 그 수도(首都)로 하여 만나고 있음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어산불영(魚山佛影)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반도를 신국(神國)으로 생각해서, 화백민주주의의 진의(眞意)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어떤 법도(法度)가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7) 古云去<樂浪郡>境及<帶方郡> 一萬二千里, 在<會稽>之東, 與<聃耳>相近.

해석(解釋)
예부터 말해지기를 “왜국(倭國)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에 이르기 까지의 경계(境界)로부터 12,000에 떨어져 있으되, 회계(會稽)의 동쪽이라고 말하면서, 또 동시에 담이(聃耳)와 근접(近接)해 있다.”고 한다.

주의(注意)
이 문장(文章)의 시작이 ‘옛부터 말하기를’의 뜻인 고운(古云)이 무척 중요합니다.  
이는 “아주 예전부터 그랬다.”는 표현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문장은 이해(理解)하기 위해서는 일단 왜(倭)라는 자의(字意) 즉 글자 뜻을 알아야합니다.  
왜(倭)에는 ‘빙 돌아서 둘러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점이 해동(海東)삼국(三國) 중에 고구리(高句麗)를 뺀 두 나라 - 이는 현 중국의 산동(山東)에서 절강성까지를 뜻하는데 - 여기서 수륙(水陸)으로 3,000에 왜국(倭國)이 있다고 한것은 분명히 한반도를 뜻하는데, 다시금 일본열도를 비롯한 포괄적인 왜(倭)가 “어찌해서 빙돌아가는지?”를 설명하는 문장인 것이지요.

“즉 섬(島)을 포괄해서 최외곽선을 그리자면” 회계(會稽)의 동쪽으로 잡되, 산동(山東)에서 절강성으로부터 12,000여리를 잡아서 ‘빙 돌려야하는데’  “그 외곽은 다시 담이(聃耳)가 있었던 곳에서 가까운 곳에 온다.”라는 문장인 것입니다.
담이(聃耳)는 ‘노자(老子)가 노담(老聃)이고, 또 이(耳)라는 이름을 가져서 노자(老子)의 행정(行程)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노자는 한단고기(桓檀古記)에도 묘사가 되어 있드시 한반도로 들어와서 산해관을 빠져나가 다시 중국 남서부 지역으로 들어온 이상한 전설(傳說)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유명한 일화를 빌어서 왜(倭)가 ‘어찌 빙돌아가는지?’를 설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  사천(史穿) 김성겸 님의 ‘한반도=대한국(大漢國) 설’의 중요성

1)  역사해석의 등식 : ‘‘대한국(大漢國)=대왜(大倭)=가라국(伽羅國)=대가야(大伽倻)’

지금까지 우리는 현 일본(日本)땅에 있는 사람들을 왜(倭)라고 생각해온 고정관념에 잡혀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일제강점의 영향이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고구리, 백제, 신라가 있었을 당시에는 왜(倭)가 중국 남반부에서 한반도, 그리고 수서(隋書)에서 말하듯이 현 청해(靑海)에 이르기 까지 ‘중국 대륙 외곽을 빙도는 세력’을 왜(倭)라고 칭해왔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수(隋)나라 시절 중국대륙 남반부는 백제와 신라가 다 차지하는 바람에 왜(倭)는 이들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 ‘빙돌아서 다니는’ 세력으로 압축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서(隋書)에서 말할 때, 고운(古云)이라고 “옛부터 말하기를....”는 이러한 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께서 ‘한반도=대한국(大漢國) 설’을 주창한 것은 대단히 아시아 고대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초석(礎石)이 됩니다.

원래 한(漢)의 뜻은 은하수(銀河水)입니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지상(地上)의 물이 하늘의 은하수(銀河水)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순환(循環)상생(相生)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대한국(大漢國)= 대왜(大倭)’라는 등식(等式)으로써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중국사서에서는 왜(倭)를 소왜(小倭)와 대왜(大倭)로 구분하지 않지만,  의외로 일본서기(日本書紀) 안에는 “대왜(大倭)의 앙갚음이 두려워 멈추었다.”라는 말들이 등장해서 구분해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왜(大倭)를 가라국(伽羅國) 혹은 대가야(大伽倻)라고도 칭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한국(大漢國)=대왜(大倭)=가라국(伽羅國)=대가야(大伽倻)’라는 역사해석의 등식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봅니다.

2)  황룡국(黃龍國)과 한인(漢人)에 대한 새로운 관점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이 규명한 ‘한반도=대한국’은 이처럼 위에서 본 역사해석의 등식 - 즉 ‘대한국(大漢國)=대왜(大倭)=가라국(伽羅國)=대가야(大伽倻)’을 새로운 눈(眼)으로 보게 합니다.

(가) 북연(北燕)의 황룡국(黃龍國)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것은 북연(北燕)이 세운 황룡국(黃龍國)에 대한 설명입니다.  

(부탁의 말씀)
(좌계가 이 글을 쓰면서, 정확한 사서(史書)의 전거(典據)와 원문(原文)을 찾으려고 했으나, 못 찾았습니다.  혹 정확한 원문(原文)을 아시는 분은 ‘댓글’로 달아달라고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튼 북연(北燕)에 대한 설명을 사서(史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합니다.

<인용문(引用文)>

북연 [ 北燕 ]

후연(後燕)의 장군 풍발(馮跋)이 세운 한인(漢人)왕조(409~438).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이다. 409년 연왕(燕王) 모용 운(慕容雲)이 근신에 의해 살해되자, 한인(漢人)인 풍발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여 북연을 세우고 (***)도읍을 용성(龍城:遼寧省 朝陽)으로 정하였다.(***) 천왕은 거란족(契丹族)을 선무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나, 항상 북위(北魏)로부터 위협을 받아 국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그의 아우 홍(弘)이 천왕의 자리를 잇자, 연(燕)의 백성으로 북위에 붙는 자가 많았다. 홍은 강남의 송(宋)과 동맹하여 스스로 번(藩)으로 칭하면서 조공(朝貢)을 바쳐 송으로부터 관작(官爵)을 받았는데, (***)당시 강남에서는 이 나라를 황룡국(黃龍國)이라 하였다.(***) 436년에 북위군에 의해 용성이 함락되자 고구려로 도망하였으나, 438년(장수왕 26) 북풍(北豊)에서 장수왕에게 죽음을 당하여 연은 2대 28년으로 망하였다.

(1)  황룡국(黃龍國)은 둘일 가능성이 있다.

위 인용문(引用文) 사료(史料)에서 중요한 것은 이 “북연(北燕)을 황룡국(黃龍國)이라고 다름아닌 강남(江南)사람이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남(江南)사람은 양자강 남쪽 사람인데, 중요한 것은 한수(漢水)가 가장 중요한 ‘양자강 지류’이기 때문에, 결국 한수(漢水)의 남쪽에 있는 사람들이 황룡국(黃龍國)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통전(通典)에서 신라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대륙을 빙도는 세력을 가라국(伽羅國)으로 불렀는데, 이런 가라국(伽羅國)에 부용(附庸)해 주는 댓가로 오늘날 ‘섬서성 태백산’과 ‘청해(靑海)’ 지방에 이르는 지역 - 즉 양자강의 한수(漢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기초를 딱을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
그곳에 이미 수서(隋書)에서 거론하고 있듯이 항상적으로 “청해(靑海)에서 흑룡강까지 ‘다섯 달’이나 걸려서 행상(行商)하는 흐름이 이미 있고” 또한 “ 한반도 남해(南海)에서 ‘바이칼’에 이르기 까지 ‘세 달’에 걸쳐서 행상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그 교차점(交叉點)이 바로 오늘날 요령성 조양시(朝陽市)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차점(交叉點)에서 대한국(大漢國) 혹은 대왜(大倭)의 힘을 응집시켜, 고구리든, 백제든, 혹은 신라이든 관경삼국(管境三國)에 대해서  동북방(東北方)에서 힘을 밀어줄 수 있는 것이니깐 말입니다.
반면 저 중국대륙의 서쪽으로는 섬서성 태백산과 청해(靑海)지역에서 밀어줄수가 있는 것이지요.  
즉 서쪽의 황룡국(黃龍國)은 황하(黃河)와 양자강이 만나는 ‘접속점’이고,  동쪽의 황룡국은
양 끝에 바다를 지닌 두 행상(行商)의 흐름의 ‘접속점’이었던 것으로 원래부터 황룡국(黃龍國)이 둘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남당(南堂)유고에서 등장하는 황룡국(黃龍國)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많이 들어옵니다.)

즉 고조선(古朝鮮)의 주력(主力)이 바로 대한국(大漢國), 대왜(大倭)로써 존재하며,  가장 ‘피를 적게 흘리면서’ 화백민주주의를 아시아-대륙에 펼치는 국가를 신중하게 골라서 그 ‘전략적 핵심지역’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일찍이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이 지적했듯이 ‘중국측에서는 신선(神仙)이 사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남당(南堂)-유고(遺稿)에서도 ‘신선(神仙)들이 사는 해산(海山)’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남당(南堂)-유고(遺稿)는 수서(隋書)와 통전(通典)의 내용과 통하는 내용이 아주 많다.”는 것이지요.

즉 한반도에 사는 ‘해산(海山)의 신선’들은 평화시에는 고구리, 백제, 신라에게 골고루 접근의 기회를 주지만, 한쪽 화백-민주주의의 대의를 어긋나면, 배제시키는 방법으로써 때로는 고구리, 때로는 백제, 때로는 신라가 차지하게 하는 ‘두 황룡국(黃龍國)의 실질적 주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는 한반도에 들어옴으로써 이런 대한국(大漢國), 대왜(大倭)와 접속이 되었고 부용(附庸)함으로써, 그 결과 절강성에서 섬서성 태백산(太白山)과 청해(靑海)에 이르는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전략적 핵심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황룡국(黃龍國)은 둘일 개연성이 있고, 또 후연(後燕)의 풍발이 한인(漢人)이란 것도 강남(江南) 사람들의 용어 - 대한국(大漢國) 사람을 한인(漢人)이라고 칭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5.  결론(結論)

1) 첫째,  남당(南堂) 유고를 주도적으로 해석하고 계신 두분 선생님들께서 각각 주장한 입론(立論) - ‘한반도=대한국설’과 ‘작(鵲)태자=석탈해설’이 수서(隋書)와 통전(通典)을 신뢰할수 있는 사서(史書)로써 보게했다.

2) 둘째, 이런 관점에서 수서(隋書)와 통전(通典)을 통해서 볼 때,  고구리,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을 ‘세계경영’했을 뿐만 아니라,  사해(四海) ‘밖’에 대해 천자국(天子國)을 대신하는 ‘대신중국(代臣中國)’의 역할을 했음이 밝혀진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