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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이상한 백제의 영토: 백제 서남쪽 마한이고 동쪽은 낙랑이고, 북쪽은 말갈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15.

대개 마한은 전라도요, 백제는 경기와 충청도요, 말갈은 송화강 유역이요, 낙랑은 요하 혹은 대동강 유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마한 백제 말갈 낙랑 등의 위치 관계는 통설의 위치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1. 통설과 맞지 않는 《삼국사기》 기록

백제와 마한의 위치관계

마한이 전라도이고 백제가 경기도이면 백제는 마한의 북쪽이던지 서북쪽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전혀 다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년

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온조임금이 웅천책을 세웠다. 마한임금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분명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경기도가 전라도의 동북쪽이던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백제와 마한의 위치는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낙랑의 위치관계

통설대로라면 백제가 경기도이고 낙랑이 평안도이거나 요하주변이다.
즉, 낙랑은 백제의 서북쪽에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13년

王謂臣下曰國家東有樂浪....

온조임금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동쪽에 낙랑이 있어...


평안도가 경기도의 동쪽이던가? 아니다.
즉, 우리가 알던 낙랑과 백제의 위치도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말갈의 위치관계

말갈은 남만주지역에 있던 종족 혹은 나라이다. 백제의 북쪽이긴 북쪽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말갈의 국경과 백제의 국경이 서로 접하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2년

王謂群臣曰靺鞨連我北境,

온조임금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나라와 북쪽지경과 연이어 있으니....


경기도가 만주와 붙어 있는가? 아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백제와 말갈에 대한 통설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 어떤이는 말갈이 백제를 침략하는 기록을 해석하기 위하여 말갈은 여기저기 흩어져살았다고까지 주장기도하지만 말갈은 곧 勿吉이요 남만주 지역에 살던 자들이다.


2. 관건은 마한의 위치

위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해답을 제공하는 나라는 바로 마한의 위치이다.

마한이 과연 전라도 땅인가?
마한의 원래 위치와 그 이동을 파악하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백제 마한 낙랑 말갈의 모순된 위치관계가 하나씩 풀려간다.
그러면 마한이 원래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마한의 원래 위치

마한은 건국에 대한 기록도 없어 매우 알기 어렵지만 소략하게나마 남아 있는 기록이 있다.


《潛夫論》卷九

韓西亦姓韓為衛滿所伐遷居海中

韓西 역시 姓이 韓씨인데 衛滿에게 토벌당하여 海中으로 옮겼다.


이상하게도 箕準의 성이 韓씨라고 하고 나라이름이 韓西라고 한다.
여기서 이동지인 海中은 후에 기록을 보기로 하고 여기서 나온 韓西가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를 찾아보면....


《路史》卷二十八

韓西, 王肅云涿郡方城縣有韓城是

韓西나라는 王肅이 말하기를 涿郡의 方城縣이라고 하는데 韓城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즉, 마한이라는 나라는 현재 하북성 탁주시에 있었던 나라이다.

燕國에 패한 마한

《欽定日下舊聞考》卷一百二十四
補詩曰其追其貊燕師之北國也韓在燕北貊為韓之北國韓既歸于燕韓從而東徙漢初謂之三韓(燕史)
그 追와 그 貊맥... 연나라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韓은 燕의 북쪽에 있다. 貊은 韓의 북쪽에 있다. 韓이 이미 燕에 귀속하였기 때문에 韓은 동으로 달아났는데 漢 초기에는 이들을 삼한(三韓)이라 불렀다.(燕史에서 인용)


여기서 三韓의 위치는 燕의 동쪽이라고 한다.
대개 燕國이 가장 전성기였던 시기의 강역은 잘 알지만 그들이 약소했을때에 강역은 알려지지 않았다.
《路史》에서 보듯이 燕國은 하북성 탁주시 남쪽에 원래 있었던 나라이다. 연국은 원래 그렇게 강성했던 나라가 아니다.


《史記》卷三十四
燕北迫蠻貉内措齊晉崎嶇彊國之間最為弱小
燕國 북쪽은 핍박을 받았는데 만맥(蠻貉)은 연나라 안쪽까지 침투했다. 그래서 齊와 晉에 사이에 끼여 가장 약소국이 되었다


燕北迫蠻貉内措를 燕國이 만맥을 침략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뒷문장인 약소국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즉, 燕國을 만맥이 북쪽에서 침입해서 잠식했다는 의미이다.


《鹽鐵論》卷八
大夫曰徃者四夷俱强並為冦虐朝鮮踰徼刼燕之東地

대부가 말하길, “일찍이 사이가 모두 강성할 때 각기 극렬하게 중원을 침범하였다. 조선은 변방을 넘어 연燕의 동쪽을 침범하고...


즉, 燕國은 현재 하북성 탁주시 남쪽의 약소국이었다가 마한을 밀어내고 강대국이 된 것이다.

여기서 燕國은 최대 강역을 갖게 되는데 요동군의 위치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한다. 만약 燕의 요동군이 현재 요하의 동쪽으로 본다면 百濟東有樂浪은 절대로 풀수가 없다. 여기서 燕國이 차지한 경계인 滿番汗은 衛滿의 番汗城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지만 험독 근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아래 <백제의 宗國 마한은...?>에서 말하겠다.


箕準이 위만에 패한 후 마한의 위치

마한은 다시 箕準에 이르러 위만에게 패하고 海로 들어갑니다.
이 海과 과연 어딘가를 보면....


《오주연문장전사고》
일찍이 어떤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미처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 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이때 방 장군(龐將軍)이란 자가 전사(戰死)하였는데, 그의 아내는 기와 굽는 사람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더욱 노기(怒氣)를 품고 출전하여 용맹한 적장(賊將)을 죽이고 크게 승첩(勝捷)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 남은무종(南殷武宗)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위만을 토평(討平)하였는데,..."


남으로 이동한 나라 이름이 남은(南殷)이라고 하니 나라이름으로부터 우리는 그 위치가 산동 남쪽 부근임을 알 수 있다. 전라도땅에 나라를 세우고 남은(南殷)이라고 할리는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위만조선을 멸할때 마한도 같이 참전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宗國 마한은...?

이렇게 마한은 여기저기 나타난다.
과연 백제의 宗國 마한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당연히 위 《欽定日下舊聞考》의 기록대로 燕國의 동쪽에 있던 삼한 중의 마한이다.
그렇다면 이 삼한 중의 마한의 위치를 대략으로나마 찾아보자.

《삼국지》에는 마한 54개 국이 나온다. 그 중 몇개의 위치만 알아내더라도 마한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은 오환(烏丸)으로 추정된다. 臼斯의 의미는 알 수 없으나 烏旦의 烏은 "새"로 읽어야 할 것이며 旦은 "환"으로 읽어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다 이두글자이기 때문이다. 즉 烏旦과 烏丸은 모두 "새환"으로 읽어야 할 글자이다.
  2. 고리국(古離國)은 고리국(藁離國)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동명왕이 세운 부여의 북쪽 혹은 서쪽에 있던 나라이다. (논형, 위략, 후한서, 양서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 글자가 약간 차이가 있는데 槀離, 索離, 槖離, 橐離 등으로 썼지만 모두 다 글자가 비슷하여 필사하면서 오류를 범한 것이니 당연히 藁離이다)
  3. 비리국(卑離國)은 비리군(陴離郡)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漢國의 험독이다.
    《요사》 권38
    集州懐衆軍下刺史古陴離郡地漢屬險瀆縣髙麗為霜巖縣渤海置
    "집주 회중군 하자사는 옛 비리군지역이다. 한나라에서는 험독현에 속하였고 고구려에서는 상암현이었다. 집주는 발해가 두었다."

즉, 마한은 한반도에 있던 나라가 아니라 오환(烏丸)과 부여의 서쪽 그리고 漢의 험독현 부근에 있던 나라이다.

3. 자연스레 정해지는 백제의 위치

기존에는 마한을 한반도 서남쪽으로 보았기에 馬韓東北有百濟, 百濟東有樂浪, 百濟北有靺鞨 등이 모두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마한의 위치를 기존의 사료를 검토하여 새롭게 정립한 결과 마한 낙랑 말갈 백제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자연스레 설명된다.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이므로 대략 요하의 서쪽으로 잡아야 한다.

낙랑군은 요하 혹은 대동강 유역이므로 낙랑은 백제의 동쪽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다.
백제가 요하 서쪽이므로 말갈이 백제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과연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지명 가운데 요하 서쪽의 지명이 나오는가?

아직 탐구중이지만 하나가 발견된다.


《삼국사기》 온조왕 11년
十一年夏四月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殺掠一百餘人秋七月設禿山狗川兩柵以塞樂浪之路.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여기서 구천(狗川)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구수(狗水)를 찾아보면...


《欽定熱河》卷七十二, 水四, 分隷各屬諸水, 承德府
狗水 元一統志狗水在惠州東一百八十里源自指頭山崖出東流一百二十里入利州界合於凌河按此當發源平泉州(即八溝廳)南境東流入建昌縣境
구 수는 원일통지에 말하기를 惠州의 동쪽 180리에 있다고 했다 그 강은 지두산(指頭山)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120리를 흘러 리주(利州)로 들어가 릉하(凌河)와 합한다. 생각건대 그 강은 당연히 평천주平泉州에서 발원하여 그 남쪽 땅에서 동으로 흘러 건창현(建昌縣) 땅으로 들어간다.


마한 땅의 위치와 구수(狗水)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구수(狗水)는 삼국사기 구천(狗川)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강은 요하의 서쪽 대릉하 부근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구수(狗水)의 발원지인 지두산(指頭山)이 어디인지 보면....
指頭山은 이두자이다.
指는 손가락이란 말이며 頭는 머리라는 뜻이다.
指는 뜻의 반절을 훈독하여 "소"가 되므로 指頭山은 따라서 훈음병차하여 소머리산으로 읽어야하는 글자이다.

온조왕이 11년에 구수(狗水)에 목책을 세운 뒤 7년 뒤인 18년에 소머리산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온조왕조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구곡까지 갔다. 그러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되돌아왔다.


우두산(牛頭山) 이것은 소머리산 즉 지두산(指頭山)이다.
위 두 산이 다른 산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1. 마한의 영토가 험독과 부여의 서쪽 그리고 오환 부근인 점, 
  2.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구천(狗川)이 구수(狗水)라는 점,
  3. 또한 구수(狗水)의 발원지가 지두산(指頭山)인데 구천(狗川)에 목책을 세우고 7년 뒤에 우두산(牛頭山)을 습격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우두산(牛頭山)과 지두산(指頭山)은 같은 산이라는 결론도 가능해 진다.


이 모두를 종합하여 볼때 백제의 영토는 경기도가 아니라 요하의 서쪽이며 오환의 영역이며 부여의 서쪽이며 漢의 험독현 지역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