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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나타난 우리나라 역사 발췌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1.           史記, 卷三, 殷本紀, 第三

箕子懼, 乃詳狂, 紂又囚之. ……周武王遂斬紂頭, ……釋箕子之囚.

箕子(기자)는 두려워하여 이에 거짓으로 미친척하여 노비가 되니 紂王(주왕)은 또한 그를 가두었다. …… 周(주) 武王(무왕)은 드디어 紂(주)의 머리를 베고, …… 箕子(기자)를 가둔 것으로부터 풀어주었다.

 

2.           史記, 卷四, 周本紀, 第四

武王已克殷, 後二年, 問箕子殷所以亡. 箕子不忍言殷惡, 以存亡國宜告. 武王亦醜, 故問以天道.

武王(무왕)이 이미 殷(은)을 이기고 난 뒤 2년에 箕子(기자)에게 殷이 망한 바에 대하여 물으니 箕子는 참지 못하고 殷이 악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武王은 역시 부끄럽게 생각하였고, 그래서 天道(천도)에 대하여 물었다.

 


3.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第六

秦始皇 …… 二十六年 ……  分天下以三十六郡, 郡置守 尉 監. 更名民曰黔首, …… 地東至海曁朝鮮【正義: , 其記反. 朝音潮. 鮮音仙. 海謂渤海 南至揚蘇 台 等州之東海也. , 及也. 東北朝鮮國. 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即古朝鮮也., 西至臨洮 羌中, 南至北嚮, 北據河, 山至遼東【集解: 地理志. 西河有山縣. 正義: , 先代反. , 白浪反. 謂靈 夏 勝 等州之北. 山在朔州北塞外. 從河傍, 東至遼東, 築長城北界..

(진) 始皇(시황) …… 26년(BC221) ……  천하를 나누어 26개의 군으로 만들고 (군)에는 守(수)와 尉(위)와 監(감)을 두었다. 백성(民)을 黔首(검수)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 영토는 동쪽으로 海(해)와 朝鮮(조선)에 이르고【正義: 曁는 ‘기’로 읽는다. 朝의 음은 潮(조)이다. 鮮의 음은 仙(선)이다. 海라는 것은 渤海(발해)를 말하는데 남쪽으로 揚州(양주) 蘇州(소주) 台州(태주) 등의 동쪽 海에 이른다. 曁는 및(及)이라는 뜻이다. 동북쪽은 朝鮮國(조선국)이다. 括地志(괄지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高句麗(고구려)는 平壤城(평양성)에서 다스리는데 원래 漢(한) 樂浪郡(낙랑군) 王險城(왕험성) 즉 古朝鮮(고조선)이다.】, 서쪽으로는 臨洮(림도)와 羌中(강중)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北嚮(북향호)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황하(河)에 의지하여 요새(塞)로 하였고 (음산)을 아울러 遼東(료동)까지이다【集解: 地理志. 西河(서하)에 山縣(음산현)이 있다. 正義: 塞, ‘새’로 읽는다. 並은 ‘방’으로 읽는다. 靈州(령주) 夏州(하주) 勝州(승주) 등의 북쪽이 황하이다. (음산)은 朔州(삭주) 북쪽 塞 밖에 있는데 황하(河)를 따라 (음산)을 곁에 두고 동쪽으로 遼東(료동)까지 長城(장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북쪽 경계이다.】.

 

4.           史記, 卷十二, 孝武本紀, 第十二

其明年, 伐朝鮮. 夏旱…

그 다음 해에(BC108) 朝鮮(조선)을 정벌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5.           史記, 卷二十, 建元以來侯者年表, 第八

國名

侯功

元封

太初已後

平州【索隱: 表在梁父】

以朝鮮將漢兵至降侯

三年四月丁卯, 元年【集解: 如淳曰音頰】. 四年, 薨無後國除.

 

평주【索隱: 表는 량부에 있다】

조선의 장군으로서 漢의 병사가 도착하자 항복하여 侯가 됨

3년4월 정묘일 侯 (겹)의 원년이다【集解: 如淳은 의 음은 頰(협)이라고 하였다】.

4년 侯 (겹)이 죽어 후사가 없어 나라를 없앴다.

 

荻苴【索隱: 音狄蛆. 表在勃海】

以朝鮮相漢兵至圍之降侯

三年四月, 侯朝鮮相韓陰元年.

 

적저【索隱: 음은 적저이다. 表는 발해(군)에 있다】

조선의 재상으로서 漢의 병사가 포위하자 항복하여 제후가 되었다.

3년 4월 제후 조선 상 한음 원년이다.

 

【索隱: 表在齊. 音獲, 水名, 在齊. 又音卦反】

以朝鮮尼谿相使人殺其王右渠來降侯

三年六月丙辰, 侯朝鮮尼谿相【侯】參元年

 

홰청【索隱: 表는 齊(제)에 있다. 의 음은 獲(획)이며 강의 이름이고 齊(제)에 있다. 또한 음은 ‘홰’乎卦反이다】

조선의 尼谿(니계)[1]의 재상으로서 사람을 시켜 그의 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여 제후가 되었다.

3년6월 병진일 제후 조선 니계의 재상【제후】(삼) 원년이다.

 

【索隱: 音機. 表在河東】

以朝鮮王子漢兵圍朝鮮降侯

四年三月癸未, 侯張【索隱: 韋昭云 姑洛反】歸義元年.

六年, 侯張使朝鮮謨反, 死國除

 

【索隱: 음은 機(기)이고 河東(하동)에 있다】

조선의 왕자로서 漢(한)의 병사가 조선을 포위하자 항복하여 제후가 되었다.

4년3월 계미일, 제후 張(장각)【索隱: 韋昭가 말하기를 의 음은 각姑洛反이라고 했다】 歸義(귀의) 원년이다.

6년, 제후 장각은 조선을로 하여금 모반하도록 하였다. 장각이 죽자 국가를 없앴다.

 

涅陽【索隱: 表在齊, 志屬南陽】

以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其子侯.

四年三月壬寅, 康侯子最元年.

太初二年, 侯最死, 無後, 國除.

열양【索隱: 表는 齊(제)에 있다. 志는 南陽(남양)에 속한다.】

朝鮮(조선)의 재상 路人(로인)으로서 漢의 병사가 도착하자 먼저 앞서서 항복하였고 길에서 죽자 그의 아들이 제후가 되었다.

4년3월 임인일, 康(강)[2] 제후의 아들 最(최)의 원년이다.

太初(태초) 2년에 제후 最(최)가 죽고 후사가 없자 국가를 없앴다.

 

6.           史記, 卷二十二,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第十

元封二年

,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出遼東擊朝鮮.

원봉2년

가을에 루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는 료동을 출발하여 조선을 공격하였다.

 

7.           史記, 卷三十, , 第八

自是之後, ……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索隱彭吳賈人姓名始開其道而滅之朝鮮番名】, 則燕齊之間靡然發動.

이때 이후로,[3] [엄조(嚴助)와 주매신(朱買臣)은 동구(東甌)를 끌어들이고 양월(兩越)의 일에 간섭하니 강회(江淮) 지방이 혼란스러워 군비가 소모되었다. 당몽(唐蒙)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서남이(西南夷)로 가는 길을 열고자하여 산을 뚫어 1000여리의 길을 통하여 파촉(巴蜀)의 영역을 확대하였으나 파촉은 그 일로 고달팠다.] 팽오(彭吳)가 예맥조선(濊貊朝鮮)[4]을 매수하여 창해군(滄海郡) 【索隱: 彭吳賈란 사람의 성과 이름이다. 처음으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열어 멸망시켰다. 조선은 번국(番國)의 이름이다】을 설치하니 연(燕)과 제(齊)의 백성이 잇달아 바람에 초목이 흔들려 넘어지듯이 소문을 듣고 움직여 발동(發動)하였다.[5]

 

其後漢將以數萬騎出擊胡…… 東至滄海之郡, 人徒之費擬於南夷

그 후로 한국(漢國)의 장군들은 매해마다 수만의 기병으로 호(胡)로 출격하였다. [또한 차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은 흉노(匈奴)의 하남(河南) 지방을 빼앗아 삭방(朔方)에 성을 쌓았다. 이 때 한국(漢國)은 서남이(西南夷)로 가는 길을 만드는데 수만명을 동원하였고 천리나 되는 먼 길로 등에 지고 식량을 운송하여 대개 10여 鍾에 1石만 도달하여 공()과 북()에 재물을 풀어 식량을 모았다. 수 년이 지나도록 도로는 완성되지 않았다. 만이(蠻夷)는 이로 인하여 여러번 공격하였고 한국(漢國)의 관리는 군대를 징발하여 이를 물리쳤다. 모든 파촉(巴蜀)의 조세로도 부족하여 호민(豪民)들을 모집하여 남이(南夷)의 밭을 경작하게 한 후 곡식을 현의 관청에 납입시키고 그 돈은 도내(都內)에서 받았다.] 동쪽으로는 길이 滄海郡에 이르렀는데 그 길을 만드는 사람에게 드는 재화가 남이(南夷)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8.           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 第九

去游燕, 而後得見, 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索地理志樓煩鴈門郡正義林胡國名朔嵐已北】, 西有雲中九原【索地理志雲中九原二郡名秦曰九原漢武帝改曰五原郡正義二郡並在勝州也雲中郡城在林縣東北四十里九原郡在林縣西界】, 南有沱易水【集解案周禮曰正北曰州其州沱鄭沱出鹵城索隠嘑沱水名州之川也音呼地理志鹵城縣名代郡沱河自縣東至合又東至文安入海也正義呼沱出代州繁畤縣東南流經五臺山北東南流過定州流入海易水出易州縣東流過幽州歸義縣東與呼沱河合也】, 地方二千餘里, 帶甲數十萬, 車六百, 騎六千匹, 粟支數年. 南有碣石鴈門之饒【索戰國碣石山在常山九門縣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縣西南是也正義鴈門山在代燕西門】,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소진이 연국(燕國)으로 간지 몇해가 지나서 연문후(燕文侯)에게 말하였다. “연(燕)의 동쪽에는 조선(朝鮮)과 료동(遼東)도 있고, 북쪽에는 림호(林胡)와 루번(樓煩)【索地理志: 루번(樓煩)은 안문군(鴈門郡)에 속했다. 正義: 림호(林胡)는 나라이름으로 삭(朔)과 람(嵐)의 북쪽에 있다.】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索地理志: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은 2개의 군의 이름이다. 진국(秦)에서는 구원(九原)이라고 하였고, 한(漢) 무제(武帝)가 이름을 바꾸어 오원군(五原郡)이라고 하였다. 正義: 2개의 군은 모두 승주(勝州)에 있다. 운중군(雲中郡)의 성은 유림현(林縣) 동북쪽 40리에 있고, 구원군(九原郡)은 유림현(林縣) 서쪽 경계에 있다.】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호타수(沱水)와 역수(易水)【集解: 주례(周禮)에서 기록하기를 정북쪽은 병주()이고 그 주에 호타수()가 있고 하였다. 정현(鄭玄)은 말하기를 호타수()는 로성(鹵城)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索: 호타()는 강의 이름으로 병주()의 하천이라고 하였다. 음은 호타(呼)이다. 地理志: 로성(鹵城)은 현(縣)의 이름으로 대군(代郡)에 속한다. 호타하(沱河)는 현으로부터 동쪽으로 참합()에 이르며 또한 동쪽으로 흘러 문안(文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正義: 호타수(呼沱)는 대주(代州) 번치현(繁畤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오대산(五臺) 북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정주(定州)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역수(易水)는 역주(易州)의 현을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유주(幽州) 귀의현(歸義縣)을 지나 동쪽에서 흘러오는 호타하(呼沱河)와 합류한다.】가 있어 지방(地方) 2천여리입니다. 무장군사(帶甲)가 수십만이고 600승의 병거와 6000필의 기병과 수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가졌습니다. 남쪽으로는 갈석(碣石)과 안문(鴈門)【索: 전국책戰國에서는 갈석산(碣石山)이 상산(常山) 구문현(九門縣)에 있다고 하였다.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대갈석산(大碣石山)이 우북평(右北平) 려성현(驪城縣)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이다. 正義: 안문산(鴈門山)은 대군(代)에 있고 연국(燕)의 서쪽 문이다.】의 비옥함이 있으며,[6]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이익으로 백성들이 비록 경작하는 수고가 있을지라도 대추와 밤의 이익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위 천부(天府)라고 하는 것입니다.

 

9.           史記, 卷一百三, 萬石張叔列傳, 第四十三

元鼎五年秋……是時, 漢方南誅兩越, 東擊朝鮮, 北逐匈奴, 西伐大宛, 中國多事.

원정(元鼎, BC116 ~ BC111) 5년 가을……이때에 한(漢)은 이제 막 남월과 민월을 토벌하려 하였고, 동쪽으로는 조선을 공격하려 하였으며, 북쪽으로는 흉노를 쫓아내려고 하였고 서쪽으로는 대완(大宛)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중국(中國)에서는 많은 일이다.

 

10.      史記, 卷一百十一, 衛將軍驃騎列傳, 第五十一

其後四年, 大將軍 , 烈侯. 子伉代長平侯. 自大軍圍單于之後十四年, 而卒. 竟不復擊匈奴者, 以漢馬少, 而方南誅兩越, 東伐朝鮮, 羌西南夷, 以故久不伐胡.

그 후 4년째 되는 해에 대장군 위청이 죽었으므로 시호를 열후라고 하였다. 아들 위항은 대를 이어 장평후가 되었다. 대장군이 선우를 포위했을때부터 14년 뒤에 죽었다. 그동안 다시 흉노를 공격하지 못한 것은 한(漢)에는 말의 수가 적었고 장차 남쪽으로 민월과 남월을 정벌하려 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조선을 정벌하려하였고 강족과 서남이를 격퇴하려고 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호(胡, 흉노)를 정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11.      史記, 卷一百十二, 平津侯主父列傳, 第五十二

元朔三年, 張歐免 以御史大夫. 是時, 通西南夷, 東置滄海, 北築朔方之郡. 數諫以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 願罷之. 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置朔方之便. 發十策, 弘不得一. 謝曰: 山東鄙人, 不知其便若是, 願罷西南夷滄海 而奉朔方. 上乃許之.

원삭(元朔, BC128 ~ BC123) 3년에 장구가 파면되고 공손홍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때에는 서남이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을 설치했고 북쪽으로는 삭방군의 성을 쌓았다. 공손홍은 ‘쓸모없는 땅을 받들어 중국(中國)을 피폐하게 하는 것을 파할 것’을 여러 번 간하였다. 이에 천자는 수매신 등으로 하여금 공손홍을 꾸짓고 삭방군의 이로움에 대하여 10가지 방책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공손홍은 그 하나도 미쳐 알지 못하였었던 것이다. 공손홍은 용서를 구하며 말하기를 “산동(山東)의 비인(鄙人)이 그 이로움을 알지 못한 것이 이와 같으니 서남이와 통하는 것을 파하고 창해군을 설치를 파하시어 오직 삭방군만 받드시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12.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夫燕亦勃碣之間【正義: 勃海碣石在西】一都. 南通齊趙, 東北. 上谷至遼東地踔【索:劉氏踔音卓, 一音勅, 騰貌也】, 人民希, 數被寇, 大與趙代俗相類, 而民雕捍少慮【索: 言如雕性之悍也】, 有魚鹽棗栗之饒. 北鄰烏桓夫餘【索: 鄰一作臨. 臨者亦却背之義, 他並類此】, 東綰穢朝鮮真畨之利【索: 綰者, 綰統其要津, 則上云臨者, 謂却背之也. 正義番音潘】.

대개 연국(燕國) 역시 발해와 갈석의 사이에【正義: 발해勃海와 갈석碣石은 서쪽에 있다.】있는 하나의 도회(都)이다. 남쪽으로는 제국(齊國)과 조국(趙國)으로 통하고 동북쪽으로는 호(胡)와 인접하여 있다. 상곡(上谷)에서 료동(遼東)의 땅은 아주 멀어서【索: 劉氏가 말하기를 踔은 음이 탁卓이라고 하였다. 또는 쵸(勅)라고 하였다. 역시 은 뛰어넘는 형상을 말한다.】 인민들이 적어 여러 번 약탈을 당하였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조국(趙)과 대군(代郡)은 풍속이 서로 비슷하여 백성들이 독수리처럼 사납고 배려심이 적고【索: 말이 독수리의 성품처럼 빠르고 사납다는 것이다.】 생선과 소금과 대추와 밤 등이 풍요하다. 북쪽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索: 鄰은 혹은 臨으로도 쓴다. 臨이라는 것은 떨어져 등지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이와 비슷하다.】와 인접하여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穢)과 조선(朝鮮)과 진번(真畨)의 이익을 지배한다【索: 綰이라는 것은 그 중요한 나룻터를 관통(綰統)한다는 말이며, 즉 위에 언급된 臨이라는 것은 떨어져 등지어 있다는 말이다. 正義: 番의 음은 반(潘)이다.】.

 

13.      史記, 卷一百三十, 太史公自序, 第七十

燕丹散亂遼間, 滿收其亡民, 厥聚海東, 以集【集解徐廣曰一作莫藩音普寒反】葆塞外臣作朝鮮列傳第五十五

연국(燕)의 태자 단(丹)은 료간(遼間)으로 흩어져 난리를 일으켰고 위만은 그 망민(亡民)을 거두어들여 해동(海東)에 모이고 진번()【集解: 徐廣이 말하기를 진번은 진막으로도 쓴다고 했다. 藩의 음은 반(普寒反)이다】을 모아 새(塞)에서 보전하여 외신(外臣)이 되었으니 조선열전 제 55를 지었다.

 

 



[1] 동사강목에서는 濊(예)를 반절법으로 쓴 것이라고도 한다.

[2] 康(강)이 곧 朝鮮(조선)의 재상 路人(로인)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면 康(강)이 이름이라면 로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3] 효무제(孝武帝, 재위 BC141 ~ BC87)가 즉위한지 수년, 다시 말해 漢이 건국된지 70여년이 지나자 나라가 윤택해졌으므로 모든 나라사람들이 사치를 일삼은 이후로라는 말이다.

[4] 滅은 濊를 잘못 쓴 것이리라. 한서 식화지를 따랐다.

[5]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서남이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하여 많은 인력과 재물이 탕진되었고 서남이로 가는 길목에 있던 파촉(巴蜀) 사람들은 노역으로 인하여 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이 齊(제)와 燕(연)에까지 퍼져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창해군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서는 齊(제)와 燕(연)의 사람들을 동원하고 그들의 재산을 사용하여야 했었지만 齊(제)와 燕(연)의 사람들은 파촉(巴蜀) 사람들의 일을 소문으로 듣고 알았으므로 소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6] 갈석과 안문이 연국(燕國)의 남쪽에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